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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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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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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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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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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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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9

실시간 기획/연재 기사

  • [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 (7 )
    제4회 결 혼 1948년 12월 ×일, 20살을 앞두고 순자는 낭자를 틀고 김용환 총각과 성례를 치루었다. 워낙 아버지가 부모가 없는 용환이의 딱한 처지를 염려하여 결혼식을 올려주려고 하였었는데 평소에 용환이를 가끔씩 돌봐주던 어느 한 가정에서 “용환이가 아무리 고아라고 해도 어떻게 처가집에서 성례를 치르게 하겠는가”면서 자기네가 용환이의 결혼식을 도맡아 치르겠다고 주장하기에 결국 그 집에서 치르기로 아퀴를 지었다. 성례는 아주 간소하게 치뤄졌다. 주인 내외가 용환이의 일가친척을 대신하였고 하객들이래야 용환이의 동창생과 몇몇 친구들뿐이었다. 그날 순자는 속으로 “정말 일가친척이 없는 가련한 사람이구나”하고 생각하였다. 아니나 다를가 이튿날 아침, 시가편 가까운 친척들에게 예단을 놓자고 보니 진짜 친척이라고는 단 한명도 없었다. 아무리 가난하였지만 어머니는 이 딸을 위해 그래도 간단한 예단감들을 정성껏 마련했는데 그 예단감을 받을 시가편 친척이 한명도 없다니?! 순자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예단을 받을 시가편의 친척 한명도 없다는 것도 신부인 순자한테는 퍼그나 서러운 일이었다. 이제 친정에 가면 부모한테 뭐라고 말씀 올린단 말인가?!순자가 우려는 부질없는 것이 아니었다. 삼일이 되여 친정으로 인사하러 간 뒤 예단감들을 고스란히 그대로 내놓았더니 어머니가 낙루했고 아버지가 땅이 꺼지게 한숨을 지었다. 그러자 신랑 용환이는 송구스러운 나머지 머리를 숙이고 몸둘 바를 몰라했다.“아버지, 어머니! 몹시 섭섭하겠지만 일가친척이 없는 것이 이 분의 죄가 아니잖아요?! 전 이 사람이 착하고 정직한 품성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요.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가 시름을 놓을 수 있도록 꼭 잘살게요.” “그래그래 네말마따나 없는 것이 뭐 저 사람의 죄겠냐?! 앞으로 입을 악물고서라도 꼭 잘살아야 한다.” “아버지의 말씀이 그른게 없느니라. 둘 다 가난한 사람끼리 만났으니 부디 싸우지랑 말고 잘살아야 한다.”순자가 신랑을 두둔해 나서자 부모님도 한마디씩 동조했다.…결혼 뒤 순자네는 남의 집 사랑채 한칸을 빌어 살림을 차렸다. 말이 사랑채였지 들어가면 이곳 저곳 벽이 떨어지고 천정에도 여러 곳에 구멍이 나있었다. 밤이면 하늘의 별까지 보일 지경이었다. 집수리를 하던 날, 어머니는 사위 용환이를 데리고 언 땅을 파헤친 다음 진흙에 벼짚을 섞어 짓이겨서는 떨어진 벽과 구멍난 천정에 매질을 하였으며 집이영도 고쳐 얹었다. 그러던 중 불현듯 언 땅을 파헤치던 곳에서 기다란 뱀 한마리가 기여나왔다. 바로 그 언땅을 파헤치던 곳에 뱀굴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온종일 말씀이 없던 어머니었건만 더는 침묵하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내가 하나밖에 없는 딸을 저런 사람한테 시집보내니 이런 일이 다 생기는구려…” “어머니, 그만하세요. 예?”순자가 손으로 어머니의 입을 막으며 또 신랑을 두둔했고 용환이는 이들 모녀의 얘기는 못들은 척 수걱수걱 일만 했다. 그날 밤 신랑은 잠자리에서 순자의 손을 꼭 잡고 진지하게 속삭이었다. “참, 임자가 나같은 인간한테 시집와 너무 고생이 많구만…나의 사람이 돼주어 진심으로 고맙소. 나 임자에 대한 고마움을 눈을 감을 때까지 가슴에 간직하고 살아갈거요. 그리고 꼭 출세하여 임자가 더는 고생하지 않도록 해 줄거요.” “여보, 고마워요. 전 당신만 잘 되면 더 원이 없겠어요.” “아무렴, 나 꼭 출세하여 임자를 잘해주리다.” …용환이는 고마움을 억제할 수 없어 순자를 꼭 껴안아주었고 순자 또한 미더운 남편을 만난 것으로 하여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순자의 눈물은 용환의 앞가슴이 촉촉히 젖어들게 하였다. 20세기 중반년대는 우리 중국에 있어서 대 재난의 시대이자 대 변혁의 시대었으며 번영창성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시대이기도 했다. “8.15” 광복 후에도 중국의 국내는 몹시 혼란했으며 특히 1946년부터 국민당의 일으킨 내전으로 백성들은 도탄속에서 허덕이었다. 이렇듯 대동란속에서 공산당은 광범한 민중의 힘을 뒤에 업고 요심전역으로 전반 동북광야를 해방한 뒤 계속 산해관을 넘어 회해전역과 평진전역을 발동하여 국민당군을 궁지에 몰아넣었으며 1949년 10월 1일 마침내 중화인민공화국의 창립을 전 세계에 선고하였다. 공화국의 창립과 더불어 중국에서 살면서 중국혁명에 마멸할 수 없는 공헌을 한 조선인들은 그날부터 나라의 주인으로 됐고 신분도 재중조선인으로부터 중국조선족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재중조선인은 원래 공산당을 더 따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찍 공산당의 영도하는 동북항일연군 중에는 조선족이 많았다. 또한 관내의 팔로군에도 조선의용군이라는 것이 있어 공산당대오에 힘을 더 보태였다. 특히 조선인 정율성이 작곡한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원래 “팔로군행진곡”이였음)은 그 장엄하고도 씩씩한 선율로 하여 늘 국민당군의 감담이 서늘케 했다. 그래서 국민당은 조선인을 미워하면서 배척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 사례로 1947년 길림시에 쳐들어온 국민당군은 “조선사람들은 빨갱이와 내통하는 적색인종”이라면서 무작정 진압하기도 했다. 국민당군이 조선인들을 죽이고 배척하자 재중조선인들이 더욱 “우리를 구해줄 이는 공산당밖에 없다”고 인정하면서 공산당을 더 좋아하게 되였다는 설도 있었다. 그래서 당시 연변의 토지개혁과 전선원호사업이 더 잘 진행이 됐는지도 모를 일이다. 공화국창건 전야에 벌써 연변에는 일대 변혁이 일어났다. 공산당의 민족정책이 연변에도 시행되었던 것이다. 선후로 연변인민방송국, 연변일보사 전신인 “동북조선인민보” 등이 섰고 공화국창건과 더불어 연변가무단과 연변대학이 일떠섰다. 미구하여 연변위생학교가 연길에서 창립, 동북군정대학 연변분교 의과반을 졸업한 순자의 남편 김용환도 초빙되어 이 학교의 교단에 서게 되었으며 1950년 순자는 남편을 따라 연길로 이주(당시 동북군정대학 가족이 단체로 이주)하게 되었다. 순자네 부부는 연길시 하남가(주정부 서쪽 ㅡ 지금의 연길시정부자리)에 정착하였는데 바로 연변의학원의 정규창 교수네 댁과 한 동네에서 살게 되었다. 한편 창립 1주년밖에 되지 않은 나젊은 공화국은 비록 가난의 때를 가셔버리지 못했지만 순자가 바라던 자유와 평등의 이상적인 사회는 너무나도 빨리 찾아왔다. 그야말로 천지개벽이었다. “8.15”해방을 맞던 날이 어제같았는데 그사이 토지개혁, 전선원호, 국공양당간의 내전끝에 공화국창건과 더불어 지난날 헐벗고 굶주리던 노농대중들이 나라의 주인으로 되었다. 순자네 가정만 보더라도 한낱 의지가지 없던 남편 용환이도 공화국이 령도하는 나라의 지식인으로 인재로 되었으니 말이다. 하긴 한시기 많은 재중조선인들이 조선으로 나갈 때 김용환도 흔들리지 않은건 아니었다. 그때 중국에서는 한창 내전으로 동난이 심했지만 조선은 해방이 되어 건설고조가 일어났으며 많은 분야에서 인재가 수요되는지라 동북군정대학 연변분교의 수재인 용환이가 나가면 한자리 하며 크게 써먹을 수도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당시 조선으로 나간 군정대학시절 용환의 부분적 동창생들은 모두 중앙당기관과 중앙내무기관 혹은 도당기관과 같은 중요한 일터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네같은 수재는 조선에 오면 꼭 크게 한자리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유혹을 보내오기도 했다. 그 때 방송을 통해 새로 창작된 조선국가를 들으면서 용환이가 몹시 흥분된 것도 사실이었다.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 은금의 자원도 가득한3천리 아름다운 내조국 반만년 오랜 역사에…실로 장엄하고도 박력이 넘치는 조선의 국가였다. 그 애국가를 통해 용환이는 사회주의 새 나라를 건설하는 조선인민들의 긍지와 영광 그리고 그 결심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시기 중국은 국공내전으로 아주 혼란했고 민심도 크게 흔들렸지만 중국보다 사회주의 단계에 먼저 들어선 조선은 많은 분야에서 중국보다 앞선 것만은 확실했다. 특히 당시 많은 재중조선인들이 조선을 자기의 조국으로 인정하고 있던 시기라 용환이가 흥분에 젖은 것도 이상한 일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조선에 대한 미련보다 용환이는 나서자란 고향인 연변을 떠나기 싫었다. 아름다운 이곳의 산천과 인정이 많은 이곳의 사람들과 떨어지기 싫었으며 더군다나 자기 자신을 나라의 인재로 키워준 이 땅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당과 나라에 대한 배반이라고 여겨졌다.거기에 순자도 자주 남편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여보, 우린 조선보다는 이곳에 더 정이 들었어요. 사업이란 조선에서 하나 이 곳에서 하나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그래 당신의 말이 맞소. 사업을 하자면 어디에선들 못하겠소?! 그럼 태줄을 묻은 이 땅에서 사업에 충직하며 한번 잘살아 봅시다.” ……아니나 다를가 조선보다 몇년간 늦게 공화국이 창립된 중국이었지만 아주 빠른 시일내에 중국대지는 평화와 안정이 찾아들었으며 사람마다 평등하고도 화목하게 살아가는 사회주의 제도가 바야흐로 무르익어갔다. 중국의 변화를 보는 용환이와 순자는 조선으로 나가지 않고 이 곳에 아주 정착한 것이 아주 잘된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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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4-07-09
  • 그제날 아버지한테서 들은 얘기들(11)
    ■ 김철균 아버지가 감추고 있었던 비밀 “이 애비는 너 엄마한테 잘해주지 못했다. 미안한 일도 많이 했다. 그러니 후에 엄마한테 잘해드려라. 이 애비의 부탁이란다…” 어렸을 때 나는 이러한 아버지의 말씀을 제대로 터득하지 못했다. 그냥 술주정을 부리고 밥상을 뒤엎고 하여 미안하게 생각하는줄로만 알았었다. 헌데 크면서 타인들한테서 듣고 또한 지난 세기 80연대에 조선으로부터 누나라는 분까지 찾아오면서 다시 아버지에 대해 생각해보노라니 어디 뭔가 짚이는데가 있었다. 일찍 1950년 가을, 교하에 있는 조선인민군 제2야전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아버지의 상처는 너무 중한 건 아니었으나 얼마든지 퇴역할 수는 있을 정도였다 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퇴역은커녕 상처가 낫자마자 재차 탄원해 전선으로 나갔다 한다. 지어 교하에 입원해있는 동안 처자가 있는 집으로 와보지도 않았고 편지 한통 쓰지도 않았었다. 그러니 맘에 없는 엄마와 사는 것이 전선으로 나가기보다도 싫은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전선으로 다시 나간 아버지었건만 그 뒤 많은 전투도 겪었으련만 용케도 아버지의 몸은 번마다 적탄을 피해갔으며 1953년 7월 27일 정전이 될 때까지 크게 부상도 당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헌데 전쟁이 끝났건만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자 정전 이듬해엔가 나의 넷째할아버지와 다섯째할아버지가 조선으로 나가 아버지를 붙잡아 끌고 왔다고 한다. 당시 아버지가 조선에서 어떻게 살고 있었고 또한 노인네들이 아버지를 어떻게 끌고 왔는지는 알 바가 없다. 노인네들이 말하지 않았고 아버지 또한 함구무언하니 말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아버지와 다투거나 싸울적마다 어머니는 “왜 조선에서 계속 살거지 돌아왔는가”, “당신은 몸만 집에 있지 속은 조선에 가있다”고 하면서 하소연하군 했었다. 하다면 당시의 상황을 분석해보면 아버지의 생각도 그렇게 되리라는 짐작이다. 당시 조선상황을 놓고 보면 많은 남성들이 전쟁터에서 죽은지라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은터라 다리 한쪽이 없는 잔페군인도 새파란 처녀한테 장가를 갈 수 있었다고 하니 가뜩이나 집으로 돌아오기 싫어하는 아버지로 놓고 보면 이른바 “봉건식 혼인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을 것임에 분명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러한 “자유혼인”을 지킬 수는 없었다. “봉건통”이라고 할 수 있는 넷째할아버지와 다섯째 할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할 수는 없은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어머니곁으로 돌아왔으나 마음은 항상 조선의 그 여자분한테 있었을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왜 자꾸 술마시면 주정하고 또 어머니한테 트집을 잡군 했는가 하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며 아버지가 나쁜 사람이라고 저주하기 앞서 아버지가 봉건혼인의 희생품이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안타까운 마음도 없지 않아 생기게 된다. 또한 아버지 역시 나이가 썩 많아진 뒤에는 어머니를 불쌍하게 여기기도 했고 나한테 어머니에 대해 많이 말해주기도 했다. 어느 정도 양심적 가책도 느낀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조선에 두고온 그 여자분한테도 양심적 가책을 느끼긴 마찬가지었을게 아닐까? 같은 남자로서, 또한 아들로서 나 역시 당시 아버지의 심정에 대해 헤아려 보게 되기도 한다. 말그대로 아버지를 나쁘다고 할 수 없는가 하면 어머니를 나쁘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조선에 있었다는 그 여자분을 나쁘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특수한 시대에 생겨난 특수한 혼인비극이라고 해야 가장 정확할 것 같다. (다음기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7-05
  • 해외견문시리즈(12) 젊은 마도로스의 수기
    ■ 김철균 이 글의 서두에서도 언급했지만 항구란 항상 마도로스들한테 로맨틱한 꿈을 안겨주는 곳이다. 그 수많은 “배놈”과 항구의 아가씨들한테 사랑을 주고 짜릿한 쾌감과 더불어 눈물도 주었던 코리아의 제일항 - 부산항구. 여기까지 쓰고보니 여태껏 나는 본선의 아무개가 어느 아가씨와 어떻게 여차여차 했소. 어떻게 징글스러웠소 하며 남들의 로맨스만을 언급했지 나 자신의 사생활은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사실 말해서 나 역시 칠정육욕이 있는 인간이며 2년여간 “배놈”으로 있으면서 여자를 점해보지 못했다면 그것이 도리어 이상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위선자가 아니다. 하다면 30살 푼한 한창 나이에 그 황홀한 세계에서 나 역시 무슨 용빼는 수가 있단 말인가?! 부산항에 입항한 뒤 나는 오랜간만에 편안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한것은 본선의 대부분 선원들이 부산출신이기에 부산입항 후 집으로부터 통근하여 밥먹는 선원이 몇 명 안되는데다 또한 회사에서도 3명의 아줌마를 본선에 배치하여 전문 주방일과 청소, 세탁 등을 도맡아주었기에 나는 모든 것에 일절 신경쓰지 않아도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어창의 화물을 하역한 뒤 도크장(선박정비장, 태풍을 만났을 때 부분적으로 크게 파손됐음)에 오른다기에 나는 오래간만에 팔자가 늘어진 셈이었다. 나는 낮이고 밤이고 그 동안 미처 쓰지 못한 일기를 정리하는 한편 “여명의 눈동자”, “장군의 아들” 등 책들을 닥치는대로 읽기 시작했다. 나는 갑자기 생활이 허전해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책을 읽거나 비디오를 보는 것만으로는 달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필경은 사내였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나는 그때 이미 감정파열로 아내와 이혼한 몸, 고향도 아닌 타관향에서 여자를 찾는 것이 딱히 양심에 걸릴 것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전라도 고향땅으로 휴가를 맡고 갔던 3타수가 불현듯 귀선했다. 덜먹총각인 그가 집에 가봤자 부모외에는 별로 반가와하는 사람이 없었고 그 부모 역시 하루밤 자고나자 “사내란 녀석이 배만 타고 장가는 안 들려느냐”하며 책망을 하기 시작, 참 누구든 장가들기 싫어 배타러가는가보지. 부모를 따라 농사를 지어봤자 먹을 알이 별반 없고 또한 아가씨들이라고는 쌀독의 뉘만큼도 없는 고향에서 장가는 어떻게 간단 말인가? 그래서 배타고 돈벌어 부산이나 여수 같은 큰 도시에 자리를 잡고 장가를 들려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일이 뜻대로 잘되지 않아 오늘까지 끌어왔던 터였다. 그럼에도 무턱대고 장가만 들라는 부모님, 그래서 3타수 김종래씨는 만류하는 부모님을 뿌리치고 귀선했던 것이다. 그날 저녁 나와 그는 술상을 차려놓고 신세타령을 하기 시작했다. “김형, 나 한국서 살지만 장가들어 자식까지 본 형이 한참 부럽능기라. 이 시팔 불알차고 장가도 못가는 이눔의 한국, 선진국은 무슨눔의 선진국인고?” “그런 말 말어. 우리 연변도 마찬가진거야. 인젠 그 곳도 얼굴이 반반한 계집애들은 다 도시로 몰켜들고 머슴애들은 장가들지 못해 지랄염병할 때가 된거라구.” “김형, 나한테 연변아가씨 한명 잡아서 붙여줘, 나 그럼 오늘밤 완월동 가서 술 한잔 사고 형을 즐겁게 해주는기라.” 그날 밤 나와 3타수는 무슨 충동에서인지 약속이나 한듯 택시를 잡아타고 부산에서는 물론 한국에서도 이름난 완월동으로 향했다. 얼마 후 우리가 택시에서 내리자 미리 대기라도 하고 있는듯 요염하게 치장한 아가씨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났다. “아저씨, 잠간 들려 놀다가세요. 즐겁게 해줄게요.” “아저씬 아마 이런 곳에 처음인가 보죠? 어서 오세요. 화끈하게 해드릴께요.” 이렇게 아가씨들이 어깨에 매여달렸건만 김종래씨는 홱홱 뿌리치며 나의 손목을 이끌고 갈 길만을 재촉했다. 아마 단골로 다니던 집이 있는 모양이었다. 미구하여 우리가 들어선곳은 “대마도”란 네온싸인이 반짝이는 어느 스탠드바 같은 곳이었다. 우리가 홀안에 들어서자 은은한 음악이 흘렀는데 그것인즉 마도로스 - “배놈”의 노래였다. 무역선 오고가는 부산항구 제2부두 술취한 마도로스 항구가 무정터라 닻줄을 올리며는 기적이 울고 뱃머리 돌리며는 사랑이 운다 아~아~ 항구의 아가씨 울리고 떠나가는 버리고 떠나가는 마도로스~ 아메리칸 마도로스 … … 아니나 다를가 홀안을 둘러보니 저마다 아가씨 한명씩 끼고서 술처먹는이들로는 필리핀, 파키스탄, 구소련 등 나라에서 온듯한 사내들로서 그들 역시 “배놈”들임에 틀림없었다. 이윽하여 김종래씨를 알아보고 히프를 내휘두르며 다가오는 40대 초반으로 돼보이는 마담. “아이유, 총각 왔네그려, 그래 언제왔어? 집에는 가보구? 총각이 이런 곳 다니면 망친당께. 왜 자꾸 오능고?” “누님, 무슨 말이 이리 많은고? 빨랑빨랑 술상 차리고 이쁜애들 둬명 붙혀달라잉께. 이 형씨는 중국서 왔는데 우리 동포잉기라 오늘 즐겁게 해주라잉께!” “뭐?! 중국서 온 아저씨. 그렁께 이리두 순지해보이는기라. 참 이런데 물젖으면 안된다잉께.” 그러면서도 “미쓰리! 미쓰신!”하고 부르며 어딘가 사라지는 마담. 보아하니 김종래씨와 마담사이는 한 고향사람 아니면 아주 잘 아는 사이인듯 싶었다. 뒤이어 마담이 아가씨 2명 데려오자 둘은 각각 나와 김종래씨옆에 나누어 앉았다. 미쓰리는 내옆에 앉고 미쓰신은 김종래씨옆에 앉고 헌데 종래씨한테서 들을라니 더 이쁘게 생긴 미쓰신이 나의 파트너라나? 서로 마주앉으면 구애없이 얼굴을 쳐다보기도 좋고 또한 서로 술잔을 마주치는데도 쉽가는데 일리는 있는 것 같았다. 큰 홀에서 술상을 파하자 우리는 서로 남녀 한쌍씩 짝을 지어 3층에 있는 아가씨들의 방으로 올라갔다. 미쓰신의 방은 전기온돌방이었는데 이불궤, 옷궤 등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것이 살림집 방안을 방불케 했다. 미쓰신은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옷을 와락와락 벗고는 이불우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 거동은 몸을 파는 남미나 동남아의 창여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아저씨, 옷 벗지 않고 뭘해요? 자, 어서요! 나 억수로 피곤한데요.” 하긴 서로 돈으로 여자몸을 팔고 사는 이런 교역장소에서 무슨 말과 가동작이 필요하랴. 그저 덮치고 받아주면 되는 판인데. 하지만 남미나 동남아에서는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이 곳 한국에서는 왜 서로 얘기라도 나눌 수 없겠는가. 나는 미쓰신과 그렇게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미쓰신, 급해말고 우리 술 한잔 더 나누고 볼까?” “뭐 할 말이 있다고 그래요? 아저씬 여길 왜 왔어요? 너무 착한체 하지 마세요. 뱃놈들은 다 그 따위들인걸요.” “아니 미쓰신 날 뱃놈들과 동일시하면 안되는거야 하긴 뱃놈무리에 가담했다만 나 금방 배에 승선한 중국조선족이라구.” “뭐 중국교포요?!” 소스라치게 놀라며 일어나앉는 미쓰신. 그녀는 부랴부랴 옷을 주어입고는 아래층 카운터에 전화를 거는 것이었다. 이에 나는 그녀가 중국조선족이라고 나를 내쫓아달라는 영을 내릴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술상주문이었다. 미구하여 뽀이가 간단한 술상을 차려오자 우리는 또 술상에 마주앉았다. 술을 마시는 한편 내가 본인이 신분과 살아온 경력 그리고 “뱃놈”으로 된 사연에 대해 이야기하자 그녀 역시 “그러게 아까 남보다 어딘가 다르다는 느낌이 들더군요”라고는 자기의 약력에 대해 소개했는데 그것을 간추리하면 다음과 같았다. 그녀 미쓰신은 경남 마산 부근의 어느 한 어촌마을에서 태어났는데 고래잡는 배와 이 업종에 출중한 재간을 갖고 있는 아버지의 신근한 노동으로 미쓰신의 동년은 매우 행복하고 세상에 부러움이 없었다. 헌데 후에 정부에서 고래잡이에 대한 금지령을 내린데서 아버지는 고래잡이배를 아주 헐값으로 처리하고는 조기를 잡는 어선의 말단선원으로 고용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다로 나간 아버지는 영영 다시는 돌아오지를 아니했다. 태풍에 배가 뒤집어져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아버지를 잃은 뒤 살림은 점점 쪼들려갔다. 가정의 생계를 위해 엄마는 매일 부두에 나가 물고기를 되넘겨 해물시장에서 팔았지만 그날 그날 입에 풀칠하고 나면 남는 것이 없었다. 그러던차 동생이 부산 영도에 있는 해양대학에 붙게 됐다. 그러니 어떻게 하나 출세시켜야 하는 법. 그러다가 미쓰신이 생각해낸 것은 여자가 힘들지 않고도 빨리 돈을 벌 수 있는 비결은 이쁜 얼굴과 싱싱한 몸뚱아리가 밑천이란 걸 알게 됐다. 그래서 돈벌어 동생의 뒤를 대주기 위해 엄마를 속이고 나선 것이 바로 이 직업창녀로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몸팔아 동생한테 뒤바라지를 해주었는데 어느 날 동생이 글쎄 누나가 준 돈으로 이 완월동거리에 나타날 줄이야. 미쓰신은 너무도 분하고 억울해서 그날로 엄마한테 달려가 모든 비밀을 고해바쳤다. 그러자 엄마는 “그 애비에 그 아들이라더니”하며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그제야 엄마는 딸한테 아버지의 비밀까지 털어놓았는데 이전에 그토록 존경이 가던 아버지마저 돈을 벌면 하루 건너 여자를 찾아가는 늑대었을줄이야. 아, 세상의 사내란 몽땅 이런 따위들이었구나. 그때로부터 미쓰신은 결혼같은건 아예 포기해버리고 어떻게 하면 사내들한테서 돈을 빨리 그리고 많이 우려내겠는가에 대해서만 신경을 써왔다… “아저씨가 중국교포이고 또한 이런 곳에 처음 왔다고 하니 말해주네만 이런 곳에 다닐바가 못돼요. 제가 사내들을 곱게 보지 않을듯이 이곳의 아가씨들 모두가 그래요. 여긴 사랑이란 있을 수 없어요.” 나중에 미쓰신은 나한테만은 화대를 받지 않을테니 맘껏 즐기라고 했다. 참 나한테 무슨 매력이 있는지? 또한 그녀의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하지만 그날 밤, 나는 끝내 그녀를 점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녀와 너무나도 일찍 운명에 순종하여 생소한 남자한테 시집가던 누나의 얼굴이 서로 교체되면서 끝내 마지막 양심의 방선을 허물수가 없었다. 그러자 자기를 묵묵히 보며 고민하고 있는 나의 무릎위에 얼굴을 묻으며 울음을 터뜨리는 미쓰신. “세상에 자기같은 아저씨도 있군요. 사랑해 아저씨. 우리 결혼할 수 없을가요?” 이에 내가 억지웃음을 보이며 머리를 흔들자 그녀는 “그래 그래 집에 사모님 있을테죠? 참 그 사모님 부러워요.” 그러는 사이 7월의 새벽하늘은 일찍이도 밝아왔다. 아침식사로 해장국으로 요기를 끝내자 미쓰신은 기어코 나를 부두까지 바래다주겠다면서 택시를 세내는 것이었다. 헌테 택시는 부두쪽으로 간 것이 아니라 해운대쪽이었다. 거기서 우리는 시원한 바다공기를 마시며 한동안 거닐다가 다시 택시에 앉아 남포동을 걸쳐 부두로 향했다. 그 사이 핸들을 잡은 그녀는 한마디 말도 없이 앞만을 주시하면 차를 몰았다. 허나 나는 그녀가 눈물을 떨군다는 것을 육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부두에서 나를 내려놓은 미쓰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부르릉 하며 차를 몰고 앞으로 대달렸다. 그 사이 갑자기 내가 미워졌을까? 아니 그것은 분명 내앞에서 연약한 여자의 눈물을 보이기 싫어서였을 것이었다. 그후 나는 그녀를 한 번도 보지 못했고 그 사이 세월도 흘렀다. 허나 나는 지금도 그녀를 잊지 못하고 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성만 알뿐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미쓰신, 그건 단지 내가 그녀를 점하지 못해서 오는 아쉬움뿐만은 결코 아니었다. ※ ※ ※ 사나이와 바다와 그리고 인생 마도로스로 일하던 2년 남짓한 사이, 나는 선박과 더불어 세계의 30여개 나라의 50여개 항구를 드나들어 보았다. 그러노라니 힘들고 짜증나는 일들도 많았지만 재미있고 신기한 현상도 많이 보았다. 풍차로 바다물을 밀어준다는 네덜란드의 로톨담과 암스테르담의 풍경, 도시복판의 다리가 한쪽으로 쭉 밀리면서 그 사이로 만톤급윤선도 지나가는 중남미 알루바도섬의 기이한 현상, 그리고 도마뱀들이 길가나 집주위 지어는 호텔의 천정에까지 붙어서 기여다니는 희한한 일, 이러한 것들은 우리 중국에도 과연 있을가? 또한 한국에서 출항하여 싸이판과 오스트랄리아를 거쳐 남미에 갔다가 다시 대서양과 인도양을 에돌아오노라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이 이론만이 아닌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된다. 그외 이전에 TV로만 보아오던 많은 것들을 직접 지척에서 볼 수가 있었는데 예하면 포클랜드군도의 펭긴과 물범, 아프리카해상의 돌고래의 집체무용 같은 헤염동작 이러한 것을 목격할 때면 확실히 배를 헛타지 앟았구나 하는 자부감이 생기군 했다. 한편 선원생활이란 필요시에는 목숨도 내걸어야 하는 모험을 해야 하는 법이다. 작업선친구들의 말에 따르면 남극주 가까이에서 조업하는 오징어채낚이선은 늘 바다에서 떠다니는 얼음산을 피하면서 조업해야 하는데 그것들과 부딪칠 위험이 시시각각으로 있으며 일단 부딪치기만 하면 십중팔구는 고기밥으로 되기가 일쑤라 한다. 그럼 다른 해역에도 오징어가 많을텐데 왜 하필 남극주근처에 가서 고기잡이를 하는지? 그것은 단지 그곳의 바다가 오염이 없어 고기가 더 맛있고 그 값이 높다고 해서만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남이 개척하지 못한 어장을 자기네들이 재척한다는 뜻과 죽음과 박투하면서 잡은 물고기를 육지에 보내준다는 마도로스의 용감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고기무리를 따라 조업하노라면 알게 모르게 남의 나라 영해에 들어갈 수도 있는바 그러다가 일단 해상경비정한테 발각되어 총포소리를 들으며 쫓기울 때면 바지에 똥오줌을 내싸기가 일쑤라 한다. 그만큼 넋이 떨어졌으면 다시 배를 탈 기분고 나지 않으련만 바다생활에 이골이 튼 “배놈”들은 또 다시 그 일이 언제였더냐 싶게 배를 탄다고 한다. 그만큼 배를 타면 육지에서는 맛볼 수 없는 인간애를 맛볼 수 있고 또한 바다와 같은 성미를 키울 수도 있는 법이며 바다는 그만큼 사나이들의 육신을 단련시키는 드넓은 무대였던 것이다. 그렇다. 젊은이들여, 배를 타보자. 배를 타고 세계를 돌면서 바다밑세계도 개발하고 바다수수께끼도 풀어헤치자. 그러면 그대는 육지의 그 어느 젊은이보다 도량이 넓어질 것이고 용맹해질 것이며 더욱 사나이다운 사나이로 될 것이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7-04
  • [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 (7)
    ■ 김철균 어려운 자취생활이었으나 세월은 빨리도 흘러 어느덧 순자도 3년간의 중학교 시절을 마치고 졸업하게 되었다. 그 3년 사이 순자가 다니던 명신여자중학교를 비롯하여 용정 6개소의 중학교가 합병되어 육도중학교가 고고성을 울리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용정고중의 전신이되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집에 돌아오자 동네사람들이 정주칸이 넘쳐나게 모여들었다.“여보슈, 명기어른, 개천에 용 난다구 우리 동네에 여수재가 났수다. 얼마나 기쁘겠수?! 우리가 이렇게 자랑스럽구 기쁜데 민기어른이야 여부가 있겠수? 참 축하하우다.” “중학교에서도 항상 우등생이 됐다면서요?” “졸업장에는 박규찬 교장님의 큼직한 도장이 찍혀 있다우.” “글쎄 박규찬 교장님의 추천으로 연길현교육국에서 희숙이를 선생님으로 배치했는데 서성구 소학교로 가게 되었다오.”김명기어른은 연길현교육국의 도장이 찍힌 교원초빙통지서를 내보이며 동네사람들한테 자랑했다.……교원초빙통지서를 받고 떠나던 날이 되었다. 어머니 윤씨가 씻어 말리워 다리미질까지 한 옷을 갈아입고 이불짐을 등에 진 순자의 가슴은 설레이기만 하였다. 일찍 동년시절부터 선생님이 되리라던 꿈을 가졌었고 봉천의 방직공장에 끌려가 근로봉사를 하면서 모진 학대와 기시를 받으면서도 버리지 않았었으며 배움의 길이 막혀 산에서 손에 물집이 생기도록 괭이질을 하며 약재를 캐면서도 버리지 않았던 교원의 꿈이었다. 그날 그것이 현실로 됐다. 그날따라 하늘도 유난히 높고 푸르렀고 얼굴을 스치는 미풍도 무척 살갑기만 했다. 뒷동산기슭의 붉은 꽃송이/ 네 먼저 내 먼저 다투어 피고// 시냇가 버들이 늘어지는/ 건설의 봄날이 찾아왔다네// 농촌의 사시는 풍년의 노래/ 자유와 행복의 꽃이 핀다네…순자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길을 재촉했다. 바로 이 때었다. 함께 동구밖까지 동행하던 어머니가 순자의 팔을 잡아당기며 서라고 했다. “어머니 왜요?”순자는 어머니가 궤춤에서 용돈을 꺼내 자기한테 주려고 그러는줄 알고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저만큼 뛰어가 앞장서서 걸었다. “얘, 희숙아! 잠간만 서서 내 말 좀 듣거라.” “왜 또 웬 말씀을 하시려구요?” “얘야, 저길 좀 보거라! 가더라도 저 총각의 속을 좀 풀어주고 가려므나!”어머니는 손을 들어 마을의 제일 마지막 집 굴뚝쪽을 가르켰다. 거기에는 김용환이가 외롭게 서서 순자가 떠나는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네가 떠난다는 소리를 듣고는 매일 운다고 하더니 오늘은 또 저렇게 서있구나! 참 불쌍한 청년인데…”어머니는 뒷말을 흐렸다. 어머니의 그 말에 순자는 길에 못박힌듯 멈춰섰다. 순간, 순자는 된 방망이에 뒤머리를 얻어맞은듯 큰 충격에 휩싸이면서 머리가 빙글빙글 돌아가는듯 했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9세부터 고아로 되었다는 김용환 총각,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눈물만은 모른다던 그가 순자가 떠난다고 하니 지금 울고 있다. 순자가 가 버리면 다시는 그녀처럼 순박하고 재덕도 겸비한 처녀를 만날 수 없다고 실망한 나머지 굵은 사나이의 눈물을 휘뿌리고 있었던 것이다. 기실 용환 총각이 정식으로 순자한테 청혼을 한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리고 순자가 그의 사랑을 받아들인 적은 더욱 없었다. 그렇다고 할진대 용환 총각이 아무리 실망하며 절규한다고 해도 순자가 양심적 가책을 받을 일은 꼬물만큼도 없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떠나버리면 그뿐이었다. 하지만 이시각 순자가 생각한 것은 달랐다. 순자는 분명 용환총각이 자기한테 관심이 있는 것을 알았고 자기 또한 그것이 싫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다만 위에서 언급하다싶이 정식으로 된 언약이 없었을 따름이었다. 천성적으로 맘씨가 곱고 자기보다 남의 심정을 더 잘 헤아리는 순자는 용환 총각이 자기를 맘속에 담고 있는 것이 마치도 자기 때문인 것처럼 여겨졌고 순박한 총각의 가슴에 찬물을 껴얹는 것은 천벌을 받을 일로 간주됐다. 교원이 아니라 더 큰 벼슬자리가 기다린다고 해도 절대 용환 총각을 실망시킬 수 없다고 여긴 순자는 천천히 발길을 돌려 용환 총각이 서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어머니 윤씨도 딸이 옳게 생각한다고 여겼던지 아니면 용환 총각이 더없이 측은하게 느껴졌던지 순자의 발목을 잡지 않았다. 용환총각한테로 다가간 순자는 다소곳이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였다. “잠시나마 생각이 짧았던 저를 용서하세요.” “그것이 어찌 순자 너를 탓할 일이냐?! 기실 내가 주제넘지. 나같은 신세에‘장원급제’하는 너를 넘보다니 참 어리석은 노릇이지…” “아니예요. 저도 이젠 마음을 정했어요. 뭐 선생이 되나 가정주부가 되나 어떤 마음으로 사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겠어요?!” “아니다. 너 나를 섬기노라면 한평생 고생을 밥먹듯 해야 될거다. 널 넘보는 건 다만 나의 욕심때문뿐이니 너 이제라도 너의 이상대로 살아야 한다. 그리고 그동안 너의 머리속을 혼란하게 만든 나를 많이 욕해달라…” “그만, 그만하세요. 저도 이젠 교원의 꿈을 접었어요. 저는 우리 둘의 인연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어요.”순자는 불과 몇 분도 되지 않는 사이에 용환총각을 바라보며 자신이 그렇게도 동경하던 교원의 꿈을 접었다. 그러고 보면 순자도 천성적으로 다혈기질이 다분히 타고난 모양이었다.……어느 사이에 모였는지 아버지, 오빠들과 올케들도 순자네를 먼발치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어쩔 수 없구나. 저 맘이 여리고 착해빠진 것, 아무렴 착하지 않으면 우리 집 희숙이 아니지…여보, 우리 아들 하나 더 두었다고 칩시다.”어머니 윤씨는 대답 대신 머리를 끄덕이며 눈물을 훔치었다. 용환 총각과 약혼한 뒤 순자의 이름은 희숙이로부터 지금의 이름으로 재차 고쳐졌다. (다음기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7-02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16) 클레물리궁
    클레물리궁의 자료 소속대륙: 유럽, 소속국가 러시아, 지점: 모쓰크바 시중심 함의: 러시아의 심장이며 러시아 국가권력의 상징임 클레물리궁은 모쓰크바 중심에 위치해 있다. 클레물리궁의 남쪽은 모쓰크바강과 인접돼 있고 서북쪽은 알렉산드르 화원이 있으며 동남쪽은 붉은 광장으로 클레물리궁은 정부등변 삼각형형태로 돼있다. 클레물리궁의 높고도 견고한 장벽과 종루, 금빛십자가가 건물꼭대기에 박혀 있는 성당 그리고 옛스러운 루각과 궁전은 모쓰크바강반의 산기슭에 우뚝 서있으면서 아름답고도 웅위로운 예술건축군을 구성하고있다. 한편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클레물리궁은 모쓰크바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서 역시 러시아의 정치중심으로 그 역사를 견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대 클리물리궁 대 클리물리궁은 19세기 러시아의 짜리황제의 관저이다. 대 클리물리궁은 아름다운 모쓰크바강을 따라 건축되었는데 2 개의 큰 대청으로 구성되었으며 클리물리궁 건축군중 가장 중요한 건축으로 되고 있다. 대 클리물리궁은 내부장식이 호화로운바 궁전의 중앙장식은 각종 꽃무니도안으로 누각을 이루고 있으며 꼭대기의 자동색 원주탑은 13미터에 달하는바 거기에 기발을 게양할 수 있는 대가 있다. 이 곳은 그제날 황제가족이 혼례를 치르는 곳이었고 짜리황제가 외국사절단을 접견하는 곳이기도 했으며 지금 역시 러시아정부가 집무를 보는 곳으로 되고 있다. 가장 오래된 광장 러시아어로 “붉다”는 것은 “아름답다”란 뜻으로 풀이, 모쓰크바의 붉은 광장인즉 바로 “아름다운 광장”이란 뜻이다. 붉은 광장은 모쓰크바에서 가장 오래된 광장이며 클레물리궁의 건축군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구성부분이다. 장방형으로 된 광장은 총 면적이 9만평방미터에 달한다. 러시아의 10월 혁명 후 붉은 광장은 러시아인들이 경축활동, 집회와 열병식을 거행하는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7-02
  • 오묘한 세계대백과(16)지구는 왜 자주 “화”를 내는가?
    지구의 성격은 그래도 비교적 온화하다고 할 수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화”를 내기도 한다. 지구가 “화”를 낼 때면 속으로 올리 토하듯 대량의 고온용암, 기체, 먼지 등 물질을 대량 분출하는데 한 갈래의 거대한 불기둥으로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불기둥은 일정한 높이로 충격해 올라온 후 그 체적이 신속하게 팽창하면서 하나의 큰 버섯모양의 연기구름을 형성한다. 이것이 곧바로 화산폭발이다. 용암은 화산중에 내뿜는 주요한 물질로서 지만의 연류층에서 산생한다. 그것들은 지구의 “몸체”속에서 가만있지 않고 꿈틀거리다가 일단 기회가 성숙되기만 하면 모든 것을 불문하고 지구표면으로 충격해 올라오면서 화산폭발로 형성된다. 소유의 화산이 모두 폭발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화산은 일찍 폭발했으나 지금은 더는 활동하지 않고 있으며 이런 화산을 “사화산(死火山)”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사화산”도 지각의 변동에 따라 돌연적으로 폭발할 수도 있으며 이런 화산을 “휴면화산”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폭발하는 화산을 우리는 또 “활화산(活火山)”이라고 한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7-02
  • 해외견문시리즈 (11)젊은 마도로스의 수기
    ■ 김철균 부산항구, 길게 울리는 배고동소리에 후다닥 일어나 선창으로 내다보니 배는 이미 오륙도를 지나서 바야흐로 입항준비를 다그치고 있었다. 도선사가 이미 올라 입항로를 안내하고 있었고 옆으로 지나는 크고 작은 선박들마다 고동을 울리며 반겨주었다. 부산항구, 선수와 선미에서 대기하고 있던 선원들은 흥분에 젖어 웃고 떠들며 서로 안고 빙빙 돌았다.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우네 오륙도 돌아오는 연락선마다 목메어 불러봐도 대답없는 내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그렇다. 그 얼마나 오랜 세월을 두고 배달민족의 슬픔과 눈물을 자아내게 하던 부산항구었더냐.북으로는 두만강을 건너 간도땅으로, 남으로는 부산을 거쳐 현해탄 지나 일본땅으로 나라 잃고 살 길을 찾아 타관땅, 낯선 곳으로 떠나던 사람들, 순간 영화나 소설에서 보던 모습과 정경들이 눈앞에 금시 안겨오는듯 했다.밤비 내리는 부산의 파지정 파도도 올고 갈매기도 울었다 정든 사람 떠나보내는 여인도 울었다 다시는 돌아오기 힘든 고국산천 뒤돌아보며 사나이도 주먹으로 눈물 닦았다 부산에서 시모노스끼까지 여덟시간 뱃길이지만 못살아 돈벌러 가는 길이라 놓고 싶지 앟는 그 사람 손목 놓고가는 길이라 천리길 만리길보다 멀었다 그날 도항증을 받으로 갔다 일본인 순사한테 발길에 채이고 뱃머리에서 고등계 형사에게 뺨을 맞아가며 서러운 뱃길을 떠나던 사람들 지금은 모두 어디에 살고 있는지?그 옛날 설음에 찬 물결에 젊은 나그네의 머리위에서 울던 갈매기 지금은 몇이나 남아 있을 것인가 갈매기들도 늙었으리라 아니 벌써 저 세상으로 가버렸으리라… …어디 그뿐이었더냐. 어릴적 고향의 엄마한테서 듣던 그 이야기- 이수일과 심순애는 서로 서로 눈이 맞은 사이었단다. 이수일이 일본으로 유학가게 되자 심순애는 부모님의 말씀 거역할 수 없어 평양부자 김준배한테로 시집을 갔단다. 그 후 일본에서 돌아온 이수일은 돈의 노예로 된 심순애를 호되게 꾸짖으며 그 더러운 돈을 심순애한테 던져주고 심순애는 또 심한 갈등에 모대기다 부산 앞바다의 서슬푸른 파도속에 몸을 날리고…이는 봉건혼인에 반항해나서는 한쌍의 청춘남녀의 사랑이야기었다. 이렇듯 부산은 외국의 자본주의의 신흥사상이 바다를 통해 인입되는 곳이기도 했다.그 다음은 가렬처절하던 동족상잔의 “6.25”전쟁이다. 전주, 정주, 광주로! 대전,대구, 부산으로! 파죽지세로 진격하는 조선인민군의 공세에 대한민국의 90% 이상의 지역과 92% 이상의 인구를 내주고 대한민국정부가 하마트면 부산앞 남해바다에 처박힐번 했던 그 시기, 그 때 부산은 대한민국의 마지막 숨통이기도 했다. 그 뒤 유엔군의 개입으로 인한 인천상육작전과 낙동강에서의 공방전, 그것을 계기로 전선은 다시 북으로 밀려 3.8선부근에서 고착되고 그후부터 조선반도의 남과 북은 정치와 사상의 다른 이념으로 해서 지금까지 갈려져 살면서 서로 보고 싶은 얼굴을 보지 못하고 가고 싶은 땅으로 가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강대국의 인위적인 분열책략에 의해서 두동강이 난 3천리강산, 분통한 일이다.입항한 이튿날, 나는 본선내의 몇몇 중국조선족선원들과 함께 낙동강으로 향하게 됐다.6.25 당시 한국국방군과 조선인민군이 가열처절한 공방전을 벌였던 곳- 낙동강, 우리가 택시를 잡아타고 한시간푼 달리니 낙동강가에 이를 수 있었다.그날은 잔잔한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그 안개비속에 7월의 낙동강은 소리없이 흐르고 있었다.강폭이나 흐름새가 어찌보면 북중변경의 두만강을 연상케 하는 700리 낙동강, 우리 넷은 하염없이 흐르는 낙동강을 바라보며 제각기 생각에 잠겨 있었다.사실 우리 4명의 중국 조선족선원을 놓고 보면 모두가 가족의 부친이나 백부 그리고 할아버지 등이 북측인민군에 참가한적 있는 사람들, 특히 나는 낙동강전투에서 공까지 세운적 있는 아버지와 4촌형 김송춘씨한테서 많은 전쟁이야기를 들어온터였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 (한국 전시가요) 가렬한 전투의 저기 저 언덕피흘린 동지를 잊지 말어라… … (조선 전시가요) 이렇게 3년 1개월간이나 서로 총을 맞대고 싸웠으나 얻은 것이 과연 무엇이었더냐. 군사분계선은 그대로 남아있고 수많은 고아와 과부와 이산가족만을 낳은 전쟁, 아니 그 6.25때문에 오늘날 더욱 화해하기 힘든 것이 반도남북의 현실이 아니란 말인가. 전쟁이란 강압정치로서 통일에서의 유일한 방법인 것은 아니다. 그러니 단일민족이라는 전제밑에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며 옛날의 알륵들을 풀어야만 통일이란 대업도 가능한 것이다. 오늘날 역시 조선인민군의 후예들인 우리들까지도 그 옛날 가열처절한 싸움을 벌였던 이 낙동강반에서 활개치며 다닐 수 있는데 민족과 나라를 위한 마음이라면 삭일 수 없는 원한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보슬비 내린다. 열기 띤 가슴속까지 적셔주면서 잔잔히 내린다. 그 안개비속에 무겁게 드리워진 하늘, 낙동강반의 하늘은 과연 언제 개일런고?…(다음기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6-28
  • [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6)
    ■ 김철균 순자는 처음에 용정에 있는 명훈녀자중학교에 다녔다. 순자네가 사는 동네에서 용정까지의 거리는 20리도 넘었다. 그러다보니 순자의 어머니 윤씨는 늘 꼭두새벽에 일어나 밥을 지었고 순자는 말 그대로 별을 이고 나가서는 달을 이고 집으로 돌아오군 하였다. 더군다나 여름철 큰비가 쏟아지거나 겨울에 큰눈이 내릴 때면 그 고생이 더욱 막심하였다. 순자는 이를 악물고 공부에 열심했다. 수업시간에는 물론 학교로 가거나 집으로 돌아올 때면 늘 과문같은 것을 외우군 했다. 일반적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20여리 길이면 한개 과목을 거침없이 줄줄 외울 수 있도록 암송할 수도 있었다. 이토록 등교하거나 귀가하는 시간마저 공부에 푹 빠지다 보니 길을 오끼여 생뚱같은 길에 들어설 때도 있었다. 순자가 명훈중학교에 붙은 그 해의 겨울이었다. 어느날 오후 하학하자 순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늘 등교와 하학할 때마다 동행하던 이웃 학급의 한옥단을 찾았다. 옥단이는 순자와 몇년전부터 진작 절친한 사이었다.일찍 소학교에 다닐 때부터 늘 그와 그림자처럼 붙어다녔다. 10살 때의 어느 겨울날 옥단이가 입은 옷이 너무 얇아 순자가 자기의 옷을 벗어주면서 그와 옷을 바꿔입은 것이 인연이 되면서 그런 절친한 사이가 됐다. 그때로부터 옥단이는 순자라면 둘도 없는 친구로 여겼고 순자는 집에 맛나는 것이라도 있으면 늘 자기보다도 더 어렵게 자라는 옥단이한테 가져다주군 하였다. 그러면서 둘은 또 중학교까지 함께 다니며 거의 매일마다 길동무가 되었다. 그런데 그날만은 옥단이한테 다른 사연이 있었다. “얘 순자야. 어쩌지? 오늘 용정에 있는 이모네 집에 행사가 있어 난 거기에 가서 묵어야겠구나.” “그래, 그럼 별 수 없지 뭐.” “아니, 그러지 말고 우리 함께 이모네 집에 가서 함께 자자꾸나. 네가 가면 우리 이모도 몹시 반길거야. 이전에 이모한테 네 말을 했더니 한번 널 데리고 오라고까지 했단다.”옥단이의 성의가 고마웠지만 순자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순자가 집으로 가지 못하면 그만큼 부모가 근심하며 찾아다니기 때문이었다. “안돼, 난 집으로 가야 해. 그리고 그냥 다니던 길이기에 괜찮아.”순자는 미안해하는 옥단이와 작별하고는 혼자서 귀로에 올랐다. …순자는 여전히 종전처럼 그날 배운 과목에서 암송해야 할 부분을 외우며 길을 다그쳤다. 길에서 이렇게 과목암송같은 것을 하면서 걷노라면 힘드는줄도 모르고 또한 어느결에 집에 도착했는지도 모를 때가 많았다. 헌데 그날 순자는 너무 과목암송에 집착하다 보니 그만 집쪽 동네로 향하는 길이 아닌 다른 동네쪽으로 통하는 길에 들어섰다. 토끼꼬리처럼 짧은 겨울해는 어느덧 넘어가고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혼자서 과목을 중얼거리며 걷던 순자는 갑자기 산쪽에서 들려오는 승냥이의 울음소리에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고 사위를 둘러봤다. 순간, 어쩐지 자기가 걷는 길이 생소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갑자기 뒤잔등이 섬뜩해났다. 용정을 떠날 때 두 남학생의 뒤만 따라 걷다보니 그만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 분명했다. (이를 어쩌나?…)불현듯 멀지 않은 산등성이에 두줄기의 새파란 불빛이 번뜩하는 것 같았다. 승냥이와 호랑이까지 자주 출몰한다는 산골이라 더럭 겁부터 났다. 또한 자기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기다리다가 찾아떠날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큰오빠 등이 크게 근심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순자는 종주먹을 쥐고 오던 길로 되돌아서며 종달음을 쳤다…그가 갈림길목에 도착하여 다시 고향동네로 가는 길에 들어선지 얼마 안되어 아니나 다를가 아버지와 큰 오빠가 홰불을 켜들고 “희숙아, 희숙아!(해방후엔 순자의 이름이 “희숙”이로 불려졌음)”하고 부르며 길을 훓는 것이 보이었다. 그날 밤, 순자는 아버지가 학교를 당장 그만두라고 할가봐 가슴이 한줌만해졌다. 다행히도 아버지는 순자를 꾸중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호령 대신 긴 한숨을 내쉬더니 쌀을 팔아 세방을 구한 뒤 순자더러 용정에서 자취하면서 공부를 하게 하자고 어머니와 상론하는 것이었다. 순자는 용정 해란강가에 있는 한 자그마한 방을 세맡고 자취생활을 시작하였다. 순자가 워낙 알뜰하고 상냥한데다 홀로 아이를 키우며 사는 방주인도 매우 착한지라 방주인과 순자는 서로 의지하고 도와주며 살 수 있었다. 세방을 맡고 자취생활을 한지 몇 개 월 후 순자는 명신여자중학교로 옮겨 다니게 됐고 남동생 구춘이도 용정의 어느 한 중학교에 입학하여 오누이가 세방에서 함께 기거하게 되었다. 당시 해방직후라 생활이 간고함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해방된 이듬해라 모든 것이 몹시 부족한 상황이었다. 집에 얼마간 있던 쌀도 용정의 세방을 맡느라고 적지 않게 팔아버린 상황에서 부모님들은 순자와 구춘이한테 넉넉히 쌀을 보내줄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잘 알고도 남음이 있는 순자는 부모한테 무작정 손을 내밀 수가 없었다. 순자는 공휴일마다 용정부근의 농촌으로 다니며 삯일을 하여 받는 쌀과 남새로 살림에 보태군 하였다. 헌데 그것으로 남동생 구춘이와 둘이서 생계를 이어가기에는 판부족이었다. 당시 구춘이는 한창 자라는 나이어서인지 밥 한그릇을 게눈감추듯 비우고는 모자란듯 입을 쩝쩝 다시군 했다. 그럴 때마다 순자는 자기 그릇의 밥을 구춘의 그릇에 갈라주군 하다보니 자신은 늘쌍 배를 곯군 하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순자의 학급에는 영숙이라는 여자애가 있었는데 그 애 역시 아주 째지게 가난한 집의 딸이었다. 그 애가 자기네보다도 더 가엽다고 느낀 순자는 자주 그 애를 데려다 밥을 먹이군 했는데 그런 날이면 곧바로 순자가 굶는 날이었다. 하지만 천성이 착한 순자는 남동생과 영숙이가 밥을 맛스레 먹는것만 봐도 배가 부른 것만 같았다. 그러던 어느날 셋째 오빠 구완이가 김용환이라는 동창생과 함께 순자네가 기거하는 자취방으로 찾아왔다. 부모님이 보내준 좁쌀과 버섯, 감자 등을 가져왔던 것이다. 오빠와 함께 온 용환이라는 청년은 옷은 비록 람루하게 입었지만 얼굴은 매우 준수하게 생겼으며 그닥 크지 않은 두눈은 수심에 잠겨있으면서도 가끔씩 예지로 번쩍이기도 했다. 가난한 집 애들이 거개가 그러하듯이 용환이라는 청년은 오빠와 함께 밥을 먹으면서도 머리를 수그리고 말이 없었다. 순자는 방 한쪽구석에 쪼크리고 앉아 오빠와 용환이란 청년이 밥을 먹는 모습을 번갈아 지켜 보았다. (저 청년은 왜 생기가 없을까? 혹시 한쪽 부모라도 없는 것이 아닐가? 하긴 요즘 세월에 양쪽 부모가 모두 계신다 해도 가난하면 어깨가 처질 수밖에…아니, 내가 웬 쓸개빠진 궁리를 하는거야. 저 청년이 나한테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래!)순자는 자기의 생각대로 억측하고 또 그것을 부정하군 하다가 둘의 식사가 끝나자 부랴부랴 설겆이를 시작했다. 오빠와 그 청년이 돌아간 뒤에도 순자는 자꾸 용환이라는 청년의 얼굴모습이 떠오르면서 마음이 뒤숭숭해났다. 이런 생각을 하지 말자고 했지만 그렇게 안되었다. 순자는 잡생각을 떨쳐버리려고 동생이 벗어놓은 옷을 대야에 담아들고 해란강가의 빨래터로 향했다. ……그 뒤에도 그 청년은 오빠와 함께 몇번 순자가 기거하는 자취방에 나타났다. 헌데 두번째부터는 얼굴에 어쩐지 생기가 도는듯 했고 순자와 얼굴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매우 거동이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그건 순자도 마찬가지었다. 거기에 순자는 용환이와 얼굴이 마주칠 때마다 몰래 가슴이 콩콩 뛰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 날도 어디로 가는 길에 순자네 자취방에 들렸다면서 오빠는 용환이와 동행했다. 둘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형세에 대해여 논하면서 “조선에서 3.8선이 생긴이래 남북내왕이 몹시 불편해졌소”, “남조선에는 미군이 주둔하면서 군정이 실시되고 있는데 좌우익갈등이 매우 심하다오”, “우리 중국에서도 공산당의 모택동은 연합정부를 주장하지만 국민정부의 장개석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소” 하며 여러 가지를 화제에 올리군 하였다. 헌데 목에 피대를 살구어가며 열변을 내뿜는건 오빠 구완이었으며 용환이는 외딴 생각을 하는지 오빠가 “자네 안 그런가?”하고 툭 다쳤어야 “엉?! 그래, 그거야 그렇구 말구”하며 오빠가 내놓은 화제에는 영 취미가 없어하는 눈치었다. “자네, 오늘 왜 이래? 웬 딴궁리를 하는가?” “아니, 딴궁리는 무슨 딴궁리…” “자네 혹시, 내 여동생한테 관심이 있는거 아닌가?” “아니, 아니야! 자리를 보고 다리를 펴라고 나같은 신세에 언제 자네의 여동생을 다 넘보겠는가?!”그러면서도 용환이는 삽시에 얼굴이 홍당무우처럼 빨개지었다. “글쎄 자네같은 수재라면야 내가 뭐 마다할리 없겠소만은 우선은 우리 부모님이 허락해야 하고 또 관건은 저 애의 마음이 움직여야 한다네…”아닌 밤중에 홍두깨 내밀듯 화제가 이렇게 돌아가자 순자는 더는 들을 수가 없어 살며시 밖으로 나와버렸다. 하지만 둘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궁금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하여 출입문밖에서 엿들으려 했으나 가끔씩 오빠의 웃음소리가 들려올뿐 둘이 도대체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도무지 더 이상 한마디도 엿들을 수가 없었다. 순자는 후에야 오빠를 통해 용환이가 착하고 총명하며 공부도 아주 잘하지만 의지가지가 없는 고아라는것과 일제시대에는 일본인가정의 배달같은 것을 하면서 겨우 공부를 했으며 지금도 생활환경이 영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는 “용환이가 확실히 너한테 관심이 있으며 그의 생활환경이 그러하니 네가 알아서 결정하라”는 암시와도 같았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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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6-26
  • 오묘한 세계대백과(15) 무서운 지진
    무서운 지진 지진은 일종 매우 흔히 볼 수 있는 자연현상으로서 일반적으로 그 진동이 크지 않기에 인류한테 큰 손실을 갖다주지 않는다. 하지만 재난성이 큰 지진은 그야말로 무섭다. 이런 지진은 집이 무너지고 도로가 갈라지며 또 어떤 경우에는 화산, 쓰나미, 수재, 산붕괴, 지함(땅이 꺼져들어가는 현상) 등 각종 자연재해를 갖다주기도 한다. 그럼 구경 어떤 원인으로 하여 지진이 조성될까? 연구에 따르면 지진은 주요하게 암층의 단열로 일어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지구내부의 압력이 지나치게 클 때 곧 암석이 단열되고 이동하며, 이때 지면은 곧 흔들리고 갈라터지면서 지진이 형성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지구내부에서 지진이 일어나는 곳을 지원 혹은 지진대라고 한다. 이는 하나의 점이 아니고 한개 구역을 가르키는 것이다. 그리고 지원대응의 지방을 지진중심이라고 한다. 이곳은 진동이 가장 크게 발생하며 일반적으로 파괴가 가장 엄중한 지구라고 한다. 일본은 세계에서 유명한 지진다발국으로서 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6급 이상의 지진 중 20% 이상이 일본에서 발생한다고 한다. 예하면 1995년 1월 17일 오사까와 고베 지구에서 발생한 7.2급 지진시에는 도합 5250명이 사망하고 2만 6804명이 상했다고 하며 2011년 3월 11일 동일본의 대지진은 거대한 바다의 쓰나미까지 몰고와 그 지구에 훼멸성적인 대재난을 갖다주었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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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6-22
  • 해외견문 시리즈(10) 젊은 마도로스의 수기
    ■ 김철균 그날은 7월 9일, 대만 고웅항을 떠난 본선은 그제야 진짜로 부산으로 향하는 배길에 들어섰다. 이제 오라지 않아 부산에 입항한다고 하자 모두들 기뻐서 야단법석했다. 그도 그럴 것이 본선 선원들의 대부분은 부산출신이었는데 이제 아무 날 몇시에 부산항에 입항한다고 회사에 팩스를 날리기만 하면 숱한 아내, 어머니와 미혼처들이 부두까지 마중나와 있겠으니 말이었다. 이렇게 모두들 잔뜩 희열에 잠겨있을 때 불현듯 선내 스피카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방송되었다. “선내 알려드리겠습니다. 선내 알려드리겠습니다. 선내 각 부서들에서 각별히 유의하기 바랍니다. 방금 받은 해상일기예보에 따르면 올해 ××호 태풍이 지금 빠른 속도로 이쪽을 향해 밀려오고 있습니다. 선내 각 부서들에서는 태풍에 대처할 모든 준비를 잘하여 선박운행에 이상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거듭 말씀드리겠습니다…” 환희로 들끓던 선내는 삽시에 쥐죽은듯 고요해졌다. 하늘이 맑고 바람 한점 없는데 태풍이라니. 선박생활경험이 없는 우리 중국 조선족선원들은 그것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헌데 선내분위기가 벌써 달라졌다. 갑판장은 갑판원들을 이끌고 선내를 돌면서 통로문과 선창문을 몽땅 꽁꽁 닫게 했고 갑판의 물건 예하면 공구들은 몽땅 거두어들이고 도람통같은 것은 배전난간에 묶어 고정시켜 놓았다. 한편 기관실에서는 모든 설비들을 재점검하는 동시에 알준한 당직근무조를 내왔으며 우리 주방에서는 통신장의 지휘하에 주방의 일체 그릇들을 큰 대야같은데 채곡채곡 넣어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시켜놓고는 비상으로 선원들한테 빵, 과자나 과일 등을 나누어주었다. 뒤이어 매개 선원마다 구명조끼를 착용하고 근무하라는 지시가 방송되었다. 얼마 후 과연 본선이 먹장 같은 구름떼들이 하늘로 몰켜오더니 뒤미처 불어치는 태풍과 함께 파도가 일기 시작하면서 선체가 이리저리 기우뚱거리군 했다. 그러자 선장은 기관당직자외의 모든 선원들을 조타실에 대기시켰다. 일단 사고가 발생하면 그 손실을 극력 줄이기 위해서였다. 항행지휘는 선장이 직접 했고 1탁수가 키를 잡았으며 기관실에서는 기관장의 지휘하에 1기사, 2기사가 엔징운행을 담당했는데 선내 전체가 1급비상태에 들어간듯 싶었다. 그 외 통신장은 레시바를 귀에 끼고 태풍전야의 현상태를 부지런히 보고하는 한편 본부의 지시를 선장한테 수시로 전달하군 했다. 사위는 대낮에도 불구하고 인츰 칠흑처럼 되더니 큰 파도가 배전을 세차게 때리기 시작했다. 갈매기들은 죽는다고 아우성치며 조타실 뒤에 있는 바람막이 같은 구석에 하나 둘씩 몰켜들었는데 어디로부터 그 숱한 갈매기들이 날아놨는지 쌓이고 쌓여 사람의 키를 초과할 지경이었다. 남대서양 포클랜드의 파도가 무섭다고 했는데 태평양에 불어치는 태풍에 비하면 파도라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태평양이 태평스럽지 못하다는 말을 실증하듯 앞으로부터 밀려오는 파도가 어찌나 높은지 선박을 당장 삼켜버릴 기세였고 그 파도가 선수를 들이박을 때는 길이 160미터나 되는 육중한 선박 전체까지도 부르르 떨기가 일쑤였다. 또한 그 파도가 선수에서 120미터 뒤에 있는 조타실꼭대기까지 올라오는건 물론 선박 전체가 파도속에 푹 잠겼다가 다시 물우로 솟구칠 때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천둥이 울부짖고 굵직한 비줄기가 흩날리는 자욱한 안개속에서 본선은 항행을 계속했다. 선장과 1항사는 한시도 시선을 떼지 않고 앞만을 주시했다. 그러다가 큰 파도가 밀려오는 것이 어슴프레 보이면 급기야 “엔징가속”을 불렀다. 그러면 그 옆에서 복창하는 1항사, 엔징속도를 빨리면 그만큼 파도와 부딪치는 충격이 크기에 더 위험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런 것이 아니었다. 배가 전진하는 속도가 빨라야만이 파도와의 충격에서 뚫고 나갈 수 있지 그렇지 않고 속도가 느리거나 혹시 엔징이 꺼지기라도 하면 선박 자체의 힘이 적거나 없기에 배가 뒤집혀질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옆으로부터 파도가 밀려오는 것이 보이면 선장은 인차 배머리를 파도가 밀려오는 쪽으로 돌리게 했다. 왜냐하면 앞으로 치는 파도보다 옆으로 치는 파도가 더 무섭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옆의 파도를 발견하지 못했거나 혹은 미처 배머리를 돌리지 못했을 때는 선체가 파도에 맞아 거의 한쪽으로 넘어갈 것만 같았는데 벽에 머리를 박는 이, 바닥에 쓰러지는이들로 조타실은 수라장이 되기가 일쑤였다. 밤이 되었다. 칠칠야밤, 비바람은 더욱 세찼고 파도는 더욱 흉악스럽게 선박 전체를 삼켜버릴양으로 덮쳐들었다. 지척도 분간하기 힘든 한바다에서 아무리 유명한 선장이라 해도 육감에 의해 항행지휘를 했지 정확한 판단과 지휘는 거의 불가능햇다. 배는 파도에 의해 수시로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 했다. 바로 이 때 억수로 크고도 거센 파도가 선수를 호되게 갈기는듯 하더니 엔징이 툭하고 꺼졌다. 순간 선내 전체는 까막나라로 되었고 선장의 지휘도 1타수가 잡은 키도 기능을 잃었다. 8000톤급 되는 본선은 완전히 부평초처럼 파도가 치는대로 이리 밀려가고 저리 밀려가고 했다. 드디어 어둠속에서 누군가 울음을 터뜨리었다. “아이고, 내가 왜 부산서 승선하지 못하고 방콕까지 가서 앞당겨 승선했노?” 뒤이어 “엄마야 나 어떻게 죽어, 난 아직 장가도 못들었는데.” 심지어 기독교신자로 출항할 때마다 기도를 드리군 하던 냉동사까지도 “하나님은 무슨 말라비틀어진 하나님이라더냐,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면 이럴 때 우릴 구하지 않고 언제 구한다더냐?!”라고 희스테리적으로 부르짖었다. 이에 선장은 차마 들을 수 없었던지 “이 미친 놈들아, 조용하지 못해? 죽긴 왜 죽는다고 지랄염병들을 하고 있는거야?!”하고 소리를 질렀지만 하나님도 개아들보다 못한판에 선장의 말이라고 먹혀들어갈리 만무했다. 이렇게 약 20분 가량 지났을 때 불현듯 엔징시동이 걸리는 소리가 나더니 조타실내 신호등들이 일제히 켜졌다. 조타실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파도의 충격에 1호발전기가 스톱하는 통에 바다에 처박힐번 했던 본선은 다시 2호발전기를 가동해서는 항행을 계속했다. 허나 공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아니 파도의 충격은 점점 더 커갔고 선체도 점점 더 기우뚱거렸다. 하지만 한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어서인지 선원들은 더는 아우성을 치지 않았다. 사내란 것들이 고까짓 위험에 아우성쳤다는 창피감도 있었겠지만 인젠 생사의 여하를 운명의 배치에 맡긴 모양이었다. 이렇듯 긴장한 분위기속에서도 선박과 선원들의 안전을 책임진 선장이 어딘가 남들 과는 달랐다. 그는 인차 심리평형을 잡고는 수시로 앞과 좌우를 관찰하면서 될 수 있는한 정확한 지휘를 하느라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엔징으로 인한 위험이 제거되자 이번에는 또 새로운 위험이 들이닥쳤다. 파도가 이미 선박 우현쪽을 때려서 기우뚱했던 선체가 바로서기도 전에 또 다른 파도가 재차 우현쪽을 강타한데서 배가 점점 좌현쪽으로 기울러지고있었는데 거의 45도각을 이루었다. 선장은 그런 찰나에도 지휘를 계속했다. “좌현 20도! 좌현 20도! 빨리 키를 돌렸!” 이에 1타수가 그걸 복창하며 키를 좌현 20도로 돌리자 그제야 선체는 천천히 평형을 잡는 것이었다. 가령 그때 키를 좌현쪽으로 돌리지 않았거나 혹은 미처 돌리기도 전에 파도가 재차 우현쪽을 때렸더라면 그 후과는 상상할 수도 없었을 것이었다. 20여년 전부터 해병대 상등병으로 베트남전에도 참가했었다는 A급 선장인 정유식, 그는 그야말로 훌륭한 선박의 마스터임에 틀림없었다. 가령 그때 그가 정확진 지휘를 하지 못했거나 또한 그마저 죽음의 공포에 떨며 재능을 과시하지 못했다면 선박과 선내 24명 선원들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되였을는지?… 장장 18시간이나 지속되는 태풍은 이튿날 오전 10시에야 비로서 물러가기 시작하더니 찬란한 해빛은 인차 우리의 머리위를 비추었다. 검푸르던 바다는 다시 푸름을 자랑하며 찰랑대였고 고기무리들도 이에 따라 물우로 솟구치며 자유로히 놀았다. 한편 태풍이 한창인 하늘가에는 아름다운 바다무지개가 걸리었다. 한차례 폭풍취우의 세례를 겪고난 선원들은 지친 나머지 이리저리 아무렇게나 쓰러져있었고 선장 역시 눈에 피줄기가 서고 열병에 앓고난 사람처럼 얼굴이 해쓱해졌다. 그 사이에 배란간에 묶어놓았던 빈도람통들은 파도에 맞아 납작하게 되었고 조타실 뒤에 몰켜있던 갈매기들은 자기들의 무게에 깔리고 숨막혀 죽은 것이 태반이나 되었다. 살아만은 갈매기들은 죽은 갈매기들의 죽음이 애닮아서인지 슬피 울면서 조타실주위를 맴돌며 떠날념을 하지 않았다. 죽은 갈매기들을 바다에 “수장”하는 동안 조타실에서는 자주 고동을 길게 뽑아 그것들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였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 때 우리가 태풍속에서 18시간이나 역사했지만 항행거리는 고작 5마일도 되나마나 했다. 마도로스들의 지치고 짜증난 마음을 달래기라도 하는걸가. 원양운반선 “코리안스타”호는 24노트의 최고속도로 한국의 제일 항구인 부산을 바라고 힘찬 항행을 다그쳤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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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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