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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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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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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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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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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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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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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전후 국민혁명군에 군장비 제공한 국가들②
1927년, 중국과 독일의 접촉을 시작으로 항일전쟁 직전까지 독일은 중국의 최대 협력 파트너였다. 원래 독일 군사고문은 장개석에게 60개의 독일의 기계사단을 통폐합해 내놓아야 했지만 국민정부는 그렇게 많은 돈이 없었고, 또 그렇게 큰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았기에 항일 전쟁이 발발한 후 중국 전역에 30개의 ‘조정사’만 있었고 독일은 40만 세트의 장비만 쏟아부었다. 이 정예부대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거의 소진되었다. 최초의 ‘송호회전’, ‘남경보위전’, 화북전장의 ‘흔구회전’, ‘낭자관전투’;등 전투에는 대량의 독일 기계사단이 일본군과 교전하여 참혹한 대가를 치렀다. 이들 30개의 ‘조정사’ 중 28개는 사단 전체가 마비됐고, 2개 사단만이 격렬한 전투를 피했기에 그 병력과 장비를 보존할 수 있었다. 또 전쟁 때문에 독일의 무기는 제때 수송되지 못했고, 독일군은 장비를 보충받지 못해 많은 병사들이 국산장비를 갖고 전쟁터로 나가야 했다. 게다가 독일은 일본과 동맹을 맺은 탓으로 독일군은 중국에 대한 군사 지원을 늦추다가 1938년 7월 중국에 대한 지원을 모두 멈추고 중국에서 철수했다. 독일인들은 철수했고, 중국의 항전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중국내 전장은 군사 장비의 보충이 시급했고, 장개석은후원자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바로 이때 소련이 나타났다. 소련은 국민정부로 하여금 일본군의 진군속도를 저지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장개석과 합작협정을 맺고 중국에 군사물자를 지원했다. 이에 따라 독일기계사와 미국기계사 사이에 소련기계사가 하나 더 생겼다. 소련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국민정부가 농수산물과 각종 금속 원자재만 제공하면 된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10년 만에 중소 협력은 이렇게 성사됐다. 소련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나름대로 성의를 갖고 있었고, 탱크와 비행기 같은 중무기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소련 장비로 20개 사단을 무장시켜 독일군 무기사단의 손실로 생긴 공백을 메우려 했다. 이렇게 양 측이 각각 필요한 것을 취해서 교역은 비교적 만족스럽게 진행 됐다. 하지만 소련 기계사의 배치에 있어서 중·소 양측은 이견이 있었다. 소련 측은 모두 소련군 편제대로 새로 편성된 부대에 장비를 배치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장개석은 몰래 장비를 따로 빼돌려 포병단을 조직했다. 이렇게 10여 개의 포병단위를 만들면서, 미리 약속했던 대로 소련 기계사단에 이를 전달하지 않았다. 한편 소련이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물자 수송도 간단해 1차 소련의 기계장비로 4개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었으며 이 중 제200사단은 중국 최초의 기계화사단이 됐다. 그리고 후속으로 소련의 기계화 장비도 육속 도착해 장개석은 18개의 소련 기계화사단을 구성해 일본군과 잘 싸울 수 있었다. 이 보배같은 소련 기계화사단들에 대해 장개석은 독일 기계사단들처럼 잔혹한 전장으로 보내져 소모되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1941년에는 15개 사단이 각 전장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소련과 일본이 중립조약을 맺은 뒤 중소 관계가 약화되면서 소련의 군사장비는 보충되지 않았고, 소련의 기계화사단 역시 점차 역사적 명사로 되었다. 미국의 원조는 큰 것을 노린 전략적 움직임 실제로 영국은 독일의 지원이 끊긴 뒤에도 잠시나마 중국에 군사물자를 제공했지만 일본의 압력에 원조를 중단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나서야 중영 간 원조가 회복됐다. 그러나 대영제국은 이때 이미 해가 기울어 극동에 전념할 여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소련의 장비가 없어지자 미국은 국민당 정부를 지원하는 구세주가 됐고 국민당 군은 미 장비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항일전쟁 단계에서 미국이 실제로 충분한 지원을 하지 않은 데는 객관적인 이유도 있고 주관적인 이유도 있다. 한편으로 운남-미얀마 도로가 끊기자 물자 장비는 험준한 항로를 통해서만 수송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적었다. 다른 한편으론 아시아 전장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영국과 소련에 많은 장비를 보내기도 했다. 미국인은 통이 컸다. 중국의 해방전쟁 시기까지 22개 군 64개 사단이 무장할 수 있는 장비를 장개석에게 보내와 국민당 군대의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그러나 장개석은 미국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공산당에 의해 대만이란 작은 섬으로 쫓겨나 지내다가 일생을 울적하게 마감했다. 중국은 북벌전쟁 때부터 외국의 군사원조를 대대적으로 받으면서 중간에 공급처를 여러 개 바꿨다. 심지어 프랑스·벨기에·이탈리아 등도 중국에 숟가락을 얹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독일·소련·미국이 더 많이 지원했다. 왜 이런 나라들이 그렇게 호의적으로 중국을 지원했을까? 독일의 속셈은 짐작이 가는 대로 장사를 하러 온 것이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금속과 각종 원자재가 중국에 많고 거기에 무기까지 팔아 큰돈을 벌 수 있는 중국을 싫어 할리가 없는 것이다. 소련은 여러 가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일본을 견제하여 극동에서의 이익을 보장해야 하는 한편, 당시 소련은 넓은 영토가 독일군에 함락되고 원자재가 부족했기에 가까운 곳에서 필요로 하는 물자를 공급할 수 있는 나라로 중국을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은 국민정부에 원하는 게 없음에도 속내는 더 흉악했다. 미국이 내놓은 ‘임대법’은 파시스트의 침략을 받는 전 세계 국가들을 지원하는 것으로, 앞에서 이런 국가들이 육탄이 되어 주는 것이고 양쪽이 다 소모되면 그 때에 가서 그들이 나서서 수습하여 이들 국가들을 깊이 통제하겠다는 취지가 있었다. 한마디로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변화 속에 있고, 친구와 적은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판단되며 이익만이 영원한 것이다. 이들 나라가 중국에게 도움을 줬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만, 이는 거래일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현대 사회에도 약육강식의 규칙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다만 실력이 강해야 비로소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경직된 도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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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전후 국민혁명군에 군장비 제공한 국가들①
[동포투데이 철민] 1937년 8월 13일, 제2차 상해 보위전이 발발하자, 장치중(張治中) 장군의 국민당 제9집단군이 상해에 진주했다. 당시 장개석은 장치중 장군에게 2개의 독일의 기계화사인 87사단과 88사단을 지원하였다. 이어진 남경 보위전에서도 몇몇 개편 완성된 독일 기계화사가 빛을 발산하면서 중국군의 완강함을 보여주었다. 중국과 독일, 양국은 서로 다른 진영에 있었다. 그런데 왜 장개석은 독일 기계화 부대가 소유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두 나라는 또 어떻게 교역했을까? 그럼 제2차 세계대전 전후 독일의 타산을 알아본다. 국민당이 독일을 처음 접한 것은 손중산(孫中山) 때였다. 당시 혁명을 위해여 손중산은 도처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나라들에 손을 내밀었다. 당시 독일은 공산주의의 발원지로서 손문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번 인연은 성공하지 못했다. 독일은 당시 낙후한 중국을 외면했으며 손문은 어쩔 수 없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 뒤 비로소 제1차 국공합작과 소련이라는 거물이 등장하면서 손문을 후원하게 되었고, 격렬한 북벌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1924년 손중산이 사망하자 장개석은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쿠데타를 일으켜 좌익과 공산당 세력을 소탕함과 아울러 소련과 완전히 단절했다. 당시 중국은 가난했고, 전쟁 때는 어쩔 수 없이 장개석은 또 밖으로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남경정부가 직면한 국제 환경은 매우 험악하고 객관적으로도 중국과 독일은 일련의 교류를 촉진하는 것으로 양국의 교역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해야만 했다. 영국과 프랑스 역시 같은 아시아에서의 이익은 대부분 남아시아와 동남아에 있었으며, 중국에 대한 수요는 그리 높지 않다는 점을 장개석은 명심해야 했다. 한편 그 시기,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강대해졌고, 동아시아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으며, 영국·프랑스 식민지에도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일본을 안정시키고 자신의 식민이익을 지키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는 일본의 중국 침략을 방임하면서 묵인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으며, 중국을 지원하는 물자의 통로를 차단하고 될수록 일본에 아첨했다. 미국은 당시만 해도 그렇게 강하지 않았으며 유럽은 여전히 세계의 중심이었고, 후발주자인 미국은 앞사람의 눈치를 봐야 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모범을 보였고 다른 나라들도 감히 중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감히 하지 못하자 장개석의 아첨은 ‘장님’에게 던져지면서 이상적 효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다행히 독일은 그 바닥을 지켰다. 1927년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본전을 모두 잃었고, 자신의 군사력이 각종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등으로 나라 전체가 억눌리자 복수를 꿈꾸고 있었다. 독일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해 실력을 키웠다. 그중 중국에 대한 군사원조는 그 일부였다. 영국과 프랑스 등 나라의 요구대로라면 독일은 국방군을 10만 명으로 줄이고 나머지 독일 병사들은 모두 현지에서 전역해야 하며, 방위산업도 모두 전환하여 더 이상 군사 장비를 생산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장개석이 협력 요청을 하는 순간, 이는 독일의 마음에 와 닿은 거대한 군사기구로선 힘겨운 일이었지만 해 볼만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자 중국과 독일은 군사협력을 시작했다. 독일 측은 군사교관을 파견하고 장개석이 군대를 훈련시켜 많은 병사가 전역한 뒤 독일의 국방력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하고 전투력을 유지하도록 도왔다. 또 독일 장비를 대량으로 팔아 물자와 돈을 챙기고 노동자를 단련시켜 생산량을 보장하면서 부수입도 챙겼다. 장개석은 유럽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신뢰할 수 있는 군사 장비를 대량으로 확보해 자신의 통치를 공고히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독일은 이미 무릎을 꿇고 유럽의 2등 국가가 됐지만 그러나 이것이 바로 장개석이 비로소 가격을 낮추고, 최소의 대가로 최대의 이익을 얻는 방법이 되었으며, 그의 장사는 매우 잘 되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이익이 되고, 서로에게서 이익을 얻을 수 있고, 거래도 오래갔다. 독일은 1927년부터 수백 명의 군사고문을 파견해 40만 세트의 무기·장비를 지원했고, 중국의 군수공장 설립을 도왔으며 독일 무기상들과 연계해 중국 군사물자의 주요 공급국이 됐다. 중국과의 교역에 신경을 쓰는 독일은 다른 대안이 없으니 성의를 보여야 했다. 이들이 차례로 파견한 군사고문은 선발된 엘리트들로, 전임 두 단장은 중국군 지휘중추와 장교 양성제도를 각각 개량해 보병의 지휘를 원활히 하고 산하 각급 병종도 전장에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도록 했다. 3인 군사고문단의 단장인 세케트 장군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모진이 독일 ‘10만 국방군’ 개편에 착수한 것으로 군을 줄이고 전투력을 높인 경험이 있다. 이 장군은 확실히 힘이 있었다. 그는 전형적인 독일 군인에 속했다. 국민정부 군대의 각종 폐해에 대해 하나씩 해결책을 제시해 장개석에게 많은 유용한 건의를 가져다주어 진정으로 중국군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세케트 장군의 계획대로라면 국민당은 60개의 ‘조정사’와 60개의 ‘정리사’를 개편하는데, 전자는 정당한 독일군 무기사, 후자는 일부 독일군 무장을 한 부대였다. 다만 당시 국민정부의 부정부패가 횡행하고 독일도 제대로 장비를 팔 수 없어 ‘7.7사변’ 직전까지 장개석의 손에는 3개의 완전체 독일 기계화 사단과 1개의 교도총대, 그리고 공상희의 체제 내에 없는 세경 총단 밖에 없었다. 1935년 세케트 장군이 병으로 사임하자 후임자인 파켄하우젠도 국민정부의 군사산업 발전을 적극 도왔다. 독일인의 도움으로 국민당은 정식으로 승마총, 꽃 기관총, 82박격포 등을 본떠 선택적으로 병기공장을 세워 어느 정도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되었고, 상황은 곧 호전될 것 같았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생겼다. 당시 중국은 가난하여 대양과 은화를 국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으며, 대외 무역에서 다른 나라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화인 달러와 파운드화는 국민정부 스스로도 부족하고 금은과 은 같은 귀금속은 더더욱 내놓지 못했다. 그럼 중국과 독일 간 군사물자 거래는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일까? 답은 텅스텐(钨矿), 석(锡), 안티몬(锑) 등 세 가지 금속이었다. 이 세 가지 금속은 방산 분야에서 널리 쓰이지만 독일 본토에서 생산되지 않아 99%가 외국산이었다. 히틀러가 집권한 뒤 군비확충에 나서면서 이들 금속의 수요가 크게 늘었지만, 영국과 프랑스 등은 관리가 철저해 독일은 원료를 충분히 조달받을 방법이 없었다. 이 세 종류의 금속은 중국에서는 오히려 매우 흔히 볼 수 있었다. 호남, 광동 등지에서는 모두 상응하는 광물 매장량이 채굴되고 있었다. 게다가 중국은 솔직히 많이 쓰지 않았고 산업용 원자재를 군사장비와 교환하는 것을 선호했다. 독일은 전쟁에 대비해 대규모로 원료를 비축해야 했고, 중국은 물산이 풍부해 독일의 많은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중국은 금속광산을 제외한 농산물·면화·브루마 등의 물자를 돈처럼 쓸 수 있었고, 독일이 국민정부에 지원을 요청한 유일한 품목이다. 다만 장개석의 무기·장비에 대한 수요가 높아졌고 국제정세 변화, 물자수송의 지연, 영국의 봉쇄 등으로 중·독 양국 간 원자재·무기 교역이 이뤄지지 않자 국민정부가 현금·백은을 들고 독일과의 협력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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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의 차남 장위국의 생모는 누구일까
[동포투데이] 중화민국의 대통령 장개석은 장경국과 장위국 이 두 아들을 둔 가운데, 본처가 낳은 장남 장경국은 아버지를 많이 닮았지만 차남 장위국은 아버지를 닮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버지의 네명의 부인과도 닮은 곳이 전혀 없었다. 당시 장위국의 신상에 대해 여러 가지 풍설이 나돌았다. 이를 두고 장개석은 송미령조차 호기심에 그한테 추궁할 정도로 대외적으로 극력 말을 아꼈다. 당시 장개석의 대답은 부인 송미령으로 하여금 분노로 인해 가출까지 강행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장위국의 생모는 과연 누구일까? 그리고 장개석의 대답은 왜 송미령을 이렇게 화가 나도록 했을까? 사실 장위국도 줄곧 자신의 신상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고 싶어 했다. 1941년 계모 송미령과 친하게 지내던 장위국은 계모의 허락을 받아 송미령의 서재를 마음대로 드나들며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장위국은 우연하게 송미령의 서재에서 ‘아시아의 내막’이라는 책에 호기심을 갖게 되었고 인차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미국 작가 존 겐실이 쓴 이 책은 한 페이지가 한 귀퉁이로 접혀져 있었으며 장위국은 그대로 읽어 내려갔다가 그 내용에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책에는 장위국이 장개석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적혀 있었다. 장위국은 놀란 나머지 이전에 들었던 소문들을 머리에 떠올렸다. 아버지와 별로 닮지 않은 생김새로 태어난 그의 신상에 여러 가지 의혹이 있다는 것을 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장위국은 1916년 10월에 태어났다. 당시 장개석에게는 아들 둘뿐이었지만 작은 아들인 장위국은 어려서부터 떠돌아다니며 여러 곳을 전전했다. 네 살이 되자 장위국은 아버지 장개석에 의해 고향인 봉화(奉化)로 보내지기 전까지 상하이 구(邱)씨와 주(朱)씨 두 집안의 평범한 가정에서 양육됐다. 그가 장개석의 고향인 절강 봉화에 온 뒤 장개석의 본처 모복매(毛福梅)와 첩 요야성(姚冶成)이 번갈아가며 돌보던 중 요야성은 자식이 없었기에 오랫동안 장위국을 돌봐왔다. 장위국은 모복매를 ‘어머니’라고 불렀고, 요야성을 ‘모친’이라고 불렀다. 당시 장개석의 생모인 왕부인이 생존해 있었고, 봉화에 있던 가족들도 모두 장위국을 좋아하며 극진히 잘 대해줬다. 수 십 년 후 장위국은 그 옛일을 다시 들먹이면서 계구(溪口)에 살았던 그 시간을 매우 행복하고도 즐겁게 여겼다. 그러나 이런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장위국은 여덟 살 때 장개석에 의해 광주(廣州)로 가 황포군관학교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당시 장개석은 이미 진결여(陈洁如)와 결혼했기 때문에 장위국을 돌보는 사람은 진결여로 바뀌었다. 그 뒤 장위국이 11살이 되자 장개석은 송미령을 부인으로 맞아들이기 위해 모씨, 요씨와 진씨 이 세 여인 모두와 관계를 끊었다. 장개석은 진결여를 미국으로 보냈으며 장위국을 그의 신임이 두터운 오충신(吳忠信)의 집으로 보내게 되었다. 그때로부터 오충신의 부인이 장위국의 이모로 되었다. 장위국과 송미령이 처음 만난 것은 1940년이었다. 그때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장위국은 스물네 살이었고, 장개석은 둘째 아들과 송미령 두 사람의 첫 만남이 어색해질까 봐 어느 정도 걱정하였다. 하지만 장위국은 송미령을 만나자마자 아주 자연스럽고도 친절하게 영어로 ‘어머니’라고 불렀고, 서양식 예의에 따라 송미령의 볼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송미령은 젊은 시절 서양식 교육을 받았기에 장위국에 대한 첫인상도 좋았다. 두 사람은 모두 기독교를 믿었고, 이후 아주 사이좋게 지냈다. 그래도 그 해의 크리스마스 날 밤이 되자 장위국의 생모가 누구인지 궁금했던 송미령은 장개석한테 자꾸만 따지고 캐물었다. 그런데 줄곧 송미령에게 순종하고 질문이 있으면 반드시 대답하군 하던 장개석이었지만 이번에는 매우 내키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 송미령의 핍박에 아주 짜증스럽게 “묻지 마, 난 절대 말하지 않을 거야”라고 한마디로 일축하며 내뱉었다. 그러자 이에 몹시 화가 난 송미령은 크리스마스 날 밤 집을 나와서는 홀몸으로 홍콩행을 강행했다. 그녀는 장위국과 사이가 좋았기에 당연히 그의 존재 때문에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송미령이 화가 난 것은 장개석이 자기한테 속이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장개석이 직접 시간을 내 홍콩으로 가서 그녀를 찾았고, 두 사람은 곧 다시 사이가 좋아졌다. 아마 장개석도 이때 장위국의 신상을 송미령에게 알렸을 가능성이 컸다. 이후 송미령은 이 문제에 대해 더는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장위국을 예전처럼 잘 대해주었다. 장위국은 송미령의 방에서 그 ‘아시아의 내막’을 보고는 계모가 자기한테 뭔가를 암시하려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했다. 그 후부터 장위국은 생모를 찾을 타산을 했다. 장개석은 그 몇 년 동안 손중산(孫中山)을 따르면서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를 보아 장위국은 아마도 일본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장위국은 장개석의 권고에 의해 미국으로 연수를 보내진 틈을 타 일본으로 건너가 야마다 준자부로라는 사람을 찾아냈다. 이 사람은 손중산이 일본에 있을 때 손중산의 충실한 추종자였다. 그리고 장개석이 그 몇 년 동안 일본에서 생활할 때, 두 사람은 왕래가 밀접했다. 장위국은 이 사람이 긍정코 자기의 출생 내막을 알고 있으리라 믿었다. 과연 장위국의 예상대로 야마다는 그의 생모의 이름을 말해줬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내막’에 나오는 설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확신시켰다, 그랬다. 장위국은 확실히 장개석의 친아들이 아니었다. 야마도에 따르면 장위국의 생부의 이름은 대계도(戴季陶)로 국군의 원로 중 한 명이자 중량급 인물이었다. 당시 대계도는 장개석과 함께 손중산을 따라 일본으로 망명했고, 장개석과는 동향이자 동창으로 친하게 지냈으며 나중에 대계도는 장개석 휘하의 장군으로 되기도 했다. 1913년, 일본에 있던 대계도는 급병에 걸려 현지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으며 당시 그는 시게마츠 가네코라는 간호사를 알게 되었다. 그가 입원해 있는 동안 두 사람의 관계는 급속도로 뜨거워졌고, 대계도가 퇴원한 후 두 남녀는 동거하게 됐다. 하지만 당시 대계도는 일찍 결혼한 몸이었고 그의 아내 뉴유항(钮有恒)은 그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대갓집 규수였기에 대계도는 그녀를 사랑하면서 두려워했으며 한 번도 그녀를 화나게 한 적이 없었다. 본인은 한때 국군 고위층의 ‘3대 공처가’ 중 일원으로 꼽히기도 했다. 일찍 대계도는 조카와 사사로운 정을 나눈 적이 있었다. 그러던 그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크게 놀란 나머지 다리에서 뛰어내려 자살까지 하려고 했다. 다행이도 당시 그의 부하가 재빨리 그를 구해 주었으니 말이지 큰 일이 날 뻔 했다. 한편 1916년 대계도가 손중산을 따라 귀국할 때 시게마쓰 가네코는 이미 임신 3개월이었다. 하지만 당시 대계도는 감히 그녀를 데리고 귀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는 고통을 참으면서 시게마쓰 가네코를 일본에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시게마츠 가네코는 아들을 낳았다. 그녀는 야마다 준자부로에게 자기가 낳은 아이를 중국으로 데려가 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했다. 이 아이가 바로 장위국이었다. 이렇게 되자 그 몇 년 간 점점 더 아내를 두려워하고 있었던 대계도는 아내에게 이 아이의 내력을 도무지 설명해야 할 수가 없었다. 이에 대계도의 절친한 친구로서, 장개석은 그를 곤란하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 스스로 이 아이를 입양할 것을 제의하였다. 대계도는 즉석에서 동의했으며 이렇게 되어 생부가 아이의 의부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개석은 절친한 친구에 대한 약속 때문에 끝까지 진실을 말하지 않았고, 송미령이 따져 물었지만 처음에는 말하지 않았다. 장위국은 이때의 실정을 알게 되었고, 마음속으로는 장개석에 대해 몹시 감탄했다. 다른 한편 생모인 시게마츠 가네코는 장위국이 다섯 살 때 이미 세상을 떠났으며 장위국은 야마다의 말을 반신반의로 믿다가 장개석의 일기를 읽어본 결과 그것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는 확실히 장개석의 아들은 아니었지만, 장제스는 그를 자식처럼 여겼으며 ‘경문위무(经文纬武)’라는 좋은 뜻으로 장경국의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장차 형 장경국(蒋经国)에게 큰 도움이 되기를 바랐으며, 또한 큰 돈을 투입하여 장위국의 마음가짐에 따라 그를 외국에 유학 보내 훌륭한 군인으로 키우기도 했다. 그러나 장위국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장개석과 장경국은 어쩔 수 없이 그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장개석이 회의나 순시하러 나갈 때면 데리고 가는 사람은 반드시 장경국이었고 정계에서 중점적으로 양성한 사람도 장경국이었으며, ‘호구병변(湖口兵变)’을 틈타서는 장위국의 수중에 있던 병권을 빼앗기도 했다. 장위국은 이때부터 의기소침해졌고, 장경국이 죽은 후에야 사람들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장위국은 자신의 신상을 알고도 장개석처럼 대외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는 1996년에야 자기가 서술한 책에서 자신이 대계도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장위국은 ‘물방울 같은 은혜도 샘솟듯한 물량으로 갚는다’는 이치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고, 장개석이 혈연관계가 없는 아버지였지만 이미 그 친아버지가 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랑을 장위국에게 주었다는 알고 있었다. 장위국은 언제 누가 물어도 장개석의 아들이 된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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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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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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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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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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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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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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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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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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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는 한국인인가?
-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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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는 한국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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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견문 시리즈 젊은 마도로스의 수기(15) 한국인의 삶의 자세와 중국의 조선족
- ■ 김철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자세히 관찰해보면 중국인들이 “망썬머?(忙什么?)”하는 말을 잘 하는 반면 한국인들은 어디서나 “빨리 빨리”라는 말을 밥먹듯 한다는 것을 어렵잖게 보아낼 수 있다. “빨리 일어나라”, “빨리 세수하고 밥먹어”, “빨리 끝내고 한시간쯤 푹 쉬자”, 여기서 푹 쉰다는 것도 한시간 정도니 역시 쉬는 것도 빨리 쉬라는 뜻인데 여하튼 한국인들의 생활은 빨리를 떠날 수 없다. 또한 한국인들의 행동도 명실에 부합되게 빠르기 그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국인들의 생활근성을 자상히 관찰해보면 남들한테 뒤떨어지는 것을 아주 큰 수치로 여김이 분명했다. 그 실례로 스페인 라스팔마스에서 사는 한국교민들을 내세울 수 있다. 그들의 거개가 한국에서 사업을 벌이다가 망한 뒤 이민으로 온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라스팔마스로 온 뒤 그들은 동산재기의 정신으로 열심히 일하여 경쟁에서 본토사람들을 능가하고 있었는데 실로 감탄할만했다. 필자가 스페인 라스팔마스에서 만나 알게 된 이횡권, 유혁선 부부가 라스팔마스로 올 때만 해도 빚을 잔뜩 지고 거의 도망치다싶이 온터였다. 그러다보니 집은 물론 내일 먹을 빵을 살 돈마저도 없었고 집은 물론 내일 먹을 빵을 살 돈마저 쪼개써야 하는 형편이었다. 다행히도 그때 당지의 스페인 사람들은 부두의 잡부나 거리의 청소부같은 일을 꺼렸었다. 그들 부부는 천한 직업이나마 일자리는 쉽게 얻을 수 있었다. 그러자 그들은 잡부나 청소공 샅은 임시일을 맡아하는 한편 한국선박들이 자주 들이닥치는 실정에 따라 김치나 두부 같은 것을 만들어 선박에 가서 팔았는데 장사가 아주 잘되었다. 이렇게 몇년간 고생하여 돈이 모여지자 식당 하나를 세맡고 한식관을 차렸었다. 그것이 바로 “호텔강촌”의 전신인 “강촌식당”이었다. 그 뒤 그들은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트롤선 세척을 세맡아 아프리카 해상에서 어로작업을 벌였으며 몇년간의 만선기를 날린 끝에 자기의 트롤선 세척을 새로 갖추고도 4층으로 된 “호텔강촌”을 일떠세웠다. 한편 부지런히 일하는 기질은 그들 이횡권, 유혁선 부부한테서도 얼마든지 보아낼 수 있었다. 우선 이횡권씨는 호텔의 사장이고 선박회사의 보스였으며 또 한국순복음교회 라스팔마스지부의 지부장으로 일하는 몸이었건만 일단 식당으로 들어서면 요리를 날라주고 마늘을 바르고 남새를 다듬는 것과 같은 일들을 꺼리낌없이 하였으며 유혁선 여사의 요리 만들기와 김치 담그는 솜씨는 웬간한 주방장은 뺨칠 정도로 수준급이었다. 그의 주방일군들은 역시 손님이 없으면 트럼프나 고스톱을 치면서 흥얼거리는 것이 아니라 손에 일감을 떨구지 않았으며 하다 못해 유리를 닦거나 솥밑의 때를 벗기거나 하는 일로 시간을 보내군 하였다. 라스팔마스에서 이렇게 열심히 사는 이는 이횡권네 부부만이 아니었다. 자상히 살펴보면 “무궁화백화점”, “대서양상회”, “불꽃나이트클럽” 등 한국인 업체들에서도 모두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들은 삶의 시스템부터 당지의 스페인 사람들과는 근본 달랐다. 첫째, 스페인 사람들은 겉치레로 크고 호화로운 건물에서 일을 보면서 하인부터 쓰지만 한국인들은 작은 건물에서도 큰 효과를 보려 하며 될수록 자체로 모든 일을 대체했는바 구멍가게 같은 곳에서도 별의별 사업을 다 벌일 수 있었다. 둘째, 스페인 사람들은 언제나 앉은 자리에서 손님이 찾아들기를 기다리며 값도 할인해줄줄도 모르지만 한국인들은 손님이 있는 곳이면 그 어느 곳이든 찾아간다. 그 실례로 우리 선박이 그곳에 입항할 적마다 많은 한국인 업체들이 다투어 선박에 찾아와서는 물건을 예약하거나 식당으로 청하군 했는데 혹간 선박에서 부식물같은 것을 올리거나 하면 라이타나 볼펜을 선물로 주고 한끼 청해먹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또한 상점 같은 곳에 들어서면 서비스가 어찌도 좋은지 콜라나 커피같은 것을 공짜로 마음대로 마시게 하여 그걸 먹고 물건을 사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렇게 열심히 하노라니 같은 한국인 사이에도 경쟁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으며 따라서 그 곳에서 망하는 한국인들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라스팔마스에서 망하는 한국인들은 재차 미개척지인 아프리카로 진출했다. 그래서 라스팔마스의 한국인들은 “한국에서 라스팔마스로, 라스팔마스에서 아프리카로” 라는 말도 나왔는데 경쟁에서 적수였지만 누가 일단 아프리카로 간다면 다시 사업을 벌이라고 한인회에서 의연금을 모아 챙겨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가 아프리카 코트디바르(상아해안)의 아비쟝에는 라스팔마스로부터 건너온 이씨 성의 한국선식상 한명 있었다. 한국에 늙으신 모친과 아내 그리고 자식 셋까지 두고 왔다는 그는 당지의 흑인여인과 동거하면서 또 혼혈아 둘을 낳아키우고 있었다. 그토록 열심히 일했건만 자주 사업이 망해 이러구 저러구 하여 한국으로 갈 수 없었던 사나이, 그래서 그가 제일 즐겨부르는 노래가 바로 “머나먼 고향”이였다. 머나먼 남쪽하늘아래 그리운 고향 사랑하는 부모형제 이몸을 그리워 천리타향 낯선거리 헤매는 발길 한잔술에 설음을 타서 마셔도 마음은 고향하늘로 달려갑니다 … 이렇게 망하고 또 망하는 지겨운 해외생활 끝에 머리에 흰서리가 한 벌 덮인 사나이었건만 그의 신념은 변함이 없었다. 그것인즉 언젠가는 꼭 돈 많이 벌어 조상의 뼈가 묻힌 조국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인가 그는 검은 피부를 가진 애들한테 한국말과 한글을 열심히 가르치고 있었다. 그 애들 또한 그렇게도 정확하게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등의 한국말을 번지였다. 특히 그 애들이 부르는 “반달”, “바다가 육지라면”, “고향의 봄” 등 노래 중에서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란 대목을 듣노라면 옆에 있는 우리들까지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아, 얼마나 고향이 그리웠으면 저 깜둥이 자식에게까지 그런 노래를 배워주었으랴. 그렇다. 잠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이지만 언젠가는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나 소원성취하고 금의환향하겠다는 그 정신과 자세가 소중했다. 여기서 우리는 실패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 실패로 인해 붕괴되는 정신적인 실패가 더 무섭다는 철리를 터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실례로 모진 실패와 시련을 거듭하면서도 끝내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사막에 남새재배로 성공한 “사막에 피는 꽃”의 한국인 주인공인 김용복씨를 들 수 있다. 스톱, 여기까지 쓰고 나니 우리 중국 조선족들의 삶에 대한 자세를 반성해보지 않을수 없다. 집에서는 부모한테 의뢰하고 밖에서는 공짜가 생기기만을 바라는 삶의 방식, 여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위에서도 언급하다싶이 라스팔마스의 이횡권씨 부인인 유혁선 여사는 아무리 간고하고 힘든 때도 남편을 배반할 엄두도 못냈거니와 사업에서 실패한 남편이 불쌍하기만 했으며 그럴수록 남편을 도와주어 성공하도록 하고 싶었단다. 아비쟝의 이씨 사나이의 한국부인 역시 남편이 아비쟝에서 깜둥이 여인과 여차여차한다는걸 번연히 알면서도 운명에 순종하면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악착스레 살고 있다고 했다. 하다면 이에 반해 우리의 여인들가운데 남의 남자가 남편보다 더 우월해보이고 혹간 남편이 사업에서 망하면 그런 남편한체 아이들까지 떠맡기고 도망가는 여인들이 수두룩하다. 이는 머나먼 한국여인들을 말고라도 우리의 지난 세기 60 ㅡ 70연대에도 거의 볼 수 없었던 상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기에 오늘 두번째 아이의 출생을 거부하는 남편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그들의 말을 빈다면 자기의 여편네도 건사하기 어려운 세월에 두번째 아이를 어떻게 낳느냐는 것이다. 하다면 조선족의 인구장성 먼저 조선족의 자질제고가 급선무라는 필자의 주견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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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견문 시리즈 젊은 마도로스의 수기(15) 한국인의 삶의 자세와 중국의 조선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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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날 아버지한테서 들은 얘기들(13)
- ■ 김철균 지금의 분열로 두개 나라가 된 한반도의 현실에 대해 구태어 길게 언급할 필요가 없겠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듣고 또 나름대로 분석하고 있으니 말이다. 언급하고 싶은 것은 지금의 한반도 현실 역시 다 우리 민족이 약하고 힘이 없는데다 강대국들의 욕심과 아귀다툼으로 인한 비극이란 것을 강하게 언급하고 싶다. 1945년 8월 15일 한반도는 일본천황 히로히토의 항복성명으로 광복이 됐다. 헌데 광복이란 얻어진 것이지 우리 민족이 자체의 힘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에 의해 남한테 빼앗겼던 집이나 물건을 되찾게 되면 그 사람의 말을 잘 듣기 마련이다. 이는 사람으로 생겨서의 이치이다.” 아버지의 말씀이었다. 지리적 위치를 놓고 볼 때 한반도는 중국대륙과 러시아 극동지구와 붙어있고 미국과는 세계에서 가장 큰 해양인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있다. 그러니 제 2 차 세계대전의 종말 당시 미국의 입장으로서는 모든 방면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장악하고 발을 붙여야 할 지역이 바로 한반도였다. 하지만 제 2 차 세계대전의 종말을 앞두고 미국 혼자의 힘으로 일본을 굴복시키자면 막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그 당시 미국은 또 다른 강대국으로 떠오른 소련의 힘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1945년 7월 26일에 있은 포츠담회담에서 미국은 소련의 대일작전을 적극 요청하기까지에 이르렀다. 동시에 대일작전에 대한 스탈린의 동의를 얻어낸 후 미국대통령 투루먼은 돌이킬 수 없는 한가지 큰 과오를 저질렀음을 인차 깨달았다. 바로 이 때 투루먼은 본국으로부터 “아기는 무사히 태어났다”란 전보를 받게 됐는데 그 “아기”란 바로 원자폭탄이었다. 워낙 그 “아기” 즉 원자폭탄이 좀만 더 일찍 태어났어도 미국은 근본 소련의 힘이 필요없이 혼자서도 일본을 굴복시킨 뒤 보다 많은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1945년 8월 6일,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에 첫 원자폭탄을 투하한 3일 뒤인 8월 8일 소련홍군은 도합 157만 7700여명의 막강한 병력으로 운집, 세갈래로 나뉘여 만주와 조선 지역으로 진출하며 파죽지세로 일본군에 대한 최후의 공격을 들이댔다. 소련홍군의 공세는 그해 4월 독일 본토인 베를린을 진격할 때의 속도를 초과하였다. 이는 미국도 미처 예상치 못하던 일이었다. 미국은 조선 전체를 소련홍군한테 넘겨줄 수는 없었다. 조선 전체가 소련의 지배로 넘어가면 미국은 아시아의 극동지구에서 발붙일 곳이 없게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소련홍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방법이란 한반도의 중간지역에 경계선을 긋는 것이었는데 마침 그 중간지역에 38도선이 지난 것이 있었고 미국은 이 38선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이 조선 남과 북에서 일본군의 투항을 접수하자고 제안하기에 이르렀으며 마침 소련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당시 소련이 왜 미국의 이 제안을 받아들였는지는 알바가 없다. 다만 2 차 대전에서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군사적 지원을 받아온 소련으로서는 미국의 제안을 거절할 적당한 이유가 없었던 모양이었으나 이는 다만 추측에 불과하다. 이렇게 생겨난 38선 - 그 38선을 사이에 두고 남과 북은 각각 미국과 소련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고 또 그것을 계기로 여러 가지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조선은 힘이 없었다. 소련군이 ‘해방자’란 명목으로 북에 진출할 때와 미군이 ‘점령군’이란 명목으로 등륙할 때에도 모두 구경밖에 할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약소국가와 약소 민족의 운명이었다. 그리고 북쪽은 소련을 등에 업었고 남쪽은 미군을 등에 업었으니 ‘통일’이란 구호는 같았으나 목소리의 내용은 제각각이었다. 그리고 통일과는 점점 멀어져가는 정치적 이념속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말대로라면 2차대전의 종말 당시 통일된 한반도가 탄생할 기회가 없은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북측의 뜻대로라면 소련이 38도선을 경계로 하자는 미국의 제안을 듣지 않고, 또한 머나먼 오키나와에 있는 미군이 “남조선”에 발붙이기 전에 한반도 전체를 점령했더라면 그때에 통일된 조선이 탄생했을 것이고 남측의 뜻대로라면 미국이 보다 일찍 원자폭탄을 만들어 소련의 힘을 요청하지 않고 혼자의 힘으로 일본을 굴복시켰더라면 역시 미국의 지배하에 있는 통일된 한국이 탄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약소국가인 한반도는 그러한 선택권은 물론이고 그러한 요구를 미국 혹은 소련에 제기할 권리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한편 중국은 달랐다. 한시기 중국도 남북으로 분단될 위기가 있은 적이 있었다. 즉 1949년 당시 미국과의 협의를 거친 스탈린이 모택동한테 장강이북을 차지하고 장강이남을 장개석한테 양보하라고 제의했다고 한다. 하지만 모택동은 스탈린의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 모택동한테는 힘이 있었던 것이다. 전쟁속에서 쟁쟁 소리나게 단련된 600만명의 군대가 있었고 공산당의 세뇌교육을 받은 2억만여명의 인민들이 있었으니 스탈린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고도 남음이 있었다. 반대로 한반도는 광복조차 외세에 의해 이룩된 것이었고 소위 한국독립군, 항일빨치산과 조선의용군 등 민족의 군대가 있었지만 그들은 조선에서 일본군의 투항을 접수할 권리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아버지의 얘기처럼 남들의 신세로 광복을 맞았으니 남의 말을 고분고분 들어야 했다. 그렇게 생겨난 38선, 이는 결국 1950년의 6.25동난을 초래했고 전반 7000여만의 겨레가 지금까지 분단의 설음을 안고 사는 고통속에 몰아넣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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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날 아버지한테서 들은 얘기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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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9)
- ■ 김철균 결혼 뒤 남편은 자기의 주견이 세울 때도 있었지만 많은 방면에서 아내인 순자가 하자는대로 따라주었다. 그것은 자기한테 바친 아내의 자아희생적인 선택에 대한 “보답”이기도 했거니와 가정생활을 포함한 모든 생활에서 아내의 뜻과 주장이 그만큼 정확하고 “진리”였기 때문이었다. 우선 순자는 민족단결을 도모하는 측면에서 각별한 신경을 기울였다. 특히 당시는 연변조선족자치구가 갓 창립된만큼 민족단결을 각별히 강조해야 할 시기이기도 했다. 연변은 조선족과 한족을 비롯하여 만족, 회족, 몽고족 등 여러 민족이 어울려 사는 고장이다. 이렇게 여러 민족이 함께 사는 고장인만큼 여러 민족이 친 형제처럼 화목해야 한다. 만약 여러 민족 사이에 단합이 잘 되지 않고 서로 흉보고 물어뜯고 하는 현상이 비일비재로 나타난다면 외래침략자가 쳐들어오지 않아도 내부적으로 분열이 생겨 붕괴되기가 쉽다. 나라에서 연변에 자치권리를 부여한 것은 바로 여러 민족이 손잡고 공동으로 잘 살라는 것이지 결코 조선족들만이 특수화를 부리라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우리 연변지구에서는 반드시 조선족은 한족을 떠날 수 없고 한족 또한 조선족을 떠날 수 없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한 순자는 한족을 비롯한 기타 소수민족과의 민족단결을 위한 일련의 언행지침을 제정하였다. 절대적은 아니지만 한족들은 너그럽고 순박한 반면 위생지키는 면에서 좀 지저분하고도 부족함이 노출되고 있다. 우리 조선족 또한 절대적은 아니지만 친절하고 활발한 반면 사람과 사람사이, 가정과 가정사이에서 남의 험담을 늘여놓는 열근성이 노출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조선족과 한족들 사이에서 서로 상대방의 우점을 따라배우고 자기의 열근성을 극복하면서 손을 잡아야 민족단결을 운운할 수 있고 자기 민족한테 30%의 배려를 쏟았다면 한족한테는 70% 혹은 그 이상의 배려를 쏟아야 한족들의 긍정과 신뢰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한족들을 위해 많이 봉사하고 그들의 신뢰를 받는 것 역시 결국은 우리 조선족을 위하는 사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순자는 민족단결이란 쉽게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민족단결의 성과도 나무위의 배가 익어 절로 떨어지기를 기다리듯이 그냥 자연스럽게 이룩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많은 면에서 한족들을 위해 봉사를 해주었는데 실례로 조선족가정과 한족가정에서 같은 일에 봉착하였다면 될수록 한족집부터 도와주군 했다. 여기에 한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순자네 이웃에는 성이 진씨인 한족집이 있었다. 어느 날 이집 주인 진씨가 마당을 쓸려고 문을 나섰는데 벌써 누가 말끔하게 쓸어놓은 것이 아닌가? 그래서 진씨는 한뉘 자기의 몸도 가꿀줄 모르는 마누라가 마당을 다 쓸다니 해가 서쪽에 뜰 일이라고 희한해했다. 그리고 그채로 집에 들어오면서 아직도 잠자리에 누워있는 마누라를 보며 “오래 살다보니 마누라가 마당을 쓰는 것을 다 본다”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마누라가 잠꼬대를 하듯 “내가 왜 당신을 두고 마당을 쓸어?!”하고 한마디 하고는 홱 돌아눕는 것이었다. 그럼 그렇지. 아직도 잠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마누라가 마당을 쓸 일은 없지. 그렇다면 과연 누가 몰래 남의 마당까지 쓸어놓았단 말인가?… 다음날 아침, 2-3일에 한번씩 아침시장에 다녀오는 습관이 있는 진씨는 그날 아침도 하남시장에 나가 콩물과 기름튀기떡을 사들고 집마당에 들어서다가 이웃집 김선생네 색시가 자기 집 마당을 쓸어주는 것을 보고 흠칫 놀랐다. “아이유 색시, 색시가 우리 집 마당을 다 쓸어주다니 웬일이유? 나는 또 게을러빠진 우리 마누라가 마당을 쓸었다 하고 칭찬까지 해줄번 했는데…” “아주버님, 어디 아침장마당에 다녀오는 길이세요? 아침에 우리 집을 마당을 쓸겸 먼저 아주버님댁네 마당부터 쓸었어요.” “그래도 그렇지. 우리 집 마누라는 아직 꿈속에서 깨여난 것도 같지 않수다 허허허” “괜찮아요. 이웃집 마당이 깨끗해야 우리 집 마당도 깨끗하고 온 동네가 깨끗할 것이 아니예요?!” 그러자 진씨는 “당신네 조선족들은 정말 깨끗하여 항상 위생모범우다. 정말 깨끗해…”라고 하며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순자는 한족가정에 환자가 생겼을 때도 그러했고 한족집 가정에 반찬이 떨어졌을 때도 그러했으며 하다 못해 조선족애와 한족애가 다툼질을 하거나 싸울 때도 먼저 조선족애를 교육하고 나중에 한족애한테 타일러주군 했다. 이를 두고 한시기 많은 조선족들은 이해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순자가 한 것이 옳다는 것이 증명이 되었다. 많은 한족들이 조선족들을 우러러 보게 되었고 조선족가정에 변이라도 생기면 적극적으로 도움의 손길을 보내오기도 했다. 한편 순자는 남의 마당을 쓸고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갖다던지기도 하였는가 하면 위생이 좀 불결한 집은 집안청결까지 도와주면서 개인과 가정 그리고 동네와 거리의 위생을 잘 지킬데 관한 선전도 잘 하였다. 그래서인가 일단 아침만 되면 순자가 동원하지 않아도 동네사람들은 스스로 비자루를 들고 위생청결에 떨쳐나서군 하였으며 순자네가 사는 동네는 연길시의 그 어느 동네에 비해서도 위생청결이 잘되여 늘 가두판사처의 표창을 받군 하였다. 그러자 거민위원회에서 선진일군을 선거하거나 소조의 조장을 선거할 때면 모두들 한결같이 순자를 선거하였는데 거기에는 한족주민들이 거의 과반수를 차지하군 하였다. 그리고 1953년말 순자네가 연변위생학교 사업의 수요로 집을 하남가로부터 신흥가로 이사할 때 많은 사람들이 순자와 갈라지기 아쉬워하며 눈물까지 흘렸다. 그중에도 한족로인들과 한족아낙네들이 적지 않았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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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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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18) 루브르궁
- 루브르궁의 자료 소속대륙: 유럽, 소속국가: 프랑스, 지점: 파리의 세느강변 함의: 인류고대예술진품을 대량 수집한 박물관임 루브르궁(卢浮宫)은 프랑스의 파리 세느강 오른쪽에 위치, 1204년에 최초로 지어졌는데 최기에는 하나의 성곽에 불과했다가 후에 재건을 거쳐 궁전으로 됐으며 지금은 세계에서 이름난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루브르궁의 총체 건물은 “U”자형으로 부지면적이 18만평방미터에 달하는데 정교한 건축예술로 하여 사람들한테 고풍스러우면서도 청신한 감을 주며 장엄하고도 숙연한 감을 주기도 한다. 루브르궁에는 대량의 인류의 고대예술진품들이 소장되여 있어 건축과 예술의 완미한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그리하여 “인류 문명발전의 총색인”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루브르궁의 박물관 목전 루브르궁에는 세계 각국으로부터 가져온 도합 40여만건의 예술진품이 소장되어 있다. 박물관은 또한 나라 및 품종에 따라 분류되어 진열되어 있다. 예하면 동방예술관, 고대애급예술관 고대그리스ㅡ고대로마 예술관, 진주보석관, 그림예술관 및 조각예술관 등으로 진여되었다. 그 중 고대그리스와 고대 로마예술관이 가장 먼저 세워졌으며 고대애급예술관이 가장 특색있는 진품들로 진열되었고 그림예술관은 품종이 가장 많은 바 35개 전람청에 2200여폭의 그림진품이 소장되어 있다. 루브르궁의 세가지 보물 루브르궁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루브르궁의 세가지 보물”로서 즉 “모나리자”, “승리의 녀신”과 “미로의 비너스” 등이다. 그 중 “모나리자”의 그림은 그 신비한 미소로 일찍 세계에 알려졌다. 그리고 “승리의 녀신”은 돌우에 세워진 여신의 조각으로 비록 머리부분과 두팔이 없어졌지만 사람들이 보는 여신조각은 의연히 가장 완미한것이다. “미로의 비너스”는 기원전 2세기 말에 창작된 것으로 조각이 단정하고도 자연스러웠으며 신체선이 우아하고도 아름답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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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18) 루브르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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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묘한 세계대백과(18) 천태만상의 구름
- 하늘의 구름은 장난기가 심한 “녀석”으로 하냥 천태만상의 변화를 일으키기 좋아하는 “성미”를 갖고 있다. 구름은 어떤 때는 얇다란 면사포 모양을 하다가도 어떤 때는 두텁고도 무겁게 전반 하늘을 뒤덮기도 한다. 대낮의 구름은 깨끗한 깃털 같다가도 아침과 저녁이면 붉게 물들기도 한다. 그럼 구름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가? 대자연을 보면 하천과 호수 및 바다와 토양의 수분 등이 끝임없이 증발해 하늘로 올라간다. 이런 수증기들은 일정한 고도로 올라간 후 공기 중의 흑먼지에 붙으면서 갈수록 많아지다가 나중에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구름으로 된다. 그리고 어떤 지방엔 수증기가 많고 또 어떤 수증기는 높게 올라가고 어떤 수증기는 낮게 올라감에 따라 구름형태도 부동하게 형성된다. 또한 일출 때와 일락 때면 태양빛이 비춰주면서 그 구름들은 아름다운 채색노을로 되기도 한다. 대기 중에서 뭉쳐진 작은 얼음 입자들은 쉽게 소실되지 않는바 물처럼 쉽게 증발하는 것도 아니다. 지면으로부터 더 높은 고공일수록 풍력도 더욱 강해지는바 그 곳에서의 구름이 일단 얼음덩어리로 되면 그것이 쉽게 소실되지 않으며 그것이 강풍에 의해 밀려가고 밀려오고 하는데 높은 하늘의 구름떼들은 바로 이렇게 형성된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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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묘한 세계대백과(18) 천태만상의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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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견문시리즈 젊은 마도로스의 수기(14)
- ■ 김철균 (첫 부분) 요즘 들어 보도매체와 여성단체 및 전반 중국의 동포사회가 조선족인구의 마이너스장성을 두고 깊은 우려를 표시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 우려의 내용들을 종합해보면 “농촌에서는 어린이들의 생일떡을 먹어보기가 힘들다”, “학생수의 감소로 조선족학교가 문을 닫고 있다”, “이제 수십년만 지나면 연변조선족자치주란 이름도 명색일뿐일 것이다”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조선족인구보존을 위한 해결책이 하루속히 나와야 한다고 보면서 한편 우리 조선족의 현재의 삶의 환경에서 인구감소에 대한 우려보다도 조선족인구의 자질제고, 생존공간의 마련 및 삶의 자세를 바로잡아 주는 것이 선차적인 과업이 아니겠는가 하는 견해도 피로하고 싶다. 툭 까놓고 말하자면 자꾸만 아이를 낳으라고만 선동할 것이 아니라 조선족으로 하여금 자존, 자립, 자강의 정신을 키우게 한 다음 인구장성에 관심을 돌렸으면 하는 마음이다. 왜냐하면 중국조선족이 멀리는 서양인, 가까운데는 동족인 한국인과 본토의 한족들에 비해 확실히 생존력 차이가 존재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 아래에 한국 본토와 세계 여러 곳에 널려있는 한국인들의 생활이야기를 통해 우리 자체의 삶의 배경을 검토해보기로 하자. 한국인들한테 주어진 삶의 배경 주지하다싶이 36년간의 일제통치시대의 뒤를 이어 지난 세기 50연대초기의 “6.25”전쟁은 갓 독립된 대한민국땅으로 하여금 쑥대밭이 되게 했다. 페허로 된 공장건물과 황폐해진 전야, 거기에 수백만을 헤아리는 이산가족과 부모를 잃은 고아들, 전쟁의 포성은 멎었지만 그 후유증은 오래갔다. 사람들은 분분히 살길을 찾아 정든 고향을 떠났고 복지라고 모여든 곳이 바로 서울이었다. 부푼 가슴을 안고 서울을 찾아왔건만 서울은 역시 그들이 바라던 “천국”은 아니었다. 인구과잉으로 인한 공급의 부족과 실업율의 급상승, 성행하는 범죄활동과 매음업, 모든 것은 정부의 커다란 부담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하여 후에 모든 매스컴들의 추적화제로 됐지만 당시의 정부는 그 위기를 모면하려고 유럽 나라들을 중심으로 세계 각국에 “유아수출”을 시작, 그것이 바로 한국이 일으킨 이른바 첫 “산업혁명”이었다. 그 목적인즉 한 세대의 대한민국 아동들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는 중국에 사는 우리들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짐승도 새끼를 고와한다는데 천하의 어머니들의 마음이란 다 같은 법이라 어느 여인인들 자기의 살점과 같은 자식을 외국에 팔기를 원했으랴. 하지만 굶은채 드러누워있는 시부모님과 노무시장에 갔다가 한숨 쉬며 돌아온 남편, 하여 부득불 수많은 여인들은 어머니로서는 천하에서 제일 독한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끼고 있어봤자 굶어죽을 것이 번연한 판에 외국에라도 보내면 어린 것도 살고 자식을 판 외화로 시부모한테 보리밥이라도 대접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연고로 해서 30년이 지난 뒤 한국에는 그 때의 생활을 소재로 한 영화들도 적지 않게 나왔다. 필자가 본 “수잔”이란 영화가 바로 그런 부류에 속하는 스토리었다. 그 줄거리를 간추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지난 1960연대 초기 한국의 한 농촌에는 정아라고 부르는 한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가정에는 부모외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공부하는 두 오빠에 젖을 먹는 어린 남동생을 두고 있었다. 가정상황이 빈곤하기를 말이 아니어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병으로 드러누워있고 두 오빠 또한 학비를 대지 못하여 퇴학맞을 위기가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굶기를 하루 세끼 밥먹듯하고 병마는 그칠 사이가 없고… 바로 이렇 상황에서 어머니는 독한 마음을 먹고 오스트리아의 한 젊은 부부한테 정아를 입양보낸다. 쌀 두가마니를 살 수 있는 값으로 외화를 받고 말이다. 이렇게 오스트리아의 젊은 부부의 딸이 된 정아는 이름을 “수잔”으로 바뀌었고 한동안 이들 부부의 귀여움을 받으며 행복하게 자란다. 그러다가 이들 부부한테도 아들애가 생긴다. 아들애가 생기자 부부는 더는 수잔을 귀여워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때로운 미개한 동양인종자라고 기시도 한다. 그러다가 수잔은 점점 크면서 자기의 모습이 그들 서양인과는 다르며 출생국가도 머나먼 한국이란 것을 알게 됐고 자기를 버린 부모와 낙후한 한국을 저주하기도 한다. 약 20년뒤 성개방이 일찍 된 유럽, 바로 수잔의 남동생이 자기의 누나를 좋아하면서 그녀와 성관계를 발생한다. 그러나 그 뒤 수잔이 남동생과의 결혼을 결심하자 그 남동생은 “널 좋아한 건 잠시뿐이고 너같은 동양인과 절대 결혼은 할 수 없다”고 등을 돌렸고 서양인 부부 역시 수잔이 결혼을 거들자 더는 집에 둘 수 없다면서 이젠 독립하라고 집에서 내몬다. 집에서 나온 수잔은 얼마 후 자기가 임신했음을 알게 되고 빈민구의 어느 한 찌그러가는 방에서 아들애를 출산한다. 그 뒤 어릴 때 서양인 부모한테서 배운 피아노의 연주로 어린 아들애를 돌보며 어렵게 살아가던 중 수잔은 오스트리아주재 한국대사관 일군을 알게 되고 그를 통해 자기가 입양될 때의 한국의 사정도 듣게 되었으며 “아리랑”이란 노래도 배우게 된다. 또한 한국대사관을 통해 오랜 수소문 끝에 한국에서 살고 있는 친 부모까지 찾게 되며 얼마 후 김포공항을 통해 한국행을 하게 된다. 한편 김포공항에서 딸과의 극적인 상봉을 한 정아의 엄마는 피부색은 한국인이 분명하나 한국말이라고는 한마디도 모르는 딸을 두고, 또 딸이 낳은 혼혈남아를 보면서 넉두리를 하며 통곡한다… 이 영화를 통해서도 우리는 그 때 한국사회의 생존환경을 한 측면이나마 알 수 있다. 그 후 두번째로 되는 한국의 산업혁명이라면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노무송출이라 할수 있었다. 주지하다 싶이 인구가 많고 경제가 발달하지 못한 한국으로서는 정부적 차원으로부터 출발하여 잉여로력의 눈길을 해외에 돌리고 세계시장을 개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여 독일의 노천탄광과 리비아의 관개수로건설을 비롯한 해외건설과 외적송출선 선원 등 수많은 잉여로력을 외국에 송출하여 국내부담을 줄이는 한편 외화를 벌어들이도록 했다. 특히 1960년대까지도 한국에서는 배를 타는 직업이 매우 인기가 높았는바 당시의 선원인수가 무려 70만명에 달했으며 마도로스라 하면 돈도 많고 아가씨들도 줄쳐서 따랐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한국에는 마도로스에 대한 노래가 많이 유행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잘 있거라 부산항구”, “이별의 인천항구”, “원양개척가”, “아메리칸 마도로스” 등이 있는데 여기서 “원양개척가”의 가사만 읽어봐도 우리는 기세높이 바다로 진출하는 그 때의 기상을 상상해볼 수 있는 것이다. 사나이몸 태어나서 할 일도 많지만너와 나 원양개척의 사명을 받았다폭풍우 훈련속에 맺어진 동지애수평선에 해가 뜨고 해가 질 때면부모형제 나를 믿어 성원을 보낸다 … 이렇듯 고생과 역경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계를 정복하려는 정신이 있었기에 후일 한국인들은 아주 빠른 시일내에 무지몽매하던 한국땅에 선진적인 물질문화의 뿌리가 내릴 수 있게 했던 것이다. 그 실례로는 낡은 흔적을 가시기 위한 새마을운동과 세인을 놀래웠던 8.8올림픽을 들 수 있으며 또한 1997년부터 있은 아시아금융위기에 휘말려들어갔어도 재빨리 헤어나와 2002년 월드컵 주최국의 하나로까지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이러한 한국인들에 비해 중국 조선족을 반추해본다면 한국이 가장 간고할 때 우리는 잘 살지는 못해도 나라의 덕분에 땅을 분여받을 수 있었고 나이가 차면 직장에 들어갈 수 있었으며 여하튼 큰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먹고 살 수는 있었던 것이다. 이는 우리의 경쟁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갑자기 시장경제체제로 진입하니 남한테 먹히우고 갈팡질팡하는 것도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보아진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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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견문시리즈 젊은 마도로스의 수기(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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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8)
- ■ 김철균 순자네가 연길에 이주한 뒤 얼마 안되어 세상에는 많은 변화들이 일어났다. 1950년 4월,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은 나루배에 대포와 기타 중무기들을 싣고 국민당해군의 함포속을 뚫으며 11마일(33.5킬로미터)이 되는 경주해협을 강행도하하여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섬 해남도를 해방하였다. 그리고 그해 6월 25일에는 반도에서 남북사이의 내전이 발발하였다. 전쟁초기 북측인민군대는 3일만인 6월 28일 한국의 수도 서울을 함락하였다. 그 뒤 인민군은 파죽지세로 남진을 계속했다. 그 진격의 선두에는 중국인민해방군 출신장병 6만 5000명이 있었다. 헌데 조선의 전황은 잠시 이상적이 되지 못했다. 9월 15일,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가 7만여명의 병력과 260여척의 함정을 지휘하여 반도 서해안의 인천에 상육했다. 그 때로부터 전황은 역전되었다. 9월 28일, 인민군은 서울서쪽 인천쪽으로 밀려드는 한국군과 유엔군을 연희고지에서 결사적으로 막으며 결사전을 벌였으나 역량대비가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었기에 부득불 3개월간 장악하고 있던 서울을 어쩔 수 없이 내주게 되었다. 한편 한국군과 유엔군은 반도의 중간을 뭉텅 잘라 낙동강까지 진격했던 인민군부대들이 포위망에 들게 되었다. 전쟁형세는 인민군에 몹시 불리하게 전이되었으며 드디어 10월 1일 한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넘으면서 10월 19일 북측의 수도 평양이 함락됐고 얼마 안되어 한국군과 유엔군은 압록강변까지 다달았다. 바로 이 관두에 중국의 모택동은 “항미원조 보가위국”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중국의 중국군을 반도전선에 파견했다. 그해 10월 25일, 출국후 중국군의 첫 작전이 개시, 미기병사단에 대한 지원군의 장진호 포위섬멸전을 계기로 전황은 다시 역전되기 시작했다. 한국군과 미군은 중국군의 기동성이 강한 운동전과 포위섬멸전에 말려들어 38선 이남까지 후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후퇴중 미8군 사령관 워커장군이 차사고로 죽었고 유엔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 이렇듯 반도에서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계속되는 긴장한 나날에도 중앙정부는 연변의 조선족들에게 자치권리를 부여하는 민족정책을 실행했다. 1952년 9월 3일, 연변조선족자치구(창립당시에는 자치구로 명명했음) 창립대회가 연길 서광장에서 성황리에 열리었다. 그날 조선족을 포함한 연변의 여러 민족 인민들은 산뜻한 명절옷차림을 하고 거리에 떨쳐나섰다. 세상에 둘도 없는 민족자치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에루와 어절씨구 좋구나 좋네/ 장백산도 노래하고 해란강도 춤을 추네// 에루와 어절씨구 장고를 울리세/ 연변조선족자치구(주) 세웠네… 춤군들 속에는 순자도 있었다. 그날 순자는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공산당에 대한 감격을 금치 못하였다. 아, 얼마나 위대하고 영명한 공산당인가? 일제는 조선 전체를 집어삼키고 중국까지 침략하였으며 또 중국에 쳐들어와서까지 재중조선인들이 조선말을 하지 못하게 억압하였지만 중국공산당은 재중조선인들한테 나라의 주인으로 중국조선족으로 만들어주면서 조선말과 조선글을 마음대로 쓸 수 있게 하고 있을뿐더러 이제는 그것도 모자라 지방자치권리까지 부여하는 것이 아닌가! 이는 해방전 일제의 노화교육을 받았고 근로봉사대에 끌려가 전염병에 시달리며 곤욕을 치르던 순자한테도 그렇고 그제날 의지가지 없는 고아를 공부시켜 나라의 인재로 중등전문학교의 교단에 서게 한 용환이한테 있어서도 더욱 크나큰 감격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순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기도 했다. “연변조선족자치구(주)라고 해서 조선족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한족 등 여러 민족이 더불어 살고 있다. 우리의 자치구(주)가 화목하고도 무궁하게 발전장대해지자면 여러 민족과의 단결을 잘 도모해야 한다. 그렇다면 조선족은 한족과 손을 잘 잡아야 하고 한족 또한 조선족과 손을 잘 잡아야 한다. 즉 연변이란 지역사회에서 조선족은 한족을 떠날 수 없고 한족 또한 조선족을 떠날 수 없도록 똘똘 뭉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사회를 만들자면 조선족인 우리가 먼저 한족들한테 손을 내밀면서 그들을 돕고 아껴주고 사랑해줘야 한다…” “자기 민족한테 30%의 배려를 쏟았다면 한족한테는 70% 혹은 그 이상의 배려를 쏟아야 한족들의 긍정과 신뢰를 받을 수 있다. 이렇게 되어야 연변의 민족단결사업은 새로운 차원으로 거듭 발전할 수 있다.” 자치구(주)가 창립되던 날 저녁이 되어 순자가 남편한테 자기의 생각을 털어놓자 남편도 참 좋은 생각을 하였다면서 칭찬해 주었다. (다음기 계속) 주: 본문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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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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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묘한 세계대백과(17) 성미가 괴벽한 바람
- 바람의 성격은 말 그대로 괴벽하여 어떤 때는 미풍처럼 살살 얼굴을 스쳐 지나가다가도 어떤 때는 조폭하게 광풍을 몰아치며 멈추지도 않는다. 바람은 공기의 유동으로 형성되는 것으로서 우리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일종 우리가 볼 수 있을뿐만 아니라 강대한 살상력을 갖고 있는 바람이 있는데 그것인즉 용권풍(휘오리바람? 선풍?)이다. 용권풍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흡진기처럼 그것이 육지를 지날 때면 흔히 도시를 석권하면서 가옥을 훼멸시키고 전주대를 잘라버리는가 하면 심지어 사람까지 공중으로 휘말아올리기도 한다. 이 바람은 또한 사람을 공중으로 휘말아올렸다가 안전하게 지면에 돌려보내는가 하면 어떤 경우에는 가정의 찬장을 이 곳에서 저 곳으로 하나의 손상도 없이 갖다놓기도 한다……용권풍은 이렇게 괴벽한 강선풍을 일으키는 바람의 일종이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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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묘한 세계대백과(17) 성미가 괴벽한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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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17)
- 웨스트민스터궁전 서류 소속대륙: 유럽, 소속국가: 영국, 지점: 런던 서구의 중앙지역 함의: 세계상에서 가장 큰 고트식 건축물임 웨스트민스터궁전은 11세기에 지어졌는데 템즈강변에 우뚝 솟아있으며 영국의 최고의 입법기구인 국회의 상의원과 하의원의 소재지로서 국회청사로도 불리우고 있다. 이 건물은 세계에서 가장 큰 고트식 건축물로서 영국의 가장 저명한 궁전 중 하나이며 독특한 문화적 가치가 있는바 영국의 가장 대표성적인 풍경을 자랑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궁전은 부지면적이 아주 큰 바 대청만 해도 14개가 있고 400여개의 방이 있으며 남북으로 각각 상의원과 하의원으로 갈라져 있다. 상의원과 하의원 웨스트민스터궁전은 중앙대청을 중심으로 남북 두개 부분으로 나누는데 남쪽 부분이 상의원의 귀족원으로 붉은색을 위주로 색상포치가 되였다. 다음 북쪽 부문은 하의원 즉 중의원으로 록색을 색상표지로 하고있다. 그 중 하의원 정문의 량측에는 각각 2명의 영국수상의 조각상이 세워져있는데 한쪽의 조각상은 제 1 차 세계대전시기의 수상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劳合·乔治)고 다른 한쪽의 조각상은 제 2 차 세계대전시기의 수상 윈스턴(温斯顿)처칠이다. 웨스트민스터궁전의 다기능대청1834년의 한차례 큰 화재로 웨스트민스터궁전의 대부분 건물이 재더미가 되고 유독 웨스트민스터대청만이 보존돼 남게 되었다. 이 대청은 11세기에 지어졌는데 영국의 진정한 역사고적이라고 할 수 있다. 대청은 길이가 60여미터이고 높이가 27.5미터로 당시 국왕이 성대한 연회를 베풀던 장소로 쓰인 외 일찍 정치범 거두들을 심판하는 법정으로 쓰이기도 했다. 20세기 이래 이 대청은 또 국장(国葬)을 치르던 장소로 쓰이기도 했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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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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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날 아버지한테서 들은 얘기들(12) 한반도, 한반도의 고대역사
- ■ 김철균 아버지는 반문맹이었다. 지난 세기 30연대초(?)엔가 조선에서 건너온 독립활동가들이 세운 야학에서 한글 정도를 좀 익혔을 따름이지 거의 문맹이나 다름이 없었다. 헌데 아버지는 이야기를 참 재미있게 잘 엮었다. 아마 머리가 좋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제날 아버지가 하는 얘기들을 듣노라니 참 재밋다는 생각뿐이었지만 지금 와서 곰곰히 분석해보면 어떤 얘기들은 진짜로 일리가 있었고 역사적으로도 맞아떨어지는 것들이었다. 특히 한반도 역사에 대해서 그랬다. 아버지가 보는 한반도는 가장 아름답고도 가장 훌륭한 곳에서 가장 살기 힘들 수밖에 없는 곳이 한반도라 했다. 가장 아름답고도 가장 훌륭한 곳이란 것은 이른바 산좋고 물맑으며 사계절이 분명하고도 3면이 바다여서 어업자원과 지하자원이 아주 풍부하다는 뜻에서였다. 그리고 가장 살기 힘들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은 지리적 위치상 약소민족으로서 대국의 변두리에서 붙어 살다보니 알게 모르게 눈치를 봐가며 처신할 때가 자주 있고 본의 아니게 자존심을 꺾을 때가 있다는 뜻이었다. 지도를 봐도 알다 싶이 한반도는 중국대륙의 동북쪽의 한쪽 변두리에 붙어 있으며 일본과는 바다를 사이두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왜구(현재의 일본)가 늘 조선을 건드릴까 했고 그럴 때마다 조선은 중국의 도움을 크게 적게 받군 했다. 왜구의 욕심은 단지 작은 반도에 불과한 조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중국대륙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고 중국 또한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도 조선을 지원했고 또한 여러모로 보호해주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조선은 알게 모르게 중국의 “속국”처럼 되기 마련이었다. 속국이란 뭔가? 대국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들어야 하고 정기적으로 곡물과 여인 등을 갖다바쳐야 하는 것이 속국으로서 반드시 이행해야 할 것들이었다. 하긴 중국의 수나라가 조선을 침략한적이 있고 조선의 고구려 역시 중국 동북지방을 차지한적도 있었으나 양국간의 수천년 역사상 이런 일은 아주 적었으며 전반을 보면 중국이 조선을 지켜주고 보호해준 한편 조선은 중국의 아부하며 굽신거린 역사가 더 길었다 할 수 있었다. “사람도 약하면 강하거나 큰 사람한테 빌붙어갖고 자신을 보호하기 마련이다. 약하면 자존심이란게 생길 수가 없다. 이는 사람 사는 세상의 이치이다.” 이렇게 얘기한 아버지의 이론처럼 조선의 반만년 역사에서 조선은 고구려, 신라, 백제 등 반도내 동족간의 군사충돌은 비교적 심했으나 아주 오랫동안 외래침략자에 의해 점령당한적은 없었다. 중국한테 아부했으니 중국의 보호를 받았으며 이러한 중국의 보호벽이 있으니 왜구의 크고 작은 침략에도 버티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의 근대사에 와서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수천년동안 보호벽이 돼주던 청국(중국)이 조선을 지켜주기는커녕 자기 자신도 건사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서기 18세기에 있은 아편전쟁을 계기로 서방의 8국연합군이 바다 건너 중국으로 쳐들어와 서로 뜯어먹기를 했는가 하면 청일전쟁에서도 청국은 패전국이 됐다. 그리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그 틈바구니에서 조선이 입은 피해도 상당했다. 이렇게 청국이란 이 보호벽이 허물어지면서 조선은 더는 자체의 힘으로 자기의 나라를 지켜낼 수 없었으며 결국 1910년 “한일합방”과 더불어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되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 아버지의 이러한 얘기들을 들으면서 아버지가 왜 이러한 얘기들을 어린 나한테 들려주는지에 대해 거의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아버지가 아는 것이 많구나 하고 감탄할 때가 많을뿐이었다. 하지만 한반도의 지난 역사와 오늘의 현실, 그리고 중국 조선족을 포함한 세계 각 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는 우리 한민족의 현실을 정시하노라니 아버지가 한 얘기들은 그 구절구절마다 심오한 그 무엇인가를 담고 있은 것이 분명했다. 우선 우리 한민족은 자아정체를 감추고 사는 경우가 많다. 한반도의 상황을 놓고만 봐도 옛날에는 중국문화의 전파로 마치 한문을 많이 알면 가장 박식한 사람으로 취급되었으나 일제시대에는 일제의 강압정치로 자기의 글과 말마저 빼앗기었으며 지금은 또 미국문화의 영향으로 남측 한국사회는 미국식 영어가 난무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에 사는 재일동포, 러시아에 사는 고려인과 재미동포 및 우리 중국조선족의 문화는 제각각이다. 점점 한민족이라는 정체를 잃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이는 그 어디에 가서 살아도 중화의 전통을 잃지 않는 화교나 소화문화의 맥을 이어가는 일본인과는 선명한 대비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다음기 계속) 주: 본문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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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날 아버지한테서 들은 얘기들(12) 한반도, 한반도의 고대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