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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룡 칼럼]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한국 이념논쟁
●김정룡(다가치 포럼 대표) 현시대 유명 정치학자로 손꼽히는 하버드대학교 샤무엘 헌탕턴 교수는 1996년 저서 『문명의 충돌』을 출간했다. 책이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로 반응이 뜨거웠다. 그는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2년 후 소련이 해체됨에 따라 냉전 시대가 종말을 맞았다. 냉전 시대 인간은 대체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진영의 이념에 각각 속해 있었다. 냉전이 종말 된 미래사회에서는 이념이 무의미해졌고 따라서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갖게 되면서 다른 귀속처를 찾게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귀속처가 바로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라고 제시하였다. 그가 말한 귀속처는 새로운 문명이 아니라 과거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실제로 탈냉전 후 지구촌의 인간무리들은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에로 재편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중국의 경우 개혁개방 전 해외 화교 화인들 중 고국을 못 마땅해하는 사람들도 개혁개방 이후 즉시 돌아서서 고국에 투자를 서슴지 않았다. 아세아 최고 부자 리카싱(李佳成)이 투자에 나서자 주변에서 ‘사기당하면 어쩌냐?’고 말리자 그는 ‘사기당해도 고향사람들에게 당하는 것인데 사기라 생각하지 않고 도와주는 것이라 여길 것이다.’라고 말했다. 재벌은 남다른 배포가 있는 법이다. 싱가포르 리콴유(李光曜) 전 총리는 본래 반공자였다가 개혁개방 이후 유교 전도사를 자칭하고 나서 중국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이것이 바로 이념을 탈피하여 민족문화에로 회귀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2008년 북경올림픽 개막식 주제가 공자였는데 이것은 전통문화에로의 회귀를 뜻한다. 1990년 초 동구권에서 있었던 코소보 인종청소 전쟁은 종교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아무튼 세상은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흘러가고 있는 추세이며 이미 새로운 역사 흐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지구촌의 흐름을 역행하는 곳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한반도이다. 동서 독일이 통일되고 남북 베트남도 통일되어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문화로 굴러가고 있다. 오로지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은 것은 남북한이다. 1990년 베이징아세아게임 때 한국관광객이 대량 백두산투어에 나섰다. 그때 한국여행사 에스코트 00사장이 한 말이 지금도 뇌리에서 생생하게 맴돌고 있다. “참 세월이 놀랍게 변했어요. 우리가 중국 땅을 밟으면서 백두산 구경을 할 것이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현실로 되었어요. 이 추세대로라면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남북통일도 10년이면 되지 않겠어요!” 그 후 2000년 김대중 대통령께서 북한을 방문하자 매체들이 ‘10년 안에 통일이 이뤄질 것’처럼 떠들었다. 그런데 그 후 강산이 두 번 변하고도 3년이란 세월이 흘러가고 있는 현재 남북통일이 가까워지기는커녕 점점 더 요원해지다못해 요즘은 아주 적대관계가 심각해지고 있는 중이다. “가장 중요한 게 이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일전에 국무회의에서 한 발언이다. 시중에서는 모두 뜬금없는 발언이라고 하기도 하고 때아닌 이념타령이라고 공격하기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이 발언이 확실히 케케묵은 이념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이게 무슨 시대인데 아직도 이념타령이라니? 역사를 거스르는 행위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요즘 한국 사회는 홍범도 장군의 정체성을 갖고 논쟁 중이다. 양 진영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으로 부질없는 일이다. 1943년 홍범도 장군이 사망할 당시에는 침략당한 약소국가들에서 나라마다 민족주의가 우선이지 이념과 사상이 우선 과제가 아니었다. 강대국들도 마찬가지로 이념을 떠나 미국과 소련이 협력하여 반파시스 전쟁에 돌입하였다. 홍범도 장군이 소련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은 사실이나 오늘날 이념논쟁을 일으킬 사안이 아니다. 한국 정치는 할 일이 하도 없어서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안타깝다. 문제는 왜 윤석열 대통령이 이념을 최대 이슈로 들고나왔는지? 맥락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 일부 진영에서는 아직도 빨갱이타령이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다. 종북좌파타령을 70년 동안 벌여오다가 요즘에는 종북좌파 타령이 질리기도 하고 그 실체도 주목을 받기가 조금 약발이 떨어져 친중좌파 공격으로 방향을 틀고 화살을 돌리고 열을 올리고 있다. 필자는 얼마 전에 한국 지인의 소개로 한국 엘리트들이 참여하고 있는 카톡방에 가입한 적이 있다. 카톡방은 흔히 그렇듯 좋은 정보도 나누고 서로 필요한 교류도 하고 인맥도 넓히고 등등 좋은 점이 많다. 하지만 인간무리에는 취향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인데 그 취향이 정치적인 성향이 강하면 골머리가 아파난다. 어느 한 분은 윤석열 대통령을 찬양하는 ‘윤비어천가’를 올렸는데 조선 창시자 이성계를 찬양한 ‘용비어천가’를 저리 가라 할 정도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수령을 찬양하는 ‘어천가’보다 훨씬 뛰어난 솜씨로 현직 대통령을 찬양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통령을 이렇게 신을 찬양하듯 하는 것을 처음 본다. 일각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문재인 전 대통령을 평가하는 기준이 극명하게 나뉘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문재인은 빨갱이고 북한 간첩이다. 나라를 북한에 팔아 먹는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사고방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아무리 좌파 성향을 지닌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설마 나라를 팔아먹을 수가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그들은 상식을 벗어나 비합리적인 주장을 하면 이에 동조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억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 친미를 확실하게 하면 다른 분야가 조금 떨어지더라도 문재인처럼 나라를 팔아먹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그들에게는 굳건하게 박혀 있다. 윤석열 대통령을 신을 찬양하듯 하는 행위는 필자와는 하도 상관없는 일이라 개의치 않고 그냥 넘겨버리고 말았는데 다음 일은 도무지 지나칠 수가 없었다. 기름 개구리를 산 채로 끓는 기름에 넣어 튀기다가 물을 넣고 끓여 먹는다. 한 분은 친중좌파들을 개구리 산 채로 튀겨먹고 끓여먹듯이 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머리카락이 곤두설 지경으로 정신이 아찔해졌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그만이라는 속담이 있다. “미친 아낙네의 악담보다 더 저질스럽다.”는 말을 남기고 나가기를 해 버렸다. 종북좌파 타령이나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친중좌파 타령이든 모두 같은 이념타령이다. 이런 이념타령이 시중에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고 그 세력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대통령의 이념논쟁을 때가 아닌 것이라 하거나 뜬금없는 일이라는 지적은 헛발 짚는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편 한국사회에서 아직도 공산주의 빨갱이 타령이 심각한데 진짜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자가 얼마나 될까? 의문이다. 무엇을 대상을 공격하려면 그 대상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나서 공격해야 마땅하나 한국에서 공산주의 빨갱이 공격은 실체를 모르는 막무내식이어서 안타깝다. tvn방송에 <어쩌다 어른>이라는 강연프로그램이 있다. 몇 년 동안 출연을 가장 많이 했던 최진기 강사가 있었다. 그는 자칭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이다. 액면 그대로 믿기로 하고 그가 이해하고 있는 공산주의란 무엇인지? 알아보자. 마르크스의 노동 분배 원칙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이다. 최진기 강사는 이 공산주의 핵심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마르크스는 아마 아버지가 돈을 벌 능력이 있고 그 돈을 자녀가 학비로 사용하는 케이스에서 힌트를 얻어 내놓은 이론일 것이다.” 이어서 그는 유명 스타 연예인 강동원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사람을 어떻게 수요에 의해 분배할 것인가?”고 희죽거리면서 공산주의를 형편없는 애들장난처럼 매도하고 조롱하는 것이었다. 만약 공산주의가 최진기 강사의 말처럼 그렇듯 유치한 것이라면 어떻게 지구촌 반 되는 인간무리가 추종했겠는가? 능력에 따라 일한다는 것은 인간이 고도의 의식을 갖추면 타인의 능력과 비교하지 않고 또 타인의 노동기여도와 비교하지 않고 나의 능력껏 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은 공산주의사회는 물질이 풍부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되어 불필요한 물질을 탐내지 않고 사치를 탐내지 않는 전제하에서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것을 의미한다. 요점은 물질이 풍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된 사회에서 실천가능한 원칙이라는 것이다. 빨갱이 뜻은 사상이 빨갛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필자의 부친은 평생 당지서를 맡았는데 사상이 붉다못해 둘째 아들이 휴학하는 해에 참외 밭을 대신해 보게하고는 아들이 생산대 참외를 먹었다고 하여 장부에 가을에 떼어내게 기입해 놓았다고 한다. 필자가 자랄 때 동네 어른들이 늘 저한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너의 부친은 진짜 빨갛다.’는 말을 반복했다. 최진기의 자칭 최고 강사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의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이 수준이라면 진짜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자가 얼마나 될까?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 서강대 00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산주의는 제도로서 실천은 실패했지만 그 이념과 사상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분단국가로 존재하고 이직도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있는 이 민족의 현실. 언제 가야 통일되고 하나가 되어 부질없는 다툼에서 벗어날 것인지? 민족의 운명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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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핵폐수 해양 방류 시작과 과정 그리고 결과는?
● 철 민(논설위원) 한·중·일 해양 안전 문제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신경전을 벌였던 일본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처리 문제가 24일 일본 정부의 바다 방류 개시와 더불어 또 새로운 논쟁거리를 몰아오고 있다. 우선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행위를 두고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나라들로는 일본의 이웃 국가들인 중국과 한국(정당과 사회단체 등), 북한 등과 거리가 멀지만, 남태평양 도서국의 반발도 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은 후쿠시마 오염수가 바다로 흘러들기 시작해서 240일이면 중국 연해에 도착한다며 정부로부터 국민 매 개인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방류 결정을 국제 공공의 이익을 무시하는 극단적으로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고 있다. 한편 중국 정부는 일본산 수산물 수입의 전면 중단을 발표하였다. 한국 언론도 한국의 여러 해산물 시장이 거의 텅 비어 있어 어부들은 미래의 생계를 걱정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24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제주도 동문어시장에서 20년 넘게 해산물 장사를 해온 한 상인은 “예전에는 오전 10시경과 오후 5∼7시(두 시간대)에 장사가 안될 때도 시장은 붐볐지만, 요즘은 손님이 없는 텅 빈 고속도로”라며 “코로나19 기간에는 장사가 더 잘됐다”라고 우려했고 한국 서부 해안 도시 군산 출신의 한 어민은 “내일 해산물 경매장에 간다고 생각하니 답답하다”라며 “해산물 소비량이 4분의 1로 줄었고 가격도 더 낮아질 것 같다”라고 탄식했다. 부산종합어시장에서는 조기 한 박스가 보통 4만 원 또는 5만 원에 팔리는데, 전국 해산물의 약 30%가 이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이번 주 수요일(23일)에는 조기 한 박스가 정상가의 절반 이하로 판매되었으며, 한국인들의 주요 해산물인 멸치는 평소보다 10~20% 정도 가격이 저렴하게 판매되었다. 24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담화문을 발표하여 일본이 이날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방류를 개시한 것은 지구 생태환경을 파괴하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면서 핵 오염수 방류계획을 강행하는 것은 자신들의 사욕을 위해 인류에게 핵 재앙을 초래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반인도적 범죄행위라고 주장했다. 이외 후쿠시마 핵 오염수를 바다로 방류하기로 한 일본의 결정을 알게 된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에 있는 한 비정부기구가 공개적으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반대하는 글을 올렸으며 또 피지 수바에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시위에 나서기로 했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은 해외의 국가와 사회단체의 규탄은 물론 일본 자국 내 어민 단체와 국민의 반발을 사고 있다. 특히 1945년 원폭 피해자 후손들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나섰다. 교도통신은 24일 원폭 피해자 후손들로 구성된 일본-전국 원폭 피해자 2세 단체 연락 협의회가 나가사키시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후쿠시마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항의했다고 전했다. 이 단체는 원자폭탄의 피해자인 히로시마가 견딜 수 없다며 성명을 발표했고, 이 성명은 총리 관저에 우편으로 발송됐다. 성명은 “원폭 피해자 2세들은 부모들이 방사능 영향으로 고통받는 것을 오랫동안 목격했고, 자신들도 유전적 영향을 배제할 수 없어 건강을 염려하고 있다”라며 “정부와 도쿄전력이 책임을 지고 육상에서 보존·관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외에도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이루다 나열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고도 높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은 국제원자력 기구(IAEA)의 감찰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IAEA의 권위성과 전문성은 인정하지만, 이 기구의 분석과 결론 모두를 믿는 건 아니다. 특히 IAEA 역시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에 대해 명확한 지지 혹은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도 않았다. IAEA 역시 사상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수치나 분석을 통해서는 함부로 결론을 내릴 수 없은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모든 일이란 시작이나 과정을 통해서는 어떤 결과가 나타나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례로 1945년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전에는 그 위력이 그 정도로 강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자료도 있다. 다음 우리는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 더군다나 믿을 수 없다는 추리가 나온다. 일본인을 두고 말하자면 좋게 말하면 “총명하다”하고 할 수 있지만 다른 각도로 말하면 “잔머리를 잘 굴린다” 혹은 “비열하고 간교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은 조선과 중국 그리고 기타 태평양 지역 국가와 지역에 큰 피해를 주었다. 그것도 아주 음융하고 비열하고 잔혹한 수단과 명분 등으로 말이다. 조선 왕조의 명성황후 음해 사건, 중국 대만 강점과 한일 합방 그리고 지난 세기 30~40년대 조선에서 위안부를 모집할 때는 “방직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등 감언리설로 순진한 소녀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고 1920년대 말의 만주에서의 황구툰(皇姑屯) 사건과 루거우차오(卢沟桥) 사건 등을 분석 조명해보면 당시 일본이 강하다기에 앞서 음흉하고 뻔뻔스럽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 시 일본은 한편으로는 미국과 담판함과 아울러 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일본을 함부로 믿어서는 큰 코 다친다는 분석도 함께 나온다. 종합적으로 일본을 평가하면 일본인의 겉면을 보면 예의가 바르고 친절하고 생활이 아주 규칙적으로 보이지만 일본인의 속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겉과 속이 같은 한국인과는 달리, 웬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중국인과는 달리 또한 거만하지만 우쭐대지는 않는 서양인들과는 달리 일본인한테는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피해국에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역대의 독일 총리들과는 정반대로 일본은 오늘 현재도 기나긴 침략 역사에 대해 사과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교과서까지 뜯어고치면서 군국주의의 침략사를 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두고 각국은 여러 가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강경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중국과는 달리 미국은 지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고 한국 정부는 “지지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입장으로 나오고 있다. 여기서 미국은 태평양을 사이 두고 일본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속 궁리가 있는가 하면 다른 일종의 전략이 내포되어 있을 수도 있고 한국은 자국민들한테 미칠 손실보다는 일본과 정부 사이의 마찰을 우려하는 듯한 양상이다… 한편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에 대해 지금 과학적이고 안심할 수 있다는 학술적 수치는 있으나 그 영원성을 장담하는 언사는 한 마디도 없다. 어찌 됐든 일본의 핵 오염수는 방류하지 않는 것이 방류하는 것보다는 ‘명지한 선택’이라 보여지며 방류하는 것으로 나쁜 결과가 있을지언정 반대로 좋은 결과는 제로라는 것만은 분명한 것이다. 가령 앞으로 방류 과정에 혹시라도 일본 자국 혹은 주변국들에 피해 사례라도 발생한다면 그때 가서 아무리 미국이나 국제원자력기구라 해도 결코 일본을 위해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며 일본이라는 이 섬나라의 위망은 일락 천장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서기 2023년 8월 24일, 이날은 인류 역사상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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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무주지(無主地)’ 섬이 아니었다.
● 김정룡 (多가치포럼' 대표) 민간속설에 ‘이웃이 먼 사촌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가령 이웃집에서 경사가 생기면 함께 기쁨을 나누고, 안 좋은 일에는 같이 슬픔을 나누고, 급한 일이 생기면 이웃이 가장 먼저 달려와 돕는 등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삶을 영위해온데서 생겨난 속담일 터. 민간백성들의 삶은 대개 이웃끼리 화목한데 비해 한 사람, 한 사람으로 구성된 국가의 경우 이웃나라끼리 사이는 그다지 화목하지 못하다. 바다를 사이 두고 이웃으로 살아온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으로 좋은 때도 있었지만 서로 반목하는 일들이 더 많았고 지금까지도 해묵은 갈등들이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있는데 그 가운데서 독도의 영유권 문제, 종군위안부 문제, 일본전범기업 강제징용 배상문제 등이 주요 쟁점으로 꼽힌다. 최근에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가 새로운 갈등으로 부상하여 오랜 갈등들에 얹어져 가뜩이나 썰렁한 냉기를 더욱 차갑게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남아 내려온 갈등도, 새로 생겨나고 있는 갈등도 모두 일본 측의 책임이 크건만 정작 일본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후안무치한 태도를 보이고 있어 아주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어느 한 착실한 역사학자의 통계에 의하면 한반도는 서너 차례 모자라는 1천 번의 침략을 당해왔다고 한다. 무려 1천 번이나 침략을 당해왔으나 남을 침략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하니 얼마나 착한 민족인가? 누구인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백의민족은 맞기만 하고 때릴 줄 모르니 선천적으로 DNA에 문제가 있다”고. 아무튼 그 1천 번 가운데서 일본의 침략이 다수였다. 일본은 지진이 많고 태풍이 많기로 지구촌에서도 이름난 곳이다. 게다가 땅이 척박하여 먹을 것이 늘 부족했다. ‘제집’ 내에서 해결책이 안 보이니 눈을 ‘옆집’에 돌릴 수밖에 없었다. 남의 것을 빼앗아오는 약탈행위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가에 왜구의 노략질이 들끓었다는 얘기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곡식도 빼앗고, 옷도 강탈하고, 여자도 납치해가고 등 눈에 보이는 쓸 만한 ‘물건’이면 전부 빠트리지 않고 싹쓸이해갔다. 백의민족의 전통인사말은 ‘무사한가?’인데 그 유래가 바로 빈번한 외침을 당한데서 생겨난 것이다. 일본은 왜구의 노략질도 빈번했을 뿐만 아니라 정부차원의 침략도 감행하였고 그 궁극적인 목적은 한반도 식민화였다. 1592년 풍신수길이 발동한 임진왜란이 좋은 근거이다. 명나라 조선 파병 때문에 일본이 임진왜란에서 실패했으나 그 후 결코 한반도 식민화 정책은 포기하지 않았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조선정부는 청나라와 일본을 불러들인 것이 화근이었다. 큰 전쟁을 피하고자 조선정부는 동학농민운동 측과 협상하여 평화적인 해결책을 마련하고 청나라 군과 일본군 모두 철회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모처럼 좋은 기회를 만난 일본이 철회할 리가 만무했다. 청나라와 군대 철회로 갈등을 빚다가 드디어 무력충돌이 발생하였고 그것이 바로 ‘중일갑오전쟁’이다. 일본을 ‘쌰오르번(小日本)’으로 하찮게 여겨왔던 청나라가 생각 밖으로 일본한테 패배한다. 조선을 청나라 속국에서 벗어나게 하고 ‘독립문’까지 세워준 일본이지만 정작 조선은 독립을 하지 못하고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만다. 호랑이가 나간 자리에 승냥이가 들어온 셈이었다. 일본은 강대했던 청나라를 물리쳤으나 또 다른 강대한 적인 러시아와 맞붙어 싸워 이겨야 만주와 조선에서의 이권을 모두 독차지할 수가 있었다. 1904년 일본은 한반도에서 자기네가 마음에 드는 곳에 어디든 군사기지를 세울 권리가 있었다. 러시아와 맞붙으려면 동해바다 섬에 군사기지를 세울 필요가 있었다. 하여 일본의 레이더망에 독도가 들어왔다. 1905년 일본은 독도를 ‘무주지(無主地)’라 주장하면서 영토편입을 시도하고 시마네현(島根縣)에 지방고시를 알린다. 남의 나라 땅을 침략하고 그 땅을 ‘무주지’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드는 수법은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을 식민지화 하는 과정에서 활발하게 써 먹었던 수법이었다. 즉 일본이 유럽열강들한테서 배운 것을 조선침략에 활용했다는 뜻이다. 독도는 1905년 전에 과연 ‘무주지’였을까? 아니다. 마찬가지로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에 이르는 곳마다 모두 ‘무주지’ 땅들이었을까? 아니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무주지’라 주장하는 것일까? ‘발견자우선주의’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활용했던 것이다. ‘발견자우선주의’의 본뜻은 최초로 발견한 사람들이 소유 우선권이 있다는 의미인데 백인들이 아메리카 땅을 발견하고 개척할 당시 수많은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다. 결코 백인들이 최초의 발견자가 아니다. 분명히 그 땅엔 인디언이라는 주인이 이미 있었다. 해가 지지 않는 식민지를 개척한 그 땅들에 주인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이미 오래 전부터 발견하고 삶을 영위해온 원주민들이 거주해왔다. 그렇다면 왜 유럽열강들이 ‘발견자우선주의’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들었을까? 주인이 이미 있었는데 ‘무주지’라 주장하고 거기다 한 술 더 떠 ‘발견자우선주의’를 떠드는 근거는? 유럽열강들은 지구촌 곳곳에 살고 있는 인류 집단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그 땅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3C’ 즉 기독교(Chrisianity), 문명(Civilization), 상업(Commerce)을 통해 식민지 정복을 정당화했다. 1455년 교황 니콜라오5세는 아프리카 서쪽 해안의 영토에 대한 포르투갈의 권리를 승인했다. 최초의 탐험시대부터 이미 그 땅에 인류가 살고 있든 말든 국가가 있든 말든 유럽열강들 중 그 누가 먼저 그 땅에 도착하면 자기네들이 주인이라는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를 적용했던 것이다. 독도는 1905년 이전에 조선의 소유이고 조선이 영유권을 갖고 있다는 역사적인 증거는 충분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산업혁명과 식민지개척 공부에 가장 모범생이었던 일본이 서구열강들이 식민지 개척 과정에서 정당화로 써먹었던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 무기를 휘둘러 독도 영유권을 시마네현에 편입하는 고시를 알리는 수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있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있을 때 일본 소유로 편입되었던 것들을 바로 잡는 조항에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등 제도들이 조선의 영유권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조선의 지리는 육지와 3170 개 섬으로 구성되어 있어 섬마다 일일이 모두 표기할 수가 없었고 그때 독도가 빠져있었던 것을 일본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있다. 즉 이것 때문에 일본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한국정부가 독도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군대가 주둔하여 관리하고 있다. 6.25 전쟁 때 한국군 36명의 용사가 독도를 굳건하게 지켜냈고 지금까지도 한국이 독도에 주둔하고 관리하고 있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존재의 일차적인 이유는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다. 2016년 세월호사건과 지난해 10월 발생했던 이태원참사사건에 전체 국민이 분노하는 이유가 바로 정부가 국가의 존재이유를 방기했다는 것이다. 다음 자국의 영토를 지키는 것도 국가존재의 주요 이유이다. 영토를 잃는 것은 안전을 잃어버리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기 때문이다. 한국정부의 독도에 대한 입장은 다음과 같다. “독도는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으로 명백한 우리 소유의 영토이다. 독도에 대한 영유권 분쟁은 존재하지 않으며 독도는 외교 교섭이나 사법적 해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확고한 영토주권을 행사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어떠한 도발에도 단호하고 엄중하게 대응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독도에 대한 우리의 주권을 수호해 나아간다.” 다만 걱정이 하나 있다. 일본정치주류세력인 우익이 줄곧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주장에 대해 올해만 세 번 한일 양국정상이 만난 자리에서 아무 언급도 없었다. 윤석열 정부의 과거사를 묻지도 따지지도 말자는 대일외교방침 때문일까? 일각에서는 이대로 나아간다면 일본이 독도를 완전히 빼앗아가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공동관리 주장을 들고 나오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한다. 독도분쟁은 대한민국의 자존심 문제이다. 자존심을 잃으면 나라의 존재이유가 사라질 만큼 국민의 사기가 저하된다. 그러므로 독도만은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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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전주국제영화제 정준호-민성욱 공동집행위원장 투톱체제 성공을 바라며
독립영화의 요람 전주국제영화제가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로 전환해 정체성 확립과 대중성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지 관심을 받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는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민성욱 부집행위원장과 정준호 영화배우를 공동집행위원장으로 의결했고, 지난 26일 조직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은 시장실에서 위촉장을 전달했다. 마력은 동력의 단위로 높을수록 좋다. 이번 쌍두마차 체제가 앞으로 3년 동안 시너지 효과를 일궈낼 것으로 기대된다. 백제예술대학교 방송연예과 교수인 민성욱 신임 공동집행위원장은 전주국제영화제 출범부터 조직위의 사무국장 및 부집행위원장을 역임한 '지킴이'이고, 정준호 신임 집행위원장은 높은 인지도를 가진 대중성을 확보한 영화배우이기 때문. 어떤 조직이나 더 큰 발전과 생존을 위한 변화와 혁신이 요구되는 시점이 있다. 세계 초일류 전자제품 회사로 대한민국을 빛내는 삼성이 만일 제일제당 시절처럼 사카린을 밀수해 설탕을 팔던 그대로 운영되고 있다면 지금의 영광도 없었을 것이다. 2020년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는 비경쟁 위주로 실시됐고 올해 2022년 23회 영화제는 국제경쟁, 한국경쟁, 한국단편경쟁, 특별부문(한국 장편 다큐멘터리, 지역공모작품, 비경쟁 아시아 영화)로 진행되며 업그레이드 됐다. 2023년 24회부터 3년간 시행될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기존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보다 더 대중성을 일으켜 더욱 큰 소통을 통해 영화계 발전과 주최지인 전주 지역발전에 더 크게 기여하는 영광이 실현될 지 귀추가 주목된다. 쌍두마차 체제가 된 전주국제영화제는 전주시민의 선택을 받은 우범기 시장이 조직위원장으로 이끄는 마차다. 우 조직위원장이 전주시 발전을 위한 고뇌 끝에 내놓은 묘수라고 풀이된다. 시장은 시민의 행복과 시의 발전을 도모하는 자리기 때문이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에 대해 기대가 큰 반면에 걱정과 반감도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수립되자, 권해효 배우, 방은진·한승룡 감독이 이사직을 사퇴했다. 이사회에서 자신의 의견과 다르게 의결되었다고 사퇴하는 것이 영화제에 대한 진정성일 수도 있지만 무책임하게 보일 수도 있는 지점이다. 고 자니윤(고 윤종승) 코미디언은 2013년 2월28일 해외동포들과 판문점을 방문한 후 가진 뒷풀이에서 "한국 사람들은 너무 똑똑해요.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려고 하면 이XX 안돼, 저XX 안돼 하는거에요. 일을 해보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 한국계 코미디언으로 성공하고 그의 인프라를 총동원해 조국 대한민국 관광발전을 위해 기여하고 싶었으나 좌절된데 대한 의견으로 들렸다. 대한민국은 625전쟁 후 폐허에서 일어나 세계 경제 10대 강국이 되었고 민주주의를 이루어낸 나라다. 지난 80년간 대한민국이 변화가 없었다면 우리 국민들은 헐벗고 굶주리고 억압속에서 지옥살이를 하고 있었을 게 자명하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는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 이사회에서 결정된 사안이다. 임기는 3년이다. 3년간 응원하고 3년 후 큰 성공과 발전을 이루면 박수를 치고, 변화의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때 가서 비판해도 늦지 않다. 한국언론인연대 박상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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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Z세대 중국에 호감" 중국 호감도 세대별로 다른 원인
●오카다 미츠루(일본 저널리스트)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7일 방콕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3년 만에 처음으로 중·일 정상회담을 갖고 악화된 양국 관계를 '재조정'하기 시작했다. 기시다는 대중 관계 개선에서 반중 여론과 대중 강경 자민당 우파의 제약을 받고 있지만 반중 여론을 거론하면 일본의 Z세대(18~29세)의 중국에 대한 호감도는 40% 이상으로 다른 연령층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Z세대의 정치적 의지가 선거의 키를 쥐고 있는 세계적 흐름을 보면 '반중 여론'과 '우파'에만 의존하는 기시다 외교가 위태롭다. 45분 동안 진행된 이번 일-중 정상회담은 3시간여에 걸친 중-미 정상회담에 비해 일본의 대중국 중요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일·중 정상은 회담에서 국방부 해상 및 항공 연락 메커니즘의 직통 전화선 조기 개통, 새로운 중일 고위급 경제 대화의 조기 개최, 새로운 중일 고위급 문화교류 협의 메커니즘 회의 조기 개최 등 몇 가지 공감대를 형성했다. 향후 중일관계 개선의 지표 중 하나로 정상 간 상호 방문을 실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시다 총리의 대중 관계 개선의 한 가지 저항은 '반중(反中)' 여론 고조다. 일본의 대중(對中) 인식 악화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각부가 매년 발표하는 '외교에 관한 여론조사'에는 흥미로운 수치가 나온다. 예를 들어 지난 1월 발표된 조사에서 응답자의 20.66%가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지난해보다 1.4% 증가)고 답했다.그러나 연령별로는 Z세대 중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는 비율이 41.6%로 전체보다 배 이상 많았다. 60~69세 13.4%, 70세 이상 13.2%에 비해 Z세대는 중국에 대한 친근감이 높다. 그렇다면 왜 연령대에 따라 중국에 대한 태도가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분석하고 싶다. 나는 젊었을 때(저자는 1948년생) 중국의 사회주의에 대한 동경심을 갖고 있었고, 일본이 침략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에 중국에 대한 속죄의식을 갖고 있었다. 중국이라는 '타자' 위에 자신의 생각을 투영해 기대를 부풀렸다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일본이나 구미의 통치체계를 중국의 정치와 사회에 투영해 일본이나 구미의 기준으로 중국을 관찰하고 판단한다. 요즘 60~70대 일본인들이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다. 그러나 Z세대는 생각이 다르다. 내가 가르친 대학생의 경우 태어나기도 전에 일본 경제가 침체에 빠졌고, 일본 경제의 고도성장기를 경험하지 못했다. 이들이 철들었을 때 중국은 이미 미국을 추격하는 대국이 됐고 IT 기술에서 일본을 앞섰으며 애니메이션과 게임 품질에서도 일본을 추월하고 있다. 또 Z세대가 다니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많은 곳에서 중국 유학생과 접촉할 기회가 종종 있다. 다시 말해 Z세대는 중국을 일종의 '대등한' 시각으로 보는 것이다. 중국에 대한 특별한 생각이 없기 때문에 특별한 환상은 없다. Z세대와 밀레니얼 세대가 사회의 버팀목이 될 때 일본인 전체의 대중국 관념도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쇠락이라는 역사적 변화, '탈아입구((脫亞入歐)'의식을 심리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대가 '2선 후퇴'하면 일본의 '반중' 여론도 달라질 것이다. 기시다 정권도 언제까지 반중 익찬 여론에 의존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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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민주주의의 성공 비결
●송첸/중국 리즈 트러스(Liz Truss) 영국 총리가 집권 44일 만에 사임하고 리시 수낙(Rish Sunak) 총리가 두 달 만에 보수당 내 세 번째 총리로 취임한 것은 영국식 민주주의가 정치적 안정을 담보하기에는 무능함을 보여준다. 미국식 민주주의도 마찬가지지만 그 정도는 아니다. 서방 민주주의는 정당 정치에 기반한 부자들을 위한 클럽이다. 서방 정치의 주장은 풀뿌리들이 국가의 지도자가 아니라 의회에서 대표자를 선출하기 위해 투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권자들이 정부 정책에 대해 항의할 수 있지만 정치인들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느라 너무 바쁘기 때문에 그러한 항의가 귀에 들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 트러스의 몰락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낙수 경제"를 기대하면서 수백만 파운드의 기업과 개인에 대한 세금 부담을 낮추려는 그녀의 계획으로 인해 발생했다. 그러나 비평가들은 그 계획이 부자는 더 부자가 되도록 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 깊은 빈곤으로 몰아넣는다고 비난했다. 미국에서 최고 정치인(낸시 펠로시 하원의장 포함)은 백만장자이다. 빈곤율 11.7%는 세계 평균인 10.1%보다 높지만, 이들은 국민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돈을 찍어내며 세계 곳곳에서 불필요하고 부당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 마약 중독과 총기 난사도 정부가 국내 정책보다 대외 정책에 집중하기 때문에 골칫거리다. 반면 중국은 절대빈곤을 근절한 유일한 주요국이다. 14억 인구의 삶의 질을 향상시켰다. 이를 통해 토지 개발, 교통 연결성, 수력 발전소를 통한 청정에너지 생성 등 생활 환경도 개선했다. 중국은 또한 인터넷 서비스가 가장 외진 마을에도 도달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이는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의 결과이다. 서방에서 정치는 국민의 복지에 관한 것이 아니라 현 정부가 하거나 제안하는 모든 것에 동의하지 않음으로써 권력에서 생존하거나 권력을 얻는 것에 관한 것이다. 서방의 민주주의는 혼돈 속의 권력이다. 중국의 민주주의는 법이나 조치를 확정하기 전에 풀뿌리를 포함한 사회 각계각층의 의견을 고려하는 인민의 힘이다. 서방이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18세에 도달한 모든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이 투표권과 피선거권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타운 및 카운티 수준에서 대표자를 선출하기 위해 투표할 수 있다. 그리고 시민에 의해 선출된 지방 인민대표대회 대표는 투표를 통해 더 높은 수준의 대표를 선출한다. 이는 영국, 미국 및 기타 서방 국가의 민주적 투표 시스템과 어느 정도 유사하다. 자격이 있는 유권자들이 국회의원을 선출하고 그 의원이 해당 국가의 지도부를 선출하는 방식이다. 중국에서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문자 그대로 "인민이 스스로 통치한다"로 번역되는 민주다. 중국은 이처럼 크고 다양한 국가이기 때문에 소수 민족 간의 투표도 허용한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이 제도를 사람 최우선으로 하고 책임감 있는 시민으로 만들고 좋은 거버넌스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돕는 제도라고 설명했다. 중국의 정책 결정은 서방처럼 정치인에만 국한되지 않고 풀뿌리 국민도 포함한다. 국가 최고 정치 자문기구인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는 의사결정과 문제해결에 있어 폭넓은 협의를 주창함으로써 중국 사회주의 민주주의의 특징과 장점을 충분히 보여준다. 학술 연구에 따르면 공개 협의를 통해 수립된 정책 선택은 여론과 밀접하게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광범위한 공개 협의로 인해 중국의 정책 변경은 위에서 아래로, 지역, 성, 시, 진 및 촌에 이르기까지 긴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은 개인의 생각과 필요를 반영하며 정치인의 아이디어와 결정이 우세한 서구에서 볼 수 있는 정치적 또는 조직적 투입 때문에 방해받지 않는다. 현대 기술의 출현으로 중국 정부는 시민들에게 법률 및 규정 초안에 대해 피드백을 제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수단으로 온라인 상담을 점점 더 많이 활용하고 있다. 실제로 온라인 상담은 거버넌스 개혁의 도구가 되었으며 정치협상회의는 이를 대중적 지지를 육성하는 수단으로 수용했다. 시진핑 주석의 말처럼 정치협상회의는 중국 공산당이 만든 위대한 정치 협상제도이다. 사회주의 협상 민주주의를 추진하기 위해 당파, 인민단체, 민족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을 포괄한다. 주 : 본문의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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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강술래는 야합(野合)의 축제였다
한국국어사전은 강강술래와 강강수월래를 같은 말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강강술래는 한문 표기가 없고 강강수월래를 한문으로 ‘强羌水越來’로 표기하고 있다. 强은 강하다는 뜻이고, 羌(중국서부에서 양을 토템으로 삼은 민족이며 세력이 강해 늘 중원을 위협하여 한족정권은 그들을 오랑캐로 취급해왔음)은 오랑캐라는 의미이다. ‘强羌水越來’는 강한 오랑캐가 물을 건너온다는 뜻이다. 필자는 한국국어학자 어르신들에게 문제 제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즉 강강술래는 수천 년 동안 지속되어온 민속인데 강한 오랑캐가 물을 건너오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아무런 연관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는 걸까? 답이 아닌 답이 하나 있긴 하다. 국어학자들이 강강술래를 한문으로 표기할 방법을 찾지 못해 본래 4음절인 강강술래를 음악의 필요에 따라 5음절로 늘린 강강수월래를 말도 안 되는 ‘强羌水越來’로 표기했을 것이다. 이런 억지춘향 표기현상을 가리켜 사자성어로 견강부회(牽强附會)라고 말한다. 강강술래를 ‘强羌水越來’로 표기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설명하려면 먼저 강강술래의 어원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강강은 본래 감감이다. 감은 감다, 감돌다 등등의 의미이며 감감은 감의 강조이다. 강강술래는 원을 그리며 빙빙 돌아가는 놀이이기 때문에 본래 감감술래였다. 감감술래가 세월이 흐름에 따라 강강술래로 변음 되었던 것이다. 술래는 가운데서 눈에 띠를 두르고 숨은 자를 찾아내는 자를 일컫는 말이다. 한국국어학자들은 술래가 한자어인 순라(巡邏)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데 글쎄 썩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강강술래의 어원을 살펴보았으니 이번에는 강강술래란 도대체 어떤 놀이인지? 알아보자. 강강술래는 본래 순수 우리말이고 그 뜻은 원무를 의미한다는 데 포커스를 맞추고 유래를 찾아야 한다. 원무는 고대사회에 수많은 민족들이 보편적으로 추었던 춤이다.『예수는 신화다』라는 책에서 저자는 원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영지주의자 예수는 미스테리아 입문식에서 원무를 이용하여 제자들을 이끈다. 그러한 입문식 춤은 이교도 미스테리아 의식에서 두루 나타나는 것이다.” 현대의 한 권위자는 이렇게 말했다. “고대입문식 축제 가운데 춤이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엘리우시스에서의 미스테리아 의식에서 입문식 후보자는 중심에 자리 잡고, 다른 사람들은 둘레에서 춤을 추었다. 그것은 행성과 별들의 궤도를 흉내 낸 것이었다. 미트라스 미스테리아의 의식에서도 미트라스를 상징하는 입문자는 중앙에 자리 잡고, 황도의 12궁을 상징하는 12명이 주위를 돌며 춤을 추었다. <요한행전>에서도 그와 비슷하게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며 춤을 춘다. 예수가 신호를 보내면 사도들이 신성한 말 ‘아멘’을 읊조린다. 예수는 이러한 ‘원무’를 통해서 ‘수난’을 나타낸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이것을 예수는 ‘신성한 비밀’이라고 부르도록 했다. 원무는 고대사회에 있어서 보편적인 춤이었으나, 그 형식과 내용 및 목적에 있어서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위의 글에서는 원무가 이교도 입문식과 예수라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양의 원무가 행성과 별의 궤도를 흉내 낸 데서 유래되었다면 동양의 원무는 달을 흉내 낸 데서 유래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달을 흉내 내는 원무를 추는 것을 도월(跳月)놀이라 한다. 민속학자 임동권(任東權) 씨는 고대인들의 도월놀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원시시대에 있어서는 달을 중심으로 하여 행사가 많았다. 상원과 추석이 그러했고 달 밝은 밤이면 모두 모여 유희를 즐긴 것은 우리 조상만이 아니고 지금도 미개사회사회에서는 모두 그렇다. 따라서 옛날 1년 중에서 가장 달 밝은 한가윗날 마을의 소녀나 부인들이 모여 만월과 같은 둥근 원을 그리면서 놀이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때에 노래도 부르며 뛰기도 했을 것이니 강강술래가 임진왜란 때에 비로소 창안된 것이 아니고 그 이전에도 민족전래의 유희로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강강술래처럼 대대적인 것은 아니나 달밤에 소녀나 소년들이 손을 잡고 뛰며 노는 유희는 어디서나 볼 수 있다. 그러한 뜻으로 강강술래를 보면 문헌고증을 할 수 없어서 그렇지 함화진(咸和鎭) 씨가 추상한 것처럼 마한 때의 민족유희였을지도 모르며 마한이 아닐지라도 백제 또는 고려시대에 이미 전파되었던 놀이인지도 모르겠다.” 중국소수민족문헌인『묘속기(苗俗記)』에 도월놀이에 관한 기사가 있는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른 봄에 남녀가 들판에 모여 배우자를 찾는 것을 이름 지어 ‘도월(跳月)’이라 한다. 정월 초 3일부터 13일까지 모두 도월놀이 기간이다. 13일 도월놀이가 끝나면 남자는 갈대피리를 불면서 앞장서고 여자가 띠를 끌고 뒤따르며 장내를 세 바퀴 돌고나서 손잡고 대나무숲속에 들어가 먼저 야합하는 바, 이름 지어 ‘라양(拉陽)이라 부른다. 그러고 나서 임신되면 시집가고 임신이 안 되면 이듬해에 또 반복해서 도월놀이에 참여한다. 『귀주통지(貴州通志)』에도 위의 기사와 비슷한 내용이 적혀 있다. “화묘(花苗), 매년 이른 봄에 남녀가 들판에 모이는 것을 ‘도월’이라 부른다. 평평한 곳(平壤)을 택해서 월장(月場)으로 삼는다. 남자가 갈대피리를 불고 여자가 방울을 울리며 빙빙 돌면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면서 하루 종일 즐긴다. 날이 어두워지면 남녀가 서로 짝을 지어 갔다가 날이 밝으면 헤어진다.” “백묘(白苗), 도월놀이 풍습이 화묘와 같다.” 우리는 전라남도 남해안 여러 지방의 강강술래도 역시 묘의 제족(苗之諸族)과 같은 순수한 도월놀이였으며 따라서 강강술래도 역시 청춘남녀들이 야합을 목적으로 한 놀이었다고 볼 수 있다. 현대인은 야합을 음란행위로 간주하지만 고대인에게 있어서 야합이야말로 자연의 원리에 순응하는 신성한 의무라고 여겼을 것이다. 중국 유명 학자 이중탠 교수는 이것을 ‘이른 새벽 모닥불 축제’라고 표현한다. 중국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위대한 공자님도 그의 부모가 매신을 제사하는 모임에서 만나 야합해서 탄생되었다고 한다. 『조선의 향토오락』에 의하면, 강강술래는 주로 상원과 추석, 즉 만월 시에 진행했다고 한다. 왜 강강술래놀이는 만월 시에 했을까? 중국신화연구자들에 의하면, 달은 여성의 생래규칙과 닮았다고 한다. 달이 이지러지고 차는 것은 여성의 임신현상과 닮았고, 또 여성의 월경주기는 달의 주기와 같다고 한다. 월경, 월신(月信), 월수라고 부르는 것은 달의 규칙과 같은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달 속에는 생식을 주관하는 월정(月精)이 있는바, 개구리의 화신인 상아(常娥)가 곧 월정이라고 한다. 만월 시의 달의 모양이 아름다운 것은 달 속에 아름다운 상아가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며, 따라서 상아의 ‘출현’은 곧 인간의 생식을 관장하고 또 인간의 생식력을 왕성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강강술래가 만월 시에 진행된 것은 곧 고대인의 생식숭배의식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강강술래 참여자들이 본래 소년 소녀들이었다가 여자의 중심으로 된 것은 후대에 내려오면서 유교문화의 영향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모두어 말하자면 강강술래는 순수한 우리말이며 원무를 뜻하며 원무는 곧 도월놀이며 도월놀이는 곧 남녀야합의 놀이었다. 후대에 내려오면서 소위 학자라는 어르신들이 영웅주의사상, 한문숭배사상, 유교사상의 덫에 걸려든 탓에 강강술래의 본래의 모습을 말살시켜 버렸던 것이다. 이는 고대문화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우리민족의 비극이다. 풍류인물이였던 세종대왕이 박연(朴堧)에게 고대로부터 내려온 민속을 채집하여 정리할 것을 부탁해 성과가 있었다. 하지만 유생들이 그 귀중한 자료들을 전부 화롯불에 던져버렸다. 결과 오늘날 선조들의 수많은 풍부한 민속 문헌고증이 차단되었다. 그리고 한국인은 다재다난(多災多難) 했던 민족이어서 고유한 민속을 영웅주의에 덧씌워 풀이하다보니 역사가 유구했던 민속의 상한선을 기껏해야 임진왜란시기에 꿰맞추는 경향이 짙다. 이를테면 전라남도 남해안 일대 여러 지방의 고유민속인 강강술래를 임진왜란시기 의병술에 능하고 전쟁에 공이 많았던 이순신 장군이 창안해낸 것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후세인들이 강강술래놀이를 하는 것은 이순신 장군의 공을 기리기 위한 행사라고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민속학자인 임동권 씨는 1960년대 두 차례나 전라남도 여러 지방을 현지답사 하였는바, 현지고로들은 강강술래를 이순신 장군에 의해 창안되었다고 믿고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리고 김창호(金昌浩), 어석경(魚錫經) 등 학자들도 현지고로들의 말을 믿고 역시 그렇다고 주장했다. 한 가지 미묘한 것은 강강술래의 전파지가 전라남도 남해안 일대로서 이순신 장군의 전적지와 맞물린다는 것이다. 허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강강술래는 그 상한선이 마한 혹은 더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결코 이순신 장군이 창안해낸 것이 아니고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한 놀이도 아니다. 다만 한 가지 가능성이 있다면 이순신 장군이 고유한 민속놀이를 의병술에 이용했을 것이다. 필자는 이주민의 한 사람으로서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법무부 귀화시험 교재에 역시 강강술래를 이순신 장군이 창안한 것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이 될 이주민들한테 잘못된 역사교육을 시키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한국사회는 쩍하면 중국과 일본을 향해 역사왜곡을 하고 있다고 볼멘소리를 하고 있는데 자기네들 역사를 자기네들이 왜곡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으니 얼마나 비극적인가? 김정룡 '多가치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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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수교 “50년”을 이야기한다
● 이 성 (By Star Lee) 오늘은 한중수교 30주년이다. 과거의 30년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愛恨情仇(사랑, 원망, 정, 원한)이 뒤섞인 두 연인 간의 멜로드라마와 같았다. 한 때는 서먹서먹했던 맛선 본 선남선녀처럼, 한 때는 애정행각이 지나쳐 주변사람들이 눈쌀을 찌프렸던 연인처럼, 또 한 때는 서로간의 오해와 불만으로 사랑이 식어가며 냉정의 시간을 갖고자 하는 커플처럼…. 어느 중국의 외교관이 사석에서 이런 농담을 하였다고 한다. 한국은 중국에 있어 매력적인 애인과도 같아 항상 그립고 가슴이 설레이지만 저 북방에 사는 본처를 생각하면 가까워지기에는 부담스럽고 떨어지려니 애간장이 탄다고 한다. 조금 불편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그것이 양국간의 애뜻하고 불편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 같았다. 필자는 한국에서 수십년, 중국에서 수십년 살아오면서 ‘한중수교’라는 멜로 드라마를 본방사수하면서 지켜봤던 사람으로 각별한 애착과 소감이 있다. 열혈 팬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평범한 서민의 시각에서 한중간의 과거 30년 미래 20년을 논하고자 한다. 제1화 1992~2002 연모의 시대 30년전 한중수교가 이뤄졌다. 양국 대중에 있어 40년전 전쟁을 했던 ‘적대국가’, 서로 정체성마저 부정했던 ‘괴뢰정부’와 수교한다는 것은 조금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서먹함과 생소함을 덜하게 했던 것은 88 서울 올림픽과 90 북경 아시안게임이였다. 그 당시에 한중수교가 중국인에 가져다준 가장 큰 변화는 경제도 아니고 문화도 아니였다…스포츠 경기에서 국가명칭이 남조선이 대한민국으로 바뀌였고 중공이 중국으로 바뀌였던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의 신북방정책에 힘입어 중국동포들의 한국 친지방문이 한중교류의 물꼬를 텄으며 뒤따라 한국 제조업 기업의 중국진출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동남아국가에 진출하려면 상당히 많은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극복해야 했지만 중국에서 수십년간 정착한 동포들은 한국기업의 중국 진출에 있어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말이 안통해도 현지에서 동포통역, 동포직원을 채용하면 모든 일이 다 순리롭게 풀릴것만 같았고 10억인구 상대로 한사람당 1원만 벌어도 10억원이 벌어진다는 차이나 드림에 벅차 북경, 상하이, 산동성, 요녕성, 강소성, 광동성 등 지역에 줄기차게 태극기를 꽂았다. 시험을 거치지 않고 빽으로 명문대에 입학한 학생이 잔혹한 대학생활을 맞이하게 되는 것처럼…중국진출의 열정과 자신감은 냉혹한 현실속에서 좌절하기 시작하였다. 세계의 역사를 보면 어느 나라도 신하나 내시에게만 의지하는 성군이 없었던 것처럼 언어가 통한다는 이유로 현지 동포직원에게 과도하게 의지하면서 구매관리, 고객관리, 직원관리를 소홀히 하며 많은 기업들의 경영이 난관에 부딪치기 시작하였다. 물론 이는 일부 실패의 요인에만 불과하다. 20년전 어느 삼성출신 중국 주재원이 쓴 책을 본적이 있다..중국에서 실패하지 않는 비법 중에서 1위가 중국여인과 거리를 두라는 것이다. 주색을 삼가라는 말이 당연해 보이지만 이 역시 그 시기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의 수준을 여실히 들어냈다. 결국 21세기에 들어서서 많은 제조업기업들이 중국을 탈출(심지어 야반도주)하게 되면서 중국 제조업 진출의 열풍은 서서히 저물어갔다. 이로서 제조업이 테마를 이루던 한중간의 사랑 드라마 1화는 막을 내리며 다음의 10년을 그리는 새로운 막이 열렸다. 제2화 2002~2012 동거의 시대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제조업의 중국 정복은 순탄하지 않았지만 한중관계는 갈수록 돈독해졌다. 조심스럽게 상대방을 알아가면서 사랑의 싹을 틔우던 연인은 이제 동거를 하기 시작한 것과 같았다. 제조업을 중심으로 한 10년간의 하드웨어 교류의 시대를 넘어 소프트웨어 교류의 시대가 막을 올렸다. 이때부터 한국음식, 한국문화, 한국패션이 본격적으로 중국에서 대중화되기 시작하였다. 한국 드라마, 한국 음악이 중국에서 서서히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서 중국보다 더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한국은 중국인이 흠모하는 나라가 되였다. 젊은 층은 한국 현대문화의 모든 것을 따라하고 싶어했으며 우호적인 외교관계도 한중양국 국민감정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북경 올림픽 전까지만 해도 경제력이 3~4위에 불과하던 중국이 미래 G2 가 될 것이라는 예측을 과대평가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때만 해도 중국은 일인당 GDP가 3000달러 조금 넘는 빈국이였고 국민들에 있어 국가가 부강해진다는 기대감만 있을 뿐 미국을 도전할 수 있는 초강대 국으로 성장할 것이란 자신감은 아직 턱없이 부족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 한국 학생의 중국유학 붐은 최고조에 달았으며 21세기 초반 월드컵 진출, 올림픽 유치, WTO진입 3대호재가 터지면서 “중국이 미래다”라는 여론이 세상을 뒤덮으며 한국 내 중국어 교육기관들은 최대의 호황을 누렸었다. 북경의 HSK학원에는 한국인 수강자들로 북적였으며 모든 중국의 대학교에는 한국인 유학생이 항상 1위를 차지하였다. 중국인의 해외관광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늘어나면서 한국방문 관광객이 100만명을 돌파하기 시작하였고 재한 화교들은 중국과의 혈연적인 연고를 무기로 내세워 중국인 인바운드 여행과 쇼핑을 거의 독식하다시피 하면서 한중 관광산업의 새 시대를 열어갔다. 이 시기는 한중간의 관계가 가장 안정적인 시기였으며 외교관계, 문화교류, 경제교류 모든 면에서 엄청난 변화와 성장을 가져왔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동거를 겪으면서 서로 간의 단점들이 속속히 들어나면서 한중관계는 새로운 양상을 맞이하기 시작하였다. 제3화 2012~2022 모순의 시대 20년간의 동거동락을 겪으며 한중관계는 새로운 시기에 접어들기 시작하였다. 한국에서의 중국열풍도 만만치 않겠지만 중국에서의 한류는 최고조에 달하며 주변국가의 질투를 살 정도로 뜨거웠다. 외교관계 같은 정치적인 요소를 떠나서 대중문화적인 영향력을 봤을 때 한국을 10으로 보면, 미국이 7, 일본은 4, 기타국가 합치면 3이였다. 이때가 한중 양국은 과거 수천년 교류 역사상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된 시기였을 것이다. 지난 역사상 한중관계 가장 가까웠던 시기는 아마 명나라 때였다. 明史를 보면 그때의 한중관계를 이렇게 평가했다 “他國不敢望也”(다른 나라가 넘볼 수 없을 정도로 밀접했다). 21세기에 들어서 한중관계가 바로 이렇게 “타국불감망야”가 된 것이다. 그러나 중국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物極必反(어떤 사물이든간에 도가 지나치면 그 반대로 바뀐다) 한중관계는 지나친 열정시기를 겪으며 결국 그 반대로 돌변하게 된 것이다. 한중관계는 정치인들과 경제인들만의 파티가 아니라 대중 속에 그 뿌리가 있다. 한중관계의 밀접함은 대중문화에서 여실히 반영 되였다. 중국의 방송을 켜보면 10대 예능프르그램 중 8개 한국 프로그램 포맷을 번안한 것이였다. 한국에서 인기있는 무한도전, 나는 가수다, 복면가왕, 진짜 사나이, 아빠 어디가, 슈퍼맨이 돌아온다, 런닝맨, 히든싱어 모두 중국에서 그 모조품을 볼 수 있었다. (물론 단순 도용이 아니라 대부분 저작권료를 주고 사들인 것이였다) 저자는 이런 광경을 목격하며…드디어 올 것이 온다는 안좋은 예감이 들었다. 한국 방송에서 중국의 예능 포맷이 80% 차지하고 중국 연예인이 한국 드라마 주연들을 독식한다면 한국 국민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결과는 뻔하다…엄청난 후폭풍이 휘몰아치게 되는 것이다...그러한 전략적인 타산이 없이 2020년 마스크 붐 때 너도나도 마스크 사업하듯이 중국의 방송사들은 무분별하게 한국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결국 경착륙이란 국면을 맞이하게 되였다.. 사드사태는 다들 아는 내용이니 여기서 거론안하겠지만. 사드를 빌미로 행해진 한한령은 사드라는 계기를 이용했을 뿐이지 절대로 사드만이 불러온 결과가 아니라고 본다. 외국의 문화가 본국의 문화 발전공간을 무참히 짓밟고 본국 문화의 생존토양을 파괴했을 때는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 전세계 어느 문화도 한류가 중국에 끼친 영향처럼 큰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아무리 미국이 문화 선진국이라고 해도 영국과 멕시코의 문화를 이처럼 송두리째로 바뀌지는 못했지만 이 밀월기의 한국은 중국에서 그런 것을 이뤄냈다. 이는 칭찬이 아니다…오늘날의 국면을 자초한 도화선이라고 본다. 2016년 6월까지만 해도 태양의 후예를 정점으로 한류는 중국을 점령하면서 문화 식민지를 확장해 나갔다. 그러나 이 과열된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바로 ‘사드’가 그 ‘총알받이’가 된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2016년 7월 사드배치를 발표하면서 중국 정부에 한류를 경착륙시킬 명분을 주었다. 과도한 한류의‘횡포’를 지켜보던 중국 정부는 사드 사태에 대한 1차 타격목표로 한류 문화를 지목하게 되었다. 한중경제교류에 있어 한국문화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중국의 젊은 세대에 미치는 영향은 간과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음으로 부득이 손을 보게 된 것이라고 중국국내 전문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한한령의 실시가 6년 지나면서 중국은 자국문화가 빼앗긴 고지를 되찾으며 포스트 한류시대 중국 본국 문화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주식시장에 청소부 법칙이란 재미있는 룰이 있다. 즉 모 주식을 청소부마저 관심가지고 샀을 땐 그 주식을 과감히 매각해야 한다는 것이다…즉 과열은 과냉을 초래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세번째 10년은 한중관계가 파란만장한 애정 스토리를 전개하는 과정이다. 곧 결혼을 할 것처럼 뜨겁게 사랑하다가 상대방의 단점이 하나 둘씩 보이고 거기에다 양가 부모의 반대, 주변인들의 험담, 자기 정체성의 약화를 겪으며 과연 이런 사랑이 진정으로 행복한지를 느끼게 하는 고비를 겪게 된다. 그 전환점이 사드라는 돌발사태로 인해 발생된 것이긴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계기일뿐 예고된 결과라고 말하고 싶다. 한중관계는 지나칠 정도로 뜨거웠던 것이 문제라고 본다…중국이 소위 혈맹이나 전통우방국가라고 이야기하는 북한, 파키스탄, 라오스 등 국가와의 관계를 보면 한국처럼 가깝게 지낸 적이 없다. 물론 이는 한국의 문화적인 선진성에서 유래되었지만 이러한 과도 밀접한 관계는 서로 간의 기대를 지나치게 부풀리게 되고 판단을 흐트리게 되며 상대방과의 문화적인 차이, 제도적인 차이를 약화시키다가 특정 시기에 특정 계기로 그 모순이 폭발하게 된 것이다. 사드는 한국의 친중파를 피말리고 씨말리게 만들었으며 중국의 민심을 한순간에 떠나게 만들었다. 또한 한국국민도 덩달아 중국을 불신하기 시작하였으며 중국과의 사랑이 결혼대상자에서 그냥 친구로라도 지냈으면 좋겠다는 관계로 강등하게 되었다. 제4화 2022~2032 냉정의 시대 올해가 한중 두 국가의 멜로드라마가 방영 된지 30주년을 맞이하는 시기이다. 공자님은 30이립(三十而立)이라고 이야기하였는데 군자는 서른살이 되면 가정을 이루고 철이 들 때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30년전 경제적으로 막상막하하던 중국은 이젠 어느덧 한국 경제력의 10배가 된 G2국가가 되었고 중국과 수교하면 큰 이득이 생길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이젠 국운을 좌우지할 만큼 중요한 국가관계로 부상하게 되였다. 중국의 속담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三十年河東,三十年河西(삼십년은 하동에서 삼십년은 하서에서). 이제 한중관계는 30년간의 사랑과 원망을 겪으며 성숙된 어른이 된 것이라 본다. 또한 한중관계라는 고정적인 패턴도 이젠 30년의 역사를 겪으며 새로운 30년을 맞이하게 된다. 미래의 한중관계는 어떻게 변모할 것인가? 이 글에서 필자는 단순히 한중관계 과거 30년을 돌이켜 보는 것뿐만 아니라 미래 20년간 한중관계에 대해서도 전망을 적고자 한다. 30년전 한중 수교당시 한국은 미국의 눈치를 볼 필요없이 자유롭게 중국과의 관계를 정립할 수 있었지만 어느덧 미국과 대등한 체격으로 성장한 중국이 미국의 최대 경쟁자가 되면서 한중관계에 있어 새로운 변수로 등장하게 되었다. 현재 한중관계는 항상 미중관계, 한미관계라는 변수들을 고려해가면서 대응해나가는 관계로 변모되면서 한국 정부에게 새로운 숙제를 마련하였다. 한중관계의 30년은 사실 두 연인이 맞선을 보면서부터 사랑에 빠지고 동거하고 서로 의심하고 관계가 나빠지는 식상한 멜로드라마의 스토리를 연출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파혼하게 된 것이다. 앞으로 다시 관계가 좋아질 수 있을까라는 시청자들의 궁금증이 많겠지만 필자는 이제는 과거로 돌아가기 어렵다고 본다…사드문제가 해결되고 양국 국민의 감정이 회복되었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10대부터 시작하여 20대를 겪으며 철없이 사랑에 푹 빠져 정신 못차리던 시기를 넘어서 이젠 성숙해졌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한중양국은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서로 다른 가문에서 태어난 연인으로 사랑을 이루기엔 너무나 많은 난관을 극복해야 한다. 어찌보면 양국의 관계라는 것은 무거운 결혼보다 서로 애뜻한 정을 주고받는 애인관계가 더 아름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핀란드 친구의 말이 생각난다…어떻게 스웨덴을 평가하냐고 물으니 핀란드 남자는 스웨덴 남자들은 대부분 게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필자가 핀란드 사람은.스웨덴 사람을 좋아하지 않은 것이냐 따지니 하는 말이 “사이좋은 이웃국가가 없잖아요”라고 대답했다. 정말 그런 것인가? 중국의 주변국가 중 중국을 좋아하는 나라는 몇이 되는가? 또한 한국의 이웃국가 중 한국을 좋아하는 나라는 얼마인가? 아마 답은 머리 속에 떠올랐을 것이다. 강대국 속에서 생존과 발존을 모색하는 상황은 21세기 20년대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중국왕조의 전환기에 한반도 왕국이 항상 겪던 일이였다. 한나라와 흉노를 사이 둔 고구려, 고구려와 당나라를 사이 둔 신라, 거란과 송나라를 사이 둔 고려, 원나라와 명나라를 사이 둔 조선, 청나라와 명나라를 사이둔, 조선 고비마다 지혜롭게 강대국 사이에서 생존전략을 모색하며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고 사직을 지킨 한반도의 왕국은 이 시대의 미중 양국의 경쟁구도 속에서 슬기롭게 난관을 이겨낼 것이라고 본다. 물론 그 과정이 험난하고 고달프고 마음이 힘들어도 말이다. 그것이 이 반도의 동포들이 회피하기 힘든 숙명일 수 있겠지만 그런 고난 속에서 더 강인해지고 똑똑해지는 법이다…그러한 차원에서 한반도는 중국왕조보다 더 강한 생명력을 가졌었다. 이 10년은 중국이 미국을 초월하여 세계 최대 경제강국으로 부상하는 시기일 것이다. 물론 PPP방식으로는 10년전에 이미 미국을 초과하였지만 허영심이 강한 백인은 실질보다 명목을 더 중요시한다. 그래서 올림픽에서도 자신에게 유리할때는 금메달로 순위 매기지 않고 메달수로 순위를 매긴다. 미쏘 갈등은 백인 내부 이데올로기적인 모순에 불과하다면 미중 갈등은 문명의 시프트를 상징함으로 엄청 신경쓰고 있는 것이다..문제는 이러한 동양 문명의 시프트가 10년 안에 이뤄질 것 같은 두려움에 빠지면서 오늘날의 국제관계를 혼돈에 빠뜨리게 만든 것이다. 서양문명은 중국의 부상을 저지하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겠지만 14억 인구인 중국의 발전 모멘텀을 막기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 있어 설마 중국이 경제적으로 넘버원이 되었다고 하여 엄청난 세계정치경제지형의 변화를 불러올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한국은 수천년간 겪어왔던 것처럼 세계의 정상으로 복귀한 중국을 맞이하게 될 것이지만 이는 하나의 축복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전세계에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4대 강국이 에워싸고 있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거인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총각이라고 생각하기 보다 여러 미남들에 의해 에워싸인 미인이라 정의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는가? 한국은 중국, 미국, 일본, 러시아 모두에 있어 항상 존중하고 아껴주고 자기 편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국가이다…드라마의 한장면이 떠오른다…어느 남자가 미인을 넋이 빠져 바라보다가 그 여성이 불쑥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시무룩해진 장면… 역시 미인은 싱글일 때가 더 매력적이다.. 정치적인 이야기를 조금 가미하자면 이 시기에 한국은 친미, 친중, 친일을 논하기 보다 모든 사안을 개별적으로 쪼개 국익에 부합되고 대다수 국민의 이익에 부합되고 실보다 득이 더 많은 것만 골라서 사안별로 입장을 취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이유는 “미인은 싱글일 때가 더 매력적이기 때문이다”..그래서 전세계의.미인 선발대회엔 미쓰만 참가할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시기는 또한 포스트 코로나의 시기이다. 포스트 코로나의 최대의 수혜주는 무엇인가? 두말할 것 없이 관광일 것이라 본다. 중국의 코로나 봉쇄가 해소되고 해외 관광이 자유로워지면 해외관광시장은 과거의 5배로 커질 것으로 예상하며 연간 5억명의 중국인이 해외 관광을 나설 것으로 본다. 코로나 기간 동안 힘든 민생을 무엇으로 달랠 것인가? 내부적인 지원책과 개혁만으로는 역부족일 것이다…외부적인 힘을 빌어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것이 답이 아닌가 생각한다. 꿈 같은 이야기일 수 있겠지만 2023년 중국관광객 5천만명이 한국 방문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때 되면 한국의 대부분 서비스산업, 상당수 제조업이 혜택을 볼 수 있다. 코로나로 인해 식어간 모든 상권이 관광산업의 부흥으로 인해 엄청난 호황을 누릴 것이 틀림없다. 중국이 밉든 곱든, 인접국가로서 최대의 고객이란 사실은 변함이 없다. 중요한 것은 중국이란 시장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정부의 지침대로 움직이는 대형 시장임으로 한중관계의 꽃길 같은 미래만 꿈꿀 것이 아니라 그 꿈이 현실이 되도록 모든 이가 그 밑걸음을 깔아야 한다. 그 사이 맺힌 것도 많고 얽힌 것도 많고 섭섭한 것도 많겠지만…연인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포스트 코로나를 맞이하며 한중 양국이란 연인이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는 시기이다. 농담하나 하겠다. 오래 전에 헤어진 연인이 전화 올 땐? 정답은 “다단계 영업”이라고 한다….이것이 제 4화의 줄거리이다. 제5화 2032~2042 격변의 시대 2032년의 세상은 어떻게 변모할 것인가? 10년후의 세상을 예측하긴 쉽지 않겠지만 현실을 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중국의 부상은 모멘텀에서 현실로 이뤄질 가능성이 높으며 미국은 여러가지 내부/외부적인 요인으로 말미암아 순탄치 않은 10년을 겪으면서 과거와 같은 영광을 누리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본다. 북한에 대한 예측은 항상 어긋났음으로 변수가 아닌 그냥 무시해도 좋은 상수로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또한 한국은 일인당 소득이 4만 5천불이상의 선진국으로 도약할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한중관계는 10년의 냉정기를 겪으며 새로운 시기에 들어설 것이라 보는데 학계나 정계에서는 여기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사람이 없는 것 같아 좀 안타깝다. 물론 예측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담대한 가정을 전제로 새로운 세상을 분석하며 한중관계를 다시 짚어보고자 한다. 지금 중국은 미국의 압박 속에서 어렵게 생존의 틈을 찾아가고 있는데 가장 큰 아킬레스건은 바로 반도체이다. 그러나 미국의 봉쇄가 과연 주효한지를 심각히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초기에는 중국에 대한 반도체 봉쇄를 통해 중국의 성장을 늦출 수는 있겠지만 중국이란 거대한 공룡의 돌진을 막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본다. 10년 후 중국이 만약 반도체의 독립을 이뤘을 때 그때 세계의 패권은 진정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문제는 기술의 초격차를 지향하는 한국의 반도체 산업이 미국의 영향 아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중국의 오기를 불러일으켜 10년의 시간으로 그 기술격차를 극복했을 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이냐는 고민을 해보았는가? 실제로 지금 중국인 이미 자국기술력으로 7나노 반도체 파운드리를 이뤄냈다. 아직 삼성과 TSMC와 상당한 격차가 있지만 중국 상하이 중심국제반도체 회사의 리더가 바로 TSMC와 삼성의 기술혁신을 이뤄낸 CTO 량멍숭이란 사실이다. 반도체는 하나의 산업기술에 불과하지만 미래 10년 심지어 50년간의 국제관계를 재정립하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바로 이런 요소 때문에 미중간의 디커플링이 쉽지가 않고 또한 국제관계의 이합집산이 이뤄지고 있다. 과거 20년간 한국은 항상 중국의 최대 수입국이였으며 중국은 한국의 최대 흑자국이였다. 중국이 미국에서 수천억달러를 벌어오면 거기에 한국이 수백억달러를 인출했던 구도였다. 그러나 올해에 들어서서 한중 교역은 처음 적자로 돌아섰다. 이는 액시던트가 아니라 이제는 자연스러운 모멘텀이라고 본다. 그동안 한국이 중국으로 수출한 제품 중 대다수는 중간재였다. 특히 미국으로 수출하는 비중이 제일 컸다. 그러나 미중갈등으로 인해 미국의 하이테크 중국제품 수입이 줄어들면서 중국의 한국 중간재 수입도 줄게 되었고 중국 자체 생산 원자재의 발전은 한국산의 수요를 감소하게 만들었다. 이런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한국의 산업은 과거의 패턴 그대로 작동하고 있지만 중국은 이미 크게 변하고 있다. 과거 20%이상 차지하던 삼성 핸드폰의 시장점유율은 0.5%로 떨어졌고 인기가 절정에 달하던 현대기아차도 이젠 중국차와 가격을 겨뤄야 하는 현실로 되고 있다. 이마저도 참담한 현실인데 10년 후는 어떻게 될 것인가? 현시점에서도 중국은 세계 최대의 핸드폰, 배터리, 전기자동차 생산국이다. 이는 이미 양적인 우위를 벗어나 질적인 우위라 내달리고 있다. 그럼 10년 후면…믿고 싶지 않겠지만 중국기업은 중국 방방곳곳에서 메이드 인 코리아의 악몽이 될 수도 있다. 과거 신발이나 가전처럼 말이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도 아직 초격차를 운운하고 있다. 초격차는 이 10년간은 유효하지만 다음 10년은 어떻게 할 것인가? 초격차가 무격차가 되면 다음은 뭐로 먹고살 것인가? 전세계 역사상 어느 국가도 이처럼 초고속으로 성장하면서 글로벌 시장을 잠식한 이웃국가를 마주한 사례가 없었다… 중국의 위협은 현실뿐만 아니라 미래까지도 커버될 날이 멀지 않다. 삼성보다 싸고 좋은 메모리, 스크린, 핸드폰, 현대보다 싸고 좋은 자동차, 로보트, 한화, SK, 롯데, LG보다 싸고 좋은 화학원료의 메이드 인 차이나가 세계를 석권할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필자는 중국의 위대함을 칭송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현실에 무감각하고 근거 없는 자신감이 팽배한 이 시대의 풍조를 바로잡고 싶을 뿐이다. 미래 10년후의 한중관계는 지금 겪어보지 못했던 심지어 과거 수천년간 겪어 보지 못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것이라 본다. 역사 속에서 한반도는 현재의 중국처럼 나락에 떨어졌다가 다시 정상으로 복귀한 시대를 겪어보지 못했다. 미래의 10년을 대비하려면 대한미국은 어마어마한 중국전문가를 양성해야 하고 중국의 산업구조 산업발전을 제대로 분석하고 대응해야 한다. 중국과 등진 경쟁자가 아닌 중국이란 거대시장과 거대경장 속에서 자신의 포지셔닝을 제대로 하고 변화를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특공대가 되야 한다. 중국시장과 생산과의 융합도 심각하게 고민하고 분석해야 한다. 이는 특정 기업만이 아니라 전체 국가와 국민적인 차원에서 다뤄야하는 숙제이다. 이 숙제를 잘 푸냐 못 푸냐는 미래 10년뿐만 아니라 미래 100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본다. 현재 반중정서가 팽배해 있는 시기에 중국을 알고자 하는 사람이 날 따라 줄어들고 중국 전문가들도 갈수록 주목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 중국은 어둠속의 도둑처럼 조용히 질주하고 있지만…대한민국은 태평성세의 연예가무에 빠져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걱정이 든다. 사드 때가 위기이가? 진정한 위기는 다음 10년이라고 본다. 중국이란 거대 공룡을 옆에 두고 과연 몸집이 작은 파충류가 먹이를 구할 수 있을 것이란 현실적인 걱정이 든다…그러나 이 땅에서 과연 누가 이런 심각한 고민을 해보았는가? “중국은 파멸할 것이다. 분열할 것이다”라는 허황된 꿈으로 자기 위로하면서 살아갈 것인가? 노키아와 모토롤라의 몰락을 보면 경쟁 속에서 잘못된 전략이 얼마나 큰 피해를 초래할 것인가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21세기 30년대의 한중관계는 지금과 완전히 다른 면모를 보일 것이다. 자신감이 넘치고 교만함까지 보이며 실질적인 파워까지 겸비하고 심지어 비민주적이란 프레임마저 사라진 미래의 중국을 다룰 생각을 지금부터 준비하지 않고 그냥 어영부영 10년을 넘기다가 엄청나게 후회할 것이라 경고하고 싶다. 중국을 경계하고 두려워하기보다 옛정을 그리며 앞으로 어떻게 화합하며 살아가고 중국 부상의 피해자가 아닌 수혜자로 될 수 있는 가가 21세기의 나머지 시간의 테마가 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친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중(知中)이고 중중(重中)이다. 그런 의미에서 친미는 현상유지, 친일은 과거유지, 친중은 미래유지이다...라는 정의를 내릴수도 있다. 이로서 한중양국이 50년간 이뤄진 멜로드라마가 NEXT 시즌을 기대하며 종영이 된다. 한중수교 60주년일때는 환갑의 나이의 두 노인의 사랑 스토리가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다...영화 "은교"처럼 될 것인가? "죽여주는 여자"처럼 될 것인가? 그것은 다음세대 출연자들의 몫이 될 것이다. 필자에 대해 당신이 뭔디 이렇게 거창하고 허황된 이야기를 꾸미는가 질타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나중에 지켜보면 이 드라마가 제가 예상한 각본대로 연출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럼 여기까지…글을 마치고 2032년에 다시 2탄을 올리겠다. 그때까지 이 글의 독자와 한중관계 모두 건강하시기 기원한다. 2022년 8월 24일 서울에서 (By Star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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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의 '정치적 유산'
● 양백강, 로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일본 총리가 2022년 7월 8일 거리 연설에서 67세의 나이로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아베 신조 피살 사건은 일본 정계는 물론 국제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아베는 전 일본 총리로서 자신의 기록적인 초장기집권과 일본 내 보수세력에 대한 막강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전후 일본 정치사, 국가전략 진화의 한 축을 차지하는 등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 파장을 남겼다. 아베 자신은 역사가 됐지만 일본의 미래 국가 발전 방향에 대한 조명은 아베의 '정치적 유산'이라는 시각에서 살펴볼 수 있다. 정치인 가문의 출신인 아베는 1993년 7월 중의원 의원으로 처음 당선돼 당시 최연소 국회의원이 됐고, 2006년 9월 총리가 돼 첫 전후 출생 총리가 됐지만 1년도 안 돼 물러났다.이후 5년간의 칩거 끝에 2012년 9월 자민당 총재에 당선되고 12월 총리에 취임하면서 7년 8개월여의 '아베 시대'가 열렸고, 아베는 헌정 사상 최장수 총리가 됐다. 2020년 8월 퇴임 후 짧은 휴양을 거쳐 정계에 복귀한 아베는 정계 보수세력을 결집했다. 2021년 11월 아베가 자민당 최대 파벌인 호소다파 회장에 취임하면서 아베계로 기치를 바꾸는 등 정치권에서 강세를 보였다. 장기간의 임기를 제외하면 아베의 정치적 위상은 당시의 국제환경과 국내 정치상황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2007년 아베 총리 사임부터 2012년 재집권까지 5년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미·서방 국제체제에 크게 의존하던 일본은 충격을 받았다. 자민당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아소 타로(麻生太郞) 정권, 후속 민주당 3선 내각이 모두 난국에 빠졌다. 상대적으로 미국과 유럽의 패권이 쇠퇴하고,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들이 집단적으로 부상하면서 2010년 중국 경제는 처음으로 일본을 추월하며 격차를 벌렸다. 국제 권력구조, 글로벌 거버넌스 시스템의 심각한 변화, 각 분야의 질서, 규칙, 발언권 다툼이 날로 치열해지고 일본의 대외위기의식, 국제게임의식이 나날이 증가하고 있어 '강인정치'에 대한 요구가 더욱 절실해졌다. 당시 요미우리신문 사설은 잦은 총리 교체로 일본 지도자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외국 지도자의 모습은 "일본에 수치"라고 했다. 이런 '비정'적이고 대외적인 주장을 더욱 강하게 하는 전략적 마인드와 여론의 분위기는 아베가 재집권해 장기집권을 이어갈 수 있는 중요한 전제조건이 됐다. 총리 재임 후 아베는 계파적 자원과 정치적 수완을 앞세워 당내 최고 권력을 장악했고, 자민당의 6연속 총선 승리를 이끌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우경화 보수적 정치관과 국제정세 및 일본 국민의 마음가짐 변화를 긴밀히 결합시켜 전략적 행동을 통해 일본을 '강대하게' 만들겠다는 자신의 정책 철학을 제시했다. 실제로 아베는 초대 총리 시절부터 방위청 승격, 교육기본법·국민투표법 개정, 해양기본법 제정 등을 추진해왔다. 2012년 이후 긴 임기 동안 아베는 정치·안보 분야에서 일본의 '자립'과 '자주'를 체계적으로 강화해 더 큰 '전략적 공간'을 넓히려 했다. 아베가 역사교과서 추가 수정, 무라야마 담화 부인 등 기존 역사 발언, 전후 외교 총결산 추진 등을 통해 일본 정치의 우경화를 가속화하고 아시아 이웃 국가들에서 우려를 낳고 있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아베 시대'는 냉전 이후 일본의 국가전략 전환 발전의 중요한 단계로, 일본이 금융위기 이후 세계구도, 국제질서 변화에 적응하는 데 중요한 시기였다. 이 시기 '아베 노선'은 안보 분야의 '돌파'를 접점으로 국가전략의 전환을 추진하고, 다각화된 외교수단을 활용해 '종합전략의 활성화'를 높이겠다는 것이 기본 발상이었다. 국제사회, 특히 아시아 국가들이 이런 돌파구에 대한 우려와 의구심은 자명하다. 개헌 추진, 자위대 입헌 지원 외에 아베 주도로 2013년 첫 국가안전보장전략, 일본판 국가안보회의(NSC) 설립, 방위계획대강 조기 개정, 2014년 내각 정령으로 집단적 자위권 부분해제, 새로운 방위장비 이전 3원칙 마련, 2015년 평화안보법안과 국제평화지원법안, 이른바 신안보법 제정, 적에 대한 공격능력 보유 및 대형화·공격무기장비 플랫폼 도입 검토, 대외방위협력, 외교정책 안전화 등을 추진했다. 안보 분야에서도 아베가 추진한 '개혁'은 전략체제, 법치의 틀, 집행체제, 역량건설의 모든 측면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어 전후 일본 보수세력의 전후체제 돌파와 '안전 자주' 실현이라는 기본적 발상을 답습할 뿐 아니라 일본 안보전략의 외향성과 공격성을 더욱 가속화했다. 이는 평화헌법의 굴레를 뚫고 일본의 '국방정상화'와 '군사대국화'를 가속화하는 것이다. 이런 움직임은 일본의 안보정책과 방위정책, 방위력 건설 목표의 대전환을 예고하고 있어 아태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위협이 되고 있다. 외교 분야에서 아베는 '전략적 외교'를 적극 추진했으며, 재임 기간 동안 총 비행 거리는 158만km로 80개 국가와 지역을 방문했으며 이는 지구를 39바퀴 도는 것과 같다. 아베 총리는 또 '지구 외교' '적극적인 평화주의' '자유롭고 개방적인 인도태평양' 등의 개념을 내세워 '도덕적' 색채를 부각시키려 했다. 하지만 사실 아베 외교는 고도의 현실주의, 실력주의, 지정학적 경쟁 사고를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강대국의 게임이 그의 핵심 관심사다. 아베의 입장은 미·중 간 총체적 균형을 유지하며 '좌우를 만나다'는 전략 아래 미·일 동맹의 '체제 내 발전'을 견지하고, 대외정책의 융합을 추진하고 경제·안보·문화적 수단을 통합 운용해 '중등 세력' 특히 유럽·인도·태국과의 전방위적 전략적 협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일본 국내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아베는 그동안 위축되었던 일본 외교를 크게 뒤집고 국제 담론력을 강화했지만 많은 논란과 문제점도 남겼다. 아베는 역대 총리 중 최장수 집권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정치인의 업적은 시차를 두고 평가되지 않는다. 내부적으로는 우익세력의 요구에 부응하고 외부적으로는 미국을 숭배하고 추종했지만, 저출산·고령화, 디지털 시대의 발전, 주요 외교 문제는 제때에 해결되지 않았다. 실제로 아베 총리가 2020년 8월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그의 '정치적 유산'에 대한 논쟁은 계속됐다. 아베의 '정치 유산'은 개인적 색채가 뚜렷하지만 전후 일본 보수 정치세력의 국제질서, 일본 국가 발전에 대한 해석을 대변한다.이런 해석은 1980년대 중후반부터 '정상국가론' '정치군사대국 몽'이라는 형태로 일본의 국가전략 방향에 영향을 미쳤다 아베는 그동안 자신을 '열린 보수주의자'라고 칭하며 자신의 보수적 정치이념을 확산시키고 개인 정치권을 공고히 하는 데 열심했다. 장기 집권을 거치면서 아베 주변에는 보수 정치인이 대거 포진했고, 그 중 적지 않은 수가 자민당과 정부 고위직을 차지하며 '아베 독트린'의 추종자이자 집행자로 자리매김했다. 현 일본 정계의 보수세력의 '정신적 지도자'인 아베의 죽음은 추종자들의 추종을 중단시키기는커녕 이들의 더 집요한 행동을 자극해 아베의 '미완의 의지'를 완성하겠다는 자세로 공감과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다. 아베의 후계자인 스가 요시히데와 기시다 후미오는 인맥·공직 경력에서 아베와 그의 측근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두 사람 모두 '아베 색채'에서 벗어나 자신의 특색을 살리는 경향이 있지만, 스가 시대 정책이나 지금까지의 기시다 정권의 정책을 보면 전체적으로 '아베 노선'을 답습하고 있다. 기시다가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자주방위정책과 '신시대 현실주의 외교'도 아베의 정책과 유사하다. 기시다가 자신의 특성을 과시하기 위해 제안한 '일본식 신자본주의' 경제·사회 정책도 정책 여백이 부족해 '아베노믹스'로 회귀할 위험이 있다. 동시에 아베의 '정치적 유산'이 일본의 정치적 현실을 완전히 뒤흔들 수는 없다는 점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외교안보정책 분야에서 일본의 '전략적 주관성'과 '역동성'을 모색하겠다는 아베의 제안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길잡이 역할을 계속할 것이다. 대만 문제에 대해 아베 총리의 '대만 공동방위'에 대한 미일군사 개입 등 허위 주장은 일본의 현실적인 정책이 되기는 더욱 어렵다. 한반도와 러시아에 대한 외교 측면에서도 현 정부는 아베 총리의 기존 사고방식을 현 상황에 맞게 바꾸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현재의 러시아-우크라이나 분쟁을 배경으로 일본이 국제위기를 이용하여 국내의 전략적 변혁을 촉진하고 해외의 전략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관행은 아베 시대의 그림자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질서의 변화와 국가의 전략적 변혁에 직면하여 일본의 구체적인 대응책은 변함이 없을 것이며 아베의 '정치적 유산' 중 비합리적이고 비건설적이며 지속 불가능한 내용은 결국 폐기되고 잊혀질 것이다. 작자 양백강(楊伯江)과 로오(盧昊)는 각각 중국사회과학원 일본연구소 소장, 부연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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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룡 칼럼]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한국 이념논쟁
- ●김정룡(다가치 포럼 대표) 현시대 유명 정치학자로 손꼽히는 하버드대학교 샤무엘 헌탕턴 교수는 1996년 저서 『문명의 충돌』을 출간했다. 책이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로 반응이 뜨거웠다. 그는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2년 후 소련이 해체됨에 따라 냉전 시대가 종말을 맞았다. 냉전 시대 인간은 대체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진영의 이념에 각각 속해 있었다. 냉전이 종말 된 미래사회에서는 이념이 무의미해졌고 따라서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갖게 되면서 다른 귀속처를 찾게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귀속처가 바로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라고 제시하였다. 그가 말한 귀속처는 새로운 문명이 아니라 과거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실제로 탈냉전 후 지구촌의 인간무리들은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에로 재편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중국의 경우 개혁개방 전 해외 화교 화인들 중 고국을 못 마땅해하는 사람들도 개혁개방 이후 즉시 돌아서서 고국에 투자를 서슴지 않았다. 아세아 최고 부자 리카싱(李佳成)이 투자에 나서자 주변에서 ‘사기당하면 어쩌냐?’고 말리자 그는 ‘사기당해도 고향사람들에게 당하는 것인데 사기라 생각하지 않고 도와주는 것이라 여길 것이다.’라고 말했다. 재벌은 남다른 배포가 있는 법이다. 싱가포르 리콴유(李光曜) 전 총리는 본래 반공자였다가 개혁개방 이후 유교 전도사를 자칭하고 나서 중국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이것이 바로 이념을 탈피하여 민족문화에로 회귀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2008년 북경올림픽 개막식 주제가 공자였는데 이것은 전통문화에로의 회귀를 뜻한다. 1990년 초 동구권에서 있었던 코소보 인종청소 전쟁은 종교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아무튼 세상은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흘러가고 있는 추세이며 이미 새로운 역사 흐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지구촌의 흐름을 역행하는 곳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한반도이다. 동서 독일이 통일되고 남북 베트남도 통일되어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문화로 굴러가고 있다. 오로지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은 것은 남북한이다. 1990년 베이징아세아게임 때 한국관광객이 대량 백두산투어에 나섰다. 그때 한국여행사 에스코트 00사장이 한 말이 지금도 뇌리에서 생생하게 맴돌고 있다. “참 세월이 놀랍게 변했어요. 우리가 중국 땅을 밟으면서 백두산 구경을 할 것이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현실로 되었어요. 이 추세대로라면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남북통일도 10년이면 되지 않겠어요!” 그 후 2000년 김대중 대통령께서 북한을 방문하자 매체들이 ‘10년 안에 통일이 이뤄질 것’처럼 떠들었다. 그런데 그 후 강산이 두 번 변하고도 3년이란 세월이 흘러가고 있는 현재 남북통일이 가까워지기는커녕 점점 더 요원해지다못해 요즘은 아주 적대관계가 심각해지고 있는 중이다. “가장 중요한 게 이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일전에 국무회의에서 한 발언이다. 시중에서는 모두 뜬금없는 발언이라고 하기도 하고 때아닌 이념타령이라고 공격하기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이 발언이 확실히 케케묵은 이념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이게 무슨 시대인데 아직도 이념타령이라니? 역사를 거스르는 행위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요즘 한국 사회는 홍범도 장군의 정체성을 갖고 논쟁 중이다. 양 진영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으로 부질없는 일이다. 1943년 홍범도 장군이 사망할 당시에는 침략당한 약소국가들에서 나라마다 민족주의가 우선이지 이념과 사상이 우선 과제가 아니었다. 강대국들도 마찬가지로 이념을 떠나 미국과 소련이 협력하여 반파시스 전쟁에 돌입하였다. 홍범도 장군이 소련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은 사실이나 오늘날 이념논쟁을 일으킬 사안이 아니다. 한국 정치는 할 일이 하도 없어서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안타깝다. 문제는 왜 윤석열 대통령이 이념을 최대 이슈로 들고나왔는지? 맥락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 일부 진영에서는 아직도 빨갱이타령이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다. 종북좌파타령을 70년 동안 벌여오다가 요즘에는 종북좌파 타령이 질리기도 하고 그 실체도 주목을 받기가 조금 약발이 떨어져 친중좌파 공격으로 방향을 틀고 화살을 돌리고 열을 올리고 있다. 필자는 얼마 전에 한국 지인의 소개로 한국 엘리트들이 참여하고 있는 카톡방에 가입한 적이 있다. 카톡방은 흔히 그렇듯 좋은 정보도 나누고 서로 필요한 교류도 하고 인맥도 넓히고 등등 좋은 점이 많다. 하지만 인간무리에는 취향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인데 그 취향이 정치적인 성향이 강하면 골머리가 아파난다. 어느 한 분은 윤석열 대통령을 찬양하는 ‘윤비어천가’를 올렸는데 조선 창시자 이성계를 찬양한 ‘용비어천가’를 저리 가라 할 정도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수령을 찬양하는 ‘어천가’보다 훨씬 뛰어난 솜씨로 현직 대통령을 찬양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통령을 이렇게 신을 찬양하듯 하는 것을 처음 본다. 일각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문재인 전 대통령을 평가하는 기준이 극명하게 나뉘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문재인은 빨갱이고 북한 간첩이다. 나라를 북한에 팔아 먹는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사고방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아무리 좌파 성향을 지닌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설마 나라를 팔아먹을 수가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그들은 상식을 벗어나 비합리적인 주장을 하면 이에 동조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억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 친미를 확실하게 하면 다른 분야가 조금 떨어지더라도 문재인처럼 나라를 팔아먹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그들에게는 굳건하게 박혀 있다. 윤석열 대통령을 신을 찬양하듯 하는 행위는 필자와는 하도 상관없는 일이라 개의치 않고 그냥 넘겨버리고 말았는데 다음 일은 도무지 지나칠 수가 없었다. 기름 개구리를 산 채로 끓는 기름에 넣어 튀기다가 물을 넣고 끓여 먹는다. 한 분은 친중좌파들을 개구리 산 채로 튀겨먹고 끓여먹듯이 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머리카락이 곤두설 지경으로 정신이 아찔해졌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그만이라는 속담이 있다. “미친 아낙네의 악담보다 더 저질스럽다.”는 말을 남기고 나가기를 해 버렸다. 종북좌파 타령이나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친중좌파 타령이든 모두 같은 이념타령이다. 이런 이념타령이 시중에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고 그 세력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대통령의 이념논쟁을 때가 아닌 것이라 하거나 뜬금없는 일이라는 지적은 헛발 짚는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편 한국사회에서 아직도 공산주의 빨갱이 타령이 심각한데 진짜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자가 얼마나 될까? 의문이다. 무엇을 대상을 공격하려면 그 대상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나서 공격해야 마땅하나 한국에서 공산주의 빨갱이 공격은 실체를 모르는 막무내식이어서 안타깝다. tvn방송에 <어쩌다 어른>이라는 강연프로그램이 있다. 몇 년 동안 출연을 가장 많이 했던 최진기 강사가 있었다. 그는 자칭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이다. 액면 그대로 믿기로 하고 그가 이해하고 있는 공산주의란 무엇인지? 알아보자. 마르크스의 노동 분배 원칙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이다. 최진기 강사는 이 공산주의 핵심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마르크스는 아마 아버지가 돈을 벌 능력이 있고 그 돈을 자녀가 학비로 사용하는 케이스에서 힌트를 얻어 내놓은 이론일 것이다.” 이어서 그는 유명 스타 연예인 강동원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사람을 어떻게 수요에 의해 분배할 것인가?”고 희죽거리면서 공산주의를 형편없는 애들장난처럼 매도하고 조롱하는 것이었다. 만약 공산주의가 최진기 강사의 말처럼 그렇듯 유치한 것이라면 어떻게 지구촌 반 되는 인간무리가 추종했겠는가? 능력에 따라 일한다는 것은 인간이 고도의 의식을 갖추면 타인의 능력과 비교하지 않고 또 타인의 노동기여도와 비교하지 않고 나의 능력껏 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은 공산주의사회는 물질이 풍부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되어 불필요한 물질을 탐내지 않고 사치를 탐내지 않는 전제하에서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것을 의미한다. 요점은 물질이 풍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된 사회에서 실천가능한 원칙이라는 것이다. 빨갱이 뜻은 사상이 빨갛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필자의 부친은 평생 당지서를 맡았는데 사상이 붉다못해 둘째 아들이 휴학하는 해에 참외 밭을 대신해 보게하고는 아들이 생산대 참외를 먹었다고 하여 장부에 가을에 떼어내게 기입해 놓았다고 한다. 필자가 자랄 때 동네 어른들이 늘 저한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너의 부친은 진짜 빨갛다.’는 말을 반복했다. 최진기의 자칭 최고 강사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의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이 수준이라면 진짜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자가 얼마나 될까?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 서강대 00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산주의는 제도로서 실천은 실패했지만 그 이념과 사상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분단국가로 존재하고 이직도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있는 이 민족의 현실. 언제 가야 통일되고 하나가 되어 부질없는 다툼에서 벗어날 것인지? 민족의 운명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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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룡 칼럼]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한국 이념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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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핵폐수 해양 방류 시작과 과정 그리고 결과는?
- ● 철 민(논설위원) 한·중·일 해양 안전 문제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신경전을 벌였던 일본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처리 문제가 24일 일본 정부의 바다 방류 개시와 더불어 또 새로운 논쟁거리를 몰아오고 있다. 우선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행위를 두고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나라들로는 일본의 이웃 국가들인 중국과 한국(정당과 사회단체 등), 북한 등과 거리가 멀지만, 남태평양 도서국의 반발도 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은 후쿠시마 오염수가 바다로 흘러들기 시작해서 240일이면 중국 연해에 도착한다며 정부로부터 국민 매 개인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방류 결정을 국제 공공의 이익을 무시하는 극단적으로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고 있다. 한편 중국 정부는 일본산 수산물 수입의 전면 중단을 발표하였다. 한국 언론도 한국의 여러 해산물 시장이 거의 텅 비어 있어 어부들은 미래의 생계를 걱정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24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제주도 동문어시장에서 20년 넘게 해산물 장사를 해온 한 상인은 “예전에는 오전 10시경과 오후 5∼7시(두 시간대)에 장사가 안될 때도 시장은 붐볐지만, 요즘은 손님이 없는 텅 빈 고속도로”라며 “코로나19 기간에는 장사가 더 잘됐다”라고 우려했고 한국 서부 해안 도시 군산 출신의 한 어민은 “내일 해산물 경매장에 간다고 생각하니 답답하다”라며 “해산물 소비량이 4분의 1로 줄었고 가격도 더 낮아질 것 같다”라고 탄식했다. 부산종합어시장에서는 조기 한 박스가 보통 4만 원 또는 5만 원에 팔리는데, 전국 해산물의 약 30%가 이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이번 주 수요일(23일)에는 조기 한 박스가 정상가의 절반 이하로 판매되었으며, 한국인들의 주요 해산물인 멸치는 평소보다 10~20% 정도 가격이 저렴하게 판매되었다. 24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담화문을 발표하여 일본이 이날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방류를 개시한 것은 지구 생태환경을 파괴하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면서 핵 오염수 방류계획을 강행하는 것은 자신들의 사욕을 위해 인류에게 핵 재앙을 초래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반인도적 범죄행위라고 주장했다. 이외 후쿠시마 핵 오염수를 바다로 방류하기로 한 일본의 결정을 알게 된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에 있는 한 비정부기구가 공개적으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반대하는 글을 올렸으며 또 피지 수바에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시위에 나서기로 했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은 해외의 국가와 사회단체의 규탄은 물론 일본 자국 내 어민 단체와 국민의 반발을 사고 있다. 특히 1945년 원폭 피해자 후손들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나섰다. 교도통신은 24일 원폭 피해자 후손들로 구성된 일본-전국 원폭 피해자 2세 단체 연락 협의회가 나가사키시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후쿠시마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항의했다고 전했다. 이 단체는 원자폭탄의 피해자인 히로시마가 견딜 수 없다며 성명을 발표했고, 이 성명은 총리 관저에 우편으로 발송됐다. 성명은 “원폭 피해자 2세들은 부모들이 방사능 영향으로 고통받는 것을 오랫동안 목격했고, 자신들도 유전적 영향을 배제할 수 없어 건강을 염려하고 있다”라며 “정부와 도쿄전력이 책임을 지고 육상에서 보존·관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외에도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이루다 나열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고도 높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은 국제원자력 기구(IAEA)의 감찰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IAEA의 권위성과 전문성은 인정하지만, 이 기구의 분석과 결론 모두를 믿는 건 아니다. 특히 IAEA 역시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에 대해 명확한 지지 혹은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도 않았다. IAEA 역시 사상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수치나 분석을 통해서는 함부로 결론을 내릴 수 없은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모든 일이란 시작이나 과정을 통해서는 어떤 결과가 나타나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례로 1945년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전에는 그 위력이 그 정도로 강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자료도 있다. 다음 우리는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 더군다나 믿을 수 없다는 추리가 나온다. 일본인을 두고 말하자면 좋게 말하면 “총명하다”하고 할 수 있지만 다른 각도로 말하면 “잔머리를 잘 굴린다” 혹은 “비열하고 간교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은 조선과 중국 그리고 기타 태평양 지역 국가와 지역에 큰 피해를 주었다. 그것도 아주 음융하고 비열하고 잔혹한 수단과 명분 등으로 말이다. 조선 왕조의 명성황후 음해 사건, 중국 대만 강점과 한일 합방 그리고 지난 세기 30~40년대 조선에서 위안부를 모집할 때는 “방직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등 감언리설로 순진한 소녀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고 1920년대 말의 만주에서의 황구툰(皇姑屯) 사건과 루거우차오(卢沟桥) 사건 등을 분석 조명해보면 당시 일본이 강하다기에 앞서 음흉하고 뻔뻔스럽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 시 일본은 한편으로는 미국과 담판함과 아울러 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일본을 함부로 믿어서는 큰 코 다친다는 분석도 함께 나온다. 종합적으로 일본을 평가하면 일본인의 겉면을 보면 예의가 바르고 친절하고 생활이 아주 규칙적으로 보이지만 일본인의 속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겉과 속이 같은 한국인과는 달리, 웬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중국인과는 달리 또한 거만하지만 우쭐대지는 않는 서양인들과는 달리 일본인한테는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피해국에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역대의 독일 총리들과는 정반대로 일본은 오늘 현재도 기나긴 침략 역사에 대해 사과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교과서까지 뜯어고치면서 군국주의의 침략사를 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두고 각국은 여러 가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강경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중국과는 달리 미국은 지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고 한국 정부는 “지지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입장으로 나오고 있다. 여기서 미국은 태평양을 사이 두고 일본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속 궁리가 있는가 하면 다른 일종의 전략이 내포되어 있을 수도 있고 한국은 자국민들한테 미칠 손실보다는 일본과 정부 사이의 마찰을 우려하는 듯한 양상이다… 한편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에 대해 지금 과학적이고 안심할 수 있다는 학술적 수치는 있으나 그 영원성을 장담하는 언사는 한 마디도 없다. 어찌 됐든 일본의 핵 오염수는 방류하지 않는 것이 방류하는 것보다는 ‘명지한 선택’이라 보여지며 방류하는 것으로 나쁜 결과가 있을지언정 반대로 좋은 결과는 제로라는 것만은 분명한 것이다. 가령 앞으로 방류 과정에 혹시라도 일본 자국 혹은 주변국들에 피해 사례라도 발생한다면 그때 가서 아무리 미국이나 국제원자력기구라 해도 결코 일본을 위해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며 일본이라는 이 섬나라의 위망은 일락 천장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서기 2023년 8월 24일, 이날은 인류 역사상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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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핵폐수 해양 방류 시작과 과정 그리고 결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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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무주지(無主地)’ 섬이 아니었다.
- ● 김정룡 (多가치포럼' 대표) 민간속설에 ‘이웃이 먼 사촌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가령 이웃집에서 경사가 생기면 함께 기쁨을 나누고, 안 좋은 일에는 같이 슬픔을 나누고, 급한 일이 생기면 이웃이 가장 먼저 달려와 돕는 등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삶을 영위해온데서 생겨난 속담일 터. 민간백성들의 삶은 대개 이웃끼리 화목한데 비해 한 사람, 한 사람으로 구성된 국가의 경우 이웃나라끼리 사이는 그다지 화목하지 못하다. 바다를 사이 두고 이웃으로 살아온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으로 좋은 때도 있었지만 서로 반목하는 일들이 더 많았고 지금까지도 해묵은 갈등들이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있는데 그 가운데서 독도의 영유권 문제, 종군위안부 문제, 일본전범기업 강제징용 배상문제 등이 주요 쟁점으로 꼽힌다. 최근에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가 새로운 갈등으로 부상하여 오랜 갈등들에 얹어져 가뜩이나 썰렁한 냉기를 더욱 차갑게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남아 내려온 갈등도, 새로 생겨나고 있는 갈등도 모두 일본 측의 책임이 크건만 정작 일본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후안무치한 태도를 보이고 있어 아주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어느 한 착실한 역사학자의 통계에 의하면 한반도는 서너 차례 모자라는 1천 번의 침략을 당해왔다고 한다. 무려 1천 번이나 침략을 당해왔으나 남을 침략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하니 얼마나 착한 민족인가? 누구인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백의민족은 맞기만 하고 때릴 줄 모르니 선천적으로 DNA에 문제가 있다”고. 아무튼 그 1천 번 가운데서 일본의 침략이 다수였다. 일본은 지진이 많고 태풍이 많기로 지구촌에서도 이름난 곳이다. 게다가 땅이 척박하여 먹을 것이 늘 부족했다. ‘제집’ 내에서 해결책이 안 보이니 눈을 ‘옆집’에 돌릴 수밖에 없었다. 남의 것을 빼앗아오는 약탈행위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가에 왜구의 노략질이 들끓었다는 얘기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곡식도 빼앗고, 옷도 강탈하고, 여자도 납치해가고 등 눈에 보이는 쓸 만한 ‘물건’이면 전부 빠트리지 않고 싹쓸이해갔다. 백의민족의 전통인사말은 ‘무사한가?’인데 그 유래가 바로 빈번한 외침을 당한데서 생겨난 것이다. 일본은 왜구의 노략질도 빈번했을 뿐만 아니라 정부차원의 침략도 감행하였고 그 궁극적인 목적은 한반도 식민화였다. 1592년 풍신수길이 발동한 임진왜란이 좋은 근거이다. 명나라 조선 파병 때문에 일본이 임진왜란에서 실패했으나 그 후 결코 한반도 식민화 정책은 포기하지 않았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조선정부는 청나라와 일본을 불러들인 것이 화근이었다. 큰 전쟁을 피하고자 조선정부는 동학농민운동 측과 협상하여 평화적인 해결책을 마련하고 청나라 군과 일본군 모두 철회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모처럼 좋은 기회를 만난 일본이 철회할 리가 만무했다. 청나라와 군대 철회로 갈등을 빚다가 드디어 무력충돌이 발생하였고 그것이 바로 ‘중일갑오전쟁’이다. 일본을 ‘쌰오르번(小日本)’으로 하찮게 여겨왔던 청나라가 생각 밖으로 일본한테 패배한다. 조선을 청나라 속국에서 벗어나게 하고 ‘독립문’까지 세워준 일본이지만 정작 조선은 독립을 하지 못하고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만다. 호랑이가 나간 자리에 승냥이가 들어온 셈이었다. 일본은 강대했던 청나라를 물리쳤으나 또 다른 강대한 적인 러시아와 맞붙어 싸워 이겨야 만주와 조선에서의 이권을 모두 독차지할 수가 있었다. 1904년 일본은 한반도에서 자기네가 마음에 드는 곳에 어디든 군사기지를 세울 권리가 있었다. 러시아와 맞붙으려면 동해바다 섬에 군사기지를 세울 필요가 있었다. 하여 일본의 레이더망에 독도가 들어왔다. 1905년 일본은 독도를 ‘무주지(無主地)’라 주장하면서 영토편입을 시도하고 시마네현(島根縣)에 지방고시를 알린다. 남의 나라 땅을 침략하고 그 땅을 ‘무주지’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드는 수법은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을 식민지화 하는 과정에서 활발하게 써 먹었던 수법이었다. 즉 일본이 유럽열강들한테서 배운 것을 조선침략에 활용했다는 뜻이다. 독도는 1905년 전에 과연 ‘무주지’였을까? 아니다. 마찬가지로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에 이르는 곳마다 모두 ‘무주지’ 땅들이었을까? 아니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무주지’라 주장하는 것일까? ‘발견자우선주의’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활용했던 것이다. ‘발견자우선주의’의 본뜻은 최초로 발견한 사람들이 소유 우선권이 있다는 의미인데 백인들이 아메리카 땅을 발견하고 개척할 당시 수많은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다. 결코 백인들이 최초의 발견자가 아니다. 분명히 그 땅엔 인디언이라는 주인이 이미 있었다. 해가 지지 않는 식민지를 개척한 그 땅들에 주인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이미 오래 전부터 발견하고 삶을 영위해온 원주민들이 거주해왔다. 그렇다면 왜 유럽열강들이 ‘발견자우선주의’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들었을까? 주인이 이미 있었는데 ‘무주지’라 주장하고 거기다 한 술 더 떠 ‘발견자우선주의’를 떠드는 근거는? 유럽열강들은 지구촌 곳곳에 살고 있는 인류 집단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그 땅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3C’ 즉 기독교(Chrisianity), 문명(Civilization), 상업(Commerce)을 통해 식민지 정복을 정당화했다. 1455년 교황 니콜라오5세는 아프리카 서쪽 해안의 영토에 대한 포르투갈의 권리를 승인했다. 최초의 탐험시대부터 이미 그 땅에 인류가 살고 있든 말든 국가가 있든 말든 유럽열강들 중 그 누가 먼저 그 땅에 도착하면 자기네들이 주인이라는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를 적용했던 것이다. 독도는 1905년 이전에 조선의 소유이고 조선이 영유권을 갖고 있다는 역사적인 증거는 충분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산업혁명과 식민지개척 공부에 가장 모범생이었던 일본이 서구열강들이 식민지 개척 과정에서 정당화로 써먹었던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 무기를 휘둘러 독도 영유권을 시마네현에 편입하는 고시를 알리는 수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있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있을 때 일본 소유로 편입되었던 것들을 바로 잡는 조항에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등 제도들이 조선의 영유권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조선의 지리는 육지와 3170 개 섬으로 구성되어 있어 섬마다 일일이 모두 표기할 수가 없었고 그때 독도가 빠져있었던 것을 일본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있다. 즉 이것 때문에 일본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한국정부가 독도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군대가 주둔하여 관리하고 있다. 6.25 전쟁 때 한국군 36명의 용사가 독도를 굳건하게 지켜냈고 지금까지도 한국이 독도에 주둔하고 관리하고 있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존재의 일차적인 이유는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다. 2016년 세월호사건과 지난해 10월 발생했던 이태원참사사건에 전체 국민이 분노하는 이유가 바로 정부가 국가의 존재이유를 방기했다는 것이다. 다음 자국의 영토를 지키는 것도 국가존재의 주요 이유이다. 영토를 잃는 것은 안전을 잃어버리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기 때문이다. 한국정부의 독도에 대한 입장은 다음과 같다. “독도는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으로 명백한 우리 소유의 영토이다. 독도에 대한 영유권 분쟁은 존재하지 않으며 독도는 외교 교섭이나 사법적 해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확고한 영토주권을 행사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어떠한 도발에도 단호하고 엄중하게 대응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독도에 대한 우리의 주권을 수호해 나아간다.” 다만 걱정이 하나 있다. 일본정치주류세력인 우익이 줄곧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주장에 대해 올해만 세 번 한일 양국정상이 만난 자리에서 아무 언급도 없었다. 윤석열 정부의 과거사를 묻지도 따지지도 말자는 대일외교방침 때문일까? 일각에서는 이대로 나아간다면 일본이 독도를 완전히 빼앗아가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공동관리 주장을 들고 나오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한다. 독도분쟁은 대한민국의 자존심 문제이다. 자존심을 잃으면 나라의 존재이유가 사라질 만큼 국민의 사기가 저하된다. 그러므로 독도만은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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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무주지(無主地)’ 섬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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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전주국제영화제 정준호-민성욱 공동집행위원장 투톱체제 성공을 바라며
- 독립영화의 요람 전주국제영화제가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로 전환해 정체성 확립과 대중성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지 관심을 받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는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민성욱 부집행위원장과 정준호 영화배우를 공동집행위원장으로 의결했고, 지난 26일 조직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은 시장실에서 위촉장을 전달했다. 마력은 동력의 단위로 높을수록 좋다. 이번 쌍두마차 체제가 앞으로 3년 동안 시너지 효과를 일궈낼 것으로 기대된다. 백제예술대학교 방송연예과 교수인 민성욱 신임 공동집행위원장은 전주국제영화제 출범부터 조직위의 사무국장 및 부집행위원장을 역임한 '지킴이'이고, 정준호 신임 집행위원장은 높은 인지도를 가진 대중성을 확보한 영화배우이기 때문. 어떤 조직이나 더 큰 발전과 생존을 위한 변화와 혁신이 요구되는 시점이 있다. 세계 초일류 전자제품 회사로 대한민국을 빛내는 삼성이 만일 제일제당 시절처럼 사카린을 밀수해 설탕을 팔던 그대로 운영되고 있다면 지금의 영광도 없었을 것이다. 2020년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는 비경쟁 위주로 실시됐고 올해 2022년 23회 영화제는 국제경쟁, 한국경쟁, 한국단편경쟁, 특별부문(한국 장편 다큐멘터리, 지역공모작품, 비경쟁 아시아 영화)로 진행되며 업그레이드 됐다. 2023년 24회부터 3년간 시행될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기존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보다 더 대중성을 일으켜 더욱 큰 소통을 통해 영화계 발전과 주최지인 전주 지역발전에 더 크게 기여하는 영광이 실현될 지 귀추가 주목된다. 쌍두마차 체제가 된 전주국제영화제는 전주시민의 선택을 받은 우범기 시장이 조직위원장으로 이끄는 마차다. 우 조직위원장이 전주시 발전을 위한 고뇌 끝에 내놓은 묘수라고 풀이된다. 시장은 시민의 행복과 시의 발전을 도모하는 자리기 때문이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에 대해 기대가 큰 반면에 걱정과 반감도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수립되자, 권해효 배우, 방은진·한승룡 감독이 이사직을 사퇴했다. 이사회에서 자신의 의견과 다르게 의결되었다고 사퇴하는 것이 영화제에 대한 진정성일 수도 있지만 무책임하게 보일 수도 있는 지점이다. 고 자니윤(고 윤종승) 코미디언은 2013년 2월28일 해외동포들과 판문점을 방문한 후 가진 뒷풀이에서 "한국 사람들은 너무 똑똑해요.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려고 하면 이XX 안돼, 저XX 안돼 하는거에요. 일을 해보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 한국계 코미디언으로 성공하고 그의 인프라를 총동원해 조국 대한민국 관광발전을 위해 기여하고 싶었으나 좌절된데 대한 의견으로 들렸다. 대한민국은 625전쟁 후 폐허에서 일어나 세계 경제 10대 강국이 되었고 민주주의를 이루어낸 나라다. 지난 80년간 대한민국이 변화가 없었다면 우리 국민들은 헐벗고 굶주리고 억압속에서 지옥살이를 하고 있었을 게 자명하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는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 이사회에서 결정된 사안이다. 임기는 3년이다. 3년간 응원하고 3년 후 큰 성공과 발전을 이루면 박수를 치고, 변화의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때 가서 비판해도 늦지 않다. 한국언론인연대 박상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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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전주국제영화제 정준호-민성욱 공동집행위원장 투톱체제 성공을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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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Z세대 중국에 호감" 중국 호감도 세대별로 다른 원인
- ●오카다 미츠루(일본 저널리스트)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7일 방콕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3년 만에 처음으로 중·일 정상회담을 갖고 악화된 양국 관계를 '재조정'하기 시작했다. 기시다는 대중 관계 개선에서 반중 여론과 대중 강경 자민당 우파의 제약을 받고 있지만 반중 여론을 거론하면 일본의 Z세대(18~29세)의 중국에 대한 호감도는 40% 이상으로 다른 연령층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Z세대의 정치적 의지가 선거의 키를 쥐고 있는 세계적 흐름을 보면 '반중 여론'과 '우파'에만 의존하는 기시다 외교가 위태롭다. 45분 동안 진행된 이번 일-중 정상회담은 3시간여에 걸친 중-미 정상회담에 비해 일본의 대중국 중요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일·중 정상은 회담에서 국방부 해상 및 항공 연락 메커니즘의 직통 전화선 조기 개통, 새로운 중일 고위급 경제 대화의 조기 개최, 새로운 중일 고위급 문화교류 협의 메커니즘 회의 조기 개최 등 몇 가지 공감대를 형성했다. 향후 중일관계 개선의 지표 중 하나로 정상 간 상호 방문을 실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시다 총리의 대중 관계 개선의 한 가지 저항은 '반중(反中)' 여론 고조다. 일본의 대중(對中) 인식 악화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각부가 매년 발표하는 '외교에 관한 여론조사'에는 흥미로운 수치가 나온다. 예를 들어 지난 1월 발표된 조사에서 응답자의 20.66%가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지난해보다 1.4% 증가)고 답했다.그러나 연령별로는 Z세대 중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는 비율이 41.6%로 전체보다 배 이상 많았다. 60~69세 13.4%, 70세 이상 13.2%에 비해 Z세대는 중국에 대한 친근감이 높다. 그렇다면 왜 연령대에 따라 중국에 대한 태도가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분석하고 싶다. 나는 젊었을 때(저자는 1948년생) 중국의 사회주의에 대한 동경심을 갖고 있었고, 일본이 침략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에 중국에 대한 속죄의식을 갖고 있었다. 중국이라는 '타자' 위에 자신의 생각을 투영해 기대를 부풀렸다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일본이나 구미의 통치체계를 중국의 정치와 사회에 투영해 일본이나 구미의 기준으로 중국을 관찰하고 판단한다. 요즘 60~70대 일본인들이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다. 그러나 Z세대는 생각이 다르다. 내가 가르친 대학생의 경우 태어나기도 전에 일본 경제가 침체에 빠졌고, 일본 경제의 고도성장기를 경험하지 못했다. 이들이 철들었을 때 중국은 이미 미국을 추격하는 대국이 됐고 IT 기술에서 일본을 앞섰으며 애니메이션과 게임 품질에서도 일본을 추월하고 있다. 또 Z세대가 다니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많은 곳에서 중국 유학생과 접촉할 기회가 종종 있다. 다시 말해 Z세대는 중국을 일종의 '대등한' 시각으로 보는 것이다. 중국에 대한 특별한 생각이 없기 때문에 특별한 환상은 없다. Z세대와 밀레니얼 세대가 사회의 버팀목이 될 때 일본인 전체의 대중국 관념도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쇠락이라는 역사적 변화, '탈아입구((脫亞入歐)'의식을 심리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대가 '2선 후퇴'하면 일본의 '반중' 여론도 달라질 것이다. 기시다 정권도 언제까지 반중 익찬 여론에 의존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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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Z세대 중국에 호감" 중국 호감도 세대별로 다른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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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과 중국인 그리고 조선족의 특수성
- 조선족의 형성 조선족이란 중국에 정착해서 사는 한국인 후예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조선족이란 개념에 대해 한국과 중국의 시각은 조금씩 차이가 난다. 한국에서는 “동포”이고 “겨레”이고 하며 “피는 못속인다”는 것으로 동질성을 크게 떠들어대고 중국에서는 “소수민족”이요,“조선족동포”라고 하며 “중화민족 대가정의 일원”라며 역시 목소리가 높다. 필자의 입장에서는 조선족에 대한 한국과 중국의 시각상 모두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중국내에서 조선족이 형성된 그 시대와 역사적 배경을 분석해보면 어렵지 않게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중국조선족의 그 대규모로 되는 인구유동을 말하면 아마도 “한일합방” 전후인 지난 세기 초엽으로 잡을 수 있다. 당시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건너온 조선인들은 주로 두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한가지 부류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독립투사 및 그 가족들이었고 다음 한가지 부류는 먹고 사는 생계를 위해 건너온 사람 및 그 가족들이었다. 이 두가지 부류의 공통점이라면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고 난 뒤, 또는 돈을 벌어 크게 한몫 잡게 되면 조국인 조선으로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헌데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자면 약소민족인 조선인들은 자아의지와는 별도로 중국인과 손잡지 않으면 안되었다. 당시 중국 또한 장개석의 국민당과 모택동의 공산당이 항일을 위해 통일전선을 구축했지만 정치적 대립은 여전히 첨예했다. 그 와중에 중국으로 진출한 조선인들 역시 중경의 한국독립군과 연안의 조선의용군 및 동북의 항일연군 등으로 여러개 파로 나뉘었다. 그 뒤 1945년 드디어 조선은 광복되었다. 하지만 이 광복은 조선인 스스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미국과 구 소련의 힘에 의해 즉 남들의 도움으로 얻어진 것이었다. 한반도 중간지대에 38선이 그어졌고 남과 북에는 각각 미군과 소련군이 주둔했다. 이는 약소 국가와 민족의 운명이었다. 대부분 사람들은 귀국하였지만 중국, 러시아와 일본과 미국 등 나라에 널려있던 한민족동포들중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귀국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38선과 두동강이 난 조국이 싫어진 이유도 적지 않게 있다는 분석이다. 한편 중국의 조선인한테는 농민들한테 토지를 나눠주고 조선인을 중용(군부대에 조선인이 많았음) 크게 중용해주고 약소민족을 차별시하지 않은 공산당의 정책도 크게 작용했다. 이렇게 귀국하지 않은 조선인들은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과 더불어 중국의 소수민족 즉 중국조선족으로 확정되게 되었다. 중국조선족을 보는 한국인들의 시각은? 중국조선족을 보는 한국인들의 시각은 그닥 곱지 않다. 공산권 나라에서 생활하는데다 지난 세기 50연대에 있은 “6.25” 전쟁에 중국 조선족출신 부대 3개 사단이나 북측 인민군에 편입되어 낙동강까지 진격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한테 있어서 “6.25”의 상처는 오래갔다. 필자가 제일 처음 한국에 갔을 때 한국인 강××는 “당신들이 공산권에서 왔기에 머리에 뿔이라도 났는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군”하며 농조로 말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중화권에서 생활하는 조선족들은 토배기 중국인을 닮아 돈에 너무 집착한다는 것이 한국인들의 시각이기도 하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아무리 힘들고 어지러운 작업도 꺼리지 않고, 사기치고 등쳐먹고, 여인들은 또 돈이라면 60~70대의 노인하고도 함께 침대에 오른다고 말이다. 한편 한국인들은 색안경을 끼고 조선족을 보면서도 자주 이용하기도 했다. 드넓은 중국대륙을 진출하기 위해서는 조선족이란 “지팽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성공한 이들도 많다. 중국어에 능통하고 중국본토인들과 “인맥”이 큰 조선족들의 힘을 빌어 사업체를 활성화시키고 하여 한국인들은 조선족에 감사해하고 있고 거기에서 한몫 크게 덕을 본 조선족도 많다. 반면에 중국 조선족사기군에게 크게 당해 빈털털이로 나앉은 한국인도 많다. 아마 성공한 사례보다 실패사례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런가 하면 한국에 진출한 조선족도 엇비슷한 희로애락이 많다. 다르다면 한국에 진출한 조선족 거개가 힘들고 기시는 받았지만 그래도 부를 축적하고 환고향 뒤 윤택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는 가운데 한국인과 조선족 사이의 갈등이 많이 생겼고 서로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상호 좋은 점만 생각하고 말하면 갈등이 작아지겠으나 나쁜 점만 골라가며 목청을 높이니 그 갈등의 벽은 높아만 가는 것이다. 중국 조선족의 “서울”ㅡ 연길시 현재 연길시는 몰라보게 변했다. 여기에는 연길시가 중앙정부의 서부발전계획의 혜택을 많이 받고 있다는 점도 있지만 수십만명 인력이 한국으로 진출해 벌어들인 재부의 힘도 막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더라도 한국으로부터 연변으로 송금되는 돈은 연평균 10억달러(2010년 기준) 이상으로 이는 연변 GDP의 35% 좌우가 된다고 한다. 35%ㅡ 대단한 것이다. 지금 연길시는 낮이면 승용차 행렬이 거리의 풍경선을 이루고 밤이면 매 고층건물마다 휘황한 네온싸인으로 반짝이면서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사람들의 차림새도 크게 달라졌다. 어제 서울에서 그 어떤 패션이 선보였다 하면 오늘 연길 서시장의 전문점에 그 패션이 진열될 지경이다. 사람들의 얼굴도 화기가 넘치고 걸음이 씩씩해졌다. 그리고 여름만 되면 진달래광장은 거의 매일 저녁 “맥주절”, “미식절” 등으로 인파가 붐비고 새로 만들어진 청년광장 또한 거의 밤낮으로 여러가지 축제가 열리면서 공연무대가 펼쳐진다. 하지만 이렇듯 열광적인 축제의 뒤가 되면 사람들은 곧바로 조선족들의 삶을 반성한다. 한국의 덕으로 이만큼 생활이 다채롭고도 풍요로와 진 오늘 사람들은 중국경제가 한국을 따라잡고 있는 것에 대해 좀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이다. 한국경제가 중국보다 우월했기에 현지의 조선족들은 본토중국인들보다 월등한 생활수준을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이제 중국경제가 한국을 따라잡거나 추월하면 조선족들의 이런 우월감이 없어진다. 그렇다고 중국경제가 추락하는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중국에 큰 정이 있으니까. 중국조선족의 이중성 중국조선족은 그 형성된 자체거나 지나온 역사 등 요인으로 이중성이 강하다는 평가를 자주 받는다. 사례로 중국축구대표팀과 한국축구대표팀이 축구경기를 펼칠 때면 그런 현상이 자주 나타난다. 필자의 한 친구는 한국에서 중한축구경기를 시청할 때면 중국팀을 응원하고 중국에서 중한축구경기를 시청할 때면 한국팀을 응원한다고 하였다. 이는 한국인 혹은 본토중국인들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중국조선족 일원인 필자로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이중성이라고 강조하고 싶다. 한국과 중국에 모두 정이 있고 두 나라를 모두 사랑하니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닐까? 다음 한반도 북측과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조선족은 진짜 한국인도 혈육으로 대하고 조선인도 혈육으로 대한다. 혈육이라고 하면서도 “북한”이라고 욕하는 한국인이나 역시 같은 민족이라 하면서도 “남조선”이라 질책하는 조선인들과는 확연히 다른 양상이다. 혈육이요, 같은 민족이라 하면서도 유엔에까지 등록된 국호 “대한민국” 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 쓰지 않고 왜 자기들이 만들어낸 상대방을 자극하는 “별명국호”를 쓰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5~6살 되는 애들보다도 못하다는 생각이다. 이번 인천아시안게임 개막되던 9월 19일, 북측대표단이 입장하자 사회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국호를 제대로 방송했다. 이는 아주 정상적이고 상대방의 국호를 존중하는 자세이다. “북한” 이란 “별명국호”가 한국의 일반 서민들의 입에서 나온다면 그래도 이해할 수 있겠으나 청와대 관원과 국회의원들의 입에서까지 스스럼 없이 나온다는 것은 심사숙고해볼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 어느 해엔가 북측 또한 남북축구경기를 놓고 태극기게양과 한국국가 주악을 거부한데서 그 경기가 제3국에서 펼쳐지기도 했다. 필자의 주견이라면 2006년도엔가 KBS와 조선중앙TV가 공동으로 금강산에서 펼친 “열린음악회”에서 사회자가 “남과 북”, “북과 남”이란 언어를 골라 사회하였다. 상대방의 진짜 국호를 제대로 불러주기 싫으면 이런 언어의 선택도 괜찮다는 분석이다. 중국조선족은 이런 수법은 쓰지 않는다. 조선이면 곧바로 조선이고 한국이면 “남조선”이 아닌 “대한민국”이라 불러준다. 그래서 한국인들로부터 입장이 모호하다는 책망도 듣는다. 하지만 중국조선족의 이중성(삼중성이 될수도)은 한반도 남북에 유리할뿐만 아니라 중한 또는 한중 관계에 있어서도 유리하다. 중국이 한국의 제1무역파트너로 될 수 있은데는 중국조선족의 기여도 어느 정도 점한다는 생각이다. / 김철균 (동포투데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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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과 중국인 그리고 조선족의 특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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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권변호사 칼럼 - 지급명령 이의신청시 주의점 소개
- ■이상권 변호사 (채권추심전문변호사사무소) 채권추심전문변호사사무소의 이상권 변호사는 지급명령 이의신청시 주의점을 소개했다. 채무자가 임의로 돈을 주지 않는 경우 법에 의해 강제집행을 해야 한다. 그런데 강제집행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판결과 같은 집행권원이다. 지급명령제도는 소송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간단하게 집행권원을 얻어 집행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제도이다. 그러므로 지급명령에는 청구원인사실을 주장만 하면 되고 증거를 붙일 필요가 없다. 지급명령에 대해서는 이의신청을 하면 소송으로 전환되게 된다. 채권자의 지급명령신청에 대해서 이의를 하는 경우 주의할 점이 있다. 첫째, 이의신청서에는 이의신청 사실만을 적는다. 이의신청서에 답변의 내용을 적어도 상관은 없다. 하지만 이의신청서에는 이의를 한다는 내용만을 적는 것이 좋다. 이의신청서에 왜 이유를 하는지 이유를 적을 필요도 없다. 다만 ‘이의신청한다’는 취지를 적어서 간략하게 내는 것이 좋다. 상대방의 소장에 대응하는 준비서면은 오랜 시간을 숙고해서 적는 것이 마땅하므로 이의를 하면서 답변서에 적을 내용을 적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둘째, 이의신청을 한 후 상대방의 보정을 기다린다. 이의신청을 한 후에는 상대방이 보정을 기다려야 한다. 채무자가 이의신청을 하면 법원은 상대방에게 소송에 필요한 인지와 송달료를 추가로 납부하라고 통지서를 보낸다. 그런데 여기서 상당한 사람들이 인지대와 송달료를 납부하지 않고 각하를 당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이유는 지급명령을 일종의 ‘찔러보기’나 ‘의사타진’의 수단으로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채권추심업체나 대부업체 중에는 무차별적으로 지급명령을 한 후 이의신청을 하는 것은 다 각하를 당하고 이의를 하지 않는 사건만 채권추심을 진행하는 업체들도 있다. 그러므로 이런 지급명령의 활용도를 알고, 반드시 상대방이 보정을 하였는지 여부를 기다려야 한다. 셋째, 상대방의 증거제출을 기다린다. 지급명령에은 청구원인을 주장만 하면 되고 증거를 붙여 제출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그 이유는 상대방이 다투지 않을 것을 전제로 집행권원을 신속하게 만들어 주려고 하는 것이 지급명령제도이기 때문이다. 만약 채무자가 이의신청을 하면 채권자는 인지대와 송달료를 납부해야 할 뿐 아니라 증거를 제출해야 한다. 그러므로 채무자는 채권자가 청구원인은 입증하는 증거를 제출하기까지 답변서를 제출하지 말고 기다려야 한다. 왜냐하면, 상대방은 전혀 증거가 없으면서도, 혹은 제대로 된 증거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지급명령신청을 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대방이 증거를 제출하면 먼저 증거에 대해서 검토를 하고, 그 다음에 청구원인사실을 검토하여 답변서를 제출해야 한다. 넷째, 답변서는 신중하게 제출한다. 답변서를 제출할 때에는 상대방의 주장과 증거를 면밀히 검토하여 신중한 답변서를 제출해야 한다. 답변서나 소장이나 준비서면에서 한번 뱉은 말은 거의 되돌릴 수 없다고 봐야 한다. 한번 한 말을 번복하기 시작하면 그 소송은 졌다고 생각해도 된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주장과 증거에 대해서 면밀히 검토한 후에 답변서를 내야 한다. 특히 상대방의 증거에 대해서는 즉시 이의사항이 있으면 이의를 해야 한다. 만약 상대방의 증거가 원본이 없는 것 같으면 원본을 보여달라고 요구하고, 위조된 것 같으면 위조항변을 해야 한다. 상대방이 낸 증거에 대해서 다투지 않다가 추후에 이야기를 하면 ‘책문권의 이의상실’의 대상이 되어 이의신청을 하지 못할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므로 적시에 이의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섯째, 가능하면 변호사를 선임한다. 소송은 일반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기술적이다. 변호사가 개입하지 않고 일반인이 답변을 하는 경우, 스스로 자인을 하거나 상대방이 입증할 사실을 인정해주거나 하는 실수가 발생한다. 그러므로 소송에 대해서 경험이 아주 많고 소송이 너무나 뻔한 것이 아닌 이상은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이 좋다. 상대방의 지급명령 신청서와 증거자료를 갖고 최소한 변호사와 상담을 해야 한다. 변호사와 상담을 한 후 본인이 그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소송을 진행하든지 변호사를 선임해서 진행을 하든지 선택을 하시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소송에서 서면의 작성은 매우 기술적이다. 똑같은 주장이라도 매우 요령있게 매우 정중하게 매우 설득력있게 써야 한다. 이것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다. 답변서를 쓰는 데에도 매우 요령이 필요하다. 어떤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요령있게 인정하는 서면을 써야한다. 상대방의 청구원인을 인정한다고 해도 일단 상대방에게 입증책임이 있다면 무조건 부인하는 것이 옳다. 채무는 인정하더라도 그냥 인정하는 것과 요령있게 인정하는 것은 다르다. 예를 들어 분할납부를 해 달라고 주장하는 경우 그냥 주장하는 경우 상대방의 청구원인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청구원인을 부인하지만 설령 이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이런저런 사유를 들어서 분할을 해 주시거나 혹은 기간을 연장해 해 달라고 주장해야 한다. 소송은 지극히 작은 것에서 승패가 갈릴 수도 있다. 그러므로 할 수 있으면 변호사를 이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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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권변호사 칼럼 - 지급명령 이의신청시 주의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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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권 변호사 칼럼 - 가족간의 돈거래는 냉정해야
- ○이상권 변호사 2014년 9월 19일 채권추심전문변호사사무소는 ‘mbc 오늘아침’에 기획기사를 제공했다. 이 기획기사는 가족간의 돈문제를 다룬 것으로 제목은 ‘남보다 못한 가족, 돈 앞에 무너지는 가족애’라는 내용이다. 가족간의 돈거래는 타인과의 거래만큼이나 빈번하다. 그런데 가족간의 돈거래는 가족이기 때문에 더 깊은 파국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다. 채권추심전문변호사사무소에서 제공한 사례 중에는 형부가 처제에게 돈을 빌려준 경우가 있다. 형부가 처제에게 돈을 빌려줬는데 갚지 못하자, 결국 형부와 언니가 이혼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이 사례는 가족간의 돈거래가 가진 위험성을 잘 말해준다. 가족간 돈거래의 특징은 무엇이고, 가족간 돈거래에서 주의할 점은 무엇일까? 민사적으로는 가족간의 돈거래라고 해서 특별히 다른 점은 없다. 차용증을 쓰고, 금전소비대차 계약을 하고 돈을 빌려주며, 소송에서 이를 입증하려면 차용증과 계좌이체내역서가 있어야 한다는 점은 동일하다. 가족간의 돈거래는 ‘차용증’ 쓰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이 특색이라면 특색이다. 형사법에서는 친족상도례라는 것이 있다. 친족상도례는 강도와 손괴를 제외한 모든 범죄에서, 직계혈족, 배우자, 동거친족, 호주, 가족과 그 배우자간의 재산죄에 대해서는 형을 면제하고, 이 외의 친족간에는 친고죄로 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식이 가출하며 아버지 재산을 절취해도, 절도죄는 형의 면제를 받게 되며, 사촌이 절취하면 친고죄가 된다. 이런 형사문제와 달리 민사적으로는 동일한 취급을 받는다. 가족간의 돈거래는 가족이기 때문에 냉정하게 거래를 하지 못하는 것이 보통 타인과 거래를 한다면, 그 사람의 재산과 신용을 체크하고 믿을 수 없다면 거래를 하지 않을 것이다. 위험이 있다면 담보를 제공받을 것이다. 하지만 가족간의 거래에서는 돈을 갚지 못할 줄 알면서도 거래를 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러므로 가족간의 돈거래에는 이런 점들을 주의해야 한다. 첫째. 가족간의 돈거래도 냉정하게 할 필요가 있다. 가족이기 때문에 냉정하게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때로는 돈과 함께 가족을 잃을 것이라는 위험성을 안다면, 가족간의 돈거래도 냉정하게 할 필요가 있다. 가족간의 거래는 위험이 더 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족이라는 이유 때문에 자신의 경제적인 능력을 넘어서서 돈을 빌려주건, 대출을 하여 빌려주거나 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가족간의 돈거래에서는 가능하면, 빌려주는 액수를 줄이고, 자신의 감당할 수 있는 돈을 그냥 주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둘째, 가족간의 돈거래에는 지혜가 필요하다. 성경에 의하면, ‘가족과 친구는 위기의 때를 위해서 있다’는 말이 있다. 가족에 대해서는 우선 애정을 가지고 도와 주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가족간의 돈거래도 차용증을 정확히 받는 것이 좋다. 가족의 경우 타인에 비해 채무자에 대한 정보를 잘 알 수 있으므로 그 사람이 돈을 갚을 의사와 능력이 있는지,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지, 장래성은 어떤지 등을 정확히 계산해야 한다. 만약 그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는 것이 밑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이라면 빌려주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이다. 가족간의 돈거래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경제적인 기반을 닦도록 도와주는 것의 일환으로서 돈거래를 해야 한다. 그러므로 단순히 물고기를 주는 것보다는 고기낚는 법을 가르쳐 주는 식으로 거래해야 한다. 단순한 돈거래보다는 더 지속적이고 깊은 도움이 필요하다. 가족관계에서는 단순한 차용보다 가족구성원이 자립적인 경제활동을 하도록 도와주는 접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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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권 변호사 칼럼 - 가족간의 돈거래는 냉정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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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좋은 우리 서울
- ●연 통 서울은 살아볼수록 참 살기 좋은 도시라는 느낌이 온다. 물론 앞에 반드시 ‘돈만 있으면’이라는 규정어가 붙어야겠지만 말이다.오래전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노태우 정부가 근로자의 임금을 대거 인상해 주고 복지예산을 엄청나게 쏟아부어서 김영삼 정부 시절에 글로벌화를 부르짖으며 선진국 진입을 선언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제 서울에 1년을 살아보니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누가 배달민족이 아니랄까 봐 배달은 곳곳에 24시간 존재한다. 시골의 다방 커피 배달부터 도시공원의 짜장면 배달까지…밤중에 치맥을 시켜도 쪼르르 달려오는 배달민족. 사실 배달을 시키는 쪽이 미안해 말을 꺼내기가 무색할 정도로 배달 시스템이 어찌나 발달해 있는지, 돈 앞에서 굽실거리는 허리가 가엾기까지 하다. 또 필요 이상으로 문화시설과 복지시설에 투자가 들어가 있고, 대부분 문화시설과 복지시설은 가동률은 50%를 넘지 못한다. 심지어 가동률이 1% 미만의 시설들도 쉽게 짚어낼 수 있다. 선거에 나서면 개나 소나 지역구민들께 숱한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을 지키느라고 전반적인 국면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내 선거구’의 이익만을 위하여 발바닥이 부르트는 의원님들과 지자체장님들의 모습이 불쌍하기까지 하다. 옆의 구에서 스포츠센터 하나 세우면 ‘우리 구에서도 없으면 안 되지’ 하고 그걸 선거 구호에 집어넣어 가동률이 10%도 안 되는 스포츠센터 하나 데꺽 만들어낸다. 그 돈은 과연 어디서 왔을까?한국 정부와 여당이 내년 복지예산을 10% 이상 늘린다는 정책에 따라 복지예산이 처음으로 국가 예산의 30%를 넘어설 것이라고 한다. 지자체들은 복지정책에 따른 지방재정의 고갈 때문에 중앙정부에만 손을 내밀다 못해 서민세를 대폭 올린다고 난리고 중앙정부는 담뱃값을 대폭 인상하겠다고 난리다. 복지 디폴트가 생길 정도로 선진국 수준의 국민 총생산을 올리지 못하면서 복지나 문화에는 선진국보다 더한 예산을 쏟아붓겠다고 하니…. 민주선거의 악성 순환이 이런 데서 보인다. 그래도 필자와 같이 한국의 정치생활과는 무관한 ‘외국인’은 참 소비가 편하고 서비스가 물샐틈없이 슴배어 있는 서울이 살기가 참 좋다는 게다. 서비스가 이제 더 슴배일 곳이 없을 거야 하고 살피면 또 예상외의 서비스 품목이 속속 발생한다. 이윤을 좇는 거라면 무엇이든 하는 시장의 속성…….이제 중국에 가면 참 불편한 감이 든다. “쩌거…메이유…너거 뿌싱~”이 중국은 아직 수두룩한 분야에 존재하는 현상이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안 되는 것이 없다. 시민이 “우리 동네 네거리에 유턴이 없으니 참 불편하오!” 하고 떠들면 다음 달에 그 네거리에 유턴 신호가 생긴다. 그래서 서울의 거리는 네거리마다 거의 다 유턴 라인이 있다. 북경에서는 유턴이 정말 가물에 콩 나듯 너무 드물어서 불편했는데, 이건 달리다가 유턴해야겠다 싶으면 바로 앞 네거리에서 유턴하면 된다. 북경은 “아차, 길 건너편의 목적지를 지나쳤네!” 하고 유턴을 하자면 네거리를 보통 다섯 개 이상은 더 가야 유턴 라인이 보인다. 서민이 난전을 벌여 “소비돈이나 좀 벌어야겠소” 하고 떠들면 골목길이 다음 주면 벼룩시장이 된다. 북경에서는 말도 안 돼! 시정감찰대가 와서 와당탕 짓부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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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좋은 우리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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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교육공화국'인가?”
- 지금 중국동포 사회는 … 3시간 법•제도교육, 6주 기술교육, 3일 취업교육, 8시간 건설업취업교육에 4시간 건설업 기초안전보건교육까지 '교육 노이로제' 심화 중국동포들 사이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교육공화국’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이는 중국동포들이 한국에 와서 외국인등록을 하고, 또 취업활동을 하기까지 이런 저런 교육들을 필수적으로 받아야만 하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지난 9월 이후부터 방문취업 비자로 입국한 동포들은 외국인등록을 하려면 3시간 한국의 법과 제도를 가르치는 사회통합교육을 먼저 이수해야 한다. 그리고 취업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실시하는 3일 취업교육을 이수해야 하고, 건설업종에서 취업하려면 또다시 8시간 건설업 취업등록 교육을 받아야 한다. 동포방문(C-3-8) 비자로 입국한 동포들은 교육이 더 많다. 먼저 방문취업 체류자격을 부여받기 위해서 6주 기술교육을 이수해야 하고, 그 다음 역시 3일 취업교육 등을 이수해야 한다. 그런데 최근 또다시 대한민국은 교육공화국이라는 말이 떠돌게 만드는 것은, 4시간 동안 받는 건설업기초안전교육 때문이다. 지난해 중반 노량진 침수사건과 방화대교 붕괴사건 등으로 안전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면서, 한국정부는 건설업 기초안전교육을 의무적으로 이수하게 하였다. 이에 건설현장에서 일을 하려면 4시간 건설업기초안전교육을 받아야 한다. 중국동포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문제는 4시간 건설업 기초안전교육을 이수했다 하더라도 건설업종에서 취업활동을 할 수 없는 체류자격자(F-4)나. 별도의 기초안전교육을 받지 않아도 되는 체류자(H-2)에 대해서도 교육기관이 돈을 벌기 위해 무분별하게 교육을 시키고 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또 학원가는 경쟁적으로 건설업 기초안전교육을 받으면 건설현장에서 일을 할 수 있는 것처럼 허위 과장 홍보하여 교육생 모집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이런 저런 교육으로 노이로제에 걸려 있는 중국동포들에게 ‘기초안전교육이라니...’ 불만이 생길 수 있다, 그럼에도 건설업 기초안전교육장으로 동포들이 몰려드는 이유는 이 교육을 이수하면 누구나 다 건설현장에서 일을 할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 때문이기도 하지만, 산업인력공단에서 실시하는 건설업 취업등록 8시간 교육을 3개월 주기로 실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까지 일을 하지 않고 기다릴 수 없는 동포들은 기초안전교육이라도 받아 이수증을 손에 쥐고 건설현장에서 하루라도 빨리 일을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교육공화국이라는 말은 결코 좋은 의미의 말은 아닌 듯싶다. 동포들을 위한 교육 정책이 좋은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학원의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되지 않도록 관계 당국의 철저한 관리감독이 뒤따라야 할 것같다. <동포세계신문 9월 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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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교육공화국'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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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동북 3성의 조선족은 우리나라 미래의 귀중한 자산이다
- ■ 이돈구 석좌교수(영남대, 서울대 명예교수, 한림원 정회원) 중국은 우리의 역사와 함께 발전해 온 국가이며 오늘날 인접국으로서 최대의 인적, 물적 교류 국가다. 인적 자원은 물론 거대한 자원을 가지고 있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나라다. 또한 중국은 우리에게 혈연적으로도 매우 가까운 나라다. 중국 내 대부분 조선족이 동북3성에 있는데, 2010년 기준으로 길림성 104만 명, 흑룡강성 33만 명, 요녕성 24만 명이다. 특히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연변의 조선족 자치주를 보면, 1860년대부터 함경도 사람들이 두만강을 건너 이주를 시작하여 1881년에 1만여 명, 1916년에는 20만 명, 1930년경에 39만 명이 자리를 잡고 있다. 현재 연변의 조선족 자치주의 면적은 43,474km2, 총인구 219만 명(2007년 기준)이고, 이 중 약 80만 명이 조선족이다. 이렇듯 중국에서 살고 있는 많은 조선족은 우리와 역사, 문화를 공유하는 한 핏줄로서 우리와 중국의 우호관계를 다질 수 있는 교두보 역할을 할 수 있고, 상호간의 이해를 넓히고 교류를 확대할 수 있는 초석이 된다. 그러나 중국 내의 조선족 인구는 1990년에 192만 명, 2010년에는 183만 명으로 계속 줄어들고 있는 추세이다. 그 이유로는 출산율 감소, 국제결혼, 높은 고령화와 사망율 때문으로 추정된다. 특히 더 우려되는 것은 최근 중국내 조선족들에게서 한민족이라는 동질성이 점점 옅어지고, 자신들이 한민족으로서 한국에 친밀감을 느끼기보다는 완전한 중국인으로서 동화되고 있어, 우리가 먼저 그들에게 동포애를 발휘하여 손을 잡아주고 끌어안아야 한다. 조선족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중국 동북 3성은 중국 내에서도 사회기반시설이 매우 낙후되어 경제성장이 느리기 때문에 다른 지역으로의 인구 유출이 심한 편이다. 따라서 중국 내 조선족에 대한 교육과 경제적 지원을 줌으로써 조선족과 우리와의 유대감을 강화할 수 있고, 중국 내 조선족의 교육·경제력의 향상을 통해 중국의 대한국 정책을 더욱 유리하게 이끌 수 있다.일본은 100여 년 전부터 브라질에 이주하였고, 이주자들이 생산한 농산물 등을 본토 일본에서 구입해 줌으로써 그들이 소득을 올려 정착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다른 나라의 사례에 비해 우리의 이민 정책을 보면, 그동안 너무 소홀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조선족은 바로 우리 자신들이고, 우리 조상의 후손인 형제이다. 과거 우리의 어려웠던 시절 어쩔 수 없이 타국에 가서 지금까지 힘들게 개척하며 살아온 그들을, 지금 우리가 도와주지 않으면 누가 돕겠는가? 이미 중국에 가서 정착한 우리 동포인 조선족에게 자녀 교육, 학자 교류, 연구비 지원, 교역 등을 아낌없이 지원한다면 첫째는 그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될 것이고, 그다음에는 간접적으로 우리 자신에게도 이익으로 돌아올 것이다.지금 중국의 조선족에 가장 필요한 것은 조선족 학교의 교원양성, 안정적인 교원 수 유지 및 교원의 질 향상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는 조선족 학교를 통해 조선족에게 민족의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는 민족교육으로 후대를 지켜나가도록 도와야 한다. 조선족 학교가 줄어듦에 따라 우리말 우리글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중국어만 하는 젊은 조선족들이 늘어가고 있다니,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그들이 우리 민족성을 잃게 되는 것엔 그들에게 무관심한 우리의 책임 또한 크다 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조선족을 돕기 위해서는 연변지역을 포함한 길림성내 조선족 인구의 집중 분포지역에 조선족 중소학교의 교원 양성 및 안정된 교원 수 유지가 매우 중요하며, 여기에 대한 특별한 지원이 필요하다.현재 연변지역을 포함한 길림성내 조선족 집중분포지역에서 지역경제의 어려움으로 인한 교원들의 낮은 수입과 어려운 생활조건은 많은 조선족 교원들의 교직 이탈 및 불안정의 근본원인이 되고 있다. 특히 농촌지역의 교원양성과 보충의 어려움에 따른 부족한 교원 수는 조선족 학생들의 질 좋은 학습을 보장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또한 많은 지역에서 도시 진출로 인한 조선족 인구 감소는 조선족 학교의 생존위기와 교사들의 교직 생존을 위협하고 있으며, 현재 이미 많은 조선족학교가 폐쇄 또는 합병된 상태이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청장년의 한국 진출이 날로 늘어나고 있으며, 시골에는 노약자와 일부 어린이들만 거주하고 생활하는 현실이다. 이렇다 보니 어린이를 현(군에 해당됨) 소재지의 학교에 기숙하거나 친인척에 의뢰하여 학교에 보내고 있는 가정도 많다고 하니, 우리 정부를 통한 한국국제협력단의 지원을 비롯하여 기업과 시민단체 등을 통한 지원도 고려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본인(사진)도 1990년대, 2000년대에 한국과학재단의 지원으로 70여 명의 조선족 학자들의 국내 대학에서 수학할 때 도운 경험이 있다. 우리 민족답게 그들은 매우 명석하고 뛰어나며 성실했다. 이미 중국에 정착한 이들에게 우리가 적극 지원해준다면 능히 중국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크게 자랄 잠재력이 충분하다. 무한한 자원과 기회의 땅인 중국에서 우리가 더욱 수월하게 진출하고 우리의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서라면 우리의 형제이며 혈족인 조선족이 중국에서 확고한 위치를 다질 수 있도록 우리가 적극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조선족은 우리와 함께 통일(統一)된 미래를 열어갈 우리나라의 동반자인 동시에 우리의 귀중한 자산이기 때문이다.본 포럼(상임의장 최진호, 한림원 종신회원)은 고조선을 시작으로 고구려·발해로 이어진 우리의 옛 고토(古土) 중국 길림성·흑룡강성·요녕성의 동북 3성에는 지금도 200만 명이 넘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서 우리말 간판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는 자랑스러운 우리 조선족 동포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면서, 아울러 서울대 명예교수로서 지금은 영남대 석좌교수로서 활동하고 계시는 이돈구 교수님의 동북 3성의 조선족 연구와 교육 지원에 깊은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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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동북 3성의 조선족은 우리나라 미래의 귀중한 자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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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근 컬럼] 쩨쩨한 외국인,대범한 한국인
- ● 유영근 미국변호사 필자가 일하는 곳은 채권추심을 전문적으로 하고 있는 법률사무소이다. 사무실에서 해외 관련 업무를 담당한 필자가 하는 일 중 하나는 우리나라 수출 업체들이 외국에 수출하고 받지 못한 미수금을 받아주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나라 업체들이 외국 수입업체로부터 수출 대금을 받지 못한 경우만큼 외국업체들이 한국으로 수출하고 받지 못한 미수금의 추심을 의뢰하는 경우도 많다. 특이한 것은, 외국업체들이 한국업체로부터 받아 달라는 미수금은 금액이 적은 경우도 많이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1,000불 정도, 우리나라 돈으로 백 만원 정도의 돈도 받아달라고 의뢰를 한다. 그 외국 회사들이 1,000불에 회사 사운을 걸 만큼 작은 회사들은 아니며, 변호사비용 등을 고려하면 실제 받을 돈이 거의 없어도, 외국회사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이러한 소액 수출대금을 받으려 한국 수입업체에 전화를 하면 오히려 코웃음을 친다. 그렇게 작은 돈을 받으려고, 몇 년 전 발생한 채권에 대해 변호사사무실에 의뢰를 했느냐는 반응이다. “외국놈들 참 쩨쩨하기도 하다”하는 말이 전화기를 통해 들리는 듯하다. 한번은 한 독일 업체로부터 한국의 개인에게 판 물건대금을 받아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액수는 우리 돈으로 채 50만원이 되지 않았다. 수소문을 하여 한국 소비자를 찾아 연락을 했더니 여러 물건과 함께 그 물건을 구입한 것을 인정했으나, ‘쩨쩨하게 50만원을 안냈겠냐’고 반문했다. 그래서 영수증이나 지불을 증명할 서류를 보내 달라고 했더니, 국가 중요 기관에 조카가 근무하는데 조카에게 이야기하겠다는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물품대금 50만원을 지불한 서류를 보내 달랬더니 ‘국가 기관’까지 들먹이며 나온 것이다. 국가 기관이 그런 일까지 관여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50만원에 국가 기관까지 들먹이는 한국인의 배포의 근거를 알지 못하겠다. 외국업체가 적은 액수라도 추심을 의뢰하는 이유는 원칙의 문제로 보인다. 매우 적은 액수이고, 태평양 혹은 유라시아 대륙을 끼고 있음에도 머나 먼 외국에 있는 법률사무소에 의뢰해서 돈을 받으려는 이유는 돈보다도 원칙의 문제이다. 자신들이 땀흘려 만든 제품을 팔고 나서 대가를 받지 못한 것을 그냥 넘어가는 것은 원칙에 어긋나는 것으로 보는 듯하다. 또한 미수금 문제를 해결하고, 상대업체와 사업관계를 이어가고자 하는 목적일 것이다. 친구와의 돈거래를 하게 되면, 액수가 크던 적던 그 금전관계를 깨끗이 마무리 짓지 않으면 친구관계가 힘들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사업에서도 마찬가지다. 적은 액수라도 미수금이 남아 있으면, 상대 사업체와 다시 거래하는 것이 껄끄럽다. 그러므로 미수금을 깨긋하게 정리하는 것이 발전적인 사업상 관계를 지속하는 길이다. 원칙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은 언제나 쩨쩨해 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정말 쩨쩨한 사람은 마땅히 지불해야 할 돈을 지불않고 ‘뭐 그까지 것을 가지고’ 배포있는 척 허세를 부리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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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근 컬럼] 쩨쩨한 외국인,대범한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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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타인데이 날 있은 일
- ■ 전영실 발렌타인데인(情人节)날을 며칠 앞둔 어느 날이었다. 그날, 내가 시티폰가게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데 웬 중년남자가 손을 내밀어왔다. 올려다 보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아, 얼마나 오래간만에 보는 얼굴인가?! 21년전의 첫사랑 남자를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줄이야. “살아 있으면 이렇게 만나게 되는구만.” 그 남자도 무척 흥분된 표정이었다. 나는 24살이 되는 그 때 중매군의 소개로 그 남자를 만났었다. 훤칠한 키꼴에 얼굴도 영준하고 대졸생인 그 남자, 총명이 넘치는 그 남자의 모습에 나는 첫 눈에 마음이 끌렸다. 그 때 나는 대졸생을 무척 흠모했다. 얼마간 요해하는 과정에 그는 모름직이 나의 마음속의 우상이 되었으며 몰래 사랑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한 남자에게 그토록 마음이 끌려보기는 처음이었다. …… 그런데 얼마 뒤 결국 내가 바라지 않던 소문이 들려왔다. 바로 그 남자의 과거였다. 그 남자의 속내를 아는 분이 귀뜀해주기를 그 남자한테 약혼녀가 있는데 지금 그녀를 떼어버리려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나는 억이 막혀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같은 여자의 마음에서 내가 배신당한 그런 기분이었고 마음속에서는 이름할 수 없는 역겨움이 치밀어 올랐다. 그것을 계기로 우리는 헤여지고 말았다. 그 남자의 인격에도 의심이 갔고 몇해동안 뒷바라지를 해준 그 시골쳐녀도 가긍스러웠고 더구나 남의 발등을 밟고 행복을 만들고는 싶지 않았다. 지금 세월엔 아무렇지도 않게 여길지 모르나 그 때 그 세월에는 크게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일이었다. 물론 헤여질 때 나의 가슴에는 여전히 그 남자에 대한 일루의 미련이 남아있었지만 말이다. 첫 사랑이란 잊을 수 없는가 보다. 그래서인지 지금 남편과 결혼하여 20여년을 살아오면서 가끔 그 남자를 떠올릴 때도 있었다. 이전에 길림에서 사업했었는데 지금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그 시골여인과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가끔 남편과 불화가 있을적이면 그 남자와 살았다면 어떻했을까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상을 해보기도 하였다. 그래서 여자들은 문턱을 넘으면서도 열두가지 생각을 한다고 하는가 보다. 이렇게 잊혀지지 않던 그 남자가 그날 느닷없이 근 20여년만에 내 눈앞에 불쑥 나타난게 아닌가. 세월이 흘렀지만 총명이 넘치는 그 모습은 여전했다.. 그 남자는 유정한 눈길로 나를 응시했다. 그 눈길을 피했지만 웬지 나의 가슴에도 잔잔한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퇴근한 뒤 시간을 낼 수 있겠소?” 나는 저도 몰래 머리를 끄덕이었다. 퇴근시간까지는 한시간 정도 남아 있었다. 나는 전혀 일이 손에 잡히지를 아니했다. 마치 열두마리의 토끼새끼를 품기라도 한듯 콩당콩당 심장이 뛰고 저도 모르게 이 양볼에 열이 나는 것만 같았다. 나는 퇴근종이 울리기 바쁘게 그를 따라 직장대문앞에 나갔더니 택시가 진작 대기하고 있었다. “추억다방”에 도착한 후 그는 면목도 모르는 다방의 마담한테 나를 소개하며 “나의 첫 사랑이라니깐” 하면서 흥분하기 시작했다. “첫사랑”이란 그 표현은 어쩐지 께름적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란 알고도 모르는 것, 께름직했던 느낌은 순간에 눈녹듯 사라지고 다시 애틋한 정이 찰랑거렸다. 그날 우리는 서로 대방의 사업과 가정형편을 물었고 그립던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는 단 한번도 나를 잊어본적이 없다고 몇번이나 곱씹어 말하였다. 그는 신문과 잡지들에서 나의 글도 보군 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는 어렵게 살아왔었다. 그 시골처녀와 결혼을 한 뒤 그녀의 호구와 직장을 해결하느라 많은 돈을 썼고 세집도 여러번 이사를 했다고 한다. 지금의 형편도 여의치 못한듯 했다. “영실인 잘 살지? 집도 몇채 있다면서…?” 집고생은 한번도 한적 없었다는 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는 몹시 부러워했다. “우리 둘이 결혼했더면 고생 모르고 잘 살았을텐데, 우리 둘이 결혼했어야 하는건데…” 그는 자기의 혼인에 대해 김빠진 소리만 하였다. 나는 그러는 그 남자한테 연민의 정이 생겼으며 더구나 헤여질 때 “며칠 뒤면 발렌타인데이인데 그날 우리 다시 만나기요”하는 말을 들으며 이상야릇해나기도 하였다. 기다리던 발렌타인데이 날이었다. 나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하루종일 소녀처럼 시티폰을 들여다 보군 했다. 아니나다를가 퇴근무렵, 시티폰이 울렸다. 시티폰을 들자 생소하면서도 익숙한 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실이 나요… 지나번 약속 안잊었지?” 나는 무척 흥분되면서도 여자의 체신을 지키느라 일부러 “그만 깜박했네요. 오늘은 일이 많은데요…”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꼭 할 말이 있다”면서 늦게까지라도 지난번 만났던 “추억다방”에서 날 기다리겠다는 것이었다. 오래만에 만난 첫 사랑 남자가 더구나 발렌다인데이날 나한테 꼭 할 말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프로포즈? 나는 공연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혹시 한다발의 장미꽃을 안겨주려고? 그렇지 않으면…? 다방으로 갈 무렵, 나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어수선하던 머리도 다시 쓰다듬었다. 젊은 색시들이 “언니 어디에 가기에 이렇게 이쁘게 하고 가요?” 하고 물을 때 “너희들만 애인이 있어 나도 축하해줄 사람이 있어”라고 하면서 갸웃거리는 처녀애들을 뒤로한채 다방으로 향하였다. 다시 찾아온 이 남자, 내곁에 있지 못했어도 잊어본적 없었던 이 남자. 내 인생에서 다가서지 못할 꿈으로만 남아있는 그 남자, 생각만 하여도 활랑거렸다. 내가 추억다방의 문을 열었을 때 기다리고 있던 그 남자는 원망의 눈길 대신 무척이나 반가워하였다. 뜻밖에 그 남자는 장미꽃을 안겨줄대신 후ㅡ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속탄이야기를 터놓자고 기어이 만나자고 했다는것이었다. 지저분한 명태껍질, 질서없이 열어제낀 빈 맥주병들 그만 마시라고 권고했지만 소용없었다. “참 저한테 꼭 할 말이 있댔잖아요? 어서 하세요.” 나는 기분을 바꾸려고 이렇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 순간, 그 남자는 나의 손을 덥석 잡는 것이 아닌가. “영실이 미안해, 영실이한테 이런 말을 하게 돼서, 집사람을 외국에 보내려는데 돈2만원 가량 모자라, 영실이 좀 도와줘. 영실한테 그만한 돈은 있잖아?”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돌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그 뜻밖의 충격에 내가 마음속에서 달포 이상 쌓아올렸던 기대와 희망의 모래성은 삽시에 무너져내렸다. 남의 이야기로만 듣던 다른 여자들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여자들의 돈을 바라보고 혼인 했다던 남자들의 이야기, 여자의 돈을 꾼 뒤 바람처럼 사라졌다는 다른 남자의 이야기…이런 이야기들을 들으며 “차마 세상에 그런 일이?”하며 드라마에서나 있을 일이라 비웃던 나였는데 오늘 내가 당하고 있는게 아닌가. 물론 내 앞의 첫사랑 남자가 그런 이야기속의 주인공이였던 A, B, C, D처럼 사기군은 아니라면서 자신을 위안하고는 있었지만 말끝마다 “첫사랑”이라면서 그것도 낭만으로 넘쳐야 할 발렌타인데이날에 이처럼 구구하게 돈구걸을 하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한단 말인가? 가슴속에 소중이 간직해왔던 꽃병이 짤랑 하고 박산났다. 왜서 그리움과 환상의 첫사랑 여자앞에서 이런 비굴한 말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을까? 내 앞의 이 남자, 그리고 이야기들속 사내대장부들의 당당한 기상이 죄다 사그러졌단 말인가? 이 사내들을 이렇게 만든건 단지 그네들만의 탓이란 말인가? 그날 밤 그 남자가 많은 말을 털어놓았지만 한마디도 나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이 초라한 남자한테 마음이 흔들린 내가 더 초라해 보였다. 내 마음속의 진심을 읽어내지 못한 그 남자는 내 손목을 다시 잡으면서 말을 했다 “영실이, 왜 대답이 없소?” 나는 더욱 억장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저도 모르게 뜨거운 것이 양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괞찬소, 내가 말을 잘못 꺼냈구만. 이런 말 그만 두고 … 다음 오는 3.8절에 내가 영실일 기분좋게 해주겠소…” 그 남자는 이렇게 너스레를 쳤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단호히 거절하지도 못하고 그 남자에게 작별을 고했다. 나는 집까지 바래다주겠다는 그 남자를 뿌리치고 혼자 걷기로 했다. 찬기운이 얼굴로 맞혀왔다. 가로등과 길 양켠의 장식등들이 명멸하는 도시의 활홀한 야경이 펼쳐졌다. 발렌다인데이밤이라 연인 혹은 애인들이 떠들썩하며 지나가고 꽃파는 남녀들이 호객을 하느라 분주했다. 식당, 노래방, 다방의 네온싸인들이 깜박거리면서 발렌타인데이를 경축하고 있었다. 밤은 점점 도가니처럼 달아올랐다. 하지만 내 가슴은 냉장고처럼 싸늘해지기만 했다. 나는 집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면서 내처 누구를 향해서인지도 모르고 이런 물음표를 내던졌다. 아, 저 사람들은 다 행복한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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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타인데이 날 있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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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주원 칼럼 - 경찰의 함정수사 유형 소개
- ■ 한주원 함정수사는 ‘법정드라마’에서 많이 나오는 단어이다. 과연 함정수사란 무엇이고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이번에는 함정수사를 당했을 때, 답변 요령에 대해서 간략하게 정보를 제공하고자 한다. 함정수사는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범의유발형이다. 원래 그런 생각이 없었던 사람인데 사복경찰관이 계속 종용을 해서 덜컥 미끼를 물고 만 경우이다. 두 번째는 기회제공형으로 원래 그럴 생각이었던 사람인데 경찰이 미끼를 던졌을 때 덜컥 물고 만 경우이다. 그렇다면 실전에서 그 결과는 어떻게 작용할까. 첫 번째의 경우는 초동수사부터 검찰, 그리고 재판까지 변호인 조력을 잘 받는다면, ‘공소기각’을 넘어 무죄까지 나올 수 있다. 두번 째의 경우, 대부분 처벌이 된다. 두 사건 모두 형사처벌을 벗어나는 것은 지루한 싸움이 될 것이다. 이 두가지 요건에 ‘원래 그런 사람’ 이라는 부분이 법원의 판단을 받아야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초동수사부터 아무 말이나 하면 ‘자승자박’, 스스로 무덤에 들어가는 것이다. 묵비권은 나쁜 것이 아니다. 내가 법리적으로 모르고 부족하기 때문에 조력자를 내세워 진술을 하기 전까지는 묵비권을 행사하겠다는 것은 좋다. ‘저 말 한마디가 그렇게 힘든 일인가요?’ 혹은 저렇게 말하면 앞에 있는 경찰관이 ‘친절한 태도를 뒤로하고 살벌한 분위기를 만들 것 같고, 또 그분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못하시는 건가요?’ 같은 생각을 가질 필요는 없다. 법적으로 충분히 권리를 내세울 수 있는 국민이므로 주눅이 들어서 선처만 바랄 필요는 없다. 죄가 있고 없음은 당당하게 재판부에서 받으면 된다. 미리 인정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경찰관이 연행을 하면서 ‘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고 불리한 질문에는 묵비권을 행사 할 수 있다’고 말해주지 않았다면 변호인을 선임해서 진행하겠다고 말하고 변호인 선임을 위해서 가족들 지인과 통화를 하도록 해달라고 하면 된다. 이를 안 된다고 하는 경찰관은 없다. 그걸 막았다면 문제가 생긴다. 그리고 범행에 도주 우려가 없다면 긴급 연행되어도 금방 풀려난다. 긴급연행에서 진술할 필요는 없다. 나가서 변호인 선임해서 다시 조사 받으러 오겠다고 한다면 대부분 풀려난다. 따라서 법대로 차근차근 진행하면 된다. 통상 형사사건 선임료는 민사사건 선임료 보다 많이 높다. 잘 판단해서 인생에 있어서 말 한마디 잘못하여 낙인 찍히지 않도록 잊지 말아야 한다. 함정수사뿐만 아니라 어떤 사건이든 정확한 증거가 없이 그저 진술 하라는 대로 묻는대로 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출처: 법률사무소 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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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주원 칼럼 - 경찰의 함정수사 유형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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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한국 불법기록, 주홍글씨 되나?
- ■ 이성기 1992년 중.한 양국수교 이후 수많은 조선족 1세대들이 한국을 방문하였고, 상대적으로 높은 소득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선 “불법체류”를 하는 행동이 한때 불가피한 이유가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이들을 한국출국 조선족 1세대라 지칭하여 본다. 이 1세대들은 자녀들의 교육과 고향귀국 후 안정적인 삶을 위한 목표가 있었기에 근로현장을 중심으로 묵묵히 일을하여 가정을 일으켜 세웠다고 생각된다. 21세기가 시작된 이후 1세대들의 후원을 받은 2세대 자녀들의 한국행이 줄을 이었고 부모세대 덕분에 풍족한 삶을 영위하였던 2세대들은 한국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한국의 법규를 위반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게 되었다. 실제 법무부 통계를 보아도 2000년 전.후를 살펴보면 1세대들은 대다수 “위장결혼, 불법체류, 신원불일치” 등 한국출국 목적과 한국생활 연장을 위한 생활형 법규위반이 주요 위법항목 이었지만 2000년 후로는 “폭력, 보이스피싱, 불법체류, 공사문서위조” 등 위법항목 사안이 강한 형사건들이 많아짐을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시대의 변화에 따른 모순도 있겠지만 1세대들에 비하여 산업현장에서 땀흘려 일을 하고 기술을 배우기 보다는 우선 당장 쉽게 눈앞에 이익을 쫒은 결과가 한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라 분석해 볼 수 있다. 한국 법무부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단순 불법체류자에 한해서는 자진신고 시 형량을 감경하여 통상 1년정도의 입국규제를 제한하고 있다. 허나 한국정부의 대 조선족 정책이 다양해 지고 문호의 개방이 넓혀짐에 따라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강력범죄와 한국출국 목적을 위한 고의적 공.사문서 위조의 경우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강제추방 후 한국입국을 원천 봉쇄하고 있는 실정이다. 중국에서든 한국에서든 생활하는 지역과 공간에서는 법규를 준수하고 살아감이 본인 스스로를 위해서도 전체의 대의를 위해서도 필히 필요한 필수 항목이라 할 수 있다. 2014년 4월을 기점으로 조선족 사회에서는 일부이기는 하나 한국에서 법규를 위반하고서 중국에 추방혹은 자진신고 후 일정기간의 입국규제 기간을 모두 채웠지만 과거의 잘못이 주홍글씨처럼 낙인이 찍혀 한국방문의 어려움을 겪게되는 대상자가 늘어만 가고 있다. 앞선 설명대로 강력범죄 대상자의 경우 원칙적인 입국규제를 함은 옳지만 한국의 법규에 대한 무지와 체류기간 일자 계산을 잘못하는 등의 인도적사유가 적용될 수 있는 항목들이 과거에 비하여 한국 법무부의 강한 규제로 인한 범법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 법무부는 올해 4월부터 3년복수비자, 1년복수비자 등 조선족 이라면 년령을 불문하고 누구나 편리하게 한국을 방문할 수 있는 정책을 내 놓았다. 이와함께 한국에서의 조그마한 법규위반 이라 할지라도 위법자에 대해서는 한국방문의 기회를 봉쇄하고 있는 실정임에 좌절되는 한국방문에 낙담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만 가고 있다. 올해 5월 이전에는 방대한 업무량이 몰리는 심양한국영사관 에서 진행해 오던 “영사면담제”역시 사실상 잠정 패쇄된 상황이라 본인의 사유를 설명하고 기회를 얻을수 있던 창구역시 막혀버린 실정이다. 사람이 살아가며 고의성이 아닌, 특히 외국생활로 인한 해당 국가의 법규를 인지하지 못하여 발생되는 착오로 인한 법규위반은 세계 어느 국가이던 발생되게 마련이다. 법무부에서는 모든 법규위반자에게 무조건적인 입국허가를 진행하여 달라는 의견이 아닌 법규위반 내용을 살피어 단순 법규위반 자일 경우에는 인도적사유를 적용하여 입국규제 기간을 다 채웠다면 다시금 한국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될 수 있도록 행정적 보완을 하여 주었으면 하는 필자의 바램이다. 한국을 방문하는 조선족들 역시 이제는 모두다 알수 있듯이 한국정부에서 조선족에 대한 한국방문 문호를 과감히 개방한 만큼 해당 국가의 법규를 준수하고 모범적인 한국생활을 하여야 할 것이다. 중국에서 자의. 타의의 환경으로 인하여 중국으로 이주하여 생활하다 중국공민, 조선족이 된 우리 선조들이 그 뿌리를 지켜나가기 위하여 척박한 황무지를 개간하며 고생을 하면서도 민족의 문화와 언어, 관습을 이어왔던 것은 한민족의 자긍심을 잃지 않기를 바램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반세기가 지난 후 이루어진 조선족과 한국인으 만남으로 인하여 한국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조선족에 대한 인식이 올바르지 못한 잘못된 선입견이 많은것 또한 현실적이라 할 수 있다. 한민족이라 생각하여 고향이라 생각되어 더 친근히 한국을 방문한 동기가 되었지만 아직은 서로가 진정한 소통을 이루지 못함에 많은 오해와 모순들이 이어지고 있지만 이는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환경이 조성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도 조선족 스스로 한국생활 중 모범적인 생활과 법규를 준수하는 모습을 보여줌은 진정한 한민족으로 소통되기 위한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임을 우리는 꼭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이미 한국생활을 시작한 제3세대 조선족이 있음을 인지하고, 나의 당신의 우리의 자녀들이 얻게 될 진정한 권리와 한민족으로써의 긍지를 느끼게 하여 주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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