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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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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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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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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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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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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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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룡 칼럼]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한국 이념논쟁
●김정룡(다가치 포럼 대표) 현시대 유명 정치학자로 손꼽히는 하버드대학교 샤무엘 헌탕턴 교수는 1996년 저서 『문명의 충돌』을 출간했다. 책이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로 반응이 뜨거웠다. 그는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2년 후 소련이 해체됨에 따라 냉전 시대가 종말을 맞았다. 냉전 시대 인간은 대체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진영의 이념에 각각 속해 있었다. 냉전이 종말 된 미래사회에서는 이념이 무의미해졌고 따라서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갖게 되면서 다른 귀속처를 찾게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귀속처가 바로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라고 제시하였다. 그가 말한 귀속처는 새로운 문명이 아니라 과거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실제로 탈냉전 후 지구촌의 인간무리들은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에로 재편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중국의 경우 개혁개방 전 해외 화교 화인들 중 고국을 못 마땅해하는 사람들도 개혁개방 이후 즉시 돌아서서 고국에 투자를 서슴지 않았다. 아세아 최고 부자 리카싱(李佳成)이 투자에 나서자 주변에서 ‘사기당하면 어쩌냐?’고 말리자 그는 ‘사기당해도 고향사람들에게 당하는 것인데 사기라 생각하지 않고 도와주는 것이라 여길 것이다.’라고 말했다. 재벌은 남다른 배포가 있는 법이다. 싱가포르 리콴유(李光曜) 전 총리는 본래 반공자였다가 개혁개방 이후 유교 전도사를 자칭하고 나서 중국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이것이 바로 이념을 탈피하여 민족문화에로 회귀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2008년 북경올림픽 개막식 주제가 공자였는데 이것은 전통문화에로의 회귀를 뜻한다. 1990년 초 동구권에서 있었던 코소보 인종청소 전쟁은 종교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아무튼 세상은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흘러가고 있는 추세이며 이미 새로운 역사 흐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지구촌의 흐름을 역행하는 곳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한반도이다. 동서 독일이 통일되고 남북 베트남도 통일되어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문화로 굴러가고 있다. 오로지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은 것은 남북한이다. 1990년 베이징아세아게임 때 한국관광객이 대량 백두산투어에 나섰다. 그때 한국여행사 에스코트 00사장이 한 말이 지금도 뇌리에서 생생하게 맴돌고 있다. “참 세월이 놀랍게 변했어요. 우리가 중국 땅을 밟으면서 백두산 구경을 할 것이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현실로 되었어요. 이 추세대로라면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남북통일도 10년이면 되지 않겠어요!” 그 후 2000년 김대중 대통령께서 북한을 방문하자 매체들이 ‘10년 안에 통일이 이뤄질 것’처럼 떠들었다. 그런데 그 후 강산이 두 번 변하고도 3년이란 세월이 흘러가고 있는 현재 남북통일이 가까워지기는커녕 점점 더 요원해지다못해 요즘은 아주 적대관계가 심각해지고 있는 중이다. “가장 중요한 게 이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일전에 국무회의에서 한 발언이다. 시중에서는 모두 뜬금없는 발언이라고 하기도 하고 때아닌 이념타령이라고 공격하기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이 발언이 확실히 케케묵은 이념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이게 무슨 시대인데 아직도 이념타령이라니? 역사를 거스르는 행위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요즘 한국 사회는 홍범도 장군의 정체성을 갖고 논쟁 중이다. 양 진영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으로 부질없는 일이다. 1943년 홍범도 장군이 사망할 당시에는 침략당한 약소국가들에서 나라마다 민족주의가 우선이지 이념과 사상이 우선 과제가 아니었다. 강대국들도 마찬가지로 이념을 떠나 미국과 소련이 협력하여 반파시스 전쟁에 돌입하였다. 홍범도 장군이 소련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은 사실이나 오늘날 이념논쟁을 일으킬 사안이 아니다. 한국 정치는 할 일이 하도 없어서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안타깝다. 문제는 왜 윤석열 대통령이 이념을 최대 이슈로 들고나왔는지? 맥락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 일부 진영에서는 아직도 빨갱이타령이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다. 종북좌파타령을 70년 동안 벌여오다가 요즘에는 종북좌파 타령이 질리기도 하고 그 실체도 주목을 받기가 조금 약발이 떨어져 친중좌파 공격으로 방향을 틀고 화살을 돌리고 열을 올리고 있다. 필자는 얼마 전에 한국 지인의 소개로 한국 엘리트들이 참여하고 있는 카톡방에 가입한 적이 있다. 카톡방은 흔히 그렇듯 좋은 정보도 나누고 서로 필요한 교류도 하고 인맥도 넓히고 등등 좋은 점이 많다. 하지만 인간무리에는 취향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인데 그 취향이 정치적인 성향이 강하면 골머리가 아파난다. 어느 한 분은 윤석열 대통령을 찬양하는 ‘윤비어천가’를 올렸는데 조선 창시자 이성계를 찬양한 ‘용비어천가’를 저리 가라 할 정도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수령을 찬양하는 ‘어천가’보다 훨씬 뛰어난 솜씨로 현직 대통령을 찬양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통령을 이렇게 신을 찬양하듯 하는 것을 처음 본다. 일각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문재인 전 대통령을 평가하는 기준이 극명하게 나뉘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문재인은 빨갱이고 북한 간첩이다. 나라를 북한에 팔아 먹는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사고방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아무리 좌파 성향을 지닌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설마 나라를 팔아먹을 수가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그들은 상식을 벗어나 비합리적인 주장을 하면 이에 동조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억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 친미를 확실하게 하면 다른 분야가 조금 떨어지더라도 문재인처럼 나라를 팔아먹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그들에게는 굳건하게 박혀 있다. 윤석열 대통령을 신을 찬양하듯 하는 행위는 필자와는 하도 상관없는 일이라 개의치 않고 그냥 넘겨버리고 말았는데 다음 일은 도무지 지나칠 수가 없었다. 기름 개구리를 산 채로 끓는 기름에 넣어 튀기다가 물을 넣고 끓여 먹는다. 한 분은 친중좌파들을 개구리 산 채로 튀겨먹고 끓여먹듯이 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머리카락이 곤두설 지경으로 정신이 아찔해졌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그만이라는 속담이 있다. “미친 아낙네의 악담보다 더 저질스럽다.”는 말을 남기고 나가기를 해 버렸다. 종북좌파 타령이나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친중좌파 타령이든 모두 같은 이념타령이다. 이런 이념타령이 시중에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고 그 세력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대통령의 이념논쟁을 때가 아닌 것이라 하거나 뜬금없는 일이라는 지적은 헛발 짚는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편 한국사회에서 아직도 공산주의 빨갱이 타령이 심각한데 진짜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자가 얼마나 될까? 의문이다. 무엇을 대상을 공격하려면 그 대상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나서 공격해야 마땅하나 한국에서 공산주의 빨갱이 공격은 실체를 모르는 막무내식이어서 안타깝다. tvn방송에 <어쩌다 어른>이라는 강연프로그램이 있다. 몇 년 동안 출연을 가장 많이 했던 최진기 강사가 있었다. 그는 자칭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이다. 액면 그대로 믿기로 하고 그가 이해하고 있는 공산주의란 무엇인지? 알아보자. 마르크스의 노동 분배 원칙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이다. 최진기 강사는 이 공산주의 핵심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마르크스는 아마 아버지가 돈을 벌 능력이 있고 그 돈을 자녀가 학비로 사용하는 케이스에서 힌트를 얻어 내놓은 이론일 것이다.” 이어서 그는 유명 스타 연예인 강동원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사람을 어떻게 수요에 의해 분배할 것인가?”고 희죽거리면서 공산주의를 형편없는 애들장난처럼 매도하고 조롱하는 것이었다. 만약 공산주의가 최진기 강사의 말처럼 그렇듯 유치한 것이라면 어떻게 지구촌 반 되는 인간무리가 추종했겠는가? 능력에 따라 일한다는 것은 인간이 고도의 의식을 갖추면 타인의 능력과 비교하지 않고 또 타인의 노동기여도와 비교하지 않고 나의 능력껏 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은 공산주의사회는 물질이 풍부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되어 불필요한 물질을 탐내지 않고 사치를 탐내지 않는 전제하에서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것을 의미한다. 요점은 물질이 풍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된 사회에서 실천가능한 원칙이라는 것이다. 빨갱이 뜻은 사상이 빨갛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필자의 부친은 평생 당지서를 맡았는데 사상이 붉다못해 둘째 아들이 휴학하는 해에 참외 밭을 대신해 보게하고는 아들이 생산대 참외를 먹었다고 하여 장부에 가을에 떼어내게 기입해 놓았다고 한다. 필자가 자랄 때 동네 어른들이 늘 저한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너의 부친은 진짜 빨갛다.’는 말을 반복했다. 최진기의 자칭 최고 강사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의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이 수준이라면 진짜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자가 얼마나 될까?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 서강대 00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산주의는 제도로서 실천은 실패했지만 그 이념과 사상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분단국가로 존재하고 이직도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있는 이 민족의 현실. 언제 가야 통일되고 하나가 되어 부질없는 다툼에서 벗어날 것인지? 민족의 운명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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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핵폐수 해양 방류 시작과 과정 그리고 결과는?
● 철 민(논설위원) 한·중·일 해양 안전 문제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신경전을 벌였던 일본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처리 문제가 24일 일본 정부의 바다 방류 개시와 더불어 또 새로운 논쟁거리를 몰아오고 있다. 우선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행위를 두고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나라들로는 일본의 이웃 국가들인 중국과 한국(정당과 사회단체 등), 북한 등과 거리가 멀지만, 남태평양 도서국의 반발도 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은 후쿠시마 오염수가 바다로 흘러들기 시작해서 240일이면 중국 연해에 도착한다며 정부로부터 국민 매 개인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방류 결정을 국제 공공의 이익을 무시하는 극단적으로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고 있다. 한편 중국 정부는 일본산 수산물 수입의 전면 중단을 발표하였다. 한국 언론도 한국의 여러 해산물 시장이 거의 텅 비어 있어 어부들은 미래의 생계를 걱정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24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제주도 동문어시장에서 20년 넘게 해산물 장사를 해온 한 상인은 “예전에는 오전 10시경과 오후 5∼7시(두 시간대)에 장사가 안될 때도 시장은 붐볐지만, 요즘은 손님이 없는 텅 빈 고속도로”라며 “코로나19 기간에는 장사가 더 잘됐다”라고 우려했고 한국 서부 해안 도시 군산 출신의 한 어민은 “내일 해산물 경매장에 간다고 생각하니 답답하다”라며 “해산물 소비량이 4분의 1로 줄었고 가격도 더 낮아질 것 같다”라고 탄식했다. 부산종합어시장에서는 조기 한 박스가 보통 4만 원 또는 5만 원에 팔리는데, 전국 해산물의 약 30%가 이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이번 주 수요일(23일)에는 조기 한 박스가 정상가의 절반 이하로 판매되었으며, 한국인들의 주요 해산물인 멸치는 평소보다 10~20% 정도 가격이 저렴하게 판매되었다. 24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담화문을 발표하여 일본이 이날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방류를 개시한 것은 지구 생태환경을 파괴하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면서 핵 오염수 방류계획을 강행하는 것은 자신들의 사욕을 위해 인류에게 핵 재앙을 초래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반인도적 범죄행위라고 주장했다. 이외 후쿠시마 핵 오염수를 바다로 방류하기로 한 일본의 결정을 알게 된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에 있는 한 비정부기구가 공개적으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반대하는 글을 올렸으며 또 피지 수바에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시위에 나서기로 했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은 해외의 국가와 사회단체의 규탄은 물론 일본 자국 내 어민 단체와 국민의 반발을 사고 있다. 특히 1945년 원폭 피해자 후손들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나섰다. 교도통신은 24일 원폭 피해자 후손들로 구성된 일본-전국 원폭 피해자 2세 단체 연락 협의회가 나가사키시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후쿠시마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항의했다고 전했다. 이 단체는 원자폭탄의 피해자인 히로시마가 견딜 수 없다며 성명을 발표했고, 이 성명은 총리 관저에 우편으로 발송됐다. 성명은 “원폭 피해자 2세들은 부모들이 방사능 영향으로 고통받는 것을 오랫동안 목격했고, 자신들도 유전적 영향을 배제할 수 없어 건강을 염려하고 있다”라며 “정부와 도쿄전력이 책임을 지고 육상에서 보존·관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외에도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이루다 나열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고도 높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은 국제원자력 기구(IAEA)의 감찰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IAEA의 권위성과 전문성은 인정하지만, 이 기구의 분석과 결론 모두를 믿는 건 아니다. 특히 IAEA 역시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에 대해 명확한 지지 혹은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도 않았다. IAEA 역시 사상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수치나 분석을 통해서는 함부로 결론을 내릴 수 없은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모든 일이란 시작이나 과정을 통해서는 어떤 결과가 나타나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례로 1945년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전에는 그 위력이 그 정도로 강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자료도 있다. 다음 우리는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 더군다나 믿을 수 없다는 추리가 나온다. 일본인을 두고 말하자면 좋게 말하면 “총명하다”하고 할 수 있지만 다른 각도로 말하면 “잔머리를 잘 굴린다” 혹은 “비열하고 간교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은 조선과 중국 그리고 기타 태평양 지역 국가와 지역에 큰 피해를 주었다. 그것도 아주 음융하고 비열하고 잔혹한 수단과 명분 등으로 말이다. 조선 왕조의 명성황후 음해 사건, 중국 대만 강점과 한일 합방 그리고 지난 세기 30~40년대 조선에서 위안부를 모집할 때는 “방직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등 감언리설로 순진한 소녀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고 1920년대 말의 만주에서의 황구툰(皇姑屯) 사건과 루거우차오(卢沟桥) 사건 등을 분석 조명해보면 당시 일본이 강하다기에 앞서 음흉하고 뻔뻔스럽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 시 일본은 한편으로는 미국과 담판함과 아울러 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일본을 함부로 믿어서는 큰 코 다친다는 분석도 함께 나온다. 종합적으로 일본을 평가하면 일본인의 겉면을 보면 예의가 바르고 친절하고 생활이 아주 규칙적으로 보이지만 일본인의 속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겉과 속이 같은 한국인과는 달리, 웬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중국인과는 달리 또한 거만하지만 우쭐대지는 않는 서양인들과는 달리 일본인한테는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피해국에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역대의 독일 총리들과는 정반대로 일본은 오늘 현재도 기나긴 침략 역사에 대해 사과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교과서까지 뜯어고치면서 군국주의의 침략사를 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두고 각국은 여러 가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강경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중국과는 달리 미국은 지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고 한국 정부는 “지지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입장으로 나오고 있다. 여기서 미국은 태평양을 사이 두고 일본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속 궁리가 있는가 하면 다른 일종의 전략이 내포되어 있을 수도 있고 한국은 자국민들한테 미칠 손실보다는 일본과 정부 사이의 마찰을 우려하는 듯한 양상이다… 한편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에 대해 지금 과학적이고 안심할 수 있다는 학술적 수치는 있으나 그 영원성을 장담하는 언사는 한 마디도 없다. 어찌 됐든 일본의 핵 오염수는 방류하지 않는 것이 방류하는 것보다는 ‘명지한 선택’이라 보여지며 방류하는 것으로 나쁜 결과가 있을지언정 반대로 좋은 결과는 제로라는 것만은 분명한 것이다. 가령 앞으로 방류 과정에 혹시라도 일본 자국 혹은 주변국들에 피해 사례라도 발생한다면 그때 가서 아무리 미국이나 국제원자력기구라 해도 결코 일본을 위해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며 일본이라는 이 섬나라의 위망은 일락 천장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서기 2023년 8월 24일, 이날은 인류 역사상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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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무주지(無主地)’ 섬이 아니었다.
● 김정룡 (多가치포럼' 대표) 민간속설에 ‘이웃이 먼 사촌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가령 이웃집에서 경사가 생기면 함께 기쁨을 나누고, 안 좋은 일에는 같이 슬픔을 나누고, 급한 일이 생기면 이웃이 가장 먼저 달려와 돕는 등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삶을 영위해온데서 생겨난 속담일 터. 민간백성들의 삶은 대개 이웃끼리 화목한데 비해 한 사람, 한 사람으로 구성된 국가의 경우 이웃나라끼리 사이는 그다지 화목하지 못하다. 바다를 사이 두고 이웃으로 살아온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으로 좋은 때도 있었지만 서로 반목하는 일들이 더 많았고 지금까지도 해묵은 갈등들이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있는데 그 가운데서 독도의 영유권 문제, 종군위안부 문제, 일본전범기업 강제징용 배상문제 등이 주요 쟁점으로 꼽힌다. 최근에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가 새로운 갈등으로 부상하여 오랜 갈등들에 얹어져 가뜩이나 썰렁한 냉기를 더욱 차갑게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남아 내려온 갈등도, 새로 생겨나고 있는 갈등도 모두 일본 측의 책임이 크건만 정작 일본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후안무치한 태도를 보이고 있어 아주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어느 한 착실한 역사학자의 통계에 의하면 한반도는 서너 차례 모자라는 1천 번의 침략을 당해왔다고 한다. 무려 1천 번이나 침략을 당해왔으나 남을 침략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하니 얼마나 착한 민족인가? 누구인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백의민족은 맞기만 하고 때릴 줄 모르니 선천적으로 DNA에 문제가 있다”고. 아무튼 그 1천 번 가운데서 일본의 침략이 다수였다. 일본은 지진이 많고 태풍이 많기로 지구촌에서도 이름난 곳이다. 게다가 땅이 척박하여 먹을 것이 늘 부족했다. ‘제집’ 내에서 해결책이 안 보이니 눈을 ‘옆집’에 돌릴 수밖에 없었다. 남의 것을 빼앗아오는 약탈행위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가에 왜구의 노략질이 들끓었다는 얘기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곡식도 빼앗고, 옷도 강탈하고, 여자도 납치해가고 등 눈에 보이는 쓸 만한 ‘물건’이면 전부 빠트리지 않고 싹쓸이해갔다. 백의민족의 전통인사말은 ‘무사한가?’인데 그 유래가 바로 빈번한 외침을 당한데서 생겨난 것이다. 일본은 왜구의 노략질도 빈번했을 뿐만 아니라 정부차원의 침략도 감행하였고 그 궁극적인 목적은 한반도 식민화였다. 1592년 풍신수길이 발동한 임진왜란이 좋은 근거이다. 명나라 조선 파병 때문에 일본이 임진왜란에서 실패했으나 그 후 결코 한반도 식민화 정책은 포기하지 않았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조선정부는 청나라와 일본을 불러들인 것이 화근이었다. 큰 전쟁을 피하고자 조선정부는 동학농민운동 측과 협상하여 평화적인 해결책을 마련하고 청나라 군과 일본군 모두 철회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모처럼 좋은 기회를 만난 일본이 철회할 리가 만무했다. 청나라와 군대 철회로 갈등을 빚다가 드디어 무력충돌이 발생하였고 그것이 바로 ‘중일갑오전쟁’이다. 일본을 ‘쌰오르번(小日本)’으로 하찮게 여겨왔던 청나라가 생각 밖으로 일본한테 패배한다. 조선을 청나라 속국에서 벗어나게 하고 ‘독립문’까지 세워준 일본이지만 정작 조선은 독립을 하지 못하고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만다. 호랑이가 나간 자리에 승냥이가 들어온 셈이었다. 일본은 강대했던 청나라를 물리쳤으나 또 다른 강대한 적인 러시아와 맞붙어 싸워 이겨야 만주와 조선에서의 이권을 모두 독차지할 수가 있었다. 1904년 일본은 한반도에서 자기네가 마음에 드는 곳에 어디든 군사기지를 세울 권리가 있었다. 러시아와 맞붙으려면 동해바다 섬에 군사기지를 세울 필요가 있었다. 하여 일본의 레이더망에 독도가 들어왔다. 1905년 일본은 독도를 ‘무주지(無主地)’라 주장하면서 영토편입을 시도하고 시마네현(島根縣)에 지방고시를 알린다. 남의 나라 땅을 침략하고 그 땅을 ‘무주지’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드는 수법은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을 식민지화 하는 과정에서 활발하게 써 먹었던 수법이었다. 즉 일본이 유럽열강들한테서 배운 것을 조선침략에 활용했다는 뜻이다. 독도는 1905년 전에 과연 ‘무주지’였을까? 아니다. 마찬가지로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에 이르는 곳마다 모두 ‘무주지’ 땅들이었을까? 아니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무주지’라 주장하는 것일까? ‘발견자우선주의’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활용했던 것이다. ‘발견자우선주의’의 본뜻은 최초로 발견한 사람들이 소유 우선권이 있다는 의미인데 백인들이 아메리카 땅을 발견하고 개척할 당시 수많은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다. 결코 백인들이 최초의 발견자가 아니다. 분명히 그 땅엔 인디언이라는 주인이 이미 있었다. 해가 지지 않는 식민지를 개척한 그 땅들에 주인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이미 오래 전부터 발견하고 삶을 영위해온 원주민들이 거주해왔다. 그렇다면 왜 유럽열강들이 ‘발견자우선주의’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들었을까? 주인이 이미 있었는데 ‘무주지’라 주장하고 거기다 한 술 더 떠 ‘발견자우선주의’를 떠드는 근거는? 유럽열강들은 지구촌 곳곳에 살고 있는 인류 집단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그 땅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3C’ 즉 기독교(Chrisianity), 문명(Civilization), 상업(Commerce)을 통해 식민지 정복을 정당화했다. 1455년 교황 니콜라오5세는 아프리카 서쪽 해안의 영토에 대한 포르투갈의 권리를 승인했다. 최초의 탐험시대부터 이미 그 땅에 인류가 살고 있든 말든 국가가 있든 말든 유럽열강들 중 그 누가 먼저 그 땅에 도착하면 자기네들이 주인이라는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를 적용했던 것이다. 독도는 1905년 이전에 조선의 소유이고 조선이 영유권을 갖고 있다는 역사적인 증거는 충분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산업혁명과 식민지개척 공부에 가장 모범생이었던 일본이 서구열강들이 식민지 개척 과정에서 정당화로 써먹었던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 무기를 휘둘러 독도 영유권을 시마네현에 편입하는 고시를 알리는 수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있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있을 때 일본 소유로 편입되었던 것들을 바로 잡는 조항에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등 제도들이 조선의 영유권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조선의 지리는 육지와 3170 개 섬으로 구성되어 있어 섬마다 일일이 모두 표기할 수가 없었고 그때 독도가 빠져있었던 것을 일본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있다. 즉 이것 때문에 일본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한국정부가 독도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군대가 주둔하여 관리하고 있다. 6.25 전쟁 때 한국군 36명의 용사가 독도를 굳건하게 지켜냈고 지금까지도 한국이 독도에 주둔하고 관리하고 있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존재의 일차적인 이유는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다. 2016년 세월호사건과 지난해 10월 발생했던 이태원참사사건에 전체 국민이 분노하는 이유가 바로 정부가 국가의 존재이유를 방기했다는 것이다. 다음 자국의 영토를 지키는 것도 국가존재의 주요 이유이다. 영토를 잃는 것은 안전을 잃어버리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기 때문이다. 한국정부의 독도에 대한 입장은 다음과 같다. “독도는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으로 명백한 우리 소유의 영토이다. 독도에 대한 영유권 분쟁은 존재하지 않으며 독도는 외교 교섭이나 사법적 해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확고한 영토주권을 행사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어떠한 도발에도 단호하고 엄중하게 대응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독도에 대한 우리의 주권을 수호해 나아간다.” 다만 걱정이 하나 있다. 일본정치주류세력인 우익이 줄곧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주장에 대해 올해만 세 번 한일 양국정상이 만난 자리에서 아무 언급도 없었다. 윤석열 정부의 과거사를 묻지도 따지지도 말자는 대일외교방침 때문일까? 일각에서는 이대로 나아간다면 일본이 독도를 완전히 빼앗아가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공동관리 주장을 들고 나오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한다. 독도분쟁은 대한민국의 자존심 문제이다. 자존심을 잃으면 나라의 존재이유가 사라질 만큼 국민의 사기가 저하된다. 그러므로 독도만은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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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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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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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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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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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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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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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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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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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는 한국인인가?
-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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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는 한국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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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칼럼] 12초
- ●김혁 (재외동포 소설가. 역사칼럼니스트) 1 1초, 그 찰나의 시간에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걸가? 국제 도량형 총회는 세슘 원자가 91억 9천 2백 63만 1천 7백 7십번 진동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1초라고 정의했다. 1초, 이 칼럼의 제목을 읽을만한 동안인 그 시간내에 지구에서는 수많은 일들이 벌어지고있다. 전 세계적으로8명의 새 생명이 탄생하고5명이 목숨을 잃는다. 1대의 승용차가 만들어지고 4대의 TV가 만들어진다. 166병의 콜라와 1200여 개의 달걀이 소비된다. 80가마가의 쌀이 재배된다. 51톤의 시멘트가 소모된다. 22명의 여행자들이 국경을 넘는다. 인터넷에서는4백만 건의 이메일이 전송된다. 39만 4천여 개의 댓글들이 달린다. 마이크로 소프트 회장인 빌게이츠는 1초에 인민폐로 800위안 벌어들인다. 이렇게 추산해보면 빌게이츠는 하루에 인민폐로 600만 위안을 버는셈이다. 벌이 살아 남기 위한 날개 짓을 200번 한다. 사람들이 134억 8천만 개의 식물, 곤충, 동물을 죽인다. 총구를 떠난 총알이 900m를 날아간다. 헬리콥터의 날개는 125회 회전을 한다.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486억Kw의 에너지를 받는다. 세계 각지에서420톤의 비가 쏟아진다. 빛이 30만km 즉 지구를 7바퀴 반을 이동한다. 빛의 속도로 우주는 30만 키로미터씩 팽창을 한다. 그리고 우주에서 79개의 별이 사라진다. 그러면 12초 사이에는 어떤 일들이 일어난 것일가? 2 일전, 연길에서 2시간 40분간 비행기를 타고 상하이로 날아갔다. 포동국제비행장에서 29개의 역을 지나 상하이 기차역에 닿았다. 다시 2시간30분동안 고속렬차를 타고 고도(古都) 난징에 닿았다. 난징역에서 2호선 지하철을 타고 5개의 지하철역을 지나 30여 분만에 이른 곳은 난징대학살 기념관이었다. 굳이 사비를 팔아 난징땅을 밟은 것은 새롭게 집필, 연재하는 장편소설 “춘자의 난징”을 위한 현지감각을 찾기 위해서였다. 나의 이 신작장편은 조선족문단 최초로 위안부와 난징대학살을 픽션물로 다루고있다. 조선족 권위문학지 “연변문학”에 연재가 당금 마무리 되어 곧 출간할 예정이다. 난징대학살은1937년 12월 13일부터 다음해 1월까지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이 30만 명에 달하는 중국인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중국 국민정부의 수도였던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은 중국인들의 항일 의지를 꺾기 위해 6주 동안 적수공권의 민간인들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중국지역 일본군 총사령관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 휘하의 일본군인들은 민간인들을 생매장 하기, 휘발유를 뿌려 불지르기, 칼로 참수하기, 일렬로 세워놓고 총을 쏴 총알의 관통력 테스트하기…등 잔학한 방법으로 대학살을 자행, 아이에게 젖을 먹이던 어머니, 3개월 된 아기까지 무차별 학살했고 여성들을 조직적으로 강간한 뒤 기념사진도 찍었다. 아름다운 고도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무간나락에 떨어졌다. 중국의 석학 임어당(林語堂)이 갈파했듯이 “신이 인간을 창조한 이후 이런 잔학상은 처음”이였다. 난징시 서쪽 외곽에 자리를 잡은 난징대학살기념관에는 평일에도 관람자가 장사진을 이루었다. 단체로 온 학생들에서 머리발 허연 노인들 그리고 이국적 외모의 외국유람객들이 눈에 띄었다. 간간이 한국인들의 익숙한 말씨도 들려 왔다. 기념관은 표를 받지 않고 무료 개방하고 있었다. 밀려드는 인파에 끼어 한참 줄을 선 뒤에야 입장할 수 있었다. 넓다란 기념관 정원에 들어서자 무엇보다 눈길을 끈 것은 “300000”이라는 숫자였다. 전시관 곳곳에는 “300000”이라는 수자가 새겨 있었다. 바로 일본군에 죽임을 당한 희생자의 숫자이다. 1985년 8월 15일 개관한 난징학살기념관은 일본군이 학살을 저지른 비극의 현장에 세워졌다. 기념관은 포토전시관과 유골전시관, 파괴된 도시와 살해된 사람들을 상징하는 부조물, 생존자들의 족적을 탁본 해 만든 동판조각로, 희생자의 명단을 판각한 벽인 “통곡의 벽”등으로 구성돼 있었다. 희생자의 유골이 집단으로 발굴된 곳에 만들어진 “만인갱”(万人坑)이라는 전시공간에는 유골은 무려 7단계로 층층이 쌓여 있어 처참했던 당시 상황을 어렵지 않게 엿볼 수 있었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내는 음향시설을 갖춘 전시 공간도 있었다. 천정에서 물방울이 12초 간격으로 “똑똑”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있었다. 시계의 초침처럼 정확한 그 소리는 난징대학살 당시 12초마다 한 명씩 살해됐다는 것을 환기시켜주는 소리었다. 3 드디어 중국의 난징대학살 문건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IAC)는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에서 제12차 회의를 열어 난징대학살 문건에 대해 '등재 권고' 판정을 내렸고 이리나 보코바 유네스코 사무총장이 이를 추인해 등재가 확정됐다. 난징대학살 문건은 일본 군대가 1937년 12월 난징을 점령한 이후 6주간 난징 시민과 무장해제된 중국 군인들을 학살한 사실과 1945년 이후 전쟁 범죄자의 재판 관련 기록물을 아우른다. 일본 정부는 유네스코의 이번 결정에 대해 유감을 밝혔다. 등재 신청 자료에 있는 숫자가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하며 중국 측에 등재 신청 취소를 요구해왔던 우파 일각에서는 유네스코 분담금을 끊어야 한다는 격한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여기서 “과거사 지우기”에 급금해 하며 국제사회와의 공생에서 스스로 멀어지려 자처하는 일본 아베 내각의 심각한 력사인식의 오류를 보아낼 수 있다. 난징대학살은 종전 후인 1946년 명백하게 확인된 대참안이다. 대학살을 주도했던 전범들은 난징군사법정과 도쿄에서 열린 극동군사법정을 통해 처형됐다. 하지만 오늘에 이르도록 일본에서는 일부 양심세력만이 이를 인정할 뿐 “이는 중국인의 환상이다” ,”학살은 없었다”는 뻔뻔한 부인이 계속되고있다. 일본의 극우분자들은 이 모든것이 “허구 또는 과장”이라 망언하며 발뺌하려 애쓰지만, 난징은 당시의 사진과 세계각지 언론의 기사, 생존자들과 유가족의 방대한 증언 등을 모아 놓은 이 기념관을 통해 일제의 만행을 세상에 알리고 “과거의 시간”을 지우려는 일본의 시도를 까밝아놓고있다. 누군가 시간이란 “과거에서 출발해 현재를 지나 미래를 향해 끝없이 날아가는 되돌아올 수 없는 화살”이라고 했다. 극구광음(隙駒光陰), 문틈새로 달리는 말을 보듯이 얼핏 스쳐지나는 시간이라지만 역사는 인류의 무지, 쟁투, 잔학, 수난을 분초 속에서도 슬로모션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시간의 필름에 새긴 그 영상물의 테마에는 평화라는 커다란 글자를 새겨 놓았다. 두시간 남짓한 관람이였지만 나지막히 귀에 잡히던 그 촌초 (寸秒)의 소리는 커다란 울림으로 내내 머리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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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칼럼] 12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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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간통죄 폐지 7개월, 중혼죄 도입 검토해야
- ■ 엄경천/이혼전문 변호사, 법무법인 가족(家族) 대표변호사 헌법재판소는 지난 2월 26일 "배우자가 있는 자가 간통한 때에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그와 상간한 자도 같다."는 형법 241조에 대하여 위헌 결정을 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간통은 일부일처제를 근간으로 하는 혼인제도와 양립하기 어려운 일탈행위로서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중대한 반사회적인 행위로 보아 형사처벌을 해왔다. 그런데 20세기 접어들어 1930년 덴마크가 간통죄를 폐지한 것을 비롯하여 스웨덴(1937년), 일본(1947년), 독일(1969년), 노르웨이(1972년), 프랑스(1975년), 스위스(1989년), 아르헨티나(1995년), 오스트리아(1996년)가 뒤따랐다. 미국도 많은 주에서 간통죄를 폐지하였거나 사문화되었다. 심지어 중국과 북한도 간통죄를 폐지했다. 이슬람국가와 대만 정도가 간통죄가 유지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일부일처제의 혼인제도를 유지하면서 간통죄를 폐지하는 것이 모순되는가. 간통죄를 폐지한 국가나 간통죄에 대한 위헌결정을 한 헌법재판소가 간통 자체의 반사회성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간통행위에 대하여 형사처벌을 하는 것이 성적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보았을 뿐이다. 간통죄를 폐지한 국가는 대부분 간통죄 대신 중혼죄를 두어 일부일처제의 혼인제도를 보호하고 있다. 이런 차원에서 간통죄에 대하여 헌법재판소의 단순 위헌결정을 할 것이 아니라 간통죄에 대한 위헌성은 선언하되 국회에 간통죄 대신 중혼죄를 신설하는 등 입법촉구를 하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하는 것이 보다 온건한 방법이었다는 지적도 있다. 이번에 대법원이 유책배우자의 이혼청구를 허용해야 할 것인가와 관련하여 사건을 전원합의체에 회부하고 공개변론까지 열었지만 기본적으로 유책주의를 유지한 것은 간통죄 위헌 결정에 따른 사회적 수용성을 고려한 것으로 보이고, 특히 일부일처제를 기본으로 하는 혼인제도의 근간이 흔들릴 것은 염두에 둔 것으로 평가된다. 헌법이 보장하는 혼인과 가족생활의 보장, 일부일처제의 혼인제도를 담보하기 위하여 완전히 사적 영역에 둘 것이 아니라 간통죄에 대한 대체입법을 주장하는 견해가 적지 않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다수의견도 ‘유책배우자의 책임사유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배우자 아닌 사람과 사실혼에 가까운 불륜관계를 맺는 경우’라 면서 ‘민법에서 중혼을 금지하고 있지만 이를 위반한 경우 혼인취소를 청구할 수 있으나, 이를 처벌하는 형벌규정을 두지 아니하였고, 사실상 중혼에 대한 형벌조항으로 기능하던 간통죄가 폐지된 이상 중혼에 대한 형사제제가 없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독일과 프랑스 등 일찍이 간통죄를 폐지한 많은 국가에서 중혼을 범죄로 규정하고 형사처벌을 하고 있다. 간통죄 폐지를 전후하여 사실혼에 가까운 불륜관계를 맺는 것을 포함하여 중혼에 대한 처벌규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아직 구체적인 입법논의는 부족한 실정이다. 간통죄 폐지 후 위자료 액수가 올라갈 것이라는 전망을 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법 논리적으로나 실무상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면이 있다. 사실상 파탄이 난 부부를 단지 서류상의 부부로만 남겨두는 것도 문제지만, 사실혼에 가까운 불륜관계에 대한 형사제재를 하지 않고 유책배우자의 이혼청구를 받아주는 것은 일부일처제의 혼인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것으로서 더욱 문제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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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간통죄 폐지 7개월, 중혼죄 도입 검토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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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혼인무효, 가정법원의 판결 없이도 주장할 수 있다.
- ■ 엄경천/이혼전문 변호사, 법무법인 가족(家族) 대표변호사 > 김씨(남)는 2010년 전 처와 이혼하였고, 자녀는 없었다. 이혼하고 4년이 지나 김씨는 2014년 11월 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전에 동거하던 이씨(여)는 김씨가 사망하면 사망보험금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2014년 12월에 김씨를 찾아가 김씨의 인감도장과 주민등록증이 필요하다고 말하여 김씨로부터 이를 받아 그 다음날 구청에서 김씨와 이씨가 혼인한다는 혼인신고서를 제출하였다.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한 김씨는 평소 가깝게 지내면서 간병을 하던 정씨(여)와 혼인하기로 하고 혼인신고서를 제출하였는데, 구청 가족관게등록공무원은 이미 3일 전에 혼인신고서가 제출되었다는 이유로 김씨의 혼인신고 접수를 거부하였다. 김씨는 이씨가 혼인신고를 한 사실을 알고 일주일 뒤 이씨가 혼인신고를 목적으로 자신의 인감도장과 주민등록증을 받아 사용하였다는 내용의 고소장을 자필로 작성하였으나, 급성 폐렴이 겹쳐 이틀 뒤에 사망하였다. 김씨가 사망한 후 김씨의 어머니는 보험회사를 상대로 사망보험금 1억원을 청구하였다. 보험회사는 보험수익자가 법정상속인으로 되어 있는데, 이씨가 김씨의 법률상 배우자이기 때문에 이씨의 법정상속분에 해당하는 6,000만원을 제외한 4,000만원만 지급하였다. 김씨의 어머니는 나머지 보험금 6,000만원을 받기 위하여 가정법원에 혼인무효소송을 제기하여 혼인무효 판결을 받아야만 할까? 당사자 사이에 혼인할 의사가 없으면 설령 혼인신고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혼인은 무효다. 혼인이 무효라는 이유로 가족관계등록부를 정정하려면 가정법원에서 혼인무효 판결이 확정되거나 상대방 배우자가 공정증서원본불실기재죄의 형사판결이 확정되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다른 소송에서 선결문제로 혼인의 무효를 주장 입증할 수 있다. 대법원도 “민법은 혼인의 취소에 관하여는 소에 의하도록 하면서도, 혼인의 무효에 관하여는 그 사유만을 규정하고 있을 뿐이므로, 혼인무효 사유가 있는 경우 혼인무효의 소를 제기할 수 있음은 물론, 이러한 소가 제기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이해관계인은 다른 소송에서 선결문제로서 혼인의 무효를 주장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대법원 2013.9.13. 선고 2013두9564 판결). 배우자 중 한쪽이 사망한 경우에는 혼인이 해소되었기 때문에 이혼소송을 제기할 수 없고, 이미 이혼소송을 제기한 경우에도 배우자 한 쪽의 사망과 동시에 종료된다. 그러나 혼인무효는 본인은 물론이고 법정대리인 또는 4촌 이내의 친족은 언제든지 가정법원에 소를 제기할 수 있다. 또한, 앞서 본 바와 같이 가족관계등록부를 정정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반드시 가정법원에 소를 제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고 민사소송에서 혼인무효를 주장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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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혼인무효, 가정법원의 판결 없이도 주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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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이혼 후에도 재산분할을 받을 수 있나
- ■ 엄경천/이혼전문 변호사, 법무법인 가족(家族) 대표변호사 이수애씨(가명, 39세, 여)는 약 1년 6개월 전 남편 정동건씨(가명, 41세, 남)와 이혼했다. 이씨는 정씨의 잦은 음주와 가정폭력이 두려워 하루라도 정씨로부터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이씨는 정씨에게 위자료와 재산분할에 대하여는 말도 꺼내지 못하고 협의이혼을 하였는데, 아이의 양육은 이씨가 하기로 하고 정씨로부터 양육비로 월 50만원을 받기로 했다. 그렇게 이혼한 후 이씨는 직장생활은 고달픈데 수입은 많지 않아 아이를 키우는 것이 쉽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전 남편 정시가 매달 보내주기로 한 양육비 50만원을 처음 몇 달은 보내주었지만, 6개월이 지났을 무렵부터는 양육비를 보내지 않다가 연락까지 두절되었다. 이씨는 아이와 함께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지만, 이제 아이와 하루하루를 버틸 생각을 하니 남편의 폭력은 감당할 자신이 생겼다. 전 남편한테는 이혼 당시 시가 5억원 상당의 아파트가 있었고, 스포츠 용품을 판매하는 일이 제법 잘되고 있었다. 위 사례에서 이씨는 이혼한지 2년이 지나지 않았다면 재산분할을 청구할 수 있고, 3년 내에 위자료도 청구할 수 있다. 협의이혼을 했다고 해서 모든 권리를 포기했다고 속단하는 것은 금물이다. 이씨와 같이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전업주부 중에는 남편의 폭력에서 벗어나는 것에만 급급하다보니 이혼 후의 경제적 기반에 대하여는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협의이혼을 한 후에도 2년이 경과하지 않았다면, 전 배우자를 상대로 재산분할을 청구할 수 있다. 협의이혼은 협의이혼신고가 된 시점에 이혼의 효력이 발생하는데, 협의이혼을 한 후에 재산분할을 하는 경우에는 이혼시점의 재산을 기준으로 재산분할을 하게 된다. 또한, 혼인파탄에 대한 책임이 있는 배우자라 재산분할청구권까지 부인되는 것은 아니다. 외도 등 혼인파탄에 책임이 있는 배우자는 책임의 정도에 따라 상대방 배우자에게 위자료를 지급해야 할 수 있겠지만, 재산분할은 혼인파탄과는 별개의 문제다. 협의이혼을 전제로 재산분할을 포기하기로 했더라도 재판상 이혼을 할 경우에는 재산분할을 포기하기로 한 합의는 효력이 없다. 즉, 재산분할을 포기하기로 합의를 하고 실제 협의이혼을 했다면 재산분할도 청구할 수 없지만, 협의이혼을 하기로 하고 재산분할을 포기하기로 합의했더라도 실제로 협의이혼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재판상 이혼(이혼소송)을 하는 경우 재산분할을 포기하기로 한 합의는 효력을 잃게 된다. 대법원도 “재산분할에 관한 협의는 혼인중 당사자 쌍방의 협력으로 이룩한 재산의 분할에 관하여 이미 이혼을 마친 당사자 또는 아직 이혼하지 않은 당사자 사이에 행하여지는 협의를 가리키는 것인바, 그 중 아직 이혼하지 않은 당사자가 장차 협의상 이혼할 것을 약정하면서 이를 전제로 하여 위 재산분할에 관한 협의를 하는 경우에 있어서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장차 당사자 사이에 협의상 이혼이 이루어질 것을 조건으로 하여 조건부 의사표시가 행하여지는 것이라 할 것이므로, 그 협의 후 당사자가 약정한대로 협의상 이혼이 이루어진 경우에 한하여 그 협의의 효력이 발생하는 것이지, 어떠한 원인으로든지 협의상 이혼이 이루어지지 아니하고 혼인관계가 존속하게 되거나 당사자 일방이 제기한 이혼청구의 소에 의하여 재판상 이혼(화해 또는 조정에 의한 이혼을 포함한다)이 이루어진 경우에는 위 협의는 조건의 불성취로 인하여 효력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대법원 1995. 10. 12. 선고 95다23156 판결, 대법원 2000.10.24. 선고 99다33458 판결 등)라고 판시하여 이와 같은 법리를 확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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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이혼 후에도 재산분할을 받을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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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의 아들 … 충칭에서 학창시절 보내
- ↑중대부속청교 교정의 전경 “유랑은 언제까지? 도망은 어디까지? ” 70여년 전 어느날 유명한 <류망삼부곡 (流亡三部曲)>이 충칭 칭무관(靑木關) 민중 교육관에서 울려 퍼졌다. 노래를 불렀던 이들은 이곳까지 피난 온 학생들이었다. 당시 국립 중앙 대학 부속 중학교 학생으로서, 올해 85세인 쾅하오원(况浩文)씨는 이러한 광경이 아직도 인상이 깊다. 1939년 5월, 국민정부교육부는 충칭 칭무관으로 이전하였고, 국내 유명한 대학, 중학, 초등 학교들도 잇달아 이곳으로 이전하거나, 새로 지어졌다. 칭무관 위안지아거우(袁家沟)의 중대부속중학교도 그 중 하나이다. 항일 전쟁시기 충칭에서도 중대 부속 중학교는 둘로 나뉘는데, 칭무관에 있는 하나는 중대부중청교(中大附中青校)이고, 다른 하나는 사핑바(沙坪坝)에 있는 곳으로 1942년 증설된 중대부속분교로 중대부중사교(中大附中沙校)이다. 쾅하오원 씨는 1946년 청교와 사교가 난징으로 다시 이전된 후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현재의 난징사범대학부속중학교) 그 당시, 중대부중청교에 다니던 학생들의 대부분은 가족을 따라 충칭으로 피난온 학생이나 보육생이었고, 일부는 칭무관 현지에서 모집된 우수한 학생들이었다. 중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학생 수가 가장 많을 때는 1500명이 넘었다. 그러나 학교 시설은 매우 열악하였다. 학교 운영의 어려움 속에서 중대부속중학교는 국가의 기둥이 되는 인재들을 배출해냈다. 예를 들어 중국의 자랑이라고 불리는 중국공정원(中国工程院) 원사(院士) 딩헝가오(丁衡高)도 중대부중청교에 다녔었던 것이다. 한국학생 10명의 특별 입학 중대부속중에는 중국학생뿐만 아니라 외국 학생도 있었다. 항일 전쟁시기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충칭으로 이전되어 왔는데, 임시정부관원과 가족들도 잇달아 충칭으로 오게되었다. 1938년 말, 국민정부교육부부장 천리부(陈立夫) 특별 승인을 받아, 중대부속청교는 10명의 임시정부관원 자녀들을 받았는데, 그 중 1명은 임시정부주석 김구의 차남 김신이었다. (재학시절 이름은 김신강) 쾅하오원씨는 김신이 고관(高官)의 자제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그의 생활은 다른 사람과 같이 어려웠다고 한다. 25년전 그들은 한국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김신이 말하기를 그 당시 식탐을 참을 수 없어, 그는 종종 집에서 준 차비를 아껴, 몇 십리 산길을 걸어서 학교에 갔는데, 이는 단지 츠치커우(磁器口)를 지날 시 마오쉐왕(毛血旺) 한 그릇과 땅콩 반 근을 먹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김신은 아직도 그 때 그 맛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충칭에서 생활한지 5년이 되어서 김신은 충칭 말도 매우 유창하게 하였고, <류망삼부곡>도 잘 부르게 되었다. 중대부속중학교를 졸업한후, 그는 쿤밍(昆明)에 있는 서남연대(西南联大)에 입학하였고, 1944년 입대를 하였고, 나중에는 미국공군학교에서 훈련을 받게 되었다. 1993년 김신은 뿌리를 찾기 위해 충칭으로 돌아왔는데, 칭무관으로 가서 모교의 유적을 돌아보았다. 반세기가 흘렀어도, 그에게는 어두운 등불 아래서 공부를 하던 그때 그 모습이 바로 어제의 일같이 느껴졌다. 김동철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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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의 아들 … 충칭에서 학창시절 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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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칼럼] 중국 전승절 열병식과 조선인 작곡가 정율성
- ● 김혁 (재중동포 소설가, 역사칼럼니스트) 9월 3일 중국의 수도 베이징 톈안만 광장에서 “중국인민 항일전쟁 승리 및 세계 반(反)파시스트 전쟁 승리 70주년” 기념식과 사상 최대 규모의 열병식이 개최되었다. 중국의 간거했던 항일전쟁 승리의 의미를 되새기는 동시에 첨단 무기를 통해 중국의 군사굴기를 과시하면서 주요 2개국(G-2)으로 올라선 중국의 “글로벌 파워”를 대내외적으로 천명하는 자리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한국 박근혜 대통령,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 최룡해 북한 노동당 비서 등 정상급 외빈 50여명과 각국 외교사절, 중국의 전현직 지도부 등이 톈안먼 성루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조선인 음악가가 작곡한 음악이 톈안먼 광장의 상공에 울려퍼졌다. 작곡자는 바로 중국의 군가 “태양따라 앞으로”의 작곡가 정율성이다. 정율성은 1914년 7월 7일, 한국 전라남도 광주남구 양림정에서 태여났다. 1933년, 3.1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가 일제의 탄압에 중국으로 망명한 형들을 따라 부산, 일본, 상하이를 거쳐 중국 난징에 이르렀다. 난징에서 “의열단”이 꾸린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학과를 배우고 이어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였다. 반일활동을 하는 한편 시간을 짜내 러시아인 크리노와교수에게서 성악을 배웠다. 크리노와교수는 그의 음악천부를 높이 평가하여 그를 “동방의 카루소”라고 격찬하였다. 1937년 정율성은 상하이 부녀구국회 지도자이며 조선혁명가 김성숙의 안해인 두군혜의 도움으로 “중국혁명의 성지” 옌안으로 떠나게 된다. 열아홉 살의 정율성은 바이올린과 만돌린 그리고 “세계명곡집”을 지니고 간난신고를 겪으며 옌안에 도착하였다. 옌안에서 루쉰예술학원을 나왔고 “팔로군 행진곡”, “연수요”, “항전돌격운동가”등 50여 수의 악곡을 창작하였다. 팔로군(八路軍)은 1937년 제2차 국공합작 후에 설립 된 공산당의 주력부대로서 신사군과 함께 화베이 지방에서 항일전의 최전선을 담당했다. 당시 팔로군과 손잡고 조선의용대도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팔로군의 통일전선 파트너였던 조선의용대는 대일 전선에서 스파이와 배후교란 등 매우 위험한 임무를 기꺼이 맡았다. 정율성은 연안에서 탁월한 작사자 두 명을 만나는데 “팔로군 행진곡”의 작사자인 궁무(公木)와 “연안송(延安頌)”의 작사자인 여전사 모예(莫耶)이다. 1939년 정율성은 시인 궁무에게 자신이 구상하고 있던“팔로군 행진곡”의 노랫말을 써줄 것을 부탁한다. 전선에서 풍부한 전투경험을 쌓았던 공무는 자신의 생생한 경험을 녹인 노랫말을 정율성에게 건네주었고 정율성은 같은해 8월에 곡을 완성한다. “전진 전진 전진!/ 태양을 향한 우리의 대오/ 조국의 대지 위에 섰다/ 민족의 희망을 안은/ 우리의 힘 막을자 누구냐/ 우리는 싸움의 전위/ 우리는 민중의 무장/ 두려움없이 굴함 없이 용감하게 싸워/ 왜놈들을 국경밖으로 몰아내자/아,나팔소리 울린다/ 아 항전의 노래 우렁차다......!” 1939년 겨울, “팔로군 행진곡”은 루쉰예술학원 음악부에서 등사판 소책자로 책으로 엮어져 연안 전체와 전군, 전후방(前後方) 할 것 없이 배포되었다. 이듬해 정율성의 지휘 아래 “팔로군 행진곡”의 첫 공연이 옌안에서 열렸다. “팔로군 행진곡”은 건조한 황토고원에서 불붙듯 삽시간에 퍼지면서 모든 항일전사들의 가슴에 깊이 아로 새겨졌다. 격정과 기백이 차넘치는 “팔로군 행진곡”은 군민의 항일의지를 북돋우어주면서 재빨리 널리 유전되었다. 그후 이 노래는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으로, 1988년에 이르러서는 “중국인민해방군군가”로 채택되였다. 1990년 9월 베이징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개막식 역시 정율성 작곡의 이 노래의 연주로 시작됐다. 연안 시절 정율성은 그 훗날 중국 최초의 여성대사로 주 덴마크, 주 네덜란드대사가 된 정설송과 결혼하여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열아홉 살 나는 중국 쓰촨의 처녀 정설송은 뛰어난 사업 능력과 미모로 연안에서 소문높은 인기 인물이었다. 그녀는 “연안송”의 작곡자인 정율성을 몹시 숭배하였다. 하지만 정율성의 외국인 신분에 걸려 둘의 사랑은 곤경에 처하였다. 이때 마침 팔로군 포병퇀 퇀장 조선인 무정장군이 마침 연안에 도착하여 정율성에 대해 담보하고 나섰다. 이국적 청춘남녀는 시련을 거쳐 드디어 1941년 말 혁명성지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이듬해 딸 정소제(郑小提)가 태어났다. 결혼 후 정율성은 무정장군을 따라 조선의용군 소재지인 태항산에서 조선혁명군사학교 교육장을 담임하였다. 그는 학생들을 이끌고 탄우가 비발치는 전쟁터에서 선전을 벌리기도 하고 대중가요창작활동도 펼쳐 나갔다. 그가 창작한 “조선의용군행진곡”과 ”혁명가”등은 중국의 하북과 동북의 항일근거지의 조선의용군들 속에서 널리 불려졌다. 1945년 8.15해방을 맞은 뒤 정율성은 조선의용군과 함께 조선으로 나갔다. 황해도 선전부장을 지냈으며, 해주음악전문학교를 세웠고 보안간부훈련대대부협주단(조선인민군협주단의 전신)을 창건하여 초대 단장을 역임했으며 조선국립음악대학 작곡학부장에도 부임했다. 그 몇 년사이 ”두만강”, “동해어부” 등 30수의 가곡 그리고 “조선인민군군가”를 작곡했다. 김일성 주석은 1948년 그 공로를 인정해 정율성 선생에게 표창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조선인민군군가”는 지난 2006년과 2007년 방북한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을 맞이해 인민군 군악대가 연주하기도 했다. 중국의 저명한 음악평론가 겸 작곡가 탕허(唐河)는 “전 세계에서 한 사람이 두 나라의 군가를 동시에 작곡한 것은 극히 드문 일일 것”이라고 극찬했다. 이로서 정율성은 두 나라 군가 작곡자로 세계에 유례없는 기록을 남겼다. 1952년 정율성은 중국에 돌아와 베이징인민예술극원, 중앙악단에서 전업작곡가로 있었다. 이 시기 그는 중국의 윈남, 따리등 오지를 찾아다니며 민요수집에 전력하였고 아이들을 위하여 ”평화의 비둘기”등 명동요를 창작하였으며 또 중국국가주석 모택동의 시사 34수에 곡을 붙이기도 했다. 10년의 “문화대혁명”이 결속되자 창작의 봄을 맞이했던 정율성은1976년 12월 7일 베이징 교외의 강에서 물고기를 낚다가 뇌익혈로 쓰러졌다. 향년 62세였다. 사후 정율성은 중국의 공신들만을 대우하는 “팔보산 혁명열사릉”에 묻혔다. 비문엔 이런 구절이 새겨져 있다. “인민은 영원하며, 율성동지의 노래도 영원하다. 중국인민은 그의 노래를 부르면서 일제 침략자들을 몰아냈고, 낡은 중국을 뒤엎었으며, 새 중국을 건립했다.” 1978년 베이징 음악출판사에서 “정율성가곡선”이 출판되었고 2009년에는 “신중국 창건영웅 100인”중의 한 사람으로 당선되었다. 40여년의 음악생애에서 각종 쟝르의 음악작품 360여수를 창작한 정율성은 중국현대음악사의 한 획을 그으면서 영원한 “인민음악가”로 추앙받고 있다. 지난해 7월 방한한 시진핑 주석이 서울대 강연에서 중·한 우의의 상징으로 정율성을 언급하다시피 중국에서의 정율성의 위상은 높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정율성이라는 이름은 오랫동안 금기시 되어왔다. 그가 중국과 북한, 그리고 한국전쟁과 깊은 관계를 맺은 탓이다. 지난 세월 이념과 냉전(冷戰)의 장벽 속에 갇혀서 정율성 선생의 실체(實體)는 한국인들에게는 오랫동안 베일 속에 가려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다 최근 정율성 탄생 100주년을 계기로 중한 양국에서는 기념음악회, 일대기 영화화 등 관련 행사들이 잇달아 열리면서 그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이 활발히 일고 있다. 정율성의 일대기는 일찍 중국의 조선족 영화인들에 의해 영화로 제작되여 스크린에 오른바 있다. 2002년 연변 조선족 자치주 성립 50주년을 기념해 제작된 영화에는 중국영화계의 쟁쟁한 일군들이 대거 투입되었다. 감독으로는 중국드라마부분 최고의 상인 “금독수리”상과 “비천”상을 석권한 중국인 감독과 조선족 감독인 박준희가 메가폰을 잡았고 중국영화계 최고의 상인 “금계상”과 “백화상” 수상자들이 정율성과 부인 부인 정설송역을 맡았다. 영화는 옌안에서 뿐만 아니라 베이징, 톈진, 창춘 그리고 연변지역을 폭넓게 전전하면서 외경을 찍었다. 영화는 만들어진 후 평양국제영화제에서 특별상을 받았고 한국광주영화제에도 초청, 상영되었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정율성에 대해 이념의 색안경을 건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심한 이데올로기의 질곡이 여전히 한 천재음악가의 명성과 자유를 옥죄고 있다. 때문에 정율성과 그의 가족들에 대한 항일독립투쟁 포상은 물론 공적조차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제의 살벌하고 등등한 치하 당시 수많은 독립운동가, 애국투사들이 사회주의 계열에서 활동했는데 이는 독립운동의 한 방편이었음은 엄연한 사실이고 그들의 치열한 반일의식에 대해서도 세상이 다 아는 일임에도 말이다. 정율성선생이 한국 광주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반일에 투신했고 음악을 무기로 우리 민족의 혼을 전해 세계인을 감동 시킨 민족의 대음악가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두 나라의 군가를 작곡한 진귀한 기록을 세워 놓은 인물로서 선생은 일제치하 중국대륙을 무대로 항일독립운동에 투신 하면서 국가의 자존과 민족의 얼을 잊지않았고 몸과 혼을 불살랐다. 음악가로서나 혁명가로서나 그이는 온 민족의 추앙을 받을 만한 선각자임이 분명하다. 총 100분 가량 진행된 전승절 열병식 전 과정은 관영 중국중앙 CCTV를 통해 생중계되고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로 전송됐다. 따라서 정율성이 남긴 장쾌한 선율은 온 누리에 메아리쳤다. 이를 계기로 그이의 생애 그리고 음악이 하루 빨리 이념의 구름장을 넘어 만방에 알려지고 더 높이 울려 퍼졌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 본다. 2015년 9월 3일 - “청우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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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칼럼] 중국 전승절 열병식과 조선인 작곡가 정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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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36)
- ■김철균 순자는 용환이를 무척 아끼고 사랑했다. 평소에 집에 뭘 색다른 음식이라도 있으면 자기도 먹지 않고 남겼다가는 용환이한테 가져다 주었으며 집에서 누가 용환이에 대해 귀에 좀 거슬리는 소리를 하면 슬며시 두둔해 나서군 했다. 그 뒤 얼마 안있어 용환총각이 진짜로 시험에 합격되어 동북군정대학 용정분교에 붙자 순자는 오빠들앞에서 용환총각을 드러내 놓고 자랑하기도 했다. “너, 아직 혼인도 하지 않았는데 그렇게도 용환이를 자랑하며 싸고 돌고 싶느냐?!” 오빠들은 넌지시 순자와 농작을 걸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순자는 오빠들의 살을 꼬집으며 고개를 비틀군 했으나 속으로는 그런 소리를 그닥 싫어하는 양상은 아니었다. 또한 셋째 오빠 구완이는 농담으로 용환이한테 “순자가 자네한테 이토록 잘해 주는데 앞으로 순자를 구박하는 일같은 것이 없어야 하네”하고 못이라도 박으면 순자는 그 자리에서 “사람을 뭘로 보고 그런 말을 하는가”고 하면서 셋째 오빠한테 면박을 주군 했다. 그 외에도 매일 공부가 끝날 때마다 학교 정문에서 기다리다가 용환이가 나오면 동행해 주군 하던 순자, 아버지 명기 어른이 셋째 오빠한테 끊어다 준 옷감이 맘에 들어 그것을 용환 총각한테 주자고 셋째 오빠 구완이와 사정하던 순자, 면방추(棉棒锤)를 돌리면서 누빈 실로 용환 총각한테 장갑과 목도리 같은 것을 떠주던 순자… 용환이는 점차 순자로부터 단지 약혼녀만이 아닌 어머니와 같은 따사로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홉살을 잡으면서 아버지를 잃은 용환으로 놓고 말하면 성인이 되는 그 때까지 진정한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 보지 못하고 늘 남들이 먹다 남은 찬밥이나 얻어 먹으며 살아 왔던 터라 갑자기 순자로부터 살뜰한 사랑을 받고 보니 꿈만 같았다. 그 때로부터 용환이는 순자한테 아내 이상으로 모든 것을 의탁했고 순자 또한 외롭고도 불쌍하게 자란 용환이를 자상히 보살피는데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이는 수십년간을 살아오면서 일종의 습관으로 되기도 했다. …… 인생만년에 들어 병석에 누워있는 용환 영감은 더욱 마누라한테 “아기”와 같은 존재로 돼 버렸다. 하지만 여느 환자들과는 달리 운신할 수는 없어도 사유는 비교적 명석한 용환 영감인지라 자신을 정성껏 간호하는 마누라의 소행에 자주 눈물을 흘리군 했다. 그리고 순자가 가끔씩 그제날 함께 낭만에 넘치던 연애시절을 추억하며 그 때 함께 불렀던 노래를 부르기라도 하면 용환 영감은 유달리 눈에 생기가 돌며 즐거운 표정을 짓군 하였다. “영감, 그 노래들이 그렇게 듣기가 좋수? 영감이 좋다면야 백번인들 못 부르겠수, 천번인들 못 부르겠수.” 그러면서 순자는 또 추억이 담긴 그 노래들을 부른다. 무산대중의 봄이 왔네/ 이 봄은 해방의 봄이라네// 얽히운 쇠사슬 깨뜨려라/ 해방의 봄맞이 얼씨구 좋다… 한편 용환 영감은 순자의 노래를 들으면서 여러 가지로 인생을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는 반대로 가령 마누라가 투병생활을 한다고 할 때 자기도 순자처럼 마누라한테 잘해줄 수 있을가고 반성해 보았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나빠서가 아니라 남성들한테는 여성들만이 갖고 있는 특유한 사랑의 정감세계가 없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몸을 가르는 그 진통속에서 새 생명을 낳는 여성의 사랑의 힘, 그것이 어떻게 남성들한테 있을 수 있으랴?! 여성이 갖고 있는 사랑의 힘은 위대하고 거룩한 것이다. 거기에 순자는 더욱 돌출했다. 고아한테 앞날을 기탁한 순자, 자신의 자식 6명 외에도 한족고아 6명이나 돌봐준 순자한테는 여느 여성들한테도 없는 사랑의 세계가 별도로 있었던 것이다. 용환 영감은 5년이란 오래고도 지루한 투병생활 끝에 2008년의 봄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누라인 순자한테서 더 이상 그 무엇을 바랄 것이 없다는 그런 모습이었다. 운명할 때 용환 영감은 순자의 노래를 들으며 조용히 이 세상을 하직했다. 마누라가 하는 일처사가 몽땅 시름이 놓이는지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 한마디도 없었다. 그 노래는 여전히 용환 영감이 젊었을 때 즐겨 부르던 “낙화유수”였다.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새파란 잔디엮어 지은 맹세야// 세월의 꿈을 실어 마음을 실어/ 꽃다운 인생살이 고개를 넘자… 제17회 만년의 소망 (명신녀자중학창립 90돐 경축모임에 참가하여) 젊어서는 희망으로 살고 노년에 들어서는 추억으로 산다고 최근 들어 김순자 할머니는 자주 추억속에 빠질 때가 많다. 순자 할머니한테는 지금도 옛날부터 간직해온 물건들이 있다. 바로 학교시절 입었던 교복, 그 때 팔에 꼈던 완장, 받았던 상장과 졸업장 그리고 넥타이와 14살 때 명주실로 베천에 쌍그네를 뛰는 처녀의 모습을 곱게 담은 수놓이 작품도 있었다. 그리고 시집올 때 갖고 온 “예장함의 쌀”마저 지금까지 64년간 보관하고 있었다. “예장함의 쌀”을 놓고 말하면 위에서 언급하다싶이 영감의 투병생활 때 그것을 얼마간 갈라내 쌀죽을 끓여 대접했으니 가장 요긴한 일에 사용한 셈이었다. 순자할머니는 그제날부터 보관하고 있던 물건들을 꺼내놓고 어루만지면서 명상에 잠기군 한다. 순자 할머니가 간직하고 있는 이런 물건들은 역사가 깊었고 또한 많은 사연이 깃들어 있기도 했다. 학교 때 입었던 교복, 그 때 팔에 꼈던 완장 및 그 때 받았던 상장과 졸업장은 꿈많던 소녀시절 때의 긍지와 자랑이었다. 그 때 그 시절 순자는 그 누구에 못지 않게 이쁘게 생긴데다 키도 훤칠하게 컸다. 거기에 교복을 입고 완장까지 끼고 마을길에 나서면 온동네가 부러운 눈길을 보냈다. 거기에 예절까지 밝아 동네사람들은 모두 김민기 어른이 덕망이 높아 자식들을 잘 두었으며 특히 순자를 며느리로 삼는 가정은 그야말로 복덩이를 받아 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입을 모으군 했다. 그만큼 순자는 훌륭한 인물체격에 공부를 잘했고 또한 마음씨도 비단처럼 부드러웠던 것이다. 당시 학기말마다 순자가 최우등생으로 받아안은 상품만 해도 한아름씩이나 되군 했고 그것을 가져올 때면 항상 친구들이 도와 주어야 집까지 가져올 수가 있었다. 순자는 그렇게 상품으로 받은 학용품들을 절대 혼자 독차지하지 않았다. 자기를 도와 집까지 날라다준 친구들한테 나누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한테도 선물하군 했다. 그리고 순자가 받은 상장들에는 모두 강덕 ××년, 중화민국 ××년 등 글자들이 박혀 있었는데 이 역시 한시기 그가 온동네가 부러워할 정도로 날린 소녀였다는 유력한 증거물로 되고 있다. 한편 순자한테는 이름도 몇개 있었다. 어릴 때는 기숙이었고 학교에 붙었을 때는 일본놈들의 억압에 못이겨 창씨개명을 했을 때에는 기슈구었으며 해방과 더불어 고쳐진 이름은 희숙이었고 결혼할 때에 와서 지금의 이름인 순자로 되었다. 그 중 희숙이던 이름이 순자로 고쳐진 것은 순자의 위로 숙자가 아까운 22살 꽃나이에 절명하여 순자가 외 딸로 된데다 순자 역시 봉천에 끌려가 상한병에까지 걸리면서 죽을번했기에 앞으로는 이런 액운을 피해 인생항로를 “순항”으로 살라고 결혼을 앞두고 아버지 김민기 어른이 일부러 고쳐준 것이었다. 순자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화룡 서성구 소학교의 교원 통지서를 받을 때까지만 해도 아들을 둔 동네사람들은 순자를 며느리감으로 탐내면서도 혼사말을 넣을 엄두조차 못내었다. 그 중에는 농촌에서는 그래도 부자란 소리를 들으면서 떵떵거리며 사는 가정도 몇집이 잘 되었다. 당시 그런 가정들에서는 모두 순자가 도시의 높은 간부한테로 시집갈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었다. 헌데 그들의 판단과는 달리 순자가 의지가지 없는 고아인 김용환 총각과 백년가약을 맺을줄이야. 그것도 이미 결정된 교원사업도 포기하고 말이었다. 이에 놀란건 동네사람들뿐이 아니었다. 순자의 동창생들과 모교인 용정중학교의 교장 선생님까지 몹시 놀라면서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심지어 순자의 한 학교의 모 남성 동창생은 “이럴줄 알았더면 내가 먼저 청혼했을텐데…”하며 일부러 순자를 찾아와 서운감과 유감을 표하기까지 했다. 사람들은 제멋대로 순자를 평가하기도 했다. “아무리 총명하고 공부를 잘해도 여자는 머리칼만 길었지 생각이 짧다”, “순자가 공부를 너무 해서 이상주의에 빠진 것이 틀림없어. 이상과 현실은 완전히 다름에도 말이야”, “순자가 환장했어. 환장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고아총각을 인생반려로 선택할 수 있담” 등으로 횡설수설했다. 이들의 말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아무리 사랑이 중하다 해도 교원사업을 포기한 것은 너무나도 단순한 결정인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것 때문에 순자는 평생 고생을 밥 먹듯이 해왔다. 순자는 자기가 가령 처녀시절 용환 총각과의 결혼을 선택하지 않고 교원사업을 시작했더라면 지금쯤 자기의 운명이 어떻게 되였을가고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 동안 긍정코 연길시 및 주와 성의 우수교원으로 몇번 당선되었을 것이고 소학교 교장직에 올랐을 수도 있었을 것이며 지금쯤은 수천원이 되는 퇴직금으로 자신의 노후가 아주 화려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순자는 인차 그 생각을 부정해 버렸다. 비록 오랫동안 힘들고 가난한 인생살이를 해왔지만 용환 영감과 살면서 영감의 사랑을 독차지 하다싶이 많이 받아왔고 그 누구에 못하지 않게 자식도 아들 3명과 딸 3명을 낳아 키웠는가 하면 한족자식 6명이나 두게 되었으며 또 사회생활도 그만큼 보람있게 해왔으니 그것이 여느 직위나 두터운 퇴직금 봉투보다 못하지 않다고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리고 자기가 한족자식 6명을 돕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많은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칠수 있게 된 것도 전적으로 영감의 뒤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순자는 잘 알고 있었다. 이렇다고 생각하니 순자는 순자는 한쪽에 돈낟가리가 있고 한쪽에 용환 영감이 있을 때 그 중 하나만 선택하고 하면 두말없이 돈을 포기하고 용환 영감을 선택할 것 같았다. 순자는 또 자기의 일생을 초불과 비교해 보군 했다. 자기의 몸을 녹여 세상을 밝히는 초불, 그렇다면 자기 역시 자신을 희생시켜 남편과 가정 그리고 이 사회를 위해 유익한 일을 하는 존재가 되었다고 할 때 이 역시 지나온 인생에 대한 커다란 위안이 된다고 순자는 생각했다. 2 최근 들어 한명, 두명 저 세상으로 가는 동년배들을 보면서 순자 할머니는 뭔가 생각을 달리하고 있다. 며칠 전에도 순자 할머니는 그제날 주정부 서쪽 동네에서 살 때 이웃으로 보내던 한 할머니네 집으로 다녀왔다. 순자는 그 할머니와 근 60년간 친 형제제처럼 살면서 우정을 나누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 몇년간 그 할머니의 건강상태도 통 심상치가 않았다. 그 할머니는 자기 자신이 바깥출입을 할 수 없으니 자꾸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순자 할머니더러 놀러 다니라고 한다. 그 할머니가 하는 말은 일리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옛날 함께 동고 동락하던 노인들이 이젠 대부분 가버리고 몇명 안 남았다. 올해 94세인 윤할머니, 82세에 나는 염옥순 할머니, 82세에 나는 오춘선 할머니와 최연옥할 머니 등으로 30명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그래서인가 이런 할머니들은 자꾸 순자 할머니를 보고 싶어하며 불렀고 그러면 순자 할머니 역시 불편한 몸을 큰 딸 영순이한테 의지하며 찾아 다니군 했으며 할머니들 또한 반가워서 야단들이다. 특히 며칠 전에 찾아간 그 할머니는 순자 할머니가 갈 적마다 붙잡고 놓지 않는다. 할 얘기도 많았다. 토지개혁, 국내전쟁과 공화국창립, 대약진, 문화혁명 그리고 30년 전의 개혁개방에 이르기까지 기억력이 매우 비상하기도 했다. 바깥출입을 못하니 집안에 앉아 늘 옛날에 대한 추억으로 사는 모양이었다. 그 할머니와는 달리 순자할머니는 인생에 대해 이젠 늙었다고 느껴본지가 그닥 오래지 않다. 10여년 전 거민위원회 조장직에서 물러날 때만 해도 젊은이들한테 책임을 넘겨야 한다고는 감안했으나 자기가 일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2008년 남편 용환 영감을 저 세상으로 보낸 뒤에는 많은 생각이 달라졌다. 이 세상을 위해 보다 해놓은 일이 너무나도 적다고 생각해졌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때 중국에는 9급에 달하는 특대지진(2008년 5월 12일)이 발생했다. 이는 1949년 공화국창립 이래 파괴성이 가장 강한 한차례의 강진이었다. 당시 정부부문의 통계에 따르면 사천 특대지진시 6만 9227명이 조난당하고 37만 4643명이 부상당했으며 1만 7923명이 실종, 인민폐로 8452억원의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이는 웬간한 전쟁이 초래하는 손실을 초과할 정도였다. 지진이 발생한 후 당중앙과 공화국정부에서는 신속히 위문단을 현지에 파견하는 한편 모든 역량을 집중하여 재해구조사업에 달라 붙었다. 동시에 전국 각지에서는 각급 적십자조직을 통하여 재해지구에 위문금을 보내는 활동을 전면적으로 벌였다. 이 소식은 순자 할머니도 TV방송을 통해 접하였다. 순자 할머니의 딸 김영순의 소개에 따르면 TV를 통해 무수한 형제자매들이 조난당한 장면을 시청할 때마다 특히 어린 애들이 죽고 상하는 장면을 볼 때마다 할머니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저렇게 아까운 사람들이 왜 이렇게 죽어야 하는가. 하늘도 무심하다”고 낙루했다고 한다. 그러던 할머니는 어느 날 큰 딸 영순이를 앉혀 놓고는 자기의 타산을 털어놓았다. “요즘 난 많은 것을 생각해 보았다. 너의 부친이 돌아간 뒤 처음으로 나라에서 발급해주는 생활보조비로 200원을 받았다. 나라의 덕으로 생활비를 받았으니 암만해도 첫 달의 생활비 200원을 몽땅 지진재해지구에 보내야겠다.” 이 말에 큰딸 영순이는 놀란 나머지 한동안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아니 어머니, 그건 어머니의 생활비예요. 그걸 몽땅 기부하고는 어떻게 생활한단 말씀이세요?!” “이 돈이 없어도 굶어 죽지는 않는다. 이전에 이런 돈이 없을 때도 살아왔을라니 한달 생활비를 바친다 하여 입에 풀칠을 하지는 않을거다.” 순자 할머니의 주장은 강경했다. 어머니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아는 큰 딸 영순이는 그대로 어머니의 뜻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 이튿날 순자할머니는 지팽이를 짚은대로 큰 딸과 함께 택시에 앉아 연변적십자회 사무실로 찾아갔다. 그들 모녀가 찾아가자 처음에 주적십자회일군은 잘못 찾아왔는가 하고 착각할 정도로 지팽이를 짚은 노인이 돈을 기부하러 찾아올줄은 생각지도 못한터였다. “할머니, 오늘의 이 행사는 할머니가 올 곳이 아닙니다. 지진재해지구에 보낼 위문금을 모금하는 장소입니다.” “나 잘 아우다. 그래서 찾아온 것이 아니겠수?” “뭐라구요? 할머니도 성금을 내련다구요?!” “그렇수다. 올해 영감이 돌아간 뒤 얼마전에 나한테로 내려오는 생활비 200원을 받았는데 이 첫달 생활비는 나라의 긴요한 사업에 보태려고 그런다우.” 이에 적십자회일군은 감동된 나머지 “나라의 보조를 받는 노인이 재해지구에 성금을 내놓는다”고는 “적십자회사업을 하면서 이렇듯 훌륭한 할머니는 처음 본다”며 순자 할머니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서 한동안 순자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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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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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철은 연변의 신성장 동력
- 9월 30일부터 시작되는 고속철개통으로 연변의 전반 사회경제질서에 새로운 변화가 일면서 연변은 고속철경제라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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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철은 연변의 신성장 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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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칼럼] 백포(白圃) 서일
- ●김 혁 (재중동포 소설가, 역사칼럼니스트) 일전 북경민족출판사와 연변인민출판사가 기획한 인물평전시리즈의 일환으로 “백포 서일장군”이 출간되었다. 리광인 절강 월수외국어대학 부연구원과 소설가 김송죽의 공저로 40만자 475쪽 분량으로 된 책은 북로군정서와 대한독립군단 총재이고 종교지도자, 사상가인 서일장군의 일대기를14 편에 나누어 기술하였다. 독자들은 인물전을 통해 수하장령들이었던 김좌진이나 홍범도, 이범석과 같은 인물에 가려 널리 알려지지 못했던 서일장군의 참모습을 읽을 수 있고 잘못 기록되었거나 자기중심적 기술과 과대 서술되었던 역사 사실과 인물들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2 교육자, 종교인, 언론인이기도 한 서일선생의 짧은 생애를 되새겨 본다. 서일선생은 1881년2월 26일 함경북도 경원군 안농면 금희동 농가에서 태어났다. 호는 백포(白圃)이다. 18세까지 향리의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신학문에 뜻을 두고 경성함일(鏡城咸一)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이로부터 후학을 기르는데 전념하여 식민지 젊은이들의 의(意)와 기(气)를 살리는데 앞장섰다. 하지만 그의 젊은 시절은 암울한 나날의 련속이었다. 스물 다섯에 을사늑약을 겪었고 서른에는 망국의 경술국치를 감수해야만 했다. 서일은 고향의 암담한 현실에 통분해했고 반일투쟁의 새로운 모색으로 고심을 거듭했다. 당시 반일지사들은 만주로 망명했고 만주지역에 사범학교 설립이 급증했다. 이는 일제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교육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한 선지자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31세때인 1911년 당시 지사들이 많이 망명해있던 북간도 왕청현으로 떠났다. 그는 왕청 덕원리에서 물밀 듯 이주해오는 조선인자녀들을 가르치며 민족독립의 강한 의지를 불 붙여 주었다. 1911년 서일은 홍암(弘岩) 나철(罗喆) 대종사를 만나 그의 감화를 받고 그후 1912년 10월 대종교(大倧敎)에 귀의했다. 대종교는 한민족의 민족기원 신화에서 비롯되였으며 교리에 민족의 정통사상과 철학을 담고 있다. 구국일념으로 불탔던 라철종사는 “나라는 이미 망하였으나 민족에게만은 진실한 의식을 배양시켜 민족부흥의 원동력을 만들어야 한다.”는 종지에서 대종교를 중광하였다. 서일이 왕청현 덕원리에 와서 자리잡을 때는 대종교가 화룡현 청호에 총본사를 두고 그 뿌리를 각 곳에 내리기 시작할 시기었다. 홍익인간의 리념을 추구․실행하는 대종교 정신은 바람세찬 만주벌판을 누비던 독립군들에게 막강한 정신력을 주게 된다. 주시경, 최현배 등의 한글학자․ 정인보, 신채호, 박은식 등 민족사학자들 김좌진, 홍범도, 이범석등 독립군 지도자들 이시영, 신규식, 조성환 등 임시정부의 민족지도자들이 모두 대종교인이었다. 서일은 북간도 일대에서 대일항전을 노리는 의병들을 규합, 중광단(重光团)을 조직했다. 단장에 취임한 그는 무력항쟁의 기틀을 잡기위한 체제구축에 심혈을 기울이었다. 후일 그가 총재로 지휘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장병은 거의가 대종교인이었다. 1918년 서일은 김좌진, 김동삼, 신팔균, 손일민, 신채호 등 39인 련서로 “무오대한독립선언서(戊午大韩独立宣言书)”를 발표하면서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강도높은 전투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일민보”, “신국보” 등 신문을 발간했고 “일제와의 항쟁은 혈전을 벌이는 피의 전투 밖에 없다”는 논조를 내세웠다. 서일은 광복을 위한 투철한 투쟁정신의 모범을 보였고 나아가 종교적 완성을 위한 수행과 연구에 몰두하면서 수전병행(修战竝行)의 삶을 살았다. 급박한 전투가 벌어지는 곳에서도 언제나 대종교 깨달음의 상징인 단주(檀珠)를 목에 걸고 있었다고 전한다. 1919년 7월부터 1920년 10월까지 서일은 중광단을 확대․개편한 대한정의단, 대한군정부), 북로군정서(北路军政署) 등 독립군단을 이끌었다. 정규병력 1천5백명을 청산리전투 주역인 사관으로 양성하고 러시아 체코군으로부터 3만여정의 무기도 확보했다. 이처럼 군정서가 힘을 갖추기 시작하자 일제는 더럭 겁을 먹고 서일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일제의 “북간도 지방의 항일단체 상황” 이라는 보고서에는 그 상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군정서는 서대파구(西大坡沟)에 근거를 두고 서일이 통솔한 단체로서 대부분 단군교도(대종교)이다. …그들의 행동은 극히 흉포하여 부단히 선내지(鮮內地)에 대한 무력침습을 양언하고 있다. …총재는 서일, 부총재 현천묵, 사령관 김좌진, 부사령관 김성, 참모장 라중소등이다. …일단 유사시에는 명령일하(一下) 동원소집을 할수 있을 것이다…” 간도를 중심으로 한 만주지역의 독립군 무장력량의 흥기는 일본제국주의의 지대한 불안을 자아냈다. 이들을 눈에 든 가시로 벼르던 조선총독부는 몇 달 간의 계획하에 대토벌을 준비한 끝에 수만명의 병력을 출동시켰다. 일제는 “간도지방불정선인초토계획”을 꾸미고 동북군벌 장작림에게 압력을 가하여 서북간도에 대한 연합토벌을 강요하였다. 하지만 조선인의 반일활동을 언녕부터 동정하고있던 연길도윤과 육군퇀장 맹부덕은 우리 독립군이 일본군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빨리 퇴각할것을 바랐다. 강적이 박근해오자 그 예기를 피하고 실력을 보존하기 위해 여러 독립군부대들이 백두산 밀림으로 이행했다. 그러던중 화룡현 청산리에서 세기의 접전이 드디여 펼쳐졌다. 청산리 전투는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연합부대가 호상 배합하며 병력과 장비상 몇 갑절이나 우세한 일본 토벌군과 싸운 단병상접의 백열전이었다. 의복과 식량까지도 막대한 곤난으로 조성된 조건에서도 백운평전투․완루구전투․어랑촌전투․고동하전투 등 대소 10여차의 전투를 거쳐 일본군 1,200여명을 섬멸하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야말로 민족의 반일운동사상 가장 우렁찬 승전고를 울리고 눈부신 기념비를 세워 놓은 것이다. 청산리에서 승전고를 올린후 여러개의 독립군단들은 일제의 추격을 피해 밀산로 이동한다. 여기에서 북로군정서 서일․대한독립단홍범도 등 10개 부대는 전(全)만주 3천5백 병력을 통합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고 서일이 총재로 추대되었다. 부대편성을 마친 독립군단은 이듬해 정월 우수리강을 건너 시베리아로 이동했다. 이때 서일은 군사 지휘권을 부총재인 홍범도와 김좌진에게 맡기고 자신은 경제적 뒷받침을 책임졌다. 그러나 그해 6월 28일 토비(土匪) 수 백명이 야간에 내습하여 살인 방화 약탈을 자행하는 흑하사변(黑河事变)이 일어났다. 수많은 동포와 청년독립군들이 희생을 당했다. 밀산현 당벽진(当壁镇)에서 재기를 도모하던중 설상가상으로 8월 26다시 토비들의 급습을 받았다. 마지막 한 부분의 자그마한 력량마저 피바다에 쓰러졌고 발 붙이고 있던 마을과 백성들까지 참화를 당하였다. 이 치명적 타격은 서일로 하여금 다시 일어설 수 없는 절망의 궁지에 밀어 넣었다. 서일은 낙망하였고, 자기의 책임이 너무도 중하다는 자책으로 하여 환멸의 나락 속에 미끄러져 들어갔다. 비분강개한 선생은 8월 28일 마을 뒤산으로 올랐다. "날 저물고 길은 궁한데, 인간 가는 길이 어디메뇨"라는 홍암 대종사의 유서 글귀를 읊조리고 나서 대종교의 폐기법(废气法)으로 자결했다. 41세 독립운동가가 남긴 유언은 처절하다. “조국광복을 위해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 차라리 이 목숨을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3 서일 장군의 유해는 밀산현 대흥동에 안장되었다가 1927년 봄에 당벽진에서 화장하여 화룡으로 이장하였다. 지금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의 외곽에는 홍암, 무원, 백포의 유해를 봉장 한 장지가 그대로 있는데 그 주소로는 화룡시 청룡향 청호촌이다. 외곽의 작은 구릉우에 서일의 묘소가 대종교 제1대와 제2대 교주들인 나철, 김교헌 묘소와 함께 “삼종사 묘소”를 이루고 있다. 역사에 관심있는 지인들과 함께 서일의 묘소를 찾아 보았다. 룡정에서 잘 닦여진 포장도로를 따라 서남 방향으로 30여분간 달리니 드넓은 평강벌을 가슴에 품은 채 2백여가구가 옹기종기 모여사는 청파호가 우리를 반겼다. 청파호 부근에서 무릎을 치는 수풀을 헤치고 작은 언덕을 올랐다. 묘역’으로 가는 길목에 언덕에 반쯤 묻힌 토굴이 보였다. 입구가 벽돌로 봉해진 이 토굴은 독립군이 야산에 토굴을 파서 사용하던 무기창고라고 한다. 지금도 형체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무기고들은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이 가장 치렬했던 곳임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무기고를 지나 좀 더 언덕을 오르니 드디여 삼종사묘소가 보였다. 묘역에는 중간에 나철선생이 그 좌우로 서일장군과 김교헌선생이 어깨를 나란히 한채 평강벌을 굽어보고 있었다. 묘소 앞에는 “대종교 대종사 홍암 나선생 신해지묘”, “대종교 종사 백포 서일 신해지장”, “대종교 종사 무원 김교헌 신해지상”이라는 석비가 세워져 있었다. 현재 화룡현 문화유물보호단위로 관리되고 있어 철책으로 둘러져 있는20여평 남짓한 묘역에는 “반일지사 무덤 (反日志士墓葬)”이라는 안내문이 세워져있다. 1대교주 나철은 1916년 추석날 황해도 구월산에서 자결한 후 대종교 교인들은 제1대 교주 나철의 유언에 좇아 그의 유해를 화룡 청파호에 이장하고 1923년 11월 18일에 녕안현 남관 총본사에서 병사한 제2대 교주 김교헌을 1924년 1월에 그의 유해를 역시 화룡 청파호에 옮기였다. 1989년에 화룡시 룡성진 청호촌 노인회에서 삼종사묘소를 수선하면서 잃어진 김교헌의 비석을 다시 세우니 대종교 삼종사묘소는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그뒤 1991년 9월 1일, 화룡시인민정부 공고로 되는 삼종사묘소—반일의사무덤이 화룡시 문물보호단위로 됨에 따라 삼종사묘소는 비로소 오늘의 모습으로 우리한테 나타난다. 이렇게 대종교의 선각자들이 당년에 일제와 처절한 사투를 펼쳤던 곳에서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서일은 탁월한 조직능력을 갖춘 군사가이며 대종교의 교리를 철학적으로 체계화시킨 리론가였다. 특히 한학과 역리(易理)에 능통하고 불서와 신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렬악한 상황에도 독립군을 이끌고 일제와 맞서 무장투쟁에 앞장 선 용기와 종교적 수행과 연구를 꾸준히 하여 지혜를 고루 갖춘 문무겸비의 실천적 지도자였다. 41세에 자진순명(自尽殉命)한 그는 짧은 생애 가운데 나중 10년을 백두산과 만주벌판을 누볐다. 그의 묘소 앞에 섰노라니 민족위기의 관두에 선두에서 피를 토하듯 내지른 사자후(獅子吼)가 생생히 들려오는 듯 하다. - “청우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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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칼럼] 백포(白圃) 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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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칼럼] 피서(避暑)의 방식
- 에어콘이 고장났다. 하필이면 이 삼복더위에. 판매상과 연계해 고치려니 이핑계 저핑계 시종 찾아주질 않는다. 그렇다고 스스로 뜯어 가져가기도 번거롭고 해서 더위에 대처할 궁여지책으로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구식 선풍기를 꺼내 먼지를 닦고 다시 돌렸다. 개운치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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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칼럼] 피서(避暑)의 방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