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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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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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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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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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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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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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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룡 칼럼]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한국 이념논쟁
●김정룡(다가치 포럼 대표) 현시대 유명 정치학자로 손꼽히는 하버드대학교 샤무엘 헌탕턴 교수는 1996년 저서 『문명의 충돌』을 출간했다. 책이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로 반응이 뜨거웠다. 그는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2년 후 소련이 해체됨에 따라 냉전 시대가 종말을 맞았다. 냉전 시대 인간은 대체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진영의 이념에 각각 속해 있었다. 냉전이 종말 된 미래사회에서는 이념이 무의미해졌고 따라서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갖게 되면서 다른 귀속처를 찾게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귀속처가 바로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라고 제시하였다. 그가 말한 귀속처는 새로운 문명이 아니라 과거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실제로 탈냉전 후 지구촌의 인간무리들은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에로 재편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중국의 경우 개혁개방 전 해외 화교 화인들 중 고국을 못 마땅해하는 사람들도 개혁개방 이후 즉시 돌아서서 고국에 투자를 서슴지 않았다. 아세아 최고 부자 리카싱(李佳成)이 투자에 나서자 주변에서 ‘사기당하면 어쩌냐?’고 말리자 그는 ‘사기당해도 고향사람들에게 당하는 것인데 사기라 생각하지 않고 도와주는 것이라 여길 것이다.’라고 말했다. 재벌은 남다른 배포가 있는 법이다. 싱가포르 리콴유(李光曜) 전 총리는 본래 반공자였다가 개혁개방 이후 유교 전도사를 자칭하고 나서 중국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이것이 바로 이념을 탈피하여 민족문화에로 회귀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2008년 북경올림픽 개막식 주제가 공자였는데 이것은 전통문화에로의 회귀를 뜻한다. 1990년 초 동구권에서 있었던 코소보 인종청소 전쟁은 종교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아무튼 세상은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흘러가고 있는 추세이며 이미 새로운 역사 흐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지구촌의 흐름을 역행하는 곳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한반도이다. 동서 독일이 통일되고 남북 베트남도 통일되어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문화로 굴러가고 있다. 오로지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은 것은 남북한이다. 1990년 베이징아세아게임 때 한국관광객이 대량 백두산투어에 나섰다. 그때 한국여행사 에스코트 00사장이 한 말이 지금도 뇌리에서 생생하게 맴돌고 있다. “참 세월이 놀랍게 변했어요. 우리가 중국 땅을 밟으면서 백두산 구경을 할 것이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현실로 되었어요. 이 추세대로라면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남북통일도 10년이면 되지 않겠어요!” 그 후 2000년 김대중 대통령께서 북한을 방문하자 매체들이 ‘10년 안에 통일이 이뤄질 것’처럼 떠들었다. 그런데 그 후 강산이 두 번 변하고도 3년이란 세월이 흘러가고 있는 현재 남북통일이 가까워지기는커녕 점점 더 요원해지다못해 요즘은 아주 적대관계가 심각해지고 있는 중이다. “가장 중요한 게 이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일전에 국무회의에서 한 발언이다. 시중에서는 모두 뜬금없는 발언이라고 하기도 하고 때아닌 이념타령이라고 공격하기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이 발언이 확실히 케케묵은 이념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이게 무슨 시대인데 아직도 이념타령이라니? 역사를 거스르는 행위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요즘 한국 사회는 홍범도 장군의 정체성을 갖고 논쟁 중이다. 양 진영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으로 부질없는 일이다. 1943년 홍범도 장군이 사망할 당시에는 침략당한 약소국가들에서 나라마다 민족주의가 우선이지 이념과 사상이 우선 과제가 아니었다. 강대국들도 마찬가지로 이념을 떠나 미국과 소련이 협력하여 반파시스 전쟁에 돌입하였다. 홍범도 장군이 소련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은 사실이나 오늘날 이념논쟁을 일으킬 사안이 아니다. 한국 정치는 할 일이 하도 없어서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안타깝다. 문제는 왜 윤석열 대통령이 이념을 최대 이슈로 들고나왔는지? 맥락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 일부 진영에서는 아직도 빨갱이타령이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다. 종북좌파타령을 70년 동안 벌여오다가 요즘에는 종북좌파 타령이 질리기도 하고 그 실체도 주목을 받기가 조금 약발이 떨어져 친중좌파 공격으로 방향을 틀고 화살을 돌리고 열을 올리고 있다. 필자는 얼마 전에 한국 지인의 소개로 한국 엘리트들이 참여하고 있는 카톡방에 가입한 적이 있다. 카톡방은 흔히 그렇듯 좋은 정보도 나누고 서로 필요한 교류도 하고 인맥도 넓히고 등등 좋은 점이 많다. 하지만 인간무리에는 취향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인데 그 취향이 정치적인 성향이 강하면 골머리가 아파난다. 어느 한 분은 윤석열 대통령을 찬양하는 ‘윤비어천가’를 올렸는데 조선 창시자 이성계를 찬양한 ‘용비어천가’를 저리 가라 할 정도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수령을 찬양하는 ‘어천가’보다 훨씬 뛰어난 솜씨로 현직 대통령을 찬양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통령을 이렇게 신을 찬양하듯 하는 것을 처음 본다. 일각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문재인 전 대통령을 평가하는 기준이 극명하게 나뉘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문재인은 빨갱이고 북한 간첩이다. 나라를 북한에 팔아 먹는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사고방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아무리 좌파 성향을 지닌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설마 나라를 팔아먹을 수가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그들은 상식을 벗어나 비합리적인 주장을 하면 이에 동조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억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 친미를 확실하게 하면 다른 분야가 조금 떨어지더라도 문재인처럼 나라를 팔아먹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그들에게는 굳건하게 박혀 있다. 윤석열 대통령을 신을 찬양하듯 하는 행위는 필자와는 하도 상관없는 일이라 개의치 않고 그냥 넘겨버리고 말았는데 다음 일은 도무지 지나칠 수가 없었다. 기름 개구리를 산 채로 끓는 기름에 넣어 튀기다가 물을 넣고 끓여 먹는다. 한 분은 친중좌파들을 개구리 산 채로 튀겨먹고 끓여먹듯이 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머리카락이 곤두설 지경으로 정신이 아찔해졌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그만이라는 속담이 있다. “미친 아낙네의 악담보다 더 저질스럽다.”는 말을 남기고 나가기를 해 버렸다. 종북좌파 타령이나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친중좌파 타령이든 모두 같은 이념타령이다. 이런 이념타령이 시중에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고 그 세력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대통령의 이념논쟁을 때가 아닌 것이라 하거나 뜬금없는 일이라는 지적은 헛발 짚는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편 한국사회에서 아직도 공산주의 빨갱이 타령이 심각한데 진짜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자가 얼마나 될까? 의문이다. 무엇을 대상을 공격하려면 그 대상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나서 공격해야 마땅하나 한국에서 공산주의 빨갱이 공격은 실체를 모르는 막무내식이어서 안타깝다. tvn방송에 <어쩌다 어른>이라는 강연프로그램이 있다. 몇 년 동안 출연을 가장 많이 했던 최진기 강사가 있었다. 그는 자칭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이다. 액면 그대로 믿기로 하고 그가 이해하고 있는 공산주의란 무엇인지? 알아보자. 마르크스의 노동 분배 원칙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이다. 최진기 강사는 이 공산주의 핵심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마르크스는 아마 아버지가 돈을 벌 능력이 있고 그 돈을 자녀가 학비로 사용하는 케이스에서 힌트를 얻어 내놓은 이론일 것이다.” 이어서 그는 유명 스타 연예인 강동원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사람을 어떻게 수요에 의해 분배할 것인가?”고 희죽거리면서 공산주의를 형편없는 애들장난처럼 매도하고 조롱하는 것이었다. 만약 공산주의가 최진기 강사의 말처럼 그렇듯 유치한 것이라면 어떻게 지구촌 반 되는 인간무리가 추종했겠는가? 능력에 따라 일한다는 것은 인간이 고도의 의식을 갖추면 타인의 능력과 비교하지 않고 또 타인의 노동기여도와 비교하지 않고 나의 능력껏 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은 공산주의사회는 물질이 풍부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되어 불필요한 물질을 탐내지 않고 사치를 탐내지 않는 전제하에서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것을 의미한다. 요점은 물질이 풍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된 사회에서 실천가능한 원칙이라는 것이다. 빨갱이 뜻은 사상이 빨갛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필자의 부친은 평생 당지서를 맡았는데 사상이 붉다못해 둘째 아들이 휴학하는 해에 참외 밭을 대신해 보게하고는 아들이 생산대 참외를 먹었다고 하여 장부에 가을에 떼어내게 기입해 놓았다고 한다. 필자가 자랄 때 동네 어른들이 늘 저한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너의 부친은 진짜 빨갛다.’는 말을 반복했다. 최진기의 자칭 최고 강사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의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이 수준이라면 진짜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자가 얼마나 될까?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 서강대 00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산주의는 제도로서 실천은 실패했지만 그 이념과 사상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분단국가로 존재하고 이직도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있는 이 민족의 현실. 언제 가야 통일되고 하나가 되어 부질없는 다툼에서 벗어날 것인지? 민족의 운명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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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핵폐수 해양 방류 시작과 과정 그리고 결과는?
● 철 민(논설위원) 한·중·일 해양 안전 문제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신경전을 벌였던 일본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처리 문제가 24일 일본 정부의 바다 방류 개시와 더불어 또 새로운 논쟁거리를 몰아오고 있다. 우선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행위를 두고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나라들로는 일본의 이웃 국가들인 중국과 한국(정당과 사회단체 등), 북한 등과 거리가 멀지만, 남태평양 도서국의 반발도 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은 후쿠시마 오염수가 바다로 흘러들기 시작해서 240일이면 중국 연해에 도착한다며 정부로부터 국민 매 개인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방류 결정을 국제 공공의 이익을 무시하는 극단적으로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고 있다. 한편 중국 정부는 일본산 수산물 수입의 전면 중단을 발표하였다. 한국 언론도 한국의 여러 해산물 시장이 거의 텅 비어 있어 어부들은 미래의 생계를 걱정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24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제주도 동문어시장에서 20년 넘게 해산물 장사를 해온 한 상인은 “예전에는 오전 10시경과 오후 5∼7시(두 시간대)에 장사가 안될 때도 시장은 붐볐지만, 요즘은 손님이 없는 텅 빈 고속도로”라며 “코로나19 기간에는 장사가 더 잘됐다”라고 우려했고 한국 서부 해안 도시 군산 출신의 한 어민은 “내일 해산물 경매장에 간다고 생각하니 답답하다”라며 “해산물 소비량이 4분의 1로 줄었고 가격도 더 낮아질 것 같다”라고 탄식했다. 부산종합어시장에서는 조기 한 박스가 보통 4만 원 또는 5만 원에 팔리는데, 전국 해산물의 약 30%가 이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이번 주 수요일(23일)에는 조기 한 박스가 정상가의 절반 이하로 판매되었으며, 한국인들의 주요 해산물인 멸치는 평소보다 10~20% 정도 가격이 저렴하게 판매되었다. 24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담화문을 발표하여 일본이 이날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방류를 개시한 것은 지구 생태환경을 파괴하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면서 핵 오염수 방류계획을 강행하는 것은 자신들의 사욕을 위해 인류에게 핵 재앙을 초래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반인도적 범죄행위라고 주장했다. 이외 후쿠시마 핵 오염수를 바다로 방류하기로 한 일본의 결정을 알게 된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에 있는 한 비정부기구가 공개적으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반대하는 글을 올렸으며 또 피지 수바에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시위에 나서기로 했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은 해외의 국가와 사회단체의 규탄은 물론 일본 자국 내 어민 단체와 국민의 반발을 사고 있다. 특히 1945년 원폭 피해자 후손들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나섰다. 교도통신은 24일 원폭 피해자 후손들로 구성된 일본-전국 원폭 피해자 2세 단체 연락 협의회가 나가사키시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후쿠시마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항의했다고 전했다. 이 단체는 원자폭탄의 피해자인 히로시마가 견딜 수 없다며 성명을 발표했고, 이 성명은 총리 관저에 우편으로 발송됐다. 성명은 “원폭 피해자 2세들은 부모들이 방사능 영향으로 고통받는 것을 오랫동안 목격했고, 자신들도 유전적 영향을 배제할 수 없어 건강을 염려하고 있다”라며 “정부와 도쿄전력이 책임을 지고 육상에서 보존·관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외에도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이루다 나열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고도 높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은 국제원자력 기구(IAEA)의 감찰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IAEA의 권위성과 전문성은 인정하지만, 이 기구의 분석과 결론 모두를 믿는 건 아니다. 특히 IAEA 역시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에 대해 명확한 지지 혹은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도 않았다. IAEA 역시 사상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수치나 분석을 통해서는 함부로 결론을 내릴 수 없은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모든 일이란 시작이나 과정을 통해서는 어떤 결과가 나타나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례로 1945년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전에는 그 위력이 그 정도로 강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자료도 있다. 다음 우리는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 더군다나 믿을 수 없다는 추리가 나온다. 일본인을 두고 말하자면 좋게 말하면 “총명하다”하고 할 수 있지만 다른 각도로 말하면 “잔머리를 잘 굴린다” 혹은 “비열하고 간교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은 조선과 중국 그리고 기타 태평양 지역 국가와 지역에 큰 피해를 주었다. 그것도 아주 음융하고 비열하고 잔혹한 수단과 명분 등으로 말이다. 조선 왕조의 명성황후 음해 사건, 중국 대만 강점과 한일 합방 그리고 지난 세기 30~40년대 조선에서 위안부를 모집할 때는 “방직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등 감언리설로 순진한 소녀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고 1920년대 말의 만주에서의 황구툰(皇姑屯) 사건과 루거우차오(卢沟桥) 사건 등을 분석 조명해보면 당시 일본이 강하다기에 앞서 음흉하고 뻔뻔스럽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 시 일본은 한편으로는 미국과 담판함과 아울러 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일본을 함부로 믿어서는 큰 코 다친다는 분석도 함께 나온다. 종합적으로 일본을 평가하면 일본인의 겉면을 보면 예의가 바르고 친절하고 생활이 아주 규칙적으로 보이지만 일본인의 속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겉과 속이 같은 한국인과는 달리, 웬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중국인과는 달리 또한 거만하지만 우쭐대지는 않는 서양인들과는 달리 일본인한테는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피해국에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역대의 독일 총리들과는 정반대로 일본은 오늘 현재도 기나긴 침략 역사에 대해 사과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교과서까지 뜯어고치면서 군국주의의 침략사를 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두고 각국은 여러 가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강경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중국과는 달리 미국은 지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고 한국 정부는 “지지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입장으로 나오고 있다. 여기서 미국은 태평양을 사이 두고 일본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속 궁리가 있는가 하면 다른 일종의 전략이 내포되어 있을 수도 있고 한국은 자국민들한테 미칠 손실보다는 일본과 정부 사이의 마찰을 우려하는 듯한 양상이다… 한편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에 대해 지금 과학적이고 안심할 수 있다는 학술적 수치는 있으나 그 영원성을 장담하는 언사는 한 마디도 없다. 어찌 됐든 일본의 핵 오염수는 방류하지 않는 것이 방류하는 것보다는 ‘명지한 선택’이라 보여지며 방류하는 것으로 나쁜 결과가 있을지언정 반대로 좋은 결과는 제로라는 것만은 분명한 것이다. 가령 앞으로 방류 과정에 혹시라도 일본 자국 혹은 주변국들에 피해 사례라도 발생한다면 그때 가서 아무리 미국이나 국제원자력기구라 해도 결코 일본을 위해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며 일본이라는 이 섬나라의 위망은 일락 천장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서기 2023년 8월 24일, 이날은 인류 역사상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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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무주지(無主地)’ 섬이 아니었다.
● 김정룡 (多가치포럼' 대표) 민간속설에 ‘이웃이 먼 사촌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가령 이웃집에서 경사가 생기면 함께 기쁨을 나누고, 안 좋은 일에는 같이 슬픔을 나누고, 급한 일이 생기면 이웃이 가장 먼저 달려와 돕는 등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삶을 영위해온데서 생겨난 속담일 터. 민간백성들의 삶은 대개 이웃끼리 화목한데 비해 한 사람, 한 사람으로 구성된 국가의 경우 이웃나라끼리 사이는 그다지 화목하지 못하다. 바다를 사이 두고 이웃으로 살아온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으로 좋은 때도 있었지만 서로 반목하는 일들이 더 많았고 지금까지도 해묵은 갈등들이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있는데 그 가운데서 독도의 영유권 문제, 종군위안부 문제, 일본전범기업 강제징용 배상문제 등이 주요 쟁점으로 꼽힌다. 최근에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가 새로운 갈등으로 부상하여 오랜 갈등들에 얹어져 가뜩이나 썰렁한 냉기를 더욱 차갑게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남아 내려온 갈등도, 새로 생겨나고 있는 갈등도 모두 일본 측의 책임이 크건만 정작 일본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후안무치한 태도를 보이고 있어 아주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어느 한 착실한 역사학자의 통계에 의하면 한반도는 서너 차례 모자라는 1천 번의 침략을 당해왔다고 한다. 무려 1천 번이나 침략을 당해왔으나 남을 침략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하니 얼마나 착한 민족인가? 누구인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백의민족은 맞기만 하고 때릴 줄 모르니 선천적으로 DNA에 문제가 있다”고. 아무튼 그 1천 번 가운데서 일본의 침략이 다수였다. 일본은 지진이 많고 태풍이 많기로 지구촌에서도 이름난 곳이다. 게다가 땅이 척박하여 먹을 것이 늘 부족했다. ‘제집’ 내에서 해결책이 안 보이니 눈을 ‘옆집’에 돌릴 수밖에 없었다. 남의 것을 빼앗아오는 약탈행위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가에 왜구의 노략질이 들끓었다는 얘기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곡식도 빼앗고, 옷도 강탈하고, 여자도 납치해가고 등 눈에 보이는 쓸 만한 ‘물건’이면 전부 빠트리지 않고 싹쓸이해갔다. 백의민족의 전통인사말은 ‘무사한가?’인데 그 유래가 바로 빈번한 외침을 당한데서 생겨난 것이다. 일본은 왜구의 노략질도 빈번했을 뿐만 아니라 정부차원의 침략도 감행하였고 그 궁극적인 목적은 한반도 식민화였다. 1592년 풍신수길이 발동한 임진왜란이 좋은 근거이다. 명나라 조선 파병 때문에 일본이 임진왜란에서 실패했으나 그 후 결코 한반도 식민화 정책은 포기하지 않았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조선정부는 청나라와 일본을 불러들인 것이 화근이었다. 큰 전쟁을 피하고자 조선정부는 동학농민운동 측과 협상하여 평화적인 해결책을 마련하고 청나라 군과 일본군 모두 철회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모처럼 좋은 기회를 만난 일본이 철회할 리가 만무했다. 청나라와 군대 철회로 갈등을 빚다가 드디어 무력충돌이 발생하였고 그것이 바로 ‘중일갑오전쟁’이다. 일본을 ‘쌰오르번(小日本)’으로 하찮게 여겨왔던 청나라가 생각 밖으로 일본한테 패배한다. 조선을 청나라 속국에서 벗어나게 하고 ‘독립문’까지 세워준 일본이지만 정작 조선은 독립을 하지 못하고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만다. 호랑이가 나간 자리에 승냥이가 들어온 셈이었다. 일본은 강대했던 청나라를 물리쳤으나 또 다른 강대한 적인 러시아와 맞붙어 싸워 이겨야 만주와 조선에서의 이권을 모두 독차지할 수가 있었다. 1904년 일본은 한반도에서 자기네가 마음에 드는 곳에 어디든 군사기지를 세울 권리가 있었다. 러시아와 맞붙으려면 동해바다 섬에 군사기지를 세울 필요가 있었다. 하여 일본의 레이더망에 독도가 들어왔다. 1905년 일본은 독도를 ‘무주지(無主地)’라 주장하면서 영토편입을 시도하고 시마네현(島根縣)에 지방고시를 알린다. 남의 나라 땅을 침략하고 그 땅을 ‘무주지’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드는 수법은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을 식민지화 하는 과정에서 활발하게 써 먹었던 수법이었다. 즉 일본이 유럽열강들한테서 배운 것을 조선침략에 활용했다는 뜻이다. 독도는 1905년 전에 과연 ‘무주지’였을까? 아니다. 마찬가지로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에 이르는 곳마다 모두 ‘무주지’ 땅들이었을까? 아니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무주지’라 주장하는 것일까? ‘발견자우선주의’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활용했던 것이다. ‘발견자우선주의’의 본뜻은 최초로 발견한 사람들이 소유 우선권이 있다는 의미인데 백인들이 아메리카 땅을 발견하고 개척할 당시 수많은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다. 결코 백인들이 최초의 발견자가 아니다. 분명히 그 땅엔 인디언이라는 주인이 이미 있었다. 해가 지지 않는 식민지를 개척한 그 땅들에 주인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이미 오래 전부터 발견하고 삶을 영위해온 원주민들이 거주해왔다. 그렇다면 왜 유럽열강들이 ‘발견자우선주의’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들었을까? 주인이 이미 있었는데 ‘무주지’라 주장하고 거기다 한 술 더 떠 ‘발견자우선주의’를 떠드는 근거는? 유럽열강들은 지구촌 곳곳에 살고 있는 인류 집단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그 땅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3C’ 즉 기독교(Chrisianity), 문명(Civilization), 상업(Commerce)을 통해 식민지 정복을 정당화했다. 1455년 교황 니콜라오5세는 아프리카 서쪽 해안의 영토에 대한 포르투갈의 권리를 승인했다. 최초의 탐험시대부터 이미 그 땅에 인류가 살고 있든 말든 국가가 있든 말든 유럽열강들 중 그 누가 먼저 그 땅에 도착하면 자기네들이 주인이라는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를 적용했던 것이다. 독도는 1905년 이전에 조선의 소유이고 조선이 영유권을 갖고 있다는 역사적인 증거는 충분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산업혁명과 식민지개척 공부에 가장 모범생이었던 일본이 서구열강들이 식민지 개척 과정에서 정당화로 써먹었던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 무기를 휘둘러 독도 영유권을 시마네현에 편입하는 고시를 알리는 수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있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있을 때 일본 소유로 편입되었던 것들을 바로 잡는 조항에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등 제도들이 조선의 영유권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조선의 지리는 육지와 3170 개 섬으로 구성되어 있어 섬마다 일일이 모두 표기할 수가 없었고 그때 독도가 빠져있었던 것을 일본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있다. 즉 이것 때문에 일본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한국정부가 독도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군대가 주둔하여 관리하고 있다. 6.25 전쟁 때 한국군 36명의 용사가 독도를 굳건하게 지켜냈고 지금까지도 한국이 독도에 주둔하고 관리하고 있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존재의 일차적인 이유는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다. 2016년 세월호사건과 지난해 10월 발생했던 이태원참사사건에 전체 국민이 분노하는 이유가 바로 정부가 국가의 존재이유를 방기했다는 것이다. 다음 자국의 영토를 지키는 것도 국가존재의 주요 이유이다. 영토를 잃는 것은 안전을 잃어버리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기 때문이다. 한국정부의 독도에 대한 입장은 다음과 같다. “독도는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으로 명백한 우리 소유의 영토이다. 독도에 대한 영유권 분쟁은 존재하지 않으며 독도는 외교 교섭이나 사법적 해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확고한 영토주권을 행사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어떠한 도발에도 단호하고 엄중하게 대응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독도에 대한 우리의 주권을 수호해 나아간다.” 다만 걱정이 하나 있다. 일본정치주류세력인 우익이 줄곧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주장에 대해 올해만 세 번 한일 양국정상이 만난 자리에서 아무 언급도 없었다. 윤석열 정부의 과거사를 묻지도 따지지도 말자는 대일외교방침 때문일까? 일각에서는 이대로 나아간다면 일본이 독도를 완전히 빼앗아가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공동관리 주장을 들고 나오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한다. 독도분쟁은 대한민국의 자존심 문제이다. 자존심을 잃으면 나라의 존재이유가 사라질 만큼 국민의 사기가 저하된다. 그러므로 독도만은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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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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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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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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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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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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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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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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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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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는 한국인인가?
-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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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는 한국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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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37)
- 에펠탑의 서류 소속대륙: 유럽, 소속국가: 프랑스, 지점 파리시 함의: 파리의 상징임 1887년 곧 파리에서 시작될 세계엑스포를 맞기 위하여 당시 프랑스의 저명한 건축사인 구스타프 쿠르베 에펠은 한 철탑을 설계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 철탑건축의 “아버지”인 그의 이름을 기억하기 위하여 이 철탑의 이름을 “에펠탑”이라고 명명하였다. 에펠탑은 부지면적이 1만평방미터로서 파리 시구역의 쎄느강변의 전신광장에 높이 우뚝 서있다. 이 건축사상의 걸작은 견고한 철근, 철골과 청천하늘을 찌르는 호매로움으로 하여 프랑스의 일관적인 우아하고 낭만적인 민족개성을 나타내고 있다. “운중목녀” 에펠탑은 높이가 320미터로 파리 시중심에서 제일 높은 건축물이며 전부가 철강골자로 세워졌는바 총중량이 9757톤에 달한다. 멀리서 보면 에펠탑은 마치 꺼꾸로 쓴 자모 “Y”와 같아 외관이 아름답고 선이 자연스럽다. 철탑은 도합 3층으로 돼있는데 제일 첫층은 높이가 57미터, 두번째 층은 높이가 115미터이며 세번째층은 높이가 276미터에 달한다. 그리고 철탑의 제일 꼭대기에 서서 바라보면 전반 파리시내가 한눈에 안겨온다. 때문에 낭만적인 파리사람들은 이 철탑한테 아름다운 이름 ㅡ “운중목녀(云中牧女)”라고 지어주었다. 굴곡적인 역사 에펠탑의 수건초기, 이 철탑을 두고 사람들은 프랑스의 력사와 예술을 파괴한다고 인정했다. 일찍 20세기 20연대에도 프랑스정부는 이 철탑을 넘어 뜨린 뒤 근 1만톤에 달하는 철로 공장을 지으려고 타산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 철탑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도 점차 소실되게 되었다. 1964년, 에펠탑은 드디어 법률적 보호를 받게 되었고 영원히 철거할 수 없는 역사기념비로 되었다. 그러다가 지난 세기 50연대에 들어 에펠탑은 프랑스의 라디오TV발사 중심으로도 되였는데 이 탑은 세계에 제일 높은 안테나탑 중의 하나로 된다. 동포투데이 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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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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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석 칼럼] 뚫어라!
- ■곽재석(한국이주・동포개발연구원, 원장)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니 世上萬事가 疏通이라는 것을 새삼 다시 절감하게 된다. 너와 내가 서로를 배려하지 못하고 자기의 이익과 주장만을 고집하고, 甲과 乙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손발을 맞추지 못하는 엇박자 소통불통이 세상 모든 갈등과 불화의 원인인 것 같다. 요즘의 한국정치가 그렇고 경제가 그렇고 특히나 중국동포사회가 더욱 그런 것 같다. 요즘 한국의 중국동포사회가 돌아가는 것을 보면 도대체 이들 중국동포들이 오늘 자신들이 어느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고 있는지, 또 자신들이 매일매일 얼굴을 대하며 살아가고 있는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도대체 제대로 알고 있기나 한 지 매우 의문이 든다. 저들이 정녕 한국사람과 더불어 함께 소통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과 의지가 정말 제대로 있는지 것인지 의아하기 짝이 없다. 수년 전부터 한국사회 이민자들 비율 중에 중국 조선족 동포들이 급증하게 되면서 중국동포들의 한국 주류사회 정치 참여의 필요성이 제기되게 되었다. 그러나 느닷없이 필리핀계 결혼이민자가 대한민국 다문화인구의 이익을 대변하는 대표로 뽑혀 국회에 입성하게 되면서 중국동포들의 소외감과 차별감이 매우 고조되기도 했다. 한국 국민의 일원이며 또 지역사회를 구성하는 주민이기도 한 중국동포들의 이익이 잘 대변되도록 이들 중에 적절한 인물을 한국 정치무대에 올려 놓아야 한다는 당위성에 대하여 많은 사람이 공감한 바 있다. 그러나 요즘 매우 기이한 일을 만나게 되었다. 한국에 귀화하거나 국적회복한 동포 인사들이 중심이 된 단체가 전국한적화인연합총회(全國韓籍華人聯合總會)이라는 단체명을 걸고 내년 총선에서 중국동포사회를 대변하는 사람을 추천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들어보지 못했던 세계화인절(世界華人節) 축제에 중국동포단체들이 참석한다고 야단법석을 떨더니 이제 한국에 체류하는 조선족 중국동포들이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중국재한교민협회라는 단체 주관의 노래자랑대회가 조만간 개최된다고 한다. 도대체 한국정치판에 한국국적을 가지고는 있지만 중국인(華人)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한국 입법부에서 누구를 위한 어떤 법을 만들겠다는 것인지, 도대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참으로 정신나간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중국이 세계 정치와 경제에서 G2로서 잘나간다고 하지만 여기는 엄연히 한국땅이고, 한중수교 이후 대한민국은 중국 조선족들을 명백히 중국동포로서, 우리 민족의 일원으로 한국에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어제까지도 한국 정부가 동포로서 제대로 대우해 주지 않는다고, 같은 민족을 이렇게 푸대접하면 안된다고 아우성을 치더니 이제는 급변하여 華人의 일원이라고 희희낙락하는 저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참으로 아득하기만 하다. 저들 중국 조선족 동포들이 가진 체류자격이 H-2 방문취업 비자로서 우리 민족인 중국 조선족 동포들에게만 특별히 주어지는 취업자격이며, 저들이 변경한 F-4 또한 그 이름이 재외동포 체류자격으로서 이 또한 우리 민족 동포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며, 저들이 그를 기반으로 쉽게 영주권 및 국적을 취득하여 한국에 살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까마귀고기 먹은 사람 마냥 정녕 까맣게 잊어 버린 것인지 되묻고 싶다. 이러한 행태가 이제는 우리도 이만하니 한국사회와 한국땅과 소통하지 않고도 우리들끼리 한판 잘해볼 수 있다는 華人의 자만심의 發露는 아닌 것인지 되묻고 싶다.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이 있다. 대한민국은 중국 조선족을 이제껏 華人으로서 받아들인 것은 결코 아니다. 대한민국 법무부는 그리고 한국이주・동포개발연구원을 포함한 많은 동포단체와 교회 그리고 그토록 헌신적이었던 사람들이 이제껏 華人들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일해 온 것은 결코 아니다. 모든 노력과 수고가 결국 내 혈육, 내 핏줄, 내 동포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더욱 보람있었고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앞으로 조선족 중국동포들은 이곳 한국 땅에 살면서 정녕 내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내 자손은 어떠한 사람으로 미래를 살아갈 것인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이를 통해 한국 사람의 마음과 정신과 원활하게 소통하지 못한다면 한국 땅에서의 중국동포사회의 정상적인 발전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한국땅에 사는 중국 조선족이 같은 민족으로서 한국사람과의 관계를 제대로 뚫을 수 있을 때 비로소 한국땅에서의 동포사회 미래도 제대로 뚫릴 수 있을 것이다. 곽재석 원장(한국이주•동포개발연구원) 대통령 비서실장 수석보좌관(2001~2002), 세종대학교 교육학과 겸임교수(2004~2009) 법무부 외국적동포과장(2006~2009) 역임,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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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석 칼럼] 뚫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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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光復) 다음은?
- 70년, 사람으로 말하면 칠순이다.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고희잔치를 치른다. 70년, 올해는 한반도 광복 70주년이다. 국가적인 축제가 한창이다. 학생들에게 물었다. 왜 광복일을 기념할까요? 나라가 세워진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란다. 면상에서 틀린 대답이라고 하기는 무리이다. 광복과 건국을 혼동하는 이들은 한국에서 의무교육을 1년도 받아보지 못한 중국동포 자녀들이다. ‘광복절’은 귀화시험의 단골 문제이다. 필기시험에도 나오고 면접시험에도 나온다. 꼭 알아둬야 하고 국경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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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光復) 다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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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판 “스탈린그라드 전역” – 석패보위전 (2)
- 남림파 진지는 일본군이 점령하려는 주요 공격목표였다. 중국군 제11사 31퇀 3영은 영용하게 저격하여 이 날 황혼무렵까지 일본군의 연속되는 5차의 공격을 물리쳤다. 한편 우측의 9련 진지는 적한테 점령당하고 좌측의 8련 진지 역시 일본군한테 내주면서 연장이 전사하기도 했다. 그리고 중기관총과 박격포로 무장한 제7련은 완강하게 진지를 고수, 맹열한 화력을 집중하여 적의 진공을 물리쳤으며 진지의 앞에는 일본군 시체가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하지만 7련 관병들의 상망과 기타의 손실도 컸다. 이튿날 새벽, 일본군은 삼면으로 협공하면서 7련 고지를 진공해 왔으나 여전히 영용한 7련의 관병들에 의해 격퇴되었다. 일본군은 육군으로서는 중국군 고지를 점령하지 못하게 되자 오전 9시경, 비행기 5대를 출동시켜 중국군 7련 고지를 무차별하게 폭격, 주위의 삼림이 불타고 구축해 놓은 여러개의 토치카도 폭격에 의해 날려갔으며 2패의 패장과 박격포 포수들도 모두 전사하였다. 또한 중기관총패는 전사자가 과반수를 초과했고 기술병종의 관병들은 생존자가 몇명 되지 않았다. 3일째 되던 날, 일본군은 비행기의 지원하에 계속 중국군 제7련이 지키는 고지를 공격, 중국군의 엄페물과 기타 공사는 파괴되어 페허로 되었으나 7련의 장병들은 완강하게 전투를 견지하였으며 4일째 되던 날 즉 5월 31일, 제7련이 남림파에서 철거할 때 전 련은 고작 70여명밖에 살아남지 않았으며 전체 관병의 상망자가 4분의 3에 달하였다. 5월 29일, 다른 한 갈래의 일본군 39사단의 주력은 여가파를 경과해 점심무렵, 조가댐에 진입, 다시 두갈래로 나뉘어 중국군 11사가 지키는 우장파와 주가평을 향해 진공하였다. 우장파는 산세가 험준하고 숲이 무성했으며 주가평은 협곡이 깊고 봉우리들이 첩첩하였다. 제11사의 관병들은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저항했다. 중국군은 수량상 배가 되는 일본군의 진공에 대적, 진지가 있는 곳의 주봉인 대송령에서는 수차에 거치는 육박전까지 벌어졌으며 일본군은 대포와 비행기로 중국군 진지를 초토화로 만들었으나 번번마다 고지점령에는 실패했다. 이와 동시에 일본군 제3사단의 일부는 도자하를 가로 질러 중국군 18군 임시 34사가 지키는 교변남과 천대관 일대의 고지를 향해 맹렬히 공격, 천대관은 이 일대에서 중국군이 지키는 가장 높은 고지였다. 이날 일본군은 점심하를 따라 천대관의 뒤면으로부터 중국군을 향해 공격, 천대관을 탈환하려고 하였으나 점심하에 들어서자마자 중국군의 저격을 받으면서 일격에 300여명의 시체를 남기고는 다시 공격목표를 왕가댐으로 돌렸다. 하지만 일본군은 왕가댐에서도 중국군의 강한 저격벽에 부딪치면서 아무런 진전도 가져오지 못했다. 그 뒤 일본군 제3사단에 증원부대가 도착하면서 중국군 천대관의 부대는 대부대와의 연락이 끊기었다. 천대관을 사수하는 34사 1패의 전사들은 굴하지 않고 진지를 사수하면서 일본군과 박투, 일본군은 수차의 공격에도 산봉우리를 점령하지 못하자 비행기까지 동원되어 고지를 페허로 만들었으며 중국군 용사들은 일본군과 육박전을 벌이던 끝에 모두가 장렬하게 희생되었다. 천대관을 점령한 일본군은 깊고 좁은 협곡에 들어섰으나 용가암 진지를 지키는 중국군의 포격을 받아 많은 상망자를 내고 퇴각하였다. 뒤이어 일본군은 비행기의 지원하에 협곡을 강행돌파한 뒤 다시 중국군 11사의 2선 진지를 향해 맹공격을 해왔다. 석패요새전역은 매우 간고했다. 일방은 반드시 공략해야만 하는 일본군 입장이었고 일방은 반드시 필사적으로 지켜내야 하는 중국군 입장이었다. 일본군이 석패요새의 외곽진지들에 진입한 후 이 일대의 험산준령들은 매일 평균 9대 이상의 일본군 비행기들이 덮쳐들어 폭격했고 중국군과 일본군의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벌어졌으며 비명과 아우성으로 골짜기를 진감했다. 5월 30일, 일본군은 재차 중국군의 석패요새를 향해 공격을 강행, 비행기의 엄호하에 어느 작으마한 공간만 있어도 일본군은 그 공간을 이용해 공격의 발판으로 만들군 하였다. 당시 조가댐 부근의 크고 작은 산에서는 3시간 가량 총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고 한다. 헌데 그것은 쌍방이 정전한것이 아니라 적아쌍방간 육박전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당시 삼각암과 사방만을 공격하는 일본군은 1000여명에 달하였는데 그들은 고지를 쟁탈하기 위해 최루가스탄을 사용하면서 올라왔고 중국군은 이런 최루탄을 막아내는 설비가 없었기에 그저 일본군과 육박전을 벌이는 수밖에 없었으며 희생이 막대하였다. 이 두 고지에서의 전투는 당시 가장 치렬한 전투었다. 일본군은 매 1미터를 전진할 때마다 막대한 대가를 치렀는바 당시의 정경을 보면 해나 달마저 초연에 가리어 원 색갈을 잃을 지경이었으며 중국군 진지앞에 쌓인 일본군 시체는 쌓이고 쌓이어 금자탑 모양을 하기도 했었다. 육군과 배합작전하고 석패를 보위하기 위하여 중국군 공군과 미공군의 전투기들도 빈번히 출동하여 전장 혹은 전장 부근의 일본군을 향해 공격하였는가 하면 일본군의 증원부대를 소멸하고 보급선을 차단하기도 했다. 5월 29일, 중국군 공군은 이창현성을 폭격하여 일본군 30여명을 살상, 30일에는 이창현 동쪽에 있는 일본군 비행장을 폭격하여 일본군 전투기 1대를 파괴하기도 했다. 5월 31일, 석패전역의 마지막 시각, 중국 공군은 지면부대와의 연합작전으로 일본군 전투기 6대를 격추하였으며 일본군의 함대가 육군과 협동작전하려던 계획을 철저히 파탄시키었다. 당시 적아간이 모두 일체의 대가를 가리지 않고 석패의 전연진지에서 치렬한 전투를 할 때 전구 총사령 진성 상장은 호련 사단장한테 전화로 “석패보위전이 파악이 있는가”라고 묻자 호련은 “성공파악은 없으나 사수의 결심은 있다”라고 대답하는 것으로 자신의 영웅기개를 보여주었다. 중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석패보위전의 가장 관건적인 전투에서는 승리의 천평이 몇번 일본군쪽으로 기울어질번 하기도 했지만 적아쌍방이 서로 어울려 육박전을 벌일 때에는 일본군의 현대화장비가 전혀 우세가 없었으며 쌍방이 바친 대가는 거의 1 : 1로 대등하였다. 특히 어느 한 전투에서는 적아간 거의 총을 쏠 수 없는 정도에 이르게 되자 수천명씩 서로 엉켜 육박전을 벌였는데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백병전(白刃战)이 바로 석패보위전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최근 어느 한 매체는 당시 백병전에서 전사한 소년병들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당시 중국 농민가정의 자식들은 보편적으로 영양이 좋지 않아 16~17세가 되어도 키가 총창만큼도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들 소년병들은 자기의 키보다 더 큰 총창을 들고 결사전을 벌이었다. 만약 당시의 소년병들이 살아있다면 지금은 모두 80여세가 되는 노인으로 되어 자기 집 정원에서 차물을 마시거나 손자손녀를 안고 안온한 생활을 만끽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다른 중국사람들로 하여금 이러한 향수를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기의 보귀한 생명을 바치였었다.…” 이 날 3시간에 달하는 백병전이 있은 날의 오후, 수많은 용사들이 흘린 선혈이 장강 남안의 토지를 붉게 물들이었다. 이 날 1500여명에 달하는 용사들은 중국의 강토에 쓰러진채 조용히 잠들었고 총성이 없는 3시간의 백병전끝에 중국군은 끝내 고지를 지켜냈고 패하여 퇴각한 건 일본군이었다. 한편 일본군은 거듭되는 공격에도 석패를 공략하지 못했고 입은 손실도 막중함과 동시에 “무적황군”의 기세도 완전히 상실하였다. 5월 31일의 밤이 되자 전쟁터의 총포성이 돌연히 멈추었고 일본군을 분분히 머리를 돌려 동쪽으로 퇴각하였다. 석패보위전은 중국군의 승리로 끝났으며 그 전역에서 중국군은 도합 7000여명의 일본군을 살상, 많은 무기를 포함한 대량의 군수품을 노획하기도 했다. 석패보위전은 1939년 3월 장강방어전의 총성과 함께 시작되었고 1943년 6월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에 거쳐 진행되어 왔으며 최종 중국군의 승리로 종지부를 찍었다. 그 5년간 중국군은 도합 15만명의 병력을 투입했고 일본군도 10만여명의 병력을 투입했다. 전쟁에서 일본군은 2만 5718명이 살상되고 비행기 45대, 자동차 75대, 선박 122척을 손실보았으며 중국군은 사상자 1만여명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소련의 스탈린그라드전역과 마찬가지로 중국판 “스탈린그라드전역”의 승리는 당시 중일 양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전환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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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기획/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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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판 “스탈린그라드 전역” – 석패보위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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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판 “스탈린그라드 전역” – 석패보위전 (1)
- [동포투데이 김민 기자] 제2차 세계대전시기 스탈린그라드전역은 구 소련홍군이 수도 모스크바를 보위하기 위해 진행한 가장 치열한 전역으로서 이 전역은 제2차 세계대전 유럽전장에서의 중대한 전환점으로 되었다. 하다면 아주 멀고 먼 극동전장에서 역시 스탈린그라드 전역과 비슷하게 치열한 방어전이 있었는바 이 전쟁은 어떤 각도로 보면 중국과 일본의 생사를 가르는 전역이기도 했다. 중경과 전반 중국의 운명과 관계되는 전역 석패는 인가 100호도 되지 않는 작은 옛진이었다. 석패진은 이창현(지금의 이창시 이릉구) 경내에 위치, 장강삼협의 오른쪽에 있으며 장강이 가까이에서 흐르고 산에 둘러싸이어 있다. 석패는 이창현성과 30여리 떨어져 있고 장강천험의 요충지로서 역래로 모든 군사들이 서로 쟁탈하던 곳이었다. 고진 석패는 사방 70리가 되며 위에는 삼두평으로 항일전쟁시기의 군사요충지로서 국민당군의 제6전구 전진지휘부와 강방군 총부가 설치되어 있었고 아래에는 평선파가 있었는데 석패의 초소로서 이창현성과는 30여리 상거해 있었다. 1938년 일본군은 이창을 점령한 후 석패는 중경을 지키는 첫 방어벽으로 전략적 지위가 매우 중요했다. 일단 석패가 함락되기만 하면 일본군은 수륙공(水陆空)의 배합으로 중경과 전반 중국을 위협할 수 있었다. 제2수도인 중경을 지키기 위하여 1938년 겨울 중국해군은 석패에 제1포대를 구축, 좌우로 제1, 제2포대에 도합 10문의 대포를 설치하여 장강삼협 요새포대군의 최전선으로 되게 하였다. 당시 석패를 지키는 중국 해군장병은 100여명으로 석패로부터 이창에 이르는 구간에 주둔해 있었으며 포대의 요새는 남진관 상류의 장강 강면을 봉쇄할 수 있었다. 이 구간을 지켜내기 위하여 당시 중국군은 정예 포병부대를 석패에 주둔시켰다. 당시 일본군 역시 중경을 점령하려면 반드시 이 요새를 넘어야 하기에 천방백계로 이 요새를 노렸다. 1941년 3월 상순, 일본군은 많은 병력을 집중하여 이창 대안으로부터 석패 정면의 평선파와 측면의 조가판을 진공하였지만 모두 중국수비군한테 큰 타격을 받고 퇴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일본군은 감히 석패에 대해 소홀한 무력행동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결코 이 요새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석패요새에 대한 보위전은 중경 혹은 전반 중국을 지켜내는가 지켜내지 못하는가 하는 관건으며 중국군은 전선에 부채형 진지를 구축하였는데 이는 항전초기 서주전역의 대아장과 비슷하였다. 이 부채형 진지를 고수하면서 일본군의 정면진공을 견제하기 위하여 장개석 위원장은 제6전구의 진성과 장강수비군의 오기위한테 수없이 많은 전보를 보내어 석패요새의 견고성을 확보할 것을 강조하였다. 5월 27일, 장강수비군에 대한 작전포치가 떨어졌다. 장강수비군은 장양, 이창 2개현 사이에 있는 도초평, 고가댐, 여가파, 조가판, 석패 등을 결전의 요새로 구축하였다. 결전의 승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진성은 제10 집단군과 제94군 주력을 장양과 자악으로 전이시켜 장강수비군의 우측을 엄호하게 하였으며 동시에 공군전투기가 동원되어 육군과 협동작전을 하게 하였다. 5월 말, 중경의 장개석 위원장으로부터 재차 지령이 떨어졌다. 장개석 위원장은 석패전역을 중국의 “스탈린그라드”라고 하면서 장강수비군의 호련 등 장병들에게 영용하게 적을 무찌르며 석패요새를 사수할 것을 요구, 석패요새의 제11사 사장 호련 또한 석패요새와 생사를 함께 할 것을 전 사에 명령하면서 자기의 지휘부를 화선과 가까운 충객마포에 설치하였다. “승패여하를 불문하고 결심은 있어야” 당시 적아 쌍방의 병력대비를 보면 다음과 같았다. 일본군, 2개 사단, 1개 여단으로 도합 10만명. 중국군은 호련이 인솔하는 18군 제11사가 핵심진지를 고수하고 제10집단군 제94군 병력이 엄호가고 공군전투기가 협동작전을 하게 되였다. 호련은 산악작전에 유명한 장군이었다. 그는 석패주위의 우중충한 산세, 깎아지르듯한 절벽, 계곡과 산골짜기, 무성한 수림 등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였으며 아울러 요도의 층층마다 장애물을 설치하여 석패진지로 하여금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었다. 5월 28일, 일본군 제3사단과 제39사단이 석패를 향해 진격해오기 시작했다. 이 날 일본군 제3사단은 장양의 고가댐으로부터 이창현 경내로 진입, 중국군 제11사의 첫 방선인 남림파진지에 향해 공격을 발동하였다. 동시에 우측의 18사 진지 또한 일본군의 습격을 받았다. 이를 서막으로 석패요새를 둘러싼 중국군과 일본군 사이의 혈전이 전면 개시되었다. 전투는 매우 격렬했는바 중국의 8년 항전중 이 전역은 특히 관건성을 띤 전역으로 되었다. 중화민족의 존엄을 위하여 중국군 제18군 용사들은 일본군의 한차례, 또 한차례의 진공을 물리치면서 육탄으로 강철의 장성을 만들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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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판 “스탈린그라드 전역” – 석패보위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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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묘한 세계대백과(37)
- 현대의 선박은 모두 강철로 건조하며 크고도 무게가 대단하다. 그런데 왜 수면에서 뜰수 있을까? 그럼 우선 우리 함께 실험을 해보자. 만약 친구가 얇은 철판을 물위에 놓는다면 그것은 인차 가라 앉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이 철판을 갖고 상자를 만든 뒤 다시 물위에 놓으면 그것은 얼마든지 수면위에 뜰 수가 있다. 그럼 철판 자체는 그 중량의 변화가 없지만 왜 이 실험의 전후가 크게 다를까? 이는 힘의 작용은 상호원리와 같다. 우리가 철판으로 만든 상자를 물위에 놓았을 때 상자 자체는 아래로 쏠리는 중력이 있고 그것의 밑부분 또한 밀어올리는 물의 부력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 부력이 철상자의 중력보다 클 때는 물은 철판으로 하여금 물우에 뜨게 한다. 부력이란 물체가 액체와 접촉하는 면적이 큼에 따라 부력도 커진다. 즉 철상자가 접촉하는 물량이 철상자보다 크기에 철상자가 물위에 뜰 수 있는 것이다. 선박이 물위에 뜰 수 있는 원리가 바로 이런 것이다. 동포투데이 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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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묘한 세계대백과(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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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36)
- 말타 거석묘의 서류 소속대륙: 유럽, 소속국가: 말타, 지점: 말타 내륙과 연해의 작은 섬 함의: 선사(史前)건축의 노천박물관 말타 거석묘는 “말타거석문화시대의 신전”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약 이 거석묘는 기원전 3600년과 2500년 사이에 수건, 아주 오랜 석기시대로부터 남아 내려온 가장 복잡하고도 매력이 있는 유적이다. 말타군도의 작은 섬에는 지금도 거석건물이 30여곳에 있으며 어떤 것은 단독으로 존재하고 어떤 것은 신묘군을 조성하고 있다. 그 중 간티야 신전(杰刚梯亚神亩)과 하가르 킴 신전(哈格尔基神亩) 및 몽나아드라(蒙娜亚德拉) 신묘가 가장 유명하다. 주목을 끄는 거석덩이 말타섬의 하가르 킴 신전(哈格尔基神亩)는 선사(史前)건축예술의 진품이다. 무덤 중에는 길이가 660미터에 달하는 큰 석판이 있는데 말타군도에서 가장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거석덩이다. 하가르 킴 신전 (哈格尔基神亩)의 허다한 문과 창문은 모두 하나의 완정한 거석구멍으로 제작, 석문상에는 무늬조각이 있고 벽에는 조각된 고대 서사부호가 있다. 그리고 신전당으로 통하는 굴속 양측에는 커다란 돌덩이로 만든 “돌걸상”이 있다. 이런 “돌걸상”은 도대체 제사대인지 아니면 그 무엇인지 지금도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정밀하고 정확한 태양시계 거석건축 중 가장 사람들한테 신기하게 보인는 것은 몽나아드라(蒙娜亚德拉) 신묘로 이를 또한 “태양신묘”라고도 부른다. 사람들이 자세하게 측량하고 발견한데 의하면 이 신묘는 실제상 상당히 정밀하고도 정확한 태양시계였다. 태양광선이 신묘내의 제단과 돌기둥의 위치를 비출 때면 정확하게 여름과 겨울의 주요한 절기를 알려준다. 아주 멀고 먼 옛날, 신묘의 수건자들은 이렇듯 정확하게 태양광선의 위치를 계산해 냈는바 이로 보아 그들이 장악한 천문과 역법 방면의 수준은 매우 선진적이었음을 알수가 있다. 동포투데이 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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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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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34)
- ■ 김철균 순자네가 신흥소학교 부근에서 살 때는 물론 신흥가두 민부사회구역에 이사간 뒤에도 동네사람들은 흔히 순자네 집을 “집체식당”이라고 불러왔다. 왜냐하면 매일 점심 때만 되면 적어서 10명 이상씩 순자네 집에서 식사를 한다. 오족하면 1년에 김장감으로 배추 3000근씩 산다는 순자네 집이었다. 또한 사람들은 순자네 집을 “집체여인숙”이라고도 한다. 사촌, 육촌과 사돈에 이르기까지 순자네 집에서 숙박을 해보지 못한 사람이 거의 없었으며 순자네 또한 집식구들만이 단촐하게 집에서 잠을 자본 적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찾아오는 손님은 모두 사연이 있기 마련이었다. 가족이 연변병원에 입원했거나 다른 어떤 사유로 연길로 왔다가는 찾아들군 하는 것이었다. 친구거나 다른 친척이 딱 없어서가 아니었다. 특히 며느리 친정 편의 사돈이거나 사위 쪽의 사돈들도 자주 찾아오군 했는데 그들도 진정 연길에 친지가 없어 순자네 집으로 발길을 돌린 것이 아니었다. 친지들이 있어도 모두 출근족이 아니면 다른 그 어떤 불편한 점들이 많아서였다. 아니 그것보다 순자네 집으로 찾아오면 그만큼 눈치가 보이지 않아 좋아서였다. 순자와 남편 용환 영감 모두가 손님을 열정적으로 대했고 뭔가를 더 주지 못해 안달아하는 사람들이라 손님들 모두가 절로 순자네 집으로 발길이 돌려지기가 일쑤었다고 한다. 한편 신흥소학교 근처에 있을 때면 찾아오는 손님들 거개가 연변병원과 제1백화상점 그리고 공원 등이 가깝기에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건 사실이었다. 찾아오는 손님들 거의 모두가 연변병원에 오거나 연길서시장 혹은 제1백화상점으로 왔다가는 돌아가지 못할 때면 순자네 집으로 찾아 들었던 것이다. 순자네가 신흥소학교 근처에서 살 때만 해도 연변의 교통상황은 비교적 덜 발달한 상황이었다. 당시 비교적 거리가 먼 훈춘, 왕청 등 곳에서는 연길로 한번 오려면 크게 별러야 하는 상황으로 당날 치기로 연길로 다녀올 때가 아주 적었다. 대부분 연길로 와서 일을 보고는 친척집에 들려 하루밤 정도 자고는 이튿날까지 일을 볼 때가 많았다. 그러한 견지에서 볼 때 신흥소학교 부근에 있는 순자네 집은 외지 손님들이 손님들이 오가며 들리기가 가장 안성맞춤한 위치라고 할 수도 있었다. 순자네 집으로 오는 손님중에는 자식들이 끌어들이는 손님들도 많았다. 자식들의 동창생, 집체호 때의 친구 및 사업동료와 사회친구들로 끝이 없었으며 그들이 올 때마다 순자는 하루 저녁 사이에도 밥상 2-3차씩 갖추기가 일쑤었으며 해놓았던 밥이 모자라 다시 밥을 지을 때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손님이 집으로 줄쳐서 들어올 때 짜증이 나지 않았다고 하면 그건 새빨간 거짓말 올시다.” 순자의 말마따나 손님접대에 짜증나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짜증을 겉으로 나타내지 않은 순자였다. 그리고 그 손님들 중에는 필경 반가운 손님, 그닥 반갑지 않은 손님 등이 있기 마련이며 고기 한점이라도 더 주고 싶은 손님도 따로 있는 법이지만 순자는 천편일률로 손님들을 열정적으로 맞이하고 똑같이 대접했으며 또 바래주기도 했다. 우리는 흔히 농촌사람은 인심이 후하고 도시사람은 인색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같은 도시이면서도 지방도시인 훈춘시내나 왕청시내의 사람들은 연길사람을 더욱 인색하다고 했다. 마치 그 옛날 조선에서 모든 조선인들이 한결같이 서울사람들을 “서울깍쟁이”라고 부르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연길도 연변의 “서울”이라고 연길사람들이 훈춘 등 지방도시의 사람들보다 더 깍쟁이라고 부를 수도 있으며 실제적으로도 도시 사람들이 농촌사람에 비해 더욱 깍쟁이로 보이는 경우도 허다하다. 도시사람들이 농촌사람들에 비해 인색하고 큰 도시의 사람일수록 지방도시의 사람에 비해 더욱 “깍쟁이”로 보이는데는 여러 가지 요소가 내포돼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딱 한가지만은 허다한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인즉 농촌사람들이 물건구입 혹은 병원 진찰 등을 명목으로 도시로 올 때가 많고 그것도 큰 도시로 올라올 때가 많으며 반대로 큰 도시 사람들이 지방 도시 혹은 도시 사람들이 농촌으로 가는 경우가 아주 적다는 점이다. 그것의 가장 돌출한 실례로는 농촌행 버스를 보면 아주 쉽게 알 수 있다. 지난 세기 90연대까지만도 농촌으로 통하는 버스는 흔히 아침과 저녁으로 달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을 자세히 관찰하면 흔히 아침에 버스가 농촌으로 갈 때는 승객이 적거나 아주 적은 반면 버스가 도시로 올라올 때는 승객이 미여지기가 일쑤이다. 그리고 오후 다시 농촌으로 내려갈 때는 승객이 붐비어 발 옮길 자리마저 없을 지경이지만 그 버스가 다시 도시로 올라올 때는 역시 승객이 적기가 가물에 콩나듯 할 때가 허다하다. 이는 농촌사람들이 도시로 다니는 차수가 더 빈번하고 그 인수도 더 많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설명한다. 다음 농촌에서 온 손님들이 도시에서 점심을 먹거나 하루밤 정도를 묵을 경우 여기에 또한 묘한 부분이 있다. 즉 농촌에서 올라온 그 많은 승객들은 도시에 들어온 후 시내에서 점심을 먹기 마련으로 식당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친척집이나 친구네 집을 찾는 경우가 허다하며 혹시 잠을 잔다면 여관 혹은 친척이나 친구의 집을 찾는다는 것이다. 이러다 보면 농촌에서 도시의 친척을 찾는 손님은 “내가 어쩌가 찾아 갔는데 푸대접을 하더라”고 섭섭해하지만 반대로 도시의 사람들은 “친척들이 우리네 집으로 올 때가 많지 우리가 농촌으로 갈 때가 아주 적다. 그리고 그 손님들은 자기네가 어쩌다 찾아온다고 하지만 이렇게 어쩌다 찾아오는 손님을 우리는 거의 매일 접대해야 할 상황이다”라고 억울해한다. 그렇다면 연변병원과 제1백화점 그리고 서시장과 공원 등이 가까운 순자네 집은 도시 중에서도 손님이 가장 많이 찾아오는 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화제는 다시 본 줄거리로 돌아와 집에 이틀이 멀다하게 손님이 찾아들고 낮마다 자식들이 들어와 점심밥을 축낼 때마다 순자는 그 손님들과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군 했다. 즉 아무리 손님이 끊기지 않는 집이지만 그 손님한테는 어쩌다 찾아오는 집이고 믿고 찾아오는 집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순자는 그런 손님들을 소홀히 대할 수 없었다. 평소보다는 색다른 음식을 만들어서는 끼니마다 식탁에 올렸고 병원에 가족이 입원한 친척한테는 병원위문과 더불어 병치료에 보태라고 돈을 쥐어주기도 했으며 물건구입을 온 친척한테는 그들과 동행하며 물건구입을 도와주군 하였다. 기실 찾아온 손님이 많을 때면 짜증이 나는건 사실이었지만 다시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들 모두가 반가운 손님들인 것만은 분명했다. 자기를 믿고 찾아오는 사람들이었으니까. 헌데 한가지 이상한 것이 있었다. 그것인즉 지난날 신흥소학교 부근에서 살 때 병원과 연길제1백화점, 서시장 등이 가까와 손님이 많았다면 후에 북대시장 부근인 민부사회구역으로 이사간 후에도 순자의 집에는 여전히 손님이 매일이다 싶이 찾아왔다. 과연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를 두고 찾아오는 손님들은 지금은 연길시내에 택시가 흔한지라 집이 어디에 있든 상관이 없다고들 했지만 진정한 뜻은 달랐다. 새들도 날아가다가 앉고싶은 나무가 있다고 하물며 사람도 가고 싶은 집이 따로 있기 마련인 것이 아니겠는가! 제16회 인생그라프 인생만년에 들어서면서 순자는 비교적 편안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아니 순자는 자신이 아주 편안하고 행복하다고 자부했다. 우선 장장 40여년간 해오던 가두적십자회 주임직을 내놓았는가 하면 자기가 낳은 자식 6명과 한족자식 6명까지 모두 가정을 이루고 안착된 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집도 민부사회구역의 아파트로 이사를 가 더는 그 17평방미터밖에 안되는 되는 방에서의 비좁고도 지긋지긋한 생활과 작별하게 되었다. 생활상에서도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게 되었다. 지식분자들에 대한 나라의 정책이 점차 완벽해짐에 따라 남편 용환 영감은 국가고급지식인 대우를 받게 되었고 두 내외간으로는 다 쓸수 없을 정도로 노임도 많이 올랐다. 지난 세기 80연대 중반까지 이어져 오던 그 힘든 식량고생을 더는 하지 않게 되었으며 “식량난”이란 이 세글자는 이젠 옛말로 순자네 가정사에서나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자식들도 다 잘 되었다. 큰 아들 영남이는 연길방직책임유한회사의 의사로 활약하다가 그도 이제는 퇴직했고 둘째 아들은 정부기관에서 근무하는가 하면 셋째 아들은 개체약방을 경영하고 있으며 딸들 중 큰딸 영순이는 이미 사업터에서 퇴직하고 연길시 “뢰봉반”의 성원 및 연길시 통신보도협회의 회원으로 활약, 둘째 딸과 셋째 딸은 개체호로 상업에 뛰어들었는데 특히 셋째딸 영애는 북경에 진출하여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이전에 도와주었던 화전의 정수금, 장춘의 중경림, 훈춘의 장려와 돈화의 이문영 등은 모두 의료위생 부문에서 근무, 특히 그 중 장춘의 중경림은 모 의학연구소의 중견일군으로 상급 해당부문에서 매우 중시하는 일군으로 되었다. 행복이 찾아온 것도 사실이었다. 자식들은 물론 지난 세기 80연대에 도와 주었던 한족자녀들도 효도가 극진했다. 그제날 “남의 자식을 도와 주어봐야 그 때뿐”이라는 말을 귀에 못박히도록 들으면서 이에 대해 어느 정도 반신반의하기도 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한족자녀들이 친자식들에 별로 못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한족자녀들은 음력설같은 큰 명절은 물론 매년의 “노인절” 때마다 찾아왔다. “너희들이 시부모 혹은 처가집에 가서 ‘노인절’을 쇠어야 할텐데?” 간혹 순자가 이렇게 나무람하면 그들은 연변외 타지방들에는 “노인절”이란 것이 없다고 하거나 한족들은 조선족에 비해 “노인절”을 쇠는 바람이 크게 일지 않는다고 둘러대군 했다. 그렇다면 순자는 그러는 그들이 더 반가왔다. “노인절”을 쇠지 않는 지방에서 살면서 연변에 “로인절”이 있다는것을 알고 찾아오고 비록 연변에서 살지 않지만 조선족들이 “노인절”을 아주 중시한다는 것을 알고 찾아오는 그들의 효성이 더욱 중요했다. 한편 이런 한족자식들이 올 때마다 순자네 집은 “일장 소란”이 벌어지기가 일쑤였다. 그들이 명절에 “어머니”를 보러 왔다가 “어머니”가 해주는 맛있는 음식들을 그냥 공짜로 먹을 수가 없어 돈이라도 내놓으면 순자는 한바탕 성을 내군 한다. “지금 애들이 한창 자라고 공부하고 있는 때어서 너희들이야말로 가장 힘들 때란다. 이는 내가 겪어봐서 잘 안다.” “그래도 그렇죠. 저희들이 매달 드리는 것도 아니고 어쩌다 명절에 왔다가 어머니한테 용돈을 하라고 드리는건데 이것마저 거절하면 어떡해요.” “지금 영감의 퇴직금도 올라 난 용돈이 아주 넉넉하다. 그러니 돈을 내놓을 생각을 아예 말어라. 난 그저 너희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반갑다.” 이렇게 돈 때문에 싱갱이질을 하다가도 결국은 흔히 한족자식들이 두손을 들고 “투항”하는 경우가 많다. 뿐만아니라 그들이 돌아갈 때면 돈 500-1000원씩 질러준다. 이에 한족자식들이 거절이라도 하면 “너희들한테 주는 것이 아니라 손주가 고와서 손주들한테 주는 것”이라며 막무가내이다. 정말 못 말리는 조선족 어머니었다. 2 새천년에 들어서면서 중국의 경제는 날개를 돚친듯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국민들의 생활도 날따라 향상되었다. 즉 사람들은 더 이상 배부르게 먹는데 만족하지 않고 삶의 질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른바 “웰빙시대”를 추구하면서 일종 관광붐을 일으켰다. 순자네 노부부도 여느 노인들과 마찬가지로 각종 명목으로 된 관광단체에 자주 가입했다. 건국 전에 사업에 참가한 노간부들에 대한 연변위생연수학교와 연변 노간부국을 비롯한 해당부문의 따뜻한 배려도 있었지만 김용환 령감 자신이 관광을 즐기면서 해당 부문에서 조직하는 관광이라면 한번도 빼놓지 않고 등록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김용환 영감이 관광을 즐겼다기보다는 마누라와 함께 관광지를 유람하면서 노년을 유쾌히 보내고 싶었다고 해야 더 적절했다. 기실 순자는 수십년을 살아오면서 어릴 적에 근로봉사단 아동공으로 봉천에 한번 가본 뒤로 수십년동안 연변밖을 벗어나보지 못하였다. 그러던 순자가 만년에 영감의 덕분으로 북경의 만리장성, 북대하의 바다가 등 명승지들을 두루두루 유람하는 행운을 가지게 되었다. 제일 처음으로 그들 부부가 북경관광을 다녀올 때 순자는 일부러 영감한테 심양에서 내려 하루밤만 체류하자고 졸라댔다. 마누라의 그 목적에 대해 용환 영감은 잘 알고 있었다. 심양 아니, 일제시대 때 심양의 이름은 봉천이었다. 그곳은 수십년간 순자한테 아픈 상처만을 남겨 놓았던 도시이기도 했다. 그날 순자네 노 부부는 심양역에서 내려 곧바로 동릉구로 찾아갔다. 그러나 순자의 기억속에 남아있던 옛날의 모습은 하나도 없었다. 노 부부는 나많은 노인들한테 물어가며 겨우 그제날 일본인이 경영하던 “도요다이야 고죠” 회사가 있던 옛터를 찾았다. 하지만 그 건물이 지금까지 남아 있을리 만무했다. 순자의 얼굴에는 몹시 서운해하는 모습이 역연했다. 그러자 영감 김용환은 순자를 위안하면서 그 곳에서 멀지 않은 동릉공원에 가서 휴식하면서 사진이라도 찍자고 했다. 그런데 택시에 앉아 동릉공원에 도착하기 무섭게 순자는 갑자기 눈물을 펑펑 쏟으며 하소연하는 것이었다. “영감, 이젠 알리우다. 바로 저 공원이우다. 옛날 고향이 그리울 때마다 저 공원에 찾아와 실컷 울던 일이 기억나우다.” 그도 그럴 것이 심양의 모든 것이 변했지만 동릉공원만은 그래도 적지 않은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순자는 그 곳의 옛 건물과 아름드리 고목들을 어루쓸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뿌렸다. 그런 건물과 고목들이 기억에 떠올랐던 모양이었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길/ 계수나무 한나무 토끼 한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나라로 …… 이는 그제날 순자가 바로 이 동릉공원에서 울면서 고향을 그리며 부르던 노래 “반달”이었는데 수십년후 동릉공원을 다시 찾은 순자는 조용히 흐느끼며 그 노래를 다시 불렀다. 그러자 용환 영감도 걸걸한 목소리로 따라부르기 시작했다. 그 날 이들 노 부부는 심양 동릉공원어귀에 있는 “9.18”기념비앞에서 사진 한장을 찍었다. 그 날밤 조선족이 운영하는 어느 작으마한 모텔에 투숙한 순자는 그 때 그 봉천시절에 남몰래 부르던 “반달” 등 노래를 부르면서 온밤 눈물로 지새웠고 이를 달래는 영감 용환의 얼굴에도 두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리기는 마찬가지었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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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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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지명과 연변지명②광지바위부터 광려산까지
- 광주리바위 지명은 연변과 한반도에 걸쳐 널리 분포 되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연변에서는 광지바위라 부르고 북한에서는 광주리바위 또는 광지바위라고 부르며 한국에서는 며느리바위 부처바위 감투바위와 같이 지명이 변종 되여 나타나고 있으나 전해 내려오는 설화는 유사하다. 중국 강서성의 불교 명산 려산(옛 지명은 匡廬山) 지명과 동일한 경상남도 창원 광려산(匡廬山) 지명, 충청남도 예산군 후사리에 자리 잡은 광주리봉 지명도 불교지명으로 추정된다. 절이 있어 뒷절 또는 후사라 하여 후사리 지명이 생겨났다는 기록을 보면 광주리봉도 역시 불교문화와 연관 있는 지명임을 알 수 있다. 허나 지명풀이에서 유사한 설화를 찾아 볼 수 없다. 이밖에 서울 구로구 광주리물 혹은 광지廣池 라는 지명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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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지명과 연변지명②광지바위부터 광려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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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지명과 연변지명①왜랑동부터 워렁바위골까지
- [동포투데이] 지명 속에는 그 땅에 정착하여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 사람들의 눈에 비친 자연모습들이 그대로 간직되어 있고 우리문화 속에 스며든 외래문화의 영향이나 문헌에는 나와 있지 않은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찾아낼 수도 있다. 최초의 地名을 적을 시기에 음운체계가 다른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어떤 것은 비슷한 음을 취해 적기도 했고 어떤 것은 뜻을 취해 적기도 했다. 그 가운데 허다한 지명은 철저하게 소리를 취한 음차(音借))를 위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원래의 뜻과는 더욱 더 거리가 먼 지명들이 생겨났다. 중국 길림성 연길시 소영향에는 와룡동이 라는 마을이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중소학교 도덕교양자료집으로 편찬한《내 고향연변》의 해설에 따르면 1907년 국자가 서쪽 교외의 와룡동 마을에 창동강습소가 세워졌고 1935년 학교 졸업생들이 와룡동 산비탈에 사은기념비(师恩纪念碑)를 세웠다고 기술하고 있다. 1986년 연길시 지명위원회에서 편찬한 연길시 지명지에는 마을 서쪽 산세가 마치 누워있는 용의 자세를 방불케 하여 와룡동(卧龙洞)이라고 명명하였다고 적고 있다. 허나 예로부터 이 지역의 많은 사람들은 와룡동을 왜랑동으로 불러왔다. Wehe 돌(石头)의 관형어 Wehengge의 (石头的) 만주어 음을 정확하게 전하고 있다. 와룡동은 사실상 왜랑동으로서 돌이 많다는 만주어 음역이다. 토박이 노인들은 어릴 때 상발원에서 마을로 올라가는 산기슭에 돌들이 널려있어 숨바꼭질 하던 옛 이야기를 종종 꺼내 군 한다. 와룡동 서쪽에 위치한 소백석구(小白石)와 동쪽에 위치한 석마동(石磨洞) 모두가 돌이 들어있는 지명으로서 와룡동의 지명과 그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풀이 된다. 사실 연변지명가운데 와룡동이라고 명명한 곳이 여러 곳이 보인다. 용정시 개산툰 부근의 와룡동도 밭에 돌들이 많아 발에 자주 걸렸다고 한다. 이 지역 노인들도 와룡동을 왜랑동으로 불러 왔다. 와룡동에서 서쪽으로 5리쯤 올라가면 돌볏이 라는 마을이 나타난다. 예전에 돌볏마을은 웃 돌볏와 아래 돌볏로 나누어 지여 있었는데 60년대 초에 웃 돌볏가 폐촌으로 사라졌다. 웃돌볏 마을은 두만강 연안에서도 역사가 오랜 마을이다. 옛 사람들은 갔어도 그 역사의 발자취는 그대로 살아남는다. 오래 전에 이미 폐촌으로 된 웃돌볏 마을 뒤 산에는 아직도 커다란 너럭바위로 쌓여진 거대한 산봉이 돌탑처럼 우뚝 솟아있다. 마치 수없이 많이 부서지고 깨어지면서도 자신의 꿈을 찾아 치열하게 살아왔던 이주민들의 너럭바위처럼 무거운 삶들이 그대로 녹아내려 굳어진 듯이 파란만장한 세월 속에 잃어버린 마을의 영원한 이정표로 남아 그 자리를 외로이 지켜 서있다. 연변의 화룡시 서성진 와룡촌은 산에 둘러싸여있는 꽤나 골이 깊은 산간마을이다. 지금은 마을들을 통합하여 와룡촌으로 불리우지만 예전에는 와룡촌 마을과 가까운 곳에 어랑촌 이라고 부르는 자그마한 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 여기에서 와룡(whe)과 어랑(olhe)이란 지명은 모두 바위를 나타내는 말로서 이 지역 지형적인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만주어에서 바위의 의미를 가지는 wehe는 여진어에서 olhe로 나타나고 있다. 돌과 바위로 유명한 함경북도 명천군의 아감면과 경성군의 어랑면 지명은 모두 여진어의 olhe라는 음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새겨진 것들이다. 한국지명에는 언뜻 보면 만주어 wehe와 여진어 olhe라는 문자가 들어있지 않지만 꼼꼼히 따지고 보면 돌과 바위의 뜻을 지닌 지명에 숨어 들어있다 .전라남도 영암군 ‘월출산’의 명칭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백제 때는 월나악(月奈岳), 고려 때는 월생산(月生山), 조선시대는 ‘월출산(月出山)’이라 불렀다고 적고 있다. ‘月奈>月生>月出’으로 변화했는데 두 번째 글자만 ‘奈>生>出’로 오랜 세월 두고 바뀐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영암군 지명도 백제 때에는 월나군(月奈郡)이었는데 통일신라 때에 영암군(靈巖郡)으로 바꾸었다고 했다. 월출산 지명 月奈岳과 영암군 지명 月奈郡은 만주어에서 바위를 뜻하는 wehe 왜랑이란 음과 근접되여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동석(動石)은 월출산 구정봉 아래에 있다. 특히 층암(層巖) 위에 서있는 세 개의 돌은 높이가 한 길 남짓하고 둘레가 열 아름이나 되는데, 서쪽으로는 산마루에 붙어 있고, 동쪽으로는 절벽에 임해 있다. 군의 이름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는 영암(靈巖)군이라는 지명은 이 신령한 바위에서 유래했다는 말로서 月奈는 Wehe 돌(石头)의 관형어 Wehengge의 (石头的) 만주어 음과 근접하고 있어 월출산(月出山)의 옛 지명 月奈岳과 영암군(靈巖郡)의 옛 지명 月奈郡은 바위산 바위고을이라는 의미를 정확하게 전하고 있다. 전라북도 진안군 옛 지명도 옛 문헌들을 뒤적인 결과 희한하게도 월랑(月良 혹은 越浪)으로 적어 있다. ‘월랑’은 백제시대에 부르던 월량(月良)이란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현재도 진안의 대표적인 경관을 ‘월랑팔경(越浪八景)’으로 부르고 당지 주민들은 여전히 월랑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진안의 팔경을 꼽은 ‘월랑팔경’ 중에서 으뜸가는 마이산은 바위산으로서 진안군 지명도 이 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면 월랑은 만주어wehe 음과 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서울시 종로구 송월동(松月洞)은 송정동(松亭洞)의 「송」과 월암동(月岩洞)의 「월」자를 따서 송월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여기에서 월암(月岩)동은 원래 워렁바위라 하였고 이 바위가 있는 동네를 워렁바위골, 한자로는 월암동月岩이라 적어 왔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출판한 <<고지도를 통해 본 서울지명연구>>에서는 보름달처럼 둥글게 생긴 큰 바위가 있으므로 붙인 이름이라고 풀이하고 있으나 만주어의 wehe 라는 바위라는 뜻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지명에 사용된 한자들은 그 본래의 뜻과는 관련이 없이 발음만을 기록한 것으로 생각된다. 즉 당시의 지명을 의미로서가 아닌 소리에 따라 한자로 옮겨 적은 것이다. 月奈 月良 越浪 月岩역시 月달이나 浪 파도의 한자 의미와는 무관한 당시의 바위 wehe라는 소리를 옮겨 적은 것으로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지금까지 학자들은 月을 달 어음 변이 돌로 추정하고 지명을 해석하여 왔지만 月奈 月良 越浪 月岩의 소리 정체성에 주목하지 못하였다. 月奈 月良 越浪 月岩과 같이 옛 지명에 사용한 것이 여럿이 발견되고 이들 사이에 소리가 일정한 공통점이 띠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를 실마리로 삼아 유사한 古地名들에 대한 어느 정도의 추정은 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 예를 들면 경상북도에 자리 잡은 불국사와 석굴암을 품고 있는 토함산(吐含山) 옛 지명 월함산(月含山) ,경기도 파주시 월롱역(月籠驛) 지명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이외에도 東國與地勝覽(동국여지승람)에 적혀있는 月良村面(경기도 이천부)이라는 지명, 이천시 부발읍에 있는 월량골(月凉 혹은 月浪) 지명이 이에 해당한다. 여진어의 olhe로 나타나고 있는 한국지명으로는 서울특별시 계남근린공원에 옮겨있는 우렁바위 ,전라남도 화순군 우렁바위이다. 한국에 어랑 만두라는 음식 이름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어랑이란 말은 산골을 말하는 뜻이고 어랑 만두는 그 지역에서 먹던 음식으로 알고 있으나 보다 더 정확한 뜻은 돌이나 바위가 많은 산간 지대를 말하며 어랑 만두는 이런 깊은 산간 지대에서 먹던 음식을 뜻한다. 이와 같이 지명 어원을 꼼꼼히 따지고 보면 우리 언어의 밑바닥에 스며든 북방민족의 여러 언어요소를 살펴보게 되고 여진족과 만족 거란과 몽고족이 우리와 가장 가까이 서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실 우리의 언어는 방대한 북방 언어계통에서 뻗어 나온 하나의 지류이다. 오늘 날에 와서 다시 돌이켜 보면 많은 북방소수민족들의 언어는 치열한 언어전쟁에서 이미 그 자취가 사라졌지만 함경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경상도 평안도 지명들은 그 지방의 언어와 더불어 거세찬 역사의 파도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우리 역사와 문화를 균형 잡힌 시각으로 이해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복잡하게 얽힌 지명들을 풀어나갈 수 있도록 관건적인 실 머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글 : 허성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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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지명과 연변지명①왜랑동부터 워렁바위골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