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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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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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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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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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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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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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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지' 재해석⑤ 삼국시대의 막을 올린 원소
    ●김정룡(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장) 나관중의 <삼국지 통속연의>에서 원소에 대한 평가는 매우 인색하다. 실제로 원소는 당시 대단한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다. 한국 작가들의 <삼국지> 여러 버전들에서도 원소를 그저 그런 인물로 취급하고 비중을 두지 않았다. 원작이든 여러 버전이든 원소를 이렇게 홀시한 이유는 무엇일까? 패배자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패배자일지라도 역사는 역사이기 때문에 원소에 대해 재평가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럼 원소의 역사적인 존재와 그의 행적이 어떠한 것이어서 합당한 평가를 그에게 부여해야 한단 말인가?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던 후한 말기에 한 계급을 대표하는 인물이 몇 안 되는 상황에서 원소는 사족(士族)이라는 계급집단의 대표자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가 재해석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주나라 때 천자, 제후, 대부, 사인, 서민 등 다섯 계급의 존재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이 다섯 계급 중에 사인(士人)은 공부해서 출세하여 권력을 잡는 집단으로서 사대부가 되는 것이 삶의 목표였다. 진나라 때 귀족세습 제도를 폐지하고 간부 임명제를 실시하였고 한나라 초기 동중서에 의해 사족집단이 권력층에 대거 진출하게 되었으며 후한시기에 이르러 관료계급을 독차지할 만큼 사족집단이 힘이 컸다. 그런데 후한 시기 황제들이 나이가 어린 탓에 외척과 환관들이 권력을 점유하고 있었으며 사대부 집단은 제3의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환관이 황궁을 관리하는 것은 전례의 법이자 제도인데 어떻게 바꾸겠습니까? 하물며 선제가 막 붕어하셔서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못했는데 내가 또 어떻게 노골적으로 사대부의 편에 서겠습니까?” 수렴청정을 하면서 천하를 호령하던 하태후가 환관을 죽이라는 간언에 대해 한 말이다. 이 말에서 우리는 당시 사대부가 하나의 강력하지는 못했지만 그나마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원소 가문이 바로 사대부였다. 고조부부터 4대가 내리 ‘삼공(三公)’의 직무를 맡아서 ‘사세삼공’이라 불렀다. 후한의 삼공은 태위(太尉), 사도(司徒), 사공(司空)이었다. 그들의 지위는 구경(九卿)보다 높고 황제 다음이었으며 재상(총리)에 버금갔다. 원씨 가문은 사세삼공이었으니 당연히 전형적인 사족이었다. 원소는 가문이 좋은 덕인지 영제를 지키던 근위군의 두 번째 인물이었다. 첫 번째 인물은 환관 건석(蹇碩)으로서 상군 교위이자 대장이고 세 번째인 포홍(鮑鴻)은 하군 교위, 네 번째인 조조는 전군(殿軍)교위였다. 당시 환관과 외척의 다툼에서 원소는 외척의 손을 들어주었고 자신이 군벌이 아니었으므로 직접 나서 환관들과의 전쟁을 벌이는 것이 버거워 동탁을 끌어들인다. 명의상으로는 동탁의 상경을 대장군인 하진이 요청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 아이디어는 원소가 낸 것이다. 그 와중에 하진이 환관을 죽이는 일에 머뭇거리는 바람에 오히려 환관들 손에 하진이 먼저 저승으로 가고 만다. 하진이 죽자 눈에 달이 오른 원소가 환관 척살에 의지를 불태운다. 선한 자든 못된 자든 가리지 않고 무릇 환관이면 닥치는 대로 죽여 무려 2천 명의 목숨을 앗았다. 외척도 죽고 환관무리도 몰살되었으니 원소를 대표로 하는 제3의 세력이었던 사족 즉 사대부 집단의 천하가 되는 것이 아니냐? 사족이 벼슬길을 농단하고 여론을 통제하고 집권자로 변신하는 꿈이 실현되는 것이 아니냐? 애석하게도 역사는 사족집단의 바람대로 전개되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동탁 때문이었다. 사실 동탁을 수도로 끌어들이는 일에 조조는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환관이 문제가 된 것은 그 책임이 군주에게 있고 그들의 죄를 다스리려면 우두머리를 주살하면 된다. 그것은 옥리 한 명만 맡아도 되는 일인데 왜 굳이 바깥의 장수를 부르는지 모르겠군.” 군벌을 조정에 끌어들이면 어떤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조조는 미리 알고 있었다. 하지만 원소는 남의 칼을 빌어 사람을 잡자는 작전으로 동탁을 끌어들인 것이 결국 늑대를 집안에 불러들인 꼴이 되고 말았다. 상경한 동탁은 힘을 믿고 황제까지 갈아치우려 들자 원소가 결사반대했다. 이에 동탁은 버럭 화를 내며 손을 검에 얹고 심하게 욕설을 퍼부었다.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 천하의 큰일은 내가 결정하면 그만이지 감히 네가 반대해. 너는 이 동탁의 칼이 얼마나 빠른지 시험해보고 싶으냐?” 원소도 지지 않고 맞섰다. “이 세상 천지에 설마 귀하의 칼만 빠를 것 같소?” 원소는 말을 마치자마자 물러서 퇴장했고 그 즉시로 낙양을 떠나 기주(冀州)로 도망쳤다. 동탁이 원소를 추적하여 죽일 수는 있었으나 주비(周毖)와 오경(吳璟)이 만류했다. “원소는 대세를 못 읽을 뿐이지 사실 큰 뜻은 없는 자입니다. 그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기보다는 은혜를 베풀어 고마워하게 하는 편이 났습니다. 어쨌든 원씨 가문은 4대가 삼공을 지내서 관련자들이 세상에 가득합니다.” 동탁은 이 말을 듣고 원소를 발해태수로 임명했다. 어찌되었든 이 사건을 계기로 원소는 문벌이란 신분으로 강력한 힘을 갖고 있는 군벌과 맞설 수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달고 군벌로 변신하려고 마음먹었다. 동탁이 어린 황제를 지 마음대로 갈아치우자 거국적인 반 동탁 연대가 생겨나게 되었고 원소가 연합군의 맹주가 되었다. 세력이 커지면 정치적인 욕심이 생겨나고 커지는 법이다. 원소는 한복과 따로 황제를 세울 것을 모의했고 그들이 점찍은 인물은 유주목(幽州牧) 유우(劉虞)였다. 이는 동탁이 한 짓과 다를 바가 없었으므로 조조는 극구 반대했다. 원소와 조조는 어릴 때부터 불알 친구였고 젊어서 함께 황궁의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잘 지내고 있었으나 동탁이 죽고 나서 사사건건 부딪히다가 나중에 결별하고 만다. 서로 각자의 길을 가는 것까지는 좋은데 원수가 되어 서로 죽고 죽이는 생사결단의 전쟁까지 벌이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원소가 조조에게 원한을 품은 것은 조조가 헌제를 끼고 천하를 호령하면서부터 시작 되었던 것이다. 당시 ‘천자를 끼고 천하를 호령한다(挾天子令諸侯).’는 말은 원소 측에서 먼저 지어낸 것이다. 원소의 원망을 알면서도 조조는 원소를 주목으로 임명하는 등 배려하려고 했으나 원소는 조조와의 생사결단을 내고야 마는 결심을 내린다. 한편 원소는 정치적인 감각이 한참 떨어진 인물이었다. 그 일례로 군사의 생명은 군량과 군수품인데 당시 원소의 해결책은 배고프면 약탈하고 배부르면 남은 것을 버리는 것이었다. 그 결과 군량 부족 때문에 싸우기도 전에 포기하는 자가 속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원소와 조조의 싸움에 판돈을 원소에게 거는 자가 더 많았다. 왜냐하면 조조는 출신도 그렇고 별 볼꼴이 없는 인물로 보았고 원소는 가문이 좋고 또 과거의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한 각 지방의 사대부 관료들이 대거 원소를 밀어주는 바람에 70만의 대군을 갖는 군벌로 성장하였다. 사족집단 외에도 천자를 등에 없고 천하를 호령하려는 조조의 움직임이 마음에 안 들어 좋게 보지 않고 원소에게 한 손을 들어주는 바람에 원소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관동연합군의 맹주였던 원소는 북쪽에 웅거하던 공손찬을 멸하고 기주, 청주, 병주, 유주의 땅을 소유하여 중국의 북방을 대부분 차지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사람도 많고 세력도 크며 군사도 강력해서 조조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이에 비해 조조는 무척 딱해 보였다. 그가 가진 것은 황제 밖에 없었다. 게다가 한나라 제국의 그 천자는 땅 한 뙈기, 병졸 한 명, 돈 한 푼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이 다수 사람들이 원소에게 판돈을 걸었던 것이다. 건안 5년(200) 원소와 조조의 생사결단 전쟁이 펼쳐졌다. 역사에서는 그 전쟁을 관도대전이라 부른다. 관도대전은 <삼국지>에 등장하는 3대 대전 중 하나이자 첫 번째 대전이었다. 관도대전은 원소와 조조의 역량 대비가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원소의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군사적인 작전 원인 외에도 원소의 책사였던 허유가 조조와 대화했던 말을 빌어 원소의 패배 원인을 알아보자. “원소는 첫째 자기만 알아. 일단 아랫사람을 도통 믿으려고 허지 않지. 자기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면 자초지종 설명도 하기 전에 화부터 낸다네. 둘째 아량 따위는 없어. 수장이면 아랫사람이 실수하고 그래도 때론 넓은 가슴으로 품어 주기도 하고 알고도 모른 척도 해주고 그래야 되지 않나. 그런데 사람을 구석까지 몰아세운 다음 집요하게 캐물어 한 번 실수로 목 날아간 책사들 한둘이 아닐세. 한 번은 나도 곤장 200대나 맞았어. 나중에 미안한지 200냥 주더군. 셋째 원소는 자네도 알겠지만 판단력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하다네. 공들여 지략을 짜주면 뭐하나?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을 못하는데 그래서 내가 자네에게 온 걸세.” “허허. 나도 곤장 200대 맞아볼까. 200냥 벌게.” 조조의 변죽 좋은 농담이었다. 조조는 어릴 때부터 동네에 소문이 자자한 장난꾸러기였다. 미성년자 신분에 술 마시고 저잣거리에서 여인 희롱하기를 즐길 정도였다. 물론 책도 좋아하고 다독가이기도 했지만 주로 병법서를 읽으며 그것을 직접 실험해보고 싶어 안달 나 있었다. 이에 비해 원소는 어릴 적에 주로 집에서 책만 보는 모범생이었다. 그런 그에게 조조의 자유로운 일탈은 그저 부러운 면모였다. 조조는 샌님 같은 원소를 꼬드겨 저잣거리로 끌고 나가곤 했다. 원소가 자기로 인해 본모습이 드러나는 걸 보는 게 조조의 즐거움이었다. 이 둘이 어느 하루 막 식을 올린 신부를 야밤에 납치하려던 것이 동네 사람들에게 걸려 줄행랑치는데 그만 원소가 깊은 구덩이에 빠져버렸다. 원소가 몇 번이고 탈출을 시도했지만 구덩이가 너무 깊어 나오지 못한 채 버둥대며 진이 빠져 가고 있었다. 이때 조조가 외쳤다. “신부 보쌈한 도적놈이 여기 구덩이에 있어요!” 이 소리를 들은 동네 주민들이 몽둥이를 들고 몰려오기 시작했고 깜짝 놀란 원소는 초인적 힘을 발휘하여 구덩이에서 빠져나와 젖 먹던 힘을 다해 뛰었다. 만약 조조의 꾀가 아니었다면 원소는 동네 사람들 매질에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릴 적 샌님 스타일 원소가 꾀가 많은 조조에게 밀렸듯이 어른이 되어도 역시 그 패턴이 작용한 것이 아닐까. 한편 이렇듯 송아지 친구였던 두 사람이 함께 황궁에서 일했던 사이였는데 천하를 다투는 원수로 변하였고 결국 원소가 관도대전에서 패하자 피를 토하고 말 위에서 죽었다. 만약 관도대전에서 원소가 이겼다면 역사는 유가의 패턴으로 흘렀을 것이고 조조가 이겼기 때문에 역사는 법가의 패턴으로 흘렀던 것이다. 동탁, 원소, 조조는 서로 스타일이 현저하게 달랐다. 동탁은 현 질서를 파괴하는 자였고, 원소는 공자를 닮아 옛 질서를 회복하려 했고 조조는 상앙이나 한비자를 따라 새로운 미래사회를 구축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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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28
  • [연재] 진의(秦怡)-눈물겨운 김염(金焰)과의 결혼생활⑤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김염의 탈선행위는 왕인미와의 사통관계뿐이 아니었다. 확실한 건 아니었지만 당시 진의와의 감정모순이 커가던 시기, 김염과 진의는 서로 별거생활을 하던 때가 있었다. 바로 그 시기 김염은 진의의 여동생인 진문(秦文)을 불러들였다는 풍설도 있었다. 이는 우리의 관념으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세상사는 가끔씩 이런 일도 생긴다는 것을 우리에게 귀뜸해 주는 것도 사실이다. 헌데 김염과 진의의 여동생 진문과의 관계에 대해 확실한 것은 없다는 것이 또한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해 진의는 지금까지도 함구무언이라고 한다. 이러는 진의의 생각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알 수가 없을 것이 아닌가?… 자기의 탈선행위 즉 왕인미와의 사통관계에 대해 김염은 숨기지 않았다는 것이 진의의 말이다. 그리고 진의가 김염한테 이혼하자고 제의하자 김염의 대답은 더욱 어처구니가 없었다고 한다. “나의 마음속에는 임자밖에 없어. 내가 사고를 친 건 일시적으로 방황과 고민에서 벗어나기 위한 거였어. 그리고 임자가 나와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하다면 나의 곁을 떠날 수도 있어. 하지만 이혼만은 안 돼!” 김염의 이 말은 그야말로 뻔뻔스러운 것이었으며 웬간한 여인이라면 결코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뻔뻔스러운 남자는 김염 말고는 천하에 있을 수가 없다고 진의는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진의는 김염의 부탁대로 해주었다. 당시 진의가 생각한 것은 그래도 김염의 사회상의 형상이었고 또 자녀들의 앞날을 걱정한 것도 있었다. 결국 진의는 이혼보다는 별거를 선택했다. 많은 사람들로 말하면 별거란 부부로서의 허울뿐이지 이혼이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별거로 있던 상대가 어떤 불행에 빠졌을 때 등 경우에는 부부란 그것이 아주 중요했다. 아니나 다를까 진의와의 별거 후 김염은 과음으로 위출혈이 생겨 병원으로 호송되었다. 다행히도 구급결과 생명은 건지었지만 신체는 이미 폐인이나 다름이 없었다. 걸을 수는 있었지만 몇 발자국 가지 못하고 숨이 차 헐떡거리군 했다. 한편 이렇게 되자 그제 날 김염의 술친구였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김염의 신변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렇게도 귀와 살쩜을 감빨며 친밀하던 정인들 역시 한명도 찾아와 문방하는 이가 없었다. 그야말로 추풍낙엽이 된 김염은 우정과 애정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사업능력마저 상실하였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별거한지 오래되었지만 다시 가슴이 아파하며 다가온 건 선량하고도 정을 중히 여기는 진의였다. 이미 폐인이 된 김염의 앞에서 진의는 더 이상 그를 나무람하지도, 귀찮아도 하지 않고 묵묵히 아내의 역을 맡아하면서 김염의 수발을 들었다. 어찌 보면 진의의 개인 인생은 기구하면서도 첩첩애로였다. 1962년 남편 김염이 병석에 누운 지 2년 만에 아들인 김제(金捷)마저 정신적 충격에 의해 정신분열증에 걸렸던 것이다. 이러자 진의의 어깨위에 있는 부담은 더욱 중해지기만 했다. 집에 있을 때면 두 환자를 돌봐야 했고 또한 수입내원이 끊어지면 안 되겠기에 시간만 있으면 이것저것 닥치는대로 출연무대로 찾아나서군 했다. 1983년 김염은 병고 끝에 사망하였다. 당년 상해탄의 <영화황제>로 름름하던 모습은 찾을 곳 없고 몰골만 앙상히 남은 김염은 임종 전 진의한테 “아직도 날 미워하고 저주하는가?”고 물었다. 이에 진의는 “나 진작 당신을 용서했어요. 기나긴 인생이라 혼인생활에 문제가 생기는 건 정상이죠. 지나간 일은 그냥 흘려 보냅시다”라고 했다고 한다. 세월이 많이 흐른 뒤 진의는 김염이 사망하던 당시를 회고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염이 사망한지 얼마 안 되어 한 여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는데 김염의 생전에 내가 그를 잘 돌봐주지 않았다고 책망하더군요. 그래요. 김염한테는 여인이 많았어요. 또한 여인들의 호감을 살만한 매력을 가진 사내다운 남자였고 잘 생겼지요. 나 역시 그의 탈선행위를 알면서도 그를 돌봐준 건 그젯 날 그를 따르던 애모감이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죠. 그리고 우리의 딸이 현재 한국에 있는데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참 이쁘게 잘 생겼어요…” 김염이 사망한 후 진의는 모든 정력을 아들 김제한테 쏟아 부었다. 간병인을 쓸 수도 있었으나 모성애 때문에 자신이 직접 아들의 잠자리를 봐주고 밥을 먹여주고, 화장실로 데려가 머리를 감겨주는 등 일들을 맡아하군 했다. 그렇게 고되고도 힘든 나날 속에서도 진의가 사회적으로 이룩한 업적은 놀라울 정도였다. 제1 회 중국 TV 금응상(金鹰奖) 우수 여배우상 획득 제 11 회 상해국제영화제 종신 성과 상 획득 제 27 회 중국 영화 금계 상 종신 성과 상 획득 2009년 2월 중국 부녀연합회와 인민일보 등 11개 중국 매체가 수여하는 <중국 10대 여걸 칭호> 획득 … 어찌 보면 진의의 인생은 2개의 인생이 서로 교차되는, 극히 모순되는 인생이었다. 그녀의 인생을 명암(明暗)으로 평가할 때 사회와 연예 권에서의 그녀 인생은 눈부신 활약과 더불어 명랑과 기백의 인생이었고 가정에 들어가서의 그녀 인생은 사회 최하층 생활을 하는 간병인, 가정주부와 별반 다름이 없는 인생이었다. 지금도 생존해 있는 진의 여사는 아들이 눈 감기 전에 한 말 “어머니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죽어야 한다”는 말을 되 외우며 눈물을 짓는다. 정신분열증 환자라면 이런 말을 못하겠는데 임종을 앞두고 아들 김제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고 하면서 울고 또 울고 한다. 휘황한 인생 그리고 고달프고도 기막힌 인생, 이는 영화배우인 진의의 인생을 놓고 볼 때 그 자체가 기나긴 대하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끝)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8-27
  • 함부로 여자를 건드리지 말라
    ●김희수(중국) 어릴 때 내가 살던 마을의 어느 한족 부부가 늘 싸움을 했는데 승자는 항상 아내였다. 그 시기에 조선족 여성들이 남편 앞에서 찍소리도 못했지만 한족들은 달랐다. 한족들의 경우 남자들이 아내 앞에서 찍소리도 못했다. 그 한족 부부는 싸운다 하면 동네가 떠들썩하게 싸우군 했다. 처음에는 집에서 싸우다가 아내가 매를 들면 남편은 무서워 밖으로 달아나군 했다. 나는 그 집의 아내가 남편을 밖에까지 쫓아오며 구타하는 장면을 서너 번 목격했다. 아내는 달아나는 남편을 따라잡은 후 한 손으로 남편의 멱살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남편의 뺨을 짝짝 소리 나게 때렸다. 그 시기에 한족 남자들이 아내에게 쥐여사는 공처가였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아내에게 폭행을 당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조선족의 경우 여자가 남편을 구타하는 일은 더구나 보고 죽자 해도 없었다. 그런데 개혁개방 후 세상이 달라졌다. 조선족 남자들도 아내에게 쥐여사는 과거의 한족 남자들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간 큰 남자 시리즈까지 나왔다. 반찬 투정하거나 아내에게 말대꾸를 해도 간 큰 남자가 되는 것이다. 날이 갈수록 여자들은 무섭게 변하고 있다. 1990년대에 연변에서 잠자는 남편을 도끼로 찍어 죽인 사건이 있었는데 지금도 생각하면 여자가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오죽했으면 남편을 죽였겠는가?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하고 그 여자의 입장에서 이해해 보려고 해도 그 잔인한 살인까지 용납할 수는 없다. 어느 날 퇴근하는데 한 20대의 여자가 길옆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때 지나가던 40대의 남자가 몇 초동안 그 여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담배 피우던 여자가 그 남자를 쏘아보면서 “보긴 뭘 봐?”하고 꽥 소리 질렀다. 여자의 고함소리에 겁에 질린 남자는 찍소리도 못하고 도망치듯 가버렸다. 작년의 어느 날 새벽 3시쯤에 떠드는 소리에 잠에서 깨여나 창밖을 내다보니 세 청년이 한 청년을 사정없이 구타하고 있는데 한 젊은 녀성이 곁에서 구경하고 있었다. 청년이 맞아서 반죽음이 되여서야 세 청년은 손을 떼고 가는데 그중 한 청년이 구경하던 젊은 여성을 보고 “저쯤 패주면 되니?”하고 물었고 그 여성이 흡족하다는 듯 “만족이요!”하고 대답했다. 작년의 어느 날 밤에 술자리가 끝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20대의 세 여성이 한 남성을 주먹으로 치고 발길로 차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금년 여름의 어느 날 밤에 또 한 20대의 여성이 손으로 한 남자를 가리키며 “이 아새끼, 죽여 버린다!”하고 고함치는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여자가 남자를 구타하는 건 일도 아니다. 이제는 여자가 어린이의 눈알을 뽑기도 하고 자신이 갓 낳은 핏덩이를 가차 없이 창밖으로 던져버리기도 한다. 중국에서 남편이나 동거남의 생식기를 잘라버리는 것은 희귀한 일이 아니다. 그러니 여자가 남자를 구타하는 것쯤은 여기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여자가 무섭다. 여자에게 죄를 짓지 말라. 여자를 화나게 하지 말라. 함부로 여자를 건드리지 말라. 섣불리 여자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말라. 잠을 자다가 어느 순간에 여자의 가위에 거시기가 잘리거나 여자의 도끼에 죽음을 당할지 모른다. 폭력은 남자들만의 소유물이 아니다. 여성의 지위가 높아진 오늘날에는 여자도 폭력을 휘두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남녀평등을 주장한다고 해도 여성들이 남자들과 폭력 따위를 공유해서는 안된다. 남존여비사상이 지배하던 과거에 여자들이 아무리 수난을 당했다고 해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으로 폭력을 휘둘러서는 안 되며 그런 폭력을 정당화해서는 더구나 안된다.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 해도 남자는 남자다, 여자는 여자답게 온순해야 한다, 이런 뜻이 아니다. 남자가 담배를 피운다고 해서 여자도 평등을 주장하며 같이 담배를 피운다면 자신의 건강만 해칠 뿐이다. 마찬가지로 남자가 폭력을 휘두른다고 해서 평등을 주장하며 같이 폭력을 휘두른다면 결국 감옥행, 자신만 해칠 뿐이다. 그럼 여자들보다 10배, 100배는 더 많고 악렬한 남자들의 천인공노할 폭행은 묵과해도 좋단 말인가?! 단죄하려면 남자들부터 단죄해야 할 게 아닌가? 그래서 하는 말이다. 남자들의 폭행은 더없이 잔인하고 악렬하기에 본받지 말라는…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20-08-23
  • 민족문화에 대한 긍정적 사고
    ●김인섭 중국의 개혁개방에 가속이 붙은 가운데 조선족 인구 감소는 여전히 현재진행형 일로를 걷고 있다. 이 현상을 두고 중국 정부는 의사일정에 상정시킨 지 오래고 여러 사회조직들과 수많은 지성인들이 부동한 분야에서 관심을 쏟고 있지만 뭇사람들은 막연히 지켜볼 뿐이다. 인구 급감으로 하여 많은 민족 관련 정책과 조치들이 늘 효과 반감이 되면서 민족자치지역의 존폐까지 의심하는 쑥덕공론 소문도 들려온다. 그러나 그 갈음으로 민족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이중 언어를 위시한 민족문화 무게가 더해지는 것이다. 현재 나타난 조선족 인구는 통계상의 수자로서 인구구조에서 혈연적으로 조선족이지만 민족교육을 이탈 하였거나 민족어를 상실한 인구는 반영하기 어렵게 되여 있다. 이들은 아직도 실질적 조선족으로 남았지만 민족문화생활이 어려운 상당수의 부류이다. 허나 민족문화가 아직 몸에 배어 있으면서 민족문화 완전 이탈의 한계선을 밟고 좌우동(左右动)하는 세대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엄연히 직시해야 할 중대 사항으로서 전사회가 염두에 두고 하나의 중요 과제로 삼아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의 민족교육 정책 수립에는 일반적 민족교육, 문화이탈의 방지, 산재인구의 문화교육, 여가의 문화교육, 탈 민족문화 가능의 동아리들에 대한 문화교육이 병행하는 대책을 세워야 하고 문화문맹들을 민족문화 반열에 복귀시키는 복합적 시책이 마련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은 조선족 문화인구의 실질적 감소를 억제하는 조치로서 인구감소를 방지하는 중요한 대비책이 된다. 인구의 절대적 감소와 민족문화 이탈로 민족사회는 공동체의 공동화, 민족교육의 위축, 민족문화 쇠락이라는 3중 위기를 맞고 있다. 이것은 사회 발전에 따른 시대적 아픔으로 봐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적극적으로 그 발생을 최소화하고 미래지향적 전략을 펴야 한다. 지금 시급한 것은 아이들을 인위적으로 타민족 학교에 진학시키거나 또 교육 환경의 부족으로 아이들이 민족교육에서 제외되는 현상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이것이다. 조건이 구비되었음에도 아이들을 민족문화와 격리시키는 단 시적 행위와 어쩔 수 없이 후대의 민족교육을 포기하는 이 두 과제는 민족사회의 존속에 직결되는 중대사로서 장기적이고 치밀한 사업이 필요한 것이다. 오늘 세차게 일고 있는 제4차 산업 혁명은 바야흐로 지능화 시대를 당겨오고 있다. 매개인은 자기의 개성과 장점을 키우며 자기만의 정체성을 가진 플랫폼(平台)을 만들어야 한다. 이것은 변혁의 혼돈 속을 무난히 통과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 그렇다면 거기에 가장 필요한 정보력, 사고력, 팀워크(团队合作) 력, 리더십(领导力) 등 기질을 육성하는 데는 민족문화가 가장 적합한 정신 인프라(基础设施)라는 이 긍정적 인식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새 시대에는 고학력이나 고 학위가 아니라도 여러 문화 터전에서 원활한 교류를 진행할 수 있는 유연한 정서 지능을 지닌다면 어느 분야에서 최고로 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게 될 뿐만 아니라 적어도 생계 걱정을 해소할 수 있다. 한족과 조선족 이중 문화가 생존과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는 이 우세는 조선족만의 우수한 민족성이다. 우리 조선족은 나라에 기여하면서 중한 교류의 교두보 작용을 발휘하였고 민족사회도 발전시켜왔는바 이것은 우리 민족문화를 긍정할 수 있는 충족조건이 된다. 그런데 인구의 절대적 감소와 대량의 후대가 민족문화를 이탈한 결과로 인재 공급이 수요를 따르지 못하는 수급 모순(需给矛盾)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이것은 인재의 양적 부족과 민족문화 수준의 저하라는 이중 부족 현상이 가져온 직접적 결과이다. 이것을 효용가치라는 측면에서 고찰한다면 민족문화와 민족 인재의 희소성 가치가 급등한다는 반증인 것이다. 인간은 교류 기능이 능란하고 범위가 넓을수록 더 보람 있는 삶을 영위하게 된다. 때문에 우리는 민족문화의 수용 능력, 자정 능력과 창조 능력을 지속적으로 키워야 한다. 기성세대는 후대들에게 민족문화의 길을 개척해 주기 위하여 물심양면의 노력을 쏟아야 한다. 진입 가능한 문화 세계가 넓다는 의미는 목표 선택에서 선택지가 많고 성공 확률이 그만큼 높아진다는 현실적 가능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조선반도(한반도) 남북과 동시에 교류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조선족만의 지정학적 강점으로서 반드시 반도의 평화 추세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불원한 장래 이 시대가 오면 조선족 사회는 새로운 전기를 맞아오게 된다. 그렇다면 민족사회 위기는 전화위복(转祸为福)이 되여 새 번영을 이룩하는 천재일우(千载一遇)의 호기로 되리라 확신하는 바이다. 전제는 민족문화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확립하고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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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고
    2020-08-23
  • [연재] 진의(秦怡)-눈물겨운 김염(金焰)과의 결혼생활④
    ▲김염과 왕인미.ⓒ인터넷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왕인미는 1914년 호남 장사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녀의 부친 왕정권(王正权)은 일명의 교사로서 지식이 연박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 고귀한 것은 사상이 아주 개명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왕인미한테 몇 명의 언니가 있었지만 왕정권은 딸들에게 전족(裹脚)을 강요하지 않았으며 지어는 보모로 들어온 어멈까지도 발이 큰 여인이었다. 그리고 왕인미의 모친 역시 자상하면서도 엄한 민국의 여인이었다. 왕인미가 7살 되던 해 셋째 오빠가 몰래 밖에서 노름을 하다가 모친한테 발각되었는데 원래 몸에 병이 있는데다 아들이 노름을 하는 것을 본 모친은 너무 큰 충격을 받은 탓에 아들의 귀쌈을 세 번 때린 후 그 자리에서 쓰러진 것이 그냥 사망되고 말았다고 한다… 왕인미는 바로 이른 가정의 환경에서 자랐던 것이다… 1934년, 왕인미는 채초생 감독이 찍은 영화 <어광곡(渔光曲)>에서 여 주인공을 맡은 한편 영화의 주제가를 불러 전반 상해탄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고금중외로 연예권에서 관중들을 정복한 여 스타가 탄생하면 이에 뒤따르는 건 당연히 애정거리가 화제로 되기 마련이었다. 왕인미 역시 마찬가지었다. 당시 그녀가 추구한 남자는 바로 당시 상해탄 연예권에서의 풍류남아 김염이었다. 기실 왕인미는 명월가무단에서 가수로 활동할 당시 김염과 합작하여 영화촬영을 한 적이 있었고 당시 김염은 그녀에 대해 아주 호감을 보이기도 했다. 남자는 <영화황제>이고 여자는 <영화여왕>이라 둘은 아주 빨리 애정의 소용돌이 속에 말려들어 갔다. 헌데 왕인미의 가정에서 김염이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반대할 줄이야. 하지만 왕인미는 김염이 아니면 그 누가한테도 시집가지 않겠노라며 버티었다. 지어 그녀는 신문에 글을 발표하여 “김염은 중국인이 아니지만 독립사상으로 충만된 청년이다. 때문에 난 나라를 잃은 망국자와 결혼할지언정 절대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적과는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렇게 되어 왕인미는 결국 김염과 단란한 가정을 뭇게 되었다. 결혼 후 왕인미한테는 두 가지 선택이 기다렸다. 하나는 예전처럼 계속 연예 권에서 활동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집안 살림에 충실하면서 현모양처로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가정교양의 영향으로 독립자주의 의식이 비교적 강한 왕인미는 결혼 뒤에도 여전히 자기의 두 손으로 생활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 진보단체인 대붕극단(大鹏剧社)과 계약을 맺았고 또 미군 타자원으로 활동하려는 생각도 하였다. 이에 남편 김염은 견결히 반대하였다. 결국 왕인미는 김염과 타협하여 극단과의 계약을 해제하고 전심전의로 가정에 충실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결혼생활이란 일방의 희생으로 원만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결혼 후 얼마 안 되어 왕인미는 임신하였다. 임신초기 여러 가지 활동으로 태아가 위험해지게 되자 그녀는 병원에 입원하여 태아가 안전하게 들어앉기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유감스러운 것은 그녀가 병원에서 아기를 출산할 때까지 김염은 겨우 한번 그녀를 보러 온 것이었다. 이는 그녀한테 큰 상처를 남기었다. 그리고 더욱 상심이 큰 것은 아이가 조산하여 8일 만에 요절한 것이었다. 이는 김염과 왕인미의 결혼생활에 어느 정도 결렬이 생기게 했다. 그 뒤 둘은 언짢은 일 같고도 자주 다투었으며 결국 1944년에는 이혼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혼당시 둘은 격렬한 다툼도 정면적인 소통도 없이 그냥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고 말았다. 기실 당시 왕인미한테는 이혼은 하였지만 김염에 대한 미련마저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다. 헌데 김염은 그것이 아니었다. 얼마 안 되어 김염은 왕인미에 대한 모든 미련을 버린 듯 재차 다른 여인과 결혼해 버렸다. 그것도 같은 연예권의 동료였고 거기에 왕인미보다 훨씬 젊었으며 당시로는 연예 권에서 한창 잘 나가는 진의와 결혼했던 것이다… …… 한편 그 때로부터 10년이 흐른 뒤 왕인미도 엽전예(叶浅予)란 남성과 결혼하였다. 헌데 두 번째로 결혼한 여인은 늘 알게 모르게 원래의 남자와 현재의 남자를 비교해보는 습관이 생기게 되는 법이다. 하다면 두 남자를 비교해 볼 때 두 남자 모두 사업을 첫째로 놓는 건 같았지만 김염은 직설적이었고 엽전예는 은폐적이었다. 특히 엽전예는 왕인미와 지향하는 세계관이 부동했으며 심지어 생활습관마저 각각이었다… 둘은 상대와의 정감세계에서 점차 서로 멀어져 가면서 방황하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럴 즈음, 왕인미는 김염 역시 진의와의 결혼생활이 윤탁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비록 다시 결합하지는 못하더라도 김염과 왕인미의 옛정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가정적 환경이 주어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편 김염의 탈선행위는 왕인미와의 사통관계뿐이 아니었다. 확실한 건 아니었지만 당시 진의와의 감정모순이 커가던 시기, 김염과 진의는 서로 별거생활을 하던 때가 있었다. 바로 그 시기 김염은 진의의 여동생인 진문(秦文)을 불러들였다는 풍설도 있었다. 이는 우리의 관념으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세상사는 가끔씩 이런 일도 생긴다는 것을 우리에게 귀뜸해 주는 것도 사실이다. 헌데 김염과 진의의 여동생 진문과의 관계에 대해 확실한 것은 없다는 것이 또한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해 진의는 지금까지도 함구무언이라고 한다. 이러는 진의의 생각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알 수가 없을 것이 아닌가?…(다음에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8-23
  • '삼국지' 재해석④ 황건적(黃巾賊)의 난
    ●김정룡(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장) 중국역사를 살펴보면 왕조가 교체될 따마다 농민봉기가 있었다. 그 중에는 성공한 봉기도 있었고 실패한 것도 있기 마련이다. 봉기가 성공하면 혁명이요, 실패하면 역모다. 또 봉기를 이끈 지도자들은 성공하면 영웅이요, 실패하면 역적이다. 또한 성공하면 봉기라 부르고 실패하면 ‘난(亂)’이다. 불순한 동기와 목적으로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게 했다는 뜻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후한 말기에 있었던 황건적의 난이다. 황건적의 난은 후한 말 여러 전란 중에 가장 큰 전란이었다. 30만의 대군에 대륙의 반을 휩쓸었으니 규모가 어마어마해서 한정권(漢政權)이 매우 위태로울 지경에 이르렀다. 그들은 왜 목숨 걸고 난을 일으켰을까? 앞서 후한 말기 환관들이 천하를 호령했다는 당시 상황을 언급하긴 했는데 여기서 그들의 만행이 어느 정도였나는 데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영제 때 환관 중 최대 실세인 장양이란 자가 있었다. 이 자가 영제의 신임을 어느 정도 받고 있었느냐면 황제가 일개 환관을 아버지라 불렀다. “황제 폐하, 나라 곳곳에 흉흉한 얘기들로 가득 차 뒤숭숭하기 그지없습니다. 암탉이 수탉으로 변한다는 기이한 현상까지 생겨나서 이런 불길한 일들로 백성들이 불안에 떨고 있어 민심이 말이 아니옵니다.” 상소문을 한 보따리 안고 황제를 알현한 관리의 말이다. “아니 별 일 다 보겠네.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든 수탉이 암탉으로 변하든 그게 짐과 무슨 상관이더냐. 그렇지 않습니까, 아버지?” 영제는 천하의 흉흉한 민심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황제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환관 탓이었다. “네, 황제 폐하, 위대하신 하늘의 아들이신 천자 폐하께서 들을 얘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황제가 다른 일정이 있다면서 자리를 뜨려하자 우직하고 충성스런 관리가 죽을 각오로 머리를 바닥에 박으며 또 한 마디 간언했다. “하늘의 아들이시라면 제발 이 나라를 돌봐 주소서! 폐하의 아버지는 저 간사한 환관 놈이 아니라 하늘이시옵니다! 하늘이 땅을 굽어 살피듯 천자께서 백성들을 굽어 살피는 것이 순리이지 아니옵니까? 가난과 수탈에 허덕이는 이 나라가 보이지 않습니까? 제발 저 요사한 환관들을 멀리 하시고 들어야 할 것을 똑 바로 들어주시옵소서.” 곁에서 시무룩하게 듣고 있던 환관 장양이 사악한 맘의 결정을 내린다. “황제 폐하, 또 다른 역적의 무리일 뿐입니다. 저들은 폐하가 행복한 것을 눈 뜨고 보질 못합니다. 처벌하시지요.” “아버지께서 알아서 하세요.” 충성스런 관리는 곧 끌려 나가 참수 당했다. 당시 장양은 천자를 끼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의 집 앞에는 날마다 뇌물을 싣고 온 가마들이 줄지어 있었고 가마가 없는 자들은 뇌물이 가득 든 보자기 꾸러미를 들고 찾아왔다. 뇌물을 바치는 목적은 관직을 사기 위함이었다. 당연히 뇌물의 값어치에 따라 관직 등급이 달랐다. 심지어 관직을 외상으로 파는 일까지 있었다. 어느 한 번 가산을 몽땅 털어 갖고 온 한 젊은이의 뇌물이 눈에 차지 않자 장양이 잔머리를 굴린다. “내가 자네 관상이 마음에 들어서 말이야. 정말 아무에게나 주지 않는 기회이지만 하나 방법을 마련해 주겠네. 외상으로 관직을 사게. 물론 갚을 때는 원래 값보다 두 배로 갚아야 하지만 걱정할 필요 전혀 없어. 그 정도는 백성들에게서 충분히 빨아낼 수 있네. 어때 할 수 있겠나? 낙양에 근사한 자리 하나 줌세.” 변변치 않는 뇌물을 들고 온 젊은이는 지옥에서 천당에 옮겨진 듯 갑자기 세상이 훤히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매관매직이라는 비리를 해 먹다 못해 싹수가 보이는 젊은이에게 외상으로 관직을 팔아먹는 일까지 있었으니 그들의 부정부패는 실로 가지가지였다. 후한 말기는 장양을 비롯한 환관들의 전성기이자 전횡기였다. 환관들은 일족이나 양자를 관리로 중용하고 관료나 호족과 결탁하여 중앙이나 지방의 관계에 세력을 확장함으로써 정권을 독점했다. 그들은 뇌물을 받고 부정한 선거로 관리를 등용하였으며 백성들에게는 혹독한 가렴주구로 일관하여 호화 방탕한 생활을 일삼게 되니, 부정과 부패가 사회에 만연했다. 이것이 결국 황건적의 난을 불러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장각(張角)이라는 선비가 있었다. 관직 등극에 실패한 그는 매일 산에 올라 약초를 캐는 것으로 세월을 죽이고 있었다(요즘 대한민국 역사 강의자로 가장 ‘주가’가 높은 설민석 선생은 자신이 지은 <삼국지>에서 ‘장각은 과거시험에 실패한 선비출신’이라고 했는데 당시는 과거시험이 없었고 관직은 효와 예를 바탕으로 하는 윤리도덕을 갖춘 선비들이 천거(薦擧)에 의해 등용되는 것이 제도였다. 환관들이 이 제도를 무시하고 매관매직했으며 진짜 과거시험은 수나라 때 수 문제에 의해 창설된 관리 선발 제도였다). 장각은 어느 날 산에서 남화노선이라는 산신령을 만난다. 산신령은 그에게 책 한 권을 준다. “이 책으로 도술과 신통력을 익혀 좋은 곳에 쓰게나. 만약 나쁜 쪽으로 쓴다면 세상이 뒤집어질 것이니 명심하오.” 책 제목은 ‘태평요술’이다. 장각은 태평요술을 익혀 바람과 무술을 관장하는 도력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낭야(산동성)의 우길(于吉)이 창시한 것을 이어받아 부수주설(符水呪說)로 질병치료를 행하여 민심을 얻었다. 장각은 <대현량사(大賢良師)>라고 자칭하고 병자에게 죄의 참회를 구하고, 돈이나 영수를 마시게 하고 주문을 외워서 신의 용서를 청하는, 그런 방법으로 포교를 했는데 십 수 년 사이, 신자는 중국 동반부의 넓은 지역에 걸쳐서 수십만 명에 이르고, 36의 <방(方)>이라고 하는 집단으로 조직되었다. 대방(大方)은 1만여 명, 소방,(小方)은 6000~7000명인 이 조직을 만들었다. 장각이 만든 이 조직을 태평도라 불렀다. 장각은 어떻게 짧은 시간 동안 30여 만이 되는 신도를 모을 수 있었을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환관의 천하가 된 조정은 백성들의 삶을 살피지 않아 그들은 정권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태평도를 유일한 희망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아울러 태평도는 말 그대로 세상을 균등하고 평화롭게 한다는 뜻이므로 이것이야말로 백성들이 원하는 바였기 때문에 인기가 높았다. 둘째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궁핍한 백성은 주머니 사정 때문에 병이 나도 병원을 찾지 못하고 민간요법에 의한 치료가 매력적이어서 이에 몰리기 마련이다. 태평도가 바로 이 역할을 했다. 같은 시기 서방의 파촉 및 한중 지역에서 발전한 오두미도(五斗米道)가 삽시간에 들불처럼 번져 세력을 확대해가고 있었는데 좌절과 실의에 빠진 농민들 사이에서 태평도(太平道)와 오두미도의 광신도가 되었다. 신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정치적인 욕심이 생겨난 장각은 184년에 황건적(黃巾賊)의 난을 일으켰다. 장각이 이끈 이 태평도의 각 지부가 군사조직으로 전환되어 일어난 대규모 농민봉기이다. 중국의 전통적 오행설에 의하면 불에서 흙이 생성된다. 이들은 화덕(火德)에 해당하는 한나라는 곧 몰락하고 이어서 토덕(土德)에 해당하는 황건의 세상이 다가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머리에 새 세상을 상징하는 황색의 띠를 동여매었다. 치밀한 사전계획에 의해 한꺼번에 36만이 봉기한 이 전대미문의 항쟁은 들불처럼 광대한 지역에 번져나갔다. 장각은 천공(天公)장군이라고 하고, 아우인 지공(地公)장군 장보, 인공장군 장양과 함께 반란의 지도자가 되었다. 황건군은 그해 가을 주모자 장각이 죽고, 동생 장량, 장보 또한 전사하는 등 유능한 지도자를 잃고 주력군이 쇠미해졌으나, 각지에서 약 30년간 끈질긴 항쟁을 벌였다. 대규모 농민봉기에 봉착한 지배층은 즉시 권력투쟁을 중지하고 당고를 해제하는 등 호족세력을 무마하여 항쟁의 진압에 안간 힘을 썼으나, 유명무실한 왕조체제를 유지할 뿐이었다. 목적이 좋다한들 결과가 좋다는 법은 없다. 장각이 이끈 태평도, 정부 입장에서 말하는 황건적의 난은 1851년 홍수전이 이끈 태평천국운동처럼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농지의 균등 분배, 남녀평등, 사회 악습의 철폐 등 구호를 내세운 태평천국운동은 초기 대중의 열렬한 지지를 얻어 성세호대 하였다. 남경에 정부를 세운 이후 승리에 도취되어 기강이 해이해졌고 따라서 금욕정신을 제창하던 홍수전은 황제로 등극하고 전통왕조와 다를 바 없는 정치를 펼치려 하였고 그를 따르던 무리는 백성의 지지를 받고 나서 돌아서서 백성을 수탈하는 짓을 서슴지 않았다. 14년 세월을 가다보니 중도에 초심을 잃은 것이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장각의 태평도도 홍수전의 태평천국처럼 출발은 좋았으나 30년이나 가는 도중에 백성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나쁜 조직으로 변질되었고 내부 조직이 권력다툼으로 와해되어 결국 실패하게 된다. 이것이 태평도의 실패에 있어서 주관적인 원인이라면 외부세력의 저항도 만만치 않아 와해를 앞당기게 된다. 외부세력이란 진압군이다. 옛 유비의 스승이었던 노식과 황보숭, 주준 등 3명의 장수가 황건적과의 전투 부대로 편성되고 조조도 기도위에 임명되어 황건적 토벌에 나선다. 한편 강동의 손견도 하비에서 부하 황개, 한당, 정보, 조무와 함께 1500명의 군대를 이끌고 토벌에 참여한다. 그리고 유주의 탁현에서는 유비가 장비, 관우와 함께 의형제를 맺고 수백 명의 장정들을 모집했는데 모집된 용사 500명을 이끌고 황건적 토벌에 나선다. <삼국지>는 후한 말기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서술하고 나서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가 도원결의를 맺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이들은 황건적 난에 맞서 싸우려는 결의를 다지는 것이다. 황건적의 난은 진압되고 만다. 하지만 그 근간인 태평도는 오두미도와 함께 도교 형성의 토대가 된다. 무슨 말이냐면 본래 공자의 유학이 한 무제 때 동중서에 의해 통치 이데올로기가 되면서 유교로 되었고 노자의 도학은 이렇게 후한 말기에 이르러 태평도와 오두미도에 의해 도교로 변화되어 왔던 것이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8-16
  • [연재] 진의(秦怡)-눈물겨운 김염(金焰)과의 결혼생활③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진의와 김염이 결혼하자 모든 친구들이 진의를 대신하여 기뻐해 주었고 진의 또한 이전 혼인의 음영에서 벗어나 진정한 남자다운 남자를 만났다고 내심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런데… 김염의 나쁜 습관은 결혼 첫 날부터 드러났다. 결혼식 날 김염은 입이 비뚤어지도록 술을 마셨고 흐트러지게 만취상태가 되었으며 집안 바닥의 여기저기에 토해놓았다. 이러자 진의는 만취한 김염을 달래어 침대에 눕게 하는 한편 난장판이 된 방안을 수습하느라 진땀을 뺐다. 아니 이보다는 심리상의 불안이었다. 전 남편 진천국이 주정뱅이더니 김염도 같은 <술 귀신>이 아닐까? 그녀는 김염만은 진천국 같은 남자가 아니기를 맘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비록 마음속으로는 불안했지만 필경은 신혼이라 진의는 이러한 불안은 피면할 수 없으며 앞으로의 결혼생활은 보다 많은 아름다운 여정이 있을 것이라고 희망했다. 그런데 결혼 후 김염과 같은 방안에서 생활하면서 시간이 길어질수록 진의의 실망은 점점 커가기만 했다. 왜냐하면 김염은 거의 매일 밤마다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는 날이 밝을 녘에야 집으로 돌아 오군 했으며 또한 그럴 때마다 인사불성이 되군 했다. 진천국보다 더 심했지 조금도 나은 점이 없었다. 진의는 어릴 적부터 대 봉건적인 가정에서 자랐기에 여자로서의 어느 정도 인내심이 있었고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묵묵히 모든 것을 참으면서 이한 가정을 잘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아울러 자녀 1남 1녀를 낳기도 했다. 한편 김염은 아주 출중한 인재로서 한시기 전체 상해탄을 휩쓸었던 영화황제이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만 해도 술 마시기를 즐기는 것 외 김염은 다른 흠집이 크게 없었으며 진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나이인 것만은 분명했다. 적어도 자기의 자식을 남한테 주려고 한 진천국보다는 인격상 고상하다고 점찍을 수 있었다. 또한 진의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남자의 스타일은 진천국보다는 김염같은 어딘가 고집은 세지만 떳떳한 그런 사나이 스타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진의는 가정과 사업을 따로 생각하는 여인이었다. 결혼생활이 그닥 이상적이 되지 못하자 그녀는 사업에 일심의 정력을 몰부었으며 해방 후 그녀가 출연한 영화들을 보면 그녀의 출중한 연기력을 충분히 실감할 수 있었다. 진의는 1961년 중국의 <22대 영화스타> 평의에서 제12위로 입지를 굳혔으며 또한 그 때 그녀의 나이는 39세로 더욱 휘황한 앞날이 기다려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 당시 이 50살을 넘긴 김염은 여전히 낡은 시대의 생활방식을 고집, 술을 마시고 집에서 꽃을 가꾸고 강아지를 키우는 등으로 남들이 보는 시선이 그닥 곱지를 아니했다. 그리고 가끔씩 성격이 조폭하여 남한테 미움을 사기도 했으며 점차 그 누구도 그와 합작촬영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진의는 자주 김염한테 그런 자본주의 시대식 생활방식을 버리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자존심이 강한 김염은 외부로부터 오는 시선 때문에 자기의 생활방식을 고치려고는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당시 사회의 환경에서 김염의 이런 아집은 자아고립을 자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 인간은 주어진 환경에 적당히 어울릴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이렇게 환경에 어울리지 못한 김염은 자연적으로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렇게 되니 그의 인생은 피곤했으며 한편 김염 또한 자신의 인생에 위안이 될 수 있는 돌파구를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 돌파구가 과연 무엇이었을까? 바로 이런 시기에 김염의 인생에는 그의 본처 왕인미(王人美)가 다시 뛰어들었던 것이다. 거기에서 김염이 왕인미를 불러들였느냐 아니면 왕인미가 김염을 유혹했느냐 하는 것은 그닥 중요하지 않았다. 당시 진의는 사업이 한창 분망한 시기라 늘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촬영을 하였기에 부부 사이에 교류하는 시간이 갈수록 적을 수밖에 없었으며 남편 김염의 신변에서 일어난 변화에 대해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는 터였다. 그러다가 타인의 입을 통해 김염의 탈선행위를 알게 되었을 때 진의가 받은 충격은 클 수밖에 없었다…<다음에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8-15
  • 민족과 모국어에 대한 생각을 말한다
    ●김호웅(연변대학조한문학원교수) 요즘 인터넷을 달구고 있는 <<안티 이오스와 조선족>>(최학송, <<안티 이오스와 조선족>>, 길림신문, 2019.3.4.)이란 글과 <<우리말 굳이 배워야 하나>>(대가 숲을 이룰 때, <<우리 말 굳이 배워야 하나>>, zhixinzhe512.)라는 글을 읽었다. <<우리말 굳이 배워야 하나>>의 작자는 <<안티 이오스와 조선족>>라는 글에서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안티 이오스 장군의 이야기를 통해 연변을 비롯한 조선족 공동체의 붕괴 또는 부재를 기성사실화하고 있다. 안티 이오스는 천하의 장사였지만 대지에서 발을 떼는 순간 힘이 빠져 웬만한 상대에게도 번쩍 들려 바다에 처박힌다고 한다. 조선족 사회도 대지를 떠난 안티 이오스가 되어 버렸으니 우리 족보와 같은 것들을 일찌감치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에 저장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조선족 공동체 재건을 위한 움직임이 들불처럼 타오르는 마당에 이런 말을 하는 친구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오늘은 주로 <<우리 말 굳이 배워야 하나>>라는 글에 대해 토론하고자 한다. 이 글은“누구도 같은 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 두 번 발을 담글 때 강은 같은 강이 아니고, 그도 같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라는 고대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리투스의 만물류전(万物流转)의 사상에 철학적 근거를 두고 있다. 하지만 역사는 반복되며 역사는 오늘의 거울이 된다는 진리도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산해관이남의 대도시에 자리 잡은 젊은이들이 그 옛날 선비족(鲜卑族)처럼 강세문화 속에 깊이 들어가 스스로 발을 빼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전철을 밟지 않을까 생각한다. 선비족은 옛날 북방에서 우리민족과 이웃해 살았고 종횡무진으로 맹활약을 했다. 그들은 선후로 10여개의 나라를 건립했고 중국의 절반 강산을 통치했다. 하지만 오늘 중국의 56개 민족 중에는 선비족이 없다. 지금 선비족의 일부 후예들이 시버족(锡伯族)이라는 이름으로 신강, 요녕성과 길림성의 일부 지역에 남아있다만 그들은 이미 망망대해와 같은 중국에서 창해일속과 같은 존재로 되여 버렸다. 물론 <<우리 말 굳이 배워야 하나>>의 작자는 자신의 절실한 체험을 통해 산해관 이남의 대도시에 있는 조선족 젊은이들의 고충을 대변하고 있다. 현지에 조선족 유치원이나 소학교가 없으니 자녀를 다른 민족의 유치원이나 소학교에 보낼 수밖에 없다고 한다. 설사 가정교육을 통해 우리말과 글을 배웠다해도 초급중학교, 고급중학교에서 대학교까지는 어차피 한어를 써야 하고 한어의 수준여하가 학업성적과 졸업배치를 좌우지하게 된다. 그러니 어차피 다른 민족의 유치원이나 소학교에 자녀를 입학시키는 게 현명한 처사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절해고도와 같은 상황에서도, 디아스포라로 천애지각을 떠도는 경우에도 자식들에게 모국의 언어와 문화를 가르쳐준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유태인이 그러하고 중국인이 그러하지 않습니까. 제가 <<새는 좌우 두 날개로 하늘을 난다>>(김호웅, <<경계의미학과창조력>>, 연변인민출판사, 2019년 판.)라는 글에서 사례로 든 연변대학의 유일한 러시아인교수 다위도브선생의 자녀들이 그러하고 한국대전의 홍문장 중화요리집주인 왕 씨네 자녀들이 그러하다. 이중언어 구사 능력을 글로벌시대의 중요한 자본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대도시에서 끝끝내 자식들을 모국어를 아는 사람으로 키워냈다. 자식들에게 모국어를 배워주자면 적어도 자식을 가정에서나마 모국어환경에 노출시켜야 하는데 이는 우리 젊은 부모들의 목표와 의지여하에 달린 문제이다. 우리 젊은 부모들이 가정에서 중국어로 대화를 하기 때문에 자식을 모국어도 모르는 사람으로 만드는 이다. 그런데 <<우리 말 굳이 배워야 하나>>라는 글을 보면 논리적으로 앞뒤가 서로 모순이다. 전반부에서는“이제 우리와 조선어의 관계는 가부장제혼인에서 벗어난 자유연애가 되는 셈”이라고 했다. 그러나 후반부에 와서는‘엄마의 언어’즉 모국어의 가치와 문화의 다양성에 대해 강조했다. 참으로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모국어를 버리고 다른 언어를 배우는 게 바람직하다는 말인지, 아니면‘엄마의 언어’모국어를 배워야 한다는 말인지 앞뒤가 서로 모순된다. 하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작자의 논지는 분명하다.‘강물’이 바뀌었고‘사람’도 바뀌었다는 것이다. 즉 세상이 변한 것만큼“누구도 우리에게 민족주의를 강요할 권리가 없으며 더욱이 우리 자녀들에게‘민족’을 부담으로 넘겨줄 필요는 없다”, “민족주의를 벗어날 때 우리는 자유로운 영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주체성을 잃고 주류문화에 두 손을 들고 나앉은 사람들, 달갑게 주류문화에 동화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민족이란 역사성을 띤 개념이요, 민족주의 역시 모든 역사단계에서 다 부정해야 할 명제가 아니다. 민족이란 개념을 두고 많은 견해들이 대립, 충돌하고 있다. 원초론과 근대론이 대표적이다. 스딸린은 원초론적 관점에서 민족이란 역사적으로 형성 되였으며 공통의 언어, 공통의 지역, 공통의 경제생활 및 공통의 문화생활에서 보여준 공통의 심리자질을 가진 안정된 하나의 공동체라고 하였다. 하지만 베네딕트앤더슨은 민족은 근대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생겨난 역사적 구성물로서 그것은‘상상의 공동체’라고 하였다. (베네딕트앤더슨 저, 윤형숙 역, 〈상상의 공동체〉, 나남, 2003.) 앤서니스미스 같은 학자는 원초론과 근대론의 종합과 절충을 시도했지만 본질적으로는 원초적 요소에 기반을 둔 근대적 민족을 강조했다. 즉“민족은 공간적으로 위치 지어진 과거를 공유하는 전통을 기반으로 형성된 집단적 정체성”을 그 표지로 한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민족은 근대에 와서 갑자기 나타난 이 아니라 근대 이전의 시간 속에 뿌리박은‘손에 잡히는 민족정체성’의 재료로부터 구성된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에는 신화의 공유뿐 만아니라 역사적 기억의 공유가 있고 언어적, 문화적 전통의 공유라는 요소들이 있다고 하였다.(앤서니스미스 저,이재석 역, <<민족과 인종의 기원>>, 그린비, 2018.) 민족이란 이렇게 숙명적인 존재인가 하면 또 오랜 세월을 거쳐 그 구성원들의 삶의 둥지로, 운명공동체로 되여 왔다. 하기에 이어령선생은 민족은 옷처럼 추우면 입고 우면 벗어던지는 그러한 편의적인 존재가 아니라 잘리면 병신이 되는 손과 발과 같은 소중한 존재라고 하였다. 민족공동체를 잃었을 때, 자기의 민족적정체성을 확인할 없을 때 인간은 무서운 고통과 고뇌를 경험하게 된다. 조선왕조 인조왕시기 연경(燕京)에 파견 되였던 사신들이 이러한 아픔과 치욕을 경험한바 있고 알제리인의 후예이며 마르티니크 출신인 프란츠파농(1925~1961)이 이러한 아픔과 고뇌를 경험한바 있다.(프란츠파농 저, 이석호 역, 〈<은 피부 하얀 가면>>, 인간사랑, 1998.) 또한 김사량의 단편 <<뱃속으로>>, 이창래의 장편<<영원한 이방인>> 허련순의 장편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까>>에 오는 주인공들이 그러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민족이 보존되고 그 민족이 강해야 그 구성원은 안정된 삶을 살 수 있고 사람답게 살수 있다. 민족 또는 민족국가를 잃었을 때 우리는 창씨개명, 치발역복과 같은 치욕을 받아야 했다. 민족이란 이처럼 소중한 이기에 우리 민족의 선열들은 민족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자기의 목숨마저도 서슴없이 바쳤다. 우리 조선족의 선인들도 중국의 자유와 해방, 모국의 국권회복이라는 이중 역사사명을 짊어지고 피 흘리고 목숨을 바쳐 싸웠다. 봉오동전투, 청산리대첩은 연변 땅에서 일어났고 우리의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들은 항일부대의 주요한 성원들이였다. 이러한 민족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우리 후세들에게 가르칠 필요가 없고 공연히 우리 자식들에게‘민족’이란 부담을 떠넘기지 말아야 한다니 이게 말이 될까? 민족과 언어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언어는 사물에 이름을 부의하고 불명확한 상황을 명료하게 정리하며 애매모호한 대상을 분명하게 규정해주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1889~1976)는 언어와 세계의 관계에 대해 "언어는 존재가 드러나는 장소다. 언어를 어떤 장소라고 한다면 존재는 그 안에 거주한다. 고 하면서 언어를‘존재의 집’라고 했다. 즉 모든 사물은 언어를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고 보존할수 있다. 이처럼 언어는 민족의 역사를 담는 그릇이요, 민족의 얼을 담는 항아리이며 한 민족을 다른 민족과 구별짓는 가장 중요한 징표다. 하기에 외솔 최현배(1894~1970)선생은 "우리 말과 글은 우리의 얼”이라고 했고 당신에게는 "한글이 목숨”이라고 했다. 언어는 민족구성원들간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으로 될 뿐만 아니라 해당 민족의 사고방식과 심성(心性)을 가장 잘 드러낸다.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역사와 얼은 바로 우리의 말과 글에 고스란히 담겨져 살아 숨 쉬고 있다. ‘구술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도 있지만 말과 글이 없으면 우리의 유구한 역사도 내 가슴에서 너의 가슴으로 전달될 없고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얼도 그 모습을 갖출 수 없다. 언어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역사도, 문화도, 정신도 잃게 되고 그 어디에도 몸담을 수 없는 벌거벗은 존재로 된다. 중국의 주체민족인 한족은 서로 다른 방언계통을 갖고 어 남북 사이에 서로 말로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지금도 간혹 복건성 남부(闽南) 출신의 인사가 북방에 와서 연설을 하면 상용중국어(普通话)를 하는 사람이 옆에 앉아 통역을 해야만 현지 청중들이 알아들을 수 있다. 그런데 한족이 어떻게 이 세계에서 가장 큰 민족으로 되였을까? 그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한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자는 지극히 중요한 문화통일의 역할을 했다. 한자에 내재한 일맥상통하는 안정된 계승성, 공용성과 민족성은 거대한 응집작용을 했다. 한자가 없다면 한족이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만약 한자가 표의문자가 아니고 표음문자였더라면 역시 강대한 한족이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유럽처럼 몇십개 민족으로 갈라졌을 것이다. 이처럼 말과 글은 그 민족의 흥망성쇠와 직결되는 문제다. 물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세계화의 바람이 거세차게 불어치고 있다. 지금 적지 않은 사람들은 바야흐로 국경이 없고 민족의 계선이 없는 대동세계가 된 줄로 착각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너나없이 한집이 되는 은 좋은 일이요, 인류의 아름다운 이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멀고먼 미래의 일이지 현실의 일은 아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보면 세계화의 진전이 빨라질수록 그만큼 민족주의 물결이 거세차게 일고 있다. 세계화는 개별국가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반면, 민족주의를 야기하고 다문화주의와 병행하게 한다. 따라서 세계화와 민족주의(또는 다문화주의)는 오늘의 세계를 움직이는 두 바퀴 구실을 하고 있다. <<우리 말 굳이 배워야 하나>>라는 글에서도‘다양화 자체가 미덕’이라 했다. 그렇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은‘세계주의와 민족주의’라는 이중변주곡을 연주하고 있다.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을 켜든지 오보에를 불든지 팀파니를 치든지 자기특유의 개성을 갖고 독특한 소리를 내면서도 다른 악기들과 하모니를 이루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민족도 자기 문화의 독특한 개성을 갖고 독특한 소리를 내면서도 다른 민족들과 조화를 이루야 한다. 공자의 말 그대로 동이불화(同而不和)의 세계가 아니라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 민족마다 최선의 민족국가를 이룩하고 최선의 문화를 일구어내서 다른 민족과 서로 교류하고 서로 도와주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바라는 세계주의와 민족주의의 이중변주곡이요, 우리가 동경하는 미래상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훌륭한 민족정책을 펴고 있다. 우리 조선족만 해도 민족자치제도의 혜택을 받고 있고 민족의 언어와 문자의 사용을 법적으로 보장받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자신이 편의주의적인 발상을 가지고 스스로 굴러들어온 복을 차버리고 있다. 사실 우리말과 글처럼 아름답고 과학적이고 배우기 쉬운 언어와 문자도 세상에 별로 많지 않다. 총명한 사람은 하루아침에 깨칠 수 있고 설사 머리가 좀 둔한 사람이라 해도 열흘이면 깨칠 수 있다. 또한 컴퓨터에 기초프로그램을 깔아야 기타 프로그램을 깔수 있듯이 먼저 모국어를 확고하게 배워두어야 다른 언어도 쉽게 배울 수 있다. 이렇게 갈고 닦은 이중 언어의 능력은 우리 조선족의 양 날개로 된다. 그런데 일부 젊은 부모들은 모국어라는 한 날개를 애초에 꺾어버리는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정판룡 선생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게 바로 다문화주의 사상이다. 다문화주의는 전통적으로 공약(公約)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던‘다름과 평등’이라는 가치의 조화를 추구한다.‘다름’을 이유로 차별하지 않고‘평등’을 이유로 동화를 강조하지 않는 사회, 다시 말하면 사회구성원 각자가 자기의 개성과 문화적 정체성을 가지되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공유하는 사회이다. 요즘 말로 하면 다원일체의 조화로운 사회이다. 선생은 다문화사회에서 소수자는 다수자와 담을 쌓고 협소한 민족주의를 고수해서도 아니 되고 그렇다고 해서 그냥 낙후된 상태에서 다수자의 도움만 받을게 아니라 다수자와 적극 교류하고 힘을 비축하여 다수자에게 도움을 주고 그들의 존중을 받는 존재로 부상해야 한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이른바 평등을 이룸에 있어서 소수자의 주체적인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선생은 이러한 사상을 보다 널리 확산하고 우리 조선족의 피와 살로 되게 하기 위해‘며느리론’을 내놓았다. 그 골자는 다음과 같다. 중국에 시집은 왔으되 허구한 세월 친정 생각만 하고 시집살이를 열심히 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시집동네의 사랑을 받을 수 없다. 이와는 달리 시집어르신을 잘 모시고 남편공대를 잘하면서 아들딸을 많이 낳아 훌륭하게 키워내서 시집마을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이때라야만 비로소 친정을 도울 수 있고 친정마을과 시집마을에서 모두 사랑과 존중을 받을 수 있다.(정판룡,<<중국조선족문학의 성격문제>>,<<정판룡문집>>제2권, 연변인민출판사, 1997년 판.) 우리 조선족의 이중문화 신분을 염두에 둘 때, 또 디아스포라의 현지화는 역사의 필연이라고 할 때 정판룡선생의‘며느리론’은 우리 조선족의 바람직한 삶의 자세와 진로를 가장 형상적으로 풀이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다문화주의 사고방식에 입각해 정판룡선생은 중국의 거물급 학자들과 널리 교류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 나가서도 금발 머리든 까만 머리든, 파란이든 까만 눈이든 폭넓게 친구를 사귀이었다. 또한 제자를 끝까지 옆에 두고 싶어 하는 스승들과는 달리 그들이 자기의 날개를 키워 중국 유수의 대학이나 연구소에 훨훨 날아가 자리를 잡게함으로써 중국 경내 조선-한국학의 발전에 기여하고 우리 연변대학의 위상을 높이고 문화령토를 넓혀나갔다. 가는 떡이 커야 오는 떡도 큰법, 밤낮 우는 소리만 하고 받아먹기만 한다면 절대로 다문화사회의 주체가 될 수 없다. 허구한 세월 자포자기하고 주류사회에 얹혀사는 존재가 될 것이 아니라 자기의 정체성을 당당히 지키면서도 총명과 지혜, 헌신성으로 중화민족의 대가정에 기여를 함으로써 이 공동체의 존경받는 구성원으로 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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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11
  • '삼국지' 재해석③ 환관과 선비집단의 싸움
    ●김정룡(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장) 앞서 2부 말미에 삼국시대가 열리기 전 전란이 당시 시대배경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당시 전란은 모두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 크게 나누면 모두 네 가지 전란이 있었다. 환관과 외척의 싸움, 환관과 선비집단의 싸움, 황건적의 난, 반동탁의 난이다. 앞부분에서 이미 환관과 외척의 싸움을 자세하게 다뤘기 때문에 본문에서는 주로 환관과 선비집단의 싸움을 다루려 한다. 선진시대(先秦時代)의 관료집단은 두 부류였다. 한 부류는 무관(巫官)이요, 다른 한 부류는 사관(史官)이다. 독자들은 무속인, 무속신앙이란 말을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도대체 뭔 뜻일까? 무(巫)란 글자의 뜻은 위 가로는 하늘을 뜻하고 아래 가로는 땅이며 내리 줄은 하늘과 땅을 만나 교감을 이뤄내는 것인데 누가 이 역할을 담당하나? 바로 내리 줄 양 옆에 있는 두 사람이다. 뭘 어떻게 역할을 수행하나? 노래와 춤을 통해서, 즉 가무강신(歌舞降神)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민속종목에 그네뛰기가 있는데 이 그네뛰기 유래를 아는가? 농경사회에서 강수의 양에 따라 풍년과 흉년이 판가름 난다. 오월단오가 되면 파종이 끝나고 천신에게 제를 올리는 행사가 있었다. 이 행사는 거국적인 이벤트였다. 진수의 <삼국지> 고구려 편에 의하면 “매월 오월과 시월이면 나라에서 군데군데 크게 모여 연일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춘다(國中大會, 連日飮酒歌舞). 남녀 할 것 없이 손에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며 머리를 땅에 향했다가 하늘을 쳐다보면서 발로 땅을 힘껏 밟는다.” 이 기사에서 우리는 우리 민족이 딴따라민족이 된지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적어도 2천년의 역사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건 그렇고 오월단오에 처녀가 그네 뛰는 것은 여자는 음이고 천신은 양이며 음의 대표자 처녀가 하늘 공종에 치솟아 올라 양신과 결합하면 비를 내를 수 있다는 민속적인 신앙행위였다. 방울을 울리는 것은 처녀가 천신과 교감했다는 것을 대지에 알리는 신호이다. 이 때 여자는 시집갔거나 나이 지긋한 늙은 여인이면 안 된다. 반드시 음기가 왕성한 낭랑 처녀여야 한다. 조선시대까지 기우제 때 거국적으로 300여 명의 무녀(巫女)가 동원되어 속옷을 벗은 채 치마를 벌리고 앞뒤로 가로세로다리를 들었다 놓았다하면서 바람을 일으키는 춤을 추었다. 무녀들의 음기발산을 통해 양신인 천신이 교감되어 비를 내려준다는 것이다. ‘바람피운다.’는 우리말의 유래.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련다. 이런 행사를 관장하는 관리가 천관(天官)이며 <주례>에 의하면 천관은 힘이 센 관직이었다. 천관이 바로 무관이며 무관은 주로 제사를 관장하는 관직이었으며 당시로서는 제사행사가 으뜸의 행사였기 때문에 왕이 제사장을 겸하는 제정일치 시대였다. 이 제사장인 왕을 보좌하는 관료들 다수가 무관(巫官)이며 무관은 당시 정치무대에서 실세였다. 상나라 때까지 귀신의 일이 사람의 일보다 더 중요해서 모든 일에 길흉화복을 알아보는 점을 쳤으니 무관이 얼마나 굉장한 집단이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주나라에 이르러 귀신의 일보다 사람의 일이 더 주목받기 시작했다. 즉 귀신의 중심문화에서 인간의 중심문화로 전이되는 과정이었다. 요즘 말하는 ‘인문학’은 여러 가지 세상만사가 내포되어 있으나 실제로 인문학의 뿌리는 여기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공자의 어록 중에 이런 말이 있다. “귀신을 경하되 멀리하라(敬鬼神, 而遠之).” 뭘 뜻하는가? 귀신중심시대에서 인간중심사회를 구축하려는 사상과 이념이 담긴 말이었다. 당시 공자 같은 선비들(그의 500년 선배인 주공이 물론 인문학의 창시를 열었던 것), 각 학파들의 논쟁을 통해 확실히 인간중심사회 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그 증거 중의 하나가 바로 관직 중에 사관(史官)이란 관직이 주목받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공자보다 더 명성이 높았던 당시 최고 엘리트였던 노자 선생이 바로 주주사(周柱史)였다. 지금의 개념으로 말하자면 중앙도서관의 관장을 맡고 있었는데 주나라에서 기둥역할 하는 사람의 일을 관리하고 기록하는 높은 벼슬자리였다. 잠깐! 사관(史官)이라면 태사공(太史公) 사마천을 떠올리면서 역사책이나 쓰는 별 보잘 것 없는 관직이 아니냐고 생각하기 일쑤인데 노자가 맡은 사관(史官)이란 관직은 역사서를 쓰는 것이 업무인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일을 기록하고 관장하는 관직이었다. 갑골문 학자들의 해석에 의하면 일 사(事)와 역사를 뜻하는 사(史)는 같은 글자에서 분리된 것이라고 한다.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 천하를 제패하고 겸병 전쟁을 벌임에 있어서 선비들이 대거 등용되어 각국의 왕의 책사를 맡았다. 공자님도 무려 14년 동안이나 어디 마땅한 감투가 없을까 하면서 여기저기 머리를 기웃거렸던 것이다. 장자는 머리 쓰고 사람과 사람이 아귀다툼으로 부대끼는 것이 싫어 관직을 주어도 팽개치고 거지 삶을 살았던데 비해 가장 휘황찬란하게 자신의 뜻을 펼친 선비는 바로 상앙이었다. 위(魏)나라 출신이었던 상앙이 자신의 나라에서는 뜻을 펼치지 못하자 진(秦)나라에 가서 꿈을 펼쳤다. 물론 마지막 인생길은 참혹했지만 이 부분은 논외로 하고 그의 개혁업적 가운데 필자가 가장 눈길이 가는 것은 관료세습제를 폐지하고 군공에 따라 사회기여도에 따라 간부임명제를 실시한 것이다. 이는 중국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개혁에 꼽히는 업적 중 하나이다. 당시 주나라 신분은 천자, 제후, 대부, 사인, 서민 등 다섯 계급이었다. 천자가 전쟁을 일으켜 빼앗은 이민족의 땅과 본래 대대로 내려온 토지소유권을 형제, 친인척, 전공이 있는 자들에게 땅을 나눠주고(分封) 제후를 세워 다스리는(建國) 제도 즉 봉건제에 있어서 천자는 천하의 태평을 도모하고 제후는 절대적 세력으로서 나라를 다스리는 치국에 힘쓰고 그 밑에 대부를 두어 채읍을 다스리는 것을 제가(齊家)라 하였고 대부 밑에 사인(士人)이 있는데 이들 집단은 공부하여 즉 수신(修身)하여 대부를 도와 제가에 힘쓰고 혹자는 대부를 뛰어 넘어 제후의 책사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라는 유교이념이 이렇게 유래된 것이다. 혹자는 제가(齊家)란 한 가족의 집식구를 다스리는 것으로 착각하는데 역사에서의 제가는 대부의 채읍을 다스리는 것을 뜻한다. 이렇듯 굳건하던 봉건제 타파에 나선 인물이 바로 상앙이다. 그는 그 막대한 권력을 갖고 있는 대부 집단의 기득권을 빼앗고 공에 따른 간부 임명제를 실시하였으니 당연히 기득권 세력의 저항에 부딪히게 마련이고 종당에 가서 편안한 천수를 누릴 수가 없이 참형을 당했던 것이다. 어찌되었든 상앙의 군현제의 꿈은 진시황이 계승하여 능력에 따른 간부 임명제가 실시된다. 그런데 시황제의 태산에 올라 천신에게 제사를 올린 것에 입을 나불거렸다는 이유로 선비들이 변을 당하는 이른바 분서갱유 사건이 있었고 이때 선비들이 고전을 천정에 감추고 땅에 파묻으며 음지에서 연명하면서 기회를 노린다. 그 결실은 한나라 무제 때에 이루게 된다. 그냥 하늘에서 내려주는 것이 아니라 동중서(董仲舒)라는 최고 엘리트에 의해 선비들이 출세의 길이 열린다. 동중서는 오늘날의 상식으로 말하자면 능력이 뛰어난 장사꾼이었다. 그는 무제와 다음과 흥정을 건다. 제국이 천년만년 가려면 법가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만약 법가에만 의지한다면 앞선 왕조 진나라의 꼴이 된다는 것이다. 그럼 도가의 이념은 어떨까? 무위자연을 이념으로 소국을 지향하는 도가이념으로 한나라 초기 재미를 쏠쏠하게 보았으나 황제는 힘이 없고 주변 오랑캐는 자꾸 시끄럽게 집작 거려 위협이 되고 있으니 강력한 제국 건설이 급선무라고 황제를 선동한다. 황제는 들어보니 들으면 들을수록 그럴듯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어쩌자는 건가? 임자.” ‘흠, 드디어 황제께서 내가 던진 낚시에 코가 걸렸군.’ 동중서는 속으로 ‘쾌’자를 불렀다. 동중서의 주장은 이렇다. 유가의 선비들이 입을 나불거려 시끄럽긴 하지만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이란 삼강과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의 오강으로 강력한 사회질서를 구축한다면 제국이 오래갈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황제는 결국 동중서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따라서 선비들의 출세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군현과 주에 간부를 임명함에 있어서 우수한 인재를 추천하는 ‘천거(薦擧)’제에 의해 선비들이 대거 관직에 등용되어 세상을 주름잡기 시작하였다. 동중서의 덕분에 후한에 이르면 유교가 뿌리를 내려 낙양의 태학 학생은 3만 명에 달했고, 태학의 건물도 여러 번 증축되어 말기에는 24동에 1,850개의 교실을 갖게 되었다. 아마 요즘 지구촌의 지식분야의 최대 상징인 하버드를 훨씬 능가하는 규모였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지방에서도 각각 사숙이 만들어져 이름 있는 학자를 스승으로 하는 동문의 학생들이 배출되었다. 그런데 그놈의 환관들이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간부로 등용되고 싶다면 뇌물을 바치라고 노골적으로 대놓고 금품사냥에 혈안이 되어 있어 유교적 의식에 고취되고 정상적인 관리 등용문이 가로 막힌 이들은 반환관 운동에 앞장섰다. 환관파와 유생을 주축으로 하는 반환관파의 대립은 '당고의 금(黨錮之禁, '당고의 옥'이라고도 불림)'으로 불리는 2차례의 대탄압으로 청류 지식인(유생들은 자신을 청류, 환관무리를 탁류로 여겼음)들이 관계에서 일소되었다. 그 후 원소가 환관학살에 적극적이었던 이유가 바로 그 자신이 사족가문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환관은 유생집단을 관직에서 씨를 말릴 정도로 몰아냈으나 결국 사족가문 출신인 원소에 의해 다시 자신들이 씨를 말릴 정도로 학살당했다는 것이 참으로 흥미롭기도 하고 아이러니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이 당시 시대배경 중 한 축이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8-11
  • 中 해방전쟁 시기 실패한 미국의 대 중국 침투 전략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중국의 국내 해방전쟁은 중국인민이 부패한 장개석 독재정권을 뒤엎고 자유와 독립해방을 쟁취하는 대 결전이었으며 중국의 두 가지 운명, 두 가지 전도를 가름하는 최후의 대 결전이었다. 이 대 결전 중 중국 국민당정권은 미국에 대한 의존도가 컸으며 미국 또한 국민당 정권에 대한 원조를 대폭 늘이기도 했다. 이렇듯 엄준한 정세에 직면하여 중국공산당은 2차 대전 후의 국내 외 형세를 전면 분석, 미국을 두려워하고 미국을 숭배하는 당과 군대 내의 불안심리를 극복하면서 대 미국 투쟁의 책략에 대해 심중하게 정하였으며 일련의 유력한 조치를 취하는 것으로 미국이 중국 내전에 개입하는 것을 될수록 억제시켰으며 최종 미국이 국민당정권에 실망하여 중국 내전에서 손을 떼도록 하였다. <중간 지대> 형성과 <양대 진영> 이론으로 사상을 통일 냉전초기, 미소가 전시 군사실력 균등의 기초에서 건립한 얄타 체계는 실질상 유럽의 정치판도와 미소의 세력범위를 다시 획분하였다. 당시 소련은 종합실력은 미국보다 한참 뒤 떨어졌기에 극동에서 미국과 타협하여 현 상태를 유지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동시에 스탈린은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을 전승할 수 있겠는가를 의심하면서 장개석이 곧 이겨서 중국을 통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인정했다. 중국인민의 해방전쟁은 바로 이런 국제적 환경 속에서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러자 당시 국제형세에 대해 확실한 안광을 가진 모택동은 <중간 지대(中间地带)>와 <양대 진영(两大阵营)>의 이론을 제기, 이것으로 전 당과 전 군의 사상을 통일시켰다. 1946년 8월 6일, 모택동은 미국 기자 안나 루이스 스트롱과의 담화에서 “미국과 소련 사이에는 광활한 지대가 가로막혀 있다. 여기에는 유럽,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허다한 자본주의 국가와 식민지 그리고 반 식민지 국가들이 있다. 가령 미국반동파들이 이런 국가들을 힘으로 굴복시키기 전에는 절대 소련을 진공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했다. 모택동은 이 <중간 지대> 이론으로 반소반공을 외치는 미국의 직접적인 목적은 “반소의 구호 아래에 발광적으로 미국 노동자와 민주인사들을 진압하는 것과 대외확장의 일체 대상국으로 하여금 모두 미국의 부속물로 만드는 것”이라고 폭로하면서 미소 양대 진영 사이에는 상대적으로 독립된 역량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아냈던 것이다. 모택동은 <중간 지대> 이론을 제기했을 뿐만 아니라 지어는 <양대 진영> 사이의 평행제약 외교를 신봉, 하지만 미소와 중국공산당과의 관계는 본질적인 구별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소련은 중국공산당 지지자였으나 미국은 도리어 중국혁명운동의 반대자였다. 그리고 중국의 정치형세가 격렬하고도 근본적인 변동이 발생할 시기마다 이런 본질적인 구별은 각 일방의 정치적 연변(演变)의 추향을 결정하군 했다. 미국정부가 장개석 정부를 부축하는 정책을 실행하기에 냉전이 폭발하자 모택동은 미국과 관계개선의 노력을 포기했다. 이렇게 중국공산당은 외교정책을 제정하는 관건적인 단계에 들어 미국은 중국의 내부 사무를 간섭할 시도를 포기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간파, 반드시 <양대 진영의 한쪽에 쏠리는(一边倒)> 외교 총 방침을 실행하기로 했다. <일체 반동파는 모두 종이범>이란 전략 논단으로 공미심리(恐美心理) 극복 항일 전쟁 후기와 항일전쟁 이 금방 끝난 뒤 미국정부의 정책과 행동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판단은 “미국은 유럽에서는 그리스를 놓고 영국과 쟁탈전을 펼칠 것이고 아시아에서는 중국과 쟁탈전을 벌일 것”이라는 것이었다. 즉 인민해방군이 남경과 상해와 같은 대 도시를 점령하면 미국은 필연코 간섭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미국의 개입은 결정적인바 다르다면 강경개입인가 아니면 <연한 개입>인가 그리고 그 개입 역도의 크고 작기의 문제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판단은 정확한 것이었다. 미국이 생각하는 2차 대전 결속 후의 세계판도 중 중국은 의연히 민국시기의 지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었고자원 유출지구에 농부산품을 공급하는 것으로 공업산품의 시장 및 원자재 생산지로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의 피라미드 중 중국은 반드시 최하층에 위치해 있으면서 미국의 이익에 부합되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중국공산당의 욕망은 혁명을 통해 제국주의의 동방전선을 무너뜨리고 독립지위를 수립하는 것이고 아울러 자주적으로 현대화건설을 진행하는 것으로 피라미드 최하층 같은 지위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이는 미국이 추구하는 전략 목표와 매우 심각하게 모순되는 것이었다. 때문에 미국은 악랄하게 중국공산당의 집정을 반대해 왔으며 더욱이는 공산당을 대표로 하는 민족독립의 추구와 국가발전의 염원까지도 한사코 반대해 왔다. 이는 항일전쟁 시기와 전후 초기의 태세가 이것을 충분히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당시, 중국공산당의 전쟁 상대는 몹시 강대했다. 2차 대전 후의 미국은 경제 및 군사 실력이 극도로 증강되었고 과학기술 역량 역시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진정한 세계 제1의 군사강국으로 군림하였다. 하지만 1946년 중국의 전면 내전이 폭발한 후 모택동은 “일체 반동파는 모두 종이범”이란 이론을 제기, 전략상에서 적을 무시하면서 적과 날카롭게 맞서 싸울 것을 전국인민들에게 호소하였다. 미국과 장개석의 압력과 무리한 요구 앞에서 모택동은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물론 우리는 어느 정도 양보하여야 한다. 하지만 주요한 정책은 양보가 아니라 투쟁이다. 만약 우리 당이 상당한 양보를 한다고 할 때 우리는 재차 무리한 압박과 요구와 두 번, 세 번이 되는 투쟁을 해야 하고 결과는 더욱 큰 양보를 해야 할 것이며 만약 견결히 투쟁하는 정신마저 없다면 결과는 곧 더욱 나빠지기 마련이다…” ▲1945년 8월 충칭(重慶)에서 열린 국공담판에서 만난 장개석(가운데)와 모택동(오른쪽). 미국이 중국 내전에 개입한 주요한 수단은 물자원조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통계에 따르면 국공 담판이 진행되던 1946년 상반년만 해도 미국정부가 국민당정부에 제공한 각종 물자는 그 가치가 13.5억 달러에 달했다. 그리고 중국 내 전면 내전이 폭발한 후 미국정부는 또 국민당 군에 131척의 함정을 지원하였으며 일본이 투항한 후부터 1946년까지 미국의 해군과 공군이 내전 전선으로 수송한 국민당 군대는 도합 54만 명에 달했다. 하지만 이러한 미국정부의 통이 큰 부축에도 불구하고 국민당정부는 부패했고 국민당 군대는 무능하기 짝이 없었으며 이로 인하여 투르먼 정부의 대 장개석정부 지원은 미국 내 여론의 물매를 맞았다. 한편 인민해방군은 방방곡곡에서 승전의 첩보를 올렸으며 특히 1948년부터 1949년의 5개 월 사이에 인민해방군은 전략적 대 결전을 강행, 연속 요심 전역, 회해 전역과 평진 전역을 펼쳐 5개 월 내 도합 154만 명의 국민당 군을 섬멸하였다. 이렇게 되자 미국정부는 부득불 국민당정부가 군사상에서의 실패가 이미 기정사실로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주중 미국대사 존 레이튼 스튜어트(John Leighton Stuart, 1876-1962)가 1948년 미 국무장관 마셜한테 보낸 전보문에서 “우리는 매우 원하지 않는 이러한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민당 현 정부의 붕괴는 조만간 피면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라는 형식으로 반영되었다. 그 뒤 미국정부는 국민당정부에 대한 원조의 수량과 차수를 줄이면서 대 중국 정책을 개변하기 시작했다. 한 방면으로 미국은 여전히 매 주 400만 달러 가치에 달하는 군수품을 국민당정부에 제공하는 한편 다른 한 방면으로는 장개석의 일부 요구에 대해 거절하면서 다른 출로를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1949년 1월 2일, 미국정부는 국민당 군대에 실시하던 군사훈련을 정식으로 중단한다고 선포, 동시에 주중 미국 연합 군사고문단 단장 파다비를 귀국시켰으며 1월 27일에는 주중 미국 군사고문단을 전부 철수한다고 선포하기도 했다. 미국정부는 장개석을 두고 더 이상 이상적인 인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미국의 대 중국 이익은 이미 성사보다는 망치는 일이 더 많다고 인정하였다. 그 뒤 미국은 <중도환마(中途换马)>를 목적으로 국민당의 2인자 이종인과 접촉, 최종 장개석을 압박하여 은퇴하게 하고 이종인더러 대권을 잡게 했다. 헌데 유감스러운 것은 미국의 부축 하에 대권을 잡은 이종인이었건만 그 역시 국민당의 독재정치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아울러 장개석 또한 진짜 은퇴한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되어 1949년 봄에 북경에서 있는 국공 양당의 평화담판은 철저히 파탄되었다. 이와 더불어 미국은 <중국 내정 개입>의 목적이 실패로 돌아가자 백서를 발표하여 책임을 국민당 정권에 떠밀면서 더 이상 중국 내정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고 표했다. 이렇게 되어 중국공산당은 중국내정에 개입하려는 미국의 전략을 억제시키는 역사적인 승리를 취득하였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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