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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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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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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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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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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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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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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산책] 훙커우 공원 그리고 매헌 윤봉길 ①
    ●강순화 “사람의 자유와 인류의 평등을 실현하고 세계평화를 달성하는 것이 지상(至上)의 정의이고 정의를 위하여 삶을 희생한 이를 의사(義士)라 한다. 영웅과 성인군자는 살아서 명예가 있지만 의사는 죽어서 말한다. 매헌 윤봉길(梅軒 尹奉吉)을 의사로 흠모하는 뜻이 거기에 있다.” 위의 글은 서울 양재동소재 윤봉길의사기념관 뜰에 세운“숭모비”에 새긴 비문의 첫 구절이다. 매헌 윤봉길은 겨우 24년 6개월의 짧은 삶을 살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가 순국하기 8개월 전에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으킨 역사적 의거로 그는 청사에 길이 빛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만민의 마음속에 살아있을 것이다. 출신과 교육 20세기 초, 기울대로 기운 한말의 풍운은 마침내 나라마저 무너져내려앉으려는 피빛노을녘이였다. 한반도의 운명이 경각에 달해 이른바 을사5조약을 빌미로 설치한 일제의 통감부가 한반도 강점준비의 그물을 쳐나가기에 혈안이 되여 있던 숨 가쁜 위기의 나날, 어두컴컴해지는 한민족의 역사의 박명기에 한 줄기 빛이 이름없는 농가에서 쏟아져나왔다. 1908년 6월 21일 저녁 8시경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은 그 생애의 고고성을 우렁차게 울렸다. 산지수명(山地秀明)한 두메산골, 청풍명월(淸風明月)의 수려한 예향(禮鄕) 충청도 예산땅 한 촌락에서의 일이다. 일명《목발이》라고 하는 이 마을의 한미한 농가에서 듬직한 사내아이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목계천 건너 섬속의 섬, 도중도(島中島)의 한가운데에 자리한 오늘의 광현당(光顯堂)에서 갓 20세의 어머니 경주김씨(慶州金氏) 새댁이 첫 옥동자를 분만하자“대장감이로구나!”하며 할머니가 제일 먼저 반겼다. 덕산“목발이”마을에서는 이 가문이 5형제씩 두게 되여 마침 앞산인 수암산(修岩山)에《5형제바위》가 있으므로 수암산 5형제바위의 정기를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곳 뒷산 가야산(伽倻山)줄기에 장군봉(將軍峯)도 있어서 장군감이 또 태어났다고 반겨마지않았다. 갓난아이때 부터 대장감이라 해서 집안의 기쁨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부모님들은 첫아들을 무척 대견스럽게 여겼고 앞날에 대한 기대 또한 남달랐다. 이렇게 열여덟된 아버지 윤황(尹璜)씨와 두살우인 어머니 김원상(金元祥)사이에서 태여난 윤봉길, 자(字)는 용기(鏞起)요, 본명은 우의(禹儀)이고 봉길(奉吉)은 별명이었다. 서당을 마칠즈음 스승인 매곡(梅谷) 성주록(成周錄)이 자기 아호에서 글자를 취하여 매헌(梅軒)이라는 아호를 지어주었다. 후일 망명지 중국 상해에서 대의거에 성공하고 투옥되였을적에 옥중의 가명으로 희의(熙儀)를 쓴적이 있다. 윤봉길이 태어난 집안은 몰락한 양반가문으로서 전형적인 농가였다. 평생 땅만 파는 할아버지는 마을에서“윤두더지”로 통했고 억척스런 성미와 철저한 근면 성실에 하늘도 감동했던지 마침내 벼 백여 석을 거둬들이는 풍수를 이루었다. 흙에서 태여나 생애를 마치기까지 오로지 흙의 주인으로서“목발이”마을“내 건너”에 농사왕국을 꾸민 할아버지는 그처럼 당찬 농민의 본보기였다. 그래서 가문의 택호가“내 건너”로 통하기도 했다. 윤봉길은 1913년 다섯 살 때부터 큰아버지 경(坰)의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웠으며 1918년에는 덕산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어려서부터 유학교육을 받으며 성장하는 가운데 애국심을 키웠는데 열두 살 때인 1919년에 일어난 거족적 민족운동인 3·1운동의 자극을 받으면서 민족적 분노를 목격하였다. 그 충격으로 일제의 제국신민(帝國臣民)으로서의 식민지노예교육을 거부하고 학교를 자퇴하였다. 그 후 최병대(崔秉大)의 문하에서 동생 성의(聖儀)와 함께 한학을 배웠다. 1920년경"동아일보",“개벽” 등을 통하여 새 사상에 접하면서 겉보기에는 평범한 농가에서 자라면서도 남달리 비범한 기상을 보였다. 1921년부터는 고명한 유학자 성주록(成周錄)이 개설한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사서삼경 등 중국 고전을 공부했는데 총명하여 신동(神童)이라 불렸고 뛰어난 시재를 보여 약 300여 편의 자작한시를 수록한"명추(鳴推)","옥수(玉睡)》,《임추(任椎)" 등 시문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산천초목도 서광어린 정기를 어린 심신에 불어넣어 어두움으로 치달리는 역사에 새 불씨를 심어 일으키도록 해주는 듯 싶었다. 어린시절부터 척박한 산골, 한미한 시골집을 배움터로 삼아 심신을 연마하는 한편 농촌계몽활동을 전개하면서 점차 농민들의 가엾은 생활에 눈을 뜨게 되였다. 경제적으로 빈곤할 뿐만아니라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해 문맹으로 생활하는 농촌사회의 참경은 그에게 깊은 동정심을 갖게 하였으며 스스로 시련을 극복해 나가는 슬기와 용기를 익혀 체질화해 나갈 수 있었다. 1926년 19세 되던 해 “학문이 학문으로 그 가치를 나타내는 일은 지식이 아니라 몸으로 행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 그는 서숙생활을 마치고 고향 목바리마을 49가구 200여명을 상대로 하여 문맹퇴치운동을 시도하고 사랑방에 야학을 개설했다.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한글, 역사, 산수, 과학, 농사지식 등을 가르쳤으며 자신의 체험과 지식을 총동원하여 농민계몽, 농민부흥운동, 독서회운동 등으로 농촌부흥에 전력하였다. 다음해에는 이를 더욱 이론적으로 뒤받침하기 위하여 3편으로 된 “농민독본”을 저술하여 유인물책자도 펴냈다. 제1편은 현전하지 않고“계몽편”,“농민의 앞길” 2편이 남아있는데“계몽편”은 예절 등 개인의식으로부터 시작해 민족의식과 민족정신을 비유법으로 일깨워주었고“농민의 앞길”은 농민본위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길, 즉 농민이 나아갈 길을 제시하였는바 20세 청년으로서는 너무나도 초시대적인 선진적사회의식과 투철한 독립정신을 보여주었다. “농자 천하지대본이요, 농심은 천심이라 했거늘 잠들었던 가난한 농민들을 흔들어 깨워야 산다, 알아야 산다, 협동해야 산다”라고 생각한 그는 1929년 부흥원(復興院)을 설립하여 농촌부흥운동을 본격화하였으며 그해 1월초부터 1년간 기사일기(己巳日記)를 쓰기 시작하였다. 2월 18일에는 부흥원에서 학예회를 열어 우화극《토끼와 여우》를 공연하였는데 여우같이 교활한 일제를 풍자했기에 관중의 대환영을 받자 곧 일본 놈들의 주목을 받게 되였으며 경찰에 불려가서 추궁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윤봉길은 이에 구애받지 않고 계속 지방농민들을 규합하여 자활적농촌진흥을 위하여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추대 되였다. 한편 수암체육회(修巖體育會)를 설치 운영하면서 건실한 신체로서의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그후 서울 시조사잡지 기자 이흑룡(李黑龍)이라는 독립운동공작원과 자주 접촉하게 되면서 그의 활동은 본격적으로 항일의 성격을 지닌 농민운동으로 바뀌었다.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 다짐한 순국의 정신 1929년 11월에 일어난 광주학생사건은 매헌 윤봉길로 하여금 민족혁명투쟁의 길에 들어서게 했다.“농민이 우매하기 때문에 우리가 못사는 줄 알고 농민운동을 펴왔는데 알고 보니 그 왜놈들때문에 못사니 이 불효자식 갈길이 무엇인가는 아시지 않겠습니까?”라는 말을 어머님전상서에 올리고 23세 때인 1930년 3월 6일에 만주로 망명하이었다. 그의 책상에는“사내대장부로 집을 나가 뜻을 이루지 않고는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丈夫出家生不還)”는 결연한 의지를 담은 휘호 한폭을 남겼다. 1930년 10월 18일 망명지 청도에서의 서신에는 “사람은 왜 사느냐? 이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 산다. 보라! 풀은 꽃을 피우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도 이상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를 다짐하였다. 우리 청년시대에는 부모의 사랑보다 더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는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 나의 우로(雨露)와 나의 강산과 나의 부모를 버리고라도 그 강의한 사랑을 따르기로 결심하여 이 길을 택하였다.”라고 썼다. 이 처연한 글귀들에는 당시 나라와 민족을 위한 불같은 신념으로 항일운동에 나선 한 젊은 독립투사의 단호함과 비장함이 서려있다. 중국으로의 망명 도중 선천(宣川)에서 미행하던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45일간이나 옥고를 치렀다. 그 뒤 만주로 탈출하여 그곳에서 김태식(金泰植), 한일진(韓一眞) 등 동지와 함께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그해 단신으로 대련(大連)을 거쳐 청도(靑島)에 도착한 윤봉길은 1931년 여름까지 현지를 살펴보면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모색하였고 이곳에서 세탁소 회계원, 모직공장 직공 등으로 취직하면서 돈을 벌어 야학과 농민운동으로 빌린 돈을 갚으라고 고향에 송금하기도 하였다. 1931년 8월 활동무대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옮겨야 보다 큰일을 수행할수 있을것이라 믿고 그곳으로 갔다. 우선 상해 프랑스조계 하비로화합방(霞飛路和合坊) 동포석로(東浦石路) 19호 안공근(安恭根)의 집 3층에 숙소를 정하였다. 생계를 위하여 동포실업가 박진(朴震)이 경영하는 미리공사(美利公司)에 직공으로 종사하면서 상해영어학교에서 수업하는 한편 로동조합을 조직하여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였다. 1932년 한인애국단의 이봉창(李奉昌)이 1월 8일 일본 동경에서 일본왕을 폭살하려다가 실패하자 상해일대는 복잡한 정세에 빠지게 되였다. 더욱이 일제는 1월 28일 고의로 죽인 일본승려사건을 계기로 상해사변을 도발하였다. 중일 양군의 총소리를“민족과 민족이 부딪치는 소리”로 들은 윤봉길은 자신의 길을 찾은 듯 결심하였다. 그래서 그해 겨울 마랑로(馬浪路. 지금의 馬當路) 보경리 4호에 있는 림시정부를 찾아갔다. 그리고 백범 김구를 만나“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칠 각오임”을 호소하였고 1932년 4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한인애국단은 임시정부의 행동단체였다. 김구가 직접 지휘하여 이미 이봉창, 류상근, 최흥식을 일본과 만주로 파견하여 큼직큼직한 일을 도모하고 있었다. 그것은 일본이 1931년 9.18사건을 일으켜 이른바 만주사변을 도발한데 대한 임시정부의 대책이기도 했다. 임시정부에서는 리봉창을 적의 심장부에 파견하여 일본왕 히로히또(裕仁)를 폭살하는 한편 류상근과 최흥식은 만주 방면의 고관을 저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것은 만주의 한, 중련합군의 중요한 지원작전이였다. 이에 일본은 만주의 확보를 위하여 중국의 후방을 교란하고 한국독립운동의 거점을 공격하는 계획을 세워 반격해왔다. 그것이 이른바 상해사변이고 윤봉길은 그 흉계를 다시 뒤집어 응징한 것이다. “제가 큰뜻(大志)을 품고 상해에 천신만고로 왔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렇게 다녔던 것입니다. 그럭저럭 중일전쟁도 중국에 굴욕적인 정전협정으로 결착되는 형세인즉, 아무리 생각해봐도 죽을 자리를 구할 길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에게 동경사건과 같은 경륜이 계실 줄 믿고 찾아왔습니다. 지도해주시면 은혜 백골난망입니다.”라고 하는 윤봉길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해보니 평시에 보아온 학식있고 착실한 청년로동자뿐이 아니라 정녕 살신성인의 대의(大義), 대지(大志)를 품은 의기남아였다고 백범 김구는 말했다. “뜻이 있으면 일도 이룬다(有志者事竟成)고 안심하시오. 내가 근일에 연구하는바가 있으나 마땅한 사람을 구하지 못해 번민하던참이였소. 전쟁 중에 연구 실행코자 경영하던 일이 있으나 준비부족으로 실패했는데 지금 신문을 보니 왜놈이 전승한 위세를 업고 4월 29일에 홍구공원에서 이른바 천왕의 천장절 경축례식을 성대히 거행하며 요무양위(耀武揚威)를 할 모양이요. 그러니 군은 일생 대목적을 이날에 달함이 어떠하오?” 하는 물음에 윤군은“저는 이제부터는 흉중에 일점 번민이 없어지고 마음이 편해집니다. 준비해주십시오.”라고 쾌히 승낙했다. 그는 한인애국단 단장인 김구 앞에서 혈서로 다음과 같은“선서문”을 써 이 사명을 수행할 것을 맹세하였다. “나는 赤誠으로써 祖國의 獨立과 自由를 回復 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여 중국을 침략하는 敵의 장교를 屠戮하기로 맹세하나이다. 大韓民國 14년 4월 26일 선서인 尹奉吉 한인애국단 앞" 역사적인 순간인 4월 29일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윤봉길은 말쑥한 일본식양복으로 갈아입고 날마다 홍구공원에 가서 식장 설비하는 것을 살펴보며 그날 자기가 거사할 위치를 점검했다. 한편으로 시라가와(白川)대장의 사진을 구하고 태양기(일본기)를 사는 등등의 일로 매일 홍구에 내왕하면서 듣고 본 것을 김구에게 회보하였다. "오늘 홍구에 가서 식장설비를 구경하는데 시리가와 이놈도 왔습니다. 제가 그 놈의 곁에 섰을 때에 어떻게 내일까지 기다리는고, 오늘 폭탄을 가졌더라면 이 자리에서 당장 쳐 죽일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것이 무슨 말이요? 포수가 꿩을 쏠 때는 날게 하고 쏘아 떨어뜨리는 것이나 숲속에 자고 있는 사슴을 쏘지 않고 달리게 한 후에 사격하는 것 모두가 쾌미(快味)를 위함인것이요. 군은 내일 성공의 자신감이 박(薄)하여 그러는 거요?"라고 물으니"아닙니다. 그 놈이 내곁에 선것을 보았을 때 문뜩 그런 생각이 나더란 말씀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번에 성공할 것을 나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군이 일전에 내 말을 듣고서 한 얘기 중에 이제는 가슴의 번민이 그치고 편안해진다는 것이 성공의 철증으로 믿고 있습니다. 내가 치하포에서 쓰지다를 죽이려 했을 때 가슴이 몹시 울렁거렸지만 고능선선생으로부터 들은 득수반지무족기(得樹攀枝無足奇), 현애살수장부아(懸崖撒手丈夫兒)란 구를 생각하니 마음이 가라앉았습니다. 군이 결심하고 일을 행하려는 것과 똑같은 이치요." 윤봉길은 김구의 말을 깊이 마음에 새기는 낯빛을 가지는 것이였다. 4월 29일 새벽, 김구는 윤봉길과 함께 김해산 집에 갔다. 최후로 식탁에 앉아 아침밥을 먹는 윤봉길의 모양은 담담하고 태연하였다. 시계가 7시를 치는 종소리가 들렸다. 윤봉길은 자기 시계를 꺼내 김구에게 주면서 그의 시계와 바꾸기를 청했다. "선서식 후에 선생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산 것입니다.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이니 나에게 주십시오. 나는 한 시간밖에 소용이 없습니다." 나는 그것을 기념품으로 받고 내 시계를 내주었다. 윤봉길은 식장으로 떠날 때 자동차를 타면서 소지한 돈을 꺼내 김구의 손에 쥐어 주었다. "약간의 돈을 갖고있는것이 무슨 방해가 되는가?" "아닙니다. 자동차 삯을 주고도 5, 6원은 남겠습니다." 그러자 곧 자동차가 움직인다. 김구는 목멘 소리로 말했다.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윤봉길이 차창으로 김구를 향해 머리를 숙일 때 자동차는 큰 소리를 내며 천하영웅 윤봉길을 싣고 홍구공원으로 향했다.(다음에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6-14
  • 홍색 연안 시절의 조선민족 여성들
    “아, 연안! 너 장엄하고 웅위로운 옛성이여 가는 곳마다 항적의 노래 울려 퍼지고 아, 연안! 너 장엄하고 웅위로운 옛성이여 끓는 피 네 가슴에서 용솟음친다. ... ... ... 아, 연안! 너 장엄하고 웅위로운 성벽은 철같은 항적의 전선 이루었나니 너의 그 이름 세월과 더불어 역사에 찬란히 길이 빛나리.“ 이는 우리 민족의 천재적 성악가이며 작곡가인 정율성(1918.7--1976.12)이 스무살 때 창작한 "연안송(가)"의 한 구절이다. 1938년부터 항일근거지에서 가장 많이 불렸던 "연안송(가)"! 장개석통치구의 수많은 열혈청년들과 학생들이 이 노래를 부르며 국민당의 봉쇄선을 목숨 걸고 뚫고 넘어 만난을 무릅쓰며 혁명의 성지-연안으로 찾아왔다. 그중에는 우리 조선민족의 열혈청년들도 있었다. 연안성에서 동쪽으로 연하강을 따라 10여리 걷느라면 쵸얼거우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과 연하강을 사이 둔 건너편엔 리가평이란 마을이 있었다. 바로 이곳에 조선의 우수한 아들딸들을 교양하는 조선혁명군정학교와 조선독립동맹이 있었다. 그때 그곳에 있은 조선 사람은 약 200여 명 되었는데 그중에는 여성들도 있었다. 그 여성들 중에서 명망이 높았던 이로는 허정숙(许贞淑)이였다. 허정숙은 당시 연안군정학교의 조직교육을 책임진 부과장이었다. 조선의 유명한 애국자 허현선생의 큰딸로 태어난 허정숙은 서울에서 소학과 중학을 마치고 일본에 가 대학문과를 공부하고 “동아일보”기자로도 활약하였고 후엔 잡지“신여성”을 편집하며 사회활동에 투신하였다. 1925년엔“서울여자청년동맹”을 조직한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되었다. 1927년 5월엔 기독교, 불교, 천주교 등 각 종교단체와 통일전선조직-“근우회(槿友会)”를 창립하고 서울의 여자학생운동을 지도하였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때엔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중심으로 각 여자학교의 학생시위를 지도한 것으로 하여 일제에게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2년만에 석방된 그녀는 다시 항일활동을 하다가 재차 체포되어 1936년에야 석방되었다. 출옥 후 허정숙은 최창익, 한빈 등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들은 급진적이고 진보적인 청년들을 조직하여 선후로“조선공산주의청년전위동맹”,“조선청년전지(战地)복무단”을 건립하였으며 활발한 항일 활동을 진행하다가 1939년 6월 연안으로 들어갔다. 연안에서 그녀는 항일군정대학을 다녔고 졸업 후에는 팔로군 120사에서 정치지도원 등 사업을 하다가 1944년 태항산조선혁명청년학교가 연안에 옮겨와 군정학교를 성립할 때 허정숙은 조직교육과 부과장으로 임명 되였고 직접 정치과목 강의도 맡아하였다. 그의 이론수양이 높은 강의는 언제나 생동하고 실제적이여서 학원생들의 환영을 받았다. 8.15 후 허정숙은 연안에서 나와 심양을 거쳐 조선(북한)에 귀국했으며 그 후 수차 조선당정대표단의 일원으로 중국을 다녀갔고 조선대표로 국제여성회의에 출석하기도 했다. 허정숙과 때를 전후하여 연안에 들어선 다른 한 여성으로는 난영(김영숙)이였다. 조선 함경북도의 한 지주집 딸로 태여 난 그는 망명한 연인을 따라 중국에 들어와 혁명에 참가하였다. 그는 일본어에 능숙하여 중경에 있을 때엔 일본어방송 아나운서까지 담당하였다. 후에 연안에 들어간 그녀는 태항산 129사에 배치되어 사업하였다. 당시 팔로군 115사가 산동성 양산에서 평형관 전투의 승리로 일본군을 포로하였는데 그중에는 일본동경대학출신인 고급군의가 있었다. 팔로군전선총사령부에서는 그 고급군의를 태항산에 호송하여 난영에게 교육임무를 주었다. 난영의 도움 밑에 그 고급군의는 “일본인반전동맹”의 중요한 간부로 성장하였다. 1941년 1월 무정이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창설할 때 난영이는 129사의 조선인 대표로 회의에 출석하였고 그 후 조선혁명청년학교와 독립동맹의 도서관관리원 겸 무정의 비서로 있었다. 성격이 활달하고 활약적인 난영이는 예술에서도 장끼를 보여주었다. 학교에서 신입생환영식이나 기념일 공연에는 그가 당연히 주역이 되었으며 김창만 편극으로 된 대형화극“조국의 딸”의 여주인공 역도 그녀가 맡았고 의용군이 화북에서 처음 겪은 호가장전투를 반영한 극“태항산우에서”의 여병 역도 그녀가 맡았다. 1944년 음력설 직전 난영(김영숙)은 조선독립동맹 조직부 조직과장으로 승진 되었고 8.15 후 조선(북한)에 귀국하여 무정과 결혼하였다. 6.25전쟁이 끝난 후 그녀는 북경대학 유학생으로 파견되여 전문적으로 중국과 조선의 문화교류와 역사를 연구하였다. 조명숙(赵英)은 현처양모형의 여인으로서 비행사 출신인 윤공흠(尹公钦)의 부인이다. 항전 전에 남편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였는데 1941년 조선청년연합회 창립활동에 참가하였고 그 후 줄곧 태항산에 있다가 1944년초에 연안에 들어가 독립동맹의 간부로 되었다. 8.15후에는 조선(북한)으로 귀국하여 어느 도의 당책임 일군으로 있었다. 이 외에도 연안에 들어가 항일전쟁에 참가한 조선민족 여성들이 적지 않았다. 미인으로 불리던 석영(石英, 조직교육과 주춘길과장의 부인), 그리고 1938년 10월10일 한구(汉口)에서 조선의용대의 유일한 여성으로 참가했던 김위나(金威娜)는 중국 영화계의 황제로 불리우는 김염의 누이동생이였다. 그리고 독립동맹의 간부였던 최의(崔毅,연안군정학교 부교장이며 조선의용군 부사령원 겸 정치위원인 박일우의 부인)도 있었는데 8.15 후 연변에 왔다가 남편과 함께 조선(북한)으로 나갔다. 이 외에도 “조선공산주의청년전위동맹”의 한 지도자인 한빈 동지의 부인 문정원(文贞元), 민족주의자 김두봉선생의 딸 김귀숙(金贵淑, 여성대대 부대장)과 김해엽(金海烨)이 있었고 태항산“3.1병원”에서 간호부사업을 하다가 조직의 파견을 받고 의과대학 공부까지 한 이화림 등 20여 명의 조선민족 여성들이 있었다. 일제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해 우리민족의 독립을 위해 단연 혁명의 길에 나선 겨레의 여성들, 그 가열처절한 전쟁의 년대에 그들은 남성들과 어께곁고 국경을 넘나들며 이국땅에서 청춘을 바쳤다. 그녀들의 장거는 청사에 길이길이 빛날 것이며 우리민족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류동호)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6-13
  • 중국 영화 100년 사상 절세의 미남배우 ㅡ 왕심강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지난 세기 70년대, 중국대륙에서는 영화관람은 아주 즐거운 일종의 향락이 아닐 수 없었다. 돌이켜 보면 국산영화나 수입영화가 많지 않던 그 시절, 그래도 깊은 인상을 남겼던 국산영화는 <정찰병>이었다. 특히 영화 중에서 해방군 정찰연장이 새햐얀 장갑을 낀 손으로 국민당군의 포구를 만지고는 국민당군 퇀장한테 “당신들은 포를 어떻게 정비했는가” 라고 훈시할 때 그 연장의 동작과 자태 그리고 그 어투 등은 상대방을 기죽게 말들었다. 그리고 그 정찰연장의 모습은 너무나도 멋졌다. 하다면 그 정찰연장 역을 맡은 배우가 바로 이 글의 주인공 왕심강(王心刚)이었다. 영화가 많지 않던 그 시절, 많은 영화애호자들은 몇 번이고 이 영화를 보았다고 한다. 특히 어떤 처녀애들은 순 왕심강의 멋진 모습을 보기 위해 이 영화를 7-8번이나 보았다고 하는데… 우리는 미녀들에 한해서는 절세의 미녀라는 말을 잘 붙이지만 남자에 한해서는 <절세의 영웅>이란 말은 잘 붙여도 <절세의 미남>이란 말을 잘 안 붙인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그 전례를 깨뜨리고 영화 <정찰병>의 주인공역을 맡은 배우 왕심강을 두고 <절세의 미남>이라고 부르기로 해본다. 사람은 아무리 잘 생긴 사람이라 해도 성격이 조폭스럽고 품행이 저질이며 허풍이나 친다면 남한테 잘 보일 리가 없다. 잘 생긴 얼굴에 똥칠을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왕심강은 그런 유형에 속하는 남성이 아니었다. 왕심강은 실력파 배우였고 거기의 남성적 매력의 <최고 소유자>였지만 매우 겸손했고 정직했으며 또한 매우 내성적이기도 했다. 1932년 1월 1일, 요녕성 대련 출생인 왕심강은 1956년 스릴방첩영화 <고요한 삼림>에 출연하면서 영화계에 입문, 그 뒤로 <바다의 매(海鹰)>, <홍색낭자군(红色娘子军)>, <옛성에 휘몰아치는 불길(野火春风斗古城)>, <비밀설계도(秘密图纸)>, <남해장성(南海长城)>, <열화 속에서 영생하리라(烈火中永生)>, <정찰병(侦察兵)>, <지음(知音)> 등 수십 부에 달하는 영화에 육속 출연하면서 중견 남성 영화배우로서의 입지를 굳게 다졌으며 중국 영화계의 정상에 우뚝 서기도 했다. 특히 그가 출연한 영화 중 1961년에 촬영한 <홍색낭자군>, 1974년에 촬영한 <정찰병>과 1982년에 촬영한 <지음>은 출중한 인물매력과 성숙된 연기력으로 거의 모든 영화관객들을 매료시키면서 왕심강은 번번히 영화계의 <만인 탐닉 스타(万人迷)>로 되군 했다. ▲ 왕심강이 출연한 영화<정찰병>의 한 장면ⓒ스타자료집 다음 1959년에 촬영된 영화 <바다의 매>에는 왕심강이 무개로 된 찦차에 왕효당(王晓棠)을 앉히고 빗바람 속을 달리는 장면이 있었다. 아주 멋지고 왕심강의 용감성이 돋보이는 장면이었다. 이 장면은 당시로 말하면 꿈많은 중국의 많은 소녀들을 설레이게 했다고 한다. 그 뒤 왕심강과 왕효당은 <옛성에 휘몰아치는 불길>을 포함한 몇 부의 영화에서 각각 남녀 주인공을 맡게 되었고 모두 성공적이어서 당시 중국인들한테서는 <남자는 왕심강, 여자는 왕효당>이라는 말이 유행될 정도였었다. 왕심강이 많은 영화에서 성공적으로 인물부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그의 천부적인 재능과 갈라놓을 수 없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그의 각고한 노력도 많은 분량을 점하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문화혁명> 후기, 중국에서는 영화 <남해장성(南海长城)>을 다시 촬영하게 되었고 왕심강은 영화의 주인공 구영재(区英才)의 역을 다시 맡게 되었다. 헌데 당시 왕심강은 40살을 훌쩍 넘긴 중년이었고 체중도 많이 나갔으나 그가 맡게 될 주인공은 30살도 안되는 건강하고 용감한 젊은이었다. 이러자 왕심강은 식사량을 엄격히 통제하면서 아령, 평행봉 등 운동을 열심히 하였으며 2개월 후 20대의 날쌘 젊은이처럼 영화촬영에 돌입할 수 있었다. 그 때의 일을 회고하면서 왕심강은 이렇게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영화배우는 일종 특수한 직업으로서 스크린(银幕)을 통해 그 형상은 수천만의 관중들에게 영향을 주기 마련이다. 때문에 영화배우는 반드시 관중한테 책임져야 하고 영화사업에 지출한 나라의 투자에도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직위의 높고 낮음과 인격의 여하를 막론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랬듯이 왕심강 역시 사업에서의 아쉬움과 개인생활에서의 좌절과 고충들이 적지 않았다. 1961년 그가 출연한 영화 <홍색낭자군>에는 워낙 홍상청과 오청화 사이에는 혁명적인 우정으로부터 애정으로 승화되는 장면들이 있었다. 헌데 후에 이 영화를 최종 심의할 때 이런 애정표현 장면들은 모조리 삭제되었다. 영화제작에 있어서 최종 심의 때 장면의 삭제는 아주 정상적인 일이다. 더군다나 당시 지난 세기 60연대 초기, <계급투쟁>과 <자본주의 생활의 꼬리>를 자르던 시기엔 애정표현이 나타나는 장면이 삭제되는 건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의 효과 면에서 그것이 아쉬웠다. 오청화와 애정 관계였던 홍상청이 나중에 적들에게 체포되어 화형을 당하는 걸로 마무리되었다면 그 결과가 안타까워 관중을 더 울리게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런 장면 또한 개혁개방의 오늘에 와서는 아무렇지도 않는, 결코 문제로 될 것이 한 장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965년에 촬영한 <열화 속에서 영생하리라>에서 왕심강은 원래 허운봉, 강설금, 성강 이 3대 주역 중 성강(成岗)의 역을 맡게 되었다. 헌데 <3가지 돌출>을 내세우던 그 시기, 허운봉과 강설금을 돌출하게 내세우기 위해 씨나리오를 수개하면서 성강의 전부의 장면은 삭제되었으며 왕심강은 보조역인 유사양(刘思扬)의 역을 맡았었다. 헌데 최종 심의결과 허운봉역을 맡은 조단(赵丹)보다 유사양의 역을 맡은 왕심강한테 시선이 더 집중된다는데서 영화에는 유사양마저 사라졌다. 큰 유감이었다. 어찌보면 왕심강의 출중한 인물과 뛰어난 연기력이 이런 경우에는 더 <장애>가 되었다. ▲왕심강과 그의 아내 왕소채ⓒ스타자료집 한편 왕심강은 자신의 애정에 아주 충실한 사나이었다. 왕심강의 아내 왕소채(杨绍采)는 워낙 중국인민해방군 제38군 문공단의 단원으로 1961년 영화 <오강천험을 돌파(突破乌江)>에서 홍군 위생원역을 맡았던 배우기도 했다. 왕심강과 결혼한 후 남편을 지극히 사랑했던 그녀는 왕심강의 뒤심으로 되어주기 위해 주동적으로 자신의 문예활동권에서 퇴출하여 가정의 현모양처로 되어주었다. 이에 왕심강이 아내한테 감동을 받은 것은 두말을 할 것도 없었다. 그러던 아내 왕소채가 문화혁명 중 홍위병들의 물리적 운동에서 강렬한 충격을 받고 쓰러졌다. 진단결과 정신분열증이었다. 그러자 왕심강이 받은 충격 역시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왕심강은 아내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녀를 더욱 극심히 보살폈고 외부로부터 오는 갖은 유혹들을 물리치면서 아내의 곁을 지켜주었다. 그리고 묵묵히 가정의 중임을 떠메고 도처에 수소문하면서 용하다는 명의를 찾아 다니며 아내를 치료해 주었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위에도 꽃이 핀다>고 이렇듯 왕심강이 보살펴 준 결과 왕소채는 점차 정신분열 상태에서 원래의 정신상태로 되돌아왔고 건강을 회복하였다. 이 글의 앞머리에서도 언급하다싶이 아주 영준하고도 <귀공자>티가 나는 왕심강이었지만 그는 아주 소박하고도 겸손한 영화예술일꾼이었다. 왕심강은 군대 내의 문관직 일꾼이었다. 그의 어깨에 달린 계급장은 소장급이었지만 실제로 그가 받는 대우는 부군장급 대우였다. 하지만 왕심강은 관료행세를 하는 것이 아주 <체질>과 성격에 맞지 않은 모양 새였다. <문화혁명> 후기에 왕심강은 상급의 지령에 의해 8.1영화촬영소의 업무 부소장으로 진급, 주택도 촬영소의 집단숙소에서 나와 북경 백광로 1번지(北京白广路一号)에 있는 고급군관 주택구로 옮기게 됐고 전문 개인용 차량도 있게 됐다. 하지만 그는 자기한테 차례진 차량에 앉아 다닐 때가 아주 드물었다. 회의에 참가할 때를 제외하고 그는 늘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하였으며 촬영소의 일반 직원들과도 아주 잘 어울렸다. 그래서일까? 그의 오랜 이웃인 영화배우 리파(坡都)마저 “왕심강은 관료로 될 스찔이 아니다” 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혹시 기자들이 찾아와 왕심강의 성공담을 취재하면 늘 “기실 나는 영화라는 무대를 통해 그 <빛>을 빌었을 뿐이고 바로 그 <빛>으로 인해 사람들은 나를 기억하고 있다”라며 겸손하게 나오군 했었다. … 노년기에 들어서자 왕심강한테서는 당년의 <영준군인> 및 <백마왕자>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고 머리에 백발이 무성해진 왕심강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생활과 인생에 충실했다. 그는 몸이 허약한 아내 왕소채를 돌보는 한편 멀리 미국에서 생활하는 자식한테도 자주 다녀오기도 한다. 이렇게 중국과 미국 사이를 오가다가도 가끔씩 손자와 나란히 앉아 담소하는 것을 일종 향수로 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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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08
  • “불법체류자 단상”
    ●김도균(한국이민재단 이사장) 한국에는 불법체류자로 불리는 외국인이 약 40만 명에 달한다. 우리 경제 규모에 그정도는 용인된다는 목소리도 있지만 진짜 문제는 합법대비 불법의 비중(20%)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하기야 국내 불법체류 외국인보다 해외에서 불법체류중인 우리 국민이 더 많고 일정한 수준의 불법체류자는 사회나 경제구조상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지만, 정부가 자체적 으로 관리하거나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 이미 불법이 불법을 양산하는 고착화ㆍ조직화의 단계에 진입했다는 것은 향후 이민정책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법무부(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정책을 시행했지만 백약이 무효다. 지금 시행중인 자진신고 제도만 해도 그렇다. 이달 말로 종료되는 자진신고 제도를 불체자 감소를 위한 선순환 대책이라고 하는데 출발이 잘못되었다. 지금 시행중인 자진신고제도는 불법체류자가 자진출국하면 범칙금을 면제 해주고, 일정기간 후 다시 단기 방문비자(90일,취업불가)를 발급해 재입국을 보장해 준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이렇게 불법을 합법으로 선순환 한다는 것인데 이민정책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것은 '선순환'이 아니고 '악순환'이라는 것을 다안다. 불법체류자가 출국하고 나면 그자리를 또 다른 불법체류자로 대체할 수 밖에 없고 단기비자로 재입국한 외국인은 취업이 불가하므로 다시 불법체류자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현장에서는 극단적으로 불법체류자 고향방문 정책이라고 비웃는 소리도 나온다. 당장은 늘어나는 불체자가 일시적으로 감소하는 착시현상은 보이지만 풍선효과와 돌려막기식 정책으로 악순환이 반복될 뿐이고, 현재 정책이 다음 정책에게 빚을 떠넘기게 되고 정책의 신뢰성만 해치게 된다. 불법체류자 대책중 하책은 단속이고 중책은 출국유도와 입국차단이고 상책은 시장조절이다. 법무부는 줄곧 하책과 중책만 번갈아 가며 시행해 왔는데 지금은 시장기능을 조절하는 상책을 검토하고 시행해야 한다. 이달이면 불법체류자 자진신고도 끝나니 이후에 발생할 불법체류자 증가는 시간 문제이다. 이들 중 농어촌 근로, 간병인, 외식업 등 노동시장 테스트가 이루어지고 국민 공감대가 이루어진 부분은 과감히 합법 체류의 길을 넓히고 유학생, 이민자 가족, 동포들의 취업과 체류에 특례를 확대해야 한다. 그리고 일단 합법의 길을 선택하고 성실한 체류자로 검증된 인재는 과감히 영주권까지 갈수 있는 사다리를 만들어 주어야 불법으로 전락하지 않는다. 반면 국민 일자리 잠식분야인 건설업과 퇴폐업소 등에 대해서는 엄격한 법집행(고용주는 형사처벌, 외국인은 영구 입국금지)으로 유입을 확실히 차단하여 국민이 공감하는 이민정책을 만들어야 한다. 코로나 이후 이민정책의 대전환이 요구되며 이제 전문가가 나서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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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고
    2020-06-07
  • [특별기획] 장백산하 해란강반에 울려 퍼지는 '탈빈공략'의 새노래
    편집자의 말: 6월 3일, 중국 관영 매체인 신화통신은 탐방기 <장백산하의 새 노래 편 ㅡ 길림성 연변주 탈빈공략 관찰(长白山下唱新篇——吉林延边州脱贫攻坚观察)>를 큰 편폭으로 할애하여 실었다. 연변 조선족의 <탈빈공략> - 이는 오래 전부터 꿈꿔왔던 프로젝트였지만 잘 안되던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이다. 우선 환경적으로 그닥 부유하지 못한 북한이나 러시아와 인접되어 있다. 이런 나라들과의 무역에서는 상품가치 등가교환에서만 이익을 볼 뿐이지 큰 도움을 받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그리고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상 조선족에 한해서만은 큰 중시를 돌리지 않는다고 해도 큰 과언이 아니었다. 조선족이 <당의 말>을 너무나도 잘 들으니 말이다. 그제 날의 항일전쟁과 해방전쟁 시기에는 그 어느 민족에 비해도 공산당을 위해 목숨을 잘 바치는 민족이 조선족이었고 신 중국이 탄생한 후에도 <대약진>, <인민공사> 등 당의 총 노선을 가장 잘 관철한 민족이 조선족이었으며 <문화혁명> 시기에는 또 <계급투쟁>에 제일 앞장선 민족도 우리 조선족이었다. 어디 그 뿐이랴. 나라에 공량을 바칠 때에는 허리띠를 졸라매면서라도 그 임무를 초과 완성했었고 나라에서 <계획생육정책>을 제정하자 어느 여성이 임신했다고 하면 쫓아다니면서까지 낙태시키군 하던 우리 조선족이었다. 그래서 아주 영예롭게도 연변주는 거의 해마다 전국의 <모범자치주>로 되기도 했다. 그럼 아주 잘 살았는가? 글쎄다. 굶어죽었다는 사람이 없었으니 <번영하는 우리 연변>, <살기 좋은 조국 변강>이란 어구들이 기사를 통해, 노래를 통해 많이 나가기도 했다. 이렇게 <당의 말>을 너무나도 잘 들으니 나라에서 특별히 달래줄 필요도 없었을 것임은 불 보듯 번연했다. 연변에 대한 보도기사ㅡ 이전에 우린 그걸 잘 믿지를 아니했다. 수분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어느 아무깨 기자가 뭘 좀 받아먹고 허풍을 떨었구나 하고 말이다. 그런데 최근 몇 년 간은 보도기사를 믿어서가 아니라 연변 농촌 사람들의 말에서 이전에 비해 확실히 좋아졌다는 것을 알게 됐다. 농촌의 주택건설이며 도로건설이며가 확실히 잘 되어있고 국가에서 연변농촌에도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나마 기쁘고 좋은 일이며 앞으로도 바라마지 않는 일이다. 현재 연변 조선족들한테는 산재되어 있는 문제들이 많다. 인구의 마이너스 성장 문제, 이로 인한 학교들의 폐교되는 문제, 노총각들이 장가가지 못하는 문제와 조선족들이 개변해야 될 음주문화 문제 등으로 수두룩하다. 단꺼번에 다 해결할 사항들도 아니다. 그럼 오늘 신화통신의 탐방기를 실으면서 연변의 애로사항들이 하나씩 풀리면서 더 좋은 앞날이 다가오기를 기대한다. ▲화룡시 <진달래> 민속촌 전경ⓒ신화통신 아래의 글은 신화통신의 탐방기 <장백산하 새 노래편 ㅡ 길림성 연변주 탈빈공략 관찰>이다. 봄 파종철이 지나자 장백산하 해란강반에는 나뭇잎들이 푸르고 꽃들이 만개하면서 생기로 차 넘친다. 50여년 전, 연변에서 태어난 노래 <붉은 해 변강을 비추네(红太阳照边疆)>는 전국인민들로 하여금 변강건설에 뛰어든 연변의 각민족 아들딸들의 앙양된 투지에서 감동을 받게 했다. 당의 18차 대표대회 이래 이곳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각민족 인민들은 지속적으로 분투하여 오늘날 모든 <빈곤현(贫困县)>들이 <빈곤모자>를 벗어던졌다. 전통 맛 여전하나 삶의 나날 날로 풍족해져 화룡시 동성진 동광촌은 포장이 된 마을길과 집집마다의 울안이 매우 깨끗했다. 조선족촌 박춘자 여성은 주방에서 작으마한 밥상을 들고 나왔다. 상위에는 배추김치, 된장과 소고기, 명태 등이 깨끗한 접시에 담겨져 있었다. "우리의 생활은 아직도 된장을 떠날 수 없어요. 하지만 삶의 나날은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났죠. 모든 것이 날로 풍족해지고 있는거죠." 박춘자 여성의 기억에 따르면 연변 조선족의 노동과 생활은 많은 변천을 겪어 왔다. 그것은 현재 연변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사진에서도 보아낼 수 있다. 가대기에 소를 메워 밭갈이를 하고 바지가랭이를 걷어 올리고 모내기를 하고 또한 낫을 들고 벼 가을을 하고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야말로 이 땅에 첫 보습 날을 박던 그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삶의 희노애락은 이루다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진달래 민속촌에서 촌민들이 휴식의 한때를 즐기는 장면ⓒ신화통신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인구는 214만명, 이 중 조선족은 36.3%를 차지하며 길림성 2대 특별 빈곤지구 중 하나였다. 연변의 8개 현,시 중 4개가 국가 부축 빈곤현이었으며 2012년 말에는 빈곤 발생율이 29%에 달하였다. 연변의 변화는 빈곤부축사업의 항목의 겨냥조치로부터 추진되었다. 왕청현 조원 소목이산업원(桃源小木耳产业园)의 넓고 밝은 직장 내에 들어서면 로봇이 물건을 나르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왕청현은 장백산 임구에 위치해 있어 역사적으로 <흑목이버섯 천담현(黑木耳千担县)>이란 명칭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날에는 주로 수 작업식 생산으로 이뤄졌기에 생산량이 적고 질 보장이 잘 되지 않았기에 훌륭한 자원으로 훌륭한 수입을 바꾸어 오지 못하였다. 최근년래 왕청현에서는 종식표준화 시범기지(种植标准化示范基地)를 하나하나씩 건립, 도합 45개의 기지로 점차 국내 흑목이버섯 고가시장으로 만들었으며 목이버섯을 상품화하여 북경, 상해와 광주에까지 판매, 촌민들의 연 평균 수입이 3000-4000위안씩 증가되게 하였다. 이 외 용정시 동성용진 용성촌에서는 당지 용두기업으로부터 빈곤부축항목의 혜택으로 촌민 유경의가 사육하는 연변황소 고기가 호텔에 납품, 황소고기 매 킬로그램 당 150위안에 달했고 안도현 합신향에서는 <삼림황금>으로 불리는 상황버섯이 온도가 맞춤한 비닐하우스 안에서 자라고 있었다. 이 상황버섯은 킬로그램당 600위안 내지 700위안으로 그 비닐하우스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용정시 삼합진 천불지산(天佛指山)은 해마다 송이 따는 계절만 되면 일본과 한국으로부터 많은 상인들이 찾아와 값은 크게 따지지 않고 적극 주문하고 있단다… ▲화룡시 남평진 유동촌의 조선족 주택들ⓒ신화통신 다시 화룡시 동성진 동광촌의 박춘자 여성한테로 돌아온다. 충분한 해빛을 받아 이슬 머금고 자라는 농가원의 야채들, 박춘자 여성은 문턱에 앉아 마당 내 비닐하우스에서 자라는 매 한포기의 야채를 바라보면서 손가락 꼽으며 뭔가를 계산하고 있는 듯 했다. 50여년 간 노래소리 울리고 호매한 발걸음은 계속돼 연변 시인 한윤호가 노랫말을 만들고 연변적 작곡가 김봉호가 선율을 만든 <붉은해 변강을 비추네>란 노래는 50여 년간 불리워 왔다. 그리고 이 노래속의 <강물을 끌어올려 산에 올리네>란 놀라운 일은 오늘날 화룡시 숭선진 상천촌에서 현실로 되고 있었다. 당년에 이곳의 촌민들은 <사이펀(倒虹吸)> 원리를 이용하여 두만강의 물을 60미터 높이에 있는 산위에 끌어올려 그 곳을 비옥한 논으로 되게 했다. 상천촌 당지부서기 박동섭에 따르면 지금 상천촌의 입쌀은 브랜드로 되어 높은 가격으로 내지에 팔리고 있다. 하지만 이 촌에서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전자상거래, 된장 가공과 향촌관광업의 발전을 탐색하고 있는 중이었다. ▲도문시 석현진 합흠 농민전업 합작사 농민들이 비닐하우스 안에서 작업하는 장면ⓒ신화통신 화룡시 남평진 유동촌에 가보면 85후의 청년 김호가 대졸 후 주동적으로 귀농, 촌민들을 이끌고 오미자 재배, 민속관광지 건설 등을 추진, 촌민들을 위해 농구장과 게이트볼 경기장(门球场)을 앉혔으며 집집마다 수세식 변기를 갖춘 화장실을 갖추게 했고 노인들로 하여금 매일 점심 때마다 노인들한테 영양식을 무료로 제공하군 했다. 그리고 왕청현 천교령진 천평촌에서는 뭔가를 해야겠다고 작심한 촌 당지부서기 윤학의는 자기의 아내를 촌으로 <초대>했다. 부부가 손잡고 탈빈 목표를 이룩하자는 심산이었다… 변강의 한 모퉁이에 위치해 있었지만 연변의 빈곤탈퇴 사업은 고군작전이 아니었다. 2016년 10월, 절강성의 녕파와 연변은 동서부 빈곤부축 협력을 갖기로 하고 22개 기업이 육속 연변에 자리를 잡았다. 이들은 <논공유(共享稻田)>란 명목으로 빈곤부축 항목을 제정, 연속 2년간 화룡시 1.4만 뙈기의 논에서 생산된 입쌀을 도맡아 인수하는 것으로 2000여명 빈곤인구의 수입증장에 크게 이바지했다. 2019년 4월, 연변의 화룡시, 용정시와 도문시가 <빈곤모자>를 벗었고 올 4월에는 안도현과 왕청현이 <빈곤모자>를 벗으면서 연변의 모든 시현들이 빈곤탈퇴에 성공, 2016년 이래 전 주적으로 304개의 빈곤촌이 <빈곤행열>에서 나왔고 2.9만호, 4.9만 명에 달하는 인구가 빈곤에서 벗어나면서 연변의 각민족 인민들은 새로운 출발을 할 기점에 설 수 있게 되었다. ▲남평진 유동촌 촌민이 집에서 벽에 장식품을 걸어놓는 장면ⓒ신화통신 피어난 꽃 특별히 붉고 <실크로드(丝路)> 천하로 통한다 빙설중에도 꽃은 피어나고 산비탈의 진달래는 더더욱 아름다워라. 이는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조선족 인민들의 무한한 추구를 뜻한다. 용-포 고속도로(용정으로부터 돈화시 대포자하진에 이르는 고속도로)의 한 중간 대교 아래에는 백년 역사를 갖고 있는 조선족 마을 ㅡ <진달래> 민속촌이 있다. 현재 이 마을은 <연변속의 민속촌>보다는 <중국속의 민속촌>으로 더욱 통한다. 이 마을에서는 떡볶이, 냉면과 장고춤, 가야금 등 조선족 특색 관광상품으로 지난해만 해도 국내외 관광객 40여만 명을 유치했다. 이 마을의 촌민 이월순 여성은 원래의 주택을 개조해 민박을 차렸는데 이로부터 나오는 수입은 그야말로 쏠쏠했다. “반평생 농사만 해오다가 오늘 와서 사장님(老板)으로 불리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죠.” ▲화룡시 숭선진 상천촌 촌민이 밭에서 트랙터로 작업하고 있는 장면ⓒ신화통신 화룡시에는 일명 <진달래실크로드(金达莱丝路)>란 전자상거래 플랫폼이 있으며 실체의 가게에는 상황버섯, 꿀, 목이버섯 등을 진열, 모두 조선족 특색의 <포장>을 하였다. 예하면 입쌀은 월병처럼 조선족 특색의 선물세트로 포장했고 쿠션(抱枕), 벼짚 수공업품 등에도 조선족 특색의 글발이 아주 선명하게 새겨 넣었다. 이는 북경에서 온 어느 한 작은 젊은 지원팀에서 모색해 낸 아이디어로 이들은 당지의 빈곤부축 특산으로 조선족 특색의 브랜드를 창출, 전자거래의 플랫폼을 통해 전국에 판매했다. 이렇게 하찮고 고생스럽게만 보이던 것이 빈곤부축의 아름다운 산업과 창업의 낙원으로 되었던 것이다. 연변에는 <진달래 실크로드>만 있은 것이 아니었다. 지난 5월 15일, 220개의 컨터이너에 옥수수를 실은 <바다실크로드 1호>가 청도항에 입항했다. 이는 <훈춘-자르비노(러시아)-청도> 항선의 첫 항행으로 <훈춘-자르비노-주산> 항선이 개통된 후에 있은 또 한 갈래의 국내 무역화물이 국경을 벗어나 운송하는 항선이었다. <항구를 빌어 바다로 나가는 새로운 아이디어>로 일찍 개방발전의 <제한적 구역>에 있던 연변으로 놓고 볼 때 이는 대해로 향하는 새로운 발걸음임에 틀림없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6-05
  • 천마는 빛을 가른다.
    ● 김경화(재중동포작가) 소천수편 오늘 아침, 나는 강가에 세수하러 나갔다가 녀자 하나를 만났슴다. 보라색치마에 기인 생머리의 날씬한 녀자의 뒤모습이라니. 녀자는 아리도록 하아얀 손으로 눈처럼 하얀 수건을 강물에 헹구는것이였슴다. 순간, 나는 마술에 걸린듯 선자리에서 한치도 움직일 수 없었슴다. 녀자, 나리꽃처럼 싱싱한, 꿈에서나 그리던듯한 그런 녀자가 내 앞에 생생히 살아 숨쉬는 것이였슴다. 꿈인가? 환각인가? 그때, 녀자가 돌아섰슴다. 나는 그만 숨이 따악 멎는 것만 같았슴다. 하이얀 얼굴에 가느다란 눈, 작은 얼굴에 오목조목 반듯한 이목구비의 녀자였슴다. 나이는 어림잡아 스물서넛? 까만 블라우스에 보라색치마의 녀자는 허리가 개미처럼 가늘었슴다. 《천수오빠 맞죠?》 어데서 흘러나왔을가. 맑은 샘물이 바위우에 잔잔히 부서지는듯한 맑고 명쾌한 구을음. 어데서 본듯한 얼굴의 녀자였슴다. 혹시 나는 꿈에 이 녀자를 봤을지도 모르겠슴다. 《저 정혜예요.》 허벅지를 가만히 꼬집었슴다. 아파났슴다. 《야 너, 정혜구나. 야 너 언제 이렇게 처녀가 다 된거니? 참 오래만이구나. 사범학교에 붙었다고 니네집에서 초두부하던 날 보고는 아마 처음이지? 야...》 나는 과장되게 야 하고 소리지르며 정혜의 어깨를 툭 쳤슴다. 두서없이 내뱉은 인사말이 나 스스로도 어이없어서 그랬는지두 모르겠슴다. 정혜의 어깨가 꿈틀했고, 나는 손을 오므려 주먹을 쥐였슴다. 《네. 4년만에 왔어요. 그럼 나중에 또 보죠.》 손을 마주 비비며 정혜가 고개를 까땍했슴다. 그래서 보니, 시린 강물에 정혜의 손은 빠알갛게 되여있지 않겠슴까. 《어. 그래. 나중에 보자.》 나는 아름답고 싱싱한 녀체가 내 앞을 지나쳐서 저멀리 점점이 사라질때까지 넋을 놓고 있었슴다. 가슴이, 웬지 까닥없이 가슴이 부풀어오르고, 꿀을 먹은듯 마음 한구석이 달착지근해났슴다. 벌렁벌렁 뜨거운 가마솥안에서 끓고있는 콩비지처럼 가슴이 작은 부품으로 가득 차 오르는 이 설레임, 먼가 달라질것 같고 좋은 일어날것 같은 기분, 얼마만임까 나는 괜히 신이 나서 푸덕푸덕 세수도 여느때보다 걸싸게 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까닥없이 돌멩이도 툭툭 차면서 꼭 철없는 개구쟁이가 되였슴다. 그러면서 아까 어깨를 너무 심하게 치지 않았나 하는 걱정도 했슴다. 정혜가 아프지 않았을가? 에익, 우둔한넘. 청산리 여기는 녀자가 금싸래기보다 더 귀한 존재임다. 개혁이요 개방이요 하는 바람이 시골에까지 불더니 녀자들이 잘 나가는 세상이 갑자기 돼버렸슴다. 누가 먼저 선코를 뗐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나 둘, 떠나가는가싶더니 이제 마을에 젊은 녀자란 찾아볼 수 없슴다. 마을에 남은건 할머니들이나 나이 지숙한 아줌마들, 그리고 부우연 떠꺼머리총각들과 안해를 바깥세상에 내보낸 새시대 홀애비들뿐임다. 마을 어데를 가나 온통 가고 간다는 이야기들뿐임다. 누구도 이제 어데로 간다오. 우리도 빨리 어데 가야겠는데. 어데로 가려구? 글세 모르지. 가긴 아무데나 가야겠는데. 글세 어데루 갈지? 한숨과 신세타령뿐임다. 누구는 어떻게 목돈 벌고 누구는 한국에, 일본에 가서 몇년있더니 몇십만원 쥐고 와서 시내서 식당을 꾸리고 경리가 되고 그런 소리만 여기저기 란무함다. 이 황량한 시골, 그러나 나의 꿈은 결코 황량하지 않슴다. 나의 별명이 무엇임까. 백번 넘어지면 백한번 일어선다는 불사조 오뚜기 천수가 아님까? 여섯살때인가. 엄마는 마을로 다니는 트럭운전수랑 눈이 맞아서 야밤도주를 했슴다. 얼굴도, 뒤모습도 아무것도 기억에 없슴다. 냄새, 알싸한 살구씨같은 냄새만 코끝에 아직 쟁쟁하게 매달려있을뿐임다. 청산리 소만국의 아들로 태여난 죄로 하고싶은 공부도 못하고 초중을 중퇴하고 여기 청산리에서 소궁둥이를 두드리게 된 나임다. 그렇지만 나는 여느 농촌총각들과 다름다. 힘들어도 슬퍼도 묵묵히 혼자서 울고, 혼자서 모든걸 이겨내야 했던 나는 기인 어둠의 턴넬같은 세월속에 순금처럼 단단해진것임다. 나한테 이제 더 큰 시련이 무엇이겠슴까. 남은건 오직 오기뿐임다. 죽지 않으면 살기라는 악에 가까운 오기, 그것이 있는한 나는 결코 씩씩하게 앞을 향해 달리기만 하는 소천수일것임다. 명마는 앞만 보고 달린다는 말도 있지 않씀까? 작가, 작가가 될것임다. 이 시대의 별같은 존재로, 혜성처럼 반짝 떠올라서 적어도 연변문단을 놀래우고, 조선족문단을 뒤흔들것임다. 그리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녀자와 사랑할것임다. 8년째 제대로 된 결혼식한번없고, 아이울음소리 없는, 전 주 산아제한모범촌인 청산리에 획기적인 사변을 일으킬것임다. 웃마을 강아무개처럼 물건너녀자나 들이지는 않을것임다. 중간마을 최아무개처럼 아이 딸린 째보과부를 들이지도 않을것임다. 코방귀를 힝 뀌면서 연길로 간 미숙이나, 한국에 시집간 혜자나, 산동으로 간 금자같은 그런 머리에 든거 없고, 허영심만 잔뜩 차서 청산리총각들은 사람취급도 안하는 녀자애들이 눈자위가 휙휙 뒤집힐만한, 오뉴월 오이처럼 쭉 빠지고, 햇감자처럼 하얗고 부드러운 녀자를 한명 찾아서 이 천수의 녀자로 만들것임다. 작가가 되고, 그리고 이름을 날리고, 그렇게 되면 어느 모모한 잡지사에서 편집이나 기자로 초빙해줄지도 모르는것이 아님까? 동팔이 나하고는 짜개바지친구로 어릴때부터 단짝이였던 녀석임다. 하루살이, 오늘 하루 배불리 먹고 즐거우면 땡이라는것을 무슨 신조처럼 수호하고 사는 녀석임다. 녀석은 허구헌날 추렴이고 술임다. 다른건 제쳐놓고 기름개구리가 금값인 봄에도 얼음장 끄고 몇마리 붙잡았다 싶으면 그 길로 아궁이에 불을 때서 개구리탕을 하고 봉지술을 외상으로 가져다가 친구넘들을 불러모으는것임다. 늙은 엄마가 전기세 낼 돈이 없어 십원 꾸러 온 동네를 도는판인데 녀석은 그게 목구녕으로 잘도 넘어가나봄다. 아니꼬바서 녀석하구의 술자리는 절대 사양임다. 맨정신일때 만나면 따끔히 핀잔도 주지만 녀석은 머라는지 암까. 《야, 장가를 가거나 잘살기는 백번도 틀린 우리가 아니냐. 넌 뭘 믿고 그리 새파랗게 기가 살아있냐. 미친넘. 너나 나나 빤한 인생 아니냐구. 우리가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무슨 재미에 산다더냐.》 고래고래 소리지르는것임다. 《누가 너랑 같냐? 지랄하고.》 나는 녀석을 한대 패줄 조짐으로 눈을 부릅뜸다. 《어휴. 그래 제발 출세해다오. 친구야.》 녀석의 푸념질임다. 눈 크게 뜨고 기대해라 녀석 이제 이 소천수는 작가가 돼고 그리구 청산리에서 제일 이쁜 윤정혜의 팔을 끼고 활보할것이니. 《째애액, 꽤애액, 긁긁,》 나의 치륜같은 인생상념에 먹물을 뿌리고 비바람을 때리는 소리. 《망할넘의것,》 나는 마구 갈겨쓴 노트장을 손으로 한번 쓰윽 문지르고는 덮었슴다. 들미나무무늬로 된것인지를 손으로 문질러봐야 알수 있을정도로 카아맣게 그을은 옷장의 왼쪽구석에 노트를 깊숙히 집어넣고 부엌으로 가서 솥뚜껑을 열어젖혔슴다. 시큼털털한 돼지죽냄새가 코를 푸욱 찌름다. 《꿀꿀꿀 앙앙》 점심때가 훌쩍 지난때까지 배를 쫄쫄 굶다가 급기야 구유를 딛고 올라서서 괴성을 지르던 돼지들은 한바게쯔 골똑 담아서 훌쩍 쏟아주는 먹이에 너무 감격해서 이상한 신음까지 발하며 마구 탐닉함다. 늦가을날씨는 제법 쌀쌀함다. 할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로인독보조에 무슨 활동이 있다고 가시고, 지금은 이 푸른 10월의 뜨락에, 나 홀로 서있슴다. 그래, 잘 크거라. 혹시 니넘들이 이제 내 색시감한테 끼워줄 반지가 될지도 모를일이니. 갑자기, 마음속에 쓸쓸함이 썰물처럼 밀려옴다. 작가가 되겠다고 이를 앙다문지도, 2년이 훌쩍 넘었슴다. 여기저기 보내놓은 원고들은 전부가 물세태에 밀려간 제방뚝처럼 묘연함다. 쓸쓸함다, 외롭슴다. 실의감이 온몸을 엄습함다. 작가가, 작가가 아니면 어떻슴까. 그냥 신문한구석에 손바닥만하게 소천수 라는 내 이름 석자가 활자로 찍혀 나오기만 해도 좋겠슴다. 그리고, 쭉쭉빵빵이 아니면, 어떠슴까. 그냥 우둥퉁하고 거무틱틱해도 좋으니 제발 녀자를 하나 달라고 하나님께 여쭙고싶은 심정임다. 도시가 아니면 어떻슴까. 이 청산리에서 함께 봄이면 나물도 뜯고 겨울이면 낫자루부업도 같이 하고 그러면서 알콩달콩 살아갈 그런 녀자만 있으면, 정말 세상이 살맛 날것 같슴다. 자가용승용차에 양복입은 인생만 인생이겠슴까? 덜렁거리는 소수레에 나 하나만 사랑하는 안해를 싣고 이 풍요로운 청산리를 누비는 재미도 쏠쏠할게 아님까. 그러면, 더는 이 마음이 가을을 끝낸 저 벌판처럼 허전하지 않을것이라는 생각임다. 저 지겨운 소똥냄새도 싱그러울것 같슴다. 나에게도 녀자가 있었슴다. 천수야, 하고 눈웃음치며 옆구리를 쿡 찌르던 녀자, 작은 키를 감추느라 하이힐을 신고, 엉뎅이가 커서 걸을때면 우스꽝스럽게 뒤뚱거리던 녀자가 있었슴다. 황금자, 황금자가 있었슴다. 나보다 한살 어리고, 서너집 사이두고 살던 황금자가 있었슴다. 함께 소학교를 다니고, 중학교를 다니고, 함께 청산리에 돌아와서 소궁둥이를 따라붙어야 했던 황금자가 있었슴다. 그러나, 어느날부터인가, 내앞에서 금자는 자주 한숨을 쉬였고 신경질적으로 호미를 쥐여뿌리군 하였슴다. 나는 그런 금자를 새벽이슬처럼 소중히 사랑했었음다. 돼지풀도 뜯어다가 마당에 놓아주고, 버들치도 잡아다가 끓여먹으라고 주고, 개암이며 잣도 뜯어다주었슴다. 그러나, 금자는 간간히 시내에 드나들면서 싸구려화장품도 사다가 찍어바르고 로천시장에서 파는, 날나리 싸구려치마도 사입고 하더니, 어느날 쪽지 한장 달랑 남기고 증발해버렸슴다. 천수야, 넌 참 좋은 남자야. 그런데 난 청산리가 너무 싫어. 지겨워. 기음매는것도 지겹고 소울음소리도 지겹고 모든게 진저리나. 나 연길로 간다. 친척언니가 연길 어느 식당에서 출근하는데 복무원자리는 많으니 오라구 편지가 왔구나. 미안해, 천수야. 칙칙한 흙냄새뿐인 이 청산리에서 썩고싶지는 않구나. 행복해라. 안녕. 나는 으드득, 소리를 내며 쪽지를 갈기갈기 찢어서 방구석에 버렸다가 주어들고 앞내가로 달려가서 강물에 쓸쓸히 쓸쓸히 날렸슴다. 죽여버릴, 순이도 가고, 봉자도 가고 다 떠나가도 너만은 내곁에 남아주리라 했는데. 아니, 어쩌면 니가 이렇게 떠나갈것임을 나는 알고있었을지도 모른다. 알고있었기에 남아주리라 더욱 굳게 믿으라고 자신한테 강요한것인지도. 그리고, 그날저녁 나는 아버지가 마시는 배갈 한병을 그대로 굽내고 방구석에 뻗어버렸슴다. 우웩, 우엑, 쓰디쓴 열물이 올라왔다. 눈을 뜰수가 없었슴다. 그날밤, 할머니는 눈굽을 찍으며 밤이 가고 아침이 오도록 손자의 구토물을 닦아내야 했음다. 그리고, 그날 그 이후, 나는 황금자를 그 밤의 쓰디쓴 열물과 함께 깨긋이 씻어버렸슴다. 첫사랑이라고 첫사랑일수도 있는 그런 아릿한 마음의 추억을 어찌 그리 쉽사리 잊을수 있냐고 하겠지만 나는 그게 아님다. 지나간 감상에 젖어서 연연하는건 나의 인생관이 용납을 못하는 부분임다. 그렇게 억지로 망각의 강에 사형을 주고 처넣었던 황금자를 나는 기분좋게 떠올릴수 있었으니. 아침에 만난 정혜때문이였슴다. 황금자가 무엇이겠슴까. 저 한마리의 비둘기같이 상큼한 정혜에 비하면 그야말로 발가락틈새의 무엇에도 못미칠 미물이 아님까. 정혜는 마을에 눌러있었고 얼마후에는 책을 끼고 마을에 있는 소학교로 출퇴근하였슴다. 거의 페교직전인 학교라 교원이 달랑 두명으로 겨우 버티고있던차라 교장선생이 일본가기직전까지만이라도 애들을 가르쳐줄수 없겠냐고 정혜한테 제의를 해왔다는 소식도 함께 듣게 되였슴다. 정혜. 아주 어린 아이때부터 공부도 잘하고 얼마나 야무졌는 모름다. 박녀인과 일밖에 모르기로 소문난 아버지가 그런 정혜를 극진히 뒤바라지했고 화룡에서 초중을 다니더니 어느날 정혜는 마을의 자랑으로 사범학교에 철썩 붙었지 않슴까. 이제 4년세월을 거쳐서 다시 나타난 정혜는 완전 하야말쑥하고 쭈욱 빠진 도시아가씨가 된것임다. 괜히 꿀을 먹은듯 마음이 달착지근해남다. 농사일도 열심히 하고, 농한기에 채석장에 가서 돌도 캐겠슴다. 때갈나는 멋진 남자의 모습을 정혜한테 보여주어야겠슴다. 그날저녁, 내 일기장에 녀자이름 석자가 박혔슴다. 윤정혜 윤정혜편 가을, 하늘이 훌쩍 저만큼 높아진 계절, 창문밖으로 지나가는 바람이 제법 차갑게 얼굴을 스칩니다. 때국이 줄줄 흐르고 학년도 나이도 맞지 않는 애들, 교실벽은 언제 회칠한지 모를정도로 거무틱틱해서 더욱 마음이 산란합니다. 대학생이 길 가다가 벼락맞기보다 더 힘든 이 산골에서 사범학교로 갈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했던가요. 나는 오직 폼나는 교원이 되여 또 한번 청산리의 자랑거리가 될 야망으로 부풀었습니다. 그러나 사범학교문에 발을 디디던 그날, 나는 내가 내 머리우에 보이는 하늘만 파란줄 알았던 시골뜨기 개구리였음을 알아야 했습니다. 내가 가지고있던 옷중에서 제일 근사한 옷을 정성껏 다림질해입고 온 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가슴설레며 깃을 세운 다림질마저도 후회해야 했습니다. 꼿꼿이 깃을 세운 하얀 셔츠와 칼날같이 주름잡은 깜장바지가 나의 촌냄새를 더해준 격이 되였으니 말입니다. 등교 첫날, 그렇게 다림질을 반질반질하게 한 셔츠를 목단추까지 꼭꼭 잠그고 나타난 애는 나 하나뿐이였습니다. 눈물이 자칫 보일가봐 신발코를 잔뜩 세워 애매한 땅바닥만 문지르던 그 소녀를 나는 아직 잊지 못합니다. 공부를 잘하자, 그것만이 내가 할수 있는 최선이다. 그러나 공부에 대한 우월감은 수업시간외에는 아무 소용도 없었습니다. 청산을 떠나 화룡에서 3년동안 중학교을 다니면서 그래도 어중간히 도시물을 먹었다고 생각했던 나였는데. 그게 아니였습니다. 나는 촌뜨기녀자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였습니다. 기숙사에서, 식당에서, 수업없는 시간에 나는 도처에서 작아지고 초라해져야 했습니다. 겉보기에는 그냥 꾸미지않은듯한 차림같으면서도 묘하게 풍기는 귀티같은것, 그런것땜에 당당해보이고 자신감으로 환해보이는것들. 나는 그런것들앞에 심하게 초라해지는 렬등감때문에 코를 높이 세우고 다녀야 했습니다. 그런 렬등감은 점점 추워지는 날씨와 더불어 더욱 심해져만 갔습니다. 돈, 돈이다. 돈이 사람을 빛나게 하고 당당하게 하는것임을 알았습니다. 거의 11월이 다가도록 홑잠바를 입고 새파랗게 얼어다니면서 나는 돈의 중요성을 뼈속까지 감지하고있었던것입니다. 돈에 대한 절박감이 이렇게 사무친것은 처음이였죠. 성보옷상가, 서시장에서 싸구려옷을 살가 했지만 그 싸구려옷을 입고 애들앞에 나설바에는 차라리 홑잠바로 얼어다니는게 나을것 같은 내 자존심. 《이 옷 입어봐도 돼요?》 장사군아줌마는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마지못해 옷을 내주었습니다. 니 주제에 이런 비싼옷을 살수나 있겠니 하는 야유, 나는 알듯말듯한 아줌마의 웃음을 야유라고 생각했고 거의 오기로 돈을 꺼내뿌렸습니다. 기숙사에 오니 애들이 난리입니다. 《어머, 너 웬일이니. 셔츠에 잠바만 입고 다니더니, 니네집 농촌에 있다해서 어려운줄 알았더니 아닌가보네? 이거 브랜드인데. 와 이쁘다.》 《우리 아버지가 청산에서는 좀 이름있어. 목재장사를 하거든, 내가 워낙에 소박해서 엄마한테 핀잔만 듣지 머. 여기 올때 핸드폰 잃어버린거 아직 못샀는데 아까 보니 마땅한게 없어서 안샀다.》 《오, 너 그래서 폰이 없구나. 글세 요즘 폰없는 사람이 어디있나했지.》 나는 그날저녁, 처음으로 그애들과 같은 선우에 선 자호감을 느낄수 있었습다. 얼마 안지나 내 손에 핸드폰이 쥐여졌고 결국 그렇게 반년치 생활비를 한달반도 안되여 모두 써버리고말았습니다. 좋은 옷을 입고 애들과 어깨를 겨누며 어울려 다니고 핸드폰을 들고 다니고 그러나 마음은 한없이 초조했습니다. 돈은 바닥나고, 집에다가 더이상 손을 내밀수도 없고 손을 내밀어봐야 농촌에 이 겨울에 무슨 돈이 있겠습니까. 가정교사를 할가고도 했지만 애들앞에 아버지가 목재장사를 해서 부자라고 땅땅 소리친 내가 어찌 그것을 한단말입니까. 설사 한다해도 한시간에 십원되는 과외비로 무엇을 할수 있겠습니까. 두 얼굴, 두 얼굴을 가지고 살았던 4년입니다. 그 4년동안 내가 어떻게 열심히 공부하는 시골부자집딸과 짙은 화장과 용염한 웃음으로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삼배동아가씨의 두 얼굴로 살아왔는지 누구도 모를것입니다. 그것은 아마 무덤까지 갖고가야할 나만의 엄청난 비밀일것입니다. 청산리사람들에게 나는 공부잘하고 착하고 순수한 천사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찌 나의 하얀 피부에 슴배인 고급로션의 출처를 알것이며 나의 몸을 감싸고있는 브랜드의 아픔을 알것인지요. 졸업을 했지만 요즘 사범학교 졸업장들고 어데로 가겠습니까. 친구들은 더러는 든든한 뒤심덕분에 모두의 선망의 눈길을 받으며 교원이거나 방송국이거나에 취직을 했고, 더러는 연해도시로, 더러는 류학준비로 드바빴습니다. 그러나 나는 뒤문도 없지만 4년동안의 아픔으로 달구어진 이 도시에는 더이상 머물고싶지 않기도 하였습니다. 멀리멀리 해외로 류학을 가서 좀 더 나은 삶을 살고싶었습니다. 그러나 만만치 않은 류학비용을 농사일하면서 내 뒤바라지를 하느라고 집에 땡전한푼없이 된 부모님한테 내놓으라고 할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졸업만하면 동생의 뒤치닥거리까지 내가 다 맡을거라고 큰소리치던 나입니다. 나는 어쩔수없는 길 하나를 선택하기로 했습니다. 일본으로 류학을 떠나는 민정이한테 일본에 가게 되면 돈깨나 있는 남자를 소개해라고 부탁했습니다. 부모님이나 이 시골사람들이 사범학교를 무슨 하늘에 별마냥 크게 보지 요즘 그거 가지고 어데다 견주려는 그 자체가 얼마나 우둔하고 무모한것인지를 세상은 압니다. 마을사람들이나 부모들한테는 일본쪽 대학교에서 류학으로 모든 학비를 면제하고 데려가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부모님은 기뻐서 어쩔줄 몰라하고 마을사람들도 모두 부러워합니다. 민정이가 일본에 가서 정착하고 남자를 소개해오려면 조금 시간이 걸릴듯하니 그동안 집에서 조용히 쉴참으로 고향에 온 나입니다. 솔직히 그동안 몸과 마음이 너무 지친 나입니다. 교장선생님이 애들을 가르쳐달라고 찾아왔습니다. 어차피 할일도 없는 터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교원이 하고싶었지 않았던가요? 나는 흔쾌히 대답했고 지금은 그렇게 되여 애들을 가르치고있습니다. 세수하러 나가는 길이나 출퇴근길에 항상 부딪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천수오빠. 새벽안개를 헤가르며 이백여리길을 달려 집으로 온 그 아침, 짐을 풀고, 강가에 세수하러 나갔다가 돌아서던 그때, 나는 우연찮게 천수오빠를 보게 된것입니다. 오빠는 헤벌쩍 나를 향해 웃고있었습니다. 참 불쌍하고 괜찮은 남자죠. 엄마도 없고 할머니와 아버지손에서 자랐다지만 이 시골에서도 기를 잃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남자입니다. 어느때는 금자언니와 쉬쉬한 소문도 있더니, 금자언니는 연길에서 노래방아가씨로 나간다던데 오빠는 그걸 알고있는것일가요? 어느새 떠꺼머리총각으로 부옇게 된 오빠를 보고 4년전과는 많이 겉늙고 초라해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새, 오빠가 많이 늙은걸가요. 아니면 내 눈이 변한걸가요. 천수오빠뿐아니라, 마을에 오빠네또래들을 둘러봐도 하나같이 구질구질한 농부의 모습입니다. 하긴 앞뒤가 산으로 꽉 막힌 이 골안, 젊은 녀자라고는 찾아볼수 없으니 그들에게 무슨 활력이 있겠습니까. 어제저녁에 천수오빠는 책 빌러 왔습니다. 잡히는대로 소설책 한권을 건네주니 오빠는 두통수를 긁적긁적하며 나가버립니다. 글을 쓴다고, 소설가지망생이라고 합니다. 혹시 오빠가 정말 소설을 써낼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초중중퇴한 청산리남자라고 소설가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글 한편이 술 한끼값도 안되는 이 시대임을 오빠는 과연 알고있는것일가요? 한때, 나도 작가가 되고싶었던 아름다운 소녀의 치기다분한 꿈이 있었습니다. 백일장에서 무슨 무슨 상이며도 안아왔고, 학교의 벽보란에 자주 내가 쓴 작문이 나붙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중학교시절부터 나에게 글짓기를 가르치던 h선생님, 서른다섯에 겨우 장가를 들어서 코딱지만한 세집에서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겨울이 오도록 새물나는 옷 한벌 안해에게 사주지 못하는 그 선생님을 보았을때 나는 까닭없는 회의를 느꼈습니다. 어느 양고기꼬치집에서 밤중까지 주방일을 하는 안해의 월급을 쪼개는 h선생님, 그 흔한 금반지 하나 못사주고 조촐하게 치르는 결혼식하며, 결혼한지 삼년만에 찾아온 아이의 흔적에 기쁨보다는 걱정으로 한숨쉬는 선생님, 그 선생님을 보면서 나는 글쓰기라는것에, 작가라는것에 회의를 느꼈습니다. 광고지를 보면 봤지 책을 안보는 이 시대가 아닙니까. 작가가 차닭알파는 아줌마보다도 못할수 있는 이 시대, 밉고 저주스럽지만 그러나 그 누가 이 시대를 거역할수 있겠습니까. 더러운 돈이고 머고 하지만 그러나 그건 없는자의 투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4년동안 두 얼굴의 생활을 하면서 내가 뼈저리게 느낀것입니다. 정승처럼 벌던 거지처럼 벌던 돈은 역시 돈이 아닐가요? 이 시대, 작가, 누가 감히 작가이려 하겠습니까. 그리고 누가 감히 작가의 안해이려 하겠습니까. 밤을 패며 눈을 집어뜯으며 어렵게 품은 글 한편으로 근사한 술 한잔 마실수 없는 이 시대에 작가가 되겠다고 덤비는 저 남자. 작가가 될테니, 폼나게 상도 받아올테니, 그때 니가 내 녀자친구가 되여줄래? 하고 짓꿎은 롱담을 던지는 저 남자. 철딱서니없다고 할가요. 세상을 모른다고 할가요. 저 어이없는 꿈에서 어서빨리 깨였으면 좋겠습니다. 차라리 도시에 가서 짐을 나르면... 저 마른 몸에 무슨 짐이나 나를수 있을지... 그러나, 아버지는 오빠가 채석장에 가서 뫼를 휘두르는 그 솜씨가 혀를 내두를 지경이라고 합니다. 어데서 그런 힘이 솟는지 쉬지 않고 메질을 서른개씩 한다는 남자. 남자는 후줄근하고 먼가 실의에 빠져있는 이 청산리 남자들과 분명 먼가 다른듯합니다. 패기도 있고 괜찮은 남자라고 여겨집니다.. 나를 향한 그 애모쁜 마음도 가엾도록 지극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선우에 설수 없는 사람임을 어찌하겠습니까. 나는 날마다 노트에 거꾸로 수자를 적어갑니다. 지금은 가을이고, 3월, 정확히 래년봄이면 민정이가 일본남자를 데리고 내앞에 나타날거라고 편지가 온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안녕. 청산은 영영 나한테서 안녕이라고밖에 할수 없는 그런것이 되여버릴것입니다. 앞뒤가 꽉 막히고, 인터넷접속도 되지 않는 청산리. 휴대전화도 아예 먹통입니다. 수업이라야 학년도 맞지 않고 나이도 맞지 않는 애들한테 상식적인 교재강의나 할뿐입니다. 가끔 노래도 배워줍니다. 선생이란 나와 늙은 교장선생님과 사모님 셋뿐이니 어쩔수 있겠습니까. 남자인 교장선생님이 지리과와 체육을 맡고 사모님이 수학과 력사를 가르치고 내가 한어와 조선어문, 음악을 맡았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체육시간이랍시고 정해놓은 시간이면 아예 자유시간으로 정해버렸습니다. 마음대로 뛰여놀아라. 하다못해 메뚜기를 잡아도 좋다 이것입니다. 나는, 음정박자 뒤틀린 오솔길이며, 별과 꽃과 선생님이며를 애들한테 배워주곤 했는데 시골애들이라 그런지 나의 뒤틀린 음정박자를 꼬집지는 않습니다. 수업이 없는 토요일과 일요일은 가끔 집에서 엄마 일도 거들고, 그렇지 않은 날에는 뒤산에 들꽃도 꺽어다 물병에 꽂으면서 시간을 달랩니다. 밭에 나가서 엄마와 아버지를 돕고싶지만 엄마가 무섭게 제지합니다. 니가 어떤 딸인데, 너는 호미자루를 쥐여서는 안된다. 이제, 큰일을 할 너인데... 머리가 머리가 아파옵니다. 나들이를 할때마다 마을총각들이 떼거지로 따가운 눈총을 보내지만 나는 그냥 무시해버립니다. 다들 내 뒤모습을 뚫어지게 눈주어보거나, 사람좋은 웃음을 던지긴 하지만. 소천수, 그 황당한 남자외에는 대놓고 사랑할가요를 웨치지는 않습니다. 녀자라곤 없는 화량한 마을에서 청춘을 허비하는 저들이 그저 가엽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각자의 주어진 운명임을 어찌하겠습니까. 문화생활이란 캔맥주병이나 구리쇠줄을 엮어서 만든 안테나로 줄이 쭉쭉 건너가게 나오는 텔레비죤프로가 고작입니다. 그것도 길림채널만 나옵니다. 118, 99, 95, ... 점점 줄어드는 수자의 크기에 간간히 희열을 느끼며 나는 지긋지긋한 이 청산리에서의 하루하루를 보내고있습니다. 동팔이편. 이넘의 구질구질한 촌구석을 벗어나, 미끈한 처녀들 다리라도 마음껏 구경할수 있는 도시에 가서 비까번쩍하게 살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것인가. 그러나, 어찌어찌하여 운명이 청산리에 던져진 몸들이니 별수 없다. 도시로 무작정 출입을 해보기도 했지만 도시에도 실업자가 넘쳐나고는것이다. 배운것도 없고 돈도 없고 재주도 없고 그렇다고 빽도 없는 촌넘들이 도시에서 발을 붙인다는게 어디 쉽겠는가. 기껏해야 짐을 나르는 일이거나 삼륜차부거나 양고기꼬치집에서 불을 나르거나 하는 일밖에 차려지지 않는다. 그것도 웬만해선 차려지지 않는다. 덩치도 웬만해야 하고 그리고 특별히 양고기꼬치집같은데는 스물대여섯넘었다하면 벌써 볼장 다 본것이다. 어렵사리 요행 일을 얻어서 하던 누구누구도 두달을 못넘기고 청산리로 돌아왔다. 일도 일이겠지만 그 얼마 안되는 월급으로는 변두리에 석탄불때는 단층집을 세맡고도 밥을 먹기도 힘든것이니. 시골을 떠날때 돈을 벌어서 장가도 가고, 도시에 집도 사고, 그렇게 아름다운 희망으로 부풀었던건 다 대낮에 도깨비꿈이다. 밥도 먹기 힘든데 언제 돈을 모아 집을 사고 장가를 가겠는가. 그리고, 때국이 흐르는 옷차림을 하고 꾀죄죄해서 짐을 나르고 삼륜차를 모는 도시의 최하층총각들한테 누가 련애라도 하자고 하겠는가. 행여 농촌에서 도시로 온 처녀애들이면 혹시나싶어서 기웃거려보지만 천만에. 그런 녀자애들일수록 눈이 뒤통수에 가 붙어서 인간자체보다는 입은 옷의 상표나, 타고다니는 차가 무엇인지를 바람난 아낙네가 무엇을 밝히듯 밝히는것이다. 외국으로 나가서 목돈이라도 쥐고오면 좋으련만 그게 쉬운게 아니다. 리자돈을 꿔가지고 달아다니다가 빚만 지고 나앉은게 한둘이 아니다. 혹간 운수가 좋아서 한국이나 일본에 가서 떵떵 돈을 버는 총각들도 있다. 그렇지만 그 좋은 운수가 아무에게나 차려지는가? 녀자라고 생겨먹은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잘 나가는 시대이다. 배살이 추욱 늘어진 아낙네건 울퉁불하게 생긴 처녀애건 모두 시내로 나갔다싶으면 환골탈태를 해서 나타나는 세월이다. 그리고 이 청산리총각들을 왼눈에도 안본다는듯 할기죽거리며 집식구들까지 모두 휘동해서 도시로 데리구나간다. 《아들 낳은 집은 한숨뿐이고 딸 낳은 집은 금빛이 번쩍인다.》 요즘 우리 청산리류행가이다. 농사군의 자식으로 태여난이상 농사나 곱도록이 지어야겠지만 우리가 열심히 기음매고 가을할 기분이 나겠는가? 모든것은 음양의 리치에 맞아야 잘 돌아가는 법인데 아주 음이 고갈되였으니... 아무리 농사가 돈이 안된다지만 그래도 열심히 하고 부업도 짬짬이 하면 그런대루 돈은 된다. 한족들은 맨몸뚱이 하나만 달랑 끌구와서 거지처럼 자리를 붙이고 남의 삯일을 하더니 장가도 들고 애도 낳고 이제는 아주 이 청산리에 벽돌집을 짓고 오토바이 굴리며 떵떵거리며 산다. 마을의 소매점도 한족들이 꾸린다. 대신 매상고를 올려주는건 조선족청년들이다. 그렇지만 우리 탓만은 아니지 않는가? 세월이 그렇구 녀자도 없고, 희망도 비전도 없는데, 뭐하겠는가. 술이나 먹자. 물론 우리도 저 한족들처럼 지긋이 늘어져서 농사짓고 부업을 하고 그러면은 지금보다는 낫게 살수 있겠지만 저눔들처럼 살기는 싫다. 인생이 얼마라구 저렇게 살가. 돈을 벌려면 외국돈을, 뭉치돈을 벌어야지 언제 저런 소비돈을 한푼두푼 모으겠는가. 일년가도, 맥주상자 한번 들고다니지 않고, 개추렴 한번 안하고 일만 하고 하여간에 이상한 족속들이다. 술...그래도 술이 좋다. 알콜에 절으면 그 순간만이라도 우리는 캄캄한 기차굴같은 이 삶의 절망속을 벗어날수 있는게 아닌가. 이 청산리에 미친넘이 한명 있다. 소천수, 글쓰기가 무슨 길가에 마구 널려진 돌멩이를 주어모으는것인가? 작가라는게 어디 호박꼭지따듯 아무나 할수 있는건가 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초중도 제대로 못나온 저 친구는 자기는 세기를 놀래울 작가가 된다고 큰소리를 치는것이다. 가끔 술을 먹고 집에 들어박혀 먼가를 끄적거리다가는 우리한테 들키면 덴불에 놀랜듯 이불장안에 감추곤 한다. 소설을 써서 크게 이름을 날린다고 한다? 제 주제두 모르는 정신빠진 넘. 한때는 황금자하고 뛰뛰한 소문이 돌더니 금자가 도시로 가버리고나서 한때는 술에 빠니는가싶더니 이내 오뚜기처럼 발딱 일어서서 정신차리구 다닌다. 역시 오뚜기라는 별명에 무색하지 않은 천수다. 하두 거저 발딱발딱 일어서서 친구넘들이 지어준 별명이다. 천수아버지는 십년가도 누가 말을 시키지 않으면 아야 소리 한번 안내는 그런 사람이다. 친구들하고 잘 어울리지도 않는다. 어쩌다가 개추렴을 하거나 버들치라도 잡아서 술판을 벌리자고 찾으면 바쁘다고 손사래를 훼훼 내젓는다. 미친넘, 제가 그래봤자지. 지가 아무리 농사를 열심히 짓고 아무리 채석장에 가서 뼈가 부서지게 돌을 깨봐두 하루아침에 거렁뱅이가 벼락부자로 탈바꿈하랴? 처녀선생, 일본류학을 앞두고있는 청산리의 자랑거리~윤정혜, 그녀와 팔장을 끼고 활보할테니 기대하라고 큰소리를 쳐댄다. 아주 개구리가 기러기를 탐내는 꼴이다. 정혜가 누구인가. 우리같은 촌바우들하고는 달라도 너무 다른, 아니 비교조차 안되는 녀자다. 우리 마을에서는 참 드문 사범학교를 나온 지식인녀자. 게다가 얼마나 이쁜가. 갸름한 얼굴에 호수처럼 깊은 눈, 날씬한 몸매, 미인은 아니지만 무엇보다 산골녀자들에게는 보기 드문 박속처럼 하얀 피부가 너무 싱그러운 우리한테는 정말 그림에 떡일수밖에 없는 녀자다. 일본류학준비를 한다고 한다. 그리고 떠나기전에 집에 와서 잠간 쉬는것이고, 페교직전인 학교에서 애들도 가르치니 참 고향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하는것이다. 젊은 녀자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이 고장에서 정혜의 출현은 정말 거치른 들판에 부는 바람이라고 해야겠다. 청산리총각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정혜의 뒤모습이나, 사람을 감미롭게 하는 은은한 미소에 반하지 않은 이가 없다. 개추렴을 하거나, 이른저녁에 마을의 누구네 앞마당에 모여앉아서도 우리는 온통 정혜의 이야기에 몰입을 한다. 정혜의 살얼음우를 걸어가는듯한 상긋한 목소리며 아름다운 자태며에 입을 모은다. 그러다가 우리는 하나같이 실의에 빠져 멍청히 굳어버리는 것이다. 정혜, 그녀는 우리가 감히 넘볼수 있는 녀자가 아니라는, 그냥 바라보면서 한탄해야 하는 아름다운 무지개같은 존재라는것을 슬프게 깨닫는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슬프게 웨친다. 이제 얼마 안있으면 정혜는 떠나갈것이라고. 가끔 정혜한테 련애편지나 날려볼가? 하고 우리들중에 누군가가 싱거운 소리도 해보지만, 우리는 일제히 주제파악을 하라고 이마빡을 쥐여박아준다. 사람이 제 주제꼴은 알아야 되지 않는가? 그러나, 소천수 저 철없는 수송아지같은 넘아를 어찌하랴? 농사일만 해도 장난아닌데 전부 한족들뿐인 채석장에 끼여서 돌까지 캐고있다. 돈을 벌어서 커다란 보석반지를 산다고 한다. 그리고 그 반지를 정혜한테 끼워주고, 팔짱을 끼고 이 마을을 활보한다고 큰소리를 땅땅 치는것이다. 정혜가 일본류학을 떠난다는데, 그리고 너하고 정혜가 어떻게 한줄에 세울수 있는 공이냐고 누군가가 면박을 줬더니 당장 달려들어 드잡이라도 할 태세이다. 일본류학이 대순가고 한다. 보석반지를 사서 끼워주고 정혜랑 결혼한다고 한다. 그리고, 작가가 되고, 돈도 많이 벌어서 비까번쩍하게 정혜를 호강시켜준다고 한다. 웬 꿈이 저리도 야무지다냐 차라리 하늘에 별을 따오겠다고 하지. 그러나, 정혜에 대해 말할때 그 단호한 태도며 누구라도 정혜를 사랑하겟다고 하면 단박에라도 결단을 내고야 말듯한 저 비장한 얼굴을 좀 보라. 가을걷이도 다 끝났고, 이제 놀 일만 남았다. 그러나, 모든게 다 비여버린 황량한 들판이 웬지 더 쓸쓸하다. 날은 점점 추워진다. 땔나무를 하는것외에는 일이 없다. 우리는 집안에 들어박혀 트럼프를 치거나 마작을 굴리고 술을 마시면서 두더지처럼 동면하고있다. 땔나무는 1월에 들어서서 후딱 며칠간 하면 되는것이니. 하고 게으른 위안들을 해가면서 눅거리 봉지술로 속을 달랜다. 농사일이 지겹긴 하지만 어서 봄이 왔으면 좋겠다. 그래도, 봄이면 먼가 희망이 생길것 같고, 그리고 파릇파릇한 산등성이에 민들레꽃이라도 망울지겠으니 말이다. 이 겨울, 더욱더 마음이 무거워진다. 웃마을, 장일수네 뚱보안해가 돈벌러간다고 떠난것이 종무소식이 됐고, 홀아비 하나가 더 늘어났다. 가끔 우리는 순이나, 금이, 금자, 에 대해 이야기를 함다. 괜히 성깔은 드러워도 은근히 정이 가는 순이였는데, 그리고 금이는 이발도 얼마나 이뻤던가 하는것들을. 그리고, 그 옛날, 순이나, 금이나, 금자랑 어울려서 들놀이를 갔던 어느날의 아름다운 추억을, 말한다. 그리고, 학교시절에 가졌던 우리의 희망과 꿈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그럴때면 괜히 누구나 들뜨고 상기된 얼굴들이고 생기가 넘치기두 한다. 마치, 별볼일없이 늙어버린 어느 로인네가 당년에 풍운을 주름잡던 그 시절을 도도히 될수록 멋있게 이야기하며 자아도취에 빠져 행복해하듯 우리는 양념을 쳐가며 좀 더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내놓고 거기에 즐거워하곤 하는것이다. 그러다가 우리는 결국 도로 힘이 풀어지고, 우리의 막막한 신세를 한탄하군 한다. 소천수는 느티나무도 쩍쩍 얼어터진다는 이 엄한에도 뫼를 메고 채석장으로 다니는것을 우리는 본다. 과연 어쩌자고 저리도 악착을 떠는것일까? 워낙 마른 몸은 아주 비쩍 뼈만 남은꼴이 되버렸고, 바람과 해볕에 그슬려서 새카맣게 광부같은 모습이다. 하기사 채석장일군이 광부보다 나으라는건 없다. 돈을 벌고, 탈퇴환골하고, 그리고 새봄이 오면 거창한 작품으로 우리를 깜짝 놀래게 한다는것이다. 그리고 기어이 정혜의 팔짱을 끼고 활보할 날이 올것이라고, 곧 올것이라고 한다. 가끔 만나는 천수는 아주 먹이를 앞에 놓은 야수처럼 눈까지 반짝반짝하고 커다란 희망으로 부풀어있다. 정혜가 과연 가당키나 한가? 저러다가 정혜가 어느날 증발하기라도 한다면 천수는 어찌될지 정말 걱정이다. 그대로 무너져버리거나 혹시 강물에 뛰여들것 같다. 승산없는 전쟁을 앞둔 철모르는 전사같은 저 무모한 놈을 어쩌면 좋은가? 겨울이 가고 드디여 봄이 왔다. 아직은 바람이 쌀쌀하지만, 버드나무에 물이 오르고 들판도 푸르러가는걸 보면 완연한 봄이다. 소천수 어떻게, 무엇이라고 말을 뗄가? 그의 무모한 열정과 거의 악에 가까운 치기에 대해서, 새봄이 오면 내놓는다고 하던 천수의 엄청난 작품에 대해서 이제 말해야 할것인데. 벌레들도 돌아눕는다는 립춘이 림박하던 날, 싱그러운 바람에 알싸한 향기가 풍겨나오던 그런 날이였다. 올해는 이 심산골안에도 먼가 획기적인 사변이 일어나서 우리 모두를 행복하게 해줄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그런 아름다운 희망으로 사람을 싱그럽게 하던 날이였다. 마을길목에서 이 새로운 봄의 기운에 우리모두 조금씩 들떠있었는데 채석장에서 돌을 캐던 한족눔 하나가 새까만 얼굴로 정신없이 마을로 뛰여들어오는것이다. 꼭 몽골등에에 쏘인 둥글소처럼 말이다. 《쵄쑤, 타 추썰라.》 우리는 종주먹을 부르쥐고 마을에서 북쪽으로 이리는 되게 떨어진곳에 있는 채석장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러나, 천수는 이미 없었다. 굴러내려온 엄청난 바위돌과, 여기저기 뿌려져있는 검붉은 피자욱과 웅성거리는 사람들뿐이였다. 그날도 정신없이 뫼질하던 천수는, 바로 머리꼭대기에서 밑의 돌을 무절제로 캐내는바람에 흔들리던 바위돌이 허망 내리꽃혔고 그래서 어쩔새없이 바위돌에 강타를 맞고 쓰러졌담다. 일하던 한족들이 달려왔을때에는 이미 입가에 검붉은 피가 흥건하더란다. 우리는 큰길로 달려나가 마구 차를 막았으나 한시간은 족히 걸려서야 요행 목재차에 오를수 있었다. 아, 천수, 이 미친 눔아. 그렇게 악을 쓰고 난리를 치더니 너 결국 이렇게 되는거니? 천수야. 제발 죽지만 말아다오. 그러나, 채석장에서 본 바위돌과 피자욱을 떠올리니 고개만 흔들어졌다. 《천수, 천수 어떻게 됐어유?》 시병원으로 마악 들어가던 우리는 입구에 멀거니 서있는 채석장에서 같이 일하던 쑈왕을 보았던것이다. 《쵄쑤, 쵄쑤 타...타...》 쑈왕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병원뜨락 한구석을 가리키는것이였다. 거기에는 한족일군들이며 마을의 남정네 몇명이 누우런 황토지빛갈의 가로놓인 주머니를 앞에 놓고 눈굽을 적시고있었다. 아. 아. 저게 천수란 말인가. 그 활기차서 날뛰던 우리의 친구 천수란 말인가. 소설가가 되고 부자가 되고 정혜를 자기 녀자로 만든다고 하던 천수란 말인가. 우리는 허망함에 정체모를 깊은 나락속으로 꺼져들어가고있었다. 오늘아침까지도 우리는 뫼를 메고 구리빛얼굴에 싱싱한 활기를 머금고 채석장으로 향하는 천수를 보았다. 그런데, 그 천수가 불과 몇시간만에 저렇게 누우런 주머니에 들어가있단 말인가. 야, 천수야. 누가 먼저 달려들었는지 모른다. 우리는 일제히 누런 봉투를 에워싸고 당장이라도 그속에서 웃으며 달려나올것 같은 우리의 불사조오뚜기천수를 주먹을 치며 부르짖었다. 그때, 새카만 얼굴이 일그러질대로 일그러진 천수 아버지가 정신없이 병원뜨락으로 달려오는것이였다. 산에 갔었는지 롱구화에는 흙이 덕지덕지 매달려있었다. 무작정 사람들틈을 헤집고 우리중 누군가의 어깨를 헤가르며 누런 봉투앞에 멈춰버린 천수 아버지의 두손이 허공에서 떨리고있었다. 그리고, 뚤렁뚤렁 떨어지는 커다란 눈물방울, 그렇게 천수아버지와 우리 친구들은 서로의 어깨들을 부여잡고 가슴을 치며 피눈물을 쏟고 또 쏟았다. 천수아버지가 한번만 천수의 얼굴을 더 보겠다고 마구 누런 봉투를 헤치려고 했지만 한족들이 막았다. 워낙에 얼굴이 험하게 망가져서 병원일군들에게 돈을 내고 렴섭을 부탁했다는것이다. 대체, 사람의 일이란. 천수가, 적어도 우리는 보석반지를 꺼내들고 정혜한테 사랑고백을 했다가 멋있게 걷어차였거나 어느날 갑자기 증발해버린 정혜를 두고 실의에 빠진 천수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술잔을 부딪쳐줄 준비를 하고있었는데 이게 머란 말인가. 천수의 유물을 정리하면서 우리는 또 한번 전률해야 했다. 옷장안 깊숙이 감춰졌던 노트 하나와 한뭉테기의 종이, 그것은 소설이 아니라 련애편지라고 해야 할, 아니 정혜에 대한 절절한 절규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리고 까만 비닐주머니에 악착스레 세겹네겹 감겨져있는것은 네자리수의 저금통장이였다. 천수의 노트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이제 한달만 더 고생하면 정혜한테 보석반지를 사줄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정혜한테 사랑한다고 온힘을 다해 말해볼것이다. 정혜가 거절할것이라는 생각같은건 하지 않겠다. 나는 정혜한테 고백하는 그 순간만을 영원히 간직할터이니. 시내백화점에서 파는 가장 이쁜 보석박힌 금반지는 1만 3000원, 이제 2000원만 모으면 된다. 힘내자, 소천수. 아, 아, 천수 머라고 더 말할수 있을가. 우리는 그저 거의 탈진상태에 빠져 내가 죽어야지 왜 천수를 죽이냐고 악을 쓰는 할머니와 묵묵히 눈물을 훔치는 천수의 아버지를 바라보며 으스러지게 주먹을 쥐고 눈물을 삼키고 또 삼킬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리고 정혜가 갔다. 천수가 죽고나서 얼마뒤 정혜는 청산리에 올때처럼 보라빛치마에 까만 브라우스를 입고 트렁크를 들고 정혜를 데리러 온 까만 승용차에 앉아 떠나갔다. 일본으로 떠난다고 한다. 영영 돌아오지 않을것이라고 한다. 정혜는 채석장이 있는 북쪽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입술을 깨물더니 돌아서서 차문을 열고 들어가는것이였다. 그리고 휘익휘익 까만 승용차는 멀어지는가싶더니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것이였다. 봄이 또다시 오고있었다.
    • 오피니언
    2020-06-05
  • 조선족 생활세계와 젠더 질서의 변화 가능성
    ●최선향 (장강사범학원) 젠더(gender)는 생물학적 성차(性别差异)가 아닌 사회적인 성별(社会性别)을 나타내는 용어로서 여성성(女性气质,女人味)과 남성성(男性气质,男人味)은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고 본다. 1970년대 이후 여성주의학자들에 의해 쓰이기 시작한 젠더라는 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시대가 바뀌고 사회가 발전하면 여성성, 남성성의 내용도 달라지고 성역할 규범이라든가 성별분업(性别分工)에도 변화가 따른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지난 9월 학술회의 차로 연길에 다녀왔는데 10여년 만에 가 본 연길은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중 제일 반가운 변화가 주말 연길공원에서 본 아기를 안고 공원을 돌던 젊은 아빠의 모습과 중학생으로 보이는 쌍둥이 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공원을 산책하던 다정한 아빠의 모습이었다. 아이와 함께 산책 나온 아빠들을 보며 홀연 10년 전 조선족 여성 노인들의 노후생활을 연구하기 위해 만났던 한 할머니의 남편이 해 주신 이야기가 떠올랐다. 연변 화룡 출신의 그분은 퇴직간부였는데 젊은 시절 화룡에 살 때 아내를 돕고 싶어도 주위 사람들이 비웃을가 봐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하셨다. 물을 길어도 날이 어둡기를 기다려 남들이 안 볼 때 가서 길어왔다고 하셨다. 그러고 보니 세상이 많이 바뀐 것 같다. 한금옥 선생의 <도시 조선족 맞벌이가정 주부들의 가정지위에 대한 조사>라는 논문을 보면 1990년대초 조선족 가정의 가사분담에서 남편의 참여는 아주 저조하였다. 조복희 등 학자들의 논문 <연변지역 조선족의 가족생활 및 육아방식의 실태조사>를 보면 1990년대초 연변조선족 가정의 육아분담 조사에서 남편은 거의 안 한다고 답한 비례가 40.5%나 된다.(이화, 2019: 43, 45) 하지만 개혁개방 이후 도시화, 지구화를 배경으로 한 이주의 물결 속에서 조선족의 생활세계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이주의 여성화와 엄마의 부재라는 전에 없던 현상들이 나타나면서 가사에 별로 손을 대지도 않던 조선족 남성들이 아내가 한국이나 외지에 일하러 가고 홀로 집에 남게 된 것이다. 그들이 홀로 가사일과 아이를 돌봐야 하는 상황이 많아지며 연변 소품(小品)에도 가정 살림을 맡아하는 남자들의 모습이 담겨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러한 변화에는 많은 낯설음과 심리적 갈등, 콤플렉스 등 여러 가지 감정들이 교착되였을 것이다. 몇 년 전 추석에 남편의 고중 동창네 가족이 우리 집에 놀러 왔었는데 그 친구의 변화를 보고 많이 놀랐다. 예전에 본 그는 한국기업에서 한창 잘 나가던 시기라 사람이 성격이 활달하고 자신감 있어보였다. 그런데 중년에 들어서며 직장을 잃고 거의 3년 동안 집에서 놀아서(그의 말을 빌린다면) 그런지 사람이 기가 많이 죽고 많이 소침해 있었다. 남편이 왜 이리 많이 변했는가고 묻자 그 친구는 “너도 집에서 한 3년 있어봐. 이렇게 돼.”라고 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그런것 같다. 남자가 젊은 나이에 일하지 않고 집에서 ‘놀기’만 한다는 것은 보통 상식적으로 리해가 안 가는 일이다. 실은 남자들도 집에 있으면서 ‘놀기’만 하는 게 아닌 데 말이다. 그의 아내 말을 들어 보면 남편이 직장 생활을 안하는 대신 집에서 집안일도 많이 하고 애도 많이 돌보며 직장생활을 하는 자신을 많이 돕는다고 했다. 우리는 주변에 애를 돌보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전업주부로 있으며 가정과 아이들을 돌보는 여성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녀들은 그처럼 그 정도까지는 기죽지 않는다. 왜 그럴가?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이지만, 여기에는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성별분업이라는 이데올로기가 한몫해서다. 우리는 남자가 할 일, 여자가 할 일을 따로따로 구분해 놓은 남여의 성별분업에 많이 익숙해져 있다. 가사일과 자녀양육은 먼저 여성과 연결시키는 대신 남성들은 바깥일을 잘 해야 하고,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사람으로 인식해 왔다. 보통 돈을 벌어 오는 일차적인 책임은 남편이 짊어져야 한다고 여긴다. 남편이 그런 책임을 잘 못 질 경우 부실한 남자, 못난 남편으로 평가 받는다. 남편은 생계를 책임지는 대신 집안일은 안 해도 되고 못해도 된다. 반대로 집안일은 잘하지만 돈을 못 벌거나 많이 못 버는 남자는 좀 모자란 남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여가생활에서도 남자와 여자는 취미가 달라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 예전에 아는 지인 부부가 부부싸움을 많이 했는데 들어보면 아내는 남편이 매일 드라마나 본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남자라면 뉴스나 큰일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왜 드라마만 보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 아내 되는 사람이 아주 여성적이지도 않은 데 말이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하는 만큼 성역할 분담을 잘 못해서 불만을 가질 때가 많다. 여성은 돈을 잘 벌고 능력이 있어도 집안 살림을 잘 못하거나 자녀양육에 신경을 많이 못 쓸 경우 가족과 사회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 못 할 때가 많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일수록 자신의 녀성스러움, 즉 현모양처의 이미지를 더 굳히려고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다. 이렇게 성별분업 이데올로기가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할 때가 많다. 그런 의식에서 벗어나야 남자든 여자든, 직장일이든 가사일이든, 자녀 양육이든 편하게 할 수 있는 데 말이다. 지금까지 조선족의 발전을 논함에 있어 경제나 사회, 교육 등 공적 영역에 관한 언급이 주를 이루고 생활세계에 관한 언급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독일의 철학자 하버마스에 의하면 사회는 크게 체계와 생활세계로 나눌 수 있다. 체계는 권력, 돈과 같은 매개체를 통해 도구적 이성과 목적합리적 행위가 작동하는 세계이고, 생활세계는 가치, 규범, 상징적 상호작용 등 의사소통적 행위가 작동하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심영희,1999:90) 공적 령역에 관한 연구와 거시적인 안목, 거대담론도 중요하지만 사적 영역, 생활세계, 조선족의 일상에 관한 미시적인 접근도 필요하다. 일상이란 반복되고 체화 되여(생각, 사상, 이론 따위가 몸에 배여서 자기 것이 됨.)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것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일상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자질구레한 일과들의 공간인 동시에 인간의 사적이고 내면적인 삶과 닿아있는 중요한 영역이다. 일상생활은 흔히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되기도 하지만, 국가나 민족, 사회의 구조도 따지고 보면 개개인의 반복적인 일상생활에 의해 유지된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족들이 일상적인 생활세계 안에서 일상적인 활동을 어떻게 꾸려가는가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활동은 상황에 구속받음과 동시에 상황 자체의 변화를 시도할 수 있는 실천적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족은 지금까지 시대와 사회의 발전과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해왔다. 오늘날 지구화라는 현실에도 빠르게 적응하며 새로운 생활패턴을 만들어가고 있다. 가족구성원들이 서로 다른 나라, 지역에 흩어져 살며 초국적 가족이 늘어나고 있는 오늘, 새로운 현실에 더욱 잘 적응하려면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남겨져내려온 전통적 습관과 문화를 새 시대에 걸맞게 바꾸어나가야 할 것이다. 특히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스며들어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기존의 젠더 규범과 젠더 질서의 변화가 요구된다. 일상생활 속에서, 가정에서 남녀가 보다 평등하고 민주적인 관계를 만들어가야 보다 행복하고 화목한 가정을 꾸려나갈 수 있으며, 가족구성원 누구나 자신의 가치를 실현해가며 보다 발전된 모습으로, 보다 충실하고 성장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그러한 실천과 노력들이 이어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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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31
  • 中 장장 1세기에 거친 ‘항공모함의 꿈’ ③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2011년 중국의 첫 항공모함이 건조대에서 출해, 성공적으로항행 시험 진행했다. 2012년 9월 25일, <요녕 함(辽宁舰)>으로 명명된 중국의 첫 항공모함이 정식으로 해군에 교부, 항공모함이 없는 중국해군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2017년 12월 17일, 중앙군위의 비준을 거쳐 중국의 첫 국산항공모함이 <중국인민해방군 해군 산동함(山东舰)>으로 명명, 해남성 삼아(三亚)에 있는 모 군항에서 해군에 교부되었으며 자국산 항공모함이 없던 역사에 커다란 종지부를 찍었다. 중국에 있어서 항공모함의 꿈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다. 1928년부터 항공모함의 건조를 계획하고 있었으니 거의 1세기 전부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산둥함.ⓒ인터넷 중국은 1985년부터 퇴역한 항공모함에 대해 학습하고 연구하기 시작, 항공모함의 설계에 대해 어느 정도 계시를 받았다. 1987년 3월, 당시 해군 사령원으로 갓 부임된 유화청 상장은 군위 지도일꾼들한테 해군 장비규획을 회보할 때 두 가지 계획에 대해 설명했다. 즉 항공모함과 핵잠수함으로 장원한 관점으로 볼 때 이는 국방건설에 있어서 유리하며 반드시 보유해야 할 장비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 지난 세기 90연대 초 소련이 해체되면서 국제 정세에는 급격한 변화가 생겼다. 이와 더불어 우크라이나에서 건조되면서 이미 70%가 완성되었던 <바랴그(Varyag)>호 항공모함 건조작업도 중단되었다. 그리고 소련이 해체되면서 재산분할시 <바랴그>호 미 완공 항공모함은 인적 및 지리적 원인으로 우크라이나의 소유로 되었다. 헌데 당시 우크라이나의 경제사정으로 <바랴그>호를 계속 건조할 여력이 없었으며 1992년 1월 작업이 중단되면서 중도폐철로 될 가능성이 컸다. 1993년 당시의 러시아 총리 체르노멜킨과 러시아 해군 사령 그루모프가 우크라이나 총리 쿠치마의 안내 하에 흑해의 조선소를 찾아와 <바랴그>호의 건조를 마무리할 것에 대해, <바랴그>호를 다시 러시아에 넘길 가능성 등을 두고 연구와 협의를 진행했다. 하지만 양 측은 적절한 절충안을 만들어 내지 못한 채 그냥 굳바이 하고 말았다. 그 뒤 1995년 이미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이 된 쿠치마는 <바랴그>호의 운명을 흑해 조선소에 넘겨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던 차 1995년 12월 쿠치마는 중국 북경을 방문하게 되었고 방문기간 양측은 우크라이나의 미 완성 항공모함 <바랴그>호를 중국조선소에 넘겨줄 의안을 두고 담판을 진행했다. 1997년 홍콩 주재 대륙 자본기구 창율그룹(创律集团) 총재 조리이며 홍콩 중문대학 졸업생인 요백량(姚柏良) 등이 우크라이나로 향발해 우크라이나 측과 <바랴그>호를 구입할 데 관해 협상하게 되었다. 1998년 4월, 마카오 창율 관광오락 회사(Agencia Turisticae Diversoes Chong LotLimitada-홍콩 창율그룹의 계열회사)가 입찰을 통해 2000만 달러(실제 도합 1억 달러 투입)의 대가로 <바랴그>호를 구입, 명목은 <바랴그>로 하여금 대형 해상종합 관광시설로 개조한다는 것이었으며 거기에는 디스코 청, 여관과 도박장 등 시설을 앉히기로 했다. 홍콩 창율그룹에서는 <바랴그>호 인수임무를 당시 홍콩의 유명상인이었던 서증평(徐增平1952년 생)한테 맡겼다. 서증평은 일종 도박에 가까운 큰 결심을 내렸다. 1998년 1월 27일, 서증평은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 도착한 후 다시 니콜라이 흑해 조선소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조선소에 도착한 서증평은 조선소 책임자의 안내 하에 <바랴그> 호에 올라 함선 전체를 고찰하였다. 당시의 <바랴그>호는 참신하고도 완전한 함체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주 정밀한 결구의 구조는 서증평으로 하여금 이 항공모함에 대한 인수의욕이 더욱 솟구치게 했다. 1999년 7월 홍콩 창율 회사에서는 견인선과 예인선(拖船)을 임대하여 <바랴그>를 밀어갖고 중국으로 가기로 하였다. 헌데 배가 니콜라이 조선소를 떠나자 국외의 일부 세력들이 저애하기 시작, <바랴그>호는 다시 흑해로 돌아왔고 한동안 조선소에 머물러 있으면서 출항할 수 없었다… 2001년에 이르러 <바랴그>호는 중국 외교부의 각고한 노력으로 중국으로 올 수 있는 일루의 희망이 보이었다. 그 해 8월 25일, 터키 국가안전위원회는 마침내 <바랴그>호가 터키 해협을 통과하는 것을 허락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중국으로 오는 뱃길은 순탄한 것이 아니었다. 우선 <바랴그>호는 자체 동력이 아닌 다른 견인선과 예인선에 의해 움직이었기에 애로가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항해 과정 <바랴그>호와 기타 견인선과 예인선을 이은 로프(缆绳)가 끊어지는 일이 자주 생겼고 해상 폭풍을 만나는 등 일련의 좌절을 겪으면서 항행을 계속했다. 2001년 12월 11일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에돌아 인도양에 들어섰고 2002년 2월 5일에는 말라카 해협을 통과했으며 2월 12일에는 드디어 남 중국해로 들어섰다… …… 2002년 3월 3일, 천신만고 끝에 <바랴그>호는 마침내 중국의 항구도시 – 대련에 도착했다. 아침 5시경, <바랴그>호는 6척의 견인선과 예인선에 의해 대련 외항을 떠나 서서히 내항으로 들어왔고 오전 9시경 내항에 도착했으며 12시경 안전하게 대련 내항의 서구 4호 산적화물 부두에 정박, 약 4개월(123일)에 거쳐 장장 1만 5200마일을 마라톤식 항행해온 셈이었다. 6 위에서 언급했지만 새 중국의 항공모함 건조에 대한 도전은 1985년부터 본격 개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 도전은 맹목적인 것이 절대 아니었다. 적어도 1950연대의 <위성>을 쏴 올리고 5년에 영국을 능가하고 10년에 미국을 따라잡는다고 허풍을 치던 때와는 근본 달랐다. 간절했지만 조급해 하지 않았고 욕심도 컸지만 과학적이고도 현실적이었다. 중국은 퇴역했거나 퇴역을 앞둔 항공모함을 구매해서는 그것을 모체로 삼아 학습하고 연구했으며 그 기초 상 자체 개발에 모를 박았다. 한 발자국씩 국산 항공모함을 건조 생산하는 길을 더듬었던 것이다. 그 퇴역한 항공모함들로는 다음과 같다. <키예프(KievAircraftcarrier)>호 - <킹예프>호는 구소련의 항공모함으로 1970년에 건조, 이 항공모함은 비록 그 어떤 전역에도 참가해 보지 못했지만 복역기간 인도와 북한, 알제리 등 나라를 방문하였고 구소련의 <수정의 이상(水晶理想)>, <국가 명함장>으로 불렸으며 구소련 해군의 상징이기도 했다. 2008년 8월, 이 항공모함이 경매에 붙여지자 미국, 중국과 인도 등 9개의 매입신청 국가 중 중국이 입찰에 성공했다. 그 뒤 <키예프>호는 중국의 산해관 선박공업 유한회사로 인도되어 원상복구가 되었고 군사잔해로부터 평화 및 생태의 상징으로 되었으며 현재 천진 국제 여행낙원 항에 그 모습을 드러내 보이면서 많은 관광객들을 끌고 있다. <민스크(Minsk)>호- 이 항공모함은 구소련 니콜라예프 조선소에서 건조, <키예프>호와 동급의 중형 항공모함으로 배수량이 4만 2000톤에 달하며 항공모함 및 순양함 2가지 기능을 모두 갖고 있었다. 이 항공모함은 12월 28일부터 건조하기 시작해 1975년 9월 30일 진수했으며 1978년 9월 27일 완공되었다. 소속은 구소련 태평양 함대였다. 이 항공모함은 1999년 8월 중국에 매각, 광주 문충 조선소에 인양되어 대규모 봉폐식 수리와 개조를 거쳐 2000년 5월 심천 대붕만 주제공원에 정박되어 관광객들의 참관용으로 되었다. <멜버른(mélbərn)> 호 – 이 항공모함은 원래 영국에서 건조한 <준엄>급 항공모함으로 1949년 1월 오스트레일리아에 매각되었으나 1956년 3월 5일에야 비로서 영국의 포츠머스 항에서 오스트레일리아로 향발했으며 이 해 5월 14일 오스트레일리아 함대의 사령관이 승선한 기함(旗舰)으로 명명되었다. 이 항공모함은 1969년 6월 3일, 미국 해군 <프랭크 E. 에반스(DD-754)>호와 충돌했고 1982년 1월 30일 퇴역하였다. 1984년 <멜버른>호 항공모함은 전부의 설비가 몽땅 철거되어 말 그대로 <빈껍데기>만 남았으며 1985년 고물로 되어 중국의 한 <금속 폐물 상>한테 팔렸다. 중국에 매입된 후 이 항공모함은 남해의 한 군사기지에서 부분적으로 분해 개조되었다. 이 중 승강장, 증기 이젝터(蒸汽弹射器)와 주 비행 갑판은 그대로 보류되었으며 중국은 이를 이용하여 준항공모함 함재 항공병 시험을 하군 하였다. … 이상에서 언급하다 싶이 중국은 <키예프>호, <민스크>와 <멜버른>호 등 이미 퇴역하였거나 퇴역을 앞둔 항공모함들을 매입하면서 두 가지로 활용하였다. 하나는 그 기본구조와 내부 시설 등에 대해 학습하고 연구하였으며 또한 군사연습용으로도 활용하였다. 둘째는 이런 항공모함을 최종 민간에 개방하여 관광용으로 되게 하기도 했다. 중국의 이런 과정은 결국 중국도 작전에 투입될 수 있는 항공모함을 갖추기 위해서였고 더우기는 최종 자국산 항공모함을 건조하기 위해서였다. 그 첫 보조로 중국의 첫 항공모함의 플랫폼은 바로 우크라이나에서 매입한 <바랴그>호였다. 배수량이 6만 7000톤이고 총 길이가 306미터에 달하는 이 항공모함은 2005년부터 대련 조선소에서 개조를 개시, 2011년 8월 진수에 성공했으며 몇 차례의 시험항행 후 2012년 9월 25일에 <요녕함>으로 명명되어 해방군 해군에 교부되었다. 다음 중국의 첫 자국산 항공모함의 건조는 비교적 순탄대로라고 할 수 있었다. 이미 몇 척의 낡은 항공모함의 구조와 성능에 대해 많이 장악하고 또한 <바랴그>호를 성공적으로 개조한 경험이 누적되었으며 자국산 항공모함을 기어코 자체의 기술과 힘으로 건조한다는 수많은 과학자들과 근로자들의 신념이 그 건조를 앞당기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결과 2013년에 착공한 첫 자국산 항공모함의 건조는 5년 미만 시일의 작업을 거쳐 2017년 4월 26일 진수에 성공했으며 2019년 12월 17일, 습근평 등 중앙 지도일꾼들이 참가한 가운데 <산동함(山东舰)>으로 명명되어 해군에 교부되었다. 장장 1세기의 파란만장한 풍운을 거쳐 중국 <항공모함의 꿈>은 실현되었고 중국 해군의 항공모함의 시대가 열렸다. 그것은 그 어떤 해상 강대국과도 힘겨루기를 할 수 있다는 뜻을 의미한다. 그 상대가 항공모함 11척을 보유한 미국과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항공모함 규모에서 미국과는 비교도 안 되지만 중국 해안에서의 항공모함 해전에서는 대등한 실력을 과시할 수가 있으며 또한 중국은 태평양을 건너 미국 본토를 칠 실력도 안 되거니와 그럴 뜻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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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23
  • 中 장장 1세기에 거친 ‘항공모함의 꿈’ ②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2011년 중국의 첫 항공모함이 건조대에서 출해, 성공적으로항행 시험 진행했다. 2012년 9월 25일, <요녕 함(辽宁舰)>으로 명명된 중국의 첫 항공모함이 정식으로 해군에 교부, 항공모함이 없는 중국해군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2017년 12월 17일, 중앙군위의 비준을 거쳐 중국의 첫 국산항공모함이 <중국인민해방군 해군 산동함(山东舰)>으로 명명, 해남성 삼아(三亚)에 있는 모 군항에서 해군에 교부되었으며 자국산 항공모함이 없던 역사에 커다란 종지부를 찍었다. 중국에 있어서 항공모함의 꿈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다. 1928년부터 항공모함의 건조를 계획하고 있었으니 거의 1세기 전부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요녕함.ⓒ인터넷 3 항일 전쟁이 승리하자 진소관은 웅심 가득히 항공모함의 건조에 투신할 준비를 하였다. 헌데 그 시각, 중국의 대지에는 국공내전의 어두운 구름이 두껍게 내리 드리워졌다. 그 시기 장개석의 머릿속에는 오직 어떻게 하면 공산당을 숙청하고 나라 전체를 자기의 손아귀에 넣는가 하는 것뿐이었으며 해군건설 같은 건 완전히 머릿속에서 포기한 상태였다. 1946년 6월, 장개석 군대가 모택동이 영도하고 있는 공산당의 해방구로 진공을 개시함에 따라 중국에서는 전면적인 국공내전이 발발했고 국민당 해군 역시 그 내전에 휘말려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전 초기 국민당은 이른바 전국의 각 전장에서 <승승장구>했다. 이러자 내전을 우려했던 진소관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속타산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국민당이 승리하여 전국이 일원화의 계획 권에 들면 항공모함의 건조도 더욱 순리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전쟁의 대세는 장개석과 진소관이 바라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이 됐다. 공산당의 유백승과 등소평이 이끄는 유-등 대군이 대별산으로 진군함에 따라 장개석은 해방구에 대한 전면 진공을 중점진공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되었고 임표의 동북인민해방군이 요심 전역에서 대승하여 전반 동북을 적색화시키자 진소관은 이른바 장개석에 대한 환상을 의심하기 시작했으며 요심전역에 이은 회해 전역과 평진 전역에서도 국민당 군이 괴멸에 가깝도록 얻어터지자 진소관은 자기의 <항공모함의 꿈>을 기본상 포기하였다. 1949년 11월, 대륙에서 패한 국민당 군을 따라 대만으로 떠나는 진소관은 일종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환멸에 싸여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여태껏 충성을 다하며 장개석을 믿고 따랐던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과 고통이었다. 이것으로 진소관과 국민당의 <항공모함의 꿈>은 국민당 군의 전면 패전으로 한 단락 막을 내렸다. … 4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 공화국이 창립된 후 얼마 안 되어 모택동은 높이 서서 멀리 보는 안광으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반드시 조선공업을 크게 벌여 대량의 선박을 건조해야 하며 ‘해상철길’도 구축하여 강대한 해상 전투역량을 건설해야 한다.” 모택동의 이 말에서 당시의 정무총리 주은래는 인차 항공모함을 머릿속에 떠올렸다고 한다. 1973년 10월 25일, 외국손님을 회견할 때 주은래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었다. “우리 중국의 남사군도와 서사군도가 남부 베트남이 점령하고 있다. 우리한테 항공모함이 없으니 우리의 해군들이 더 이상 총칼을 갖고 결사전을 벌일 수도 없는 일이다. 나는 한평생 군사와 정치를 해왔으나 오늘까지도 우리 중국의 항공모함을 보지 못했다. 중국산 항공모함을 볼 수 없다는 건 그야말로 평생의 유감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 장시기 이래 중국해군 역대의 지도군인들은 자국산 항공모함의 발전을 두고 크나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초대 중국해군 사령원이었던 소경광(萧劲光) 대장은 일찍 자기 기고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 중국해군은 항공모함을 수요한다. 한 함대가 먼 바다에서 활동할 때 항공모함이 없으면 곧 제공권을 잃게 된다. 제공권이 없으면 곧 먼 바다 작전의 승리를 보장할 수 없다… 또한 해군 사령원을 맡은 적이 있었던 전 중국 군사위원회 부주석 유화청 상장 역시 진작 항공모함에 대해 그 욕망을 드러낸 적이 있었다. 그는 수차 “만약 해군에 항공모함이 있다면 작전 질에서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 전 방위적인 작전 능력이 크게 향상될 것으로 보며 군대의 위력과 국가의 위력에도 큰 변화가 생기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1970연대부터 중국인민 해방군은 항공모함에 대한 연구를 시작, 항공모함에 대한 의식이 대대적으로 높아졌다. 당시 중국은 이미 유엔에서의 합법적 지위를 회복했고 또한 유엔의 5개 이사국의 하나로 되었다. 헌데 유엔의 5개 이사국 중 유독 중국만이 항공모함이 없었다. 이는 대국으로서 또한 국제적으로 영향력이 막강한 중국으로 볼 때 일종 커다란 수치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중국 외 4개의 이사국들은 모두 항공모함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 중 <항공모함 대국>인 미국은 이미 11척의 항공모함을 갖고 있었다. 이는 세계 항공모함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셈이었다. 이 외 구소련은 배수량이 6.75톤에 달하는 대형 항공모함을 보유, 영국은 2척의 <엘리자베스 여왕>호 급의 신 일대 항공모함 건조를 계획하고 있었으며 프랑스 역시 배수량 4만 톤에 달하는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 호 중형 핵 동력 항공모함을 갖고 있었다. 또한 중 소 국가 역시 분분히 구매 하거나 자체로 항공모함 건조를 계획하고 있었다. 그 중 중국 주변의 인도는 견정 불이하게 <3척의 항공모함 전략>을 관철, 2척을 구매와 개량 외 자체로 국산인 <바이크란트(Vikrant)>호를 건조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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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0-05-23
  • 中 장장 1세기에 거친 ‘항공모함의 꿈’ ①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2011년 중국의 첫 항공모함이 건조대에서 출해, 성공적으로항행 시험 진행했다. 2012년 9월 25일, <요녕 함(辽宁舰)>으로 명명된 중국의 첫 항공모함이 정식으로 해군에 교부, 항공모함이 없는 중국해군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2017년 12월 17일, 중앙군위의 비준을 거쳐 중국의 첫 국산항공모함이 <중국인민해방군 해군 산동함(山东舰)>으로 명명, 해남성 삼아(三亚)에 있는 모 군항에서 해군에 교부되었으며 자국산 항공모함이 없던 역사에 커다란 종지부를 찍었다. 중국에 있어서 항공모함의 꿈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다. 1928년부터 항공모함의 건조를 계획하고 있었으니 거의 1세기 전부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일본 항공모함.ⓒ인터넷 1 중국인들이 항공모함의 꿈을 꾼 것은 그닥 늦은 편이 아니었다. 세계 패권을 장악하려면 바다로 진출해야 하고 바다로 진출하려면 강대한 해군과 함정이 있어야 하며 이러자면 반드시 항공모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당시 중국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영국과 스페인이 세계 각 대륙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강대한 해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다면 중국이 다른 대륙으로 진출하기는커녕 자주 얻어터지는 것은 바로 강대한 해군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민국정부는 깨닫기 시작했던 것이다. 일찍 1928년 당시 국민당 해군 서장(署长)이었던 진소관(陈绍宽)은 자기의 군사저서에서 처음으로 항공모함을 건조할 계획을 서술하였다. 이는 영국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전통식(全通式) 비행갑판이 있는 <헤르메스(Hermes)>호가 건조된 지 근근히 10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 뒤 진소관은 자기의 <항공모함 건조안>을 국민당 중앙에 건의, 1929년 8월 14일, 국민당 제2기 5중 전회에서 통과된 <군사정리안(整理军事案)>에는 다음과 같이 언급되었다. “오국(吾国-우리나라라는 뜻)은 해안선이 길고 판도 또한 크지만 현재 해군의 실력은 미약하고…. 향 후 국방계획 중 반드시 실사구시하면서 해군을 발전시켜야 하는바… 국방계획을 완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2일 후 상해 강남 조선소에서 건조한 포함 <함녕(咸宁)>호 갑판에는 해군 병사들이 기립자세로 늘어선 가운데 장개석 위원장의 연설이 있었다. “국가의 권리를 되찾기 위하여 우리는 반드시 강대한 해군을 건설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중화민국으로 하여금 세계에서 일류로 가는 해군을 가지게 해야 합니다. 이는 전적으로 여러 사병들한테 달려 있습니다. 예견하건대 우리는 15년 내에 배수량 60만 톤에 달하는 전함을 가진 해군력을 확보하여 세계 일류의 해군을 건설해야 할 것입니다.” … 1930년 중화민국 해군부에서는 항공모함, 장가순양함, 잠수정 등을 건조할데 관한 6년 계획서를 제출했다. 그 구체적 계획으로는 다음과 같다. 항공모함 1척, 장갑순양함 2척, 순양함 2척, 대중소형 구축함 28척, 대중소형 잠수정 24척 … 이 외 각종 포함, 소해정(扫雷艇), 잠수모함, 어뢰정, 운수함 등 도합 106척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당시 내전이 끊임없이 발발하고 정부의 재정이 극히 어려운 사정 등으로 이 <신기루>같은 함정건조계획은 근본적으로 실행에 옮길 가능성이 없었다. 국민정부의 해군전략사상 구축 및 구체발전 책략은 자꾸만 미루면서 최종 방안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가 1932년 1월 진소관이 해군부 부장으로 된 후에야 중앙 해군은 비로서 비교적 안정적인 발전시기에 들어섰다. 2 전 국민당 육군 및 해군의 1급 상장이었던 진소관은 중국 전구를 4개의 대전구로 나뉘고 20척의 항공모함을 건조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1937년 7월 7일, <노구교 사변>의 발발로 중국이 전면 항전단계에 진입하자 진소관은 부득불 잠시 그 계획을 접고 현유의 함정으로 항일전에 투입할 준비를 포치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중국 해군의 항일전은 주로 장강 중하류에 집중되었으며 가장 치열한 전투는 강음(江阴)에서 있었다. 1937년 8월 상순, 일본함대가 강을 따라 서쪽으로 올라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하여 국민정부는 적지 않은 선박을 강에 침몰시켜 강음에 봉쇄선을 구축하였다. 이러자 일본군은 이 봉쇄선을 돌파하기 위하여 항공모함 <호쇼(Hōshō)>호에 있던 비행기를 출격하여 대규모로 되는 폭격을 감행, 봉쇄선에서 방어하던 국민당 해군 제1함대는 거의 모두가 폭격으로 침몰되었다. 그 뒤 일본의 항공모함은 경상적으로 중국의 영해로 출몰하면서 육에서의 행동과 배합하군 했다. 강음해전 중 일본군의 공중우세는 진소관으로 하여금 항공모함의 작용을 더욱 중시하게 했다. 강음해전은 1937년 8월 16일, 강음대전의 개시와 더불어 12월 1일 강음에서의 철퇴(강음 포대 12월 3일 함락)에 이르기까지 도합 108일간 진행되었다. 강음해전은 항일전쟁 중에서의 보기 드문 육해공 3군 입체작전이었으며 항일전쟁기간의 유일한 해군전역이었다. 오랫동안 중국의 해안에서 위풍을 떨치던 함대는 일부는 산동의 연태에서 침몰되었고 주력의 전부는 강음에서 복멸되었다. 이는 중일 갑오전쟁이래의 가장 중대한 손실이었다. 강음 보위전에서 일본군은 도합 4척의 항공모함을 출격하여 당시 중국해군의 거의 모든 주력 전함을 격침시켰고 강음요새를 초토화시켰으며 당시의 중국해군부대로 하여금 거의 재기불능에 가깝게 만들었다. 1943년 11월, 진소관은 해군부를 대표하여 재차 해군건설 계획을 제출, 이 계획 중에서 그는 이미 몇 척의 항공모함에는 더 이상 만족하지 않고 몇 개의 항공모함 군을 제조할 야망으로 차 있었다. 당시 그는 중국 연해를 4개의 해군 역할 구역으로 획분, 제 1 구역은 요녕의 안동(지금의 단동)으로부터 산동반도의 성산도(成山头)에 이르고 제 2 구역은 성산도로부터 장강 하구까지에 이르렀으며 제 3 구역으로부터 광동의 산두(汕头)까지, 제 4 구역은 산두로부터 중국 – 베트남 변경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다음 매 해군 구역마다 1개 지대의 해안방선 함대를 창립, 항공모함 5척씩 4개 해군 구역에 도합 20척의 항공모함을 두기로 하였으며 매 한척의 제조 원가는 18억 원에 달했다. 이 계획서를 보고 당시 장개석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으나 진소관은 “이 돈은 아낄 필요가 없다”고 역점을 찍어 강조하였다. 당시 전시상태에 처한 중국의 상황으로 놓고 볼 때 이 계획은 현실적 가능성이 거의 없는 <탁상공론>이나 다름이 없었다. 진소관 역시 이 점에 대해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먼저 장개석한테 주의력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도 매우 뜻깊다고 인정했다. 1945년 8월, 항일 전쟁이 곧 승리하게 될 무렵이 되자 진소관은 진짜로 행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당시의 군정 부장 진성(陈诚), 전서청(铨叙厅-주관 인사의 청) 청장 전탁륜(钱卓伦) 등을 설복하여 <해군 분담방위 계획(海军分防计划)>을 제정, 이 계획은 몇 년 전의 계획을 수정한 것으로 원래 20척으로 계획했던 항공모함을 12척으로 적게 계획한 것이었다. 이는 더욱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방안을 접수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진소관의 해석에 따르면 이 12척의 항공모함 역시 1차적으로 건조하는 것이 아니고 그 기한을 30년으로 하였다. 첫 10년 계획으로 1만 톤짜리와 8000 톤 짜리 항공모함 각각 1척씩 건조, 매 1척의 건조원가는 각각 6280만 달러였다.(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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