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8(일)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실시간뉴스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3-11-1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허성운 칼럼] 재비탄과 복새섬
    널리 사용되였는데 어느 결엔가 사람들이 쓰지 않게 되면서 사라지는 말들이 있다. 지난세기 50년대까지만 해도 나무배를 뜻하는 재비라는 말이 두만강 연안에서 허다히 사용되어 왔었고 모래톱을 의미하는 복새섬이라는 말도 넘치도록 흔하게 썼던 낱말인데 오늘날에 와서 이런 어휘들은 마치 근대 이전 아득하게 먼 옛날에 썼던 고어처럼 느껴진다. 역사적인 사실은 때로 당황스럽다. 이름을 가진 것이 이름 없는 것이 되어 우리 역사의 한 모퉁이에서 사라지고 이름이 없어야 할 것이 이름을 가진 것으로 되어 우리 역사의 길목에 나와 앉아있다. 두만강 유역의 지명 이름들을 살펴보면 원래 재비탄과 복새섬으로 불리어졌던 땅 이름들도 오늘날에 와서는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지명으로 사라졌다. 지금도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개산툰 선구 지명은 원래 나루터 의미를 지닌 재비탄을 한자로 옮긴 이름이고 사이섬이라고 불리는 간도도 복새섬이라는 이름에서 기원된 땅이름이다. 그리고 두만강 연안에 자리잡은 화룡시 남평 길지마을 지명도 복새섬에서 기원되는데 최초에는 복사평伏沙坪 표기되였다기 질땅을 뜻하는 길지마을과 통합하면서 풍수색채가 짙은 길지吉地라는 지명으로 불리어 지게 되었다. 화룡시 숭선 지명도 이주 최기에 복사평腹沙坪으로 새기였으나 나중에 숭선으로 지명이 굳어진다. 훈춘 두만강 연안 구사평九沙坪마을과 도문시 복새골 지명도 같은 사례이다. 연변 지명들은 식민지 시절 일본인들이 만든 지명이 그대로 이전된 것이 많다. 과거에 복숭아나무가 많이 자라 불리어진 지명이라고 복새섬을 엉뚱하게 풀이한 글들을 우리는 요즘에도 심심찮게 보게 된다. 복새섬 복새밭 복새땅이라고 부르는 복새覆沙라는 말은 섬이나 강 연안에 위치해 있다가 강물이 범람하여 모래가 뒤덮인 땅를 가리키는데 과거에는 밭 세금이 면제되어 왔었다. 유유히 흐르는 세월 속에서 두만강 푸른 물은 수많은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오랜 세월 두고 개산툰 평야를 무법으로 훑고 지난 간 옛터들은 폐허로 만들고 아픈 과거를 흔적 없이 지워놓았다. 과거에 두만강은 지배굽이로부터 노째굽이에 이르기까지 두 갈래 물줄기로 갈라지어 흘렸고 그 사이에 커다란 복새섬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선구 지명을 두고 사람들은 이 마을이 “처음 배를 들이댄 곳”이라고 해서 배 선(船) 자에 입 구(口)자를 달아서 “선구(船口)”라고 불렀다고 전하고 있지만 사실상 재비탄이란 말을 먼저 있었고 그후 줄촨이 놓여지고 한자로 선구라고 작명한 것으로서 나중에 마을의 지명으로 고착되였던 것이다. 재난과 가난이 먹장구름처럼 드리워 캄캄했던 그 옛날 강대 세력들의 다툼으로 난리가 났을 때 백성들은 험난한 삶에 쫓기어 두만강 강가에까지 밀려났다. 그때 백성들에게 등대처럼 한줄기 빛이 되어준 것이 바로 두만강에 자리 잡은 크고 작은 복새섬과 재비탄들이였다. 그 옛날 주린 배를 움켜쥐고 두만강연안에서 군데군데 화전 밭을 일구어 가며 새 삶을 일구어야만 했던 민초들의 고단한 삶의 흔적이 두만강 강가에 자리 잡은 복새섬 곳곳에 고스란히 묻혀있다. 그리고 그 모래땅에서 수확한 감자 동배 (콩의 일종) 메싹 그리고 백사장에서 알을 쓸던 얘리(두망강 물고기 일종)로 차려진 밥상은 그들에게 있어서 진수성찬이나 다름없었으며 복새섬은 세상에 둘도 없는 무릉도원이 되여 왔다. 해와 달을 거듭하면서 민초들은 두만강 복새섬을 기점으로 하나 둘씩 연변 땅에로 스며들기 시작하였다. 두만강의 크고 작은 수많은 복새섬에서 시작한 연변 땅에로 얼기설기 실핏줄처럼 뻗어나간 오솔길들은 온갖 가시덤불속을 헤쳐 나아가 마침내 수백만 백성들의 이주경로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빈손으로 고향을 버렸지만 그들에게는 세세대대로 물려받은 작물 재배 기술이 있었고 오랜 세월동안 삶을 지탱할 수 있게 한 태고의 언어문화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오늘날에 와서 연변역사 전체를 바꾸어 놓게 된 것은 그들의 막강한 경제적 실력과 정치적 세력을 지녔기 때문에가 아니라 방대한 대륙문화를 받아들이는 포용적인 마음을 지녔기 때문이다. 연변의 큰 흐름을 바꾸어 놓았던 힘은 우리 선인들이 놀랄 만큼 타자의 문화를 수용하여 새로운 사회공간을 확장하는 뛰어난 비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변 역사는 거대한 유물 속에 남아 있지 않다. 오히려 사소한 삶의 조각들 그들이 써왔던 대뜨베(파종도구 일종) .가대기. 밀찌 (유읍방언 사읍방언에서 후걸이). 물독에 그려진 다양한 물고기 문양 . 지팡살이 땅문서와 계약서들. 마적에게 붙잡혀간 아들을 찾기 위해 먼 길을 떠나는 아버지의 허리춤에 감싸고 감싼 동전잎 등과같이 생생한 증언들이 도도히 흐르는 력사의 흐름 속에 복새섬처럼 쌓이고 쌓여 연변의 력사가 이루어 진 것이다. “복새섬이 맛이 마이 갔수꾸마” 그 옛날 복새섬에서 새둥지도 들추고 늪에서 조개도 줍던 소년은 벌써 80고개를 바라보면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무산광철에서 버린 철분 찌꺼기와 한때 건설 붐으로 포크레인이 모래를 파헤치어 버림받은 복새섬은 잡초가 무성하고 봄이면 하늘높이 솟아올라 우짖던 노질(유읍방언 종다리 일종 사읍방언에서 예조리)이 울음소리도 뜸하다. 한때 물자를 유통시키고 수천만 백성들의 이주의 길목에 발판을 깔아주었던 재비탄과 복새섬은 쇠락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지만 오늘날 강가에 부는 바람만은 여전하다. 다만 그 시기 바람은 연변 역사상 가장 거대한 변화를 몰고 왔던 바람이었다. 우리가 오늘날에도 두만강 강가에 서서 사라진 재비탄과 잡초 무성한 복새섬을 바라만 보아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이유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9-05-05
  • 뜨데국과 수제비
    ● 허성운 정지방 가득 오손도손 앉아 호호 불며 뜨끈뜨끈한 뜨데국으로 허기진 배를 달래가던 그 시절 뜨데국 이야말로 솔직해서 살림살이 속내까지 훤히 비치는 과거 우리 삶의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음식이었다. 몰론 요즘 와서 간편한 라면이 뜨데국 자리를 빼앗고 있지만 그래도 가끔 감자와 파 따위를 넣고 끓인 뜨데국의 맛은 라면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뜨데국을 수제비이라고 부르고 그 어원을 학자들에 따라 손을 뜻하는 한자 수(手)와 접는다는 의미의 ‘접(接)’이 합쳐져 ‘수접(手接)’이라는 설과 수저비(水低飛)로 풀이하는 설로 나뉜다. 조선에서는 밀가루 반죽을 얇게 밀어서 뚝뚝 뜯어 넣는다는 말에서 뜨데국 이름이 유래된 것으로 풀이한다. 허나 뜨데국과 수제비는 지난세기에 들어와서 밀가루로 반죽하였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따지고 보면 메밀가루로 만들어진 것이다. 메밀은 비록 '밀' 자가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밀과는 전혀 다른 식물 종이다. 원래 메밀은 크게 열매가 까만 메밀과 은색 메밀로 나뉘는데 조선반도 북부에서는 주로 까만 열매를 가진 쓴 메밀을 심고 남부에서는 하얀 열매를 가진 단 메밀을 심었다. 조선반도 남부의 메밀가루 색깔이 하얀 반면에 북부에서는 속껍질과 함께 가루를 만들어 빛깔은 검다. 1934년 7월 13일자 '매일신보' 기사에는 검정 메밀가루[黑麵]로 된 국수를 먹고 8명이 중독된 사건이라고 나온다. 이 기사를 보면 평양에서는 메밀 겉껍질이 붙은 채 빻은 가루로 만든 면발을 시꺼멓다는 뜻의 '흑면(黑麵)'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언어연구는 오늘날까지도 거대한 빙산처럼 수면에 드러난 부분은 극히 적고 거개가 수면 아래 잠긴 상황에 놓여있다. 뜨데국과 수제비라는 말도 빙산과 마찬가지로 수면위에서 보면 두 개의 각이한 빙산처럼 분리 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수면아래에서는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로 뭉쳐있다. 만주어사전에서는 sacu는 메밀의 하얀 가루를 말하고 deide는 메밀의 겉껍질이 섞인 까만 가루를 뜻한다. 여기에서 sacu는 우리 말 수제비와 대응되고 deide는 우리 말 뜨데국으로 대응된다. 다시 말하면 메밀이란 큰 의미의 덩어리가 언어 밑층에 잠겨 있고 뜨데국과 수제비라는 서로 다른 모습으로 마치 빙산조각처럼 수면위에 나뉘어 노출된 것이다. 메밀은 조선 반도 모든 밭작물 중에 가장 짧은 생육기간을 필요로 하므로 반도 북부 특히 함경도와 연변일대에서 가장 오래 재배되어 온 대표적인 화전작물이다. 화전으로 일군 밭에는 나무와 풀들 탄 재가 좋은 양분을 제공되어 있어 여름작물을 수확한 뒤에도 그루갈이 작물로 재배되어 왔다. 전반 조선반도 그 어느 지역보다도 경작의 일반적인 위도한계가 훨씬 높이 올라와 있는 함경도와 연변일대 거친 산악지대에서 폭설과 같은 각종 혹독한 기후를 견뎌내면서 화전민들은 메밀과 함께 악착같이 살아남아 마침내 화전 밭을 영구경작지로 탈바꿈하여 가면서 연변 촌락들이 하나 둘 일어서기 시작하였다. 뜨데국의 음식역사에는 연변 땅에서 삶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끈질긴 살아온 우리 선인들의 눈물겨운 이민사가 오롯이 담겨있다. 오늘날 와서 열콩은 강낭콩으로 천지꽃은 진달래로 비술나무는 느릅나무로 말끔히 얼굴을 바꿔 버리고 등장하는 연변 언어풍토의 이상기후로 하여 뜨데국이란 고유의 말도 사투리 딱지가 붙어져 표준어로 고상하게 포장된 수제비 말에 밀려 그 설자리를 차츰 잃어가고 있어 그 옛날 뜨데국에서 느끼던 정취는 날이 갈수록 희석되어 가는 기분이다. 일찍 1961년 쏘련의 가가린은 지구라는 큰 우물 틀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광활한 우주선에서 지구를 내려다보고 지구는 푸르다는 것을 발견한다. 언어 연구에서 우리는 아직까지 자신이 처한 시간과 공간적 제한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타자의 언어가치를 정확히 바라보지 못하는 우물 안의 개구리 신세로 고정된 틀 안에 억매여 있다. 수제비와 뜨데국이란 말은 단순히 표준어와 사투리라는 그릇된 잣대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두 쪽으로 갈라진 구리거울이 하나로 이어지며 눈부신 빛을 뿜어내는 옛 전설이야기처럼 두 단어를 포용하여 하나로 아우르는 균형 잡힌 시각으로 바라 볼 때 비로소 우리 언어의 간격을 좁히고 언어통일에로 나아가는 길로 한걸음 가까이 다가설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만주어라는 명칭은 17세기에 들어와서야 불리어지기 시작한 이름으로서 결코 만주족만 독차지 하고 썼던 타자의 언어가 아니다. 만주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민족을 포함한 수많은 북방소수민족들이 함께 공유하였던 언어로서 우리 모두의 귀중한 언어유산이다. 지금 수많은 북방 소수민족언어는 치열한 언어전쟁에서 이미 그 자취가 사라진지 오래지만 연변과 함경도방언은 거세찬 역사의 파도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복잡하게 얽힌 우리 언어의 비밀들을 풀어나갈 수 있도록 관건적인 실 머리를 제공하고 있으며 우리 언어연구 시야를 폭넓게 펼쳐보여 주고 있다.
    • 오피니언
    2019-03-29
  • 결혼식에서 눈꼴사나운 '하객'
    ◆신부보다 더 화려하게 꾸미고 온 여성. 너무 진한 화장에 화려한 의상을 입고 결혼식에 등장하는 여성들이 간혹 있다. 특히 너무 화려한 복장으로 손님들의 시선을 사로잡게 되면 정작 신부에게 쏠려야 하는 시선이 분산될 수밖에 없다. ◆헤어진 연인. 현실생활에서 보면 간혹 헤어진 연인을 결혼식에 초대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결혼식은 당신에게 매우 중요한 날이다. 헤어진 연인은 결혼식에서 뜻밖의 돌발적인 행동이나 발언으로 분위기를 망칠 수 있다. ◆술을 좋아하는 친구. 술을 즐기는 친구들이 주변에 많다면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결혼식은 무사히 넘어간다고 해도 피로연에서 돌발적인 행동으로 사고를 칠 수 있다.
    • 오피니언
    2019-03-12
  • 윤동주 생가
    [동포투데이]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명동촌에는 유명한 저항시인 윤동주의 생가가 있다. 윤동주 생가는 1900년 조부 윤하현이 지은 남향의 기와집으로, 기와를 얹은 열칸과 서쪽에 자리한 동향의 사랑채가 있는 전통적인 구조로 이루어졌다. 윤동주 가족이 이사 간 후 다른 사람에게 팔렸다가 1981년에 허물어졌고 1994년 8월 연변대학 조선연구쎈터의 주선으로 복원 되였다. 윤동주가 유년기에 공부한 방, 방학 때 귀향하여 시를 쓰던 방이 당시 그대로 만들어져 있다. 주변에는 외숙인 김약연이 세운 명동교회, 윤동주기념비, 윤동주가 1939년 9월에 쓴 시 <자화상>에 나온 우물, 명동학교 유적이 있다. 반일저항시인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화룡현(지금의 용정시) 지신 명동촌에서 출생하였다. 1925년 9살에 명동소학교에 입학, 1932년에 은진중학교에 입학, 중학교 시절부터 문학적인 재질이 꽃피기 시작하였다. 1935년 평양숭실중학교에 전학, 1936년 3월 숭실중학교에 대한 일제의 신사참배강요에 항의표시를 하고 용정에 다시 돌아와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 1938년 광명학원을 졸업, 1941년에 연희전문학교를 졸업, 1942년 일본도쿄성립대학교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 그해 9월에 교도동지사대학 영문과에 전학했다. 그간 윤동주는 수많은 주옥같은 반일저항시를 발표했다. 1943년 7월 14일, 조선독립운동의 혐의로 일본교도시경찰서에 체포, 1944년 3월 31일, 2년 징역에 선고, 일본규슈후쿠오카형무소에 이송되어 옥살이를 하다가 1945년 3월 3일 광복을 앞두고 옥사했다. 당시 나이는 29세였다.(림철, 리성호)
    • 오피니언
    2019-01-14
  • [칼럼] 불타버린 통신분야 국가기반체계와 도미노 현상
    ● 송창영 지난 KT 아현지사 통신구 화재 사건을 통해 대한민국 국민들은 정보통신의 중요성과 국가기반체계 보호의 필요성에 대해 충분히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화재 사건의 원인을 밝히고 향후 다시 비슷한 화재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통신 분야 재난으로 인하여 더 심각한 재난이 발생할 수 있었던 상황을 되돌아 보고 향후 대응책에 대해 고민하고 대비하는 것도 중요하다. 현대사회는 거미줄보다 훨씬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다. 단순히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유기적으로 돌아가는 것이 현대사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시대에서 발생하는 재난은 단순히 하나의 유형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유형의 사회재난이나 자연재난 등과 연계되어 복합재난으로 발전하는 경향이 있다.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여러 시설. 전화, 무선, 방송 시설 등의 통신 시설, 도로, 철도, 항만 등의 교통시설, 상하수도, 전력, 가스 등의 공급 처리 시설 등을 일컬어 라이프라인이라고 한다. 라이프 라인에 대한 의존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특정 재난으로 인한 ‘국가기반시설의 서비스 중단’이 ‘국가기반시설의 마비’라는 사회적 재난으로 나타나고 있다. 안전에 대한 국민의 요구가 증가하고, 이러한 위험에 대비해야 할 필요성이 증가함에 따라 정부는 국가기반시설을 국가위기관리의 중요한 한 영역으로 설정하여 적극적인 보호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또한, 국가기반시설은 각 기반시설 간의 연계성을 고려한 관리가 필요하다. 유럽에서는 2005년 1월부터 2009년 6월까지 주요 기반시설을 평가하였으며, 독일 연방국민보호재난지원청의 결과를 보면 주요 국가기반시설 사고 사례 2,103회 중 1,482회가 외부적인 요인으로 나머지 621회는 기반시설 간 연계성으로 인하여 발생하였다. 전체 중단 사례 중 도미노 현상으로 발생한 피해 사례는 약 30%가량을 차지하였으며, 처음 운영중단으로 인한 피해보다 이차적으로 더 큰 피해가 발생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위스 국가기반시설 프로젝트에서는 정전 시 통신 시설 마비와 다른 기반시설 사이의 의존도를 조사한 사례가 있다. 결과를 보면 통신 시설에 대해 의존도가 가장 큰 기반시설은 은행과 보험이었으며, 그 뒤로 철도, 항공, 선박 등의 교통수송 시설과 경찰, 소방서, 구조대, 정부시설, 행정시설 등에서 의존도가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국가기반시설로 지정된 대부분의 기관은 기존의 자연재난과 사회재난 위주의 물리적 피해범주 분석에 국한되어 재난관리를 효율적으로 수행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기반시설물이나 중요 건축물, 주요 산업시설물 등에 대한 국가기반체계 보호 필요성은 점점 증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 분야의 국가기반체계 기능 마비는 연속적으로 다른 기반시설 분야에 영향을 미치므로 특정 기관만의 대처에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각 기반시설 간의 연계성을 고려한 관리방안을 수립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이런 관리방안을 수립하기 위하여 몇 가지 방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을 수 있다. 첫째, 현재 국가기반시설은 관리의 편의성 때문에 시설 중심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국가 차원의 기능 유지를 위해 필요한 모든 물리적 기반시설뿐만 아니라 마비 시 최소한도의 국가기능 유지에 영향을 주는 무형의 시스템, 네트워크망, 구역(Zone)까지 국가기반시설에 포함한 관리방안을 수립해야 한다. 둘째, ‘다른 기반시설이나 체계 등에 미치는 연쇄효과’ 등 해당 시설의 중요도 및 마비시 타시설에 미치는 영향도를 측정하는 검증 절차를 개발하여 정성적 기준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 셋째, 한 분야의 국가기반체계 기능 마비가 연속적으로 다른 기반시설 분야에 미치는 파급력에 대한 분석이 부족하여, 국가기반시설 간의 연계성을 고려한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 국가기반체계 한 분야의 마비가 타 분야에 미치는 업무중단 등 기능적 파급범위를 분석하고, 타 분야 연쇄효과 차단을 위한 기능 연속성 확보방안을 작성해야 한다. 각각의 국가기반시설은 그 하나만으로도 기능 유지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지만, 각각의 서비스 중단이 초래하는 위험성으로 인해 상호 간 연계성 기반의 관리도 매우 중요하다.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에서는 다른 기반시설이나 체계 등에 미치는 연쇄효과나 공동대응 필요성을 고려하게 되어 있지만, 아직 국가기반시설 보호 계획이나 평가는 시설 단위에 머무르고 있다. 향후 국가기반시설을 보호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할 때 시설 중심이 아닌, 기능 중심으로 다른 기반시설 분야과의 연계성을 고려하여 계획을 수립하고 관리해야 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8-12-30
  • 차라리 한글을 몰랐으면 좋겠다.
    ● 박수산 (중국동포) 인터넷으로 뉴스를 보다 중국 동포란 글자만 나오면 떼를 지어 댓글들이 시동을 건다. 어느새 한 군단이 되어 싹 쓸어버릴 듯 줄 화살을 날리고 있다 언제부터 이랬을까. 남들은 하고 싶어도 감히 못 하는 일 예사롭게 하고 있다. 제 핏줄을 다른 족보에 버젓이 올려놓고 화살에 독을 가득 묻혀 전멸시키지 못해 아우성친다. 한 그루의 나무 위에서 잎과 가지가 나란히 풍경을 만들어 온 세상에 찬탄의 목소리를 높이련만 지금은 잎 하나라도 가지 하나라도 더 끊어버리려고 광란의 화살을 날리고 있다. 생각해 보면 싸움시켜놓고 제 몸에 수혈하는 썩어가는 가지들 지금 어느 곳에 엎드려 좋아서 낄낄 댈 거다. 그것도 모르고 제일 아끼고 사랑해야 할 잎과 가지인데 뇌사에 걸렸을까? 제 보루에다 화살을 마구 날리고 있다. 차라리 한글을 몰랐으면 좋겠다. 죽어가는 잎과 가지들을 안 보았으면 좋겠다
    • 오피니언
    2018-12-03
  • [학생작문] 엄마와 함께 태산에 올랐던 날
    ▲ 연변대학사범분원부속소학교 3학년 5반 허정윤 [동포투데이] 나는 이번 겨울방학에 엄마와 같이 산동성에 있는 태산으로 놀러 갔습니다. 우리는 아침 일찍 고속렬차를 타고 길림에 도착한 다음 다시 태안으로 가는 보통렬차로 갈아탔습니다. 렬차는 거의 20여시간을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천하제일 명산으로 불리는 태산은 뿌연 안개 속에 어렴풋이 보였는데 연길에 있는 모아산보다 훨씬 높아보였습니다. ▲ 연변대학사범분원부속소학교 3학년 5반 허정윤 우리는 호텔에서 하루밤 묵은 후 이튿날 오전 관광뻐스를 타고 태산으로 향했습니다. 태산으로 올라가는 입구인 중천문에서 우리는 삭도를 타고 남천문으로 올라갔습니다. 삭도를 타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높고 우람진 나무들도 그림 속의 나무처럼 작아보였습니다. 얼마 후 우리는 남천문에 도착했습니다. 남천문은 태산 정상에 있는 옥황정과 매우 가깝습니다. 가파로운 계단을 따라 옥황정에 오른 나는 숨이 차고 땀이 비 오듯 쏟아져 그 자리에 폴싹 주저앉았습니다. 숨을 돌린 후 일어나 아래를 내려다본 순간 저도 모르게“야!”하고 탄성이 흘러나왔습니다. 저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산봉우리 사이로 흰구름이 두둥실 떠가고 있었습니다. ▲ 연변대학사범분원부속소학교 3학년 5반 허정윤 우리는 이날 공자가 글을 남겼다는 비석 앞에서 찰칵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옛 황제들도 와서 절을 했다던 절당에서 소원도 빌었습니다. 저녁이 되여 호텔로 돌아온 나는 태산에 직접 올라가 보고 느낀 것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일기장에 차곡차곡 담았습니다. /연변대학사범분원부속소학교 3학년 5반 허정윤 / 지도교원:배춘화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8-10-29
  • '고국'도 아니고 ‘모국’도 아니다
    ● 권진홍 지난 8월, 여름방학이 거의 마감될 쯤, 북경정음우리말학교 학생들이 한국을 방문하였다. 비록 함께 간 건 아니지만 워낙 인터넷이 발달하고 위챗사용이 활발한지라 거의 실시간 뉴스처럼 화면들을 접할 수 있었다. 아이들의 유쾌한 모습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보던 중 플래카드 표어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정음우리말학교 고국탐방”… 처음 기획 시에는 ‘모국탐방’이라고 했다가 여러 선생님들이 ‘모국’이라는 용어는 타당치 않은 것 같다는 의견을 내놓아서 쓰지 않았는데 최종에는 ‘고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단체방문일 경우에는 개인적인 방문에 비해 표어도 있고, 공식적인 행사도 있기 때문에 용어사용에 여러 면으로 신경을 써야 한다. 그렇지만 많은 단체들에서 크게 중시를 하지 않고 한국에서 사용하는 대로 받아들여서 쓰고 있는 현상이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오늘은 이 ‘모국’과 ‘고국’에 대해 좀 알아보고 싶다. 그래야 앞으로 사용할지 말지를 정할 수 있을 것 같다. 두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알기 위해 한국의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봤다. 모국: 1. 자기가 태어난 나라. 흔히 외국에 나가있는 사람이 자기 나라를 가리킬 때에 쓰는 말. 2. 따로 떨어져나간 나라에서 그 본국을 이르는 말. 고국: 주로 남의 나라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조상 때부터 살던 나라를 이르는 말. 사전해석이 알려주듯이 현재 중국에서 중국국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한국을 ‘모국’이라고 사용하는 건 옳지 않은 사용법이다. 한국이 일부 이민 1세의 모국 이였겠지만 3대 4대에 걸치는 우리가 태어난 나라는 아니다. ‘고국’이라고 사용하는 건 더더욱 삼가해야 할 것 같다. 사전에 보면 ‘남의 나라에 있는 사람이…’라고 해석을 하고 있다. 즉 한국을 ‘고국’이라고 하면 스스로 지금 살고 있는 나라를 ‘남의 나라’로 인정하는 셈이 된다. 스스로를 이방인으로 만들고 있는 자세이다. 가끔 조선족을 여기에서도 저기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이방인으로 자처하는 글들을 본다. 같은 피가 흐른다고 친절한 대우를 받을 줄로만 예상하고 있던 한국에서 차별대우를 받을 뿐더러 원래 쓰던 한글 이름마저 그대로 기입하지 못하게 하는 취급을 받는다면서 억울함을 호소한다. 억울함이란 잘못한 것이 없는데 불합리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할 때 느끼는 감정이다. 억울하다고 생각하기 전에 먼저 내 처신이 맞았는지부터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한국에 가서 무작정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만 믿고 다른 면들도 다 같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는지… 어릴 때부터 길들여진 습관이 하루아침에 다 없어질 수는 없는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억울하다는 생각을 가지기 전에, 이방인 취급을 당한다는 생각을 하기 전에 나 자신이 잘 처신했는지부터 돌아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비록 간단한 하나의 어휘에 지나지 않는 것 같지만 언어가 지니는 파급력은 무시할 수 없다. 언어는 사용하는 사람의 의사표명이고, 보고 듣는 사람이 이해하는 가장 직접적인 매체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어휘 하나 사용도 신중을 기해야 한다. 지금 민족 언어를 유지해나가고, 민족 예의범절을 몸에 익혀 민족 특색을 오래오래 이어나가는 것은 아주 바람직한 일이고 앞으로도 기성세대들이 많은 심혈을 기울여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명확히 해야 할 부분도 꼭 잊지 말아야 한다. 조금 더 단단하고 성숙된 문화를 만들고 숙성시켜가는 과정에 우리부터 먼저 분명한 의식세계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아직 사유능력이 여물지 않은 아이들도 우리말, 우리문화를 정확하게 배우고 수용하면서 우리만의 우세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전통을 알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작정 주입시켜 혼란을 주는 것보다는 차츰차츰 혼자의 인지능력으로 판단해나가고 선택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것도 중요하다.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어떤 어휘를 사용하든, 어떤 판단기준을 가지든 그것을 정확하게 알고 선택하자는 것이다. 주: 본문은 본지의 편집 방침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8-09-22
  • 안희정 前 충남지사는 가정으로 돌아갈 의무를 질 수 있을까
    중학교때부터 정치인을 꿈꿔온 민주화 운동 86세대, 보수의 텃밭 충남에서 도지사 재선으로 민주당의 세 확산, 대통령 예비후보로 문재인 대통령 다음가는 인기를 구가하던 안희정 전 지사가 '미투' 쓰나미에 휩쓸려 전 여직원을 성폭행했다는 의혹으로 재판을 받고 있다. 안희정 전 지사는 도덕적·사회적 비판은 감수하겠다는 입장이지만, 법적 판단은 재판부에 맡긴다며 '합의한 성관계'로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안 전 지사와 함께 근무했던 K씨는 작년인 2017년 7월부터 2018년 2월까지 4차례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여기서 드는 의문은 '성폭행'이라면 2017년 7월부터 올해 2월까지 법적인 조치나 적극적인 의사표현을 하지 않고 안 전 지사의 주변에서 맴돌며 일하고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E교육회사 Y 전 대표는 대표 재임시인 지난 2014년 7월 입사지원을 했으나 면접을 보고 "입사하지 않겠다"는 20대 여성 A씨에게 만남을 요청하고, 차안에서 껴안고 가슴과 엉덩이를 만진 혐의로 기소됐고, 또 같은해 10월 6일과 20일 비서 B씨를 "예뻐보인다. 한 번 안아보자"며 추행하자 B씨는 이 일이 있은 후 사직했으며, 양 전 대표는 A,B씨에게 성추행한 점이 인정되어 2016년 4월 법정구속됐었다. 피해자들이 즉시 성추행을 고소하거나 사퇴하여 재발을 방지한 사례다. 2017년 7월부터 2018년 2월은 무려 7개월이나 된다. 성폭행이었다면, 무섭고 징그럽고 불쾌한 일을 자행한 이를 지근거리에서 상사로 모시며 수행하고 법적 조치를 하지도 않으며 간헐적으로 성관계를 갖는다는 것이 위의 사례와 너무나 판이하게 달라, 법적 조치를 7개월만에 한 이유에 대해 주목이 되고 있다. K씨가 JTBC TV 생방송에 나와 안희정 전 지사가 성폭행을 했다고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며 진행한 인터뷰 시점은, 안 전 지사가 3선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발표한 이후이다. 또한, K씨가 안 전지사를 밀착 보좌하는 수행비서에서 정무비서로 근무형태가 바뀐 이후이기도 하다. 비서실 등 정무직은 보통 지사 등 정치인의 임기와 같이 근무하고 함께 그 직을 그만두는 것이 통상적이다. 안 전 지사가 임기를 3개월여 남겨두고 사퇴하고 비서실장 등 정무직 직원들이 동반사퇴한 것도 그런 관례때문이다. K씨는 안희정 대선예비후보 캠프때부터 합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안 전 지사는, 민주당이 강세인 가운데 문재인 대통령 다음으로 안 전 지사가 2위를 함으로써 차기 대권주자 반열에 확실히 올랐고, K씨를 도지사 비서직에 채용하고 수행비서로 임명해 수개월을 함께 지냈고 성관계(K씨 주장은 성폭행)까지 한 사이인데, K씨는 수행비서에서 정무비서로 자리가 바뀌면서 안 전 지사를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고, 안 전 지사가 도지사 3선에 도전하지 않음으로써 K씨의 직장은 사라질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성폭행이냐 합의된 성관계냐는 재판부가 판단할 몫이다. 그러나, 무려 7개월간 4차례의 관계가 있었는데 성폭행으로 법적 조치를 하지 않았고, 피해를 주장하는 자가 피의자와 곁에서 보좌하는 일을 했으며 직장에서 퇴출될 위기가 다가오는 시점에 법에 성폭행이라고 뒤늦게 호소한 점은 어딘가 모르게 어색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성관계가 있던 장소도 무인도나 감금된 상태도 아니었고 폭행도 없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충분히 뿌리치고 도망치거나 성폭행하지 말라고 싫다고 비명을 지르고 구조를 요청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특히, 최초 관계가 있은 후 이 관계가 성폭행이었다면 즉시 수행비서직을 사퇴하고 안 전 지사를 성폭행으로 고소했어야 추가 성폭행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감금되어 묶인채로 무자비한 폭행을 당하여 도망칠 의지가 상실된 상태가 아니거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 아니라면, 적극적으로 방어하고 도망치고 싫다고 분명히 항거하였어야 추가 관계를 갖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간통죄가 사라졌지만 안 전 지사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부분이 없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하지만, 한번 발을 삐끗했다고 영원히 매장하는 일은 개인을 위해서도 사회를 위해서도 좋은 마무리는 아니다. 바람핀것이든 성범죄를 저지른 것이든 충분히 반성하고 (성범죄라면 처벌을 받고) 다시 가정으로, 직업을 되찾을 기회를 줘야 하지 않나 싶은 것이다. K씨가 생방송에 나오지 않고도 안 전 지사를 법적인 조치만 해도 정치적으로 매장이 될 것인데, 생방송까지 나와서 일방적 주장을 함으로써 이미지가 회복되기 어려울만큼 훼손된 상태다. K씨가 피해자라면 가해자인 안 전 지사를 고소할 권리가 있듯이, 안 전 지사도 부인 이외의 여자와의 관계를 그만 둘, '헤어질 권리'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안 전 지사는 가정으로 돌아갈 의무를 질 수 있을까. 안희정 전 지사에 대한 1심 선고는 오는 8월14일 있을 예정이다. [기고=박상진]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8-07-30
  • 사랑하는 아들에게- 선물보다 값진 사랑의 편지
    나의 아들 유성아~ 엄마는 지금 (우리 아들이 머하고 있을가?...)하는 궁금증으로 너의 모습을 그려보면서 이 편지를 쓴단다....이번 6.1절이 너에겐 마지막 아동절이더구나...니가 태여나서 너무나 기뻐했던 날들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소학교생활을 마감하게 되는 어엿한 청소년으로 되였네~~엄마가 아들 곁에서 축하해주고 놀아주지 못해서 참 아쉽구 미안하구나.... 너랑 이렇게 떨어져 지낸지 3년 3개월... 한국 행 짐을 싸고 있는 엄마를 잠결에 깨서 보고는 말없이 머리 숙여 문뒤에 앉아 떼쓰고 싶어하는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구나... 그리고는 한참 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스스로 툭툭 털고 일어나 세수하고 옷 입고 책가방을 메고 애써 웃음 지으며 학교 가던 니 모습을 생각하면 엄마는 지금도 가슴이 미여진단다... 엄마도 여느 엄마들처럼 니가 성장해가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너의 든든한 '슈퍼우먼'이 되고 싶었는데 안되네.... 매사 남과 비교하지 않고 항상 타인을 배려해주는 니가 엄마는 참 뿌듯하단다... 그리고 이젠 니가 엄마의 '슈퍼맨'이 되는 듯 싶어서 하루하루가 힘이 나고 마음이 든든해진단다... 비록 몸은 니 옆에 없지만 엄마의 마음은 단 1초도 너의 곂을 떠나지 않았다는 걸 알지.... 아들~~ 6.1 절 선생님들과 친구들이랑 잼 있게 쇠고 새로운 꿈을 향해 오늘도 래일도 열심히 뛰여보세요~~사랑해 나의 '슈퍼맨'아들~~ 한국에서 엄마가. 용정시실험소학교 6학년 1반 전유성 엄마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8-06-05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