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5(수)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실시간뉴스
  • ‘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4-05-02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3-11-21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아는 사람을 멀리하라!
    ■ 허강일 재한조선족들의 소비습관이 과소비로 굳어지면서 “돈을 벌겠으면 아는 사람들을 멀리하라”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한달에 200만원을 버는 경우라 해도 전기세, 물세, 집세, 용돈을 떼고 나면 60만원을 적금하기 힘든 상황이다. 게다가 결혼식, 회갑연, 아이 돐잔치까지 줄이으면서 적금은 커녕 사장으로부터 가불해 쓰는 경우가 푸술하다. 불법체류로 14년 있다가 재입국신청을 위해 청도에 돌아온 김모(길림, 64세) 여인은 “한국행에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다”면서 “돈 모으기가 하늘의 별따기”라고 하소연하였다. 10여년전 길림지구에서 김치 장사로 소문놓았던 김모여인은 남편의 타계에 충격을 받고 한국행을 선택, 막노동으로 보낸 세월이 너무나도 아깝다고 하였다. “가령 그냥 김치장사에만 전념했더라면 아마 지금쯤 큰 공장을 차렸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김모의 어조에는 후회가 가득 묻어있었다. 한국인과 거의 대등한 노임을 받는다고 하지만 소비는 한국인을 초과했다는 것이 지성인들의 지적이다. 한국인들은 결혼식에 가서도 1차로 끝나지만 조선족들은 2차, 3차 심지어 새벽까지 축제를 펼치기에 부조돈을 전부 먹어서 없앤다고 했다. 관혼상제에 2, 3만원 혹은 많아야 5만원하는 것이 한국인들의 부조습관이지만 조선족들은 기본으로 10만원을 들고 가는 것이 풍기다. “주말이 무서워요.” 방문취업비자가 만기가 되어 돌아온 홍모(녕안, 여)는 주말이면 촘촘이 기다리고 있는 부조가 지겨울 정도라고 하였다. “네가 쇠니까 나도 쇤다”는 식의 심태가 낳은 소비문화는 평일에 끼인 생일마저 주말로 미뤄가며 “보충잔치”를 펼치다 보니 어떤 날에는 하루에 두세집 부조하러 다녀야 할때도 있다고 했다. 한국에 체류한 시간이 길면 길수록 부조할 일이 더 많다는 것이다. 평소 연락 없던 사람마저 부조 받을 일만 생기면 연락한다고 했다. “부조한 것만큼 돌려받는다고 하지만 아들 딸이 모두 중국에서 결혼한 저희 같은 경우는 부조 받을 일이 전혀 없잖아요. 그러나 울며겨자먹기로 갑니다. 인젠 고향사람도 사실 그렇게 반갑지 않아요.” 한국불법체류 17년차로, 17년만에 중국에 처음으로 돌아왔다는 류모는 불법체류에 대한 단속이 심할때엔 돈이 모아졌으나 불법체류에 대한 단속이 느슨해지고 유동이 자유로워진후부터 돈이 모아지지 않았다고 하였다. 더불어 사는 세상, 더불어 산다는 이유로 주말마다 모여서 흥청망청 탕진하는 것은 피땀을 팔아 돈을 버는 우리의 참된 자세가 아니라고 본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6-05-10
  • "타자"의 시각에서 본 조선족과 한국인
    ■ 안성호 (절강대학 인문학원 교수) ◇ 조선족과 한국1980년대 시작된 조선족사회와 한국사회와의 교류도 이젠 30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1980년대 중국조선족과 한국인 사이에는 ‘동포애’라는 감성적 요소를 핵심으로 하는 감동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다 중국조선족이 한국에 들고 간 한약재 중의 가짜 상품으로 인하여 한국인들의 조선족에 대한 불신이 싹텄다. 양측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반세기 동안의 단절로 인한 문화적 차이는 서로간의 불신과 저촉적인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1990년대 후반기에 고조를 이루게 되었다.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상호간의 이해가 깊어지고 감성에서 이성으로의 전환이 되면서 상호간의 신뢰와 교류만이 두 사회의 양호한 발전에 유리하다는 공통된 인식이 점차 형성되고 있다. 하지만 최근 한국에서 일어난 몇 차례 조선족에 의한 형사사건은 다시 한번 조선족 사회의 이미지를 흐려놓고 있다. 조선족에게 있어서 한국은 고마우면서도 아직도 융합되기 어려운 ‘가깝고도 먼’ 존재이다.문화적 측면으로 볼 때 조선족과 한국인은 분명 전통문화의 기초를 공유하고 있고 같은 민족이다. 김치, 된장 등 음식문화 뿐만 아니라 예의범절, 연중행사, 언어와 문자 등 거의 모든 기초문화를 공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족과 한국인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두터운 무형의 장벽이 있고, 이로 인하여 조선족사회는 늘 정체성 혼란을 느끼고 있다.조선족 사회의 정체성 혼란은 ‘나(조선족)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명확한답이 없어 비롯된 현상이며 중국과 한국이라는 두 국민국가의 사이에 끼어 사는 과경민족(跨境民族)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이러한 딜레마를 이해하려면‘국민국가’라는 근대국가모식과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와 ‘타자’의 관계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국민국가’, ‘타자’와 ‘민족상상(想象)’국민국가라는 개념은 유럽에서 기원하였으며 국민의 동질성과 국가에 대한 정체성을 중요시한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최초로 유럽의 국민국가 이념을 도입하였으며 한 개 나라, 한 개 민족이라는 이념으로 국민국가의 건설을 추진하였다. 일본은 단일민족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나라이므로 “일본 = 일본인 = 대화민족”이라는 국민성과 민족성이 고도로 일치되는 국민국가의 길을 걸어왔다.국민국가의 건설은 국민의 동질성 즉 “우리는 같은 사람들이다”라는 인식을 강요한다. 이러한 동질성을 수립하기 위하여서는 ‘우리’와 구별되는(혹은 대조되는) ‘타자(他者)’가 필요하였다. 즉 ‘우리’라는 동질성을 가진 국민을 만들기에는 ‘우리’와는 서로 달라 구별할 수 있는 ‘타자’가 있어야 하였던 것이다. 일본의 경우에는 재일(在日)조선인들이 ‘타자’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재일조선인들은 이러한 차별로 인하여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반일반공(反日反共)’이라는 이데올로기 하에 “한국 = 한국인 = 한민족”이라는 국민국가 건설의 길을 걸어왔다. 즉 한민족과 한국인, 한국국민이 거의 동일한 개념으로 인식되어 왔던 것이다. 정치적 수요에 맞추어 ‘국악(国乐)’, ‘국어(国语)’ 등의 개념을 창출하였고 국민들의 동질성과 배타적인 문화체제를 수립하여 왔다.한민족이 절대 다수인 한국에서는 화교 즉 한국에 살고 있는 중국인들이 ‘타자’로 분류되어 배척과 차별의 상대가 되었다. 하지만 일본의 재일조선인들에 비해 한국의 화교의 숫자가 적어 ‘타자’가 양적으로 너무 부족하였으므로 내부에서도 계층에 따른 ‘타자 만들기’가 이루어지게 되었는바 이에 따른 ‘왕따’와 차별문화는 오늘날까지도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이처럼 ‘우리’와 서로 다른 ‘타자’를 구별하는 것은 ‘우리’만의 동질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다. 한국에 들어와 사는 외국인이 증가함에 따라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새로운 ‘타자’로 분류되었다. 한국 사회에서 “우리는 한국인이다”라는 인식을 더욱 강조하고 외국인을 ‘타자’로 몰아 붙임으로써 민족주의를 통하여 한국인으로서의 동질성과 우월감을 느끼려 하는 것이다.중국은 역사적으로 다민족국가로서 다양한 민족이 함께 살고 있었다. 근대 국민국가이념이 량계초 등에 의하여 도입된 후 다민족 국가라는 현실에서 ‘중화민족’이라는 민족공동체가 구상되었다. 근대의 민족이란 실체가 아니라 근대화의 과정에 다양한 경로와 방식을 통해 상상된 공동체라고 주장한 프레드릭 앤더슨의 말을 빌리면 ‘중화민족’은 일종 ‘상상의 민족공동체’인 셈이다.중화민족 아래에 56개의 민족을 둠으로써 “중국 = 중화민족 = 중국인”이라는 국민문화를 형성하여 가고 있다. 이러한 다문화적 요인으로 인하여 중국문화는 역사적으로 배타성보다는 포용력이 강하였고 보다 개방적이고 융합적인 문화였다. ‘우리’와 ‘타자’의 시각에서 보면 중화민족은 ‘상상의 공동체’로서 개개인과의 관계가 밀접하지는 않았다. 다민족적인 배경으로 인하여 민족을 통한 ‘우리’와 ‘타자’의 구별이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타자’와의 구별이 상대적으로 용이하게 이루어 졌다.◇ 조선족의 '타자'조선족의 경우, 중국으로 이주하면서 주로 조선족 마을에서 생활하였고 주변에 한족 만족, 몽고족 등 여러 민족들과 어울려 살았으므로 ‘우리’는 조선족 자체였고 주변의 기타 민족이 ‘타자’였다.1980년대까지 조선족 사회에서 ‘조선족’이라는 명칭보다 ‘조선사람’이라는 명칭이 더욱 일반적이었다. 조선사람은 조선말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융합력이 강한 중국에서 민족의 얼을 보전할 수 있는 중요한 전제였다. 조선족 사회는 중국에서 살아 나가면서 늘 “타자”를 의식하면서 생활하였다.“조선족 마을들은 기타 민족 마을들 보다 깨끗하다.” 이는 조선족 마을이 ‘타자’인 기타 민족의 마을과 구별하는 선명한 특징의 하나로 되었다. 백의민족으로서 예로부터 위생습관을 잘 지켜왔다는 해석도 되지만 ‘우리’와 ‘타자’의 관계에서 볼 때 ‘타자’와 구별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된 것이다. 마을 내부에서 조차 어느 집의 솥이 더욱 반짝반짝 빛나는가 비기는 습관은 이러한 타자의식의 내부침투라고 볼 수 있다.조선족은 노래와 춤에 능하다는 것은 동북에서 조선족문화의 중요한 특징으로 자리매김 되었고, 이를 통하여 ‘타자’인 기타 민족과 구별하고 조선족으로서의 동질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타자’의 시각은 교육에 대한 열정, 징구량(征口粮)의 초과 납부, 농토 건설, 마을 건설 등 여러 분야에서 모두 엿볼 수 있다. 조선족 사회 내부에서가 아니라 늘 한족 등 기타 민족과의 비교를 통하여 조선족으로서의 동질성과 자부심을 확인하고 있었던 것이다.이러한 ‘우리’와 ‘타자’의 구별은 다민족국가 중국이라는 맥락에서 진행되었고 중화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 속에서 진행되었다. 이 과정을 통하여 조선족사회가 중국 국민국가의 건설에 동조하게 되었다. ‘조선사람’으로부터 ‘조선족’으로의 호칭 전환도 이 과정에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한국과의 교류와 조선족의 ‘타자’ 인식 조선족 사회와 한국사회가 교류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족의 ‘우리 - 타자’의 인식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원래 조선족에게 있어서 중국의 기타 민족이 ‘타자’였고 한반도의 사람들은 자신이랑 똑 같은 ‘우리’였다. 하지만 조선족 사회는 이미 중국의 국민국가 건설의 과정에 중화민족의 일원으로서의 조선족, 즉 ‘중국의 국민’이라는 인식이 정착되게 되었다. 바꿔 말하면 한민족이면서도 중국국민이라는 이중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반대로 한국인들은 “한민족 = 한국인”이라는 동질적 국민의식을 확립하고 있었다.40년의 단절을 겪고 난 이후 1980년대 중엽부터 조선족 사회와 한국사회가 다시 만나게 되면서 서로 같은 ‘우리’라는 동포애에 젖어있었다. 하지만 서로가 인식하고 있는 ‘우리’의 내용은 이미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중국을 “우리 나라”라고 하는 조선족에 대하여 한국인들은 배신감마저 느낄 만큼의 충격을 받았고 조선족에게 한국인임을 승인하여 달라고 강요하였다.조선족 사회 또한 한때 자기와 같은 ‘우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한국인들과 교류하면서 여러 가지 차별을 경험하면서 소외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는 같은 민족 기초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두 국민국가의 문화 사이의 충돌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서로가 상대방을 ‘우리’라고 여겼었는데 알고보니 ‘우리’가 아닌 ‘타자’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이로 인한 실망과 배신감이 더욱 상대방을 불신하게 만들었던 것이다.조선족은 ‘중국인’ 즉 ‘타자’라는 인식이 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 이미 굳어졌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재한(在韩)조선족 사회가 20여 년간 한국에서 점차 정착해 오면서도 늘 소외감을 느끼게 되고 뛰어 넘을 수 없는 무형의 장벽을 감지하는 중요한 원인이 아닐까 생각한다.물론 기타 외국인에 비하면 완전히 ‘타자’인 것만은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조선족은 한국 사회에서 ‘우리’와 ‘타자’의 사이에 위치하면서 경우에 따라 완전히 ‘우리’로 인정될 때도 있다. 한국 주류 사회에서 활약하고 있는 재한조선족 엘리트계층도 이미 많이 성장하였다고 보아야 하며 어느 정도 ‘우리’로 인정되고 있다고 본다. 앞으로 한민족으로서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한민족이라는 ‘우리’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시대의 발전 흐름에 맞는 것이며 조선족의 발전에도 유리하다고 본다.조선족 사회의 정체성 혼란 또한 이러한 배경에서 기원하였다고 본다. 조선족들이 오랫동안 간직하여 왔던 ‘우리’라는 동질감이 한국과의 교류 가운데서 힘없이 무너져 버리게 되었다. 한국인과 조선족이 같은‘우리’가 아니라 ‘타자’로 인식되었을 때 ‘우리’와 ‘타자’를 구별할 수 있는 수단이 결여되었던 것이다. 즉 지금까지 한족 등 타민족과의 ‘타자’ 구별에서 활용되었던 언어, 례의범절, 생활습관 등 근거들이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고 중국과 한국의 직접적 교류가 증가하는 가운데 조선족으로서의 존재감 조차 무력해지지 않을까 하는우려를 강하게 느끼게 되었다.따라서 동일한 기초 민족문화를 공유하는 기타 지역 한민족과 구별하기위하여서는 무엇을 가지고 ‘우리’를 확정할 수 있을지 망설이게 된 것이다. 아직도 우리는 조선족이라고 강조하면서도 조선족, 조선족문화는 무엇인가에 대하여 정확히 정의 내릴 수 없다.사실 “조선족문화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기에는 무리가 있다. 조선족문화가 동아시아라는 거대한 무대를 배경으로 다양한 문화를 융합하면서 형성되었고 지금도 새로운 문화적 요소를 끊임없이 도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융합을 가능하게 하였던 조선족의 사회발전 시스템에 대한 탐구, 조선족만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특색을 발굴함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는 조선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한민족문화의 다양성, 중국문화의 다양성, 글로벌 시대에 대한 적응력 등 다양한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본다.안성호 프로필: 절강대학 인문학원 교수 할빈사범대학 력사교육학부 졸업 일본 고베대학 연구생원 석사, 박사과정 졸업 현재 절강대학 인문학원 교수1990년부터 조선족 정체성과 문화성격 등 조선족사회를 비롯해 문화인류학을 장기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6-04-28
  • 윗동네 중국동포들…
    ●올챙이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으나 인터넷 신문에 ‘중국동포’와 관련된 기사가 게재되면 으레 다음과 같은 댓글이 보이곤 했다. ‘동포는 무슨 얼어 죽을 동포, 말투만 겨우 비슷할 뿐 사고방식은 완전 중국인이지….’ 그런데 실제로 얼어 죽은 동포가 있긴 하다. 119에서 주사 부리는 취객으로 오인해 제때에 구조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 동사한 조선족. 여기에서 질문 하나. 조선족? 그럼 조선족은 무엇이고 중국동포는 또 무엇인가? 싱겁고 뻔한 얘기다. 이렇게 한국 사회는 명칭 또는 호칭에 참 민감한 거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야타족, 제비족 등등의 신조어 범람들. 거기에 또 밉상스러운 짓도 많이 하는 조선족이라니? 조선족이 한국에 와서 가장 난감한 상황 가운데 하나는 할아버지를 할아버지라고 부르면 화를 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장님 아내를 어떻게 부를지 몰라서 “저 아주머님이 어쩌고…” 하다 보면 사모님 얼굴에 기분 상한 표정이 역력히 드러난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아가씨’라는 호칭은 조선시대 양반집 규수를 일컬었겠는데 지금 ‘아가씨’ 하고 부르면 어떤 여성들은 기분 상한 표정을 짓는다. 그래서 남성들도 식당에서 “저기 언니~” 하고 부른다. 오래전 ‘영감 마님’이라는 호칭은 아주 귀한 분들에게만 쓰던 존칭인데 지금 ‘영감’이라면 모욕이다. 거기에 ‘영감탱이’ 하면 아주 그냥…. 그러고 보면 세월이 참으로 많이 흘렀다. 한중수교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족이 스튜어디스를 ‘공중 아가씨’라고 불러서 한국 사람들이 한바탕 뒤집혔다는 일화도 있다. 공중 아가씨는 중국어 ‘空中小姐’에서 나온 말이다. 영어가 익숙하지 않은 조선족들이 비행기에서 승무원을 우리말로 부르고 싶다면 공중 아가씨보다 ‘공중 언니’가 어떨까. 한중수교 후 20여 년의 세월 동안 조선족과 한국인들이 왕래와 교류가 많아 서로 간에 문화와 습관의 차이로 벌어지는 오해들도 이제 적잖게 감소했다고 한다. “일 없습다.” 해도 화내지 않고 괜찮다는 뜻으로 알아듣고, “오징어 살인사건” 하면 남한 사람들은 “아, 낙지 살인사건 말하는구나!” 하면서 알아듣는다. 심지어 한국의 다단계업자들이 연변에 진출해 조선족 할머니들을 단체로 모아놓고 “참새!” 구령에 맞춰 아매들이 입을 벌리면서 “짹짹!” “병아리~” 구령에 “삐악삐악!” 하는 유치원 문화까지 전파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말 다한 것이다. 다단계 하는 한국 청년들은 또 어떠한가. 그들은 조선족 할머니들의 연변 말을 습득해 “제 먼저 가겠소? 양 그래오. 내 좀 있다 가께 양!” 같은 연변 사투리를 넉살 좋게 구사하는 통에 조선족 할머니들은 배를 움켜잡고 뒤로 넘어질 정도로 박장대소한다. 참으로 훈훈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한데 조선족들이 한국에 와서 3D 업종에 종사하면서 뼈 빠지게 돈을 벌어 고향에 송금하면 부모들은 한국의 다단계업자들에게 다시 헌납하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누군가 그랬다. 한족 늙은이들은 아침부터 백화점 앞에 줄 서서 세일 상품을 사려고 기다리지만, 조선족 할머니들은 다단계에 몰려 한국 상품을 구매하고 할아버지들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보건품이나 약 광고에 귀를 기울인다고 하던가. 어찌 되었든 이제 한국 땅에 거주하는 조선족(조선족 동포든, 중국동포든) 수가 80만 명을 넘어선다고 한다. 6.25 당시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가 오리 알을 주머니에 가득 주워 담았던 인민군 중에 조선족 군인들이 상당수였던 건 이미 공개된 비밀이다. 연변자치주의 촌마다 동네마다 혁명열사 기념비가 있고 한 집 건너 혁명열사가 있다는 건 연변 조선족 인민들의 자랑이요, 미담이었다. 하지만 한중수교 후 연변을 방문한 한국 인사들에게 그것을 크게 떠들지 않았다. 이유는 말하지 않더라도 다 아는 이야기다. 그러고 보니 ‘이제 만나러 갑니다(채널A 프로그램 · 이하 이만갑)’에 출연한 한 여성의 발언이 떠오른다. 그 여성이 김아라였던가 한송이였던가 기억이 불분명하지만,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장백산은 무슨 얼어 죽을 장백산임까? 그건 중국에서 부르는 거고 우리는 백두산이라고 불러야 함다!” 그 장면을 시청하다가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순간 '저건 남한에 와서 배운 거야. 영악한 것…' 같은 여러 가지 생각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데 문득 이 노래가 생각났다.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국… 압록강 줄기줄기 피어린 자국….” 그녀에게 ‘너희 이 천여 만이 그토록 목청 높이 부르던 김 영감 노래 가사에 장백산이 나온다’고 하면 또 무슨 말을 할까. 또한, 예전에 연길에 대우호텔 외 한국인들이 많이 숙박했던 ‘백산호텔’이라고 있었다. 백산호텔? 사실 이름이 딜레마였다. 장백산호텔은 한국인들이 삐지고 백두산호텔은 중국인들이 화를 내니 살짝 백산호텔이라고 바꾼 것이다. 연변 조선족들의 영악함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여튼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조선족 군인 수보다 더 많은 숫자의 조선족 동포들이 여기 남한 땅에 내려와 거주하고 있다. 조선족이 소방서와 경찰서에만 없을 뿐 그 어느 곳에나 있다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중국동포들 천지다. 이제는 ‘조선족 중의 이자스민을!’ 외치며 국회에까지 조선족 영입 추진을 목표로 세우고 있다는 소식이 간간이 들려온다. 두만강 물은 얕은 동해로 흐르고 사람은 높은 백두산으로 오른다는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높은 백두산은 바로 국회가 아니겠는가? 적지 않은 과학자를 배출하고 여러 명의 조선족 영웅까지 배출한 중국동포들이 한국 땅에서도 영웅을 배출하지 말란 법은 없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유명했던 인물은 오원춘, 박춘풍, 김하일 등등밖에 없지 않았던가(아, 이건 좀 아닌가). 그럼 백청강도 유명했고 한국화 씨도 아마 유명하겠지만, 그 가운데 단연 으뜸은 독립운동가며 작가인 홍성걸 선생이라 생각한다. 그분이 쓴 글 중에 인민군이 남침 당시 서울 감옥으로도 쳐들어가 철문을 부쉈는데 수형자들이 쏟아져 나와 인민군을 마구 얼싸안으며 부둥켜안고 눈물 흘리며 만세를 외치는데 조선족 인민군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고 한다. 자고로 ‘적들의 적은 우리 편이다.’라는 속담이 있는데 조선족 인민군들은 ‘이들까지 과연 우리 편으로 대해야 하는가’라는 심적 갈등에 휩싸였을 것이다. 그 무리 속에는 살인범도 있을 것이고, 강간범도 있을 것이고, 새끼 돼지를 훔친 도둑도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저기 윗동네 조선족은 과연 아랫동네 한국인들에게 적일까, 친구일까. 중국에서 천대받고 화교들에게도 미움받고, 배도 건조할 수 없고 자동차, 휴대폰 등등을 못 만들고 못 하는 게 많은데… 그동안 내가 독립군 투사 후손이요, 내 할아버지 고향이 경상도요 그것만 믿고 거들먹거렸단 말입네까? 부끄러운 줄 알아야겠다. 명성황후가 나오는 사극을 보면 꼭 이런 대사가 나온다. “난 조선의 국모(國母)다!” 물동이를 이고서 양손에 모젤 총을 들어 팡팡~ 일본군을 쓰러눕히며 김성주의 경호를 섰던 김정숙은 김정일의 생모다. “나도 조선의 국모요!” 김정숙이 이렇게 말한다고 하더라도 누구도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저 소나무가 고려 쩍 소나무냐? 조선 쩍 소나무냐? 그 질문에 명쾌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는 것처럼. 거기에 김정일이 한술 더 뜬다. “조선의 어머니는 오직 한 분 뿐입네다!” 김평일이 열 받아 쿠바로 가면서 “그래 맞아. 너 금마!” 했다던가. 이 너그 엄마 김정숙 동지가 김 영감의 잠을 위해서 걱정했던 유명한 일화가 있다. 김일성 집무실 밖에는 휘영청 늘어진 수양버들이 있었는데 이른 아침부터 늘 참새들이 연변 아매들처럼 시끄럽게 “짹짹” 울어 참 성가셨는데 어느 아침에 김정숙 동지가 파리채를 들고서 수양버들 밑에서 나지막한 소리로 “훠이훠이~” 하면서 참새들을 쫓고 있었다. 깜짝 놀란 경호원들이 떼떼 권총을 빼 들고 뛰어와서 그 수양버들 속에 가려져 있는 여성을 겨냥하고는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여성은 “내가 바로 조선의 국모다!”를 외쳤다. 그 버들가지 사이로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김정숙 동지였다. 경호원들이 조심스레 이유를 물은즉슨 “수령님 동지께서 나라와 인민을 위하여 밤잠도 주무시지 못하고 새벽녘까지 많은 사무를 보시다가 이제 겨우 쪽잠에 드셨는데 저놈의 참새 새끼들…” 하고 말하니 경호원들이 너무 부끄러워 모두 고개를 숙였다. 양손잡이 명사수인 김정숙 동지는 충분히 경호원의 권총을 빼앗아 그놈의 참새들을 민주화할 수 있었지만 겨우 잠이 든 김 영감 동지가 반란이 일어난 줄 알고서 팬티 바람으로 뛰쳐나와 허둥댈까 봐 그냥 파리채만 열심히 흔들며 참새들을 잡아먹을 듯 쏘아보았다고 한다. 이후 북한 인민들은 참새 목털로 만든 비단 이불을 김주석에 바쳤다는 이야기를 ‘이만갑’에서 들었으리라 믿는다. 그나저나 세계의 공산당 지도자들은 왜 참새들을 잡아먹지 못해서 그렇게 안달이 났을까. 전생에 참새 찡들하고 무슨 철천지원수라도 맺은 것인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대약진운동 때 참새들도 고생 꽤 했다고 들었다. 물론 나는 그때 어려서 모르지만 말이다. 글을 맺으면서, 불쑥 고개 드는 의문. 한국 국적을 회복한 조선족은 한국인일까, 조선족일까. 중국을 조금만 비판하면 개구리 올챙이 쩍 생각도 못 하냐(?!)고 하면서 삿대질한다. 누구나 개구리 과거는 올챙이 시절이라고 하는데, 내가 볼 때는 물알인 거 같은데… 물알? 참새들은 아무래도 그것을 후루룩 마실 것 같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6-03-20
  • 중국동포 국회의원 비례공천에 대하여
    ▲ 곽재석(한국이주·동포개발연구원) 4월 총선이 다가오면서 중국동포사회가 소란스럽다. 다문화 이민자 비례대표 몫으로 중국동포 유권자를 대표하는 인물의 국회의원 공천이 가능하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동포사회에서 그 동안 꽤 완장차기 좋아하던 인물들이 이래저래 여당과 야당을 기웃거린다고 한다. 오랫동안 동포사회의 숙원이던 국회의원 배출이 가능할지 어떨지 모두의 관심과 이목이 집중되어 있다. 이와 관련해서 한가지 예언을 하고 싶다. 금번에 여당이던 야당이던 중국동포 몫의 국회의원 비례공천은 없다. 아니 있어서도 안된다. 그러니 김칫국부터 마시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고? 내가 배가 아파서 그런다고? 천만에 말씀이다. 난 원래 소수 이민자 정치참여로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공부하고 또 그 동안 동포사회의 권익을 대변하는 정치인 배출을 목표로 동포사회에서 사업을 해 온 사람이다. 그 동안 한국사회 어디를 가든지 중국동포들의 피와 땀과 눈물을 얘기하고 한국민들이 왜 조선족 중국동포사회를 포용해야 하는지 설득하고 호소했던 사람이다. 따라서 내가 동포사회의 큰 인물이 나오는 것에 대해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지금 나는 동포사회 국회의원 비례대표 공천에 대해 명백히 반대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현재 한국의 중국동포사회에는 동포들과 喜怒哀樂을 함께 하고, 동포사회를 위해 헌신해 온 그런 功績을 바탕으로 금번에 응당 국회의원 금배지 추천을 받아야 할 만한 인물들이 좀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즘 동포사회에서는 동포들을 위해 뼈를 깎는 고통을 아끼지 않은 한국사람들을 싸잡아 비난하는 사람은 많다고 한다. 가소로운 노릇이다. 진정 동포사회를 위해 국회위원이 되고 싶은 사람은 적어도 이들 한국사람보다 몇갑절을 동포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난 다음에 감히 사람들 앞에 나서라고 말하고 싶다. 동포축제 몇 번 하고 그럴듯한 단체 몇 개 만들어서 폼잡는다고 국회의원 될 것 같으면 동네 XXX도 하품할 노릇이다. ​둘째, 중국동포 사회는 멋진 대표인물을 만들어 낼 풍토가 아직 마련되어 있지 못하다. 동포사회 모임에 나가서는 누구 한사람 칭찬을 하기가 겁난다. 그 사람 인물이다. 훌륭한 사람이다하고 치켜세우면 어느새 뒷전에서 손가락질하며 반목하고 질시하고 비난을 일삼는다. 그래서 나도 어지간히 욕을 먹고 있는 것을 안다. 아니 나만이 아니다. 동포사회에서 정말 제대로 일 좀 할 만한 사람들은 오히려 몸에 오물 묻힐까봐 감히 겁이 나서 나서질 않는다. 중국동포사회에 인물이 없는 것이 아니다. 무수한 人才群英이 있다. 그러나 서로의 아름다움을 깎아내리기만 하는 군집에서 대표 인물이 배출될지언정 그 사람이 과연 얼마나 일을 할 수 있을까? 국회의원 노릇하는 내내 욕만 엄청 먹고, 일도 제대로 못해보고 뒷전에 내몰릴 것이 뻔한데 그런 사람을 뽑은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차라리 없는 것이 더 아름답다. ​셋째, 동포사회가 나설 분위기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에 체류하는 중국동포의 규모가 60~70만명을 헤아린다고 한다. 그러나 이 엄청난 규모는 아쉽게도 아직 숫자로만 존재할 뿐이다. 한국사회에 미치는 동포사회의 영향력은 아직 미미하기만 하다. 유권자의 투표행사도 미미하고, 한국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기부하고, 참여하는 모습도 아직 초라하다. 우리끼리 잘났다, 크다만 자랑할 뿐 한국사회가 놀랄만한 아니 감동받을 만한 그 무엇을 아직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중국동포 범죄증가와 사회적 갈등에 대해 동포사회가 발벗고 나서는 모습과 노력을 제대로 보여 주지 못하고 있다. 그저 동네 소꿉놀이 수준의 행사와 사업들뿐이다. 캄캄하고 답답한 노릇이다. 넷째, 때가 아직 무르익지 않았으며 오히려 최근의 정치상황은 중국동포 사회가 한국사회에서 잠잠히 내실을 다져야 할 상황에 처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북한 핵시험 이후로 한국사회에서는 反中 感情이 오히려 고조되고 있다. 동포사회의 영향력 확대를 반기는 분위가 절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섣부르고 경솔하게 중국동포사회의 집단적 목소리를 내뿜는 행동은 오히려 한국사회의 반감을 촉발시킬 가능성이 크다. 한국의 눈치 빠른 정치권도 이런 분위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중국동포사회 완장분들께서는 제발 이런 시류를 좀 읽을 줄 아는 눈이라도 좀 있기를 바란다. 한국에 체류하는 조선족 중국동포사회의 대표인물은 필요하다. 그러나 여러모로 볼 때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밥상에 김칫국도 없다. 그러니 마실 생각도 말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나의 예언이 틀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재앙이다 곽재석 (한국이주·동포개발연구원)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6-03-18
  • 조선족 국회의원? 아직은 천방야담
    ■ 김정룡 (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 소장) “비례대표 이야기가 정치권에서 먼저 나오진 않았을 거다. 여당도 야당도 쉽사리 중국동포를 공천하는 일이 쉽지 않다. 당장 선거구에서 동포들에게 과도하게 친화적인 정책을 실시했을 경우 내국인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전략상으로 보면 망하는 수가 있다. 동포들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의 여론이 꼭 좋지는 않다. 지역구가 슬럼화 된다고 해서 떠난 분들도 많다. 다문화 사회라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지만 그 시점이 지금이냐고 물으면 ‘아직 시기상조다’고 말할 수 있다. 냉정하게 들리겠지만 이게 현실이다.” 한국00언론 기사의 한 대목이다. 여기서 말하는 정치권은 여당과 야당의 공식적인 입장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 20대 총선에서 조선족출신 비례대표국회의원 공천 얘기는 여당과 야당이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도 없고 또 발표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이것이 현실이지만 재한조선족사회에서 비례대표 얘기가 들끓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해 말부터 올해 들어 4.13총선을 앞두고 여당이든 야당이든 일부 후보들(후보들이 직접 나서는 것이 아니라 조선족사회와 인맥이 닿는 한국인을 지정)이 재한조선족사회 표를 의식하여 개별단체장들을 찾아 이런저런 약속을 하고 또 귀가 솔깃한 공약을 던져준다. 일부 단체장들이 확인을 거치지 않고 확정되지 않는 공약(公約)이 아닌 공약(空約)을 떠들고 다닌다. 많은 내용의 空約 가운데 20대 총선에서 조선족출신 비례대표국회의원 공천문제도 포함되어 있다. 아직 당 차원에서 거론조차도 되지 않은 일을 마치 이미 확정된 것처럼 공공연하게 ‘홍보’한다. 한 표라도 더 얻으려는 얄팍한 전략에 의해 생겨난 풍문이 사실처럼 되어가고 있다. 재한조선족사회에 이 空約이 公約처럼 잘 먹혀드는 이유가 있다. 이자스민 때문이다. 수십 분의 1밖에 되지 않는 필리핀 출신 이자스민이 19대 국회의원이 되었으니 4년이 지난 지금 70만 조선족사회에 당연히 국회의원이 한 명쯤은 공천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일각에서는 이를 기정사실로 보는 경향이 짙다. 미안한 일이지만 재한조선족사회는 한국정치권의 중시를 받지 못하고 있다. 왜일까? 적지 않는 사람들은 그 이유를 필리핀 사람들은 적지만 단합이 잘 되어서 국회의원을 배출한데 비해 조선족은 머릿수만 많았지 단합이 되지 않아 국회의원을 배출 못한다고 떠들고 있다. 필자는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되묻는다. 당신들 언제 필리핀 사람들을 만나보았다고 그들이 단합된 것을 눈으로 보았느냐?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근거도 없고 사실도 아닌 어처구니없는 주장이다. 19대 총선에서 여당이 이자스민을 비례대표로 공천한 것은 당시 한국정부가 다문화에 지원한 예산이 연간 2,800억원이 배경이었다. 천문학 숫자이다. 재한조선족사회에 지원한 예산은 서민 한 사람의 연봉의 반밖에 안 되는 1,200만원이었다. 정부의 입장에서 또 여당의 입장에서 천문학적인 정부예산을 퍼부으니 당연히 이를 대변할 국회의원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자스민이 공천 받은 것이지 단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이방인’ 대표를 국회에 입성시키려면 명분이 필요한데 이자스민은 명분이 있었던데 비해 조선족출신 비례대표 공천은 명분이 없었다는 것이다. 4년 후 지금에 와서 조선족출신을 비례대표로 공천하는 것이 전혀 명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숫자적으로 70만 명이니 정부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현안이 많고도 많다. 따라서 국회에 한 명쯤 입성하여 목소리를 대변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렇지만 정치는 단순히 숫자로 하는 것이 아니다. 힘의 논리로 움직일 수도 있고 국민을 설득시킬 확실한 명분이 필요할 수도 있다. 어떠한 방식을 떠나 조선족출신 비례대표를 공천했다가 내국인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된다면 당 차원에서 믿지는 장사이다. 그러므로 조선족출신 비례대표 공천을 받으려면 가만히 앉아서 되는 일이 아니다. 피동적으로 기다리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능동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한국 언론에서 떠들고 있는 것처럼 60여개 단체가 뭉치고 있다는 움직임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실제로 뭉치지도 않고 또 뭉칠 수도 없다). 또 더욱이 한국정치권이 자기들의 이해관계로 중시하는 일부 조직들은 마치 4.13총선용으로 존재하는 듯이 한국정치권에 비취지고 한국 언론에 오르내리는 것은 곤란하다. 00후보를 지지하고 그 대가를 바라는 식의 조직은 더욱 곤란하다. 조선족출신 비례대표는 이런 임시적이고 단기적인 눈앞의 이익을 쫓는 움직임에 의해 공천되는 것이 아니다. 능동적인 움직임은 철저한 준비가 있어야 힘을 발휘할 수 있다. 힘의 형성은 단순히 숫자로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영향력이 있는 조선족사회 단체장들과 엘리트들이 한 자리에 모여 왜 조선족출신국회의원이 필요한지? 국회에 입성하면 무엇을 대변할 것인지? 재한조선족사회 현안이 무엇이고 어떻게 반영할 것인지? 재한조선족사회 중장기적인 발전을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충분히 논의하고 연구를 거쳐 문자화 해 갖고 여당과 야당을 찾아다니며 설득 작업을 발이 닿도록 해야 한다. 한편 재한조선족사회에 국회의원이 될 자격을 갖춘 인물이 있는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국회의원 자격 기준에 대해 정해진 것은 없지만 대체적으로 한국역사문화를 비롯해 다방면 지식수준을 갖춰야하고, 도덕적으로 검증되어야 하고, 일정한 자금력도 있어야 하고 재한조선족사회발전과 한국사회에 기여가 있어야 할 것이다. 또 언변능력도 있어야 하고 리더십도 있어야 하고······ 등등,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 감각이다. 정치란 ‘ㅈ'자도 모르는 조선족이 국회의원이 된다면 재앙이 될 수 있다. 정치 감각을 익히려면 좋기는 구의원, 시의원을 거치면서 경험을 쌓는 것이 자산이 될 수 있고 또 이를 바탕으로 국회에 입성하면 더 큰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초등학교도 다녀보지 못한 사람이 대학생이 되는 꼴이 되면 의정활동을 제대로 못해내는 것은 물론이고 동네망신만 남기게 될 것이다. 혹자는 한국문화에 서툰 이자스민도 국회의원을 맡고 있는데 조선족이 못해내겠는가고 반문할 수 있는데 사실 한국인은 외국인에 비해 동족인 조선족에 대해 모든 면에서 기대치가 훨씬 높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국회의원이 되고자 하는 조선족은 다른 외국인에 비하지 말고 스스로 자질제고에 힘써야 한다. 상술한 바와 같이 객관적으로 또 주관적으로 철저한 준비 과정이 없이 가령 운이 좋게 비례대표가 된다한들 안 되기만도 못하다. 어떤 루트의 라인을 타서 자격이 되지 않는 속이 텅 빈 00가 비례대표로 공천되면(물론 그럴 리가 없겠지만, 그러나 100% 배제할 수는 없다) 조선족 수준과 자질이 도마 위에 올라 여론의 물매를 맞을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그 한 사람의 수준과 자질이 전체 조선족을 대변하는 것이므로 동네 망신만 남길 것이고 추후 총선에선 비례대표는 더는 바랄 수가 없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재한조선족사회를 대변하는 일군인 비례대표를 바라겠으면 조직적인 준비도 반드시 이뤄져야 하고 후보가 되려는 사람들도 자신의 자격을 스스로 검증하고 또 객관적인 검증도 거치고 나서 철저한 준비가 마련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조선족 국회의원 얘기는 천방야담으로 흐지부지하게 끝나고 말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6-03-18
  • 조선족 ‘이민정책’ 가능한가
    ■ 김범송 (칼럼니스트) 한국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조선족’ 관련 발언이 세간화제로 부상했다. 저출산대책을 논의하는당회의에서 대표가 ‘조선족을 대거 아들여야한다’고 말한 것이 큰 파장을일으킨 것이다. 네티즌들은 ‘중국동포비하’발언,야당은 ‘황당무계한 저출산 대책’이라고 공격했다. 실제로 김대표의 발언은 맥락상 출산대책보다 조선족 유입을 통해 생산인구감소문제에 대처할 이민정책을 뜻한 것이다. 따라서 일각에서 ‘조선족이 애 낳는 기계냐’고 비난한 것은 김대표의 발언 취지를 다소 곡해한 측면이 있다.김무성 대표의 발언 문제점은 ‘조선족 이민’을 통한 저출산 문제 해결, 생산인구 감소 대비책으로서의 ‘이민정책’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측면이 매우 강하다는 것이다.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양국관계가 정상화되면서 중국 조선족이 ‘코리안 드림’을 위해 한국에 진출한지도 어언간 20년이 넘는다. 특히 2007년 방문취업제의 실시로 조선족의 유입이 본격화되었다. 2015년 10월 기준 한국체류 조선족은 65만명, 여기에 국적취득자 13만명을 합치면 그 수가 80만명에 달한다. 그들은 서울 대림동 등지에 ‘차이나타운’을 형성해 생활하고 있고, 2010년 이후 ‘정주(定住)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 비록 처우가 많이 좋아졌지만 여전히 일상차별, 오해와 편견 속에서 이방인으로 생활하고 있다.현재 재한조선족들은 서울 영등포구, 구로구 등지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차이나타운’을 형성하여 가족친지 위주로 생활하고 있다. “서울대림동지하철 2·7호선대림역인근의조선족 주거지는한국속중국마을이다. 대림역인근거리에 한글과 중국어가 병기된 상점 간판이 어지럽게 들어서 있다. 중국 음식점과 옷가게부터 여행사, 휴대폰매장, 부동산알선업체, 장례업체까지구비돼 재중동포들의 생활에 큰 어려움이없다.” 한국언론에 비춰진‘차아나타운’의 모습이다. 아직도 중국식 생활방식을 고수하는 재한조선족은 한국인들에겐 ‘불편한 이웃’이며, 최근 조선족 강력범죄 발생으로 이들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시선은 차겁기만 하고 오해와 편견은 더 쌓여간다. 조선족들이 ‘중국인’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끼리끼리 살아가는 이유다.‘차이나타운’은 80만 재한조선족의 사회생활 축소판이다. 중국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차이나타운’의 주인공들은 ‘한국계 중국인’이라는 외국인등록증을 소지한 중국동포들이다. ‘차이나타운’에는 한국 특유의 스트레스가 없다. 독한 배갈에 느끼한 중국요리, 중국어가 섞인 한국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다. 반면에 ‘주류사회 진출’과는 거리가 퍽 멀다. 한국언론이 재한조선족의 ‘사회적 융화’를 ‘제자리 걸음’이라고 지적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차이나타운’이 유지되는 한 중국동포들의 ‘한국인 동화’는 요원한 일이다.2010년 이후 조선족들의 한국 진출이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면서 재한조선족의 체류수는 급격히 늘어났다. 또 돌아가는 경우는 적어진 반면, 중국에 남아있는 가족까지 불러들이면서 ‘정주화’의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 일각에서 재한조선족을 ‘이주민’이라고 주장하는 이유이다. 재한조선족의 ‘정주화’가 단기적 현상인지 아니면 장기적인 국면으로 발전해 명실상부한 한국인으로 동화될지는 향후 두고봐야 알겠지만, 이는 중국 조선족의 존폐와 직결되는 문제로서 ‘정주화’가 미치는 영향력을 매우 클 것으로 전망된다.현재로서는 재한조선족의 ‘정주화’가 장기적으로 지속되는 데 여러 가지 어려운 점 및 변수가 상존한다. ① ‘정주화’가 지속되는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은 조선족을 위한 강력한 이민정책이 뒷받침돼야 한다. ② ‘차이나타운’의 ‘중국인’ 정체성 유지와 주류사회 진출을 통한 한국인 동화는 자가당착, 이율배반적으로 양립이 불가능하다. ③ 작금의 ‘정주화’는 입국정책 완화에 따른 중도입국 청소년 증가에 기인된, ‘부모와의 화합’ 성격이 짙다. ④ 많은 재한조선족은 중국(고향)에 ‘돌아가 살’ 살림집을 마련했고, 노후보험과 부모자식간 인연이 중국에 남아있다. ⑤ ‘중국인’ 정체성이 강한 조선족 3~4세대는 향후 중국경제의 발전으로 많은 일자리가 창출되면, 언제든지 돌아갈 개연성이 존재한다. 조선족 젊은층의‘중국인’ 정체성과 중국 변수는 ‘이민정책’의 효과적 추진에 걸림돌이 될 것이다.한국정부가 단기간 내 재한조선족 전체(65만명)에게 한국국적 혹은 영주권을 부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즉 ‘이민정책’을 추진할 동기부여가 결여되어 있다. 재한조선족의 96%가 한국인들이 기피하는 일자리에 집중, 저임금·저숙련 단순기능직에 근무하고 있다. 기술개발 등 성장동력의 확보에 도움이 되는 고급인력은 거의 없다. 또한 한국인 인상 속의 재한조선족은 ‘돈 벌러’ 한국에 온 외국인 염가노동력, 사회적 안정을 ‘위협’하는 사회적 집단으로 각인돼 있다. 또 이민정책은 전체 외국인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며, 조선족에게만 따로 적용할 수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실제로 한국정부의 이민정책이 절박한 ‘약세군체’가 존재한다. 즉 사실상 이주민으로서 장기간 한국에서 생활해온 재한조선족 1세대들이다. 이들 대다수는 하루살이 일용직으로 열악한 생활환경에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고, 바야흐로 빈민층으로 전락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정부는 사회통합의 과제로서 이들 빈민층을 위한 ‘댓가없는’ 이민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 재한조선족을 위한 이민정책이 ‘필요한 이유’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6-03-13
  • ‘중국동포 국회의원 비례대표’ 반드시 배정돼야
    ▲이동렬 (동북아신문, 재한동포문인협 회장) 4월 총선을 한 달반 정도 앞두고 재한동포사회는 중국동포 국회의원 비례표를 반드시 배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더욱이 새누리당이 ‘다문화 1호 국회의원’인 이자스민 의원의 비례대표 재선 불가 방침을 내놓은 상황에서 김무성 대표까지 “조선족을 대거 받아들여야 한다”고 조선족 이민 당위성을 강조한 상태라서 그 귀추가 더욱 주목된다. 일각에서는 중국동포의 자질과 동포사회풍토 등을 거론하며 아직 ‘중국동포 국회의원 비례대표’ 출현이 시기상조란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어쩌면 현실을 냉철히 분석한 결론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볼 때 나는 20대 총선에서는 ‘중국동포 국회의원 비례대표’ 반드시 배정돼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 이유는 우선, 재한중국동포사회가 성장을 거듭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 거주 중국동포의 수는 약 70만이다. 한국 국적 취득자가 10만을 넘긴 가운데, 영주권, 재외동포비자, 방문취업제 비자 등 다양한 비자를 갖고 한국에 거주 체류하며 한국 체류 외국인의 33% 숫자를 기록하고 있다. 1980년대 중반기부터 현재까지 거의 30년간의 거주 체류 역사를 기록하며 무역, 상업, 건설업, 서비스업 등 각 분야에서 ‘없어서는 안 될 역할’을 해오고 있다. 한국 다문화사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당위성을 예로 들 수가 있다. 다음, 재한동포사회가 하나로 결집되지 못했으나 나름대로 단체들이 역할을 해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유명무실한 단체가 많기는 하다. 그러나 사회봉사를 내국인들보다 더 열심히 하는 동포단체나 개인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사회, 문화, 예술, 언론 등 분야에서 보면 국내 체류 여느 외국인들보다 활동이 빈번하고 단체도 잘 짜여 져 있는 셈이다. 다문화를 중시하는 한국에서 중국동포를 배제하고 다문화 운운하는 것은 잘못된 처사이다. 따라서 중국동포의 입장을 대변할 국회의원 하나를 비례대표로 배정하는 것은 다문화발전의 새로운 전략이 될 수 있다. 셋째, 중국동포는 한국도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도 잘 알고, 북한도 잘 알고 있는 나름대로의 장점을 가지고 있다. 연변은 한반도 통일을 도울 수 있는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를 갖고 있다. 북한과 냉전으로 돌아간 상황에서 중국과의 껄끄러운 마찰을 피하고 두 나라의 정서를 서로 전하며 윤활유 역할을 할 수 있는 게 바로 중국동포들이다. 넷째, “그럼 국회의원 비례대표로 나설 인물이 있느냐”고 많은 사람들이 묻고 있다. 풍토도 어지럽고 인물도 보이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나는 중국동포 국회의원 비례대표가 한국 국회의원과 똑같은 수준의 정치적 식견과 혜안을 갖고 나서야 한다고 보지 않는다. 물론 그만큼 ‘똑똑’하고 ‘바르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러나 중국동포 국회의원의 기능과 역할은 다른 곳, 다른 분야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한국 정치인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적임자가 될 수가 있다. 비례대표 제도의 취지가 바로 그런 것 아닌가? 따라서 일정 분야에서 학식과 예의를 갖추고 비교적 세력화 되고 힘이 있는 동포를 찾아 맡기면 역할을 잘 해낼 수가 있다고 본다. 이 자스민 의원이 한국사회를 여느 국회의원만 알지 못했지만 결혼 이주자를 대표하는 국회의원의 역할을 충분히 잘 한 것도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 시대가 인물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중국동포들 가운데 일단 국회의원이 출현하면, 흩어진 동포사회의 힘이 결집되고 한국사회와 더불어 동포사회의 발전을 더욱 가속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뒤에서 헐뜯는 동포들도 적지 않겠지만, 그런 것쯤은 무시해도 괜찮다. 그 사람의 뒤에는 든든한 정부가 있으므로 급속한 결집력을 형성할 수 있는 토대가 있다. 잡음은 금방 사라지리라고 본다. 현재 동포사회가 하나로 결집되지 못하는 원인은 동포사회 자체가 ‘함께 해야 한다’는 풍토가 박약한데도 있지만, 한국정부의 후원과 지지가 너무 미약한데도 큰 원인이 있는 것이다. 20대 총선을 그대로 지나쳐 보내고 21대 총선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 그만큼 동포사회가 절박하다. 바로 지금이 재한 중국동포사회가 모든 역량을 결집해 ‘중국동포 국회의원 비례대표’를 반드시 배정받아야할 시점이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6-02-29
  • 뜨거워지는 ‘한풍’, 냉랭해지는 ‘한류’
    ■ 김진곤(주중한국문화원 원장) 중국 드라마가 한국에 ‘한풍(漢風, 중국문화 열풍)’을 몰고 왔다. <견환전(甄嬛傳)>, <여상육정(陸貞傳奇)>, <난릉왕(蘭陵王)>처럼 한국에서 많은 호평을 받은 중국 드라마에 이어 최근에는 <랑야방(瑯琊榜)>이 한국 누리꾼들의 이슈로 떠올랐다. 앞서 한국 드라마가 중국에서 큰 열풍을 끌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양국 사이에 상통하는 문화적 정서를 바탕으로 한 중국 드라마가 한국 대중들의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것은 더없이 반가운 일이다. 한국에서 중국 드라마가 이처럼 대중적인 인기를 끄는 데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양국 간 문화적 공통점과 유사성. 둘째, 중국 드라마의 제작 수준과 퀄리티의 향상. 마지막으로는 나날이 늘어가는 중국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이다. 중국과 중국 문화를 더 잘 이해하고자 하는 한국인들의 열망은 양국 간 문화 교류에 희소식이자 국민들 간의 상호 이해와 인식, 우호적인 정서 제고에도 큰 역할을 한다. 하지만 영화와 드라마를 비롯한 중국 영상물이 한국 영상시장에 대대적으로 진출하고 있는 데 비해, 한국 드라마는 2015년 들어 중국 시장에서 다소 ‘시들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별에서 온 그대> 이후로는 이렇다 할 화제작도 나오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중국 시장에서 한국 드라마의 열기가 식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딱히 이렇다 할 묘안이 없다. 여기에는 한국 드라마 특유의 촬영방식 탓도 있고, 올해 초 중국 국가신문출판광전총국(中國國家新聞出版廣電總局, 광전총국)에서 공포한 <온라인 해외 시청각물 관리 관련 규정에 관한 통지(關於進一步落實網上境外影視劇管理有關規定的通知)>(이하 <규정>)와도 연관이 있다. 한국 드라마는 보통 방영과 촬영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대본은 시청자들의 반응에 따라 수정되기도 한다. 말하자면 ‘살아있는’ 대본인 셈이다. 한국 드라마는 중국에서 주로 온라인 경로를 통해 방영되었기 때문에 <규정>이 나오기 전에는 별다른 제한이 없었다. 중국의 일반인 자막팀이 한국 드라마를 빠르게 업데이트한 덕에 한국에서 밤 시간 방영된 드라마가 다음날이면 중국에서 다운로드를 받을 수 있었고, 이와 같은 실시간 방영은 상당수의 시청자를 끌어 모았다. 하지만 <규정>이 발표되고 드라마 촬영 종료 후 당국의 심의를 거쳐야만 중국 온라인 사이트에서 방영이 될 수 있게 되자, 이 과정에서 생긴 대략 6개월의 긴 시간차 동안 드라마에 대한 시청자의 관심이 분산되어 버려 예전처럼 열풍이 형성되기 어렵게 되었다. 한국 드라마의 ‘인기’가 사그라든 또 다른 원인은 바로 수적 규제이다. <규정>에서는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방영할 수 있는 수입 드라마의 비중이 사이트 총 방영횟수의 30%를 넘지 못하도록 규제하고 있다.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되고 양국 간 상품무역 규제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는 만큼 중국 영상시장도 앞으로 점점 더 개방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아직 성숙하지 못한 중국의 드라마 시장을 보호하고 올바른 가치관을 알린다는 중국 측의 입장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한중 양국 간의 문화교류 촉진을 위해서는 앞으로 중국 영상시장의 규제를 지속적으로 줄여나가야만 할 것이다. 이와 함께 중국은 인터넷상의 해외드라마 불법 업로드를 단속하는 등 저작권에 대한 보호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저작권에 대한 보호없이 문화 발전을 이룩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중국정부 차원에서 저작권 보호를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긴 하지만,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다. 또한 문화 산업투자기금을 설립해 한중 합작영화나 드라마, 프로그램 등에 대한 투자가 더욱 전문화된 경로와 업계를 통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전문 합작프로젝트 연구센터를 설립해 심층적으로 연구하고, 동시에 양국 문화산업정책연구협의회를 설립해 한중문화교류 관련 정책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낼 필요가 있다. 이런 가운데 제각각 진행되던 양국의 영상제작이 공동제작을 하는 방향으로 전환되는 것은 매우 큰 발전이라 할 수 있다. 중국과 한국은 영상물 제작과 관련한 각기 나름의 장점을 지니고 있다. 중국은 천년이 넘게 전해 내려온 문화적 전통, 고사와 전설 등 다양한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으며 인적자원과 자금력도 풍부하다. 또 거대한 문화시장도 자리하고 있다. 한국은 한류로 대표되는 세계적인 한국문화 열풍의 경험과 전문 매니지먼트사, 트레이닝 시스템, 그리고 한국인들만의 독특한 문화적 기질과 창의력을 갖추고 있다. 특히 한국과 중국은 서로 가까운 문화와 정서로 인해 영상 분야에서의 합작이 여타 국가들보다 더욱 수월해 손발이 ‘척척’ 맞을 가능성이 높다. 각자의 장점을 결합해 동아시아를 기반으로 세계로 뻗어갈 수 있는 경쟁력 있는 문화상품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앞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올바른 방향이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6-02-28
  • 등려군은 간첩? 뒤늦게 밝혀진 비밀
    ▲ 등려군(邓丽君) 관위에 국만당 당기 덮여지고 장례식 소장급별로 치러져 등려군(邓丽君)은 대만의 유명한 여가수였다. 일찍 중화권의 스타 성룡(成龙)의 회억에 따르면 일찍 지난 세기 80미국생활시기 성룡과 등려군은 함께 영화를 보고 식사도 하고 사진도 찍으면서 매우 유쾌한 나날을 보냈었다. 헌데 그런 유쾌한 나날은 오래 가지 못하였다. 성룡과 등려군의 내왕이 빈번해지고 상호 신임과 요해가 깊어짐에 따라 성룡은 등려군한테 이외의 다른 비밀이 있음을 감지하게 되었다. 그것인즉 당시 등려군은 대만 국민당의 첩자의 신분이었던 것이다. 그 뒤 성룡은 모진 번민에 시달리던 끝에 드디어 고통을 참으며 등려군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는 중국 대륙과 대만의 양안관계가 비상시기었던만큼 성룡은 비교적 명석한 두뇌를 갖고 그것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결코 누가 누구에 대한 잘못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연예인이 정치에 개입하면 필경 심신이 자유롭지 못하다는건 번연한 사실이다. 실제로 지난 세기 80연대 후기에 들어 등려군이 대륙에 건너와 순회공연을 하게 된다는 설이 수차 나돌았으나 일이 진척되지 않아 최종 그녀는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원인 역시 국민당첩자란 그녀의 특수신분과 관련이 있었다고 한다. 1995년 5월 8일, 등려군은 천식질환으로 사망(사인 아직도 불투명함), 그뒤 거의 20년이 돼서야 당시 그녀의 관위에는 국민당 당기가 덮여졌고 그녀의 장례식은 국민당군 소장급별로 치러졌다는 것이 밝혀졌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6-02-23
  • 북핵문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 베문태 (한반도통일지도자총연합 공동회장/서울시연합회장) 새해에 접어들어 북한의 4차 핵실험(1월6일)으로 미지근하던 남북통일의 열기가 점점 식어들기 시작하는 이때 DMZ 대북확성기 방송재개로 남북관계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느낌이다. 이러한 때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한 미 일 3자회담, 한 중 2자회담, 한 러 2자회담이 각각 열리면서 해법 찾기에 급급하지만 중국과 러시아의 동향이 엇박자로 진행되는 가운데 이란이 핵개발을 포기하고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복귀한 것을 두고 국제사회가 크게 환영하는 분위기에 젖어들고 있다. 북한은 그동안 한반도 비핵화는 김일성 주석의 유언이라 호들갑을 떨며 한국과 국제사회를 안심시키는 척하면서 뒤로는 핵개발을 서둘러 제4차 핵실험까지 강행해온 북한의 이중성에 놀아나면서 언제까지 북한의 비핵화를 이끌어 내려고 무장해제 상태에 있어야 하는지 의문된다. 북한의 비핵화는 이미 루비콘 강을 건너 간 사항이고 결코 돌아올수 없는 다리를 건너갔습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북한을 상대로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6자회담 당사국들이 신사회담을 통해 대화로 해결하자는 중국의 태도에 기대야 하며, 중국의 눈치를 보며 이에 편승하려는 러시아의 태도 변화에 기대를 걸고 시간만 보내려는 전략에 언제까지 놀아나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북핵 문제해결의 해법은 이미 공론화 과정을 통해 그 해답이 나와 있지 않는가? 유엔 안보리는 금번 기회에 중국과 러시아가 유엔안보리의 강력한 대북제재조치와 한, 미, 일, 중, 러 5자회담을 통해 강력한 대북 설득력으로 북한의 NPT복귀와 핵 불능화 조치를 취하는데 동참하지 않을 경우 중국과 러시아와 맺은 전략적 동반자 관계 등은 허구에 불과 하며 제5,6차 핵실험을 강행하더라도 막을 길이 없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할까? 국가는 우리국민들의 생존권 보장과 국토방위를 위해 부득히 자위적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국제사회에 공포하고 이에 따른 대처방안에 착수해야 한다고 본다. 북한은 하늘이 무너져도 핵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이미 밝힌바 있다. 그런데도 6자회담 국이 핵 포기를 종용하며 언제까지 허송세월을 보내야 하며 지금까지 유엔안보리와 함께 너무 안일하고 느슨하게 대처한 관계로 제4차 핵실험도 막아내지 못한 상태에서 핵실험이나 미사일 발사때 마다 태평양 괌 미 공군기지에서 B29폭격기나 띄우고 핵잠수함으로 한국영공과 해상을 통해 무력시위 한번 하고 돌아가는 것이 북핵 억제해법이라고 본다면 큰 오산일 뿐이다. 북한은 한 미연합사의 이러한 엄포를 십분 활용하며 즐기고 있는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번만은 북한의 심장부를 겨냥해 5자회담 국의 강력한 경제제재조치와 대북압박으로 북한의 핵개발을 포기시키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이번에도 중국이 예전처럼 유엔안보리 대북경제제재조치에 미온적으로 접근할 경우 더 이상 중국의 눈치를 보며 기다릴 필요 없이 한, 미 양국은 주한미군의 사드(THAAD) 배치문제와 동시에 우리의 핵 개발 착수문제 등을 전향적으로 검토해 나가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세계229개국 중 군사력 순위 7위 국가로서 우리국민들의 생존권을 우리스스로 지켜야 할 책무가 있는 주권국가임으로 한미동맹을 더욱 강화함과 동시에 중국의 눈치를 볼 것도 없이 인도, 이란 등으로 경제권역을 확대하면서 우리의 생존전략을 확실히 짜야 할 이때를 결코 놓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6-01-31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