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5(수)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실시간뉴스
  • ‘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4-05-02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3-11-21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광복 70주년 행사장에서의 막말 유감”
    ▲국악인 김덕수의 행사차량 [동포투데이] 지난 8월 15일 서울에서는 뜻 깊은 광복70주년을 맞아 다채로운 행사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일본 아베총리의 과거형 표현을 담은 담화로 인하여 개운치 않은 뒤끝이 남긴 하지만...... 세종문화회관의 중앙행사를 마치고 재외동포와 언론인을 초청 국립민속박물관에서 마련한 민속공연(해방가)을 관람 후 오후 6시에 있을 광화문 행사를 위해 이동 중 재외동포 기자단은 김모의 사물놀이패의 퍼레이드 행렬을 취재하게 되었다. 행사용 무대를 20여 미터를 남겨두고 퍼레이드를 관전하는 시민인파로 인해 퍼레이드 행렬의 진행이 방해를 받아 일시적으로 멈춰 서게 되자, 국악인 김모는 행사차량에서 하차. 인파를 향해 “이게 뭐 하는거야?”라고 반말에 막말로 소리쳤고, 마이크를 통해 생방송 행사장에 울려퍼졌다. 이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심히 부끄러운 일이며, 국악인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에 공연을 다니는 공인 김모의 인격을 의심케하는 대목이다. “벼는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는 속담처럼 공인이면 많은 사람들에게 행동이나 언행이 귀감이 되었으면 한다. 또한 국내외 행사를 주관하는 기관은 이러한 일이 반복되지 않게 철저한 검증과 준비가 필요하다고 본다. /이군호
    • 오피니언
    2015-08-17
  • [김혁 칼럼] 소설로 읽는 “간도참변”
    30년대 상해에서의 독립운동가들의 사투를 그린 영화 "암살"이 흥행가도를 달리면서 여주인공 안옥윤의 어머니가 겪은 "간도참안"이 다시 회자되고 있다. 영화 “암살”에서 톱스타 전지현이 주연한 안옥윤은 “간도참안”에서 어머니를 잃는다. 또 한 부의 의열단활동을 다룬 영화 “아나키스트” (개봉: 2000.04.29, 감독: 유영식 출연: 장동건, 정준호, 김상중, 이범수, 김인권)에서도 주인공 상구는 경신년 간도 대학살에서 친지를 잃고 상해로 와서 의열단에 가입한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5-08-10
  • 한민족 (韓民族)과 화인(華人)
    (새국어사전 해석 ) 이 몇 년 사이 일부 동포 단체들의 행실들을 보면 “소 웃다 꾸러미 터질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국적회복 동포나, 귀화동포, 다시 말한다면 이미 한국 국적을 가진 조선족들ㅡㅡㅡ 5000만 한국 국민과 똑 같은 자격을 가진 귀한 동포를 화인(華人)이나, 화교(華僑)라 지칭한다. 예로 <<귀한동포총연합회>> 를 <<전국한적화인총연합회>> (全國韓籍華人總聯合會)라 일컫는다. 얼마 전에 상식적으로 알아 두어야 할 우리말의 단어들을 “새국어사전”에서 찾아보았다. 한민족(韓民族) ; 한반도와 그 북쪽에 연한 만주 일대, 제주도 등의 섬에 거주하는 민족, 황색 인종에 속하며, 우랄알타이어종인 퉁구스의 한 갈래로 공통된 한국어를 사용하며, 공동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음. 배달민족 한족(漢族); 중국 본토 재래의 종족. 약 5000 년 전부터, 황하 상류에서 중국 동남부로 이동하여 온 아시아 남방계통의 황색인종으로 중국어를 쓰며, 세계 여러 곳에 널리 펴져 살고 있는 종족. 중국의 중심이 되는 민족. 화교(華僑) ; 외국에 정착하여 사는 중국사람 화인(華人) ; 중국사람(주체는 한족)교포(僑胞) ;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같은 민족의 사람 동포(同胞) ; 같은 나라 또는 같은 민족의 사람을 다정하게 이르는 말 재한동포(在韓同胞);국적은 외국에 두고 한국에 온 한 민족 동포 (주요하게 조선족을 이름)귀한동포(歸韓同胞) ;국적을 외국에 두었다가 한국에 귀화하여 한국국적을 취득한 동포.(주요하게 조선족을 이름 )과경민족 (過境民族) ; 본 민족이 외국에 단일 민족으로 건립된 국가가 있는 민족“귀한동포”나 “ 재한동포 ”는 새 국어사전에서 찾아보지 못하였기에 필자 나름대로 해석 하였다. 1: 국적회복동포나 귀한조선족을 화교나 화인이라 한다면 어불성설이다. 조선족은 과경 민족이다. 중국에 있는 과경민족으로는 : 조선족, 몽고족 , 러시아족 , 까자흐족 우즈베크족 , 끼르끼즈족 , 따지크족 등이다. 과경민족은 두가지 특성이 있다고 하는데 하나는 본연의 국가로 되 돌아 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과경된 나라에 동화되어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특수 경우도 있다. 예로 이스라엘 민족이다. 지금 귀한동포를 화인 ( 華人 ), 화교 ( 華僑 )라 지칭하는 것은 틀린말이라고 생각한다. (1) 과경민족이 고국에 돌아가 고국의 국적으로 되었을 때 그 민족을 “화교” 나 “화인“으로 부른다면 어불성설이다. 예를 들어 중국의 러시아족이 러시아로 돌아가 러시아 국적으로 되었는데, 그들을 ”화교“나 “화교”라 부른다면 외교적 마찰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도 하여 본다. 한반도는 948차나 외세의 침탈을 받은 한( 恨 ) 이 많은 민족이다. 특히 근대사, 당 송 명 청 을 걸치면서 뼈 아픈 과거 사가 있다. 여기서 언급 하려는 것은 한국 국민은 화교가 아니라는 말이다. (2) 공식적으로 말한다면 1952년 9월 3일 연변 조선족 자치구가 건립 된 날이 조선족이 탄생한 날이라고 보아야 한 다는 이론에 나는 동감이다. 그 전에 중국에는 “ 고려인 ”, “ 조선인 ”. “ 한국인 ”만이 있었고, 다른 별명으로는 얼뀌즈(二鬼子). 로꼬리빵즈(老高麗梆子)가 있었다. 조선족은 분명히 단군 후손이고, 배달민족이고, 백의 민족이고. 한 민족이다. 중국에 살면서 우리를 괴롭히고 따라 다니던 우리들의 별칭을 벌써 잊었는지 의심스럽다. 하필이면 우리들을 왜 화인, 화교라 밀어부치는지 이상스럽다. 여기에서 언급하려는 것은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조선족도 화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중국에 국적이 있는 조선족일 뿐이다. (3) 누구라도 한글을 좀 안다면 “이완용”을 알 것이라 생각한다. 그는 천추에 용납 못할 매국노이다. 아무리 정치를 하고 싶고, 아무리 비례대표가 되기 싶어도, 제 조상과, 제 민족을 팔아먹는 대표는 누구라도 용서치 않을 것이라 생각 한다. (4) 전국한적화인총연합회 대표는 여러번 <<대한만국 화교 대표>>의 신분으로 중국이나 기타 장소에서 얼굴을 보인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에는 중국이나 전세계 화교 계에서 명성이 아주 높은 한성호 박사가 이끄는 화교협회가 있는데 갑자기 다른 화교 대표가 도처에서 활동하니 모든 것이 오리무중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2015. 8.3 김충정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5-08-09
  • [한국생활수기] 땀내 나는 아저씨들
    ■ 정형섭 (중국) 한국 노무를 갔다온 분들에게서 일해 돈 벌기가 정말 쉽지 않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나는 한번도 겪어본 적은 없었다. 돈 벌기가 여간 쉽지 않다는 말은 많이 들었어도 한번도 겪어본적은 없었다. 얼굴이 떡판같고 기름이 번질했던 오촌아저씨가 한국에 가서 몇년 안돼 주름살이 주륵주륵 패인 홀쪽한 얼굴로 돌아오고, 머리털이 더부룩했던 동생이 가발을 쓰고 온 것을 보고는 기가 막혀 할말을 잃었다. 거기가 대체 어떤 곳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얼마전, 단기 관광비자를 맡고 한국 관광에 나선 나는 돈 한푼이라도 벌어 갈겸 한국에서 조선족들의 말단 일터라고도 하는 노가다판을 체험키로 했다. 거처도 일할데도 없는지라 우선 사촌동생의 연줄로 한국 온지 오래된 쇼리(小李)네 셋방에 림시 더부살이를 하면서 신세를 좀 입기로 했다. ㅇ 일당 첫날 저녁 환대술에 녹초가 돼서 바지 입은 그대로 골아 떨어졌는데 쇼리가 <<쩡거!쩡거!>>하고 소리쳐 깨우는 것이였다. 겨우 눈을 비비고 시계를 보니 아직은 세시반도 되지 않았다. 왜 이리 일찍 깨우냐고 못마땅해 투정질 하자 쇼리가 급한 목소리로 늦게 가면 일이 차례지지 않는다며 빨리빨리 일어나 일차비를 하라고 재촉했다. 나는 더부살이 신세에 그들에게 도움은 못줄망정 보따리는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얼른 일어나 그들이 주는대로 배낭주머니에 작업복과 안전화, 노동장갑 따위를 쑤셔넣고 그들 뒤를 따랐다. 이른새벽이라 바깥은 아직 어두컴컴했고 하늘에는 아직도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손전지를 들고 앞장서 걷고 있는 쇼리를 따라 쪽방촌의 좁다란 골목을 빠져 큰 길에 들어서니 길 양쪽에 꽉 들어찬 각종 간판들이 현란한 빛을 내뿜고 있어 길바닥은 바늘이라도 주을만큼 환했다. 길을 가면서 드문드문 눈에 띄는 사람들 거의 모두 배낭주머니를 둘쳐메고 잰걸음을 치고 있었는데 그들 역시 우리같은 일당족이라 한다. 독산동 막끝에서 가랑이에 비파소리 일게 걸어서 남구로에 위치한 남부인력까지 가는데 한 오십분 시간이 걸렸다. 인력소개소 두리마리 철문은 아직 꾹 닫겨져 있는데 어둑시그레한 주위에는 벌써 일당을 나온 한국 근로자들과 조선족들이 삼삼오오 모여서서 소개소 임원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꾼들은 줄레줄레 점점 더 모여들고 있었다. 드디어 소개소 임원이 와서 문을 열자 일꾼들은 우르르 따라들어가 저마다 직원의 책상우에다 신분증이나 외국인등록증을 꺼내놓았다. 그런 것이 없는 사람(불법체류)들은 신분증만한 종이장에다 이름자를 써서 바친다. 아침 다섯시를 넘기니 칠십평이 되나마나 한 소개소안은 발 디딜 자리 없이 일꾼들로 차넘쳐 일부는 문밖에서 발꿈치를 들고 안쪽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일꾼들 반수이상은 중국에서 온 조선족들이었다. 남부인력에서는 인력 주문이 많은 시기에는 하루 일당 송출인수가 400명도 웃돈다고 한다. 소개소에서는 전날부터 건축 현장들에서 들어온 인력주문에 따라 현장 지점과 인력수, 전화번호가 적힌 인력송출표를 작성해 둔다. 그리고 상위에 배열된 일꾼 명함장들을 주어서는 송출표에 해당한 팀을 하나씩 묶어 현장으로 내보낸다. 그런데 인력소개소마다 인력 주문은 적고 일꾼은 남아도는 터라 이런 건출 현장에 배치받은 사람들은 한시름을 던듯 개운한 표정으로 코치를 따라가는 것이었다.일부 건축 현장에선 차를 보내지 않아 부랴부랴 전철역에 뛰어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날 우리 일행은 운좋게 자가용이 있는 한국 코치와 한팀이 되여 그의 승용차에 편안하게 앉아 섬북동 신축 건설 현장으로 가서 현장을 청리하는 일을 하게 됐다. 지하 2층에 내려가 물이 질퍽한 바닥에 난잡하게 널린 기자재들을 걷어내 한쪽에 정연하게 쌓아놓고 자갈콩크리트 쓰레기들을 박박 끌어내가는 힘들고 어지러운 일이였다. 공장설비를 가설할 자리에 가로세로 콩크리트구조물을 만들어놓아 니야까(밀차)는 들어갈 수 없으므로 젖은 자갈콩크리트쓰레기를 편직주머니에 반쯤씩 넣어 직접 등에 지고 지게차가 닿을수 있는 곳까지 날라가야 했다. 등이 젖을가봐 비닐쪼각을 주어 등에 치기는 했지만 뾰족뾰족한 돌모서리가 등을 찌르고 흙탕물이 궁둥이를 타고 흘러내려 오줌을 싼것처럼 바지가랭이가 젖어들어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한참 일하고 나니 일꾼들의 작업복은 땀과 흙탕물에 범벅이 되어버렸다. 처음 그런 일을 하게 된 나는 엉덩뼈가 물러나는 것 같고 두다리가 후들거렸다. 그 일을 하면서 나는 썩 오래전에 봤던, 탄부들이 갱속에서 석탄을 등에 지고 기어다니던 영화장면까지 떠올랐다. 아침 일곱시반에 시작한 일은 오후 여섯시에야 끝났다. 거기서 오전오후 각각 십분씩 새참(빵하나와 깡통음료 한통)먹는 휴식과 점심휴식 한시간을 빼면 순 노동시간만 아홉시간이다. 점심과 저녁 때가 다가올 쯤엔 배가 고프고 맥이 빠진 일꾼들이 여윈 소 밭갈이 하듯 행동이 굼떠지고 쓰레기 주머니를 멘채 쓰레기무지에 벌렁벌렁 나자빠지기도 했다. 저녁이 되자 코치가 소개소에 가서 하루 임금을 받아다 우리한테 나눠주었다. 건축업체에서 소개소에 지불하는 잡부 임금은 인당 하루 6만원인데 소개소에서 수수료 10%를 떼고 승용차 기사가 인당 교통비 4000원을 떼고나니 우리 손에 들어오는 돈은 딱 5만원이였다. 그 5만원을 받아 속호주머니에 넣고 무거운 몸을 질질 끌며 세방을 오면 저녁 아홉시가 거의 돼간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라면으로 대충 에때운후 이내 이부자리에 착 넘어져 잠에 곯아 떨어진다. ㅇ위장 지금 한국 3D(노동환경이 열악하고 급여가 적고 한국인들이 기피하는 일터)업종에는 조선족이 없는 곳을 찾아보기 힘들다.요즘들어 더욱 많은 조선족들이 한국인들이 기피하는 3D업종에 몸을 담그고 있어 인력난 부족에 시달리던 한국 건설업체들이 일꾼이 남아돌 때가 많았다. 상황이 이러하자 일부 업체들은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인력소개소에 인력주문을 할 때면 한국 근로자들만 보내달라는 조건부를 달기도 한다. 경험이나 기술적 측면에서 조선족들이 한국적 근로자들에 비해 큰 열세에 처해있기 때문이다.그런데 인력소개소에서는 때로 한국 근로자가 부족할 때엔 들어온 일감을 포기하기 아쉽고 하니 부득불 한국인 근로자와 조선족을 섞어서 내보낼 때도 있었다. 용산역 실내미장현장에 나갔을 때 일이다. 한조는 틀비계위에 올라서서 낡은 천정장식목질판을 뜯어내고 다른 한조는 바닥의 타일을 까내는 일을 하게 되였다. 일을 시킬 때 반장은 말을 빨리 하는데다 경상도 방언까지 곁드는 바람에 조선족 일꾼들은 그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니야까>>에 <<비계>>, <<데꾸>>따위를 싣고 엘리베이터 이용해 5층을 올라오라는데 한국에 온지 얼마 안되는 나는 미처 무슨 말인지 몰라 멍해졌고 <<예? 뭐라구요?>>라고 하니 반장은 대뜸 짜증을 냈다. <<아저씨들 교포요?>> 라며 따져묻고 조선족임을 확인한 반장의 얼굴은 대뜸 무섭게 일그러져 갔다. 우리 여섯 사람중 한국인은 단 한사람, 네사람은 조선족이고 다른 한사람은 한족이였다. 한족사람은 우리가 사전에 주의를 주어 처음부터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졸졸 따라만 다녔으나 반장이 한사람씩 질문할 때엔 몽땅 들통나고 말았다.반장은 화김에 소개소에 전화를 걸어 왜 한국인만 요구했는데 교포들을 보냈냐, 말길도 바로 알아듣지 못하는 일꾼들을 보내 하루 일을 망쳤으니 배상하라는 등 한동안 야단을 쳐댔다. 우리는 당장 쫓겨날가봐 마음을 조이며 반장의 눈치를 살폈다. 반장은 당장 쫓지는 않았지만 우리들이 하는 모양새가 마뜩찮았던지 하던 일도 끝나지 않았는데 오후에는 딴 일을 한다는 핑계로 반날 임금을 주어 돌려보냈다. 우리가 이제 돌아가면 오후에 어디 가서 일을 찾겠냐며, 오후까지 시켜달라고 사정해 봐도 쓸데없는 짓이었다. 한국에 온지 얼마 안되는 조선족들은 외래어와 방언이 섞인 한국말에 능통치 못해 의사소통에서 장애를 받게 될 때가 많다. 더군다나 한국 노가다판에 진출한 조선족 대부분은 중국에서 그런 일을 한번도 해보지 못한 사람들이라 한국인 근로자에 비해 많은 열세에 처한 것은 사실이다. ( 니야까 ㅡ 밀차, 틀비계 ㅡ 높은 곳에 올라서서 일할수 있게 철관으로 만든 가설물, 데꾸 ㅡ 못빼기.) ㅇ 일독촉 고용제 노동은 중국의 호도거리 농사같은 제집 일과는 완판 다르다. 제집 일은 힘들면 천천히 하고 수시로 쉴수 있지만 고용된 일꾼은 그렇지 않다. 임금을 정하고 일꾼을 쓰는 고용주는 제한된 노동시간내에 보다 많은 경제효익을 높이기 위해서 노동 효율을 매우 중시한다. 그래서 노가다판에서 일하는 조선족들은 현장 관리한테 일독촉을 받으며 바삐 돌아칠 때가 많다. 특히 성질이 사나운 현장 관리를 만나면 좀 얼쩡거려도 꾸중 듣기 십상이다. 두 사람이 큰 마대 속에 들어있는 나무쪼각을 한아름씩 안아다가 키넘는 화목상자에 담는 일을 했다. 마대속에 아직 적잖게 남아 둘이 들기엔 버거울 것 같아 좀 더 안아나르던 중이다. 헌데 그 몇아름 차이를 두고 현장 관리의 눈총을 맞을줄이야. 현장 관리는 씽 ㅡ 달려오더니 고까짓거 왜 둘이 마대채로 들어다 쏟지 않고 질질 시간을 끄냐면서 우리와 함께 마대를 들어다 화목상자에 쏟는것이였다. 늑장 부리지 말고 일을 빨랑빨랑 하라는 경고였다. 현장에 널린 고철을 주어서 밀차에 싣고 고철 무지에 가져다 부리울 땐 밀차를 고철무지에 바싹 올리붙힌후 뒤엎지 않고 손으로 한뭉큼씩 쥐어내 부리운다고 잔소리다. 사모리를 할 때 우리는 반장의 요구대로 명심해서 모래와 세멘트가루 비례를 5:1로 맞추느라 먼저 모래 다섯 삽을 떠내놓고 거기에 세멘트가루 한삽을 뿌려놓군 했다. 제딴엔 일을 깔끔히 하느라 세멘트 주머니도 아구리실을 풀고 헤쳤다. 헌데 옆에서 비뚜름한 눈길로 지켜보고 있던 반장이 “지금 새기놀음을 하구 있어?”라고 책망하더니 삽을 나꿔채가지고는 시범을 보이듯 삽으로 세면트주머니 중둥을 둬번 푹푹 찍어 터치워서는 모래무지한귀퉁이에 활 쏟아놓는 것이였다. 그리고 삽자루가 부러지라 세멘트가 덮힌 모래를 옆으로 활활 퍼넘기고는 삽을 던지고 우리에게 “봤어? 이렇게 하란 말이야!”하고 큰소리쳤다. 모래세면트 비례는 색깔을 보고 짐작하면 될것이지 그렇게 한삽씩 셈을 세고 자빠져 밤을 새울 작정이냐고 비아냥거렸다. 우리로서는 또 그렇게 거칠게 일했다간 꾸중을 들을것 같아 걱정이고, 참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처지에 놓여있었다. 단국대 건축현장에서 기자재정리를 할 땐 억척스런 책임지경을 만나 모두가 녹초가 되어버렸다. 일꾼을 부리려면 주인이 먼저 일꾼 노릇을 해야 한다고 책임지경은 처음부터 달궈빼려는 듯 600센치미터짜리 폼을 한손에 한장씩 두장을 들어 나르는것이였다. 잡부들은 보통 400센치미터짜리 폼은 두장씩 나르지만 600센치미터 짜리는 무겁기에 오래 나를 때는 한장씩 메여나른다. 어느 현장에서든 그 정도로 일하면 몸을 사린다고 아니꼽게 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책임지경이 먼저 두장씩 시작을 뗐다는건 잡부들에게 너희들도 이렇게 하라는 무언의 호소와 마찬가지여서 잡부들은 무조건 두장씩 날라야 했다. 다 같은 남자로서 책임지경이 두장씩 나르는데 잡부들이 달랑 한 장씩 들고 그의 뒤를 따를수야 없잖은가. 관리인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잡부로서는 그렇게 할수가 없다. 책임지경은 나르다가도 때론 다른 일을 보는척 하고 어디로 갔다 한참씩 지나서 왔지만 온 오전 두장씩 들어나른 잡부들은 작업복이 땀에 흠뻑젖고 걸음이 막 휘청거렸다. 너무 힘들어 화장실에 가서 시간을 질질 끌다오는 사람도 있었다. 한국에서 셋방살이를 하는 조선족 남성들은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고된 노동에 바삐 돌아치고 지친 몸에 귀가해도 저녁을 챙겨 줄 사람이 없다. 그들은 손쉽게 먹을수 있는 빵이나 라면 따위로 대충 에때우고는 잠에 곯아떨어지는 것이 일상이다. 일은 고되고 먹는 것은 부실한 탓에 신체만 못쓰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국에서 건강을 챙기겠다고 보건품을 사먹고 각가지 남새,육류,과일들을 먹고싶은대로 다 사먹는다면 돈을 모을 수가 없게 된다. 함께 일당을 다니던 최씨의 코구멍만한 셋방에 가본 적이 있었는데 그 집 한구석엔 그냥 라면상자와 쭈글쭈글해진 오이 몇개,된장주머니와 전기주전자 하나밖에 없었다. 일하고 들어와서는 그저 전기주전자에 물을 끓여 라면을 데워먹고 물도 수도물을 끓여 마신다고 했다.두달이 넘도록 고기를 구경도 못했단다. 연길에서 왔다는 원로인(62세)은 독신생활을 하면서 노가다판을 전전한지 벌써 5년 된다는데 금방 일을 시작한 조선족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노가다판에서 오래 버티며 일을 하려면 눈치 있게 제몸도 알아서 챙기구말야. 관리자가 자리를 뜰 때믄 틈틈이 숨을 돌리고 일손두 좀 늦추란 말이야, 힘을 남겨야 다음날 계속하잖겠나. 매일 열시간씩 하는 고된 일을 우직하게 밑구멍 빠질줄을 모르고 힘을 쓰다간 한달도 못 버텨낸다니깐!” ㅇ 한국근로자들의 원성 한국 일용직근로자들은 다년간 중국 교포들이 한국 3D업종에 몰려드는 바람에 일거리 찾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인건비가 오르지 못한다고 원성이다.일당을 나갔다가 <<데마>>맞는 날엔 조선족들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기도 한다. 영등포구 광세건설현장에가서 함께 일하던 한국인 코치는 휴식시간에 지금은 일당을 해서 식구들을 먹여살리기도 힘들다며 한탄했다. <<지금은 노가다판에 중국교포와 짱개놈들이 너무 많아 단가가 올라가지 못한다잉. 일꾼이 흔해뿌리이까 현장서는 배부른 흥정이 아이가? 나 이젠 노가다를 이십년 넘어 하문서말여 예전에 일당으루 4ㅡ5만원을 받았는디. 지금도 그값이니 이게 뭔 개판인겨? 물가란건 몇배나 올리뛰는데 노가다 단가는 개뿔두 오른게 없잖노. 교포들이 아니믄 이렇게꺼정 되지 않을건디.씨바, 그까짓 5만원짜리 일당도 하지 못해 지랄이니 이거 어디 사람이 밥 먹구 살것는가!>> 실은 조선족 노무일군들이 한국으로 대거 진출하기 전에는 한국 3D업종은 인력이 많이 부족됐기에 한국 근로자들은 대우와 로동환경,강도에서 우열을 선택할 여지가 있었고 보수가 적으면 고용인과 협상도 가능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족들의 진출로 노가다 일꾼이 넘쳐나다보니 고용업주들은 «너희들이 안해도 싼값으로 일을 시킬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일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하기 싫으면 그만두라»는 배포유한 태도로 나온다.지금은 환경이 열악하고 일이 힘들다는 이유로 단가를 올리려 들다간 아예 일감마저 떼우고 쫓기울 수가 있다. 12명 잡부들이 부평건축현장으로 배치받아 갔을 때였다.지하 2층의 형틀을 철거한 기자재들을 정리하는 일이였다. 파이프와 폼, 다루끼 (각목), 사포드가 가로세로 난잡하게 덧쌓여 있고 바닥에는 물까지 고여있어 기자재들을 정리하려면 땀동이를 꽤 쏟아야 할 것은 물론이고 입고 간 옷은 흙투성이가 될 것은 불보듯 뻔했다.하지만 일급은 고정된 6만원인데 소개 수수료와 교통비를 떼고 나면 실제 수입은 5만원밖에 안되었다. 그날 팀장과 한국인 잡부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좀처럼 일에 손을 대려 하지 않았다. 반장이 왜 시작안하냐고 묻자 팀장이 고개를 외틀며 정해진 단가로는 일을 못하겠다고 한다.통풍이 안돼 숨이 막힌다니, 바닥에 물이 고여 신과 작업복을 버린다니, 일이 너무 힘들다니 ... 여럿은 이 핑게,저 핑게 대며 단가를 올려달라며 만원만 올려주면 바쁜대로 해주겠다고 했다.그러자 반장은 고려할 여지가 없다는듯 냉소를 던지며 할 사람은 계속 남아하고 하기 싫은 사람은 지금 돌아가란다. 배짱을 부려 단가를 좀 올려보려던 한국인 잡부들은 그만 코를 떼우고 안전모를 벗고 돌아섰다.그러나 조선족들은 반장이 시키는대로 수걱수걱 일을 시작한다.매일마다 일이 차례지는 것도 아니고 앞에 차례진 일도 만원 더 안준다고 그만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조선족 일군들이 일을 시작하는 것을 본 한국인 잡부들은 가면서 저 좃족들땜에 될일도 안된다며 큰 소리로 욕지거리했다 반장이 인력소개소에다 전화를 한통 치더니 얼마 안돼 수명의 조선족 일군들이 도착했다.그날 그 힘들고 어지러운 일은 완전히 조선족들의 몫이었다. ㅇ 스트레스 관리가 엄한 한국 3D업종에서 일하는 조선족들은 육체의 고달픔은 물론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자주 받게 된다. 어쨋든 노동 현장에서 고용주는 지배권을 행사하게 되고 노동자는 임금을 제대로 받기 위해 일을 해야 하고 또 고용주한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물론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대체로 관리인들은 노동자를 엄하게 대하고 때론 인격 모욕도 서슴치 않는다.또 변명을 좀 하면 대든다고 욕하고 쫓아내고 직업소개소에 반영하기도 한다.대부분 조선족들은 사고치지 않고 돈을 버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기때문에 자존심은 온데간데 없어진지 오라다.더군다나 불법체류로 일하고 있는 조선족들은 신고에 의한 강제송환이 무서워 항상 머리를 숙이고 다닌다.한국인들과는 눈치도 맞추려 하지 않는다.그러나 자존심이 강하고 인격을 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면 겉으로는 복종하는체 하지만 마음은 그렇게 편할리가 없다.한국인들한테 온갖 스트레스를 받고 혼자 분을 삭이느라 속이 곪아터지다보니 우울증이 오고 식욕을 잃고 불면증에 시달리는 등 몸도 정신도 다 망가지는 경우도 많다. 성북구 한 학교건물 확건 건축현장에 갔을 때다. 우리팀은 한국인 두사람과 조선족 여섯이였다. 그날은 교통체증때문에 반시간 넘어 지체하다보니 8시가 다 돼서야 현장에 도착했다. 턱에 칼자국 흉터가 길게 나있는 무뚝뚝한 반장이 우리를 보자마자 거친 소리로 왜 이리 늦었냐고 호통치고는 때가 지났는데도 아침 먹으란 소리는 없이 인차 작업복을 바꿔입고 일부터 하게 했다. 다들 바쁜 걸음에 배가 촐촐해 맥이 나지 않는데도 아침(현장마다 아침,점심은 면비로 제공)은 주지 않고 무거운 일부터 시키니 일꾼들은 마지못해 복종은 하면서도 속으로는 내키지 않아했다.반장은 우리가 늦게 왔다고 일부러 밥을 주지 않는게 분명했다. 두 한국인을 포함한 네사람은 동쪽에서 기자재를 정리하고 나머지 조선족 네사람은 서쪽에서 배수로를 덮었던 낡은 콩크리트 뚜껑을 걷어내 지정된 곳에 날라다 쌓았다. 콩크리트뚜껑 하나 무게가 25키로그람은 넘었는데 두사람이 맞들어 나르면 덜 힘들었지만 혼자서 한장씩 메고 나르자면 이내 숨이 헐떡헐떡 차고 다리도 후둘둘 해나른해진다. 사달은 그때문에 생겼다.조선족조에서 제일 경력자인 김씨성의 남자가 아침이 지났는데도 밥은 주지 않고 힘든 일부터 시킨다고 툴툴거리며 둘이서 맞들고 천천히 나르자고 했다. 우리는 반장이 있을 때엔 혼자 한장씩 들고 열심히 나르는척 하다가 반장이 없어지면 두사람이 한 장씩 맞들고 천천히 날랐다. 헌데 반장이 엉큼하게도 층집위에서 우리를 빤히 지켜볼줄은 그 누구도 몰랐다. 그는 내려오자마자 독기 어린 눈으로 일꾼들을 쏘아보며 <<씨바,너희들은 대체 일하러 온거야 농땡이를 치러 온거야? >> 하고 욕사발부터 안겼다. 이때 김씨가 아침 때가 지났는데 밥을 먹지 않고 어떻게 맥을 내며 일하겠냐고 말대꾸를 했다.한국서 이미 5년간 노가다를 해서 벌만큼 벌어놓은 그는 아무 때든 집을 돌아가도 좋다는 배포유한 심정으로 무서울게 없었다. 일개 조선족 잡구가 감히 자기와 대든다고 하니 성이 상투밑까지 치민 반장은 당장 나가라고 축객령을 내렸다.김씨도 질세라 또 몇마디 대꾸하자 반장의 입에서는 «씨팔놈새끼»가 연달아 튀어나왔고 김씨는 조선족들만 알아 들을 수 있는 «차오니마»로 맞받아쳤다. 순간 반장의 손이 번뜩이더니 김씨의 뺨을 부리나케 후려갈겼다. 김씨도 한대 얻어맞고 가만있으려 하지 않았다. 반장의 멱살을 거머쥐고 주먹으로 패려는 순간 일군들이 급히 뜯어말려 대판 싸움은 피면했지만 우리 조선족 네사람은 현장에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넷 가운데 두사람은 불법체류다보니 그냥 남아서 시비하다간 경찰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 넷은 교통비를 팔고 반시간남짓이 공맥만 빼고 배를 촐촐 곯으면서 패잔병마냥 돌아왔다. 억울했지만 어디가서 하소연할데도 없었다. ㅇ 걸싼 일꾼 일당을 뛰는 조선족라고 해서 모두가 <<데마>>를 걱정하는것은 아니다. 일이 년장 노릇을 한다고 어디서든 눈치보기를 말고 일을 시키는대로 걸싸게 해내면 당연히 관리인의 호감을 사게 되고 인력소개소에도 좋은 반영이 올라가게 된다. 그러면서 그들과 유대관계가 형성되고 혜택을 보게 된다. 현장들에서는 하던 일이 채 끝나지 않았을 때는 다음날 또 인력소개소에 인력주문을 하게 된다.그들은 원래 하던 일꾼들의 표현이 안좋을 때면 소개소에서 보내는 새 일꾼들을 받지만 원래 일꾼들이 맘에 들면 그들을 다시 요구한다. 그런 팀에 든 일꾼들은 열흘이고 한달이고 일이 끝날 때까지 거기에 발을 붙이고 일할 수 있기에 매일 인력소개소에 가서 일배치를 초조하게 기다릴 필요가 없고 더우기 <<데마>>맞을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아도 된다. 한 현장에서 여러날동안 일하노라면 관리인들과 친해져 그들의 도움을 받아 계약공이 될 수도 있고 간단한 기술도 익혀 높은 임금을 받기도 한다. 최기사는 자기가 선택한 8ㅡ12명의 고정일꾼들로 팀을 무어 그냥 자기 봉고차에 태워가지고 현장을 다닌다. 일꾼 대부분은 일정한 노가다 경력을 가진 조선족들로서 신체가 든든하고 현장청소, 기자재정리, 꼼방같은 잡역은 물론 일부 초보자 목공일에도 막힘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새벽부터 인력소개소에 가서 명함장을 내놓고 일 배치를 기다릴 필요없이 일곱시쯤에 지정한 곳에 모여 최기사의 차에 앉아 직접 현장으로 가면 된다. 그리고 저녁에 소개소에 들려 그날 임금을 받아가지고 돌아간다. <<정예부대>>나 마찬가지인 최기사팀은 한 현장에 가면 보통 일이 끝날 때까지 며칠 지어 한달넘어 일할 때도 있다.부천데크노파크신축건설 등 현장들에서는 용역일꾼이 수요될 때마다 정해놓은 듯 최기사팀을 요구하군 한다. 일을 잘한덕에 현장에 목수가 부족될 때면 사포드세우기, 반도채우기, 형틀철거 등 기공일까지 맡아해 잡역보다 일급을 1ㅡ2만원씩 더 받는다. 우리 넷이 인력소개소를 통해 경희대학신축현장으로 일당을 갔을 때였다. 크레인이 들어올린 석고보드를 구루마(현장에서 원자재를 운반하는 달구지)를 리용해 여러 층에서 일하는 내장팀에 공급해주는 일이였다. 네사람은 내장팀에 공급이 딸릴세라 석고보드를 넘쳐나게 싫은 구루마를 밀고 땀벌창이 되어 달아다녔다. 다음날 미장작업에 지장이 없게 하기 위해 저녁때가 지났지만 그 자리에서 빵으로 대충 요기를 하고는 두시간반동안 연장작업까지 했다. 어오야지는 일꾼들의 노동 표현에 아주 만족한나머지 6만원인 일급을 7만원으로 높여주었고 거기다 연장작업비까지 넉넉히 3만원씩 보태주었다. 일꾼들은 있는 힘껏 일한 보람을 느끼며 기뻐했다. 돌아갈 때 어오야지는 일꾼들의 전화번호를 일일이 적어두었다가 이틀후에 일꾼이 수요되자 또 그 네사람을 불렀다.그들은 그곳에서 거의 열흘동안 열심히 일하면서 일급을 만원씩 더 받았고 인력소개소를 거칠 필요없이 직접 현장을 갔기에 10% 용역소개비도 절약했다. 돈화에서 왔다는 박로인(65세)은 매일 아침 남부인력소개소에 와서 소개소에서 배치해주는 일꾼들을 데리고 건축현장으로 간다.얼굴에 주름이 깊숙이 패이고 양볼이 홀쪽하니 여윈 그런 늙은이가 어디서 맥이 나길래 건축현장에서 지경으로 있으면서 매일 잡부들을 이끌고 힘든 일, 어지러운 일을 가리지 않고 해내는지 참 이해가 안됐다. 헌데 일품새를 보니 과연 육십대 노인 같잖게 잽쌌다. 생산대 대장처럼 일순서를 미리미리 예산하고선 사전에 기자재를 쌓을 받침틀이나 화목저장상자를 만들어 놓고 노동 공구도 마련해 놓아 일꾼들이 서성거리고 기다리는 일이 전혀 없게 한다. 일꾼들이 보통 한대씩 메여나르는 큰 사포드도 박로인은 두 대씩 메고 선줄을 끌었고 시멘트주머니를 등허리에 척 붙이고는 층계를 씨엉씨엉 걸어올라간다. 얼굴에서 구슬땀이 뚝뚝 떨어지고 작업복 등어리가 땀에 질펀한데도 로인은 휴식시간이 될 때까지 담배 한대 피지 않고 직심스레 일한다. 그러니까 그를 따라 일하는 인부들도 마찬가지로 땀똥이를 꽤나 흘리게 된다. 휴식시간이 되자 우리가 그렇게 제 몸을 사릴줄 모르고 고지식하게 일하는데 대해 못마땅해 하자 박로인은 <<일꾼이 일을 할때는 열심히 해야지. 그렇잖으믄 일꾼이 흔해빠진 지금에 어디서 일을 시켜주나? 나 한국 와서 칠년째 노가다를 한사람인디 어디가두말야 일 못한다는 소리는 한번도 못들어본겨. 그러길래 이 나이에도 일을 시켜주는데가 그냥 있잖아...>> 라고 했다. 박로인은 아마도 노가다판에서 몸을 혹사한 탓에 체내 지방이 다 빠지고 이젠 단단한 뼈와 근육만 남은것 같았다. 한국 노가다판은 어디든 노동 시간은 길고 휴식시간은 담배 필 시간도 모자란다. 해가 긴 여름같은 계절에는 건축현장을 포함한 노가다판의 하루 로동시간은 보통 열시간에 달하는데 농장과 어선작업처럼 계절성이 강한 업체들에서는 일이 딸릴 때면 노동 시간을 하루 12시간까지 늘이고 연장작업도 들이댄다. 노가다판에 일이 많은 봄과 가을사이에 낮 기온이 30도를 웃도는 고온에서 안전모와 작업복, 안전화를 착용하고 파고 쌓고 메고 끌며... 땀을 흘리는 건축공사장의 노동이야말로 육체를 혹사하는 고역이라 하지 않을수 없다. 노가다판을 다니는 아저씨들은 가는 곳마다 염분이 푹 스민 내의로 주위 사람들의 후각을 흐리우는 땀내를 풍기군 한다. 버스나 전철에서 <<땀내 나는 아저씨들>>이 곁에 와 앉으면 자리를 내면서까지 코를 가리고 피하는 <<결벽족>>들을 흔히 볼수 있다. 또한 한국 노가다판에서는 무더위를 무릅쓰고 일하다 갑자기 쓰러지거나 뇌출혈을 일으켜 구급차에 실려가는 일이 자주 있다. 그속에는 물론 우리 조서족 일꾼들도 다수 포함된다. 몇년전부터 실시되고 있는 무연고동포 방문취업제는 악덕 브로커들의 사기행각을 효과적으로 배격하고 조선족들의 노무 송출에 넓은 길을 틔워주었다. 한국 노가다판으로 진출하는 조선족들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또한 일자리 찾기가 갈수록 힘들고 3D업종의 임금이 오르지 못하는 등 불리한 요소도 병행되고 있다. 건축공사와 실외 작업이 중단되는 겨울철엔 일부 남성 일꾼들이 일할데가 없어 여름에 번 돈을 축내기만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중국에 있을 때처럼 소비한다면 나머지가 별로 없게 된다.그러니 어찌 맘놓고 먹고 놀 수가 있으랴. 때문에 중국에 송금하는 뭉치돈에는 그들의 피땀과 스트레스가 고스란히 배여있다. 그 돈은 우리가 빈곤에서 탈출해 풍요로운 생활을 마련하고 화목한 가정,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가는데 주춧돌이 되고 있다. <본문은 중국조선족 한국생활수기 모음집 "빵상과 쭝국애 혀네언니"에서 발췌>
    • 오피니언
    2015-08-08
  • 한국지명과 연변지명④훈춘시 팔련성부터 경주 반월성까지
    ● 허성운 중국 길림성 혼춘시(琿春)에서 서쪽으로 약 7.5km 떨어진 삼가자향(三家子鄕)에 자리 잡고 있는 팔련성(八連城)은 지세가 평탄한 혼춘하(琿春河) 충적평야 지대에 위치하여 있다. 두만강이 팔련성 서쪽 1km 떨어진 지점에서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있다. 팔련성은 팔뢰성(八磊城), 팔루성(八壘城),반랍성(半拉城),고토성(古土城), 반랍성자토성(半拉城子土城) 등으로도 불린다. 팔련성이란 명칭의 유래에 대해 학계에서는 북대성과 7개의 성이 연결되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고, 북한의 고고학자인 주영헌 朱榮憲 선생은 팔련성이 8개의 내성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부르하퉁하와 세린하 합수목에 자리 잡은 패랑산 산성은 산 정상에 축성한 테뫼식 산성으로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다. 한자로 偏脸山城으로 표기하고 있어 사람들은 한자 의미에 따라 산줄기가 기울어져 있어 그 명칭이 유래 된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팔련성 ,패랑산 지명을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하여 먼저 우리 말 바람벽이라는 말부터 검토해 보기로 하자. 사전을 펼치면 바람벽을 벽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언어지식이 깊지 않은 사람들에게 간혹 고유어 바람(风)과 한자어 벽(壁)으로 이루어진 합성어로 추정하기 쉽다. 그런데 바람벽의 방언들을 살펴보면 바름벽, 보름벽, 베름빡 등 다양한 소리로 나타나고 있어 이런 사투리들은 그 지역에 따르는 바람 (风) 사투리와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사실 바람은 벽(壁)의 고어로서 중세국어에서(壁)람으로 나타난다. 어원을 따지고 보면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 바람(壁)과 바람(风)을 구별하기 위해 바람벽(壁)이라는 동의중복(同義重複 ) 낱말이 만들어진 것으로 결론이 내려진다. 우리말과 맥락을 함께하고 있는 만주어를 살펴보면 벽(壁)을 빛랑 fajiran으로 새기고 있어 이에 대한 추론을 뒷받침하여 주고 있다. 한국과 북한에는 반월성(半月城)이라는 명칭을 가진 유적들이 있다. 북한 개성 반월성은 도시성곽제도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반월성은 나성의 서쪽 성벽 눌리문 부근에서부터 능선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와 남대문과 동대문을 거쳐 고려 성균관의 뒤 언덕을 지나 북쪽 성벽 북소문 부근까지 뻗어 있다. 남대문은 한국 전쟁 때 부서진 것을 1954년에 복구한 것이다. 성의 평면 모습이 마치 반달모양과 같아 반월성이라고 해석하고 있지만 벽을 말하는 바람벽이라는 어원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아야 정확하다. 한국 경주 반월성은 궁성으로서의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성벽의 동·서·북면은 대체로 흙과 돌로 기초를 다져쌓고 그 위를 정토로 덮었으며 남면은 절벽인 자연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경주 반월성(半月城) 지명도 한자 그대로 뜻풀이하여 달 모양의 성으로 지명을 단순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밖에 한국 부여 금성산에 위치한 반월성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 된다. 이상의 설명과 같이, 바람(壁)은 한자로 八連城 半拉城 偏脸城 半月城 등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우리말 바람은 본래 벽(壁)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언젠가부터 바람벽으로 바뀌어 그 독립 기능이 상실되어 단지 지명 요소로 숨어 쓰이게 되었다. 그 가운데 대부분은 토성으로 축성되어 있는 옛 산성 지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바람(壁)은 오랜 세월동안 언어 변천을 거쳐 파생 지명으로 나타 날 수 있다. 한국 세종시 부강면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는 금호리 마을에는 바람실이라 부르는 산 지명이 있다. 옛날 주민들이 이곳이 마을을 지켜주는 산이라 믿어 왔기에 벽이 하는 기능을 이 산이 수행한다고 하여 바람실이라는 지명이 유래된 것으로 전하고 있으나 금강에 위치한 지리적 조건과 이 일대에 산성이 밀집하여 분포된 특징으로 보아 오래전에는 산성이 있었거나 원래 인근 산성에서 이주하면서 붙인 지명으로 추정된다. 몰론 우리의 지명에는 ‘바람고지’ㆍ‘바랑골’ㆍ‘바람들’ ‘바람말’ㆍ‘베랑모팅이’ㆍ‘베루바우’등 바람과 유사한 소리가 들어있는 명칭이 매우 많은데 이들 모두가 바람벽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여러 곳에 따라 바람 (风) 벼루 벼락 바랑(자루 같은 주머니)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닌 지명으로 드러난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5-08-06
  • 한국지명과 연변지명③삼합 사물깨부터 경남 사천시까지
    《중국고금지명사전》(中国古今地名辞典) 기록에 의하면 두만강 명칭은 만주어 tumen sekiyen 한자로 图们色禽에서 유래 되었다고 적고 있다. 만주어 tumen sekiyen는 만 갈래 물줄기라는 뜻으로 해석되는데 이를 우리말로 즈믄 (천 혹은 많다의 고어) 샴치(함경도 방언 샘물)라고 풀이 하면 그 해석이 더욱 완벽하다. 수많은 샘물들이 두만강 양안에 모여 있는 까닭으로 이름이 붙여 진 것이다. 두만강 양안에는 말 그대로 샘물들이 하늘의 별처럼 널려 있어 한 겨울에도 많은 구간이 완전히 얼어붙지 않는다. 샘물 따라 물안개 보얗게 피는 곳엔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줄지어 들어 앉아 마을 지명들도 샘물둥지 샘물구파이 우물깨 약수동과 같이 다양하게 불러왔다. 그 가운데 두만강 가에 자리 잡은 삼합진에는 지명이 사물깨라는 동네가 있다. 옛날 이 마을에는 샘 줄기가 있는 바윗돌들이 군데군데 자리해 있어 여러 갈래 샘물들이 사시장철 마르지도 않고 바위 밑에서 솟아 나왔다. 사물깨 마을은 말 그대로 샘물이 주물러 자연 그대로 만들어 놓은 동네였다. 여기에서 사무깨란 말은 우물 샘 (새미)의 받침소리 리을(ㄹ)이 탈락한 것이고 깨는 함경도 방언에서 지점 장소를 뜻한다. 연변 동불사 소재지에서 북으로 십리길 들어가면 사수(泗水)촌이 나타난다. 작은 하천을 끼고 마을들이 이루어 졌으나 강물양이 적어 콧물처럼 흐른다 하여 콧물 사(泗)자를 사용해 지명이 유래 되였다는 설과 이 마을 우물들이 골고루 안물(함경도 방언 뽀얀 샘물)로 되여 콧물 사(泗)자를 사용해 지명이 유래 되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마을 노인들은 가뭄에도 마루지도 않고 뽀얀 우물이 시원하게 솟아나는데 한여름에도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약수 물이었다고 한다. 한국 경상남도 서남부에 사천시(泗川市)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역사를 거슬러 사천시 지명을 뒤적여 보면 조선 태종 때에 사천(泗川)현으로 고려 때에 사주(泗州)로 신라 때 사물현(史勿縣)이였던 명칭을 경덕왕이 사수(泗水)현으로 개명 한 것으로 기록 되여 있다. 사실상 사천시의 최초의 지명을 따지고 보면 사물현(史勿縣)으로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중국 연변 지명과 한국 지명을 바탕으로 사물(史勿)이란 이 지명을 꼼꼼히 캐고 보면 결국 샘물(泉)이란 뜻을 지닌 동음차자(同音借字)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다시 말하면 사물(史勿)은 원래 샘물을 뜻하는 우리 말 <<샴 /새미 >>에 대한 한자음으로의 소리 옮김이고 사수(泗水)는 그것에 대한 뜻 옮김이다. 샘물들이 흘러 내를 이루고 또 내가 흘러 강물이 되므로 샘의 뜻을 지닌 사물(史勿)이란 지명이 사천(泗川) 지명으로 이어 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를 실마리로 삼아 유사한 地名들에 대한 어느 정도의 추정은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연변 부처골 용진마을 사물깨, 북한 장진호 연안 지명 사수(泗水), 전라도 만경강 옛 명칭 사수강(泗水江) 등 지명들도 이런 맥락에서 해독 할 수 있다. 거기에 아득히 먼 고구려 지명 사물택(沙勿泽)과 인명 위사물(位沙勿)도 이와 같은 흐름으로 풀이하여 나갈 수 있다. 여기에서 사(沙)는 사(史)로 바뀌어 졌으나 사(史)와 사(沙)는 같은 음독(音讀)으로서 물(勿)과 함께 묶어 놓고 보면 사물(沙勿)은 샘물을 뜻하는 소리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 글누림에서 출판한<<지명으로 읽는 이민사 연변 100년 역사의 비밀이 풀린다>>에서 화룡에 있는 쓰렁바이 지명을 쓰렁바위로 착각하여 四人岩 四棱岩으로 새기고 인근 옥천동 지명을 충청도 옥천군 옥천동에서 따온 지명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허나 사실 쓰렁바이 지명은 만주어 seri 샘물과 ba 장소를 나타내는 의미로서 샘물터라는 뜻 이다. 옥천동 지명도 샘물로 이름난 이 고장 쓰렁바이 지명과 같은 맥락으로 풀이해야 정학한 것이다. 한국어 샘과 만주어 seri는 비슷한 음을 띠고 있다. 한자 표기 된 지명은 사실 이런 의미를 연결시키는 고리 구실을 하고 있다. 지명을 올바르게 해독하려면 이런 한자 지명 속에 구겨 넣은 최초의 말소리를 정확히 찾아 끄집어내야 한다. 연변 지역은 고대로부터 동북아 역사 발전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어 왔으며 발해시기에 들어와 도성이 자리 잡을 만큼 매우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학계에서는 기존 고고학적 기록과 유적에 매달려 조사하고 있을 뿐 이 지역에서 오래 동안 이어온 고유의 문화 이를테면 지명과 방언에 대한 연구는 현황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못한 실정이다. 거기에 많은 마을들이 하나 둘 사라져 가고 현지에 살던 토박이 노인들도 하나둘 세상을 떠나가고 있는 오늘날 이에 대한 조사사업은 시급하게 정확하게 이루어져야 마땅하다. 「옛날에사 대촌이었지. 인자 성 쌓고 남은 노인들만 남아. 이래가지고 동네가 우찌 될견지 농촌 다 망하는 게라이.」 연로한 할아버지의 한숨석인 독백, 오늘의 연변 농촌 마을에서 가끔 듣게 되는 말들이다. 글 : 허성운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5-08-06
  • [기획] 중국동포와 함께 남북통일 이야기 나눈다
    ■ 김용필 (동포세계신문 편집국장) 7월중 가장 무더웠던 날로 기억될 만한 11일 토요일 26명으로 구성된 중국동포 리더들은 임진각을 방문하고, 군사통제 구역에 있는 도라산역과 도라산 전망대, 제3땅굴을 견학하고, 미군이 주둔해 있던 막사 캠프그리브스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남북분단의 현장과 일에 대해 느끼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통일부에 등록된 사단법인 통일아카데미(대표 강신삼)와 사단법인 GK희망공동체(이사장 허을진)이 주최한 ‘조선족리더들의 남북 통일 이야기’ 프로그램에 참여한 중국동포들이 1박2일 일정으로 워크숍에 참여한 것이다. 지난해부터 DMZ탐방을 해왔던 기자는 좋은 기회다 싶어 이번 워크샵에 참여했다. 장단역 증기기관차 어느 때 같으면 시커먼 시멘트 기둥만 남아있는 끊어진 다리 사이로 푸른 물결로 찰랑이는 임진강이 무심코 흐르는 풍경을 볼수 있으려만 이번 방문길에는 긴 가뭄 탓에 바닥을 훤히 드러내놓은 왜소한 임진강을 임진각 전망대 위에서 바라볼 뿐이었다. 임진각을 찾으면 누구나 인상깊게 보는 것이 있다. 바로 장단역 증기기관차이다.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12월 31일 장단역에 멈춰선 증기기관차는 몸체에 1020여발의 총탄을 맞고 바뀌가 휘어진 체로 파괴되어 DMZ내에 방치되어 있다가 임진각으로 그대로 이전해 와서 지금 일반인들에게 남북분단의 상처가 얼마나 아픈지 보여주는 상징물로, 또 끊어진 경의선이 언젠가 다시 연결되면 북으로 달리고 싶은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2004년에는 등록문화재 제78호로 등록되어 있는 문화재가 되었다. 임진각에서 매일 울려퍼지는 <잃어버린 삼십년> 임진각에서는 매일 시시때때로 들려오는 노래소리가 있다. 설운도의 노래 <잃어버린 삼십년>이다. 1983년 한국방송 KBS는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 프로그램을 하루 이틀도 아니고 6월 30일부터 11월 14일까지 138일 동안 눈물의 감동 속에서 진행했다. 당시 중2 학생이었던 기자도 여의도 KBS본관을 견학 간 기억이 난다. 6.25전쟁으로 말미암아 뿔뿔이 흩어졌던 이산가족들이 저마다 어릴적 사진과 고향 등을 적은 피켓을 목에 걸고 KBS본관 앞에서 인사인해를 이루는 장면을 보았다. 1953년 6.25전쟁이 끝나고 꼬옥 30년만에 이산가족들은 눈물의 재회를 가졌던 것이다. 그 동안은 제 각자 먹고 사느냐고 가족을 찾을 겨룰이 없었다.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서야 한국사회는 헤어진 가족을 찾고자 하는 열망이 분수처럼 폭발하였다. 이 당시 방송에 출연한 이산가족은 5만3,536명이고, 1만189건의 상봉이 이뤄졌다. 이 방송이 나갈 때마다 국민들의 심금을 울렸던 노래, 설운도의 <잃어버린 삼십년>은 이곳 임진각에서도 매일 쉬임없이 울려퍼진다. 남북 분단으로 1천만명에 이르는 이산가족이 발생했지만 6.25전쟁이 끝나고도 60여년 이상 흘러간 지금도 北에 있는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하며 임진각을 찾는 실향민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고 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그리웠던 삼십년 세월 의지할 곳 없는 이 몸 서러워 그 얼마나 울었던가요. 우리 형제 이제라도 다시 만나서 못다한 정 나누는데 어머님 아버님 그 어디에 계십니까 목메이게 불러봅니다.” 세상 어디에 이런 비극이 있겠는가? 통한의 장벽,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갈라놓은 휴전선 길이는 155마일(248km)이다. 휴전선을 기준으로 남으로 2km, 북으로 2km로 각각 군사분계선을 그려놓고 군이 대치하고 있다. 이 4 km 구간은 비무장지대, 즉 DMZ 지대라고 한다. 자유의 다리 휴전선을 따라 DMZ 기행을 하다보면 지역마다 특징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곳 경기도 파주 임진각 앞으로 펼쳐지는 지역은 어떤 특징이 있을까? 해설사는 “포로 교환을 위해 이곳 임진강에 다리를 가설했다”며 “그것을 자유의 다리라고 말한다”고 설명한다. 자유의 다리는 원래 경의선 철교 하행선이다. 상행선은 6.25전쟁 때 파손되어 지금은 기둥만 덩그러니 남아있지만, 하행선은 도로로 개조하여 1953년 정전 후 이 다리를 통해 전쟁포로 교환이 이루어졌다. 당시 한국군과 유엔군 12,773명이 넘어와 자유의 다리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판문점 앞에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있다. 포로 교환을 비롯하여 남북적십자회담 대표들의 왕래가 이루어졌던 이 다리는 남북분단의 비극을 상징하는 다리라고 해설사는 설명한다. 도라산역에서 남북통일(通一) 시대를 오후에 가보게 된 도라산역은 2000년 9월 경의선 복원공사를 개시해 2002년 4월 개통된 역으로 임진강역에서 임진강 철교를 지나 DMZ내 장단역 사이의 끊겨진 경의선을 연결하여 향후 유라시아 철도길을 잇는 시발점이 될 것이라는 염원을 갖고 있다. 이곳에 와보니 단동과 신의주를 연결하는 압록강철교가 떠오른다. 2004년 초 단동에 가게 된 기자는 북한을 보고파 압록강을 찾았다. 역시 인상에 깊이 남았던 것은 끊어진 압록강철교였다. 마찬가지로 6.25전쟁때 끊어진 다리로 중국쪽 철교만 남아있어 압록강단교로 불리우다가 1990년 북한과 중국의 합의에 따라 조중우의교(朝中友誼橋)로 부르기 시작했다. 도라산역에서 인상적인 것은 “남쪽의 마지막 역이 아니라 북쪽으로 가는 첫 번째 역입니다”라는 커다란 문구와 ‘평양행’이라 씌여 있는 입구이다. 이제 머지 않아 서울에서 신의주까지 연결되는 경의선이 복원 개통되고, 조중우의교도 완전 복원되어 신의주에서 압록강철교를 거쳐 중국대륙과 유라시아로 연결되는 철도를 따라 즐거운 여행을 떠나게 되는 꿈을 꾸게 된다. 이런 생각도 문뜩 들었다. ‘남북통일(統一) 시대는 쉽지 않겠지만 최소한 철도가 이어져 통(通)하는 남북 통일(通一)시대는 열리지 않겠는가!’ 그런 통일(通一)시대가 곧 열릴 거라 기대하는 것은, 이미 70만명에 이르는 중국동포들이 한국에 거주하고 있으면서 한국과 중국을 자유롭게 오가는 시대가 되었고, 이들이 어느 누구보다도 남북통일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남북통일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중국동포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를 반영하듯 한국정부는 중국동포를 한중교류의 가교자 역할에서 통일시대를 열어가는 중요한 가교자 역할자로 주목하며 다각도의 지원방안을 구상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시진핑 정부를 맞은 중국도 이를 과거처럼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 또한 감지된다. 지난 6월 30일 주심양한국총영사관 주최로 ‘통일대비 동포협력방안 세미나’가 공개적으로 열렸다는 점, 그리고 세미나에 참석한 조선족 인사가 “조선족은 양쪽과 자유롭게 교류가능한 장점을 바탕으로 남북간 접촉과 교류에 크게 기여해 왔다”면서 “조선족 지식인 기업인의 교량 중재자 역할, 친인척 왕래를 통한 접촉 등을 계속 강화해야 한다”고 공개석상에서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 등은 과거와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90년대 중반 황장엽 북한 노동당 비서장이 남한으로 망명해 오고, 탈북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할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최근까지만 해도 “북한”, “통일” 이런 이야기는 중국동포들이 공개석상에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무거운 주제였다. 통일아카데미 강신삼 대표는 “남북통일문제에 대해 이젠 조선족동포들과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때가 된 것같다”고 말한다. 기자도 동감한다. 이번 한국 민간단체 통일아카데미와 중국 조선족 단체 GK희망공동체를 통해 중국동포들이 함께 DMZ 투어를 하고 남북통일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 또한 진일보한 분위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5-08-05
  • [역사만필] 영화 “암살”의 여주인공과 “간도참변”
    ●김 혁 (재중동포, 역사칼럼니스트)   한국영화의 흥행신화를 다시 쓰면서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는 영화 “암살”에서 톱스타 전지현이 주연한 안옥윤은 “간도참변”에서 어머니를 잃는다.  또 한 부의 의열단활동을 다룬 영화 “아나키스트” (개봉: 2000.04.29, 감독: 유영식 출연: 장동건, 정준호, 김상중, 이범수, 김인권)에서도 주인공 상구는 경신년 간도 대학살에서 친지를 잃고 상해로 와서 의열단에 가입한다.   “간도참변”은 “경신간도학살사건”이라고도 불린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5일간 일어났던 청산리전투에서 크게 패하면서 일본군은 그 보복으로 한인사회· 항일단체. 학교· 교회 등을 초토화시켰다. 간도참변으로 한국인 3,700여 명이 피살되었다고 전해지며, 이 참변으로 간도를 포함한 만주 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던 한인 사회 및 항일단체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간도참변”중에서도 가장 비참했던 사건은 “장암동 학살사건”이다. 한국의 “제암리 학살사건”에 비견되는 사건으로 “간도참변을 떠올리면 모두 “장암동”부터 떠올린다.  경신년간도대학살의 현장을 찾았다.    피로 물든 장암촌   청산리, 봉오동 대첩에서 연전연승한 독립군은 일본군과 맞대결을 계속하는 것이 불리하다는 판단에서 만주벌의 북쪽으로 대피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의 대대적인 보복전을 피하고 거듭되는 전투에서 피로해진 부하들의 건강회복이 필요해서 취한 조처였다.   한편 독립군에게 참패한 일본군은 보복의 칼날을 뽑아들었다. 일제는1920년 10월부터 3개 월 여에 걸쳐 조선인 마을들에 방화하고 민간인들을 살해했는데, 이런 만행은 1921년 5월까지 계속되었다.  그중에서도 장암동 주민들의 희생이 가장 컸다. 그 참안현장을 답사하기로 하였다. 몇몇 문학지기들과 매스컴 기자들과 함께 아침일찍 연길 동북아 터미널에서 개산툰행 버스에 탑승했다.    9시경에 용정 동성용진에서 하차해 도보로 장암촌을 향했다. 평소의 답사처럼 흔쾌히 길에 올랐는데 그렇게 먼 길일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잡풀이 뒤 덮인 산자락에 난 소수레길을 따라 도보로 30여 리를 걸었다. 몇몇 대원들은 평소와는 달리 힘에 부쳐했다.   오후 한 시가 넘도록 무려 4시간이나 강행군을 해서야 세전이벌 동남쪽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동명촌 제2촌민소조에 이르렀다. 좁은 골짜기를 따라 동남쪽으로 얼마간 들어가니 그곳이 바로 장암동이라고 했다.  초가집과 벽돌기와집이 섞인 오붓한 마을, 지금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시골마을 이지만 수십년 전 이 곳에서는 일제의 몸서리치는 만행이 자 행된 참변의 현장이었다. 마을 중심에 들어서니 "동명"는 표지석이 보였다.   우리는 동명촌에서 근 60년간 살아 왔다는 주병욱(75세) 할아버지를 만났다. 그에 의하면 촌민들에 의해 “노루바위 골”이라 불리는 이곳은 중국말로는 장암동, 간장암동(間獐巖洞)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촌민들 거개가 한국으로 출국하고 지금은 마을 주민 다수가 중국인들이라고 했다.  그가 가르켜준대로 골짜기를 따라 얼마쯤 올라가니 동명촌 제3촌민소조 마을이 나타났고, 마을 앞쪽 언덕에 새로 수선한 "장암동(獐巖洞)참안유적"비가 있었다.  석비정면에 “獐巖洞慘案遺址”라고 새겨져있었다. 뒷면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있었다.    1920년10월 “경신년대토벌”때 일본침략군은 이곳에서 무고한 백성 33명을 학살하여 천고에 용납못 할 죄행을 저질렀다.    龍井3.13紀念事業會  1999年6月30日    유적비에는 몇글자로 응축 된 그날 장암동에서는 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던것일가! 청산리 전쟁에서 참패한 일제는 간도 지역 조선인들에 대한 야수적인 보복으로 혈안이 되었다 조선인들이 독립군들에게 지원의 손길을 뻗친데 대한 분풀이었다. 이 참에 독립군의 근거지를 박멸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실제로 봉오동ㆍ청산리 전역에서 독립군이 대첩을 이룰수 있었던것은 지역 동포들의 헌신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독립군을 쫓아 시베리아 쪽에서 남하하는 일본군과 남에서 북상하는 일본군은 도로 변에서 조선인 마을만 보면 수색하여 청년들은 보는 대로 사살하고 녀성들을 간음하며 가옥에 방화하는 등 야수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이른바 “삼광전략(三光戰略)” 즉 모조리 죽이고, 략탈하고, 불지르는 초토화 섬멸 작전이었다.   일제의 조선인 학살에 대해 당시 동북에서 발행했던 “길장일보(吉長日報)” 1920년 11월 7일부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있다. “그들은 독립군이든 아니든 묻지도 않고 조선인이라면 함부로 수색하며 살해하고 있다. 례컨대 삼둔(三屯)에서 조선인 3~4명이 체포되었고, 남대고비(南大古比)ㆍ오술동(五述洞) 마을의 가옥은 몽땅 소각되었다. 그리고 빈송배(杉松背) 등에 서는 14명이 타살되었는데, 그중에는 학생이 5~6명, 교원이 1명이 있었다.   소가(小街)에서는 12명이 타살되었고 경성위자(鏡城威子)에서 타살된 남녀는 도합 200여 명에 달한다. 삼도구에서 불에 탄 화민(華民) 가옥은 2호이고 조선인 가옥은 500~600호이다. 삼도구 내의 청산리 지방의 전 촌 조선인가옥 1,000여 호를 전부 불살랐으며, 봉자구의 조선인 가옥 70~80호도 불태워버렸다. 회경가의 50~60호의 조선인 가옥과 명동학교도 불태웠다. 최근 3주일 내에 연변일대에서 살해된 조선인은 2,000여 명에 달하며 매개 촌에 이르러서는 남녀를 한 곳에 집결시켜 놓고 함부로 총살하거나 불태워 죽였으며 혹은 집 안에 가두어 놓고 소살하였다.”   그중 가장 잔인한 학살현장의 하나가 바로 장암동이었다. 1920년 참안을 앞둔 장암동은 연길현 용지사(勇智社)에 속해 있었다. 장암동마을의 주민들은 대부분 예수교신자들이었으며 린근에서 장암동 마을을 “예수 마을”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마을에는 영신이라는 이름의 학교가 있었다. “3,13”반일시위때 장암동주민들과 영신학교 교원들은 시위에 적극 참가하였고 남양평, 팔도하자의 일본군수비대를 습격할 계획까지 세웠다고 한다.   장암동은 또 간도국민회 제2동부지방회 제4분회에 소속되어 있었고 촌민 대다수가 국민회 회원이었다. 1919년 후반기 장암동에서는 간도국민회 만주지방 총회장 양도헌(梁道憲)으로부터 총과 탄약을 얻어 경호대를 조직하였으며 반일단체인 최명록의 도독부와 의군부와도 연계를 갖고 있었으며 그들은 늘 장암동에 와서 활동하였다. 이에 일제는 장암동을 “불령선인의 책원지”의 하나로 간주하여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고있었다. (“무장독립운동비사”)  1920년10월30일 새벽 0시30분, 용정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제4사단 28려단 보병 제15련대 제3대대 대대장 다이오까의 명령을 받은 스즈끼대위는 보병 70여명, 헌병 3명, 경찰관 2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거느리고 장암동에 파견되었다.  4시경에 그들은 남양평수비대와 합세하여 새벽 6시30분에 장암동을 포위시킨후 청장년 33명을 반일부대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포박하여 교회당안에 가두어놓고 불을 질렀다. 교회당은 즉시로 화염이 충천하였는데 놈들은 불 속에서 뛰쳐나오는 사람들을 총창으로 마구 찔러죽이고 다시 불 속에 던져넣었다.   가슴치며 절규하던 가족들은 일본군이 물러간 후에야 육친들의 시체를 찾아 장사지냈다. 며칠후였다. 유가족들의 피눈물이 아직 채 마르기도 전에 일본군이 또다시 마을에 쳐들어왔다. 놈들은 유가족들을 강요하여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한데 모아놓으라고 강요했다. 유족들이 위협에 못이겨 땅을 파 시체를 모아놓으니 놈들은 다시 파낸 시체를 조짚단 위에 놓고 석유를 쳐 재가 되도록 태워버리면서 이중살해를 감행했다. 일본군은 장암동에서 민가 11채, 영신학교와 교회당을 불태워버렸다.  그후 이중학살된 참혹한 시체가 누구의 것인지도 가릴 길이 없어서 유족들은 재를 모아 28명의 합장 무덤을 만들어 성분하였다.   일제는 장암촌에서 류례가 없는 잔악한 행위을 우리 동포에게 행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장암촌은 폐허가 되고말았다.   사건 다음 날부터 장암동을 비롯해 일본군의 만행 현장을 조사한 서양 선교사들이 있었다. 용정에서 제창병원을 경영하던 영국인 선교사 마틴과 카나다 북장로회 선교사 푸트가 학살현장을 찾아보았던 것이다. 그들에 의해 일본군의 몸서리치는 잔학상이 세상에 드러났다.  마틴은 “견문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10월 31일 일요일 마차로 12마일 떨어져있는 비암촌을 향해 용정에서 출발했다. 지난 10월 29일 벌어진 일을 조사해보려는 데서였다.   그날 날이 밝자마자 무장한 일본 보병 한 개 부대는 예수촌을 빈틈없이 포위하고 골안에 높이 쌓인 낟가리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는 전체 촌민더러 밖으로 나오라고 호령하였다. 촌민들이 밖으로 나오자 아버지고 아들이고 헤아리지 않고 눈에 띄면 사격하였다.   아직 숨이 채 떨어지지 않은 부상자도 관계치 않고 그저 총에 맞아 쓰러진 사람이면 마른 짚을 덮어놓고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불태웠다. 이러는 사이 어머니와 처자들은 마을 청년남자 모두가 처형당하는것을 강제적으로 목격하게 하였다.   가옥을 전부 불태워 마을은 연기로 뒤덮였고 그 연기는 용정촌에서도 보였다 ...이런후에 일본군은 유유히 돌아가서 천장절을 축하했다.   마을에서 불은 36시간이 지났는데도 계속 타고있었고 사람이 타는 냄새가 나고 집이 무너지는 소리가 나고있었다. ...알몸인 젖먹이를 업은 여인이 새 무덤앞에서 구슬프게 울고있었고... 큰 나무 아래의 교회당은 재만 남고 두채로 지은 학교의 대건축도 같은 운명이 되었다. 새로 만든 무덤을 세어보니 31개였다. ...다른 두 마을을 방문하였다. 우리들은 불 탄 집 19채와 무덤 또는 시체 36개를 목격하였다”   선교사 푸트는 그의 수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내가 11월 4일에 간장암동에 갔더니 촌인은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주었다.  ‘10월 30일에 왜병이 내습하여 31명이 살고 있는 촌락을 방화하고 총격을 가했다’ 나는 가옥 9칸과 교회당과 학교가 잿더미로 된 것을 보고 사실임을 알았다. 또 11월 1일에는 왜군 17명, 왜경 2명 및 조선인 경찰 1명이 이 마을에 와서 남자들을 모조리 끌어 내다가 죽인 후 그들의 처를 불러내어 사자의 경력을 말하라고 고문했고, 그 다음에 촌락의 주민들 모두 모아서 일장 연설을 한 후 외국인 선교사가 이곳에 온 일이 있는가를 물었다…”   일본군의 잔인한 만행을 목격한 선교사들은 “피에 젖은 만주땅이 바로 저주받은 인간사의 한 페이지”라고 탄식하였다.  이들 선교사들에 의하여 일본군의 만행에 대한 기시가 “시카고 데일리 뉴스”와 “상하이 로투(路透)통신사”등에 보도되었다.   이렇게 만행을 저질러놓고도 일제는 상부에 바치는 보고에서 “우리 토벌대는 적도들의 음모장소로 되는 집들을 소각하고 적의 시체는 우리 나라 풍속대로 화장하고 부락의 생존자들을 모아놓고 우리 군대의 토벌취지를 말하고 장래에 있어서 불령행동을 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동지방에서 철퇴하였다.   그후 시체의 화장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군대, 경찰 등 인원을 파견하여 협력하게 하여 완전히 타지 않은 시체 및 유골들을 유족, 친지들 혹은 부락 대표자들에게 부탁하고 령수증을 받았다”고 진상을 왜곡하여 죄악을 덮어감추려고 했다. (김철수 “연변항일사적지연구”)  일본군은 용정의 선교사들이 조사하러 다니자 민간인 대학살이 외국에 알려질 것을 우려해 이를 경계하는 기록도 남겼다.  “특히 10월 30일 아군의 한 부대가 연길 장암동에서 불령선인 토벌에 즈음하여 36명을 죽이고 민가 12호 및 학교, 교회당을 불태운 사건을 듣고 저들 선교사는 다음 31일 그곳에 가서 사진기로 피해 상황을 촬영하고(시체에 밤 껍질을 덮어 태웠으나 반만 타서 숯이 되어있는 것을 촬영했다고 한다) 조위금 200원을 보냈으며 또한 전후 수차에 걸쳐 선교사 및 신문기자가 이를 조사한것은 사실이다.  본건을 혹은 학살사건으로서 선전의 불을 붙이는 단서가 될지도 모르므로 크게 경계를 요하기에 군대 측에 특별히 주의를 주고 있다.” (“장암동 부근의 토벌 상황”“, “장암동 소탕 상보”)  사책들에서 흔히 “경신참변(庚申慘變)”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같은 해 훈춘에서 있었던 “훈춘 참변”과 함께 우리 민족이 만주지방에서 일제에게 당한 가장 대규모적이고 비극적인 참변이었다.  유적비에 묵념을 올리고 마을 동쪽골짜기에 자리잡고있는 노루바위를 찾아보았다. 주병근 할아버지에 의하면 “노루바위는 원래는 제법 선바위모습을 한 바위였는데 한때 군부대가 주둔하면서 바위 일부를 부셔버렸다”고 한다.   오후 4시가 넘어서야 우리는 귀로에 올랐다.   온 하루 답사를 강행한지라 발을 조이는 신발이 거추장 스러워 아예 신발을 벗고 걷는 대원도 있었다. 발이 부르튼 이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아픔이 우리들의 마음을 아릿하게 하고 있었다.   모두들 말이 없었다. 단 먼 답사길에 지쳐서가 아니였다. 수십차 답사를 이어왔지만 이번 처럼 가슴이 무거워나는 답사길은 없었다. 석양이 서산마루를 피빛으로 물들이고있었다. 어둠에 사위어 가는 노루바위 골을 다시 돌아다 보았다. 노루가 많다고 하여 노루바위골이라고 불렀다는 장암동, 하지만 답사 내내 노루는 보이지 않고 어디선가 처연히 들려오는 꿩 우는 소리만이 어젯날의 우리민족이 겪었던 아픈 수난을 이야기 하는듯 했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5-08-05
  • [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35)
    ■김철균 긴것 같으면서도 짧은 것이 인생인가부다. 특히 할일이 많고 뭔가를 추구하면서 시간에 쫓기며 사는 사람들일수록 늘 자신의 인생이 짧다고 생각한다. 2004년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 들어 순자네 가정엔 청천벽력과도 같은 불행이 들이 닥쳤다. 남편 용환 영감이 뇌혈전으로 쓰러졌던것이다. 뇌혈전이란 사람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뇌혈관에 피덩어리가 생기면서 혈액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나타나는 현상이다. 용환 영감한테 이러한 증상은 오래전부터 조금씩 있었다. 두통, 현기증과 손발저림과 같은 현상이 나타났지만 영감은 대수로와하지 않았다. 오히려 항상 마누라가 몸이 허약하다며 신경을 기울여왔던 영감이었다. “나한테도 그렇고 자식들한테도 마찬가지로 마누라가 건강히 오래 살아야 그 가정이 잘 운영되는 법이라오.” 영감은 평소에도 이런 말을 많이 해왔다. 그러면서 마누라가 좀 아프다고 하면 손발을 주물러주고 약방에 가서 약을 사온다, 병원으로 데리고 간다 하며 자상하게 굴었고 자식들한테까지 “너희들이 어머니한테 절대 등한히 굴어서는 안된다”며 자주 당부를 하던 영감이었으나 자기 자신한테만은 항상 그 정반대었다. 간혹 순자가 영감의 몸에 대해 걱정이라도 하면 “내 몸은 내가 잘 알아서 보양할테니 당신은 걱정마오”라고 하며 안심시키군 하던 용환 영감이었다. 헌데 그러던 용환 영감이 쓰러졌다. 평소에 별로 잔병들이 없고 건강하기만 하던 사람이 앓는다고 하니 아주 치명적이었다. 의사가 자기의 몸에 더 등한하다더니 그 말이 틀림이 없었다. 영환 영감이 뇌혈전으로 쓰러지자 가족은 물론 연변위생연수학교의 지도부에서도 용환 영감의 병치료에 총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너무나도 치명적인지라 그 치료가 몹시 힘들었으며 완치란 거의 불가능하게 됐다. 한동안의 입원치료와 순자의 정성어린 간호로 용환 영감의 병세는 어느 정도 호전되었지만 바깥출입은 근본 할 수 없었고 이전처럼 식사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순자의 손이 따라 가야 했다. 죽을 끓여 입에 떠넣어 주고 젖은 수건으로 몸을 닦아주고 2일에 한번씩 요자리를 갈아 주어야 하는 등으로 마치 갓난 아기를 돌보듯이 돌봐야 하는 것이 뇌혈전으로 반신불수가 된 환자를 돌보는 일이었다. 순자는 영감의 병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영감한테 가장 값진 걸 대접하고 싶었다. 값진 것이란 다만 비싼 물건이어서만이 아니었다. 자신이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면 곧 바로 값진 것이었다. 용환 영감이 투병생활을 시작해서부터 순자는 매일 영감한테 죽을 쑤어 대접했다. 순자가 영감한테 끓여 대접하는 쌀죽은 결혼 때 갖고 왔던 것으로 거의 60년간 보관하고 있던 “예장함의 쌀”로 지은 것이었다. “예장함의 쌀”이란 딸이 결혼할 때 부모가 딸의 함속에 넣어서 보내주는 쌀이다. 이는 옛날부터 내려온 조선민족의 풍속으로서 딸이 시집간 뒤 농사를 잘 지으라고 원래는 “종자벼”를 넣어서 보내었으나 후에는 그것이 변화되면서 아예 매일 이밥을 먹으며 살라고 함속에 쌀을 넣어서 보냈던 것이다. 순자는 수십년동안 아무리 식량고생을 하면서 살면서도 이 쌀만은 터뜨리지 않았다. 보다 관건적인 시각에 이 쌀을 아주 유용하게 사용할 타산이었다. 헌데 이젠 그 “대장함속이 쌀”을 터뜨릴 때가 된 것이었다. 쌀이 없어서가 절대 아니었다. 그 쌀을 터뜨려야 할 그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순자는 용환 영감이 다시 일어나는 “기적”을 바라면서도 영감의 병상황으로 보아 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아주 희박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더는 망설일 것이 없이 그 “예장함의 쌀”을 터뜨려 영감한테 쌀죽이라도 끓여 대접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그 “예장함의 쌀”을 터뜨려 쌀죽을 끓일 때마다 흘린 눈물이 죽속에 떨어져 말그대로 쌀죽보다는 “눈물죽”으로 될 때가 많았다고 한다. 한편 용환 영감이 투병생할을 하고 있는 동안 연변위생연수학교에서는 전문간호원을 배치해 주려 했으나 용환 영감이 거절했고 순자 역시 영감을 남한테 맡기고 싶지를 아니했다. 아무리 유능한 간호원이라고 해도 마누라인 자기보다 나을 수가 없다고 인정했기 때문이었고 용환 영감도 이에 아주 동감인듯 했다. 영감을 간호하는 동안 순자는 늘 영감의 머리맡에서 신문을 읽어주고 방송에서 들은 얘기를 들려주군 했다. “당신한테 참… 미안하구려.…당신은 그 옛날부터 …나한테 모든 것을 희생했고 오늘까지도 …” 룡환령감은 병석에 있으면서 자주 이러한 말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 불편한 입을 실룩거리며 노래를 불렀는데 생각밖으로 그 노래는 한국에서 한시기 많이 유행됐던 비교적 신식노래인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였다. 젖은 손이… 애처로워 살…며시 잡아본 순…간/ 거칠어진… 손마디가 너무나도… 안타까웠소// 시린 손끝에 뜨거운… 정성 고이 접어 다져온… 이 행복/ 여민 옷깃에 스미는 바람 … 땀방울로 씻어온 나날들// 나는 다시 태여나도… 당신만을 사랑하리라 …… 알고보니 영감은 언젠가 한번 어느 한 모임에서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를 듣고는 그 노래를 부른 사람한테 졸라서 그 노래의 가사를 베끼였으며 그뒤 일부러 몇번 혼자 친구의 딸이 운영하는 노래방을 다니면서 배웠다고 했다. 그랬다. 세상에 하많은 사연들중 김용환/김순자 노부부의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순자의 헌신정신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일찍 용정에서의 꿈많던 처녀시절 교원으로 될수 있는 절호의 기회마저 포기하고 용환청년과 백년가약을 맺었던 순자ㅡ 그 후 이들 부부는 수십년간의 풍운조화를 겪으면서 살아왔다. 국내해방전쟁, 공화국창건, 자치주창립, 반우파운동 및 전대미문의 문화대혁명…이렇게 희로애락속에서 어느덧 이들 노 부부의 사랑은 세기를 뛰어 넘어 2000연대에까지 이끌어 왔다. 그래서일까? 용환영감의 병문안을 왔던 노인들 거개가 순자의 지극한 정성에 감동된 나머지 자기들의 만년도 용환 영감과 같은 팔자로 되였으며 좋겠다고 했다. 또한 모두들 사람의 팔자에서 마누라보다 먼저 저승으로 가는 것이 상팔자고 마누라를 앞세우고 자식들의 손에서 저승으로 가는 것이야말로 불행중 가장 큰 불행이라고 한결같이 입을 모았다. 남정들한테 있어서 마누라는 엄마와 같은 존재라고 말하는 영감들도 있었다. 그렇게 말하는 노인들에 따르면 아무리 박식하고 유능한 남정이라고 해도 어리석으면서도 철부지같은 단순한 심리가 있기에 어려서는 낳아준 어머니의 손길을 닿아야 하고 나이가 들어 사회생활에 투신하면서도 함께 사는 아내앞에서는 어리궂게 놀기 마련이며 특히 늙고 병들고 외로울 때면 더욱 아내앞에서 아기처럼 된다는 것이었다. 3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새파란 잔디엮어 지은 맹세야// 세월의 꿈을 실어 마음을 실어/ 꽃다운 인생살이 고개를 넘자… 어느날 순자는 잠자는 영감의 모습을 내려다 보다 문득 그 옛날 둘이서 손잡고 마을 뒤산의 숲속을 거닐던 때가 기억에 떠올라 그때 함께 부르던 노래 “낙화유수”를 조용히 부르다가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잠자는줄로만 알았던 영감이 번쩍 눈을 뜨며 그 노래를 계속 불러 달라고 했다. 기실 영감은 자지 않았으며 눈만 감고 있을뿐이었다. 자기가 눈을 뜨면 마누라가 부르던 노래를 멈출가봐서였다. 순자는 옛기억을 더듬으며 계속 노래를 이어갔다. 이 강산 흘러가는 흰구름속에/ 종달새 울어울어 춘삼월이냐// 홍도화 물에 어린 봄마루에서/ 행복의 물새 우는 봄으로 가자 사랑은 낙화유수 인정은 봄이라/ 오늘도 가는 곳이 꿈속이더냐// 영춘화 야들야들 피는 들창에/ 이 강산 봄소식을 편지로 쓰자 …… 노래를 듣고있던 용환 영감의 눈빛은 생기가 돌았다. 영감은 순자의 손을 살며시 잡아 주었다. 그러고는 떠듬거리며 노래 한곡조를 뗐다. “고향산기슭에…올라서니 사철푸른 …소…나무 반겨주고…” 그러자 순자도 따라불렀다. 고향산기슭에 올라서니/ 사철푸른 소나무 반겨주고/ 장원들 노래소리 들려오누나/ 아 사랑스런 산천아/ 아 내 정든 고향이여/ 조국의 변강이여…… 오막살이 우리 집에도/ 광명한 새아침 닥쳐왔다네// 에라 좋구나 에라 좋구좋다/ 새로운 우리 살림 꾸려보세 … …… 이렇게 노래를 부르는 순자의 추억은 어느덧 그 옛날 고향마을의 그 뒤동산으로 나래쳐갔다. …… 그날 교원초빙통지서를 갖고 화룡 서성구로 가다가 용환 총각한테로 다시 발길을 돌린 순자는 끝내 교원에 대한 꿈을 포기하고 용환 총각과 백년가약을 맺으리라 맘속으로 다졌다. 그날 둘은 고향의 뒤산에 올랐다. “순자, 난 모든것이 꿈만 같구려. 순자가 글쎄 있는 밑천이라고는 이 한몸뚱아리뿐인 나한테 마음의 쪽문을 열어주다니 말이요. 정말 고맙소. 나 영원히 오늘을 잊지 않으리다.” “그런 말 마세요. 전 그냥 저의 마음이 내키는대로 했을 뿐이예요.” 용환이는 순자를 꼭 끌어안고는 앞날에 대한 무한한 동경에 취해 갖고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가 바로 “낙화유수”였다. 순자 역시 행복감에 푹 젖어들었다. 그 순간 하늘의 해빛은 찬연하였고 바람도 잔잔하였다. 다람쥐 한마리가 그들을 발견하고는 흠칫 놀라며 저 멀리 달아났다. 둘은 온세상을 차지한듯 오래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김소월이 시에서 쓴 것처럼 그대로 굳어져 바위로 된다고 해도 좋을 것만 같았다. 미구하여 침묵을 깬건 그래도 용환이었다. 잠시나마 취해있던 꿈에서 깨여나 이지를 회복한 모양이었다. “순자, 앞으로는 어떻게 할 타산이요?” “전, 그냥 당신의 뜻에 따르겠어요. 당신은 당신의 뜻대로 그냥 공부를 하세요. 제가 뒤받침을 해줄게요. 전 아무래도 좋으니 당신만은 꼭 성공할거예요.” “그래? 고맙소. 난 순자만 있으면 더없이 행복하며 온 천하를 얻은거나 마찬가지요.” 그 날 두사람은 서로 껴안고 무한한 행복의 무드속에 푹 잠겼다. 둘은 자기들의 젊음이 영원한 것을 바랐고 또 그럴 것이라 믿기도 했다. 둘은 해가 서산에서 져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해서야 산에서 내려왔다. 집에 들어서니 어머니 윤씨가 씨암탉을 잡아 솥에 앉히고 있었다. (다음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5-08-02
  • 오묘한 세계대백과(38)조석이 형성된 비밀
    고대에 사람들은 낮에 물이 불어나는 것을 “조”라고 했고 저녁에 물이 불어나는것을 “석”이라고 했다. 조수는 마치 놀기를 좋아하는 아기마냥 쉼없이 뛰논다. 그럼 바다물은 왜 “조”와 “석”이 있을까? 지구와 태양 그리고 달 사이에는 모두 일종 흡인력이 있다. 평시에 태양이 지구와 비교적 멀리에 있기에 흡인력도 작아져 별로 큰 작용을 하지 못하지만 달, 지구와 태양이 직선으로 위치해있을 때는 태양과 달이 모두 지구상의 바다물에 대한 흡인력이 산생, 둘의 흡인력이 중첩되면서 바다물이 불어나는 현상이 생긴다. 그리고 달과 태양이 지구와 직각을 형성할 때는 둘의 흡인력 작용의 방향이 다르기에 흡인력이 서로 아주 약하므로 이럴 때는 작은 조류가 생긴다. 큰 조류는 일반적으로 음력의 초하루와 15일, 작은 조류는 일반적으로 음력 초이레, 초여드레 혹은 22일과 23일 이렇게 매달 두번씩 나타난다. 조석은 일종 자연현상으로서 인류의 항해, 물고기잡이와 소금말리기에 편리를 제공한다. 조석은 또 전기에너지로 변하여 사람한테 광명과 동력을 제공하기도 한다. 조석의 발전은 일종 잠재력이 큰 사업으로서 다년간의 실천을 경과하여 이미 대규모 개발이용 단계에 진입했으며 발전전경이 아주 유망하다. 동포투데이 김민 기자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5-08-02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