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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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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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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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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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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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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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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룡 칼럼]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한국 이념논쟁
●김정룡(다가치 포럼 대표) 현시대 유명 정치학자로 손꼽히는 하버드대학교 샤무엘 헌탕턴 교수는 1996년 저서 『문명의 충돌』을 출간했다. 책이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로 반응이 뜨거웠다. 그는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2년 후 소련이 해체됨에 따라 냉전 시대가 종말을 맞았다. 냉전 시대 인간은 대체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진영의 이념에 각각 속해 있었다. 냉전이 종말 된 미래사회에서는 이념이 무의미해졌고 따라서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갖게 되면서 다른 귀속처를 찾게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귀속처가 바로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라고 제시하였다. 그가 말한 귀속처는 새로운 문명이 아니라 과거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실제로 탈냉전 후 지구촌의 인간무리들은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에로 재편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중국의 경우 개혁개방 전 해외 화교 화인들 중 고국을 못 마땅해하는 사람들도 개혁개방 이후 즉시 돌아서서 고국에 투자를 서슴지 않았다. 아세아 최고 부자 리카싱(李佳成)이 투자에 나서자 주변에서 ‘사기당하면 어쩌냐?’고 말리자 그는 ‘사기당해도 고향사람들에게 당하는 것인데 사기라 생각하지 않고 도와주는 것이라 여길 것이다.’라고 말했다. 재벌은 남다른 배포가 있는 법이다. 싱가포르 리콴유(李光曜) 전 총리는 본래 반공자였다가 개혁개방 이후 유교 전도사를 자칭하고 나서 중국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이것이 바로 이념을 탈피하여 민족문화에로 회귀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2008년 북경올림픽 개막식 주제가 공자였는데 이것은 전통문화에로의 회귀를 뜻한다. 1990년 초 동구권에서 있었던 코소보 인종청소 전쟁은 종교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아무튼 세상은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흘러가고 있는 추세이며 이미 새로운 역사 흐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지구촌의 흐름을 역행하는 곳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한반도이다. 동서 독일이 통일되고 남북 베트남도 통일되어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문화로 굴러가고 있다. 오로지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은 것은 남북한이다. 1990년 베이징아세아게임 때 한국관광객이 대량 백두산투어에 나섰다. 그때 한국여행사 에스코트 00사장이 한 말이 지금도 뇌리에서 생생하게 맴돌고 있다. “참 세월이 놀랍게 변했어요. 우리가 중국 땅을 밟으면서 백두산 구경을 할 것이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현실로 되었어요. 이 추세대로라면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남북통일도 10년이면 되지 않겠어요!” 그 후 2000년 김대중 대통령께서 북한을 방문하자 매체들이 ‘10년 안에 통일이 이뤄질 것’처럼 떠들었다. 그런데 그 후 강산이 두 번 변하고도 3년이란 세월이 흘러가고 있는 현재 남북통일이 가까워지기는커녕 점점 더 요원해지다못해 요즘은 아주 적대관계가 심각해지고 있는 중이다. “가장 중요한 게 이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일전에 국무회의에서 한 발언이다. 시중에서는 모두 뜬금없는 발언이라고 하기도 하고 때아닌 이념타령이라고 공격하기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이 발언이 확실히 케케묵은 이념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이게 무슨 시대인데 아직도 이념타령이라니? 역사를 거스르는 행위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요즘 한국 사회는 홍범도 장군의 정체성을 갖고 논쟁 중이다. 양 진영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으로 부질없는 일이다. 1943년 홍범도 장군이 사망할 당시에는 침략당한 약소국가들에서 나라마다 민족주의가 우선이지 이념과 사상이 우선 과제가 아니었다. 강대국들도 마찬가지로 이념을 떠나 미국과 소련이 협력하여 반파시스 전쟁에 돌입하였다. 홍범도 장군이 소련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은 사실이나 오늘날 이념논쟁을 일으킬 사안이 아니다. 한국 정치는 할 일이 하도 없어서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안타깝다. 문제는 왜 윤석열 대통령이 이념을 최대 이슈로 들고나왔는지? 맥락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 일부 진영에서는 아직도 빨갱이타령이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다. 종북좌파타령을 70년 동안 벌여오다가 요즘에는 종북좌파 타령이 질리기도 하고 그 실체도 주목을 받기가 조금 약발이 떨어져 친중좌파 공격으로 방향을 틀고 화살을 돌리고 열을 올리고 있다. 필자는 얼마 전에 한국 지인의 소개로 한국 엘리트들이 참여하고 있는 카톡방에 가입한 적이 있다. 카톡방은 흔히 그렇듯 좋은 정보도 나누고 서로 필요한 교류도 하고 인맥도 넓히고 등등 좋은 점이 많다. 하지만 인간무리에는 취향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인데 그 취향이 정치적인 성향이 강하면 골머리가 아파난다. 어느 한 분은 윤석열 대통령을 찬양하는 ‘윤비어천가’를 올렸는데 조선 창시자 이성계를 찬양한 ‘용비어천가’를 저리 가라 할 정도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수령을 찬양하는 ‘어천가’보다 훨씬 뛰어난 솜씨로 현직 대통령을 찬양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통령을 이렇게 신을 찬양하듯 하는 것을 처음 본다. 일각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문재인 전 대통령을 평가하는 기준이 극명하게 나뉘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문재인은 빨갱이고 북한 간첩이다. 나라를 북한에 팔아 먹는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사고방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아무리 좌파 성향을 지닌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설마 나라를 팔아먹을 수가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그들은 상식을 벗어나 비합리적인 주장을 하면 이에 동조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억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 친미를 확실하게 하면 다른 분야가 조금 떨어지더라도 문재인처럼 나라를 팔아먹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그들에게는 굳건하게 박혀 있다. 윤석열 대통령을 신을 찬양하듯 하는 행위는 필자와는 하도 상관없는 일이라 개의치 않고 그냥 넘겨버리고 말았는데 다음 일은 도무지 지나칠 수가 없었다. 기름 개구리를 산 채로 끓는 기름에 넣어 튀기다가 물을 넣고 끓여 먹는다. 한 분은 친중좌파들을 개구리 산 채로 튀겨먹고 끓여먹듯이 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머리카락이 곤두설 지경으로 정신이 아찔해졌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그만이라는 속담이 있다. “미친 아낙네의 악담보다 더 저질스럽다.”는 말을 남기고 나가기를 해 버렸다. 종북좌파 타령이나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친중좌파 타령이든 모두 같은 이념타령이다. 이런 이념타령이 시중에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고 그 세력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대통령의 이념논쟁을 때가 아닌 것이라 하거나 뜬금없는 일이라는 지적은 헛발 짚는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편 한국사회에서 아직도 공산주의 빨갱이 타령이 심각한데 진짜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자가 얼마나 될까? 의문이다. 무엇을 대상을 공격하려면 그 대상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나서 공격해야 마땅하나 한국에서 공산주의 빨갱이 공격은 실체를 모르는 막무내식이어서 안타깝다. tvn방송에 <어쩌다 어른>이라는 강연프로그램이 있다. 몇 년 동안 출연을 가장 많이 했던 최진기 강사가 있었다. 그는 자칭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이다. 액면 그대로 믿기로 하고 그가 이해하고 있는 공산주의란 무엇인지? 알아보자. 마르크스의 노동 분배 원칙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이다. 최진기 강사는 이 공산주의 핵심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마르크스는 아마 아버지가 돈을 벌 능력이 있고 그 돈을 자녀가 학비로 사용하는 케이스에서 힌트를 얻어 내놓은 이론일 것이다.” 이어서 그는 유명 스타 연예인 강동원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사람을 어떻게 수요에 의해 분배할 것인가?”고 희죽거리면서 공산주의를 형편없는 애들장난처럼 매도하고 조롱하는 것이었다. 만약 공산주의가 최진기 강사의 말처럼 그렇듯 유치한 것이라면 어떻게 지구촌 반 되는 인간무리가 추종했겠는가? 능력에 따라 일한다는 것은 인간이 고도의 의식을 갖추면 타인의 능력과 비교하지 않고 또 타인의 노동기여도와 비교하지 않고 나의 능력껏 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은 공산주의사회는 물질이 풍부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되어 불필요한 물질을 탐내지 않고 사치를 탐내지 않는 전제하에서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것을 의미한다. 요점은 물질이 풍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된 사회에서 실천가능한 원칙이라는 것이다. 빨갱이 뜻은 사상이 빨갛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필자의 부친은 평생 당지서를 맡았는데 사상이 붉다못해 둘째 아들이 휴학하는 해에 참외 밭을 대신해 보게하고는 아들이 생산대 참외를 먹었다고 하여 장부에 가을에 떼어내게 기입해 놓았다고 한다. 필자가 자랄 때 동네 어른들이 늘 저한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너의 부친은 진짜 빨갛다.’는 말을 반복했다. 최진기의 자칭 최고 강사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의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이 수준이라면 진짜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자가 얼마나 될까?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 서강대 00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산주의는 제도로서 실천은 실패했지만 그 이념과 사상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분단국가로 존재하고 이직도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있는 이 민족의 현실. 언제 가야 통일되고 하나가 되어 부질없는 다툼에서 벗어날 것인지? 민족의 운명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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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핵폐수 해양 방류 시작과 과정 그리고 결과는?
● 철 민(논설위원) 한·중·일 해양 안전 문제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신경전을 벌였던 일본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처리 문제가 24일 일본 정부의 바다 방류 개시와 더불어 또 새로운 논쟁거리를 몰아오고 있다. 우선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행위를 두고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나라들로는 일본의 이웃 국가들인 중국과 한국(정당과 사회단체 등), 북한 등과 거리가 멀지만, 남태평양 도서국의 반발도 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은 후쿠시마 오염수가 바다로 흘러들기 시작해서 240일이면 중국 연해에 도착한다며 정부로부터 국민 매 개인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방류 결정을 국제 공공의 이익을 무시하는 극단적으로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고 있다. 한편 중국 정부는 일본산 수산물 수입의 전면 중단을 발표하였다. 한국 언론도 한국의 여러 해산물 시장이 거의 텅 비어 있어 어부들은 미래의 생계를 걱정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24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제주도 동문어시장에서 20년 넘게 해산물 장사를 해온 한 상인은 “예전에는 오전 10시경과 오후 5∼7시(두 시간대)에 장사가 안될 때도 시장은 붐볐지만, 요즘은 손님이 없는 텅 빈 고속도로”라며 “코로나19 기간에는 장사가 더 잘됐다”라고 우려했고 한국 서부 해안 도시 군산 출신의 한 어민은 “내일 해산물 경매장에 간다고 생각하니 답답하다”라며 “해산물 소비량이 4분의 1로 줄었고 가격도 더 낮아질 것 같다”라고 탄식했다. 부산종합어시장에서는 조기 한 박스가 보통 4만 원 또는 5만 원에 팔리는데, 전국 해산물의 약 30%가 이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이번 주 수요일(23일)에는 조기 한 박스가 정상가의 절반 이하로 판매되었으며, 한국인들의 주요 해산물인 멸치는 평소보다 10~20% 정도 가격이 저렴하게 판매되었다. 24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담화문을 발표하여 일본이 이날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방류를 개시한 것은 지구 생태환경을 파괴하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면서 핵 오염수 방류계획을 강행하는 것은 자신들의 사욕을 위해 인류에게 핵 재앙을 초래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반인도적 범죄행위라고 주장했다. 이외 후쿠시마 핵 오염수를 바다로 방류하기로 한 일본의 결정을 알게 된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에 있는 한 비정부기구가 공개적으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반대하는 글을 올렸으며 또 피지 수바에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시위에 나서기로 했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은 해외의 국가와 사회단체의 규탄은 물론 일본 자국 내 어민 단체와 국민의 반발을 사고 있다. 특히 1945년 원폭 피해자 후손들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나섰다. 교도통신은 24일 원폭 피해자 후손들로 구성된 일본-전국 원폭 피해자 2세 단체 연락 협의회가 나가사키시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후쿠시마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항의했다고 전했다. 이 단체는 원자폭탄의 피해자인 히로시마가 견딜 수 없다며 성명을 발표했고, 이 성명은 총리 관저에 우편으로 발송됐다. 성명은 “원폭 피해자 2세들은 부모들이 방사능 영향으로 고통받는 것을 오랫동안 목격했고, 자신들도 유전적 영향을 배제할 수 없어 건강을 염려하고 있다”라며 “정부와 도쿄전력이 책임을 지고 육상에서 보존·관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외에도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이루다 나열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고도 높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은 국제원자력 기구(IAEA)의 감찰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IAEA의 권위성과 전문성은 인정하지만, 이 기구의 분석과 결론 모두를 믿는 건 아니다. 특히 IAEA 역시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에 대해 명확한 지지 혹은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도 않았다. IAEA 역시 사상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수치나 분석을 통해서는 함부로 결론을 내릴 수 없은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모든 일이란 시작이나 과정을 통해서는 어떤 결과가 나타나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례로 1945년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전에는 그 위력이 그 정도로 강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자료도 있다. 다음 우리는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 더군다나 믿을 수 없다는 추리가 나온다. 일본인을 두고 말하자면 좋게 말하면 “총명하다”하고 할 수 있지만 다른 각도로 말하면 “잔머리를 잘 굴린다” 혹은 “비열하고 간교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은 조선과 중국 그리고 기타 태평양 지역 국가와 지역에 큰 피해를 주었다. 그것도 아주 음융하고 비열하고 잔혹한 수단과 명분 등으로 말이다. 조선 왕조의 명성황후 음해 사건, 중국 대만 강점과 한일 합방 그리고 지난 세기 30~40년대 조선에서 위안부를 모집할 때는 “방직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등 감언리설로 순진한 소녀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고 1920년대 말의 만주에서의 황구툰(皇姑屯) 사건과 루거우차오(卢沟桥) 사건 등을 분석 조명해보면 당시 일본이 강하다기에 앞서 음흉하고 뻔뻔스럽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 시 일본은 한편으로는 미국과 담판함과 아울러 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일본을 함부로 믿어서는 큰 코 다친다는 분석도 함께 나온다. 종합적으로 일본을 평가하면 일본인의 겉면을 보면 예의가 바르고 친절하고 생활이 아주 규칙적으로 보이지만 일본인의 속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겉과 속이 같은 한국인과는 달리, 웬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중국인과는 달리 또한 거만하지만 우쭐대지는 않는 서양인들과는 달리 일본인한테는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피해국에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역대의 독일 총리들과는 정반대로 일본은 오늘 현재도 기나긴 침략 역사에 대해 사과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교과서까지 뜯어고치면서 군국주의의 침략사를 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두고 각국은 여러 가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강경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중국과는 달리 미국은 지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고 한국 정부는 “지지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입장으로 나오고 있다. 여기서 미국은 태평양을 사이 두고 일본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속 궁리가 있는가 하면 다른 일종의 전략이 내포되어 있을 수도 있고 한국은 자국민들한테 미칠 손실보다는 일본과 정부 사이의 마찰을 우려하는 듯한 양상이다… 한편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에 대해 지금 과학적이고 안심할 수 있다는 학술적 수치는 있으나 그 영원성을 장담하는 언사는 한 마디도 없다. 어찌 됐든 일본의 핵 오염수는 방류하지 않는 것이 방류하는 것보다는 ‘명지한 선택’이라 보여지며 방류하는 것으로 나쁜 결과가 있을지언정 반대로 좋은 결과는 제로라는 것만은 분명한 것이다. 가령 앞으로 방류 과정에 혹시라도 일본 자국 혹은 주변국들에 피해 사례라도 발생한다면 그때 가서 아무리 미국이나 국제원자력기구라 해도 결코 일본을 위해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며 일본이라는 이 섬나라의 위망은 일락 천장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서기 2023년 8월 24일, 이날은 인류 역사상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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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무주지(無主地)’ 섬이 아니었다.
● 김정룡 (多가치포럼' 대표) 민간속설에 ‘이웃이 먼 사촌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가령 이웃집에서 경사가 생기면 함께 기쁨을 나누고, 안 좋은 일에는 같이 슬픔을 나누고, 급한 일이 생기면 이웃이 가장 먼저 달려와 돕는 등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삶을 영위해온데서 생겨난 속담일 터. 민간백성들의 삶은 대개 이웃끼리 화목한데 비해 한 사람, 한 사람으로 구성된 국가의 경우 이웃나라끼리 사이는 그다지 화목하지 못하다. 바다를 사이 두고 이웃으로 살아온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으로 좋은 때도 있었지만 서로 반목하는 일들이 더 많았고 지금까지도 해묵은 갈등들이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있는데 그 가운데서 독도의 영유권 문제, 종군위안부 문제, 일본전범기업 강제징용 배상문제 등이 주요 쟁점으로 꼽힌다. 최근에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가 새로운 갈등으로 부상하여 오랜 갈등들에 얹어져 가뜩이나 썰렁한 냉기를 더욱 차갑게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남아 내려온 갈등도, 새로 생겨나고 있는 갈등도 모두 일본 측의 책임이 크건만 정작 일본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후안무치한 태도를 보이고 있어 아주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어느 한 착실한 역사학자의 통계에 의하면 한반도는 서너 차례 모자라는 1천 번의 침략을 당해왔다고 한다. 무려 1천 번이나 침략을 당해왔으나 남을 침략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하니 얼마나 착한 민족인가? 누구인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백의민족은 맞기만 하고 때릴 줄 모르니 선천적으로 DNA에 문제가 있다”고. 아무튼 그 1천 번 가운데서 일본의 침략이 다수였다. 일본은 지진이 많고 태풍이 많기로 지구촌에서도 이름난 곳이다. 게다가 땅이 척박하여 먹을 것이 늘 부족했다. ‘제집’ 내에서 해결책이 안 보이니 눈을 ‘옆집’에 돌릴 수밖에 없었다. 남의 것을 빼앗아오는 약탈행위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가에 왜구의 노략질이 들끓었다는 얘기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곡식도 빼앗고, 옷도 강탈하고, 여자도 납치해가고 등 눈에 보이는 쓸 만한 ‘물건’이면 전부 빠트리지 않고 싹쓸이해갔다. 백의민족의 전통인사말은 ‘무사한가?’인데 그 유래가 바로 빈번한 외침을 당한데서 생겨난 것이다. 일본은 왜구의 노략질도 빈번했을 뿐만 아니라 정부차원의 침략도 감행하였고 그 궁극적인 목적은 한반도 식민화였다. 1592년 풍신수길이 발동한 임진왜란이 좋은 근거이다. 명나라 조선 파병 때문에 일본이 임진왜란에서 실패했으나 그 후 결코 한반도 식민화 정책은 포기하지 않았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조선정부는 청나라와 일본을 불러들인 것이 화근이었다. 큰 전쟁을 피하고자 조선정부는 동학농민운동 측과 협상하여 평화적인 해결책을 마련하고 청나라 군과 일본군 모두 철회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모처럼 좋은 기회를 만난 일본이 철회할 리가 만무했다. 청나라와 군대 철회로 갈등을 빚다가 드디어 무력충돌이 발생하였고 그것이 바로 ‘중일갑오전쟁’이다. 일본을 ‘쌰오르번(小日本)’으로 하찮게 여겨왔던 청나라가 생각 밖으로 일본한테 패배한다. 조선을 청나라 속국에서 벗어나게 하고 ‘독립문’까지 세워준 일본이지만 정작 조선은 독립을 하지 못하고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만다. 호랑이가 나간 자리에 승냥이가 들어온 셈이었다. 일본은 강대했던 청나라를 물리쳤으나 또 다른 강대한 적인 러시아와 맞붙어 싸워 이겨야 만주와 조선에서의 이권을 모두 독차지할 수가 있었다. 1904년 일본은 한반도에서 자기네가 마음에 드는 곳에 어디든 군사기지를 세울 권리가 있었다. 러시아와 맞붙으려면 동해바다 섬에 군사기지를 세울 필요가 있었다. 하여 일본의 레이더망에 독도가 들어왔다. 1905년 일본은 독도를 ‘무주지(無主地)’라 주장하면서 영토편입을 시도하고 시마네현(島根縣)에 지방고시를 알린다. 남의 나라 땅을 침략하고 그 땅을 ‘무주지’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드는 수법은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을 식민지화 하는 과정에서 활발하게 써 먹었던 수법이었다. 즉 일본이 유럽열강들한테서 배운 것을 조선침략에 활용했다는 뜻이다. 독도는 1905년 전에 과연 ‘무주지’였을까? 아니다. 마찬가지로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에 이르는 곳마다 모두 ‘무주지’ 땅들이었을까? 아니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무주지’라 주장하는 것일까? ‘발견자우선주의’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활용했던 것이다. ‘발견자우선주의’의 본뜻은 최초로 발견한 사람들이 소유 우선권이 있다는 의미인데 백인들이 아메리카 땅을 발견하고 개척할 당시 수많은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다. 결코 백인들이 최초의 발견자가 아니다. 분명히 그 땅엔 인디언이라는 주인이 이미 있었다. 해가 지지 않는 식민지를 개척한 그 땅들에 주인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이미 오래 전부터 발견하고 삶을 영위해온 원주민들이 거주해왔다. 그렇다면 왜 유럽열강들이 ‘발견자우선주의’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들었을까? 주인이 이미 있었는데 ‘무주지’라 주장하고 거기다 한 술 더 떠 ‘발견자우선주의’를 떠드는 근거는? 유럽열강들은 지구촌 곳곳에 살고 있는 인류 집단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그 땅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3C’ 즉 기독교(Chrisianity), 문명(Civilization), 상업(Commerce)을 통해 식민지 정복을 정당화했다. 1455년 교황 니콜라오5세는 아프리카 서쪽 해안의 영토에 대한 포르투갈의 권리를 승인했다. 최초의 탐험시대부터 이미 그 땅에 인류가 살고 있든 말든 국가가 있든 말든 유럽열강들 중 그 누가 먼저 그 땅에 도착하면 자기네들이 주인이라는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를 적용했던 것이다. 독도는 1905년 이전에 조선의 소유이고 조선이 영유권을 갖고 있다는 역사적인 증거는 충분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산업혁명과 식민지개척 공부에 가장 모범생이었던 일본이 서구열강들이 식민지 개척 과정에서 정당화로 써먹었던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 무기를 휘둘러 독도 영유권을 시마네현에 편입하는 고시를 알리는 수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있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있을 때 일본 소유로 편입되었던 것들을 바로 잡는 조항에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등 제도들이 조선의 영유권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조선의 지리는 육지와 3170 개 섬으로 구성되어 있어 섬마다 일일이 모두 표기할 수가 없었고 그때 독도가 빠져있었던 것을 일본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있다. 즉 이것 때문에 일본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한국정부가 독도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군대가 주둔하여 관리하고 있다. 6.25 전쟁 때 한국군 36명의 용사가 독도를 굳건하게 지켜냈고 지금까지도 한국이 독도에 주둔하고 관리하고 있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존재의 일차적인 이유는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다. 2016년 세월호사건과 지난해 10월 발생했던 이태원참사사건에 전체 국민이 분노하는 이유가 바로 정부가 국가의 존재이유를 방기했다는 것이다. 다음 자국의 영토를 지키는 것도 국가존재의 주요 이유이다. 영토를 잃는 것은 안전을 잃어버리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기 때문이다. 한국정부의 독도에 대한 입장은 다음과 같다. “독도는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으로 명백한 우리 소유의 영토이다. 독도에 대한 영유권 분쟁은 존재하지 않으며 독도는 외교 교섭이나 사법적 해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확고한 영토주권을 행사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어떠한 도발에도 단호하고 엄중하게 대응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독도에 대한 우리의 주권을 수호해 나아간다.” 다만 걱정이 하나 있다. 일본정치주류세력인 우익이 줄곧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주장에 대해 올해만 세 번 한일 양국정상이 만난 자리에서 아무 언급도 없었다. 윤석열 정부의 과거사를 묻지도 따지지도 말자는 대일외교방침 때문일까? 일각에서는 이대로 나아간다면 일본이 독도를 완전히 빼앗아가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공동관리 주장을 들고 나오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한다. 독도분쟁은 대한민국의 자존심 문제이다. 자존심을 잃으면 나라의 존재이유가 사라질 만큼 국민의 사기가 저하된다. 그러므로 독도만은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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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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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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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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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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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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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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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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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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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는 한국인인가?
-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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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는 한국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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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365일 중국여행 포토시리즈(3)
- 중국 황하 후커우(壶口)풍경구는 국가급 풍경명승구이고 국가 4A급 관광구이고 국가지질공원이다. 후커우 풍경구는 동쪽으로는 산시성 린펀시 지현 후커우진(山西省东濒临汾市吉县壶口镇)과 인접되어 있고 서쪽으로는 산시성 예안시 시촨현 후커우향(陕西省延安市宜川县壶口乡)과 인접되어 있으며 2개 성이 공유하는 관광구이다. 이 풍경구는 타이왠(太原)과는 387킬로미터 떨어져 있고 시안(西安)과는 449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후커우풍경구 대경관인 후커우 폭포는 중국 제2의 대폭포이고 세계에서 가장 큰 황색폭포이기도 하다. 이 폭포는 강수량이 많은 여름철에는 기세가 장관을 이루고 겨울철에는 전반 수면이 동결되면서 보기 드문 거대한 얼음폭포 세계를 조성하고 있다. 후커우 폭포 주변의 암석들은 모두 회녹색과 담홍색을 띠고 있으며 지층이 형성된 대략 2.2억년 전으로 추측되고 있다. 일찍 기원전 770년의 역사기재에 따르면 후커우 폭포는 그 급류가 너무 강하여 북으로 계속 이동, 기원 813년(1583년을 거친 후)에 이르러서는 1660미터나 북으로 이동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매년 북으로 1미터씩 이동한다고 쳐도 이 폭포가 형성된 시간은 약 6.5만년전으로 추측되고 있다. 지형특징 후커우 폭포는 친푸협곡(秦晋峡谷)의 남단에 위치, 협곡 밑의 너비가 400미터가 되던 강폭이 30~50미터가 되고 협곡의 위와 아래 사이의 낙차가 약 150미터가 되면서 폭포가 형성되며 물 흐름량은 초당 1000~3000입방미터에 이른다. 수문특징 후커우 구단에 이르러 황하의 물흐름량은 초당 1000입방미터에 이르고 5~6월이 되면관개계절이 된다. 황하의 물이 가정 적어지는 계벌이 되믄 이 곳의 물흐름량은 초당 250~300입방미터가 되고 우기인 7~9월이 되면 강수량이 많고 평균 물흐름량이 초당 2500입방미터가 된다. 유역개황 지리위치: 황하 후커우 풍경구는 산시성 지현 서부에 있으며 지리적 위치는 북위 36. 810도, 동경 110.264도이며 해발 448미터이다. 후커우 풍경구는 후커우 폭포를 중심으로 북으로 마펀탄(马粪滩), 남으로 쇼쵄요(小船窝)이 있고 서쪽으로는 협곡지역이고 동쪽으로는 인조산(人祖山)이 있으며 총면적은 100 제곱킬로미터가 된다. 기후: 후커우 풍경구는 평균 해발 958미터에 위치, 고원 대륙성 중온대 난온대 계절풍의 영향을 받으며 북부는 건조지대에 속하고 남부는 반습윤지대에 속하며 남부와 북부의 차이가 현저하다. 연평균 기온은 9.9도로 사계절이 분명하고 겨울이 춥고 시간이 길며 가장 추운 1월이면 평균 최고 기온이 2.2도이고 최저 기온은 영하 11도까지 내려간다. 주요 관광경관 멍먼산(孟门山): 멍먼산은 후커우폭포 하류의 5킬로미터 되는 지점에 위치, 황하 가운데에 형성된 섬이다. 이 섬은 길이가 약 300미터가 되고 너비가 약 50미터로 높은 곳은 수면과 10미터의 차이가 있다. 섬에는 거형의 거부기 조각상이 있어 일종 신비로운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룽둥(龙洞): 룽둥은 후커우 폭포의 서쪽으로 지현 방향에 있으며 천연적으로 형성된 동굴이다. 십리룽후(十里龙壕): 십리룽후는 후커우 폭포에서 약 5킬로미터 지점에 있다. 이 곳은 400미터 너비가 되는 협곡의 가장 아래부분에 위치, 전설에 따르면 이 곳은 용의 몸을 관통하는 지대라 하여 “십리룽후” 혹은 “십리룽차오(十里龙槽)” 명명되었다고 한다. 동포투데이 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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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365일 중국여행 포토시리즈(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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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와 함께 숨쉬는 사람들(7)
- 우리는 작은 배를 타고 전복사육장으로 향발했다. 청산도의 전복사육장은 바닷가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있었다. 전복사육장에 이른 우리는 사육장 이모 저모를 돌아본 뒤 사육장 일군이 건져올린 전복을 생 것 그채로 칼로 썰어서는 초장에 찍어 맛보았다. 물론 한두점씩 맛본 것이 아니라 양껏 먹을 수 있었고 술도 있었다. 나 또한 웬간히 술마시기를 좋아하는지라 또 전복안주가 푸짐한지라 약 반근 정도는 마신 것 같았다. 전복사육장에서 우리는 약 2시간에 거친 체험활동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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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와 함께 숨쉬는 사람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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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35)
- 로마의 서류 소속대륙: 유럽, 소속국가: 이탈리아, 지점: 이탈리아 중부의 타이브강하류의 평원함의: 세계에서 가장 큰 로천박물관 전설에 따르면 기원전 753년에 어미승냥이가 구해주고 키워준 로모(罗慕)형제가 고대로마를 건립, 로마성은 그대로부터 고대로마제국의 발상지로 되었다. 기원전 1세기 로마는 방대한 로마제국의 서울로서 로마의 도시 문화와 건축은 쾌속발전을 이룩, 수많은 신선묘, 성당, 개선문, 기공주(记功柱)와 경기장 등이 건설되었다. 그리고 줄곧 로마제국과 이탈리아의 정치중심이었던 로마는 유규한 역사와 오래된 문화를 갖고 “영원한 도시”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개선문과 만신전 로마의 투수장(斗兽场)서쪽에는 기원 312년 콘스탄틴(君士坦丁)의 개선문이 있다. 콘스탄틴이 강적을 전승함과 더불어 제국을 통일한 것을 경축하여 세운 것이다. 개선문은 세개의 궁문이 있으며 개선문 전반 내외가 많은 조각들로 새겨졌 있다. 주제는 로마제국 각 시기의 중요한 사건들을 취급한 한부의 생동한 로마전쟁사이다. 만신전(万神殿)은 판테온(潘提翁) 신선전이라고도 하며 기원 2세기에 수건됐다. 고대로마 시기의 유일하게 보존돼 내려온 완정한 건축물이다. 만신전은 고대로마의 건축사들이 과학적인 계산방법과 정교한 건축예술을 표현한 건축사상의 기적이다. 잔혹한 투수장 고대로마의 투수장(斗兽场)은 정타원형으로 “대원형경기장”으로도 불리며 기원 80년에 착공, 유태인 전쟁포로 수만명의 신고끝에 10년이 되어서야 비로서 준공되었다. 여기서는 자극을 즐기는 로마귀족들이 야수와 야수, 야수와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서로 잔혹하게 박투하고 죽이는 장면을 구경하던 곳이었다. 그리고 이는 결국 노예계층의 반란을 불러 일으켰으며 고대로마 제국의 신속한 멸망을 초래하였다. 1084년, 게르만 사람들이 로마를 진공하면서 로마는 전쟁의 세례로 한차례 크게 받았고 이 투수장도 폐허로 되고 말았다. 동포투데이 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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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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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묘한 세계대백과(36)
- 중국의 소설 “서유기”에서는 손오공이 자기 몸의 털을 뽑아 훅- 하고 불자 순식간에 수많은 손오공이 나타나는 장면이 있다. 이는 진짜 신기했다. 기실 지금에 와서 생명복제의 기술은 더는 환상이 아니라 이미 현실로 되고 있다. 1996년 영국의 과학가들은 한마리의 양한테서 난세포를 채취하고 또 다른 한마리의 양한테서 유전물질의 보통 조직세포를 채취한 후 하나의 공각(空壳)내에서 결합시켜 하나의 성숙한 난세포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난세포가 실험실에서 배태가 될 때 연구일군들은 그것을 다시 다른 제3의 양의 자궁안에 넣었다. 수개월후 제3의 양은 새끼양 “토리”를 낳았다. 토리는 세계에서 생명복제기술로 태어난 첫 양이었다. “토리”가 다른 양들보다 다른 점이라면 “토리”한테는 “아빠”가 없지만 “엄마”가 셋이 있다는 것이다. 생명복제는 복제, 복사 등으로서 원형의 물체 중에서 똑같은 복제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며 그것의 외모와 유전인자가 원형과 완전히 같은 것을 말한다. 그런데 복제인간은 가능하게 매우 복잡한 사회적 윤리, 도덕 등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 이로 인하여 일부 생물기술이 발달한 나라들에서는 복제인간의 실험에 대해 금지령을 내리거나 엄하게 제한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동포투데이 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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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묘한 세계대백과(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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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33)
- ■ 김철균 1986년에 순자의 남편 김용환은 연변위생연수학교 부교장직에서 물러나 정령 이직을 하게 되었다. 이직전 김용환은 몹시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 그는 1980연대 초 연변위생학교로부터 새로 선 연변위생연수학교 부교장으로 임명돼 전근하였고 그와 중 연변 노간부대학, 연변대학 의학원 통신학부, 연변위생연수학교 등 교육기지를 건립하는 사업에 많이 참여했다. 그러다보니 장춘이나 북경으로 출장다니는 일이 잦았다. 출장이란 30-40대 젊은이들한테는 구경도 할겸, 밖에 나가 안계를 크게 넓히는 일로 여러 모로 유익한 점이 많으나 이퇴직을 앞둔 중노년들을 놓고 보면 가장 힘들고 귀찮은 일이기도 했다. 특히 수십년동안 마누라가 해주는 된장과 김치따위를 먹는데 습관이 된 사람들은 객지생활이 일종 곤혹이나 다름이 없었다. 용환 영감이 출장갈 때마다 순자는 각종 짠지와 김치 그리고 명란젓갈 같은 것을 반찬을 한보따리씩 만들어 보내어 용환 영감 자신뿐만 아니라 함께 출장을 간 여러 일군들이 함께 밑반찬으로 밥맛을 돋구게 하여 항상 엄지손가락을 내들게 하군 했다. 이렇듯 이직전야까지 몹시 바삐 돌아치던 용환 영감은 이직하게 되자 갑자기 모든 것이 허전해졌다. 수십년간 자기가 맡은 사업에 충직하면서 팽이처럼 돌아치던 사람이 갑자기 일손을 놓으면 모두가 그렇게 되는 모양이었다. 한편 돌이켜 생각해 보니 지나온 수십년간 용환 영감은 모든 것을 당과 조직의 배치에 따르면서 사업했다. 자기의 뜻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본 적은 거의 없었다. 말그대로 몸과 마음을 몽땅 조직생활에 바쳤던 것이다. 용환 영감은 이직한 지금부터라도 자기의 뜻에 맞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다시 배우고 해보고 싶었다. 그러자 어떤 노인들은 “이제부터라도 마작이나 사교무를 시작해도 얼마든지 배워낼 수 있다”며 손을 잡아끌었다. 그런 노인들 중에는 이전엔 확실히 규칙적인 생활만 하다가 퇴직하자 바람으로 다른 여러가지 취미생활을 시작한 분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 노인들의 말을 빈다면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또 “인생2모작”이라고 하는 노인들도 있었다. 용환 영감은 여러 가지로 고민했다. 여느 노인들처럼 무도장에 다니면서 이직후의 인생을 즐겨볼가고 생각을 해보았고 오토바이나 한대 갖춰갖고 낚시나 다닐까 하고 생각을 모아 보기도 했다. 무도장과 낚시, 용환 영감은 두가지 취미생활에 모두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두가지 다 재미가 짙은 취미생활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연길시 신흥가두 민부사회구역을 놓고 말하면 행정적으로는 신흥가두에 속하지만 지리적 위치는 연길시 북산가두와 아주 가까운 상황이다. 당시 연길시 북산가두에는 연길시 최초로 발기한 “뇌봉반”이 활약하고 있었다. 용환 영감은 그 “뇌봉반”이라는 그 사회단체에 큰 흥미를 느꼈다. 참 좋은 단체인 것 같았다. 북산가두 “뇌봉반”의 활동은 여러 가지 형식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자선자금을 모금하여 불우 이웃이거나 불우 학생을 찾아가 “사랑의 마음”을 전달하는가 하면 때로는 입을만한 옷견지들을 거두고 식품 따위를 준비해 가지고는 감옥을 찾아가 그 곳에서 복역하는 수감자들한테까지 따사로움을 전달하군 했다. 처음에 순자의 남편 용환 영감은 불우이웃이나 불우학생을 돕는데는 매우 적극적이고 동감이었으나 감옥의 수감자들한테까지 찾아 가는데는 썩 달통돼하지 않았다. “죄를 진 자들은 그 죄값을 치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뇌봉반”에서는 새해를 맞으며 연길시 공안국 노동교화소를 방문하게 되었다. 물론 여러 가지 동복과 식품 등을 푼푼히 준비해 가지고 말이다. 그 날 용환 영감도 순자한테 이끌려 따라가게 되었다. 교화소 내에는 별의별 개조대상들이 다 있었다. 도둑질을 하여 들어온 사람, 집단폭력에 가담했다가 붙잡혀 들어온 사람 그리고 마약밀매를 했거나 마약복용으로 들어온 사람 실로 형형색색 종종별별이었다. 그런데 이상한것은 개조대상들 중 20세 이하의 청소년이 각별히 많았고 그 가운데서도 조선족 청소년이 더욱 많은 비율을 점하고 있었다. 교화소의 책임일군에 따르면 청소년 범죄자들 대부분이 부모가 이혼했거나 양쪽 부모 혹은 한쪽 부모가 외국이나 국내연해지구로 떠난 가족의 자식들인바 이런 “결손가정”의 자식들이 가정의 사랑과 교육이 제때에 따라가지 못해 흔히 기로에서 헤매다가 범죄를 저지른다는 것이었다. 이런 결손가정의 자녀가 범죄의 길에 들어 서는 것을 보면서 교화소의 책임일군은 몹시 가슴이 아파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현재 조선족사회에 “결손가정”이 많은 상황에서 부모들이 단지 돈벌이에만 골몰하지 말고 자식교양에 보다 신경을 기울릴 것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날 용환 영감은 너무나도 애티나는 조선족 애 한명을 붙잡고 이것 저것 묻기 시작했다. “얘, 너 몇살이냐?” “열아홉살입니다.” “집에 누가 있느냐?” “전 집이 없습니다.” “집이 없다니?! 거 웬소리냐? 어디 다시 한번 제대로 말해봐라.” 용환 영감은 흠칫 놀랐다. “아버지와 엄마가 이혼했는데 아버지한테로 가면 아버지가 엄마한테로 가라고 하고 엄마한테로 가면 엄마가 또 아버지한테로 보내군 하여 별 수 없이 이혼한 집 애들끼리 되는대로 살다가 이 곳으로 들어 왔습니다.” “그래 무슨 잘못을 저질렀느냐?” “노래방에 가서 돈을 물지 않아 노래방 주인과 다투다가 몇이서 그 주인을 때려 놓아 병원에 입원까지 하게 했습니다.” “그럼 치료비를 대주면 되지 않느냐?” “아버지와 엄마중 누구도 치료비를 대주지 않아 이렇게 들어 왔습니다. 전 이미 버려진 애랍니다.” 기가 막혔다. 아무리 이혼했다고 그 부모 중 누구도 자식을 돌보지 않다니?! 용환 영감은 한심한듯 혀끝을 찼다. 그날 밤 용환 영감은 순자의 손을 꼭 잡고 의미심장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 가정의 ‘숨은 영웅’은 바로 당신이요. 우리 가정에도 자식이 여럿인데 문화혁명 때 당신은 가정이 그토록 어려우면서도 자식들한테 사랑을 주면서 정말 잘 키웠소. 만약 그 당시 당신마저 흔들렸더라면 우리 자식들한테서도 오늘 낮에 본 그 애처럼 기로에 들어서 범죄를 저지르는 애가 없다고 어떻게 장담하겠소?! 자식이란 뉘집 자식이나 다 마찬가지요. 태어날 때부터 범죄의 길로 나갈거라고 이마에 써붙이고 나온 자식은 없단 말이요.” “당신 말씀 맞수다. 기실 교화소에 들어간 애들 중 적지 않은 애들은 불쌍하우다. 부모의 사랑과 교육이 따라가지 못하여 그렇게 된게 아니겠수? 그러게 우리라도 그런 애들한테 부모들이 주지 못한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요.” 순자의 말에 용환 영감은 동감인듯 머리를 끄덕이면서 앞으로는 가끔씩 교화소 같은 곳도 자주 찾아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한편 의료일군이기도 하였던 용환 영감은 이직 후에도 곧잘 자신의 특장을 발휘하였다. 그는 연길시와 주내 기타 시와 현을 돌면서 영예원과 양로원의 노인들한테 병을 봐주기도 하고 그들과 음식을 함께 나누면서 즐거운 나날을 보내기도 했다. 또한 간혹 자신의 파악없는 병종에 대해서는 자기의 사돈인 정규창 교수한테 소개하여 치료하게 했고 때로는 정규창 교수와 동행하기도 했다. 그뿐이 아니였다. 원래 살던 신흥소학교 동쪽 동네는 물론 새로 이사간 신흥가두 민부사회구역에서도 동네에서 누가 사망하기라도 하면 김용환 영감을 곧 찾군 하였다. 그럴 때마다 김용환 영감은 짜증 한번 내지 않고 상가집의 후사를 처리해주군 했다. 2 연길시 신흥가두 농약공장 부근에는 두부장사로 생활을 이어가는 한족 부부가 있었다. 두부장사란 말그대로 풋 돈벌이었다. 매일 꼭두새벽에 일어나 두부를 앗아서는 남편은 북대시장 부근에 가서 팔고 아내는 두부방에서 팔고 하지만 들어오는 수입이란 얼마 되지 않았다. 거기에 공부하는 자식이 둘씩이나 있다 보니 두 학생의 뒤를 대다 보면 항상 생활을 이어대기조차 빠듯한 상황이었다. 두부장사를 한다지만 그들 부부는 두부도 다 팔고 나머지가 있어야 그 것을 먹군 했다. 다른 육류나 기타 철따라 나오는 남새같은 것은 더욱 사먹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저 맨 밥에 간장을 놓고 먹을 때가 많았다. 순자는 열심히 살아가는 그들 부부가 감탄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측은해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하여 가끔씩 그 한족 부부네 집에 다니면서 일을 거들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반찬거리 같은 것을 사다주기도 했다. 그러자 적지 않은 조선족들은 순자의 이런 거동을 나무람했다. “한족들은 없어서 저렇게 먹는 것이 아니웨다. 그 사람들은 돈이 있어 가지고도 습관상 저렇게 산다우.” 그런 얘기들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수천년을 내려오면서 가난 때문에 아끼고 절약하는 습관이 몸에 밴 한족들이었다. 남들이 잘살아도 그 것을 탐내지를 아니하고 뭔가를 먹고 싶어도 돈지갑을 쉽게 열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개혁개방과 내수촉진의 나라의 경제책략과도 맞지 않게 아끼기만 하다가 나중에는 돈의 가치를 상실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돈을 도자기속에 넣어 땅속에 묻었다가 그것이 몽땅 썩어버린 일, 자식 몰래 돈 만위안을 옥수수 뒤주 속에 감추었는데 후에 그것을 알리 없는 자식들이 옥수수와 함께 돈까지 알곡분쇄기에 넣어 산산히 쪼각이 난 일…이러한 사례가 있는가 하면 또 어느 해 겨울엔가는 연길역 부근에선가 내지에서 왔다는 한 걸인에 동사했는데 그의 몸속에 수천위안의 현금이 감춰져 있었다는 이야기도 한시기 연길에서 화제거리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사례는 조선족보다는 한족들한테서 많이 나타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순자는 두부장사를 하는 그 한족 부부네 사정만은 그 예외라고 생각했다. 그들 부부는 있으면서도 아끼며 간장반찬에 밥을 먹는 그런 유형은 절대 아니었다. 사람이 오래 살면 별 희한한 일을 다 겪게 된다는 말이 있다. 바로 그 두부장사를 한족 부부네 집으로 드나들면서 순자 역시 소설에서나 있을만한 스토리가 있었다. 음력설을 앞둔 어느 겨울날 오후에 있은 일이다. 그 날 순자는 시내에 나갔던 김에 두부장사를 하는 그 한족부부네 집에 들렸다. 음력설이 코앞으로 다가오니 그들 부부를 두고 어딘가 궁금해서였다. 순자가 들어서니 부부는 두부를 앗느라 새뾰얀 김이 서린 가운데 분주히 오갔다. 두부방을 경영하는 이들을 보면 여름철에는 하루에 한차씩 두부를 앗는데 그치지만 겨울철에는 보통 하루에 2차씩 두부를 앗군 했다. 특히 그 당시는 음력설 전야어서 많은 가정들에서 설에 먹을 두부를 미리 사기에 구태여 앗은 두부를 장마당으로 가져가지 않아도 앉은 자리에서 다 팔 수 있었다. 순자가 들어서자 그들 부부는 일손을 멈추며 반색을 했다. “오늘도 몹시 바삐 돌아치는구만.” “예, 음력설기간엔 두부를 하지 않기에 요즘 많이 해놓고 팔지 못하면 뚱뚜포(冬豆腐)를 해야 하기에 말입니다.” “그럼 음력설을 쇨 준비는 다했수?” 이에 그들 부부는 머뭇거릴 뿐이었다. 순자는 벽쪽에 있는 냉장고를 열어 보았다. 아니나 다를가 순자의 예견처럼 소금에 절인 배추와 간장그릇 그리고 역시 소금에 절인 마늘장아찌가 있는 외 아무 것도 없었다. “나 좀 어디에 다녀오리다.” 의아해하는 한족 부부의 눈길을 뒤로 하고 밖으로 나온 순자는 곧추 북대시장으로 향했다. 음력설전야라 북대시장안은 설 쇨 물건을 구입하느라고 사람들로 복새통을 이뤘다. 사람들은 보통 돼지고기 20근, 소고기 20근 그리고 냉동수산물과 과일 등은 박스채로 샀다. 평소엔 극도로 아끼다가도 일단 음력설만 되면 통이 크게 물건구입을 하는 한족들이었으니 시장의 상인들마다 설기간이면 1년 매출액의 50%를 올린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이렇듯 음력설만은 1년간 모았던 돈주머니를 풀어 놓는다는 한족들 풍속이었으나 아직 설 쇨 물건도 구입하지 않고 있는 그 두부방의 한족 부부한테는 확실히 말못할 사연이 있는 모양이었다. 시장에서 순자는 소고기 5근, 명태 5-6마리와 약간의 남새를 사갖고는 다시 두부장사를 하는 한족부부네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많지는 않았지만 그들 부부가 설날 두 자식과 함께 단란히 모여앉아 설을 쇨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순자가 들어서며 시장에서 사온 것들을 내놓자 한족 부부는 너무나도 송구스러워하며 몸둘 바를 몰라했다. “아주머님, 우리 젊은 사람들이 아주머님네 집으로 뭘 사들고가야 하는건데 이게 뭡니까? 번마다 이러시면 우린 어쩝니까?” “나의 적으마한 성의이니 받아주게나. 명태 한마리라도 자네들한테 사주는 것은 모두 마음이 내켜서 하는 것일세.” 이 때 출입문이 열리더니 순자의 남편 용환 영감이 들어섰다. “아니, 영감이 어떻게?!” 놀라워 하기는 용환 영감도 마찬가지었다. 내외가 이 한족 부부네 두부방에서 마주치리라고는 순자나 영감이나 모두 아주 상상밖이었다. 용환 영감의 손에도 비닐꾸러미가 두 개나 들려 있었다. “아주버님, 아까 이 아주머님도 숱한 걸 사왔는데 또 이렇게 사오다니 정말 이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묘한 것은 이 두부방에서 마주치리라고는 두 내외는 물론이었고 이 두부방의 한족 부부도 여태껏 순자와 용환 영감이 내외간이라는 것을 아주 꿈밖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순자와 용환 영감은 서로가 서로를 모르게 이 두부방의 한족 부부한테 도움의 손길을 뻗쳤는데 이는 연변이라는 이 지역사회를 장식하는 민족단결의 아름다운 스토리었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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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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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칼럼] 펄럭이는 전범기(戰犯旗)
- 2015 캐나다 FIFA 여자 월드컵이 막을 올렸다. 1991년에 창설되어 올해로 7회째를 맞은 이번 대회는 본선 출전국 수를 24개국으로 확대해 역대 최대 규모로 열렸다. 남자 월드컵에 비견 될 만한 전 세계인의 스포츠 축제었기에 모두들 또 한번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일본대 스위스 C조 1차전경기 관람을 하려던 중, 팬들은 뜻밖의 광경을 보게 된다. 일본 축구팬들이 전범기를 꼬나 들고 자기의 팀을 응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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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칼럼] 펄럭이는 전범기(戰犯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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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시 “해방자들”의 성폭행 기록
- [동포투데이 김민 기자] 올해는 제2차 세계대전 결속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70년전 소련홍군은 미군과 더불어 독일, 프랑스 등 나라의 인민들을 도와 그들로 하여금 나치스의 독재에서 해탈되어 “해방의 자유”를 누리게 했다. 1944년 여름부터 유럽대륙에서 동맹군의 대반격이 시작되었다. 당시 미국은 여러 전장에서 “해방자”라는 거룩한 형상으로 유럽대륙의 곳곳에 나타났고 독일군은 패전을 거듭하였으며 최종 유럽대륙은 나치스의 잔혹한 통치에서 벗어났다. 그 뒤 허다한 문인들은 미군에 대한 찬양의 필묵을 아끼지 않으면서 “나젊고 영준한 남아들이 압박으로 시달리는 국토를 해방하였다”고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년간 육속 폭로되는 자료들을 보면 점령지에서의 미군의 행위를 보면 그 이미지가 그닥 광채롭지 못하였으며 소련홍군 역시 독일을 점령한 후 소름에 끼치는 행위를 많이 감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여인들을 숨겨 두어라” 미국사병들은 유럽에서 대담하게 “성쾌락”을 즐기었다. 영국에 진출한 뒤 이들 건장하고 자신감이 넘치며 정력이 왕성한 젊은이들은 쵸콜렛, 나일론 양말과 비누 등 작은 예물로 당지의 소녀들을 유혹, 매춘소녀가 적지 않았다. 로만디 등륙 전야, 런던의 많은 나이트클럽과 스탠드바에는 많은 미군들이 출입, 이들은 주흥이 도도해지자 거리에서 “사냥감”을 물색하였으며 가격을 정하고는 군외투를 가리고는 총망히 “교역”을 마치군 하였다. 당시 한 미군사병은 친구한테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현재 우리는 ‘두번째 전장’을 개척하고 있네. 나는 밤장막이 드리운 영국공원에서의 장면을 도무지 형용할 수가 없네. 이는 하나의 거대한 ‘전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네…”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더라도 1942부터 1945년 사이 미군은 영국에서 도합 126건의 강간사건을 저질었다. 상대적으로 볼 때 당시 영국은 교전국이 아니었기에 미군은 그래도 어느 정도 자제하는 모습이였다. 하지만 일단 영국해협을 건너 전쟁구역에 들어서자 “해방자”란 감투를 쓴 미군들은 한차례, 또 한차례의 “성쾌락”을 미친듯이 즐기었다. 당시 고향을 멀리 두고 떠나온 미군 관병들은 일단 시간이 흐르자 심리 및 생리적 압력을 이겨내기 힘들어 하였으며 또한 자신들은 프랑스를 위해 밑지는 일을 너무 한다고 여기면서 이 나라의 여성들은 미군을 위해 “헌신”할 의무가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때문에 이들은 흔히 유혹이 실패하면 폭력적 수단으로 자기의 성욕을 해소하군 하였다. 당시 로만디 지역에서는 한가지 유행어가 전해졌는데 그 유행어인즉 “이전에 독일군이 오면 우리는 여성을 남성으로 위장시켰으나 현재 미군이 오니 우리는 여성을 숨기게 된다”였다. 미군사병들의 성행위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1945년, 로만디의 제2 대도시 르아브르(勒阿弗尔)항구에는 귀국을 준비하는 미군사병들로 가득했다. 이들은 귀국전의 마지막 “성욕해소”를 강행, 이들은 기혼여성을 포함한 모든 프랑스 여성을 성욕해소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공원, 건출물 페허, 공동묘지와 철길 등은 모두 청천백일하의 음란장소로 되었다. 그 나날, 원래 고요하던 르아브르는 대뜸 “제복을 입은 표객”들로 인해 난장판이 되었다. 이러자 골치가 아파난 르아브르 시장 피에르 바찬은 부득불 당지 미군지휘관인 웨이드 대령한테 편지로 “시민들은 심지어 공원에서 산보하지 못하고 공동묘지에 가서 고인을 기리지도 못한다. 조금만 조심하지 않아도 여성들은 미군의 성노리개로 된다”며 이런 현상을 제지시켜 줄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편지에서 피에르 바찬 시장은 미군들더러 교외에 있는 한 창녀촌으로 가게 해달라고 건의했으나 웨이드 대령의 거절을 당했다. 리유는 만약 이 소식이 미국으로 전해질 경우 군인들의 아내 및 연인들과의 관계에 해를 끼친다는 것이었다. 종족전쟁: 시작은 히틀러 계승은 스탈린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소련군의 작전능력은 세계가 공인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소련군의 난잡한 군기 또한 정시할 바였다. 1941년 스탈린은 전쟁발발 4개월 이래 소련군은 도합 175만명(희생 35만명, 부상 103만명, 실종 37만명)을 손실보았다고 발표하였다. 막대한 손실이었다. 한편 거대한 상망의 손실은 평민에 대한 무차별적인 보복으로 이어졌다. 자료에 따르면 소련군은 폴란드를 시작으로 반공에 진입하여 베르린 함락에 이르기까지 도합 200만명에 달하는 독일여성들을 성폭력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그 속에는 윤간을 한 사례도 수두록했다. 성욕해소 대상자를 찾음에 있어서 소련군은 선택이 없었다. 피해자들로는 10세의 아동으로부터 80세 로인 및 출산을 앞둔 임산부들도 있었으며 베르린에서만도 도합 13만명에 달하는 여성들이 소련군의 성노리개로 되었으며 이중에는 후에 전 독일총리 리컬의 부인도 포함, 당시 그녀는 12살이었다. 그리고 이 중 만여명에 달하는 여성들은 수치감으로 모대기다가 자결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니모스토푸촌은 소련군이 최초로 점령한 독일영토었다. 피점령 당시 이 곳의 여성과 아이들은 거의 모두가 살해되었는데 당시 거리와 골목 그리고 교외에마저 살해된 싸늘한 시체로 깔렸으며 독일군인들은 십자가에 못박혀 피살당하거나 건물에 매달려 살해되기도 했다. 이는 순 종족전쟁이나 마찬가지었다. 종족전쟁으로 말하면 시작은 히틀러가 했으나 마무리는 스탈린이 한 셈이었다. 전쟁터에서 소련군의 군기는 대단히 엄했다. 교전시 소련군은 퇴각자만 나타나면 일률로 기관총 소사로 죽여버리는 것이 관습으로 되었다. 하지만 작전행동외 소련군의 군기는 대단히 허술했다. 거기에 소련군 사병 거개가 문화적 자질이 낮았기에 이들은 적대국가의 평민에 대해서까지도 난폭한 폭행을 감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은 교화소에서 개조를 받고 있는 인원들에게 군복을 입혀 전장으로 내보내는 사례가 많았다. 당시 소련군 포병대위로 있었던 솔레니친의 회고에 따르면 그의 부대가 동프로이센으로 진군할 때 사병들은 독일여성들의 내의를 빼앗아 입고 또한 강탈한 물건을 탱크안에 넣었으며 또한 물건을 빼앗은 뒤 집 여주인들을 강간하였는가 하면 심지어 강간 뒤 살해하기도 했다. 강간은 인류문명사에서 가장 야만적인 행위로서 인류의 존엄과 가치를 무시하는 것이며 강자가 약자를 짓밟는 가장 전형적인 범죄라 할 수 있다. 때문에 문명사회는 강간행위에 대한 처벌이 줄곧 중하게 정해졌다. 히틀러의 독일군이 폴란드와 소련으로 진공할 때 이들은 도처에서 당지 여성들을 강간하였으며 아울러 대량의 비공개적인 “기원(妓院)” 설치하여 독일군을 “위로”하도록 하였다. 이러자 고도로 격분한 스탈인은 반공이 시작되자 제일 처음으로 한말이 “피값은 피로 받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이른바 “승리자”이고 “해방자”란 허울밑에 벌어진 많은 사연들은 오랫동안 숨기어져 오다가 최근 20년 사이에 갈수록 많은 책들을 통해 폭로되고 있다. 즉 반세기 이상 침묵을 지켜온 피해자들이 분분히 침묵을 깨고 이 한단락의 역사에 대해 증인으로 나섰던 것이다. 독일군이 투항한 날자는 1945년 5월 8일이었다. 그 뒤 소련군 각 부대에는 사병들의 방종행위를 금지할데 관한 명령이 하달되었다. 이는 당시 독일주둔 소련군 총사령인 주코프 원수가 8월 3일에 하달한 것이다. 이는 소련군의 영예를 수호하고 독일국민들의 반항심리를 눅잦히기 위한 주코프 원수의 큰 결심이었다. 사진을 통한 새로운 발견 1945년 5월 2일, 베르린 전역은 종말을 고했다. 이러자 소련의 종군기자들이 대거 베를린으로 몰려 들었다. 당시 이미 공략된 베를린 제국빌딩 앞에 도착한 소련 타스사의 촬영기자 할제이프는 총포알 구멍투성이인 이 나치스 독일의 상징건물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영감이 떠올라 한장의 역사적 및 시대적 의의가 있는 사진을 남기기로 결심했다. 그는 소련군 3명을 찾아 합작촬영을 해줄 것을 요청, 그것인즉 이 3명 군인이 제국빌딩 꼭대기에 올라가 붉은 기를 꽂는 것이었는데 이 3명의 군인은 순순히 응해나섰다. 이 날 할제이프는 도합 30여장의 사진을 찍었고 이 중 한장을 선택하여 대외에 발표하였다. 이 한장의 사진이 소련 각 매체에 발표된 후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 한장의 사진이 바로 소련이 나치스 독일을 정복한 상징이었기 때문이었다. 헌데 당시 이 사진이 세계를 뒤흔든 동시에 자상한 사람들에 의해 한가지 흠집이 발견되었다. 그것인즉 당시 촬영에 응한 한 군인의 양쪽 손목에 모두 시계가 채어져 있었다. 이는 그 소련군인이 당시 독일주민들한테서 강탈한 것임을 간접적으로 폭로한 것으로 되었다. 그 뒤 이 사진은 수정되어 발표될 때마다 그 소련군인은 한쪽 손목에만 시계를 차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결코 역사의 진실을 감출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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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시 “해방자들”의 성폭행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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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칼럼] 진혼곡(鎭魂曲)
- 물질의 풍요에 꺼둘리고 노곤해져 모두들은 일종의 카르텔(동일 업종의 사람들이 이윤의 증대를 노리고 자유 경쟁을 피하기 위한 협정을 맺는 것으로 형성되는 안일한 형태)같은 침묵과 회피의 완충지대에서 안일만을 즐기고있다. 이렇게 침중한 과거에 대한 평이와 미온적인 태도가 주는 좌시와 부재가 이 내가 펴 낼 작품이 많음에도 기어이 십 년 전 작품을 뒤적여 다시 중판본을 내는 이유이다. 첫 장편이라 설익은 작품일망정 이 작품이 시대라는 이름의 호랑이 등에 본의아니게 올라타 추썩임을 당해야만 했던 젊은 청춘들, 세상의 폭력과 반인륜적 관습, 그 형극의 틈바구니에서도 유토피아로의 열망과 생존 본능으로 몸부림 한 모든 문혁 경력자들을 위한 진혼곡으로 읽혀지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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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칼럼] 진혼곡(鎭魂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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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은 중국을 얼마나 알까
- 일전 한국 프로그램 "명견만리"가 조선족 공중위챗들에서 폭풍인기를 끌었다. 프로그램은 참으로 재미있고 디테일하게 중국의 발전현황을 소개했다. “우리는 중국이라는 대학에서 영원히 학위를 따지 못한다.” “세계적으로 미국 우습게 아는 나라는 북한 뿐이고 중국을 우습게 아는 나라는 한국 뿐이다.” 진행자는 이렇게 한국인들은 중국에 대해 잘 모른다며 일축하기도 했다. 여기서 재미있는 에피소드 하나 소개한다. 며칠전 한국인과 기차얘기를 하다 "중국 기차는 한국보다 몇년이나 떨어졌는가"는 질문을 받았다. 현재 중국의 고속철은 세계 1위, 300킬로메터 시속으로 씽-씽 달리고있다. "중국의 90후들한테 한국은 안중에도 없다. 미국이나 독일이나 일본을 따라잡겠다는 젊은이들은 많아도 한국을 따라잡겠다는 중국 젊은이들은 단 한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아직도 오만함에 빠져있다" “우리는 긍적적인 중국 90후 세대들이 만들어 나갈 앞으로의 중국이 더 무섭다" 프로그램은 이렇게 한국사회에 메시지를 날리기도 했다.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우리는 목숨을 걸 정도로 한국벌이에 집착했다. 물론 그덕에 가난의 때도 많이 벗을수 있었다. 한국 드라마, 오락프로 등 한국 tv에 푹 ~~빠지기도 했다. 울고 웃으면서 시간가는줄 모를때도 많았다. 또 화장품도 한국, 옷도 한국, 세련된 한국 상품에 매혹되면서 이쁘다는 말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한국문화에 푹 심취되여있는 사이 우리가 살고있는, 우리 나라 중국은 이렇게 세인들의 주목을 받고 세인들의 두려움을 받고있다. 얼마전 한국의 한 간판아나운서는 한 인터뷰에서 “저희는 중국어와 한국어를 구사하는 중국 조선족들이 너무 부럽다”고 했다. 현재 한국에서 중국어 열기는 달아오르는 더위보다 더 뜨겁다고 했다. 우리도 이젠 우리가 살고있는 나라에 좀 더 눈길을 돌려야 되지 않을가 싶다. 정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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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은 중국을 얼마나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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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365일 중국여행 포토시리즈 (2)
- 중국명: 张掖丹霞地质公园 외국명: Zhangye Danxia National Geological Park 소속지구: 중국 깐수성 면적: 약 510평방킬로미터 기후: 온대 대륙성 건조기후 짱예딴샤(张掖丹霞)지질공원은 깐수성 치렌산(甘肃省祁连山)구에 위치, 린저현(临泽县) 이남으로 30킬미터 되는 지점에 자리잡고 있으며 중국에서 단하지형이 가장 잘 보존된 지역이자 지형조형이 가장 풍부한 지구의 하나이다. 또한 중국 채색단하의 전형적인 대표지역이며 아주 높은 고찰 및 관광 가치가 있다. 2005년 11월 중국지리잡지사와 전국 34개 매체에서는 공동으로 “중국의 가장 아름다운 지방” 평선활동을 조직, 이 활동에서 짱예딴샤 지질공원은 “중국의 가장 아름다운 7대 단하”로 평의되었다. 짱예딴샤의 지형은 중국 국내에서 유일하게 단하지형과 채색구릉경관이 결합된 구역으로 분포면적은 약 510 평방킬로미터이고 성급 지질공원이며 성급 풍경명승구이다. 짱예딴샤 지질공원에는 단하지형이 도합 780여 곳이 있으며 주로 동남부와 서남부 및 서북부 지대에 위치, 중국 건조지구에서 가장 전형적이고도 면적이 큰 단하 지형경관을 이루고 있다. 지리적 위치 짱예딴샤 지형은 린저현 경내에 위치, 짱예시와는 40킬로미터 떨어져 있으며 사방 100 평방킬로미터의 치렌산 북부 구릉지대인 깐난위구족 자치현 바인향(肃南裕固族自治县白银乡)을 중심으로 해발 고도가 2000미터 내지 3800미터 사이이다. 짱예딴샤 지형에는 주로 두개의 무늬지형 분포구가 있는데 한곳은 동쪽으로부터 금탑사와 마제사(马蹄寺)와 서쪽으로 향한 옌썬(西延)으로부터 훙산촌(红山촌), 마제, 훙산만, 바이인(白银), 다허(大河), 훙산촌 분포구이고 다른 한곳은 동쪽으로부터 훙시후(红四湖)일대로서 훙시후, 훙쵄즈(红圈子). 판쵸우(板桥), 허리(合黎)까지의 분포구인바 가장 독특한 곳은 훙산만과 바이인 일대 그리고 훙쵄즈일대이다. 짱예딴샤 지질공원은 동서로 약 40킬로미터, 남북으로 50~100킬로미터가 된다. 이 곳의 단하지형은 수천수만개의 절벽으로 된 산들로 이어지며 선명한 단절색과 적갈색으로 상호 대칭되면서 더욱 선명하다. 당지의 소수민족들은 이런 기이한 산풍경을 놓고 “알란라그다(적색의 산이라는 뜻)”라고 부르고 있다. 기후특점 짱예딴샤 지역은 대륙깊이에 위치, 전형적인 온대대륙성 건조기후에 속하며 일조시간이 길고 광열자원이 풍부하다.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뜨거운 것으로 사계절이 분명하며 연 평균 강수량은 130밀리미터 좌우에 달한다. 평균 기온은 영상 7도 좌우이고 매년 6월부터 9월까지 강수량이 집중되며 이 기간이 또한 여행하기 가장 훌륭한 계절이다. 관광지침 70세 이상의 노인은 무료이고 학생, 군인은 해당 증서에 따라 50% 할인값으로 티켓을 구매할 수 있다. 1.2미터 이하의 아동은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개방시간 여름: 5시 30분부터 20시 30분까지 겨울: 8시부터 18시까지 (다음 계속) 동포투데이 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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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365일 중국여행 포토시리즈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