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8(토)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실시간뉴스
  • ‘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4-05-02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3-11-21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한국인도 친중(親中)하면 조선족?
    ●김정룡(多가치 포럼 위원장) 지난 22일 SBS가 ‘조선구마사’라는 드라마(사극)를 방송하자 대한민국이 한바탕 떠들썩하게 비판에 들끓었다. 드라마 속에서 조선 기생집이라고 설정된 배경이 있는데 전형적인 중국식 가옥의 형태를 띄고 있고 식탁에는 중국 음식인 월병, 피단, 양갈비, 중국식 만두, 중국술이 올라 있었다. 그리고 OST(드라마 주제곡) 월아고-고쟁독주, 고산류수-고금독주에 사용되는 현악기가 고쟁, 고금 등 중국전통 악기로 연주된 장면을 문제 삼아 드라마 작가를 친중작가로 낙인찍고 비판에 열을 올리고 있다. ‘조선구마사’ 작가 박계옥 씨(이하 박 작가로 칭함)가 친중혐한 작가로 공격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박 작가의 전작 tvn에서 방송된 ‘철인왕후(2021.2.14. 종영)에 대해서 시청자들의 비판이 있었다. '철인왕후'는 중국에서 소설로 먼저 출간된 뒤 제작된 웹드라마 '태자비승직기'를 원작으로 하고 있으며, 이 드라마를 쓴 작가의 전작 '화친공주'에서 고려인을 비하하는 '빵즈' 표현이 쓰인 사례가 있고 박 작가는 실존인물인 순원왕후와 신정왕후를 우스꽝스럽게 표현하고,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을 두고 '지라시네'라는 표현 등으로 논란이 되었다. '철인왕후'의 각본을 맡은 박 작가와 중국 콘텐츠 제작사 쟈핑픽처스가 집필 계약을 체결한 것도 친중작가로 공격하는데 큰 빌미를 제공한 것 같다. 박 작가가 친중하든지, 혐한하든지 나의 입장에서 왈가왈부 할 일 아니다. 다만 요즘 한국 온라인에서 박 작가를 조선족이라고 주장하는 글들이 떠돌아다니고 이를 근거로 일부 언론들이 나서 기사화하고 있는데 왜 한국인들(일부이긴 하지만)은 한국인이 친중혐한해도 조선족이라고 낙인찍는지? 의문스럽다. “충신? 하이고 충신이 다 얼어죽어 자빠졌다니? 그 고려 개갈라 새끼들이 부처님 읊어대면서 우리한테 소, 돼지 잡게 해놓고서리...개 백정새끼라고 했지비아니?!!” “그 목사 충신 최영장군의 먼 일가친척인데.. 그래도 됩니까?” “충신이 다 얼어죽었다니? 우래보고 소돼지 잡게 해놓고 개 백정새끼라고 했지비아니? 드라마 ‘조선구마사’에 등장하는 대사인데 일부 한국인들은 이 대사가 연변조선족 사투리 극형이라면서 이를 근거로 박 작가를 조선족이라고 단정한다. 진짜 유치하고 어처구니없어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어느 지방의 사투리든지 무릇 사투리란 억양과 어휘 두 가지로 구성된다. 한국 드라마에 등장하는 연변사투리는 진짜가 아니라 99% 짝퉁이다. 아마 10여 년 전으로 기억되는데 고 최진실 씨가 주연한 연변여자(옥화) 역에서 그녀의 말투는 평양말에 플러스 평안도, 황해도 말이지 연변사투리와는 거리가 10만 8천리나 된 것을 연변사투리랍시고 연출한 것이다. 그 후 조선족을 소재로 한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한 연변사투리는 진짜 연변사투리가 아니라 이북말을 흉내 내는 짝퉁일 뿐이다. 진짜 연변사투리가 등장한 영화가 딱 한 편 있다. 위안부를 소재로 다룬 영화 ‘소리굽쇠’에서 조안 씨가 한 대사는 진짜 연변사투리가 맞다. 왜 그 많고 많았던 드라마나 영화중에서 조안 씨만이 연변사투리를 구사할 수가 있었을까? 그 영화 조안 씨와 함께 주연을 맡은 위안부 역 이옥희 씨가 연변 유명 코미디 배우이기 때문에 조안 씨에게 정확한 연변사투리를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살펴보자. 박 작가를 조선족이라고 근거로 삼고 있는 드라마 ‘조선구마사’ 대사에서 ‘했지비아니?’ 라는 말은 연변에서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는 말이다. ‘했지비’ ‘먹었지비’ ‘갔지비’ 등등 동사 뒤에 ‘지비’를 붙이는 것은 함경남도에서 사용하는 방언인데 연변사람 절대다수는 함경북도 출신이고 소수 함경남도 사람이 있긴 하지만 이 ‘지비’란 말을 유행시키지 못해 연변에는 ‘지비’란 말이 없다. 게다가 뒤에 ‘아니’를 붙여 ‘했지비아니?’는 연변사람에겐 생소하기 그지없는 말이다. ‘우리보고’를 ‘우래보고’라고 한 것 같은데 이 말도 연변에는 전혀 없는 말이다. 혹시나 해서 연변출신 지식인들에게 여러모로 알아보았으나 전부 난생 처음 들어보는 말이라는 똑 같은 대답이다. 문제는 드라마나 영화에 이북 말씨가 등장하면 그것을 연변사투리라고 단정하고 심지어 작가를 ‘조선족’이라고까지 왜곡하여 공격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허무하고 무모하고 유치한 ‘씹어 치기’인가? 박 작가는 분명 한국인이다. 그가 조선족일 수가 없는 것이 1970년에 태어나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고 1995년 캐치원 시나리오 공모에 ‘돈을 갖고 튀어라’로 입선하면서 작가로 데뷔했다. 그 후 현재까지 영화 12편, 드라마 10편을 발표했다. 만약 그가 조선족이라면 25세 나이에 데뷔하여 그 많은 영화와 드라마 시나리오를 쓸 수가 없다. 한국영하와 드라마 시나리오를 쓰려면 한국사회 온갖 문화, 한국인의 생활정서에 이르기까지 전부 마스터해야 하는데 일부 유치한 한국인들의 주장처럼 그가 조선족이라면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필자도 한국에서 15년 동안 글을 써왔지만 영화와 드라마 작가 데뷔는 엄두도 못 내고 아예 꿈도 못 꾸고 있다. 여느 한국인은 박 작가가 드라마 ‘댄스의 순정’에서 주연을 연변처녀(문근영)로 설정한 것을 겨냥해 작가를 조선족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런 식의 주장이 맞다고 가정한다면 지금까지 조선족을 소재로 한 영화와 드라마 작가들이 전부 조선족이라는 말도 안 되는 엉터리 ‘삼단논법’이 성립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듯 전혀 근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온라인에서 박 작가를 중국인, 화교, 연변인, 귀화한 조선족 등 온갖 의혹, 그 가운데서 박 작가가 ‘조선족’이 아니냐는 의혹이 가장 거세지자 23일 SBS ‘조선구마사’ 측 관계자는 이데일리에 “박 작가는 조선족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에 한 누리꾼은 “박 작가 작품들은 다른 작가들의 비해 텀이 너무 짧다. 철인왕후 끝난 지 한 달 밖에 안 됐는데 조선구마사까지. 박 작가의 팀이 조직적으로 시나리오를 쓰는 것 같다”라며 “박 작가가 중국, 조선족과 관련 없다면 박계옥 작가 팀 또는 서브작가들의 국적이 의심된다.”라며 또 다른 의혹을 제기했다. 문제는 왜 한국인이 친중혐한해도 조선족이라고 공격하는 것인지? 묻고 싶다. 조선족은 의례 한국을 싫어한다는 전제를 바탕 깊숙이 깔고 색안경을 끼고 평소에도 삐뚤어진 시선으로 조선족을 바라보고 있는 결과가 아닌지? 이쯤 되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요즘 미국에서 아세아계 출신들을 마구 혐오하는 것과 비슷하게 한국에서도 조선족을 혐오하는 바람이 거세지지 않을까? 우려된다. 일부 한국인이 조선족을 혐오하는 이유 중에 피해의식의 작동결과가 아닌지? 의심스럽다. 한반도는 수천 년 동안 지리적인 원인에 의해 중국의 영향을 심각하게 받아왔다. 이 과정에 피해의식이 뼈가 저리게 각인되어왔다. 본문과 관련하여 한 가지 사례만 들어보자. 박 작가를 혐한한다고 주장하는 근거 중 고려인을 ‘빵즈’라고 한 대목을 두고 ‘한국인을 몽둥이로 때려죽일 놈’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면서 작가를 혐한한다고 비판한다. ‘빵즈’란 도대체 무슨 뜻일까? 몽둥이를 뜻하는 ‘빵즈(棒子)’의 유래에 관해서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 수나라와 당나라 초기 고구려를 수차례 침략했을 당시 고구려인들이 몽둥이를 잘 휘둘러 혼난 기억 때문에 ‘까오리빵즈(고려몽둥이)’라 불렀다는 것. 둘째 만주에 거주한 조선여인들이 하도 방치질을 열심히 해서 ‘까오리빵즈’라는 별명을 붙였다는 것. 셋째 어느 특정 집단의 사람들을 비하하는 말로서 우리말 그냥 ‘놈’에 해당된다는 것. 예를 들어 중국 드라마 ‘관동진출’에서 동북에 온 산동사람들은 하남사람들을 ‘허난빵즈’라 부르고 하남사람들은 산동사람들을 ‘쌍둥빵즈’라 부르는 대사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따라서 후에 조선인들이 만주에 오게 되자 산동사람들은 ‘까오리빵즈’라 부르고 조선인도 따라서 산동사람들을 ‘싼둥빵즈’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고로 ‘빵즈’란 그냥 민간에서 하나의 비하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유행어로 치부할 뿐 굳이 서로 몽둥이로 때려죽일 만큼 적개심에 차서 하는 말이 아니다. ‘까오리빵즈’와 ‘싼뚱빵즈’라는 말은 지금까지도 연변에서 가끔씩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까오리빵즈’를 ‘몽둥이로 때려죽일 한국사람’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지나친 터무니없는 상상의 확대적 산물이다. 그렇다면 왜 한국인은 ‘빵즈’란 말을 견강부회해가면서 또 굳이 살의(殺意)가 내포된 의미로까지 해석할까? 역시 답은 수천 년 쌓여온 피해의식 때문이 아닐까? 판단된다. 10위 안에 드는 세계 경제 대국인 대한민국, 선진국 문턱에 들어섰다고 자부하는 대한민국, 하지만 한국인의 머릿속에는 중국이란 대국에 대한 두려움이 여전히 크게 남아 있어 사소한 일도 확대해석하여 크게 만들고 말도 안 되는 선제공격으로 피해의식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의도가 훤히 보여 안타깝다.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더 해보자. 아리랑을 비롯한 우리민속문화는 한반도 남북한뿐만 아니라 해외 750만 동포의 공동문화유산이다. 조선족의 경우 해외 750만 동포 중에서 고국의 민속문화를 가장 잘 계승 발전시켜왔다. 이런 맥락에서 조선족 민속문화가 중국국가급과 성급 무형문화재로 등재되고 심지어 조선족의 농악무는 세계유네스코에 등재되기까지 한 상황이다. 이를 두고 한국에서 거센 반발이 일고 있다. ‘우리 한국문화를 중국에 빼앗기게 생겼다.’고 난리다. 정인갑 전 청화대 교수에 의하면 농악무의 경우 유네스코의 무형문화재로 등재될 때 그 발원지를 한반도로 분명히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문화의 출처를 밝힌다면 문제 될 것이 없지 않는가? 사실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반발이 일고 있는 것은 아리랑을 비롯한 우리민속문화를 남한만이 소유해야 하는, 즉 다시 말하자면 해외동포는 소유와 계승 발전의 자격이 없다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갑자기『택리지』가 떠올랐다. 1751년에 출간된 이중환이 지은『택리지』란 책이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조선반도는 삼면이 바다인데다 산이 많고 평야가 적어 사람들의 세상을 보는 식견이 좁다.”고 지적했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21-04-07
  • '삼국지' 재해석⑱ 삼국시대 가장 걸출한 정치가 조조Ⅱ
    ●김정룡(多가치 포럼 위원장) 의심의 대명사가 된 조조 조조가 다시 세상에 나왔을 때는 시국이 굉장히 어수선했고 나라 정세는 요동치고 있었다. 황제는 완전히 허수아비가 되었고 정권은 서부 군벌인 동탁에게로 넘어갔다. 그런데 동탁의 무리는 인간의 상식을 벗어난 망나니들이었다. 이중텐 교수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동탁은 호랑이었고 여포는 이리였으며 그들의 부하들은 들개였다. 동탁은 일 저지르기 너무 좋아했다. 그는 군신들과의 연회 석상에서 후궁의 여인들을 데려다 쾌락과 향락을 즐겼으며 연회에 참석한 관리 한 사람을 끌어내어 멋대로 때려죽이기도 했고 가장 잔혹한 형벌로 그에게 체포된 반대파를 학대했다. 결국 동탁은 황제를 폐위하고 백관들을 도살했으며 후궁들을 욕보여 더럽혔다. 그의 병사들은 낙양성 안에서 방화와 살인, 약탈을 자행하고 부녀자들을 강제로 욕보였다. 한나라의 수도는 전대미문의 참상을 겪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동탁의 이런 행위는 민심은 물론이고 지방의 지지 또한 얻지 못했다. 오히려 동탁은 전국 각지의 공동 성토의 대상이 되었고 그도 지방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조정의 기강이 문란해지는 한편 사방에서 전란이 일어났다. 한나라는 사실상 멸망했고 천하는 대란에 휩싸였다. 본래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지방관들은 군벌로 변해 할거하는 후왕(侯王)으로 바뀌었다. 난세라 여기저기서 영웅들이 용솟음쳐 나올 판이었다. 동탁은 조조를 인재로 보고 효기교위로 임명하고 함께 일을 도모하려 했다. 그러나 조조는 동탁이 나라를 이끌 재목이 아니고 더욱이 동탁을 위해 일한다면 세상에 나쁜 결과를 초래하리라는 것을 판단하고 성과 이름을 바꾸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친다. 야밤에 도망쳤는데 동탁이 알고 추살령을 내렸는데 낙양을 간신이 벗어나 중모현(中牟縣, 지금의 정주시)에 이르렀을 때 탈주범으로 의심 받아 체포된다. 재판 받기위해 관아에 연행되어 갔는데 지방 관리들이 조조가 인재라는 것을 알고 풀어준다. 조조는 운이 좋은 사나이였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조조는 몸을 의탁할 곳이 없어 망설이다가 아버지의 친구였던 여백사를 찾아간다. 여벽사는 조조를 반갑게 맞이하고 술잔치를 벌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방 쪽에서 컬을 가는 소리가 들려오자 조조는 자기를 죽이려고 그런 줄 알고 먼저 선손을 써 여백사의 일가족을 몰살한다. 다 죽일 무렵 조조는 아차 싶었다. 본래 자기를 위해 돼지도 잡고 양도 잡고 하려고 칼을 갈았는데 그만 자신이 그 칼에 죽는다는 의심을 품고 만회할 수 없는 실수를 범했던 것이다. 사람을 잘못 죽였다는 것을 알아차린 조조는 몹시 후회한다. 사서에 이런 기록이 있다. “처창(凄愴)하게 말하기를 차라리 내가 남을 배신할망정 남이 나를 배신하게 하지 않겠다.” 조조가 실수를 깨달고 처참하고 슬픈 심정으로 자신을 위로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관중의 <삼국연의>는 이 대목에서 조조를 천하의 나쁜 놈으로 몰아간다. “차라리 내가 천하 사람을 배신할망정 천하 사람들이 나를 배신하게 하지는 않겠다.”로 확대 수정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조조에 대한 최대의 나쁜 편견을 갖게 만들었던 것이다. 나관중은 왜 조조의 실수를 이토록 확대 수정하였을까? 조조가 대범하지 못해 의심이 많은 나머지, 아니 의심이 많을 정도가 아니라 의심이 지나쳐 이런 끔찍한 일까지 저질렀다는 것을 인상 깊게 남김으로써 조조를 진짜 악인으로 각인시켜 버리는 효과를 노렸을 것이다. <삼국연의>가 탄생한 이후로 중국 관료사회는 물론이고 민간에서는 의심이 많은 사람을 조조에 비유하는 것이 관습으로 자리매김 되어 왔다. 조조의 성공적인 전략 네 가지 도망 다니던 조조는 진류(陳留, 지금의 개봉시 동남쪽)에서 멈췄다. 더는 도망 안가도 되는 계기를 맞았던 것이다. 투자자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큰 노릇하려면 투자를 받아야 한다. 하물며 정치는 정치자금을 후원받지 못하면 정치를 할 수가 없다. 조조를 미래 영웅으로 알아본 자가 나타났는데 그가 바로 위자(衛玆)라는 사람이다. 조조는 위자의 투자를 받아 그 일대의 병사를 불러 모으고 말을 사서 의거를 일으키자 군사가 5천을 넘었다. 이때가 중평 6년(189년) 12월이다. 이 일은 조조가 군사조직으로서 세상에 도전장을 내민 첫 스타트였다. <삼국연의>에서는 조조가 반동탁연합군인 관동연합군 설립을 발기한 것으로 묘사하였는데 역사사실과 다르다. 조조는 당시에 그 거대한 조직을 발기할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왜냐면 조조는 그때 관직도 없었고 근거지도 굳건하지 못했고 군사력도 미약했기 때문에 관동연합군 조직에 조조의 호소력이 있을 만큼의 지분은 없었다. 다만 조조가 반동탁 의거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관동연합군 맹주 원소를 비롯해 기타 지방 할거세력들이 한가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본 조조는 실망하여 독자적인 길을 걷기로 맘을 굳혔다. 조조의 전략은 우선 근거지를 마련하는 점령, 군대를 모으는 모병, 군량을 해결하는 둔전, 인재를 널리 초빙하고 등용하는 초현(招賢)이었다. 조조는 둥군을 먼저 차지하여 태수가 되고 다음에는 연주를 점령하여 주목(州牧)이 되었다. 그런데 이 관직은 조정에서 내린 것이 아니라 지방호족들의 추천으로 임시대행이었다. 말이 임시이지 잘만 하면 중앙정부가 제대로 굴러가기 전까지는 맡을 수 있었다. 변수는 다른 군벌에게 빼앗기는 일만 없도록 하면 된다. 그런데 문제가 그리 간단치 않았다. 당시 연주의 땅 많은 곳을 황건적이 차지하고 있어 그들과 싸워야 했다. 이 싸움에서 조조는 가장 아끼던 부하 포신을 잃었다. 땅을 빼앗는 대가가 그만큼 컸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긴 대가가 없는 결실은 없으니까, 조조도 일정한 대가를 치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조조는 이렇게 해서 근거지를 마련하게 되었다. 황건적의 군대는 오합지졸이었다. 조조는 이들을 정복한 후 정예부대를 편성해 ‘청주병’으로 만들어 군사를 확보했다. 땅이 있고 군사가 있는데 먹을거리가 문제였다. 전통적인 농경사회에서의 먹을거리는 단순히 음식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전반 사회가 돌아가는 경제를 의미하기도 했다. 중국속담에 “민이식위천(民以食爲天,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만큼 중히 여긴다는 뜻)이란 말이 있다. ‘식(食)’이 보장되지 못하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조조의 아이디어는 둔전이었다. 이 아이디어는 조조의 부하 원환(袁渙)이 입안한 것이고 국연(國淵)이 발전시켰다. 조조 조직에서 가장 먼저 백성을 어루만져주고 폐해를 없애주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은 아마 원환이었을 것이다. 둔전 초기에 백성을 모아 둔전을 열었지만 백성은 달갑게 생각하지 않고 대다수가 도망쳤다. 원환이 조조에게 말했다. “백성은 예로부터 향토에 안주하고 이주하는 것을 싫어했는데 이런 습속은 갑자기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뜻에 따라서 행하기는 쉽지만 그것을 거슬러 행하기는 어렵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들의 의견을 따름이 마땅합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자는 즉시 받아들이고 그렇지 못한 자는 억지로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조조가 그의 의견에 따르자 백성들은 크게 기뻐했다. 원환은 매번 모든 현에 칙령을 내려 말했다. “홀아비나 과부들의 안부를 챙기고 효도한 아들과 정절을 지킨 며느리를 표창하라.” 조조의 성공에는 백성을 살피는 원환과 같은 훌륭한 선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해도 지나지 않을 것이다. 둔전의 맛을 본 조조는 넓은 지역에서 둔전을 실시하고자 생각하고 국연에게 그 일을 관장하도록 했다. 국연이 여러 차례에 걸쳐 조조에게 이 제도의 손실과 이익을 진언하고 토지를 헤아려 백성을 살게 하며 인구를 헤아려 관리를 두고 일과 세금에 대한 법령을 밝히니 5년 만에 창고는 풍부해지고 백성은 다투어 노력하고 즐겁게 일했다고 사서는 기록하고 있다. 이중텐 교수는 조조의 둔전에 대해 이렇게 개괄하여 말했다. “둔전은 거주의 군사화, 경작의 집단화, 농업생산의 국영화를 이룬 제도였다.” 둔전 발전에 공이 컸던 국연은 조조의 전투에 군량미를 보급하는 직책을 맡아 훌륭하게 완수하였다. 항상 그래왔듯이 후방에 묵묵히 일하는 사람은 빛을 못 보기 마련이다. 그 사람의 공이 아무리 컸어도 말이다. 국연도 이런 사람 중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조조의 둔전 사업에 기여가 큰 신하가 또 있었다. 그의 이름은 임준(任峻)이다. 조조가 정벌에 나설 때마다 임준은 항상 나아서 성을 지키며 군수품을 공급해주었다. 어느 해에 기근과 가뭄이 있어서 군대의 식량이 부족했으므로 우림감(羽林監)인 영천의 조지(棗祉)가 둔전을 설치하자고 건의하니 조조는 임준을 전농중랑장(典農中郞將)으로 임명하고 백성을 허현 교외에서 둔전을 하게 하여 1백만 섬의 곡식을 거두었으며 군(郡)과 국(國)에 전관(田官)을 두었다. 여러 해 뒤 곳곳에 곡식이 쌓여 창고마다 가득 찼다. 조조가 둔전으로 창고를 늘릴 때 원소의 군대는 뽕나무 열매나 따먹었고 그것도 없으면 약탈해 먹었다. 원술의 군대는 민물조개를 먹었다. 원씨 형제의 상황을 조조에 비교하면 누가 미래 영웅이 될 것인지의 결과는 이미 그때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조조에게 근거지가 마련되었고 병사도 모였고 먹을거리도 확보되었으니 이제 부족한 것은 인재 모집이었다. 조조의 인재 모집 전략은 ‘무릇 인재라면 등용한다(唯才是擧).’는 것이었다. 무슨 뜻이냐면 유교적인 입장에서 말하자면 아무리 학식이 뛰어나고 밝아도 도덕이나 윤리에 흠집이 있으면 인재라고 할 수가 없다. 조조는 도덕과 윤리에 흠집이 있을지라도 능력만 있으면 등용한다는 것이 바로 인재모집 전량이었다. 또 과거에 원수였어도 오늘 날의 조조의 창업에 도움이 된다면 과거를 묻지 않고 등용한 것이 조조의 또 다른 인재등용 성공 전략이었다. 조조가 이런 넓은 도량으로 인재를 모집했기 때문에 천하의 인재들이 절대다수가 제 발로 찾아왔던 것이다. 가장 먼저 조조를 찾아온 인재는 순욱이었다. 순욱은 본래 원소의 사람이었다. 그는 원소는 천하를 통치할 그릇이 아니라는 것을 판단하고 일개 동군태수인 조조에게 귀의했다. 순욱은 21년 동안이나 조조의 핵심 참모로 역할 했다. 곽가(郭嘉), 순유(荀攸), 종요(鍾繇) 모두 순욱이 추천했다. 정욱(程昱)은 연주자사 유대가 기도위를 맡아달라고 불렀을 때 병을 핑계대도 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조조가 연주에 와서 부르자마자 달려갔다. 조조가 이 네 가지 일을 완성시킨 것은 191~196년 사이였다. 이때 다른 군벌과 호족들은 아무런 성과가 없이 허송세월을 보냈다. 쉽게 말하자면 조조는 차근차근 영웅이 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다른 자들은 준비가 전혀 없었다는 뜻이다. 현대사회에서도 준비 된 자만이 성공한다는 말이 있듯이 예나 지금이나 준비 된 자만이 성공한다는 말은 불변의 진리이다. 천자를 끼고 천하를 호령하다 동탁이 죽고 난 후 조정은 더욱 혼란에 빠졌다. 이각과 곽사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향에 돌아가려고 할 때 가후의 계책에 의해 다시 구데타를 일으켜 조정을 장악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또 패권을 다투는 싸움을 벌여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어린 황제는 의지할 곳이 없어 매일 밤 뜬눈으로 지새웠다. 이때 구세주가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조조였다. 조조에게는 모개라는 책사가 있었다. 조조의 정치, 경제, 군사 여러 면에서의 그림을 모개가 그려냈다. 모개가 조조에게 말했다. “동탁의 난 이후 사회가 불안하고 나라의 근본이 흔들리며 경제가 무너지고 재난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나라는 위태롭고 백성은 불안해서 확실히 큰 재능과 지략을 가진 사람이 이 국면을 수습하고 패왕의 위업을 성취해야 합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원소와 유표 등은 강해 보이긴 하지만 안목이 얕으며 근본을 모릅니다.” 이어서 구체적인 지적을 했다. “그러면 무엇이 근본일까요? 첫째는 정의, 둘째는 실력입니다. 실력 중에서도 또 경제적 실력이 으뜸이지요. 정의의 기치를 세우면 정당한 명분으로 출병을 하고 적을 이겨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경제력이 생기면 위세가 생겨 나아가고 물러서는 것이 자유로워집니다. 결국 두 가지 길이 생기지요. 나아가면 공격할 수 있고 물러서면 방어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모개는 세 가지를 건의했다. 정치 전략으로 천자를 받드는 것과 경제 전략으로 경작지를 늘리는 것과 군사전략으로 군수물자를 비축하는 것이었다. 조조는 모개의 건의를 받아들이고 즉각 행동에 나섰다. 사자를 장안에 보냈다. 그러나 하내태수 장양이 가로막아 갈 수가 없었다. 이때 동소(董昭)라는 사람이 나서 도움을 주었다. 동소도 원래 원소의 부하였다. 원소의 진영을 이탈해 장양 밑으로 들어갔다. 동소의 눈에는 조조야말로 진정한 영웅이 될 것이라고 보고 장양을 설득해 조조와 손을 잡게 했다. 심지어 사비를 털어 조조의 명의로 이각과 곽사에게 뇌물을 보냈다. 조조는 동소의 덕분에 조정과의 왕래가 트였고 정식으로 연주의 주목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조조가 천자를 알현하기까지의 길은 험난했다. 이번에는 동승과 원술이 반대했다. 또 동소가 나섰다. 동소가 양봉을 찾아가서 다음과 같은 거래를 했다. 양봉은 황제 곁에 있는 군벌 중에서 가장 강하면서도 아직 기반이 부족해서 바깥의 도움이 필요했다. 양봉이 군대를 움직이면 조조가 군량을 대고 양봉이 국정을 주도하면 조조가 바깥에서 돕는 것이었다. 양봉은 동소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조조를 진동장군으로 추천하는 한편 부친의 작위였던 비정후를 물려받게 했다. 마침 동승도 시끄러운 일이 생겨 조조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어 가로막혀 있던 벽들이 모두 허물어져 조조는 뜻대로 황제를 알현하고 수도를 허창에 옮겨 황제를 받들게 되었다. 조조의 본래 뜻은 황제를 받들어 모시는 것이었는데 밖에서의 여론은 ‘조조가 천자를 끼고 제후들을 호령한다.’는 것으로 바뀌었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생겼을까? 원소와 조조는 어릴 적 짜개바지 친구였고 성인이 된 후에도 한때 조정에서 함께 일했다. 반동탁연대인 관동연합군에서도 호흡을 같이 한 때가 있었다. 그러던 두 사람이 정식으로 결별하게 된 계기는 조조가 황제를 받들어 모신 것이었다. 원소의 입장에서는 조조가 과거 자기 수하였는데 황제를 받들게 되면 거꾸로 나를 호령하는 것 아니냐는 심리에서 한발 더 나아가 ‘조조가 천자를 끼고 제후들을 호령한다.’고 소문을 퍼뜨렸던 것이다. ‘천자를 끼고 천하를 호령한다.’는 말이 이렇게 세상에 널리 전해지면서 조조는 정권을 탈취한 역적모의의 주범이 되었다. 조조는 이 명의롭지 못한 누명을 벗으려고 원소를 대장군으로 임명했지만 원소가 조조에 대한 불신은 여전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1-04-07
  • 과학은 편견을 용납하지 않는다
    ● 레이중저(雷钟哲·산서작가협회 회원) 3월 30일, 세계보건기구(WHO)는 제네바에서 중국과 세계보건기구가 공동 작성한 코로나19 발원 관련 연구 보고서를 발표했다. 연합 전문가 팀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사람에게 전파하게 된 4개의 경로에 대해 탐색하고 평가, 첫째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중간숙주를 거쳐 사람한테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고 둘째는 가능성이 비교적 높게 직접 사람한테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셋째는 콜드 체인 식품(冷链食品)을 통해 사람한테 전파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며 넷째는 실험실을 통해 사람한테 전파되었을 가능성은 극히 적다고 인정했다 올해 1월 14일부터 2월 10일까지 17명으로 된 중국 측 전문가 및 17명으로 된 외국 측 전문가들은 공동 전문가팀을 구성, 각각 유행병학, 분자역학과 동물 및 환경 등 3개 소조로 나뉘어 중국 우한(武汉)에서 28일간에 달하는 글로벌 바이러스 기원 중국 조사(全球溯源研究中国部分工作)를 전개했으며 이에 기초하여 장장 120페이지에 달하는 연구 보고서를 집필했다. 다시 말하면 이 보고서는 세계 정상급 유행병 전문가들의 심혈과 지혜를 집중한 것으로 권위성, 과학성, 믿음성은 의심할 바 없는 것이다. 바이러스의 근원지를 밝혀내는 것은 과학적인 문제이고 또한 세계적인 책임이고 의무로서 마땅히 전 세계 과학자들이 협력하여 해당 연구 사업을 전개하고 마땅히 여러 개 국가와 여러 개 지역 특히는 코로나19 확산세가 심각한 지역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바이러스 발원지 문제를 정치화하는 그 어떤 행위와 쇄국 적이고 협조를 거부하는 자세는 바이러스 발원지 추적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글로벌 방역 노력을 파괴하여 더욱 많은 생명 손실을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번에 중외 전문가팀은 코로나19 발생 초기의 많은 확진 사례가 우한 화난 해산물 시장(武汉华南海鲜市场)과 연관이 있었지만 그 뒤엔 다른 많은 사례가 기타 시장과 연관이 있었으며 또 초기의 어떤 사례는 시장과는 그 어떤 연관도 없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외 중외 전문가팀은 일찍 2019년 12월, 더 넓은 지역의 사회 구역 내에서 바이러스가 전파된 것은 화난 수산물 시장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었다는 것을 밝혀내기도 했다. 이러한 증거들을 보면 ‘화난 해산물 시장은 코로나19 최초의 발원지’가 아니란 것을 증명할 수 있다. 중외 전문가팀은 또 많은 국가들이 이미 발표한 연구 데이터를 분석, 다른 나라에서 코로나19 샘플이 우한 현지에서의 발견보다 몇 주 먼저 발견되었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는 기타 국가에서는 전파는 있었지만 발견하지 못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는 것이다. 보고서는 또 조기에 발견된 코로나19 전파 사건에 대해 조사해 볼 중요성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이런 결론은 ‘중국 바이러스(中国病毒)’ 혹은 ‘우한 바이러스(武汉病毒)’라고 한사코 떠들어대는 미국 및 서방 국가들의 편견에 대한 논박할 수 없는 일격으로 된다. 회고해보면 코로나19의 만연이 전 세계를 휩쓰는 긴급한 관두에 서방의 일부 정객과 매체들에서는 의식형태의 편견으로부터 출발하여 코로나19를 정치화하는 한편 과학적인 대응과 강력한 방역 대신 책임을 중국에 미루면서 온갖 중상을 다 쏟아붓곤 했다. 특히 미국을 위수로 한 일부 서방국가들은 줄곧 코로나19 발원지에 관련한 요언을 날조하여 왔다. 지난해 3월 16일, 미국의 전 대통령 트럼프는 소셜미디어에 극단 적 종족주의에 해당하는 성명을 발표, 코로나19를 ‘중국 바이러스’라고 규명했다. 트럼프는 “미국은 이제 중국 바이러스(Chinese Virus)의 영향을 받는 업종 예하면 항공사와 기타 업종을 적극 지원할 방침이며 그리고 미국은 다른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강대해질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코로나19 앞에서 미국은 강대해진 것이 아니라 반대로 코로나19로 사망한 인구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로 되었다. 2021년 2월 말까지 미국의 코로나19 누적 확진자는 세계 총 확진자의 25%를 초과했고 사망인구 또한 세계 총 사망자의 20%에 근접, 50만 명을 초과하는 인구가 코로나19로 귀중한 생명을 잃었다. 유감스러운 것은 일부 사람들은 여전히 편견의 ‘색안경’을 벗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며칠 전 제네바에 상주하는 미국 대표단의 임시 대리 공사(临时代办)는 의연히 세계보건기구는 우한에서 원시 데이터와 독립적인 평가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접촉하고 전문가 팀이 발표할 보고서는 과학 연구에 기초해 보다 나은 대응을 준비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뜻인즉 전문가팀의 공동 연구 보고서의 과학성에 대해 의구심을 가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상한 것은 코로나19 발원지의 일부 핵심 쟁점을 연구할 때마다 미국 측은 과학자도 아니고 보건 분야의 전문가도 아닌 사람들이 나서서 이러쿵저러쿵하며 정치적 농단을 남긴다는 것이다. 중국 측의 투명하고 당당하며 개방적인 자세는 이미 많은 외국전문가들의 일치적인 공명을 자아냈다. 최근 세계보건기구의 많은 성원들은 중국에서 공동연구를 진행하는 동안, 우리는 이미 중국 측과 전면적인 솔직하고도 담백한 토론을 진행하였으며 전체 과정을 핵심 데이터를 얻을 수 있었기에 중국 측에 신뢰와 개방성을 느낄 수 있었다고 밝혔다. 국제 전문가 팀 성원인 다삭은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코로나 19 발원지 연구가 고도로 집중화가 될 수 있은 배경에는 우한 바이러스연구소 등과 함께 해당 전문가들이 심입되어 토론에 개입했고 개방된 교류를 가졌다. 이는 그야말로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고 감탄했다. 이는 중국 측이 발원지 연구에 최대한의 협력을 했고 전문가팀이 원하는 곳이면 어디나 다 찾아갈 수 있었으며 만나고 싶은 사람은 한 명씩 다 만났다는 것을 충분히 설명하고 있다. 바이러스 발원지 연구는 복잡한 과학적인 과제이며 코로나19는 인류 공동의 적이다. 희망하건대 서방국가들은 세계보건기구의 연구에 방해나 조작 그리고 잡음을 일으키지 말고 중국처럼 개방적이고도 투명하게 국제 전문가팀을 자국에 초청하여 조사 연구하고 전문가들의 일은 전문가들에게 맡겼으면 한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명지한 선택으로 될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21-04-01
  • 중국 산아제한 폐지, 노령화에 적극 대응해야⑤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인공지능(AI)의 시대가 점차 다가오고 있다. 이에 우리는 그래도 그렇게 많은 사람이 수요 되는가? 반대적인 관점은 인공지능이 사람이 하던 많은 일터를 대체하기에 많은 인구는 오히려 부담거리로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인공지능이 부분적으로 전통산업의 일터를 대체하지만 동시에 신형의 경제와 신형의 산업에 대한 고용수요도 크게 늘어나도록 추동할 수 있다고 인정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매 한 차례의 과학기술 진보가 전통산업체가 생산해내는 노동력 소모율은 낮추지만 총적 취업률은 감소시키지는 않았으며 동시에 핵심 산업은 새로운 더욱 많은 일터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예하면 자동차의 출현은 마차몰이꾼의 실업을 초래했지만 많은 버스와 트럭 운전자가 생기게 했으며 자동차 연구 개발, 제조, 수리 등 직업 등으로 자동차 업종 종사자는 이전 마차몰이꾼 수량을 크게 추월하였다. 역사의 경험에 따르면 농업생산율의 제고로 농업노동력의 감소를 가져왔지만 ‘실업’한 농민은 공장에 들어가 제조업에 종사하였고 또한 공업생산율의 부단한 제고로 노동자수가 부단히 감소되자 ‘실업’한 노동자들은 다시 서비스업에 진출하는 등 현상이 비일비재였다. 1989년부터 2018년 사이 미국 제조업의 취업인수는 1806만 명으로부터 1281만 명으로 감소, 감소폭이 29% 되었지만 서비스업에 취직한 인원수는 1883만 명에서 1억 2931만 명으로 증가, 증가폭은 587%가 되었으며 총 취업률은 하강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대폭 증가하였다. 미래 20년간 인공지능이 26%에 달하는 사람의 일터를 대체할 것이지만 일터는 여전히 38% 증가할 전망이다. 2018년 미국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普华永道会计师事务所)가 예측 발표한 ‘인공지능과 해당 기술이 중국 취업에 미치는 순 영향(人工智能和相关技术对中国就业的净影响)’에 따르면 미래 20년간 인공지능이 중국에 12%의 순 직업을 증설, 약 9000만 명에 달하는 사람의 일터와 맞먹었다. 이 중 인공지능이 사람의 일터 26%를 대체 특히는 공업과 농업 영역에서 각각 36%와 27%의 일자리를 대체하게 되지만 아울러 인공지능은 38%에 달하는 새로운 일터를 창출, 이 중 서비스업과 건축업에 각각 50%와 48%의 일터를 창조해주게 된다. 때문에 인공지능은 고용에 대체효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소득효과와 비용의 절감을 갖다 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회사로 놓고 볼 때 결과적으로 제품 가격이 싸지고 소비자의 실질적 소득이 높아져 소비를 촉진하며 나아가 생산의 확장과 고용의 증대 즉 일자리의 창출을 촉진하게 된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사람의 소비기능을 대체할 수는 없기에 인구감소로 인한 수요의 위축으로 경제발전은 저애를 받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그럼 당장 전면 개방해 출산을 장려해야 하는가? 최근 들어 생육을 전면 개방해야 하는가의 여하를 두고 쟁론이 매우 치열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19기 4중 전회에서는 ‘생육정책을 최적화하여 인구의 질 제고하자’란 슬로건이 제기되었고 어느 정도의 개진이 있었지만 여전히 중국은 ‘둘째 자녀 생육 전면 보급’이란 큰 틀에서는 제약을 받고 있다. 그럼 전면 개방하면 ‘가난할수록 자녀를 많이 낳는 현상’이 초래될까? 반대 관점의 1: 생육을 전면 개방하면 부유층과 가난 층이 많이 생육하고 중산계층이 적게 생육하는 현상이 초래돼 사회의 공평성에 문제가 생긴다. 반대 관점의 2 : 농촌의 출생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인구의 자질이 곧 하강된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반대관점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인정한다. 즉 생육은 매개 사람의 기본 권리이며 생육권은 마땅히 가정의 자주에 귀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생육의 전면 개방은 모든 가정에 있어서 일시동인(一视同仁)의 공평한 존중으로 되어야 한다. 그리고 현재 농촌의 생육율은 여전히 저조하여 농촌 출생인구의 폭증현상이 나타날 가능성이 아주 적다는 것이며 농촌의 출생인구 역시 저 자질 인구로만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이전에는 부동한 민족과 도농의 조건과 구역 구분의 생육정책보다는 아예 전면적 생육개방이 더욱 공평하다는 분석이다. 2015년, 전국, 도시 진과 향촌의 출산율은 각각 1.05%, 0.91%와 1.27%로 농촌의 생육율이 도시 진에 비해 약간 높을 뿐, 농촌 가임여성의 평균 출산아기수는 여전히 1.3명도 안 되었다. 생육정책의 조정은 심중해야 하는가 아니면 가속화해야 하는가? 반대관점: 정책조정은 반드시 심중하게 하면서 두 번째 자녀의 생육을 고무격려하고 조건이 허락되는 지방에서는 세 번째 혹은 네 번째 자녀 생육까지 허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두고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인정한다. 즉 생육개방정책은 너무 오랫동안 지연되어 왔기에 더 이상 미룰 것 없이 즉시 전면 개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땅히 전면 개방하여 생육을 격려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주장하는 것은 목전 인구형세가 너무 긴급하며 3차 출산붐 중 후반의 출생자 출산시기가 늦어질수록 절반의 효력만 발생하기 때문이다. 1980년 외동자녀 정책의 집행계획은 30년이었으나 자전우(翟振武) 등 교수들이 ‘두 번째 자녀 출산 허락’을 개시하면 출생인구가 대뜸 4995만 명에 달하고 생육율이 4.5%에 달할 것이라고 분석, 질질 끌면서 정책조정시기를 지연시켰다. 21세기 초 인구정책에 관련된 치열한 토론 중 보수파가 여전히 우세를 점하면서 생육정책의 조정은 여전히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2007년 쑹젠(宋健) 등 전문가들은 여전히 1990년 이래의 총적인 생육율이 1.8% 정도로 안정되고 있다고 인정, ‘11.5’ 기간 생육정책의 안정을 유지하면서 중앙에서 출범한 문건의 요구에 따라 “천방백계로 저 생육율 수준으로 안정시켜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자전우 교수는 “만약 2012년에 ‘두 번째 자녀 출산’을 허락하면 총적 생육율이 4.5%란 고봉기를 맞이하여 출생인구가 4995만 명에 달할 것”이라면서 ‘두 번째 자녀 출산’의 전면 개방을 미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전우는 또 “‘1가정 2자녀’가 되면 향 후 4-5년간 매년 130만 명 내지 160만 명의 아이가 더 태어나 도합 660만 명의 출생아가 더 늘어날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했다. 2013년 11월 중앙에서는 ‘1가정 2자녀’ 정책을 전면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2014년의 더 늘어난 출생인구는 47만 명에 그쳤으며 2015년에는 2014년에 비해 오히려 32만 명이 감소했다. 그럼에도 자전우 교수는 여전히 “‘1가정 2자녀 정책을 전면 개방’하면 미래 5년간 매년 160만 명 내지 470만 명의 아이가 현 상태보다 더 출생하게 된다고” 예측했다. 하지만 2015년 12월 중앙에서 ‘1가정 2자녀 정책’을 전면 개방하였지만 2016년 들어 2015년보다 더 출생한 영아는 131만 명에 그쳤으며 그것도 2017년에는 2016년에 비해 63만 명이 감소하였으며 2018년에는 심지어 2017년에 비해 200만 명이나 대폭 감소하기까지 했다. 자전우의 예측은 비록 이전에 비해서는 많이 낮아졌지만 현실의 수준에 비해서는 여전히 매우 높았다. 정책에 대한 보수 세력들의 영향으로 중국의 생육정책 조정은 ‘쌍 외동 2 자녀(부모 양측이 모두 외동일 경우 자녀 2명 출산할 수 있는 정책) — 일방 외동 2자녀(부모 양측 중 일방이 외동일 경우 자녀 2명 출산할 수 있는 정책) — 2자녀 출산 전면 개방’의 루트는 거부기 걸음으로 추진돼 왔다. 2016년 ‘2자녀 출산 전면 개방’이 되었지만 그 추진효과는 기대 이하였다. 그럼에도 계획생육 영역의 관원들은 ‘2자녀 출산 전면 개방’으로 대다수 가정의 수요를 만족시키고 있지만 만약 이런 부대조치의 개선으로 인해 앞으로 인구 대 방출의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책건의 : 생육격력 정책을 전면 개방하여 인구의 노령화에 적극 대응해야 인구는 경제사회 발전의 근본 목적이며 또한 경제사회 발전의 기초 요소이다. 때문에 생육정책의 조정은 가장 근본적이고도 가장 중요한 공급 측면의 구조 개혁으로 된다. 그리고 기타 위기와는 달리 장시기 동안의 저조의 생육율이 일으키는 인구위기는 장기성을 띠고 있으며 그 영향이 느릴 수는 있겠지만 일단 위기사태가 폭발하면 걷잡을 수 없다는 것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때문에 다음과 같이 건의하는 바이다. 한 방면으로는 하루 빨리 전면 개방하여 생육을 격려, 생육권이 가정의 자주로 되돌려야 하며 생육지지 시스템을 하루 빨리 구축해야 한다. 이 중 첫째는 차별화가 된 개인 세금 삭감 및 경제수당 정책을 실행하고 이를 임신보건으로부터 자녀의 18세 혹은 학력교육이 결속될 때까지 피복되어야 한다. 임신보건으로부터 분만을 거쳐 자녀가 18세 혹은 학력교육이 결속될 때까지 생육격려 시스템을 전면 건립하는 것을 탐색하여 임신기 보건 수당, 분만기 입원 수당, 위탁보육 지원금, 교육 수당, 가정 개인 세금삭감 및 개인세금 납부기준에 맞지 않는 저소득층에 대해 직접 경제보조금을 지급하는 것 등이 포함된다. 아울러 각지에서는 실제 상황에 근거하여 전국 정책의 기반에서 더욱 차별화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는 위탁교육 서비스 보급을 강화해야 하며 0-3세 위탁율을 현재의 4%로부터 40%로 확대함과 아울러 격세 돌봄에 대해 보조금을 지급해야 한다. 그리고 고용단위와 사회 역량 및 영유아 위탁 교육 서비스 기구에 대해 대폭 지지와 격려를 해야 하며 전일 위탁(全日托), 반일 위탁(半日托), 시간제 위탁과 임시 위탁 등 다양한 형태의 서비스망을 형성해야 한다. 동시에 위탁기구가 수요되지 않고 조부모(외조부모)에 의한 격 세대가 돌보게 되는 경우 조부모(외조부모)에 수당을 지급해 조부모들이 격 세대 돌봄의 적극성을 불러 일이키는 한편 부모의 육아압력을 경감시켜 주어야 한다. 셋째, 여성의 취업권를 진일보 보장하고 개선해야 하며 아울러 기업에 대해 출산세액 혜택을 주고 출산비용이 국가, 기업과 가정 간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분담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박차를 가해야 한다. 다음 출산휴가, 포유기 휴가 등 제도의 실행을 진일보 추동, 생육기 휴가, 남성의 출산협조 휴가 등 대우의 보장을 타당하게 해결해야 하며 여성의 취업권익을 침해하는 업체에 대해서는 경제 혹은 행정 처벌을 주어야 한다. 또한 직장 내 여성근로자의 규모와 연간 출산 상황에 따라 일정 수준의 세수 혜택을 주어 기업이 부담하는 출산비용을 경감시켜야 한다. 생육보험과 직원 의료보험은 2017년부터 통합 시범사업을 시작했기에 생육 보험의 피복면과 편의성 제고에 도움을 주는 역도를 높여야 한다. 넷째는 미혼으로 인한 생육의 평등 권리를 보장하는 사업을 강화해야 한다. 비록 미혼 생육을 격려하는 것은 아니지만 미혼으로 생육한 여성 및 그 자녀는 여전히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 하며 특히는 호적등록, 입학 등 방면에서 기시를 받지 말아야 한다. 다섯째, 교육과 의료의 투입을 대폭 늘여 집값의 장기적인 안정을 유지하고 양육 원가를 대폭 낮춰야 한다. 거기에 대학입학 전 교육투입을 늘리고 공립유치원 건립을 대대적으로 증가해야 하며 9년 의무교육제를 12년으로 연장해야 한다. 동시에 교육개혁을 추진하고 ‘가정의 숙제가 학부모의 숙제로 되는 현상’을 뿌리 뽑아야 한다. 그리고 의료투입을 늘리고 아울러 의약위생체제의 개혁을 추진하며 의료비용을 절실하게 낮춰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노령화에 적극 대응하고 질 높은 상품과 서비스 시스템을 구축하여 노년친화의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첫째는 국가자금계획의 부족을 사회보험으로 하루 속히 보충하는 것을 추진, 사회보험으로 양로보장 체계의 제 2, 제 3의 기둥 역할을 발휘하게 해야 한다. 중앙과 지방의 일부 국유자본을 이전해 사회보험기금으로 만드는 프로젝트는 2020년 말까지 완료되었고 지금은 그 후속 작업이 추진되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각 지역의 사회 보험료의 부족은 심각한 불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전국적으로 통일된 계획으로 지역사이의 불균형을 평정하고 성과 시의 사회보험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미봉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현재 중국의 기본 양로보호금은 과도하게 제 1 지주(支柱)에 의존(85%)하고 있으며 기업연금과 직업연금 그리고 개인이 구매하는 상업건강보험과 상업양로보험이 대표하는 제 2와 제 3 지주의 비율은 아직도 비교적 낮은 상황이다. 둘째는 노인인구에 대한 평생학습 시스템을 구축하고 기업이 노년 노동력을 유지 및 고용하는 것을 장려하며 최적기에 적절하게 정년 연장을 하도록 해야 한다. 중국 남성의 법정퇴직 연령은 60주세로서 일본(65세), 한국(61세), 영국(65세), 미국(66세) 등 나라보다 일찍하다. 노년에 대한 평생학습 시스템을 구축하여 노년의 인력자본 수준을 끌어올리어 고용주가 연장 노동력을 유용(留用)하고 계속 고용함에 있어서의 장애를 제거하고 아울러 양로금 개혁 등을 통하여 노년 노동력이 직업생애를 연장하는 것에 대해 격려해야 한다. 셋째는 노년을 위한 높은 질의 서비스와 상품을 제공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양로 인재대오 건설을 추동하여 가정과 사회구역을 기반으로 기구의 충분한 발전과 의료양로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다 층 차 양로 서비스 시스템을 구축을 가속화하여 노년에 대한 서비스의 과학기술화, 정보화 수준을 제고시켜야 하며 노년 건강에 대한 과학기술의 지지력을 대폭 높여야 한다. 넷째는 노년 우호형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중국 전통의 효도문화를 발양하고 빛내고 노인을 존중하는 문화를 더욱 고양하면서 양로, 효로, 경로의 사회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그리고 노인들의 사회참여를 위한 공공서비스의 단점을 보완하여 노인들로 하여금 사회의 교육, 문화, 정신 및 문화‧오락 자원을 누릴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것으로 노인의 합법적 권익을 보장해야 한다. 총체적으로 인구의 고령화에 대비한 법치적 환경을 마련하고 노인의 합법적 권익을 보장하면서 노인들로 하여금 가정, 사회와 정부와 더불어 참여하는 양호한 분위기를 조성해야 하는 것이다. (끝)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1-04-01
  • 사람들은 왜 좋은 이름에 집착할까
    ●김희수(중국)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 마음에 안 들어 개명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애초에 그 이름을 지었을 때는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아름다운 축복이 깃들었을 것이다. 부모가 고민하면서 숱한 이름 가운데서 골랐을 좋은 이름을 버리고 새 이름을 지으려고 할 때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다. 다른 아이들이 놀려준다거나 흔한 이름이어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거나 남이 고치니 덩달아 고친다거나 또는 이름을 고쳐야 출세한다는 점쟁이의 말을 믿는다거나 등등 나름대로의 이유는 있겠지만 과연 이름을 고친다고 운명이 달라질까? 모택동은 1947년 3월 13일에 호종남(胡宗南)이 쳐들어왔을 때 연안을 떠나야 승리한다는 뜻인 리득승(离得胜)과 음이 같은 리덕승(李德胜)으로 개명했기에 전국을 해방하고 승리했다. 하지만 대립(戴笠)은 사주팔자에 좋다는 우롱(雨农)이라고 개명했지만 결국 좋은 끝장을 보지 못하고 1946년 3월 17일에 비행기 추락 사고로 빗속(雨中)에서 죽었다. 성공했거나 출세한 사람들은 이름을 잘 지어서 출세한 것일까? 정말 그렇다면 이름을 지을 때 출세한 사람들의 이름을 따서 지으면 출세는 근심하지 않아서 될 것이다. 이 세상에 동성동명이 많다. 그러나 같은 성과 같은 이름을 가졌다고 해도 운명은 서로 다르다. 동성동명이라고 해도 출세한 사람과 출세하지 못한 사람이 있을 것이고 장수한 사람과 단명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자신이 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이름 탓이 아니다. 한마디로 성공한 사람들이 이름을 잘 지어서 출세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세상에 이름 하나 잘 지어서 성공했거나 출세한 사람이 없다. 물론 개명한 후 성공했거나 출세한 사람들은 적지 않다. 그러나 그들이 개명한 후 손 놓고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다면 출세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들은 단순히 좋은 이름을 지어서 출세한 것이 아니다. 반면에 개명 후 실패한 사람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이 개인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자녀에게 좋은 이름을 지어주겠다는 부모의 마음 지극히 옳은 것이고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 개명하려는 사람의 마음도 나무람 해서는 안 된다. 다만 이름에 너무 집착해 자주 개명하려고 하고 일이 뜻대로 안되면 이름 탓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만은 바꿔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을 만족시키고 충족시키는 좋은 이름은 없다. 절대적으로 좋은 이름은 없다는 뜻이다. 어떤 이름이 좋다고 너도나도 그 이름을 지으면 중복이 생기고 개성이 없어지게 된다. 작명소가 생겨나고 이름 짓기에 도움을 주는 이름 짓기 프로그램이 나오면서 좋은 이름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름은 이름일 뿐 운명을 개변하지 못한다. 운명을 개변하는 것은 좋은 이름이 아니라 자신의 두 손이다. 이름 없이 마당쇠로 살다가 죽은 사람도 있고 이름 석 자로도 모자라 자, 호까지 달고 숱한 별명까지 길게 붙여서 자신을 나타낸 사람들도 있다. 이름이 없건 이름이 하나이건 이름이 여러 개이건 또는 좋은 이름이건 수수한 이름이건 모두 죽으면 후세에 이름이 남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대부분은 죽음과 함께 그 이름도 사라진다. 이름을 바꾼다고 운명이 바뀌지 않는다. 아무리 좋다고 하는 이름으로 개명해도 자신의 노력이 없이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하지만 개명의 좋은 점도 있다. 이름을 바꾸면 자신심이 생겨날 수 있다. 이제야 자아를 찾은 것 같고 이제야 진정한 내가 된 것 같아 날것만 같은 심정 일수 있다. 이런 자신심에 날개를 달고 훨훨 날려면 자아도취에 취해 꿈만 꾸지 말고 꾸준한 노력의 날갯짓을 힘차게 해야 한다. 개명이 헛되게 되지 않으려면 원대한 포부는 아니어도 자신만의 당찬 포부를 품고 참다운 인생관을 세우고 자신의 웅대한 목표를 위해 꾸준히 날갯짓을 해야 좋은 이름에 걸맞은 결과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21-03-21
  • '삼국지' 재해석⑱ 삼국시대 가장 걸출한 정치가 조조Ⅰ
    ●김정룡(多가치 포럼 위원장) <중국통사> 저자 판원란(范文瀾)은 기원 190~280년까지 사이를 삼국시대라고 정의하였다. 삼국시대는 중국역사상 비교적 혼란한 시기였고 이 난세에 영웅이 속출하여 중국 고전소설 중 나관중의 <삼국연의>가 지금까지 가장 인기가 높다. 이 시대 영웅들 중 누가 가장 걸출한 정치가였을까? 사람들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제갈량이나 유비를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제갈량이나 유비는 당시 가장 걸출한 정치가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제갈량이나 유비를 걸출한 정치가로 떠올릴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소설 <삼국연의>에 속아왔기 때문이다. <삼국강의(品三國)>로 유명해진 이중텐 교수는 “역사인물은 역사적인 이미지, 문학적인 이미지, 민간적인 이미지 등 세 가지 이미지가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제갈량과 유비에 대한 인식은 모두 문학적인 이미지일 뿐 역사적인 이미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당시 가장 걸출한 정치가는 누구였을까? 조조였다. 물론 조조에 대한 평가는 삼국시대 직후 진(晉)나라 때부터 현재까지 복잡하고 다양하며 대체로 부정적인 평가가 더 우세했다. 조조에 대한 나쁜 평가는 두 가지에서 기인된 결과인데 하나는 유교적인 영향이었고 다른 하나는 문학이 그려낸 이미지가 영향을 끼친 탓이다. 현대에 들어 조조에 대해 우호적인 평가를 내린 사람은 노신이다. 그는 <위진시대의 품격∙문장과 약∙술의 관계>라는 글에서 “조조는 대단한 사람이며 적어도 영웅이다. 내가 비록 조조와 한패는 아니지만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그를 매우 존경한다.”고 말했다. 가장 최근에 와서 조조를 전면적으로 명예회복을 시킨 것은 이중텐 교수이다. CCTV 백가강단 프로에서 <삼국강의(品三國)>를 진행하여 중국 사람들이 조조에 대해 새롭게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관점을 바꿔놓았다. 필자는 이중텐 교수의 조조에 대한 명예회복이 바로 조조의 역사적이면서도 진실에 부합하는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조조의 역사적인 이미지의 진실은 어떠했는지? 조조의 출생비밀과 개구쟁이 청소년 시절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조조를 서한(西漢)의 상국(相國) 조참(曹參)의 후예라고 기록했는데 이중텐 교수는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말한다. 조조의 성조차도 본래 조씨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면 조라는 성은 그의 부친인 조숭(曹嵩)이 조등(曹騰)의 양자가 되면서 얻었기 때문이다. 양자관계라면 전혀 혈연관계가 없다. 가령 조등이 조참의 후예라는 것을 고증해내더라도 조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조조의 아버지는 조숭이 분명하지만 조숭은 누구의 아들일까? 아무도 모르는 수수께끼였다. 역사학자 진수도 이에 대해 더 자세하게 밝힐 길이 없어 애매모호한 말을 남겼다. “그의 출생의 전말에 대해선 자세히 알 수 있는 사람이 없다.” 한국드라마에 단골소재로 등장하는 출생비밀이 2천 년 전 조조도 안고 있던 문제였다. 조조는 자기 자신의 가문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었을까? 그는 <가전(家傳, 족보에 해당함)>을 지을 때 “조숙진탁(曹叔振鐸)의 후예라고 칭했다. 조숙진탁은 주나라 무왕이 자신의 동생인 희진탁(姬振鐸)을 조읍(曹邑)에 봉해 조백(曹伯)으로 삼았는데 조숙진탁은 조씨의 시조가 되었다. 조조가 자신의 선대를 주 문왕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데 이것도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역사학자들은 주장한다. 왜 조조는 굳이 이렇게 거창하게 ‘족보’를 지어내려고 했을까? 있어보이기 위해서였다. 왜 있어보여야 했을까? 동한 말년에 사회관계에서나 출신 가문을 매우 중시하였으므로 조조가 비록 이런 풍조를 못마땅하게 여겼더라도 정치상의 필요에 의해 신분을 높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조조의 아버지는 분명하기 때문에 조조는 환관가문에서 출생한 것이 명확하다. 조조의 아버지를 양자로 받아들인 조등은 당시 환관으로 비정후(費亭侯)에 봉해지고 대장추(大長秋)에 임명되었다. 대장추는 환관 중의 고관으로서 2천 석의 녹봉을 받았는데 오늘 날의 급별로 말하자면 성부급(省部級, 한국의 장관급에 해당함)이었으니 대단한 관원이었다. 조등은 사람 됨됨이도 괜찮아서 환관 중에서 사인들과도 잘 어울렸고 좋은 일과 큰일도 많이 해서 <후한서>에 전기가 실려 있다. 조등이 살던 시대는 후한 말로서 환관이 세상을 쥐락펴락하던 때였다. 조등과 같은 환관은 관직도 높고 재산도 많지만 자식이 없어 양자를 들였던 것이다. 한편 관직도 높고 재산도 많았지만 환관이란 신분은 천대 받는 신분이었고 그들 가문에서 태어난 자식도 출생신분이 출세하는데 있어서 떳떳하지 못해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재산이 많아 생활이 매우 여유로웠다. 조조의 아버지 조숭은 태위라는 관직을 1억 전(錢)을 주고 샀으니 조조도 어릴 적 부잣집 도련님으로 매우 호강하게 자랐을 것이다. 돈이 많은 가문에서 자란 조조는 가정교육이 별로였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조조 자신이 이런 시를 읊었다. “삼사(三徙)의 가르침도 없었고 과정(過庭)의 훈육도 받지 못했노라.” 여기서 ‘삼사’는 맹자의 엄마가 아들에게 좋은 교육환경을 마련해주려고 세 번 이사한 것을 뜻한다. ‘과정’은 공자의 아들이 마당을 지나갈 때 공자가 그를 불러 세워 두 차례 가르침을 준 일로, 한 번은 시(詩)를 다른 한 번은 예(禮)를 배우라고 말했다. 조조가 읊었던 시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부모는 자녀교육에 별로 관심을 갖지 못했던 것 같다. 돈은 많고 받은 교육이 허술하다면 그 아이는 어떤 아이었을까? 틀림없이 문제아다. 조조가 바로 문제아였다. 사서에 이르기를, “조조가 어렸을 때 매를 날리거나 개를 풀어놓고 사냥하기를 좋아해서 내키는 대로 마음껏 놀았다.” 숙부의 눈에는 조조가 아무래도 사람 질 할 것 같지 않아 걱정이 많았다. 그는 여러 차례 조조 아버지에게 좀 교육시키라고 일러바쳤다. 조조가 이 일을 알고 나서 숙부에게 보복하기로 맘먹었다. 어느 하루 조조는 길에서 마주 오는 숙부를 보자 입을 일그러뜨려 주둥이가 돌아간 것처럼 했다. 숙부는 곧 조조 아버지에게 조카가 풍을 맞았다고 알렸다. 놀란 조조 아버지가 아들을 찾아보니 입이 멀쩡해 있었다. 어찌된 사연인지? 물었더니 조조는 숙부를 혼내기 위해 연출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 후부터 조조의 아버지는 조조의 숙부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어릴 적 조조는 동네에서 말썽을 피우는 장난꾸러기, 개구쟁이 소년이었다. 어느 하루 조조와 원소가 동네 결혼식 구경 갔다가 갑자기 큰일을 저지른다. 어린 녀석들이 신부를 훔칠 끔찍한 맘먹고 기회를 노리다가 갑자기 ‘도둑이야!’고 외쳤다. 사람들이 정신없이 집에서 뛰쳐나오자 조조가 방에 들어가 신부를 둘러메고 달아났다. 너무 급한 나머지 도망갈 길이 막히자 원소는 덤불숲(일설에 의하면 깊은 구덩이에 빠졌다고 함)에 뛰어 들어 갔다가 가시에 걸려 꼼짝달싹 못하게 되었다. 조조가 갑자기 기묘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도둑이 여기 있어요.”라고 크게 외쳤다. 막다른 골목에 빠져 있던 원소는 젖 먹던 힘을 다해 초인적으로 뛰쳐나왔다. <삼국지>에서는 어릴 적 조조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젊어서부터 기지가 뛰어나고 상황 대처 능력이 매우 좋았다. 권모술수에 능했고 자신의 힘으로 남을 잘 도왔으며 자유분방한 성격이었지만 품행과 학업에는 정진하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지 않았고 심지어 천박하다고 경멸했으며 후에 어떤 선비(남양의 명사 종세림, 宗世林)는 조조와 결연히 단교하기까지 했다. 부패한 세태에 실망한 청년 조조 소설 <삼국연의>에 다음과 같은 스토리가 등장한다. 조조가 동탁을 암살하려고 사도 왕윤에게서 칠보도를 선사 받는다. 조조는 동탁이 잠을 자는 침대에 접근하여 손을 쓰려는 찰나에 동탁이 잠에서 깨어난다. 당황한 조조는 칠보도를 동탁에게 바치러 왔다고 거짓말을 한다. 칠보도는 천하제일 칼이므로 동탁도 눈이 번쩍 띄어 흐뭇해한다. 그 때 밖에 나갔던 여포가 동탁의 침실에 가까워지자 조조는 급히 인사를 올리고 방에서 빠져나온다. 여포는 조조가 동탁에게 칠보도를 바치러 온 것이 아니라 암살하러 왔다는 것을 밝히자 동탁은 조조를 잡아들이려고 현상금이 걸린 체포령을 내린다. 다급해진 조조는 목숨을 구하고자 낙양을 급히 빠져나간다. 조조의 동탁 암살 사건이 비록 실패했지만 당시 동탁이란 이름만 거들어도 모두 오금이 저려날 지경으로 무서워하는 ‘거인’을 죽이려한 조조의 용기에 감탄하여 조조는 일약 사회적으로 동네방네 소문이 자자한 스타가 된다. 이 스토리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아니 듣기 좋은 말로 그냥 소설이 지어낸 허구이다. 그렇다면 조조는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리게 되었을까? 조조는 불량배 청소년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조를 하찮게 보았다. 그런데 유일하게 태위 교현(橋玄)이란 사람이 조조를 높게 평가했다. “천하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이니 당대의 걸출한 인재가 아니면 구제할 수 없을 것이오. 천하를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그대일 것이오.”라고 말하면서 처자식을 부탁하기에 이른다. 조조를 좋게 본 교현은 조조를 친구 허소(許劭)에게 소개한다. 허소는 당시 가장 유명한 감상가이자 평론가였다. 그는 매월 초하루에 당시의 인물들에 대한 품평을 발표하여 월단평(月旦評)이라 불렸다. 누구를 막론하고 한 번 논평을 거치면 그 해당인의 몸값은 백배로 뛰어오른다. 그렇게 되면 상류사회 진출이 훨씬 쉬워진다. 사회진출을 바라는 조조가 평을 부탁했다. 그러나 허소는 좀체로 움직이지 않았다. 너무 졸라 할 수 없이 허소가 조조를 품평한다. 그 때 허소가 한 말이 현재까지도 시빗거리가 되어왔다. “당신은 치세의 능신이요, 난세의 간웅이다.” 이 말을 들은 조조는 크게 웃었다. 매우 즐거워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웃음의 의미에 대해서도 장삼이사의 견해가 매우 다르며 대체적으로 조조를 깎아내리는 쪽에 무게를 두어왔다. <후한서> 허소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조조가 아직 벼슬을 하지 않았을 때 늘 공손한 말과 많은 예물로서 자신을 평가해주기를 원하였다. 허소는 그를 하찮게 여겨서 상대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조조가 빈틈을 노려 허소를 협박하자 허소는 어쩔 수 없어서 ‘그대는 태평한 시대에는 간적, 혼란한 시대에는 영웅이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조조는 매우 즐거워하며 떠났다.” 조조는 관료사회에 진출하기 전에 자신을 세상에 홍보하려고 허소를 졸랐을 수도 있고 또 자신이 방탕했던 과거도 있고 해서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허소한테 달라붙어 평을 부탁했을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조조는 왕성한 혈기를 지닌 청년의 들끓는 열기로 관직생활에 뛰어들었고 뭔가 큰일을 해내고야 말 것이라는 웅대한 포부를 지녔다. 조조가 처음 맡은 관직은 낙양북부위(洛陽北部尉)였다. 부현급이고 주로 치안담당인 경찰서장 역할이었다. 이 관직은 좋은 자리가 아니었다. 이 자리는 높은 자리도 아니었고 권한이 크지도 않았으며 책임만 무겁고 성가신 일도 적지 않았다. 천자가 사는 곳의 주변이라 권세가들이 매우 많았기 때문이다. 이 권세가들은 국법도 안중에 없었고 말썽을 일으키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그렇다고 함부로 건드릴 수도 없었다. 낙양북부위는 다른 사람에게는 나쁜 자리일 수 있지만 조조에게는 적합한 자리였고 열과 성을 다 해 임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관서의 아문(衙門)을 새롭게 바꾸고 오색의 큰 몽둥이를 만들어 대문마다 10개씩 걸어놓고는 “금령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권세가 있는 자라도 가리지 말고 모두 몽둥이로 때려죽이라.”고 명했다. 몇 달 뒤에 과연 사람을 때려죽인 사건이 터졌다. 영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환관 건석의 숙부를 때려죽였던 것이다. 건석은 지금의 청와대 경호실장에 해당하는 관직을 맡고 있었으니 그의 숙부는 조조 같은 말단관료를 안하무인으로 대했다. 어느 하루 야간 통행의 금령을 공공연하게 어겼다. 조조는 기다렸다는 듯이 조금도 망설임 없이 그를 오색 봉으로 때려죽였다. 실로 일벌백계였다. 이 일이 있고나서 수도에 밤에 나다니는 발걸음이 끊겼고 감히 금령을 어기는 자가 없어져서 치안이 크게 좋아졌고 조조는 이 때문에 조야(朝野)에 이름을 떨친 스타가 되었다. 그런데 세상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았다. 십상시 중에서도 세력이 만만치 않는 건석의 숙부를 때려죽였으니 당연히 후폭풍이 일기 마련이었다. 법으로 세상을 다스려 천하를 공정하고 공평한 사회로 구축하려는 조조의 꿈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꼴이 되어 뒷공론이 자자했다. 그러나 누구도 대놓고 조조를 어떻게 하지는 않았지만 조조 스스로 세태에 염세증을 느끼고 관직을 떠난다. 왜냐하면 당시는 매관매직 풍조가 심각했고 관료사회는 부패하기 말이 아니었다. 그러한 열악한 환경에서 법제를 강화하려고 만약 계속 권세가들의 가족을 불편하게 만든다면 세상이 조조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이중텐 교수는 당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조조의 시대는 승냥이와 이리가 길을 막아섰고 여우와 살쾡이가 창궐했다. 조조는 지방관이 되었을 때 재빠르게 질서를 바로잡고 법률을 엄정하게 적용하며 맹렬하고 신속하게 움직이겠다는 중대 결심을 했다. 그가 탐관오리를 파면시키고 불법을 엄단하자 사악한 세력들은 조조라는 말만 꺼내도 무서워서 벌벌 떨었고 심지어 줄행랑을 놓는 사람마저 있었다. 그 결과 ‘정치와 교화가 크게 행해져서 군(郡) 전체가 태평’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는가? 그가 못살게 굴고 있다는 꼬투리를 잡은 밀고장이 끊임없이 어전에 전달되었고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 임직을 변경하는 전근 명령을 낸다. 그의 부친 조숭이 음으로 양으로 보호해주지 않았다면 그에게 좋은 결과는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결과’의 중국어 뉘앙스는 죽음을 의미하거나 적어도 인생을 망친다는 뜻이 있다. “이번에는 조조가 조정과 관리사회를 꿰뚫어 보았다. 그는 동한 왕조는 이미 치료할 약이 없으며 천하의 대란은 이미 역전시킬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설사 혼란해지지 않더라도 썩어 문드러진 조정과 관리사회는 더 이상 ‘치세의 능신’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나라를 위할 길이 없음을 깊이 느낀 조조는 더 이상 자신의 주장을 개진하거나 계책을 올리지 않았다. 아울러 또 한 번 조정의 임명을 사절하고(이번 임명은 봉록 2천 석의 동군태수였음) 고향으로 돌아와 성 밖에 집을 짓고 문을 걸어 잠그고 책을 읽었으며 한가할 때에는 사냥을 하면서 지냈다.” 얼마간 지난 후 조조는 다시 조정에 입조하여 전군교위(殿軍校尉)를 맡는다. 이 직책은 팔교위 중 서열 네 번째였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1-03-14
  • 중국 산아제한 폐지, 노령화에 적극 대응해야④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장기 이래 중국 인구에 관한 논쟁은 멈춘 적이 없다. 그 하이라이트는 바로 3개 방면에 있었다. 첫째, 중국의 적정 인구규모는 얼마나 커야 하는 것이고 둘째, 인구자질에 대비해 인구 수량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며 셋째는 즉시 전면 개방하여 생육을 격려해야 하는가 등이었다. 중국의 적정 인구규모는 얼마인가? ‘적정인구론’은 계획생육 정책의 이론에 기초한 것으로 목전 이 관점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적지 않은바 이는 일체 인구쟁의에 있어서의 원초라 할 수 있다. 일찍 1980년대에 후바오성(胡保生), 쑹젠(宋健), 텐쉐웬(田雪原) 등 학자들은 이제 100년 후에 가서 중국의 적정인구는 7억 명 좌우로 만약 인구를 통제하지 않으면 2080년에 가서 중국 인구는 43억 명에 달할 것인바 이는 외동자녀정책의 합리성과 필요성을 논증한다고 분석했다. 첫째, ‘적정인구’란 그냥 추상적인 개념으로 그 추산은 많은 장기적인 가설이 수요 되는 것이며 역사적인 상황을 갖고는 정확하게 계산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다. 프랑스의 인구 학자 알베르호드 소베(1982)는 일찍 “인구 학계는 적정인구를 하나의 과도적인 공구처럼 사용해볼 필요가 있다. 마치 수학가가 허구적인 수자를 쓰듯이 말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중국의 쑹젠(宋健), 텐쉐웬(田雪原) 등 학자들도 미래 100년의 중국 인구 규모변화를 예측하면서 당시 3.0%의 총 생육율로 직접 멀리 추측, 총 출산율이 경제사회 발전추세보다는 저하된다는 법칙을 생략하고는 만약 인구를 통제하지 않으면 중국인구가 43억에 이르게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사실상 2000년에 들어선 후 중국의 총 출산율은 1.6% 이하로 떨어졌다. 1981년 당시 텐쉐웬은 공업기술 장비의 정도 = 공업고정자산/공업노동인수, 참고로 발달국가의 상황을 보면서 그는 공업고정자산의 년 평균 성장율을 5.5% 내지 6%로 가정하고 공업노동자 기술 장비의 년 평균 성장율을 4% 내지 5%로 잡고는 발달국가의 공업기술 장비의 수준을 따라 잡으려면 2080년 중국의 공업노동자는 가장 많아서야 0.6억이며 다시 농업과 봉사업의 노동자의 최대 규모를 일정 비례로 계산하면 2080년에 이르러 중국의 적정인구는 6.5억 내지 7억이란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하지만 만약 고정자산의 연 성장율을 1%를 증가해도 2080년에 이르러 중국의 적정 인구는 7억 명을 훨씬 초과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리고 실제상 1992년부터 2018년 사이 중국의 제 2 산업의 고정자산 투자는 연 평균 19.6%로 증가속도를 보이면서 텐쉐웬의 1981년 가설을 크게 초과하였다. 둘 째, 인구의 생활감당력 능력의 진보가 부단히 제고되고 있어 절대적인 적정인구가 없다는 것이다. 지난 세기 중후기 ‘인구폭발’ 사조가 성행할 때를 예견이라도 한 듯 일찍 1948년 영국학자 포그는 지구 토지와 자원의 잠재력은 인구 22억 명까지는 먹여살릴 수는 있겠으나 이를 초과하면 인류는 곧 멸망적인 재난에 직면하게 된다고 했다. 그리고 1968년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의 파울 에를리히 교수는 자기의 저서 ‘인구폭발론’에서 전 세계인구가 약 35억 명이 되면 지구 생태환경의 감당능력을 초과하게 된다고 제출, 아울러 20세기 70연대와 80연대에 이르면 수습할 수 없는 기근과 동란이 폭발할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 전 세계의 인구는 이미 근 76억 명에 접근, 총체적으로 큰 혼잡이 없이 질서가 있으며 자원이 고갈되거나 환경붕괴 같은 큰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리고 인구에 대한 자원 환경의 적재적소(承载力) 능력은 과학기술의 진보에 따라 현저하게 높아졌다. 예하면 인류의 원유와 천연가스 탐사에 의해 1980년부터 2017년 사이 전 세계 원유 매장량(잉여 매장량/ 그 해 생산량)은 약 30년에서 50.2년으로 증가, 감소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가하였으며 천연가스 매장량도 49.9년에서 53.6년으로 파동적이면서도 증장 세를 보였다. 그리고 태양광, 수력, 풍력 등 재생에너지의 개발과 활용을 통해 원래의 비 자원 에너지를 활용에너지로 전환하여 큰 효과를 보고 있다. 세계은행의 데이터에 따르면 1960부터 2015년 사이 글로벌 화석연료 소비비중은 원래의 94.1%에서 79.7%로 감소되었으며 원전과 대체 에너지 소비비중이 원래의 2.7%에서 13.4%로 상승했다. 또한 이스라엘의 일인당 담수 량은 원래 중국의 4%에 불과했지만 바닷물의 담수화에 의존하는 등 기술에 의해 물 자원 부족문제를 완화시켰다. 인구의 자질제고가 관건이다. 그렇다면 인구의 숫자는 중요하지 않는가? 첫째, 당전의 사회는 인력자원의 중요성이 돌출하게 나오고 있는 사회이다. 거기에 앞으로는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량 대체하게 된다. 그렇다면 인구 숫자의 중요성 여하는? 1)인구 3억인 미국이 인구 14억을 가진 중국보다 부강한 것이다. 그럼 인구가 적어도 대국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반대 관점의 1: 국력은 주요하게 인구의 숫자가 아닌 인구의 질에 의해 결정된다. 리소핑(李小平), 청언푸(程恩富) 등 소수의 학자들은 인구가 적으면 일인당 GDP가 더욱 상승하게 된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우리는 인구의 숫자와 인구의 질이 공동으로 국력에 영향을 준다고 인정한다. 간단하게 말하면 국력 = 인구의 숫자 * 인구의 질 * 기타 요소이다. 한 방면으로는 인구가 많은 것은 국가의 우세이지 열세가 아니다. 1978년부터 2018년 사이 중국의 GDP는 미국 GDP의 6%로부터 지금의 63%로 상승, 목전의 발전 추세라면 중국의 경제총량은 2028년 전후가 되면 미국을 따돌릴 수 있다. 만약 현재의 중국인구가 3억 명 내지 7억 명이라면 미국과의 차이가 현실과는 크게 멀어지기 마련이며 민족부흥의 길은 더욱 멀기만 한 것이다. 다른 한 방면으로 인구의 대폭도 감소는 도시의 대폭 위축 심지어 없어질 수도 있으며 대량의 산업이 피폐해지거나 없어지게 되어 국력이 크게 손상되기 마련이다. 예하면 1960년부터 2015년까지 일본의 ‘석탄도시’ 유바리 시의 인구는 10.8만 명에서 8843명으로 감소,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1980년부터 2015년 사이 9.1%로부터 48.6%로 상승했으며 2006년에는 재정파산을 고하였다. 목전의 추세라면 2019년부터 2100년 사이 중국인구가 14억에서 7.5억 명으로 위축되어 전 세계에서 점하는 비율이 19%에서 7%로 내려가게 된다. 한편 미국은 장기간에 거쳐 생육을 고무하고 고 자질의 이민을 대량 영입, 특히 두 차례에 거친 세계대전 기간 안정 환경으로 대량의 인구와 인재를 영입, 1900년부터 2018년 사이 미국의 인구는 7621만 명에서 3.3억 명으로 상승하였다. 유엔에 따르면 2100년에 들어 미국의 인구는 4.3억 명으로 전망, 그러면 그 때에 가서 인구는 미국이란 대국 지위의 형성과 공고성에 아주 중요한 작용을 할 것으로 보인다. 둘째, 인구는 소비자일 뿐만 아니라 더우기는 인구가 생산자란 것이다. 인구가 많은 것은 수요 측으로 놓고 보면 큰 시장을 형성하는가 하면 공급 측으로 놓고 보아도 충분한 노동력과 더 많은 인재를 제공하게 된다. 그러나 인구가 적으면 일인당 GDP가 더 높다는 관점으로 오직 인구가 경제에 대한 소비만 중시할 뿐 인구가 경제에 대한 창조는 홀시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일인당 GDP로 놓고 보면 인구는 분모(分母)뿐만 아니라 분자(分子)로도 작용하며 그 작용은 더욱 기초적이고도 더 오랫동안 지속되기 마련인 것이다. 그 어떤 역사의 경험도 인구총량과 일인당 GDP가 서로 마이너스 관계라는 것을 증명한 적이 없으며 현실적으로 그 어떤 나라나 지역도 인구감소를 통해 경제의 쾌속 발전을 이룩한 사례가 없었다. 반대로 일본과 유럽의 많은 국가를 포함한 발달국가들에서는 모두 생육을 격려하면서 인구증장을 모색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019년 당시의 일본 총리 아베신조는 그 해 일본의 출생인구가 처음으로 90만 명 선이 붕괴되자 “현재의 사태는 매우 심각하다. 이는 국난(国难)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총 생육 율을 1.4%에서 1.8%로 회복시킬 것을 간절히 희망한다고 했다. 또한 2020년 초 러시아 대통령 푸틴은 연방회의에서 대통령 국정 교서문(国情咨文)을 발표하면서 “러시아의 운명과 역사의 전망은 인구에 달려 있는바 1.5%의 총 생육 율은 너무 낮다. 이제 다음의 10년 중반전에 출생 율 증가를 보장해야 한다. 2020년부터 러시아는 첫 아이 가정도 ‘어머니 기금’을 받을 수 있는 분명하고도 폭 넓으며 체계적인 가족지원 프로젝트가 필요하다”라고 강조하였다. 수요의 단적 면에서 볼 때 큰 시장의 이윤 공간은 기업들로 하여금 더 많은 연구개발 투자를 형성하게 한다. 큰 시장은 기업주체가 많아 분업을 세분화하기에 생산성을 높일 수 있고 기업경쟁도 치열해 혁신동력이 강화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인구가 많으면 창신 추진에 유리하며 큰 시장에서의 미소한 수요 역시 하나의 시장을 형성할 수 있기에 작은 기술의 창조도 그 생존이 가능한 것이다. 사람들은 인구가 많으면 지하철이 많이 붐비고 있다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사실상 인구가 적은 도시는 지하철 건설은 엄두도 못 내는 상황이다. 그리고 인구가 많기에 2019년 말까지 중국의 고속철 여정은 3.5만 킬로미터에 달하여 세계 제 1의 순위에 올랐다. 동시에 중국은 미국과 유럽에 이어 제 3 대 자국산 대형여객기를 만들어 내는 지구로 되었다. 현재 세계에서 오직 미국, 유럽과 중국만이 충족한 시장으로 대형 여객기 산업이 수요하는 규모를 만족시키고 있다. 거대한 소비시장이 있기에 중국의 인터넷 경제발전 또한 주목을 끌고 있으며 전자 상거래, 모바일 결제, 공유경제, 인공지능 등 항업이 신속히 발전하고 있다. 2018년 말 중국의 유니콘(独角兽) 기업수와 추정치는 각각 세계의 38%와 42%를 차지했으며 2013년부터 2018년 사이 중국의 매년 유니콘 기업수는 1개로부터 32개로 발전, 동시기 미국은 15개로부터 53개로 발전하였으며 이 사이 중국과 미국의 거리는 쾌속 축소되었다. 다음 단면적인 공급에서 볼 때 인구가 인재의 기초로 되자면 인구가 많아야 그만큼 인재가 더욱 많아지고 창의력도 그만큼 강해지기 마련이다. 현재 중국에서 대학 전과 및 그 이상 학력을 갖고 있는 인구는 이미 2억 명에 접근, 세계의 1순위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인구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인재 저비’가 많고 그 규모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1982년부터 2015년 사이 중국의 중등전문학교 학력을 가진 인구 규모는 604만 명으로부터 1.71억 명으로 상승, 총 인구 비중의 0.6%로부터 12.4%로 증가했으며 이 역시 세계의 1순위를 나타내고 있다. 세계은행의 데이터에 따르면 1970년부터 2018년 사이 중국의 고등교육 총 입학 율(고등교육을 받은 인수가 상응 연령인구에서의 비중)은 12.9%로부터 50.6%로 상승, 한편 1971년부터 2017년 사이 미국은 이 방면에서 47.3%에서 88.2%로 나타났으며 거의 같은 시기 중국과 미국의 차이 역시 점차 축소되었다. 또한 2001년부터 2018년 사이 중국의 고등학교 졸업생 수는 104만 명에서 753만 명으로 증가, 증장 율이 약 627%가 되었다. 이 외 엘리트 인재들이 중국의 각 항 각 업종에서 중견으로 자리매김을 하여 방대한 대오를 형성, 중국은 점차 많은 영역에서 세계의 선두주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다음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1-03-09
  • '삼국지' 재해석⑰ 하늘이 내린 최고 군사가 곽가(郭嘉)
    ●김정룡(다(多)가치 포럼 위원장) 조조는 천자를 받들어 모신 이후 전투마다 승리하여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영원한 승자란 없듯이 조조도 전투에서 대패하여 삼국정립이 형성되는 계기가 되어 그의 인생에서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조조가 세상에 이름을 떨친 이후 처음 대패한 전쟁이 바로 적벽대전이었다. 적벽대전에서 천재적인 제갈량이 귀신처럼 바람의 방향을 바꿔놓았고 이 바람이 주유의 부하 황개가 조조의 진영의 배에 지른 불길에 키질이 되어 조조가 대패했다고 하는데 이 스토리는 나관중이 지어낸 문학적인 이야기일 뿐 사실이 아니다. <삼국지>를 비롯해 여러 사서에서는 당시 조조 진영에 역병이 돌아 사망자가 속출하자 조조가 배에 불을 지르고 퇴각했다고 기록했다. 물론 조조의 적벽대전의 패배 이유가 역병에만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사실이 그랬다면 조조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곽봉효(봉효는 곽가의 자)가 있었다면 나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통탄했다. 바꿔 말하자면 적벽대전 당시 곽가가 살아있었다면 그가 반드시 교묘한 계책을 내어 승리를 이끌어내고 조조가 패배에서 벗어나 승리하도록 하며 위험을 평온한 상태로 바꿀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만약 곽가가 있었다면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패배하지 않았더라면 역사는 다르게 흘렀을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 추측이고 역사는 추측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안타까운 입장에서 나온 말이다. 나관중은 조조의 탄식을 문학적으로 다음과 같이 구성했다. 조조가 화용도(華容道)에서 빠져나와 남군(南郡)에 이르자 조인이 주연을 베풀어 위로하였는데 여러 모사들이 모두 자리에 있었다. 조조가 갑자기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통곡하였다. 여러 모사들이 ‘승상께서는 재난을 만났을 때에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으셨고 지금은 안전하게 성안으로 돌아와 군사들은 배불리 먹고 있고 말도 사료를 충분히 먹었으며 군대를 재정비하여 원한을 갚을 수 있는데 도리어 통곡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조조는 ‘내가 통곡한 것은 곽봉효 때문이오. 봉효가 있었다면 결코 내가 이런 실수를 저지르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오.’라고 했다. 이어서 그는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크게 곡하면서 ‘슬프도다, 봉효여! 애통하도다, 봉효여! 안타깝도다, 봉효여!’라고 했다. 이에 여러 모사들이 모두 침묵하여 부끄러워했다. 곽가가 군사책사로 얼마나 뛰어났기에 조조가 그토록 슬프고 애통하고 안타까워했을까? 곽가는 본래 원소의 사람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곽가는 원소의 무능을 보아내고 그의 모신(謀臣) 신평과 곽도에게 말했다. “무릇 지혜가 있는 사람은 주군이 될 사람을 헤아려야만 백 번 군사를 일으켜 백 번 완벽하게 공명을 세울 수 있는 것이오. 원공(袁公)은 한갓 주공의 낮은 선비를 모방하려고 하고 인재를 등용하는 기틀을 알지 못하고 있소. 일을 처리할 때 생각은 많으나 요령이 적고 모략을 좋아하지만 결단력이 없어 그와 더불어 천하의 큰 난국을 구제하고 패왕의 대업을 정하기는 어려울 것이오.” 그리고는 마침내 원소를 떠났다. 곽가는 영천군 양적현(陽翟현) 사람이다. 영천에 희지재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책략이 뛰어난 인물이므로 조조는 그를 매우 중용했지만 일찍 죽었다. 아마 영천의 인재들이 수명이 짧았던 모양이다. 이런 일이 닥칠 줄 몰랐던 조조가 순욱에게 부탁해 말했다. “희지재가 죽은 후로는 더불어 일을 계획할 사람이 없소. 여남과 영천에는 본래 우수한 인물이 많거늘 누가 희지재를 계승할 수 있겠소?” 순욱은 곽가를 추천했다. 조조는 곽가를 만나보고 천하의 일을 논했다. 그때 마침 유비가 달아나서 예주목으로 임명되었다. 어떤 이가 조조에게 말하기를, “유비는 영웅의 포부를 갖고 있으므로 지금 도모하지 않으면 후에 반드시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조조는 그것을 곽가에게 물어보았다. 곽가가 대답하기를 “그것은 옳은 말입니다. 공은 검을 뽑아 의로운 군사들을 일으키고 백성을 위해 어지러움을 제거했습니다. 성의를 보고 신의에 의지하는 영웅을 불러도 충분하지 않을 듯 걱정입니다. 지금 유비에게는 영웅이라는 평가가 있고 우리 쪽으로 몸을 돌렸는데 그를 살해하면 현인을 살해했다는 평가를 듣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지혜가 있는 선비들은 의심을 품을 것이며 마음을 바꾸어 다른 주군을 택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공은 누구와 함께 천하를 평정하겠습니까? 한 사람의 화근을 제거하려다가 천하의 기대를 막아 어찌 위험하게 하는 일을 살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조조는 크게 만족하여 말했다. “그대를 얻었소. 내가 대업을 이루게 할 이는 바로 이 사람이구나.” 곽가도 역시 대만족이었다. 기뻐서 이렇게 말했다. “조공은 나의 주공이시다!” 조조는 즉시 표를 올려 곽가를 사공군좨주(司空軍祭酒)로 삼았다. 조조는 여포와의 세 차례 전투로 병사들이 피로를 느끼자 철군을 준비했다. 곽가는 철군을 반대하고 다시 전투를 벌일 것을 극력 주장하고 전투를 벌이면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단정했으며 결과적으로 여포를 사로잡았다. 조조가 원소와 관도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강동에서 천리 진지를 구축한 손책은 강을 건너 북쪽으로 허도를 습격하고자 했다. 조조의 진영의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모두 두려워하고 있는데 곽가가 이일을 헤아려 보고는 말했다. “손책은 이제 막 강동을 병탄했고 그에게 주살된 자들은 모두 영웅호걸로서 다들 사람을 얻기 위해 죽을힘을 다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손책은 경솔하고 대비도 없으니 비록 백만의 군대가 있다고 해도 혼자 중원에 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만일 자객이 숨어 있다가 일어나면 단지 한 사람의 적일뿐입니다. 제가 그를 보건대 반드시 필부의 손에 죽을 것입니다.” 과연 손책은 장강에 이르러 건너기도 전에 허공(許貢)의 식객에게 죽임을 당했다. 원소가 죽고 나서 조조는 그의 잔재세력인 아들 원담과 원상을 정벌하러 나섰다. 조조의 기세가 무서울 정도로 강해 연전연승하자 여러 장수들은 다시 전투를 벌이자고 주장했지만 곽가는 철군을 주장했다. 곽가가 말했다. “원소는 두 아들을 사랑했으나 생전에 누구를 세워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곽도와 봉기가 그의 모신이 되었지만 반드시 원씨 형제는 함께 다투다가 서로 어그러질 것입니다. 우리 군대가 그들을 압박하면 그들 형제는 군대를 합쳐 우리와대치할 것이고 느슨하게 풀어주면 그들 형제는 다투려는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차라리 남쪽으로 가서 유표를 정벌하는 것이 더 나을 듯합니다. 형세의 변화를 기다렸다가 변화가 생긴 후에 공격하면 한 번의 출동으로 평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조는 곽가의 계책을 받아들여 남쪽으로 정벌을 떠났다. 군대가 서평에 이르러서 보니 과연 곽가의 예측대로 원담과 원상은 기주를 차지하려고 다투고 있었다. 원담은 원상에게 패하여 달아나 평원을 지켰으며 아울러 신비를 보내 조조에게 항복하겠다며 목숨을 구걸했다.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 그를 구해주었으며 마침내 업성을 공략하고 또다시 남피에서 원담을 공격하여 기주를 평정했다. 조조가 원상과 삼군의 오환족을 정벌하려고 할 때 부하들은 대부분 유표가 유비를 파견하여 허도를 습격할 것이라고 여기고 두려워했는데 곽가만은 이렇게 말했다. “명공이 비록 천하에 위세를 떨치고 있지만 호족(胡族)은 명공이 먼곳에 있는 것만 믿고 반드시 방비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방비하지 않는 것을 틈타 갑자기 그들을 공격하면 격파해 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물며 원소는 항상 백성과 오랑캐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며 원상 형제도 아직 생존해 있습니다. 지금 원씨가 다스리는데 주의 백성은 공의 위세를 두려워하며 잠시 귀순한 것이며 명공께서 아직 은덕을 베푸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지금 만일 원상을 남겨놓고 남쪽으로 정벌하러 가시면 원상은 오환족의 도움에 의지해 다시 주인을 위해 죽음을 마다치 않던 신하들을 불러들이게 될 것이고 호족이 다시 한 차례 충돌하면 백성과 오랑캐 모두 호응할 것입니다, 그러면 오환의 선우 답돈은 또다시 남쪽으로 중원을 넘보려고 야심을 품을 것이니 그가 만일 제업을 이루려는 야심을 이루면 아마도 청주와 기주도 우리 소유가 아닐 것입니다.” 다음 곽가의 말이 중요했다. “유표는 단지 앉아서 얘기하는 세객(說客)일 뿐입니다. 그는 자신의 지략이 유비를 제어하는데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유비에게 중임을 맡기면 제어할 수 없고 하찮은 직책에 앉히면 쓸모가 없어집니다. 공께서는 비록 나라를 비워두고 멀리 정벌하러 가더라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곽가의 판단이 정확히 맞았다. 유표는 움직이지 않았다. 진수는 <삼국지>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곽가는 깊은 통찰력이 있고 모략을 세우는 데 뛰어났으며 사리와 인정에 통달했다.” 조조는 곽가의 예리한 예측과 판단에 탄복하여 말했다.“오직 봉효 만이 나의 뜻을 확실히 알 수 있소.”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천재적인 지략가는 서른여덟에 병이 심해 숨졌다. 조조는 장례식에 직접 참석하여 매우 슬퍼하면서 순유를 비롯한 여러 신하들 앞에서 말했다. “여러 분은 모두 나와 동년배인데 오직 봉효만이 가장 젊소. 천하를 평정하는 일이 끝나면 그에게 뒷일을 부탁하려 했는데 중년의 나이에 요절했으니 이는 운명이오!” 곽가가 조조의 책사로 일한 지가 11년이었고 이 기간 동안 조조를 승승장구하게 했다. 그의 공이 누구보다 컸으므로 조조는 천자에게 표를 올려 말했다. “군좨주 곽가는 정벌에 따라나선 지 11년이 되었습니다. 중대한 논의가 있을 때마다 적을 만나면 변화에 따라 대처했습니다. 신이 미처 책략을 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도 곽가는 쉽게 처리했습니다. 천하를 평정하는데 그의 계략과 공적은 높습니다. 불행하게도 명이 짧아 대업을 마치지 못했습니다. 곽가의 공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진실로 잊을 수 없습니다. 그에게 식을 8백호를 더해 이전의 것과 합쳐 1천 호가 되도록 해주십시오.” 곽가가 죽은 해인 건안 12년(207)에 유비는 제갈량을 책사로 맞이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곽가의 죽음은 조조의 남방 점령과 천하제패에 제동이 걸렸고 무일푼으로 알거지였던 유비는 제갈량을 만나 비로소 운이 트기 시작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1-03-04
  • 잃어버린 조선족의 역사
    ● 김 규 조선족은 중국에 살고 있는 한민족으로 대개 조선시대 말부터 중국으로 이주하여 생활하면서 형성되었다고 한다. 형성된 역사가 짧기에 여기서 잃어버린 역사 얘기를 하게 되면 대부분 조선족 지식인들이나 역사학가들은 실소를 금할 수 없을 것이다. 백여 년밖에 안되는 조선족 역사에 그 무슨 비밀 같은 것이 있으며 잃어버린 것이 있을쏘냐고... 역사는 예전에나 지금이나 잃어버리고 고쳐지고 망각되는 일이 허다하다. 중국 조선족의 역사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잃어버리게 되었을까? 1931년 중국은 동북의 만주국 통치를 인정하면서 일본에 동북을 빼앗기고 만다. 동북을 강점한 일본은 바로 중국 동북의 길림성 조선 접경지대의 백두산 일대에서 맹활약하던 조선독립군(조선 독립을 위하여 싸우는 군대로 잠시 지칭하며 당시 이 군사력의 정확한 명칭은 모른다)을 첫 타깃으로 삼는다. 사실 1931년 전까지 동북은 중국 땅이어서 일본은 영사관의 병력과 현지 경찰 등으로는 조선독립군을 제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31년 이전의 조선독립 세력은 이미 중조 접경 지역에서 이십여 년간 발전을 하여 대규모의 병력을 가졌던 것이다. 그 예로 최서해 강경애 등 당시 프롤레타리아 계열의 작가들을 보면 모두 중국 땅으로 이동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일제의 검열로 다만 중국 땅을 생존과 기회의 땅으로 묘사하였지만 실제는 백두산 일대에는 조선의 독립투사들이 대거 포진하여 있었다. 그중에는 파산된 농민도 있었겠지만 땅과 집을 팔고 구국 운동을 하려는 조선의 의로운 사대부 귀족과 의인들도 많았었다. 하여 연변과 동북에는 그 당시 애국지사들이 세운 학교가 많았다. 그 예로 윤동주는 심지어 기독교 계열의 학교를 용정에서 다니며 애국주의를 전수받았다. 1931년은 중국 조선인의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한 해였다. 그러나 역사에서는 그냥 일본의 동북 강점으로 나온다. 중국 조선인의 역사에서 백두산 일대에서 총칼을 갈며 광복을 꿈꾸는 피 끓는 인생들을 그냥 별 볼일 없는 사람들로 취급하고 있을 때 중국공산당은 당시 그렇게 보지 않았다. 중국 역사에서의 항일연군은 곧 조선독립군과의 연합을 의미한다. 정사에서는 지금 그 누구도 당시 조선독립군의 세력이 어떠했는가가 나오질 않는다. 다만 중국공산당의 영도하에서의 항일연군의 활동이 부각될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역사적 환경하에서의 피치 못할 사정으로 해석되지만 결코 우리가 망각해서는 안 될 역사이다. 조선독립군의 군사세력은 당시 동북에서 으뜸가는 위치에 있었으며 이 사실을 잘 아는 중국공산당은 조선독립군에 연합 제의를 한다. 그 당시 중공은 중국 전역에서 국민당에게 잔혹하게 탄압을 당해 겨우 수만 명이 정강산에 오를 때라 동북지역은 군사력과 당조직이 상대적으로 약해있었다. 일설로 양정우가 동북으로 올 때에도 단신으로 왔었다. 그만큼 동북의 중공의 조직과 군사력은 약했다. 1931년 일본의 동북 강점 이후 연변 일대 조선독립군에게 있어서 중국공산당과의 연합 유혹은 컸다. 다만 조선독립군은 성분이 복잡했는데 독립군 중 젊은층은 소련 사회주의 혁명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나이가 있는 일부는 서방 민주주의 혁명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대체로 소련의 혁명 성공을 인정하는 편이었으며 소련이 이끄는 국제공산당과 연계를 가지고 있었다. 국제공산당은 조선독립군의 현 병력으로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소련 접경지대로 이동하여 세력 보전하라고 조선독립군에 제의하였다. 중국공산당은 조선독립군이 중국 경내에 남아서 같이 항일연군을 성립하여 일제와 싸울 것을 요구하였다. 1932년, 일제는 동북 강점을 마치고 백두산 일대의 조선독립군에 대한 정벌을 준비한다. 조선독립군은 연변과 동북 각지에 산재하여 있는 독립군 우두머리들을 모아서 앞으로의 방향에 대한 회의를 연다. 즉 소련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중국에 남아서 유격전을 할 것인가? 이 고위층 회의가 반역자 혹은 간자에 의하여 일본군에 알려지며 조선독립군의 각 지대의 중대장들과 수령들이 포위를 당해 전부 희생된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어랑촌 13용사가 나타나게 된 전말이다. 어랑촌 13용사는 사실 중국공산당이 영도하는 유격대원들의 희생이 아니고 동북 일대 조선독립군 영수들의 마지막 울부짖음이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김구를 말하고 이승만을 알지만 이들을 모른다. 어랑촌 13용사는 유격대원으로 포장이 되었으며 그들의 이름도 사적도 전부 허구로 되어있으며 심지어 이 사건이 발생된 시점도 전부 허구로 되어있다. 우두머리들을 전부 잃은 조선독립군은 일부분은 소련으로 들어갔으며 (김일성) 일부분은 중국공산당과 합병하여 항일연군을 이루었다. 후에 이들의 대부분은(일설에 6개 사단 6만 명이라고 함) 김일성을 따라 조선군으로 편입되었으며 나중에 조선전쟁에서 대부분이 사라졌을 것으로 믿는다. 하여 오늘날에 와서 백두산 조선독립군의 역사는 영원히 미제로 남아있으며 전부 김일성 주석(그 당시 나이가 십 대)이 한 일로 역사를 쓰게 되었다. 1957년에 조선에서 사람이 와서(옛 조선독립군으로 추측이 된다) 어랑촌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사적을 묻는다. 이때에서야 중국에서는 이 부분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이들의 이름을 복구하려 했으나 이미 이십여 년이 흘렀는지라 어려웠다. 문화대혁명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연변에 어랑촌 13용사의 기념비가 세워진다. 그러나 그중의 인물들은 이젠 더는 알 수 없었으며 심지어 살아있는 사람이 용사에 들어가고자 하는 일이 발생했다. 역사는 똑똑히 적은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만약 중공의 유격대와 유격대원이었다면 그렇게까지 수십 년간 방치할 수도 없었으며 죽은 뒤에도 사적이 모호한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오늘날에 우리가 보는 어랑촌 13용사는 일개인의 서술에 의하여 역사를 이용하는 자들에 의하여 가공이 되고 흐트러진 것이지만 역사의 진면모는 그 자리에 있었으며 지나간 역사는 결코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이제 백 년이 다 돼가는 이 시점. 역사의 진실을 파헤치고 그걸 증명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시간이 흘렀다. 아마 우리의 후대들은 지금 역사책으로 전해져오는 어랑촌 13용사 이야기를 알고 믿으며 자랄 것이다. 조선족의 역사는 이렇게 영원히 잃어버렸다. 주 : 본문은 본지의 주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21-03-02
  • 조선의용군과 만주독립군 활동
    ● 김 규 한국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조선의용군’을 검색해보면 만주에서 싸우던 독립군 부대라고 버젓이 나온다. 해서 만주에서 조선의용군 혹은 조선 의용대가 싸웠거니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조선의용군이 곧 조선독립군이고 만주에서 만들어진 조선독립군 백두산 독립군이나 만주 독립군이라고 생각하고 나아가서 항일연군에도 가담하지 않았나 혹은 항일연군에 속하거나 관련된 거 아닌가 하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중국 모처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운 건 맞으나 조선의용군은 1920년 좌우부터 진행된 만주의 독립운동 독립혁명 독립군 그리고 항일연군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조선의용군은 1938년경에야 만들어졌으며 즉 급조한 것이며 광복이 될 때까지 300명 좌우였으며 게다가 대부분이 비전투원이었다. 조선의용군을 조선독립군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만주의 조선 독립 세력은 훨씬 전에 이루어졌다. 1938년이면 김좌진이 가담한 청산리 전투도 끝난지 십수 년이 되는 해이다. 그리고 장소도 틀린다. 만주가 아니라 한구 즉 오늘의 중국 후베이성 무한시에서 의용군을 설립했다. 설립한 배경에는 장개석은 상하이에 있는 김구와 호흡이 맞았고 조선 독립을 돕고자 했으나 김원봉 같은 좌파랑은 맞지 않았다. 그래서 국공합작을 빌미로 김원봉 세력을 연안에 보냈는데 그게 조선의용군이다. 그 당시 동북의 항일연군에는 만주의 조선독립군 세력이 절반 넘어 포진해 있었으며 중국공산당의 입장으로 볼 때 조선인은 모두 한민족이고 같은 부류라고 생각하였기에 김원봉의 조선의용군에 대해 접대를 잘해줬다. 1945년 항일 전쟁이 끝나자 항일연군에 속해있던 수만 명의(일설에 6개 사단 6만 명) 조선독립군과 화북 일대의 조선의용군이 조선 김일성 휘하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중 대표적인 게 정율성이라고 봐야겠다. 하여 모택동이나 중공의 입장에서는 조선인은 대단히 고마운 존재로 그것이 조선 의용대이든 만주 독립군이든 모두 동일시 하이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김학철에 대한 예우이다. 김학철은 나이를 보나 독립활동에 가담한 시기나 시간을 보나 항일연군과 다른 조선의용군에 비겨도 한참 떨어진다. 그러나 김학철이 중국에 왔던 시기는 중국에서 공을 세웠던 조선인들이 대거 조선반도로 회 괴하던 시기였으며 중국은 아직 그 감사함이 따뜻하게 몸에 배어 있던 시기였다. 그래서 분대장에 불과한 김학철은 버젓이 모택동과도 이웃으로 잠깐 산 적이 있다. 그리고 해방 후 행정구역을 정할 때 원체 연변은 조선인의 공헌으로 볼 때 연변조선족 자치구로 해줄 수 있다는 게 중공의 공론이었지만 그 당시 주덕해를 비롯한 혁명가들은 비교적 적은 조선족 인구와 지역을 감안하여 조선족 자치주로 하겠다고 겸손하게 결정하였으며 이것이 그 후 중공에서 조선족이라면 소수민족 중 최고로 취급하는 결정적 계기다. 말이 엇나갔지만 조선의용군은 만주 독립군 혁명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김원봉이 개인적으로 만주에는 자주 다녀갔지만 조선의용군은 한날한시라도 만주 땅을 디딘 적이 없었으며 전투나 혁명은 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오늘날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만주의 독립군이 조선의용군으로 버젓이 나오는데 이는 역사 왜곡이다. 만주의 독립군은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한 1912년경부터 중국과 조선의 접경지대인 백두산 약수동 근처에서 태동을 하였으며 1931년 만주가 일본의 손에 들어가자 일본 관동군을 상대하여 소탕당할 험악한 상황에 맞닥뜨려 일부는 소련 경내로 이동을 하였으며 대부분은 중공과 연합하여 항일연군으로 바뀌었다. 다시 말해서 항일연군 중의 조선인이 곧 만주의 독립군 활동을 한 장본인이란 말이다. 조선 의용대는 그냥 조선인이라는 것 외에 활동 무대는 중국 화북 일대였으며 최고 인수가 300명에 그쳤다. 항일연군 중의 조선인은 나중에 조선에 들어간 것만 6만 명이다. 개중에 안 간 사람과 군인이 아니어서 못 간 사람(중국공산당 지하당원) 등을 포함한다면 만주 독립군 활동 세력은 십수만도 가능하다. 중국에서는 항일연군의 조선인 사적을 최대한 줄여 중공의 업적을 과시하는데 유리하므로... 이 세 세력은 조선족이라는 근대의 가장 위대한 한민족의 역사적 업적을 가로채였으며 김원봉 같은 300명 부하를 거느린 하루라도 제대로 된 전투도 못해보고 테러분자 비스름한 행적을 기록한 사람에게 영광을 주었다. 누구를 탓하랴 우리 조선족 자신도 우리의 역사를 모르고 있지 않는가? 그것이 설령 눈앞에 있다고 하여도 ……. 주 : 본문은 본지의 주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21-02-20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