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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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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2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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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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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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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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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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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묘한 세계 대백과(30)
    “곧추 날아예서 3000자요, 구천에 떨어지는 은하 믿기 어려워라.” 이는 중국 당조시의 대시인 이백이 폭포를 묘사한 저명한 시이다. 결백한 물이 고공중에서 날아떨어지며 폭포를 형성하는 것은 마치 부드러운 비단대와도 같아 아름답기 그지 없다. 그럼 폭포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폭포란 물흐름이 높은 곳에서 지세가 낮은 곳으로 떨어지면서 형성된 것이다. 이런 낙차가 비교적 큰 지세는 흔히 자연계 중의 높고도 큰 암석이 단렬로 인해 조성된 것이다. 단렬된 암석은 마치 층계와도 같아 한층은 높고 한층은 낮은바 물이 이 곳을 흘러서 지날 때면 날아 떨어지면서 아주 장관을 이루는 폭포가 형성된다. 그리고 위로부터 아래로 떨어지는 폭포의 충격력이 매우 크게 되면서 그 물기둥이 아래의 암석을 호되게 내리치게 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암석에는 큰 “凹”자형 구명이 생기며 점차 이 것이 깊은 담으로 되기도 한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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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9
  • [칼럼] 김기종 사건으로 재활용되는 망국의 종북타령, 언제나 끝나려나?
    김무성은 리퍼트 대사에게 “종북세력이 한-미 동맹 깨려한 사건” 당·정·청 한목소리로 ‘종북!’, 과연 바람직한 나라 운영인가? 문재인 “피습당한 리퍼트 대사 외려 의연한데, 우리끼리 종북몰이?” 국민은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 ‘소통과 화합을 통한 국민대통합 정치를 펼치겠다’는 공약을 믿었다. 또 ‘대탕평책으로 인재를 고루 등용 하겠다’는 의지도 믿었다. ‘증세 없는 복지를 대통령이 되면 시행하겠다’는 약속도 믿었다. 하지만 집권 2년이 지나고 3년차에 들어선 지금 국민들은, 박근혜 대통령은 지역 안배나 고른 탕평은 차치하고라도, 각료 인사와 지역 안배, 지지자와 비지지자를 철저히 편가르는 행보를 보인 것은 아닌가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 대통령과 여당의 지지도는 바닥을 쳤고, 국정원과 검찰의 각종사건의 조작 의혹 내지 편파수사 등 사회적으로 각종 불신을 낳았던 사건과 판결로 인해 민심은 정부조직에 대한 신뢰를 거두어들였으며 연말정산과 대서민 세금폭탄은 급기야 조세저항 등 정권에 대한 저항의 움직임마저 보이고 있는 현재이다. 이런 시점에서 ‘때마침’ 김기종 사건이 발생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사건 발생 직후 “우리나라에서 백주대낮에 미국 대사가 테러를 당했다는 것은 우리 국민과 정부에 있을 수 없는 충격적인 일”이라며 “어떤 목적에서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 단독으로 했는지 배후가 있는지 모든 것을 철저히 밝혀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해 이미 이 사건은 ‘테러’이고, 사건의 주모자는 ‘배후’를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규정해버렸다. 이는 대통령이 청와대 안에 있었다던 세월호 참사 때와는 달리, 국외에 있으면서도 대단히 신속하게 쏟아낸 발언이었다. 청와대는 이 사건이 있은 직후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의 주재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를 열고 “이번 사건 범인의 반미, 종북 행적 여부 및 활동에 대해 철저한 조사 및 배후세력 존재 여부 등을 수사할 것”이라는 방침을 정했다. 청와대와 정부 또한 어느 때보다도 민첩하게 움직였다. 우선 이병기 신임 대통령 비서실장은 지난 6일 총리공관에서 열린 고위 당·정·청회의에서 “금번 사건 자행한 범인 김기종의 지금까지 행적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고 배후 세력의 존재 여부 등을 수사를 통해 진상을 규명하며, 그에 따라 엄정한 조치를 취해나가겠다”고 공론을 모았다. 이병기 비서실장은 “우리 사회의 헌법적 가치를 부정하는 세력에 대해서 여러 가지 논의를 했으며, 향후 이를 방지하기 위해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 대목은 이 실장의 향후 행보를 가늠케 하는 잣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의 이같은 움직임이 있자 경찰의 움직임은 거의 반사적이었는데, 경찰은 청와대 방침이 결정된 직후인 이날 새벽 3시 40분쯤, 사건 혐의자 김기종 씨의 주거지와 사무실에 대해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아 새벽 4시40분에 기습적으로 압수수색을 집행했고, 이 과정에서 검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국가보안법적용’ 카드까지 꺼내드는 과잉충성(?)을 보였다. 새누리당 또한 청과 정의 입장과 별반 다르지 않은데, 김무성 대표가 지난 8일 마크 리퍼트 미국대사를 문병하는 자리에서 “이번 사건은 종북좌파들이 한-미 동맹을 깨려는 시도였지만, 오히려 한-미 동맹의 굳건함을 확인하고 더 결속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언급했음을 박대출 대변인이 밝혔는데, 향후 대선 후보를 꿈꾸는 집권당의 당대표가 국민정서에 반하는 ‘종북좌파’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 것은 국민들의 시선을 이끌기 충분했다. 박대출 대변인의 이날 브리핑은 리퍼트 대사 피습을 애둘러 ‘종북세력의 소행’으로 규정한 지난 6일 고위 당·정·청 회의의 기조를 그대로 이어간 것인데, 박 대변인은 김기종씨가 야당 집권 시절 7차례 방북한 사실과 통일부 통일교육위원으로 위촉된 사실 등을 꺼내들고 “김기종씨가 어엿한 시민운동가로 행세한 데는 야당 의원들과의 교류가 한몫을 했다”며 “새정치연합은 ‘종북몰이’ 운운하며 역색깔론을 펼칠 때가 아니라 ‘종북 숙주’에 대한 참회록을 쓸 때‘다”라고 말해, 새누리당은 이번 사건을 기회로 삼아 이용가치를 최대한 부풀려 볼 심산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반면 문재인 새정치연합 대표는 지난 8일 김무성 대표에 이어 리퍼트 대사를 문병 후에 “끔직한 사고를 겪은 리퍼트 대사가 오히려 의연하고 여유 있는 태도로 한국 사람들을 위로하는데, (앞서 문병한 김무성 대표가 ‘종북세력’은 운운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김기종) 사건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려 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한-미 양국 관계에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해 이번 사건과 종북몰이 프레임에 대해 우려와 경계의 뜻을 분명히 했다. 새정치연합 김성수 대변인 또한 은 새누리당의 ‘종북 숙주’ 공세에 대해 즉각적으로 “김기종의 과거 행적을 들먹이며 어떻게든 야당에 종북 올가미를 씌워보려는 그 속셈이 너무도 뻔하다”며 “(4.29 재보궐)선거가 다가오자 구시대적 종북몰이로 표를 얻어 보려고 하는 것은 매우 비겁한 정치행태”라고 반박과 아울러 맹비난했다. 같은당 오영식 최고위원 역시 9일 제71차 최고위원회의에서 “엊그제까지 머리를 맞대고 국정을 논의하던 제1야당에 대해 이때다 싶어 ‘종북의 숙주’ 운운하는 것은 어이가 없는 망발”이라고 비판했다. 우리나라 ‘현재’라는 브레이크 없는 열차 앞에는 넘어야할 민생의 산도, 건너야할 시대적 과제물도 너무나 많은 이시기에 과연 구시대적 ‘빨갱이론’에서 변종으로 탄생한 ‘종북’이라는 프레임에 누가 누구를 가두려는 것인가? 청와대는 물론이고 정부와 수사기관, 집권여당이 합세해 이번 미국 대사 피습 사건에 대해 미리부터 사건의 먼발치까지 훤히 내다보는 듯한 발언과 행태들을 보이는데, 이들은 수사가 마무리되기도 전에 벌써부터 수사범위와 대상을 포괄적으로 한정지어놓은 듯한 행태를 보이고 있고, 일부 편파적 언론에서는 이에 부창부수라도 하려는 듯 몇 날을 하루 종일 ‘종북타령’으로 일관하는 우리나라 작금의 형세는 망국의 길을 치닫고 있는 듯한데, 이와 같은 우리나라의 국세를 과연 누가 책임질 것인가? 국민은 결코 어리석지 않다. 오늘날의 국민들은 과거 이승만 정권에서 유신시대를 거치는 동안 입맛에 맞게 편작된 언론에 길들여진 그런 국민들이 아니다. 더 이상은 문맹이 이 나라 절반을 차지하던 저학력 시대의 암울한 국민들도 아니다. 이 나라 국민들 평균 학사이상 학력의 소유자이고, 인터넷과 소셜 등 첨단 소통능력과 운용지식을 보유한 세계적 수준의 지식노동자들임을 염두에 둔다면, 이 나라에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여야를 막론하고,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철저하게 국민의 눈높이를 의식해야 할 것이다. 누가 똑똑하고 어리석은 정치를 하는지, 누가 진정 국민을 위하고 대타협, 대화합을 이룰 리더인지, 이제 그 판단은 고스란히 국민들의 몫이라는 것을 아직도 모르는 권력자와 정치인이 있다는 것과, ‘종북몰이’로 표현되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국민들이 분명하게 가려낼 것이다. 즉, 모든 이 나라의 운명의 예측과 과거사에 대한 판단은 모두 고스란히 국민들 고유의 몫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망국의 종북몰이 이제는 끝내야 될 때다. <기사제공: 한국인터넷언론인협동조합> 주: 본문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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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9
  • [김혁 칼럼]“한국의 쉰들러”와 윤동주
    ●김 혁(재중동포 소설가) 1 무조건적인 희생으로 가족을 위해 로심초사하며 한 시대를 묵묵히 살아냈던 아버지의 모습을 그린 영화 “국제시장”이 한국역대영화 2위를 기록하며 흥행신화를 쓰고있는 가운데 영화의 들머리에 재현 된 “흥남대탈출사건”이 다시 회자되고있다. “흥남 대탈출”은 한반도에서 벌어진 수많은 전사(戰史) 중에서도 특별한 역사적 사건이다. 전시의 긴박한 상황에서 민간인의 철수를 돕기 위해 군인들이 자기 목숨과도 같이 여기는 작전용 중장비를 수송선에서 내려놓고 그 공간에 더 많은 피란민을 태워 수송했는데 그 수효가 무려 10만명에 이른다. “쉰들러 리스트”로 잘 알려진 독일인 오스카 쉰들러(Oskar Schindler, 1908-1974)가 나치 수용소에서 구해낸 유대인의 수는 약 1,200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흥남에는 10일간의 짧은 기간 동안 10만 명의 피난민을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세계 전사를 통틀어 가장 많은 민간인을 탈출시킨 작전으로 기록돼 있다. “흥남 대탈출”은 오로지 인종, 국경, 종교, 이념이라는 모든 벽을 훌쩍 뛰어넘은 인간사랑이라는 큰마음이 움직였기에 가능했던 대서사극이었다. 이 “흥남대탈출”의 주인공은 바로 “의인”으로 불리는 현봉학이었다. 2 미군의 철수작전이 펼쳐지던 흥남부두에서 형봉학은 아비규환을 목격했다. 영하 30도의 혹한 속에서 울부짖는 피난민들의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그는 미10군단의 아먼드 장군을 붙들고 “저들을 살려달라”고 간청을 거듭했다. 그의 눈물겨운 노력에 감동한 장군은 군수물자를 버리고 피난민들을 태웠다. 이렇게 해서 배 193척에 나눠 타고 목숨을 구한 피난민은 9만8000여명. 마지막 수송선에 탄 1만4000여명은 12월25일 거제에 도착해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불리웠다. 이 배에서 5명의 어린 생명이 태어났다. “한국의 쉰들러” 현봉학(玄鳳學) 선생은 1922년 함경북도에서 태어나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 모교에서 임상병리학을 강의했다. 미국 리치먼드의대에서 공부한 뒤 1950년 3월 귀국, 석 달 만에 6·25를 맞았다. 전쟁중 한국 해병대사령관 고문과 미10군단 사령관 민사부 고문으로 근무하던중 흥남부두에 이르렀고 10만여명의 피난민을 구하는 신화를 남겼던 것이었다. 휴전 후 다시 미국으로 간 형봉학은 펜실베이니아의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토머스제퍼슨의대 등에서 교수를 역임했고, 연세대와 아주대 등 한국의 대학가에서도 후학 양성에 힘썼다. 2007년 86세로 별세했다. 3 윤동주의 묘소가 조선문학에 천착한 일본학자 오오무라에 의해 발견되여 세간에 공개되였음은 일반이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사실 오오무라 이전에 윤동주의 묘소를 찾으려 시도한 사람이 또 한분 있었다. 바로 현봉학 박사였다. 70세 로인이 될 때까지 윤동주를 전혀 몰랐던 현봉학박사는1984년 봄에 우연히 낡고 바래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초간본을 읽고 크나큰 감동과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하여 그해 8월 현봉학 박사는 재미동포 13명을 인솔하고 중국용정행차를 했다. 연변의 유지들과 지치주정부 외사처에 윤동주의 유적, 특히 묘소를 찾아주기를 부탁했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은 윤동주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했다. 실망은 했으나 그들에게 윤동주가 뛰어 난 민족시인이었음을 역설하고 내년에 다시 방문할터이니 꼭 그 유적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오오무라에 의해 윤동주의 묘소가 발굴된 소식을 접한 현봉학박사는 또 서둘러 용정으로 날아왔다. 1988년 6월, 현봉학 선생이 주동이 된 미중한인우호협회의 연증(捐贈)으로 용정중학교 동창회가 수선을 하여 윤동주 묘소의 첫 개수 작업이 이루어졌다. 지금 우리가 용정 동산마루에 가면 볼 수 있는 시인의 유택은 그렇게 많은 “의인”들의 도움으로 세인들과 만났다. 은퇴 후 현봉학 박사는 윤동주 장학회를 설립하고, 용정중학에 윤동주의 시비를 건립하는 등 오직 윤동주 추모사업에 헌신하다가2007년에 타계했다. 지금도 시인의 고향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용정중학의 시비를 마주할 때마다 이 의인을 떠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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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고
    2015-03-08
  • 【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26)
    ■ 김철균 3 순자가 문영이란 애를 한번 만나보려고 했으나 기다리던 그 애는 며칠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다른 애들과 물어보아도 그저 그애는 밖에 나다니기를 썩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라는 것만 알려줄뿐 더 이상 아는 것이 없었다. 순자는 한번 위생학교 기숙사를 찾아갈까 하고 생각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무턱대고 찾아갈 명목도 없었다. 무턱대고 찾아가면 문영이란 애가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으니 그럴만도 했다. 그러는 사이 이틀이란 날자가 또 훌쩍 지나갔다. 순자는 이제 하루만 기다려서 오지 않으면 아무런 이유라도 달고 찾아가려고 했다. 순자가 이렇게 궁리하고 있던 찰라 마침 문영이가 찾아왔다. 순자가 “또 우표와 편지봉투를 사려는가”고 물으려 하는데 생각밖에도 문영이는 싸구려 빵 하나를 사려고 했다. 점심을 굶었는지 무척 허기진 모양이었다. “학생, 빵갖고 요기나 하겠어? 마침 상점에 금방 해놓은 뜨근뜨근한 밥과 국이 있으니 그걸 먹으라우.” 이에 문영이는 아주 놀라하며 순자를 빤히 쳐다보는 것이었다. 상점에서 국밥도 파는가 의아해하는 모양이었다. “돈을 받지 않을테니 근심마우. 워낙 내가 먹자고 지었는데 좀 많이 했수다. 다 딸같은 애들인데 그냥 학생한테 먹이고 싶어서 그런다오.” 그제야 문영이는 이것저것 눈치를 보면서 순자가 차려주는 밥과 국에 수저를 대였다. 그러나 의연히 의아해하는 기색이었다. “눈치보지 말고 그냥 먹수. 쯧쯧 얼마나 배고겠수?!” 진짜 몹시 배가 고팠는지 문영이는 제법 밥과 국을 맛스레 먹었다. “이름이 문영이라지? 우리 좀 얘기를 해볼까?” 문영이가 어느 정도 배가 찼겠다고 생각되자 순자는 문영이곁에 다가앉으며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문영이도 다소 안심이 되는지 순자를 향해 약간 방그레 웃어보였다. 크게 접촉해보지는 않았지만 얼핏 봐도 순자가 착해보였던 모양이었다. “돈화에서 왔다지?” “예, 돈화 사하연의 산골에서 왔어요.” “집에는 어떤 식구들이 있지?” “어머니는 아주 오래전에 돌아가고 아버지는 장기환자로 힘든 일은 못하고 있어요.” 문영이는 사실대로 말씀드렸다. “쯧쯧, 농촌살림에 안사람도 없고 거기에 병까지 있다니… 그러구보니 학생도 몹시 외롭구 불쌍하구만.” 문영이를 보니 순자는 어쩐지 자꾸 눈물이 나왔다. 순자는 문영이더러 많이 먹으라며 밥과 국을 더 떠주었다. 문영이가 돌아갈 때 순자는 그녀한테 과자, 사탕 등 먹을 것을 호주머니에 가득 넣어주었다. 문영이가 뿌리치는 것도 “저녁에 허기질 때 요기하라”며 억지로 밀어넣었다. 한편 기숙사로 돌아온 문영이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세상에 아무리 맘씨고운 사람이 많다지만 “북해상점” 조선족 할머니의 거동은 어떻게 봐도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 저 어머니가 다른 그 어떤 목적이 있어서가 아닐까? 그녀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조선족 여인들이 선량하고 동정심이 강하다더니 그렇다면 저 어머니가 서양의 명절 크리스마스에 나타난다는 산타클로스 노인같은 분이 아닐까? 그렇찮으면 조선족 여인들중에서도 남을 즐겨돕는 뇌봉같은 어머니? 맞아 꼭 뇌봉같은 어머니일것야…… 결국 문영이는 긍정적인 면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세상인심이 아무리 박하다 해도 어디에 가든지 좋은 사람은 있기 마련이라고 믿었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니 문영이는 저도 몰래 순자한테 마음이 끌리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다. 그 뒤에도 문영이는 몇번 “북해상점”으로 찾아갔다. 웬간해서는 외출하기 싫어하는 그녀었건만 “북해상점”의 김순자를 알고난 뒤에는 틈만 있으면 절로 그 쪽으로 발길이 돌려지군 하는 문영이었다. 결코 의도적이 아니었다. 허기진 배를 달래려고 찾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북해상점”에 가면 어쩐지 마음이 편해졌다. 특히 순자와 마주할 때마다 문영이는 까마득히 오래되어 가물가물하던 친어머니의 얼굴이 자꾸 떠오르면서 무척 따사로움이 느껴지군 했다. 한편 문영이가 찾아갈 때마다 순자는 맛갈스러운 음식을 내놓군 했다. 문영이가 올 것을 미리 알고 몰래 남겨 놓은듯이 말이다. 그것은 문영이를 위해 남겨놓은 것이 분명했다. 당시 문영이는 흔히 주말 저녁이면 순자가 운영하는 “북해상점”으로 찾아갔고 이에 순자 또한 문영이가 찾아올 것을 예견하여 맛있는 것을 만들어서는 남겨놓군 했다. 그러면 문영이가 와서 그 음식을 먹으면서 학교에서 있었던 재미나는 일과 책에서 읽은 장면들을 웃고 떠들고 손질발질하며 이야기했고 그것을 바라보는 순자의 마음은 흐뭇하기가 그지없었다. 그리고 문영이가 기숙사로 돌아갈 때면 순자는 어김없이 호주머니에 당과류같은 것을 불룩하게 넣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제 12 회 모성애 1 고생스레 자란 애들이 남의 눈치를 많이 본다는 말이 있다. 이는 이런 애들이 자라온 생활환경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또 이런 애들은 자존심이 강하며 쉽게 남을 오해할 때도 많은 법이다. 이 면에서 흔히 여자애들이 더 심한 양상을 보이군 한다. 문영이 역시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었다. 어느 날 문영이가 “북해상점”에서 순자가 해준 국밥을 먹고있을 때 순자의 셋째 딸 영애가 시내로 일보러 나왔던 김에 친정 어머니가 차린 상점에 들렸다. 영애는 밥을 먹고있는 문영이를 보고는 이상해하며 어머니한테 물었다. “어머니, 누구세요?” 하긴 순자가 문영이를 딸처럼 대하면서 자주 밥을 먹이는 것 등에 대해 영감과 자식들한테 일언반구도 한적이 없는지라 영애가 알리 만무했다. “오, 위생학교 학생인데 엄마가 없고 아버지는 장애인으로서 몹시 불쌍한 애란다.” “그래요? 거 참 안됐구나.” 영애는 몹시 놀라는듯 하다가 인차 마음을 가라 앉히고는 문영이한테 다가 앉으며 살갑게 굴었다. 마음이 착하고 동정심이 많기는 영애 역시 마찬가지었다. “얘, 너 올해 몇살이지? 우리 한번 친해보자꾸나!” 하지만 영애가 낯설어서인지 문영이는 물어보는 대답이나 겨우 할 정도였다. 문영이는 어쩐지 순자한테는 어리광을 부릴 정도로 친근감을 느꼈지만 순자의 딸임에도 영애한테만은 저으기 눈치가 보였다. 자기가 불시에 나타났기에 문영이가 불편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영애가 문영이더러 시름놓고 밥을 먹으라고 자리를 피해주었지만 문영이는 그것마저 미안했다. 자기가 상점에 와서 밥같은 것을 먹으면 상점주인의 자식들이 좋아할 수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 뒤부터 문영이가 “북해상점”으로 다니는 차수가 차츰 뜸해졌다. 순자가 잘 대해줄수록 문영이는 자주 다니기가 더욱 무엇했다. 그럴수록 자기를 두고 영애네 형제들이 곱지 않는 시선을 보낼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웬간해서는 “북해상점”에 가서 밥같은것을 먹지 않기로 작심했다. 일부러 자제하기로 했던것이다. 한편 문영이가 상점으로 다니는 차수가 뜸해지고 어쩌다 와서도 웬간해서는 밥술을 들지 않자 순자는 이상스럽게 생각했다. 혹시 그날 영애가 문영이한테 그 무슨 상처가 될 말을 하지 않았나 해서 셋째 딸한테 따져 묻기도 했다. 셋째 딸 영애는 그 날 절대 문영이한테 서운하게 대하지 않았다고 재삼 설명했다. 순자는 여전히 시름이 놓이지 않아했다. “너희들이 앞으로 이 어미가 하는 일에 절대 참견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불쌍한 사람을 도와줄줄 모르면 그것은 사람이 할 도리가 아니느리라.” 영애 역시 착하기는 형제들 중 둘째로 가라고 하면 서운해 할 사람이라 어머니의 말뜻을 너무나 잘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가뜩이나 발길이 뜸해지던 문영이는 언제부터인가 일주일 가량 지났어도 상점에 나타나지 않았다. (영애도 그애한테 별다른 소리를 하지 않았다는데…아무렴 영애가 그런 싫은 소리를 할 애가 아니지. 그런데 문영인 웬일일까?) 이제나 저제나 하고 문영이가 나타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려도 오지 않자 어느 날 순자는 상점에 온 학생들한테 문영이가 왜 상점에 오지 않는가고 물었다. “문영이 말인가요? 그앤 요사이에 된감기에 걸렸답니다. 기숙사가 추운데다 입은 옷까지 얇아 감기에 걸린 것이지요.” 그 학생의 말에 순자는 갑자기 속에 맺히는 것이 있었다. (아, 내가 왜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애가 분명 옷을 얇게 입은 것을 보면서도 말이야. 문영이의 엄마로 돼주겠다고 하면서도 애한테 밥이나 먹이는데만 만족하고…) 순자는 등한했던 자신을 책망하면서 내일엔 상점을 딸들한테 맡기고는 기어코 문영이한테 동복을 사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순자는 무심중 밖을 내다 보았는데 하늘에서는 눈송이가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안되겠군. 오늘 눈이 내리면 내일은 긍정코 눈보라가 터질 것이고 그러면 날씨가 더 맵짜고 추워질 것이 아닌가?) 여기까지 생각을 굴린 순자는 더이상 지체할세라 상점문을 잠그고는 그 길로 백화상점으로 향했다. 백화상점에서 순자는 문영이가 입을 두터운 솜옷을 샀고 또한 돌아오는 길에 연변병원에 들려 문영이가 먹을 감기약을 샀다. … 그 날 순자가 문영이네 기숙사방에 들어서자 침대에 누운채 눈도 겨우 뜨고 있으면서 신음소리를 내고 있던 문영이는 불현듯 앓던 사람이 같지 않게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순자의 품에 안기면서 서럽게 울었다. “마마(어머니),” “너, 정말 멍청하구나. 이렇게 된감기에 걸려갖고도 왜 엄마한테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느냐?! 너 아직도 이 엄마의 마음을 모르겠느냐?” 문영이를 껴안은 순자는 눈물이 솟구치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순자가 눈물을 흘리자 문영이는 더욱 서럽게 울었다. “어머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어머니한테 찾아갈 용기가 없었어요.” 문영이는 잠시나마 생각이 짧았던 자신을 탓하며 더욱 소리내여 울었다. 그 날 순자가 문영이한테 가져간건 단지 한벌의 솜옷이나 한봉지의 감기약만이 아니었다. 문영이가 여태껏 받아보지 못했고 꿈속에서도 바라마지 않던 모성애였다. 그 날 문영이는 태어나 처음으로 스스로 자기는 행운아라고 자부해보았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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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5-03-06
  • “쌀겨, 비만 억제에 효과 있다”
    [동포투데이] 현미 도정 후 버려지는 쌀겨(미강)는 한 해 약 35만 톤. 이렇게 버려지던 쌀겨의 비만 억제 효과가 밝혀져 식품 소재로 활용이 기대된다. 연간 약 50만 톤의 쌀겨가 발생하는데, 이 중 30% 정도만 쌀겨유나 식용 효소, 화장품 원료, 사료로 이용되고 나머지는 농산 폐기물로 처리돼 쌀겨의 고부가 가치화와 폭넓은 산업적 이용에 대한 연구가 요구돼 왔다. 농촌진흥청(청장 이양호)은 충북대학교 이준수 교수 연구팀과 쌀겨에서 건강 기능 성분을 효율적으로 추출하는 방법을 개발하고, 그 추출물의 비만 억제 효과를 밝혔다. 이번 연구에 사용된 쌀겨 비검화물 추출물(USM)은 쌀겨에 알칼리 처리를 해 가수분해 했을 때, 검화(비누화)되지 않은 비검화 지질만을 핵산으로 추출한 물질이다. 동물실험은 실험용 쥐에게 △고지방 식이 △고지방 식이+저농도 쌀겨 추출물(10mg/kg/1일) △고지방 식이+중간농도 쌀겨 추출물(20mg/kg/1일) △고지방 식이+고농도 쌀겨 추출물(50mg/kg/1일)을 6주 동안 먹인 뒤 몸무게를 측정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실험 결과, 고지방 식이군은 6주간 약 43.5% 체중 증가를 보인 반면, 고농도의 쌀겨 추출물을 함께 섭취한 실험군은 체중 증가율이 약 33.2%에 불과했다. 특히, 부고환 지방 조직의 무게가 고지방 식이를 섭취한 쥐보다 약 60% 적었다. 지방 세포 크기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고지방 식이를 한 쥐는 지방세포의 크기가 눈에 띄게 증가했으나, 쌀겨 추출물을 투여한 쥐의 부고환 지방 세포 크기는 일반 쥐의 세포 크기에 가까웠다. 이같은 효과는 쌀겨에 들어있는 토콜즈(토코페롤+토코트리에놀), 감마-오리자놀, 파이토스테롤, 폴리코사놀 등 생리 활성 성분이 지방이 쌓이는 것을 막고 콜레스테롤을 낮춰주기 때문이다. 농촌진흥청은 충북대학교와 공동으로 ‘미강 유래 비검화물을 포함하는 항비만용 조성물’에 대한 특허를 출원(10-2013-0144154)하고, 연구 결과를 국제학술지 ‘LWT-Food Science and Technology 61(2015)’에 발표했다. 앞으로 기술 이전 업체와 함께 소재의 효능과 안정성을 확보한 뒤 식품의약품안전처의 개별 인정 원료 인증을 완료할 계획이다. 농촌진흥청 중부작물부 박기훈 부장은 “이번 연구를 통해 쌀겨가 비만을 억제하는 것은 물론, 항비만과 다이어트 식품 소재로도 유용하다는 것이 입증됐다” 라며, “앞으로도 쌀을 비롯해 부산물의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는 연구를 계속해 나가겠다”라고 전했다.
    • 오피니언
    2015-03-05
  • [김혁 칼럼] 김학철을 다시 읽다
    ●김 혁(재중동포 소설가) 우리앞에 한 거인이 우람하게 뻗쳐 서 있다. 양쪽 겨드랑이에 목발을 짚은 척각의 로인, 하지만 깨끗이 늙은 강파른 얼굴에 사려 깊고 슬기가 넘치는 한쌍의 눈. 그이가 바로 중국조선족문단의 맨 들머리에 우뚝 각인된 김학철 옹의 모습이다. 어제 저녁(3월1일) 우리는 또 오랜만에 그이의 거룩한 형상과 마주할 수 있었다. SBS방송에서 스페셜 “나의 할아버지 김학철,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이 방영된 것이다. 스페셜은 선생이 끔찍이도 아꼈던 손녀 김서정양이 할아버지를 되돌이켜보며 그이의 려정을 따라 중국의 하북성, 한국의 밀양, 일본의 나가사키를 순례하는 과정을 통해 할아버지가 스스로 삶을 마감하면서까지도 끝까지 지키고자 한 것은 무엇이였는지? 그 답을 찾는 려정을 선생의 많은 영상기록물과 더불어 보여주었다. 평생 펜으로 불의와 싸웠던 “조선의용대 마지막 분대장”, “조선족 문단의 거목” 김학철의 파란많은 삶을 다시 돌이켜 본다. ▲조선의용대 마지막 분대장 김학철ⓒSBS 김학철은 1916년 11월 4일 북조선의 함경남도 원산에서 누룩제조업자의 둘째 아들로 태여났다. 본명은 홍성걸(洪性杰.).7세에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랐다. 원산에서 제2공립보통학교를, 서울에서 보성고등학교를 다니다 1932년 약관 17세에 빼앗긴 조국을 찾겠다는 웅지를 품고 중국으로 들어왔다. 처음 상해에서 의렬단에 가입. 무정부주의자로 탈바꿈하여 반일지하테로활동 종사했다. 흰 셔츠에 검은 넥타이, 뒤주머니에 권총 한자루- 전형적인 당시 아나키스트들의 행색으로 쿨하게 상해의 황포강변을 누볐다. 1936년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했다. 1937년 중앙육군군관학교 (황포군관학교, 교장 장개석)에 입학하였다. 제1대대 제4중대에 편입되였으며 여기서 맑스주의사상과 접촉하면서 단순한 민족주의자로부터 맑스주의자로 변신하였다. 중일전쟁으로 3년제과정을 1년간 앞당겨 미친 김학철은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 (조선의용군 전신, 대장 김원봉)에 가입, 창립대원으로 제1지대 소속되었다. 창립대회 당시 주은래와 국민혁명군사위원회 정치부 제3청 청장 곽말약도 참석했다. 그해에 김학철은 화북항일전장에서 분대장으로 활약, 1939년 호남성 북부일대에서 항일무장선전활동을 전개했다. 1940년 가을에는 태항산항일근거지에서 팔로군에 참가했다. 태항산에서 조선독립동맹 선전부의 선전간사로 일하였다. 부대의 수요에 따라 신문편집, 연극 극본, 가사집필도 하면서 문학적 끼를 선보였다. 이시기 단막극 “서광”, “승리”, “등대”등을 창작하여 무한, 류양, 태항산 등지에서 공연하였다. 1941년, 여름 김학철은 화북 팔로군 지역으로 들어가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제2분대장으로 참전, 그해 12월 12일 하북성 원씨현 호가장(胡家庄)전투에서 대퇴골관통상을 입고 일본군에 포로되었다. 약 5개월간 석가장의 일본총령사관 경찰서 류치장에 갇혀있다가 그후 예심에서 치안유지법위반죄라는 판정을 받고 1942년 5월 일본의 나가사끼형무소 이시하야 본소에 이송되었다. 1943년 4월 29일 나가사끼 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0년, 미결가산 200일 언도를 받았다. 김학철은 나가사키형무소에서 원폭피해는 요행 면할수 있었으나 감옥에서 치료를 받지 못했다. 단지 전향서를 쓰지 않는다는 리유로 총상당한 왼쪽 다리를 치료받지 못하여1945년 2월 감옥에서 다리절단수술을 받았다. 김학철은 전쟁포로가 아니라 정치범으로 인정되여 나가사끼 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0년, 미결가산 200일을 언도받았다. 1945년 10월 6일 정치범을 무조건 석방할데 관한 맥아더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석방되었다. 해방받은 몸으로 서울로 돌아와 조선독립동맹 서울위원회 서울시 위원으로 활동했다. 1945년 12월 “주간건설” 잡지에 소설 “지네”를 발표했으며 그 후 1년간 육속 “문학”지에 “담배국”, “신문학”에 “균렬”, “서울문학”에 “어간유정” 등 10편을 발표했다. 1946년 조선으로 건너가 “로동신문”기자, 외금강휴양소 소장, “민족군대”주필등 직을 지내기도 했다. 조선전쟁이 일자 중국으로 들어와 저명한 여류작가 정령이 소장으로 있는 북경 중앙문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지냈다. 이동안 중편소설 “범람”, 단편집 “군공메달”을 중문으로 출판했다. 1952년 12월 자치주 주장 주덕해의 요청으로 연길로 와서 연변문학예술련합회 준비위원회 주임으로 임명 되였으나 반년만에 사직하고 전업작가로 맹활동했다. 1953년 9월 단편집 “새집 드는 날”을 연변교육출판사에서 출간했으며 장편소설 “해란강아 말하라!” 1, 2, 3부와 소설집 “고민” 중편소설 “번영”을 출간했으며 로신의 “아Q정전”을 번역출판하기도 했다. 그는 로신의 작품을 맨처음 조선문으로 번역한 작가이다. 1957년 중국 전역에서 불어친 반우파투쟁 속에서 “반동분자”로 획분되었다. 1964년부터 문제작인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를 창작하기 시작하여 1965년 5월에 완성했다. 1966년 전대미문의 문화대혁명이 폭발하자 그해 12월 반란파들에게 “20세기의 신화”원고가 발견되면서 필화를 입어 10년 유기징역 으로 판결, 추리구(秋梨沟)감옥에서 복역했다. 문화대혁명이 결속되자 1977년 12월에 만기석방되었다. 하지만 그 후 3년간 의연히 반혁명전과자 취급을 당하는 신세였다. 1980년 12월 연변주법원에서 “원판결을 파기하고 무죄로 선고한다”고 선포되여 1983년에 정식으로 루명을 벗었다. “20세기의 신화”는 미발표작인만큼 사회에 영향을 주지 않았으며 원고의 집필 자체는 범죄를 구성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연변주법원에서는 원 판결을 파기하고 무죄로 선고했다. 무죄를 선고받는 공판정에서는 김학철은 “나는 일찍이 이 북간도땅에 이렇게 긴 땅굴이 있으리라군 꿈에도 생각을 못했었습니다. 이 “반동”이라는 무시무시한 명칭으로 불리는 땅굴은 사람이 한번 들어가기만 하면 강산이 두 세번씩 바뀌여서야 겨우 벗어날 수 있습니다.”고 감개에 넘쳐 당시의 심정을 밝혔다. 1983년 김학철은 국적문제를 철저히 해결하고 중국국적을 가졌으며 정식으로 공직에서 리직하였다. 1989년 12월에는 49년만에 당적을 회복하였으며 항일로간부의 대우를 받게 되었다. 장장 24년의 정치박해로 상처받은 몸을 추슬리고 김학철은 다시 일어섰다. 이미 65세의 나이였지만 녹쓴 펜을 닦고 만강의 열정으로 창작활동을 재개했다. 1983년 항일회상기 “항일별곡”을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서 출간했으며, 1985년 “김학철단편소설집”이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1986년 3월에는 장편소설 “격정시대”가 료녕민족출판사에서 출간되였으며 1987년 6월에는 “김학철작품집”이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1994년에 한국 KBS로부터 “해외동포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이밖에 자서전인 “최후의 분대장”이 한국의 문학과 지성사에 의해 1995년에 출간되였고 1996년과 2001년에 걸쳐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와 산문집 “우렁이속 같은 세상” 한국의 창작과 비평사에서 출간되었다. 수백편의 수필과 잡문을 여러 신문, 잡지에 발표. 연변인민출판사에서 다권집 “김학철문집” 을 출판하면서 중국조선족문단은 물론 세계 한겨례 문단에서도 한획을 그었다. 학계는 “김학철선생의 문학은 우리가 세계문학과 대화할 수 있는 하나의 큰 창구인바 이 책이 우리 민족의 정신사에 있어서의 하나의 이정표로, 영원한 고전으로 될것”이라 내다보았다. 2001년 9월 25일 오후 3시 39분, 김학철은 85세를 일기로 연길에서 타계했다.   타계 20일전부터 자기의 병이 완치될 가망이 없음을 알고 가족의 부담을 덜기 위하여 자진 절식을 단행,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깨끗한 모습으로 조용히 죽음을 기다렸다. 본인의 소원대로 유체는 화장해 두만강에 뿌려졌고 일부는 우편함에 담아 동해바다로 띄워 보냈는데 우편함에는 “원산 앞바다 행 김학철(홍성걸)의 고향 가족, 친우 보내드림” 이라고 적었다. 유언으로 자신이 평생 지켜온 생활신조를 남겼는데 바로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을 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 그것이였다. 김학철은 반일투사이며 중국조선족을 대변하는 민족작가로서 일평생 곡절많은 인생길을 걸어왔다. 식민지시대의 고난을 눈물겹도록 맛보면서 지낸 비애의 소년시절, 항일전쟁의 피와 불의 세례를 겪은 격정의 청춘시절, 일제침략자의 감옥에서의 인고의 시간, 서울, 평양, 북경, 연변에서의 지역을 넘나든 폭넓은 문필생활… 이렇게 파란많은 인생길을 걸은 작가는 고금중외에 드물다고 해야할것이다. 우리 문단의 지성인들이 정평하다싶이 “세상에 실로 열화 속에서 아홉 번 나보고 빙설 속에서 아홉 번 얼어보고 피못속에서 아홉 번 목욕해본” 작가가 있다면 그가 곧 김학철일 것이다. 잘 아는듯, 하지만 잘 아지 못한 김학철의 삶을 다시금 읽으며 우리의 작은 문단에 세계적인 지성들과 비견(比肩)할만한 인물이 있다는데서 큰 자호감을 머금었다. 전통의 연속과 재발견의 필요성은 지금 흔들림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불안을 느끼고 있는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환기시켜 준다. 지금 우리 조선족 공동체는 격변의 물굽이에서 미중유의 파고(波高)를 경험하고있다. 불굴의 저항의식으로 강렬한 비판정신을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가려던 김학철의 행보는 리뉴얼을 요구하며 고심하는 우리의 상황을 풀어갈수 있는 코드가 될 수 있고 우리 사회와 시대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낼 수 있는 계시로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김학철의 올곧은 궤적은 오늘날에도 유통기한이 지나지 않은 새로운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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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2
  • 해란강가에 울려 퍼진 봄날의 함성
    ●김 혁 (재중동포 소설가) 조선 3.1운동의 연장선 1919년, 경성 탑골 공원에서 시작된 3.1운동은 온 한반도를 휩쓸었고 그 충격파는 드디어 간도지역에까지 미쳤다. 간도지역 조선인들의 망국의 한이 어렸던 반일열조에는 불이 확 달렸다. 그 무렵 간도지역에서는 반일계몽교육운동의 심입과 반일단체의 흥기와 더불어 반일군중운동이 점차 온양되고 있었다. 간도의 반일지사들은 울라지보스토크와 니꼴리스크 등지를 중심으로 한 연해주와 연계를 가지고 공동으로 반일운동준비를 비밀리에 추진하고있었다. 연해주에 파견된 간도 간민회 회장 김약연 등은 그곳에서 대한국민의회를 성립하면서 국내외 각지에서 파견된 민족운동자와 회합하여 독립선언서의 작성과 그 선포에 관한 합의를 하였다. 2월 18일과 20일에는 국자가(연길) 장하리의 박동원의 집에서 구춘선, 김영학, 고평, 등 연변의 주요 반일지사 33인이 모여 비밀리에 회합하여 반일운동방략을 결의하였다. 이와같이 조직적인 준비를 다그치던 중 3월 7일 조선의 “3.1”운동 소식이 간도에까지 전해졌다. 이는 타향에서 망국의 설음에 떨고있는 이들로 말하면 하나의 강심제가 아닐 수 없었다. 간도의 지사들은 다시 협의를 거듭하여 용정촌 서전대야(瑞甸大野)에서에서 “조선독립선언서발표축하회”를 거행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용정을 집회장소로 정한 것은 용정촌이 당시 간도의 서울 격으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인 것도 있겠지만 더욱이 용정에 일본영사관이 자리 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영학과 배형식을 대회 집행회장과 부회장으로 추천하고 회의순서, 시위 노선 및 대회의 구호 등 문제를 세세하게 상의하였다. 날짜는 3월 13일로 정했다. "3.1"운동의 소식을 접한 용정 동명중학교의 교원 최봉익이 조선에서 "조선독립선언서"를 가져왔다. 3월 8일부터 간도의 독립운동가들은 최봉익이 갖고 온 "조선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인쇄하여 사람들 속에 산포하였다.1919년 3월 1일, 즉 조선에서 "3.1"운동이 발생한 당날 북경주재 일본공사는 중화민국정부 외교부에 “중국정부는 일본의 ‘우방’으로서 마땅히 조치를 대어 간도 지역에서 일어날 반일운동을 제지시켜야 한다고 하면서 "만일 중국측에서 이 직책을 이행하지 못하면 일본은 중국을 돕는 견지에서 간도지역에 파행할 것이다."라고 경고를 내렸다. 3월 10일 일본영사관 국자가 분관에서도 총영사의 영을 받고 용정에서 있게 될 집회문제를 가지고 연길 도윤공서 외교과와 교섭하였다. 교섭에서 일본측은 중국측에서 군경을 파견하여 이번 집회를 제지시킬 것을 요구하면서 "만일 중국측에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면 일본은 자체로 군대를 파견하여 탄압할 것이다."라고 위협에 찬 언사를 던졌다. 원래 간도의 지방관부와 주둔군은 동병상련을 느껴 조선인들의 반일활동에 대해 방임하거나 동정의 태도를 취하고 있었으나 일본영사관으로부터 압력이 가해오자 어쩔 바를 몰라 했다. 이에 연길 도윤 장세전과 육군퇀장 맹부덕(孟富德)은 3월 12일 저녁 간도지역 조선인 반일단체지도자들을 불렀다. 그들이 천방백계로4시간 정도 권유하였으나 끝내는 설복하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장세전과 맹부덕은 길림성 독군과 성장에게 처리방법에 대하여 지시를 바라는 동시에 군경들에게도 준비태세를 명령했다. 일본정부의 공갈에 맹부덕은 부대를 거느리고 용정으로 와서 일본인 상부지를 지키게 되었다. 이리하여 용정촌은 12일 저녁부터 중국 군대와 경찰, 일본영사관 경찰들의 삼엄한 경비로 무시무시한 공포의 분위기로 가득 찼다. 3.13대회의 준비처에서는 상부지 안에서 집회를 한 다음 그 길로 시위행진을 하여 일본영사관으로 쳐들어가기로 계획하였으나 지방당국의 태도가 갑자기 변하는 바람에 모든 것이 엉망으로 되었다. 준비처의 지도성원 사이에도 의견분쟁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원 계획대로 상부지 안에서 떳떳하게 회의를 하자고 주장하였고 어떤 성원은 필요없이 모험하지 말고 안전한 곳에서 집회하자는 의견을 견지하였으며 또 어떤 사람은 원계획대로 아침에 개회를 선포하자고 우기고 어떤 사람은 맹부덕과 담판하자고 하였다. 결과 준비처에서 대표를 파견하여 맹부덕과 담판하느라고 시간을 자연 지체되어 정오 12시에 집회를 시작하기로 결정지었다. 역사의 종소리 드디어 1919년 3월 13일, 결전의 날이 밝아왔다. 전날까지만 해도 아무일 없던 하늘이 갑작스레 흐려졌고 굵은 모래알을 동반한 모진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침부터 용정거리는 수런거리는 소요와 팽만한 기운으로 늠실이기 시작했다. 간도 각지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용정의 서전(瑞甸)벌판으로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흰두루마기며 치마저고리를 입은 남정네들과 여인들 지어 백발 로인들과 삼척동자들도 가세하여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 이날 개산툰 지방의 사람들은 정동학교 교원과 학생들과 함께 12일 밤중부터 주먹밥을 만들어 가지고 80여리 밤길을 걸어 명동학교에 도착하였으며 달라자의 사람들은 새벽에 출발하여 명동학교에 도착하여 명동학교학생들과 함께 북과 나팔을 울리며 용정으로 행진 해 들어갔다. 동성용, 조양천, 차조구, 동불사, 루투구, 명월구, 장인강, 두도구, 의란구, 월청구, 위자구, 화전자, 석현, 연길 등지의 민중들도 대열을 지어 용정에 도착하였다. 간도 각 지역에서 사람들은 냇물의 지류가 강을 바라고 흘러들듯이 사면팔방에서 용정이라는 이 “간도의 서울”이자 조선인들의 의지를 대변하는 구심점을 향해 흘러 들었다. 원래 집회의 예정지점은 상부지 밖에 예수교 부속 영신학교 앞 공지였다. 11시부터 사람들은 만세를 부르며 회장에 흘러 들었다. 이때 맹부덕이 거느린 보병과 기병들이 앞을 막아 나섰다. 이리하여 집회대오는 부득불 원래의 지점에서 동북쪽으로 700여 미터 되는 곳으로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바로 당시 간도보통학교 뒷쪽(지금의 용정제1유치원마당) 부근 이었다. 회장 중앙에는 "정의인도", "조선독립 만세!"라는 오장기를 세웠다. 사방에서 모여 온 3만 여명에 달했다. 당시 용정의 인구가 9,000여명밖에 안되었던 실정을 감안해 보면 그 광경은 실로 미증유의 장관이었다. 이때 천주교회당의 종소리가 울렸다. 이 종은 당시 15세의 소년 림민호가 쳤다. 당년의 “종치기 소년” 림민호는 그 후 연변대학의 부총장을 지냈다. 그는 연변대학 창시자의 한 사람으로 민족대학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 받고 있는 민족교육자이다. 림민호선생은 그날의 감격에 대해 이렇게 더듬었다. “…나는 그해에 15살밖에 안되었고 우리 집은 바로 용정촌 천주교교회당 울안에 있었다. 이날 나는 동네의 한 친구와 함께 교회당 종루로 올라가 있었다. 용정에서 전에 없었던 장관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대회장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지만 대회는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이에 나는 친구와 함께 종을 번갈아가면서 힘껏 쳤다. 그때 우리가 종을 울린것은 우리 대회의 시작을 독촉하기 위한것이였다.” 홍안소년에 의해 울려퍼진 이 종소리는 지난 세기 10년대 우리 민족투쟁사에서 가장 뜻깊은 반일집회의 개막을 이끌었다. 이 력사적인 종소리와 함께 김영학이 대회를 선포했다. 우선 "간도거류 조선민족일동" 명의로 된 "독립선언서포고문"이 낭독되었다. "우리 조선족은 해방을 선언하노라. 지위를 선언하노라. 정의를 선언하노라. 인도주의를 선언하노라! 우리는 영광스런 력사를 지닌 민족이요, 또한 근로한 민족이 노라. 그런데 우리를 훼멸하고 타파하려는 자가 있도다. 우리 조선족은 강권의 기반하에서 신음하고 농락 된지도 어언간 여러 해 열력하였도다. 이는 부정이라 할 수도 없겠다. 위미부진한 약소인생의 자연화원이라 뉘를 원하며 뉘를 탓하리오. 그러나 지사의 눈물은 바다를 채웠고 우민의 원한은 창천에 미쳤도다. 하늘의 귀가 백성의 목소리에 향하고 하늘의 눈이 백성의 시야로 향하여 세운이 일변하고 일도가 갱신할 제 정의의 종소리는 큰 거리에 울리고 자유의 항선은 앞 나루에 닿았도다. 강국의 비행기, 잠수함은 바다 속에 침몰되고 약자의 기발은 춘풍에 나붓기누나. 오인(吾人)은 천민 속의 한 사람이오, 약자 속의 한 사람이라. 오늘 천명에 순종하고 인심에 응하여 천만 민중이 일제히 한 입 같이 자유찬가를 부르며 쌍수를 굳게 쥐고 평등의 태도로 전진하는 바이로다. 저 동양문명의 수뇌, 동양평화의 보루라고 자처하는 일제의 침략으로 하여 현 정세에 변천을 가져왔도다. 오인은 이를 회고 하야 문득 깨달음이 있으니 오인이 성의를 량찰하야 묵인 특허하리라. 민중들은 한 맘 한 뜻으로 단합 하야 침략자들이 간도 땅을 짓밟지 못하도록 할지어라. 모든 사람은 다 이런 신성한 책임이 있거늘 우리 간도의 80만 조선족 민중은 황천의 명소에 갈지 언정 인류의 평등을 위하여 있는 힘을 다 바칠 바이어라." 포고문을 읽은 다음 3장공약이 발표되었다. "첫째, 오인들의 이 거동은 정의, 인도, 생존, 존엄을 위하는 요구인 즉 배타적 감정으로 광분치 말라. 둘째,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발표하라. 셋째, 일체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야 오인의 주장과 태도로 하여금 어데까지 든지 광명정대케 하라." 공약이 다 낭독되자 "만세!"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으며 머리위로는 태극기가 수풀처럼 나붓겼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이곳으로 이주한 이들은 한민족의 뿌리와 력사적 소명의식을 자각하고 목청껏 만세를 외치고 또 외쳤다. 만세소리는 해란강가에서 오래도록 메아리 쳤다. 이어 시위행진이 거행되었다. 시위대오 맨 앞장에 명월구에서 온 공덕흡이 "조선독립을 성원"이라는 오장기를 들고나섰고 큰 폭의 태극기를 추켜든 명동학교, 정동중학교의 교원과 학생들로 구성된 300여명의 충열대가 앞장에 섰다. 그리고 그 뒤로 각지에서 모여온 군중대오가 따라 섰다. 시위자들은 "조선독립만세!", "일제의 침략을 반대한다!", "친일주구를 타도하자!"라는 구호를 높이높이 외치면서 호호탕탕하게 상부지 안의 일본 간도총영사관을 향하였다. 시위군중들의 행동에 감화 된 일제경영학교인 간도보통학교의 200여 명 학생들도 교장과 교원들의 제지를 물리치고 학교 문을 뛰쳐나와 시위행렬에 뛰어들었다. 이에 관해 당시 "독립신문"의 생생한 기재가 있다. "3월 13일, 보통학교 왜놈교장이 반일군중대회를 거행한다는 소식을 탐지하고 전교학생을 교실 안에 가두어 놓고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하늘땅을 울리는 '조선독립만세!'의 구호소리를 듣자마자 학생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팔을 휘두르며 '만세'를 외치면서 유리창문을 부수고 뛰쳐나와 거리에 달려가 시위 행렬에 참가하였다. 이 광경을 본 왜놈교장은 저도 모르게 '10년 교육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되었구나.'라고 탄식하였다."("독립신문"1920년 1월 1일) 상부지 가까이에서 시위군중들과 막아서는 군경들 사이에 몸 싸움이 시작되었다. 격노한 군중들은 돌멩이를 가로막는 군경들을 향해 뿌리면서 계속 밀고 나갔다. 그 긴박감과 결연함에 왜놈들은 질겁했다. 땅! 이때 총성이 울렸다. 맨 앞장에 오장기를 들고 나섰던 기수 공덕흡이 쓰러졌다. 이날의 거사를 암묵적으로 지지했지만 일제의 강요에 못이긴 중국경찰대장 맹부덕 부대는 당황한 나머지 시위대를 향해 일제히 발포하기 시작했다. 총소리는 연이어 울렸고 앞장 선 사람들이 하나 둘 쓰러졌다. 적수공권의 시위대오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흩어졌다. 혼란 속에서 주도자들은 즉시 시위대오를 해산시켰다. 그리고 사람들을 휘동하여 쓰러진 사상자들을 “제창병원”으로 호송하였다. “제창병원은 1914년 캐나다 선교사 바커(A.H.Barker)부부가 용정촌 동산(東山)에 설립한 병원으로 독립운동가의 정치적 피난처로 역할을 담당하였던 곳이었다. 이 병원 지하실에서 북간도의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이 인쇄되기도 했었다. 마진, 김영학, 김병흡 등 주도자들은 일부 군중들을 거느리고 여전히 상부지에 남아 사건의 시말을 열거하면서 사후대책을 대기전에는 물러서지 않겠다고 강력히 항의하였다. 그들과 더불어 구춘선, 리봉우, 고용환, 강구악, 박승필등 간부들은 국자가에 가서 중국정부는 마땅히 사상자에게 치료비와 배상금을 지불하며 사건을 조작한 자들을 엄벌할 것을 연길도윤공서에 제출하고 항의를 표시했으며 길림성 성장과 북경정부에 향해 지방군경들이 시위군중들에 대한 탄압에 항의를 표시하고 나서 정부에서 이번 사건을 책임지고 처리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러나 지방정부에서는 14일에 용정에 60여명의 군경을 증파하고 엄밀히 경계하면서 사건이 눅잦혀 질 때까지 현장을 유지하도록 명령하였다. 3월 13일에 일제와 지방군경들의 탄압으로 당장에서 희생된 사람은 10명으로서 공덕흡, 박상진, 정시익, 김태균, 김승록, 현봉률, 리균필, 박문호, 김흥식, 장학관이었다. 13일 후 17일 사이에 최익선, 현상호, 리유주, 차정룡 등 4명이 희생되었다. 이밖에 17일 후에 희생된 이들로는 김병영, 채창헌, 김종묵, 원용서, 허준언 등이었다. 13일 시위에서 남성 36명, 영성 12명 도합 48명이 부상을 입고 남성 84명, 여성 10명이 체포된 것으로 이 숫자는 1920년 1월 22일 "독립신문"에 집계되어 실렸다. 3월 17일, 용정의 각계인사들은 의사회를 조직하였다. 3천여 명의 애국청년들과 민중들이 날창과 몽둥이를 휴대하고 다시 용정에 집결하여 열사들의 시체를 메고 가두행진을 하면서 희생된 열사들을 추모하고 일제와 반동군경들의 탄압에 항의해 나섰다. 그들은 용정 제창병원 앞에 모여 발인제를 지내고 "조선독립수난자"란 현수막과 14명 수난자들의 령구를 메고 용정 동남교회에 있는 합성리 공동묘지에 가서 안장했다. 묘소에 "충렬자제공지묘"라는 묘비를 세웠다. 용정의 3.13반일시위 운동의 함성은 간도 각지는 물론 북만과 남만일대까지 울려 퍼지여훈춘, 화룡, 개산툰, 삼도구 등 북간도 각 지역에 들 불처럼 번져 5월 1일까지 30여 곳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오늘날 학계에 의해 “해란강반의 봄우뢰”라고 지칭되고 있는 용정의 3.13반일시위 운동은 조선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의 반일투지를 크게 고무해 주었고 앙양된 반일정서를 불러 일으켰다. 이는 간도지역 조선인민대중의 첫번째로 되는 대규모적인 반일투쟁사건이었다. 이는 조선인민대중들의 불요불굴의 반일정신과 힘을 과시하였을 뿐더러 일제의 미친듯하던 기염을 여지없이 꺾어놓았다. 3.13반일시위운동은 일제와 그 사촉을 받은 중국 군경들의 총칼에 무자비하게 진압당했지만 이 의거는 그 이듬해 1920년 용정에 있은 간도 일제은행의 15만원 탈취사건과 봉오동, 청산리투쟁으로 이어진다. 비무장 독립운동의 한계를 인식하고 바로 무장독립투쟁으로 전환했던 것이다. 반일의사능을 조성 오늘날 용정의 도심이 되어 제일유치원이 들어서 있는 그 날의 집회장소에는 “서전대야유적지(瑞甸大野遺跡地)”라고 쓰여진 기념비가 외롭게 서있다. 또 용정에서 남녘 삼합 쪽으로 미루나무가 늘어선 논둑 길을 따라 차로 5분정도 가면 큰 길곁에13기의 묘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광신향 합성리묘지, 3.13반일의사릉(3.13反日義士陵)이다. 이 묘역의 조성은 용정시 대외경제 문화교류협회 회장 최근갑 옹(90)의 공로와 갈라놓을 수 없다. 윤동주가 다닌 은진중학의 후배로 용정의 “산 증인”으로 불리는 그는 다년간 “용정 3.13”기념사업회의 회장 직을 맡고 3.13운동에서 희생 된 반일의사들의 묘지를 성역화 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1989년 최근갑 옹은 “3.13의사릉 수복위원회”를 설립하고 다섯 차례의 현지답사를 거쳐 1990년 4월 10일에 의사들의 묘소를 확정했다. 이어 5월에 “3,13반일 의사릉묘 수복 및 순난의사 추모식”을 장중하게 거행했다. 1994년 이 묘역은 용정시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3.13반일의사릉에는 그날 만세를 목청껏 부르다 순직한 13인 열사의 봉분이 두 줄로 안장돼 있다. 그앞에 서면 민족독립의 결연한 의지로 고결한 생명을 바쳐가며 외쳤던 영령들의 기개에 찬 함성이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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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1
  • 영화“국제시장”을 보지 않은 이유
    기성세대는 물질적 성과로 자만하지 말고 國家價値 퇴보에 자괴감 느껴야 시내의 극장을 지나가며 그 김에 볼 수 있는 상황이 되었는데도 일부러 그 말 많은 국제시장을 안 봤다. 언론에서는 연거푸 가난 속에 나라소득을 높인 기성세대를 젊은 세대가 이해하도록 기여했다며 찬사를 늘어놓고 있지만 사회의 가치는 쌓아놓은 물질소득이 전부가 아니다.국제시장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대한민국이 건국과정에서 이룩된 기존의 민주주의 국가제도를 하나하나 무너뜨려 오늘날의 불평등사회로 바꿔오던 기간이었다. 그 세월동안 살아왔던 기성세대는 민주사회를 말아먹은 장본인들이었다. 초기의 민주사회가 불평등사회로 바뀐 것에 대해 진보라는 자들이 큰소리칠 자격이 없는 것은 그들이 그 과정의 가장 큰 협력자이었기 때문이다.대표적인 국민기회균등파괴는 중고교평준화와 한글전용이었다. 이것은 진보라는 자들이 주도하고 보수기득권은 못이기는 척 따른 것이다. 가진 것이나 배경 아무것도 없는 집안의 아이라도 오직공부만 열심히 하면 공립의 영재학교에서 길러주는 제도를 없앴다. 조선시대와 달리 국민 모두가 知的언어를 배우고 사용할 수 있었던 시대도 얼마안가 단절되고 말았다. 자기들은 윗세대가 이뤄놓은 민주제도의 혜택 속에서 당장 가진 것은 없어도 노력과 능력만 있으면 삶을 개척할 기회를 가졌지만 자기들이 누린 민주제도를 말아먹어 노력을 해도 앞길이 보이지 않는 세상을 만든 것을 기성세대들은 과연 功致辭할수 있을까. 그렇다면 모아둔 재산을 물려줄 자식에게나 할 것이지 기회를 박탈당한 다른 젊은이들 앞에서 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국제시장은 민주주의 기회균등의 국가에서 국민기만적인 봉건주의 신분사회의 국가로 몰락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이기에 그 괴로운 과정을 굳이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연변통보 朴京範 >주: 본문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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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1
  • [김혁 칼럼] 황제의 수라상
    ●김혁 (재중동포 소설가) 1 제60회 아카데미 수상작 “마지막 황제”가 디지털 리마스터링으로 다시 개봉되었다. 여기서 리마스터링이란 과거의 영상이나 음원을 디지털로 복원하여 화질과 음질을 향상시키는 작업을 말한다. 필름에 붙어 있는 먼지를 제거하고, 파일의 색과 음향을 보정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필름이 손상된 고전 영화는 복원 작업까지 더해진다. 대부분의 극장들이 디지털 영사기로 교체돼 필름 영화는 아예 틀 수 없게 된 지금, 리마스터링은 문화재 보존의 차원과 초고화질 환경에 대한 콘텐츠 공급에 대한 차원의 작업으로 부상되고 있다. 2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가 생전에 집필한 자서전 “나의 전반생”을 바탕으로 이딸리아 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에 의해 엄청난 제작비와 물량이 투입되여 제작된 영화는 1988년 제 6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 감독, 각색, 음악, 촬영 등 9개 부문을 대거 수상, “그저 놀랄 수 밖에 없는 작품이다”, “우리가 다신 볼 수 없는 역사드라마”, “강력하고, 장엄한 역사적인 전기영화” 등 엄청난 찬사 속에 불후의 명화로 손꼽힌다. 1906년, 청나라 최고의 권력자인 80세의 서태후는 병상에 누워있는 광서제 대신 광서제의 동생 순친왕의 아들인 네살의 푸이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준다. 장엄한 황제 즉위식조차 하나의 놀이로 밖에 여기지 않는 어린 푸이는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황제의 존호와 궁전 및 사유재산만 인정받은 채 퇴위하게 된다. 자금성에서 연금생활을 하며 푸이는 16살때 완용을 황후로, 문수를 후실로 맞아들인다. 1924년, 풍옥상의 군사혁명으로 푸이는 자금성에서조차 추방된다. 중국침략의 야욕에 찬 일제의 사촉으로1934년, 푸이는 세상의 반대와 비난을 무릅쓰고 만주국을 세우고 황제의 보좌에 오른다. 하지만 일본군의 조종하에 위만주국에서 그는 허울뿐인 “꼭두각시 황제”노릇을 한다.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해방이 되자 일본 탈출을 시도하던 푸이는 만주에 주둔한 쏘련군에 의해 포로가 되며 중국인 전범수용소에 갇힌다. 1959년, 특사령에 의해 10년의 형기를 마치고 수용소에서 나온 푸이는 평범한 공민이 되여 만년을 보낸다. 영화는 력사의 도도한 흐름아래 몰락해가는 왕조, 그속에 굴절된 인간의 삶과 영욕을 그리고 있다 3 영화에서는 푸이가 일제의 사촉하에 지금의 창춘에 허울뿐인 위만주국을 세우고 강덕황제로 등극하는 과정이 상세하게 나온다. 그런 강덕황제에게 진상한 수라상의 쌀은 바로 간도지역에서 생산되었음을 아는 이들이 많지 않다. 당시 두만강지역은 인적이 드문 “봉금”지역으로 관헌의 눈을 피해 황무지를 개간하는것은 생명을 걸고 하는 일이었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아사직전의 가난한 조선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월강하여 황무지를 개척하였다. 용정시 개산툰진의 하천평은 조선인들의 벼농사가 비교적 일찍 시작된곳이었다. 이 마을에 최학출이라 부르는30여세의 조선인 농꾼이 있었다. 최학출은 1917년 2월 18일 충청북도 청주군 학사면 원평리에서 태어났다. 재해로 살길이 막연하여 지자 1935년에 이곳으로 이사하여 왔다. 그때만 하여도 이 고장의 벼농사는 주로 산종을 했고 벼모이식을 조금씩 하는 정도여서 벼의 생산량이 많지 못했다. 최학출만은 전부 모내기를 할 타산으로 당지의 한냉한 기후조건에 비추어 대담하게 온상육모를 시험했다. 1941년 봄, 유리창문처럼 간이 문창을 짜서 백지를 붙이고 콩기름을 발라 양광이 잘 들어가도록 투명도를 높인 다음 벼모판을 만들고 씨앗을 뿌렸다. 결과 모를 일찍이 키워냈을뿐만아니라 유별하게 벼모가 건실하게 자라났다. 이해 소출도 뜻밖에 아주 높았고 지어놓은 해쌀밥은 백옥같이 희고 기름기가 있어 그야말로 천하진미요, 천하진품으로 되었다. 그의 벼는 현과 간도성 농산품 전시회에 출품하게 되어 으뜸가는 호평을 받았고 점차 전 만주에 소문이 났다. 최학출은 만주국정부의 초청을 받고 신경(지금의 창춘)에 가서 만주국화페로 천원의 상금을 받았다. 그리고 특별히 강덕황제의 수라상에 오르는 쌀을 전문 생산하는 밭을 가꾸라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천자, 제후에 붙이는 높임말인 “어”에 곡식 “곡”자를 붙여 밭이름을 "어곡전(御谷田)"이라고 했다. 그가 맡은 "어곡전" 면적은 천평이나 되었다. “어곡전” 주위는 뺑끼칠을 한 널판자로 울타리를 하여 집짐승들이나 사람들까지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촌공서와 경찰서, 현의 관원들이 "어곡전"을 호위해 주었다. 봄에 논갈이를 할 때만 소의 힘을 빌었을 뿐 그외의 일들은 모두 사람의 힘으로 하였다. 논에 일하려 들어갈 때면 우선 손발을 깨끗이 씻어야 하였고 거름은 오직 삶은 콩과 두병만을 사용하였다. 가을이면 먼지가 없도록 까붐질을 한 다음 정미를 하고 온 마을 처녀들을 끌어다 쌀을 고르게 하였다. 처녀들은 유리판 위에 쌀을 펴놓고 한알한알씩 고르었는데 쌀알의 귀가 좀 떨어져도 안되고 쌀의 빛깔이 좀 달라도 안되었다. 황제의 수라상에 오르는 어곡을 만드는 일은 그야말로 참으로 세심한 과정이 었다. 이렇듯 만주지역의 논농사는 이곳으로 이주해온 조선인들에 의해 시작됐으며 최학출은 만주 지역 벼농사의 전설적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우리 민족의 뛰어난 벼재배 기술과 역사의 영욕을 고스란히 안고 오늘도 두만강 연안에서 나는 쌀은 당년 못지 않게 백옥같이 희고 기름기 돌며 밥맛도 참으로 구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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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26
  • [김혁 칼럼] 흑백 아카데미
    ● 김 혁 (재중동포 소설가) 1 87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막을 내렸다. 영화인들의 최고의 축제이건만 어딘가 싱겁다. 그리고 시끄럽다. 이번 아커데미 시상식은 역대 가장 뻔한 시상식이었다는 조롱을 면치 못했다. 작품상과 감독상, 남녀 주연상과 조연상 등 주요 부문의 수상작과 수상자는 미국 빅데이터 분석 업체와 베팅 사이트 등이 내놓은 전망과도 어쩌면 100% 일치했다. 또한 올해 아카데미는 아카데미 역사상 “최고로 하얬던 해”인 1998년 이후 17년 만에 다시 백인 일색의 후보를 지명해 논란을 불러왔다. 이번 아카데미는 시상식이 열리기 전부터 흑인 차별 논란이 불거졌다. 미국의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일대기와 그의 유명한 연설이 있었던 1963년의 평화대행진을 재현한 전기 영화 '셀마'가 감독상과 연기 부문상 노미네이트에서 제외되자 흑인에 대한 차별이 아니냐는 논란이 제기됐다. ‘셀마’는 지난 해 퍼거슨 시 사태를 필두로 미국 곳곳에서 있었던 인종차별주의와 관련한 끊임없는 이슈들을 동반한 채로 계속해서 화제를 모았고, 여전히 무난한 흥행 성적을 지키고 있던 영화였다. 결과 '셀마'는 이번 아카데미상에서 겨우 주제가상 하나를 달랑 건졌을뿐이다.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을 진행한 닐 패트릭 해리스는 "오늘 'best and whitest' 작품들을 축하한다"고 말했다. 이는 '최고이자 가장 하얀' 작품들이란 뜻이다. 자신들을 향한 논란을 유머스럽게 받아들이고 이번 논란에 대해 아카데미에 일침을 가한 발언이었다. 배우 숀펜은 '버드맨'으로 감독상을 수상한 알레한드로 곤잘레스를 향해 "저 사람에게 왜 그린카드를 줬냐"고 농담을 던졌다. 그린카드는 이민자들에게 발급되는 영주권이다. 그리고 알레한드로 곤잘레스는 멕시코 인이었다. 이 발언 역시 논란이 되었다. 그의 발언이 다소 경솔했다는 반응이다. 시상식에서 보통 수상소감이 길어지면 수상 소감을 끝내라는 의미로 음악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날 ‘셀마’로 주제가상을 받은 로니 린이 수상 소감을 전할 때는 음악이 등장하지 않았다. 이를 통해 주요 부문 후보에 흑인이 포함되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을 어느 정도 잠재우려는 시도로 보인다. 영화가 주역이 되는 세계 최고 영화축제이건만 아카데미 시상식은 올해에도 ‘백인 중심의 잔치’라는 오명을 털어내지 못한채 우리에게 '인종주의'의 논란을 다시 한번 화두로 던져줬다. 2 87회 아카데미 시상식이은 미국 사회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지난해 8월 10일 미국 중서부 미주리주 퍼거슨시에서 18세 흑인청년 마이클 브라운이 백인 경관의 총을 맞아 숨졌다. 머리와 팔 등에 최소 여섯발을 맞았으며 숨진 뒤에도 4시간 동안 시신이 길거리에 방치되였다. 브라운이 비무장 상태에서 무고하게 사살됐다는 증언이 나왔다. 하지만 지난 11월25일, 브라운을 총으로 쏴 사망케 한 백인 경찰 대런 윌슨에 대해 대배심이 불기소 결정을 내렸다. 이런 가운데 뉴욕 거리에서 담배를 팔던 흑인 에릭 가너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목을 졸라 숨지게 한 백인 경관에 대해서도 뉴욕시 대배심이 12월 3일 불기소 결정을 내렸다. 지난해 9월에는 백인인 남편에게 키스를 하던 다니엘르 왓츠라는 흑인녀성이 경찰에 붙잡혔다. 매춘녀로 오인 받은 그녀는 즉각 “이 사람이 나의 남편이다”라고 항변했으나 매춘부가 아니고 남편이 그녀의 고객이 아니라는것을 경찰이 인정할때까지 수갑을 찬 채 붙잡혀 있어야 했다. 체포당하며 그녀는 몸 곳곳에 상처를 입었다. "미국에서 백인 남성에게 키스하는 흑인 여성은 매춘부라고 봐야 하느냐"며 사건은 또 한 번 인종 차별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아이러니 적인 것은 그녀가 바로 인종차별에 대해 직격탄을 날린 영화 “장고, 분노의 추적자”에서 흑인 노예로 출연했던 녀배우였다. 영화의 감독 타란티노는 "미국은 과거의 비극적인 사건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노예제도는 미국의 원죄 중 하나다. 아직도 그 죄를 씻지 못했고 여전히 흑인과 백인이 서로를 대하는 데 영향을 끼친다"고 갈파했다. 3 퍼거슨 사태 이후, 흑인을 상대로 한 각종 증오 범죄, 스나이퍼들이 사격 연습 때 흑인 범죄자 얼굴을 표적으로 사용한 사실 등이 밝혀지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흑인의 인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시점에서도 미국은 스크린과 현실에서 “부당한 흑백스토리”를 그냥 연출하고 있다. 뜬금없는 연상일지 모르지만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면서 해외에서 차별 받으며 3D업종에 혹사하는 수십 만에 달하는 우리 족속들의 이야기들이 그물그물 떠올랐다. 이는 비단 먼 서구나 영화에서만 자행되는 일이 아니다. 피부색이나 나라를 두고 사람을 차별하는 악습은 우리가 고국이이라는 감동과 민족적 동질감에 대한 기대를 품고 찾아갔던 그 곳에서도 낯익은 소재다. 숀펜이 ‘조크’를 던진 감독상 수상자 알레한드로 곤잘레스의 수상 소감 한 구절이 떠오른다. "지금의 이민자들이, 예전 이민자의 나라를 만든 사람들과 동등하게 살고 존중받길 기도한다". -“청우재(聽齋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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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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