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2(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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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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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2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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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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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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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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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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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문] 겨울, 눈, 평화 그리고…
    ■김철균눈이 내린다. 설을 앞두고 내린 설날이 눈이어서일까? 기대되는 것도 많다. 대줄기처럼 내리 꽂히는 비가 아니어서인지, 한여름도 온 몸이 오싹하게 만든다는 찬비가 아니어서인지 사람마다 눈을 평화에 비유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금 아파트 발코니(阳台)에 기대선채 눈 내리는 밤하늘을 바라본다. 지금쯤 이 눈은 우리가 사는 고장 외 다른 낯선 산야에도 내리고 있겠지? 배고동 울리는 부두가에서, 정든 님 기다리는 젊은 여인의 야린 어깨위에 소복히 내려 앉을 눈, 백두산하 그 어느 두메산골 농가의 지붕을 하얗게 장식할 눈, 아니 국경(휴전선?)선 그 어디선가에서도 고향 그리는 젊은 초병의 마음과 마음을 달래주며 내릴듯한 흰 눈이다… 이렇게 짙은 정감을 나타내는 눈이 평화를 상징한다면 평화를 갈망하는 건 모든 인류의 소망이라 해야겠다. 헌데 우리 모두가 공동으로 소망한다는 평화는 이 겨울 어쩌다 눈이 내리듯이, 우리가 사는 지구촌에 쉽게 찾아 오지 않고 있다. 언젠가 모 간행물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추정에 따르면 인류는 자연이 만들어내는 생산성의 약 40%를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한다. 상당 부분이 먹고 사는 기본생활 유지가 아니라 이른바 생활수준 향상을 위해 엄청난 양의 에너지와 물자와 땅을 차지하고 있다…무질서한 개발, 포획과 오염, 생태계의 다른 구성원들의 입장에서 보면 인류는 터무니없는 탐욕과 횡포를 부리면서 지구촌의 열대우림과 다른 생물족들을 훼멸시키는 한편 이젠 그것도 모자라 자기들 인류끼리까지 옴니암니하는 싸움을 벌인다…” 만약 이 대목을 다른 사람이 읽어 본다면 과연 어떤 생각이 들까? 아마 인류의 행실을 두고 스스로 어처구니가 없어 할 것이다. 지구촌 최고의 영장물이고 생물계 문명의 상징이라고 일컫는 인류도 알고 보면 가장 허위적이고 포악한 “짐승”이라는 결론밖에 더 나올 것이 없다고 해야겠다. 또 있다. 인류는 늘 “양육강식”이란 인류사회외 “자연계의 동물세계”에서만 존재한다고 역설한다. 하지만 인류사회가 더 심하다는 생각이다. 겉이자 속이 그대로인 “동물세계”와는 달리 점잖은 양복위에 코트까지 차려 입은 신사가 일단 그 허울만 벗어 버리면 하늘이 높은 줄도 모른다. 그것도 배고파야 기타를 잡아 먹는 “동물세계”와는 180도 이상 다르다. 배가 부르면서도, 있고 많으면서도 수탈하고 점유하고 욕심을 부린다. 이는 개인과 개인, 가정과 가정, 집단과 집단, 나라와 나라 사이도 마찬가지이다. 똑 같다… 그러면서도 티없이 깨끗한 흰 눈을 반겨하고 눈이 내리는 날이면 평화를 기대하는 인류의 모순으로 엉켜진 “내심세계”—그것을 알아채서일가? 몇년전부터인지 우리의 “하느님”은 인간세상에 평화의 눈을 그닥 자주 하사하지도 않는다. 모든 것은 인간 스스로가 초래해 낸 “보응”이란 생각이다. 더 깊이 말 말자 “생태계보호”요, “자연계공존”이요 하고 자꾸 외치지만은 말고 우선 우리 인류부터가 종족과 “체제와 이념”을 벗어나 공존하면서 살자. 욕심 부리지 말고 싸움질 말며 남을 기시하지도 말자. 그러면 생태계보존과 자연계공존도 뒤따라 말만이 아닌 실상으로 될 수 있다. 그리고 다시 명년 이때쯤 인류와 지구촌 평화를 기원하며 눈내리는 밤하늘을 기대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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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02
  • [김혁 칼럼] 나 홀로 집에
    ●김 혁 (재중동포 소설가) 해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꼭 나오는 영화가 있다. 크리스마스 특선이라는 이름으로 세계각지의 여러 영화채널에서 방영한다. “나 홀로 집에 (小鬼当家)”라는 영화이다. 1990년 미국에서 제작된 코미디영화이다. 8살난 아이 케빈은 부모들이 휴가차로 프랑스로 떠나면서 홀로 집에 남겨진다. 성탄절날 아이가 혼자 있는 집에 두 명의 도둑이 들이닥치고 아이는 홀로 도둑들을 맞서 나간다. “나 홀로 집에”는 개봉한지 얼마 안되여 미국내에서 흥행률 1위를, 전 세계에서는 흥행률 3위를 기록했다. 결과 세계적으로 흥행수입 4억 7천만 딸라라는 기록을 올렸다. 그에 힘입어 시리즈로 몇부 더 제작되여 그냥 신화같은 흥행가도를 달렸다. 그후로 이 영화는 반드시 크리스마스 황금 시간대에 편성되곤했다. 2011년에는 5백만이 넘는 가구가 시청하여 력대 크리스마스 최고 시청률이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크리스마스 이브인 어제저녁, 중앙텔레비방송 영화채널에서도 황금시간대인 9시에 이 영화를 상영했다. “나홀로 집에”를 보면서 뜬금없이 홀로 집에 남겨진 우리의 아이들을 떠올렸다. 즐거워야 할 크리스마스에 청승맞은 하소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부모없이 “나 홀로 집에” 남겨진 아이들, 이 아이들을 우리는 “류수아동(留守儿童)”, “편부모 가족”, "결손가정“이라 부른다. 이 문제는 현재 우리 조선족사회의 최대의 문제점으로 부상되였다. 리산(離散)으로 인한 조선족 가정문제가 심각하다는 얘기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편부모 가족은 조선족의 도시진출, 출국로무열과 더불어 날로 늘어나는 추세이다. 지난해 연변조선족자치주 “조선족학교 결손가정자녀교양연구모임”에서 밝혀진 자료에 따르면 연변의 결손가정이 60%, 일부 학교의 학급은 지어 87%를 차지했다. 과반수이상의 우리의 아이들이 “나 홀로 집에” 남겨진것이다. 또 매체의 조사에 따르면 길림지역 7개중소학교에서도 편부모거나 부모가 곁에 없는 학생수가 재교생총수의 60.65%를 차지했다고 한다. 이중에 부모가 리혼했거나 사망한 학생의 비례수는 12.3%인 반면 해외 로무송출로 부모가 곁에 없는 학생수는 67.4%나 달했다. 그중 량부모가 다 없는 학생비례수도 34.1프로, 적지않은 수자이다. 료녕성 심양에서도 시내 5개 조선족소학교와 2개 조선족 중학교 학생 1천641명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 결과 부모가 모두 있는 가정은 35%에 불과했으며 나머지 65%가 결손가정의 자녀였다. 조사 대상 가운데 부모가 리혼했다는 응답은 13.9%였으며 부모 가운데 한 명만 있다는 응답이 27%, 부모 모두 없어 조부모 등 친척과 함께 생활한다는 응답도 24.1%에 달했다. 이러한 집계자료에 따르면 결손을 초래한 가장 큰 원인이 바로 부모 쌍방 혹은 일방의 출국이였고 다음 부모의 리혼이였는데 사실상 부모 일방의 출국으로 인한 가족의 해체(리혼 및 외국인과의 결혼 등)가 큰 비중을 차지하기도 했다. 얼마나 많은 가족들이 현대판 “리산가족”의 비운을 겪고있는지, 얼마나 많은 자녀들이 동강나고 비여진 가족의 아픔을 겪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의 아이들은 이러한 삭막한 가정환경에서 생활면에서, 학업에서 다각적으로 좌절과 갈등을 겪고있다. 부모와 장기간 이별한 상태에서 스스로를 다독이며 살아가야만 하는 아이들의 증후(症候)는 심각하다. 강보의 아이들을 품에서 떼놓고 해외로 나가서는 5년, 6년 지어 20년까지 보내면서 지어 자기 아이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부모들의 사례는 한 집 건너 주변에 수두룩하다.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부모란 그저 한국에서 몇달에 한번씩 걸려오는 전화속의 목소리로 달마다 부쳐보내는 돈의 액면으로만 기억되는 아이들에게 부모는 낯익으면서도 낯설은 존재이다. 이런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공부에 골몰할수가 없고 학업이 뒤떨어지면 곁에서 부축여주는 보호자도 없이 결국 학교생활을 쉽게 포기하고 사회로 나와 떠돌이 신세로 전락해 가고 있다. 그리고 비여진 자신의 책무를 돈으로 상환하려는 부모들에 의해 어려서부터 돈에 맛을 들인 아이들은 그 금전관에도 문제가 생기기 일쑤다. 아이들은 너무나도 일찍이 금전만능, 한탕주의에 환혹되고 있다. 학교의 문제생들 대부분이 이런 가정에서 속출되고 있다는것이 사례와 집계로 증명되고있다. 아이들의 성격 형성과 사회적 관계는 많이는 부모를 통해 배우게 되는데 가정의 부재로 인한 “나 홀로” 아이들에게는 이런 환경이 비여지고 관계가 차단될 수밖에 없다. 돈을 벌어와 금쪽같은 자식들에게 쏟는다고는 하다지만 그 과정이 외려 가족간의 그리움과 애정에 목 말라가고 있는 자식들의 어린 가슴에 멍이 들게 하고있다. 부에 대한 집착과 그로인한 아이들에 대한 소외가 자녀들의 성장과 꿈과 미래에 상처를 덧나게 하고있는것이다. 가족 구성원이 줄어들고 비여 있는만큼 기쁨과 슬픔을 공유할 대상이 줄어들고 아이들은 외로움 지어 원망까지 키우며 살아가고있다. 이 문제를 절감하고 보호와 지원 시스템 마련 등 사회적인 거동이 일고는 있지만 날로 속출하고있는 이 군체에 대한 노력의 손길은 아직도 판부족이고 미비하다. 이미 “빨간 불”이 켜진 우리의 공동체사회에서 결손가정으로 인한 사회적인 증후가 더욱 심하게 불거지지 않기 위해서는 마땅한 처방전의 마련이 화급하다.영화에서 주인공 캐빈이 두볼을 감싸쥐고 비명을 지르는 장면이 압권이다. 그래서 영화의 포스터에도 올랐고 많은 배우들이 그 모습을 패러디 하기도 했다.아롱다롱 성탄수가 불밝혀져있는 따뜻한 방안에서 부모와 풍성한 식탁에 오순도순 마주앉아 캐럴송을 부르며 재롱을 떨어야할 우리의 아이들이 지금 홀로 텅 빈 방에서 마음의 비명을 지르고 있지않을런지 모른다.2014 12월 25일“청우재”에서 김혁 - 재중동포 소설가, 용정.윤동주 연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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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2-30
  • 장개석의 투항 유도하려 했던 모택동의 “실수”?
    1950년 5월 16일, 국민당군이 주산(舟山)에서 철거한 뒤 장개석한테는 금문도와 마조군도에 대한 수비문제가 골치거리로 나섰다. 당시 이 2개의 섬도를 사수하느냐 아이면 포기하느냐를 두고 국민당군 내부에서는 논쟁이 가시화되었다. 장개석과 국민당의 고위층은 확실한 계획을 잡지 못하였고 이 2개 섬의 백성들은 불안과 공포에 시달렸다. 바로 이 때 모택동과 중공은 이미 대만을 해방할 결심을 확정하였다. 중공중앙에서는 1950년의 해방군 임무를 해남도, 대만과 서장을 해방하고 이 경내의 국민당 잔여세력을 소멸하는 것이라고 명백히 규정하였다. 하지만 당시 외계에서 알지 못하고 있은 것은 모택동은 일을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하지 않은 바로 그 것이었다. 아울러 모택동은 장개석에서 회생의 길을 마련해 주려고 했었다. 당시 해방군이 한창 전쟁준비를 진행하고 있을 때 모택동은 적당한 인물을 파견하여 장개석과 접촉함과 동시에 평화담판의 가능성을 탐색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그 때 모택동이 선택한 인물은 장치중 장군이었다. 장치중 장군은 원 국민당의 고위관원으로서 육군 2급 상장이었고 선후로 호남과 신강 등 2개 성의 성주석이었으며 장개석의 위원장 비서실 주임까지 한적이 있었기에 장개석과 사인관계가 아주 밀접했다. 한편 그와 중공과의 관계 또한 양호하였는바 일찍 국민당을 대표하여 국공 양당간의 담판에도 수차례 참가하였었다. 1950년 3월 11일, 모택동은 화남지구에서 조용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장치중한테 “대만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데 관한 장치중 선생에게 보내는 전보”에서 “선생이 대만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사업에 참여하는 것이 매주 적합하고 중요할 것 같습니다. 희망을 버리지 말고 고심히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생각밖의 효과를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썼다. 그 뒤 3월 20일, 모택동은 재차 장치중한테 전보를 보내어 한번 만나 구체적으로 연구해보자고 제의하였다. 그리고 특별히 엽검영한테 지시하여 장치중의 경호사업을 잘할 것을 부탁하였다. 그 뒤 장치중이 북경으로 오자 모택동은 직접 중앙군위의 모 책임자를 배치하여 장치중의 경호사업을 책임지게 하였으며 한편 장치중과 회담하면서 일단 대만이 평화적으로 해방될 수만 있다면 장개석의 인신안전은 물론 기타의 정치와 행정분야에서도 출로를 마련해줄 수 있다는 것을 명백히 알려 주었다. 그러자 장치중은 모택동의 계획에 좇아 장개석한테 마지막 회생의 기회를 줄수 있는 내용을 편지에 담아 정성들여 썼으며 홍콩의 한 유명인사를 통해 편지가 대만의 장개석한테 전해지도록 부탁하였다. 헌데 이 편지가 장개석의 손에 들어간 것은 수개월 뒤인 7월 19일이었다. 국민당군이 주산군도에서 철수한 뒤 장개석과 대만의 군민들은 의연히 중공측에서 평화담판의 뜻을 갖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크나큰 공포와 긴장속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후에 원 국민당군의 장령이었던 주굉도는 장개석이 이 편지를 받았을 때의 정경을 다음과 같이 회억하였다. 1957년 7월 27일, 이 날은 한반도 내전이 발발한지 1개월이 되는 날이었다. 이날 장개석은 연회를 차려 국민당군의 여러 원로들을 청해서는 한국전에 개입할 뜻을 전달하였다. 연회도중 국민당 장령인 하응흠이 돌연히 장치중이 3월 16일에 쓴 편지가 7월 19일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공개하였다. 하응흠은 “67페이지에 달하는 이 편지는 참모총장 주치유를 통해 장개석한테 전달되었다가 19일 다시 나한테 보내졌다”면서 장개석은 당장에서 중공의 제의를 거절하였다고 밝히었다. 그러면서 하응흠은 장치중의 편지내용을 공개,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았다. 국민당은 10여년간 “공산비적토벌”에 나왔지만 정치의 부패로 필연적인 실패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현재 국공간의 힘을 비교해볼 때 인민해방군은 긍정코 대만을 해방할 수 있으며 아울러 국민당은 대만을 지킬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대만은 필연코 국민당의 무덤으로 될 수밖에 없다. 장치중은 편지에서 또 만약 위원장께서 원한다면 자기 자신이 홍콩에서 만날 수가 있으며 이 편지는 모택동의 동의하에 작성한 것이라고 밝혔다. …… 하응흠의 보고가 끝나자 진성, 장군, 오충신 등은 모두 이는 대만공격 전야에 있게 되는 중공의 상투적인 정치공세라고 하는 한편 장치중을 혁명의 배반자라고 하면서 마땅히 제재하여야 한다고 흥분해하였다. 주굉도는 그 때의 정경을 회상하면서 장개석이 당시 사적으로 편지를 처리하지 않고 하응흠더러 공개장소에서 읽게 한 것은 자신이 복국중임(复国重任) 을 짊어졌기에 자신이 중공한테 머리를 돌린다는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서였지 그한테 평화담판의 생각이 없은 것은 아니라고 인정하였다. 한편 장개석이 모택동의 평화담판제의를 거절한 것은 다른 두가지 방면의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한반도전쟁이 발발하고 대만을 돕지 않던 미국정부의 태도가 크게 전변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장개석 본인이 장치중과의 개인감정에서 크게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장치중으로 놓고 말하면 1949년 북평에서 있은 국공양당간의 평화담판시 북평에 간지 얼마 안되어 공산당쪽으로 기울어지면서 국민당내에서 공산당에 투항한 장령중의 일원으로 되어 장개석한테는 가장 큰 수치이기도 했다. 한편 장치중이 쓴 편지가 4월이나 5월에 대만에 도착했더라면 역사는 혹시 다르게 씌여질 수도 있었는바 이는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당시 해방군은 주산군도와 해남도를 해방한 후 즉시 대만에 대한 공격준비를 다그쳤다. 당시 해방군은 화남 각지에 30개에 달하는 군용비행장을 수건하여 400대의 전투기가 이미 비행장에 진입했으며 복주, 하문, 산두 등 항구에 대량의 등륙정 및 기타 군함을 배치해 놓고 출항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장개석 등 국민당 수뇌부는 7월경에 이르러 대만해협의 풍랑이 적게 일 때 중공의 수십만 대군이 해협을 건너오면서 공격을 개시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다. 또한 당시 5월말의 대만은 완전히 미국의 “제28호 특별명령”에서 지적한 것처럼 “모두들 이 섬이 곧 함몰되고 중화민국이 섬도에서 기타 지구와 마찬가지로 쉽게 공략된다”고들 했다. 한편 5월 27일, 대북의 “중앙일보”는 사론을 발표하여 대만이 이미 전례없는 위기가 도래하였다고 승인, “중앙일보”의 이사장 동현광 역시 “중국이 이미 이 지경에 도달했으니 오직 의지상의 기적만이 이를 만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 와중 오직 장개석만이 매우 견정했다. 당시 장개석은 “만약 대만을 지키지 못해도 나는 절대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이미 “살신성인(杀身成仁)”의 각오를 가졌다고 한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만약 당시와 같은 사태가 재차 벌어져 모택동이 장치중이 아닌 다른 사람한테 위탁해 “살신성인”이 지경에 이른 장개석에게 편지를 쓰고 또한 한반도 전쟁같은 “대사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 결과의 역사는 긍정코 다시 씌어질 수도 있겠다는 결론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12-28
  • 1949년 겨울 북경의 ‘금창(禁娼)운동’ 내막
    중국의 민국초기 사창업은 규모화를 형성하기 시작, 가장 번창하던 1917년 북경에 등록된 기방은 도합 391개에, 기생 3500명에 달했으며 암암리에 사창업에 종사하는 기생은 적어도 7000명이 되었다고 한다. 항전시기 북평의 매 250명의 여성중 1명은 기생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1) 북평이 해방된 후 사회는 복잡하였다. 당시 정부에서는 비록 기방들에 대해 즉각적인 차압을 강행하지는 않았지만 사회의 치안을 정돈하면서 기방들을 관제범위내에 넣었고 각 공안분국과 파출소들에서는 경상적으로 기방의 표객(嫖客)들을 검사하고 나쁜 분자들을 추적하군 하였다. 당시 기방은 흔히 국민당 특무들이 숨어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하지만 당분간 차압할 수 없는 것이 당시의 실정이었다. 북경시 공안국에서는 사회치안을 수호하는 각도에서 기방들에 대해 약간의 잠정규정을 정해놓고 관제하고 있었다. 당시 북경시 정부의 규정에는 해당 공안국과 파출소에서는 우선 각 기방들에 대해 등록하고 각종 방식으로 해결방식을 탐색하군 하였다. 한편 어떤 공안분국에서는 표객들의 기방으로 드나드는 것을 제한하기 위하여 “표객검사” 도장을 만들어서는 파출소들에 발급, 표객이 발견되면 우선 교육을 하였으며 나중에는 표객의 신분증과 영수증에 도장을 찍군 하였다. 한번은 50세 가량의 한 남성이 기방에 들어왔다가 파출소 일군들한테 잡히게 되었는데 그한테는 그 어떤 증건도 없었다. 그러자 파출소 경찰은 그 남성의 와이셔츠에 “표객검사”란 도장을 찍어보내였다. 그 뒤 기방마다 “도장일군이 왔다”고 하면 모든 표객들은 도망가군 하였으며 기방은 썰렁하기 그지 없었으며 어떤 업주들은 문을 닫고 폐업하였고 적지 않은 기생들은 기타 지구의 기생방으로 자리를 옮기거나 암암리에 몸을 팔며 생계를 유지하군 하였다. (2) 1949년 5월, 북경의 사회치안은 혼란현상이 기본상 청리되었다. 그러자 북경시 정부에서는 회의를 열고 전문 기생들에 대한 문제를 연구하였다. 당시 북경시 시장이었던 엽검영은 “기방에 대한 처리는 반드시 먼저 사람을 파견하여 정황을 요해한 후 처리방침을 결정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5월 23일, 북경시에서는 민정국, 공안국과 부련회 등 기관의 일군들로 구성된 사업조가 조사사업에 착수, 전 시 200여개의 크고 작은 기방의 기생들을 대상으로 공안국과 민정국에서 각각 조사자료를 작성, 기방의 역사, 분포상황, 등급, 시설, 영업상황 및 기생들의 종류, 내원, 생활상황과 윤락원인 등을 시정부와 중앙공안부에 바치었다. 한편 민정부문에서는 기생들을 집합시킬 장소를 선택하고는 일부 생필품을 구전하게 갖추어놓았으며 시부련회 간부가 직접 각 부문으로부터 뽑아온 간부들에게 정책선전 훈련을 시켰고 위생국의 의사를 초청해 성병방지지식강좌를 조직했다. 또한 기업국에서는 수용된 기생들이 해야 할 일, 즉 털실옷 뜨기 등 일거리를 마련하군 하였다. 10월 15일, 북경시위와 북경시정부의 지시에 따라 공안국, 민정국, 부련회 등 부분에서는 “기방 봉폐행동 총지휘부”를 내왔으며 시공안국 국장 나서경이 총지휘를 맡았다. (3) 행동시간: 1949년 11월 21일 오후 6시 책임부문: 북경시 공안총국 총지휘: 나서경 행동방식:3명씩 1개 소조로 배비, 1명의 여간부 5개 내지 10개의 기방 조사기록. 조사대상: 주인, 마담 및 대리인, 기생, 심부름꾼 등 행동을 통일하기 위하여 오후 6시를 행동시간으로 규정, 집합시켜 회의를 여는 방식으로 주인, 마담을 집중시키고 오후 8시에 기생과 심부름꾼 등을 집중관제에 들어간다. 행동지휘부는 기방 분포상황에 따라 도합 5개의 소지휘부로 설치, 기방이 비교적 집중된 5개 지역에 각각 설치하였고 행동소조는 27개로 구성되었으며 도합 81명으로 매 소조마다 3명씩이었다. 그리고 매 소조마다 1명의 성격이 드세고 사업능력이 비교적 강한 여간부와 정책선전수준이 뛰어난 과장급 이상의 간부를 두었다. 행동소조의 임무는 지정된 기방에 도착하여 북경시 각계대표회의의 결의를 선포한 뒤 기생들을 집중시키고 심부름꾼과 마담 및 표객을 해산시키고 기방 재산을 차압하는 것 등등이었다. 이 날 어느 한 행동소조가 소상루(潇湘樓)에 도착하자 한 심부름꾼이 문어구에 앉아 안쪽에 대고 소리쳤다. “기방검사단이 왔다. 손님이 있든 없든 모두 자기의 문어구에서 검사를 받으라!” 그러자 일부 요염하게 생긴 기생들이 엉덩이를 휘두르며 자기의 문앞에 나타났다. “기방검사단이 아니야, 우리는 너희들 기방을 차압하러 온 사람들이다.” 행동조 조장이 웨쳤다. 이어 머리에 철갑모를 쓰고 몸에 녹색제복을 입은 군인들이 총에 장탄한채 기방의 문어구에 버티고 서자 그제야 도고하던 기방의 주인과 심부름꾼 등은 사태의 엄중성을 느꼈던지 행동조장의 말에 고분고분해지기 시작했다. 몇시간 뒤 기생들을 가득 실은 자동차들이 전문밖, 숭문문밖, 서교백방자와 동교로부터 한가담과 백순골목에 자리잡은 8개의 부녀노동교양소에 도착하였다. 이 곳에서 기생들은 각각 여러 뜨락에 배치되어 학습하는 한편 노동개조를 하게 되었다. (4) 1949년 11월 23일, 북경내 기방들이 차압된지 3일 후 북경의 8대 골목중의 하나인 한가담(韩家潭)의 대문에는 “북경시 부녀생산교양원”이란 간판이 걸리었으며 역시 철갑모를 쓴 공안총대의 전사가 총을 쥐고 보초를 서고 있었다. 1949년 11월 29일, 북경대학병원 성병방치소 등 6개 의료부문의 57명의 의료일군들이 육속 부녀생산교양원에 파견되어 기생들에 대해 신체검사를 하고 성병에 걸린 기생들에 한해서는 무료로 치료해주었다. 교양원에서는 기생출신의 여성들의 출로문제를 두고 아주 심중하게 처리하였다. 이 교양원에서 개조를 마치고 나가는 여성들에게는 아래와 같은 수속을 밟아주었다. 첫째, 정부의 증명신을 발급, 증명서가 있는 본인은 정당 직업이 있는 주민이라는 것을 증명하였다. 둘째, 생활보장을 해주는 기초상 몇가지 보증을 하게 하였는바 그것들로는 교양원에서 나간 뒤 노동이거나 가무에 종사하고 더는 창녀생활에 종사하지 않는 것, 정부의 혼인법에 따라 혼인하되 변상적인 매매혼인행위가 있어서는 안되며 결혼시 반드시 위생부문을 통해 신체검사를 받아야 하는 것 등등이었다. 한단계의 학습과 개조를 통하여 도합 1077명 여성들이 교양원에서 나가게 되었다. 헌데 대부분 여성들은 집이 없기에 자원하여 교양원에 남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교양원에서는 그들에게 82대에 달하는 직포기, 양말편직기 등을 사줌과 아울러 그녀들을 위해 신생 편직물공장을 차려 주었다. 한편 교양원에서는 북경에 있는 희곡인원들을 초청하여 그녀들을 도와 일부 소형연극을 자체로 창작해 출연하게 하였다. 이 중 연극 “천년 빙하의 해동(千年冰河开了冻)”은 금교라는 여자가 기방에 팔려가 기생으로 전락되었다가 해방을 받는 내용을 주선율로 낡은 사회 창기제도의 잔혹성과 암흑성을 폭로하였다. 교양원에서는 또 특별히 극단을 조직, 한단계의 연습을 거쳐 1950년 춘절이후 이 극단에서 출연한 연극 “천년 빙하의 해동” 북경성내에서 대 환영을 받았는바 1일주일간 출연하는 동안 극장안은 번마다 초만원을 이루었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12-27
  • 여성이 가장 신경써야 할 5개 부위
    두피 (头皮): 전문가들의 연구와 발견에 따르면 긴 머리 여성의 모낭 주위에는 매 평방센치미터마다 약 100만 개에 달하는 미생불이 번식, 이런 미생물들은 주로 두피의 표층 내에서 자리잡고 “한개의 가정”을 뭇고 있다. 이 것들은 두피층에서 생기는 분비물을 먹으면서 생활한며 최종 여성의 탈모를 초래하게 한다. 구강(口腔): 구강은 각종 식물이 반드시 경과하는 “정류소”이다. 하다면 우리의 구강은 매 평방센치미터마다 1억 개를 초과하는 미생물이 번식하고 있다. 이 중에는 인체에 유리한 미생물이 있는가 하면 상당한 부분의 나쁜 미생물도 있으며 이런 나쁜 미생물들은 구취를 산생하는 “원흉”으로도 된다. 이런 기생물들은 구강의 이빨 사이와 혀 바닥에서 활동하는 한편 식물 찌꺼기와 타액을 흡수하면서 역한 유황 화합물을 산생시킨다. 때문에 구강내의 위생청결을 위해서는 아침과 저녁으로 치솔질을 하여 이빨선과 이빨틈 사이를 잘 청결해야 한다. 그리고 이빨청결을 끝낸 후에는 혀바닥의 청결도 깨긋이 하여야 한다. 혀바닥의 세균 역시 역한 냄새를 풍길 수 있기 때문이다. 겨드랑이: 사람들이 빼곡한 공공버스나 지하철을 타다보면 흔히 한 승객의 겨드랑이에서 풍겨 나오는 역겨운 냄새를 맡을 때가 가끔씩 있게 된다. 이런 냄새는 제멋대로 주위의 공기를 오염시키고 사람을 질식하게 한다. 기실 겨드랑이에서 번식하는 미생물은 매 평방센치미터마다 10억 개에서 100억 개에까지 달하며 미생물이 많을 수록 풍겨나오는 냄새가 지독하다. 이런 냄새는 땀이 많이 흐르는 여름에 주로 풍기는데 기실 땀 자체는 아무런 냄새도 없다. 모두 겨드랑이에 잠식해 있는 이런 “단골” 때문이다. 이런 세균들은 피부에서 분비되는 지방의 시큼한 자양분을 섭취하며 번식하면서 역겨운 냄새를 풍긴다. 때문에 자주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 입어야 하며 내의는 주로 면직물로 된 것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장도(肠道): 인체 장도 내의 대장균은 인체에 유익한 미생물로서 인체의 소화를 돕는 등으로 방역계통의 조성 부분이지만 장도 밖의 대장균은 질병을 초래하는바 그것이 식물과 함께 장도내로 들어가면 메쓰꺼우면서 구토와 설사 등을 초래한다. 인체의 장도를 잘 보호하려면 매일 1~2병의 요쿠르트를 마시는 것이 좋다. 요쿠르트의 익생균이 장도내에서 나쁜 세균의 번식을 통제하기 때문이다. 이 외 적당한 운동을 하여 장도의 노화를 방지하여야 한다. 외음부: 여성의 외음부는 생식도 감염을 방지하는 첫 입구이다. 만약 외음부가 감염되면 각종 세균이 직접 음도를 통하여 자궁내와 수란관으로 침입하여 각종 질병을 일으키게 된다. 때문에 전문가들은 여성들한테 매일 외음부를 깨끗이 씻을 것을 권장한다. 정확한 방법은 매일 전문용 그릇에 깨끗한 물을 떠놓고는 5분 내지 10분간 물을 덥혔다가 물이 뜨겁지 않을 때 외음부를 씻는다. 이러면 멸균과 더불어 외음부가 깨끗해지며 각종 감염을 예방할 수 있다. <여성백과>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 오피니언
    2014-12-22
  • [연재] 동년을 회억하여 ( 3 ) 할아버지편
    저자: 리락용(1946~현재) 전주리씨43세, 의안대군파 21대손 2. ‘땅과 농사는 天下之大本’이다. 농사는 天下之大本이다. 할아버지는 밭이 일체를 결정하며 밭이 없으면 설 자리도 말할 자리도 없으며 밭이 있으면 근본을 바꿀 수 있다고 여기였고 또 한 평생 그 밭을 위하여 분투하시였다. 할아버지는 후세에 다시는 밭이 없는 치욕을 물려 주려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아름드리 나무를 베여 내고 그 자리에 그 재료로 집을 짓고 그 주위에 밭을 개간했는데 지금 보면 그 밭 면적은 한상(垧)은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아래 마을 강변을 개간하여 수전을 만들었는데 그 면적도 반상(垧)은 되는 것 같다. 이로서 그때에도 의식주 문제는 기본상 해결된 것 같다. 그 후에도 할아버지는 계속하여 유동촌 밭에 백여메터 되는 수로를 파서 장풍동 하천과 봉암동 하천을 끌어들여 수전을 만들었다. 할아버지는 여기에도 만족하지 않고 봉암동 하천 량쪽 황무지를 계속 개간하였으며 땅 한 뙈기라도 사들여야 마음을 놓았다. 우리 집이 전부의 주요 재산은 밭과 농기구 였다. 할아버지는 돈을 모아 밭만 사들였다. 특히 일본이 망한 후 연변 조선 사람들중 돈과 땅이 있고 공산 혁명의 형세를 아는 사람들은 헐 값으로 밭을 팔고 조선에 갔다. 이리하여 밭 값이 눅어 지자 할아버지는 형세를 모르고 땅이 눅다고 많이 샀다. 그후에 광복을 맞아 외지에서 일하던 둘째 셋째 아들들이 집이 돌아와 장풍동 집에 식구가 많아지자 번동에 밭을 사고 집을 지었다. 그리고는 둘째 숙부에게 장풍동 집과 주위의 밭을 주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 할아버지 토지 구매욕은 형세를 모르고 48년 토지개혁 이후에도 계속 되였다. 하여 가을이 되면 앞마당에 낟가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졌다. 할아버지는 밭을 부치기 위해 자식들이 집을 떠나 직장을 찾는 것도 반가워 하지 않았다. 45년 8.15광복후 도문철로 기관차 부사수로 일하다 일본 놈이 감방에1년2개월 갇혀 있으면서 전념병으로 생사의 고비를 넘기고 기적같 이 살아온 둘째 숙부와 도문철도 기무단에서 일하다 광복을 맞으며 잠시 돌아온 셋째 숙부에게 정부에서 복귀 통지서를 보냈지만 할아버지는 그들을 꽁꽁 묶어두고 보내지 않았다. 만약 그때 숙부들이 복귀했다면 오늘 같은 신세가 아니었을 것이다. 특히 셋째 숙부가 조선에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토지개혁 이후까지 밭을 사들여 아버지가 안 계시는 우리 집에 밭이 너무 많아 할아버지 혼자서 부치기에는 아주 힘들었을 것이나 할아버지가 밭에 못 나가게 하여 할아버지가 일하던 기억은 없다. 다만 넓은 앞마당에 집채 보다 더 높은 벼 낟가리 조 낟가리 콩 낟가리가 줄지어 있었던 기억만 생생하다. 남들이 낟가리는 이와 비교도 되지 않았다. 우리 집 앞마당은 아주 넓었는데 봄에는 오이 고추 가지 마늘등 채소를 심어 먹고 가을이면 탈곡장으로 사용했다. 인상 깊은 것은 벼 조 콩등의 탈곡이였다. 벼 탈곡은 어른둘이 발판을 밟아 고리가 달린 원통을 돌리면서 벼를 탈곡했는데 힘들어 할 때에 한사람이 두 사이에 끼여 들어 밟아주군 했다. 호기심이 많고 작난꾸러기인 나는 어른들이 말도 듣지 않고 어른들 사이에 끼여들어 발판을 밟기도 했는데 도움은 커녕 방해가 되었을 것이다. 조 탈곡은 할아버지가 얇은 철판으로 만든 가리개를 사용하였으며 어머니와 삼촌들은 자작나무를 곱게 가공하여 만든 가리개를 사용 했다. 혹시나 어떤 때에 할머니도 참여했는데 앉아서 무딘 칼로 조 이삭을 자르곤 했다. 이렇게 잘라낸 조 이삭은 마당에 펴놓고 소가 군재를 돌리며 끌고 다녔다. 어른들이 마당 복판에서 소를 몰았는데 나도 끼여 들어 소를 몰기도 했다. 군재가 끝나면 도리깨로 낟알을 철저히 털어냈다. 이미 60이 넘으셨고 중병에 계신 할아버지는 이 모든 일을 주관하셨으며 손수 다 하였다. 사랑채에는 큰 뒤주가 세 개 있었는데 널판으로 만든 뒤주에는 벼와 조, 조짚으로 만든 뒤주에는 콩을 보관했다. 벼 뒤주는 너무 높아 나는 무서워 올라 가지도 못했다. 당시4-50년대에 장풍동 골안에서 입쌀밥을 먹는다는 것은 정말 희한한 대사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12-21
  • 【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22)
    ■ 김철균 순자네 친정형제들을 보면 둘째 오빠 김구준이네가 연길시 공화대대에 살고 있었고 셋째 오빠 김구완이네가 개산툰에서 살고 있었으며 남동생 김구춘이는 연변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그 중 둘째 오빠 김구준이네는 한뉘 농촌에서 살다 보니 그저 마음치레나 할 줄 알았지 세상물정에 대해 아는 것이 극히 적었고 많은 거래에서 남한테 당할 때가 많았다. 그러다가 둘째 오빠가 사망하자 형님이 혼자서 잔밥들을 거느리고 있는 이 집의 가정형편은 점점 어렵게만 돼갔다. 그러던 중 어느 한번은 둘째 오빠네가 연길현 산골인 신광이라는 곳의 어느 한 가정으로부터 중돼지 2마리를 사왔는데 사온 이튿날부터 돼지가 왝왝 토하면서 먹지를 않더니 일주일도 되지 않아 2마리 모두 죽어버렸다. 이미 병든 돼지를 사온 것이 분명했다. 돼지 2마리의 값은 그 때의 돈으로 90위안, 가난한 농민의 가정으로 놓고 말할 때 이는 실로 떼 돈이나 마찬가지었다. “돼지 두 마리를 키워서 팔아 집살림에 보태려고 했는데 아이구 안될 놈은 앞으로 넘어져도 뒤통수를 깬다고 휴유ㅡ…” 형님의 하소연을 듣는 순자의 마음은 괴롭기 그지 없었다. “그래, 병든 돼지라는 걸 진짜 몰랐단 말이유?” “알았으면 왜 병든 돼지를 사왔겠수.” 형님은 하소연을 하면서도 원 돼지주인을 찾아갈 궁리는 하지도 않고 있었다. “그럼 이제라도 원 주인한테로 찾아가 도리를 좀 따져 보기오. 아무리 팔아버린 돼지라 해도 팔아버린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돼지가 죽었는데 왜 책임이 없겠소?!” 그러자 형님은 순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다시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원 돼지의 주인과 시비를 캐서 이길 자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좌우간 가보기오. 길고 짜르고 하는 건 대 봐야 할게 아니오?!” 형님이 주저하자 순자는 조카를 불러일으켰다. 년로한 형님이 길 떠나기 불편하기에 조카와 함께 가기로 하였다. 그때는 신광이라는 곳은 연길에서 버스도 통하지 않는 산골이었다. 순자와 조카는 걸어서 길을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순자네가 하루 종일 걸어서 원 돼지의 주인이 사는 신광에 도착하니 해가 져서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방정맞게도 그 주인의 집을 찾아가니 어디로 외출했는지 문에는 자물통이 잠겨져 있었다. 다행히도 그 동네에 먼 친척집이 있어 순자와 조카는 그 친척집에 들어가 하루밤 지낼 수가 있었다. 원 돼지의 주인은 이튿날에 나타났다. 순자네가 찾아온 사연을 말하자 처음에 그 주인은 “돼지가 죽은 것이 자기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고 하며 하늘이 낮다 하고 길길이 뛰었다. 여자 둘이 찾아갔다고 업신여기는 모양이었다. 말 그대로 조카 혼자서 찾아갔더라면 말도 못붙일 정도였다. 하지만 순자는 달랐다. 착하였지만 시비를 캘 줄 알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강하게 나올줄도 아는 여인이었다. “여보시요. 여자들이라고 업신보지 마시우. 원래 병든 돼지가 아니구서야 어떻게 일주일도 되기 전에 2마리 다 죽을 수가 있수. 우리 함께 공사수의소에 가서 다시 시비를 캐봅시다.” 수의소로 가보자는 말에 그 주인은 어딘가 켕기는지 말투가 달라지는 것이었다. “번거롭게 공사수의소에 가는 일이 없이 좋도록 합의합시다. 그럼 두 분이 이 먼 곳으로 찾아온 걸 봐서 내가 그 손실의 절반을 배상해주겠수.” “안 돼요. 돼지가 이 집에서 기를 때부터 병든 것이 분명하니 2마리의 값을 몽땅 배상해야 합니다.” 순자는 딱 잘라 말하면서 그렇찮으면 그 며칠동안 돼지를 먹인 사료값과 노동공가 그리고 손실비까지 함께 계산해서 받겠다고 못을 막았다. 그 주인은 더이상 고집을 부려봤자 이 여인을 이길 수 없다고 여겼던지 180도로 태도 변화를 보이면서 그럼 그렇게 하자고 수긍하였다. 아마 순자를 도시에서 온 높은 간부쯤으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 날 순자네는 돼지 두마리의 절반 값인 40위안만을 받고 돌아섰다. 나머지 절반 값은 한 달 후에 받기로 하고 말이다. 주인이 지금 가진 돈은 이것 뿐이라고 하도 사정하니 어쩔 수 없었다. 주인의 말 그대로 그한테 진짜로 그 이상의 돈이 없을 수도 있었다. 하긴 그 때의 세월에 현금 40위안이라는 것도 도시직원의 한달 노임에 맞먹는 액수었으니 그럴만도 했다. “고모, 정말 대단해요. 전 돼지값을 받아낼 궁리도 못하구 그저 속만 태웠는데 그걸 언제 다 생각했수?” 조카는 40위안을 받은 것만 해도 아주 다행으로 여기는 기색이었다. “사와서 일주일도 되지 않아 2마리가 다 죽었는데 그게 문제가 없어? 만약 수의소에 가서 시비를 캐면 원값에 손실비까지 더 받을 수도 있는 일이야.” 그 말에 조카는 순자에 대해 내심 탄복해마지 않았다. 순자는 둘째 형님네를 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발벗고 나섰다. 후에 둘째 형님네가 또 돼지새끼를 사다 기르게 되자 집의 구정물을 받아서는 거의 이틀에 한번씩 둘째 형님네 집에 보내 주었는데 어떤 날에는 공화촌까지 날라다주었고 또 어떤 날에는 연길교 부근까지 이고가노라면 마중을 오는 둘째 형님을 만나서 넘겨주기도 했다. 여하튼 옛날부터 순자는 올케라면 친언니 이상으로 따랐고 진심으로 도와 주었으며 그 마음은 수십년이 지난 뒤에도 마찬가지었다. 그 외 1979년 개산툰에 있는 셋째오빠 구완이의 셋째 아들 길성이가 직장에서 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해있을 때 순자가 길성이의 친어머니 이상으로 정성껏 간호해주어 의사와 간호원들마다 처음에는 모두 순자가 길성이의 어머니인줄로 착각하여 화제에 올랐었다. 그 때 길성이 또한 어머니를 집에 보내고 고모(순자)와 함께 있고 싶다고 하여 길성이의 어머니 역시 시누이(순자)한테는 두손 들었다고 감탄했다. 이런 일은 한두번이 아니었다. 1982년 연변대학에서 교편을 잡는 남동생 구춘이의 딸 김순희가 출산할 때도 그랬다. 출산직전 임산부 순희는 진통을 올 때마다 고통을 호소하며 고모(순자)부터 찾군 했다. 그러면 순자는 지체없이 다가가 순희를 달래기도 하고 여기저기 주물러주기도 해주어 친 어머니인 구춘이의 부인이 더욱 감동을 받았다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1973년 6월 연길시 하향지식청년 학부모대표대회에 참가한 후 남긴 기념사진) 1969년의 여름, 전 주 우수학부모대표대회가 수부도시 연길에서 열렸다. 순자는 당시 연길시 신흥가두에서 유일하게 우수학부모대표로 선발되어 이 대회에 참가하였다. 대회가 끝난 뒤 대회 주최측에서는 우수 학부모대표들이 여러 갈래로 팀을 나누어 주내에 산재해 있는 집체호들을 순회방문하기로 결정했다. 그 때 순자가 소속된 대표팀이 방문하는 집체호로는 안도현에 있는 여러 대대의 집체호들이었다. 순자는 당시 10여일간에 거쳐 참관방문한 집체호 중 제일 마지막으로 찾은 집체호가 가장 인상에 남았다. 그 집체호가 바로 상해지식청년들이 생활하고 있는 안도현 장흥공사 서북대대의 한 집체호였다. 서북대대는 안도현 소재지에서도 30여리 떨어져 있는 험한 산골이었다. 순자네가 찾아가자 처음에 집체호 청년들은 별로 반기는 기색이 아니었다. 이를 보아 이전에 많은 방문팀이 다녀갔어도 그들한테 별로 도움이 될 일을 하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집체호 청년들이 사는 꼴은 말이 아니었다. 모주석께서 “지식청년들이 농촌에 내려가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는 것은 매우 필요하다”고 했으나 그들이 사는 꼴을 보는 순간, 순자는 이는 모주석의 뜻과는 다르게 번져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른지 몇해가 되는지 갈라터지고 쥐구멍이 숭숭난 굴뚝아래와 불을 때면 연기가 꽉 차는 방안 … 모든 것은 이것이 사람이 사는 집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벼알이 나무에서 달리는줄로만 알면서 자라던 도시의 철부지들이 이 두메산골에 와서 당하는 고생은 순자로 하여금 몹시 가슴이 아프게 했다. 특히 자식 2명을 농촌집체호에 보낸 어머니로서의 순자는 그 애들이 도무지 남의 자식으로만 보이지를 아니했다. “여보세요. 우리가 이 곳으로 온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 애들이 어떻게 사는가를 구경하러 온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 애들이 사는 꼴을 좀 보세요. 가슴이 아프지 않습니까?!” 순자가 신발과 옷을 벗고 나서자 방문팀의 기타 몇몇 성원들도 동조해나섰다. 그날 대표팀은 흙을 이겨가지고 굴뚝밑과 부뚜막 그리고 구들장에 생긴 틈을 발라주었고 굴뚝에 숭숭 난 쥐구멍들도 막아주었다. 일을 마친 후 집체호의 부엌에 불을 지피자 “웅 ㅡ”하고 소리까지 내며 불길이 구들고래쪽으로 빨려 들었으며 방안 온들이 골고루 따뜻해나는 것이었다. 방문팀이 돌아갈 때가 되었다. 그런데 집체호애들이 옷을 입고 떠날 차비를 하는 순자를 둘러쌌다. “마마(어머니), 가지 말아요. 마만, 우리의 친 어머니와 같아요. 마마, 제발 가지 말아요.” 애들은 순자를 둘러싸고 울음을 터뜨렸다. 순자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둘러보니 큰 대야에 빨래거리를 담아놓은 것도 여기 저기에 보였다. 방문팀의 다른 성원들은 떠났지만 순자는 다시 옷을 벗었다. 그날 순자는 애들의 빨래를 다해주고 이불까지 해주느라고 밤새껏 진땀을 빼야 했다. 특히 이불을 하자고 보니 바늘이 5센치미터 길이도 안되는 바늘뿐이어서 손가락끝이 심하게 닳아 뭔가에 부딫쳐도 기절할 정도로 아프기가 일쑤였다. 그 이튿날 상해지식청년들은 떠나려는 순자를 붙잡고 또 울음을 터뜨렸다. 순자는 그들한테 “후에 꼭 다시 오마”하고 열번도 더 약속을 하고서야 그들과 떨어질 수 있었다. 전날밤에 비가 내리고 이튿날 날씨가 개여서인지 날씨는 제법 쾌청하였다. 헌데 비온 뒤의 개인 날씨라 돌아오는 길에 순자는 몇번이고 뱀무리와 맞다들군 했다. 그럴 때마다 몹시 놀라면서 가슴을 붙안군 했다. 안도에서 돌아온 뒤 순자는 자주 그 상해지식청년들이 고생하던 모습이 머리속에서 맴돌면서 마음은 늘 괴롭기만 했다. 집체호에서 생활하고 있는 영남이, 영순이도 마찬가지로 고생이 막심할 것이란 생각이 들자 그 괴로움은 더해만 갔다. 순자는 자식들이 생활하고 있는 집체호들을 돌기 시작했다. 어느 한 집체호에 갈적마다 부뚜막과 굴뚝 등을 손질해주는 등으로 일손을 놓치 않았다. 물론 상해지식청년들이 살던 그 서북대대 집체호로 다시 간다던 약속을 어기지도 않았다. 그리고 1973년의 어느날 영옥이가 있는 안도현 장흥공사 장흥대대로 갈 때는 토마토 한 바구니나 이고 30리가 되는 산길을 걸어서야 집체호에 도착, 집체호의 모든 성원들이 눈물이 나도록 감동되게 하였다. (다음기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12-21
  • [이런생각] 이주자의 예의
    ■ 전춘화 나는 중국에서는 조선족, 한국에서는 중국동포다. 몇 년 전 까지만도 이러한 나의 정체성이 참 불편했다. 중국에서는 소수민족, 한국에서는 재외동포, 센터가 아닌 변두리라는 소외감에서 오는 불편함 때문 이였을까. 내 부모님은 나라가 돌아가는 일, 이른바 '정치'와 ‘사회’라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 것은 나라님들이 신경을 쓸 일이라 생각했다. 우리는 먹고 사는 것에 관심을 갖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부지런히 살면 그만이었다. 실제로 한국에 와있는 동포 중에 많은 분들이 내 부모님처럼 그들 나름 생계를 꾸리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 중국에서처럼 그렇게 살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한국인들로부터 '돈밖에 모른다'는 비난을 받았다.'동포가 아니라 그냥 중국인'이라는 가슴 아픈 말을 듣는다. 게다가 동포가 저지른 범죄사건 때문에 동포전체가 부정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뭐가 문제였을까? 반대로 생각해보면 나는 한국인에 대한 편견이 없다. 가장 큰 이유는, 내게 도움을 줬던 한국인 '몇 분' 때문이다. 중학교 때 해마다 우리 집에 찾아와 산타할아버지처럼 한국 교회에서 후원했다는 학비와 따뜻한 목도리를 전해준 삼촌도 한국인이었고 한국에서의 유학생활 내내 등록금을 모을 수 있도록 회사에서 일하게 해준 사장님도 한국인이었다. 그래서 나는 가끔 일상가운데 마주치는 한국인의 불친절과 불쾌한 언행에도 "사람 나름'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우리 동포들에게는 '사람 나름'이 적용되지 않을까? 오랫동안 소수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세상 돌아가는 일에 신경을 끄고 먹고 사는 일에만 집중하는 것이 삶의 예의인줄 알았던 우리를 한국인들은 '이기적'이라고 표현한다. 주위 사람 눈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내 방식대로 살았더니 집단의식이 강한 한국인들은 싫어한다. 세상일에 관심을 끄고 나만 열심히 일하면서 간간히 눈에 보이는 친인척과 이웃에게 베풀면서 눈에 띄지 않게 살아가는 것이 다수의 '우리'가 생각하는 삶의 예의였는데 그것이 뭔가 부정당하는 느낌이다. 왜 그럴까? 같은 피, 같은 역사를 나눈 동포이고 한국은 내 조상님의 땅이 맞지만 어쨌든 한국 땅에 발을 내디딘 순간 한국사회와 한국인은 낯설다. 나는 그들에게 엄연히 이주자라는 증거다. 물론 동포라는 신분은 바뀌지 않겠지만. 이런 예를 들어보자. 오랫동안 떨어져있었던 여동생이 어느 날 우리 집에 와서 두 달을 묵기로 했다. 그런데 여동생은 식사 뒤 설거지를 잘 안하나 하면 나의 삶의 방식에 관심이 없다. 여동생은 그동안 살아왔던 방식 그대로 행하면서 내가 이해해주길 바랬고 어차피 두 달 뒤에 다시 떠날지도 모르니 잠시 머무는 나그네처럼 마음을 나누지도 않는다. 그러면서 내게 자매라 한다. 그리고 이 집은 예전에 부모님의 재산이었기에 당연히 와서 머무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자매라지만 밤에 갑자기 동생의 코 고는 소리를 들어야 하고 바닥에 떨어진 동생의 머리카락을 내가 직접 쓰레기통에 버려야 할 때는 낯선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한국인은 왜 저렇게 반응할까'에 관심을 갖고 이해하지 않고 느낀 바를 오구작작 모여 울분을 토하듯 풀어버리고 다시 나만의 생활패턴에 묻히는 우리가 어쩌면 한국인 입장에서는 얄미운 여동생일지도 모른다. 몇 년 전만 해도 음식가게의 사장님인 한국인 아줌마와 그 가게에서 일하는 동포 아줌마 사이의 갈등은 동포들의 사적인 모임에서 흔하게 거론되는 부분이었다. 그 모임에서 "우리 음식가게 사장님의 이런 부분들이 섭섭하다'고 토로하는 것과 "한국인들은 이렇더라"고 판단 식으로 말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다. 거기에 두어 명이 끼어 공감을 하고 살을 붙이면 한국인은 그러한 이미지가 된다. 우리가 편견을 갖는 한국인에 안타까움을 호소하듯이 우리도 아무렇지 않게 '음식가게 한국인 사장님'에 대해 어떠한 이미지를 만들어버린다. 중국에서 소수민족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 중에 중국의 해방을 위해 참전했고 동북3성의 불모지를 개간하는 등 조상들이 대가지불한 부분들이 있었다. 지금 한국에서 많은 동포들이 3D 업종에 종사하며 한국경제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고 하지만 "먹고 살기 위해' 한국에 왔다는 타이틀이 벗겨지기에는 약하다. 솔직히 처음부터 한국경제의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국에 온 것은 아니었다. 먹고 살려고 한 일이 한국경제의 발전에 도움이 된 것 뿐이다. 아무렇지 않게 전철역 계단에서 침을 뱉고, 소리 높게 통화하고 "우린 중국에서 그렇게 하지 않슴돠"라는 말로 한국인들의 옳은 방식까지 거부한다면 그것은 이주민의 예의가 아니다. 한국사회가 지금의 발전을 이룩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우리는 얼마나 알려고 했고 인정하고 있을까. 그런 발전이 있었기에 지금 돈을 벌려고 한국에 오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단 한 번도 한국인에게 제대로 알린 적이 없다. 조금만 더 그들이 살아온 방식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이 애써 구축해놓은 옳은 질서와 맞는 가치관에 동참하면서 인정한다면, 중국에서도 이주자였지만 대가지불로 인정을 받은 조상들처럼 우리도 그들에게 환영받는 이주자가 되지 않을까. 물론 한국사회에도 문제점이 많다. 중국동포들도 입을 열면 할 말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먼저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고 외부를 향해 삿대질을 한다면 동포사회는 성장할 수 없다. 나는 한국인에게 환영받을만한 이주자였는지를 먼저 생각해보자.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는 것이고, 권리를 누리려면 그에 따른 의무가 있다. 중국과 한국에서 소수민족, 동포로 살 수밖에 없는 정체성이 문제가 아니다. 또 어디론가 이주할지도 모르는 불안한 미래가 문제가 아니다. 지금 있는 이곳에서 환영받는 이주자로 선주민을 인정하고 동참하는 자세가 되어있느냐의 문제다. 계속 이중 정체성을 유지하고 살려면 최소한 중국과 한국 모두에 그에 따른 예의를 갖춰야 할 것이다. 그것이 버겁다면 차라리 한쪽 끈을 놓자. 최악의 선택은 '기회주의자'로 사는 것이다. 이상적으로 들리겠지만 글의 마무리에 「민들레 씨앗」을 이야기하고 싶다. 바람에 날려 씨앗들은 어디론가 날려간다. 그리고 그것이 어디든 뿌리를 박는다. 그 씨앗이 성장하면 또 수많은 민들레 씨앗들이 어딘가로 날려갈 것이다. 이미 모체가 날려 온 생명임을 익히 알기에 '노하우'정도는 터득하고 길을 떠날 것이다. 내 조상이 이주자였고 나 또한 이주자라는 것은 역사적 시각에서 동포들에게 플러스가 될 수도 있다. 그 이주를 통해 ‘얼마나 많은 부를 창출했느냐’가 아니라 ‘어떠한 문화와 가치관을 확산하는 이주자로 살았느냐’에 초점이 잘 맞춰진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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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고
    2014-12-18
  • 중국여인들 왜 우아하게 늙지 못할까?
    동남아를 여행하면서 호텔에 투숙해 식당에 가거나 수영장에서 헤염치거나 또는 화원에서 바람을 쏘일적마다 나의 곁을 지나는 서양남성들은 매우 예의가 있게 손짓해주었으며 어떤 경우에는 선의적으로 웃으며 거기에 중국말로 “니호우?( 你好?)”란 말 한마디씩 해주어 나를 기쁘게 했다. 또한 비가 올 것 같으면 이들은 화제를 날씨에 돌리기도 하고 그외 시사와 정치로부터 여행중 목격하는 개인의 정사, 주변의 이모저모와 기이한 일…어쨌든 나로 하여금 감탄하게 하는 것은 일부러 나와 말을 걸려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나같은 중년여인들을 놓고 보면 피부가 그닥 희지 못하고 아름답지 못하며 그렇다고 부자도 아니어서 홀로 커피숍에나 들어갈 때면 어딘가 당황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러면 지난 세기 80연대생이거나 90연대생이 주동적으로 알은체를 해줄리가 없는 것이다. 하긴 내가 만약 포르노 DVD판이라도 갖고 있는 여인이라면 모를까? 하지만 서방의 남성들은 나같은 중년여인과도 곧 잘 말을 걸어온다. 그것은 일부러 그 무슨 목적을 갖고 접근하는 것도 아니었다. 어느 거리나 골목에서 익숙한 사람 만난듯이 말을 걸어오는 것이다. 비록 기혼인사였지만 외국남성들과는 완전히 흉금을 털어놓는 대화가 가능했다. 이는 이성에 대한 흡인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순 우정의 대화로 말이다. 어떤 경우에는 과분한 대우나 총애를 받고 또한 상대방이 아주 단마크의 신사와도 같은 멋진 남성이어도 마찬가지였다. 과분한 대우나 총애를 놓고 말하면 중국여인들에 비해 서방의 여인들은 이를 아주 자연스레 받아들인다. 그녀들은 남성들의 과분한 대우나 총애 앞에서도 안절부절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며 헤쳐진 앞가슴을 가리느라 하지도 않는다. 또한 의식적으로 눈길을 딴 곳에 돌리지도 않는다. 이성앞에서 서양의 여성들은 아주 자연스러우며 심지어 어느 정도 경망을 떨기도 한다. 이는 그녀들이 장기간 살아온 것이 이성과 잘 어울리는 환경이란 점도 배제할 수 없는 것 같다. 서양여인들은 메니큐어(指甲油)와 립스틱을 선택할 줄 알았고 색깔이 선명하고 가슴이 패인 비키니를 잘 입기에 얼굴은 더욱 공작새처럼 이뻤으며 웃을 때마다 남성들로 하여금 가슴이 설레이게 했다. 또한 그녀들은 거리의 음식도 버킹검 궁전(白金汉宫)의 음식처럼 우아하게 먹을줄도 알았다. 60세가 넘어도 서양의 여인들은 여전히 자기의 일거 일동, 얼굴의 매 표정마다 남성들 눈에는 현장 생방송으로 되고 있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때문에 서양의 여인들은 16살 때부터 자신을 관리하는 것을 습관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서방세계에서는 나보다 더 연상의 여인 아니, 나의 할머니뻘이 되는 여인과 휄체에 의지하는 여인마저도, 오직 여인이기만 하면 아무리 늙었다 해도 모두 남성들로 하여금 김이 빠지게 하는 꼴불견 여인으로 보이지 않으며 노파로 되어 자신의 여성특징을 상실하는 노릇은 더욱 하지 않는다. 이런 서양여인들의 거동을 통해 나는 원 소녀시대의 모습을 복원할 수 있는 자신심이 생겼으며 아울러 충분한 안전감도 갖게 되었다. 이 또한 내가 국내의 생활을 혐오하고 두려하고 있는 원인의 하나이기도 하다. 상상해보라. 나처럼 나이가 근 40살에 달하고 허영심도 어느 정도 남아있는 여인이라고 할 때 오직 유순해야만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사회에서 생활한다면 그건 그냥 “안정식품”과도 같다. 하지만 이는 전반 여인의 인생으로 볼 때 극히 상심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중국여인들은 왜 우아하게 늙을 수 없는가? 누군가 이는 중국남성들의 핍박에 의해서라고 했다. 맞다. 중국의 완고통 남성들의 눈은 늘 젊고 잘 생긴 여인만 이쁘게 보고 있다. 지어는 별 밥맛마저 잃어질 정도로 생긴 실혼남까지도 20대 초반의 여인을 넘볼까 하면서 두 번째의 혼인을 꿈꾼다. 그리고 호주머니에 돈이 좀 있고 뱃속에 먹물이라도 좀 들어간 남성들은 한술 더 떠서 로리타(나이든 남성한테 성적매력이 있는 조숙녀)같은 여인을 정복하지 못하면 사내가 아니라고 한다. 이는 일종 중국 여인들의 비극이며 특히 중국의 중노년 여인들한테는 절망끝에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결과를 낳게 한다. 때문에 중국여인들이 우아하게 늙자면 그 유일한 출로는 중국의 완고통 남성들을 극력 멀리하는 것이다. 보다 더 멀리하는 것이다. 그리고 멀리 있는 “올리브나무”를 위하여 때이르게 자기자포하지 말아야 하며 자신심을 갖고 자신을 가꾸고 떳떳해야 한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 오피니언
    2014-12-18
  • 조선족은 조선족 꿈을
    ◐ 김희수많은 조선족들이 한국에 나가 힘들게 돈을 버는 것은 무엇때문인가? 한마디로 지금보다 더 잘 살아보자는 것이 아닐가. 지금보다 더 큰 집을 마련하고 더 좋은 차를 소유하고 더 나은 물질생활을 향수하자는 것, 또 자식들을 대학공부시키고 유학보내고 출세시키고 시집장가 보내고 한밑천 잡아보자는 것이 아닐가. 물론 한국에 나가지 않고 중국에 남아있는 조선족들도 한국에 나가 있는 조선족들과 똑같은 소원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지금보다 더 잘 살아보려는 것이 조선족꿈이 아닐가? 이론적으로는 국가요, 민족이요, 이상이요 하는 미사려구들이 안받침 되여야 하겠지만 통속적으로 이렇다고 하면 너무 용속한 표현일가? 우리는 중국꿈에 대해 많이 얘기해 왔고 얘기하고있다. 중국꿈은 한마디로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국가부강, 민족진흥, 인민행복을 실현하는 것이다. 결국 지금보다 더 잘 살아보자는게다. 그러니까 중국꿈은 조선족꿈과 모순되지 않는다. 중국에는 56개 민족이 있다. 그러니까 56개 민족이 각각 자기 민족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면 56개의 꽃이 활짝 피여나 그것이 곧 중국꿈이 되지 않을가 생각된다. 조선족은 중국꿈에 보조를 맞추어 조선족 꿈을 실현하는 것이 목표가 아닐가 싶다. 조선족 꿈은 지금보다 더 잘 사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족이 조선족으로 지금보다 더 잘 살려면 조선족 정체성이 지켜지고 건전한 조선족 사회가 유지되여야 한다. 민족정체성이 유지되고 조선족 사회가 건재하려면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잘 건설해야 한다. 그러니까 조선족 꿈은 다시 말해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잘 건설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없으면 조선족은 자치권리를 향수할수 없게 된다. 우선 우리 글이 소수민족 다섯개 주요문자에서 밀려날것이고 우리 글 출판사, 신문사, 잡지사, 방송 등이 모두 사라지게 될 것이다. 산재지구의 조선족들은 혹시 연변조선족자치주는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전체 중국조선족들에게 자치주가 있어야 조선족의 자치권리를 향수할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없으면 중국조선족사회가 무너지고 조선족은 주류민족에 동화되고 말 것이다. 주류민족에 동화되면 중국조선족도 이름뿐이고 따라서 조선족 꿈도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이다. 조선족사회가 없는 조선족 꿈은 있을수 없기때문이다. 조선족 꿈은 지금보다 더 잘 살아보자는 것이기는 하지만 반드시 조선족이 자치권리를 보장받을수 있는 조선족자치주가 건재해야 한다. 조선족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선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잘 건설해야 한다 것, 이것이 핵심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잘 건설하려면 우선 조선족인구감소부터 막아야 한다. 자치주가 존재하려면 조선족인구가 일정한 비례로 유지되여야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필연적으로 자치주인구가 증가되기 때문에 조선족인구감소만 막아서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한족 및 다른 민족인구의 증가에 따라 조선족인구도 증가되여야 자치주를 유지할수 있다. 조선족인구의 감소세를 막으려면 우선 출산률을 높여야 한다.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 민족의 운명을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되는 일이다. 혼인출산년령도 앞당겨야 한다. 1990년대 이전에는 20대에 결혼하여 30살전에 모두 부모가 되였지만 지금은 20대에 결혼하는 젊은이들은 보기 힘들고 30~40대에 결혼하는 젊은이들이 많은 실정이다. 늦게 결혼한다고 결혼전에 경제적 기반을 이룬 커플들이 많은 것도 아니다. 집도 마련하고 자가용차도 사려면 결혼이 늦어질수도 있지만 어차피 부모의 도움으로 결혼할거라면 일찍 결혼하여 산모와 아이의 건강에 다 좋다는 30살전에 출산하는 것도 조선족 꿈을 위해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된다. 다음으로 외지의 조선족과 외국으로 나간 조선족을 연변으로 돌아오게 하는 방법이다. 이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불가능이 없는” 나폴레옹의 사전을 빌려서라도 연변에 조선족인구를 집중시켜야 한다. 중국조선족들이 연길을 중심으로 연변에 모여 살게 해야 한다. 물론 청도, 북경, 상해 등지와 한국의 대림동에 새로운 조선족집거구가 형성되고있고 이는 시대발전의 필연적인 추세라고 하지만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과정에 우리 민족이 분산되고 언어, 문자를 잃어가고있는 현상은 간과해서는 안된다. 조선족들이 연변에 모여 살게 하자는것은 케케묵은 낡은 사고방식이라고 타매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전체 조선족의 미래지향적인 안목으로 높이 서서 보다 멀리 내다본다면 상술한 관점을 수긍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인구문제가 해결되면 다음으로 조선족학교를 잘 꾸려 민족인재를 양성하고 인구자질제고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또 조선족간부마다 앞장서 조선말로 발언하고 조선글을 사용하고 조선족마다 우리 말과 우리 글을 우선시해야 한다. 이것이 중국에서 조선족이 조선족으로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인데 모두가 무관심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가 고민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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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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