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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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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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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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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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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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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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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리랑 고개의 정자바위
    알고보면 정암촌이라는 이름은 과연 이 마을에 딱 들어맞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정자 바위는 멀리부터 마을의 비석처럼 시야에 안겨온다. 이 바위는 3미터가량의 거리를 두고 동, 서 두 쪽으로 나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바위 사이에 나무가 뉘여져 다리가 만들어졌다. 그래서 두 바위를 드나드는 경우를 두고 견우와 직녀의 상봉이라는 말고 가 생겨날 정도이다. 정자 바위는 옛날 군사들이 전망대로 사용하던 곳이다. 정자 바위가 있는 산등성이를 타고 옛 성벽이 울타리처럼 골짜기를 빙 둘러싸고 있다. 산에는 일찍 고구려 때 축성하고 사용하던 천 년 전의 성곽이 있다. 이 성곽에는 온돌 유적이 있는 게 자못 특이하다. 오랜 옛날부터 백의 겨레의 선조들이 이곳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정자 바위 아래의 석두하 기슭에 늘 돼지머리 등 제물을 차려놓고 산신령에게 제를 지냈다고 한다. 옛 고향의 따스한 추억과 인연을 상기시키는 이 민속은 어찌 보면 타향살이의 서러움을 달래는 일종의 의식과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충청도 마을은 함경도 문화권인 연변에서 이 정자 바위처럼 유표했다. 공교롭게 함경도 마을은 바로 남쪽으로 몇 리 되는 곳에 있었다. 일명 석두촌(石头村)으로 부근을 흘러 지나는 석두하 때문에 지은 이름이다. 만주국 강덕(康德) 원년(1934) 함경북도에서 백여 가구의 농부들이 집단 이주하여 이 마을을 세웠다고 한다. 마을은 조선 총독부에서 관리했다고 해서 시초에는 “총독부 부락”이라고 불렸으며 1936년 집단부락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남도 충청도 이민의 집단부락은 북쪽에, 북도 함경도 이민의 집단부락은 남쪽에 위치하면서 남도와 북도는 이 고장에서 서로 자리바꿈을 하고 있는 것이다. 1948년, 정암촌에서 20여 가구가 따로 나와 석두촌의 북쪽에 밭을 일궜다. 이곳에는 소나무가 많다고 해서 솔밭자라고 불렸다. 이 마을은 나중에 소실되고 송전툰(松田屯)이라고 쓴 석물만 외롭게 길가에 남았다. 송전툰은 솔밭자를 중국어로 뜻을 옮겨 쓴 것이다. 아예 송두리째 소실된 마을도 있었다. 번신령(翻身岭)은 벌떡 자빠졌다는 속설 때문에 불리는 지명인데 정암촌에서 왕청으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 북쪽 약 3리부터 시작되는 골짜기이다. 세 부락이 있었고 한때 소학교까지 있었지만 지난 세기 60년대 전부 골짜기 밖으로 철거 되였다고 한다. 정암촌도 미구에 새마을 건설을 하면서 남쪽방향으로 약간 자리를 옮긴다. 그래도 정자 바위를 그냥 뒤에 업고 있어서 마을 지명의 근원은 버리지 않은 셈이다. “충청도 사람들은 지역 우월감이 정말 대단해요.” 심범극옹은 마을의 텃세를 말하면서 연신 혀를 내둘렀다. “이전에는 함경도 사람이라고 하면 마을에 받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7년 경상도 출신의 심범극옹 가족이 정암촌에 이삿짐을 풀 수 있게 된 것은 그 누구의 의지를 따른 게 아니라 전적으로 정부적인 행위였다. 정암촌은 8.15광복 전까지 북쪽 왕청현 춘방구(春芳区)에 속했으며 훗날 동쪽 훈춘현의 관할에 들어가게 되였다. 이때 이 지역에는 아홉 개의 부락이 있었는데 부락마다 훈춘에서 이주하는 세 가구의 이민을 통일적으로 받게 되였다. 심범극옹의 가족은 마침 이 충청도 마을에 배정을 받았던 것이다. 수십 년이 지난 후 심범극옹은 이 충청도 마을의 토박이로 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충청도가 아닌 “경상도”의 그림자를 떨어뜨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충청도 사람들은 심범극옹에게 예나 제나 “그 사람들”로 통하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흥겨울 때는 노래를 했지요. 노래를 참 잘 불렀습니다.” 충청도 사람들의 1번 노래는 “청주 아리랑"이었다고 한다. 심범극옹은 인터뷰 도중에 요청에 따라 노래 한가락을 멋지게 뽑았다. 그는 적어도 노랫가락을 건드려지게 넘기는 이때만은 어김없는 충청도 사람이었다.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세. 울 너머 담 너머 임 숨겨두고 난들난들 호박잎이 날 속였네. (이하 후렴)” 지금도 노인들은 보름 같은 명절 때면 삼삼오오 모여 “청주 아리랑”을 부른다고 한다. 힘든 아리랑고개를 넘으면서 고향에 대한 향수는 그렇게 쉽게 지울 수 없었던 모양이다. 정작 노래의 발원지인 충청도에서 이 “청주 아리랑”은 이미 실전되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청주 아리랑”은 이역의 새 마을 정암촌에 정착하였고 또 정암촌의 이미지로 되고 있다. 구경 이 노래가 이민들의 70년 이주생활에서 어떻게 변형되었고 또 어떻게 본고장의 기억에서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충청도 사람들의 운명과 생활의 상징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데는 아무런 온난의 여지가 없다. 중 한두 교전에는 학자들이 와서 남도 방언과 민속을 연구하기도 했다. 학자들의 이런 발길은 날이 갈수록 뜸해지고 있었다. 정암촌은 더는 충청도 사람들만 살고 있는 고도(孤岛)가 아니었다. 지리적으로 함경도와 가깝고 또 함경도 출신의 사람들이 인근에 많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물결에 잠겨 예전처럼 외롭지 않았지만 남도 충청도의 이름은 북쪽 골짜기의 옛 산성처럼 어느덧 기억 속에서 색이 바래지고 있었다. 필자/김호림(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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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0-07-23
  • 까울령 저쪽에 고려마을이 있었다
    예전에 도문에서 훈춘으로 가려면 꼭 그 산마루를 넘어야 했다. 일명 까울령, 그 무슨 까마귀가 날아가다가 울음을 떨어뜨린 이름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산이 하도 가파르고 높아서 새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넘었을까. 까울령은 두만강 기슭까지 머리를 쭉 내밀고 장벽처럼 앞뒤를 가로막고 있다. “겨울이 되면 어떤 차들은 산길을 버리고 얼음 위로 달렸지요.” 조만길씨의 어릴 적 기억에는 바퀴 달린 “썰매”가 그 무슨 동화의 한 장면처럼 또렷이 남아있었다. 그때 두만강의 빙판에는 네발 달린 소가 가서 얼음구멍에 빠진 네 바퀴 차량을 끌어내는 진풍경이 심심찮게 벌어졌다고 한다. 조만길씨가 살던 경영촌(庆荣村)에서 집집마다 식탁에 늘 반찬처럼 올리던 한담 거리였다. 아이러니하게 조만길씨는 훗날 그 얼음구멍을 만들던 강물의 관리자로 된다. 1989년 대학을 졸업한 후 귀향하여 진수력관리소에서 근무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촌(흥진촌)입구에 있는 이름비. 경영촌은 까울령동쪽의 첫 동네이다. 광서 15년(1889년), 이곳은 나루터가 생기면서 배 선(船), 나들목 구(口)를 넣어 선구라고 불렸다고 한다. 1924년, 동네는 20여 가구로 늘어났으며 동쪽의 지상표지물 같은 굴륭산(窟窿山)의 이름을 빌어 공동산(孔洞山)이라고 새롭게 불렸다. 굴륭산은 북쪽 산비탈에 작은 동굴이 있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1949년 마을은 상서로운 뜻을 부여하여 번영을 경하한다는 의미의 경영이라고 개명하였다. 1980년대 초 경영촌에는 약 200가구 살고 있었으며 그중 한족은 10가구 정도 되였다고 한다. 그 후 꾸역꾸역 밀려온 한족이 두만강의 물처럼 마을을 야금야금 잠식하며 지금은 마을을 거의 반 정도 삼키고 있다. 어쨌거나 조만길씨가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을 무렵 경영촌의 사람들은 한족을 내놓고 선조가 거의 다 한 고향이였다. “저기 강 건너 쪽입니다. 저처럼 모두 함경북도에 원적을 두고 있었지요.” 조만길씨의 말을 따른다면 예전의 마을에는 이웃하여 살던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산마루를 불렀던 이름인 “까울령”은 분명히 그들의 고향인 함경도의 방언은 아니었다. 정체불명의 이 “까울령”은 훈춘의 지명지에서 그 원형을 드러낼듯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까울령은 옛날 고이산(高尔山)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고이산은 만족말로 홰나무산이라는 의미이다. 이 고이산을 우리말로 음역하면 “까울령”이 된다. 1964년 고이산을 다시 경영촌남쪽의 높은 산이라는 의미의 남고령(南高岭)이라고 고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다. 까울령의 수목은 재생림이며 홰나무가 주종인 게 아니기 때문이다. 왜서 홰나무의 산이라는 의미의 고이산이라고 이름을 달았는지는 영문을 알수 없다. 더구나 그 후의 이름인 남고령은 경영촌의 남쪽이 아니라 서쪽에 위치한다. 기실 까울령의 북쪽에 위치한 마을은 흥진촌(兴进村)이다. 창문을 열면 아스라이 솟아있는 산이 금방 시야를 가득 채운다. 흥진촌은 흥성하고 전진한다는 의미로 1984년에 지은 이름이다. 선통 2년(1910년) 마을이 형성되었을 때 봄이면 산과 들에 살구나무꽃이 만발했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행화촌(杏花村)이라고 불렸으며 훗날 마을에 조선인만 살고 있다고 해서 고려촌이라고 불렸다. 한때는 서쪽의 수남촌(水南村)소속으로 있었다. 수남촌은 동쪽의 봉오골(凤梧沟)에서 흘러나오는 강의 남쪽에 있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봉오골은 일명 봉오동이라고 하는데, 선통(1908~1912년)년간에 개발된 무려 25리의 긴 골짜기이다. 옛날 골짜기에는 하, 중, 상 등의 마을이 30~60가구씩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까울령”의 험준한 산줄기는 이 봉오골을 병풍처럼 빙 둘러치고 있다. 흥진촌 아니 고려촌은 그 병풍 바깥쪽에 기대여있었다. 고려촌의 북쪽 고개를 넘으면 금방 봉오골이 나선다. 그래서 현지인들은 봉오골을 북봉오골이라고 불렀고 고려촌을 남봉오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남봉오골이라고 하면 대뜸 우리 마을인지를 알았지요.” 고려촌 태생인 한룡범씨의 말이다. 예전에 항간에서 남봉오골이라는 이 이름은 고려촌이나 흥진촌보다 더 잘 통했다고 한다. 한용범씨는 고려촌에 몇몇 남지 않은 토박이였다. 그의 증조부가 함경도 은덕군에서 자식을 데리고 이곳으로 왔다고 한다. 조손 4대가 거의 100년 동안 한 고장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고려촌은 인가가 한때 50여 가구에 이른 적 있지만 현재는 30가구 정도이며 그나마 사람이 들어있지 않는 가옥이 적지 않다. 한용범씨의 말을 빈다면 두메산골이라서 사람들을 붙잡아둘 수 없었던 모양이다. 고려촌은 이전에는 조와 콩 농사를 지었으며 지금은 옥수수와 콩을 위주로 심고 있었다. 하도 척박한 고장이라 토지개혁을 하던 1947년 무렵 마을의 으뜸가는 부자는 지주 아닌 부농이었다고 한다. “북 봉오 골운 정말 ‘만석 부자’의 고향이지요.” 한용범씨는 고개 하나를 사이 둔 봉오 골에 여간 부러운 기색이 아니었다. 봉오 골은 금처럼 귀한 송이버섯은 물론이요, 영지와 황기, 기름 개구리 등 특산물이 산판에 널려있다고 한다. 이름 그대로 봉새가 깃든 오동나무의 골짜기라는 것. 전하는 바에 의하면 봉새는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 않으며 오동나무의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오동나무가 나는 터는 천하의 길지라고 한다. 그러나 봉오 골이 세간에 이름을 크게 떨치게 된 것은 이 오동나무 때문이 아니다. 1920년 6월 봉오골에서 홍범도(洪范图), 최진동(崔振东) 등이 이끄는 대한군북로독군부(大韩军北路督军府)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군 제19사단 월강 추격대대와 싸워 크게 이겼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에 의하면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전사 157명, 중상 200여명, 경상 100여 명을 내고 완전히 참패했다. 한편 독립군측의 피해는 전사 4명, 중상 2명이였다. 봉오동전투는 유명한 청산리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전투가 된다. 이때 일본군은 함경도 풍서리에서 봉오골에 지원부대를 파견했다고 한다. 풍서리는 반도의 최북단에 있는 마을이며 바로 경영촌의 강 맞은쪽에 위치한다. 일본군 지원부대는 두만강을 건너고 경영촌을 지나 봉오골로 향발했다. 이 무렵 경영촌은 또 “용배미”라고 불렸다고 한다. “배미”는 함경도 사람들이 뱀을 이르던 말이니 “용배미”는 용과 같은 뱀이라는 의미가 되겠다. 원체 마을 동쪽의 굴륭산에는 뱀이 유난히 많았고 또 용과 같은 큰 구렁이가 있었으니 그럴법하다. 각설하고 이날 저녁 까울령동쪽에 있는 비파골(琵琶沟)에서 총소리가 요란하게 터졌다. 후문이지만 일본군 지원부대가 봉오동에서 철수하는 부대와 저들끼리 혼전을 벌렸던 것이다. 비파골은 골짜기가 비파처럼 생겼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인데 현지인들은 중국말 발음을 따서 피페골이라고 부른다. 예전에는 인가가 살고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벌에 내려와 살고 있다. 진짜 피페한 골짜기로 된 것이다. 봉오동전투의 일부인 비파골의 전투 역시 “피페”한 역사로 사라질 번 했다. 다행히 20여년전 연변의 사학자들이 경영촌에 가 현지 70, 80세 노인들의 목격담을 채집하여 소중한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주전장인 봉오골은 끝내 세월의 깊은 물에 종적을 감췄다. 봉오골을 흐르는 시냇물은 바로 봉새가 골라서 마신다는 전설의 단물이라고 한다. 이 시내물이 나중에 도문사람들의 수원지로 되였던 것이다. 1977년 골짜기에 저수지를 세우면서 봉오골의 사람들은 골짜기를 떠나 도문의 여러 지역에 흩어졌다. 이제 저수지의 물 위에는 구름과 산과 나무가 비껴있을 뿐이며 옛날 골짜기를 메웠던 총과 칼의 그림자를 볼수 없다. 산비탈에 고독히 서있는 봉오동전투기념비가 흐릿한 옛 기억을 가까스로 붙잡고 있다. 봉오골은 더는 인가가 여기저기 널려있던 동네 봉오동이 아니다. 오동나무는 물에 잠기고 봉새는 어디론가 날아가버린 것이다. 사실 오동나무에 깃드는 새는 봉새이지만 오동나무의 씨앗을 먹고 배설하는 새는 까마귀라고 한다. 까마귀는 산마루에 울음소리만 아니라 오동나무에서 물어온 씨앗을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까울령은 애초부터 봉오골과 뭔가 기이한 인연을 맺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설마” 했는데 정말 그러했다. 봉오골 역시 고려촌처럼 시초부터 조선족들이 살고 있던 고려마을이며 이 때문에 예전에는 봉오골과 고려촌의 남쪽에 위치한 높은 산을 남고려령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풍문이 아니라 도문지명지의 기록이다. 나중에 줄인 말로 남고령 혹은 고령이라고 불렸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까울령은 “고령”이 중국지명으로 고착된 후 다시 우리 말로 음역된 이름이라는 해명이 설득력을 받고 있다. 산 하나를 두고 지방 문헌마저 이렇듯 이름의 뜻을 제각기 해석하여 혼선을 주고 있다. 더구나 산은 또 두 지역의 경계선으로 되고 있어서 이름 못할 뭔가의 뉘앙스를 피여올리고 있는듯하다. 필자/김호림(중국)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7-19
  • 민족어를 위한 시대적 도전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중앙민족대학에 조선어 문학과가 설립되었다. 그동안 조선어 문학과는 조선어 문학부로 성장하였고, 우리가 조선족일 수 있게 하는 우선 조건인 민족 언어와 문학을 지켜가기 위해 지금까지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민족은 역사적 기원, 생산방식, 언어, 문화, 풍속 습관과 심리적 정체성 등에서 나타난 공동 특징을 말한다. 통계에 따르면 문화 인류학자들이 제시한 민족 구성의 요소는 27개나 된다. 그중에 빈도가 높은 것이 5개인데 즉 “공동의 지역적 기원” 혹은 “공동의 조상”, “동일한 문화 또는 관습”, “종교”, “언어”, “인종 또는 형질적 특성”이라고 한다. 그런데 민족을 형성하는 5대 요소 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언어다. 언어는 문화현상 중에서 민족의식을 갖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된다. 언어 인류학자 사피어와 워프의 언어 상대성 가설에 따르면 언어는 의사소통의 도구일 뿐 아니라 의사소통을 통하여 감정을 공유하고 유사한 사유체계를 형성하게 한다. 언어는 인간과 동물을 구별시키는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다. 통신 전달의 체계는 동물들에게도 있지만 언어는 인간만이 소유하고 있는 고유 속성이다. 민족 언어는 민족문화를 민족 구성원들에게 공유하게 하고, 또 그것을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해 주는 가장 중요한 매체이다. 문화와 언어의 관계에서 문화가 언어의 구조와 내용에 영향을 미치는 동시에 언어구조가 문화의 다른 측면과 사고방식에 미치는 영향도 매우 크다. 따라서 우리는 한 민족의 언어 행위를 통해서 그 민족의 사회관계와 사회구조 및 사고의 구도까지도 파악할 수 있다. 언어와 문화는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으며 그만큼 언어의 중요성은 크다. 이민연구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다른 민족 지역으로 이주한 이민 집단이 민족 특성을 상실하는 순서는 제일 먼저 민족의 언어를 상실하고 그다음에 음식습관을 상실하며 마지막으로 가치관을 상실한다고 한다. 대도시로 들어온 조선족 가정의 청소년들이 제일 먼저 상실하게 되는 것이 바로 민족 언어이다. 150년이 넘는 이민 역사에서 조선어를 잘 공유해온 중국 조선족이 개혁개방을 맞이하여 대도시로 진출하면서 중국의 주류문화인 한족 문화와의 접촉과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민족 언어와 전통적인 가치관과 생활양식 등 문화의 유지와 보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모어(母語)를 사용할 때 가장 창의적인 사고를 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모든 소수민족들의 언어가 보존돼야 세계적 인류의 지적 자산이 보존될 수 있다고 한다. 개혁개방이래 조선족 민족교육은 점점 위축되어가고 있다. 아직도 “중국에서 좋은 대학을 가려면 조선 어보다는 한어를 잘해야 한다."라는 생각 때문에 자식들을 어려서부터 한족 학교에 보내는 학부모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 민족교육의 ‘불편한 현실’이다. 사실 대학 진학뿐만 아니라 대학 졸업 후 취직하는데도 조선어를 아는 학생이 모르는 학생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학부모들이 ‘조선어 무용론’이라는 함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재 중국에서 대학 졸업생들의 취직률이 70%를 밑도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중앙민족대학 조선어 학부 졸업생들의 취직률은 계속 100%를 자랑하고 있다. 21세기는 다양한 민족문화의 가치들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시대여야 한다. 비록 세계화가 피할 수 없는 역사의 추세라 할지라도 그것은 여러 민족의 언어나 문화가 어느 한 언어나 문화에로의 접근이나 동화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다양한 민족들의 언어와 문화는 그 문화의 자주성에 바탕을 둔 동참과 협력이 토대가 되어 모든 민족들의 미래를 위한 생존전략으로서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 언어와 문화의 획일화가 인류 문명에 끼칠 수 있는 가장 심각한 부작용은 인류문화가 갖는 언어, 문화적 다양성을 말살시킴으로써 인류가 선택할 수 있는 문화적 대안을 제한시킨다는 점이다. 조선족은 중국에서 150년 이상의 역사과정을 거치면서 중국의 일개 소수민족으로 자기 정체성을 확보했다. 이제 21세기에 진입하면서 조선족 사회가 살아남는 길은 세계화에 걸맞게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어가는 동시에 민족 언어와 문화를 지켜가면서 새로운 민족문화를 창출해가는 길밖에 없다. 그것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우리는 도전해야 한다. 필자/황유복 (베이징)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20-07-19
  • 용두레 우물과 포대 그리고 장성
    ●김호림 마을 한복판에는 우물이 하나 있었다. 반듯한 돌로 둘레를 쌓아올렸고 용두레를 잣아 드레 박으로 물을 퍼서 올렸다. “물이 많고 맑았는데 맛 또한 좋았지요.” 최흥수씨는 우물처럼 깊은 기억을 퍼서 다시 눈앞에 떠올렸다. 그는 이 우물 근처의 동네에서 집을 짓고 살던 사람이다. 예전에 우물은 동네방네 소문을 놓았다고 한다. 용두레우물을 모르면 간첩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우물이 있는 마을도 용두레마을이라고 불렸다. 용두레마을은 청나라 선통(1908—1912)년간 조선인들이 와서 세웠다고 한다. 훗날 중국말로 지명을 적으면서 용두레의 용(龙)자와 우물 정(井)자를 묶어서 “용정툰”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옛 우물가에 있었던 백년가옥. 잠간, 이야기가 아무래도 뭔가 잘못된 것 같다. 용두레마을 즉 용정이라고 하면 뉘라 없이 자연스럽게 해란강기슭의 옛 마을로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기실 이 용두레마을은 해란강이 아닌 훈춘하의 기슭에 있는 마을이다. 연변에서 이런 동명의 지명은 결코 한두 개가 아니다. 남쪽의 양지바른 곳 혹은 작은 여울이라는 의미의 남양(南阳)은 무려 일여덟 번이나 등장한다. 다만 용정은 하도 유명한 지명이라서 류달리 이상하게 여겨질 따름이다. 이 용두레 우물 역시 몇 십 년 전에 땅밑에 묻혔다. 이에 비하면 우물가에 있던 옛 기와집은 운이 좋은 셈이다. 허물리지 않고 길 서쪽에 통째로 옮겨졌던 것이다. 용두레 우물의 옛 주인이 살고 있었을지 모를 백 년 가옥이었다. “마을에서 잘나가던 부자라고 해요. 토지개혁 때 청산되었다고 하지요.” 미구에 용두레마을 역시 선후하여 동광촌(东光村) 1대(촌민 소조), 전선촌(电线村) 4대로 이름이 바뀌면서 집단기억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옛 우물은 그렇게 옛 가옥의 부자처럼 말끔하게 “청산” 된 셈이다. 한때 용두레 우물이 두레박처럼 이름을 걸고 있던 동광촌은 춘경촌(春景村)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춘경은 민국(1912—1949) 초년 조선인 몇 가구가 이주하면서 생긴 마을인데 말 그대로 “봄날의 경치처럼 아름답다”는 의미이다. 1940년 무렵 일본 다카스 개척단(高鹫开拓团)이 진입하면서 이 “봄날의 아름다운 경치”는 산산조각이 되여 버린다. 개척단은 마치 독수리가 병아리를 채듯 원래의 이름을 삼켜버렸던 것이다. 일본개척단은 일명 “만몽개척단满蒙开拓团)이라고 하는데 일본의 대륙침략정책의 일환으로 조직되었다. 대규모의 이민은 1936년 백만 가구 이민계획이 실시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약 10년간 무려 860여개의 개척단이 만주땅에 들어섰다. 이때 일본은 수매(收买)라는 허울 좋은 명목으로 땅을 빼앗았으며 또 “위험한 땅”, “군용지”, “치안유지” 등 잡다한 구실로 좋은 땅을 몰수하여 개척민들에게 나눠줬다. 원주민들은 부득불 외지로 이주하거나 황량한 지역에 가서 또 다른 “개척민”이 되였다. “만주개척년감(满洲开拓年鉴)”의 기록에 따르면 1943년까지 이런 개척민은 무려 4만 0771가구의 20여만 명이나 되였다고 한다. 훈춘에 출현했던 개척단은 8개, 의용단은 1개로서 도합 3004명이었다. 의용단은 말이 개척단의 일부이지 실은 일본군 예비대로 주요하게 청소년들로 구성되었다. 개척단과 의용단은 모두 1부락, 2부락, 3부락 혹은 상, 중, 하 부락 등 이름으로 원래의 마을 이름을 바꿨다. 와중에 다카쓰 개척단은 여섯 부락을 설립하며 이때 동광 지역에도 그들의 집단부락을 앉혔다. 일본이 전패하면서 그들의 개척단도 파산한다. 다카쓰 개척단은 1945년 8월 훈춘진에 집결하며 난민 수용소에 있다가 6년 후인 1951년 일본 정부의 통지를 받고 귀국하였다고 한다. 그 무렵 훈춘 경내의 일부 조선인들이 옛집단 부락에 와서 국영농장을 세웠다. 1956년 고급 농업생산 합작사를 세울 때 “동광”이라는 새 이름을 짓고 일본인 부락의 흔적을 밀어냈던 것이다. 동광촌은 지난 세기 80년대에 이르러 22가구의 작은 동네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개척단 일본인의 잔영은 오랜 후에도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그때 일본 사람들이 ‘닭 덕대 산’까지 전깃줄을 늘였다고 합니다. 그 전깃줄이 우리 마을을 지났다고 하지요.” 최흥수씨가 자못 정색해서 말하는 전선촌의 내력이었다. 옛날 전깃줄은 시골에서 사막의 물고기만큼이나 생소한 물건이었다. 이에 따라 전깃줄이 드리웠던 마을은 아예 “전선촌”으로 불리게 되였으며 나중에 그 이름이 다른 지명을 물리치고 현지에 고착되었다는 것이다. 필자/김호림(중국)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7-18
  • 조선족 간부 앞에 왜 조선족이 붙었을까
    ●김희수(중국) 이미 많은 사람들이 언급했지만 일부 조선족 간부들은 자신이 조선족인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 같다. 그들은 조선글로 발언 고를 쓰고 조선말로 발언하면 자신의 문화 수준이 낮아지고 체면이 깎이고 명예가 손상되는 것처럼 여기고 있다. 반면에 한어로 발언하면 문화 수준이 높아지고 체면이 서고 명예가 빛나는 것으로 인지하고 있다. 조선족 간부는 조선족을 위해 일해야 하고 조선족을 대변하여 말해야 한다. 이는 조선족 간부로서 응당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자질이다. 조선족인 것을 체면이 깎이는 것으로 여기는 순간부터 조선족 간부는 조선족이 아니다. 조선족 간부가 조선족이 아니면 간부로 존재할 수 있을까? 조선족 사회가 있어야 조선족 간부가 존재할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해서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있어야 조선족 간부가 존재할 수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있기에 민족 정책에 따라 조선족 간부는 소수민족간부 비례의 혜택을 받는다.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없다면 그 많은 조선족 간부들이 존재할 수 있을까?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아닌 한족 지구를 살펴 보라. 조선족 간부가 몇이나 되는가? 조남기, 이덕수, 전철수 등 조선족 간부는 모두 연변조선족자치주 출신이다. 조선족 간부는 자신이 조선족이기에 그 자리에 간부로 설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조선족이 아니라면 한족들과 동등하게 경쟁해야 하는데 그 결과는 밀릴 것이 뻔하다. 하기에 아무리 한족말(중국어)로 발언해도 소수민족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경우에는 조선족은 간부로 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것을 깨닫는다면 더는 자신이 조선족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것을 깨닫는다면 조선글로 글을 쓰고 조선말로 발언하는 것을 더는 체면이 깎이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것을 깨닫는다면 자신이 조선족임을 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것을 깨닫는다면 조선족을 위해 일하고 조선족을 대변해 말하려고 할 것이다. 조선족 간부는 단순한 간부가 아니라 간부 앞에 조선족이라는 무겁고도 영광스러운 이름이 붙어있는 간부이다. 조선족 간부, 왜서 간부가 뒤에 있고 조선족이 앞에 있는가? 이는 간부인 나보다 조선족이 먼저라는 것이다. 즉 조선족 간부는 조선족을 위해 일하는 간부, 조선족을 대변해 말하는 간부라는 것을 말해준다. 조선족 간부는 항상 자신이 조선족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간부 앞에 조선족을 붙여주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를 망각하면 자신이 간부로 설자리가 없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앞에 조선족이라는 무겁고도 영광스러운 이름을 달고 있는 조선족 간부라면 항상 조선족 간부로서의 사명감과 도의적 책임감을 느끼면서 조선족 사회의 언어, 교육, 문화 등이 발전하고 연변조선족자치주가 건재하도록 일조해야 하지 않을까. 조선족 간부들에게 간부 앞에 조선족이 붙어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또 명심할 것을 부탁드리고 싶다. 필자/김희수(중국)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20-07-17
  • '중국 특색'과 '미국 예외'의 가장 큰 구별 점
    ● 왈리드 (튀니지) 오늘의 세계는 신흥시장 국가와 발전 중 국가들이 군체적으로 굴기하고 국제역량 대비가 더욱 균형 발전하며 세계의 단극화 구조와 미국 패권의 시대가 몰락하면 다시는 더 이상 그 복귀가 어려운 시대로 되고 있다. 중국은 세계 다극화의 주요한 추동자로 되고 있지만 미국은 도리어 여전히 자아 우월감과 패권 사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생기는 중미사이의 모델은 서로 충돌하면서 세계에서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후 냉전시대의 중미모델: 개혁개방과 세계화 추세에 대한 역행 중국은 정확한 발전도로를 모색하고 발전과 번영에 들어서기 전, 허다한 고난에 봉착했다. 이 동방의 거물 사자가 잠에서 깨어나 개혁개방의 도로를 선택하기 전에는 빈곤, 실패, 기아와 동란 등을 수없이 겪었다. 그러나 냉전의 결속은 중국의 자아반성을 독촉했다. 반대로 미국은 여전히 그 창궐함이 극도에 달했고 맹목적인 자신감으로 거들먹거렸다. 그리고 중국은 구소련 모델의 교훈을 섭취,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모델이 결합된 새로운 것을 탐구,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개념을 창조적으로 제기했고 국가 주도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자유시장과 사영기업에 대한 제약을 풀어놓았다. 하다면 미국은 냉전이 결속된 후 미국의 우월성을 강조 미국의 모델이 세계 기타 국가들에 계발과 창조적 능력을 제공하고 있다고 믿도록 하고 있다. 냉전이 결속된 후의 수 십 년 래 중국의 주류는 <중국특색>으로 주로 중국의 원소(元素)와 대외개방, 국가의 방대한 통제조정과 자유경제의 상호 결합 및 중국 모델과 기타 국가의 모델이 상호 존중하고 상호 윙윙의 기초상 조화롭게 공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주류는 도리어 <역사의 종결(历史的终结)>과 <미국화>로 군사력과 기타의 파워로 자기의 생각에 따라 <동맹이 아니면 적으로 취급>하는 대외정책으로 세계를 개변하는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미국의 간섭을 원하지 않는 국가들을 놓고 말하면 미국식 모델은 일종의 압박으로 다가오기 마련이었다. 이른바 미국식의 자유는 허다한 국가의 눈에는 패권으로 보이었고 소위 그 <안전관> 또한 기타 국가한테는 악몽과도 같은 것이었다. 냉전이 결속된 지 40년이 지난 오늘 <중국의 굴기>와 <미국의 쇠퇴>는 자주 여론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이 두 가지 관점의 충돌 중에서 중국과 미국의 모델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등지고 달리고 있는 것이다. 예하면 중국과 세계는 날로 밀접해지는 한편 미국은 도리어 고립주의로 나아가고 있다. 중국은 무역자유, 글로벌화, 투자와 자본의 자유유동 등을 호소하는가 하면 미국은 관세보루를 설치하면서 일방적으로 무역전쟁을 도발하고 글로벌화를 반대하고 있으며 아울러 국가권력을 이용하여 기업의 투자와 교역을 간섭하면서 더 이상 공평경쟁의 원칙을 준수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는 이로부터 이른바 자유의 토대위에서 건립되었다는 미국모델은 그 시작부터 자아모순에 빠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실제상 미국모델과 중국모델의 행위적 차이는 망상적으로 바닷물을 다 마시자는 사람과 바다를 헤치면서 배를 모는 사람과의 대비이라고나 할까? 현재 차별화로 가득한 세계에 직면하여 강대한 실력의 미국은 마치도 익수자마냥 부단히 국제주의적 의무에서 탈퇴하고 글로벌 세계에서 철퇴하려고 발악하면서 고립주의로 향하고 있는 양상이다. 그러나 중국모델은 도리어 바다에서 파도타기를 하면서 큰 파도에 영활하게 대응, 이는 최종적으로 성공적으로 수면위로 떠오르는 수영선수와도 같은 모습이다. 미국은 현재 자기 자신들이 설치해놓은 전 지구적 전략의 미궁 중에서 전전긍긍하면서 그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으며 도리어 타국에서 파도를 헤치며 나아가는 선박의 항해를 저애, 이것이 곧바로 현재 미국의 대 중국정책으로 되고 있다. 헌데 이런 선박들의 항해는 단지 자신노력의 결과만이 아닌, 이미 세계적인 대 추세로 되고 있다는 것을 미국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냉전 시기, 미국의 정책 제정자들은 “미국의 모델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방식이란 것이 증명될 것이다”라고 자고자대했다. 이와는 달리 현재의 무역전쟁 중 중국의 지도자들은 반복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일을 잘 하는 것이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자아 주동성을 상실했고 그 정책 또한 중국굴기에 대한 피동적인 대응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중국특색>과 <미국 예외>란 모델의 구별 세계의 판도가 다극화로 발전함에 따라 현재 <중국굴기>와 <미국쇠퇴>론이 성행, 이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호기심을 갖고 중국이 새로운 패왕으로 등극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이해하자면 중국모델과 미국모델을 비교해보면 이 문제에 대한 답안이 나오게 된다. 중국과 미국의 모델을 살펴보면 3대 주요한 구별이 있다. 이런 구별은 중미 각 자의 행위 및 이들과 기타 국가와의 관계를 결정한다. 첫째, <중국특색>과 <미국예외>는 개념상 비슷하지만 뜻은 완전히 다르다. 중국의 특색성와 미국의 예외성은 표달하는 것은 동일한 함의를 갖고 있다. 곧바로 타국과는 부동하고 모델이 독특한 것이다. 하지만 기실 양자는 완전히 상 반대되는 우의(寓意)를 갖고 있다. 미국의 예외성은 자기 자신을 기타 사회와 문화의 앞자리에 놓는 표현으로 되고 있다. 일부 미국인들은 미국의 발전사는 다른 국가나 지구와는 다르다고 인정하고 있다. 자기들은 봉건주의와 사회주의 혹은 나치스주의를 경유하지 않았으며 미국은 인류자유의 마지막 희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은 자유를 수호하고 전파하는 사명을 짊어지고 있다고 하고 있다. 반대로 중국특색은 다시 말해 중국모델은 수 천 년 자국의 역사문화와 사회전통 습관 및 본국 특정을 거울로 삼은 특점이 있다. 미국 모델은 미국에서는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중국에는 적합하지 않으며 이 때문에 미국인들은 미국식 모델이 부동한 문화배경을 갖고 있는 전 인류한테 모두 가장 적합한 모델이라고 인정하겠지만 중국인들은 도리어 세계상에는 많은 부동한 성공모델이 존재하며 아울러 한 가지 모델을 전 세계에 파급시키려는 생각은 충돌 혹은 전쟁을 초래할 수 있다고 인정, 때문에 인류는 부동한 모델 사이에서 평화공존의 방법을 찾고 이를 실현해야지 모종의 특정 모델을 전파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로서 알 수 있는바 미국식 모델 목표는 확장이고 중국의 모델 취지는 가장 적합한 자아발전방식을 찾으며 아울러 자아 특색을 수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뚜렷하게 반대되는 국가안전관이다. 미국과 중국의 안전관의 구별은 크다. 심지어 완전히 상반대로 된다. 미국 모델의 안전관은 <내부안전>의 사상위에 있으며 이들은 미국을 <산정에 있는 성(山巅之城)>으로 여기고 있다. 그들은 미국은 태평양과 대서양 사이에 위치해 있고 거기에 인국들 또한 공격성적인 나라들이 아니기에 자기의 생명과 재부에 대한 안전감이 십분 만족하고 있다. 때문에 미국은 줄곧 영토 외에 군사력 확장에 치중하면서 세계패왕의 지위를 지키려 하고 있다. 반대로 중국의 안전관은 <외부의 위협> 위에 있다. 중국은 많은 강국과 미국 군사기지들에 포위되어 있고 또한 내부로는 분열세력들의 괴롭힘을 받고 있다. 해양을 놓고 말하면 아편전쟁으로부터 8국 연합군의 중국침략에 이르기까지 해양은 줄곧 외국세력이 중국을 침략하는 문호(门户)로 되어왔다. 신 중국이 창립된 후의 수십 년간 사회주의 노선을 선택한 이유로 중국은 시종 외부로부터 거대한 압력에 시달렸고 내부 구세력의 음모를 방지해야 했는가 하면 외부세력의 침략도 막아내야 했다. 그리고 개혁개방 정책을 실행한 후 중국은 여전히 외부세력의 간섭과 내부로는 지구분열주의 위험에 직면해 있는 상황이다. 때문에 중국의 안전관은 오직 충족한 군사세력이 있어야 만이 외부세력의 침략을 억제하고 국가의 통일과 현유의 자원을 지켜낼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세계 각 국과의 관계이다. 중국현대사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매번 중국내부가 더욱 안정할 때일수록 중국과 기타 국가와의 관계가 정비례로 좋아졌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다. 중국은 자기의 모델을 <수출>하려 하지 않고 있으며 동시에 외국모델의 압력도 접수하지 않고 있다. 내부의 안정이 공고화 되고 외부의 위협이 억제되는 것, 이 양자가 평형을 이룰 때 중국은 합작공동이익의 토대위에서 세계 각 국과 관계를 건립하고 있다. 중국은 그 어떤 나라와도 동맹을 맺지 않고 있으며 군사 혹은 의식형태의 연맹으로 이익을 추구하지 않아왔다. 때문에 중국 모델은 그 운행형식에서 <정수 + 변수(定数+变数)>로 국내적으로는 중국특색을 위주로 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합작 상대방의 가치관이 부동하고 주어진 환경이 달라도 여전히 기타 국가와 공동이익을 토대로 한 합작관계를 건립하고 있다. 주지하다 싶이 오늘 날 중국은 조선, 한국, 인도, 파키스탄,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등 국가와 모두 온건한 합작관계를 맺고 있다. 중국은 상하이(上海) 합작조직 및 브릭스(金砖国家) 그룹의 중요한 성원으로 이 두 개의 조직은 모두 문화 혹은 의식형태의 통일로 건립된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중국은 자신의 국제이익을 실현함에 있어서 공동이익을 기초로 하고 있지 동맹관계를 기초로 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이 외 <일대 일로(一带一路)>의 발기가 파급되는 다양한 문화와 부동한 합작방식은 부동한 국가와 지구의 발전전략에 잘 융합되면서 중국의 희망과 기타 국가와의 합작공동이익이 잘 반영되고 있으며 아울러 이는 결코 확장을 꿰하거나 패권을 노리는 것은 아닌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편 상대적으로 미국 혹은 서방의 모델은 <정수 + 정수(定数+定数)>의 형식으로 세계 각 국과 거래하기에 이들은 자기네들의 모델이 모범이라고 표방하면서 타국들로 하여금 자기의 복제품으로 되어 자기네들의 가치관을 접수하도록 강요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이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서방의 모델을 공동이익, 가치관과 의식형태의 기초위에서 통일로 건립된 동맹과 규칙으로 삼을 것을 호소, 자신의 모델 영향을 확대하고 기타 부동한 모델을 억제하기 위하여 시도하고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 또한 이들은 동맹을 통해 패권을 산생시키고 패권으로 하여금 자체이익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다고 해야 더 적절할 것 같다. 총적으로 중미 모델은 그 개념, 가치관, 이익을 실현하는 방식 및 기타 국가와 내왕하는 방식 등에서 모두 큰 구별점이 존재한다. 일찍 중국 개혁개방의 총 설계사 등소평은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좋은 고양이다(不管白猫黑猫,会捉老鼠就是好猫)>라고 말했다. 현재 중국 모델은 이미 성공한 모델로 활력이 충만하고 현실적 의의가 풍부하며 아울러 국제합작 영역에서도 모두 공동이익을 실현하였다. 이와는 달리 동맹과 공통점을 중시하는 미국 모델이 계속 세계에 대한 미국의 리드와 다양화한 세계의 평화공존과 발전을 보장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은 아직도 미지수이다. 필자/왈리드(중국 베이징대학 역사학부 졸업, 박사학위 현 인민망 아랍문판 편집)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7-06
  • 민국의 제일자객 왕아초
    왕아초(王亚樵), 장개석은 이 이름을 듣기만 하면 틀 이가 시큰거렸고 대립은 이 이름을 듣기만 하면 “문을 든든히 잠갔는가 검사했어?”하고 소리쳤다. 구상해탄의 3거두인 황금영, 두월생, 장소림도 길에서 왕아초를 만나기만 하면 급히 길을 되돌아 다른 길로 가군 했고 늘 부하들에게 절대 왕아초의 기분을 건드리지 말라고 부탁했다. 원 국민당 군통의 핵심 인물인 심취는 “세상 사람들은 모두 마귀를 두려워하지만 마귀는 왕아초를 두려워한다”고 말 한 적이 있다. 별 기이한 일이 다 벌어지고 있던 민국의 난세에 위세가 등등한 신비한 인물 왕아초가 나타났는데 그는 무예가 뛰어나고 경공(轻功)이 탁월하며 신출귀몰하고 행방이 묘연하며 올 때는 소리 없이 왔다가 갈 때는 흔적 없이 사라지군 했다. 그는 전문 상층사회의 고관 요인들과 일본군 고급 관리들을 암살했다. 그는 늘 상해, 남경, 무한, 복주, 홍콩, 난닝 등지를 귀신같이 달려 다니며 어디에 탐관, 한 간, 일본군이 있으면 그곳에 가서 제거해버리군 했다. 그의 손에서 도끼가 번쩍하면 악인들의 머리가 날아갔고 그의 손에서 총이 “땅”하고 울리면 악인들의 심장이 멎어버리군 했다. 그는 몸매가 왜소했는데 검은 테 안경을 끼고 다녀서 매우 점잖아 보였다. 그러나 그의 신분은 살기등등한 도끼방(斧头帮) 방주, 항일철혈한간제거퇀 퇀장이였다. 그는 “강회대협(江淮大侠)”, “암살 대왕”, “민국제일자객”, “원동제일자객” 등으로 불리면서 강호에서 위세를 떨쳤고 그의 명성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어느 한번 왕아초와 상해경비사령 양호는 무슨 문제 때문에 상의했는데 의견이 맞지 않아 다투게 되였다. 화가 난 왕아초는 키가 작기에 걸상에 올라가서 양호의 양쪽 귀싸대기를 후려쳤다. 많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있는 양호였지만 왕아초의 무예가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찍소리 못하고 바보처럼 웃기만 했다. 여기서 왕아초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가를 보아낼 수 있다. 1889년에 합비에서 출생한 왕아초는 일찍 신해혁명에 참가했고 후에 사회당에 가입하여 사회당안휘지부 부장을 담임했다. 1913년 겨울에 환계군벌 예사충(倪嗣冲)이 안휘의 정권을 빼앗고 사회당을 “난당(乱党)”이라고 하면서 진압했기에 왕아초는 상해로 도망쳤다. 왕아초는 “안휘노동자동향회”를 조직하고 암살 테러조직인 도끼방을 묶어세웠다. 도끼방의 명성은 하루아침에 높아졌고 왕아초의 이름은 상해를 진동했다. 그가 통제하고 있는 “상해노동자총회”의 회원은 가장 많을 때 10만 명에 달했다. 왕아초와 그의 암살조직은 시종일관하게 “장개석을 반대하고 항일하자”는 기치를 높이 들고 암살을 통해 사회변혁을 일으킬 수 있기를 바랐다. 왕아초는 상해 포동에 들어선 일본 해군 제3함대의 “출운호”를 폭발해버렸고 매국협정을 맺은 왕정위 괴뢰정부 외교부 부부장 당유임, 온갖 나쁜 짓을 다 저리른 송호경찰청 청장 서국량 등을 암살했다. 장개석, 왕정위, 송자문 등도 하마터면 왕아초의 손에 죽을번 했다. 왕아초는 여산에서 장개석을 암살하려고 했고 남경에서 왕정위를 암살하려고 했으며 북경역에서 송자문을 암살하려고 했다. 장학량이 스스로 책임을 지겠다고 사직하고 상해로 갔을 때 그를 맞아준 것은 기폭장치를 빼버린 작탄 이였다. 이것은 왕아초가 동북의 3000만 동포를 망국노로 만든 민족죄인 장학량에게 보낸 경고였다. 왕아초는 장학량이 정신을 차려 다시 항일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일본군, 왕정위 괴뢰특무, 군통특무, 검은 패거리 등 여러 세력들이 여러 번이나 왕아초를 죽이려고 쫓아다녔다. 장개석은 왕아초의 머리에 현상금 100만원을 내걸었고 왕정위 괴뢰특무들은 층층이 병력을 배치하고 왕아초를 죽음으로 내몰려고 했으며 일본첩보기관은 덫을 놓고 왕아초를 유혹하여 붙잡으려고 온갖 수단을 다했다. 하지만 기민하고 용감한 왕아초는 번마다 위험한 상태에서 안전하게 벗어나 계속 악세력과 완강하게 싸웠다. 1933년 가을에 장개석은 현상금 100만원을 내걸고 왕아초의 목숨을 끊어오라고 명령했다. 당시 장개석은 왕아초의 도끼에 목숨을 잃을가봐 몹시 두려워했다. 장개석이 현상금을 내건 명단 중에 임표, 서해동 등이 있었는데 현상금은 10만원을 초과하지 않았다. 군통특무들과 경찰들이 전면 수색에 나서자 왕아초는 교묘하게 부두노동자로 변장하여 상해를 떠나 홍콩으로 도망쳤다. 1935년에 리제심, 진명추, 왕아초 등은 홍콩에서 비밀회의를 가지고 국민당 제4기 6중전회에서 장개석과 왕정위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왕아초는 화극지를 남경에 파견하여 암살을 책임지게 하고 하파광과 장옥화가 옆에서 협조하며 기자신분을 얻은 손봉명이 구체적 암살행동을 맡기로 했다. 그해 11월 1일에 손봉명은 권총을 사진기 안에 감추고 예당으로 들어갔다. 회의가 개막된 후 대표들이 사진을 찍었는데 왕정위가 앞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장개석은 보이지 않았다. 손봉명은 권총을 꺼내들고 왕정위를 향해 사격했다. 왕정위는 몸에 총알 세발을 맞았는데 한발은 몸속에 숨어있다가 9년 후에 왕정위를 일본도쿄 제국대학병원의 수술대에서 죽게 만들었다. 왕정위 암살을 왕아초가 지휘했다는 것을 알게 된 장개석은 두려워서 대립을 불러놓고 명령했다. “빠른 시일 내에 왕아초를 잡아와! 산채로 잡지 못하면 죽여도 좋아. 왕아초를 잡아오기 전에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대립과 정개민은 왕아초를 잡으려고 수백 명의 군통특무를 홍콩에 파견했지만 헛물만 켜고 말았다. 1936년 2월에 왕아초는 군통특무들의 추격을 피하여 몇몇 부하들과 함께 광서의 오주로 도망쳤다. 왕아초는 이종인과 백숭희를 세 번이나 찾아가 군사를 동원해 장개석을 토벌하라고 건의했지만 이종인과 백숭희는 거절했다. 오주에 거주하면서 왕아초는 궁지에 빠졌다. 홍콩에서 왕아초를 붙잡지 못한 대립은 왕아초가 의협심이 강해 부하들에 대한 보살핌이 매우 지극하다는 것을 알고 왕아초의 부하 여립규를 붙잡아 남경의 감옥에 처넣었다. 여립규가 죽어도 왕아초를 배신하지 않겠다고 하자 대립은 여립규의 처 여완군을 찾아가서 “우리가 너의 남편 여립규를 놓아주고 상금을 톡톡히 주겠으니 왕아초한테 연계하여 경제형편이 어려우니 도와달라고 해라"며 구슬렸다. 1936년 10월초에 여완군은 갑자기 홍콩에서 오주로 와서 왕아초의 부하들과 연계를 가진 후 왕아초에게 전화를 하여 “홍콩에서 경제형편이 힘들어 오주로 왔다”고 말했다. 그때 여완군은 이미 대립에게 회유당했던 것이다. 그녀는 오주에 온후 즉시 군통 주요책임자의 한 사람인 정개민과 연계를 가졌다. 10월 20일에 그녀는 일이 있어 상의하자고 하면서 왕아초를 자기의 거처로 청했다. 의리를 중히 여기고 의협심이 강한 왕아초는 여완군을 도와주기 위해 그녀의 집으로 찾아갔다. 여완군의 거처에 도착한 왕아초는 수십 명의 특무들이 매복해 있는 줄도 모르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왕아초가 들어서자 방안에 매복해있던 특무들이 석회가루를 그의 얼굴에 뿌렸다. 왕아초는 석회가루가 눈에 들어가 눈을 뜰수 없었지만 원래 무예가 뛰어났기 때문에 몇몇 특무들을 쓸어 눕혔다. 하지만 특무들의 쏜 총이 다섯 발이나 그의 가슴에 명중되었고 세 곳에 칼에 찔려 목숨을 잃었다. 특무들은 잔인하게 왕아초의 얼굴가죽을 벗겨버렸고 살인멸구하기 위해 여완군까지 죽여 버렸다. 대립은 1923년에 호종남, 호포일과 함께 왕아초와 의형제를 맺었지만 의리를 저버리고 왕아초를 살해했다. 그는 의협심이 강한 왕아초의 약점을 이용하여 신출귀몰하고 소리 없이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암살대왕” 왕아초를 살해했다. 일본 놈들의 손에도 넘어지지 않던 일대의 민족영웅은 처참하게 장개석의 독수에 목숨을 잃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왕아초는 길에서 억울함을 당하는 사람을 보면 서슴없이 칼을 뽑아 도와주는 호한이었고 탐관오리, 악당, 일본군을 보면 처단해버리는 영웅호걸 이였다. 필자/김희수(중국)
    • 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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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05
  • 조선족, 고국이 있어 동화되지 않는가
    ●김희수(중국) 고국(한국과 조선)이 있어 중국 조선족은 동화되지 않는다고 낙관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말 그럴까? 사실 중국 조선족은 지금 경제, 문화, 언어, 문자, 풍속 습관 등에서 주류 민족에 서서히 동화되여가고 있다. 농촌에서는 이농현상으로 농촌 경제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땅을 지키지 못하면서 우리 삶의 터전을 잃어가고 있다. 도시에서도 조선족의 민영경제는 매우 취약하다. 물론 대도시에는 비교적 큰 조선족 기업도 있지만 전국적으로 굴지의 기업이 없다. 더구나 연변에는 조선족 사회의 견고한 토대로 될 중대형 기업이 별로 없다. 조선족 대부분은 외국 돈벌이에 의거하고 있는 실정이다. 조선족 경제의 취약한 상태는 경제동화를 보여주고 있으며 조선족의 취업, 교육, 과학기술, 문화 등에 영향을 주고 있다. 과거에는 우리 민족이 문화 수준이 높고 민족의식이 강했기에 우리 민족의 문화, 언어, 문자, 풍속 습관을 지키고 중국 땅에서 우수한 민족으로 당당하게 살아왔다. 하지만 개혁개방 후 중국 조선족 사회는 급변하면서 인구이동, 인구감소로 민족교육체계가 붕괴되고 민족문화가 상실되어가고 있다. 동화를 막는데 가장 중요한 조선족 학교도 줄어들고 있다. 농촌학교는 물론 도시학교도 하나둘씩 폐교되고 있다. 조선족 공동체를 이루는데 가장 중요한 인구도 급감세를 보이고 있다. 우리 말과 글보다 한족 말과 글을 더 잘하는 아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조선족 신문, 잡지도 하나둘씩 줄어들고 있다. 이렇게 조선족 사회가 동화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지만 현재 중국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세대만큼은 동화되지 않는다. 우리 세대는 동화되지 않지만 다음 세대 혹은 그다음 세대에 가서는 주류 민족에 동회 될 수 있다. 우리 조선족에게 고국이 있어 동화되지 않는다고 낙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말 그럴까? 앞으로 우리의 아들이거나 손자, 증손자가 학부모가 된다고 하자. 그리고 그때에 가서 중국 조선족 인구가 줄고 줄어 자치주가 없어지고 조선족 학교도 폐교되고 우리 말로 된 방송, 텔레비전 방송도 없어지고 우리글로 된 신문 잡지도 자취를 감춘다고 하자. 이런 상황에서 미래의 아이들이 학교도 없는 우리글을 배우려고 하겠는가? 신문 잡지도 없는 우리글을 사용하려고 하겠는가? 그때 가서 우리글은 완전히 외국어(한국, 조선)로 된다. 우리의 아이들은 외국어를 배운데 해도 고 국어보다 영어를 먼저 선택할 것이다. 고국이 있어 동화되지 않는다고 낙관하는 사람들은 또 그때 가서 조선족들이 한국이나 조선으로 이민 가서 살면 되지 않겠는가고 반문할 것이다. 하지만 전체 조선족들이 모두 고국(남북통일이 된다고 해도)으로 가서 산다는 것은 현실적이 못된다. 그때 가서 고국으로 가서 사는 조선족들이 많아질 수는 있지만 중국에 남아서 사는 조선족들도 적이 않을 것이다. 비록 우리에게 고국이 있다고 하지만 앞으로도 중국 땅에 계속 남아서 사는 조선족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중국 땅에 조선족이 존재하는 한 조선족은 고국이 있다고 해도 언젠가는 만족처럼 동화될 것이다. 중국에 살면서 중국 말을 하고 중국어를 써도 자신이 조선족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면 되지 않겠냐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이미 경제, 문화, 언어, 문자, 풍속 습관 등에서 완전히 동화된 상태에서 관념도 점점 희박해지면서 결국에는 동화되고 말 것이다. 만주족의 경우를 놓고 보아도 그렇다. 지금 만주족은 말로는 만주족이지 한족이나 다름없다. 이제는 200여 년 동안 중국을 통치한 과거를 자랑하면서 “나는 만주족이다”라고 하는 만주족은 없다. 대부분 만주족은 자신이 만주족이란 관념도 상실하고 있다. 동화는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우리는 지금 자기의 민족학교를 갖고 있고 자기의 자치주를 갖고 있고 자기의 방송, 신문, 잡지를 갖고 있어서 동화되지 않고 조선족으로 떳떳이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앞집 처녀 믿다가 장가 못 가듯이 고국만 믿고 동회 위기에 철저히 대비를 하지 않고 있다가 완전히 동화될 수 있다. 그때 가서 “중국 조선족”이라고 말할 사람, 불러줄 사람이 있을까? 필자/김희수(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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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고
    2020-07-05
  • 중국 역사상 가장 많은 남편을 두었던 산음공주
    [동포투데이] 중국의 황제는 아마도 가장 편안하게 살면서 향락을 누렸을 것이다. 그들은 삼궁육원에 수천명의 궁녀를 거느릴 수 있었다.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자만이 절대적인 향락을 누릴 수 있었다. 중국 남북조시대의 송(宋)나라에는 산음공주(山阴公主)라고 불리는 여인이 있었는데 이름이 유초옥(刘楚玉)이다. 그녀는 이런 남자들만의 특권에 도전장을 내밀었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삼궁육원을 만들어냈다. 그리하여 수많은 남자들을 남편으로 두고 마음껏 향락을 누렸다. 산음공주의 모친은 문목황후(問目) 왕헌원(王宪嫄)이다. 왕헌원은 효무제와의 사이에 2남 4녀를 낳았는데 각각 다음과 같다. 폐제(废帝) 유자업(刘子业), 예장왕(豫章王) 유자상(刘子尚), 산음공주 유초옥, 임회강애공주(临淮康哀公主) 유초패(刘楚佩), 황녀 유초수(刘楚琇), 강락공주(康乐公主) 유수명(刘修明)이다. 문목황후는 미녀였고 그녀가 낳은 딸들도 모두 그녀를 닮아 미녀들이였다. 이 네 명의 딸중에서 가장 자색이 뛰여나고 음탕하기로 유명한 딸이 바로 산음공주이다. 대명8년(464년) 5월에 산음공주의 16살 된 남동생 유자업이 황위를 계승했는데 역사에서 전폐제(前废帝)로 불리우는 인물이다. 유자업은 황음무도한 호색한 이였다. 아마도 중국 역사상에서 가장 호색한 황제일 것이다. 그는 민간에서 미녀를 많이 뽑아들였을 뿐만아니라 부친의 후궁, 심지어 자신의 친고모, 친누나까지 침상에 끌어들여 향락을 즐겼다. 그에게 강점당한 고모는 신채공주(新蔡公主)라고 불리우는 여인이다. 신채공주는 일찌기 장군 하매(河迈河邁)에게 시집갔었는데 유자업은 그녀를 궁중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궁녀를 죽인 후 그 시신을 하매의 집으로 보내면서 신채공주는 이미 죽었다고 거짓말을 말했다. 하매는 이 치욕을 견디지 못해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사전에 누설되는 바람에 유자업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신채공주는 그때부터 성을 사(谢)씨로 바꾸고 궁중에 남아 황제인 조카의 여인으로 되였다. 유자업은 심지어 신채공주를 황후로 세우려고 까지 하였으나 신채공주가 스스로 거절했다. 산음공주는 고모와는 달랐다. 그녀는 남동생과 서로 마음이 잘 맞았다. 사서의 기재에 의하면 산음공주는 자주 궁중에 들어와서 유자업과 함께 먹고 한 침대에서 함께 잤으니 부부와 같았다. 유자업은 이 누나가 하는 말이면 뭐든지 들어주었다. 한번은 산음공주가 유자업에게 말했다 “저와 페하는 모두 선황의 자손인데 페하는 삼궁육원을 거느리는데 첩은 부마 1명뿐이니 이것은 너무 불공평합니다.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이것은 기원 5세기경에 한 중국 공주가 내뱉은 말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말이다. 그러나 잘 들어보면 그녀가 주장하는 이치는 이렇다. 공주와 황제는 모두 한 부친에게서 태어났는데 왜 황제는 후궁을 만명이나 거느리고 공주는 겨우 부마 1명만 둘수 있는지? 유자업은 누나의 이 말을 듣고는 즉시 누나의 뜻을 받아들였다. 유자업은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이 일은 신속히 처리했다. 그는 즉시 30명의 잘생긴 미소년들을 뽑아서 산음공주의 집으로 보내주었다. 산음공주는 이들을 모두 남첩으로 받아들였다. 산음공주의 남편 이였던 부마 하집(何戢)이 갑자기 이렇게 30명이나 남첩이 생긴데 대하여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지는 사서에 기재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기분이 좋지 않았을 것임은 분명하다. 하집은 원래 명문가 출신이고 아주 잘 생겼을 뿐만아니라 풍채가 름름했다. 어린 남자들을 많이 가지게 되자 산음공주는 다시 성숙한 남자들에게 눈을 돌렸다. 당시 송나라의 조정에는 두 명의 미남자가 있었다. 한명은 바로 산음공주에 장가든 하집이였고 다른 한명은 남군공주(南郡公主)에게 장가든 저연(褚渊)이였다. 저연의 자는 언회(彦回)이다. 배분으로 따지자면 저연은 산음공주의 고모부였다. 이 사람도 풍채가 뛰어나고 아주 준수하였다. 그리하여 산음공주는 이 저연을 마음에 두기 시작했다. 그녀는 다시 유자업을 찾아가 저연으로 하여금 자신과 며칠을 놀아주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유자업은 저연의 품행이 단정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에게 아무 이유없이 산음공주와 며칠을 놀아달라고 얘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저 그에게 공주 집으로 가라고 조서를 내렸다. 저연이 공주집에 도착한 후에 어떻게 하는지는 산음공주의 능력에 달렸다고 생각했다. 산음공주는 신경을 써서 매일 화장을 하고 온 정성을 다해서 저연을 유혹하였다. 그러나 10일이 지나도록 저연은 나무조각 같았고 교태를 부리는 산음공주에 대하여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공주는 마음이 급해졌으나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산음공주는 “그대는 구레나룻이 철극과 같이 강한데 어찌 조금도 사나이답지 못한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저연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언회는 비록 똑똑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하여 정리에 어긋나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산음공주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강온의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그러나 저연은 전혀 동하지 않고 이렇게 응수했다. “당신은 공주이니 당신을 어떻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공주님이 이렇게 계속 핍박한다면 소인은 자살로서 끝낼 수밖에 없나이다.” 이 지경이 되자 산음공주도 더 이상은 어찌하지 못했고 저연을 곱게 집으로 돌려보내 주었다. 산음공주의 좋은 시절은 결국 끝이날 수밖에 없었다. 경화원년 11월 29일(466년 1월 1일)에 유자업은 궁중의 반란으로 목이 날아났다. 다음날에 다른 황제가 등극했는데 구정치를 일소하기 위하여 유자상과 산음공주를 죽였다. 산음공주 류초옥이 죽었을 때 나이가 22살 내지 23살이였다. 젊은 나이에 죽은 그녀도 가엾지만 진정으로 불행한 것은 그녀가 거느리던 30여명의 남첩들이였다. 산음공주가 피살될 때 그들도 산음공주와 함께 순장되였다. (김희수)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7-03
  • 중국 역사상 가장 잔인한 10대 살인백정
    [동포투데이] 중국 고대사에 나타난 10명의 살인 미치광이들은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한번 깜짝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면서 피 빚을 얼마나 졌는지 모른다. “살인 백정”이라는 네 글자로 그들을 형용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그럼 아래에 역대 10명 살인백정의 하늘에 사무치는 죄행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살인백정 백기 공손기라고도 불린 백기(白起)는 전국 시기의 진나라 대장군이었다. 싸움판에서 백기가 어찌나 무자비했던지 6국의 군대들은 백기가 군사를 거느리고 온다는 말만 들어도 혼비백산할 지경이었다. 기원전 294년에 백기는 군사를 거느리고 한나라와 위나라의 연합군을 치면서 적군의 수급을 벤 것만도 24만 개였고 기원전 273년에 군사를 이끌고 조나라와 연나라의 연합군을 공격하면서 그가 벤 수급만도 13만 개였다. 후에 또 조나라 장군 가언과 일전을 벌이면서 물을 이용해 조나라 병사 2만 명을 익사시켰고 기원전 264년에 한나라를 공략하며 5만여 명의 목을 전부 베였다. 전쟁터에서 적군의 목을 벤 것을 살인 백정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해도 백기는 기원전 278년에 군사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공략할 때 물을 터뜨려 언성(지금의 허베이 성 의성 동남쪽)이 잠기게 함으로써 사망자 수가 수십만 명에 이르게 하였는데 사망자 중에는 10여만 명에 달하는 백성들도 있었다. 또 기원전 260년에 조나라와의 장평 전투에서 백기는 생포한 조나라 군사 40만 명을 생매장하고 겨우 240명의 소졸을 돌려보내 소식을 전하게 했다. 잔인한 살인백정 조조 3국시기 저명한 정치가이며 군사가인 조조(曹操)는 난세의 영웅일 뿐만 아니라 잔인하기 그지없는 살인 백정이었다. 193년에 도겸을 공략할 때 서주대 도살을 감행했는데 기재에 따르면 남여노소를 가리지 않고 10만 여명을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개든 닭이든 짐승조차도 가만 놔두지 않고 닥치는 대로 죽였다. 당시 시체가 도처에 널린 까닭에 사수하까지 막혀 흐르지 못하는 정도가 되였다. 그밖에 조조는 장막을 치면서 옹성 토벌을 감행했고 여포를 치면서 팽성 토벌을 감행했으며 원상을 치면서 업성 토벌을 감행했다. 또 오환을 치면서 유성 토벌을 감행했는데 조조는 토벌을 감행할 때마다 모조리 죽이는 정책을 실시하여 그 수단이 극히 잔인함을 보여주었다. 식인 살인백정 황소 당조 말년의 농민봉기 군 수령 황소(黄巢)는 횡포하고 지독하기로 소문났다. 황소는 장안성을 함락한 후 사람을 어찌나 많이 죽였는지 시체가 온 거리에 널려있을 정도였다. 후에 관군이 다시 장안성을 수복한 후 백성들은 완전히 관군의 입장에 서서 “황소가 사람을 마구 죽여 피가 온 성안에 질벅했다"라고 공소했다. '구당서'의 기재에 따르면 “황소가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를 1년간 포위하고 있었는데 양초가 다 떨어지자 수백 개의 대형 돌절구를 만들어놓고 편히 살아있는 백성들과 포로들을 남녀노소 구분 없이 돌절구에 넣고 찧어서 그 고기를 병사들이 먹게 했다. 진주 4개 주의 백성들을 다 잡아먹고 나 자 황소는 또 하남, 허, 당 등 10개 주의 백성들에게도 마수를 뻗쳤다. 황소는 또 광주 대사에서 학살을 감행했는데 아랍 등 무슬림 상인들을 20여만 명 살해했다. 과연 그 미친듯한 살인 행각은 사람들로 하여금 모골이 송연해지게 하였다. 야만 살인백정 테무진 테무진(铁木真) 칭기즈칸(成吉思汗)은 세계 역사상 걸출한 정치가이며 군사가이지만 그가 세운 몽골제국의 패업은 가히 수많은 사람의 해골로 세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1215년에 테무진은 금나라의 도성 중도(지금의 북경)를 함락했는데 성안의 백성들을 한 달 동안이나 대도살했다. 당시 100만 명을 헤아리는 사람들이 그 재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221년에 테무진은 한차례의 유럽 정벌에서 대도살을 감행했는데 당시 몽골 병사 5만 명이 매인 평균 24명의 백성을 도살했다. 그 당시 도합 120만 명의 백성이 목숨을 잃었다. 최악의 살인백정 구비라이 칭기즈칸의 손자 원시조 구비 라이(忽必烈)는 원나라를 건립한 영웅이지만 종족 멸종의 정책을 시행하여 한족들을 대거 학살했는데 그 사망자는 1800만 명이 넘었다. 중국 북방의 90%에 달하는 한족 평민들은 대부분이 그 종족 멸종 참극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구비 라이가 사천에서 대도살을 감행하기 전에 300만~2000만 명의 인구가 있었는데 도살 후 80만 명도 남지 않았다. 이 인간성을 상실한 종족 멸종 행위는 기네스 세계 기록 대전에 수록(1985년) 되였다. 냉혈 살인백정 주원장 명나라 개국 황제 주원장(朱元璋)은 황제가 된 후 갑자기 마음이 변하여 공신들을 마구 학살했다. 사서에 기재된데 의하면 보유용, 리선장, 란옥삼 사건에서 도합 10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주원장은 재위 30년간 20만 명을 살해했는데 공신들을 기본상 다 죽여 버렸다. 주원장은 개국 명장 상위 춘(常遇春)에게 이쁜 여인을 주어 첩으로 삼게 했다. 그런데 상우충의 아내가 질투하여 그 첩의 손목을 잘라버렸다. 이를 알게 된 주원장은 즉시 사람을 보내어 상우충의 아내를 죽여버리고 그 갈비뼈를 삶아서 상우충 및 대신들이 식용하게 하였다. 주원장은 또 사람의 가죽을 바르는 형벌을 만들어 잔인한 본색을 세상에 알리였다. 변태 살인백정 주체 주원장의 넷째 아들인 명성조 주체(朱棣)는 아비 주원장에 비해 손색이 없는 살인백정이었다. 그는 1402년에 친조카 건문제의 황위를 빼앗은 후 건 문제 궁의 여관, 태감 등 모든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는데 한 번에 1만 4000명이나 학살했다. 그는 또 건문제에게 충성하던 옛 신하 방효유 등을 전부 살해했는데 “9족”이 아니라 “10족”까지 멸했다. 그리고 방효유의 아내 및 그 가족 중의 여자들은 군영에 가두어놓고 병사들이 마음껏 즐기게 했는데 한 명의 여자가 밤낮이 따로 없이 20여 명 사내들의 수욕을 만족시켜야 했다. 그러다가 육신이 지쳐서 죽는 여자는 시체를 가져다 개에게 먹이게 했다. 영락 말년에 주체는 또 한 번 궁녀, 환관들에 대한 대도살을 감행했는데 그 번 대참사에서 살해된 궁녀만도 근 3000명에 달했다. 임종을 앞두고도 학살 본성을 잊지 않은 주체는 바로 죽는 날에도 30여 명의 궁녀들을 교살하여 자기와 함께 묻게 했다. 과연 명실상부한 변태 살인 백정이었다. 야성 살인백정 장헌충 명나라 말년의 봉기군 수령이었던 장헌충(张献忠)은 군사를 거느리고 성도를 함락한 후 3일 동안이나 대학살을 명령했다. 대학살을 그만둔 후에도 장헌충은 의연히 날마다 100여 명씩 살해했다. 그러다가 청나라군이 몰려오자 곧바로 도망쳤다. 바로 대군이 성도에서 도망치기 전에 그는 참혹한 “4광정 책”을 실시했는데 그것이 바로 사천인을 모조리 죽이고 백성으로부터 군인가족(로 약자와 환자, 부상자)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자기의 군사들 중에 섞여있는 호북 병사와 사천 병사들 그리고 최초에 자기를 따르며 사선을 넘나들던 친병들까지 모조리 죽여 그 고기를 베여 군량으로 했다. 기재에 따르면 어느날 저녁에 장헌충은 자기가 부르는데 대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명령을 내려 자기의 어린 아들까지 죽여 버렸다. 그리고는 이튿날에 후회되어 처첩들을 불러 왜 아들을 구하지 않았느냐고 문책하고 나서 처첩들과 자기 아들을 죽인 도부수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여진을 통일하고 후금을 건립한 청태조 누르하치(努尔哈赤)는 군사를 거느리고 요동지역을 점령한 후 당지 가난한 사람들이 생활난으로 반란이라도 일으킬 가봐 요동지역의 빈민들을 모조리 붙잡아다 죽여 버렸다. 후에 또 요동의 부자들이 압박에 못 이겨 반항할 가봐 두려워 요동지역의 부자들도 대부분 다 죽여 버렸다. 누르하치는 요동 백성 도합 300여만 명을 살해했는데 요동지역의 한족들은 기본상 다 화를 면치 못했다. 이는 피를 보기 좋아하는 누르하치의 본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지옥 살인백정 다탁 누르하치의 열다섯째 아들이며 청나라 예친왕(豫亲王)인 다탁(多铎)은 1645년에 군사를 거느리고 양주를 포위한 후 대포를 쏘아 성문을 열고 양주성으로 짓쳐 들어갔다. 다탁은 연속 10일간 대도살을 감행해 양주 백성 80만 명을 살해했다. 이로써 번화하던 양주성은 순식간에 인간지옥으로 변했다. 청나라군이 양주 백성들을 보는 대로 살해하다 보니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이게 되였는데 어린애들도 재화를 피하지 못했다. 나중에 연못도 피로 물들어 벌겋게 되였는데 이런 상황을 만들어낸 다탁이 야말로 명실상부한 지옥 백정임에 틀림없다. 김희수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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