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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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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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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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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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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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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중국 축구협회 추진 사항 '약' 혹은 '독'?
    ● 리병천 중국 축구협회에서 국내 각 단계 리그 구단수의 전면 확장을 계획하고 있다. 축구협회에서 발표한 초보적인 타산에 따르면 돌아오는 2025년 시즌까지 슈퍼리그는 18개 팀, 갑급리그는 20개 팀, 을급리그는 48개 팀으로 확장해 경쟁을 펼치게 하는 체제를 구축한다고 한다…. 중국 축구협회는 지난 25일, 상하이에서 프로리그 투자인 회의를 개최했고 리그 확장과 새로운 체제를 구축할 데 관해 토론을 벌였다. 이날 회의 때 축구협회에서는 현행 16개 팀 체제인 슈퍼리그는 2025년에는 18개 팀 체제로 바꾸고 또 갑급리그는 20개 팀으로, 을급리그는 48개 팀으로 구성하게 하는 체제로 구축하려는 계획을 밝혔다. 그뿐만 아니라 축구협회에서는 향후 몇 년간 30살 이상의 국내 선수들의 이적을 제한, 어린 선수들의 재능을 보호하기 위해 귀화 선수를 포함한 외국인 수 역시 제한할 계획을 내비쳤다. 귀화 선수에 대해서도 매 팀이 2명을 보유, 경기에 단 1명만 출전할 것을 제안했다. 이 외에도 축구협회에서는 국내 선수들의 연봉을 제한하는 방안으로 1000만 원이라는 상한제를 도입할 것을 제기하기도 했다. 실제 이는 국내 프로리그가 최근 과도한 투자에 비해 실력이 크게 떨어지자 축구협회에서 긴급하게 이번 프로리그 쇄신안을 마련해 질적 발전을 도모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하지만 이번에 축구협회에서 구축하고 있는 정책들에 대해 항간에서는 더욱 큰 비판과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축구협회에서 이번에 추진하려는 방안들은 아직 최종 결정된 것이 아니다. 알려진데 의하면 이와 관련한 세부안은 내년 초에 나올 전망이다. 하지만 국내 선수들의 연봉 상한제 도입, 30살 이상 국내 선수들의 이적 제한 등 정책들이 실제로 시행된다면 중국 축구에 치명적인 타격하다 줄 수 있다는 판단이 강하게 느껴진다. 연봉 상한제 같은 경우 이미 중국 귀화를 마친 선수들이 앞으로 어떻게 작용할지가 매우 궁금하다. 광저우헝다 엘케손을 예를 들면 브라질 국적을 유지했을 때만 하더라도 연봉 5000만 원을 받았다. 하지만 귀화까지 한 이상 엘케손은 더는 외국인 선수가 아니기에 연봉이 대폭 삭감될 가능성이 크다. 국가팀 선수로 뛰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반 토막 이상 연봉밖에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과연 귀화할 외국인 선수가 있을지 의문스럽다. 이외에도 30살 이상 국내 선수들의 이적을 제한하는 정책도 극히 비합리적이고 시장 경제 발전 법칙에 맞지 않는 정책으로 판단된다. 유소년 선수들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정책이라고는 하지만 30살 이상 선수들의 앞날을 파괴하는 것을 전제로 해서는 절대 안 된다. 특히 축구선수 중 30살 좌우에야 경험적인 우세를 토대로 최상의 컨디션을 보이는 선수들이 매우 많다. 이들이 자신의 최상의 경기력을 가진 상황에서 어린 선수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또 기타 구단으로 이적을 할 수 없어 일찌감치 퇴역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까지 발생할 가능성이 우려된다. 지난달 까지만 해도 귀화를 추진하던 축구협회에서 단 한 달 만에 국가팀의 부진을 이유로 귀화를 사실상 막고 있다. 이처럼 그때그때 다르고 번복되고 있는 정책들은 사실상 정책이 아니라 '장난'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국내리그에 매년 수십억대 투입을 하는 구단주들은 축구협회의 번복되는 정책 때문에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오늘의 정책 때문에 몇억 원을 투입하고 내일이면 또 이 정책의 폐지 때문에 더 많은 돈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프로리그도 시장 경제인 만큼 자금을 무시하고는 절대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없다. 중국 축구가 정책이 없어서 실력이 떨어지는 것이 절대 아니다. 다만 세계 그 어느 나라 보다 더욱 복잡하고 이해하기 힘든 정책들이 너무 많은 것이 문제다. 중국 축구 발전을 위해 간단하고 최소 십 년간은 지속할 수 있는 장기적이고 또 시장 발전 법칙에 맞는 정책을 만들어 그 정책을 확고하게 실시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필자/리병천(연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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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고
    2019-11-28
  • [허성운 칼럼] 상해와 연변
    ● 허성운 영어사전에는 중국항구도시 상해(上海) 지명을 어원으로 유래한 단어가 새겨있다. 영어에서 shanghai는 선원으로 만들기 위해 마약 또는 술로 의식을 잃게 한 다음 배에 끌어들이다 유괴하다 어떤 일을 속여서 하게 하다 강제로 시키다 등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 이는 19세기 후반기에 외국인들이 행한 납치의 일종이다. 당시 중국 많은 연해 항구는 제국주의 열강에 의하여 강압적으로 개방하게 된다. 이런 개항항구에서는 화물선의 선원을 구하기가 어려워서 남자들을 술에 취하게 한 뒤 배에 태워 출항시켜 버렸던 것이다. 배가 출항하고 나면 배에서 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중국인 선원들은 망망한 바다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차츰 동남아지역과 조선 일본 등지로 탈출하여 정착생활을 하면서 크고 작은 차이나타운을 이루게 된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중국 근대화의 물결이 들이닥치면서 산동반도 수많은 이재민들이 바다를 건너 만주와 해외에로 이주하게 된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러시아 연해주에 까지 진출하여 울라지보스또크 등지에서 장사를 벌인다. 그러다가 볼쉐비키혁명 전후로 러시아 백계 귀족들과 부르죠아들이 밀려나게 되자 훈춘 등지로 들어와 가격이 폭락한 루불로 바깥세상에 눈이 어두운 토호들에게 넘겨 금을 사들이고 토지를 매각한다. 당시 훈춘 국자개 등 시가지 많은 상품 점포 명칭들에는 이들 산동전통문화 냄새가 짙게 풍겨났다. 지난세기 80년대와 90년대에 개혁개방 붐을 타고 연변사람들은 샤하이(下海)하게 된다. 드넓게 열린 세계와 만나기 위해 원양화물선에 오른 젊은이들은 목숨 걸고 바다에 나가 달러를 벌어왔고 문화대혁명의 암흑기를 거쳐 나온 사람들은 빈곤 탈출을 꿈꾸며 로무송출 해외친척방문 국제결혼 등 험난한 암초와 거센 풍랑이 이는 인생항로에 올라섰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외국나들이 비자 문이 열리게 되자 기업부진과 구조조정으로 샤깡(下崗)하게 된 도시 중년 세대주들 거기에 농촌 농민들도 가세하여 분분히 밭을 양도하고 집을 팔아버리고 외국으로 떠나는 질풍노도에 휘말러 들어가 험한 가시밭길에 발을 들여놓는다. 개혁개방 30년이라는 세월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자그마한 연길 공항은 끊임없이 확장되어가고 중국 남방항공 대한한공 아세아나 항공이 쉼 없이 오가며 하늘 길을 열고 화려하게 단장한 연길 도시모습과 정통의 맛을 쏟아내는 음식가게들은 연변민속풍경을 구경하러 고속철을 타고 오는 유람객들을 반긴다. 하지만 이러한 밝은 빛 뒤 면에는 취업사기 덫에 걸려 재산을 날리거나 빚더미에 앉아 가정파탄 감옥행 등 참혹한 비극을 낳은 어두운 그림자가 감추어져 있다. 실로 엄청난 숫자의 중국조선족들이 국내외사기군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끔직한 재앙을 겪어야만 했었다. 지금의 연변은 한세대의 뼈아픈 교훈과 슬픈 사연을 딛고 일어선 것이다. 오늘날에 와서도 20년 30년 넘도록 타향생활을 하고 있는 50대 60대의 수많은 조선족 중년세대들이 건설현장 인부, 음식점 도우미, 가사 도우미로 온갖 설움을 견뎌내며 악착같이 일해 차곡차곡 돈을 모아 이국땅에서 굳건히 버티고 있다. 쪽박 차고 두만강을 건너온 옛 선인들에게 재산이라고는 괴나리봇짐뿐이었던 과거, 해방이 되어도 땅과 소 그리고 곡물이 어느 정도 있었지만 오랜 세월동안 집체화시기 단순노동에 매달려 보수를 받아 왔던 사람들은 올바른 자본투자 길에 들어서지 못하고 방황하는 우리사회 아픈 문제들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상하이 상하이 트위스트 추면서 나팔바지에 빵집을 누비던 80년대90년대 한국 젊은이들의 거리는 오늘날에 와서 조선족 밀접지역으로 바뀌고 연길 냉면 화룡 온면 훈춘 꼬치 간판들이 즐비하게 서고 조선족 특유의 억양이 물씬 풍겨 나오지만 자아동질성을 잃어가며 경제문화공동체 의식은 희미해진다. 서로 다른 욕망에 따라 움직이며 얽히고설키며 때로 원치 않는 인생길에 들어선다. 오늘날 상해는 중국 개혁개방의 아이콘으로 중국 경제중심지로 부상했다. 그 옛날 수천수만 쿠리들의 비극적인 운명을 딛고 일어선 동방명주를 비롯한 초고층 빌딩은 치욕스런 과거사를 떨쳐내고 있다. 중국 조선 러시아 황금삼각 지대에 자리 잡은 연변은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담겨있는 곳이다. 20세기 초 중국전통 점포가 즐비하게 늘어선 속을 비집고 조선족 보따리 장사꾼들이 들어섰다. 홀몸으로 연변을 들어왔던 한족들과 달리 온 가족을 거느리고 들어선 조선인들은 보따리 장사로부터 시작하여 엿방 두부집 국수집을 차려가면서 차츰 연길서시장같은 건물을 일떠세웠다. 80년대 90년대에 불어 닥친 거센 회오리바람에 연변조선족공동체 흔들림으로 보이스피싱 토막살인 연변거지와 같은 어두운 그림자가 중국조선족 이미지에 따라 붙었다. 오늘날 시대는 이미 변화의 바람을 타고오고 있으며 큰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에서 벗어나 미래 연변 조선족 이미지에 어떤 수식어가 붙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핵심변수는 우리세대의 몫에 달려있으며 우리세대가 묵묵히 짊어지고 가야할 무거운 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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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19
  • [허성운 칼럼] 호천개와 국자개
    돌문을 열고 들어가면 살구꽃 잎이 보슬비처럼 흩날리는 살구평 마을이 보인다. 그 건너편에 그 옛날 화전 불길처럼 천지꽃이 붉게 피어나는 산 언저리에 아스라하게 떠오르는 추억같이 옛 이야기를 품고 있는 동네가 자리하여 있었다. 멀리 상소 늪데기에서 흘러내리는 냇물 끼고 마을이 앉았다고 하여 늪 호자 냇물 천자를 붙여 호천개(湖川街)라고 불리어 졌다고 전해 내려온다. 19세기 80년대부터 조선과 접경지에 위치한 이곳에 청은 선후하여 초간국 무간국을 설치하면서 이주한 조선인 수가 배로 늘어난다. 관에서 발급되는 땅문서는 호천개에만 구할 수가 있었던 금계랍(金鷄蠟) 명약만큼 귀하였다. 커다란 봇짐을 지고 장터를 오가며 펼쳤던 베천지락은 꼬리를 길게 무는 행렬에 묻히고 쾌관(식당)의 시라지 장국 그릇엔 고단한 삶의 거친 숨소리가 땀과 눈물로 얼룩지고 섞여 시끌벅적한 역사를 만들어 갔다. 허나 사람이 사는 집이 세월이 지나면 무너지고 자취를 감추듯 오랜 시간의 퇴적은 땅과 하늘을 바꾸어 놓았다. 광서 25년(1899년) 훈춘부도통아문에서는 공문을 보내 호천개에 있는 장터를 국자개(局子街)로 이전하여 옮긴다. 그 후 20세기 20년대에 철길이 부설되고 거살이역(간이역)이 생기면서 회경개(怀庆街)란 이름을 바꾸면서 호천개 지명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국자개는 광서년간에 남강초간국을 설치하면서 이름이 붙여진다. 여기에서 국자개는 관청 사무를 보는 곳을 말하는데 최초에는 토지문서를 취급했던 관가가 자리한 장소를 뜻하였다. 오늘날에 와서 국자개를 국자가 혹은 국자거리라고 부르고 남북으로 길게 뻗은 거리에 초점을 두지만 사실 국자개는 옛 관가가 있었던 곳과 그 둘레를 뜻한다. 한자 街의 표준음은 jie로 발음되나 중국 허다한 방언에서는gai 로 읽는다. 특히 중국 동북지방에서 上街는 shang gai로 말하는데 여기에서 길에 나선다는 뜻보다 장터 백화점이나 상점을 구경하고 돌아다니며 물건을 사는 의미가 담겨있다. 함경도 방언에는 구렁깨(구렁물 자리한 곳) 사무깨 (샘물 나는 곳)절당깨 (절이 있는 곳) 땅낭껄(당나무가 있는 곳 ) 이라는 사투리가 있는데 여기에서 깨 혹은 껄은 거리라는 의미보다 한 지점의 둘레를 아우르는 장소의 의미에 그 초점이 맞추어 지고 있다. 국자개는 최초에 부르하퉁하와 연집강 합수목에 자리한 작은 고장이었지만 호천개 장터가 옮겨오면서 갖가지 상품과 농산품이 집중되고 장 보러 오는 사람들로 차츰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호천개와 국자개 지명은 호적 토지문서 장터로 써진 땅이름만이 아니다. 1880-90년대 폭력이 난무하는 혹독한 세월 속에 힘없이 사는 백성들은 토지문서를 가진 땅임자의 지울군(노비)으로 지팡살이군으로 살다가 빚으로 처자를 팔아가며 혈혈단신 떠돌다 황야에 주검으로 내몰리는 한 많은 삶이 호천개 국자개 땅 곳곳에 묻혀있다. 재난과 가난이 먹장구름처럼 드리워 캄캄했던 밤길에 가진 것 하나 없이 빈주먹으로 꿈 하나를 보따리에 넣고 별빛처럼 깜빡이는 삶의 섬광(閃光)을 따라 두만강을 넘어 연변 땅으로 퍼져 들어와 피와 땀과 눈물로 투박한 함경도 사람들의 그 특유의 끈질긴 노력으로 메마른 땅을 기름진 옥토로 가꾸어왔다. 오늘날 다시 되돌아보면 그때 선인들이 진창 같은 과거를 딛고 최악의 실패를 박차고 다시 일어섰던 기점이 바로 호천개와 국자개 땅이름이 불리어졌던 그 암흑기다. 호천개와 국자개 땅 이름은 우리 역사에 있어서 더는 이방인이 만든 낮선 외래어가 아니다. 오늘날을 사는 우리가 미래로 안고 가야 할 하나의 귀중한 지명문화유산이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9-11-04
  • [허성운 칼럼] 역섬과 간도
    연변의 오랜 마을들에는 역섬집이란 택호가 이례적으로 많이 분포되어 있다. 역섬집 택호의 자취를 따라 추적해 보면 지금의 개산툰 지역으로 좁혀진다. 함경도 방언에는 역새리라는 사투리가 있는데 강기슭이나 우물옆자리와 같이 가장자리 변두리의 의미를 지닌 말로서 역섬 땅이름은 역새리 방언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최초에는 조선 종성 두만강 대안 고섬 일대를 지칭하는 지명으로 쓰이다가 차츰 그 의미가 확대되어 나중에 개산툰 일대를 아우르는 땅이름으로 씌었다. 오늘날에 와서 일본인들의 손때가 묻은 간도 사잇섬 명칭은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히 알려져 있지만 정작 우리 역사가 깊숙이 배어있는 역섬이라는 옛 땅이름은 잊혀지어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과거에 종성을 기점으로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쌍둥이처럼 양안의 허다한 지명은 서로 닮아 있었다. 종성의 금산(禁山)과 덕신향 큰산(金山 )지명 ,종성 늪데기(함지산)와 회경 막치기 늪데기 지명, 종성 국시고개와 덕신향 상국시 석정향 중국시 월청향 하국시 지명, 종성 상상봉 형제바위와 덕신향 형제봉 지명은 모두 두만강을 끼고 쌍둥이처럼 나란히 놓여 있다. 그 옛날 두만강은 구불구불 흘렸다. 지배굽이로부터 노째굽이 이르기까지 복새섬이 길게 드러누워 있고 크고 작은 늪이 그 옆에 번갈아 나타난다. 그 가운데 가매도래라는 깊은 소 남쪽에 고섬 마을이 자리하여 있었다. 오랜 옛적부터 토굴을 파고 고섬을 일궈낸 선인들은 지독한 추위와 굶주림에 버텨 살아왔고 지난세기 40년대까지만 해도 호총이 50여 호가 냇물을 끼고 옹기종기 들어 앉아 있었다. 종성과 개산툰을 잇는 길목에 놓인 이곳 수많은 사연을 품어왔던 마을이 지난세기 5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 천평벌과 선구촌으로 이주하면서 그 흔적이 차츰 사라지고 어느덧 옛 지명도 망각한지 오래다. 본디 역섬과 고섬 이름은 그 땅 생김새나 성격을 바탕으로 생겨나 오래 동안 우리 선인들이 써왔던 땅이름들이다. 그런데 불과 70년도 안 되는 사이에 한자어에 잠식되어 허다한 고유지명은 어두운 그늘에 가려져 있다. 재비탄은 선구로 지배굽이는 개산툰으로 애끼골은 제동으로 사무구팡이는 천평으로 역섬은 간도로 바뀌어졌고 소재데기 오사익트리 국시장거리 붉은재굽이 쌀고방 노째굽이와 같은 고유지명들은 이제 더 이상 찾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역섬 일대 마을들도 하나 둘 사라진지 오래다. 선구산성 북쪽 명당미 마을 남장골 북장골 돌볏마을 대산 가둑섬 등 수많은 마을들이 뿔뿔이 흩어져 사라졌다. 그 옛날 이 세상을 살다간 역섬 사람들이 죽어 묻힌 뼛가루는 저 먼지 이는 두만강 허허벌판 모래톱으로 쌓아있다. 물길 따라 비스듬히 고개 숙인 갈대들이 듬성듬성 서있는 길을 무심히 걷노라면 모래톱 모래 알갱이들은 선인들의 해골에서 나온 유골 뼛가루처럼 느껴지어 발걸음은 더욱 무거워진다. 굽이굽이 세상 풍파 속에서도 오랜 세월을 버텨온 땅이름이 고향을 떠나 고향을 그리워하며 타향에서 사는 후손들의 안타까운 삶에서 이어지는 현실이 애처롭다. 하지만 이제 목숨 걸고 국경을 박차고 나온 선인들의 탈출 이야기는 끝났다. 토지라는 칸막이로 경계선 안에 갇혀 살아왔던 농경 정착시대는 기술이라는 칸막이를 차지하고 사는 기술정착시대 자본이라는 칸막이를 차지하고 사는 자본 정착시대로 이어진다. 정착의 고정된 칸막이는 무너지고 바람 속을 고향으로 삼는 세계화시대로 접어든다. 진정한 고향은 거대 자본과 곁 모양을 화려하게 치장한 건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 오랜 시간을 두고 선인들의 역사가 차분히 쌓여지어 있는 마음속 깊이에 살아 있는 고향 본연의 모습이다. 먼 훗날 세월이 흐르고 우리 육체가 하나하나 쓰러지어 버려져도 운명에 굴하지 않고 국경을 박차고 나와 삶의 보금자리를 마련했던 땅 이름 역섬은 숨 쉬며 일어나 드넓은 세상 속으로 당당하게 걸어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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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0-31
  • 백의선녀의 전설
    ▲선녀봉에 세워진 백의녀 백옥상 [동포투데이] 멀고 먼 옛날 길림성 왕청 만대성(满台城) 선녀봉 아래는 해마다 봄이면 하늘에서 아름다운 8선녀들이 내려 활짝 핀 진달래를 감상하였다. 무더운 여름이면 선녀들이 경상적으로 천성호 강가, 호숫가에서 목욕하였다고 한다. 그들의 복장은 너무도 환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오색영롱하였는데 오직 제일 작은 8선녀가 언제나 하얀 옷을 입어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고 한다. 8선녀는 비록 키는 크지 않지만 인물은 예쁘고 춤 잘 추고 노래를 잘 불러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백의녀가 하얀 치마저고리를 입는데는 백색이 존경과 미래에 대한 아름다운 생활을 갈망하고 순결하고 근로함을 상징한다고 사람들은 “백의 선녀” 고 불렀다고 한다. 어느 해 봄, 백의녀와 일곱 언니는 함께 무지개를 타고 만대성의 봄 경치를 감상하였다고 한다. 기나긴 겨울이 지나고 오직 천궁에서만 생활하던 선녀들은 풍경이 수려하고 청산녹수인 만대성에 도취 되었다. 언니들과 달리 백의녀는 울긋불긋 피어난 진달래꽃에 미련을 두고 오래도록 떠나지 않았다. 갑자기 그는 무럭무럭 자란 진달래꽃들이 물이 없어 말라 죽게 된 것을 발견했다. 꽃을 생명처럼 여기는 백의녀는 급히 호숫가로 달려가 물을 치마폭에 퍼 담고 산으로 돌아와 진달래꽃에 물을 주었다. 희귀한 일이 발생하였다. 물을 준 진달래꽃들이 순간 아름답게 피어났다. 흥분된 백의녀는 신이 나서 물을 주기 시작했다. 옥황제는 선녀들이 보이지 않자 풍왕과 우왕에게 명령해 번개와 벼락을 보내 신속히 돌아오라고 하였다. 하늘을 진감하는 우뢰소리에 놀란 7선녀는 감히 거역하지 못하고 천궁으로 돌아갔다. 7선녀는 돌아왔지만 백의녀가 돌아오지 않은 것을 알게 된 옥황제는 풍왕과 우왕에게 명령해 또 번개와 벼락을 보냈다. 마침 마지막 한그루의 진달래꽃에 물을 주고 있었다. 벼락을 맞은 백의녀는 큰 바윗돌로 변해버렸다. 이때로부터 돌로 변해버린 백의녀는 풍경이 아름다운 만대성 선녀봉에 우뚝 솟아 밤과 낮이 따로 없이 이곳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 지난 세기 90년대 왕청주민들은 선녀봉 제일 높은 곳에 높이가 18미터,무게가 520여 톤에 달하는 백의녀 백옥상을 세워 아름답고 선량하고 근로 용감하고 생명보다 꽃을 사랑하는 백의 선녀를 기념하고 있다.(이강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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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0-30
  • [허성운 칼럼] 비양데기와 비암산
    용정시 비암산 지명을 두고 푸른 정기가 도는 바위가 많아 한자 푸른 벽(碧)자와 바위 암(岩)자를 붙이어 비암산(碧岩山)이라고 한다는 설 산형태가 피파琵琶처럼 생겼다고 하여 비암산琵岩山으로 불렸다는 설 콧등처럼 산세가 볼록 튀어나와 코(鼻)자를 넣어 비암산(鼻岩山)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등 여러 가지 지명설이 있다. 함경도 방언에는 험하고 가파른 언덕 벼랑을 뜻하여 비양이라는 말이 있다. 일제강점기 해란강에 다리를 놓고 해망동과 엄씨마을 (화룡 비암촌)을 거쳐 비암산 굽이를 휘돌아 소철이 부설되어 있었다. 해망동과 엄씨네 동네는 비암산 벼랑 쪽에 바짝 붙어 형성된 취락구조를 가진 마을들로서 예로부터 이 지역 사람들은 비암산을 비양데기라고 불러왔다. 하지만 비비양데기 지명은 오랫동안 한자어 표기에 밀려서 세월의 비바람에 이끼가 끼고 마모되어 오늘날에 와서는 판독하기조차 어려워지게 되었다 용정시비암산문화관광풍경구는 용정과 연변의 문화를 보여주는 창구이다. 비암산 지명이 새겨져 있는 커다란 바위 돌들이 수많은 인파가 모여드는 유람구 곳곳에 세워져 있다. 오늘도 이런 바위 앞에서 여러 지명풀이 버전이 난무하여 떠도는 것을 보면 우리 문화의 부끄러운 민낯을 들여다보게 된다. 관광개발의 핵심가치는 경제와 문화가 나란히 부흥하는 것이다. 넓은 산판에 화려한 꽃밭이 펼쳐져 있고 올려다보는 협곡에 걸린 유리 다리의 풍경도 근사하다. 이런 물질적 풍요와 현대감각을 자랑하는 시설과 달리 우리가 차려 올린 문화의 잔칫상은 초라하다. 아직도 연변의 적지 않은 풍경구에서 시설들은 단순한 경제적 이윤 추구의 수단으로 활용되는 경향을 보면 조선족 민속 문화를 발전시킨다고 내세운 강령이 무색해진다. 날이 갈수록 자의 반 타의 반 연변을 떠나 타향에서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러한 탈고향 과정은 삶의 공간으로서 고향만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 유대관계 공동체 의식 자아 동질성을 잃어가고 있다. 화려하든 초라하든 평강벌과 세전벌에 살아왔던 사람들에게 있어서 비양데기는 세속적으로 가난하지만, 자연과 정서적으로는 가슴 벅차게 다가오는 곳이다. 비양데기 옛길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흐르던 고갯길이다. 높이 솟은 비암산으로 구불구불 뻗은 장대길, 산 중턱을 감도는 아침 안개, 평강벌에 도란거리며 흐르는 논 도랑물, 소낙비 그친 뒤 저녁 노을 붉게 타는 들녘을 날아다니는 잠자리, 그리고 감자밭 옆 아버지 곁에 묻힌 어머니 묘 우리에게 비양데기에 오른다는 것은 단순한 시간과 장소를 넘어서 영원한 세계에로 들어서는 것이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고 시작되는 노래로 사람들에게 알려졌지만 비암산은 그 구석구석을 파헤쳐보면 함경도 사투리 비양데기라는 땅 이름이 스며들어 있고 선인들의 그 투박하고 웅글진 억양이 짙게 배 메아리처럼 다시 귓전에 울려 나오는 곳이다. 오늘날에 와서 비양데기에 가득 쌓아놓은 선인들이 이야기들이 우리 후손들 기억 속엔 과연 얼마나 저장되어 있을까…. 잘못된 지명풀이를 바로잡지 않으면 혼란을 초래하여 우리 문화는 영원히 부평초처럼 이리저리 떠돌 수밖에 없다. 오랜 세월을 두고 평강벌과 세전벌을 묵묵히 일궈왔던 선인들의 진실 된 역사와 마주 앉아 그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흩어진 이들 삶을 하나하나 반추하여 비암산 땅이름에 또박또박 적는다는 것은 단순히 지명 하나를 올바르게 쓴다는 의미를 넘어 선인들의 따스한 감성을 영원히 마음속 깊이에 새겨 넣어 우리 몸과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고 우리 삶에서 생명력과 치유력을 지니게 하는 일이다. 혹독한 세상과 맞서 싸워온 선인들의 삶을 정직하게 담고 있을 때 비로소 비암산 지명은 전설이 될 수 있고 또 세월 강을 건너 오래오래 전승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이 정신없이 변하는 통에 우리는 갑자기 많은 것을 얻었고 또 많은 것을 잃어가고 있다. 비양데기라는 땅 이름은 연길시 해란강 골프장 옛 계림촌 마을과 용신 대신촌에도 있었다. 이런 지명은 조선족 마을 취락이 자리하고 있었던 표징인데 이런 지명이 사라지면 문화가 사라지고 문화가 사라지면 역사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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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0-10
  • [허성운 칼럼] 샘치물과 구렁물
    《중국고금지명사전》(中国古今地名辞典) 기록에 의하면 두만강 명칭은 만주어 tumen sekiyen 한자로 图们色禽에서 유래 되었다고 적고 있다. 만주어 tumen sekiyen는 만 갈래 물줄기라는 뜻으로 해석되는데 이를 우리말로 즈믄 (천 혹은 많다의 고어) 삼치(함경도 방언 샘물)라고 풀이 하면 조금도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다. 수많은 샘물이 두만강 량안에 널려 있는 까닭으로 그 이름이 붙여 진 것이다. 두만강 량안에는 말 그대로 샘물들이 하늘의 별처럼 모여 있어 한 겨울에도 많은 구간이 완전히 얼어붙지 않는다. 샘물 따라 물안개 보얗게 피는 곳엔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줄지어 들어 앉아 마을 지명들도 약수동 옥천동과 같은 땅이름들이 다양하게 붙이여 졌다. 그 가운데 두만강 가에 자리 잡은 개산툰 광소촌과 광종촌에는 야트막한 산들이 마치 이불처럼 포근하게 마을 둘레를 덮으며 동네를 감도는 산자락에 샘 줄기가 군데군데 자리해 있어 사시장철 마르지도 않고 흘러나왔다. 최초에는 사무구팡이 사무깨 샘물둥지로 불리어지다가 차츰 상천평 중천평 하천평이라는 지명으로 굳어진다. 천평벌은 말 그대로 샘물이 주물러 자연 그대로 만들어 놓은 동네다. 1945년 쏘련군이 개산툰공장 기계부품을 뜯어 간 후 백성들은 하나둘 물대(펌프대)를 얻어 집집마다 수동식 물펌프를 설치하기 시작하였다. 룡정시 지신진 이천마을은 본래 샘치물골 샘물둥지로 알려진 동네이다. 아이들 주먹만큼 큰 샘치물이 대여섯 곳에서 퐁퐁 솟구쳐 올라와 불리어진 이름이다. 샘물은 마을 복판으로 흐르는데 돌로 샘물 주위를 쌓고 첫 어귀는 음료수를 퍼가는 곳으로 지정하고 그 아래는 집집마다 짠지 그릇과 김치를 담은 단지들이 두 줄로 빼곡히 들어차 있었고 맨 아래 쪽은 세수도 하고 목욕도 하는 구간으로 나뉘어 활용하였다. 이천(伊泉)은 이즈미(일본어 샘물)를 음역하여 한자로 표기한 지명이다. 오늘날 룡두레 우물에서 기원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룡정 이름도 사실은 유구한 세월과 더불어 다양한 언어적 변천을 동반하여 붙어진 지명이다. 룡정 지명은 최초에 함경도 방언 구렁물에서 기원된 땅이름이다. 19세기 60년대 한 날농군이 부싯돌을 찾으려다가 우연히 발견한 우물로 전해지고 그 후 20세기 문턱에 들어서서 부근에 교회당이 선후 비로소 우물에 룡두레를 설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금의 룡정 시가지는 일찍 많은 고성 고분 유적들이 산재하여 있었다. 그 가운데 수남고분은 륙도하 남안에 널려있었는데 지난세기 20년대 소철을 놓고 강둑을 쌓으면서 파괴되기 시작하였다. 수남고분 분묘구조는 석루로 한 석실이 있고 외부는 수많은 거석으로 덮고 다시 흙을 쌓아 올려서 커다란 산 모양을 이루어졌는데 이주초기 백성들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북쪽 지금의 룡정 기차역 부근과 서쪽 동흥촌 남쪽 토성포에는 흙과 돌로 기초를 다지고 그 위를 점토로 덮은 허물어진 고성들이 산재하여 있었는데 최초에 이주민들의 주거지로 사용되었다. 이런 고성 안에는 깊이 파인 구렁물들이 여러 개 널려있었는데 사람들은 이런 곳을 구렁물깨라고 불러 왔다. 구렁물깨는 룡정 도시성곽제도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함경도 방언 구렁물과 동음어 낱말인 구렁이라는 말을 살펴보면 이에 대한 추론을 뒷받침하여 주고 있다. 옛 선인들은 구렁물에는 물고기가 살고 그 물고기는 천년이 지나면 구렁이가 되고 또 천년이 지나 뢰성벽력 치는 날 밤에 룡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고 전해 왔다. 과거에 연변의 집집마다의 물독에는 거개가 물고기가 두세 마리씩 그려지어 있었는데 이런 전설에서 유래 된 것으로 보아야 정확하다. 그 옛날 도자기 생산지로 유명한 토성포에서 나서 자란 한락연은 키질불교미술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다. 상해 미술학원에 입학하여 그림을 배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사실은 어린 시절 고향에서 날마다 보아왔던 물독에 그린 수많은 물고기 선들이 그의 마음속에 파고들어 어른이 된 후 작품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것이다. 그리고 함경도 물동이 춤에서 물동이를 이고 돌고 도는 동작은 그 옛날 춘하추동 매일같이 물을 길던 어머니들이 고단한 삶에서 벗어나 마치 선녀가 룡을 타고 하늘로 오르는 그들의 황홀한 꿈을 펼치어 보인 것이다. 룡정 주위 지명들 이를 테면 룡지 룡원 구룡 등은 모두 구렁물과 관련되어 있다. 구렁이의 전설과 더불어 구렁물은 오랜 세월동안 언어 변천을 거쳐 오늘날 와서는 차츰 한자 룡(龍)자 지명 안에 숨어 쓰이게 되었다. 어찌 보면 오늘날 룡정 지명은 구렁물 속에서 건져 올려낸 샘물과도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구렁물 안에서 영롱한 뭇별 빛깔로 반짝이던 샘물이 두레박에 의하여 세상 밖으로 건져 올리면 출렁이던 물결무늬가 사라지고 오늘날처럼 하나의 메마른 력사로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이제는 축축한 냄새가 나는 밧줄도 두레박도 없는 기념비만 남은 우물에는 우리 선인들이 써왔던 구렁물이 아닌 룡두레란 우물 이름 안에 모든 력사가 꽁꽁 숨어 갇혀 있다. 인간이 종내 무덤 속의 흰 뼈로 남듯. 룡정 구렁물에 진실한 무늬를 입혀야 할 몫은 이제 미래세대와 긴 시간의 흐름일 뿐일 것이다. 사람들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말을 모어라 한다. 옛날에는 전쟁과 식민화로 많이 사라졌지만 요즘은 인구의 이동 때문에 스스로 모어가 사라지고 있다. 일제식민지 시절 우리말을 지키려고 발버둥을 쳤듯이 이제는 자기 모어를 지키는 것도 세계화된 시대에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과제이다. 우리의 모어로 된 지명도 사라진 룡정 고성과 고분처럼 죽은 언어의 공동묘지가 되지 않도록 더 많은 노력을 기울려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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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26
  • [허성운 칼럼] 지배와 자동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윤동주 집안이 1886년 종성군 동풍면 상장포에서 북간도의 자동紫洞 현재의 자동子洞으로 이주하였다는 설법을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이 견해는 자동紫洞과 자동子洞을 동일한 지명으로 착각한 그릇된 주장이다. 사실 자동紫洞은 지배굽이 현재 개산툰을 말하고 자동子洞은 자동골을 말하는 것으로서 서로 다른 지리적 공간을 뜻한다. 오랜 옛적부터 개산툰 기차역으로부터 종이공장일대에 이르는 산굽이를 따라 바위너덜이 수직절벽을 이루며 병풍처럼 둘러서있었다. 초라한 땅막집과 농막집들이 띄엄띄엄 들어앉았고 북으로 앞 물학성(지금은 폐촌)과 뒤 물학성 사이에 국시당 언덕이 자리하고 봄이 오면 과일 꽃들이 구름처럼 만발하였다. 옛 선인들은 일찍 이 일대를 지배 혹은 지배굽이라고 불러왔다. 오늘날에 와서 지배굽이라는 땅이름은 역사 뒤안길에 사라진 죽은 지명으로 되어 있지만 먼지가 두텁게 쌓인 문헌자료에서 확실한 증거를 끄집어 낼 수 있는 귀중한 단서를 제공한다. 『계림유사』에는 紫曰質背이라는 글이 적혀있는데 자색을 뜻하는 옛 사람들의 말은 지배質背였다는 것이다. 지배 소리와 근접한 제비는 중국 고서에서 紫燕으로 적혀있고 제비꽃은 그 빛깔이 자주색과 보라색으로 피어난다. 지배굽이 바위들을 유심히 관찰하여 보면 특유의 붉은 자색 빛깔이 눈에 띤다. 먼 옛날부터 차곡차곡 쌓이고 깎이고를 반복한 자색바위마다에는 파란만장한 선인들의 골곡 진 삶이 묻어나 그 부스러기마저 신비의 징표로 느껴진다. 두만강 유역에는 안주인을 부르는 호칭으로 호세미라는 낱말이 오래 동안 사용되어 왔다. 호세미는 여자 집주인을 높이 이르는 말로 알려지고 있으나 원래는 점쟁이 무당 비구니를 말한다. 골짜기마다 삼밭과 뽕나무가 자라고 집집마다 베틀로 베와 명주를 짜는 소리가 들려왔던 두만강 유역에서 호세미들의 발놀림, 손놀림에 쿵터덕 쿵, 척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베틀에서 나오는 명주천은 흔히 보라색 물감으로 염색한다. 이들이 오래전부터 자색 옷을 선호하게 된 것은 두만강 유역 재가승들이 승려를 존귀한 존재로 여기고 자색 옷을 입으면서 유래된다. 민간에서도 여자들의 저고리 자색 옷고름과 동정. 자색 댕기, 이불깃과 베개의 붉은 자색 헝겊, 손발톱에 물들이는 봉선화 보라색 빛깔 등은 모두 불교에서 말하는 축귀와 벽사의 의미가 담겨있다. 화학염료가 등장하기 이전에 오랜 역사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우리선인들은 풀뿌리로 재가승들은 진주조개로 염색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인근 사찰과 놀랄 정도로 한데 뒤얽혀 있는 지배굽이 지명은 불교적 색채가 짙게 깔려있다. ”자주고름 입에 물고 이별가를 불러주던 못 잊은 사람아“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하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찔레꽃’노래는 오늘날에 와서 2절까지만 불리지만 원래는 3절까지 있었다. “연분홍 봄바람이 돌아드는 북간도 아름다운 찔레꽃이 피었습니다 꾀꼬리는 중천에서 슬피 울고 호랑나비 춤을 춘다 그리운 고향아.” 연변과 함경도에서는 노루를 놀가지라고 부르듯이 찔레꽃을 찔구배꽃이라 말한다. 노래 작사가가 황해도 신천군 태생임을 감안하고 우에 가사에서 꾀꼬리는 예조리(노질이)로 바꾸어 음미하여 보면 “찔레꽃”노래는 그 옛날 알구배꽃 천지꽃 백살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연분홍 봄 물결이 흘려들던 지배바위와 비슷한 두만강연안의 풍경을 펼쳐 보여주고 있음은 분명하다. 세월의 무게가 두텁게 쌓이고 쌓인 지배바위굽이에서 우리 선인들의 이민사가 힘겹게 걸어 나왔다. 아무리 위대한 역사도 그 역사를 지킬 능력과 의지가 있는 후손이 있어야 만이 가능한 일이다. 그릇된 역사에 끌려가다 보면 우리 역사는 결국 빈껍데기만 남게 될 것이다. 오늘도 훼손 방치되어 빛을 보지 못하는 이주역사의 일번지 지배바위굽이는 잡초만 무성한 채 내버려져 있어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 한켠이 아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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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6-15
  • [허성운 칼럼] 피밭골과 비파골
    연변지명에는 연변역사의 굴곡이 화석처럼 새겨져 있다. 돈화시 흑석향 경독耕讀촌 지명은 최초에는 함경도 포수들이 이곳에 들어와 무더기로 피낟이 자라는 것을 보고 피밭굽이라 불러 온데서 기원된다. 그 후 일본인과 경상도 상주, 강원도 여러 지역에서 이주민들이 들어오면서 마을이름이 비파琵琶목으로 붙여졌다가 교토京都라는 지명으로 굳어진다. 일본 옛 도시 교토京都와 일본의 오랜 불교사찰들이 밀집하여 있는 비와호琵琶湖 이름으로 명명하여 의도적으로 땅이름을 왜곡하였다. 그 시기 흑석향 지역의 지명을 살펴보면 나라촌奈良 하가산촌和歌山 시가촌志賀 미에촌三重 등 일본 긴키지방 지명들을 판박이로 옮겨와 이식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삶의 터전을 빼앗긴 함경도 포수들은 그때로부터 일본군과 저항하여 싸우기 시작했으며 1945년 가을 목단령 고개길 다리목에서 일본군 소분대를 전멸시킨다. 죽은 시체를 쌓아 무덤을 만들었는데 마치 작은 산처럼 솟아 있었다. 80년대 초에 들어와 감쪽같이 무덤이 사라지고 다시 평지로 바꿔졌다. 항일전쟁 끝난 후 이들 포수들은 마적과 손잡고 토비소굴에 들어가 비극적인 결말을 맺는다. 곡파가 쓴 “임해설원”의 토비무리에는 함경도 포수형상이 파편적으로 그려져 있는데 그 맥락은 이런 흐름에서 엿볼 수가 있다. 해방 후 교토京都촌은 경독촌耕讀으로 땅이름을 바꾸어 표기한다. 항일무장투쟁사에 한 획을 그은 봉오동전투에는 비파골琵琶溝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원래 이름은 피밭골로서 일본군이 의도적으로 혹은 착각하여 군용지도에 비파골로 표기하면서 오늘날까지도 국내 학자는 물론 국외 학자들도 비파골이란 그릇된 지명을 그대로 옮겨 쓰고 있다. 1945년 가을 일본군은 투항하였지만 피밭골 사람들은 그해 겨울에 가서야 광복소식을 소금장사한테서 듣고 알게 된다. 50년대 말 숱한 농촌 인력이 쇠물을 녹이는 일에 동원되어 농사가 흉작이 들었을 때 인근 마을 사람들이 피밭골로 몰려들어와 피낟을 뜯어 간적 있었다. 연길해란강골프장 자리는 원래 관청메 (일명 계림촌)라 불리던 마을 옛터이다. 겹겹이 산으로 에워싼 마을은 무릉도원처럼 남으로 해란강이 북파하여 흘러들어 오고 마을 앞으로 작은 냇물이 동네를 감돌며 해란강과 합류되어 비켜나가는 형국이다. 마을 뒤로는 야트막한 동산이 솟아있어 전형적인 금계포란형 풍수경관을 자랑하고 있었다. 거기에 역사적으로 오랜 세월동안 전개되어 온 마을 취락들. 그 위에 겹겹이 쌓이고 쌓여 이루어진 인문지리경관은 우리가 보존했어야 할 귀중한 문화유산이었으나 2000년 문턱에 들어와 골프장이 들어서면서 지금은 복원하기 힘든 곬으로 접어 들어가고 있다. 관청메에는 절당께 진사래밭 술기고래 닷돈고래 세가달물 사물깨 삼밭구석 부싯돌밭 매방재데기와 같이 선인들이 삶의 흔적이 깊숙이 슴배인 땅이름들이 널려있다. 그 가운데 큰 피밭골과 작은 피밭골은 이미 해란호에 그 입구가 잠겨버리면서 력사속으로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다. 피밭골 지명을 쫓아 선인들의 발자취를 조심스럽게 더듬어가노라면 피낟농사로부터 벼농사로 이어지는 이들의 운명적인 삶을 돌이켜 보게 되며 긴 세월동안 입을 다물어 버린 진실과 깊숙이 묻혀있는 역사와 우리가 넘어 가야할 장벽과 마주 서게 된다. 지난시기 우리는 눈앞의 경제리익에 매달리어 외래문화를 번역복제하기에 급급하다보니 정작 자기 전통문화유산을 깊이 있게 발굴하고 복원하는 일에는 눈을 돌리지 못하였다. 이는 결국 피밭골이 피파골로 왜곡되고 고유의 마을문화자원을 반듯하게 본존하지 못하고 그 설자리조차 잃어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로 이어지고 있다. 산천초목의 경관은 선인들의 발자취가 새기여 풍경의 한계를 뛰어넘고 대대손손 이어진 풍토는 천년세월을 버텨나간다. 선인들이 손발이 닳도록 황량한 황무지를 뚜지고 뚜지어 기름진 옥토로 바꾸어놓은 력사를 밝히는 일을 미루고 미루다 보면 우리는 영영 변화된 세상을 보지 못하고 피밭골과 같은 땅이름들을 서서히 잊힐 수가 있는 것이다. 늦게라도 과거를 위해 미래를 위해 그리고 지금을 위해 우리는 하루속히 고유한 전통문화 가치를 바로세우며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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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5-25
  • [허성운 칼럼] 오양간과 오랑캐 그리고 오랑캐령
    “옛말 잰말 닭똥 세말 오양간 문 삐꺽 소 음매” 어린 시절 말버릇처럼 입에 달고 다니며 외우던 말이 나이 들어서도 이따금 저도 몰래 입 밖으로 툭 튀여 나올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한겨울 외양간에서 하얀 입김을 쏟아내며 큰 눈망울을 이리저리 굴리던 둥굴소의 착한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떠오르곤 한다. 사전을 펼쳐보면 외양간은 표준어로 새기고 오양간은 방언으로 표기하고 있다. 외양간은 소에만 한정되지 않고 말이나 양을 기르는 거처를 뜻한다. 연변과 함경도 지방에서는 겨울철의 혹독한 추위로 정지간과 벽을 사이를 두고 집채 건물 안에 두었기에 외자가 아닌 오양간으로 부르는 것이 관습으로 되어있으나 다른 지방에서는 거개가 집과 거리를 둔 헛간이나 창고에 설치하여 밖을 뜻하는 외자를 달아 외양간으로 부르고 있다. 여진어에서 집짐승 가축을 뜻하는 의미로 ulha이란 단어가 있는데 그 음이 연변과 함경도 방언 오양간의 오양이란 소리와 대응된다. 비록 조선반도 전역에서 외양간방언분포양상이 다양하고 복잡하게 나타나지만 소 말 양 닭 등 가축을 기르는 의미에 초점을 맞추어보면 뜻과 소리가 유사한 언어 그물망에 얽혀있음을 알 수가 있다. 15세기로부터 17세기 두만강 유역의 역사를 훑어보면 오랑캐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여기에서 오랑캐라는 단어는 기존의 가축이란 의미 안으로 가축을 기르는 유목민이란 의미가 점진적으로 변화한다. 결국 오랑캐란 말은 이음을 한자로 옮겨 적은 단어로서 최초에는 한 부족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쓰이다가 차차 두만강 유역에 거처하면서 사실상 외적의 침략을 대신 막아주는 스펀지 역할을 해오던 부족들을 부르는 이름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들 오랑캐 무리는 사람의 얼굴은 하였으나 마음은 짐승과 같다고 일관되게 기술하고 있다. 오랜 세월을 두고 이와 같이 오랑캐를 짐승과 동급으로 취급하고 심지어 짐승보다 못한 야만인 미개인으로 낙인찍어 오다보니 민간설화에서는 오랑캐를 五囊犬라고 풀어가면서 사람 축에 못 드는 짐승으로 둔갑시켜 버린다.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체면을 세우려고 주변강대국에서 묶은 사책에는 모두가 야만인으로 취급하고 파편적인 기록으로만 남겨지어 오늘날에 와서도 이들의 역사는 올바른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오랑캐를 비웃고 철저히 외면하여 왔던 역사에는 우리와 그들이 섞임과 공존으로 인해 력사가 강물 되어 굽이굽이 흘러왔던 것이다. 우리와 가장 가까운 곁에 서서 서로 싸우기도 하고 함께 화평의 시대를 열어왔던 기나긴 세월동안 우리는 땅을 맞대고 있는 이들과 서로 말을 나누고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오랜 섞임과 공존 과정에 나름대로 독특한 방언권을 형성하였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두만강 유역에는 오랑캐령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오량캐령은 강대 세력들의 다툼으로 난리가 났을 때 우리선인들이 험난한 삶에 쫓기어 연변에로 진출하는 길목에 놓인 피눈물로 얼룩진 고갯길이다. 재난과 가난이 먹장구름처럼 드리워 캄캄했던 그 옛날에 소와 함께 오랑캐령을 넘어 연변 땅으로 퍼져 들어와 새와 조이 짚으로 이영을 하고 타래벽을 틀어가며 정주간 옆에 오양간을 짓고 입양아처럼 식구가 되어 들어온 소는 고단한 삶을 짊어지고 선인들과 함께 걸어온 동반자이다. 두만강 그 갈림길에서 말에 올라 칼과 보물을 걸머쥐었던 타민족들과는 달리 소고삐를 잡고 농기구와 씨앗을 움켜쥐었던 선인들의 그 뛰어난 통찰력은 그들이 조상으로부터 세세대대로 물려받은 농작물 재배기술을 지녔기에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산간지대에 위치한 연변에서 소를 이용하여 가대기로 찌갈이 하고 후치로 홰지를 하는 정교한 밭농사 재배기술을 개량하여 연변 땅에 소중한 농경문화의 유산을 남겨놓았다. 오양간이란 방언을 따라가다 보면 참으로 긴 역사의 흐름을 되돌아보게 된다. 가축과 유목민을 뜻하던 오양간 단어가 짐승과 야만인을 뜻하는 오랑캐라는 단어로 마치 올챙이가 개구리로 되는 과정에 점차 다리가 생기고 꼬리가 사라지는 것처럼 굴곡적인 언어변화를 거쳐 왔다. 외양간과 오랑캐란 두 단어는 얼핏 보면 의미적 거리가 먼 어휘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오양간이란 방언에서 귀한 실마리를 찾아 가까운 이웃관계에 얽혀있는 단어임을 알 수가 있다. 이처럼 방언은 죽은 송장이 되어 세월의 이끼가 끼고 마모되어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미이라가 되어 선인들의 영혼의 아우라가 되어 오랜 과거와 아득한 미래를 이어주는 긴 시간 축 속에 그 신비한 빛을 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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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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