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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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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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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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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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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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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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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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의 살아있는 증인, 조선족 항일투사 - 이재덕②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이(리)재덕(李在德)- 동북항일연군 내의 조선족 여투사이자 국제주의 전사였으며 살아 있은 역사의 증인이다. 그리고 조선인으로부터 중국조선족으로 탈바꿈하게 된 특수시대가 낳은 여성강자이기도 하다. <8.15> 참안으로 중공 탕원 현위는 엄중하게 파괴되었으나 혁명가들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생존해있던 하운걸(夏云杰), 장인추(张仁秋) 등 혁명투사들은 항일유격대를 재건할 중임을 떠메고는 활발하게 움직이었다. 1934년 2월 13일, 하운걸 등은 칠호툰에 있는 당원과 공청단원들과 함께 김치움에서 은밀하게 전투계획을 연구, 그 날 밤으로 학강 동쪽의 황화강(黄花岗)에 있는 공씨 성을 가진 지주 집을 습격, 총 한방 쏘지 않고 소총 16자루와 탄약 등을 탈취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를 계기로 중국노농홍군 탕원 유격대가 재건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재차 나북현 압단하 자위단을 기습하여 50여자루의 소총과 탄약 등을 노획하였으며 유격대 대오는 40여명으로 발전, 하운걸이 대장으로 되고 장인추(张仁秋)가 참모장으로 되었다. 한편 선후로 할머니와 어머니를 잃고 의지가지가 없게 된 이재덕은 유격대를 집으로, 유격대원들을 자기의 친인으로 삼군 하였다. 매번 유격대가 이동할 때마다 하운걸과 장인추(张仁秋) 등이 15살밖에 안되는 그녀를 지방에 맡길 생각을 하였으나 이재덕은 <유격대는 곧 나의 집>이라고 하면서 견결히 유격대와 동행하겠다고 제기했으며 유격대에서 <배언니>로 불리는 배성춘 역시 <나어린 처녀를 어떻게 지방에 홀로 두게 할 수 있느냐>며 두둔해주기도 했다. 당시 이재덕은 탕원유격대에서 가장 일찍 참군했고 또 연령이 가장 어린 여성 유격대원이었다. 1934년 가을, 탕원유격대에서는 배성춘과 이재덕을 탕왕에 있는 후방 임시피복공장(后方临时被服厂)에 파견하여 공장에서 일하면서 1선의 항일연군 전사들에게 군복을 지어 공급해주도록 하였다. 1936년 항일명장 조상지(赵尚志)의 도움으로 탕원유격대는 정식으로 동북항일연군 제6군으로 개편되었고 군장으로는 하운걸, 정위로는 이조린(李兆麟)이었다. 이 시기 이재덕은 이미 항일연군 제6군의 피복공장과 후방병원의 골간이었다. 그해 7월, 이재덕은 북만 성위서기 풍중운과 피복공장 책임자인 배성춘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게 된다. 배성춘을 놓고 말하면 이재덕과 일종 특수한 감정을 갖고 있었다. 이재덕의 모친이 희생된 후 배성춘은 단 한시도 이재덕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켜주었다. 당시 이재덕한테 있어서 배성춘은 어머니이자 언니였고 또한 전우이기도 한 존재였다. 그리고 배성춘한테는 3명의 남동생이 있었는데 이 중 배석철(裴锡哲)과 배석구(裴锡久)는 탕원유격대의 창건을 위해 그 한몸 바치었으며 셋째 동생 배경천(裴敬天)은 이재덕과 죽마고우였다. 일찍 1928년 최용건이 창립한 송동모범학교가 개학했을 때 배경천과 이재덕은 동시에 입학했으며 배경천의 연령이 그녀보다 몇 살 많은 관계로 이재덕은 늘 배경천의 도움을 받군 했으며 그녀의 입단 역시 배경천의 도움과 갈라 놓을 수 없었다. 한편 배경천은 중등 키에 잘 생긴 얼굴을 가졌으며 재능 또한 출중하여 많은 여자애들이 우러러보는 미남형이었다. 당시 이재덕의 집은 가난한데다 남자가 없었기에 배경천이 늘 이재덕의 집에 가 바깥일을 도와주군 했다. 그리고 이재덕의 할머니와 어머니 역시 이 잘 생기고도 부지런한 젊은 청년을 좋아했는가 하면 이재덕 역시 배경천을 친오빠를 대하듯 그를 따르기도 했다. 후일 할머니와 어머니가 선후로 세상 뜨면서 외롭게 된 이재덕은 어쩐지 몰래 배경천을 그리게 되었으며 간혹 배경천이 자기 앞에 나타나면 기쁘고 유쾌하기가 그지 없었다. 당시 둘 사이에는 별로 대화가 없었지만 이재덕은 배경천을 보기만 해도 일종의 안위가 되고 믿음성이 갔다. 이렇게 이재덕이 배경천을 오빠가 아닌 다른 그 무슨 이상형으로 생각하고 있을 당시 배경천은 이미 동북항일연군 6군 2퇀의 정치부 주임이었으며 나이는 고작 23살이었다. 1935년 겨울의 어느 날, 전방으로부터 돌아온 배경천은 이재덕을 보자 “여자애 크면서 18번 변한다더니 너 날이 갈수록 이뻐지는구나”라고 우스개를 했다. 이에 이재덕은 삽시에 얼굴이 확 달아오름을 금할 수 없었다. 다음 순간, 이재덕이 살며시 쳐다보니 그녀의 앞에는 허리에 권총을 찬 대장부가 위풍당당하게 서있었던 것이다. 한편 배경천의 누나 배성춘은 진작 동생과 이재덕이 서로 묵묵히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다 시기를 기다리던 배성춘은 어느 날 드디어 이들 둘을 불러놓고는 이들의 혼약을 결정지었다. 그 뒤 1936년에 있은 배경천의 희생으로 이재덕의 이런 꿈은 갈기갈기 찢어졌다. 그 해 4월, 당시 북만성위의 지시로 배경천은 230여명의 파견대를 이끌고 남하, 남만의 항일유격대와 연계를 취하여 홍군의 북상항일에 배합하기로 하였다. 헌데 부대가 의란현 경내의 <서호경(西湖景)> 산구에서 일본군과 위 만주군 1000여명에게 포위되었다. 10시간의 치열한 격전을 거쳐 배경천 부대는 적군 120여명을 섬멸하였으나 탄약과 식량이 떨어지면서 사상자를 많이 냈으며 배경천도 최후의 1명으로 장열하게 희생되었다. 배경천이 희생된 후 이재덕은 더 이상 혼인담을 입밖에 꺼내지 않았다. 무정한 타격과 잔혹한 환경은 그녀로 하여금 더 이상 같은 고통을 겪기 싫어서였다. ▲ 이재덕과 그의 전우들 1937년 7월, 중공 북만임시성위 확대회의가 탕원 서쪽으로 이춘(伊春)과의 경계지인 모아산(帽儿山)에 있는 6군 피복공장에서 거행, 조상지, 풍중운, 장란생(张兰生)과 이조린 등이 참가했고 길동성위 대표로 주보중이 초청에 의해 회의에 출석했으며 3군 선전과장 우보합(于保合)이 회의 기록을 맡았다. 이번 회의는 각 군의 행동을 제정하는 중요한 회의로서 회의에서는 원 항일연군의 독립사를 제11군으로 확충하는 결의안도 결정, 군장에 기치중(祁致中)이었고 부군장에 장갑주(张甲州)였으며 정위에 김정국으로 선출되었다. 이번 회의 기간동안 6군 피복공장의 일군들이 후근사업을 맡았으며 이재덕 역시 수장들한테 물을 끓여주고 의복을 씻어주는 등으로 바쁘게 움직이었다. 어느 한번 휴회기간(休会期间)이 되자 누군가 “우리 내에 영준한 총각과 이쁘장한 처녀들이 많은데 우리가 이들을 도와 백년가약을 맺게 하는 것이 좋겠구만”하고 제의하자 모두들 그것이 좋겠다고 환호했다. 이어 조상지가 총각인 우보합을 보고 “자넨 요구표준이 높을 것 같은데 어느 처녀한테 눈길이 가는거요?”라고 묻자 우보함은 곧이곧대로“이재덕 동지가 아주 듬직해보이는데 그가 원하는지 모르겠군요” 라고 했다. 우보함의 말에 조상지 역시 동감을 표했다. 헌데 배성춘이 허락하겠는가 하는 것이 문제였으며 거기에 이재덕과 약혼했던 배경천이 1년 전에 희생되었기에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는데도 일정한 애로사항이 있기 마련이었다. 결국 조상지는 풍중운을 시켜 배성춘을 설복하고 다시 배성춘이 여자측의 매파로 이재덕을 설복하기로 했다. 그 뒤, 배성춘이 이재덕을 찾아 결혼을 권하자 그녀의 태도는 견결했다.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을테예요. 전 그냥 언니가 있으면 족하며 영원히 언니만을 따를테예요.” 이에 배성춘은 내심성이 있게 이재덕을 설복했다. “현재 부대에는 남성동지들이 많고 모두 산에서 싸우다 보니 그들한테는 여성동지들의 따사로움이 필요하고, 여성동지들 또한 혼자서 생활하자면 불편할 때가 많기 마련이며 역시 남성 동지들의 도움이 필요한거야. 너도 이젠 20살이야. 이번에 조사령과 풍중운이 직접 나서고 있는데 우보합은 문화수준도 있고 기타 방면도 우월하니 한번 만나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배성춘의 설득에 어느 정도 달통된 이재덕은 드디어 우보합과 대면하는데 동의했고 또한 우보함과 대면한 후에는 그녀의 마음도 봄눈이 녹듯 완전히 풀리었다. 기실 이재덕은 딱히 우보함이 싫어서가 아니었고 다만 그 때까지 그녀가 배경천을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뿐이었다. 회의가 곧 결속될 무렵, 동북항일연군 제6군과 중공북만임시 성위에서는 한차례 특수한 혼례식을 거행, 두 쌍의 예비부부가 혼례식의 주인공이었는데 한 쌍은 만족인 우보합과 조선족 이재덕이었고 다른 한 쌍은 조선족인 오옥광과 한족인 이계란(李桂兰)이었다. 혼례식은 주보중이 주례를 섰고 이조린과 대홍빈(戴洪宾)이 증인으로 나섰다. 그런데 그들이 결혼하여 약 1년 뒤, 그렇게도 이재덕과 이들 자매들을 아끼고 사랑해주던 <큰 언니> - 배성춘이 일제와의 격전에서 희생될 줄이야. 바로 1938년 11월 22일, 보청현(宝清县) 솥회산(锅盔山)에서 주력부대의 서정(西征)을 엄호하던 20여명의 6군 장병들은 서광해와 배성춘의 인솔하에 수백명에 달하는 일제놈들과의 치열한 전투에서 배성춘이 장열하게 희생되었던 것이다.(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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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8-02-14
  • 역사의 살아있는 증인, 조선족 항일투사 - 이재덕①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이(리)재덕(李在德)- 동북항일연군 내의 조선족 여투사이자 국제주의 전사였으며 살아 있은 역사의 증인이다. 그리고 조선인으로부터 중국조선족으로 탈바꿈하게 된 특수시대가 낳은 여성강자이기도 하다. 1917년 12월 29일, 이재덕은 조선 평안남도 개천군답도리(介川郡沓道里)에서 태어났다. 이재덕이 2살 되던 해 이재덕의 부친 이상희(李相熙)가 조선광복을 목적으로 하는 독립단체에 참가했다고 일제에 의해 체포되자 1920년 전 가족은 할머니 안순희(安顺姬)를 따라 중국 요녕성 안동(지금의 단동)지구의 농촌으로 이주, 다시 4년 뒤 송강성 탕원현 복흥툰에 정착한다. 당시 복흥툰에는 송강성의 군벌 오준생이 개설한 <복풍도전회사(福丰稻田公司)>가 있었으며 이재덕 일가는 그 회사의 논을 임대맡아 지으면서 입에 풀칠이나마 할 수 있었다. 1928년 초봄, 복흥툰에 3명의 조선인이 찾아왔다. 이들 중 한 사람은 키가 크고 우람지었으며 목소리도 우렁우렁하였으며 특히 그의 중국어구사가 아주 유창하였다. 그가 바로 유명한 혁명가였으며 후에는 조선의 제2임자로 된 최용건(崔庸健)이었다. 그 얼마 전 최용건은 공산당이 일으킨 광주봉기(广州起义)에 참가, 황포군관학교 교관 겸 제5기 제2구대 대장의 신분으로 200-300명의 병력으로 100여 시간에 달하는 격전을 벌이다가 봉기가 실패하자 국민당 특무들의 감시와 겹겹으로 된 적들의 봉쇄망을 뚫고 광주로부터 동북으로 오게 되었었다. 동북으로 온 최용건은 다니는 곳마다 혁명의 진리를 선전, 결국 이재덕이 살고 있는 복흥툰까지 오게 되었던 것이다. 복흥툰에 온 최용건은 김치강(金治刚)이란 가명으로 송동모범학교(松东模范学校)를 창립하고는 이 지구의 조선인들한테 민족 및 계몽 교육을 진행, 당시 10살인 이재덕은 제일 선참으로 이 학교에 입학했다. 계몽교육을 받는 기간 이재덕은 제국주의 열강들의 압박하에 있는 중국과 조선은 모두 공동한 운명 속에 있으며 오직 제국주의 침략을 물리쳐야만 진정한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쟁취할 수 있다는 혁명의 진지를 깨닫게 된다. 이 송동모범학교에 다니면서 이재덕은 선후로 공산주의 아동단 및 소년선봉대에 가입했으며 소대장에 이어 중대장으로 되기도 했다. 당시 이 학교에서는 어문, 산수, 체육과 음악 등 학과를 설치, 음악학과에서는 제일 처음 배운 노래가 최용건 교장이 지은 모범학교 교가였다. 구락부로 된 학교는 저녁마다 마을 사람들로 붐비었다. 이재덕은 늘 어머니와 할머니를 이끌고 학교로 가서는 최용건 교장의 강연을 들었으며 여기에서 <공산당>이란 세 글자도 알게 되었다. 최교장은 또 일제가 조선과 중국을 침략하고 약탈한 죄행을 폭로하였고 레닌이 영도한 10월 혁명에 대해 소개했으며 장개석이 혁명을 배반하는 과정과 자신이 광주봉기에 참가하던 과정을 감명 깊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런 혁명도리들을 들으면서 마을사람들의 인식과 각오는 날로 높아만 갔다. 최용건의 영향을 받은 복흥툰 마을에는 농민협회, 부녀협회와 반일대동맹, 반일청년회 등 대중혁명조직이 성립되었으며 부녀협회에서 김성강의 활약이 가장 돌출하였다. 1928년 10월, 최용건의 양성과 도움으로 배치운(裴治云), 최규복(崔圭福), 이재덕의 어머니 김성강이 입당, 이들은 삼강지구(三江地区)에서 가장 선참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사람들이었다. 이어 1929년 봄이 되자 학립(鹤立) 부근의 북칠호툰(北七号屯)에 중공 탕원현위가 성립, 이는 삼강지구에서 성립된 첫 현위였으며 전반 동북에서 가장 일찍 성립된 현위의 하나였다. 1931년 항일투쟁의 수요와 중공 만주성위의 비준으로 중공 탕원현위가 확대되었고 이재덕의 어머니 김성강은 현위위원 겸 현 부녀연합회 주임으로 되었다. 그 시기, 이재덕은 어머니 및 기타 공산당원들의 영향을 받아 사상상 재빠르게 진보하였다. 당시 이재덕은 늘 당조직과 공청단 조직에서 조직하는 가무, 연극, 강연 등 문예활동에 참가하여 각종 형식으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죄행을 폭로하는 한편 반일계몽 선전에도 열성을 다하였다. 1932년 초만 하더라도 이재덕은 40여 일간에 거쳐 선전대를 따라 학립진(鹤立镇), 연강구(莲江口), 태평천(太平川), 격절하 금광(格节河金矿). 학강탄광(鹤岗煤矿) 그리고 나북(萝北)경내의 압단하(鸭蛋河), 도로하(都鲁河), 의란현(依兰县) 북부 등지를 돌면서 순회공연, 공연장마다 관중들의 눈물바다로 되었으며 이는 또한 대중들의 반일각오를 불러일으킴에 있어서도 큰 작용을 하였다. 원 흑룡강성 군구 부사령원이었으며 저명한 항일장령이었던 왕명귀(王明贵) 등 많은 사람들 역시 항일선전대의 영향으로 총부리를 일제에게 겨누면서 항일전선으로 달려나갔던 것이다. ▲ 이재덕과 남편 우보합 1932년 봄 이재덕은 김성철과 배경천(裴敬天)의 소개로 공청단에 가입, 그 뒤 이 지구에서 가정 어린 공청단 촌소조장이 되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15살에 불과했다. 공청단 간부가 된 이재덕은 기타 공청단원들을 이끌고 항일표어를 붙이고 삐라도 뿌리었으며 또한 편지를 나르고 망을 보기도 하면서 공청단 활동의 중견으로 활약했다. 그해 봄의 어느 날, 풍중운(冯仲云)과 현위의 간부들이 이재덕의 집에서 회의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변복을 한 마적떼가 복흥툰 서쪽으로부터 마을로 기어들었다. 그러자 이를 발견한 이재덕은 즉시 집으로 달려가 이 위기상황을 알렸지만 이 때는 마적떼가 이미 집집마다 수색을 하기 시작한 뒤었다. 상황은 아주 위급했다. 풍중운은 기타 간부들더러 피신하게 한 뒤 회의서류들을 정리해 가방 안에 넣기 시작했다. 풍중운의 위기탈출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이 때 이재덕의 할머니 안순희 노인이 위기 중 기발한 착상을 내놓았다. “풍동지, 벙어리처럼 가장하우다. 절대 입을 열지 마시우. 모든 것은 내가 막아 나설테니…” 뒤이어 총을 꼬나든 마적들이 들이 닥치면서 이재덕과 할머니의 뒤에 있는 풍중운을 발견, 놈들은 풍중운한테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고는 그를 끌고 가려고 했다. 이러자 안순희 노인은 급기야 풍중운의 앞을 막아나서면서 “제발 끌고 가지 말아 줘유. 그 애는 나의 벙어리 아들로서 얼마 전 조선으로부터 이 어미를 보려고 여기에 왔수다…”라고 하며 울고불고 하였다. 이어 이재덕과 어머니 김성강 역시 풍중운을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하지만 마적들은 할머니와 풍중운한테 총 박죽으로 치고, 발로 차고 하며 물매를 들이대면서 기어코 끌고 가려고 했다.이 위급한 관두에 촌에 있던 지하당원과 마을 사람들이 몰켜와 이구동성으로 “그 벙어리는 확실히 안할머니의 아들이 맞수다. 이제 온지 며칠 안 되우다”라고 하며 막아나섰다. 그제야 마적들은 마을 사람들의 말에 믿음이 가는지 풍중운을 놔주면서 물러갔다. 마적들은 물러갔지만 안순희 할머니는 옷이 갈기갈기 찢어졌고 피투성으로 됐으며 얼마 안 되어 병으로 세상뜨고 말았다. 한편 이재덕의 어머니 김성강은 정직하고도 소박했으며 견정하고도 군중위신이 높은 여성간부였다. 1933년 10월 4일은 음력 8월 15일로 추석날이었다. 추석날 밤, 김성강과 기타 현위 지도일군들은 배치운, 최규복 등과 함께 유격대를 조직할데 관한 과제를 갖고 회의를 하고 있었다. 회의는 그 이튿날 동틀 무렵까지 진행, 바로 이때 갑자기 학립에 있는 일본헌병대가 들이닥쳤으며 회의참가자 300여명은 포위된 채 가도 오지도 못하고 붙잡히고 말았다. 일제는 반역자 이원진(李元珍)을 통해 대부분 군중들은 돌려보냈으나 중공 탕원현위서기 배치운, 조직부장 최규복, 현위 부녀주임 김성강과 공산당원인 정중구(丁重九), 김술룡(金术龙), 임국진(林国镇), 공청단원인 석광신(石光信), 손명옥(孙明玉), 김봉춘(金峰春) 등 12명은 석방하지 않았다. 뒤이어 적들의 비인간적인 고문이 시작되었다. 처음에 일제는 여성인 김성강을 보고 쉽게 입을 열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얼리고 닥치고 하는 수법은 김성강한테 통하지 않았다. 나중에 놈들은 “딸이 있는 곳만 알려주면 집으로 보내주겠다”라고 구슬렸다. 이에 김성강은 “나의 딸은 지금 산에 들어가 일본놈들을 족치고 있다. 내 딸은 언제든지 꼭 너희들을 족치러 올 것이다. 기다려보아라, 이 강도놈들아!”라는 한마디로 대답해 주었다. 이에 악에 받친 일제놈들은 김성강 여인의 손톱을 뽑는 등 갖은 악행을 다 가했으나 그한테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였다. 그 외 놈들은 최규복 등 혁명가들한테 채찍을 휘두르고 입에 고추물을 부어넣고 죽창으로 손톱눈을 찌르고 하면서 고문하였으나 여전히 이들을 굴복시킬 수가 없었다. 결국 일제놈들은 이들 12명 동지들을 생매장, 그것이 세상을 격노시킨 <8.15> 참안이었다.(다음에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8-02-13
  • 상하이 최대 폭력조직 靑幇(청방)보스- 두월생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두월생은 옛 상하이의 <중국의 갱스터 보스(黑帮老大)>, <중국의 제1호 방주(第一帮主)>로 불려온 인물이다. 두월생(杜月笙)은 식민지 및 반식민지 중국의 시대가 낳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아편에 손을 대고 타인에 대한 구타와 살인을 일삼는 건달패 두목이었을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는 장개석의 반혁명 행동에도 적극 가담하였는가 하면 항전기간에는 팔로군을 적극 후원하기도 했으며 개인생활 또한 심월영(沈月英), 진귁영(陈帼英), 선페호(孙佩豪), 요옥란(姚玉兰)와 맹소동(孟小冬) 등 5명의 댁을 두는 봉건적인 퇴폐생활을 즐기기도 하였다. 실로 찬반 시비가 엇갈리는 인물이었다. 본문은 당시 옛 상해탄의 이모저모를 통해 시대와 두월생이란 인물을 조명해보기로 했다. 두월생은 1888년 강소성 천사청(지금의 상해 포동신구) 고교남(高桥南)의 두씨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4살에 생모가 돌아가 선후로 계모와 숙부 상경국(商庆国)의 슬하에서 자라게 된다. 이러한 가정환경은 두월생으로 하여금 어릴 적부터 자존심과 독립성이 강하게 만들었으며 당시 청방(青帮)으로 불리는 깡패집단의 보스로 있는 진세창(陈世昌)을 극히 숭배하면서 장차 어떤 조직의 우두머리로 되는 야먕을 갖게 하기도 했다. 14살이 되던 해 두월생은 진세창 주위의 인물들과 접근하던 끝에 드디어 청방의 상해보스인 황금영 공관으로 들어가 보스의 신임을 얻게 되었으며 얼마 안 되어 상해 프랑스조계지 도박장인 <공흥클럽(公兴俱乐部)>의 경영을 맡게 되면서 일당들과 함께 군벌들과 결탁, 아편밀매에 손을 댄다. 아편에 손을 대면서 두월생은 점점 더 거칠고도 흉악하게 변했으며 무자비하고도 악행수단이 다양한 깡패두목으로 탈바꿈하였다. 1927년 7월, 두월생은 이른바 <3흠회사(三鑫公司)를 설립, 프랑스 조계의 마약거래처를 농단하였으며 경악할 정도로 자신의 세력을 확장시켜갔다. 그리고 상해의 깡패 총 두목이었던 황금영, 장소림 등과 더불어 중화공진회(中华共进会)의 발족에까지 이른다. 바로 그 시기 장개석이 손중산의 <삼민주의>을 배반, 1927년 상해에서 반혁명 정변을 일으켰고 이에 동조한 두월생은 당시 상해시 노동운동의 영수(领袖)였던 왕수화(汪寿华)을 생매장하는 악행을 저질렀으며 이어 한무리의 건달들을 시켜 노동자규찰대를 습격하고 공산당 및 진보적 대중들을 대대적으로 살해했다. 이는 장개석의 지지를 얻었으며 얼마 안 있어 두월생은 국민혁명군 육해공군 총사령부의 고문 및 군사위원회 소장참의와 행정원 참의로 되었다. 비록 이름뿐인 직함이었지만 이는 그가 기타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데 있어서 커다란 작용을 한다. 1929년 두월생은 당시 상해 프랑스조계지 최고 시정 지도기구였던 공동국(公董局)의 중국인 이사장(华董)으로 된다. 이는 중국인으로서는 프랑스조계지의 위치였다. 권력과 재산이 돈독해지자 두월생은 중회은행(中汇银行)을 차리고 상해의 금융업에 손을 뻩이었으며 서인육(徐新六), 진광포(陈光甫), 당수민(唐寿民) 등 금융계의 저명인사들과 결맹관계를 이루기도 했다. 한편 이 시기 두월생은 사회와 민중을 위해 일련의 유익한 일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25년 5월 15일, 일본인이 상해에 세운 면사공장에 아동공 학대사건이 발생, 이러자 국민당 농공부 부장 마초준(马超俊)은 상해에 있는 국민당 요인들과 상론하여 그 달 30일 상해구묘지(九亩地)에서 민중대회를 열고 일본인 공장주에게 항의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집회의 안전을 위해 두월생한테 경비를 요청하자 두월생은 그 어떤 보수와 대가에 대한 요구도 없이 부하들을 파견하여 집회에 참가한 국민당 요원 및 모든 민중들의 안전을 보호하고 회장의 질서를 잘 유지하여 장개석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26년 장시기 동안의 파업 등으로 상해는 <죽음의 도시>로 10여만명의 노동자들이 엄중한 생활고로 역겨운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이때에도 두월생은 거금을 내놓아 노동자들의 생활고를 해결하는 사업에 쓰게 했고 또한 공상계의 동료들을 동원하여 모금활동에 용약 참가하게 했다. 중국의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두월생은 중국적십자회 부회장직에 다년간 몸담고 있으면서 일련의 자선사업에도 열심히 투신, 많은 병원과 학교를 세웠다. 예하면 상해 대중직업학교(강소과학기술대학 전신)은 두월생이 세운 대표적인 학교로서 그 자신이 사재를 털어 많은 후원을 하기도 했다. 또한 상해시 항일후원회에 참가, 주석단 성원 겸 모금위원회 주임을 맡으면서 선후로 150만여원을 모금하여 전선에 보내주었고 전선에서 급히 수요하는 통신기재, 장갑보호차량 등을 팔로군 장령들에게 지원했으며 팔로군 대표 반한년(潘汉年)의 요구에 의해 1000개에 달하는 수입제 방독면구를 팔로군에 보내주어 사용하게 했다. 두월생은 항일을 위한 일련의 군사적 작전에도 손을 댄 적이 있었다. 상해가 일본군한테 점령당한 후 장개석은 장강을 거슬러 서쪽으로 침입하는 일본군의 대규모 작전을 막기 위해 장강봉쇄 계획을 제출하자 두월생은 자기의 윤선회사에서 몇 척의 선박을 출동시켜 장강에 폭침시키는 것으로 장강봉쇄계획에 도움을 주었고 이어 기타 윤선회사들에서도 적극 호응하여 장강항로를 막아 일본군의 진공을 지연시키는데 일조하였다. 1937년 상해가 함락되었다. 그 뒤함께 손잡고 일하자는 일본군의 요청을 거절한 두월생은 그 이듬해 봄 중국적십자총회 이사진을 홍콩으로 전이시키고 자신이 직접 판사처를 설치하고 사업을 주최하면서 해외의 후원물자를 접수하는 동시에 기타 구국활동에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기도 했다. 홍콩에 거주하는 동안, 두월생은 자신의 방회를 이용하여 계속 항일구국사업에 정진, 그가 장악하고 있는 상해적후사업 통일위원회는 각종 방법으로 상해 경제계의 거두들인 우흡경(虞洽卿) 등이 안전하게 상해를 떠나 중경에 도착할 수 있도록 알선해주었고 자신은 물론 고종무(高宗武), 도희성(陶希圣) 등 인사들까지 매국역적 왕정위(汪精卫)와 결렬할수 있도록 기획하기도 했다. 1940년 두월생은 홍콩에서 인민행동위원회를 조직, 실제상 중국방회(中国帮会)의 용두(龙头)로 군림한다. 1942년, 태평양 전쟁이 폭발하자 두월생은 중경으로 전이하여 항사총사(恒社总社)를 건립하면서 대 후방에서의 세력을 발전시켜 나갔으며 선후로 중화무역신탁회사(中华贸易信托公司), 통제회사(通济公司) 등 경제실체를 만들어 일본군 점령지구와의 물자무역에 성공하기도 했다. 그 외 중경에서 규모가 큰 병원을 설립, 이는 당시 가장 선진적인 전시 후방병원으로 이 병원의 탄생은 여러 언론계의 절찬을 받았었다. 한편, 일생을 반 문맹으로 살아온 두월생이었건만 자녀의 교육만은 고도로 중시하였으며 상해 프랑스조계지 선종로(善钟路)에 중학교를 한 개 소를 세우고 자신이 직접 이사장을 맡았았다. 뿐만 아니라 <포동 두씨장서루(浦东杜氏藏书楼)>를 세워 공산당이 출판한 진보적인 서적 <서행만기(西行漫记)>, <노신전집(鲁迅全集)> 등 서적까지 장서로 구입해 열람용으로 진열했다. 항일전쟁이 승리한 후 상해로 돌아온 두월생은 재 부활을 꿈꾸면서 많은 사업에 서두르면서 적지 않게 가업 및 사회사업을 복구하였으나 그런 세월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1948년 봄, 두월생은 남경정부가 소집한 국민당 <헌법실행(行宪)> 대회에서 장개석이 재차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도록 적극 밀어주었다. 한편 이 시기 당시 장개석은 엄중한 재정위기를 만회하기 위하여 장경국을 상해에 보내 개혁을 강행, 금원권을 발행하여 민간에서 유통되고 있는 외화 및 금은 장신구를 일률로 금원권으로 바꾸도록 요구했다. 하지만 두월생의 아들 두유병(杜维屏)이 이런 개혁을 따라주지 않아 장경국에 의해 체포되었고 후에 유기형 6개월로 판결받았다. 이는 두월생한테 큰 충격을 주었다. 1949년 4월, 장개석은 두월생을 단독으로 만나 자기와 함께 대만으로 가 줄 것을 희망했고 공산당 또한 비밀경로를 통해 두월생을 만나 그로 하여금 상해에 남아 줄 것을 희망했다. 하지만 두월생은 장개석의 요구대로 대만으로 가지도 않았고, 상해에 남지도 않았으며 그가 선택한 것은 당시 영국행정권에 있는 홍콩을 선택했다. 1951년 8월 16일, 두월생은 홍콩에서 병으로 사망, 63세란 그닥 길지 않은 일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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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10
  • 장학량(张学良)과 그 신변의 여인들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장학량(张学良)이라 하면 민국시기 국민당 장령 중 가장 센세이숀을 일으켰던 특대 뉴스인물의 한 사람이었다. 특히 그가 일으킨 <서안사변(西安事变)>은 민국사상의 가장 규모가 큰 군사병변으로, 이는 오늘까지도 자주 사람들의 화제로 되고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장학량의 사생활을 서술한 한글기사는 별반 없는 것으로 안다. 하다면 오늘은 <장학량과 그 신변의 여인들>이란 제목으로 민국시기 장학량과 점감색채가 짙었던 여인들 중 그 몇 명만 선택해 조명해 보련다. 장학량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젊은 시절 그와 사귀었던 여인은 많았다. 거기에 <하룻밤 로맨스>에 그친 여인수는 헤아릴 수도 없었다고 한다. 그의 회고대로라면 적어도 한 개 패(排- 약 100명 정도)가 된다고 하니 말그대로 <풍류 소우솨이(少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장학량한테 있어서 진정 그를 사랑했고 시중들었던 <부인>은 3명이뿐이었다. 장학량의 첫 번째 여인은 우봉지(于凤至)었다. 그녀는 길림의 한 부유한 실업가의 딸로서 장학량보다 몇 살 위었으며 일찍 11살 때 장학량과 혼인을 맺었다. 이는 완전히 일대 정치혼인으로 한 가정은 돈이 많았고, 다른 한 가정은 큰 권력을 갖고 있었다. 이런 종류의 결합은 당시의 전통으로 말하면 순리정장(顺理成章- 이치에 맞고 조리가 있다는 사자성어)한 일이었다. 비록 부모가 정해준 봉건식 혼인이었고 장학량이 늘 <누님>이라고 불렀던 우봉지었지만 당시 두 남녀는 아주 끈끈하게 서로 사랑했었고 늘 함께 있었다. ▲ 사진설명 : 장학량의 첫 부인 우봉지 학생시절 우봉지는 우수생으로 아주 단정하고도 지식면이 넓었기에 당시 봉천군벌이던 장작림(张作霖) 역시 며느리감으로 우봉지를 아주 귀여워했다고 한다. 그리고 장학량과의 혼인후 그녀는 장씨 가문의 일련의 일들을 거의 도맡아 처리하였으며 가정에서의 지위도 매우 높았다. 아울러 몇 살 연하인 장학량에 대한 우봉지의 사랑은 아주 진지했고 또한 깊었다. 훗날 <서안사변>으로 장학량이 장개석에 의해 연금되자 우봉지는 유선암(乳腺癌) 치료를 이유로 미국으로 향발, 그 뒤 줄곧 미국에 체류하면서 주식 및 부동산 투기로 많은 돈을 벌었다. 이는 장학량이 자유를 되찾으면 미국으로 데려와 함께 행복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1940년, 남경에서 장학량과 작별한 우봉지는 더 이상 장학량의 모습을 볼 수 없었고 그 작별은 영별로 되고 말았다. 결국 우봉지는 봉건혼인과 정치풍랑의 희생품이 된 셈이었다. 장학량한테 있어서 첫 부인 우봉지와 마지막 부인 <조우쓰 쇼제(赵四小姐)> 사이에 끼어든 여인은 곡서옥(谷瑞玉)이었다. 장학량과 곡서옥 여인은 1922년 제1차 봉직전쟁(奉直战争- 장작림과 오패부 사이에 벌어진 전쟁) 기간에 서로 알게 되었다. 이 여인의 배역은 현재 TV 드라마 <소우솨이(少帅)>에서 가끔씩 등장하군 했지만 이는 근근히 <요리중의 양념>일뿐이었다. 사실 곡서옥은 장학량의 <종군부인(从军夫人) 로 불릴만큼 다년간 장학량과 부부동거를 해온 여인으로 둘은 천진에서 혼례를 치른 적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젊은 시절 장학량이 마약에 인이 박힌 적이 있었는데 그가 마약증상이 발작할 때마다 곡서옥이 마약일종인 모르핀(吗啡)을 조금씩 공급해주어 통증이 가시게 했다는 설도 있다. 결과 장학량은 마약중독에 빠져 오랫동안 모르핀과 떨어질 수가 없었다고 한다. ▲ 사진설명 : 장학량의 두번째이자 마지막 부인이었던 조우쓰 쇼제 <조우쓰 쇼제(赵四小姐) -그녀의 이름은 조일획(赵一荻)이었고 장학량의 만년과 함께 해준 여인었다. 1912년 홍콩에서 태어난 조우쓰 쇼제는 자매 중 4녀가 되어 이런 명칭이 달리게 되었고 부친 조경화(赵庆华)는 절강성 난계(兰溪) 사람으로 북양정부시기의 교통부 차장을 지녔던 관료였다. 그리고 조우쓰 쇼제 자신 역시 작가 겸 장학량의 비서로 있던 중 둘은 운명의 최후까지 함께 하는 인생반려가 된 셈이었다. 조우쓰 쇼제는 72년간 장학량의 시중을 들었던 여인이었다. 만년에 장학량이“만약 장개석에 의해 연금되지 않았더라면 조우쓰 쇼제가 긍정코 나의 마지막 여인으로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회고하다싶이 그 72년간 그녀는 장학량의 난잡한 사생활에 대해 많이 듣고 느끼고 지어 목격까지도 했을 수 있었건만 줄곧 눈감아 주지 않았으며, 적어도 밖에서는 떠들어대지 않았다. 그리고 묵묵히 장학량의 마지막까지 동고동락해주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녀가 <남존여비> 봉건사상이 농후해서도 아니었다. 그녀는 필경 문명을 부르짖는 현대여성이었다. 하지만 왜서였을까? 그렇다면 조우쓰 쇼제가 겉과 속이 다른 <남자의 세계>에 대해 너무도 투명하게 통찰해서였을까? 아니면 <호색한(色汉)이었던 장학량의 행위가 오히려 <귀여워서였을 것>일까? 아무튼 이는 일종의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한편, 조일획 - 아니 <조우쓰 쇼제>는 후일 대만에서 <좋은 뉴스(好消息)>, <새 생명(新生命)>, <진정한 자유(真自由)>, <대사명(大使命)> 등 저작을 펼쳐낸 중국현대사에서 신비한 색채가 짙고도 대단한 여인이라고 할 수 있다. 장학량으로 놓고 말하면 우봉지, 곡서옥과 조우쓰 쇼제 외에도 인상에 짙은 여성 몇 명이 또 있었다. 그 대표적인 여인이라면 첫째로 이종형수(表嫂)였다. 장학량이 어찌어찌하여 이 이종형수와 잠자리를 함께 했는가는 잘 알 수가 없어도 그녀는 매우 표독스러운 여인이었다고 한다. 당시 뒤 골목 사회에서는 모두 그녀를 <연장(连长)>이라고 호칭, 이는 그녀가 한 개 연대가 되는 남자와 함께 침대생활을 했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원체 양가 여인(良家妇女)이 아니었다. 장학량의 이종형과 결혼하기 전에는 사창가에 몸을 담구었었고 결혼 뒤에도 여전히 사교계의 한떨기 <꽃>이었다. 그리고 이종형이 군무로 아주 적게 귀가하다보니 그녀한테는 당연히 한 개 연대에 맞먹는 남자가 생겼고 그 중에는 장학량도 포함되었던 것이다. 다음 장학량이 상해에서 사귄 여인은 이름도 모를 유부녀였다. 하루는 장학량이 그 유부녀를 차에 앉히고 그녀의 저택으로 바래주었으며 마침 그녀의 남편이 없었다. 이어 둘이 한창 운우지정을 나누었고, 미구하여 그녀가 갑자기 이런 말을 했다. “사실 나의 혼인에 이름을 올린 남자는 내 남편이 아니예요. 나의 진정한 남편은 형부였어요.” 그 유부녀의 이 말에 장학량은 깜짝 놀라 삽시에 모든 흥분이 사라졌다고 한다. ▲ 사진설명 : 장학량과 우봉지의 만년 그리고 이런 일화도 있다. 한시기 장학량은 자신이 잘 아는 국민당 고위층 한 장교의 부인과 자주 만나 운우지정을 나누군 했었다. 당시 그녀의 남편도 이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나 부인한테 단지 “<쇼류즈(小六子)-장학량의 애명>를 조심하우다. 믿을 수 없는 인간이우다” 라고 조언했을 뿐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한번은 그 국민당 장교가 부인을 거쳐 장학량의 도움을 받게 되었으며, 일이 성사되자 장학량한테 찾아가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자 장학량의 대답 역시 아주 걸작이었다고 한다. “고마워할 것까진 없수다. 자네도 큰 대가를 치렀는데 뭘…” 뒤이어 둘은 동시에 한바탕 웃기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그냥 전해진 설화로서 그 진실여하는 증명할 수가 없다. 장학량이 일생동안 못 잊어 하던 여인은 한명 또 있었다. 이는 그가 생전에 줄곧 인정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인정할 수도 없던 여인- 바로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宋美龄)이었다. 하지만 어느 장소에서인가 장학량은 무의식간 “내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은 뉴욕에 있다”라고 내뱉었다. 하다면 그 당시 장학량이 잘 아는 사람 중 뉴욕에 있는 이는 바로 송미령뿐이었다. 그리고 장학량의 사인서신거래 중 가장 많이 거래를 한 여인이 바로 송미령이었다. 무려 100여통의 편지가 장학량으로부터 송미령한테로 날아갔던 것이다. 일찍 1925년, <오주참안(五卅惨案)>으로 장학량이 상해에 피신해있을 때부터 송미령은 이 젊고 영준한 <쇼우류즈(小六子)>한테 눈도장을 찍었었다고 한다. 당시 이들 남녀는 늘 유창한 영어로 대화, 이는 쩍하면 <량시피(娘希匹)>란 막말을 내뱉는 장개석과의 대화와는 180도가 다른 무드이기도 했다. 그리고 후일 <서안사변>으로 장학량이 연금되었을 때 장개석은 몇 번 장학량을 죽이려고도 했으나 송미령의 보호로 끝내 성사하지 못하였다. 다른 한편 일찍 1930연대 초, 장학량이 유럽고찰시 이탈리아 무솔리니(Mussolini)의 딸 에다 무솔리니(Mussolini,Edda) 또한 장학량한테 흠뻑 반했다는 것이 장학량 만년의 회고였다. 그러나 당시 두 남녀는 아무런 관계도 발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장학량은 외국인 여성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 에다 무솔리니는 줄곧 장학량한테 집착했으며 이는 장학량을 무척 골치 아프게 하기도 했다고 한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8-02-08
  • 20세기 중국의 가장 걸출한 여성 위인- 송경령(宋庆龄)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송경령(宋庆龄-1893 년 1월 27일-1981년 5월 29일) 여사는 20세기 중국에서 가장 걸출한 여성위인으로 공인받고 있다. 송경령은 일찍 소녀시절에 중국 민주혁명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손중산을 숭배했으며 이어 손중산 선생을 따라 혁명에 투신, 근 70년간의 혁명생애동안 견정불이하고 굴할 줄 몰랐고 시종일관 중국의 노고대중 편에 서서 그들을 지지성원하고 대변하여 왔다. 한편, 부녀아동의 위생보건 및 문화교육 등 복지사업발전에도 솔선수범했고 중국의 완전통일과 세계평화, 일류의 진보사업을 추진함에 있어서도 정력을 몰붓었으며 마멸할 수 없는 기여를 하여 중국인민 및 해외 화교들의 친절한 애대와 다함없는 존경을 받아왔다. 1893년 송경령은 상해의 한 목사 겸 실업가 가정의 차녀로 태어났다. 당시 송경령의 부친 송요여(宋耀如)는 중국 신민주주의 혁명의 선구자 손중산의 친구이자 동지었으며 역시 송경령의 첫 계몽선생이기도 했다. 송경령은 일찍 7살에 상해 중서여숙(中西女塾)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학업에 들어갔고 1907년 15살 나이에 여동생이며 후일 중화민국 대통령 장개석의 부인으로 된 송미령과 함께 미국으로 유학간다. 미국에 도착한 송경령은 먼저 뉴저지 주 스미트 성에 있는 한 사립학교에서 영어를 배우다가 이듬해 조지아 주 메이컨(Macon)시 위엄 반다르(Majesty bandareu) 여자학교 문학부에 입학한다. 이 시기 송경령은 총명하고 공부재질이 뛰어났으며 성정이 활약적이어서 학교에 많은 활동에도 적극 참가하였다. 이 때 송경령은 중국의 신해혁명이 승리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신해혁명은 <20세 초 중국의 가장 위대한 대 사변>이라고 목청껏 환호했으며 더욱 집요하게 중국의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면서 민주혁명투쟁에 투신하였다. 1913년, 문학학사 학위를 받으며 대학을 졸업한 귀국을 결심, 도중에 일본에 들린 송경령은일찍부터 숭배해오던 손중산 선생을 만났으며 귀국 뒤 얼마 안 있어 손중산의 비서로 된다. 그리고 그 뒤에 있은 공동한 혁명투쟁 중에서 맺어진 깊은 우정과 감정은 애정으로 승화되었다. 하지만 가정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우선 당시 손중산의 나이가 송경령보다 27살이나 많았고 그 무슨 재벌도 아니었으며 더군다나 혁명가와의 결혼생활은 앞날의 풍파를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가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송경령은 갖은 경로를 통해 상해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1915년 10월 25일 도쿄에서 손중산 선생과 결혼, 스스로 안온하고도 우월하며 또한 권세가도가 있는 가정생활을 멀리하고 손중산과 함께 망명생활을 해야 하는 어려운 인생을 선택하였고 손중산이 영도하는 중국민주혁명을 적극 지지하고 또한 그 혁명에 뛰어들었다. 1922년 새벽, 진형명이 손중산을 배반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반군은 당시 손중산과 손경령이 거처하는 통수부를 포격, 이 위급한 관두에 손중산은 부하들을 시켜 송경령더러 먼저 통수부를 떠다도록 하였다. 하지만 송경령은 “중국에 이 송경령이 없어서는 되지만 당신이 없으면 절대 안돼요”라고 하면서 포성이 울부짖고 화약냄새가 지독한 그 생사의 고비에서도 마지막 손중산이 안전하게 철거할 때까지 그의 곁을 지켰다. 그 뒤에도 송경령은 손중산과 함께 이러한 위험고비를 여러번 겪으면서 혁명가 아내로서의 본분을 철저하게 지켰다. ▲ 송경령과 손문 한편 손중산과 송경령은 상해에서 이대소(李大钊) 등 중국공산당 대표 및 레닌이 파견한 특사를 여러 번 만나 그들과 교류하면서 경험교훈을 총화하면서 국공합작을 모색, 국민당 개조(改组)에 착수하였고 1924년 1월 20일 공산당원들이 참가한 가운데 광주에서 개최된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손중산이 제정한 <연러(联俄), 연공(联共), 부조공농(扶助农工)> 이 3대 정책을 통과시켰으며 제1차 국공합작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1925년 3월 12일, 손중산이 병으로 북경에서 서거하였다. 손중산의 서거로 형언할 수 없는 비통에 잠긴 송경령이었지만 인차 이지를 찾고 일어나 손중산의 유지를 받들어 그가 제정한 3대 정책을 이어나가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여전히 공산당과 긴밀히 합작하면서 북벌을 지지하고 성원, 북벌군이 무한을 점령하고 수도를 무한으로 옮기자 송경령은 선견인원들과 함께 가장 먼저 무한에 도착하였다. 1927년, 대혁명이 고조를 이루던 그 시기, 국민당내의 우파세력들이 손중산의 원칙과 3대 정책을 배반하고 <녕한합류(宁汉合流)> 결성해 공산당원과 기타 애국적인 진보인사들을 대량적으로 살해하자 송경령은 분개에 넘쳐 <손중산의 원칙과 정책에 대한 위반행위에 항의한다>란 성명을 발표하고 그 <녕한합류>와 결렬하면서 <잠시 은퇴>한다고 선고하였다. 그 뒤 송경령은 손중산의 유지를 받들어 보다 새로운 혁명의 길을 탐색하기 위하여 소련을 방문, 소련에서 스탈린과 기타 소련지도자들을 만나 보았으며 카리닌 부부와 깊은 우정을 맺기도 하였다. 소련에서 돌아온 뒤 송경령에 대한 국민당의 감시가 강화되자 그는 어느 한차례에 있은 담화에서 남경에 정착하라는 당국의 건의를 거절, “나의 생활은 남경에 간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다”, “당신들이 나의 입을 막으려면 총살하거나 감금시키는 것이다”라고 못 박았다. 국민당 당국의 감시속에서도 송경령은 일련의 중요한 국제반제활동에 적극 참가, 1927년 12월과 1927년 8월에 거쳐 두 번 국제반제동맹 명예주석으로 당선되었고 후에는 세계 반파쇼 위원회 주요 지도자로 선출되기도 했다. <9.18> 사변 후 송경령은 장개석의 <외적을 물리치는 욕망 앞서 국내를 안정시킨다(欲攘外,必先安内)>는 부저항 정책을폭로하는 한편 1932년, 일본군의 상해침략에 저항하는 19로군의 애국정신을 높이 평가하였으며 여러 번 장개석을 찾아가 부저항주의 노선을 고집하는 장개석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 송경령과 모택동 1932년 12월, 송경령은 채원배(蔡元培), 노신(鲁迅) 등과 손잡고 <중국민권보장동맹>을 결성하여 광범위한 사회활동과 각종 형식의 투쟁 및 경로를 통해 허덕형(许德珩). 나등현(罗登贤), 등중하(邓中夏), 추도분(邹韬奋), 진갱(陈赓), 요승지(廖承志)와 정령(丁玲) 그리고 구국회의 <칠군자(七君子)> 등 많은 혁명가와 애국적인 진보인사들이 감옥에서 석방되게 하였다. 그리고 중국의 가장 대표적인 좌익작가 노신 선생을 매우 관심하면서“당신의 생명은 당신 개인 것보다도 중국과 중국혁명에 속하는 것으로서 중국과 중국혁명을 위하여 당신은 살아야 합니다. 이는 중국과 중국혁명이 당신을 수요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늘 타이르곤 했다고 한다. <서안사변(西安事变)>이 발생되자 이 사변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을 적극 주장한 송경령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장개석을 총살하거나 다른 극단적인 방법으로 사건을 종말 지었더라면긍정코 더욱 수습하기 어려운 내전을 초래할 수도 있었으며 이렇게 되면 오히려 일본군의 대륙침략에 부채질을 해주는 셈으로 되기 때문이었다. 결과 중국공산당과 송경령 및 동북군 장학량 장군 등의 노력으로 서안사변은 평화적으로 마무리되었고 제2차 국공합작도 성사되었다. 한편 항일전쟁의 승리를 위해 송경령은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우선 1938년 홍콩에서 <중국보위동맹(保卫中国同盟)>을 결성, 각종 방법과 경로를 통해 해외 화교와 국제사회에 중국의 항전에 대해 선전하는 동시에 해외 애국적인 화교와 국제의 벗들을 통해 많은 자금과 약품, 의료기재와 기타 물자들을 모아서는 전선을 지원, 허다한 물자들은 송경령이 직접 알심 들여 배치해 항일전장에 보내진 것들이었다. 또한 많은 국제인사들이 송경령을 통해 공산당이 영도하는 항일근거지에 가 사업하고 고찰할 수도 있게 했다. 그 중에는 저명한 <서행만기(西行漫记)> 써낸 미국기자 스노가 있었는가 하면 캐나다의 유명한 외과의사 노로돔 베츈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중국의 항일전쟁이 승리한 후, 송경령은 원 <중국보위동맹>을 <중국복리기금회>로 개칭, 사업의 기본 기점을 부유위생, 문화교육과 사회복리 등 구제사업에 두었다. 그 시기 국공내전이 일어났고 사회질서도 매우 어지러웠다. 하지만 상해에 있는 송경령은 갖은 방법으로 각종 물자와 약품 등을 해방구에 보내주는 것으로 새 중국의 탄생을 위해 탁월한 기여를 하였으며 1949년 9월 북평에서 있은 제1차 전국정치협상회의에서 중앙인민 정부 부주석으로 당선되었고 1952년에는 아시아 및 태평양 평화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부록: 송경령 여사 대사기 1893년 1월 27일, 상해에서 출생. 1907년 미국으로 유학. 1915년 10월 25일, 일본 도쿄에서 손중산과 결혼. 1922년 8월 23일, 손중산과 함께 공산당원 이대소 등을 만나 국공합작 탐색. 1924년 6월 16일, 광주에서 황포군관학교 개교식에 참가. 1925년 3월 12일, 손중산이 북경에서 병으로 서거. 1926년 1월, 광주에서 열린 국민당 제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손중산의 3대 정책에 관련해 대회 연설, 국민당 중앙 집행위원으로 당선. 1927년 2월, 무한에서 부녀정치훈련반 개설. 1927년 7월 14일, <손중산의 원칙과 정책을 위반한 행위에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국민당 당국과 결렬. 1927년 12월, 벨기에에서 개최된 국제반제동맹대회에서 명예주석으로 당선. 1932년 1월, 하향응(何香凝) 등과 함께 항일구국 상병들을 위해 <국민상병병원>을 건립. 1932년 12월, 채원배, 노신 등과 함께 상해에서 <중국민권동맹> 결성. 1932년 9월 30일, 상해에서 <제국주의 전쟁을 반대하는 세계위원회> 극동대회를 주최, <중국의 자유와 반전쟁 투쟁>이란 제목으로 연설. 1932년 4월 20일, 하향응 등 1779명과 연명으로 <중국인민 대일작전 기본강령> 발표. 1936년 12월, <서안사변>을 평화적으로 해결할데 관한 담화문 발표. 1937년 7월, 상해에서 주은래, 박고(博古)와 임백거(林伯渠) 등을 만나 공동항일에 관한 공산당의 주장을 옹호. 1938년 6월 14일, 해외인사들을 초청하여 홍콩에서 <중국보위동맹> 결성. 1943년 9월 18일, <해외에 있는 중국인 벗들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발표. 1944년 3월 12일, 미국에서 있은 손중산 서거 기념대회에서 <손중산 선생과 중국의 민주>란 제목으로 강연. 1945년 9월, 중경 상청사(上清寺)에 있는 장치중(张治中) 장군의 거처에서 모택동을 만남. 1946년 7월 23일, 상해에서 <국민당에 대한 미국정부의 지원을 제지하는 미국인민들을 옹호한다>라는 제목으로 성명 발표. 1947년 9월 16일, 국민당 당국의 <선거참가요청> 거절. 1949년 1월, 중국국민당 혁명위원회 창립, 명예주석으로 당선. 1949년 7월 1일, <중국공산당에 경의를 드린다>란 글을 발표, 같은 달 7일에는 <제국주의는 물러가라!>란 제목으로 된 담화 발표. 1949년 9월, 초청을 받고 북경에서 중국인민 정치협상회의 제1기 전체 회의에 참가, 회의에서 중앙인민정부 부주석에 당선. 1949년 10월 1일, 중국의 개국대전에 참가. 생략 1981년 5월 29일, 북경에서 서거 * 주 : 송경령 여사의 건국 후 대사기를 생략한 것은 민국시기의 생활을 주로 언급하기 위한 것임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8-02-05
  • 中 개국대전에 참가한 장개석 직계의 유일한 장령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1949년 9월 중순의 어느 날, 그 날 북평에서는 신 정협개최 준비간담회가 한창 열리고 있었다. 회의 주제는 곧 있을 개국대전(开国大典)에 어떤 인사들이 참가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회의참가자들은 의논이 분분하였다. 모택동이 발언할 차례가 되자 그는 곧바로 회의에 참가한 전 국민혁명군 장령 진명인(陈明仁)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이제 곧 신 정치협상회의가 열리고 개국대전도 있게 되는데 여기에 각 분야의 대표인사들이 다 있지만 유독 장개석 직계의 장령이 없구려. 오늘 이 간담회에 진명인이 참가했는데 진명인 장군이 참가하면 보다 대표성이 전면적이 될 수 있 수다.” 그도 그럴 것이 진명인은 원 장개석 직계의 유명한 장령으로 그 얼마 전 장사에서 부대를 이끌고 기의해 중국인민해방군 장령으로 된 전기적 색채가 농후한 군인이었다. 1903년 호남성 리릉현 홍원향 홍원충(醴陵县洪源乡洪源冲)에서 태어난 진명인은 1924년에 정잠(程潜)이 손중산의 위탁을 받고 세운 육군강무학교에 입학했다가 후일 교장인 정잠의 소개로 장개석이 교장으로 있는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갔다. 후일 정잠과 장개석 모두 진명인의 행각을 두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진명인의 전임 교장이던 정잠은 자기가 인맥을 통해 알선해준 학생이 국민혁명군 중장(中将)까지 되었는가 하면 자기와 함께 부대를 이끌고 기의할 줄을 몰랐으며 후임 교장이던 장개석 또한 자기가 알심들어 육성해낸 진명인이 후 날 자기를 배반하고 기의할 줄을 몰랐던 것이다. 한편 진명인은 황포군관학교 시절 용모가 준수하고 기민/영활했으며 학습 및 훈련 성적이 돌출하여 늘 교관들의 애대를 받았었다. 1925년, 황포군관학교 제1기생으로 졸업한 진명인은 학교에 남아 학교 교도퇀의 견습 패장(见习排长)으로 되었다. 그 때인즉 동강에 둥지를 틀고 있던 군벌 진형명(陈炯明)이 광주를 공격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자 이 정보를 입수한 손중산은 광동의 혁명근거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동정(东征)을 결심, 진형명의 반란을 평정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국민혁명군의 <제1차 동정>이었다. 동정에서 있은 많은 전투에서 진명인은 한 개 패를 인솔하여 동관성(东莞城)내로 돌입, 적군 한 개 영의 무기를 노획하여 대공을 세웠으며 당시 퇀장인 유요신(刘尧宸)은 “내가 세상에서 제일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았는줄 알았는데 진명인이 나보다 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라고 진명인을 평가하였다고 한다. 그 뒤 진명인은 파격적으로 교도퇀 3련 연장으로 승급하였다. 한편 국민혁명군의 “제1차 동정”으로 원기를 크게 상실한 진형명은 원군이 도착하자 동정군이 광주에서 회사(回师)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재차 동강에서 반란을 계획, 손중산 역시 재차 동정을 결정했다. 이번의 제2차 동정군은 장개석이 총지휘를 맡고 주은래가 총정치부 주임을 담당했으며 부대는 1925년 10월 초 광주에서 출발해 중순에 혜주(惠州)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혜주성은 진형명의 부하인 양곤여(杨坤如)가 방어사령으로 있었다. 양곤여는 월군(粤军-광동군벌) 중의 저명한 맹장이었다. 게다가 혜주는 산세가 험준하고 3면에 물로 둘러 있어 방어하기가 쉽고 공격하기가 어려운 천연적인 요새였다. 전투는 자못 치열하였다. 10월 13일 밤, 공격을 지휘하던 퇀장 유요신이 사다리를 타고 성벽에 오르다가 머리에 총탄을 맞고 당장에서 사망되자 당시 결사대 대장이었던 진명인은 퇀장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면서 부르짖었다. “퇀장! 나 꼭 당신을 위해 원수를 갚을 것입니다…!” 이어서 진명인은 벌떡 일어나며 옆에 있는 부 연장한테 “우리 둘 중 누가 살아서 혜주성을 공략하면 죽은 전우의 부모처자를 돌봐 드리기로 하기오.” 말을 마친 진명인은 연대를 두 갈래로 나뉘어 한 갈래는 자신이 맡고 다른 한 갈래는 부 연장이 맡도록 하고는 재차 공격에 돌입했다. 이 때 <쿵 쿵 쿵> 하는 포 소리가 울리더니 성벽 한 곳이 무너지면서 성벽 위에 있던 월군의 기관총이 <벙어리>리로 되었다. 그러자 진명인은 기발을 추켜들고 무너진 성벽내로 돌입, 초연이 자욱한 가운데 적탄을 무릎 쓰고 성벽위에 올라 기발을 꽂았다. 아군의 기발이 성벽위에서 날리는 것을 본 동정군 사병들은 사기가 올라 <돌격!>을 외치면서 성내를 향해 맹공격을 들이 댔고 성벽에 의지해 수비하던 월군 사병들은 동정군의 기발을 보자 뿔뿔히 총을 벌리고 흩어지면서 도망쳤다. 혜주성은 함락되었다. 그 때까지 쌍안경으로 전투현장을 낱낱이 지켜보던 장개석은 “동정군 기발을 추켜들고 제일 먼저 성벽에 오른 군인은 누구요?” “바로 교장님의 학생 진명인입니다!” 장개석 신변의 황포군관학교 교관 이명호(李明灏)가 힘 있게 대답했다. “음, 공을 세웠수다. 이번 전투에서 관건적인 역할을 했수다.” 장개석의 얼굴에는 희색이 감돌았다. 3일 후 혜주성 함락을 경축하는 대회에서 장개석은 군 나팔수더러 진명인한테 경의를 표한다는 뜻으로 나팔을 세 번 불게 하고 직접 “진명인을 향해 차렷!”하고 명령하였다. 또한 진명인을 3영 영장으로 제발한다고 당장에서 선포하기도 했다. (후일 주은래 역시 혜주에서 총을 들고 진명인한테 차렷 자세를 취하면서 경례했다고 회고했다.) 혜주성 전투에서 이름을 날린 진명인은 북벌(北伐)중 장개석의 목숨까지 구해준 적이 있었다. ▲ 모택동과 중국인민해방군 상장 진명인(陈明仁) 1926년 6월, 북벌군이 남창에 거의 닿았을 때 중도에서 적의 매복권에 들게 되었다. 당시 장개석과 백숭희 모두 지방군벌 손전방(孙传芳)이 설치한 첩첩포위망에 들었는데 정세는 대단히 위험했다. 이 때 바로 진명인이 나섰다. 진명인의 3영은 모두 결사대가 되어 혈로를 개척해 나갔으며 포위를 돌파하여 장개석과 백숭희를 구한 건 물론 손전방 군벌의 퇀장 한명을 생포하기도 했다. 군사재능을 남김없이 발휘한 진명인은 재차 장개석의 환심을 샀다. 그 때 진명인한테 감동된 장개석은 부인 송미령과 의논한 후 한 국민당 요원의 딸을 진명인한테 소개시켜 주었으나 진명인은 그들의 성의에 사의를 표시, 고향에 두고 온 아내 사방여(谢芳茹)한테 한번 다녀왔을 뿐이었다. 그 뒤 진명인은 황포군관학교의 대령(上校)에서 국민혁명군 제10사 28려 56퇀의 퇀장으로 진급하였으며 1930년엔 28려의 여장, 1933년엔 국민혁명군 제10사의 중장 사장으로까지 승승장구하면서 장개석을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다는 비장한 각오를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국공내전에서 인민해방군과 가장 완강하게 싸운 국민당 군 장병이라면 진명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바 사평에서 동북인민해방군 임표부대와 싸운 전투가 가장 전형적인 사례였다. 바로 1947년 6월, 동북인민해방군과 싸운 이른바 <사평보위전>에서 진명인은 사평시내의 5분의 3까지 잃고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도 완강하게 저항하여 장개석으로부터 청천백일훈장(青天白日勋章)을 받아 안았으며 국민당 군 제7병퇀 사령으로 되기도 했다. 후일 그 사평전투를 두고 장개석은 진명인을 <황포 1기 중 한 폭의 기발(黄埔一期的一面旗帜)>이라고 치하했고 1949년 9월 진명인을 만난 자리에서 “싸움에선 임표마저 한 수 꺾이는 진명인”이라고 평가했다. 이렇듯 장개석과 국민당을 위해 그 한 몸 불살랐던 진명인이었지만 부패무능한 국민당 정부에 대한 실망 및 중공지하당의 설득으로 드디어 큰 결심을 내렸으며 자신의 옛 교장 정잠과 더불어 1949년 8월 4일, 국민당군 장병 7만 7000여명을 거느리고 장사기의(长沙起义)에 성공, 호남성의 이 성도를 평화적으로 해방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진명인은 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제21병퇀 사령, 호남성 임시정부 주석, 호남성 군구 부 사령원, 인민해방군 제55군 군장 등 직에 역임했으며 1955년에는 중국인민해방군 상장직함을 수여 받았다. 국민당군 장령으로부터 인민해방군 장령에 이르기까지 일생을 군인으로 희노애락을 겪으면서 살아온 진명인 장군은 1974년 5월 21일 북경에서 그 비장했던 인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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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31
  • 새 중국의 첫 여성 외교대사- 정설송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사람들은 조선인 작곡가로 중국의 <아리랑>으로 불리는 <연안송> 및 <팔로군행진곡>과 <조선인민군 행진곡> 등 두 나라 군가를 창작한 <군가 창작의 아버지>인 정율성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겠지만 그의 부인이며 새 중국의 첫 여성대사인 정설송(丁雪松)에 대해서는 그닥 잘 알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설송- 그녀는 지난 세기 30년대부터 중국의 진보적인 여성혁명가였는가 하면 예술가 및 외교가로 맹활약을 펼쳐왔으며 남편 정율성에 못지 않는 걸출한 여성명인이었다. 1918년 5월 27일, 정설송은 중국 사천성 파현(巴县-지금 중경시 파남구)에서 출생, 1924년 파현 목동진 복음당 소학(木洞镇福音堂小学)에 입학하였고 중경시 문덕여자중학(文德女中) 및 사천성 성립여자직업학교(四川省立女子职业学校) 등을 거치면서 당시 중국 상황으로는 흔치 않게 공부할 수 있는 행운을 가졌었다. 1934년, 정설송은 중경시 평민은행에 취직하면서 열혈적인 애국여성으로 발돋음하였다. 당시 18세 문학소녀였던 정설송은 당시 간행물이었던 중경의 <상무일보(商务日报)> 등 신문에 <민족해방의 전에는 그 어떤 아름다운 꿈도 거품뿐(在民族解放前什么美梦都会成为泡影)>, <개인의 일체 환상을 포기한다(抛弃个人的一切幻想)> 등 글을 발표, 중화민족의 해방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장한 뜻을 지녔다. 그 뒤 1936년 7월 중경시 직업청년구국회가 설립되자 이사로 당선되었고 그 이듬해 중경시 부녀구국회가 설립되자 상무이사로 발탁되었으며 그해 11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하지만 당시 중경에서의 국민당통치에 대해 환멸을 느낀 정설송은 단연히 혁명의 성지- 연안을 선택, 성도와 서안을 거쳐 연안을 찾았으며 1938년 1월 연안에서 항일군정대학 제3기 2대대 여성대 편입되어 공부하기 시작했고 그 뒤 선후로 제4대대 여성대 대장, 제5대대 여성대 대장을 맡다가 그 해 11월 항일군정대학 여성대대가 설립되자 대대장을 맡기도 했다. 정설송은 연안을 찾은 진보적인 청년 중에서도 가장 진보적이고도 지식과 재능이 돌출한 청년여성이었다. 이는 후일 그가 정치적으로 발전함에 있어서도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다. 1939년 7월, 연안에서 중국여자대학이 고고성을 울리자 이 대학 고급연구반에 입학한 정설송은 학생회 부회장 및 학생클럽의 편집으로 활약, 얼마 뒤 중앙에서 여자대학의 학생 45명을 선발하여 섬감녕변구(陕甘宁边区) 선거사업에 투입시키자 정설송은 수덕(绥德), 미지(米脂) 등 현에서 선거사업단 부단장으로 있다가 1941년엔 섬감녕변구 참의회 사업에도 몸담았었고 또 변구 부주석 이정명(李鼎铭)의 비서로도 있었다. 이 시기 정설송은 조선인 음악가 정율성을 알게 된다. 그녀는 조선독립을 위해 중국 연안까지 찾아온 이 조선인 청년에 대해 깊이 동정하던 나머지 나중에는 그것이 사랑으로까지 승화된다. 그 뒤 연안에서 정풍운동이 시작되자 정율성은 <계급이색분자>, <일본간첩> 등 혐의로 여러 가지 의심을 받게 되었으며 이는 정율성과 정설송 사이 커다란 사랑의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정율성의 드높은 혁명열정과 혁명투지에 감화되었던 정설송은 변함없이 이 조선인 청년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드디어 1941년 12월, 연안의 막굴에서 결혼식을 치르기까지에 이른다. 정설송은 문학과 음악에도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었다. 연안에서의 다망한 혁명사업과 간고한 환경은 그녀로 하여금 문학과 음악 재능을 키우는데 정력을 쏟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특히 1943년 4월, 임신 8개월이었던 정설송은 산비탈에 굴러 떨어지면서 조산, 이로 인해 그녀는 젖이 없었다. 그러자 정설송은 이를 악물고 평소 남편 정율성이 그렇게도 아끼던 바이올린을 팔아 어미산양을 사서 딸애한테 양젖을 공급하기로 결심을 굳히기까지 했으며 바이올린을 판 것을 기념하여 이들 부부는 딸애의 이름을 <정소제(郑小提)>라고 지었다고 한다. ▲ 정율성,정설송(丁雪松) 부부 1945년 8월 15일, 일본천황의 항복선언(방송)과 더불어 중국 항일전쟁의 승리와 조선의 광복이 동시에 찾아왔다. 그 해 9월, 정율성이 광복된 조국으로 돌아가게 되자 정설송은 그토록 중국을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따라 산 설고 물 선 조선에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조선에 도착한 정설송은 남편이 황해도 인민위원회 선전부장으로 사업하는 해주에 머물다가 1947년부터 조선노동당 중앙교무위원회(侨务委员会) 비서장, 북조선화교연합회 위원장, 주중 동북행정위원회 북조선상업대표단 대표 등 직에 종사했으며 새중국의 창립 전야에는 신화사 평양분사의 사장에 임명되기고 했다. 1950년 한반도에 <6.25>가 발발하자 그 해 9월, 정율성과 정설송 부부는 주은래와 김일성의 협상과 동의를 거쳐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고 얼마 뒤 남편 정율성은 중국국적에 가입하게 된다. 중국으로 돌아온 정설송은 새 중국 건설 및 외교사업을 위해 더욱 분망한 활동에 투신하였다. 1952년부터 중공중앙 국제활동 지도위원회 사무실 주임으로 중국여성대표단을 따라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거행된 아시아 아프리카 여성회의에 참가하였고 1958년에는 중국 고위층여성대표단 일원으로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방문했으며 1961년에는 허광평이 이끄는 중국 여성대표단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리고 1956년에는 중공 제8차 전국대표대회 대표로 평선되었고 1958년 국무원 외교사업사무실이 설치되자 비서실 조장으로 부임되면서 정치적으로는 남편을 능가하는 리더십을 보여 주기도 했다. 중국의 문화혁명은 정설송한테 있어서도 일종의 재난이었다. 문화혁명이 시작되자 정설송은 사업정지를 당하면서 심사를 받았고 1969년에는 국가 직속기관을 떠나 녕하의 평라(平罗)에서 노동개조를 하면서 정치적으로는 물론 심신상으로도 많은 위축을 받았다. 1971년 사업에 복직되자 정설송은 중국인민 대외우호협회 비서장(후엔 부회장)을 맡게 되면서 외국에 나가 많은 활동을 펼치었으며 1975년에는 제4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1976년 12월 7일, 남편 정율성이 뇌출혈로 사망하자 정신적으로 커다란 타격을 입은 정설송이었지만 사업에 대한 충성심만은 변함이 없었다. 특히 1979년 새 중국의 첫 여성대사로 주 네덜란드 중국대사과 특명전권대사로 임명되자 더욱 굵직굵직한 일들을 맡아 처리하면서 중국의 대외사업에 커다란 기여를 하여 1982년 중국공산당 제12차 전국대표대회와 제5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 참가하였으며 1984년 8월 네덜란드 및 덴마크 특명전권대사를 거쳐 귀국하였다. 그 후에도 정설송은 제6기, 제7기 전국정협 위원으로 당선되면서 각종 국가 대사에 참여, 전국정협위원, 중국대외우호협회 이사의 신분으로 구소련, 라틴아메리카 6개국 등 많은 나라들을 방문하면서 외교활동에 종사하다가 1994년 6월에 정식으로 이직하였다. 이직 후 정설송은 자신의 인생 회억록을 쓰는 등으로 만년을 보내다가 1996년 한국 국립국악단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 남편 정율성인 고향은 광주광역시를 찾아 남편의 고향집을 다녀오기도 했다. 새 중국의 첫 외교대사였던 정설송 여사는 2011년 5월 29일 북경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으며 향년 93세였다. 정설송 여사의 일생은 여성혁명가의 일생이었고 중국의 첫 여성외교대사의 일생이었다. 정설송의 이름은 영원히 중국 근대 여성발전사에 휘황한 한 폐지를 남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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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31
  • 반도무용의 영원한 전설-최승희
    편집자의 말 : 최승희를 놓고 말하면 그녀의 정치적 이념과 사상성을 두고 논란이 많은 인물이다. 일찍 지난 세기 30-40년대 최승희가 침략확장에 광분하는 일본군을 위문하려고 중국대륙과 동남아 여러 나라에 다니며 공연한 것을 두고 역사학가들은 그녀를 친일파라고 지적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그녀가 장시기 동안 이북에서 활동한 것을 미루어 적색분자로 점찍기도 한다. 하지만 이 글은 최승희 그녀의 무용예술만 언급하면서 우리 한민족 무용 발전을 위해 각고한 노력을 했다는 사실만 나열하려고 한다. 이 글의 많은 내용은 구소련 간행물 <소련여성> 1948년 제3호에 실린 글임을 밝히는 바이다. ▲ 사진출처 : 인터넷 1911년 11월 24일, 최승희는 조선 경성(지금의 서울)의 한 의사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15살이 되던 해 최승희는 경성에 있는 <숙명여자고등학교> 보통 반을 나왔고 그 뒤 1926년 5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서 일본현대무용의 선구자인 이시이 바쿠가 세운 무용학교에서 공부했으며 3년 뒤 이 학교의 1번 무용수로 활약했다. 뿐만 아니라 얼마 안 있어 이 무용학교의 <수석 대리교사>로 선발되기도 했다. 1929년 조선으로 돌아온 최승희는 18세 나이에 조선의 첫 현대무용가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으며 그해에 무용연구소를 세우는 야심을 드러냈다. 그리고 1930년부터 1932년 사이에 세 번에 거쳐 전문 공연회를 개최, 대표작으로는 현대 조선민족 무용을 상징하는 <영산무(灵山舞)> 등이 있었다. 최승희의 무용에서 계발을 받고 후일 성공한 사람도 많았다. 대만의 유명한 무용가 임명덕(林明德)이 바로 그 대표적인 인물 중의 한사람이었다. 1936년 그는 최승희의 무용공연을 보고 일본에 가서 무용을 전공, 22세었던 1936년부터 8년이란 품을 들여 도쿄대학 예술학부와 이시이 바쿠의 무용학교를 오가면서 독일풍의 현대무용을 배웠고 1943년에 도쿄에서 개인 공연회를 가지었으며 그 뒤 대만으로 돌아가서는 무용 <예상우의무(霓裳羽衣舞)>와 <수사몽가(水社梦歌)> 등 미학정서가 짙은 무용작품을 무대에 올리면서 대만의 무용예술의 발전을 위해 중대한 기여를 했다. 한편 서방의 무용기교와 조선 전통무용의 정신주체를 결합시켜 조선 무용계에서 돌풍을 일으킨 최승희는 1937년 당시 세계적인 무용대가로 등극한 미국인 솔로몬 왜루크의 알선으로 미국을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주의 여러 나라와 유럽 등지를 방문하면서 100여차 공연, 공연은 1939년까지 지속되면서 무용논평원들과 당지 관중들의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심지어 부분적 간행물들에서는 “일본이 조선을 정복하였지만 최승희만은 정복하지 못하였다”라고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1939년 말, 조선으로 돌아온 최승희는 일제가 한복을 입고 공연하는 것과 민족무용을 갖고 무대에 오르는 것을 금지시키자 단연히 고국을 떠나 중국 북경으로 향했고 그 곳에서 중국무용을 연마하고 탐구하였다. 하지만 그 때로부터 최승희는 중국의 만주와 상해, 남경 등지를 돌며 이른바 황군을 위한 <위문공연>도 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는 한복을 입고 무대에 오르는 것을 탄압하는 일제가 싫어 조선을 떠난 최승희와는 다른 친일행위를 한 최승희로서 모순되는 면이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당시 최승희의 무용을 두고 일제마저 고도로 인정했다는 것만은 의심할바가 없는 것 같다. ▲ 사진출처 : 인터넷 1946년 해방이 되자 최승희는 그 해 5월 귀국선으로 인천으로 돌아왔으나 한국에는 정착하지 못하고 7월에 문예평논가로 활약하고 있는 남편 안막을 따라 월북했으며 평양에서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세웠다. 이 후 최승희는 조선무용동맹 위원장으로 활약하면서 공훈배우 칭호 및 국기훈장 제1급 등을 받았다. 1950년 6.25가 발발하자 최승희는 북경으로 가서 중국의 중앙희극학원에 최승희 무용반을 설치하여 많은 제자들을 양성, 새 중국의 제1대 무용예술인들은 그 거개가 최승희가 양성해낸 인재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66년 최승희는 그녀의 마지막 무용작품인<고구려 무희>를 창작하여 무대에 올린 뒤 관중들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최승희는 그 자신의 친일행위 및 평양에서의 사망 등으로 많은 미스테리를 낳고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녀의 가정사 및 자녀의 행적 등도 아직은 알려진 바가 없으며 또한 그녀가 행운아인가 아니면 비운의 인물인가 하는 것도 판정하기 어렵다고 보아진다. 하지만 반도가 낳은 세계적인 무희- 최승희의 무용예술은 말 그대로 세계가 공인하고 있으며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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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8-01-30
  • 지난 세기 20-30년대 중국영화계의 황후 호접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올해 1월 20일은 지난 세기 20-30년대 중국 상해에서 “영화황후(电影皇后)”로 불리었던 호접(胡蝶)이 태어 난지 110주년이 되는 날이 된다. 이 날을 기념하면서 최근 상해시 촬영예술센터에서는 “접몽백년(蝶梦百年)”으로 명명된 호접의 영상역사 전시회(1월 20일-3월 18일)가 막이 올랐다. 전람에는 수십 년간 호접의 영화배우생애와 사생활 및 해외여행 중의 순간순간을 기록한 진귀한 사진 근 200점이 진열되었다. 그만큼 지난 세기 20-30연대 호접은 상해영화계의 유명스타였다. 당시 조선인 영화배우 김염(金焰)이 상해에서 “영화황제(电影皇帝)”로 떠올랐다면 호접은 “영화황후”로 손색이 없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 상해에서 일반 노동자의 월급이 20원 정도였다면 호접의 월급은 2000여원으로 일반 노동자 월급의 100배에 달했는바 이는 그녀의 몸값이 어느 정도였다는 것을 충분히 설명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 영화황후 호접의 영상역사 전시회의 포스터 1908년 스페인 예술인 엘 레마스가 상해에서 중국의 첫 영화관을 세웠다. 영화관은 홍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 얼마 후 호서화(胡瑞华)란 이름을 가진 소녀가 찾아왔다. 영화관 보스는 대뜸 이 소녀를 보고 “바로 저 애이다”라고 탄성을 지를만큼 기뻐했다. 그것으로 이 소녀는 자신의 일생을 영화와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그녀가 바로 상해영화계에서 이름을 날린 호접이었다. 호접은 중국 영화사상 가장 명성이 높고도 전기적 색채가 농후한 여스타였다. 호접이란 이름은 중국영화계에서 일찍 알려졌고 장시기 동안 전해져온 이름으로서 중국영화계 스타중의 스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40여 년 간 영화배우의 인생을 살아오면서 호접은 90여부의 영화에서 주역을 담당, 자주 “영화황후”로 등극하였으며 많은 영화팬들의 사랑을 독차지 하다싶이 하였다. 그리고 당시 영화팬들한테 있어서 호접은 단지 스타였을 뿐만 아니라 어느 한 시대를 대표하는 이름이었으며 지어 당시 그녀를 숭배하는 것은 일종 문화이기도 했다. 호접의 고고성은 중화민족의 거대한 변화 및 영화업과 더불어 울리었다. 1908년 상해에서 출생, 그 해 광서황제와 자희태후가 선후로 죽었다. 그렇다면 호접의 일생은 중국의 봉건제왕제로부터 중화민국을 거쳐 중화인민공화국까지 탄생하는 격변기를 지켜본 일생이었으며 그녀가 생을 마감하는 1989년은 중국 대륙과 대만 사이의 냉전시기이기도 했다. 호접이 태어날 때 부모는 철도부문에서 근무했다. 그러한 연고로 호접은 부모를 따라 상해, 북경, 천진, 중경과 광주 등 대도시를 거쳐 나중엔 광주에서 오래 동안 머물었다고 한다. 이렇게 거의 중국대지의 절반을 돌면서 그녀는 북경말은 물론 광동말과 상해말까지 유창하게 구사했고 견식면이 넓은데다 양호한 가정교양으로 자랐다. 이는 소녀시절의 호접으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게 연예사업을 위한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 소녀시절의 호접(왼쪽 두 번째) 16살 때 부모를 따라 다시 상해로 돌아온 호접은 당시 중국영화학교의 제1기생으로 입학, 아울러 그녀의 예명 호접(胡蝶)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영화학교에서 학습하는 기간 호접은 다방면 재능을 익히기 위해 노력, 심지어 자동차운전기술과 기마기술까지 숙련되게 익히었으며 또한 당시 생활방식과 배우가 수요하는 기예를 장악하기 위해 촬영에 대한 연구에도 집념했다. 그녀는 자주 자신을 촬영하는 일꾼과 함께 촬영각도와 광선의 조절 등에 파고 들면서 촬영효과를 높이는데 많은 품을 들이기도 했다. 1926년 18살에 호접은 상해의 유명한 화보 “양우(良友)” 창간호 표지인물로 실리었다. 그해에 호접은 영화 “추선원(秋扇怨)”에 출연하면서 스크린생활의 진정한 첫 발자국을 떼었고 유명해시기 시작했다. 그 시기는 중국 영화의 탐색기술, 연기기술 및 시장 개척의 초보시기었고 또한 무성영화 시대었기에 배우의 표정예술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던 때였으며 배우 거개가 표정예술에 노력을 경주하던 시기었다. 당시 호접의 풍격은 이미 관중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는바 동작성이 크지 않으면서도 진실한 것이 곧바로 관중을 끄는 매력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당시 상해의 “붉은 장미 화보(红玫瑰画报)”는 호접의 연기를 두고 “성정이 고요하여 그 속에 여자규수의 풍격이 있으며 왁작지껄이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지금 와서 호접이 출연한 영화들을 보면 거의 호접한테서 “크나큰 욕망”같은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녀는 최대한 그 무슨 “욕망”같은 것을 억제하면서 자신의 인성을 연기, 그 표현기교는 형언할 수 없는 경지에 달하게 한다. 평소에 영화관람을 별로 즐겨하지 않던 한 관중은 호접이 출연한 영화를 본 뒤 “호접이 출연한 배역이 아무리 조용하면 할수록 그 속에서 더욱 장엄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라고 소감을 밝히었다. 또한 1940년 중국 경극예술의 아버지인 매란방(梅兰芳) 역시 호접이 출연한 영화 “절대가인(绝代佳人)”을 보고 “호접의 연기는 어느 유파를 대표하는 것으로 그녀는 조용한 것을 장기로 삼아 관람자들한테 자신의 수양깊이를 보여준다”라고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1949년 호접은 영화 “금수천당(锦绣天堂)”에 출연하여 여주인공역을 담당, 이 영화는 중국의 첫 칼라영화였다. 1928년 호접은 다부작 영화 “불타는 홍련사(火烧红莲寺)”에 출연, 도합 18집으로 된 이 영화는 무협영화로서 당시 무협영화의 조류를 일으켰으며 티켓판매수입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그 뒤 호접은 계속해 영화 “부자의 생활(富人的生活), “도화호(桃花湖”, “자유의 꽃(自由之花), “가수 홍모란(歌女红牡丹)” 등에 출연하면서 보다 실생활과 접근하는 인물로 많은 영화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1933년 3월 5일, 호접이 주역을 맡은 영화 “광류(狂流)”가 상해에서 첫 방영이 되면서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 영화는 1931년에 있는 특대 수재를 배경으로 사회의 최하층 사람과 상류사회 사람들간의 계급투쟁을 반영한 영화로서 특대 수재를 통해 민족위기를 경종하기도 했다. 당시 영화계의 평론가들은 이 영화야말로 중국영화의 새로운 노선을 개척했다고 대서특필했다고 한다. 호접의 행운은 동업계 영화인 중에서 그 생애가 가장 길고 출연차수가 많아서만이 아니다. 그녀는 수차례에 거쳐 영화계의 선구자로 되기도 했다. 1931년 호접은 중국영화계에서 선참으로 프랑스 백대영화회사와 합작하여 스크린에 출연했고 또한 중국의 첫 유성영화 “가수 홍모란”에 출연한 배우기도 했다. ▲ 영화배우 시절의 호접(촬영시기 미상) 호접의 배우생활은 1930연대에 들어 클라이막스로 치솟았다. 1935년 그녀가 주역을 맡은 영화 “자매의 꽃(姊妹花)” 등 몇부의 영화가 소련에서 있은 국제영화제에 선보이었고 선후로 독일, 프랑스, 스위스와 이탈리아 등 나라에서 방영되기도 했으며 그때마다 호접은 그런 나라를 방문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기도 했다. 이는 그녀의 생애에서 일대 화려한 대악장이기도 했다. 1935년 호접의 혼례는 당시의 중대한 문화적 대사였다. 친우들의 축복 외 영화계의 많은 인사들은 그녀가 앞으로 가정의 속박에서 벗어나 계속 나라와 영화계에서 기여하며 활약하는 “여대장부”가 되기를 기대했다. 특히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의 전신인 “의용군행진곡”의 작사자인 전한(田汉)은 한수의 시로서 호접으로 하여금 주방과 작별하고 영화에 매진하라고 격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혼 후 호접은 이러한 안목의 제약에서 벗어나기로 작심했다. 영화배우로는 전성기의 나이었지만 그녀는 점차 가정에 많은 정력을 쏟는 삶에 충실하기 시작했다. 즉 남편을 섬기고 자녀를 양육하는 것으로 제2의 인생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는 당시 조류였던 소위 진보여성 및 현대여성과는 다른 선택이었으며 그렇다고 남권사회에 얽매인 봉건여성의 선택인 것도 아니었다. 어찌 보면 당시 소위 가정을 버리고 “진보”만을 외쳐대는 극단적인 여성조류에 대한 일종의 반항었다. 일대 절색으로 20-30연대 중국의 영화계를 휩쓸었던 호접은 1989년 호접은 캐나다 밴큐버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20여 년이 지난 2016년 초 호접의 생전유품이던 진귀한 사진 50여점이 캐나다 밴큐버의 미술관(아시아부)에 전시되면서 사람들은 재차 민국시기의 이 영화황후를 머릿속에 떠올리었으며 이는 중국정부의 커다란 중시를 받기도 했다. 전시회가 끝난 후 밴큐버 미술과 아시아부의 총감인 정승천(郑胜天)은 중국영화사 연구원 이진(李镇)을 초청하여 그와 함께 수천부에 달하는 자료를 찾아 호접에 대한 자료를 수집, 도합 호접의 영화인생과 관련된 205점의 자료사진을 모아서는 그해 11월에 중국으로 돌아왔으며 1년여만의 준비과정을 거쳐 드디어 호접의 영상역사전시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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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27
  • 남의 눈으로 본 “청년경찰”
    ●김인섭 영화 “청년경찰”이 빚어낸 논란이 그냥 발효하고 있다.한국 땅에서 차별과 수모를 받으며 누적된 상처가 긁히어 발로되는 아픔일 것이다.   영화가 조선족을 악역으로 내세우고 애꿎은 대림동마저 마적굴로 만들어 500만의 관객에게 전염성 메시지를 건넸으니 혈한을 쏟던 조선족들이 침묵으로 일관할 수 없다. 그들은 이미 한국 생활의 부조화 단계를 뛰어넘어 지역 사회에 융합되고 지역민들과 화합을 이루는 새 시대를 열었는데 이 친구들이 지엽으로 나무숲을 가리는 시나리오를 꾸민 편협한 사고가 이상하다.꺼지는 불에 기름을 쏟고 ‘동족상잔’ 정서를 부추기는 행태이니 피해 당사자들과 지성인들의 반발은 리유가 충분하다. 이 작품을 반민족적이라 문책하면 도를 넘지만 그의 사촌 친척이라면 모자람도 없다.   대림동은 재한 조선족들이 ‘코리안 드림’을 펼치며 일궈낸 집거지로서 한국에서 일명 차이나타운이라고도 부른다. 그들은 몇십년간 설음을 이겨내며 생계 전쟁을 거치면서 여기는 이미 한국,중국,조선족 문화가 어울린 독특한 문화지역으로 변신하였으며 미래 한국의 다문화사회 모델이라는 긍정적인 기대도 부풀고 있다. 물론 조선족들의 범죄나 후진적 작태들이 오래동안 이슈화되기도 하였으나 현재는 초기 적응이라는 원시 수준을 뛰어넘어 지역사회 건설에 책임지는 성숙된 이방인으로 변신하고 있다.그런데 “청년경찰”이라니 ’아닌 밤중에 홍두깨’다.   오늘 한국 속의 조선족 사회 형성은 주류사회의 드팀없는 지원,지지와 지도가 결정적인 요인이었다고 단언한다. 조선족들도 병주고향(竝州故鄕)을 건설한다는 진지한 감정으로 자체 도덕 개선의 절박성을 인식하며 주인적 자태로 나서고 있다. 현실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단점을 들추고 침소봉대식으로 과장하며 동족 화합의 숲에 악병(恶病) 바이러스를 뿌려댄다.자기보다 나은 사람이면 환대하고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이면 멸시하는 한국 사회의 저급문화의 발현이라고 지성인들이 말하고 있다.   지난 50,60년대 한국이 어렵던 시기 수많은 한국 남녀들이 독일에 건너가 그 나라 사람들이 기피하는 광부와 간호사로 되어 핏땀을 쏟으면서 가난한 조국에 종잣돈을 만들어 보냈다. 수만으로 헤아리는 사람들이 ‘아메리칸 드림’에 매혹되어 쓸만한 수단은 다 부려가며 가난한 조국을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또 중국을 내놓고도 미국,유럽 지역에서 한국인들의 범죄가 쟁점으로 되어 한국에 먹물을 들씌우던 무색할 통양(痛痒)도 수없이 있었다. 이것은 오늘 조선족의 '코리안 드림'과 궤적(轨迹)을 같이 하는 한국 역사의 단면이다. 그렇다면 영화의 제작진들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명철한 사고로 조선족의 현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각설하고, "청년경찰"을 도문질타(到门叱咤)할 때 삶의 개선을 위해 찾아간 조선족들은 그 나라의 법질서와 국민들에 책임을 지는 신실한 자태가 있었던가 성찰이 있어야 한다. 지연,혈연,인연 등등 연고 문화가 뿌리깊고 혹독한 상하서열과 위계질서를 지켜야 하는 한국 땅이었다. 자기 치부를 감추는 가추불외양(家丑不外扬)심리와 아니꼬운 남이면 흉을 가배로 불궈놓는 속심은 인간 본성의 일부분이다. 어느 외인이던 그 공동체 속에서 불미스런 행위를 저지른다면 냉대는 말말고 공격의 과녁이 되고 동네북이 되는 현실은 자연스러운 인간세태이다. ‘한가마밥을 먹은 사람이 한울음을 우는’ 필연성도 당연한 인지상정으로 각인되고 있다. 그럴진대 재한 조선족들고 같은 처지면 똑 같아 진다는 역지개연 (易地皆然) 의 당위성으로부터 영화의 매개 측면을 고루 인식하고 만약 내라면 어떻겠나 관대하게 헤아려봐야 할 것이다.   현재 조선족 사회는 한국에 정착하는 추세를 이루고 있으며 많은 경제,문화,예술 단체들도 이미지 개선과 소통,상생,화목을 위하여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대림동이 ‘조선족 수도’로 격상한다는 소문도 파다하다. 뭐라해도 한국 땅은 조선족들에게 있어서 매력이 넘치는 땅이 틀림없다. 그렇다면“청년경찰”을 향해 진상 규명과 시비 판단을 호소할 때 영화 소재를 제공한 당신은 무었이었던가를 동시 고민해야 마땅하다. 특히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는 종시속(从时俗)의 고마운 실천이 관철되였던가를 내성(内省)하고 반성해야 한다.    언행범절의 곱냐밉냐에 따라 ‘주러 와도 미운 놈 있고, 가지러 와도 고운 놈 있다’는 세속의 도리는 따져볼 만한 리치이다. 조선족들에게 ‘가지고도 고운 놈’이 되는 지혜가 없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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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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