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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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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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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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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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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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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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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혁 칼럼] 죽음의 방주 - '페스카마'호
    ● 김 혁 (재중동포 소설가) 요즘들어 배가 화두다. 만경창파를 누벼야할 배가 어쩌구려 사람들의 눈물 속에 스미고, 가슴패기를 짓누르고 있다. 요즘처럼 배가 사람들에게 회자된적은 없는 것 같다. 무엇보다 수년 내내 눈물 위로 떠다니는 배는 '세월호'일 것이다. 3년전, 전남 진도군 앞바다에서 침몰, 300여명의 애닯은 청춘을 수장(水葬)시킨 비정의 “세월호”. 그 미수습자 신원의 발견과 확인에 온 세간의 젖은 눈길이 오늘도 모이고 있다. 대한민국의 바다에서 일어난 해난사고들 중 두 번째로 많은 사상자를 낸 사고에 조선족 한금희(녀, 37)씨와 리도남(남, 38)씨도 조난당했음이 확인됐다. 하지만 동질의 아픔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게시판에 세월호 중국인 사망자를 비하하는 글을 올린 혐의(형법상 모욕)로 권모(당시 27세 ·무직)씨가 불구속 입건되는 불미스러운 일도 발생했다. 권씨는 인터넷 한 사이트의 게시판에 '실종자 중 조선족 2마리가 있다는데, XX버리고 학생들이 살아났으면 좋겠다'란 글을 올려 중국인 실종자를 모욕한 혐의로 입건되였다. 또한 배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연극이 막을 올려 화제다. 선상 반란 사건 '페스카마호' 실화를 담은 문제작 연극 '페스카마-고기잡이 배'가 대통령의 취임 이튿날인 10일 막을 올렸다. 연극 '페스카마- 고기잡이 배'는 1996년 8월 남태평양에서 조업중이던 원양어선 페스카마15호에서 일어난 선상(船上) 반란 사건을 다룬다. 1996년 여름. 남태평양. 참치잡이배 “페스카마호”에 오른 승선경험이 전무한 조선족선원들은 수차례 작업설명을 해도 손이 느리고 서툴러 갑판장과 갑원에게 구타를 당한다. 한국선원들은 조업 실패를 조선족선원들의 탓으로 돌리며 더욱 심한 폭력을 행사하고 조선족선원들은 비인간적인 처우에도 한국 배에 타기 위해 맡겨놓은 거액의 보증금 때문에 협조하지 않으면 하선시키겠다는 선장의 말에 굴복하고 작업에 림한다. 평소의 열배나 많은 참치가 낚시에 달려 올라온다. 태풍이 예고된 상태에서 선장까지 갑판에 내려와 작업을 하기에 이른다. 이때 조선족 선원이 낚시에 걸린 참다랑어 한 마리를 바다에 떨어뜨린다. 이에 격분한 선장이 조선족 선원을 구타하자 맞은 선원도 선장의 뺨을 때리는 일이 벌어진다. 순식간에 칼과 흉기를 든 한국선원과 조선족 선원들이 갑판에서 대치하는데 나이가 많은 기관장이 중재하여 사태를 수습한다. 분을 삭이지 못한 선장이 조선족 선원 전원을 강제 하선시키기로 통보한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선족 선원들은 선장에게 찾아가 한번만 용서해달라고 빌지만 오히려 선장으로부터 강제하선은 물론이고 선상란동으로 형사고발조치를 하고 조업 손실금에 대한 손해배상까지 청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절망한다. 실의에 빠진 조선족 선원들은 한국인 선원들을 차례로 살해한다... 이 연극이 주목을 모은것은 제38회 서울연극제 공식 작품으로 선정된 작품이고, 충격적인 사건을 다룬 소재에도 있겠지만, 금방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이 인권변호사 시절에 변론을 맡았던 사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문재인은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당시, 이 사건의 조선족 선원 6명의 변론을 맡아 화제와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일각에서는 당시 문재인이 조선족 인권을 자국민에 우선시했다며 비난하면서 “문재인의 '아킬레스건'”이라 부르기도 했다. 조선족들의 선상 반란 사건에서 한국인 선원 7명, 조선족 선원 1명, 인도 네시아 선원 3명 등 11명이 숨졌다. 이 과정에서 조선족범인들은 칼과 도끼로 피해자들을 무자비하게 란자(亂刺)하고 찍었으며 저항력이 없는 환자를 산채로 바다에 내던져 죽이기도 했다.법원은 1심에서 해상 강도살인 및 시체유기 등 혐의로 전원 사형을 선고했다가 항소심에서 주범을 제외한 5명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이후 주범인 전재천 씨는 2007년 12월31일 로무현 정부 말기 특별사면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연극은 비극적인 사건을 재구성하면서 “인간의 권리”에 대한 많은 담론과 정서를 만들어 내는 한편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몸부림쳤던 조선족 선원들의 비극을 보여준다. 모두를 경악케 했고 가슴아프게 했던 이 사건은 이데올로기의 장벽에 불협화음으로 얼룩졌던 지난 90년대 중기를 다시 무대우에 소환한다. 20년전 한척의 배위에서 벌어진 연극과도 같은 이야기는 력사와 세월의 “만경창파”에서 한국과 민족적 동질성을 가졌던 이민자의 후예들이 만나는 과정을 서로 잘못 풀었던 시대적 “침몰”을 소급해 보여준다. 아픈 상처를 건드리며 동포 사이의 참극을 반추하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하지만 오늘도 우리는 다시 한번 그 상처자욱을 들여다 봐야 한다. 이 사건이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의 100여년 정착사에서 그 선례를 찾아볼 수 없고 한국과의 관계사에서 있을수 없는 끔찍한 비극이기 때문이다. “세월호” 조선족 사망자를 비하하는 글을 올린 상기 사례에서도 보다싶이 조선족에 대한 몰리해, 비하와 질시는 지금도 한국사회에서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비일비재한 악폐이다. 한국내 조선족 체류자가 70만을 넘기고있는 현재에도 선입견과 랭대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불협화음의 상대로 전락된 조선족도 부에 대한 단순하면서도 화급한 욕망으로 가족과 고향도 쉽게 내치고 스스로 "떠돌이자"를 자처한, 일그러진 “코리안 드림”의 허허실상에 대해 심각한 반추와 검토가 재다시 수요된다. 이렇게 서로의 소통과 화합과 상생의 장을 모색하지 않는 한, 페스카마호처럼 “어사망파”의 침몰선이 또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고 보장하는 수가 없다. 중한수교 25주년을 맞은 시점에서, 이로부터 한국과 조선족이 모두 교훈을 얻고, 상처를 리성으로 치유하는 예시로 이 연극에 큰 의미를 두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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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5-28
  • 사드 배치의 ‘희생양’이 된 롯데, 누구의 탓인가
    ● 우림걸 지난 2월 28일, 롯데그룹이 한국 국방부와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부지 교환 계약을 체결했다. 국방부가 소유한 경기도 남양주시 6만7000m2 규모의 군 용지를 롯데가 가진 148만m2의 성주 골프장과 맞교환해 이를 사드 배치용 부지로 활용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소식은 중·한 양국에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한국 정부에 사드 부지를 제공한 롯데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양국 국민들은 거세게 항의했다. 계약이 체결된 날 서울에 위치한 롯데 본사 앞에는 사드 부지 제공을 반대한다는 피켓을 든 시위대의 항의 시위가 이어졌다. 한국인들뿐 아니라 중국 네티즌들도 ‘롯데마켓(樂天市場)’이라는 웨이보(微博) 계정에 잇따라 불만의 글을 남겼다. 불과 1주일 만에 롯데는 중국 소비자들의 거센 압박을 체감했다. 롯데의 해외 사업부문 가운데 중국 사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중국 롯데의 사업 범위는 24개 성·시에 매장 120곳과 백화점 5곳에 이른다. 또 한국 각지에 분포한 롯데면세점의 매출액 가운데 70%는 중국 관광객으로부터 나온다. 이 때문에 롯데가 중국 소비자들의 장기 보이콧을 유발하면 막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을 물론, 한국 정부 사드 배치의 ‘희생양’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실제로 롯데그룹 계열사들의 주가는 연일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한국 재계 5위에 속하는 롯데 같은 대기업의 영업활동이 이처럼 엄청난 타격을 받고있는 것은 과연 누구의 잘못일까? 먼저 현재의 피동적인 국면이 초래된 데에는 국방부에 사드 배치용 부지를 제공하기로 한 롯데의 잘못된 결정 자체에 직접적인 원인이 있다. 롯데가 한국 정부와 교환하기로 한 토지가 일반 상업용지나 국방용지로 활용될 예정이었다면 이처럼 큰 논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롯데 측이 해당 부지가 일반적 용지가 아닌 국내외적으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사드 배치용 부지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있는 상황에서 여러 반대 의견에도 불구, 토지교환 계약을 승인했다는 점이다. 이는 일반적인 비즈니스 의사결정이 아닌 명백한 정치적 의사결정이라고 볼 수 있다. 롯데는 앞으로 스스로 화를 자초한 대가를 무겁게 치르게 될 것이다. 두 번째로 자국 기업의 희생에도 아랑곳 않고 독단적으로 사드 배치를 강행한 한국 정부의 행태 역시 롯데가 뭇매를 맞게된 근본적 이유 중 하나다. 한국 정부는 사드 배치라는 국가 이익과 결부된 중대한 사안 결정에 대해 국회와 국민의 여론을 수렴하지 않고 오히려 여론과 사회의 분열을 초래했다. 게다가 자국의 민간기업을 논란의 중심에 올려놓고 막대한 손실을 입도록 방조한 정부는 결코 책임있는 정부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중국 정부는 한·미가 주도하는 한국 사드 배치가 지역의 전략적 균형을 심각하게 깨뜨리고, 중국을 비롯한 지역 관련국들의 전략적 안보 이익을 훼손할 것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중국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드 배치를 강행하는 한편 자국 기업에게 토지 제공을 압박했다. 이 때문에 중국 소비자들의 한국기업 보이콧이 일어나고 중·한 관계가 후퇴하는 등의 결과가 초래됐다. 이런 정부는 주변국에 우호적인 정부라고도 볼 수 없다. 한·미의 한국 사드 배치 결정으로 인한 중·한 관계 급랭은 양국 국민 모두 바라지 않는 결과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는 말이 있다. 부디 한국 정부가 한반도 및 아시아 평화와 양국민의 이익을 위해 무엇이 정말 중요한지 하루빨리 깨닫기를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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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5-28
  • 중국군 10대 원수와 그 자손들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1955년 중국인민해방군은 제1차로 군직함제를 실행했다. 당시 중남해 회인당에서는 모택동이 주덕 등 10대 장군들한테 원수 직함을 수여, 그것으로 중국군내에서는 10명의 원수가 확정되었다. 그 때로부터 수십년이 지나갔다. 오늘 그 10대 원수들 중 생존해있는 사람은 한명도 없다. 하지만 그 10대 원수의 자녀들은 대다수가 생존해 있다. 그럼 그들의 자녀들은 그동안 어떻게 지내왔을까? ▲ 주덕과 그의 가족들. 주덕(朱德- [1886-1976]) 은 중국군 10대 원수중 서열 1번이다. 주덕 원수의 딸 주민(朱敏)일찍 북경사범대학 러시아어학부에서 사업, 교수연구실 주임 등 주임을 맡았으며 1986년 이직, 그 뒤 주덕 원수의 딸 주민은 북경군지양용인재양성원(军地两用人才培训学院)을 설립, 원장을 맡았으며 이 학원은 현재 북경군지전업연수학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주민은 일찍 구 소련 유학시절 당시 모스크바에서 함께 유학생활을 하던 유쟁(刘铮)을 만나 열애에 빠졌다가 결혼, 이들 사이에는 유건(刘建), 유강(刘康). 유민(刘敏)과 유무(刘武) 등 네 자녀가 있다. ▲ 팽덕회의 질녀(조카딸) 팽강(彭钢) 팽덕회(彭德怀[1898-1974])는 중국군 10대 원수중 서열 2번이다. 팽덕회의 질녀(조카딸) 팽강(彭钢)은 1949년 후 몇명 안되는 여장군 중의 일원이다. 팽강은 일찍 중공중앙 규율검사위원회 상무위원으로 몸담고 있으면서 <군대 내의 여포공(军中女包公)>으로 불리웠으며 소장직함을 갖고 있다. ▲ 임표의 딸 임립형(林立衡)(가운데) 임표(林彪[[1906-1971]])는 중국군 10대 원수중 서열 3번이지만 그의 전쟁승리 전과와 지휘능력은 첫번째로 꼽히고 있다. 임표의 딸 임립형(林立衡)은 일찍 <중국공군보>의 부주필을 맡고 있다가 1971년 9월 13일 아버지 임표가 비행기를 타고 외국으로 도망가다가 몽골의 언더르한에 떨어져 자멸한 뒤 격리심사를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1974년 7월 31일, 모택동의 특별 비준에 의해 격리심사에서 해방받았고 그 뒤 장청림(张清林)과 결혼하였으며 이어 정주의 한 자동차제조공장에 배치받아 사업하게 되었다. 중공 11기 3중 전회 후 임립형은 북경에서의 사업 및 호적 문제가 해결되어 중국사회과학원에 배치되어 사업하게 되었으며 남편 또한 북경시 위생부문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2002년 5월 임립형은 고향의 모 회사의 요청으로 북경 황학대호텔의 이사장 겸 총경리를 맡게 되었다. ▲ 유백승(刘伯承)의 장자 유태항(刘太行) 유백승(刘伯承[1892-1986]) 유백승은 신해혁명시기부터 종군하여 북벌전쟁, 8.1 남창봉기 및 토지혁명전쟁 등에 참가한 원수이다. 유백승(刘伯承)의 장자 유태항(刘太行)은 일찍 중국공군 모 연구소 부소장, 장갑병 작전부 부부장을 역임, 차자 유몽(刘蒙)일찍 중국군 총참모부 참모로 근무, 문학에 출중한 재능을 갖고 있으면서 <유백승전기>의 편찬사업에 참여하고 씨나리오 <청년유백승>을 창작하기도 했다. 셋째 아들 유태지(刘太迟)는 중국군 소장으로 공군사령부 장비부 부부장으로 근무하였었다. 유백승의 큰 딸 유화북(刘华北)은 일찍 1945년 6월 연안보육원 시절 적에 의해 암살당하였고 둘째 딸 유미군(刘弥群)은 중국군 소장으로 공군 지휘학원 부원장을 맡아했으며 셋째 딸 유해선(刘解先)은 중국군 북경군구 총후근병원 제1진찰부 의사로 지냈었고 넷째 딸 유응령(刘雁翎)은 중국군 총병원 핵의학과 연구원으로 북경의학회 핵의학전문위원회 위원으로 지냈었다. ▲ 하룡의 아들 하붕비(贺鹏飞) 하룡(贺龙[1896-196])은 8.1 남창봉기의 총지휘와 홍 제2방면군 총지휘를 맡은 원수이다. 하룡의 아들 하붕비(贺鹏飞)는 중국군 중장으로 해군 부사령원을 맡았었고 딸 하첩생(贺捷生)은 중국군 소장으로 군사과학원 군사백과연구부 부부장으로 있었으며 선후로 군사과학원, 총정치부, 무장경찰부대 등 부문에 자리를 옮기면서 연구 및 선전사업을 하는 한편 하룡원수를 추모하는 많은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 진의 원수의 장자 진오소(陈昊苏) 진의(.陈毅[1901-1972])는 남방유격대, 신사군, 제3야전군 등을 지휘한 원수로서 종군문인이기도 하다. 진의 원수의 장자 진오소(陈昊苏)는 일찍 북경시 부시장에 부임했었고 중국인민 대외우호협회 회장 겸 중러우호협회 회장도 맡았었다. 진의 원수의 차자 진주회(陈丹淮)는 중국군 소장으로 해방군 총장비부 과학기술위원을 맡았으며 진의 원수의 셋째 아들 진효로(陈晓鲁)는 중국 국제인재개발센터 인사대리단위표준국제투자관리 유한회사의 이사장이었으며 진의 원수의 딸은 진산산(陈珊珊)이었고 사위 왕광아(王光亚)는 중국외교부 부부장이었었다. ▲ 나영환 원수의 아들 나동진(罗东进) 나영환(.罗荣桓[1902-1963])은 정치사업을 대표하는 원수로서 중국군 중에서도 중국특색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나영환 원수는 중국군 원수들 중 학력이 제일 높은 인물로 유일한 대졸생이었으며 1927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나영환 원수의 아들 나동진(罗东进)은 1939년 2월 12일 생으로 1959년에 중국군에 입대, 일찍 중국군 제2포병부대의 부정위를 맡았었으며 후에는 중국 노혁명근거지 건설추진회 고문으로 있었다. 나영환 원수의 셋째 딸 나북첩(罗北捷)은 1949년 10월생으로 1972년 제1군의대학을 졸업하고 북경군구 304병원에 배치받아 의사로 근무하였었고 넷째 딸 나녕(罗宁)은 1951년생으로 현재 북경 개성실업유한회사(北京凯星实业有限公司)의 이사장으로 있다. ▲ 서향전 원수의 아들 서소암(徐小岩) 서향전(徐向前[1901-1990])은 홍군 제4방면군의 총지휘 신분인 원수이다. 서향전 원수의 아들 서소암(徐小岩)은 중국군 중장으로 해방군 총참모부 통신부 부장을 지녔으며 서향전 원수의 내질녀 황원지(黄远志)는 원 호북성 당위 부서기 겸 규율검사서기직을 맡았었다. ▲ 섭영진 원수의 딸 섭력(聂力) 섭영진(聂荣臻[1899-1992])은 화북야전군 사령원으로서 일찍 황포군관학교 교관출신의 원수이다. 섭영진 원수의 딸 섭력(聂力)은 중국군 중장으로 일찍 중국 국방과학기술 공업위원회 부주임으로 지냈었고 현재 중국 발명협회 상무 부이사장으로 있으며 전국인대 상무위원이다. 섭영진 원수의 사위 정형고(丁衡高)는 중국군 상장으로 중국 공정원 원사이며 중국 국방과학공정위원회 연구원 부주임, 주임 직에 종사하였고 현재는 중국관성기술학회 이사장으로 있다. ▲ 엽검영 원수의 장자 엽선평(叶选平) 엽검영(叶剑英[1897-1986])은 특수한 자이지위와 이력을 소유한 원수이다. 북벌전쟁으로부터 중공의 재건 중 그는 줄곧 중국군 정계의 대표로 특수한 지위에서 활동했다. 엽검영 원수의 장자 엽선평(叶选平)은 중국정협 부주석이었었고 며느리 오소란은 오옥장(吴玉章)의 손녀로서 심천시 인대 부주임이었으며 엽검영 원수의 손자 엽신복(叶新福)은 홍콩 만신회사의 총재이다. 엽검영 원수의 둘째 아들 엽선녕(叶选宁)은 중국군 중장으로 일찍 해방군 총정치부 연락부장을 맡았었으며 전국인대 상무위원으로도 있었다. 엽검영 원수의 셋째 아들 엽선렴(叶选廉)은 중국정협 위원으로 일찍 중국 개리회사(凯利公司) 이사장 겸 총재로 있다. 엽검영 원수의 장녀 엽초해(叶楚梅)는 중국 기계공업부 기계국 원 부국장있었고 큰 사위 소가화(邹家华)는 국무원 부총리직에 있었다. 엽검영 원수의 둘째 딸 엽향진(叶向) 홍콩에서 상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셋째 딸 엽문산(叶文珊)은 현재 해남화교투자유한회사의 부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그녀의 남편은 원 국무원 부총리었던 여추리(余秋里)의 아들 여방방(余方方)이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7-05-11
  • 자신감 얻은 연변 FC, "어떤 강팀도 이길 수 있다"
    ●김창권(연변대학 체육학원 교수) 최근 극심한 부진을 겪고 있는“동병상련”의 두팀인 장수 쑤닝과 연변부덕은 살아남기 위한 “생존”싸움에서 1대 1 무승부를 냈다. 첫승이 절실했던 장수는 아연실색 했으나 연변은 대체적으로 반기는 모습이다. 연변은 적지에서 소중한 승점 1점을 따냈다. 아쉬운 무승부였지만 후회없이 잘 싸운 경기였다고 본다. 원정에서 장수를 상대로 무승부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경기내내 보여준 연변 선수들의 전투정신은 물론 살아난 조직력과 골 결정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 연변은 장수와의 경기에서 원정 첫 승을 향한 간절한 마음가짐과 정신적 준비가 잘 된데서 그동안 원정경기에서 노출되었던 조직력결여와 골 결정력 부족이라는 단점을 완전히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번 경기에서 상당히 고무적인 것은 살아난 조직력과 공격력이라고 볼 수 있는데 바로 그 동안 이루지 못했던 원정경기에서의 선제골을 넣었을 뿐만아니라 상대가 추격해오면 다시 힘을 내서 분위기를 재차 가져오는 저력을 보여주었으며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된 점이라고 본다. 이번 경기에서 연변의 수비적인 전략(5-3-2 전술시스템)이 어느정도 예상되었으며 당연히 그래야 했다. 첫승에 목마른 장수의 파상공세(4-4-2 전술시스템)도 불 보듯 뻔했다. 연변은 세계 정상급 스타들을 보유하고 있는 장수보다 객관적인 전력도 열세라고 볼 수 있으나 전혀 움츠리지 않았다. 원정경기인만큼 경기 내용에서 밀리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기회가 올때마다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며 장수를 수시로 위협한 점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고 본다.  이번 경기에서 경기내내 연변은 자신의 장점인 패싱축구와 빠른 공수전환에 의한 간결한 역습으로 상대팀을 수차나 거세게 몰아부쳤으며 팬들은 오랜만에 연변의 약속된 플레이와 조직적인 플레이를 감상하게 되었다. 뭐니뭐니 해도 하나로 뭉친 연변의 해결사는 “아프리카 표범” 스티브였다. 날카로운 돌파와 공간침투를 과시하던 스티브는 전반 13분에 김파의 패스를 받아 시원한 슈퍼골을 성사시키면서 팀분위기를 완전히 연변 쪽으로 돌려놓았다. 이로 인하여 전반전은 마치 연변이 홈장전을 치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원정경기에서 비록 아쉬운 무승부로 승리를 거두지 못했지만 연변도 호락호락한 팀이 아니라 저력이 있는 팀이며 그것이 우연히 반복된게 아니라 사실이라는 것을 슈퍼리그 각 제후들에게 알려준 한판 승부였다고 본다. “든 자리”는 몰라도“난 자리”는 “티”가 난다는 말이 있다. 이번 연변의 원정경기를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연변은 68분 핵심 수비수 니콜라가 부상 때문에 교체되면서 5분도 채 안된 시각 73분에 상대방의 간판 공격수 테세이라(니콜라의 마크상대)를 막지 못한데서 아쉬운 동점골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수비수들의 개인 수비능력의 부족은 물론 체력저하로 인한 수비수들의 순간적인 집중력 부족으로 개인기량이 뛰어난 상대방 공격수를 막는데는 한계가 있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개인기량이 뛰어난 선수를 막는 방식은 대인방어보다는 조직적인 협력수비 그리고 공을 잡기전에 미리 움직임을 방해하는 선제적 수비에 초점을 맞춰야 하지만 이번 경기에서 연변은 이런 부분에서 다소 부족했다고 본다. 이번 원정경기에서 보여준 준비된 정신상태와 경기력이라고 한다면 연변은 앞으로 그 어떤 강팀을 만나도 자신만의 플레이를 펼칠 수 있을 뿐만아니라 승점도 챙길 수 있다고 본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7-05-09
  • 유능한 우리민족
    ● 철 민 일전 무심결에 중국축구 슈퍼리그 각 구단의 감독진 및 선수진 명단을 훑어 보다가 중국 슈퍼리그에 한국적 감독과 용병이 특히 많다는 것에 감탄하면서 무릎을 쳤다. 2017년 중국 슈퍼리그 16개 구단 중 한국감독 4명, 한국용병 10명이었다. 이 중 한국감독은 3명인 중국 본토감독보다 1명 더 많았다. 우리 한민족이 축구에 유능하다는 생각이다. 중국 축구계에 많은 한국인 감독과 선수가 포진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변부덕 구단의 조선족 감독조리와 선수 20여명, 거기에 전국 각 슈퍼리그 구단들에 포진해 있는 조선족 선수 11명까지 합치면 우리 한민족 축구인들이야말로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다. 유능한 건 축구인들 뿐이 아니다. 인구 5천만명인 한국은 세계인구 70억의 14분의 1에 속하는 인구 중도국에 속하지만 유능한 사람이 많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축구를 비롯한 스포츠 분야에는 유능한 사람이 많다. 2010년 밴큐버동계올림픽 여자피겨종목 금메달 리스트 김연아를 포함해 손연재, 박태환 등 쟁쟁한 인물들이 줄지어 있으며 그 외 전 유엔사무총장 반기문, 미국의 세계은행 행장 김용 등을 선두로 거물급 인사도 적지 않다. 다음 중국을 보자. 중국은 인구대국이다. 이 중 조선족은 지난 제6차 인구보편조사 때의 통계로 200만 명도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200만명 중에도 유능한 인물이 많다. 우선 정치적 인물이자 군사가인 조남기 전 중국정치협상회 부주석 겸 중국군 총후근부 부장, 이덕수 전 중국 국가통전부 부장, 전철수 현임 중국 전국 공상연합회 주석 등을 포함해 각 분야에도 내노라 하는 인물들이 수두룩하다. 예하면 예술분야에선 중국의 4대 테너 일원이라는 성악가 김영철, 유명 바리톤 송일, 쏘프라노 방초선, 통속가요 왕자 최경호가 있는가 하면 군사계에는 정순주, 옥종환, 이영태, 김인섭 등이 있다. 특히 몇 년 전 중국군 제2포병부대의 미사일기술 여성 전문가 이현옥이 장군으로 진급해 일대 인기를 얻기도 했다. 그럼 전세계에 널려 있는 유능한 한민족 인물은 얼마나 되며 또 어떠한 인물들이 있을까? 이는 필자로서는 집계할 방법이 없다. 유능한 민족 - 한민족 만세! 이는 필자가 이 글을 쓰게 된 가장 중요한 동기이다. 우리 한민족은 머리가 비상하고 영리하며 또 끈질기며 강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친절하고 예의가 밝으며 남 돕기를 즐기는 민족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렇듯 타민족한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많은 우수성을 갖고 있는 우리 한민족임에도 부분적 약점들이 노출되어 있으니 그것도 어떤 병폐적인 약점은 아주 치명적인 것이어서 얼굴이 뜨거울 때가 자주 있어 부끄럽다. 우리 한민족의 얼이 얽힌 땅 한반도는 주변에 중국, 일본과 러시아 등 강대국들로 둘러싸여 있다. 또한 역사적 원인 및 인위적 원인 등으로 남과 북으로 분단된 상황이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우리 한민족이 지나치게 총명해서인지 한민족은 등에 강자(강국)를 업는 경우가 많다. 그 가장 뚜렷한 사례가 옛날에는 신라가 중국의 당나라를 등에 업고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이고 현재로는 전쟁의 화약고를 방불케 하는 한반도의 남과 북의 엄연한 현실이다. 한민족끼리 싸우는 경우가 허다하며 그렇게 싸울 때마다 각 자의 뒤에는 강자(강국)가 있었다. 다음 한민족은 뭉치지 못한다. 그 전형적인 사례로는 필자가 해외선원으로 근무하던 1991년 남미주의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서 한국선원들과 타이완선원들이 싸움을 벌였는데 싸움이 지속될수록 타이완선원들은 점점 많아지는 반면 한국선원들은 점점 줄어들었다. 무리를 지어 싸우는 것을 비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타아완선원들은 싸움이 지속될수록 많아지고 한국선원들은 싸움이 지속될수록 적어졌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으며 생각되는 바가 많았다. 그리고 그 당시 마산출신의 서춘철 2기사가 필자한테 들려준 말에 더욱 생각되는 바가 많았다. “한국인은 1 대 1에는 무서운 것이 없지만 10 대 10의 대결에는 걱정되는 것이 많다.” 한민족의 열근성을 잘 설명하는 답이었다. 한편, 동족끼리 싸우는데는 목청이 높고 자못 격렬한 한민족이다. 크게는 남북끼리, 그 버금으로는 지역끼리, 정당끼리가 그렇다. 그 전형적인 사례 또한 이번 제19대 대통령 선거기간의 TV토론에서 각 후보들간의 기싸움에서 잘 반영되고 있었다. 앞날에 대해 방향을 제시하는 것보다는 과거에 매달리면서 상대방 후보의 약점을 들추어 내면서 심지어 인격공격도 서슴지 않는 부분들이 아주 많았다. 그러면서도 중국의 <사드보복>과 미국의 <한국무시> 책략 등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인 한민족(정치인 및 외교인)이다. 또 있다. 바로 <용두사미(龍頭蛇尾)>란 사자성구가 생동하게 떠오르는 부분이다. 필자가 가장 잘아는 선명한 사례는 필자가 나서 자란 연변을 들 수가 있다. 주지하다 싶이 핑궈리(苹果梨-사과배), 가무(노래와 춤)와 축구는 전반 중국이 알아주는 연변의 3대 브랜드였고 중국조선족의 귀중한 문화유산이었다. 이 중 핑궈리는 1921년 당시 육도하(지금의 용정시)에서 살고 있던 조선인 최범두가 조선 함경도 북청으로부터 6주의 사과나무 묘목을 가져와 당지의 돌배나무와 접목시켜 열리게 한 과일이 바로 핑궈리었고 1953년부터 전 연변 내에서 대대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으며 수십 년 간 연변의 자랑으로 문사자료와 노래 등에 담아 남아 내려오게 되었다. 다음 연변의 가무는 원체 노래와 춤을 즐기는 우리민족인지라 연변이라는 민족 집거구가 생기자 연변 문공단(연변가무단 전신)의 창단을 계기로 각 시현마다 예술단을 세웠으며 이 중 연변 문공단은 지구 급을 뛰어넘어 성급 예술단체로 발돋음 하기도 했다. 우리민족 축구 또한 역대로 소문이 높았다. 지난 세기 50-60연대 중국 국내의 모든 전업축구단마다 조선족 선수가 있을 정도로 우리민족은 축구에 유능하기로 이름났으며 당시 중국 국가임업축구단에는 감독으로부터 선수에 이르기까지 100%가 조선족일 정도였다. 그리고 조선족이 절대 다수(한족이 단 1명-탕펑샹[唐鳳])인 길림성 축구단은 중국의 4대 강팀 중의 하나였으며 1965년에는 중국 전국축구 갑 급 연맹전의 우승고지를 점령하기도 했다. 헌데 이러한 것들이 이젠 “아, 옛날이여!”로 되고 있다. 연변의 핑궈리는 장기간의 기술양도와 당도와 수분 그리고 모양새 등 기술연구분야에서 새로운 업그레이드가 흐지부지한 탓에 이전에 연변에서 기술을 양도했던 깐수(甘肅). 닝샤(寧夏) 등지의 핑궈리에 비해 품질상 크게 떨어지고 있다는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연변축구는 아직은 여전히 중국슈퍼무대에서 종횡무진하고 있으며 연변은 중국의 중점적인 축구발전지구로 선정되고 있지만 지난 세기 50-60년대에 비해서는 크게 각광받지 못하고 있는가 하면 자금상과 인력상의 요소 등으로 현상 유지가 어려운 상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앞날 또한 명랑하지 못하다는 것이 필자의 분석이다. 다음은 연변의 가무이다. 현재 연변에서는 주정부의 차원으로 연변가무단과 연길시 조선족예술단을 대폭 지원하고 있기에 연변의 가무는 여전히 중국 내에서 여전히 큰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소수민족예술이라는 점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이지 그것을 배제하면 과연 전국을 놀라게 할만한 것이 있겠는가 하는 것도 의문스러울 정도이다. 그리고 현재 재정상황으로 연변 주 내 대부분 시와 현의 예술단체가 해체된 상황, 만약 정부측의 지원마저 없다면 연변가무단과 연길시 조선족예술단의 생존도 장담하기 어려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우리 한민족이 <용두사미>와 같다는 것은 경제분야에서도 노출되고 있다. 연변의 50-60대 조선족들은 거의 모두가 알다 싶이 연변의 유명한 기업이었던 연길 담배공장과 연길 맥주공장의 창업자들은 모두 우리민족 기업인들이었다. 하지만 이 두 기둥기업 역시 후에는 기업경영권을 한족들한테 내주었다가 이제는 타지의 기업과 합병하거나 매각까지 되었다. 연변 조선족경제의 허실을 진실하게 반영하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 한민족의 <용두사미>의 근성, 필자의 이 분석이 맞는다면 서로 입 싸움을 하면서 뭉치지 못하는 폐단과 더불어 민족의 발전과 장대에 아주 큰 걸림돌로 되고 있다. 지나치게 총명해서일까, 아니면 <약소민족과 약소국가한테는 외교가 없다>는 말이 통해서일까? 여하튼 여러 가지로 추리되고 분석된다. 그렇다고 우리민족이 희망이 없다는 건 결코 아니다. 필자한테는 한족친구들이 적지 않다. 중국에 있을 때 그 친구들은 “조선족은 깨끗하고 영리하며 한족에 비해 앞선 시대적 의식을 갖고 있다”며 평가하군 했었다. 이는 필자가 조선족이니 필자의 앞에서 좋은 말을 하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들의 말에 일리가 있었으니 말이다. 무턱대고 사람과 사람, 민족과 민족을 비교하는 건 아니지만 우리민족은 확실히 다른 민족보다 여러 가지 우수성이 있었다. 적어도 문명, 예의, 스포츠와 예술에서 그랬고 군인 같은 강한 정신력 및 부지런하고 끈질긴 근로정신 등에서는 어느 민족한테도 짝지지 않다는 것도 그렇다. 다만 뭉치지 못하고, 시작은 훌륭하나 뒤끝이 흐지부지한 <용두사미>같은 열근성만 근절하면 우리민족은 지혜민족의 후손이라는 유대민족보다도, 약삭빠르고도 빈틈없다는 소화민족보다도, 한 우물만 파며 부지런하고 꾸준하다는 중화민족보다도 더욱 우수한 민족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더욱 당당하게 한민족 만세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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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5-06
  • [미니칼럼] 꼬마 축구팬의 눈물
    ● 김 혁(재중동포 소설가) “행복한 눈물(Happy Tears)”이라는 그림이 있다. 유명 광고나 만화책에서 이미지를 차용 해 작업하는 미국의 팝 아티스트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이다. 그림은 2002년 뉴욕의 어느 한 경매에서 715만 9500 달러에 경매되였다. 당시 영국 BBC 뉴스는 이 작품이 고가에 판매, 경매 기록을 깼다는 기사를 내보낸 적 있다. 이 그림은 지금 한국 삼성 이건희 회장의 자택에 걸려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작품이 인상적이였다기 보다는 그 가격 자체가 충격적이였다. 오래 된 만화책에서나 볼법한 촌스러운 아가씨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운 그림이 수백만대를 호가한다니? 사람들은 과연 이 그림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가졌지만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머금은 아가씨의 얼굴은 그로서 강렬한 이미지로 모두들의 뇌리에 남았다. 며칠전에도 우리는 행복한 눈물을 목격했다. 4월 16일, "백두의 호랑이" 연변팀 대 하북팀전에서 올 시즌 첫 꼴을 터뜨리자 꼴문을 연 용장 김승대와 그 꼴에 도움을 준 윤빛가람 못지 않게 관중들의 주목을 받은 축구팬이 있었다. 선수와 팬들이 흥분의 도가니로 들끓는 사이 생방송 카메라는 홀연 한 꼬마 축구팬을 포착했다. 부진에 시달리던 우리의 "호랑이"가 올 시즌 첫꼴을 선사하는 순간, 한 꼬마가 격동에 못이겨 그만 눈물 왈칵 눈물을 터뜨리는 장면이였다. 붉은 빛 응원 유니폼을 입은 앳된 얼굴의 소년은 목에 두르고 있던 응원 타올로 얼굴을 감싸고 오열을 터뜨렸다. 곁자리 친구의 다독임에 마음을 안추리고 다시 눈물 머금은 얼굴로 꼬마는 “연변팀 이겨라”를 목청껏 복창하고 있었다. 이 장면은 시청자들의 감동과 공명을 자아냈고 그 동영상이 인터넷과 위챗을 달구어 불과 며칠사이에 5만회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피폐한 환경, 풍토에 "안구건조증" 환자가 속출하고 눈물을 잃어가고있는 요즘 세월 인공눈물까지 등장하고 있다. 어느때 부터인가 세상은 진정한 눈물을 잃어버렸다. 대신 위장된 눈물, 계산된 눈물로 넘쳐난다. 돈으로 치환되는 눈물도 있다. 그에 비하면 한 꼬마 축구팬이 자신의 팀을 위해 흘린 눈물을 우리는 그야말로 거금으로도 환산할수 없는 수정같은 눈물이라 높이 사고 싶다. 그것은 정녕 순수한 눈물, 값진 눈물, 행복의 눈물이 아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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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고
    2017-04-21
  • [칼럼] 더민주 당원들 "누구를 밀어야 할까"
    ● 소정선 (칼럼니스트) 3일 마지막 경선 투표을 앞두고 민주당원들이 딜레마에 빠졌다. 당내 유력주자 문재인 전대표에 맞선 2위 안희정 충남지사의 국민적 인기가 식을 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경선과 대선이 따로 노는 여론의 불일치 현상이다. 호남, 충청, 영남 경선을 끝내고 마지막 격전지 수도권 경선을 앞둔 현재 문재인 후보의 누적득표율은 59%로 수도권에서 득표율 45%만 넘으면 본선 직행이 가능하다. 안희정지사와 이재명시장은 영남경선이 끝난 직후부터 전체 선거인단 3분의2에 해당하는 136만 5천명의 수도권 표를 겨냥한 최후의 선거운동에 나섰다. 다수 전문가들은 그러나 큰 이변이 없는 한 수도권에서 문재인후보가 45%을 넘겨 대선주자가 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최근 여론조사에서 민주당 대선후보 적합주자로 2위 안희정 지사가 여전히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가 31일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양자 대결 시 문 전 대표와 안철수 전 대표는 각각 41.7% 대 39.3%로 오차범위(±3.1%포인트) 내에서 박빙 승부를 벌일 것으로 전망됐다. 그러나 안 지사가 안 전 대표와 양자 대결을 벌일 경우 각각 44.8% 대 34.8%로 10%포인트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안 지사는 민주당 경선에서 문 전 대표에게 밀리고 있지만 본선 후보로선 경쟁력이 가장 높은 것이다. 이 조사가 가지는 의미는, 안지사는 경선 이전부터 대선후보 적합도에서 계속 수위를 달려왔는데 경선 막바지인 최근까지도 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그 추세가 변함이 없다는데 있다. 오히려 문대표가 대선주자가 되면 안지사 지지표의 33.3%가 안철수 전대표로 옮겨간다는 것이다. 물론 다자대결이 될 경우 표가 다소 분산되지만 후보간 우열에는 큰차이가 없고, 또한 향후 대선은 양자 대결이 유력하다. 민주당을 진보로 볼 때 자유한국당, 바른정당의 지지도가 미미한 가운데 박근혜 전대통령의 구속 등의 영향으로 보수쪽의 지지율은 낮게 전망된다. 이럴 경우 중도 진보나 보수표의 일부가 안철수 전대표 지지로 기울면 문재인 후보는 선거에 패할 가능성도 크다. 민주당 일각에서는 ‘경선이냐, 대선이냐’는 본질적 의문을 던지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최근 경선을 빗대어 ‘안방대세 Vs 국민대세’로 비아냥 대기도 한다. 당내 경선에서는 문재인이 독주하지만 국민여론은 안지사가 우위에 있다는 의미다. 대선주자로서 문후보에 대한 불안감이 높아지고 있다. 경선초기부터 안지사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가 높아지면서 대다수 언론에서도 문 후보에 대한 불안감을 표시했다. 최근 여론조사에서조차 ‘절대 투표하지 않을 후보’로 문재인이 27.5%를 얻어 1위를 달리고 있다. 적폐청산을 주장하면서 줄세우기와 무차별 영입, 지역감정 조장 등 스스로 적폐세력을 닮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당내 경선에서도 댓글부대의 동원 등 문후보측의 더티플레이도 다른 경선주자를 자극하고 있다. 아들 취업비리, 개인 건강문제 등 혹독한 검증을 문후보가 견뎌낼지도 의문이다. 민주당내의 한 인사는 “박정희가 죽고 민주화를 염원했는데 전두환이 나타나 더 강한독재를 했고, 박근혜 탄핵되고 차원높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데 판박이의 더 교묘한 패권정치가 나타날 것”을 우려했다. 경선이 진행될수록 문후보에 대한 여론의 반감이 높아지면서 김종인, 홍석현등 원로그룹들에 의한 대연정론 시도 움직임도 최근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이들은 안철수 후보와 일부 보수 세력을 연합할 경우 보수를 안고 가는 후보가 당선될 것을 자신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당 일각에서는 안지사의 탈당과 대연정 대선후보 옹립을 거론하는 인사들도 있다. 국민적 지지율이 당내 선두주자 문재인후보보다 높고, 정치역량에서는 안철수 전대표보다 우위에 있어 대선주자로 나설 경우 실제 지지율이 높을 것이라 장담한다. 지역 정치 경험 등에서 얻어진 자신감으로 다수를 아우를 유력후보이며, 원로그룹의 지지에다 대중적인 표 흡인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이다. 탈당 반대론자들의 반론도 만만치 않다. 민주당의 한 열심당원은“지지자들은 그럴 수 있겠지만 안지사는 그럴 생각이 없을 것이다. 민주당의 개혁과 정당중심 정치 지도자인 안희정이 원하는 길도 아니다. 대연정은 사회통합과 민주제도.개혁을 위한 방법이지 대연정이 목표는 아니”라고 강변한다. 과거 이인제 후보의 탈당을 추억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당시의 경우 새 트렌드인 노무현이 부상하면서 구세대인 이인제가 자연스럽게 탈락하는 과정이었지만 현재의 새트렌드는 안희정 지사라는 주장이다. 대연정론을 비롯한 안희정지사의 ‘정치적 상품성’이 범보수와 양심적 진보층의 지지를 얻을 경우 탈당의 명분을 상쇄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탈당파의 한 관계자는 “안지사가 던진 대연정의 파장이 크다. 국민들도 이제 눈치를 채 버렸다. 일당 독주는 옳은 방법이 아니며 다른 방법도 얼마 던지 모색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제 널리 퍼졌다”고 패러다임의 전환을 강조했다. 문재인 후보의 지도력에 대한 우려가 현존하는 현실에서 현재 여론 추세가 지속되면 진보진영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민주당 지지표만 굳은 상태에서 더 이상 표가 들어오지 않고 범보수와 안철수 지지층의 표가 결집하면 이번 대선에서도 민주당은 눈앞의 승리를 놓치게 된다. ‘확실한 필승 카드로 갈 것이냐, 관성적인 지지로 또한번 좌절할 것인가’ 민주당의 행로는 3일 고척돔의 선거인단 손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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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고
    2017-04-03
  • [칼럼] 연변말이 창피한가?!
    ● 허연화 연변에서 태여나고 자란 필자는 연변말이 참으로 정겹고 좋다. 일본에서 산지 오래되기에 연변말을 할 수 있는 지인을 만나서 연변말로 대화하는 시간이 너무나 즐겁고 소중하다. 하지만 중국의 다른 지역 조선족이거나 한국 지인, 자이니찌분(재일동포)들과 대화할 때는 무의식적으로 연변말의 특유한 억양을 감추려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연변말의 특유한 억양과 특수한 중국식 우리말 단어가 다른 환경에서 자란 우리 민족들과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에 영향을 줄수 있다는 배려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연변사투리를 혼자 한다는 것이 왠지 낯뜨겁다는 의식이 조금은 있었던 것 같다. 연변말이 정겹고 좋은데 무의식적으로 “표준우리말”과 갈라서 사용하려 하였던 것이다. 아마 독자들 중에도 나와 같은 경험이 있거나 현재 이런 상황인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왜 이렇게 연변말을 “표준우리말”과 갈라서 사용하려는 상황이 발생할가? 그것은 단지 편의를 고려해서일 뿐일가? 본래 언어자체는 서렬을 매길 수 없다. 하지만 현실생활에서 의식조사를 해보면 어느 나라에든 낮게 평가되는 방언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일본에서 동북지역의 방언은 촌스럽고 열등하게 평가되며 이 지역 출신의 사람들은 일본 다른 지역에 갔을 때 방언을 억제하는 경우가 많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또한 한국 국내에서도 서울 및 서울말의 패권주의가 사회적문제로 논의되기도 한다. 허나 같은 방언이라도 표준말보다 호의적이고 자랑스러워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일본의 교토, 오사카 지역에서 많이 사용하는 간사이벤(関西弁)이라는 방언은 현재 일본에서 널리 알려져 있으며 호의적인 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다. 특히 교토지역은 교토말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며 다른 지역으로부터 온화하고 아름답고 정중하다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럼 왜 어떤 방언은 열등감을 조성하고 어떤 방언은 자랑스럽다고 느끼는 것일가? 그것은 인간이 가지고있는 편견에서 온다. 편견이라는 단어는 종종 나쁜 결과와 연계할때가 많지만 사실 그렇지만은 않다. 편견이란 어떤 집단의 성원이 다른 집단에 대해 가지고있는 의견이나 태도를 말한다.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선입견은, 많은 경우 직접적인 증거라기보다 얻어들은 소문에 의한 경우가 많으며 새로운 정보를 눈앞에 직면해도 쉽게 변화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같은 편 의식”을 느끼는 집단에는 호의적인 편견을 갖고 있고 그렇지 않은 집단에는 부정적인 편견을 가지는 경우가 있다. 특정된 집단에 대해 부정적인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그 집단에 대해 공평하게 대하기를 거부한다. 그럼 이런 편견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가? 우선 매체의 영향으로부터 분석할 수 있다. 연변사람, 연변말의 경우 한국TV의 뉴스와 드라마, 연예프로에서 부각된 모습이 사람들에게 주는 영향이 크다. 사실 한국에서의 “조선족”은 연변출신 뿐만은 아니라 흑룡강성, 요녕성출신도 많다. 연변 이외의 출신의 말투는 연변말투와 다르며 경상도쪽의 말투와 비슷한 점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조선족”하면 연변사투리를 구사하는 사람이 부각된다. 문제는 메체에서 보도되는 “조선족”의 표상이 특히 한국 진출 초기에는 사회 밑층에서 사는 폭력적이고 거칠며 도시화되지 않은 모습이 위주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국 진출 초기 조선족이 종사한 일이 같은 한국사람일지라도 천대받고 기피하는 원향어선이나 3D(Dirty, Difficult, Dangerous)업종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말이 통하는것 같은데 아닌것 같은, 서로 안다고 생각했는데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을 느끼던 적응단계였기에 크고작은 많은 트러블이 생길수 밖에 없었다. 한국에서의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매체에서 비춰지는 조선족의 이미지도 변화되고 있지만 아직도 초기단계의 이미지가 뿌리깊게 작용하고 있다. 하여 아직도 조선족이 쓰는 연변말은 흔히 조롱의 대상이 되군 하는게 사실이다.  연변말의 한국에서의 마이나스적 이미지의 영향은 한국사회 뿐만아니라 중국사회 및 중국의 조선족사회에도 파급된다. 한국과 만나기전의 연변말은 중국의 조선족들이 쓰는 여러 억양중의 하나에 불과했고 연변조선족자치주라는 이름이 보여주듯이 중국의 조선족사회에서는 중심이였고 연변말은 주류어였으며 연변에서는 “표준어”로 통했다. 같은 연변에서 사는 한족들도 연변말을 따라하거나 하여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쇼핑중심이였던 서시장일대를 가면 조선족이든 한족이든 “아재, 아재”하고 말을 걸어오군 한다. “아재”란 연변에서 젊은 여성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또한 연변은, 중국의 다른 민족으로부터 자기 민족의 특유한 문화를 유지하고 있고 춤 잘추고 노래 잘하며 깨끗하고 부지런한 민족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의 55여개 소수민족 중에는 천만을 넘거나 가까운 소수민족도 많다. 200만명(2010년 인구조사에서는 183만명)도 안되는 조선족이지만 예술에 능하고 교육률이 높다는 평가를 받게 되기까지 중국인민해방군국가를 만든 정률성으로부터 시작하여 현재의 강경산원사(중국에서 과학기술방면의 최고학술칭호), 중국대지의 각 대학의 조선족교수들, 우리말/우리문화를 유지하려는 모든 조선족들의 노력이 있었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한국붐이 중국대지에 퍼지면서 한국 매체에 비춰지는 조선족의 이미지는 중국에서 알려진 이미지와 너무 다르다. 게다가 중국처럼 큰 땅떵어리에서 소수민족이라는 개념조차 없고 조선족이라는 이미지 자체가 없는 지방에서는 되려 한국 매체에서의 “조선족”의 이미지가 실제 이미지로 자리잡을 때가 많다. 매체의 마이나스적 효과는 연변이미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매체는 소외, 모방살인, 사람들사이의 무관심의 생성, 편견의 강화, 중대하고 복잡한 문제의 왜소화와 간단화를 조성할 수 있다는 지적을 많이 받아왔다. 물론 시청취자들은 그냥 피동적으로 매체가 보여주는 것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은 아니다. 시청취자들은 몰입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절로 해석하고 분석하는 능동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기억력은 별개다. 영국의 어떤 대학의 연구팀에서는 과거 TV뉴스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력을 체크하는 과정에서 뉴스의 객관성보다 화면에 비춰진 폭력적인 기억이 고대로 사람들의 기억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주류매체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는 연구결과이다. 매체가 만드는 것은 부정적인 편견 뿐만이 아니다. 우에서 말한 일본의 간사이지역 방언의 경우가 매체에 의해 전파된 긍정적인 편견에서 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의 강호동, 류재석으로 통하는 산마, 신스께 등 개그맨거장들이 간사이 지역 출신이고 또한 연예프로그람에서 간사이 출신의 사람들이 자주 등장함으로써 간사이벤이라는 방언을 전 일본에 침투시켰다. 상업화된 매체가 주류인 현대사회에서 객관성을 가지기란 어려운 작업일 것이다. 하지만 매체를 비판적 눈으로 관찰해야 할 중요성은 계속 강조되어야 한다. 편견은 또한 한 집단이 처한 경제적위치와도 관련된다. 한국의 여러 동포들 중에서도 연변말투가 유독 촌스럽다고 부각되는 것은 왜일가? 그것은 한국과 중국이 만난20세기 90년대의 중국의 경제적 상황에 의한 것이 많다. 즉 같은 동포라 할지라도 재일, 재미 동포는 한국보다 발전한 나라에서 온 동경의 대상이고 중국, 구소련 동포들은 한국보다 못사는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구소련 지역 출신의 동포, 재미, 재일 동포들은 우리말자체의 보유가 매우 어려운 역사적, 사회적 환경에 의하여 우리말 자체의 유지가 되어있지 못하고 사투리로라도 우리말을 구사할 수 없는 사람이 오히려 더 많다. 하지만 중국에 이주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노력과 중국소수민족정책이 유효하게 결합됨으로써 소수민족 집중 거주지에서 민족학교를 꾸리고 조선말로 공부를 할 수 있고 심지어 대학입시시험도 조선어로 시험을 볼 수 있다. 타향에 이주해서도 우리말로 말하고 글을 쓰는 매우 행운스러운 집단이 조선족인 것이다. 물론 연변말은 다른 모든 방언들과 마찬가지로 조선말에서 나왔지만 또 자기 지역의 특정에 따라 변이를 거친 것은 사실이다. 다른 민족들과 어울려 살면서도 자신의 언어를 잃지 않은 것에 대한 자부감을 갖고 있었는데 되려 “고국”에서 그렇게 소중하게 유지해온 우리말이 우리말이 아니라고 비웃음을 당한격이다. 못사는 나라에서 온 가난한 동포, “가난하다는건 게으른 것이고 못배워서이다”는 한국사회의 가치관이 바탕이 되여 조선족이 쓰는 언어마저 가난해지고 천대받게 된 것이다. 사실 알고 보면 한반도외에서 유지된 소중한 우리말의 변이인데도 말이다. 편견은 또한 역사적, 정치적 요인과도 관계된다. 예를 들면 일본의 동북지역방언이 자타평가에서 열등적으로 평가받는데는 이 지역이 역사상 분단되고 정치적세력이 약화됨으로써 이 지역의 문화자체도 부당한 평가를 받은 역사가 현재까지 내려온 것이 이유가 아닌가고 분석하기도 한다. 반면 교토는 오랜 세월 일본의 중심이었고 일본스러움의 모든 상징으로서 일본인의 귀속의식이 교토에 있다고 보는 사람도 많다. 언어의 이미지는 그 지역의 역사적인 평가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살면서 여러 지역의 우리민족과 접촉해보면 우리말의 다양성과 변이를 느낄 수 있다. 각 지역의 우리말들이 억양이 다르고 쓰는 단어도 다를 때가 있지만 서로 느끼는 우리말의 기본적인 정서는 공통한 것이 너무 많고 정겹다. 작년 3월, 일본의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学)에서 윤동주 시인을 기리는 모임이 있었다. 시인이 남겨놓은 시를 읊는 부분에서 필자는 너무 감동을 먹었다. 우리가 다 아는 윤동주의 시들이 서울억양, 재일동포억양, 조선족억양, 일본인의 우리말발음억양으로 각각 읊어 귀에 들려오는 것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감동에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연변말이 낯뜨거웠던 그 시절이 낯뜨겁던 순간이었다. “우리말”이라는 것이 “표준어”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범주로 의식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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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3-29
  • [김정순 칼럼] '침묵의 나선이론' 노린 졸렬한 꼼수 아니길
    ●김정순 언론학 박사 / 휴먼에이드 미디어센터장  대통령선거일이 47일 앞으로 다가오면서 정치권의 대선 시계가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다. 이런 가운데 더불어민주당 대선경선 후보 간에 치열한 공방이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다수의 매체와 정치전문가들은 민주당 경선이 본선보다 더 치열할 것으로 보인다며 핫이슈로 다루고 있고, 더불어민주당 후보들 간 공방전은 각 매체들의 머릿기사 소재로 등장한다. 이런 와중에 지난 22일 저녁, 더불어민주당 현장투표 개표 결과로 추정되는 미확인 자료가 SNS를 통해 유출되는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면서 당 안팎은 물론 정치권이 벌집 쑤셔놓은 듯하다. 괴문서에 의해 압도적 1위로 드러난 문 후보 측은 '이는 가짜'라며 '찌라시'쯤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안희정·이재명 후보 측은 당 지도부와 선관위를 향해 강하게 항의하고 있어 심한 후폭풍이 예상된다. 예비경선 유출 정보는 그자체로 파급력이 매우 클 것으로 보인다. 정보의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유권자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선관위는 선거일이 임박했을 때의 여론조사 발표를 금하고 있는데, 이는 '밴드왜곤효과(Bandwagon effect)'에 의해 여론이 우세한 쪽으로 쏠리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침묵의 나선이론(Spiral of Silence Theory)'도 있다. 여론 형성 과정이 한 방향으로 쏠리는 모습이 마치 나선형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이론은 독일의 여론조사 기관 설립자이자 커뮤니케이션·정치학자인 노엘레 노이만에 의해 이름 지어진 것으로, 이에 의하면 인간은 고립의 두려움이 있어 사회적으로 우세한 여론에 편승하려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지지자가 가장 우세해 자신이 다수편이라는 것이 확인되는 경우, 지지자를 떳떳이 밝혀 점점 나선모양으로 확장되면서 커지는데, 반대로 자신의 지지자가 열세인 것이 보이면 사회적 고립을 염려해 침묵하다가 마침내 심연 속으로 사라져버린다는 것이다. 물론 이 이론을 경선을 앞두고 있는 지금의 우리 정치현상에 적용하는 데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선거의 판세를 가름하는 호남경선을 앞둔 시점에 유출된 것이어서 경선 후보자들은 물론 유권자 입장에서도 여간 김이 빠지는 게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압도적 1위로 밝혀진 문 후보 측은 이번 기회를 통해 '대세론 굳히기'를 펼치기 좋은 호재를 얻었다. 반대로 1위를 추격하는 후발주자들 입장에서는 본게임도 치르기 전에 뚜껑이 열리고 내용물이 공개되는, 김이 새고 맥이 빠지는 기분일테다. 2, 3위를 지지하는 다수의 유권자들은 투표도 하기 전에 '지는 게임'으로 판단해 자칫 행동하지 않고 침묵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각 후보 진영의 유·불리를 떠나, 이번 괴문서의 내용이 실제 결과이고 이게 유출된 것이 맞다면 정말 큰 문제다. 민주당 지도부와 선관위의 경선 관리에 큰 오점이 될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다시 태어나려는 대한민국의 정치에 희망을 걸고 싶은 국민에게도 찬물을 끼얹는 일이기 때문이다. △기득권과 주도권을 유지하려 불공정한 방법을 동원하는 졸렬한 꼼수 △권력 쟁취를 위해서라면 동지도 벗도 가볍게 저버리는 작태 △권모술수를 '정치의 기술' 쯤으로 여기는 태도 등, 어디서 많이 봤던 것들이다. 다름 아닌 더불어민주당이 청산하고자 하는 역겨운 '구악정치' 행태 아닌가. 이번에 벌어진 '괴문서 사건'은 결코 가벼이 볼 일이 아니다. 더불어민주당 후보 당사자들의 이해를 떠나, 새 세상을 갈망하는 유권자들을 심하게 유린한 행위일 수 있다. 선거관리위원회는 이번 사건의 진상을 명확히 규명해야 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7-03-24
  • 도시화, 국제화 시대의 조선족과 그 대응
    ●최학송 조선족은 조선반도에서 이주해온 과경민족이다. 19세기 후반으로부터 시작된 조선인의 중국 이주는 1945년 일제 패망 당시 근 200만명에 이르렀다. 일제의 패망을 계기로 이중의 절반 정도가 조선반도로 돌아갔으며 나머지 절반인 근 백만명은 계속 중국에 남아 생활해왔다. 이렇게 중국에 남은 조선인과 그 후손들이 우리가 오늘 말하는 조선족이다. 오늘날 조선족 인구는 근 200만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중의 절반 정도가 또다시 동북을 떠나고 있다. 지리적으로 보면 조선족은 이주 초기부터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중심으로 하여 주로 동북삼성에 모여 벼농사를 위주로 농업생산에 종사하면서 생활해왔다. 그러나 개혁개방 후, 특히는 1992년의 중한수교를 계기로 조선족은 장기간 생활해오던 삶의 터전을 떠나 해외로 관내로 이주하여 도시적 삶을 살아가고 있다. 현재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이 7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이나 미국 나아가서는 유럽에도 적지 않은 조선족이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통계마다 일정한 차이가 있지만 일본에만 적어도 몇만명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외 북경, 상해, 광주, 청도, 위해 등 중국 연해지역에 진출한 조선족도 적어도 20, 30만명은 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 조선족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동북삼성을 떠나 연해도시나 해외에서 도시적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제 조선족은 더는 농경민족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세계”라는 말은 불교에서 나왔다고 한다. “세”는 시간을 가리키고 “계”는 공간을 가리킨다. 시간과 공간은 만물이 존재하는 기본형식으로서 사람들의 인식, 즉 세계관도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조선족이라는 군체는 20세기 동북이라는 시공간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때문에 오늘날 “조선족”이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내포, 다시 말하면 “조선족”하면 떠오르는 이주, 개척, 투쟁, 벼농사, 사과 배, 주덕해 등 사건이나 인물들도 대부분 20세기 동북이라는 시공간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20세기라는 시간은 이미 과거가 돼버렸다. 그리고 동북이라는 공간도 지금 바야흐로 과거형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북경, 상해 등 연해지역이나 한국이나 일본과 같은 해외에서 새롭게 생활의 터전을 마련하여 살아가는 조선족들에게 동북은 차츰 과거형으로 돼버리고 있으며 이들의 자식 세대에 이르러서는 동북은 선조들이 한동안 살았던 곳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과거가 되어버린 시간은 역사를 통하여 되돌릴 수 있으며 공간은 여행을 통하여 체험할 수 있다고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조선족이라는 군체의 지속적인 발전을 담보할 수 없다. “조선족”이라는 이 이름 속에 부단히 새로운 공통의 경험과 인식을 바탕으로 하는 내용물을 보충해 넣지 않는 한 언어와 문화, 역사를 배우는 것을 통한 정체성 보존은 한계가 있을 것이다. 20세기 조선민족이 살길을 찾아 해외를 떠돌면서 중국조선족, 고려인, 재일조선인, 재미조선인 등 자신만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가진 하위분류를 만들어낸 것처럼 21세기 조선족도 그 나름의 하위분류가 생기지 말란 법이 없다. 그리고 그런 하위분류가 외부의 충격과 흡인력에 어느 정도의 저항력을 갖고 있을지도 궁금하다. 때문에 조선족 지성인과 매체는 그 힘을 모아 각지에 분산되어 살아가는 조선족들에게 역사를 통한 과거를 배워주는 동시에 조선족이기에 가질 수 있는 기회와 좋은 점들을 공유시키는 것을 통하여 세계를 무대로 하는 21세기 조선족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내고 그 과정에 “조선족”이라는 이름의 내포를 부단히 보충하고 갱신하여 조선족이라는 군체에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신문, 잡지, 라디오, 텔레비전 등 전통매체의 전파범위가 오늘날 조선족의 거주공간을 아우르지 못한다면 인터넷홈페이지나 스마트폰을 활용한 위챗 공공계정(微信公众号)과 같은 신흥매체를 통하여 조선족을 하나로 묶을 가능성은 있다. 문제는 조선족을 하나로 묶는 매체를 채울 내용물이다. 조선족이기에 가질 수 있는 기호와 가능성을 제시해주는 콘텐츠의 발굴이 시급하다. 물론 이런 내용물은 조선족이라는 신분을 지나치게 부각시켜 당지 사회와의 거리감과 반감을 조성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는 조선족 후속 세대들에게 정체성 혼란만 가중시킬 것이다. 【최학송 략력】 성명: 최학송(崔鶴松) 소속: 중앙민족대학 조선언어문학부 전공: 조선족문학, 재중조선인문학학력: 한국 인하대학 문학 박사연변대학 조문학부 문학 학사경력: 현재 중앙민족대학 조선언어문학부 부교수 주요 론저: 저서로는《재중 조선인 문학 연구》(2013)、《주요섭 연구》(2014), 역서로《1946년 북조선의 가을》(2006)이 있으며, 이 외에 《‘만주’체험과 강경애문학》(2007) 등 론문 20여편을 국내외 학술지에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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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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