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3(월)
 

편집자의 말: 중국의 저명한 영화배우 김산(金山)은 1911년 절강태생으로 본명은 조묵(赵默)이다. 

1920년대 김산은 상해에 가서 시화를 배우는 한편 아마추어로 경극공연에 참가하다가 1936년부터 영화계에 입문, 선후로 “광환지야(狂欢之夜)”, “밤중의 노래소리(夜半歌声)” 등 여러편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1946년 김산은 장춘영화촬영소 건립사업에 착수, 촬영소 창립자로 되었으며 이 해에 영화 “송화강에서”의 감독을 맡아하였다. 그는 선후로 중국희극가협회 부주석, 전국 문련위원, 전국정협위원 등 직을 맡았었다. 1982년 7월, 김산은 병으로 타계하였다. 향년 71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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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산과 손유세

1950년 10월 14일, 북경청년궁은 등불이 찬연하고 음악소리가 흥겹게 울려퍼졌다.
 
이 날 이 곳에서는 29세의 여인 손유세와 39세의 남성 김산의 결혼식이 있었다. 결혼식에는 북경에 있는 각계 명류인사들이 분분히 찾아와 이들의 결혼을 축하해주었으며 주은래의 부인 등영초도 찾아왔다. 이날 등영초는 이들에게 아주 진귀한 선물을 주었다. 이 선물인즉 새로 출범된 “중국 국가혼인법”으로 이를 선물한 것은 현시대의 부부답게 “혼인법”에 충실하라는 이었다.
 
결혼 후 김산과 손유세는 중국청년예술극원에서 김산한테 분여해 준 숙소에 신혼살림을 차렸는데 당시 손유세의 여동생 손신세(新世)가 언니와 함께 있다보니 매우 불편해하였다. 그러자 주은래와 등영초는 손신세의 고충을 헤아려 주어 자기네가 살고 있는 서화청에 와 함께 살도록 하였다.
 
당시 주은래와 등영초는 손신세를 월생녀(粤生女儿)라고 친절하게 불러 주었다. 그리고 주총리가 외국방문을 갈 때마다 등영초는 손신세를 집에 불러 함께 자게 하면서 주로 총리에 침대를 사용하게 하였다.
 
이 시기 손신세는 매우 유쾌한 나날을 보냈으며 생활도 아주 안정되였다. 헌데 그 때 언니 손유세의 혼인생활이 풍파를 겪게 되었다. 1951년 김산과 문화예술위문단이 북한에 나가 위문활동을 하게 되었다. 당시 김산이 6.25를 소재로 한 씨나리오를 쓰겠다고 하자 김일성은 대단히 기뻐하면서 자기의 여비서로 하여금 김산의 가이드 겸 통역을 맡게 하였다. 헌데 얼마 되지 않아 김산과 김일성의 여비서가 눈이 맞아 탈선행위를 저지른 것이 탄로되어 그 여비서가 총살형에 언도되고 김산은 당적을 직무를 박탈당하는 처분을 받았다.
 
이 일은 손세유로 하여금 크나큰 충격에 빠지게 했다. 하지만 결국 손세유는 김산을 양해해 주었고 이것으로 하여 김산은 아내한테 크나큰 감동을 받기도 했다.
 
그 뒤 손신세는 소련 레닌드라드대학에 유학하여 러시아문학을 저공하게 되었다. 이러자 등영초는 손신세가 조국을 멀리 떠나 고독해 한다고 경상적으로 책을 보내주고 편지를 써주면서 관심하군 하였다. 그러자 손신세 또한 모든 일을 등어머니한테 회보, 자신이 남친인 이종창을 사귀게 되자 이런 소식도 등영초어머니한테 알려주군 하였다. 이에 등영초 또한 손신세가 자기의 반려를 찾은데 대해 진심으로 축하해주군 하였다.
 
1957년 2월, 손신세는 소련에서 결혼식을 올리었고 또 얼마 되지 않아 귀국해 북경대학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손신세는 등영초어머니와 총리아버지를 자주 만날 수 있게 되어 무등 기쁘기만 했다.
 
그 뒤 손신세가 아이를 출산하자 등영초와 주은래는 아이를 이뻐해하는 한편 더욱 이들 부부를 아껴주었다. 특히 어린 것이 말을 하게 되어 TV를 통해 영초할머니 혹은 총리할아버지를 보았다고 하면 총리네 노부부는 아이가 기특하다고 하면서 자주 어린 것의 볼에 뽀뽀를 해주군 하였다.
 
헌데 이런 날을 그닥 오래가지 못하였다. 얼마 안되어 문화혁명 폭풍우가 도래하자 이들 부부는 총리네 부부를 더는 볼 수가 없었다.
 
문화혁명이 시작되자 강청은 손세유가 이립삼(李立三)한테 극장티켓 한번 선물한 것을 이유로 억지로 손세유한테 “소련수정주의 간첩”이란 죄명을 씌웠으며 장기간 조리돌림을 시키기도 하였다.
 
손세유는 자기가 잡혀가기 전에 어느 금요일 저녁 여동생 손신세와 비밀리에 천안문앞에서 만났다. 그녀는 여동생한테 “난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절대 자살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내가 죽게 되면 이는 타인한테 박해를 받아 죽은 것으로 될 것이다. 너는 이것만은 꼭 믿어주기 바란다”고 하였다.
 
과연 얼마 뒤 손세유는 반란파들의 시달림을 받아 억울하게 죽게 되었다. 언니의 죽음은 손신세로 하여금 비할데 없는 분노를 느끼게 하였다.
 
손신세는 그 누구보다도 언니 손세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희생된 후 손유세는 어머니와 함께 상해에서 숨어살다가 16살이 되어서야 겨우 조직을 찾았고 후에 주은래와 등영초의 추천으로 소련 동방예술학교에 입학했던 것이다. 소련에서 손세유는 소련의 위국전쟁에 참가하기도 했다. 한편 그는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기에 1950년 모택동과 주은래 등이 소련을 방문했을 때 모택동과 스탈린, 주은래와 스탈린 사이의 통역을 담당하기도 했었다. 이렇듯 당과 국가의 지도일군한테 충직한 언니가 어떻게 수정주의 간첩으로 될 수 있단 말인가?!
 
문화혁명시기 손신세 역시 “현행 반혁명분자”란 감투를 쓸 수 밖에 없었다. 헌데 이상하게도 몇차례의 비판과 투쟁을 받은 뒤 그냥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후에 알고 보니 당시 북경대학에 진주한 군대표는 손신세에 대한 자료를 근본 “중앙 문화혁명소조”에 바치지 않았던 것이었다.
 
한편 문화혁명시기 손세유와 마찬가지로 박해를 받다 감옥으로 갔던 김산은 1975년 4월에야 만기석방되었고 집으로 돌아온 뒤에서 아내 손세유는 일찍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손신세는 옥살이를 하고 나온 김산을 돌보기 위해 김산으로 하여금 자기의 집에 와 거처하게 하는 것으로 아내를 잃은 김산의 만년생활이 안위를 얻도록 하였다.
 
얼마 후 문화혁명이 결속되자 손신세는 20여년간 사업해온 북경대학을 떠나 중국TV예술위원회로 전근하였다. 이어 손신세의 남편 이종창이 병으로 세상뜨자 이 가정에는 오직 김산과 손신세만이 친인으로 남게 되었다.
 
사람의 인연이란 참 미묘할 때가 많다. 손신세의 남편 이종창은 임종시 아내한테 자기가 죽은 후에도 김산을 잘 돌봐주라고 부탁했고 그가 죽은 뒤 김산 역시 손신세의 집에서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얼마 안되어 김산은 당조직에 편지를 보내어 그와 손신세가 결혼하도록 비준해줄 것을 희망하였다.
 
1976년, 50세가 된 손신세와 나이 65세가 된 김산은 손잡고 서로 상대방 심령을 위로해주면서 새로운 인생길에 들어섰다.
 
1978년 김산은 중앙희극학원 원장 겸 중국TV예술위원회 주임직을 맡게 되였다.
 
1982년 7월 7일, 김산은 돌발성 뇌익혈로 타계, 향년 71세었다.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손신세 노인의 친인들은 모두 한명씩 저 세상으로 떠나갔다. 현재 손신세의 자식들은 모두 해외에 체류, 노인은 경상적으로 출국하여 자녀와 손군들을 만나보군 한다. 하지만 노인은 여전히 북경의 옛집을 잊지 않고 있으며 청명절이 돌아올 때마다 북경의 공동묘지에 가서 친인들을 찾아보군 하고 있으며 몇개의 기념일을 잊지 않는다. 주은래총리가 서거한 날, 등어머니가 별세한 날, 언니가 순직한 날과 김산이 타계한 날… 그리고 “문회보”에 추억록을 발표하여 돌아간 친인들에 대한 그리운 정을 담기도 했다.
 
현재 손신세 노인은 한권의 회억록을 준비, 생전에 이를 완수하지 못하면 친인들한테 미안한 노릇이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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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한 뒤 처제와 재혼한 중국 영화배우 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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