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3(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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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리"와 "발이"
    ●김경화(재중동포작가)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애가 급기야 발리(<발>: 발이의 중국식 꼬부랑혀 발음)????를 입 밖에 토해낸 것은 지난 4월말경의 어느 아침, 유치원에 가려고 자기 스스로 신을 신다가 말고서였다. 나는 한참이나 멍해있을 수밖에 없었다. 설마 했는데… 남편과 나는 둘 다 출근족이다 보니 애가 일곱 달 되던 때부터 남의 손에 맡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친정 쪽에도 시집 쪽에도, 단 하루도 애를 봐줄 수 있는 사람조차` 없다보니, 물론 친할머니, 외할머니 다 계시지만 연세도 있고 사정상 애를 맡길 수 없는 상황이라 그동안 보모 손에서 전탁으로 전전긍긍하면서 그야말로 전쟁을 치르듯 살아왔던 우리. 애를 제대로 봐줄 수 있는 보모만 구했더라도… 여러 가지로 마땅치 않아 골머리를 앓으면서 지내오다가 아들애가 스무 개월 되던 지난해 11월, 끝내 참지 못하고 탁아소(어린이집)를 알아봤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생겼다. 우리가 사는 구역이 한족(중국인)들만 모여 사는 집거구역이라 조선족탁아소를 찾을 수가 없었다. 시내 공중버스를 이용해 애를 데려가고 데려올 수 있는 그런 곳도 샅샅이 돌아보았지만 한족탁아소뿐이였다. 그러던 중 우리 집과 가까운 곳에 규모가 잡히고 환경도 괜찮은 유치원을 발견했는데 마침 탁아소까지 곁들어 있어 마음이 끌렸다. 한족유치원이긴 했지만 조선족반도 있었고, 탁아소에도 한족선생님 두 명에 조선족선생님 한 분이 계셔서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시간상 더 돌아볼 여유도 없어 아들애를 그 유치원에 붙이기로 결정했다. 한창 말을 번지기 시작하던 때라 혹 꼬부랑 한족(중국)말부터 배우지 않을까 내심 우려도 했지만 조선족 선생님이 계시니 괜찮을 거다, 그리고 한족말 배워서 나쁠 것도 없지 않은가. 중국에서 살고 있는 한 한족 말을 능숙하게 하는 것도 어쩌면 낭패는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애를 유치원에 데려가고 데려오고 하는 일을 나보다 시간적 여유가 더 많은 남편한테 떠맡겼다. 그냥 별 탈 없이 유치원과 집 사이를 잘 오가는 아들애를 보면서 소반부터 조선족반으로 옮기면 된다고 간단하게 생각했고 .마마(엄마), 빠바(아빠), 나이나이(할머니)와 츠판(밥 먹어) 정도의 한족 말을 구사하는 것은 그저 좋게만 받아들였다. 주변에서도 중국어와 한국어를 동시에 구사하는 아들애를 보고 어린 것이 대단하다며 칭찬할 때면 솔직히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했었다. 그런데 바로 그렇게 내가 방심하고 조금씩 으쓱해하고 있는 사이에 아들애의 혀는 어느새 중국 특유의 꼬부랑혀로 변해가고 있었고 언제부터인가는 한족말만 해대고 조선말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조선말은 시켜봐야 겨우 한두 마디 하는 정도였고 일상용어가 완전히 한족말로 바뀌운 것이다. 몇 마디 말을 더 시켜봤더니 그전에는 잘만 하던 "오리"도 어느새 "올리"로 꼬부라져 있었고 대신 한족 말은 아주 정확하고도 또렷하게 발음하는 것이었다. 그나마 조선말은 하기 싫어 짜증을 부리기도 했다. 나보다 유치원사정에 더 밝은 남편이 어느 날인가 아들애네 탁아소에 조선족애가 두 명뿐이라 선생님들이 거의 조선말을 안 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나름대로 중국 땅에 살지라도 자기 민족의 뿌리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다니던 내가 어쩌다가 아들애를 혀꼬부랑이로 만들었단 말인가! 중국에 사는 조선족, 이중성을 띤 민족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떡하다보니 우리는 고국을 앞뒤에 두고 타국을 조국이라 부르면서 살게 된 것이다. 다행이라면, 중국에서 살고는 있지만 자기 민족의 언어와 풍속습관, 문화를 잊지 않고 지키고 발전해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가 중국에서 한족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면서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에 조선족인구가 점점 줄어들고 있어 2,3십 년 후에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없어질 지도 모른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또한 우리 민족교육이 위기에 처한 것도 타민족에 비해 현저하게 낮은 조선족 인구 출생률 문제도 있겠지만 더 큰 문제는 많은 학부모들이 자식을 한족학교에 보내고 있다는 점이다. 어려서부터 중국어를 배우면 물론 좋은 점은 많다. 중국어를 능란하게 구사하고 중국인들 속에서 그들과 어울려 그들의 문화를 배우고 생활해 가면 중국이라는 이 거대한 땅덩어리에서 생존해나가기에는 많이 유리할 것이다. 이는 자식을 한족학교에 보내는 부모님들의 공통된 생각이기도 하다. 자기 자식을 중국에서 좀 더 편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그들에 대해 왈가왈부 말썽들이 많았지만 내 자식을 위한 부모의 마음 그것을 누가 감히 뭐라고 할 것인가.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중한 수교 이후로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점점 커가는 양국 간 경제무역 거래로 인해 중국 내지에 한국어에 능통한 인재 수요가 급증했고 중국인들 속에서 한국어 학습 붐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어 학습 붐은 여기 조선족 집거지인 연변에도 세차게 불어치고 있다. 연변대학 한국어학부는 응시하는 수험생이 너무 많아 고시에서 어지간한 높은 점수를 맞지 못하면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또한 갈수록 많은 한족들이 자기 자식을 조선족 학교에 보내고 있다. 그런데 내가 아들애를 한족 유치원에 보냈다는 큰 실수를 저지르다니. 김치와 토장국으로 식단을 차리고 빨래를 푹 삶아 짱짱 빨래 방치소리까지 곁들여야만 직성이 풀려하는 내가 아니던가. 조선족은 참 알뜰하다, 이런 식의 칭찬을 중국인들한테서 들을 때면 가슴 한구석이 뿌듯했던 내가 아니었던가. 어디 가서나 가장 자랑스러웠던 그 한마디― 저는 조선족입니다, 바로 그거였는데. 한류열풍이 중국대륙을 강타했을 때 인터넷상에선 한국과 조선족은 어떤 사이냐고 묻는 중국인들이 많이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고. 현재 중국에 살고 있지만 그들과 똑같은 조선민족이라고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며 설명해주곤 했다. 중국을 항상 앞서가는 한국이 우리의 고국이고 한국인들과 같은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이 큰 자랑이었다. 그런데 나는 어느새 아들애를 허울만 조선족인 우리말도 할 줄 모르는 중국애로 키워가고 있었다. "발리", 그것은 누가 들어봐도 중국인이 우리말을 하는 그런 모습인 것이다. 먼 훗날, 아들애가 어느 날 "엄마, 엄마는 왜 날 자기 민족의 언어도 제대로 구사 못하는 놈으로 만들었어요? " 하고 물어온다면 과연 나는 무엇이라 대답해야 되는 것일가? 그리고 어느 날, 중국인들이 왜 당신 아들애는 자기 민족의 언어도 제대로 구사 못하는가고, 과연 조선족이 맞긴 맞냐고 한다면 그 역시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나 스스로 만들어낸 숙제 앞에 나는 기분이 착잡해져만 갔다. 아들애가 민족어를 잊어가고 있는 것에 대해 절대 그대로 놔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들애를 민족어도 구사할 줄 모르는 반쪽짜리 조선족으로 만드는 죄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아들애도 나처럼 우리 민족에 대한 긍지감을 안고 살아가게 하고 싶었다. 단군의 피와 살을 이어받은 몸으로서 내 민족의 전통과 언어, 문화를 지키고 빛뿌리며 거기에 타민족의 언어까지도 잘 구사할 수 있는 사람, 그것이 바로 우리 민족의 후예다운 모습이고 이 시대가 바라는 인재가 아니겠는가. 이제라도 나는 아들애를 "발리"가 아닌 "발이"를 정확하게 구사할 줄 아는 진정한 조선족으로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내 민족을 사랑하고, 그래서 내 민족의 언어, 문화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빛뿌려갈줄 아는 그런 인간으로 말이다. 지금 아들애는 집과는 거리가 좀 멀리 떨어진 조선족유치원에 다니고 있다.. "발리사건"이 있고 나서 불달린 마음으로 유치원을 옮겨버린 것이다. 거리가 멀다고는 하지만 통근차가 아침저녁으로 다녀서 큰 불편은 없고, 무엇보다 교령이 십년이상 되는 아들애 담임 선생님이 참 맘에 들었다. 아들애도 처음엔 그동안 한족유치원을 다녀서인지 첨엔 생활이나 언어 등 면에서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더니 한 달이 지나니 새로운 환경에 점점 적응되고 다른 애들하고 잘 어울려 놀기 시작했다. 우리말 노래도 배우고 춤도 배우고, 단어도 하나하나 익혀가는 모습이 대견스럽기만 하다. 따라서 "올리(오리)", "발리(발)" 등 중국식 꼬부랑발음을 하던 혀도 많이 펴진 듯 했다. 이제 발을 "발리"가 아닌 "발이"로 옳게 발음할 수 있는 아들애, 오리를 "올리"가 아닌"오리"로 옳게 발음할 수 있는 아들애. "곰 세 마리", "반딧불" 등 우리말 노래도 제대로 다 부르고 만두가 아닌 토장국에 김치를 좋아하며 어른들을 만나면 구십 도로 허리를 굽히면서 «안녕하세요? 잘 가세요,» 등 인사도 제법 잘한다. 이제 나는 아들애한테 우리 말 우리글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사랑하는 그런 민족의 자긍심을 가르쳐줄 것이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전통과 역사를 가르칠 것이다. 단군할아버지가 누구이며 훈민정음을 만들어낸 세종대왕이 누구인지를 가르쳐줄 것이다. 그래서 먼 훗날 아들애가 성인이 되고난 후 중국이거나 한국만이 아닌 세계 그 어느 곳에 가서더라도 우리 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안고 우리 민족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게. 오늘도 나는 아들애에게 "발이"를 해보라고 한다. "발이, 발이". "발리"가 아닌 "발이, 발이". 그리고 나는 아들애한테 이렇게 속삭인다. 이제 너는 그 두 발(발리가 아닌 발이)로 중국이라는 이 땅덩어리 위에서, 더 나아가 세계의 중심에 서서 자신만의 세상을 그러안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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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16
  • 中 고대 유적지 비싼 티켓값에 두 눈 화들짝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중국의 고대 유적 – 누란 유적지를 한번 둘러보자면 그 티켓 값이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하지만 중국 고대 한시기 번영융성하던 누란 소국의 유적으로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평가이다. 황사 백 번 싸워야 황금 갑옷을 입게 되고, 누란을 깨뜨리지 않으면 절대 돌아오지 않으리(黄沙百战穿金甲,不破楼兰终不还)… 이는 중국 고대의 문학가인 사마천이 자기의 저서 <사기(史记)>에서 언급한 구절이다. 누란은 중국 고대에서 서역(西域)의 일개 소국(小国)이었으며 또한고대 <실크로드(丝绸之路)>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지역이었다. 현재 누란국은 오직 그 유적만을 남기고 있으면서 당년의 그 짙은 신비한 색채를 보여주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 탐색하고 싶은 고장으로 되고 있다. 헌데 누란은 가고 싶다고 해서 무조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머니 사정이 허락해야 되는 것이다. 요해에 따르면 누란 유적은 현재 중국에서 가장 고귀한 역사 경관으로 티켓값만 해도 3500위안이다. 이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걸음을 멈추게 한다. 이는 필경 도시 웬간한 월급쟁이들의 1개월 노임에 거의 맞먹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가격 여기 그닥 비싼 편이 아니라고 한다. 하긴 적어도 중국사람이라면 그래도 어느 정도 감당이 가능한 정도로 누란 유적 티켓 값을 정하지만 외국인이라고 할 때는 다르다. 적어도 30만 위안을 준비하고 누란 유적을 돌아볼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이러면 더욱 화들짝 놀랄 것이나 누란 유적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 역시 전문가들의 평가이다. 누란은 서성에서 가장 동쪽에 있는 소국으로 실크로드 노정 중 아주 중요한 지위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사기>의 기재에 따르면 누란 고국이 건립되어서부터 소실되기까지 도합 80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었고 멸망된 후에는 일부의 폐허만 남긴 상태로 전반 누란 고성의 용지면적은 12만 제곱미터였다. 아쉬운 것은 현재 고성 내부는 이미 여러 곳이 붕괴되었고 대부분의 건축물 또한 커다란 손상을 입은 상황으로 아주 쓸쓸하고 처참한 감을 주고 있다. 현재 누란 고성은 이미 중국 국가중점문물보호 유적으로 되고 있다. 만약 중국인이 누란 고성을 참관하려면 3000위안의 티켓 외 500위안에 달하는 유적보호 요금을 더 내야 하며 또한 반드시 사전에 문물국에 신청해야 진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연고로 지금까지 중국 전국에서 누란 유적에 가본 사람은 5만 명을 초과하지 않는다고 한다. 기실 이는 유적을 보호하기 위하여 극히 제한적으로 유적 답사나 참관을 허락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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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16
  • 中 해군 호위편대 인도양서 협동훈련 진행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중국 해군 호위편대가 인도양 모 해역에서 2일간 목적성 있게 협동훈련을 진행했다고 16일 인민망이 보도했다. 이번 훈련에 참가한 함대는 중국해군 제35진 호위편대로 진행한 훈련 종목으로는 편대의 운동, 함기협동(舰机协同), 해상보급, 선박 호위 등 목표성이 강한 훈련으로 다종 모식의 협동능력을 테스트하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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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16
  • 中 장백산지역서 구석기시대 유적 발견
    [동포투데이] 지난 6일, 길림성 문물고고학연구소에 따르면 올 3월부터 장백산(백두산)지역 구석기 고고학 전문 조사를 펼치기 시작, 4월말까지 220개의 유적과 채집지점을 발견했는데 수집한 유물은 5000건, 그중 구석기시대 유적은 30곳인 것으로 초보 확정됐다. 지난 세기 90년 초부터 고고학 연구원들은 장백산지역에서 화룡대동, 화룡석인구 무송신둔자서산, 무송봉림 등 구석기시대의 유적들을 발견해왔다. 이런 흑요암을 주요원료로 하는 구석기시대 말기의 유적은 장백산 천지를 둘러싸고 집중적으로 분포되여있으며 같은 원료와 박면기술, 석기 가공 기술을 가지고 있으며 비교적 안정적인 석제품 조합 성질을 띠는데 지금으로부터 2만 년 전의 유적인 것으로 추정된다. 현지 매체 연변일보에 따르면 유적지 중에는 유형이 다양한 석제품을 발견, 석핵과 석편, 조각도구와 찍개, 간석기와 돌도끼, 돌 찌르개, 돌칼 등이 포함된다. 초보적인 판단에 따르면 새롭게 발견된 유적과 채집지점은 구석기시대 유적으로부터 초기 철기시대이다. 유물의 특점과 지층퇴적 정황에 근거해 고고학 연구원들은 구석기시대의 유적은 30여 곳 되는 것으로 판단했다. 고고학 연구원들이 화룡대동유적 주변에서 새롭게 9곳의 채집지점을 발견, 그중 석제품 66건을 수집했다. 원재료는 모두 흑요암으로 석편, 석엽, 세석엽, 세석엽석핵, 조각도구가 포함된다. 장백산지역의 구석기시대 고고학 연구 사업이 끊임없이 진행되면서 러시아 극동해안 지역과 한반도, 일본열도의 구석기문화 전파주축도 점차적으로 덩치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는 장백산지역의 고인류의 생존적응 방식과 기술 확산 및 인류이적 문제를 탐색하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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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16
  • 中 징진지(京津冀) 슈퍼 데이터 창신 응용 센터
    [동포투데이 김현나 기자] 고신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중국의 투자가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15일, 중국 관영 신화통신에 따르면 중국 허베이성 랑방시(河北省廊坊市) 경제기술개발구에 있는 징진지(京津冀) 슈퍼 데이터 창신 응용센터가 해내외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이 센터는 허베이성에 이는 첫 슈퍼 데이터 산업 건축 종합체로서 총 면적이 10.6만 제곱미터이며 체험센터, 연구개발센터, 합작창업 센터, 응용센터와 감지체험 센터 및 5대 핵심 기능구 등으로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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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16
  • 여성주의시각으로부터 본 연변지역 조선족 여성 항일운동
    ●방미화 중국조선족은 항일전쟁과정에서 가장 먼저 반일혁명에 참가한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이다. 통계자료에 따르면 연변지역 총 항일열사 중 조선족이 무려 3,204명을 차지하며 그 가운데서도 조선족 여성 항일열사는 338명에 달하여 조선족열사의 10.54%를 차지한다('중국공산당연변역사대사', 2002). 현재까지 조선족 항일전사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남성전사에게 집중되었다. 설사 조선족 항일 여전사에 대한 자료라 해도 그들의 항일에서의 공헌을 높이 평가하는 공헌사, 보충사의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항일활동 속에서의 결혼, 출산, 자녀양육 등을 둘러싼 그들의 처우에 대한 여성학적인 해석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에 필자는 본고에서 여성주의시각으로부터 출발하여 연변지역 조선족 항일 여전사들의 항일활동에 내포된 여성해방의 함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연변지역 조선족 항일 여전사들은 대부분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들은 열악한 경제적 환경 속에서 어릴 적 부모를 도와 농사를 짓거나 가무를 담당함으로써 힘들었던 노동생활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결혼 이후에도 힘들게 항일운동 농사짓고 각종 생업에 종사하면서 생계를 유지해나갔다. 그들은 혁명에 참가하기 이전 자신들을 둘러싼 가부장적 문화와 가정 안팎에서 여성들의 희생만 요구받는 현실 때문에 고달픈 인생을 살아갔다. 그러던 것이, 그들에게 의식전환의 계기가 찾아오게 된다. 바로 당시 연변지역에서의 민족주의계열의 여성계몽운동, 공산주의 계열에서의 남녀평등과 여성해방 사상 전파 등 사상적 배경 하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가난한 처지를 불공평한 사회적 현실로 자각하면서 그러한 가난은 일제 침략, 지주와 자본가의 착취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인식하기 시작한다. 이 뿐만 아니라, 봉건적 남존여비사상에 얽매인 전통가정의 속박에서 벗어나 글을 배우고 사회에 눈을 떠야만 진정한 남녀평등을 실현할 수 있다고 인식하게 된다. 이와 같이 그들은 의식의 변화 및 감정의 풍파 등의 경험 속에서 부모, 형제, 남편, 친인척, 야학, 학교, 혁명지사, 진보적 서적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혁명에 참가하게 된다. 조선족 여성 항일열사 중에는 전장에서 직접 전투에 참가하여 전사한 여성들도 있는가 하면, 작식대, 재봉대, 의료대에서 활동함으로써 전투력을 재생산하는 임무를 완수한 여성들도 있다. 항일연군 제2군의 최희숙 등 8명의 재봉대원들은은 한 달 동안 600건 군복을 만들어내라는 긴급통지를 받고 엄동설한을 무릅쓰고 삼림 속에 들어가 낡은 재봉기로 낮과 밤을 이어가며 끝내 한 달이 되기 전에 600건의 군복을 재봉하였고, 작식대 리신금 여전사 역시 한차례 습격에서 부상을 입었지만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 속에서도 전우들이 한주일 굶은 상태에서 행군할 힘을 없다는 것을 알고 자신도 한주일이나 먹지 못했지만, 전우들을 위해 정신을 차리고 사처로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구함으로써 전우들로 하여금 행군을 지속하도록 하였다(《연변녀성운동사》,1991). 특히 직접 전투에 참가한 조선족 항일 여전사들은 전장에서 남성전사 못지 않은 용맹함과 전투능력을 보이면서 전우를 엄호하기 위해, 당의 비밀을 엄수하기 위해, 적들을 소멸하기 위해 끝까지 싸웠다. 투쟁중 일본군 앞에서 당의 비밀을 엄수하기 위해 혀를 깨문 여전사들이 있는가 하면, 열 손톱을 입으로 물어뜯은 전사도 있고, 일본군에 의해 두 눈알이 빠져도 끝까지 투항하지 않은 여전사도 있다. 이처럼 그들의 항일에서의 행동은 대단히 용맹하고 헌신적 이였다. 때문에 현재까지 여러 자료와 회억록 등에서도 그들의 헌신정신과 용맹함에 대해 높이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항일전장에서의 그들의 처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직면하고 또한 감당해야 할 고난과 고통에 대해 한번 짚어보도록 하자. 전장에서 그들은 신체적 조건의 취약함을 극복해야 함은 더 말할 나위도 없고, 생리적 고충, 생육의 고통도 극복해야 했다. 여성들에게 있어 전장에서의 가장 큰 고통은 달거리 임신과 해산 이였다. 달거리 때는 그렇다 치더라도, 임신하면 대개 작식대와 재봉대에 배치되는데, 임신해서도 그들은 대원들의 식량을 장만하고 해진 옷을 깁는 등 일에 종사하면서 쉴 새 없이 보내기가 일쑤다. 해산시의 조건도 말이 아니었다. 옥중 해산한 여전사가 몇몇 있는가 하면 해산시에 먹을 것이 하나도 없고 젖도 나오지 않아 아이를 낳자마자 5일 만에 잃은 여전사도 있다. 이러한 견정한 혁명정신으로 인한 친육의 상실 뒤에 오는 고통은 그들 스스로 감내해야 하는 슬픔과 고통이었다. 또한 가정과 자식을 포기해야 하는 고통도 견뎌내야 했다. 여전사들은 항일을 위해 전장에 나간 뒤, 대개 1년 내지 2년에 한번 남편과 상봉하거나 더욱 긴 경우도 있으며, 자식을 키울 수가 없어 다른 집에 보내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조선족 여전사들의 항일활동에 내포된 여성의 의미는 또한 무엇일가. 먼저, 여전사들은 확실히 항일운동을 통해 가정으로부터 사회로 진출했으며, 가정주부로부터 사회혁명가로의 신분전환을 실현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항일운동에 참가하면서 그들은 남성과 똑같은 전사로서의 사회적 신분을 부여받음으로써 가정주부로부터 사회혁명가로의 역할 전환을 부분적으로 실현하였다. 그들은 전장에서 남성들과 똑같이 전투에 참가하면서 여러 가지 칭호와 명예를 가지게 되였다. 다음으로, 항일근거지에서 조선족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 되였다. 정치적으로 그들은 각급 당정기관의 중요한 직위 예하면, 부녀위원, 소비에트정부의 회장, 현아동국 국장, 부국장 등에 임용되어 정치방면에서 평등한 권리를 부여받음으로써 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실현하였다. 경제방면에서도 남자와 똑같이 땅을 분배받음으로써 경제적 독립권을 향유하게 되였으며, 교육방면에서도 중점적으로 여성간부를 양성하는 원칙에 의해 평등하게 교육받을 권리를 부여받았다. 이와 같이 그들은 조선족 여성 지도자들이였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아내, 어머니, 며느리, 전사, 부녀회원 등 다중 역할을 동시에 행사하는 행위주체였다. 요컨대, 여전사들의 평등을 실현하려는 의지에서 우리는 해방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항일운동에 참가함으로써 해방을 실현하고자 하는 견강한 의지, 전쟁과정에서 들이닥친 모든 고난을 감내하고 이겨내는 또한 목숨도 아끼지 않는 헌신정신과 희생정신 등에서 우리는 그들의 평등과 해방을 실현하려는 철같이 강한 의지를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조선족 여전사들과 같이 빛을 보려는 의지, 그 의지만이 우리를 해방으로 이끌고, 미지의 세계, 창조적인 세계로 이끄는 통로이자 희망으로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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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16
  • 연변노동자문화궁 건설공사 정식 가동
    [동포투데이] 지난 13일, 연변노동자문화예술센터(연변노동자문화궁) 건설공사가 정식으로 가동 되었다. 이는 현재까지 연변주에서 건설되는 건물 중 건축면적이 가장 큰 공사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지 매체 연변일보에 따르면 예술센터는 연길시 연천북거리 서쪽, 빈하로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전체 부지면적은 42706평방미터이다. 주요 건설내용은 대극장, 콘서트 홀 및 관리실, 지하주차장이다. 대극장은 1층 992석, 2층 358석으로 총 1350개의 관람석이 만들어질 예정이며 주로 연극, 가무극 등 1급 종합문예공연이 진행된다. 콘서트홀은 1층 350석, 2층 161석으로 총 511개의 관람석이 만들어질 예정이며 콘서트홀에서는 주요하게 소형공연이 진행된다. 건설은 2022년 6월 30일 완공될 예정이며 건축설계의 사용년한은 50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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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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