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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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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2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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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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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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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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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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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33)
    곡부의 서류 소속대륙: 아시아, 소속국가: 중국, 지점: 산동성 서남부의의: 동방의 성지임 곡부는 중국의 역사문화의 명승도시로 지금까지 50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황제와 공자가 여기서 탄생했고 염황도 여기를 서울로 정했다고 한다. 곡부는 유규한 역사문명과 찬란한 동방 고대문화로 중외에 알려진 외 중국의 기나긴 역사 중 사람들의 마음속의 성지이고 명승도시로 서양인사들은 곡부를 “동방의 예루살림”이라고 부른다. 1998년 곡부의 공자묘, 공자부, 공자림은 유엔 교육과학문화조직의 “세계문화재명록”에 들어갔다. 공자묘 곡부의 공자묘는 기원전 478년에 수건, 공자가 사망한 이듬해에 섰다. 공자묘는 거대한 궁전식 건축물로서 북경의 고궁 및 하북성 승덕의 피서산장과 더불어 중국의 3대 고대건축군에 속한다. 공자묘는 남북의 길이가 800m, 부지면적이 13만제곱미터이며 주요 건축물로는 대성전, 규문각(奎文阁), 행단(杏坛), 비정(碑亭) 등이 있는데 배치가 엄숙하고 자세가 웅위롭다. 그 중 대성전은 공자묘의 주체건물로서 대성전 내에는 높이가 303미터에 달하는 공자의 조각상 및 황제의 어필친서가 소장돼 있다. 공자부와 공자림 공자부의 원명은 연성공자부(衍圣孔府)으로 1038년에 세워졌으며 북경고궁의 귀족부의 버금으로 “천하제일의 집”으로 불리우고 있다. 공자부의 배치는 중국전통의 전당후침(前堂后寢)제로 앞은 관아이고 뒤울안이 주택이 있다. 공자림은 공자와 기타 가족성원의 묘지로 세계에서 지속 연대가 가장 오래고 보존이 가장 완벽하며 규모도 가장 방대한 종족묘지군으로 공자의 묘가 공자림의 중심에 위치, 묘앞에는 큰 비석이 서있고 거기에는 “대성지성문선왕묘(大成至圣文宣王墓)”라고 씌여져 있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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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02
  • 연변 부동산 시장은 유가무시
    ■ 박정일 요즘 부동산시장을 보면서 서글픈 웃음만 나온다. 서글픈 웃음이 나오는 까닭은 주요하게 부동산개방상들과 일부 부동산 중개상들 때문이다. 부동산 가격은 계속해 오르는데 사는 사람은 없고 또 중개상들이 투기를 목적으로 수단을 가리지 않고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으나 중고 주택을 사는 사람은 없고…그럼에서 불구하고 중고 주택을 포함한 부동산가격은 오르면 올랐지 내릴 기미를 보이지 않는 기이한 현상 때문에 서글픈 웃음을 짓지 않을 수가 없다. 부동산 가격이 인상하는 원인중에 가장 중요한 원인은 부동산 개발의 성본 가격의 인상이다. 개혁개방 30여년 동안 물가인상에 의한 원인으로 부동산 개발에 필요한 원자재가 오르지 않은 것이 없다. 지금도 부동산 개발에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 되는 토지가격이 계속해 인상하고 원자재 가격도 계속 인상하고 있어 물가인상은 부동산 가격인상의 주범이 되고 있다. 게다가 노동력 부족으로 인한 로임인상이 계속되면서 부동산 가격은 지속적으로 오르고 있다. 부동산 가격 인상으로 집을 사는 사람이 날로 적어지는 것이 더 문제다. 그럼에도 주택상품은 계속 생산되고 있는게 오늘의 부동산 시장의 현실이다. 시장이 없으면 상품생산을 중단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부동산개발은 계속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부동산 개발에 아직도 리윤공간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문제는 수요자가 줄면서 우리 부동산시장에 유가무시(有价无市)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시장이 없는데 가격이 계속해 오르는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모르나 단언할수 있는 것은 주민들의 수입증가가 없이는 현재 부동산업계에 불고있는 유가무시의 현상이 사라질 수 없다. 집을 사라고 이런 정책 저런 정책이 쏟아져 나오지만 값이 치솟을대로 치솟은 집을 살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이젠 한국에 가서 10년을 일해도 집한채 마련할 정도로 집값이 올랐는데 누가 감히 그돈으로 집을 사겠는가? 또한 경기불황에 의한 수입저하로 집구매는 꿈에 불과하게 되였는데 누가 집을 산다는 말인가? 부동산업계에서 나타나고 있는 유가무시의 현상을 보면 생산자나 구매자나 서글플 수밖에 없다. 팔아야 하는데 팔수는 없고 그리고 사고싶은데 살수는 없고...요즘 부동산시장은 참으로 서글픈 현상이 연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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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02
  • [기획] 코리아와 함께 숨쉬는 사람들 (4)
    ◐ 김철균 그 이튿날 아침, 박정일 선생은 국도호텔 근처에 있는 “할머니순대국집”에 가서 순대국이나 한그릇씩 하자고 했다. 전날 저녁에 호텔에서 먹은 서양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서였다. 순대국은 일인분에 한화로 5000원씩이었다. 그릇에는 돼지머리고기도 적지 않게 담겨져 있었고 맛도 별맛이었다. 중국에 있을 때 들어오던 “한국의 순대국은 맛이 없다”는 것과는 딴판인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 연길에서도 두사람이 아침식사를 간단히 하려 하면 인민폐 50원 정도는 거의 소비하는 것과 비교해볼 때 크게 비싼 것도 아니었다. 그외 한국에서는 식당에서 식사를 해도 커피가 무료로 공급, 이는 커피에 거의 인이 박힐 정도로 좋아하는 나한테 있어서 아주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제14회 세계한인언론인 대회 만찬회. 이 날부터 제14회 세계한인언론인대회는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었다. 이날 대회의 첫 순서는 한국 한글학회 김승곤 회장으로부터 한글의 세계화에 관한 특강을 들었다. 특강에서 김승곤 회장은 우리 한글의 우수성에 대해 강조하여 지적하면서 그 비교로 한국인은 초등학교만 졸업하면 한글을 거의 소화해 낼 수 있지만 중국인들은 한문을 익히기에 평생의 노력을 기울인다고 했으며 또한 현재 “그루마”가 일본어로 기재되고 있지만 이는 기실 한국어라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굴러다니는 말”이라는 뜻에서 “그루마”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역사적 근거가 있는지는 몰라도 아주 그럴듯한 주장이라는 생각이었다. 이어 한국선거관리위 일군으로부터 한국 중앙선거관리위 재외동포선거에 관한 특강이 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 필자와 박정일 선생은 마이동풍으로 듣는둥 마는 둥 했다. 한국에서 지방선거나 대통령 대선을 한다고 해도 우리한테는 선거권리가 없기에 아무런 관계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날 점심시간은 한국시간으로 12시부터 13시까지 딱 1시간이었다. 빽빽한 스켓쥴이었다. ↑사진 : 한국프레스센터 앞에서 필자 그리고 오후에는 역시 특강으로 세계한인언론인연합회 사업내용 공지가 있었다. 사업내용 공지발표는 마라톤식으로 아주 오랜시간동안 진행이 되었다. 하긴 그 동안 세계한인언론인연합회에서 퇴출당했던 부분적 회원사 대표들이 회의장에 진입해 항의를 제출하는 등 계획외 일이 발생하기도 하여 지체된 것도 사실이었다. 뒤이어 우리는 버스를 이용하여 한국 프레스센터로 이동하여 그 곳에서 제14회 세계한인언론인 대회 개회식을 가졌으며 동시에 한국 연합뉴스 사장님이 베푼 연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개회식은 몇몇 고위 인사들의 축하발언이 있는 뒤 2015년도의 사업계획발표가 있었다. 이는 요란하고도 규모가 엄청난 중국의 개회식과는 달리 조용했으며 축하공연으로 몇명의 클래식 가수들의 공연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연회에서 우리는 그제야 한 식탁에 앉은 사람들과 서로 인사를 나누었고 건배를 부르며 의사소통을 하는 시간을 주로 가질 수 있었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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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31
  • [김혁 칼럼] 전설의 춤사위
    ● 김 혁(재중동포 소설가) ▲최승희 중년시절 일전 상하이에서 발매 된 매란방 기념카드가 전에 없던 구매 열조를 일으켰다. 기념카드가 발매되는 광장에는 구입하려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었고, 암시장에서 카드는 하루 새에 28위안으로부터 150 위안으로, 몇달 후에는 330위안으로 폭등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열한 배나 폭등한 가격일망정 한 무용배우의 기념 카드를 사들이고 있는 것일가? 한편 한국에서는 무용가 최승희의 가장 오래 된 영상기록물이 공개되어 화제다. 최근 발굴된 영상에는 1926년 10월 3일 이시이바쿠무용단 일원으로 작품에 출연한 15세의 최승희의 춤추는 모습이 담겨있다. 1926년 3월 일본에 유학간 최승희가 무용 입문 7개월 만에 스승 이시이바쿠무용단의 주역이 된 셈이다. 이 영상은 1926년 10월 3일 도쿄 베비 시네마 구락부 아사이 클럽 주최로 미쓰코시백화점 옥상에서 열린 촬영회에 이시이바쿠무용단이 초청돼 공연 당시 촬영한 것이다. 경극예술의 대부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중국의 경극200년사에서 최고로 지칭 되는 천재 경극배우 매란방. 18세기 청나라후반에 처음 등장한 이후 19세기 과도기를 거쳐 20세기 중, 후반까지 경극은 화려한 무대와 의상으로 관중을 사로 잡으며 중국의 대표 예술로 자리 매김했다. 그 와중에 경극에서 여자역할을 맡는 남자 배우를 지칭하는 화단(花旦)연기의 일인자로 중국대륙은 물론 전 세계에 경극의 아름다움을 알린 신화적 존재가 바로 매란방이다. 매란방은 1894년10월, 강소성 양주에서 할아버지, 아버지, 큰아버지 모두가 경극계의 명배우들인 경극세가(世家)에서 태여어 다. 여덟 살 때부터 경극을 배웠고 열 한 살 때 처음 무대에 오른다. 각종 배역을 훌륭히 소화를 해내며 경극계의 기대주로 부상한 그는 매끄러운 목소리, 깔끔한 무대매너 그리고 중후한 연기력을 과시하며 재빨리 명실상부한 경극의 대표 배우로 성장한다. 1929년 미국의 초청을 받아 중국인 최초로 뉴욕 브로드웨이(뉴욕의 맨해튼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큰길에 조성된 극장가)에서 공연을 하는 쾌거를 이룩하기도 한다. 매란방은1930년대부터 50년대까지 일본, 미국, 쏘련등지를 순회하며 문화 교류에 앞장섰고 경극의 존재와 그 진가를 세계에 널리 인식시킨다. 이 기간에 그는 저명한 희극대가 채플린, 소련의 문호 고리키, 유명한 배우 스타니슬라프스키 등 저명한 문호, 예술가들과 인연을 맺게 된다. 미국 공연시, 촬영을 중단하고 달려와 매란방을 만난 찰리 채플린은 “그는 나의 예술적 소울 메이트였다!” 고 매란방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일본의 마수가 중국을 유린하던 기간에는 일본치하에서 공연하기를 완강히 거부하여 화단(花旦)연기자로서 수염을 기른 사건은 예술가의 곧은 오골(傲骨)을 보여 주는 전례로 유명하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후에도 경극의 전통적 체계를 보전하면서 그 개혁과 발전에 힘쓴다. 배우로 활약하는 한편, 중국 희곡연구원 원장을 맡아 후배 육성에 힘쓰고 많은 배우를 배출한다. 나아가 전국인민대표, 중화전국문학예술계련합회 부주석 등 요직에 있으면서 문화적, 정치적으로 많은 공적을 남긴다. 매란방을 경극계의 “공전절후(空前绝后)한 대부”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 그의 인기를 실감하는 작은 일화를 곁들어 본다. 매란방의 출연료는 금괴(金塊) 즉 금덩이 10개에 상당했다고 한다. 해방 후 부자가 사라진 중국, 당시 최고 노임을 받는 사람이 바로 매란방이었다. 50년대 국가 주석 모택동의 노임은 408.8위안(인민폐), 매란방은 자유직업자인만큼 출연료가 순 수입이었는데 1956년 매란방이 주동적으로 월급을 낮춘 후의 노임이 2100위안(인민폐)에 이르렀다. 당시 명문대 청화대학의 교수가 매달 식사비 8 위안(인민폐)으로 산해진미를 먹을 수 있었다는 상황으로 보아 당시 매란방의 노임 2100원은 어떤 개념인지 가히 가늠할 수 있다. 때문에 전쟁이 일자 대포도 아닌 비행기를 직접 기증할 수 있었다는 매란방의 경제력이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매란방은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무대의 혁신을 과감히 꾀하여 경극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연기의 폭을 넓혀서 모든 단역을 완벽하게 소화해낸 최초의 배우였다. 50 여년의 무대생활을 통해서 그는 경극의 전통적 레퍼토리 가운데 100개 이상의 역을 소화해냈다. 그가 무대에서 표현했던 부드러우면서도 올곧은 인물들처럼 그 자신도 그러한 품성을 일생 간직했다. 이점이 그의 인간성의 매력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매란방은 그를 따르는 후학들이 그의 성을 따서 “매파(梅派)”라는 경극의 한 유파를 이루었을 정도로 경극세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매파”예술은 이미 세계 예술보물고의 정신적인 재부가 되었으며 매씨희극이론도 세계3대 희극예술체계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춤으로 세상에 군림한 여자 여기 또 한 분의 춤의 대가가 있다. 바로 민족 신무용의 개척자- 최승희이다. 최승희는 한일합방 이듬해인 1911년 서울에서 4남매 가운데 막내로 출생한다. (그의 큰 오빠 최승일은 1922년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문학단체인 가입한 좌파 소설가이다.) 그녀가 자신의 한생을 무용의 외길로 가려 마음먹은 것은 1926년 오빠의 권유로 일본 근대무용의 선구자무용가인 이시이 바쿠의 공연을 보러갔던 뒤의 일인 듯 싶다. 그날 공연된 작품은 한결 같이 전위적인 양식의 신무용들이었다. 오빠 손을 잡고 이 공연을 보러 왔던 열 여섯 소녀 눈에서는 광채가 번뜩이었다. 그날 한 조선 소녀의 운명은 비단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뒤바뀌고 있었다. 그녀는 곧 이시이를 따라 일본으로 갔고 3년이 못 되어 이시이 무용연구소 간판 스타가 되었을뿐 아니라 전 일본 열도를 흔들어 놓게 된다. 그러나 오성(悟性)이 강했던 그녀는 곧 얼마 후 스승의 춤에 혼이 사라지고 있다고 느끼고 일본을 떠나 조선으로 돌아 온다. 그녀는 이시이뿐아니라 “이사도라 던컨이나 니진스키류의 음악에 종속화한 무용”아닌, “조선의 전통과 풍물로써 새로운 것을 만들어 세계로 나갈” 당찬 생각을 뼈물게 된다. 그녀는 민족적인 것으로서 세계적인 것을 이루려는 야심에 차 있었다. 그리고 결국 모든 예술가의 지상 명제인 그 야심을 이루고 만다. 1929년 귀국하여 서울에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차리고 1930년 2월 경성공회당에서 처음으로 신작발표회를 가진다. 이 공연은 한국인 최초의 독자적인 춤 공연이었다. 두 차례 일본 유학이후에 국내에서 독자적인 근대 무용 공연을 가지면서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모으게 되었고 영화에 출연하고 자서전을 출간 할 정도로 유명해 진다. 1930년대 후반부터 유럽과 전미를 감동의 물결로 휩쓸며 “동양의 진주” “금강산의 화신”이라는 갈채를 받는다. 피카소, 장 콕토, 로맹 롤랑, 가와바타 야스나리 등 당대 최고의 명사들도 그에게 반했다고한다. 1947년 북한으로 건너가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세워 소장에 취임하고 조선 춤을 체계화하며 무용극 창작에 힘 쓰다가1969년 타계한다. 조선 최초의 월드스타였던 최승희,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분단의 고착화라는 시대의 진공 속으로 속수무책으로 빨려 들어 간 최승희, 최승희의 삶은 그야말로 “격동의 20세기”를 관통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가 오히려 비좁았던 그에게는 그러나 정작 고향이 없었다. 남에서는 친일파요, 북에서는 자본주의 성향의 반혁명 예술가라고 버림받았던 그, 하지만 땅의 나뉨도 분단의 이데올로기도 그의 예술혼은 묶어둘 수는 없었다. 그는 춤에 대한 천부적 자질을 안고 쉼없는 춤사위를 통해 아시아인으로는 중국의 매란방, 인도의 우디샹카와 더불어 세계적인 무용가로 인정받으며 춤으로 세상에 군림한 신화적 존재로 남았다. 거장들의 악수 사실 최승희와 중국과의 인연은 일찍부터 이어졌고 놀랍게도 많은 중국 문학예술계의 쟁쟁한 거장들과 만남과 교류의 일화를 남기고 있었다. 중국 현대문학의 최고의 녀류작가 장애령(张爱玲. 동방의 제인 오스틴이라고 불리는 유명 여류소설가. 쟁명을 빚고 있는 영화 “색계”의 원작자)도 일찍 최승희와 만남을 가졌었다. 1945년4월,신중국보(新中国报) 편집부는 상하이에서 무용가 최승희를 위한 간담회를 열었는데 무용계 인사들외에도 장애령 등 상해의 유명 여류작가들이 간담회에 동참했다. 그날 간담회 석상에서 최승희는 “우리의 무용예술은 고대나 서방에 대한 모방에만 그치지 말고 그 장점을 따서 현대적이고 진정 자신에게 속하는 동방적인것을 만들어 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에 장애령은 바로 문학에서도 그러한 고견은 적용된다며 동감을 표했다고 한다. 사실 장애령 역시 최승희의 무용에 심취되어 있었다. “서방의 무용, 그리고 중국명사파들의 표현은 최승희에 짝지는 것이 많다. “며 최승희의 예술체계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기념비적인 작품인 쓴“태양은 쌍간하를 비춘다”의 작가 정령(丁玲), 그녀도 최승희와 묘한 인연의 끈을 가지고 있었다. 1948년 정령은 쏘련에서 돌아와 로신예술학원에서 창작에 전념하고 있었다. 쏘련에 체류하던 기간 보았던 무극은 그녀에게 강령한 인상을 남겼다. 하여 그녀는 연안 “보육원”에서 자란 딸 장조혜(蒋祖慧)가 춤을 배우기를 권장했다. 이공과에 흥취가 있는 딸애를 설복하여 조선으로 보내어 다름 아닌 최승희의 문하에서 춤을 배우게 했다. 최승희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은 장조혜는 유명 뮤용수로 성장, 그후 유명한 현대경극 “홍색랑자군”의 제작을 맡아 그 유명세를 떨쳤다. 최승희는 세계 공연을 마치고 중국으로 와서 1941년부터 1946년까지 차원 높은 예술무용을 공연하여 중국예술계에서 커다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1944년 북경의 북해부근에 “동방무용연구소”를 차리고 중국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중국 예술전통을 익혀나갔다. 바로 이 시기 매란방과 최승희는 역사적인 조우를 가진다. 매란방등 경극계의 명배우들은 최승희를 수차 방문했고 그와 함께 무대예술에 대한 교감을 나누었다. 최승희의 높은 무용예술표현, 견해는 매란방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당시 중국의 “화경일보”는 “노래를 위주로 하는 옛 경극은 최승희 무용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종국에 가서 변혁을 일으킬 것 같다”는 소식까지 실으며 최승희의 실력과 역할을 강조했다. 경극대사 매란방과 교류하면서 최승희는 경극을 토대로 한 무용 창작론과 기본 동작을 모형화하고 교수체계를 정립해 중국 무용을 현대화하는데 기여 했다. 그러한 정론을 최승희는 인민일보에 “중국무용예술의 무용예술의 미래”라는 서명문장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연변대학 예술학원 이애순교수는 일찍 발표 한 논문 “중국무용의 현대화와 최승희의 역할” 에서 최승희가 중국에 예술무용을 전파하며 중국무용사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체계적으로 소개한바 있다.) 한편 자신의 무용세계를 살찌우는데서 최승희는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최승희는 실제 중국무용의 실험적 창작에도 참여해 여러 유형의 창작물을 탄생 시켰다. 그중 중국의 고전문학과 경극의 검무를 소재로 만든 “패왕별희”와 당나라 양귀비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양귀비 연무지도”가 대표적이다. 어젯날 양귀비를 소재로 한 매란방의 대표작 “귀비취주”와 역시 양귀비의 춤사위를 재 해석 한 최승희의 “양귀비 연무지도”가 농도와 줄기가 다른 현란한 모습을 뽐내며 한 무대에서 어우러졌다. 살얼음과도 같은 시대에 오로지 타오르는 예술혼을 고이 껴안고 험난한 근현대사를 가로질러 세계로 발돋움하면서 민족적인것을 세상에 알리는데 혼신을 던진 매란방 그리고 최승희, 새로운 시대의 변화와 운명의 질곡에 어떻게 접근하고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지를 거장들의 앞선 행보는 보여주고있다. 새로운 매체를 통해 새로운 형식으로 다시 조명되고있는 예술대가들의 모습들, 다시 한 번 경모를 머금고 보고 듣고 읽어 본다. - “청우재(聽齋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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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28
  • [김혁 칼럼] 북간도의 큰 스님
    ● 김 혁 (재중동포 소설가) 1 한국작가 최인호의 많은 수작들중에 “할”이라는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이 특별하고 의미가 있는 건 작가가 암 투병 중 타계를 앞두고 재판 된 작품이기때문, 그리고 가톨릭 신자가 쓴 불교관련 작품이기 때문이다. 1993년, 출간된 장편 “길 없는 길”을 재구성 한 작품으로 독자들에게 호평 받으며 지난 10년 간 150만부나 판매되었다. “단순한 구도소설의 한계를 뛰어 넘은 최인호 인간주의 문학의 백미”라는 평도 뒤따랐다. 책은 근대 불교선풍을 일으킨 불교 증흥조 경허(鏡虛) 대선사가 열반에 드신100년기념으로 재 구성해 내놓았다. 책에는 경허 대선사의 수법제자들의 이야기도 나온다. 그중에는 법호 그대로 세속 뿐 아니라 불가에 조차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물 속의 달처럼 조용히 사라 진 수월 스님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수월 스님, 누구이신고? 2 수월스님은 민간에서 오랫동안 구전으로 그 행적이 전해져오다 중국에서는 조선족 불자들이 수월정사(水月精舍)라는 조그만 법당을 차린 것을 시작으로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 2009년 가을, 중국 연변 도문시에서는 일광산에서 “일광산 화엄사 대웅보전 락성 및 불상 개안 경축법회”가 열렸는데 중국불교협회와 대한불교 조계종 봉은사에서 온 불자 등 2만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연변의 첫 불학대사 수월스님을 선양하는 불사가 봉행됐다. 이날 수월스님이 머물렀던 일광산 중턱에 수월스님의 옛 거처를 복원하는 기공식도 더불어 열렸다. 화엄사 불사를 주도하고 있는 오덕 스님은 조선족 출신이다. 화엄사는 중국, 한국, 북한 등 3국이 합작으로 조성한 사찰로서 가람은 중국식에 한국의 전문가들이 단청을 입혔다. 불상과 탱화는 북한 만수대 창작사 화공들이 조성했다. 오덕 스님은 “화엄사는 조선족의 첫 사찰이자 중국에서 가장 동쪽에 자리한 사찰이어서 의미가 크다”며 “남북통일과 한·중 양국의 평화를 기원하는 가람이 될 수 있도록 불사를 이어 나가겠다”고 말했다. 연변 지역에서 늦게나마 회자되고 있는 수월스님(水月)은 한국 충남 홍성 출신으로 알려졌다. 1885년경에 태어난 스님은 속성 조차 정확하지 않다. 전(田)씨라고 알려졌지만 일부에서는 전(全)씨, 김씨, 제(祭)씨, 최씨라는 설도 있다. 법명은 음관(音觀)이다. 어릴 적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 고아로 남은 스님은 머슴살이를 하며 연명했다. 어느 탁발승이 전해준 수행 이야기를 듣고 깊이 감명 받고 1883년 늦가을 서산군 연암산 중턱에 있는 천장암(天藏庵)을 찾아갔다. 당시 천장암에는 경허선사의 친형인 태허(太虛) 성원(性圓) 스님이 홀어머니 박씨를 모시고 주지로 있었다. 이곳에서 수월은 나이 서른이 다 되여 행자로서 나무꾼 생활을 했다. 어느 한번, 수월은 절 아래 있는 물레방앗간에 내려가 방아를 찧고 있었다. 그날도 수월은 천수다라니를 지극 정성으로 외우며 일을 했다. 당시 수월은 특히 “천수경(千手經)”을 좋아해서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항상 외웠다. 밤늦게 절로 돌아오던 태허가 물레방앗간 앞을 지나다 돌확 속에 머리를 박고 아기처럼 잠들어 있는 수월을 발견하고 급히 끌어냈다. 이때 그의 순전한 수행력을 인정한 태허는 다음날 법명과 사미계를 내려 정식으로 출가를 인정했고 경허를 법사로 정해주었다. 이후 그는 보임공부를 위해 금강산 등지에서 신분을 숨긴채 정진하면서 지냈다. 경허스님이 열반한 후 수월스님은 1912년 북간도로 건너왔다. 회막동(지금의 도문시의 옛 이름)에서 일반인의 모습으로 3년동안 소먹이꾼 노릇을 했다. 이때 수월은 자기가 소를 먹여 받은 품삯으로 밤을 새워 짚신을 삼고 밥을 지어 주먹밥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일제의 수탈을 피해 고향을 떠나 살 곳을 찾아 간도로 건너 오는 동포들을 먹이고 입히기 위해 길가 바위 위에 주먹밥을 쌓아 놓고 나뭇가지에 짚신을 매달아 놓았다.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알리지 않는 무주상보시를 베풀었던 것이다. 1915년 회막동을 떠나 흑룡강성의 수분하(綏芬河)로 들어갔다. 관음사(觀音寺)라는 작은 절에서 신분을 감춘 채 몰지각한 젊은 스님에게서 온갖 욕설과 행패를 당하면서도 6년간 보임공부에 열중했다고 한다. 1921년 봄부터는 두만강이 내려다 보이는 지금의 도문시 일광(一光)산의 화엄사(華嚴寺)라는 작은 절에서 여생을 보냈다. 이곳에서도 스님은 누더기를 걸치고 종일 말없이 일했고, 탁발(托鉢)을 다녔으며 아픈 사람들을 고쳐주었고 산이나 들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손수 밥을 지어 날라 주었다고 한다. 수월스님이 화엄사에 머무는 동안 그를 만나려고 먼 길을 걸어오는 조선 스님들의 발길이 끊일 날이 없었다. 금오, 효봉, 청담 등이 수월을 찾아와 몇 달 혹은 1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그의 “말 없는 가르침”을 배워갔다. 수월스님의 법은 묵언스님을 거쳐 도천.명선스님 등으로 이어졌다. 화엄사에서 지내기를 8년철이 되던 해인 1928년, 입적 할 시기가 도래했음을 알게 된 스님은 점심공양을 마친 후 절 뒷편에 흐르는 개울물에 깨끗이 몸을 씻고 머리 위에는 잘 접어서 갠 바지저고리와 새로 삼은 짚신 한 컬레를 가지런히 올려놓고 맨 몸으로 단정히 결가부좌한 채 스스로 준비한 장작더미에 올라 불을 놓았다고 한다. 스님은 자화장(自火葬)으로 조용히 열반에 들었다. 불교에서 수월(水月)이란 모든 사물에 실체가 없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달이 강을 비추더라도 물에 비친 달 그림자는 그 실체가 없는 것과 같이 수월스님은 자신이 없는 선행을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실천하였다. 수월은 한평생 나무하고 불이나 때는 불목하니 같은 스님이었다. 그러나 그는 일상의 로동을 철저한 수행의 방편으로 삼아 평생을 “끊임없이 일하는 수행자”로 살면서 뛰여난 수행력으로 세간의 존경을 받았다. 또한 일제의 수탈로 삶의 터전을 떠나야 했던 한많은 백성들을 위해 손수 주먹밥을 만들어 주고 짚신을 삼아주는 무주상보시를 한량없이 베풀었다. 이름 그대로 “물 속의 달”처럼 흔적없는 바람같이 살다 간 그는 오직 행동으로 소임을 다 해 온 숨은 성자였다. 3 최인호가 지은 책의 제목 “할”은 사찰과 선원에서 학인을 꾸짖거나 말이나 글로써 나타낼 수 없는 도리를 나타내 보일 때 내뱉는 소리를 뜻하는 불교용어다. 수월스님의 법문은 전해오는 것이 많지못하다. 다음은 구전을 통해 전하는 스님의 법문 가운데 일부이다. “도를 닦는다는 것은 마음을 모으는거여. 별거 아녀. 이리 모으나 저리 모으나 무얼 허든지 마음만 모으면 되는겨… 도를 깨치지 못하면 두 집에 죄를 짓게 되는 겨. 집에 있으면서 부모님을 열심히 모시면 효도라도 하는데, 집을 나와서 도를 깨치지 못하면 두 집에 죄를 짓는 게 아니고 뭐여… 사람 몸 받아 참 나를 알지 못하고 참 나를 깨치지 못하면 이보다 더 큰 죄가 어디 있어. 이보다 더 큰 한(恨)이 어딨어.” 법기와 수련이 높은 “깨달은 자”들의 소리가 위기론이 대두되고 있는 우리 민족 공동체에 지혜와 기운 넘치는 “할”을 날릴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 “청우재(聽齋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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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25
  • [장편실화]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31)
    ■김철균 결혼한 뒤 문영이는 극력 “친정 어머니”인 순자한테 손을 내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아무리 순자어머니가 무던하고 둘 사이가 극진하다지만 필경은 생모가 아닌 “양어머니”었고 거기에 민족도 다른 조선족 어머니었으니 말이다. 거기에 외국에서는 만 18세만 되면 친 자식들도 부모의 도움에서 벗어나 자립한다는데 결혼할 때까지 “친정어머니”의 신세를 크게 지고 보니 심리적 부담과 압력이 생겼던 것이다. 하물며 순자어머니도 이젠 년로하기 시작한 몸이었으니 더욱 그랬다. 한편 순자가 문영이의 효도를 어느 정도 받아들었더라면 그녀의 이러한 심리적 부담도 좀 가벼워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문영이가 간혹 용돈이라도 드리면 순자는 도리어 크게 성을 내기가 일쑤였고 돈 대신 부식품이나 보건품을 사갈 때면 마지 못해 그것을 받더라도 돌아올 때에는 그 가치보다 몇배에 달하는 돈을 억지로 넣어주는 순자였다. 문영이는 심정이 착잡했다. 그렇다고 오랫동안 이어온 “모녀의 정”을 끊을 수도 없었다. 그것은 그녀의 양심이 도무지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채찍질했다. 결혼 뒤 얼마 안되어 문영이는 임신하게 되었다. 임신 역시 여인한테 있어서는 결혼에 못지 않는 희사로서 자신이 드디어 어머니로 된다는 자부심으로 들뜨게 한다고 한다. 하지만 문영이는 임신사실을 일부러 순자한테 알리지 않았다. 알리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알리면 또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올 “친정어머니”였겠으니 말이었다. 이렇듯 기쁜 일을 순자어머니한테 알릴 수 없는 문영이는 자주 깊은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문영의 배는 하루가 다르게 불러갔다. 이와 더불어 누가 돈화로 다녀오거나 편지를 쓸 때마다 순자는 “넌 왜 아직도 소식이 없느냐?”, “손주를 안아 보고 싶구나” 하며 독촉이 불같았다. 또한 “너 어릴 때 고생하며 자라 혹시 냉병에라도 걸린거 아니냐? 의사인 네가 알아서 잘 처사하겠지만 그래도 이 엄마는 시름을 놓을 수 없단다”하고 염려하며 여러 모로 문영이한테 탐문하는 순자였다. 알리지 않으면 불효 같았고 알리면 어머니한테 부담을 끼치는 것 같아 문영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문영이가 이렇게 모순속에서 모대기고 있을 때 한 단위에서 근무하는 창범이가 일보러 연길로 갔다가 “문영이가 임신이고 벌써 몇 개월째 잡고 있다”고 순자한테 전해 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순자는 그 말을 들은 이튿날로 돈화로 올라왔다. 문영이를 만나자 순자는 제법 크게 성을 냈다. “내가 널 낳지 않았다고 네가 그러는 게 아니다. 이런 일을 알리지 않은 것도 역시 불효란다. 그리고 딸자식이 결혼하여 자식을 낳는 것을 보는 것도 부모로서는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단다.” 문영이는 한동안 대답거리를 찾지 못했다. 그저 쿨적거리며 울뿐이었다. 그러자 순자는 다시 문영이를 끌어 안으며 위안했다. “문영아, 네 맘을 몰라서가 아니다. 네가 나한테 부담을 준다고 그러겠지. 하지만 이제 너도 자식을 낳아 키워보면 알겠지만 부모란 자식이 결혼해도 여전히 어린애처럼 여겨지기 마련이고 늘 걱정하기 마련이란다.” “알겠어요. 어머니, 다신 안그 럴게요.” 순자는 문영이를 이끌고 임신부와 태아의 건강상태를 병원검진을 통해 확실하게 알아 보고서야 시름을 놓으며 연길로 돌아갔다. 이듬해 1월말 문영이의 출산날자가 다가오자 순자는 갓난아기의 기저귀, 아기이불, 아기옷과 닭, 토마트 같은 영양식품 그리고 문영의 옷들을 사들고 재차 돈화행을 하였다. 그 당시에도 순자네 가정생활은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여의치 않아 순자는 서시장매대에 친구가 있는 셋째딸 영애의 담보로 이러한 물건들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출산을 앞둔 문영이는 몸이 몹시 부어 있었다. 그리고 남편외 옆에서 크게 돌봐주는 이도 없었다. 그것 역시 순자로서는 무척 가슴아픈 일이었다. 문영이가 가슴이 저려 나도록 불쌍했다. “문영아, 몸이 무거울수록 가벼운 운동을 하여야 몸을 풀 때 힘들지 않고 순리롭단다.” 순자는 매일 아침마다 문영이를 데리고 보행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한편 살다보면 별의별 희한한 일을 다 겪어보게 된다. 순자가 바로 그랬다. 어느 하루였다. 그날도 순자가 문영이와 함께 돈화역 부근에서 산보삼아 가벼운 운동을 하고 있는데 짠지와 김치를 팔던 몇몇 조선족 아낙네들이 순자네 “모녀”를 보고 중얼대는 것이 순자의 귀에 들려왔다. “저 로친네가 딸이 쉽게 해산하라고 저렇게 매일 걷게 한다우다.” “글쎄, 딸이라지만 좀 이상한 것 아니우? 딸은 한족이고 저 할머니는 조선말을 하는데 혹시 저 할머니가 한족 영감한테 재가해 사는 거나 아이우?” “그러게 말이웨다. 그래서 나도 별로 이상스럽다 여겼다니까.” 그 아낙네들의 수군대는 소리에 순자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 순자는 못들은걸로 그냥 지나치려다가 다리쉼도 할겸 그 아낙네들한테 돌아서며 한마디 했다. “왜, 저 애가 한족이니 내가 한족영감을 해서 함께 살림을 하는 것 같수?” “글쎄 그럼 그게 아니란 말입니까?” “저 애가 한족이고 내 딸인건 맞지만 내가 한족영감한테 재가한건 아니우다. 몇년전 저 애가 연변위생학교에 다닐 때부터 내가 양딸로 삼았던 애 올시다.” 그러면서 순자는 그들한테 문영이가 자라온 이왕지사와 자기의 양딸로 된 자초지종 등을 알려주었다. 그러자 장사군아낙네들은 “그랬구나”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 한족양딸의 출산을 돕기 위해 연길에서 돈화로 찾아온 순자의 소행에 못내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문영이한테는 또 “너 정말 복이 있는 아이니 앞으로 이 조선족 어머니한테 잘해주라”고 부탁하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문영이네 부부와 함께 붕곤이를 안고서 며칠 후 문영이는 돈화시 부유보건원에서 출산했다. 순산으로 아들을 낳았다. 너부죽한 얼굴에 아주 건실한 아들애었다. 문영이가 출산했다고 하자 그 이튿날로 순자의 남편 용환 영감도 너무도 기뻐 어쩔바를 몰라하며 한달음에 돈화로 찾아왔다. 장인어른이 오자 문영의 남편은 이 때라 하고 아기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했다. “아니, 자네 교원사업을 한다는 사람이 애 이름을 지을줄 몰라서 나한테 지어 달라고 하나?” “아닙니다. 애들의 이름은 한대를 거슬어 올라가 할아버지가 지으면 좋다고 해서요.” “어허, 이 사람아! 그러면 친 할아버지가 지어야지 나 이 외할아버지가 무슨 자격이 있는가?!” “그래도 일자무식인 저의 부친보다도 학식이 높은 장인어른이 지으면 더 멋지게 지을 것이 아닙니까?” 이 말에 용환 영감은 슬며시 흐뭇해하며 아주 흥미가 동해하였다. 하지만 이에 순자가 견결히 반대였다. “영감 무슨 망녕이시우? 멀쩡한 바깥사돈을 두고 왜 령감이 외손군의 이름을 짓는다구 그러우?!” 그렇게 되여 결국 후날 문영이의 시아버지가 아기의 이름을 짓게 되었다. 아기의 이름은 바로 심붕곤(沈鹏坤)으로 지어졌다. 한편 실로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하는 일이 생겼다. 해산한 이튿날 진통이 어느 정도 가셔지고 혼자서 변소출입도 하게 된 문영이가 아기를 누워서 쌔근쌔근 잠들어있는 아기를 보면서 머리를 이리저리 갸우뚱거리더니 불현듯 소리쳤다. “어머니 어머니, 이리 와봐요.” “왜 그러느냐?”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아기를 와봐요. 이 애가 어쩐지 어머니를 닮은 것 같아요.” “뭐라구?! 아기가 나를 닮다니. 소웃다 꾸러기가 터지겠다.” 하지만 아기의 얼굴을 뜯어보니 이마와 눈부위며가 어쩐지 순자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용환 영감도 아기를 뜯어보더니 “하하하”하며 웃음보를 터뜨렸다. “이게 웬일이요? 아기는 분명 문영가 낳았는데 당신을 닮다니?! 이상한 일이 아니요?” 이에 문영이네 부부와 순자네 내외는 물론 사돈내외까지 이상하다는듯 어안이 벙벙하던 중 불현듯 문영이가 무릎을 탁 치며 탄성을 질렀다. “아, 맞아요. 임산부가 누구를 생각하면 아기는 흔히 그를 닮는다고 했거든요. 제가 임신 때 내내 어머니를 생각했기에 아기가 어머니를 닮은 것 같아요.” 그 말을 들어 보니 이는 아주 그럴듯했다. 이 때 문영의 신랑 심엽군도 맞장구를 치면서 “그리고 임산부가 누구를 미워하면 또 그를 닮을 확률이 크다”면서 한마디 참견했다. 이어 문영의 신랑은 언젠가 돈화의 한집에서 며느리가 임신 중에 벌름코인 시동생을 몹시 미워했는데 후에 아기를 낳고보니 아기가 글쎄 벌름코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시동생은 남자여서 벌름코래도 괜찮았으나 그 아기는 여자애여서 참 꼴불견이었다고 덧붙였다. 이 말에 일동은 재차 폭소를 터뜨렸다. ↑온 가족이 문영의 아들 붕곤이를 놓고 담소하고 있다 다른 한편 문영이가 아들을 낳자 영순이를 비롯한 딸들은 “같은 값에 분홍치마라고 딸을 낳았더면 더 좋았을텐데”하고 좀 서운해하였다. 그러자 순자는 딸들을 호되게 꾸짖었다. “너희들이 뭘 알아서 그러느냐?! 만약 외래 침략자들이 쳐들어 오면 그래도 남자들이 나가서 그걸 막지 치마를 두른 너희들이 막겠느냐? 지금 젊은이들은 진짜 하나를 알고 둘은 모른단 말이다. 그래 집안에 남자가 없어봐라. 집안꼴이 어떻게 되겠느냐? 우리 집도 너희들 아버지가 계셨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도 오늘같은 날이 없다 없어. 난 문영이가 아들을 낳은 것이 아주 자랑스럽다.” 이는 결코 문영이가 낳은 아들애가 순자 자신을 많이 닮았다고 해서 하는 유치스러운 항변이 아니었다. 순자가 남자를 잘 받들어야 가정과 사회가 안정하고 태평하다는 것도 결코 봉건사상에서 나오는 이론은 아니었다. “남자가 밖에서 잘 벌어들이고 여자가 집안일을 하는 가정은 말썽이 없이 화목하지만 여자가 밖에서 벌고 남자가 집에서 노는 가정은 하루 건너 말썽과 싸움이 생기기 마련이다”, “마누라가 남정을 존경하지 않으면 자식들도 따라서 예의범절이 엉망이 되기 쉬우며 그런 가정은 망나니 가정이다”, “우리 집도 아버지란 든든한 존재가 있으니 이 어미도 시름을 놓고 가정운영과 사회봉사에 뛰어들 수 있었다”는 등 논법은 어디까지나 생활이치에 맞는 언사였지 봉건사상은 절대 아니었다. 그러면서 순자는 항일전쟁시기 여자 유격대장이 출현하고 문화혁명 때 “무쇠처녀”가 등장해 메를 휘두르는 등 모습은 중국여성이 강하다는 것을 설명할뿐이지 결코 정상적인 인륜법칙은 아니라고 했다. 또한 반대로 남자가 해해거리며 상점이나 식당의 접대원을 한다면 그보다 더 이상의 꼴불견은 없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순자한테 남존녀비사상이 농후한 것도 아니었다. 3명의 되는 아들들한테는 여자들이란 남편을 믿고 사는만큼 항상 색시한테 잘해주고 색시들이 잘못한 일이 있더라도 웬간해서는 이해해 주어야 한다고 당부하던 순자였다. 다만 요즘 세월처럼 여자애들을 더 이뻐하고 또 어딘가 모르게 여자애들이 더 우쭐렁거리는 기풍에 어딘가 못마땅해하는 순자였지 여자를 하대해서는 더욱 아니었다. (다음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5-05-24
  • [기획]코리아와 함께 숨쉬는 사람들(3)
    ■ 김철균 2015년 4월 27일, 제14회 한인언론인대회을 앞두고 한국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국도호텔 세미나실에서 대회의 성공적인 진행을 위한 간담회가 있었다. 오후 4시(한국 시간)가 되어 간담회가 시작되자 나는 저으기 긴장이 되었다. 이런 국제급 회의는 처음 참가하기 때문이었다. 국제급 회의란 2~3개 국가만 모이어 세미나 등을 열어도 국제급 회의라고 할 수 있다. 하다면 프랑스, 스페인, 미국, 캐나다, 뉴질랜드, 오스트랄리아, 터키, 필리핀, 태국, 중국 등 10여개 국가의 언론인들이 모인 회의는 말그대로 차원이 높고도 쟁쟁한 문필가들로 모인 장소라 할 수 있었다. 이 날 나는 “중국 연변종합신문 김철균”이라고 씌어진 명찰을 목에 걸고는 대회안내원이 지정한 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순간 가슴이 몰래 콩볶듯 뛰기 시작했다. 간담회는 먼저 본 연합회 신임회장인 장마리아 여사의 인사말부터 시작이 되었다. 장마리아 여사는 “여러분들을 위해 봉사하게 될 장마리아”라고 자아소개를 하고 나서 자신은 위기와 도전에 처한 세계한인언론인을 이끌고 변화와 개혁을 위해 이 연합회의 회장직을 맡게 되었노라고 밝히었다. 헌데 이럴 변이라고야! 뒤이어 간담회 사회자가 중국에서 온 신입회원이라면서 나를 지명하여 자아소개를 하게 하는 것이었다. 아이구 하느님 맙소사! 이는 진짜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연단에 나가 마이크를 잡으니 다리가 후둘후둘 떨리어 났고 목소리가 잘 나가지 않았으며 짧게나마 준비했던 인사말조차 한마디도 떠오르지 않았다… 약 10여초 뒤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고는 회의 장소를 한 바퀴 휙 둘러보면서 입을 열었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중국 연변에서 온 김철균이라 합니다. 저는 이런 회의에 처음으로 참가하게 된 신참입니다. 금일 여러분들을 뵙게 되어 기쁘고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서두를 떼고 나니 그 다음부터는 별로 긴장해 나지 않았고 뒤말이 절로 이어졌다. 그 때 아마 내가 우리 연변 종합신문에 대한 소개 및 나 자신의 프로필 등에 대해 장황설을 늘여 놓은 것으로 기억된다. 나의 자아소개에 이어 역시 동행한 박정일 선생의 자아소개가 있었으며 그 뒤로 차례로 기타 나라에서 온 언론인들의 자아소개가 있었다. 여기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우리 외 기타 나라에서 온 언론인들의 발언은 자아소개 외에도 가끔씩 유머와 해학적인 말, 그리고 주재국의 풍토습관 소개 등이 있어 무척 활발하였다. 예하면 멋진 모습을 보이려고 가발을 쓰고 오다가 공항에서 걸렸다는둥, 오지 않으려 하다가 완도에 가서 전복을 먹을 수 있다는 것에 식욕을 주체할 수 없어 카자흐스탄으로부터 달려왔다는둥 이러한 발언은 장내의 웃음거리를 던져주기에 충분하였다. 또한 스페인에서 왔다는 언론인 김성환씨는 스페인 투우사들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여 여러 사람들의 흥미를 돋구기도 했다. (다음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5-05-24
  • 30세 이상 여성에 둘째출산 먼저 허락해야 (2)
    더 늦으면 낳을 기회가 없어져 평생의 유감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기실 올해초에 있는 중국의 “양회”의 개막전야에 전국 21개소의 고등학교 및 과학연구기구의 39명 인구학자들이 연명으로 “둘째자녀 정책을 전면 개방하고 공민의 생육제한을 취소하자”는 건의서를 작성해 해당 부문에 교부하였다. 건의서는 “단독 2자녀 정책의 실행 1년을 돌이켜 보면 둘째 자녀의 출산신청을 한 부부가 현저하게 적으므로 이 정책 역시 생육율 상승에 극히 제한을 주고 있다고” 써있었다. 건의서는 또 생육제한을 취소하면 가능하게 나타날 출생인구의 증가는 생육정책의 성과이 모험이 아니라고 지적, 현재 새로 증가되는 인구수는 외동자녀 가정이 적어지는 것으로 가정이나 사회에 모두 좋은 일이라고 분석하였다. 그러면서 새로운 정책에 대한 많은 부부들의 냉담한 반응는 향후 한동안 중국인구의 급증현상이 절대 없을 것임을 증명한다고 지넉하였다. 이 건의서를 작성한 중국인민대학 인구발전연구센터의 고보창 교수는 “목전 인구의 증폭기는 이미 지났다. 제6차 인구보편조사를 금자탑으로 중국인구는 위축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20세 이하의 인구군이 대폭으로 감소하고 있는 것이 가장 뚜렷한 증거로 되고 있다. 집계에 따르면 현재 중국에서 0~14세의 인구가 2.2억명으로 근근히 전국 인구의 16%를 차지하는바 제5차 전국인구보편조사시기에 비해 6.29%가 하강되었다”고 밝혔다. 이렇게 말하면 중국의 소년인구가 이전의 4분의 1에서 이젠 6분의 1로 되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는 아주 엄중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단독 2자녀정책 과도기 되어야 전국인대 대표이며 중산기념중학교 교장 가우림은 전국 “양회”기간에 둘째자녀정책을 전면 개방해야 한다는 제의안을 내놓았다. 그는 이를 주장하면서 “니난 1년간 전국적으로 단독 2자녀 정책에 부합되는 가정 1000만여세대중 실제적으로 둘째를 출산한 가정은 겨우 47만 세대의 가정으로서 실제적으로 단독 2자녀나 쌍독 2자녀나 별로 큰 차이가 없었으며 중국은 여전히 출생율이 현저하게 낮은 국가에 속해 있다”라고 분석하였다. 한편 그는 “생육권은 반드시 공정해야 하며 돈많은 사람들이 벌금하며 많이 낳거나 돈이 없는 사람들이 적게 낳는 형상이 있어서는 안되며 아울러 돈이 없는 부류 사람들을 극도로 통제한 결과 우리 나라는 앞당겨 노령화를 초래했다” 주장하였다. 가우림은 또한 “단독 2자녀 정책을 실행한 후의 생육수요로부터 볼 때 이 정책은 이미 중국이 처한 인구위기를 해결할 수 없게 되었으며 더욱 엄중한 것은 현재 많은 가정의 부부들이 쌍독 2자녀 정책을 실행해도 여전이 한명의 자녀만 낳는 문제로서 인구결구가 이제 곧 기형적인 ‹조롱박형으로 되어 가기에 단독 2자녀 정책은 반드시 과도기형식으로만 실행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가우림은 현재 국가 위생계획생육위가 질질 끌면서 단독 2자녀 정책을 전면 개방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면서 절충방안을 내놓았다. 그것인즉 30세 이상의 여성들에게 먼저 두자녀정책을 전면 개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가우림은 “이런 여성들이 이제 더 나이를 먹으면 생육적령기를 놓치어 평생의 한을 남기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도시의 인구관념 이미 개변됐다 최근 광동성 사회과학원 사회학 및 인구학 연구소 소장 정재정은 “둘째자녀 정책”을 전면 개방해야 한다면서 이 정책의 개방으로 인한 생육고조가 올 우려가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나젊은 일대들은 생육관념이 많이 변해 있다. 이들은 자식을 가치관으로 보는 새로운 관념이 수립되어 있기에 더는 자식이 많으면 복이 많다는 것을 신봉하지 않는다. 아울러 자녀의 질을 추구하고 수량을 추구하지 않는다. 때문에 이러한 생육관념으로 보아 새 일대들한테서 생육률이 높지 않을 수밖에 없다.” 하다면 “둘째자녀 정책”을 전면 개방할 경우 농촌의 생육율은 어느 정도일까? 이를 두고 정재정은 “농촌의 생육율은 좀 높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지난 세기 60~70년대와 같은 고봉기는 올 수 없다. 농촌의 생육관념도 많이 개변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 농촌도 점차 도시화로 되여가고 있고 농촌의 많은 젊은이들이 도시에 들어와 일자리를 찾으면서 그들의 견식도 많아지면서 생활에 대한 추구도 달라지고 있기 마련이다”라고 분석하였다. 한편 정재정에 따르면 국내성비의 차이와 향후의 노동력 잠재력을 놓고 분석해도 이젠 마땅히 “둘째자녀 정책”을 전면 개방해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이제 16년 뒤가 되면 중국의 노동력 인구가 지금의 9억명에서 8억명으로 줄 것이라고 추정했다. (끝)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5-05-24
  • 중국 도시들의 공동 난제 주차의 어려움(4)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최근 몇년간 북경, 광주, 심천 등 대도시들에서는 주차비를 높이는 것으로 교통체증을 종합적으로 다스리고 있다. 지난해 6월 남경에서는 주차비에 대한 새로운 규정을 출범, 핵심구역의 간선도로변의 주차자리는 소형차일 경우 오전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12시간의 주차비용을 232원으로 만들었다. 심수에서는 올해부터 도로 주변의 임시주차자리 주차비용을 받기 시작, 사업일인 경우 1류 구역은 시간당 10위안씩이었고 수금시간은 오전 7시 30분부터 저녁 9시까지었다. 한편 이러한 조치 또한 많은 운전자들의 질의를 받고 있는 상황으로 이들은 한결같이 “받아내는 주차비용은 어디에 쓰이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주차관리 기업 또한 한결같이 이는 일군을 모집하고 양성하고 또한 이들의 복장, 이들을 관리하고 세금을 바치고 한다고 답변하고 있다. 현재 북경에는 전문 주차관리만 하는 기업이 600여개가 있으며 비전문적인 기업까지 합치면 그 수는 더 헤아릴 수 없다. 그 외 정부 부문에 등록하지 않은 “주차자리”와 “주차장” 또한 도처에서 볼 수 있어 주차시장의 대혼란을 조성하고 있다. 그럼 수금표준을 어떻게 정하면 합리한가? 이를 두고 정주시 공안국 교통경찰지대의 부지대장 사근관은 “차별화한 수금표준은 두가지가 체현돼야 한다”면서 부동한 구역과 부동한 시간에 따른 수금표준이 별도로 나와야 하며 또한 도로변을 점한 수금은 차운전자가 일을 마친 뒤 빨리 떠나게 해야 하지 변상적으로 시간을 늘여 수금액수를 높여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광주시 정협위원인 조지위는 도로변을 점하면서 경영하는 것은 공공자원을 농단하는 것이기에 주차비표준은 정부가 제정하고 가격구성 원가와 수금한 돈의 사용처 등을 반드시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5-05-21
  • 일본 신풍(神风)특공대 모두 자원으로 죽음 선택했는가?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지난 5월 13일, 2차 세계대전시기의 일본육군항공병 특공대기지의 소재지었던 미나미 큐슈시와 일본 “지식전람회관”은 재차 보도브리핑을 열고 약 1.4만건의 “신풍(神风)” 특공대원들의 유서를 세계무형문화재로 만들려고 시도했다. 이들의 이유는 “단순히 전쟁의 참혹성을 세계에 알리어 이러한 비극이 재차 발생하는 것을 피면하려는데 있다” 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비극이 재차 발생하는 것을 피하려는데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극이 초래된 근원이 바로 일본 자체에 있었다는 것을 그들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다. “신풍”특공대도 천황을 호위할 수 없어 일본에서 “신풍”이란 단어가 기원된 것은 중국 원나라의 원세조가 일본을 침략할 때 생겨난 것이다. 1274년과 1281년 중국의 원나라 군대는 두차례에 거쳐 일본에 대한 동정을 시작했으나 번마다 해상에서 발생한 태풍 때문에 원나라 함대가 큰 손실을 보았으며 두차례의 동정은 패배로 막을 내렸다. 이러자 당시 일본은 해상에서 불어친 “신풍”으로 인해 원나라 군대를 물리친 것으로 간주, 전쟁 때마다 “신풍”으로 명명한 특공대를 전쟁의 최전방에 내세우군 하였다. 이는 자살공격으로 상대방의 목표를 파괴하는 전술로서 일찍 일러전쟁 시기에도 일정한 효과를 본 것으로 기재되고 있다. 2차 대전시기인 1944년에 이르러 전쟁의 국세는 일본에 대단히 불리하게 되었다. 특히 태평양 해상전에서 일본 해군은 연속 패배를 거듭했다. 1942년 5월의 산호해 해상전에서 일본해군이 자체로 발동한 해상전에서 첫 좌절을 당한 이래 그해 6월에 있은 해상전과 1943년의 미드웨이(中途岛) 해상전에서 참패를 당했으며 1943년 10월의 산타 크루스 해상전에서는 미소한 승리를 거두었으나 항공병의 원기가 크게 상했다. 그리고 11월에 있은 미드웨이 제도 해상전에서 대패하면서 그 때로부터 동맹군은 전략적 반공단계에 진입하게 되었다. 1944년 10월 17일, 갓 임명된 일본 제1 항공함대 사령관 오니시 다키시로 중장은 급급히 필리핀으로 향발하여 일락서산의 운명을 만구하려고 시도했다. 다키시로는 일본제국의 골수군인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심복으로 역시 진주항 기습의 핵심인물이기도 했다. 전 전선에 거쳐 일본이 전면 붕괴되는 위기앞에서 다키시로는 미약한 역량을 최대의 효율을 나타내는 유일한 방법은 전투기로 편성된 특공대를 조직, 매 전투기마다 250kg의 폭탄을 싣고 적의 항공모함과 충돌하는 것이라고 인정했다. 주지하다 싶이 합격된 비행사는 그 어떤 나라를 막론하고 모두 아주 아껴야 할 존재들이다. 그렇다면 자살식 공격으로 비행사를 소모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일본은 그렇게 했다. 거기에는 두가지 큰 원인이 있었다. 하나는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 줄곧 유효적으로 비행사들을 구조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즉 해상비행임무를 집행할 때 일단 비행기가 손실보면 비행사는 거의 모두가 살아남을 수 없었다. 당시 허다한 비행사들은 일단 임무집행에 나갔다가 회항이 불가능하게 되면 모두 자살성적인 출돌작전으로 죽음으로 자신의 가치를 높이었다고 한다. 한편 회항으로 기지에 돌아올 수 없는 일본군 항공병들의 소모속도는 보충속도 시간을 크게 초과, 2차대전 후기 일본군내에는 합격된 비행사들이 매우 모자랐다. 특히 미드웨이 제도 해상전중 많은 일본군 폭격기는 목표를 제대로 명중하지 못하였으며 미군이 필리핀을 진공할 때 일본군 항공병들은 거의 반격의 힘조차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일본전통의 “무사도”정신의 자살성적인 기습도 미군에게 주는 영향은 아주 미약하였다. 하긴 전쟁초기 이런 동방식의 인원소모의 전술앞에서 미군도 속수무책이었지만 일본군의 효율은 실제상 아주 낮았으며 명중율은 10%도 되지 않았다. 선택권리가 없는 “옥쇄” 일본군의 자살성적인 기습의 효율이 낮은 것은 이런 특공인원들의 자질과 심리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훈련시간이 아주 짧아 필요한 공중전 기술을 장악하지 못했기에 미국항공모함과의 “공동훼멸”의 목적에 이룰 수 없었다. 다른 한 방면으로는 어떤 특공대원들은 자원희생을 내비치었지만 기타 많은 대원들은 이런 죽음에 대해 원하지 않아 자살성 기습의 효과가 제대로 체현될 수 없었다. 일본학자 카타키 토시로는 역사사료를 찾고 특공대원 행존자들을 방문하는 등으로 3권에 달하는 “육군특별공격대”라는 저서를 출판했다. 이 저서에 따르면 일본군이 생산하는 폭탄은 투하할 수 없고 전문 항공모함이거나 군함과 부딫칠 때 폭발하는 자살성무기었다. 때문에 이는 비행사로 하여금 희생될 의무만 있게 했다. 하지만 당시 특공대의 지휘관을 맡은적이 있는 육군대위 이와모토 익신은 이렇게 주기 싫은 나머지 비밀리에 비행기 내부구조를 고쳐 폭탄투하장치를 가설, 비교적 순리롭게 회항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 책은 또 사사키 토모치 오장에 따르면 그가 자살성적인 비행집행을 피해 회항했을 때 그한테 차례진 것은 “군사령부는 그대가 이미 적함과 부딪치는 것으로 이미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었다고 보고하였다. 이제 그대는 진정으로 적함과 부딪치기를 바란다”고 하는 “안위”였다. 이는 일본군부의 숨겨진 진상을 남김없이 말해주고 있다. 당시 일본군은 이른바 천황의 명예을 위하여 허다한 “신분특공대”의 조직건립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이들은 “천황페하는 자기의 몸으로 적의 함정과 부딪치는 것을 바라지 않고 있었댜”면서 많은 특공대원들이 비행기를 몰고 미군함선에 부딪치는 것을 자신의 개인행위라고 기록하였다. 하지만 기실 당시 일본천황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현재 일본의 극우세력들은 당시 일본항공병 “신풍특공대”를 “천황한테 충직한 용사”들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았다. 일본 “아사히신문”의 주필 와타나베 츠네오에 따르면 당시 이들 “신풍특공대” 대원들은 자원해서 용감하게 전선에 나갔고 또한 죽기 전에 “천황페하 만세!”를 부른 것이 아니라 기실은 매 특공대원마다 모두 몹시 망설이었으며 지어 어떤 대원들은 땅에 주저 앉으면서 일어나지도 못했기에 헌병들한테 떠밀려 전투기에 올랐다고 한다. “옥쇄” 영광? 아니면 수치? 현재 유엔의 과학교육문헌 기구에서는 이미 전쟁을 반성하고 평화를 호소하는 것을 무형문화재로 등록시키기로 하였다. 예하면 2차대전 시기, 세계에서 가장 악명이 높은 뽈스까의 “집중영” 등이다. 일본에서는 “무라야마의 담화”가 발표된 1년 뒤에 히로시마 원폭사건을 유엔 과학교육문헌 기구에 신청하여 세계무형문화재로 등록시켰고 현재 한국에서는 “종군위안부”를 세계무형문화재로 등록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베 신조 정권이 출범한 뒤 일본의 역사수정주의 세력들은 부단히 가짜 평화를 부르짖으면서 침략전쟁을 미화시키고 있다. 이들은 지난날의 침략전쟁에 대해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를 무형문화재로 만들려고 시도하면서 세계 각지에서 “특공대”, “옥쇄” 등을 미화시키는 언론을 퍼뜨리면서 군국주의 분자들을 춰올리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 이른바 일본의 “지식전람회관”을 참관한 사람들 역시 이와 비슷한 인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 “지식전람회관”이야말로 평화의 기치를 내건 군국주의 찬양하는 전형으로 되고 있었다. 여기서는 “특공대원”들은 시대의 영웅으로 부각하고 있으며 침략전쟁을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특공대원”들의 “사적”으로 침략전쟁을 미화시키려는 목적이 숨겨져 있었다. “신풍특공대”의 역사에 대해 기록할 수는 있다. 하지만 주제는 명확해야 하는바 이런 특공대원들의 유물과 유언을 주제로 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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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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