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6(금)
 
 
●김 혁 (재중동포 소설가)

 

1

베이징 “해안화청”텔레비드라마유한회사와 한국 동성제작사(사)가 지난 1월 16일 베이징에서 제작인과 배우들이 모인 가운데 영화 “청년 정율성” 제작사인회를 가졌다.

영화는 약관의 나이에 중국으로 건너가 음악과 혁명의 도가니에 빠져든 정율성의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주선으로 다룰 예정이다.

영화에는 한국과 중국의 젊은 배우들을 기용, 이미 정율성 역을 맡을 배우와 부인 정설송을 분할 주요 배우들이 선정되였다. 영화는 3월 한국의 광주와 중국의 옌안 등지에서 곧 크랭크인 하게 된다.

영화이 제작측인 “해안화청” 회사는 지난해 1월 “파이판(派饭)”이라는 음식과 생활 소재의 코미디영화로 한국에 진출,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에서 관객들의 호평을 얻은바 있다.

     2

1914년 7월 7일, 한국 전라남도 광주남구 양림정에서 태여났다.

1933년, 3.1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가 일제의 탄압에 중국으로 망명한 형들을 따라 부산, 일본, 상하이를 거쳐 중국난징에 이르렀다. 난징에서 “의열단”이 꾸린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학과를 배우고 이어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였다. 그는 반일활동을 하는 한편 시간을 짜내 러시아인 크리노와교수에게서 성악을 배웠다.

1937년 열아홉 살의 정율성은 바이올린과 만돌린 그리고 “세계명곡집”을 지니고 간난신고를 겪으며 옌안에 도착하였다. 옌안에서 루쉰예술학원을 나왔고 “연수요(延水谣)”, “항전돌격운동가”, “팔로군대합창” 등 50여수의 악곡을 창작하였다.

격정과 기백이 차넘치는 그의 노래는 군민의 항일의지를 북돋우어주면서 널리 유전되였다. 그후 그의 노래는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으로, 1988년에 이르러서는 “중국인민해방군군가”로 채택되었다. 1990년 9월22일 베이징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개막식은 바로 정율성작곡의 이 노래의 연주로 시작됐다.

옌안 시절 훗날 중국 최초의여성대사로 주 덴마크, 주 네덜란드대사가 된 정설송과 결혼,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슬하에 딸 정소제를 두었다.

옌안시기 정율성은 무정장군을 따라 조선의용군 소재지인 태항산근저지로 가서 조선혁명군사학교 교육장을 담임하였다. 그는 학생들을 이끌고 탄우가 비발치는 전쟁터에서 선전을 벌리기도 하고 대중가요창작활동도 펼쳐 나갔다. 그가 창작한 “조선의용군행진곡”과 ”혁명가”등은 중국의 허베이와 둥베이 항일근거지의 조선의용군들 속에서 널리 불려졌다.

1945년 8.15해방을 맞은 뒤 정율성은 조선의용군과 함께 조선으로 나가 황해도 선전부장을 지냈으며, 해주음악전문학교를 세웠다. 보안간부훈련대대부협주단(조선인민군협주단의 전신)을 창건하여 초대 단장을 역임했으며 조선국립음악대학 작곡학부장에 부임했다.

그 몇 년사이 ”두만강”, “동해어부” 등 30수의 가곡을 창작, 그중 “조선인민군군가”를 작곡했다. 이로서 정율성은 두 나라 군가 작곡자로 세계에 유례없는 기록을 남긴다.

1952년부터 정율성은 중국에 돌아와 베이징인민예술극원, 중앙악단에서 전업작곡가로 있었다. 이 시기 그는 중국의 윈난, 따리등 오지를 찾아다니며 민요수집에 전력하였고 아이들을 위하여 ”평화의 비둘기”등 명동요를 창작하였으며 또 중국국가주석 모택동의 시사 34수에 곡을 붙이기도 했다.

10년의 “문화대혁명”이 결속되자 창작의 봄을 맞이했던 정율성은1976년 12월 7일 베이징 교외의 강에서 물고기를 낚다가 뇌익혈로 쓰러졌다. 향년 62세였다.
 
1978년 베이징음악출판사에서 “정율성가곡선”이 출판되였고 2009년 9월 “새 중국창립에 기여가 돌출한 영웅모범인물 100명”중의 한 사람으로 당선되었다.

40여년의 음악생애에서 각종 쟝르의 음악작품 360여수를 창작한 정율성은 중국현대음악사의 한 획을 그으면서 영원한 “인민음악가”로 추앙받고있다.
   
3
 
지난해7월 초 방한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서울대 강연에서 중·한 우의의 상징으로 정율성을 언급하다시피 중국에서의 정율성의 위상은 높다.

정율성의 일대기는 중국에서 일찍 영화로 제작되어 스크린에 오른바 있다. 1992년 북한의 “2.8”예술영화촬영소에서 “음악가 정율성”을 전, 후편 긴 편폭으로 제작했다. 영화는 1950년대 북한으로 간 정율성이 조선인민군협주단의 첫 단장으로 되여 음악가로 성장하는 과정을 실재한 사실에 기초하여 그려내였다.

2002년 중국에서도 정율성 관련 영화 “태양을 향하여”를 출품했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 성립 50주년을 기념해2002년에 제작된 영화에는 중국영화계의 쟁쟁한 일군들이 대거 투입되였다.

감독으로는 중국드라마부분 최고의 상인 “금독수리”상과 “비천”상을 석권한 장춘영화촬영소의 송강파 감독과 조선족 감독인 박준희가 메가폰을 잡았고 중국영화계 최고의 상인 “금계상”과 “백화상” 수상자들이 정율성과 부인 부인 정설송역을 맡았다.

영화는 옌안에서 뿐만 아니라 베이징, 텐진, 창춘 그리고 연변지역을 폭넓게 전전하면서 외경을 찍었다. 영화는 만들어진후 평양국제영화제에서 특별상을 받았고 한국광주영화제에도 초청, 상영되었다.

한국에서는 지금도 정율성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정율성의 활동한 주무대가 중국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율성선생이 한국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반일에 투신했고 음악을 무기로 우리 민족의 혼을 전해 세계인을 감동 시킨 음악가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새롭게 제작되는 또 한부의 정율성 관련 영화가 중국 나아가 남북이 모두 애대하는 음악가에 대한 오마주(다른 작가나 감독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특정 대사나 장면 등을 인용하는 일)영화로 스크린을 수놓기를 바라며, 그이의 생애 그리고 그이의 음악이 하루 빨리 한국에서도 알려 졌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 본다.
 
태그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김혁 칼럼] 스크린에 오르는 정율성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