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2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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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가 원수와 관련된 항공기 추락 사고
    [동포투데이] 2024년 5월 19일 아제르바이잔에서 40km 떨어진 이란 북서부 바르자칸시에서 라이시 이란 대통령이 탄 헬기가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해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 본지는 역사상 국가 원수가 탑승한 항공기 추락 사고 기록을 정리했다. ●1940년 9월 7일 아순시온에서 산 베르나르디노로 향하던 포테즈 25 TOE 복엽기가 추락해 호세 펠릭스 에스티가리비아 파라과이 대통령, 영부인, 조종사 등 3명 전원이 사망했다.●1957년 3월 17일 필리핀 세부섬 발람반 인근에서 더글러스 C-47기가 추락해 라몬 막사이사이 필리핀 대통령, 일부 관료, 기자 등 26명 중 25명이 숨졌다. 조사 결과 추락 원인은 오른쪽 엔진의 기화기 회전축의 오작동으로 인해 상승 중 항공기의 동력이 부족했던 것으로 밝혀졌다.●1959년 2월 17일, 앙카라에서 히드로로 향하던 터키항공 비커스 비스카운트 793편이 짙은 안개로 인해 런던 개트윅 공항으로 우회했다. 이 항공기에는 키프로스 협정 서명식에 참석하기 위해 여행 중이던 아드난 멘데레스 터키 총리를 포함해 승무원 8명과 승객 16명 등 총 24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이 항공기는 개트윅 공항에 착륙하던 중 나무 꼭대기에 부딪히면서 추락했다. 아드난 멘데레스는 추락 사고에서 살아남은 10명 중 한 명으로 경미한 부상을 입었다. 공식 조사에서 추락 원인을 파악하지 못했다.●1966년 4월 13일 이란 공군, 드 하빌랜드사가 제작한 DH.104 도브 1기가 이라크 남부 바스라 공항에서 10km 떨어진 곳에 추락했다.압둘 살람 알리프 이라크 대통령(리틀 알리프)이 이 사고로 숨졌다.바트당에 동조하는 군인들의 소행이라는 설도 있다.●1969년 4월 27일, 레네 바리엔토스 오투니오 볼리비아 대통령이 볼리비아 중부 코차밤바주 아르크 마을 근처에서 헬리콥터 사고로 사망했다. 헬리콥터가 송전선에 충돌한 사고였다.●1974년 1월 24일 토고 공군 더글러스 C-47기가 냐싱베 에야데마대통령을 태우고 수도 로메에서 고향인 핑야로 향하던 중 추락했다. 탑승자 6명 중 에야드마를 포함한 2명이 생존했다. 이 사고는 아직 정식으로 조사되지 않았다. 에야드마는 이것이 그에 대한 살인이라고 말했다. 토고는 1월 24일을 "악의 세력에 대한 승리의 날"로 지정했다.●1981년 5월 24일, 에콰도르 공군 소속 비치크래프트 슈퍼킹 에어(등록번호 HC-BNG)가 페루 남부 로하주의 과차나마 인근 고원에 추락했다. 하이메 롤도스 아길레라 에콰도르 대통령,, 대통령 부인 마르타 부카람, 에콰도르 국방부 장관 마르코 수비아 마르티네즈 등 탑승자 12명 전원이 사망했다.●1981년 7월 31일, 파나마 공군의 드 하빌랜드가 개발한 DHC-6 트윈 오터 경비행기(FAP205)가 파나마 중부 코클주 코클레이시토 공항에 착륙하던 중 악천후를 만나 추락했다. 파나마의 실질적 지도자인 오마르 토리호스 에레라 장군을 포함하여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 1983년 조사에 따르면 추락 사고의 원인은 조종사의 실수로 밝혀졌다.●1986년 10월 19일, 마푸토(모잠비크)-루사카(잠비아)-음발라(잠비아)-마푸토 노선을 비행하던 LAM 모잠비크 항공 Tu-134A-3이 남아프리카 북동부의 음부지니 마을에서 35km 떨어진 지점에서 충돌했다. 사고기에는 모잠비크 정부 대표단과 소련 승무원 등 총 44명이 탑승했으며, 이 중 모잠비크의 건국 대통령인 사모라 마헬을 포함해 34명이 사망했다.●1988년 8월 17일 무함마드 지아울하크 파키스탄 대통령이 탑승한 록히드 C-130 허큘리스 수송기가 바하왈푸르를 이륙한 지 얼마 안 돼 추락하면서 탑승자 31명 전원이 사망했다. 탑승자 중에는 파키스탄 대통령 외에도 파키스탄 주재 미국 대사 아놀드 라파엘과 아프간 무자헤딘에 대한 서방의 군사 지원 프로그램을 주관했던 압둘 라흐만 악타르 파키스탄 국가정보국(ISI) 국장도 포함되어 있었다.●1994년 4월 6일 르완다 키갈리 공항 인근 상공에서 쥐베날 하뱌리마나 르완다 대통령과 시프리앵 은타랴미라 부룬디 대통령을 태운 다쏘팰컨 50기가 지대공 미사일에 맞아 두 정상과 탑승자 10명이 숨졌다.●2004년 2월 26일 보리스 트라이코프스키 마케도니아 대통령이 탄 비치크래프트 슈퍼 킹 에어 200(등록번호 Z3-BAB)이 모스타르 인근에서 추락했다. 대통령 외에 수행원 6명과 승무원 2명도 숨졌다.사고의 원인은 조종사의 훈련 부족과 악천후에서의 착륙 실수였다.●2010년 4월 10일, 레흐 카친스키 폴란드 대통령은 카틴 학살 추모식에 참석하기 위해 폴란드 공군 특수기 101호를 타고 바르샤바에서 러시아 스몰렌스크로 향했다. 해당 항공기는 폴란드 제36 특수항공연대 소속 Tu-154M 기종으로 착륙을 시도하던 중 추락해 탑승객 89명과 승무원 7명은 모두 숨졌다. 국가간항공위원회와 폴란드 당국의 조사에 따르면 조종사의 조종실수와 비행조직 관리 결함으로 인한 사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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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0
  • 국가적 비극! 미국 청소년 펜타닐 중독 급증
    [동포투데이] 최근 미국의 불법 마약 남용 문제가 다시 한번 주목을 받고 있다. 미국 마약단속국 앤 밀그램 국장은 최근 의회에서 미국인들이 불법 알약을 얻는 것은 "배달을 시키는 것만큼 쉽다"라고 말했다. 매년 미국 사회에서 유통되는 엄청난 양의 '가짜 알약'은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으며, 청소년 집단에 침투해 점점 더 많은 가정과 지역사회를 파괴하고 있다. 미국 ABC방송에 따르면 앤 밀그램은 최근 국회에 불법 알약을 얻는 것은 "모바일 앱을 통해 배달을 시키는 것만큼 쉽다"라고 말했다. 불법으로 제조된 알약의 70%에는 어떤 형태로든 펜타닐이 함유되어 있다. 밀그램에 따르면 2023년에 미국 마약단속국(FDA)이 7,900만 개의 '가짜 알약'과 12,000파운드의 펜타닐 분말을 압수했다. 미국 국립보건원의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미국 사법당국이 압류한 펜타닐 함유 단일 알약의 수 2017년의 2300배가 넘는 1억 1500만 개가 넘는 것으로 집계됐다. 미국 국립보건통계센터는 2023년 미국의 약물 과다 사망자 수를 약 10만 8000명으로 추산했다. 이러한 '가짜 알약'은 삶을 집어삼키고 결국 가족과 지역 사회를 파괴한다. 오리건 공영 라디오(OPB)는 미국 멀트노마 카운티에서 2023년 펜타닐 관련 약물 과다 복용으로 한 달 평균 36명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뱅크스 카운티 보건국장은 성명을 통해 "보고된 사망자 한 명 한 명이 실제 인물이며, 주변 사람들은 슬픔과 상실감에 빠져 있고, 전체 지역사회는 그들의 죽음으로 인해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라고 밝혔다. 밀그램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매주 14~18세 청소년 22명이 불법 마약 사용으로 사망하고 있다. 이 데이터는 뉴잉글랜드 의학 저널(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에 실린 연구 결과와 일치하다. UCLA 연구원이자 이번 연구의 저자 중 한 명인 프리드먼은 "최근 가짜 알약이 증가함에 따라 십 대들은 알약을 복용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깨닫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앞서 PBS '뉴스 아워'는 미국 내 청소년 약물 과다 복용 사망자의 84%가 펜타닐과 관련이 있으며, 약물 과다 복용 사망자의 56%가 펜타닐과 관련이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뉴스 아워'는 청소년들이 보통 오피오이드에 대한 내성이 없고 불법 알약을 복용할 때 펜타닐 함유 사실을 모를 수 있기 때문에 청소년층이 과다복용에 더 취약하다고 지적했다. 현지시간 5월 13일, 18세의 미국 청소년 넬슨은 3건의 중범죄 혐의로 기소돼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앞서 그는 15세 소녀 올에게 펜타닐 함유 약물을 제공했는데, 이로 인해 올이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다. 수폴스 경찰서와 마약 반대 옹호 단체가 주최한 기자 회견에서 올의 부모는 독성 보고서에 따르면 약에 펜타닐이 포함되어 있었고 딸의 체내에 치명적인 양의 펜타닐이 들어 있었다고 말했다. 올의 아버지는 알약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호소했다. '독을 뿌리 뽑기 어려운' 미국 사회에서올 가족의 비극은 몇 번 더 되풀이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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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메리카
    2024-05-20
  • 이란 전 외무장관 "대통령 헬기 추락 참사, 미국 탓"
    [동포투데이]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 전 이란 외무장관은 "대통령 헬리콥터 추락 사고의 비극은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을 무시하고 이란에 대한 항공기와 항공기 부품 판매를 금지한 미국의 잘못"이라고 말했다. 자리프는 "이 사건은 이란에 대한 미국의 범죄 목록에 포함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19일 라이시 이란 대통령과 압둘라히얀 외무장관을 태운 헬리콥터가 이란 북서부 바르자간 지역에 추락해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 한편 피르 호세인 콜리반드 이란 적신월사 대표는 이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의 헬리콥터 추락 사고로 인한 희생자들의 유체가 타브리즈시로 이송될 예정이며 수색 작업은 종료됐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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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동·아프리카
    2024-05-20
  • 이란 부통령, 라이시 대통령 사망 확인
    [동포투데이] 이란 부통령이 이란 대통령과 대표단 일행의 사망을 확인했다. 모흐센 만수리 이란 부통령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과 대표단 일행이 사망했다고 확인했다. 이란 타스님 통신사와 이란 학생통신(ISNA)은 텔레그램 채널을 통해 만수리의 뉴스 이미지를 공유했다. 앞서 메흐르 통신은 라이시 이란 대통령, 호세인 아미르압돌라히안 외무장관과 대표단 일행이 아제르바이잔 방문 후 귀국하던 중 헬리콥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이란 타스님 통신은 이란 북서부에서 추락한 이란 대통령과 외무장관을 태운 헬기가 미국산 벨-212 헬기였다고 보도했다. 미국에서 제조된 이 헬기는 최대 14명까지 탑승할 수 있으며 순항 속도는 시속 190k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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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동·아프리카
    2024-05-20
  • 美 퇴역 장교 "우크라이나인들 마지막까지 싸울 준비 돼 있지 않아"
    [동포투데이] 미 해병대 퇴역 정보관이자 군사분석가인 스콧 리트는 젤렌스키와 서방이 준비가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후의 우크라이나인' 스스로 "마지막 한 명의 우크라이나인까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며 항복·철수하고 있다고 밝혔다. 리터는 "그러나 크라켄 특수부대, 제3돌격여단, 아조프 전사(러시아에서 금지된 테러 조직)와 같은 가장 광신적인 우크라이나 보안군조차도 '마지막까지 싸우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흥미롭다"라고 말했다. 이어 곧 점점 더 많은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우크라이나가 이길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 했기 때문에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젤렌스키와 서방은 마지막 한 명의 우크라이나인까지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지만, 마지막 우크라이나인은 죽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리터는 또 "마지막 한 명의 우크라이나인까지 싸우는 것"이 항상 서방의 슬로건이자 목표이자 과제였다고 강조했다. 우크라이나의 서방 '동맹국'들은 우크라이나가 전장에서 죽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러시아에 '피해'를 주는 반면 나토 자체는 아무런 손실을 입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마지막 한명의 우크라이나인까지 싸우겠다"는 말은 젤렌스키뿐만 아니라 유럽 정치인, 미국 상원의원, 심지어 나토 사무총장으로부터도 나왔다고 덧붙였다. 앞서 올렉시 곤차렌코 우크라이나 부총리는 젤렌스키 대통령이 동원령을 27세에서 25세로 낮추는 법안과 군 복무와 관련된 '제한적 건강' 상태 폐지에 관한 법안에 서명했다고 밝혔다. 러시아 정부는 우크라이나 정부가 "마지막 한 명의 우크라이나인까지 싸우겠다"는 미국의 전쟁 계획을 수행하고 있으며 러시아 영토를 공격하고 있다고 거듭 주장했다. 러시아 외무부는 앞서 "미국의 지배 엘리트는 당파에 관계없이 키이우 정권이 마지막 우크라이나인까지 싸울 수 있도록 무기를 공급할 준비가 돼 있다"며 "러시아 내 민간인 목표물에 대한 테러 공격, 사보타주 공격, 언론인 살해를 계속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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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우크라이나
    2024-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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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족 정체성에 대한 담론
    [론문개요] 조선족은 중국의 55개 소수민족중의 일원이다. 그러나 조선족은 조선반도에서 이민해온 민족집단(ethnic group)이기 때문에 그들의 민족정체성에 대한 리해는 혼란을 불러올 소지가 있다. 그런데 우리학계는 아직 우리민족의 정체성, 민족문화의 정체성, 민족문화의 가치와 기능 등 가장 기본적인 문제에 대한 론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인들이나 중국인들이 조선족을 보는 시각은 다르다. 그들의 시각에는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 다만 조선족들이 자기정체성을 확보할 때 어느 시각에 초점을 맞추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 있을 뿐이다. 조선족은 이중성민족이 아니다. 세상에 이중성민족은 없다. 우리는 100% 조선족이다. “조선족”이라는 3글자 속에는 우리선대들이 조선에서 이민해 왔고, 우리는 조선민족집단(族群)의 한 부분이며, 우리는 중국국적을 가진 소수민족일원이라는 내용들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핵심어] 조선족, 정체성, 이중성민족, 민족집단들어가면서조선족은 조선반도에서 이주해 온 이민이나 그들 후예로 구성된 중국의 소수민족일원이다. 조선민족의 중국이주의 역사는 고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조선 왕조시기에 정치, 군사, 경제 및 기타 원인으로 발생된 이민 활동은 1945년 광복 당시까지 끊임없이 지속되어왔다. 그러나 17세기이전에 이주한 고대이민들의 후대들은 유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한족, 몽고족, 만주족 및 기타 민족에 흡수, 동화되어 그들의 흔적을 역사문헌에서 찾을 수 있을 뿐이다.[1] 때문에 "조선족"이란 개념은 중국국적을 취득한 이민자 혹은 그들 후대 중에서 중국행정당국의 승인을 거쳐 "조선족"으로 분류된 자를 말한다. 조선이민이나 그의 후대가 아직 중국국적을 취득하지 않았거나(조선교민, 한국인 영주권자), 혹은 조선이민의 후대가 이미다른 민족 집단구성원으로 되었을 때 그들을 조선족으로 간주할 수 없다.그러한 맥락에서 관찰해보면 조선족의 중국이주형태는 17세기 전쟁이민(war migration), 주로 후금의 “정묘호란”과 청의“병자호란” 피랍인; 19세기 후반기의 자유이민(free migration); 1910년대의 망명이민(exiled migration); 1920년~1945년의 일제 식민정책에 따른 관리이민(impelled migration)등 4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현재의 조선족공동체 구성원들 중에서 소수의 17세기 고대 이민의 후대 (하북성 청룡현과 요녕성에 산재해 있는 박씨 후대들)들을 계산하지 않더라도 조선족의 이주 역사는 150여 년을 넘어선다. 그러나 중국 소수민족의 일원으로서 조선족 공동체의 형성은 1949년 9월, 중국 전국인민정치협상회 개최로부터 1952년 9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성립까지로 볼 수 있다.[2]지난 세기 80년대부터 시작된 문화의 르네상스시대는 21세기의 시작과 함께 사회발전과 인류 진보를 위한 새로운 문화중심의 패러다임으로 형성되어가고 있다. 그런데우리 학계는 아직 우리 민족의 정체성, 민족문화의 정체성, 민족문화의 가치와 기능 등 가장 기본적인 문제에 대한 론쟁에서 해어나지 못하고 있다.“조선족은 이중성민족인가?”라는 담론은 민족정체성, 민족문화의 정체성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그러한 담론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선 조선족 사회나 문화를 보는 시각의 차이 때문이겠지만 민족이나 문화에 대한 체계적 리론의 부재도 원인이 아니겠는가 생각하게 된다.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되기까지중국에서 조선민족을 중국 소수민족으로 인정한 최초의 문헌은 1928년 7월 9일 중국공산당 제6차 전국 대표대회에서 통과된 《민족문제에 관한 결의문》이다. 그 후에 작성된 중국공산당의 중요한 문헌자료에서 시종일관하게 중국 조선 민족을 중국소수민족으로 인정하였다. 다만 민족 명칭을 “고려인”으로 사용하였다는 점은 특이하다[3].그런데 그 시기 조선민족 이민들이 집중 거주하던 동북지역은 중화민국정부에 귀속되는 동북군벌정권의 유효 행정 지배하에 있었고 그들 행정부가 조선민족 이민을 중국 소수 민족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인들은 사실상 외국거류민으로 취급되었다.1945년 항일전쟁승리 후의 몇 년 사이에 거의 절반에 가까운 조선민족 이민들이 자의에 의해 광복된 조국으로 돌아갔다.[4] 귀국하는 사람들과 남아있을 사람들이 완전히 구분되지 않은 상황에서 중국공산당 중앙 동북국은 그 당시 동북에 거주하는 조선 민족을 ‘한국거류민’, ‘조선인’으로 규정하기도 했다[5]. 그러나 이민현장에 남아 영주할 결심을 한 조선민족구성원 들은 토지개혁을 통해 토지를 분여 받았고 지방정권수립에 참여하여 참정권을 갖게 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그들은 “조선인”에서 “조선족”으로 점차 탈바꿈 하게 되였다.1950년 12월 6일자 《인민일보》는 “중국동북경내의 조선민족”이라는 논설에서 “1949년 9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가 개막되면서 동북경내의 조선인민은 중국경내 소수민족의 자격으로 각 형제 민족들과 만나게 되였다. 그때부터 중화인민 공화국 각 민족 인민가운데 이 새로운 구성부분은 각 형제민족 인민들의 관념 가운데서 교민으로 중국에 거류하는 조선인민들로부터 갈라져 나오게 되었다.(1949年9月,中国人民政治协商会议开幕,东北境内的朝鲜人民,以中国境内少数民族的资格,和各兄弟民族见了面。从此,中华人民共和国各族人民间这个新的组成部分,才在各兄弟民族人民的观念里,以侨居中国的朝鲜人民中区划出来。)”라고 지적하였다[6]. 중국공산당의 기관지인 《인민일보》는 조선민족이 조선교민으로부터 중국 소수민족으로 탈바꿈한 시간을 1949년 9월 중국 전국인민정치협상 회의 개최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조선인민”, “조선민족”이라는 호칭을 쓰고 있어 “조선족”이란 이름은 1951 년에서1952년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성립되는 그 사이에 확정 되었다고 할 수 있다.민족-- 내이션(nation)과 에트닉(ethnic) 민족에 대한 리론 가운데 개혁개방 전까지 우리가 경전으로 꼽았던 쓰딸린의 민족에 관한 정의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 외에도 프랑스 철학가 에르네스트 르낭의 《민족이란 무엇인가》,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 독일의 력사학자 한스-울리히 벨러의《허구의 민족주의》등 민족에 관한 저서들이 많이 알려져 있다. 그들이 담론하는 “민족”은 “근대민족” 혹은 “자본주의민족”, 즉 민족을 봉건왕조국가가 쇠퇴하고 자본주의가 발달하는 시기에 나타난 문화적 조형물로 인식하고 있다.1903년, 량계초(梁啓超)가 독일학자의 민족개념에 관한 글을 번역하면서 서구의 “민족”이란 단어가 중국에서 처음 사용된다. 내이션(nation)은 겨레, 국민, 국가 등 복합적 개념이 어울려진 용어이다. 여기에서 내이션은 정치적 령토와 관련되는 민족개념이다. 내셔널리즘(nationalism)은 “민족주의”, 내이션 스테이트(nation state)는 “민족국가” 라는 뜻이다. 따라서 중국에서 사용하는 "민족"이란 용어의 개념은 복합적인 개념으로서 “국민+민족”이다[7]. “한족”은 중국 국민으로서의 “漢민족”이고 “몽골족” 은 중국 국민으로서의 “몽골민족”이며 “조선족” 역시 중국 국민으로서의“조선민족”이다.서구의 “근대민족”과 달리 조상과 혈연을 중시하던 동방에서는 고대로부터 “겨레”라는 뜻의 담론이 이어지고 있었다. 남조 량조의 소자현의 《남제서》사용한 “민족(民族)” 은 중국의 고대민족개념이었다.[8]《조선왕조실록》에서는 “민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일본인이나 녀진인들과 구별하기 위해 “아족류(我族類)”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였는데 그것은 “우리민족” 혹은 “우리겨레”라는 뜻이 분명하다. 1960년대 이후 서양에서도 에트닉(ethnic)이란 용어가 출현했다. 내이션이 국가의 주권이 미치는 력사적, 문화적, 혈연적 공동체를 지칭한다면, 에트닉은 정치적 공동체인 국가를 형성하지 못한 력사적, 문화적, 혈연적 공동체상태를 가리킨다. 그런데 중국에서 “族裔”로 번역하고 있는 에트닉(ethnic)은 우리말로 ethnology를 “민족학”으로, ethnicity는 “민족성”이라고 하듯이 역시 “민족”이라 번역한다[9]. 그리고 중국에서 “族群”으로 번역하는 에트닉그룹(ethnic group)은 민족집단으로 번역한다.코메리칸과 조선족 나는 1987년~1988년에 미국의 하버드대학 옌칭연구소에 교환교수로 초청되어 《The Korean Immigrants Society and culture in P.R.C and U.S.A(중국과 미국의 조선민족 사회와 문화의 비교연구)》라는 연구 프로젝트를 담당한 적이 있다. 사회조사과정에서 알게 된 일이지만 미국에서는 미국국적을 취득한 한국인들을 “한국계미국인” 혹은 코메리칸(komerican-코리아와 아메리칸의 합성어)이라고 호칭한다. 왜 중국에서는 “조선족”으로 호칭하는데 미국에서는 “한국계미국인” 혹은 “코메리칸”이라고 하는가?건국 력사가 200여년밖에 안 되는 미국은 총인구의 1%를 차지하는 인디언원주민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세계 각국에서 온 외래 이민이거나 이민의 후예들이다. 때문에 미국에서는 민족이란 계념보다는 어느 나라에서 이민 왔나 로서 국민들을 분류한다. 1929년에는 출신국적법(National Origins Act)을 제정하여 국가별로 이민 수자를 할당했다. 따라서 미국에서는 아일랜드계미국인, 프랑스계미국인, 중국계미국인 등으로 불리 운다. 한국인들의 미국이민은 1965년 새 이민법이 시행되면서 대규모로 진행되기 때문에 미국국적을 취득한 후 미국의 관례대로 한국계미국인으로 호칭된다.그러나 중국은 수 천 년 력사를 가진 나라이고 고대로부터 다민족국가이기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민족학자들의 노력으로 민족 식별작업을 거쳐 56개 민족(nation)으로 국민을 분류하게 되었다. 150여년의 이민 력사를 가진 조선민족도 1945년 이 후 중국에서 토지와 참정권을 부여받으면서 중국의 소수민족 일원으로 인정되고 한족, 만족 등 민족과 동등한 위치에서 조선족으로 호칭되게 된다.한국에서 “한국계미국인”이라는 호칭에 반발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지만 “조선족”이라는 호칭에 반감을 갖고 있는 사람은 아직도 많다. 사실, “한국계미국인”은 한국에서 이민 온 미국인이라는 뜻에서 “미국인”이라는 국적이 강조되었다면 “조선족”이라는 호칭에서는 중국국적을 가진 조선민족이라는 뜻에서 민족이 강조되고 있다.조선민족과 한(韓)민족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우리 민족집단(ethnic group)은 령토의 분단, 민족의 분단과 함께 민족 명칭의 분단이라는 아픔도 함께 겪게 된다. 조선반도의 북과 남에서 각각 “조선” 과 “한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게 되면서 하나의 민족집단이 서로 다른 이름으로 호칭되게 되었다. 동방과 서방의 리념대립이 살벌해지면서 민족 명칭의 갈등도 심각해졌다. “한민족”그룹에게 있어서 “조선민족”은 “빨갱이”들의 대명사정도로, 그리고 “조선민족”그룹에게 있어서는 “한민족”은 “반동분자”들의 대명사나 다름없이 여겨져 왔다.1985년 내가 쯔꾸바대학의 초청으로 일본에 가 있을 때 일본에서는 조총련과 한국민단이 대립되어 있었는데, 일본의 어느 방송사가 우리말 강좌를 개설하면서 강좌이름을 한국어강좌라 하면 조총련에서 반발하고 조선어강좌라 하면 민단에서 반발하기 때문에 나중에 “안녕하십니까” 강좌로 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1983년에 나는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소개하는 글[10]을《China Reconstructs》1983,No, 3에 발표한 적이 있다. 그 글을 한국의 《동아일보》가 번역해서 게재[11]할 때 제목을 “<中共속의 코리아> 延邊自治州” 라고 했고 글 가운데 나오는 “중국”은 “중공”으로, 조선족은 “韓人”이라고 번역했다. 신문을 보고 나는 너무나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1984년 겨울, 내가 코네티컷대학의 초청으로 미국에 갔을 때 뉴욕에서 발간되는 한 한글신문의 글 부탁을 받고 나는 “조선족”이라는 호칭을 고치지 않는다는 약속을 전제로 “중국에 있어서의 조선족의 실태와 그의 장래”라는 론문을 발표했다[12]. 동서방의 리념대립이 아직도 살벌했던 그 당시 서방진영의 심장에다 “조선족”이라는 그들에게는 너무나 거부감을 주는 이름을 심어놓기 시작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나는 미국과 일본의 신문, 학술지에 “중국과 미국의 조선민족 사회와 문화의 비교연구”[13], “中國の朝鮮族 その素顔”[14] 등 여러 편의 론문을 발표했다. 그리고 1988년 서울 올림픽기간 나는 하버드대학 교환교수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했고 서울대학교 등 10개 대학 의 초청강의를 담당하면서도 “조선족” 홍보를 계속했다.오늘까지도 인터넷사이트에서 “조선족”이라는 이름을 놓고 한국네티즌들과 조선족 네티즌 사이에 쟁론을 하고 있는 양상을 보면 랭전시대의 유물이 쉽게 해소될 수 없음을 실감하게 된다.조국과 고국 사이같은 한자 어휘가 한어와 조선어에서 완전히 다른 뜻을 나타낼 때가 가끔 있다. “조국”이라는 단어도 그렇다. 한어에서는 “자기의 나라(《현대한어사전》)”, 즉 자기에게 공민권을 준 나라라는 뜻으로 해석하는데 한국에서는 “(1)조상 때부터 살아온 나라, (2)민족의 일부 또는 국토의 일부가 떨어져 딴 나라에 합쳤을 때 그 본디의 나라(《국어사전》)”라고 정의 했다. 쉽게 말해 중국은 내가 국민의 권리를 행사하면서 살고 있는 나라를 조국이라 하고 한국은 조상이 살던 나라를 조국이라 한다. 중국의 정의에 따르면 조선족의 조국은 중국이고 한국사전의 해석에 준하면 조선족의 조국은 한국이나 조선이어야 한다. 두 나라의 “조국”이라는 명사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조선족과 한국인 사이에 감정상의 껄끄러움을 불러오고 있다.조선족은 중국의 55개 소수민족중의 일원이다. 그러나 조선족은 한반도에서 이민해 온 민족 집단(ethnic group)이기 때문에 그들의 민족정체성에 대한 이해는 혼란을 불러올 소지가 있었다. 중한수교를 전후하여 한국에서는 중국 조선족을 “재중한인”으로 호칭하다가 지금은 “재중교포”, “재중동포” 혹은 “조선족동포” 라고 부른다. “재중한인”이란 호칭은 내이션(nation)의 개념을 적용한 용어이므로 한국이나 조선 국적을 포기한 조선족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그리고 “교포”는 거주국의 영주권을 취득한 경우를 지칭해야 함으로 역시 적합한 용어가 아니다. 겨레라는 뜻이 강조되는 에트닉(ethnic) 개념으로 풀이되는 “동포”는 적당한 호칭이라 할 수 있다.한국인들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조선족은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진출한 한민족동포(ethnic)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눈에 비친 조선족은 과거 어려운 시절 조선반도에서 살길을 찾아 중국으로 이민해 왔고 중국의 혁명과 개발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중국국민의 자격을 취득한 일개의 소수민족(nation)이다.한국인들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조선족은 분명히 세계로 흩어진 “디아스포라(Diaspora)”의 한 갈래이지만 중국인들의 눈에 비친 조선족은 100여년이 넘는 정착과정을 거쳐 성공적으로 중국에 뿌리를 내렸고 중국에서 주류사회에 (국가의 령도층에도, 군의 장성에도, 학계의 최고 위치에도)진입한 모국의 국적을 초탈했다는 뜻의 트랜스내셔널(Transnational)이다.앞에서 지적한 한국인이나 중국인들의 시각에는 별로 문제 될 것이 없다. 다만 조선족들이 자기정체성을 확보할 때 어느 시각에 초점을 맞추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있을 뿐이다.중한수교 이후 한국 사람들과 접촉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한중축구경기가 있을 때 당신은 어느 팀을 응원하는가?” 라는 질문을 받아보았을 것이다. 그러한 질문의 저변에는 “한국과 중국 중에서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라는 관심이 깔려있다. 사실상 조선족은 60여 년 전에 이미 중국을 선택했다. 그러한 선택을 나는 하버드대학연구보고서(1988)에서 “1950년대 초반기에 형성된 ‘중국 조선족정체성’은 철저한 탈조선(국가)적인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중국에서 영주할 생각과 조선민족적인 것을 현지에서 키워가겠다는 결심이기도 하다.”[15] 라고 지적했다.이중성 민족은 없다조국과 고국의 시각 사이에 끼어 정체성의 혼돈을 경험하면서 적지 않은 학자들이 “조선족은 이중성을 갖고 있는 민족”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아래에서 인용하게 되는 글은 어느 개인을 념두에 둔 것이 아니고 “이중성 민족론”을 가장 간결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인용상의 편의를 위한 것임을 집고 넘어가겠다.“조선족은 중국국적을 가진 조선민족이다. 바꿔 말하면 조선족은 중국공민이며 중화민족의 구성원이며 조선반도의 국민과 동일선상에 있는 조선민족이다. 따라서 조선족은 이중성을 갖고 있다.”[16]“조선족은 중국공민이면서 조선민족이란 이중성을 갖고 있기에 국가와 민족이란 이 두 가지 복잡하고도 민감한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 정확한 정치적인 안목과 명철한 현실감각, 미래지향적인 원견이 있어야 한다.”[17]“조선족은 중국공민이면서 조선민족이란 이중성을 갖고 있다”는 주장은 학술적으로 토론의 대상으로 조차 상정될 수 없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학술관점의 문제가 아닌 개념정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이중성이란 말의 개념을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다.조선어나 한어에서 “이중성”이란 “하나의 사물에 겹쳐있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성질”(《국어사전》), “사물이 가지고 있는 상호 모순되는 두 가지 속성, 즉 하나의 사물에 구비된 상호 대립되는 두 가지 성질”(“指事物本身所固有的互相矛盾的两种属性,即一种事物同时具有两种互相对立的性质。"《现代汉语词典》)을 말한다.례를 들어 갑돌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어느 중학교의 교사이고 그에게는 을남이라는 아들이 있다고 하자. 우리는 을남이의 아버지이고 동시에 중학교사이기 때문에 갑돌이에게 이중성이 있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교사”와 “아버지”는 서로 다른 개념이지 “서로 다른 두 가지 성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갑돌이가 혼외정사로 사생아를 두었다면 이중혼인이 불법으로 인정되는 중국에서 갑돌이는 합법과 불법이라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성질”의 아이를 둔 아버지로서의 이중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중국공민”은 국적과 관련된 개념이고 “조선민족”이란 민족과 관련된 개념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서로 다른 개념을 함께 싸잡아서 이중성을 이야기할 수 없다. 한 사람이 두 개 나라의 국적을 소유했다면 그는 이중국적자이다. 만약 조선족의 절대다수가 중국과 한국(조선)의 국적을 동시에 취득했다면 조선족은 이중국적민족으로 이중성을 갖는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은 이중국적을 승인하지 않는 나라이기 때문에 이 가설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만약 조선족 민족구성원의 절대다수가 조선족과 다른 민족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라면 민족의 혈연적(ethnic--“族裔”) 이중성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적어도 현재의 조선족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국적과 민족이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을 하나로 묶어 “서로 다른 두 가지 성질”이라 할 수는 없다. 어느 교수는 나에게 “조선족은 세계조선(한)민족공동체(族群)에 속하면서 중국의 소수민족일원이기 때문에 이중성민족이 아니냐?”라고 물어왔다. 세계조선(한)민족공동체가 존재하느냐라는 문제는 접어두더라도, 만약 그런 공동체가 존재한다면 “세계조선(한)민족공동체” 와 “중국 조선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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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8-04
  • 페교를 지역의 명물로
    중국 조선족사회는 지난 세기 80년대를 기점으로 농촌인구의 도시전이 및 해외로무송출로 출산인구가 급격하게 감소하면서 조선족농촌소학교가 페교되기 시작하였다. 90년대에 이르러 페교는 도미노처럼 번져나갔고 21세기에 이르러 향진 이하의 거의 모든 조선족농촌소학교가 페교되다싶이하였으며 향진의 조선족소학교도 바람앞의 초불처럼 그 존페가 위태롭기만 하고있다.상황이 이렇다보니 중국 조선족 시골마을들을 돌아다니다보면 마을 곳곳에서 페교를 만나게 된다. 이런 페교들은 개인에게 매각되여 민가, 가축사양장소, 창고 등으로 리용되고있는가 하면 그대로 방치되여 운동장에 잡초만 무성하여 마을의 흉물로 전락되고있다. 안타까운것은 이러한 페교들이 조금만 손이 닿고 리모델링한다면 얼마든지 다양한 용도로 사용할수 있다는것이다. 대부분의 페교들은 우리 부모세대들이 후세들을 위해 허리끈을 졸라매고 백년대계로 지은 건물이여서 매우 견고하기때문이다.최근 20년간 한국에서는 농촌지역의 학교 3000여개가 페교되고 일본은 매년 400여개의 학교가 페교되고있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과 일본에서는 상당수의 페교가 문화, 복지, 휴양시설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되고있다고 한다.한국 제주도의 올레 3코스에 위치한 사진갤러리는 페교를 활용하여 문을 연것이다. 이 갤러리에는 제주의 옛 모습과 해녀들의 모습 등 아름다운 제주 곳곳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전시되여있으며 부모세대의 과거 생활양식을 엿볼수 있도록 장소나 생활도구들을 재현함으로써 관광객들의 발목을 잡고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도심과 멀리 떨어진 페교의 경우에는 유람객들로 하여금 천체망원경을 설치하여 별을 관측하면서 아름다운 여름밤을 보내도록 다양한 레저, 숙박 시설로 리용하고 도시와 가까운 지역의 페교는 회화, 조각, 판화 등을 전시판매하는 가게로 리용하거나 다양한 콘셉트의 카페 혹은 시민학교, 박물관, 미술관, 도서관, 체험학습장으로 활용하여 유람객들의 소비욕구를 자극하고있다고 한다.중국 조선족사회의 현상황에서는 농촌지역의 페교를 체험학습장이나 지역변천사를 한눈에 알아볼수 있는 전시관으로 꾸미는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농촌마을을 취재하다보면 마을의 력사를 알고있는 로인들이 점점 적어지고있어 안타까울 때가 많다. 이제 이런 상황대로 흘러간다면 조만간에 우리의 마을들은 “유령마을”로 세월속에 묻혀버릴 개연성이 높기때문이다. 또한 관광붐이 일고있는 기류에 편승해 숙박시설이 딸린 체험학습장을 꾸려 농가소득에 기여하는것도 좋은 대안이라고 생각한다.단 페교를 리용함에 있어서 지켜야 할 원칙이라면 지역주민들이 활용주체가 되고 페교가 지역주민이 함께 하는 공동체공간이 되여야 한다는것이다. 페교가 마을공동체의 핵심시설이면서 커뮤니티의 중심적역할을 수행해온 점을 고려할 때 바람직한 폐교시설의 활용은 지역사회의 새로운 도약과 발전을 가져오는 계기가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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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8-04
  • 한국 조선족 맞춤형 퇴직금정책 실시
    간병인의 경우 병원이나 단체에서 고용하여 월급을 지급받는 경우에는 1년이 넘어 퇴직하면 퇴직금을 당연히 받게 된다는 정책이 실시되고있다.조선족이 건설일용직으로 1년 이상 근무하고 회사측에 퇴직금을 요구하면 많은 회사들이 “일용직이기때문에 법적으로 퇴직금이 없다”라고 거짓정보를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에 한국 해당 전문가들은 “일용직이라도 1년 이상 근무하고 퇴직하는 경우 퇴직금을 받아야 된다”고 조언했다.단 일용직이 다음과 같은 경우는 퇴직금이 없다. 회사를 자주 바꾼 경우에는 퇴직금을 받을수 없다. 퇴직금은 근로기간이 1년 이상이 중요한데 이는 하나의 회사에서 1년 이상 근무한것을 말한다.그리고 건설일용직의 경우 건설회사가 건설근로자 공제부금을 1일 4000원(한화)을 적립하는 제도가 있는데 이는 퇴직금제도와는 별개이다. 따라서 퇴직금도 받고 공제부금도 받을수 있는데 공제부금은 한국을 떠나거나 병이나 사고로 인하여 일을 할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경우 만 60세가 되면 지급받을수 있다.업무상 질병이나 사고로 인하여 산업재해로 병원에서 료양을 종결하거나 또 료양 종결후 다시 회사에 복귀하여 근무하다가 퇴사한 경우 병원에서 치료받은 모든 기간은 계속근로년수에 포함된다. 만약 회사에서 산재발병후 바로 해고한다면 명백한 부당해고가 되며 부당해고 기간 동안도 계속 근로년수에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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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8-04
  • 부동산가격에 영향주는 요소?
    우리는 집에서 가족과 함께 편안함과 즐거움을 얻는다. 그래서 더 나은 삶으로 가기 위한 요소로 사람들은 집을 꼽는다. 그러나 평생의 꾸준함이 집 한채로 대변되는 현실속에서 우리들은 주택가격변동에 많은 관심을 기울일수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주택가격의 변화와 함께 변동요인을 살펴보면서 주택가격의 적절성을 판단할 필요가 있다.일반적으로 주택가격을 결정하는 요소로 주택의 가격형성에 핵심작용을 하는 요소로는 내부요소와 금융정책 등 외부에서 작용하는 요소로 구분하고있는데 국내의 경우 내부요소는 토지취득비용(출양 또는 획발), 개발비용(가능성조사비용, 탐사, 설계, 감리, 시공, 원자재), 도시기초시설비용(전기, 상수도, 하수도, 가스, 난방, 통신), 세금(건축기업의 영업세, 도시건설세, 교육부가세, 기타), 부동산개발업체의 리윤이 포함된다.외부요소의 경우 내부요소처럼 단순히 렬거할수 있는 부분도 있겠으나 사회학의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많은 변수때문에 고려할 부분이 상당히 많다. 다양한 변수를 일일이 라렬할수는 없겠으나 금융정책 또는 수요와 공급의 관계, 사회의 구조, 산업의 발전 등과 직결된다는 등의 다양한 학설이 존재한다.국제적인 금융위기를 해소하는 과정에서 세계 각국은 류동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천문학적인 자금을 풀었는데 갈 곳이 없는 돈은 결국 주택을 포함한 부동산에 몰려 가격의 상승을 가져올수 있다.다음으로 금리와 주택가격은 반비례관계로 알려져있다. 은행금리가 내리면 수요자구매비용이 낮아져 부동산시장진입비용이 줄어들고 부채상환능력이 높아져 주택가격은 하락한다.또한 수요가 증가하면 가격이 오르는것이 경제법칙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 인구의 도시화률은 1991년의 26.9%로부터 2001년의 37.7%, 2011년의 51.3%까지 이루어지고 현재도 진행형인데 꾸준한 수요증가의 원인제공이라고 볼수 있다.나아가 세계적인 통계로 보았을 때 주택구입의 핵심년령층은 35~54세로 보는데 제5차 인구보편조사에 따르면 2015년 중국사회의 평균년령은 44세에 달한다.그외에도 외부적인 요소로 정부정책이나 금융정책, 자금의 흐름, 경제의 발전속도 임대가격 등도 주택가격의 형성에 작용을 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주택가격은 경제의 발전으로부터 온다. 기본경제가 건전한 상황에서 주택가격은 완만한 상승을 이어간다.주택가격이 지나치게 높다는 목소리가 사회 여기저기에서 나온다. 여러 요소를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주택을 구매하면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의 구매가 가능하겠으나 과거를 뒤돌아보았을 때 주택가격이 높지 않은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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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8-04
  • 중국 폭염 잊게하는 사진 한 장 '감동'
    중국 전역이 기록적인 폭염에 몸살을 앓고 있는 가운데 한 장의 사진이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지난 1일 중국 광저우 지역 언론매체 신쾌보는 ´아이야, 고마워!´라는 제목의 사진 한 장을 보도했다.공개된 사진 속에는 5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광저우 티엔허 동푸터미널 근처 황춘거리에 쓰러져 있는 한 여성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모습이 담겨 있다.환경미화원인 이 여성은 폭염속에서 일을 하다 기절한 것으로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한참 동안이나 방치돼 있었다.마침 그 길을 엄마와 함께 지나던 여자아이가 쓰러진 여성에게 우산을 씌워주자 그제서야 두 명의 행인이 돕기 시작했다.여성은 인근 병원으로 옮겨져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이 사진을 접한 중국 네티즌들은 "이런 아이가 있어 우리 사회에 희망이 보인다", "순수한 아이에게 어른들이 배워야 한다", "더운 날씨에는 환경미화원들의 작업시간을 조정해줘야 한다"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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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8-04
  • 베이징에서 "꿈의 아리랑"이 울린다
    (사진설명: 꿈의 아리랑 공연의 한 장면) (사진설명: 꿈의 아리랑 공연의 한 장면) 중국국제방송에 따르면 중앙인민방송국 민족방송센터 조선어부와 연변대학 예술학원에서 공동 주최한 대형 음악무용서사시 "꿈의 아리랑"이 2일 베이징에서 성황리에 막을 열었다. 월강, 계몽, 항쟁, 희열, 새봄, 비약 등 6막으로 이루어진 "꿈의 아리랑"은 중국 조선족 백년역사를 배경으로 조선민족이 겪어온 곡절 많은 세월과 발전과정을 생동하게 반영했다. 공연은 역사와 현실, 전통과 현대, 음악과 무용, 연극을 상호 결합한 형식으로 조선민족의 부지런하고 소박한 민족성격을 돋보여주었고 어려움과 과감히 맞서 싸우는 민족정신을 부각했다. 박일선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부 주임은 본 방송국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와 같은 공연은 조선족문화 생활을 다채롭게 한다"고 얘기하면서 "현재 조선족 문화가 점차 사막화로 나아가는 상황에서 조선족 예술발전에 일역을 담당하여 문화의 화단을 가꾸어 나가는데 이바지하고 싶다"고 했다. "꿈의 아리랑" 오향옥 총감독은 "조선족 역사를 우리가 다시 한번 돌이켜본다는 시점에서 그때 시절을 대표할 수 있는 음악과 무용을 통해 어린이들도 역사에 대해 알 수 있도록 하는데 역점을 뒀다"고 소개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한번쯤은 중국 조선족 역사를 돌이켜보면서 가슴 뜨거운 순간을 느껴보았으면 하는 바램"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김영철과 림정, 최경호, 정인덕, 김동현 등 유명한 가수와 연극배우 그리고 예술학원 학생 등 80여명이 "꿈의 아리랑"에 출연했다. "꿈의 아리랑"은 8월 2일~3일 베이징에서 이틀간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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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8-04
  • 아름다운 도시 연길
    열길시는 현급(縣級) 시로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의 행정중심지이며, 북한-중국 국경지역의 북부 산악지대에 있다. 주민의 절반 이상이 조선족이다. 연길시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요한 상업 중심지이며, 주변 농업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의 집산지이다. 식품가공·도정(搗精)·착유(搾油)·아마가공 공장 등과 도자기·가구·편물을 비롯한 수많은 소비재 생산공장들이 있으며 농기구도 생산한다. 제2의 산업 중심지는 남서쪽으로 15㎞ 떨어진 룡정[龍井]으로, 여기에는 기계제작·제지소·발전소 등이 있다. 연길은 중국 내 소수민족인 조선족의 중요한 문화 중심지이며, 한국어 라디오 방송국과 신문사가 있다. 의과대학과 기타 일반 단과대학으로 구성된 연변대학교가 있다. 인구 207,600(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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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8-04
  • 연길 청년광장 야경
    인민페 4000만원을 투자해 새로 개조된 연길 청년호는 지하와 지상 두 개부분으로 나뉜다.지상공사는 주로 대형광장,여러가지 소형놀이터,음악분수와 각종원림소품 및 록화 등으로 만들어 졌다 .그중 음악분수는 목전 전주적으로 유일하게 전부 컴퓨터로 통제하는 분수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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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8-04
  • 국제결혼사기 중국인 여성 ‘장마오마오(張毛毛)’
    [동포투데이] 중국 흑룡강 성상지시 출신의 국제결혼사기 용의자 중국인‘장마오마오(張毛毛)’(1980년 12월생). 이혼녀임에도 불구하고 미혼이라고 속이고, 상습적으로 한국 남성들과 결혼을 미끼로 금품을 갈취하고 있다. 중국여성과 국제결혼을 계획하고 있는 남성들은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장마오마오의 사기행각으로 최근 피해를 본 한국남성 윤모(43세)씨는 ○○국제결혼정보회사를 통해 그녀를 만났으며, 한국에서 혼인신고까지 하고 그녀의 한국입국에 필요한 모든 절차를 마친 상태였다. 그러나 장마오마오는 한국에 오기도 전에 중국에서 잠적해 버렸고, 현재까지 연락이 두절된 상태다. 그동안 장마오마오는 집안 형편이 어렵다는 등 여러 차례 온갖 이유를 대며 돈을 요구했고, 윤모씨는 중국에 있는 장마오마오에게 수백만 원에 달하는 돈을 보내줬다. 현재 윤모씨는 장마오마오와 ○○국제결혼정보회사를 사기죄로 경찰에 고소하였고, 혼인무효소송을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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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8-04
  • 中 관광객 서안 고성벽 뛰여넘어
    사진속 10여명의 청년 남녀들은 담장을 넘고있다. 2013년 7월 31일 19시 50분경, 이들은 서안 함광문(含光门)을 유람하다가 문표값을 지불하지 않기 위해 서로 도우면서 성벽(城墙)을 뛰여넘어 많은 유람객들의 시선을 끌었다. 기자가 이 장면을 목격하고 촬영하자 이들은 “우리들의 행위가 문명하지 못하다”, “ 촬영하지 말라”, “인터넷에 공개하지 말라” 면서 소리를 질렀다. 관계자는 유람객들의 이러한 행동들이 종종 나타나고 있으며 이런 행위는 문명하지 못할뿐만아니라 아주 위험하다면서 유관부문에서 관리를 강화해줄것을 희망했다. / 중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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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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