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2(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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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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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2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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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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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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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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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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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격 ! 70여만종의 약 최저가 공장가격의 5~6배? (5)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의료보험에 참가한 인원이 외지에서 치료를 받게 되면 흔히 “자비부담 부분”이 많아질 수 밖에 없다. 최근 한 환자가 무한병원에 입원한 후 근근히 비의료보험 목록내에 있는 항생소로 치료를 받은 결과 자비부담이 7000여위안에 달했다. 요해에 따르면 이런 약을 사용할 때 의사들은 이런 약이 의료보험목록에 들지 않은다는 것을 환자한테 알려주지 않고 있다. 특히 의료보험 부문으로부터 관리압력을 비교적 크게 받는 병원일 수록 이런 “현금환자”를 통해 병원재정의 평형을 잡고 있으며 유명한 병원일수록 주요 환자의 내원이 전국 각지에서 오는“현금환자”로 되고 있다. 일개의 병원이라 할 때 의료 도덕상 마땅히 환자한테 어떤 약은 의료보험 결재범위에 속하고 어떤 약은 자비부담인가를 알려 주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의 상황을 보면 어떤 병원에서는 알려주고 있지만 어떤 병원에서는 알려주지 않거나 자세히 알려 주지 않고 있으며 특히 외지에서 온“현금환자”에 한해서는 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정책상의 결재범위와 실제상의 결재상황 현재 중국은 기본상 사람마다 의료보험에 참가하고 있다. 이는 역사상의 거대한 진보이다. 하지만 의료보험에 참가한 인원이 병을 보이는 것이 자기의 돈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단 결재비율상에서 자비부담 비율이 너무 높은 것이 가장 큰 폐단으로 나타나고 있다. 국내 2014년 모 성에서 한 3등 갑급병원의 집계에 따르면 농촌합작의료보험에 참가한 환자의 자비치료 비율은 57.93%, 도시진 종업원의 자비치료 비율은 36.48%었으며 성급도시 종업원의 자비치료 비율은 24.54었였다. 이로 보아 기층의 환자일 수록 자비치료 비율이 높았고 성급도시 종업원의 자비치료 비율 역시 정책상에서 규정한 결재비율보다 훨씬 낮았다. 그리고 병원등급이 높을 수록 결재받는 비율이 낮았으며 이는 외지치료에서의“원칙”으로 되고 있었다. 호북성의 경우 농촌의료합작 보험에 든 농민들을 사례로 든다면 향진 병원에서 치료할 때 800위안 이하면 그 전부의 치료비를 결재 받을 수 있으나 800위안 이상이면 85%를 결재받을 수 있었으며 만약 외지치료로 성급 의료기구에서 치료를 받으면 그 결재비율이 근근히 45~50%에 불과했다. 한편 등급이 높은 병원일수록 약물사용량은 상대적으로 적고 여러 가지 검사환절이 많으며 이 중 어떤 환절에 들어서는 결재받지 못할 부분이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리고 외지의 환자일 수록 부동한 지역의 정책 및 의료비용상의 차이로 환자의 부담이 가중되는 경우도 많았다. 동일한 수술 현저한 가격차이 동일한 수술이지만 어떤 병원은 수술비가 4만위안이 들지만 어떤 병원은 1만위안이 들고 수술 후 어떤 병원에서는 도뇨관과 인류관(导尿和引流管)를 사용하지만 어떤 병원에서는 사용하지 않으며 사용하는 병원들마다 그 가격대가 모두 다르게 나타난다. 또한 어떤 병원에서는 비용이 적게 들게 하면서도 환자의 동통이 적게 하는가 하면 어떤 병원에서는 비용은 비용대로 받아내면서도 환자가 동통으로 몸부림치게 한다. 병원의 치료비는 탄성이 강한바 이를 놓고 전문가들은 의료부문들에서 병종에 따라 가격대를 정해 고액의 비용에 한해서는 환자가 그 전부를 부담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환자로 하여금 돈을 적게 쓰고도 이상적인 치료효과를 보게 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한편 적지 않은 사람들은 현행의 약품구입체계를 두고 새로운 약품종이 나올 때마다 가격농단이 생겨 약값 인하에 불리하게 되기에 의료보험기구와 의료기구 및 의약회사가 공동으로 개혁을 진행하여 병보이기 힘든 상황 및 병원치료비가 높은 현상에 대처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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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14
  • 연변사람들 ‘한곳에 모이면’ 좋은 일 별로 없다
    가끔 산동 또는 북경에서 조선족들이 모여 사는 동네에 머무를 때면 항상 걱정과 근심이 앞섰다. (다행히 광동에 머무를 적에는 그 회사가 일본회사인 탓에 조선족 직원도 없었고 주변에도 조선족 집거구가 없었다) 그것은 ‘이러다가 연변에 되돌아가는 느낌’ 같은 것이랄까? 그래서 그 당시에는 될 수 있으면 조선족들과 어울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고, 회사에서도 조선족 직원이나 연변대학졸업생들을 최소한 일정한 거리를 두려고 애를 썼다. 그런 연유로 서울에서만큼은 조선족들이 밀집된 가리봉동이나 대림동을 멀리 떠나 자리를 잡았다. 그 원인은 딱 하나.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면 결국 객지에 나와서도 연변으로 되돌아가게 된다는 것. 연변생활로 되돌아갈 것이면 왜, 연변을 떠나 비싼 집에 살고 입에 맞지도 않는 음식을 먹으면서 사서 고생을 하느냔 말이다. 결론적으로 보면 조선족들이 모여 살면 그렇게 되는 듯싶다. 필자가 북경에서 연변대학 동창생이 운영하는 회사에 잠시 몸담고 있었던 시절을 회상해 보면, 그 동창생이 글쎄 연변대학교 조문학부 동문만 십여 명을 끌어모아 회사를 아주 연대조문학부동문회로 만들어버렸던 때다. 한마디로 연변대학교 학창시절을 연상시키듯 퇴근 후에는 명태집을 찾아서 맥주를 정신없이 들이켜곤 했다. 그러다 이것은 아니다 싶어 필자가 심술을 피워 조문학부 동문 십여 명을 다 내치고 겨우 회사 기강을 세우고 효율을 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도 TV에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에서 경찰들이 조선족들이 벌인 불법 마작판을 급습하는 뉴스가 흘러나왔는데… 현재 한국에 조선족들이 집거하는 지역에 이런 마작판이 400~500개나 있다고 한다. 십여 년 동안 한국에 와서 막노동하면서 번 돈을 꼬박 마작판에 1억 5천(백만 위안 남짓)을 그대로 다 몰아넣은 사람도 있다던가? 연변에 있을 적에 한국행을 했던 짜개바지 친구들을 만나면, “한국에 가서 번 돈을 모두 경마에 다 몰아넣고 연길에 싸구려 집 한 채 건진 것이 전부다.”라고 후회하는 얘기들을 듣곤 했는데, 서울에 와서는 대림동에 전문 마작판을 설치해놓은 집에 단기 비자를 받고 와서 막노동자들이 번 돈을 후벼 파가는 전문 도박쟁이들이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객지나 외국에 가면 고향 사람이 그립다는 얘기는 옛말이다. 오히려 지금은 고향 사람이 원수고 경계대상 1호라는 얘기도 있다. “在外地、在国外,朝鲜族聚在一起,准没个好事!” /안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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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고
    2015-05-13
  • 오묘한 세계대백과 (33)
    호수위로 기차가 달린다? 이런 희한한 현상을 볼까? 이는 확실히 존재하는 일이다. 중국 청해성에는 한 찰한염호가 있다. 이곳은 일찍 한 수역이 넓은 함수호었다. 후에 기후가 건조해짐에 따라 많은 물이 증기로 변하여 날아가 버렸고 호면이 갈수록 작아지다가 나중에는 염호로 변한 것이다. 이 염호의 표면에는 두꺼운 소금층이 있다. 마치 겨울의 호수에 얼음이 언 것과도 같다. 그런데 이 소금층은 얼음에 비해 훨씬 더 견고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30-50cm 두께의 소금층은 평방미터터당 1600kg의 무게를 받아낼 수 있는바 완전히 자동차와 기차가 누르는 무게를 받아낼 수 있다고 한다. 중국 청장도로의 31킬로미터의 구간이 바로 이 찰한염호위에 수건되었고 심지어 32킬로메터의 철도 역시 이 찰한염호위에 부설되어 있다. 가령 자동차와 기차가 이 찰한염호위로 오가는 정경을 보게 되면 아마 놀란 나머지 입을 다물 수도 없을 것이다. 만약 찰한염호우의 도로로면 혹은 철도가 파손되었다면 어떻게 될까? 연구에 따르면 도로로면 혹은 철도 옆의 소금층에 구멍을 뚫고 호수물이 흘러나와 부단히 파손된 부분에 들어가게 하는데 수분이 증발하면 나머지 소금이 파손된 부분을 고르롭게 하게 된다고 한다. 이런 방법은 재료를 절약하고도 효과가 있는 것이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5-05-13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32)
    바빌론유적의 서류 소속대륙: 아시아, 소속국가: 이라크, 지점: 바그다드 동남부의의: 바비론문화의 상징임 바빌론유적(巴比伦古城)은 세계 저명한 옛성유적과 인류문명의 발상지의 하나로 약 기원전 1800년과 기원전 600년 사이에 수건, 바빌론과 신바빌론 등 두개의 강한 왕국이 선후로 수건에 참여하였다. 기원전 539년, 페르샤인들이 바빌론성을 점령하면서 이 성은 점차 그제날의 휘황을 잃어갔다. 후에 바빌론성이 사막화가 되면서 도시주민들은 분분히 떠나갔고 사막에는 그제날 휘황했던 바빌론성만이 남았다가 사막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러다가 지난 20세기 초엽에 이 “명주”는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 다시 볕을 보게 되었다. 공중화원 바빌론의 공중화원은 “현원(悬怨)”으로도 불리며 고대 세계 7대 건축기적 중의 하나이다. 기재에 따르면 이 공중화원은 신바빌론국왕 네자르 (尼撒) 2세가 그의 왕기를 위해 수건한 것이다. 전반 건물은 높이가 25메터로 제형고지의 지세에 근거하여 한층한층의 계단을 만들었으며 매층의 계단마다 모두 작은 화원으로 돼있다. 그리고 화원과 화원 사이에는 작은 집까지 있다. 전반 화원은 공중에 걸려있는듯 하다고 하여 이 화원의 이름을 “공중화원”이라고 불리우게 된 것이다.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통천탑 통천탑은 전설이 아니라 바빌론성에 진짜 존재했던 것으로서 바빌론성의 또 다른 하나의 건축기적이다. 통천탑은 일찍 손상이 된 적이 있었으나 신바빌론왕국이 건립된 후 국왕 네브카드네자르 신(新) 바빌로니아왕 2세가 영을 내려 다시 통천탑을 재건하게 하였다. 재건된 이 통천탑은 습지에 세워졌으며 도합 7층으로 아주 신비한 장소였다. 전한는데 따르면 이 방대한 공사를 진행할 때 벽돌만 해도 5800만장이 들었다고 한다. 이로보아 당년의 통천탑의 웅위롭고 장려함을 쉽게 알 수 있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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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13
  • [김혁 칼럼] 소금 이야기
    중국의 소금 전매제가 2600년 만에 폐지될 것으로 보인다. 이 전매제는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래된 독점 제도였다. 소금 전매제도는 기원전 7세기에 제나라의 환공(桓公)이 처음 도입한 이후 기원전 119년 한나라 시절에 전국적으로 확대 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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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13
  • [김혁 칼럼] 영화, 안중근을 이야기하다
    ● 김 혁(재중동포 소설가) 1 하얼빈 역에서 민족침탈의 괴수 이토 히로부미를 응징한 민족영웅 안중근에 대해서는 지난 1970년대 말 북한영화를 통해서 비로서 접했다. 북한영화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는 백인준이 시나리오를 쓰고 인민배우 출신의 엄길선이 연출, 조선영화촬영소에서 만든 2부작 항일혁명예술영화로서 1979년에 중국 전역에서 중국 말로 더빙되어 상영되었다. 영화는 시대 상황을 생생하게 재연하면서 한 개인의 문제와 역사적 사건을 따로 떼어 놓지 않고, 주인공의 운명과 민족의 운명을 현실문제까지 연관지어 표현한 점이 돋보인다. 북한영화로는 보기 드물게 유명배우가 총출연하고 막대한 제작비와 수천명의 조연배우들이 동원, 특히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역사의 현장인 중국 하얼빈에서 촬영해 사실성이 뛰어나는 등 조선영화 가운데서도 수작으로 꼽히고 있다. 한국에서 근자에 내놓은 안중근 관련 영화로는 “도마 안중근”이다. 안중근의 세례명 “도마”로 이름 한 영화는 이또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이 감옥에 수감 된 뒤 수사 과정에서 검찰관과 나누는 대화를 통해 그의 삶을 되돌아 보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안중근이 왼 손 약지를 잘라 “단지동맹”을 뭇고 독립에 대한 결의를 다지며 마침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게 된 과정을 연대 순으로 보여 주면서 의협심과 용기 있는 행동으로 자신의 사명을 끝까지 수행하는 안중근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풀어 낸다. 한국 개그맨 출신 MC인 서세원이 시나리오를 직접 쓰고 연출을 맡았고 유오성, 고두심 등 유명배우들이 출연, 역시 중국에서 현지 촬영을 했다. 민족독립운동의 화신 격인 안중근의 역사적인 의거를 스크린에 올리는 작업은 그 오랜 이전 부터 시작됐다. 일찍 1928년에 벌써 안중근을 소재로 한 영화 “애국 혼”이 제작되였다. “한국 항일영화의 효시”로 지칭 되는 영화 “애국혼”은 한국 영화인들이 중국에서 제작, 상영했다. 당시 일제의 영화 검열이 강화되자 정기탁 등 한국의 영화인들이 중국의 상해로 이주 해 영화운동을 전개했는 데 “애국혼”이 그 작품 가운데의 하나다. 전창근이 각본을 쓰고 정기탁이 감독과 주연을 맡았다. 영화는 안의사의 민족혼을 생생하게 묘사해 반일감정이 높아가던 당시 중국 관객에게도 큰 호응을 얻었다. 다음1946년 안중근의 일대기를 서술 한 전기영화 “안중근 사기”가 상영되였다. 한국이 국권을 회복한 뒤 처음 선보인 영화는 애국지사 안중근의 의거를 소재로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 난 우리 민족이 그의 독립정신을 회상하며 민족재건의 동력을 얻고자 했다. 그 뒤로도1959년에는 “고종 황제와 의사 안중근”, 1972년에는 “의사 안중근” 을 제작, 대아의 삶을 살다 간 민족영웅의 일대기는 영화인들이 다투어 제작한 소재었다. 2 하지만 안중근 소재의 영화들은 그 애초의 훌륭한 시도에 반하여 관객들의 실망을 자아 낸 경우가 많다. 북한의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의 경우 영화의 진행은 설명이 많고 평면적이다. 중요한 대목에서 반드시 주인공의 대사나 나레이션으로 상황을 설명하면서 교육과 선전의 효과를 강조하고 극대화 하고 있는데 이는 영화의 전반 흐름을 흐트러 뜨리고 몰입도를 방애한다. 한국의 “도마 안중근”은 더구나 관객들로부터 물의를 빚었다. 영웅 안중근을 그려내려 했으나 안중근의 인간적인 고민이나 풍모가 충분히 드러나지 않고 오로지 인물의 신화화에만 골몰 한다. 게다가 독립투사가 쌍 권총을 쏘며 애써 쿨한 모습을 짓는 향항 갱영화에서나 볼법한 장면들이 이어진다. 안중근을 인격적인 실존 인물이 아니라 액션 영웅처럼 천박하게 부각한 데서 실존 인물의 사실감과 영화의 격은 휘발되고 말았다. 삼척동자도 다 아는, 민족이 애대하는 영웅을 소재로한 작품이라 그에 대한 지나친 기대감이라 할가? 상기 영화들에 대해 관객들로서는 낙공 (落空)의 실패작으로 보면서 커다란 유감을 표하고 있다. 3 중국 화인채널은 지난 달, 중국에서 열린 행사에서 중한 양측이 1억 위안(각 5000만 위안)을 투자해 안중근을 영화로 제작하기로 합의했다. 제작사 “즐거운 상상”은 현실감과 사실성을 높이기 위해서 안중근의 고향 황해도 해주 지역과 백두산 촬영을 추진할 계획이며 영화 ”동승”으로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진출한 주경중 감독이 메가폰을 잡게된다고 밝혔다. 영화는 명성황후 참살과 러일전쟁, 을사늑약과 고종황제 퇴위, 군대해산 등 굵직한 사건 등을 배경으로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응징하고 뤼순감옥에서 숨질 때까지의 이야기와 암살 전 일주일간의 긴박했던 기간을 중심으로 드라마틱하게 다룰 계획이다. 한·중·일 삼국의 역학관계에 안중근 의사가 뜨거운 이슈로 떠 오르고 있는 시점에서 그를 소재로 중국과 한국 나아가 아시아가 공감, 공조의 뉴대로 삼을 수 있는 좋은 영화가 나오기를 바란다. - “청우재(聽齋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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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12
  • [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30)
    ■ 김철균 4 열차는 네시간 달려서야 서서히 돈화역에 멈춰섰다. 연길에서 열차에 오를 때와 마찬가지로 돈화에서 내릴 때 역시 순자네 내외간은 그 무거운 짐짝들을 등 뒤에 지고 손에 들고 하면서 맨 나중에야 열차에서 내릴 수 있었다. 순자는 열차에서 내리자 바람으로 숨을 돌릴 사이도 없이 문영이부터 찾았다. 그런데 문영이가 보이지 않았다. 어제 온다던 것이 오지 않으니 오늘도 아마 오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고 마중 나오지 않은 모양이라고 생각하니 순자는 저도 몰래 또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이 때 문영이와 한 단위에서 근무하는 시댁의 5촌 조카 창범이가 달려오면서 “아저씨, 아지미 오는 길에 고생이 많았겠소”하며 반겨주었다. 순자는 “문영이가 나오지 않았구나”하고 생각하면서도 습관적으로 사위를 둘러 보았다. 순간 개찰구 배자 옆에 흰 꽃무늬가 돋친 죠세트 적삼을 입고 하얀 머리수건을 쓴 처녀가 머리를 수그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옷을 본 순자는 그가 곧바로 문영이란 것을 알아 보았다. 그 죠세트 적삼은 큰 아들과 큰 며느리가 북경에 출장갔다가 어머니한테 선물로 사다준 것을 문영이한테 준 것으로 문영이는 그 때까지도 그 적삼을 시체옷으로 나들이를 할 때마다 입군 하였다. 문영이가 마중나온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열차에서 손님들이 거의 다 내리도록 순자네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자 실망되어 머리를 수그리고 흐느끼는 모양이었다. “문영아ㅡ” 문영이를 알아본 순자는 다급하게 달려갔다. “어머니, 마마ㅡ” 귀에 익은 부름소리에 정신이 든 문영이는 개찰구로 빠져 나오며 목이 빠지도록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 왜 인제야 오세요? 전 어머니가 그리워 줄을 번 했어요.” 문영이는 순자를 끌어 안고 울다가는 다시 보고 또 보다가는 다시 끌어 안고 울음보를 터트렸다.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순자의 의복 앞 섶을 눈물로 흠뻑 적시었다. 전날부터 기다리다가 혹시 오늘도 오지 못하는 줄 알고 실망하여 울고 있었는데 이렇게 만나고 보니 눈물부터 앞섰던 것이다. …… 미구하여 문영의 거처에 도착한 순자는 문영의 결혼준비 상황부터 점검했다. 아니나 다를가 순자의 짐작대로 문영이는 거의 아무런 준비도 못하고 있었다. 음식을 만들 재료래야 달걀 10여 알에 달랑 시금치 한단뿐이었고 의복이래야 이전에 순자가 문영이한테 선물로 주었던 몇견지었으며 이불 또한 위생학교 기숙사 시절부터 덮어오던 색이 바랜 이불뿐이었다. 신랑켠에서 첫 날 옷, 옷장과 기타 가정기물들을 지참물로 도맡아 해온다는 한족들의 전통풍속이라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신랑측 부모들은 워낙 살림이 풍족하지 못한 형편에 한해에 자식 셋이나 결혼시키다 보니 신부의 첫 날 옷 한견지밖에 마련하지 못하였다는 것이 문영이의 해석이었다. 순자는 억이 막혔다. 자기네 내외마저 가지 않았더면 어쩌라 싶었다. 순자는 나들이 옷을 벗어 내치고는 다른 것으로 바꿔입었다. 우선 시장부터 다녀 와야 했다. 시장 또한 영감을 앞세우고 나섰다. 그래도 돈화시내의 지리엔 영감이 순자보다 더 밝았기 때문이었다. “허허, 여태껏 짐군을 시키더니 이번엔 짐군에 길 안내까지 시키는구려.” “바빠 죽을 지경인데 웃음이 나오우?” “그럼 웃지 않구 울라우?!” 영감의 익살에 순자 역시 그만 웃고 말았다. 그랬다. 힘들고 답답할 때는 그래도 영감이 뒤심도 되고 버팀목도 돼주니 순자는 그만큼 힘이 생기기도 했다. 5 이튿날은 문영의 잔치날이었다. 전날 긴 노정에 지친데다 문영의 잔치근심으로 온밤 잠을 설치다 보니 순자는 몹시 피곤했다. 눈에 핏발이 서기도 했다. 하지만 자기가 늦장을 부리면 그만큼 잔치가 어수선하기에 아침 일찍 일어나자 바람으로 팔소매를 거둬 올렸다. 한동안 지지고 볶고 하니 그래도 신랑의 첫날상과 둘러리로 올 손님들의 상에 올릴 음식 몇가지는 마련이 되었다. 미구하여 신랑과 신랑측 둘러리들이 도착했다. 순자는 검소하지만 신랑의 첫 날 상을 정성들여 차렸다. 드디어 첫 날 상에 마주 앉은 신랑은 웬간히 놀라하는 모습이었다. 문영이와 약속하기는 첫 날 상을 아예 차리지 않거나 그저 차리는 흉내만 내기로 했던 것이 생각 밖으로 음식가지수가 늘어 났으니 그럴만도 했다. “아버지, 어머니 술 드세요.” 신랑은 술을 부어서는 먼 길에서 오신 조선족 장인과 장모한테부터 권했다. “아니 신랑이 상을 받소 아니면 우리가 상을 받소?” 순자는 한 옆으로 돌아 앉으며 거절했다. “어머니가 문영이를 도와 나서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문영이가 없었을 것이고 또 그가 없다면 전 누구한테 장가를 듭니까? 그러기에 이 잔은 장인 어른과 장모님부터 받아야 한답니다.” 이렇게 말을 주고 받다 보니 푸짐한 음식 한점 없는 잔치었으나 웃음만은 차고 넘쳤다. 순자 역시 문영이가 드디어 결혼까지 하는구나고 생각하니 마음이 흐뭇했다…… 이윽고 혼례용 소형버스는 신랑 신부와 순자네 내외까지 싣고 문영네가 새 살림을 차릴 거처로 떠났다. 친정부모가 결혼하는 딸을 따라가는 법은 조선족은 물론 한족들의 풍속습관에도 없지만 문영이의 경우만은 특수하여 그런 풍속습관 같은 것은 아예 타파하기로 했다. 새집이라고 도착해 보니 신방이래야 한달에 37위안씩 세를 내고 드는 허술하고 비좁은 방이었다. 신부인 문영이는 자기가 가지고온 짐들을 풀기 시작했다. 쌀함박이며, 사발, 접시, 숟가락, 국자 등이 나오다가 다음으로 보따리를 푸니 양말과 기타 식료품들이 온돌에 쏟아져 나오면서 쌓이었다. 이불과 요를 궤짝우에 올려놓으니 그제야 방안은 광채를 띄우면서 안온한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 어머니 이 많은 물건을…” “아니다. 이 엄마 역시 남들처럼 너한테 잘해 주지 못하는 것이 속에서 내려가지 않는구나.” “어머니, 그런 말씀을 하지 마세요. 어머니가 갖고 온 물건은 남들이 해주는 몇만위안 아니 수십만위안의 물건보다 더 가치가 있고 정성이 깃든 것이예요. 어머니 전 대 만족이고 더 이상 남들이 부러울 것이 없답니다.” 문영이는 자기네 생활 구석구석을 낱낱히 헤아려 보고 정성을 다한 순자의 소행에 다시 한번 목에 메였다. 그 날 점심, 신랑신부의 단위에서는 그들의 처지를 헤아려 공동으로 돈화시내의 어느 한 식당을 선택하여 그들의 혼례식을 치러 주었다. 결혼식 장소로 가보니 양쪽 단위의 손님외 가족으로는 진짜 사람이 적었다. 신랑 켠에서는 그래도 10여명 잘되게 친척들이 왔으나 신부 측에서는 문영이의 먼 벌수가 되는 숙부 1명과 순자네 내외뿐이었다. 진짜 간소한 결혼식이었다. 결혼식 역시 많은 절차를 취소하다 보니 매우 간단하였다. 결혼식을 시작하는가 싶더니 어느 결에 신부측 가족대표가 발언할 차례가 되었다. 결혼 사회자가 “이번에는 신부측 가정대표의 말씀이 있겠습니다”라고 하자 순자는 문영의 숙부벌이 되는 손님을 건너다 보며 박수를 쳤다. 그러자 문영이가 다가 오더니 “어머니, 어머니가 말씀하세요”라고 하며 순자의 팔을 잡아 끌었다. 순자는 아니 아니 하며 주저하다가 결국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식상에 마주 앉은 손님들이 박수갈채를 보내왔다. 하지만 첫 날 신부옷을 입고 곱게 앉아있는 문영이를 보는 순간 순자는 눈물이 앞을 가리고 목이 메며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여러 분 바쁘시겠는데 이렇게 찾아와 문영이에 혼사를 축하 해주니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리고 신랑과 신부측 단위에서 일부러 이런 장소를 마련해 주었다고 하니 더욱 감사하며 신부의 친정 어머니인 저로서는 부끄러운 나머지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전 오늘 저의 딸 문영이의 결혼에 진심으로 축하를 드리는 한편 딱 한마디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문영아, 너희들은 맡은 사업을 잘하는 것으로 이 분들의 관심에 보답해 드리고 또 앞으로 화목하게 살면서 시 부모를 잘 모시고 형제 간에 사이 좋게 지내거라. 너 화목하지 않고 부부간에 서로 다투고 싸우는 일이라도 있으면 이 어머니의 얼굴을 더럽히는 걸로 알고 있거라…” 한 쪽에서 용환 령감의 5촌조카 창범이가 한어로 통역하여 순자의 의사를 전달하자 장내는 일시에 박수소리가 요란했다. 문영이 시 어머니는 그 말을 듣고 좋아서 어쩔바를 몰라했다. 좌석이 흥성거리자 신랑의 학교 교장 선생님이 순자네 쪽으로 찾아와 술을 따르며 말을 물었다. “아니, 어머니는 딸이 없어서 한족처녀를 딸로 삼았습니까?” “아닙니다. 나한테 딸이 셋이나 있습니다.” “아니, 그럼 후일 신세를 보자고 그랬습니까? 이 집엔 돈도 없고 지도자 직위에 있는 친척도 없는데요…” “어머니가 딸을 키울 때 그 무슨 보답을 바라고 키우겠습니까? 어머니란 딸을 키워 사회에 떳떳이 나서게 하는 것이지요. 저는 다만 친 어머니가 없는 문영이한테 친 어머니다운 사랑을 주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교장은 너무도 감동되어 연신 손수건으로 눈굽을 찍어냈다. “대단합니다. 대단합니다. 세상에 이런 조선족 어머니가 있다니 정말 우수한 어머니입니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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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11
  • 中 30세 이상 여성에 둘째 출산 먼저 개방해야 (1)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최근 중국의 신화사는 “떠메지 못할 유감, 기다릴 수 없는 시간…”이란 글을 발표해 계획생육분야에서 둘째 출산허락사업을 더한층 밀고 나가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현재 중국에서 둘째의 출산에 대해 전면 개방하는 것은 근근히 시간적 문제로 남아있다. 하지만 이것이 고령부부로 놓고 말하면 정책이 늦게 출범할 수록 생육기회가 묘연해지기만 한다. 이를 두고 광동의 전국인대 대표 하우림은 “둘째 출산을 전면 개방해도 생육고조가 올 수 없다”면서 먼저 30세 이상의 여성한테 둘째 출산을 전면 개방해야 한다고 주장, “어떤 여성은 연령이 많아 이제 더 늦으면 생육을 할 수 없기에 평생의 유감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이복동생 있어 둘째 낳을 수 없어 올해 36세가 되는 아군은 5살되는 여자애의 엄마로서 둘째를 낳고 싶지만 조건이 부합되지 않았다. 원래 그녀한테는 아버지가 같고 엄마가 다른 이복 여동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여동생이라 하지만 그는 종래로 본적이 없었다. “저의 부모의 결혼생활기간에는 오직 자식이란 저밖에 없었어요. 후에 부모가 이혼했고 어머니는 저를 데리고 살면서 더는 생육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아버지는 다른 여인과 결혼하면서 상대방이 아이가 없자 저의 이붓동생을 낳았던 것이었지요. 이는 3명의 부모가 모두 계획생육정책의 조건에 부합되는 상황에서 낳은 자녀들이었어요. 하지만 현재의 둘째출산 정책은 저와 같은 사람들이 둘째를 생육하는 것을 허락자지 않거든요.” 현재 아군으로 놓고 말하면 유일한 희망은 둘째출산정책이 전면 개방될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시간표”조차 없는 상황이다. 국가위생계획생육위의 뜻은 아직도 몇년간을 기다리면서 단독 두번째 자녀 정책의 효과를 보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자면 아군 세대의 여성은 이제 4년만 지나도 40살이 된다. 그러면 임신성공율은 물론 건강한 어린애를 낳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도 근심이 된다. 39명 학자 연명으로 정책조정 호소 기실 올해초에 있은 중국의 “양회”의 개막전야에 전국 21개소의 고등학교 및 과학연구기구의 39명 인구학자들이 연명으로 “둘째자녀 출산정책을 전면 개방하고 공민의 생육제한을 취소하자” 건의서를 작성해 해당 부문에 교부하였다. 건의서는 “단독 두자녀 정책의 실행 1년을 돌이켜 보면 둘째자녀 출산신청을 한 부부가 현저하게 적으므로 이 정책 역시 생육율 상승에 극히 제한을 주고 있다”고 썼다. 건의서는 또한 생육제한을 취소하면 가능하게 나타날 출생인구의 증가는 생육정책을 개변한 성과이지 모험이 아니라고 지적, 현재 새로 증가되는 인구수는 외동자녀 가정이 적어지는 것으로 가정이나 사회에 모두 좋은 일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정책에 대한 많은 부부들의 냉담한 반응은 향후 한동안 중국인구의 급증현장이 절대 없을 것이란 것을 증명한다고 지적했다. 이 건의서를 작성을 발기한 중국인민대학 인구 및 발전 연구센터의 고보창 교수는 목전 인구의 폭증기는 이미 지나가기 시작, 제6차 전국인구보편조사를 금자탑으로 중국인구는 위축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20세 이하의 인구군이 대폭도로 감소하고 있는 것이 가장 뚜렷한 증거로 되고 있다. 집계에 따르면 현재 중국에서 0~ 14세의 인구가 2.2억명으로 근근히 전국인구의 16.6%를 차지하는 바 제5차 전국인구보편조사시기에 비해 6.29%가 하강되었다고 밝혔다. 이렇게 말하면 중국의 소년인구가 이전의 4분의 1에서 이젠 6분의 1로 되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는 아주 엄중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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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10
  • [김혁 칼럼] 백두산 화산의 폭발
    재난영화라는 쟝르가 있다. 자연재해나 천재 지변으로 인한 재난을 극복하는 인간의 모습을 다룬 영화, 흔히 지진, 대화재, 화산 폭발, 외계인의 침략이나 유성의 충돌 등 다양한 소재로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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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09
  • 중국 대륙에 몰아치는 제3의 축구한류
    ■ 철민(동포투데이 특파기자) 중국 대륙에 제3의 축구한류가 불어칠 전망이다. 바로 연변 장백산팀의 사령탑을 잡고 있는 박태하 감독이 그 주인공으로 되지 않을까 싶다. 중국에 제일 처음으로 축구의 한류를 몰아온 것은 고 최은택 감독이 1997년에 일으킨 “한국선풍”이었다. 당시 최은택 감독이 맡은 구단은 1996년 중국축구 갑A 리그에서 간신히 강등을 면했던 연변현대 자동차팀이었다. 1997년 초반, 최은택 감독은 당시의 연변오동팀 분위기와 상태를 보고는 대담히 수술칼을 들이댔다. 즉 축구에서 꽤나 명성은 있으나 훈련에 게으르고 구단 감독진의 배치에 자주 엇서는 선수들 대신 김청, 천학봉, 왕광위 등 5~6명에 달하는 신진들을 기용하였다. 그러다 보니 시즌 초반에는 제 5 라운드까지 1무 4패를 기록하면서 갑A의 제 1 번 강등후보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제 6 라운드 원정에서 해방군 “8.1”팀을 2 : 0으로 제압하면서 반전에 성공했고 이를 계기로 연속 9경기 불패의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 해 연변오동팀은 갑A의 4위를 기록하면서 중국축구협회로부터 “진보가 가장 빠른 구단”이란 칭호를 따냈으며 최은택 감독은 연길에서 중국 CCTV의 특별취재를 받기도 했다. 최은택 감독에 이어 중국에서 축구로 성공한 인물로는 이장수 감독이라 할 수 있다. 중국진출 전야 이장수 감독은 한국에서 K리그 한 개 구단의 일개 수수한 감독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는 당시 중국 갑A리그에서 해마다 강등설로 모대기던 중경력범팀을 잡고 중국진출 2년만에 이 팀을 중국 갑A리그와 중국축구협회에서 동시에 우승, 쌍관왕을 실현하는 기적을 쌓았으며 2000년에는 중국 갑A리그에서 “최우수감독”이란 영예를 지니기도 했다. 그 뒤 선후로 청도이중팀, 북경국안, 광주헝다의 사령탑을 맡으면서 수차 우승, 준우승 등 우수한 실적을 올린 축구인으로 부상한 이장수 감독이었다. 하다면 이번에 연변장백산축구팀의 사령탑을 맡은 박태하 감독이 세 번째로 중국대륙에 제3의 축구한류를 몰고 올 전망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주지하다 싶이 박태하 감독이 사령탑을 잡기 전인 2014년 연변 장백산팀은 갑급 순위의 말석으로 이미 강등했던 팀으로 처음에 박태하 감독은 을급권 리그를 준비하다가 중국축구계의 이변에 의해 갑급권에 복귀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급급히 외적용병을 선정하는 등으로 모든 시스템이 바뀌었지만 올 시즌 초반의 연변팀은 박태하 감독의 통솔하에 지금까지 7라운드로 무패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 현재 순위 선두에서 달리는 대련아르빈마저도 1패를 기록하고 있으며 무패행진을 하고 있는 구단으로는 오직 할빈의등과 연변팀 뿐인 것으로 알고 있다. 지난해의 강등팀이 올해의 7라운드 무패행진! 대단한 변화이다. 이것이야말로 축구에서 또 한 번 불어치는 한류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제 연변팀 선수들한테 박태하의 축구사상과 전략전술시스템이 제대로 몸에 배이기만 한다면 박태하의 에너지가 더욱 많은 힘을 발산하는 것으로 연전연승의 기록을 올리리라는 것은 추호의 의심도 없다고 보여진다. 총적으로 축구를 갖고 중국에서 센쇼이션을 일으킨 감독들을 보면 순위 최하층에서 허덕이던 팀을 개조시키고 변화를 일으켜 일대 도약을 이룩했다는 점이다. 이 면에서 보면 올해 박태하 감독 역시 중국 축구권에서 연변팀을 최대의 다크호스(黑马)로 만들 수 있을 것이며 최은택, 이장수 등과 나란히 “대륙의 영웅”으로 부상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미리 해본다. 한류가 중국대륙에 주는 영향은 여러 방면에 거쳐 영향력이 크다. 의류와 화장품, IT산업을 비롯한 경제업과 이민호와 김수현, 송혜교 등 연예스타들의 중국진출과 더불어 일으키는 연예한류 등으로 한국은 한류의 열풍으로 세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일으키는 국가로 군림하고 있다. 하다면 1997년부터 불어치기 시작한 축구권에서의 한류열풍은 앞으로도 한동안 지속될 전망이 아닐까?
    • 스포츠
    2015-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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