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2(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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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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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2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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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3-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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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편실화연재】한 여인의 인생변주곡(29)
    ■ 김철균 문영이를 졸업시켜 돈화에 보냈지만 순자는 여전히 시름을 놓지 못하였다. 조선족가풍으로 보아 자식이 학교를 졸업했다고 하여 결코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일자리를 구해야 하고 또 앞으로 결혼도 해야 하며 이 모든 것에 이르기까지 부모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많은 법이었다. 워낙 문영이가 연변위생학교를 졸업하자 순자는 그 애더러 연길에 남게 하고 싶었었다. 그 사이에 문영의 친 아버지도 사망했기에 문영이가 구태어 꼭 돈화로 가야 한다는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생각같아서는 문영이한테 연길의 직장을 찾아주고 그가 결혼하기 전까지 자기의 곁에 두고 싶은 것이 순자의 마음이었다. 그러다가 장차 연길에서 결혼상대자를 찾아 혼인을 이루게 하고 싶기도 했다. 헌데 그것이 뜻대로 돼주지 않았다. 문영의 직업문제는 오래도록 풀리지 않았다. 화전의 정수금, 장춘의 중경림과 훈춘의 장려 등 애들한테서는 선후로 좋은 직업을 찾았다는 희소식이 날아 왔으나 유독 문영의 일만이 풀리지 않는 것이 몹시 안타까웠다. 순자는 집의 영감과 아들네 내외, 심지어 딸네 내외들까지 집안에서 좀 활동력이라도 있다는 성원들을 몽땅 동원하여 문영의 직업을 위해 힘쓰도록 달구쳤다. 하지만 문영이가 대학본과 졸업이 아니고 대학전과생이어서인지 아니면 단위들마다 여성직원은 결혼하고 애를 낳으면 가정부담이 많아 단위일에 영향이 많다고 그 채용을 꺼려해서인지 아무리 애를 써봤어도 풀리지 않았다. 또한 맡은바 업무에서는 뛰어난 성적을 올리며 능력자로 소문났으나 인사배치 등 “외교활동”에 들어서는 제로에 가까운 용환영감이였고 또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큰 아들 영남이와 둘째 아들 경남이도 성미가 곧은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마찬가지었다. 이렇게 순자가 한창 문영의 직업 때문에 안달아할 때 마침 그가 돈화시 화교풍습전과병원에 배치받았다는 기별이 왔다. 문영이가 공영병원에 배치받았다는 기별을 받았지만 여전히 만족해하지 않은 순자였다. 알고 보니 순자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문영이의 직업보다는 그 애를 자기의 곁에 두고 싶어하는 바로 그 것이었다. 한편 순자의 친자식들은 물론 친척들과 외부의 사람들마저 “문영이한테 그만큼 잘해 줬으면 이젠 시름을 놓으라”면서 “남의 자식이란 잘해줄 때뿐이지 때가 지나면 소용이 없다. 하물며 그 애는 한족이 아닌가”고들 하였다. 하지만 남의 자식이래서 다 그런 것이 아니었고 한족이래서 다 그런 것이 아니었으며 문영이는 더욱 그런 애가 아니었다. 순자는 그 점만은 굳게 믿고 있는 터였다. 순자의 환갑날 술을 붓는 문영이 1989년 10월, 순자네 내외가 환갑을 쇠게 되었다. 당시 순자네 내외는 보다 조용히 쇠려고 일부러 문영이와 정수금, 중경림과 장려 등 한족자녀들한테 알리지 않았다. 그런데 불현듯 문영이가 찾아왔고 기타 한족자식들도 약속이라도 한듯 줄을 쳐 찾아왔다. 알고 본즉 문영이는 진작 이전부터 순자네 내외의 생신날자를 알고 있었고 또 여러모로 탐문 끝에 10월에 환갑을 쇤다는 것도 알고 있었던 터였으며 또 이를 정수금 등 각지에 널려 있는 한족자식들한테 알렸던 것이었다. 순자네 내외의 환갑파티날, 순자의 친 자식들 외 6명의 한족자식이 참가하였고 또 그들이 술을 붓고 순자네 내외한테 조선족식으로 절을 하는 장면이 연출되자 장내에서는 우렁찬 박수소리가 터졌다. 순자의 환갑파티에서 문영이는 또한 조선말로 “오래오래 앉으세요”를 불렀다. 오늘은 온집안에 기쁨이 넘치는 날/ 어머니를 높이 모신 환갑날이랍니다// 아, 어머니 오래오래 앉으세요…… 한족딸 문영이가 부르는 노래는 재차 장내의 모든 사람들을 감동으로 설레이게 했다. 그만큼 문영이의 가슴속에서 우러 나오는 노래소리는 조선족어머니 김순자에 대한 고마움과 감격과 더불어 사랑에 넘친 진실한 것이었다. 순자의 환갑잔치날은 문영이한테 아주 깊은 인상을 남겼다. 아무리 조선족이 친절하고 문명하며 가정이 화목하다지만 순자네같은 가정은 실로 처음 보는듯 싶었다. 순자네 내외간은 물론 아들 며느리와 딸 사위들 사이 그리고 지어는 여러 사돈들과의 사이도 그러했으며 또한 타민족인 자기들마저 가족으로 대해주면서 깊은 사랑을 몰붓는 조선족의 미풍양속은 그야말로 한족인 문영이의 가슴속에 많고 많은 스토리거리를 심어주었다. 그러한 것이 계기로 되었을까? 훗날 문영이는 직업은 의료일군이었지만 작가공부를 하고 싶었다. 자기에 대한 순자와 그 가족의 사랑을 그대로 세상만방에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문영이한테 원래 천부적인 문학재질이 있어서일까 아니면 그녀 스스로 꾸준히 노력한 결과라 할까? 또 그것도 아니라면 그녀가 살아온 인생발자취 즉 한명의 불우소녀 – 연변위생학교 - “북해상점”과 조선족 김순자어머니- 이렇게 엮어진 스토리가 문영이로 하여금 작가로 되는 바탕으로 되였을까? 미구하여 문영이는 길림성작가협회의 일원으로 되었으며 성급과 주급은 물론 국가급의 간해물에도 많은 시, 수필, 산문과 실화 등 작품을 발표했다. 그 중에는 당연히 그녀의 조선족어머니 순자를 언급한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2 마침내 문영이는 돈화시실험중학교의 남성교원 심엽군과 백년가약을 맺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결혼날자는 1990년 5월 6일로 잡혀졌다. 인생에 있어서의 가장 큰 대사인 결혼식 – 문영이는 결혼날자를 정하자마자 이 소식을 우선 연길에 있는 조선족어머니 김순자한테 알리고 싶었다. 헌데 그녀는 이 소식을 결혼식을 치르기 10여일 전에야 연길에 전했다. 너무 일찍 알리면 순자한테 더 많은 부담을 줄가봐서였다. 그러나 문영의 생각은 필경 짧았다. 늦게 알린 것이 오히려 순자로 하여금 더욱 힘들게 할줄은 문영이 자신도 미처 몰랐던 것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순자로서는 자기를 너무 초라하게 시집보내지 않는다는 것을 미처 예견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문영이의 결혼식은 5월 6일,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아무리 뭐고 뭐고 해도 시집가는 딸한테 첫날 이부자리만은 꼭 해보내야 조선족의 예의범절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이 그 때 순자의 주장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연길시의 시장경제가 발전초기에 있었는지라 지금처럼 각종 물건이 포화상태에 이를 정도로 잔뜩 쌓아놓고 판매하는 상황이 아니었다. 마음에 드는 물건을 사자면 적지 않은 신경을 쓰며 여러 곳을 돌아야 살 수 있던 그런 시기었다. 순자는 큰 딸 영순이와 함께 연길시의 많은 백화점들을 반나절 돌아서야 겨우 맘에 드는 이불등, 이불안과 요감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불감과 요감을 샀다고 하여 일이 그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남들은 문영이가 순자 본인이 낳은 딸도 아니고 거기에 한족이기에 대충 이불을 해서 보내라고 권장했다. 즉 남들의 흉내나 내며 낯가림을 하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런 사람들은 순자를 생각해서 하는 권장이었지만 순자는 그런 사람들의 권장대로 할 수 없었다. 꼭 이불안을 적셔 풀을 하고 그것을 해볕에 바래운 후 한뜸 한뜸 정성들여 만들어 시집가는 문영이한테 주고 싶었다. 반대로 대충하거나 친 딸들에 비해 조금이라도 차별이 되게 해준다면 조선족민속에 어긋나거니와 자기 또한 문영이의 어머니로 될 자격이 없다고 여겼다. 순자의 주견은 그 누구도 말리지 못했다. 남편과 자식들은 오직 동조하는 길밖에 없었다. 헌데 이불안을 물에 적셔 풀을 한 뒤 볕에 바래우자고 보니 구름이 무겁게 드리운 하늘은 연며칠 구질구질 비만 내렸다. 여느해 같으면 비가 적을 계절이건만 그 해의 4월말은 비가 너무도 많이 내리는 것 같았다. 비가 적당히 내려야 모든 것이 좋기 마련이다. 특히 파종을 앞둔 농민들을 놓고 보면 너무 가물어도 걱정이고 비가 너무 내려도 파종하기 힘들게 된다. 순자도 이젠 비가 그쳐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비가 그쳐야 이불안을 볕에 바래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2-3일만이라도 비가 그쳐 주었으면 얼마나 좋으랴 싶었다. 순자의 속은 재가 들어차는 것만 같았다. 신을 믿지 않는 순자였건만 하늘에 대고 기도를 드렸다. 유정하고 자비하신 하느님, 저의 딸 문영이가 이 어미가 만들어 주는 하얗고 깨끗한 이부자리를 갖고 기뻐하며 시집갈 수 있도록 요즘 며칠만은 비가 내리지 않게 해주옵소서ㅡ … 순자의 정성이 하느님을 감동시켰는지 아니면 비가 그칠 때가 되어서인지 마침내 그 이튿날로 비가 멎고 하늘이 맑게 개였다. 순자는 이 때라 하고 서둘렀다. 당시 순자네 집마당에는 빨랫줄이 있었지만 이불안같은 큰 것은 널어 말릴 수가 없었다. 마당면적이 하도 작다 보니 빨래줄을 길게 늘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담 넘어 옆집 마당에 있는 빨랫줄을 이용해야 했다. 헌데 낮에는 옆 집에서 앞마당 배자문을 잠그기에 순자는 부득불 사다리를 이용하여 높이 1.5미터나 되는 벽돌담장을 넘나 들어야 했다. 순자는 하루에도 그 벽돌담장을 넘나 들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땅에 살짝 내려 선다는 것이 그만 발을 빗디디면서 발목을 접질렀다. 순자의 발목은 삽시에 퉁퉁 부어났다. 그날 저녁 퇴근해온 남편한테서 침을 맞았으나 인차 낫지는 않았다. 순자는 이튿날도 절뚝거리며 그 담장을 넘나 들여야 했다. 이렇게 몇번씩 해볕을 받아 이불안이 새하얗게 되자 순자는 또 그것을 개여서 방치돌우에 놓고 토닥토닥 두드려 구김살 하나 생기지 않게 하였다. 이를 보고 영순이를 비롯한 딸들은 “어머니가 한족딸한테 푹 빠져 버렸다”고 악의없는 농담을 하면서도 어머니의 일을 도와나섰다. 3 문영이의 첫날 이부자리는 결혼날자 4일을 앞두고 결국 완성되었다. 그 때까지도 결혼할 때 조선족 여인들이 만들어 가는 이부자리는 그 크기가 한족들이 만드는 이부자리에 비해 거의 배가 되었다. 그 이부자리를 각이 날 정도로 잘 개어서 궤짝위에 올려 놓으니 집안이 화려해지는 것만 같았다. 순자는 친딸 셋씩이나 시집보내면서도 이번처럼 정성을 쏟은 적은 없었다. 친딸들한테는 그야말로 남들이 하는 흉내나 낼 정도에 그쳤으나 문영이한테는 모든 성의를 아끼지 않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이렇게 이부자리를 만드는 것도 마직막이라는 뜻도 있었지만 그 이상의 많은 다른 뜻도 깃들어 있었다. 문영의 이부자리를 만드느라고 순자는 손발이 퉁퉁 부었지만 쉴 수가 없었다. 문영이가 잔치를 한 뒤 인차 집을 잡고 살림을 해야 하겠으니 달랑 이불만을 들고 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또 딸들을 동원하여 연길시 거리를 돌기 시작했다. 이불안을 널에 해볕에 바래우려 할 때는 연며칠 비가 내리더니 이번에는 연며칠이 되는 무더위가 찾아왔다. 5월초부터 한여름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더운 날에 무거운 짐을 들고 몇차례씩 백화점과 집을 오가게 되자 둘째딸 영옥이와 셋째딸 영애까지도 “우리가 시집갈 때는 비비면 찢어질 것 같은 천으로 이불을 해주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더니 한족딸이 시집간다고 하니 기둥뿌리가 빠지는 줄도 모른다”면서 악의없는 농작을 걸어왔다. 그럴 때마다 순자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어머니를 도와 모든 힘든 일에 발벗고 나서주는 딸들의 소행이 그저 고맙기만 했다. 기실 아무리 딸자식들이었지만 모두 시집을 갔기에 그들을 마구 부려 먹는다는 것도 순자의 마음에는 썩 내려가는 일이 아니었다. 결혼식날자 이틀을 앞두고 순자와 영감이 그 동안 준비한 모든 봇따리를 챙겨갖고 돈화로 떠나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돈화로 가자면 열차편과 하루에 한번씩 오가는 버스를 이용해야 했다. 처음에 갖고 갈 짐이 많았던 순자네 내외는 집으로부터 버스부가 가까운 거리에 있기에 버스를 타고 떠나기로 하였다. 헌데 공교롭게도 그들 내외가 짐을 챙겨갖고 연길 버스부에 거의 도착할 무렵 돈화행 버스가 경적을 울리며 훌쩍 떠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를 어쩌나? 미리 끊어놓은 버스표값도 아깝지만 돈화에서 기다릴 문영이를 생각하니 순자는 절로 눈물이 쏟아졌다. 그렇다고 이러한 사정을 돈화에 알릴 수도 없었다. 그들 내외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집으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순자는 집에 들어서자 바람으로 털썩 주저 앉으며 또 낙루했다. 그 이튿날 순자와 영감은 열차편을 선택했다. 순자네는 짐이 네짝이나 되다 보니 맨 나중에야 열차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날따라 웬 여객이 그다지도 많은지 바곤안에 사람이 빼곡히 들어선지라 자리가 있을리 만무했다. “웬 짐이 이리도 무겁소?!” 영감이 투덜댔다. “별거 아니우다. 그저 살림에 쓸 그릇들인데 별로 값진 것도 아닌데 무겁기만 하우다.” “아니, 돈화에 살림도구를 파는 상점이 없을가봐 연길 한 끝에서 사서 들고 간다우?!” “아따 영감두, 지난번 내가 시조카 잔치 때 가봤는데 거기 그릇들은 색갈이 어둡고 진하여 별로 밥맛마저 떨어지는 것 같더라니까. 그래서…” “…?!” 영감은 어이가 없다는듯이 열차의 천정을 쳐다보며 입만 벌리고 말았다. “아무런 그릇에나 밥을 먹으면 되는건데 여자들 마음이란 참…” 자기의 비위에 거슬리면 제법 큰소리를 치다가도 마누라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생각만 들면 인차 주죽이 들어 투항을 선고하는 영감이었다. 빼곡히 들어선 여객들속에 서있자니 무척 힘들었다. 거기에 몹시 무덥기까지 했다. 힘들긴 자신도 마찬가지었으나 용환영감은 마누라가 가여워 보였다. 의지가지 없는 자기와 결혼하여 6남매나 낳아 키우느라고 고생한 것도 모자라 한족딸까지 삼아 결혼시키며 고생을 찾아하는 마누라를 보며 영감도 눈언저리가 뜨거워나는 모양이었다. “당신이란 참 못말릴 사람이구려!” 열차가 안도역에 도착해서야 그들 내외는 겨우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그것도 어떤 고마운 젊은이들이 그들 내외한테 자리를 양보해서야 앉게 되었다. 차창옆에 앉으니 제법 시원한 차바람이 들어와 잔등까지 푹 젖었던 땀을 들이기가 제격이었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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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5-04-18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31)
    아테네외곽성의 서류 소속대륙: 유럽, 소속국가: 그리스, 지점: 아테네 함의: 아테네를 추모하는 성지, 그리스의 문화중심 외곽성은 아테네의 심장으로 그리스문화의 중심이다. 외곽성은 낡은 성중심의 한 산등성이에 있으며 “높은 곳의 성”이라고도 불린다. 외곽성은 워낙 성보루였으며 지금까지 3000여년의 역사를 갖고있다. 이 성곽은 후에 재건을 거쳐 그 기능의 성곽으로부터 종교성지로 탈바꿈, 주요 건물들로는 아테네를 모시는 보호신(아테네를 위해 지어진 것임)이 있는데 지금까지 보존돼내려온 신전당으로는 파르테논신(帕特农神)무덤, 산문, 승리여신묘, 에렉테이온 신전(埃雷修神) 사원 등이다. 아테네외곽성은 당시 고도로 발달된 아테네의 문명을 말해주는 것으로 “그리스의 국보”의 영예를 갖고 있다. 파르테논신 아테네외곽성에서 가장 저명한 건축물로는 파르테논신(帕特农神)으로 그리스건축예술의 기념비로 불리우며 또한 “신묘중의 신묘”로 불리우기도 한다. 파르테논은 기원전 447년 ㅡ 432년 사이에 수건되었으며 아테네 여신을 모시는 묘이다. 신묘는 백색대리석을 깎아 만들어졌는데 높이가 14미터가 되는 46개의 원주기둥으로 웅위로는 기둥복도를 이루고 있다. 지금와서 파괴됐던 파르테논 묘를 수건하기는 했지만 완전히 원면모를 회복할 수가 없어 그저 돌기둥만 서있는 외곽만이 보일뿐이다. 아테네 여신상 고대그리스의 신화중에 아테네는 지혜와 승리의 여신이다. 아테네 여신상은 원래 파르테논신전 묘내의 전당에 모셔져 있었는데 높이가 12미터에 달하며 왼손에는 방패(盾牌)를 잡고 있고 오른손에는 승리 여신의 작은 상을 짚고 있는데 얼굴모습이 냉정하고도 우아하며 자연스러웠다. 유감스러운 것은 이 아테네 여신상을 기원 5세기에 동로마제국의 황제 안토니 비우가 옮겨간 후 종무소식이 되어 세계예술사상의 특대 유감사가 되었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5-04-18
  • 오묘한 세계대백과 (32)
    지구는 하나의 아름다운 성구로서 지구의 이웃들 중 어느 한 성구도 지구처럼 물이 많은 곳은 없다고 한다. 헌데 이토록 많은 물은 구경 어디에서 왔을까? 목전 이를 두고 두가지 설법이 있다. 그 중 하나의 설법은 지구상에는 원래부터 물이 있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인즉 아주 오랜 옛적 일부 얼음덩어리로 조성된 혜성이 “머리가 혼미해진 과정”에 지구와 부딫쳤고 그 때 공기와의 마찰 중에서 산생된 열량에 의해 이런 얼음덩이들이 녹아내려 물로 되었으며 그것이 곧바로 지구상의 바다로 되었다는 설법이다. 다른 한가지 설법은 지구상의 물은 자체로 고유한 것이라는 것이다. 원래 이런 물들은 그 전부가 암석과 광물 중에 분산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후에 지구의 부단한 운동변화에 의해 그것들이 점차 암석과 광물 중에서 뛰어 나왔다는 설법이다. 예하면 화산폭발시 대량의 수증기가 용암과 함께 지구의 “몸”속에서 빠져 나왔으며 그것이 바다물의 내원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5-04-18
  • 중국도시들의 공동난제-주차의 어려움 (1)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최근 몇년간 중국내 도시들에서 자가용이 급증하면서 주차가 어려운 문제가 새롭게 대두되고 있다. 현재 대도시들을 보면 많은 구역과 거리에는 주차금지로 되어 있지만 이는 아예 아무런 작용을 일이키지 못하고 있다. 특히 낮이 되면 상업구역과 음식점 앞은 틈만 있으면 자가용이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주차하는 현상이 비일비재이다. 이는 실로 도시에서 거리가 자동차로 인해 마비가 되는 현상보다 못하지 않다. 그러면서 소방차와 앰블러스가 골목에 들어 가기 어려운 현상까지 겹치어 상상 외로 악성사건이 초래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주차가 혼란하고 주차하기와 주차관리가 어려운 문제는 당분간 중국 도시들에서 해결하기 아주 힘든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북경시의 주차난 문제는 이미 연속 3년간 북경시 정협회의에서 거론되어 왔다. 지난해 말 현재 북경시에는 도합 281만개의 주차자리가 있었지만 북경시의 기동차량은 이미 561.3만대에 달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북경시뿐이 아니다. 광주시 역시 현재 기동차량이 251만대에 달하고 있으나 주차자리는 66만개뿐이며 정주시 또한 기동차량은 160만대에 달하지만 3환 구역내 주차자리는 40만개뿐이다. 조사에 따르면 평균 매 한대의 차량을 놓고 보면 2만㎞를 달렸을 경우 달린 시간은 400시간에 불과하고 주차시간은 8000여시간으로 이는 전체 시간의 95%를 점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때문에 일단 자동차를 샀을 경우 반드시 주차장소가 있어야 하지만 현재 중국 도시들의 상황을 보면 이는 여간간 골치거리가 아닐 수 없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목전 중국의 법률법규에 따르지 않는 주차장 및 주차자리 등 현상에 대한 명확한 처벌규정이 없으며 집법 부문 또한 명확한 집법규정이 없기에 실제의 감독관리에서 크나큰 애로가 생길 수밖에 없게 된다.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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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17
  • 이국에서 잊혀져 버린 Killer, 테러범 강민철
    [동포투데이 김다윗 기자] 반세기가 넘도록 이뤄온 한반도남북의 대치상태과정에서 수천수만명의 비밀요원들이 희생품으로 되어 쌍방 공중의 시야에서 “말소”되었다. 이 중에는 1983년 버마(지금의 먄마) 양곤 폭파사건의 주인공이었던 북한 공민 강민철도 있다. 강민철은 워낙 북한에서 가장 치명적인 특공대원이 한명이었다. 1983년 10월 9일, 강민철은 다른 2명의 동료와 함께 버마 양곤 박물관 앞에 폭발물을 설치하여 당시 이 곳을 방문하는 한국 전두환 대통령을 폭사시키려고 시도했다. 헌데 당시 전두환 일행이 이 곳에 늦게 도착했기에 폭탄은 목표물을 폭사시키는 시간을 맞추지 못하였다. 하지만 당시 17명의 한국관원(4명의 내각부장)이 당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번의 행동은 강민철로 하여금 그의 조국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하였다. 그의 조국인 북한은 그번의 사건은 북한과 아무런 상관도 없고 한국측의 꾸며낸 자작극이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해 버마감옥에 갇혀있는 강민철을 포함한 북한의 특공대원들에 대해 아무런 “표시”도 하지 않았다. 2008년 강민철은 감옥에서 병사, 당시 53세였다. 수감생활을 하는 25년 사이 그의 고향에서는 그 어떤 사람도 그를 방문하러 오지 않았었다. 아웅산 폭발사건 30여년 후인 오늘날 그에 대한 이야기는 뜻밖으로 다시 수면위로 떠오르게 되었다. 최근 한국 국정원 전 부원장이던 나종일이 강민철에 관한 책 한권을 출판, 제목은 “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이였다. 작자는 비록 구두상에서는 강민철을 “잔폭한 죄범”으로 불렀으나 책에서는 어느 정도 그 인간세상에서 지워진 사람의 “고혼”에 안위를 주려는 시도가 보이었다. 이런 사람들은 남북한 쌍방 냉전시기에 훈련받은 희생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작자는 남북당국의 모든 행위를 규탄하면서 임무의 실패와 함께 희생품으로 되어야 하는 특공대원들의 존재와 이를 이들 가족들마저 알 권리가 없게 하는 실정을 폭로하고 있다. 1953년 한국전쟁이 결속된 후 수십년간 남북한간의 소규모 충돌은 끊임없었다. 쌍방은 서로 스파일과 자객을 상대측에 파견, 1996년 북한의 잠수함이 한국 동해안에서 좌초, 잠수함에는 당시 26명의 인원이 타고 있었는데 후에 한국측에서는 11명의 시체가 산꼭대기에서 서로 뭉쳐있는 것을 발견, 이들의 머리에는 모두 총탄자국이 있었다. 1998년 북한의 또 다른 잠수함 한척이 동일한 해역에서 좌초, 후에 이를 발견한 한국관원들이 잠수함 뚜껑을 열자 9명 사내들의 시체가 있었으며 모두 머리와 흉부 등에 총탄자국이 있었던 것이었다. 이에 한국측 관원들은 이들 북한인원들이 포로가 되기 싫어 스스로 자결한 것으로 분석했다. 특공대원을 훈련시키고 파견하는 것은 북한뿐이 아니었다. 냉전시기 약 6200명에 달하는 한국 특공대원들도 북한지역에 침투되었으나 모두 행방불명이 되었다. 최근 이들 실종자들의 동료와 친인척들의 오랜 신소끝에 서울측은 아주 적은 액수의 보상금을 이런 희생자 가족에 전했으나 그 때까자 부분적 가족은 자기의 남편이나 아들 또는 아버지가 일찍 국가를 위해 헌신하였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나종일의 저서는 강민철에 대한 심문기록 및 그의 감방친구 및 감옥장에 대한 탐방 등에 기초하여 집필한 것이었다. 이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은 강민철이 감옥에서 복역할 때 그한테 간접적으로 도움을 준 사람들이었다. 한편 강민철 등이 폭발사건을 저지를 당시 이들의 주요 상대자는 당시 한국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이었다. 헌데 당시 버마 외교부장 일행이 전두환이 투숙한 호텔에서 전두환을 영접하느라고 몇분간 지체하였기에 중대사고를 피면할 수 있었으며 폭탄이 폭발당시 전두환이 탔던 차는 1마일 밖에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일정 거리에서 폭발소리를 들은 강민철과 기타 2명의 특공대원들인 김진수와 신기철은 즉시 양곤강쪽으로 뛰어갔다. 그 쪽에는 워낙 쾌속정 한척이 대기하고 있다가 이들을 태운 뒤 먼 곳에 있는 북한화물선으로 가기로 되어 있었다. 나종일은 당시 버마정부의 서류 및 기타 정보들을 통해 당시의 정경을 묘사하였다. 당시 이들은 쾌속정이 없자 부득불 양곤강 하류쪽으로 향해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대했던 북한 화물선마저 나타나지 않았다. 이어 이들은 추격해 온 버마의 군경들과 조우, 총격전 중에서 신기철은 총탄에 맞아 죽고 이어 김진수와 강민철은 이외로 터진 수류탄에 의해 중상을 입고 포로되었다. 포로당시 김진수는 팔 하나와 한쪽 눈을 잃었고 강민철 역시 한쪽 팔을 잃었다. 한편 포로가 된 뒤 김진수는 그 어떤 함구무언으로 아무런 진술도 하지 않았기에 인차 처형되었고 강민철은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기에 사형유예집행에 언도되었다. 기나긴 철창생활속에서 강민철은 버마어를 배웠고 또한 늦게나마 기독교를 신봉하기도 했다. 저자 나종일이 강민철의 정황을 수입한 것은 아주 우연적이었다. 1998년 그가 양곤을 방문하기 위해 자료를 찾아 읽던 중 한건의 정보를 장악, 그것인즉 강민철이 복역시 그 어떤 방문객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당시 그는 극도로 실망했다. 이러자 나종일은 충동적으로 당시 버마 정보부문의 책임자를 설복, 그 책임자가 바로 후에 총리로 된 킨 뉸 장군이었다. 킨 뉸 장군의 도움으로 나종일은 감방으로 찾아가 강민철과 대면, 그한테 먹을 것도 갖다 주고 남북한에 대한 얘기도 들려주었다. 당시 강민철은 만약 석방되면 한국으로 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2004년 킨 뉸 장군이 총리직에서 해임된 후 이 한국외교관의 강민철 탐방도 중단되었다. 나종일은 줄곧 한국정부가 나서서 강민철로 하여금 자유를 찾게 해야 한다고 호소했으나 당시 서울당국은 평양과의 화해를 목적으로 “해빛정책”을 실행하면서 이를 그닥 탐탁해하지 않았다. 당시 강민철이 감옥생활을 지속하는 것이 남과 북 모두가 바라던 것이었다고나 할까? 그러니 이는 나종일의 지적마따나 북한이 부인하고 한국이 홀시한 바로 그것이었다. 병사하기 몇년전부터 강민철은 매우 소침한 상태었다 한다. 그는 늘 자기의 생명위험을 느끼군 한 것이었다. 특히 2007년 후 양곤 폭파사거으로 중단되었던 북한과 버마의 외교관계가 회복되자 그는 늘 자신의 음식물에 독약이 들어있지 않나를 의심하면서 감옥장과 감방친구들한테 자기는 석방되더라도 갈 곳이 없다고 말했다. 2008년 강민철이 간암으로 죽었지만 나종일은 아주 오랫동안 먄바관원들한테 강민철의 행방을 수소문, 모두 모른다고 고개를 내저었다고 한다. <뉴욕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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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15
  • [김혁 칼럼] 신천지와 고적지
    ●김 혁 (재중동포 소설가, 용정.윤동주 연구회 회장) 1 “동방의 명주”- 상해로 가면 곳곳이 명소일터이지만 상해의 현란한 밤문화를 향수하려면 꼭 들려야하는 곳이 있다. 바로 “신천지”라고 하는 곳이다. 상해의 경물들을 눈뿌리 아프게 발품 팔아가며 찾아보던중 필자는 “신천지”를 찾았다. 중국의 금융 및 상업 허브이자 “상전벽해”의 대명사인 포동과 상해의 최대 번화거리 남경로와 함께 명소로 손 꼽는곳- 말그대로 새로운 하늘과 땅(新天地)이 열려 있었다. 고풍스러운 유럽식 건축양식과 로천카페가 어우러졌고 오래된 건축과 록음수목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는데 낮에는 옛 상해의 문화를 간직한 쇼핑가와 레스토랑이, 밤에는 상해 최고의 밤문화를 즐길수 있는 바와 클럽으로 유명했다. 2 사실 상해에서 필자의 심중을 유난히 사로잡는 한 곳이 있었다. 그곳은 바로 대한민국 림시정부 유적지였다. 림시정부 유적지는 바로 “신천지” 부근에 위치해 있었다. 상해 로완구 마당로 롱4호(上海卢湾区马当路306弄4号). 림시정부 유적지 청사는 “신천지”와는 대조되게 매우 낡고 좁은 도로옆에 위치해 있어서 언뜻 보면 쉽게 지나쳐버릴수도 있을만큼 평범했다. 좁은 골목길 안에 적색벽돌로 건축된 허름한 3층 건물이였다. 건물곁에는 아직도 주민들이 살고있었는데 골목길에는 자전거가 세워져 있고 베란다에는 빨아 넌 옷가지들이 나붓기고 있었다. 일반 주택으로 사용되다가 지난 1992년 상해시 로완구 인민정부가 대한민국 림시정부유적지 보존단위로 결정함에 따라 다시금 꾸며졌고 일반인에게도 개방됐다고한다. 지난세기초 한민족이 일으킨 거족적 3·1운동은 일본의 식민지 국민이자 천황의 신민(臣民)으로 잠들어있던 한민족이 깨여나 하나 되는 계기가 되였다. 일제 식민지의 억압에서 풀려나려는 민족적 저항운동의 홰불이 들판의 불길처럼 맹렬히 번져 가던 1919년 4월 10일. 20여명의 지사들이 당시의 법조계(法租界, 프랑스 조계) 마랑로(马浪路) 보경리(普庆里) 4호에 모여들었다. 그날 밤 국회 격인 “림시 의정원”을 구성했고 머리를 맞대고 민족의 중흥을 위한 지혜를 모았다. 림시정부 수립 당시의 참여자로는 조동호, 여운형, 손정도, 조소앙, 김철, 선우혁, 한진교, 신석우, 리광수, 현순, 신익희, 조성환, 리광, 최근우, 백남칠, 김대지, 남형우, 리회영, 리시영, 이동녕, 조완구, 신채호, 진희창, 신철, 리영근, 조동진, 여운홍, 현장운, 김동삼 등 29인 이였다. 이날 탄생한 정부는 항일투쟁을 지휘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국 각지에 설립되였던 정부들이 통합하여 발족된 대한민국의 림시정부였고 민주공화제 국가 수립을 위해 그들이 건넌 징검다리의 맨 처음 디딤돌이였다. 그로서 이곳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을 진두지휘했던 소중한 장소로 각인되여왔다. 림시정부 요인들은 중국공산당 지하당과도 련계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 승냥이처럼 번뜩이는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서였다. 림시정부 요인들은 일본의 탄압을 피해 림시정부를 여러차례 옮겼다. 1932년 4월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윤봉길의사의 폭탁투척사건 이후 일본군의 탄압에 절강성 가흥시로 옮겨가게 되였다. 그외에도 항주, 장사, 광주, 중경 등지로 고달픈 려정은 1945년 일제가 무너질때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상해 림시정부는 시종 일제에 맞서 외롭고 의롭게 투쟁했다. 이렇게 선후로 27년간 중국에서 민주공화국의 신분으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15원의 입장료를 지불하고 청사 전시관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마루를 깔았는데 관객들은 저마다 가이드가 넘겨주는 비닐 덧신을 신고 들어섰다. 제복차림을 한 몇명의 녀성 직원이 안내를 맡아주었다. 유적지 청사는 15평 정도나 될까한 아주 좁은 공간이였다. 각 층마다 당시 활동모습을 추적하여 전시관으로 꾸며 놓고 림시정부의 활약을 담은 관련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었다. 당시 쓰였던 가구, 서적, 사진 등이 전시되여 있어서 그 당시 시대 상황을 리해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청사 주 출입구에 들어서자 정면에 백범 김구선생의 흉상이 보였다. 1층에는 회의실과 주방이 있었다. 1층에서 림시정부의 건립과 활동에 관한 비디오를 5분쯤 시청하고 웃층으로 올라갔다. 나무로 된 좁고 낮은 계단은 머리가 닿을듯 하여 고개를 숙이고서야 올라갈수 있었다. 2층에는 림시정부 수반의 집무실과 회의실이 있었다. 집무실에는 당시 사용하던 태극기와 나무침대와 식탁, 조촐한 주방가구가 있었다. 식탁우에는 백범 김구선생의 가족사진도 놓여 있었다. 회의실에는 여러명이 앉을수 있는 의자와 회의용 탁자가 놓여 있었다. 집무실 책상에 림시정부 요인들의 밀랍인형이 설치되여있었는데 그들은 금방이라도 일어나 뜨거운 악수를 청할것만 같았다. 3층에는 림시정부 요인숙소가 있었고 림시정부의 활동 모습을 담은 사진과 그 주요 인사들의 사진을 전시하고 있다. 사진속에서 과거의 주역들은 신념으로 그득찬 찬 형형한 눈빛을 짓고있었다. 아쉽게도 전시실에서의 사진촬영은 금지되여 있었다. 녀성직원들이 서투르나 분명한 조선말로 “사진 찍지마세요!”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래서 림시정부청사 머리돌(定礎式)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기며 아쉬움을 달랠수 밖에 없었다. 출구쪽에는 기념품점을 앉혔다. 기념품점에서는 백범 김구선생의 얼굴이 찍힌 마크며 림시정부 유적지 사진을 박은 열쇠고리며 우표, 휘장, 배지, 악세사리, 장식품 등 기념품들을 팔고 있었다. 현재의 림시정부 유적지는 한국 삼성물산과 독립기념관 그리고 한국의 독지가들의 성금으로 복구되였는데 상해시 려행국에서 맡아 관리를 하고 있다고한다. 한해 20만명이 넘는 한국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아오고 있다고 한다. 3 상해에 몰아치는 개발의 광풍으로 림시정부 유적지 주변은 모두 고층 빌딩과 현대식 주거 시설에 포위되여 있었다. 여일중천(如日中天)한 “신천지”에서 비록 지금은 작고 허름한 건물만이 남아 주택가사이에 묻힌 “고적지”로 되여 버렸지만 좁고 루추한 거처에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혼신을 다했던 선렬들의 채취가 력력하게 남아있는듯 해 숙연하게 옷깃을 여미였다. - “청우재(聽齋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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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13
  • 충격! 70여만종 약 최저가 공장가격의 5~6배?(3)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진교수는 한 대형병원의 외과전문가이다. 한번은 그가 치질수술을 마친 후의 한 환자를 검사하면서 간호사더러 파라핀유(石蜡油)를 가져오게 하였다. 헌데 간호사가 가져온 파라핀유를 보니 하나씩 포장되어 있었다. 이에 진교수는 “원 약값보다 포장값이 더 비쌀테니 약값이 어떻게 내릴 수 있느냐”며 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파라핀유는 의사의 손이 보다 부드럽고도 윤활성이 있게 하는데 쓰이기에 그냥 손에 몇방울 떨구어 바르면 되었으며 가격도 매우 낮았다. 그제날 이 파라핀유는 아코올과 마찬가지로 소독환절에서 별도로 돈을 받는 일이 없었다. 헌데 현재 이 파라핀유마저 1차성적으로 사용한 뒤 나머지는 버리도록 포장되었기에 환자의 지출이 늘어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현재 병원들에서 보면 약을 갈아붙이는 환자의 손에는 모두 1차용 봉페의약도구가 있다. 이 중에는 핀센트 하나, 소독용 솜 두 뭉치, 가제 한톨, 그리고 작은 소독용 무명천 등이 들어있다. 얼핏 보아도 이는 모두가 약을 갈아붙이는데 쓰이는 물건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1차용 포장도구들로 하여 환자들한테서 30위안을 더 받아들인다. 또한 수술환자의 경우 낭비되는 비용은 더욱 높아 어떤 경우에는 수술 원가를 초과할 때가 허다하다. 그리고 재료비용이 입원 총 비용의 20~30%가 될 때가 많으며 지어는 50%를 초과할 때도 있었다. 하다면 환자들이 병보이기 어려운 고리 중에는 현대의학기술과 재료의 응용 및 업그레이드 그리고 치료질고 치료효과의 명목밑에 숨겨진 다른 비밀이 있다는 것을 반드시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무한협화병원 호상 부원장에 따르면 한명의 만성 백혈병환자를 놓고 볼 때 의료보험 목록내의 약을 쓰면 환자의 생명을 3년간 연장시킬 수 있으나 자비로 써야 하는 수입약으로 치료할 경우 환자는 아주 오랫동안 정상인들처럼 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환자는 매달 자비로 8~9만위안의 치료비를 지불해야 하는 상황이다. 현재 전문적인 자선기구들에서 지정환자한테 많은 지원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환자는 매달 수만위안에 달하는 비용을 병원에 처넣어야 하는 실정이다. 신기술과 신설비의 응용 또한 치료비용을 대폭 높이고 있다. 예하면 담낭수술의 경우 이전에는 칼로 배를 째인 후 담낭을 제거했기에 거의 2시간 가량이 소모되었지민 설비경신 후 현재 수술시 그냥 배에 3개의 작은 구멍을 내고 담낭을 제거하면 되고 있다. 이러면 모험성이 적어지고 시간이 단축되며 환자의 동통도 감소시킨다. 하지만 설비의 구입과 의사에 대한 기술양성 등 원가가 대폭 증가되며 결국 이런 원가는 의료비용의 상승을 초래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특히 의학상식이 부족한 환자일수록 병원과 의사 앞에서는 피동일 수밖에 없으며 “약과 기타 재료로 병원을 살리는 환경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다. 사례로 이런 경우가 허다하다. 환자가 골절되었을 경우 의사는 흔히 환자한테 “당신은 나이도 50세가 넘기에 뼈의 생장은 이미 정지되었기에 반드시 인공관절을 바꾸어 넣어야 합니다”라고 권고한다. 이러면 의사와 환자사이는 협상이란 거의 없다. 환자가 전문 지식과 정보 면에서 의사를 따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환자는 의사한테 거의 100%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지난해 9월 무한의 환자 곽모는 처음으로 치질이 발작하여 병원으로 가게 되었다. 이 날 의사는 그한테 수술을 권고했다. 비록 병원의 선전란에는 치질은 먼저 약물치료를 하다가 효과가 없을 경우 수술하게 된다고 씌어져 있었으나 광모는 의사를 믿고 수술을 받았다. 헌데 수술이 성공적이 되지 못했고 그 후유증은 아직도 남아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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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10
  • [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 (28)
    ■ 김철균 5 어느 덧 3년이란 문영이도 학업을 원만히 마치고 위생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3년이란 세월은 빨리도 흘렀다. 그 3년간 문영이는 자기한테 친 어머니다운 사랑을 쏟은 순자어머니가 있었기에 보다 쉽게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다. 문영이한테 있어서 하많은 사연을 남기고 떠나게 된 연변위생학교었고 “북해상점”이었으며 또한 조선족어머니었다. 문영의 졸업식을 앞두고 순자는 일부러 상점의 문을 닫고는 집에서 셋째 며느리가 갖고 온 “베개쌀(시집올 때 베개속에 넣어 갖고 오는 쌀임)”을 가루내어 골무떡을 하였다. 그 날 순자네 집으로 찾아온 학생은 문영이 외 몇명 더 있었다. 기실 순자의 사랑을 받은 학생은 문영이 한명뿐이 아니었다. 화전현에서 온 정수금, 장춘시에서 온 중경림, 훈춘시에서 온 장려 등 무려 6명이었다. 이는 순자의 자식남매 6명과 똑 같은 수였으며 모두가 정도부동하게 순자의 “손등을 씻어 먹으며 학업을 마친 학생들”이었다. 그들 6명이 순자와 인연을 맺고 내왕하며 민족단결의 꽃을 활짝 꽃피워온 사연을 말할라치면 이루다 말할 수가 없다. 이 책에서 문영이 한사람만을 선택해서 주로 취급한 것은 다름이 아니다. 그것인즉 문영이가 가장 특수한 가정환경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또한 가장 긴 세월동안 순자와의 인연을 지속하면서 민족단결의 꽃을 피워왔기 때문임을 미리 설명하는 바이다 삼복더위를 하느라고 그러는지 그날은 무척 더웠다. 집안에 그냥 앉아 부채질을 해도 땀이 흐를지경인데 순자는 가마솥에 떡을 쪄내느라고 불까지 지폈다. 거기에 그 17평방미터밖에 되지 않는 방안에 사람이 빼곡히 앉다보니 집안은 찜통을 방불케 했다. 집안 온도는 무려 36도까지 되었다. 그러니 부뚜막을 오르내리며 떡을 하는 순자의 얼굴에서는 땀이 비물처름 흘러내렸고 잔등 또한 땀으로 푹 젖어 쥐어 짜면 물이 뚝뚝 떨어질 지경이었다. 바로 이 때 순자의 큰 딸 영순이가 집안에 들어섰다. 영순이는 이 광경을 보고 어머니를 나무랐다. “어머니, 지금 어느 철이라고 집에 불을 때고 그래요?!” “보면 모르겠느냐. 떡을 하고 있는 것이란다.” “떡이야 뭐 서시장에 가서 사와도 될 걸 왜 힘들게 하느라고 그러세요?” 하긴 그 때는 이미 연길 서시장에 큰 건물이 지어졌고 그 안에서는 여러 가지 매장들이 있었으며 떡을 파는 매장만 해도 찰떡, 골무떡, 송편, 시루떡 등으로 여라문 가지나 되었다. 그닥 비싼 것도 아니고 순자가 만든 것보다 더 맛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순자의 생각은 달랐다. 서시장에 가서 누가 만든 것인지도 모를 떡을 사다가 이 6명의 한족자식들한테 맛보게 하기보다는 아무리 무덥고 고생스럽더라도 자기의 집에서 자기의 손으로 직접 떡을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 6명의 한족자식들 또한 순자의 그러한 성의를 잘 알고 있엇다. 그들은 순자가 해주는 것은 단지 떡이 아닌 자기네를 아끼고 사랑하는 순자어머니의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그 며칠 뒤인 졸업식을 거행하던 날 저녁, 문영이와 몇몇 친구들은 또 순자가 운영하는 “북해상점”에 모여 들었다.. 한편 그날 저녁 모인 학생들 중 정수금과 중경림 등은 이튿날 아침기차로 연길을 떠나야 할 몸들이었다. 순자는 그 애들을 그냥 보낼 수 없었다. 손수 아침밥이라도 먹여서 보내고 싶었다. 상점을 돌보아야 하기에 늘 상점과 붙어있는 둘째 딸 영옥이네 집에서 자는 순자는 새벽녘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때는 딸네 내외가 한창 달게 자는 때어서 눈치가 보였다. 조심스레 일어나 이부자리를 거두고 조용히 부엌에 내려섰다. 순자는 전등도 켜지 않은 채 손으로 이곳저곳 더듬으며 아침밥을 짓기 시작했다. 순자는 간밤에 미리 준비한 재료들을 갖고 국을 끓이고 반찬 몇가지를 했으며 특히 장춘과 화전 등 먼 곳으로 가게 되는 애들을 위해 도시락도 몇개 마련해 놓았다. 아침 6시쯤 되자 기숙사에서 잠을 잔 애들이 이불짐이 해지고 모여 들었다. 간밤에 아침밥만은 꼭 여기에 와서 먹어야 한다고 순자가 간곡히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둘째 딸 영옥이네 내외는 한창 달게 자는 아이를 깨워가지고 자리를 비워주었다. 아침밥은 시가에 가서 먹기로 했던 것이다. “먼길을 떠나자면 속이 든든해야 하기에 갖춘 것이 변변치 않아도 많이들 먹어라.” “어머니, 고맙습니다. 그 동안 어머니한테서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앞으로 어머니의 은공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애들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그 애들은 한결같이 순자한테 “어머니”란 칭호를 붙였다. 그만큼 그 3년동안 순자는 이 애들한테 어머니다운 정성을 쏟았고 그 애들 또한 순자를 친어머니처럼 대하면서 믿고 따랐었다. 순자는 먼저 떠나는 정수금과 중경림 등 몇몇 애들한테 도시락과 함께 부모님들한테 대접하라고 술과 사탕, 과자 따위를 짐속에 넣어 보내기도 했다. 애들이 극구 사양했으나 연변에 있는 이 조선족 어머니의 성의라며 무작정 밀어 넣었다. 먼 곳으로 떠나는 애들을 바랜 뒤 순자는 버스부에 가서 훈춘으로 가는 장려한테 돈 10위안을 손에 쥐여주며 부디 잘 살라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많은 돈은 아니었지만 그냥 보낼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이에 장려도 눈물을 흘렸다. 순자의 사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장려가 버스에 올라 떠나는 것을 보고야 순자는 발길을 돌렸다. 이번에는 제일 마지막으로 떠나는 문영이를 바래기 위해 연길역으로 가야 했다. 그야말로 숨쉴 틈도 없이 팽이처럼 바삐 돌아쳐야 했다. 3선 버스에 앉아 부랴부랴 연길역에 도착하여 시간을 보니 기차시간은 아직 얼마간 남아 있었다. 대합실에 들어서자 때마침 문영이가 자주 출입문쪽에 얼굴을 돌리며 순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영이를 만난 뒤 순자는 마음속으로 준비했던 말이 가득했으나 눈물이 앞을 가리면서 한마디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이는 떠나는 문영이도 마찬가지었다. 순자는 옷섭을 헤치고 돈 100위안을 꺼내서는 문영의 손에 말없이 쥐여주었다. 순자의 마음을 잘 아는 문영이는 거절하지 않았다. 거절해봤자 소용이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도문에서 발차한 도문-장춘행 렬차가 연길역에 도착했다. 순자는 아쉬운대로 문영이와 작별해야 했다. 기차에 올라 자리를 차창쪽으로 자리를 골라잡은 문영이는 오랫동안 손을 흔들며 “어머니, 사랑합니다”를 여러번 웨치고는 아까 순자한테서 받았던 돈을 차창밖으로 내던졌다. 100위안짜리 돈은 바람에 날리며 공교롭게도 기차바퀴밑에 떨어졌다. 순자가 렬차바퀴 밑으로 내려가 돈 100위안을 주어갖고 올라오는 순간 기차역 순라일군이 눈을 부라리며 다가왔다. “아주머니, 목숨이 아깝지 않습니까? 기차가 당장 떠나겠는데 기차밑으로 들어가다니 얼마나 위험합니까?”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그럴 사연이 있어서요.” 순자는 머리를 조아리며 잘못을 빌었다. 그러고는 부랴부랴 기차에 오르려는 열차승무원을 붙잡고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이 돈을 7호 바곤의 이문영이란 처녀애한테 전해달라고 사정하였다. 그 승무원은 생각밖으로 순자의 요구를 들어주었고 후에 들을라니 그 돈 100위안이 제대로 문영이한테 전달됐었다. 그날 순자는 맨 나중에야 플래홈을 빠져 나오다가 문을 지키는 일군한테 굼뜨다고 한바탕 꾸중을 들었다. “모두들 아주머니처럼 굼뜨면 우리가 어떻게 이 일을 해요?” 이에 순자는 그 문지기 일군의 언행에 한마디 해줄가 하다가 그 생각을 도로 접고 말았다. 문영이를 떠나 보내는 날에 구태여 남과 다투고 싶지가 않았다. “금방 돈화로 떠나는 딸을 배웅하다보니 그렇게 됐수다. 어떻게 하겠수. 미안하니 양해하우다.” 말을 남긴 순자는 무거운 다리를 끌며 막 떠나려는 3선 버스의 문을 두드려 문을 열게 했다. 헌데 3선 버스에 올라 버스표를 사자고 보니 단돈 20전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것 또한 야단맞을 일이었다. 순자는 얼굴이 뜨거워나는대로 자신의 신분증을 내보이며 버스 승무원한테 사정했다. 급히 딸을 배웅하러 나오면서 깜빡 잊고 돈을 적게 갖고 나왔으니 내일 이 버스번호대로 돈을 꼭 갚겠다고 말이다. 그러자 아까 그 연길역의 문지기 일군과는 달리 3선 버스의 승무원은 아주 친절하게 자기가 대신 물어 드릴테니 근심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처녀 승무원의 소행에 순자는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하지만 20전이 적은 돈이라고 그냥 지나쳐버릴 순자가 아니었다. 이튿날 순자는 버스부로 찾아가 자초지종을 얘기하면서 “버스표값 체불금” 20전을 갚았다. 그러자 순자의 소행에 감동된 버스부 재무과의 일군은 이상스레 순자를 뜯어보며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순자가 집이 신흥가두에 있고 이름이 아무개라고 알려주자 그제야 그 일군은 순자의 손을 덥썩 잡으며 반색했다. “선생님, 저를 모르겠습니까? 선생님의 신흥소학교 보도원 선생님 사업을 할 때 제가 학생이었습니다. 영남이의 동창생이기도 하고요.” 이 역시 순자로서는 아주 뜻밖의 일이었다. 순자는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그 일군의 모습은 기억에 남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 일군은 신문을 통해 선생님의 사적을 많이 읽었다면서 잔돈 20전마저 갚는 선생님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살아있는 뇌봉이라며 감탄을 연발했다. 순자는 여전히 그 일군이 기억에 떠오르지 않았다. 하긴 길가에서, 그 어떤 행사에서와 다른 장소에서 순자는 이렇에 남들의 인사를 받을 때가 여러 번 잘되었다. 하지만 이는 난감한 일이기도 했다. 남들은 순자를 알아보지만 순자 본인은 그들을 알아볼 수 없으니 말이었다. (다음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5-04-05
  • 충격! 70여만종 약 최저가 공장가격의 5~6배?(2)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현재 중국에서 약값이 높고 병 보이기 어려운 난제는 다소 개선을 보이고 있으나 근본적인 변화는 일으키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문제를 두고 전문가들은 근원은 입찰절차에 문제가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예하면 일부 약들은 제약회사들에서 약품의 공장가격을 보고할 때 전매 및 독자연구개발 원가를 포함시키거나 심지어 2차 협상가격과 병원의사가 받을 수고비까지 포함시킨다. 하다면 제약회사들이 챙기는 합법적인 이윤은 4% 내지 7%에 달하며OTC (전 미국 증권업협회 장외시장 종합지수) 유형의 약품일 경우 10%에까지 이른다. 거기에 약품들이 병원에 직매될 경우엔 기업이 챙기는 이윤은 17% 내지 20%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전문가들은 약품판매에서 수분이 많은 것의 배후에는 제약그룹의 농단이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현재 중국의 4000~5000개에 달하는 제약회사 중 오직 200~300개 회사만이 큰 이윤을 보고 기타 대부분 기업은 미비한 이윤을 보거나 결손을 보는 상황이다. 하다면 약품판매 랭킹에서 선두에서 달리는 기업들은 흔히 공립 3급 갑등병원 이상급 병원에 약품을 공급하는 것을 농단하고 있으며 이런 병원의 약품구입량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4년 11월 25일, 국가발전개혁위에서 발급한 “약품가격 개혁방안(의견청구고)”에는 정부가 정한 가격이 미래 약품가격을 결정하는 기본기제로 되고 있는바 최고 판매가격의 제한가를 취소하고 의료보험 약품의 가격은 의료보험 부문에서 기본가격을 제정하여 지불하도록 되어 있으며 병원들에서 구입하는 약품은 의료보험기구에서 지불하는 기준가격에 근거하여 협상하도록 되어 있다. 최근 중국병원협회 비서장 장일강은 기자들의 인터뷰를 접수하면서 목전 중국은 이미 약품의 최고 제한가격을 책정하는 정책을 취고하고 의료보험부문에서 결제하는 가격으로 약값을 책정하는 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했다고 밝히었다. 전문가들은 목전 제약회사들에서 국가발전개혁위에 제공한 약값신청건은 이러저러한 페단이 존재하는바 과학적 근거가 완벽하게 구비되지 못하기에 앞으로 중국의 약품가격 개혁은 마땅히 의료기구와 제약회사 및 보험기구가 상호협상하는 기제로 나아가게 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알아본데 따르면 현재 전국적으로 여러가지 약품가격개혁의 시행방안이 실시중에 있는바 호남의 약품지도가격은 전문가들에 의해 50% 정도 낮추어졌고 절강은 직접 전국에서 가장 낮은 가격을 기준으로 약품가격개혁을 진행하는 과정에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도 아직 가장 효과적인 방안은 없으며 정부와 시장 또한 “돌을 만지며 강을 건너는 식”으로 대담한 개혁방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럼 그 무엇이 의료개혁으로 하여금 만족감이 미비하게 하고 있는가? 의료개혁은 이미 6년철을 잡고 있지만 “약값이 비싸고 병 보이기 힘든 상황”은 여전히 사회 가계의 열점화제로 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의료개혁은 세계적인 난제로서 특히 중국처럼 인구대국이고 발전중의 나라로 놓고 볼 때 더욱 난제로 되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의료개혁을 홀시하는 이유로 될 수 없다. 건강은 대중의 기본적인 수요이이며 의료개혁은 초요사회를 전면적으로 건설하는 중요한 보장으로 된다. 최근 몇년간 중국에서는 의료개혁을 수술칼을 들이대여 여러차례 약값을 조절하였고 의료보험 표준도 부단히 제고시켰으며 혜민역도를 부단히 높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사람들은 약값이 비싸고 병 보이기 어려운 난제에 시달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현재 감당하기 힘든 의료소비앞에서 의료보험 역시 유명무실해질 때가 많다. 그리고 병원은 병원대로 의사는 의사대로, 환자는 환자대로 자아고통을 하소연하기도 한다. 또한 병원비의 결과를 놓고 심입할 수록, 구체적일수록 문제의 복잡성과 이해하기 힘든 요소가 많아 허다한 착각을 남기고 있다. 최근 북경대학 전문가들이 강소 모 지구의 의료개혁상황을 조사할 때 어느 한 가정주부한테서 이런 말을 들었다. “병원으로 들어가면 돈이 종이장이나 다름 없다.” 이는 많은 사람들의 공명을 일으켰다. 얼마전 환자 진평안은 무한의 모 병원에서 아주 간단한 수술을 하게 되었다. 수술후 입원치료를 하는 기간의 어느 날 약값지불 독촉을 받게 되었다. 당시 가족이 병원에 없었기에 그는 임시로 2000위안을 마련해 병원에 바쳤으나 이는 그한테 있어서 하루의 약값도 되지 않았다. 얼마전에 있은 중국의 “양회”에서 무한협화병원의 왕국빈 원장 등 의학계의 인대 대표와 정협위원들은 모두 중국에서 약값이 비싸고 병을 보이기 힘든 객관적 사실을 시인하였다. 국가위생 및 계획생육국에서 내놓은 데이터에 따르면 2013년 중국 전국의 위생총비용은 3만억위안에 달했다. 이는 3~4년 사이에 1만억위안이 더 늘어난 수치이며 또한 주민들의 수입 증속을 초과한 수치이기도 했다. 이해하기 힘든 병원비 명세서, 도대체 어떤 수분들이 있을까? 이 속에는 확실히 병원들에서 어떤 약품종 특히 수입제 약품종들에 대해 값을 제멋대로 책정하는 현상이 난무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목전의 부분적 약값에 대해 “미친듯한 쥐”에 비유하면서 이런 쥐가 극히 제한된 의료보험비용을 통채로 삼키고 있다고 지적한다. 지난해 말, 호북성 사회과학원 송아평 원장은 감기몸살로 한 3등 갑급병원에 3일간의 세프트리악손(孢曲松)를 포함한 몇가지 주사액을 떼고 점적주사를 맞게 되었다. 헌데 이해하기 힘든 것은 주사비를 포함한 비용이 1200위안에 달했다. 이러자 그의 첫 반응은 감기주사가 너무 비싸다는 감각이었다. 그가 소속된 단위는 매년 직원들의 공비의료결재때문에 해마다 200여만위안의 비용을 초과지출되고 있었으며 이는 그로 하여금 무척 골치 아프게 했다. 그래서인가 송아평은 약값에 대해 아주 민감했다. 당시 그가 맞은 주사액은 해남성 해구의 어느 한 제약회사에서 생산한것이었다. 송아평은 이 약품의 원가와 구입과정을 알아보려고 이 약을 구입할 뜻이 있다며 해당 제약회사에 전화를 걸었더니 상대방에서는 그가 소속된 도시의 대리상을 알려주면서 그와 협상하라고 하였다. 그 뒤 송아평이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이 주사액의 원가를 알아 보았더니 공장가격은 10위안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병원에서의 가격은 192원, 경악스러울 지경이었다. 한편 어느 한 의료보험 부문의 감시통제시스템을 통해 알아본데 따르면 모 병원의 한 의사는 3개월내에 700만위안어치의 동일한 약품을 환자들의 치료에 사용했다. 이 배후의 내막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하다면 수분이 섞인 약값이 “미친듯한 쥐”라고 할 때 병원에서의 치료약품의 결재는 마치 고삐를 풀어놓은 야생말과도 같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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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03
  • [칼럼] 외국인 살기 좋은 서울은 한국인 더 살기 좋은 서울이다
    ■이해응(서울시 외국인 명예부시장) “외국인 살기 좋은 서울은 한국인이 더 살기 좋은 서울이다.” 이 말은 일본 카와사키시 외국인시민대표자회 설립 취지로 내걸었던 슬로건을 인용한 말이다. 1996년에 외국인시민대표자회를 설립하여 지금까지 운영해오고 있는 카와사키시에서 일본인들에게 내세운 슬로건이 바로 ‘외국인이 살기 좋은 나라는 일본인이 더 살기 좋은 나라다’였다고 그 당시 사무국 담당자로 전체 과정에 깊이 참여했었던 야마다 타카오 선생님의 말씀이였다. 2014년 7월 9일 박원순 시장으로부터 ‘외국인이 살기 좋은 서울을 만들고 이주외국인의 목소리를 서울시가 귀담아 듣도록 귀하를 서울시 명예부시장으로 모십니다’라는 위촉패를 받고 외국인명예부시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중이다. 어언 곧 8개월이 되어간다. 그 동안 시정에 참여하면서 그리고 외국인 명예부시장으로서의 역할을 깊이 고민하면서, 최근에 와서는 뭔가 글을 써야겠다는 느낌이 강렬하게 다가온다. 왜 “외국인이 살기 좋은 서울은 한국인이 더 살기 좋은 서울인가?” 3월 6일 서울시가 유럽권외국인주민타운미팅을 개최했다. 타운미팅에서 가장 많이 제기 되었던 제안은 바로 ‘도로교통의 안전’문제였다. 외국인이 본 한국의 도로교통문제는 자동차 중심의 도로교통, 교통규칙위반자에 대한 경찰의 단속 부족, 보행자 중심이 되지 못해 아이들이 마음 놓고 학교에 걸어다닐 수 없다는 점들이였다. 지난 서울시민인권헌장제정회의 참여중 주변 외국인주민들에게 제안사항에 대해서 물어봤을때 중국출신 이주민은 자전거도로가 도시 구석구석에 설치되어 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한국인들은 아마도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이미 익숙해져버린, 그리고 최근 시민단체에서 많이 제기되고 있긴 하지만, 이런 힘들이 합치면 사람중심의 서울을 만들어갈 수 있고, 그것은 외국인뿐 만 아니라 한국인이 더 살기 좋은 서울이 될수 있을 것이다. 타운미팅에서 박원순 시장님이 인용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에서도 인류문명의 역사를 보면 다양성을 포용하는 것이 강한 나라를 만드는 중요한 요소중의 하나다. 이유는 단순하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면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각도로 문제를 바라보기에 해결방법도 다양한 방식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시대에는 이런 다양한 해결방식이 필수적으로 되고 있다. 외국인은 다른 나라에서의 삶의 경험을 갖고 오기 때문에 서울에 온 외국인은 서울을 새롭게 보게 된다. 새롭게 보게 되면서 흥미롭거나 불편했거나 차별받았거나 우월감을 느꼈거나 여러 가지 처우와 느낌을 갖게 되는데, 이런 것은 다양한 측면의 생각들을 드러내기 때문에 더욱 살기 좋은 서울을 만드는데 풍부한 아이디어를 제공해준다. 그리고 특히 외국인으로서 느꼈던 차별과 외로움 등은 그 어떤 사회에서도 가장 중시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외국인이라서, 아이라서, 공부 못해서, 일용노동자라서, 가출청소년이라서, 백수청년이라서, 돈 없는 노인이라서, 장애인이라서, 동성애자로서... 차별의 작동방식은 똑같기 때문에 차별에 대한 문제제기를 계속적으로 제기할 수 있고 경청할 수 있고 개선할 수 있는 나라가 더 살기 좋은 나라다. 엘리베이터에서 타운미팅 참석자들과 같이 내려오는데, 이번 타운미팅 괜찮았다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괜찮으셨어요?”라고 물었더니 너무 좋았다고 하면서 외국인 학생으로서 매우 부끄럽다고 했다. 왜 그러시냐고 했더니 서울시가 이렇게 외국인을 위해 힘써주고 노력해주는데, 외국인으로서 서울시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하게 되었다고 했다. 외국인을 위한 서울타운미팅은 외국에 대한 서울시의 살아 있는 홍보와 감동으로 전해지고, 그것은 나중에 귀중한 인연으로 이어질 것이다. 재한외국인의 절반 정도가 서울과 수도권 지역에서 살고 있으며 이들은 글로벌도시 시민으로서 살아가게 된다. 한국국적이 없다고, 한국국민이 아니다라기보다 이들이 거주하는 동안 시민으로서 존중받는다면, 이들은 서울을 위해, 한국인을 위해 무엇을 할수 있을 지를 고민한다. “장애인이 살기 좋은 사회는 비장애인이 더 살기 좋은 사회다, 한부모가 살기 좋은 사회는 모든 부모가 더 살기 좋은 사회다, 외국인이 살기 좋은 사회는 한국이 더 살기 좋은 사회다...” 이런 생각들이 확산되어갈 때, 우리는 더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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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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