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2(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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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우주과학의 아버지’ 전학삼이 받은 대우는?
    [동포투데이] 중국에서 전학삼의 일생을 살펴보면 쉽게 말해 국가가 우선이고 과학이 우선이며 명리가 가장 가볍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학삼은 중국 우주선의 아버지이자 미사일의 아버지로 칭송받았으며, 그의 일생도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중국의 우주와 미사일 사업을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었다. 전학삼은 지난 세기 중국 애국 과학자 대표 중의 한 명이었다. 중국이 해방되기 전, 중국의 국내 정세가 불안정하고 교육 수준이 외국에 비해 월등히 떨어지자 민국 정부는 국비로 학생들을 모집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내주었다. 전학삼은 이때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 기회를 얻어 생애의 첫 전환점을 맞았다.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되었지만 국내 건설은 백폐화되었고, 그때 전학삼과 같은 첨단기술 인재가 중국에 가장 필요한 때였다. 이는 그가 미국에서의 후한 우대를 포기하고 조국의 건설과 발전을 돕기 위해 돌아온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그대는 전학삼이 귀국 후 받은 대우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고 있는가? 당시 중국의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한 대우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이처럼 과학기술 인재를 중시하는 이유는 전학삼을 비롯한 수많은 과학인들 귀국길에 장애물이 가득하다는 점이었다. 미국은 당연히 그들이 가져올 과학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처음에는 높은 보수를 주며 회유하다가 성과가 없게 되자 드디어 무력을 사용했다. 미국 측은 터무니 없는 혐의로 전학삼을 구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전학삼은 급기야 중국 국내 지도자들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았고, 국가가 나선 상황에서 미국은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풀어주었다. 중국에서 전학삼은 그가 사랑하는 과학사업에 온몸을 바쳤다. 그의 귀국은 최소 20년간 중국의 미사일과 원자폭탄 시험을 앞당겼고, 2탄 1성(원자폭탄, 수소폭탄과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위해 많은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했다. 미국의 한 제독은 전학삼 한 명이 미국 5개 사단과 맞먹을 수 있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전학삼이 중국의 과학연구 사업에 기여한 가치는 결코 단순하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학삼은 중국 ‘국보급’의 과학자로 국가에서 매우 중시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중국 국방부 제5 연구원 원장, 중국역학회 이사장, 중국 과학기술 협회 제3차 전국위원회 주석 등으로 임명되었고, 국가에서는 2탄 1성급 공훈을 수여하여 수많은 명리를 더하였으나 전학삼은 자만하지 않고 과학연구에 몰두 했다. 물론 당시에도 장학삼이 받은 대우는 상당했다.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항상 그의 신변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그에게 경호원을 특별히 배치했고, 당시 개국 10대 원수, 최고 대우는 경호원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식품 검식관 1명을 별도로 두었다. 전학삼의 일상 식사는 모두 검식을 거쳐 안전이 확보된 후에야 먹을 수 있었는데, 이 혜택은 10대 원수도 누리지 못했다. 국가가 전학삼 문제에 신중한 이유도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정세와 압박에 못 이겨 전학삼을 귀국시켰다고 해서 완전히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전학삼의 연구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미국이 스파이를 잠입시켜 전학삼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식품 검열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슷한 안전사고가 있었던 만큼 조심해야 했다. 전학삼이 이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가의 과학연구와 국방사업에 기여한 공로가 컸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에 남았더라면 신변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지극히 우월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 다. 하지만 전학삼은 미국이 미사일로 조국을 겨냥하도록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전학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항상 확고했고, 그 덕분에 그가 훗날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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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2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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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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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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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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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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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격! 70여만종 약 최저가 공장가격의 5~6배?(1)
    편집자의 말: 최근 있은 중국의 양회에서 있는 약품가격 개혁안을 현재 중국내에서는 갑론을박의 공방전이 계속되고 있다. 언론계와 기타 소비분야의 인사들은 약품가격 개혁을 적극 주장하고 있는가 하면 제약기업과 도매 및 판매 회사들 역시 자아고충을 털어놓으면서 다른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럼 중국의 약품가격 개혁안의 장점과 모순되는 점은 과연 무엇일까? 금일부터 동포투데이는 이를 놓고 언론계, 제약회사 및 기타 여러 분야 인사들이 주장하는 목소리를 담아 보기로 하였다. 편집자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3월 27일, 중국청년넷에 따르면 중국에서 보편적으로 팔리고 있는 70여만종에 달하는 약들의 최저가격이 공장가격보다 5~6배 더 비싼 것으로 나타나 충격을 주고 있다. 얼마전에 있는 중국의 양회(정협과 인대)에서는 광서 화홍약업의 이사장 위비연이 중국에서 90% 이상에 달하는 약이 엄청 비싸기에 약값 50% 이상을 낮추어야 한다고 지적해 화제로 되었다. 현재 중국의 약품시장을 보면 확실한 공개수치가 없는바 어떤 약종들은 항업내의 전문가들조차 어떤 성분들이 함유된 것을 정확히 모르고 있는 상황으로 말 그대로 “회색지대(灰色地带)”로 되고 있다. 최근 “중초약전문가” 한명이 약가격에 가려진 “신비한 면사포”를 열고 70여만종에 달하는 약품의 공장가격 및 판매가격의 명세서를 인터넷에 공개, 부분적 약품의 가격은 혀를 내두를 지경으로 높았다. 국가공상학원 위생관리 및 정책센터의 채강남 주임은 현재 비록 약값 수치에 관한 관방측의 공개는 없지만 상세하게 분석해보면 약품의 보편적인 판매가격이 공장가격의 5~6배에 달한다고 언급하였다. 약품, 공장가격과 판매가격의 진실 최근 자칭 “중초약전문가”라고 하는 위백흥이 자신이 개설한 인턴넷 자료를 내놓으면서 약값 조정에 대해 크게 지적했다. 1997년부터 의약판매업에 종사해온 그는 2011년에 “약값조정넷”을 개설, 이 사이트는 이미 비경영성 온라인 약품정보봉사 사이트의 자격을 취득한 상황이며 70여만종에 달하는 약품의 판매가격이 공장가격보다 5~6배 더 높다는 것도 이 사이트가 공개한 것이었다. 이 사이트를 통해 발견된바에 의하면 어떤 약품종은 판매가격이 공장가격보다 6~7나 더 높았다. 예하면 세팔로스포린(Cephalosporins-头孢) 주사액 한대(0.5g)의 공장가격은 4.9위안이었으나 판매가격은 32.8위안이었고 고혈압치료에 쓰이는 “Hydrochloroth(片剂贝沙坦氢氯噻嗪片)” 은 공장가격이 한곽에 4.75위안이었으나 판매가격은 38.07위안이나 되었다. 위백흥에 따르면 그가 개설한 사이트는 전국 40여개의 수치채집점을 설치, 의약회사를 포함하여 체인점, 개인 대리와 공장의 업무원 등이 구입해오는 약들의 가격수치 수십만건을 종합분석하여 이상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제약기업 “약값개혁 쓸모 없다” 주장 위백흥의 사이트가 적발한 내용에 대해 화황제약(和黄制药)의 한 책임자는 약값의 초상가격은 항업내에는 모두 공개된 것으로 비록 부분적 약품가격이 다소 차이가 있으나 모두 약품의 원가와 도매가격을 국가 해당부문에 보고하여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하였고 동성그룹의 이사장 장빈은 만약 소위 약품의 “낮은 가격”을 추구하면 약품의 원료와 원가만 고려하게 되고 연구개발의 원가는 고려하지 않는 것으로 된다면서 향후 약품내원이 고갈될 위험성이 있으며 어떤 기업은 부득불 부분적 약품에 대한 생산을 중지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였다. 계속하여 장빈은 “예를 들어 항생소인 세팔로스포린(Cephalosporins-头孢)의 경우 제약기업은 제1대의 생산공예를 포기하고 약효가 더 강한 제2대 내지 제3대의 약품을 개발해야 하지만 연구 및 개발 원가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으며 결과적으로 이는 환자에 대해 책임지는 자세가 아니다” 라고 하면서 약품가격의 개혁을 반대했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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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28
  • 오묘한 세계 대백과 (31)
    만약 태공에서 지구를 내려다 보면 지구는 하나의 푸른 색을 띤 성구이다. 왜냐하면 지구표면의 7/10 이상이 바다무로 덮여 있기 때문이다. 넓고도 신비한 해양세계에는 형형색색의 해양생물들이 생활하는데 거기에는 육지에 비해 더욱 풍부한 자연자원이 있어 바다는 그야말로 하나의 푸른 보물고임에 틀림 없다. 해양에는 대량의 물자원이 축적돼 있으면서 아울러 우리에게 영양가치가 높고도 맛이 있는 물고기, 게, 등 해양식품을 공급하고 있다. 그 외 해양에는 풍부한 광산자원이 깔려 있으며 그 종류와 저축량은 아주 놀라운바 빈해의 돌광산, 해저석유, 린칼시움석(磷钙石)과 해록석 등이 아주 많아 인류의 후비자원고로 되고 있다. 현재 인류는 조석(潮汐)발전과 해수담화, 해양약업 등 산업을 진일보 발전시키고 있으며 해양은 인류를 위해 각종 생필품을 제공하고 있어 인류를 위해 사심없이 기여하는 “백보상(百宝箱)”과도 같다. 바다물의 담화와 바다물의 직접 이용은 많은 담수자원을 절약할 수 있게 한다. 바다물의 담화기술은 20세기 50연대부터 시작되였는데 목전 가장 성숙된 담화방법은 증류법이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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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25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31)
    진시황릉 병마용 진시황릉 병마용의 서류 소속대륙: 아시아, 소속국가: 중국, 지점: 섬서성 임동현 경내 함의: 진시황릉 병마용은 세계 8대 기적임 진시황릉은 중국 역사상 제일 첫 황제인 진시황의 능묘로 기원 전 248년부터 기원전 208년에 수건한 것이다. 이 거대한 황제릉이 기타의 능묘와 가장 큰 다른 점이라면 그것은 방대한 지하군대를 갖고 있었으며 이로하여 세계 8대기적으로 된 진시황를 병마용이다. 여기의 군대는 사병과 말과 전차 등이 있는데 도자기모형으로 조성되었으므로 실물의 크기가 같았고 그것들은 순장품으로 지하황릉을 지키는 것이었다. 규모가 방대하고 기세가 당당하기로 이름있는 진시황릉 병마용이다. 지하황궁 진시황의 황릉은 설계와 수건에 있어서 흡사 진시황이 생전에 살던 궁전을 방불케 한다. 전반 능원은 두 겹의 담장으로 둘러 쌓이었는데 하나의 “回”자형을 이루며 황성과 궁성을 상징한다. 능원의 핵심은 지궁(地宮)이며 기타의 건축물은 담장, 배장갱(陪葬坑) 등으로 모두 지궁을 둘러싸고 건축되었다. “사기”에서 진시황릉의 지궁을 묘사한데 따르면 지궁의 천정에는 해와 달 그리고 별무리가 그려져 있었고 또한 인조대지가 있었는데 대지에는 산봉과 하류가 흐르기도 했다. 하류는 수은으로 만들어졌는데 반짝반짝 빛을 발산해 매우 아름답다. 지하군대 고고학자들이 발견한데 따르면 진시황릉의 병마용갱은 세 곳에 있는데 “品”자형으로 배열, 도합 8000건의 도용(陶俑)이 출토되었고 전차 100여대와 수만건의 실물병기 등 문물이 나왔다고 한다. 그 중 1호갱은 “우군”으로 도용과 도자기 말이 6000건이 되었고 2호갱은 “좌군”으로 보병, 기병, 전차 등 3개 병종으로 혼합편성된 진을 이루어 이 병마용갱의 “정규군소재지”었으며 3호 갱은 무사용(武士俑), 전차, 도자기말로 지하대군을 통솔하던 지휘부였다. 이 군대의 진영은 그야말로 진나라 군대 편성의 축소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한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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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25
  • [김혁 칼럼] 춘사(春史) 나운규
    ●김 혁(재중동포 소설가) 1 북간도 명동학교의 수업시간. 모두다 산수풀이에 열중하고있는데 맨 뒤에서 키득키득 웃음 소리가 들려온다. 수학선생이 이상하여 슬그머니 다가와 보니 맨 뒤에 앉은 학생이 책뒤에 거울을 숨겨놓고 비춰보며 벙긋벙긋 웃음을 웃고 있다. 그 모습이 한심하여 선생은 학교의 김약연교장에게 이 일을 고해바쳤다. 이에 김교장은 웃음으로 넘기며 말했다. “그 녀석이 장차 뭔가 되기는 될 거야”. 수학시간에 표정 연기에 열중하던 명동학교의 그 아이. 교장선생이 뭔가는 될 듯 하다고 “될성부른 떡잎”으로 예견한 그 아이가 바로 그후 불멸의 명화 “아리랑”을 제작한 한국영화계의 선두주자 나운규이다. 2 춘사 나운규는 1902년 10월 함경북도 회령에서 나형권의 셋째 아들로 태여났다. 한말의 풍운기에 태여난 나운규는 일제의 발길에 짓밟혀가는 한반도의 북녘 끝 회령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나운규의 아버지 나형권은 구 한국군 부교(副校)로 지내다 군대가 해산당하자 집으로 돌아와 독학으로 한의학을 공부하여 한의사로 전신(轉身), 한약방을 하면서 후학들을 키웠다. 그는 아들 셋과 딸 셋 여섯 남매를 두었는 데 그중 셋째가 나운규었다. 나운규가 회령에서 신흥학교에 다니던 1915년 무렵은 개화기 신문화 류입의 한 물결인 신파극(新派劇) 운동이 한창 번져가고 있을때였다. 때때로 회령 읍내에도 이따금씩 신파극단이 찾아와 순회 공연을 했는데 나운규는 공연을 빠침없이 찾아 보며 이 신파극단에 흥미와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배우들의 과장된 몸짓과 말투를 며칠씩 두고 흉내를 냈다. 나운규의 연기 재질은 아마 이때부터 싹트기 시작했다. 1916년 8월, 14살의 나운규는 윤봉춘 등 죽이 맞는 친구들과 더불어 회령 읍내 유일의 극장 만년좌에서 최초의 자작극 “2전 5리(二錢五厘)”를 공연하려했다. 공연허가 신청을 받은 일본 헌병대에서는 미성년자들이라고 집에 가서 부친의 도장을 받아 오라고 퇴짜를 놓았다. 이에 나운규는 아버지의 도장을 훔쳐 찍고 다른 허가를 받아냈다. 그런 다음 가두 선전을 한답시고 울긋불긋한 차림의 무대 분장을 하고 회령 읍내 번화가를 누비며 퍼레이드를 벌렸다. 우여곡절 끝에 연극은 막을 올렸다. 한창 신나게 공연중인데 갑자기 입구 쪽이 시끄러워지더니 나운규와 동인의 부형들이 달려 들었다. 집안 망신시키는 놈들이라며 매타작을 퍼부으니 극장 안은 삽시간에 수라장이 되어 버리고 연극이고 뭐고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나운규 대본 연출 주연의 최초의 자작극 공연은 실패로 돌아갔다. 나운규는 15살에 마음에도 없이 결혼한 녀인과의 사이에서 이듬해 아들 종익을 낳았고 19세가 되던 해에는 딸 행자를 낳았다. 예고도 없이 학교가던 길에 붙잡혀 말잔등에 태워져 강제로 결혼식을 올린 혼인이 싫어져 나운규는 무단 가출을 했다. 고향을 떠난 나운규가 직행한 곳은 북간도였다. 1918년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에 있는 명동학교에 입학했다. 북간도에서의 나운규의 행적은 동인들에 의해 적지 않게 전해지고 있다. 북간도에서 나운규는 조선인들이 무은 간도국민회에 가입하였다. 북간도에서 발간하는 “독립신문”을 고향인 회령으로 배달하는 책임을 맡고 한 달에 몇 번씩 두만강을 은밀히 건너곤 했다. 그러다 도판부사건(圖判部事件)이라 불리는 사건에 휘말려 든다. 도판부 사건이라는 것은 북간도에 있던 반일독립군들이 두만강을 건너가 회령에 있던 경찰서와 수비대를 습격한 사건이다. 그 때에 나운규와 윤봉춘은 일제의 수비부대 간의 교통을 차단하기 위해 회령과 청진 사이에 있는 무산령 터널을 폭파하고 전신, 전화 시설을 끊는 일을 맡았다. 1919년 4월 초 나운규는 지인들과 함께 북간도 한인교회로부터 독립선언문과 태극기, 격문 수천장을 두만강을 넘나들며 회령을 비롯한 여러 고을에 잠입하여 나누어 주고 거사 날짜와 시간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예정시간을 눈앞에 두고 거사는 왜경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은 거리로 뛰쳐나가 만세를 부르며 반일 시위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미 준비를 갖추고 있던 왜경의 총칼에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피를 뿌리며 죽고 부상당하고 붙잡혀갔다. 나운규의 절친 윤봉춘은 이때 붙잡혀 치안유지죄 위반이라는 죄명을 쓰고 6개월간 징역살이를 하게 되였는데 민첩한 나운규는 용케도 왜경의 추적에서 벗어났다. 그때부터 나운규의 정처없고 고달픈 방황생활이 시작되었다. 나운규는 국자가(지금의 연길시), 두도구등지를 헤매다가 시베리아 연해주, 해삼위, 노령(露領)으로 정처없이 떠돌아 다녔다. 그렇게 죽을 고비를 다 겪어가며 돌다가 풍문이 가라앉고 거지꼴이 되어서 나운규는 다시 로령에 가까운 훈춘으로 건너왔다. 훈춘으로 온 운규는 친구 김용국과 함께 북간도국민회(北間島國民會) 소속 독립군에 가담하게 되었다. 여기서 인쇄물 운반,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하던중1920년 10월, 나운규는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부대가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접전해 3천 여 명을 사살하는 대첩을 거두였다는 승전보를 들었다. 또 서로군정서 사관양성소에서 생도 298명을 북간도 왕청현의 부대에서 배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운규의 가슴은 북치듯 뜨겁게 울었다. 나운규는 김용국과 함께 신흥무관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신흥무관학교에서 6개월간 훈련을 받으면 광복군 소위로 임관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서둘러 출발했다. 용정에서 약 200리 떨어진 명월구(明月構)에 다달았을 무렵 여로에 지친 두 사람은 다 지쳐 드러눕고 말았다. 그런 두 사람에게 나이 많은 독립군 선배는 “젊은이들은 일단 집으로 돌아가 학문에 힘쓰고 배운 지식을 이후의 독립을 위해 쓰도록 하는 게 좋겠네”하고 타일렀다. 나운규는 선배들의 충고에 따르기로 작정하고 다시 두만강을 건너 회령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온 나운규는 돌이 지난지 얼마 되지 않는 어린 딸 행자를 두고 다시 서울로 올라간다. 1921년 봄 중동학교 고등예비과를 거쳐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당시는 영화의 전성시기였다. 단성사니 장안사니 연흥사니 하는 극장들이 서울 시내 여기저기에 세워졌고 “팔딱팔딱 뛰는 활동사진”이라 불리는 영화는 숱한 젊은 남녀들을 그 마력으로 현혹시켰다. 영화에 미치기 시작한 나운규는 학교에서 공부하는 날보다도 극장에 가서 활동사진 보는 시간이 더 많았으며 길을 가다가도 배우의 표정과 동작을 흉내 내기도 하였는데 이는 몇 년후 영화계의 혜성으로 등장할 나운규의 예고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영화를 보고 돌아와서는 방에 붙박혀 감상문을 쓰고 각본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그렇게 영화에 심취되여있던 나운규에게 1922년 봄, 또다시 시련이 닥쳐왔다. 회령경찰서에서 파견된 형사에게 친구 윤봉춘과 함께 지명수배자로 체포되였던 것이다. 북간도에서 면목이 있는 사람 하나가 순사 시험에 응시하면서 “도판부사건”의 연루자로 나운규와 윤봉춘 등 옛동지들을 팔아 넘겼던 것이었다. 21살의 나운규는 윤봉춘과 함께 1년 6개월의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징역형을 선고받고 청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때 형무소에 함께 수감 된 이춘성이라는 독립운동가를 알게 되었는데 그에게서 춘사(春史)라는 호를 지어 받았다고 한다. 감옥에서 치른 옥고는 북간도와 시베리아 벌판을 류랑하던 쓰라린 체험과 함께 그의 반일사상의 뿌리를 더욱 깊게 하였고 저항의식을 더욱 북돋아주어 훗날 그의 작품세계에도 이 극기의 고통은 여실히 반영되었다. 그의 대표작으로 지칭되는 “아리랑”, “풍운아”, “사랑을 찾아서” 등이 모두가 그 소산이었다. 1923년 출감 이후 나운규는 조선키네마에서 단역배우로 배우 인생을 시작하였다. 윤백남 감독의 “운영전”에 대사조차 없는 가마꾼으로 출연했던 나운규는 이듬해 백남프로덕션의 첫 번째 작품 “심청전”에 심봉사로 출연하였다. 또 조선키네마에서 만든, 자유련애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롱중조(笼中鸟)”에 조연으로 출연하여 연기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1926년 나운규는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지원을 받아 자신이 오랫동안 구상하고 각본을 쓴 “아리랑”을 제작했다. 자신이 감독하면서 1인 3역의 역할을 해냈다. “아리랑”은 개봉하자마자 요즘의 형용어를 빈다면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영화는 1926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 청사 완공 기념식이 있은 뒤 같은날 오후 5시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다. 영화가 끝나자 객석은 온통 눈물로 얼룩졌다. 정신을 놓아버린 청년, 그의 녀동생, 그녀를 사랑하는 오빠의 친구가 친일파의 횡포에 저항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는 일제 강점기, 식민의 고통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 뜨거운 감동을 안겼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가수 이정숙은 울먹이며 아리랑을 불렀고 관객들 모두가 따라불렀다. 노래가 울려퍼지자 순경이 호각을 불어 상영을 중지시켰지만 관객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라 잃은 슬픔은 한 편의 영화를 통해 그렇게 터져나왔다. 이렇게 해서 민족의 영화 “아리랑”은 서울뿐만이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며 상영되었다. 평양에서는 관객이 너무 많이 들어서 극장의 들보가 부러지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 서울로 아리랑 구경을 가자”는 유행어까지 생겼다 영화의 주제가인 “아리랑”을 부른 가수 리정숙은 이 노래로써 하루아침에 유명해졌고 “아리랑”이라는 민요는 이때로부터 온 민족의 애창곡이 되었다. “아리랑”은 말 그대로 활동사진 영역에 머물러 있던 한국영화를 획기적으로 진전시켰다. 이전까지 신파물이나 외국 번안물이 대부분이었던 시절 “아리랑”은 영화계에도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였다. “아리랑”이 상영되는 곳은 “의열단 단원이 폭탄을 던진것과 같은 열기가 감돌았다”는 등의 평가는 문헌이나 증언들 속에서 무수히 발견된다. “아리랑”은 일제시대 전 시기의 문화예술계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민족주의적 생산물이 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리랑”의 성공으로 조선 키네마는 계속하여 나운규에게 각색과 감독과 주연을 아울러 맡겨서 1926년에는 “풍운아”를 제작하게 하였는데 이 영화도 또한 조선 극장에서 13일 동안이나 공연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로써 나운규의 영화 재능은 충분히 증명되었다. 1927년 나운규는 윤봉춘 등과 함께 “나운규 프로덕션”을 설립했다. 이 자신의 이름을 건 프로덕션에서 “옥녀”·”사나이”·”사랑을 찾아서”를 만들었고 1929년에는 한국 최초의 문예영화라 할수있는 “벙어리 삼룡”을 제작하였다. “아리랑”의 성공 이후 나운규는 한국영화사에 또 하나의 기록이 될 시도를 하였다. 새로 제작하는 “아리랑 3편”을 당시 막 인기를 끌기 시작한 발성영화로 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한국영화는 변사가 대신 대사를 말해주던 무성영화시대에서 벗어나 배우가 그대로 대사를 하면서 연기하는 유성영화 시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나운규의 개인적 인기와는 달리 “나운규프로덕션”은 경영이 순조롭지 못했다. 결국 영화사는 해체되었다. 1931년 나운규는 “임자 없는 나루배”에 출연하여 오랜만에 관객들의 가슴에 남을 좋은 연기를 보여주였다. 일제 강점기 배사공 부녀가 겪는 비극적 현실을 그린 영화는 “아리랑”과 함께 일제시대 문제작으로 손꼽힌다. 이후에도 나운규는 여러 편의 영화를 자신이 감독하고 직접 출연하면서 만들어 내며 내내 한국영화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오래동안의 생활고와 작업의 과로 등이 겹쳐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면서 약관35세의 아까운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나운규는 영화계에 입문해 활동한 약 15년 동안 29편의 작품을 남겼고 26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그 중에서 직접 각본·감독·주연을 맡은 영화가 15편이나 된다. 3 일전 ”2015 춘사(春史) 영화상”이 서울 한국언론진흥재단 프레스센터에서 열렸다. “국제시장”, “명량”, “끝까지 간다”가 각본상, 기술상, 감독상을 수상했고 하정우와 배두나가 남자 연기상과 여자 연기상을 각각 수상했다. “춘사 영화상”은 한국영화계의 선구자인 춘사 나운규의 영화에 대한 열정과 삶에 대한 투혼을 기리고자 개최되는 영화제이다. 한국영화감독협회에서 제정, 지난 1990년 12월 24일 제1회 춘사영화예술상 시상식을 개최하면서 출범했다 만약 력사서술에 가정이 허락된다면 나운규가 빠진 일제강점기의 조선영화사는 대단히 빈약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그가 일관되게 추구한 예술테마는 식민통치의 억압과 수탈에 대한 저항, 통치권에 결탁한 자본가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는 “투철한 민족정신과 자유로운 영화 예술관을 가진 최초의 시나리오 작가이자 감독 그리고 배우였으며 초창기 한국영화를 이끈 영화계의 선구자”였다. - “청우재(聽齋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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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25
  • 【장편실화연재】한 여인의 인생변주곡(27)
    ■ 김철균 2 그 일이 있은 후부터 문영이는 늘 수심에 잠겨있던 지난날과는 달리 활달한 모습을 보이었다. 자신을 낳은 친 어머니는 없지만 자신을 더없이 아끼고 사랑하는 새로운 조선족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더는 영애를 비롯한 순자네 자식들의 눈치를 보지도 않았다. 그 어머니에 그 딸이라고 알고 보니 순자의 딸들 역시 착하고 친절했으며 문영이를 친동생처럼 여기는 자매들이었고 점점 나날이 지나면서 오빠들 또한 모두 점잖고 유식했으며 동정심도 많은 형제들이었다. 문영이는 일요일마다 “북해상점”에 와서 순자와 어울려 때로는 어리광을 부리기도 하고 때로는 상점옆에 있는 영옥이네 집에 들어가 영옥이네 아들애와 함께 놀아주기도 했다. 한편 문영이는 순자의 일을 거들어주면서 김치와 장을 담그는 재간과 기타 주방일을 배웠다. 일이란 내켜서 하는 것이라 재미있기 마련이었고 문영이는 열심히 조선족주방일을 배웠으며 얼마 안있어서는 제법 조선족 여성에 못지 않게 주방일을 척척 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담근 김치도 제법 맛있다는 평가를 받아보기도 하였다. 문영이가 기뻐하며 기를 펴고 나다니자 이를 바라보는 순자의 마음 또한 흐뭇하기만 했다. 그리고 얼마 뒤 순자의 남편 김용환 교원도 상점에서 문영이를 만나보고는 자신도 어렵게 자라면서 공부를 해온터라 문영이에 대해 진정으로 아껴주면서 친딸처럼 대했다. 그 해 겨울방학이 되자 문영이는 연길을 떠나 돈화에 있는 아버지의 곁으로 가게 되었다. 순자의 곁에 있고 싶기도 하고 그러면 더 편하고 행복할 수도 있었지만 문영이는 가야만 했다. 방학기간만이라도 장애자인 아버지를 돌봐야 했다. 문영이를 돈화로 보내는 것 이는 또한 순자의 뜻이기도 했다. 문영이가 떠날 때 순자는 과자, 사탕, 과일, 술 등 먹을 것을 한아름이나 사서 문영의 가방안에 넣어 보냈다. 어쩔 수 없이 문영이를 돈화의 시골로 보내긴 했지만 이는 가슴의 살을 도려내듯 저리고 아픈 노릇이었다. 아니나 다를가 문영이가 떠난 이튿날부터 순자는 문영이에 대한 근심으로 끙끙 속을 앓으면서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돈화의 농촌은 이곳 연길보다 많이 더 춥겠는데 얘가 감기에라도 걸리지 않았는지?…얘 영순아, 문영이가 무사히 도착했는지 또 앓지나 않는지 전보라도 한통 쳐보려므나.” “어머니, 우리가 자랄 때는 막 굴러다니며 자라게 하더니 이번에 한족딸을 삼으니 제법 정성이 지극하구만요.” 큰 딸 영순이의 악의없는 농담에 순자는 제법 정색을 했다. “너희들 그렇게 생각하면 못쓴다. 걔는 에미가 없는 애란다. 너희들과는 달라. 너희들도 걔를 불쌍히 여겨야 한다.” “알겠습니다. 한족딸의 어머니, 이 조선족딸들은 그 영을 받들어 따르겠나이다.” 막내 딸 영애도 한술 더 뜨며 말참견을 했다. “에끼, 이것들 너희들도 자식을 키워보면서 그것도 몰라?” 순자 역시 악의없이 딸들을 흘겨보았다. 그러면서도 순자의 뇌리속에는 문영이에 대한 근심뿐, 요즘 세월처럼 전화 한통이라도 할 수도 없었고 다만 편지를 연락을 주고 받을 수 있었으니 더욱 그랬다. …… 어느 덧 음력설과 정월보름이 지나고 위생학교 울안의 백양나무에 까치가 앉아서 우는가 싶더니 개학을 앞둔 어느 날 문영이가 나타났다. “어머니!” “문영아!…” 모녀는 대뜸 한덩어리가 되었다. “어머니, 보고 싶었어요.” “문영아, 나도 그랬어. 나도 네가 보고 싶어 죽는줄 알았다.” 모녀는 다시 한덩어리가 되었다. 이윽고 문영이의 손을 잡아보는 순간 순자는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구, 네 이 손이 뭐냐?” 그도 그럴 것이 문영이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거웠고 손등은 얼기설기 갈라터지기까지 했다. 더 설명하지 않아도 집에 가있는 동안 아버지의 병수발을 들면서 찬물에 밥을 하고 빨래하고 하면서 무척 고생한 것이 분명했다. 순자는 문영이의 언손을 가슴속에 꼭 품어 주었다. 순자의 따뜻한 살결이 손에 닿는 순간 문영이는 뜨거운 모성애에 눈앞이 흐려났다. 아, 모성애란 바로 이런 것인가?! 순자의 가슴팍에 안긴 문영이는 7-8살이 어린애가 되고 싶었고 그대로 발버둥이질을 치며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으며 아니, 그대로 영영 떨어지고 싶지를 아니했다. 때마침 이들의 상봉을 알아주기라도 하는듯 당시 중국대륙에서 많이 유행되던 대만가요 “세상에는 엄마가 좋아(대만영화-‘어머니 다시 한번 더 사랑해 주세요’에서의 주제곡)”가 “북해상점”의 반도체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세상에는 엄마가 좋아/ 엄마있는 아이는 보배같지요// 엄마품에 안기어 행복 끝없어라… 한편 순자와 문영이가 서로 한덩어리가 되어 있는 모습은 옆에서 지켜보는 영순이와 영애마저도 눈시울이 뜨거워나게 했다. 3 봄이 왔다. 뒤늦게 찾아오는 북국의 봄이지만 봄이 오는 것만은 분명했다. 해빛은 포근했고 살랑살랑 부는 바람도 매섭지 않았으며 사람마다 봄이 좋다고 겨우내 웅크리고 있던 허리를 펴며 기지개를 켰다. 아니 이 시각, 자연계에 찾아오는 봄도 좋았지만 문영의 가슴에 스며드는 인생의 봄은 더욱 따뜻하고 좋았다. 봄을 맞는 마음은 순자도 마찬가지었다. 그 해는 한족딸 문영이와 인연을 맺은 뒤 맞는 봄이라서인지 더욱 즐겁기만 했다. 문영이는 자주 “북해상점”으로 찾아왔다. 또한 문영이가 오지 않으면 순자가 문영이네 기숙사로 찾아가기도 했다. 이틀만 서로 보지 못해도 그리워서 못견딜 지경이었다. 어느 덧 “3.8절”이 다가왔다. 그 날 학교에서는 오전만 수업하고 오후에는 전체 사생들을 휴식시키기로 했다. 그러자 집으로부터 용돈을 좀 넉넉히 받아쓰는 학생들은 기숙사식당의 밥은 먹지 않고 외출준비에 서둘렀다. 밖에 나가 맛있는 것도 사먹고 옷도 사입으면서 유쾌하게 “3.8절”을 쇠려고 말이다. 그러나 문영이를 비롯한 가난한 가정의 애들 몇몇은 외출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외출하는 애들이 함께 나가 식사라도 한끼를 같이 하자고 했으나 일일이 거절했다. 그 애들도 집에서 보내오는 돈을 쓰기에 남을 도우면서까지 쓰기엔 넉넉하지 못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까닭없이 남의 배려를 받고 싶지도 않았다. 하긴 문영이는 순자네 “북해상점”으로 찾아가 맛있는 것을 얻어먹을 수 있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늘 함께 어울리던 애들을 떼놓고 혼자 가기도 미안했고 그렇다고 그 애들을 몽땅 데리고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바로 이 때 순자가 헐레벌떡 기숙사로 찾아왔다. “문영이 있구나. 내가 좀 늦었구나. 아직 밥먹기 전이지? 오늘은 ‘3.8절’이니 상점에 가서 물만두나 빚어먹자꾸나.” “어머니, 전 괜찮아요. 기숙사식당에도 밥이 있는데요 뭘…” “얘, ‘3.8절’날에 왜 고독하게 기숙사식당에서 밥을 먹겠니? 자, 그러지 말고 함께 가자꾸나. 오후에 수업도 없다면서…” “그런데…” 문영이는 함께 기숙사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던 얘들을 돌아 보았다. 그러자 순자는 눈치를 인차 알아 차렸다. “너, 저 애들 때문에 그러는구나. 그럼 저 애들도 함께 데리고 가면 될게 아니냐?!” “어머니 정말요?…” 문영이는 기쁜 나머지 순자의 목을 끌어 안고는 볼에 입을 맞추었다. ▲북해상점서 한족딸 문영이와 장려(안경을 낀 사람 장려임)한테 일본어를 배워주는 김순자(흰위생복을 입은 사람 김순자임) 그 날 문영이와 몇몇 가난한 집의 자녀들은 “북해상점”에서 순자가 만들어준 물만두와 몇가지 맛있는 밑반찬과 볶음채를 먹으면서 “3.8절”을 기념했다. 음식을 다 먹자 천진난만한 여자애들은 자기네들이 보고들은 학교얘기와 기타 사생활을 화제에 올리며 웃고 떠들었다. 그와 중 어느 한 애가 학교과목 중 일본어가 배우기 가장 힘들다고 했다. 이에 문영이도 한마디 동조했다. “그래 나 역시 일본어가 힘들긴 마찬가지야. 선생님들이 말하기를 발음상에서 조선족들은 일본어를 배우기가 쉽대. 한족은 영어를 배우기가 쉽고 말이야.” 순자는 설겆이를 하다가 엉결에 그 애들이 주고 받는 말을 엿들었다. “얘 문영아, 일본어가 배우기 힘들다구?” “그래요, 어머니. 가장 힘든 것이 일본어예요.” “음, 그랬구나. 그럼 진작 이 엄마한테 얘기할 것이지.” “뭐예요?! 그럼 어머니가 일본어를 배워줄 수 있다는 말씀이세요?” “그래 그래, 안믿어?! 이래뵈두 난 해방전 일본인이 교장하는 학교에서 전문 일본말로 대화하며 공부한 사람이란 말이다. 일본어를 모른다면 아주 섭섭한 일이지.” “야 ㅡ 정말……” 여자애들은 탄성을 올렸다. 그도 그럴 것이 순자가 한 말은 결코 제 자랑을 늘여놓는 것이 아니었다. 소학교 시절의 6년간 일본의 노화교육을 받았던 그는 일본어의 회화나 문자 실력이 당시 연변 내의 웬간한 일본어 교원은 뺨칠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때로부터 순자는 상점벽에 자그마한 흑판 하나를 걸어 놓고는 문영이를 비롯한 몇몇 위생학교 학생들한테 일본어를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가 순자의 일본어실력은 대단했다. 한낱 평범한 가정주부로만 여겼던 순자한테 그렇듯 놀라운 일본어 실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문영이와 기타 학생들은 모두가 깜짝 놀라면서 틈만 나면 순자한테로 찾아와서 모를 것을 물어보군 하면서 열심히 일본어를 배우군 했다. 순자의 보충교수로 문영이를 비롯한 애들의 일본어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제고돼 갔다. 문영이는 순자와 자기 자신의 인생이 함께 엉키게 된데 대해 진정으로 고마움을 금할 수 없었다. 만약 하늘에 하느님이 있다면 문영이는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배려라고 인정하고 싶기도 했다. 연변위생학교ㅡ “북해상점”ㅡ 김순자어머니ㅡ그리고…만약 자신의 인생에 연변위생학교, “북해상점”과 김순자어머니가 개입되지 않았더라면 과연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되였을까 하고 문영이는 자주 반문해 보기도 했다. 한편 문영이는 조선족어머니의 사랑과 도움에 고마워하는 마음만을 가지고 있을뿐만 아니라 뭔가 어머니한테 해드리고 싶었다. 그러는 것으로 어머니가 기뻐하게 해드리고 싶었는데 그것이 후날 문영이가 작가로 되는 취지가 되기도 했다. 평소에 그림그리기를 즐겼고 또 어느 정도 “미술자질”을 갖추고 있었던 문영이는 조선족어머니를 노래하는 첫 스타트로 “꿈속의 어머니”란 제목으로 된 그림 한장을 그렸다. 홀로 상상해서 그렸으니 어떻게 보면 이는 창작이기도 했다. 그림속에는 술병, 간장병과 기타 상품들이 있는 가운데 새하얀 위생모자를 쓴 순자가 벽에 걸린 작은 흑판을 이용하여 학생들한테 일본어를 가르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림의 수준을 떠나 그 속에는 순자에 대한 문영이의 고마움과 애정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4 “3.8절”이 지난 후 3일 뒤, 이른 봄이었지만 그날은 날씨가 제법 더웠다. 그 날 물건구입을 나갔던 순자는 행인들의 옷차림과 자신의 옷차림을 비교해 보고는 깜짝 놀랐다. 아직도 겨울옷을 걸치고 있는 자신과는 달리 행인들 거의 모두가 가볍고도 환한 봄철 옷으로 단장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연길복무청사 냉면부의 출입문으로 사람들이 삼삼오오 줄지어 들어가고 있었다. 날씨가 더워오자 목에 갈증이 생기면서 냉면생각들이 난 모양이었다. 순간 순자는 또 문영이가 생각났다. 문영이를 보지 못한지도 사흘이나 되었던 것이다. 그 동안 기숙사밥으로 끼니를 에우며 공부를 하고 있을 문영이를 생각하니 가슴이 또 알짝지큰해났다. 순자는 문영이한테 냉면 한그릇 사먹이고 싶었다. 시계를 보니 별로 늦지는 않았다. 순자는 종종걸음으로 문영이의 기숙사로 향했다. 기숙사에는 마침 문영이가 있었고 점심밥을 먹기 전이었다. “문영아, 오늘 무척 덥구나. 나와 함께 냉면 한그릇씩 먹지 않을래?” “냉면?! 어머니 저한테 냉면 사줄래요? 오케이, 야 신난다. 오늘 냉면 먹게 됐구나!” 키만 컸지 문영이는 여전히 애나 다름이 없었다. 냉면을 먹는다고 하니 그렇게 뛸듯이 좋아하는 문영이를 보며 순자는 저런 철부지를 두고 에미가 어떻게 눈을 감았느냐 싶었다. 순간 또 가슴이 뭉클해 나며 눈물이 나왔다. 하긴 기숙사생활을 오래 하노라면 어른들도 항상 속이 출출한 법이라 이는 결코 문영이가 철부지래서만이 아니었다. 미구하여 함께 복무청사 냉면부에 들어가 사람들 속을 비집고 겨우 식탁에 마주앉은 순자와 문영이ㅡ 헌데 순자는 문영의 몫으로 냉면 한그릇만을 샀다. “어머니, 왜 한그릇만 샀어요? 어머니는요?” “기실 난 아까 나왔던 김에 한그릇 먹었다. 미안하다. 혼자서 먹다가 그만 네생각이 나서 너한테로 간거다. 어서 먹어라.” “그랬어요? 기실 전 안먹어도 괜찮은데…” 문영이는 순자의 말을 그냥 그대로 믿었다. 쫄깃쫄깃한 냉면오리와 시원한 냉면국물, 정신없이 맛있게 먹고 있는 문영이를 바라보는 순자의 마음은 흐뭇하기만 했다. 그러나 두눈에는 이슬이 맺혔다. “어머니, 울잖아요? 왜 그래요, 어머니?” “아니다. 네가 먹는 걸 보니까 흐뭇해서 그런다. 앞으로는 냉면이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이 엄마한테로 오거라.” 천진한 문영이는 오늘 어머니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으나 그렇다고 점심을 굶어가며 자기한테 냉면을 사주고 있다는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였다. 그 날 문영이한테 냉면을 사먹이다 보니 순자는 손님이 가장 많이 들이닥칠 점심시간에 상점문을 닫아야만 했다. 하루 매출액이 100여위안이라 할 때 점심시간에 그 50% 이상의 매출액은 그 시간에 올려야 한다는 것은 모든 상점주인들이 다 알고 있는 상업법칙이다. 그렇게 말하면 그 날 순자는 주먹구구로 아무리 적게 계산해도 70원 정도는 적게 번 셈이었고 또한 적지 않은 단골을 다른 상점에 빼앗길 수도 있었다. 아니나 다를가 후에 단골로 “북해상점”에 드나들던 맥주애호가 몇몇이 그 날 점심에 찾아왔다가 그냥 돌아섰다며 섭섭해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생필품을 사러 다니는 위생학교 교직원과 학생들과 그냥 길가다 찾아들어오는 행인손님들, 그 날 순자가 놓친 손님은 과연 얼마나 되였을까? 하지만 문영이한테 냉면을 사먹인 것에 대해 순자는 꼬물만치도 후회가 없었다. 아니, 자기가 문영이한테 등한히 대한 적이 있을가봐 항상 신경을 기울였으며 2-3일만 문영이를 보지 못해도 얘가 앓지나 않는가 하고 마음을 졸이군 했다. 그랬다. 순자가 문영이에 대한 사랑은 친 딸들에 대한 사랑 그 이상에 달했다. 이는 그 사랑을 직접 받고 있는 문영이 자신도 다는 알 수가 없었으니 타남들이야 그것을 알아줄리 더욱 만무했다. 사례로 한가지만은 꼭 적고 싶다. 그해의 여름, 큰 아들과 큰 며느리가 북경으로 출장갔다가 돌아오면서 순자한테 값진 양털적삼, 속내의와 신 등을 기념으로 사왔다. 이런 옷과 신 등은 평소에 순자가 별로 보지도 못하던 것들이었다. 좋은 옷을 보면 입고 싶어하는 것이 여성들의 천성이라고 할까? 순자도 마찬가지었다. 아들 며느리가 사다준 옷을 입어보고 신을 신어보고 하던 순자는 기쁘기 한량 없었다. “고진감래(苦尽甜来)”라고 자식들 효도에 이젠 복을 누리는가 싶었고 또한 옷이 날개라고 그 옷을 입으니 20년은 더 젊어 보이기도 했다. 순자는 그 옷을 입고 거울앞에서 이리 저리 비춰보기도 했다. 결혼한 뒤 수십년간 영감한테서는 이런 옷을 한번도 선물받아 본 적이 없었는데 자식한테서 이런 복을 받아 보다니 어쩐지 꿈만 같았다. 하지만 이는 한순간에 불과했다. 또 문영이가 뇌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그 애는 지금 한창 피여나는 꽃나이인데 반반한 옷 한벌 없지 않은가?!) 순자는 아쉬운대로 입었던 새옷을 벗어 다시 포장했다. 순자는 문영이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어느 날 그가 나타나자 아들 내외한테서 선물받은 옷을 내놓았다. “어머니, 이게 뭔가요?” “너 큰 오빠네 내외가 북경에 갔다가 나한테 선물로 사온 것이다. 아마도 네한테 어울릴 것 같아서다.” 그러자 문영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뒷걸음질을 쳤다. “어머니, 전 받을 수 없어요. 어머니한테 선물한 것을 제가 어떻게 받아요.” “얘, 큰 오빠가 뭐 남이냐? 그리고 기실 그 옷들이 너무 환해서 나한테는 좀 어울리지도 않는다.” 순자는 짐짓 맘에 없는 말을 했다. 순자는 막무가내로 옷과 신 등을 문영이한테 밀어맡겼다. 기실 문영의 얼굴에는 기뻐하는 기색이 역연했다. 그러면서도 짐짓 그 심정을 감추는 모양이었다. “어머니, 제가 어머니한테서 자꾸 이렇게 받기만 해서 어떡해요. 전 어머니한테 아무 것도 해드린 것이 없는데…” “아직 나이도 어리고 앞날이 창창한데 앞으로 왜 기회가 없겠느냐! 그리고 이 엄마가 널 해주는 건 너한테서 뭘 보답받기 위해서가 절대 아니란다.” “어머니ㅡ” 문영이는 재차 순자의 목을 끌어 안으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다음기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5-03-23
  • 중국과 세계에 영향력을 미친 마오저둥의 예언
    “학문이 있다는것은 마치 높은 산에 올라 남보다 더 많이 더 멀리 바라볼수 있는 것과 같으며 학문이 없다는것은 마치 암흑속에서 걷는 것과 같이 한치앞을 바라보기조차 힘들다! 마오저둥” 마오저둥의 예언은 억측이 아니였다. 우연의 일치는 더구나 아니였다. 그것은 풍부한 실천경험과 연박한 지식 그리고 비범한 통찰력과 현실속에 깊이 침투해 조사하고 연구하고 분석하고 판단하면서 쌓은 경험적 결론이였다. 중국공산당제7차전원회의에서 마오저둥은 이같은 발언을 했다. “지휘대에 올라서서 아무것도 보아내지 못한다면 그는 진정한 영도가 아니다. 지휘대에 올라서서 수면우에 드러난 보편적인 상황들만 본다면 이 역시 진정한 영도자가 아니다. 문제가 발생하기전에 바야흐로 일어나게 될 상황들을 예견하고 멀리 내다보며 상황을 파악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영도자이다!” 1916년 7월 25일 예언 “앞으로 20년사이에 중국과 일본간에 큰 전쟁이 있을 것이다!” 1937년 7월 7일, 로구교사변을 알리는 첫 총성이 드디여 항일전쟁의 서막을 열어제꼈고 이 한방의 총소리는 20년전 24살난 한 사범생의 예언이 적중했음을 증명했다. 1919년 7월 21일 예언 “20년후, 프랑스인들에게 골치아픈 일이 생길 것이다!” 그로부터 20년후, 프랑스인민들앞에 크나큰 치욕이 생겼다. 히틀러는1918년에 독일이 투항을 선포한적 있는 바로 그 지점, 같은 기차, 같은 차바곤에서 프랑스가 투항서에 싸인하도록 강요했던 것이다. 1919년 7월 28일 예언 “일본과 독일은 세계적인 화를 불러올 것이다!” 마오저둥은 놀랄만한 관찰력으로 일본과 독일의 관계를 속속들이 꿰뚫고 있었다. 그는 장장 20년을 앞당겨 “추축국( 心 )”의 2대 파쑈마왕들이 한통속이 되여 세계에 위해를 끼치게 될 것을 예견했다. 제2차세계대전의 폭발이 바로 이러한 예언의 철같은 립증으로 되였다. 1933년 11월 예언 “우리는 제5차 포위토벌을 막을 절호의 기회를 잃게 될 것이다!” 장개석이 중앙쏘베트지구를 상대로 제5차 포위토벌을 발동하고 있을 때 마침 마오저둥은 정치생애의 궁지(低谷)에 처해있었다. 쏘베트구역과 홍군의 안위를 위해 마오저둥이 계략을 내놓았지만 중앙에서는 결국 마오저둥의 의견을 채납하지 않았다. 따라서 “제5차 포위토벌”을 막을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리게 되였던 것이다. 1934년 12월 12일 예언 “적들이 준비해둔 ‘주머니’속에 기여들어가서는 안된다! ” 마오저둥은 “주머니”전문가이다. 그는 항상 계략의 주머니를 풀어 장개석이 스스로 기여들어오도록 했었다. 그런 그가 어찌 달갑게 장개석이 풀어놓은 주머니에 기여들어간단 말인가! 류백승이 말했다. “마오저둥의 지략이 없었더라면 당시 3만홍군의 앞길은 훼멸밖에 없었을 것이다.” 1935년 5월 24일 예언 “석달개가 뚫지 못한 길, 우리가 반드시 뚫고만다!” 태평천국은 증국번(曾 藩)이 이끄는 상서군의 수하에 의해 최종패배를 당했다. 장개석은 증국번을 아주 숭배했는데 늘 증국번을 모방하기를 즐겼다. 장개석은 마오저둥이 “제2의 석달개”로 되기를 바랐지만 마오저둥은 홍군을 령솔해 겹겹한 포위를 뚫고 석달개가 뚫지 못한 길을 뚫는데 성공했다. 1935년 9월 예언 “남하하는것은 출로가 없다. 1년후 당신들은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마오저둥과 장국도(   )는 함께 “중국공산당제1차대표대회”에 참석한적 있는 원로이다. 이들은 장정의 길에서 회합한후 다시 두갈래로 갈라져 각기 제 갈길을 갔다. 장국도와의 분렬로 인해 마오저둥은 장개석의 포위권을 뚫고난후 일생중 가장 암흑했던 시기를 보냈다. 1936년 10월 9일, 홍군의 3대주력이 합류하고 장정은 결속되였다. 1936년 7월 15일 예언 “중국은 독립된후 대규모로 외자를 끌어들일 것이다!” 새중국이 건립된후 처음으로 끌어들인 외자는 쏘련정부에서 제공한 정보대부금 3억딸라였다. 그후 중국인들은 국제적채무를 갚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마오저둥의 영명한 예견은 후일 등소평에 의해 실현되였다. 1994년, 중국은 이미 세계에서 미국에 이어 두번째로 외자를 많이 보유한 국가로 성장했다. 1938년 5월 예언 “중국의 항전은 7~8년이 소모될것이다!” 성사원의 회억에 의하면 마오저둥의 《지구전을 논함》이라는 문장이 발표되기전, 주은래는 이미 문장의 기본정신을 백숭희에게 소개했다. 백숭희는 문장을 높이 평가하면서 이는 적을 물리치고 승리를 이끌어내는데 있어서 최고의 전략방침으로 될 것이라고 했다. 《지구전을 론함》을 두고 백숭희는 “작은 승리를 모아 큰 승리를 이끌어내고 공간을 시간으로 바꾼다.”라고 규납했다. 이는 군사위원회를 통해 전국에 널리 전파되였고 항일전쟁중의 전략적지도사상으로 되였다. 과연 8년의 간고분투끝에 일본은 종국적으로 투항을 선포했다. 1938년 10월 예언 “장백륜은 반드시 돌멩이를 들어 자신의 발등을 깔 것이다!” 2차대전전, 영국의 수상인 장백륜은 정치가의 리성과 상인의 자사자리를 내세워 전쟁미치광이 히틀러를 대처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장백륜이 들어올린 돌멩이는 쏘련인들의 머리꼭대기에 던져진것이 아니라 자신의 발등을 내리친격이 되고말았으며 그의 정치생명도 뿌리채 뽑히우는 격이 되여버렸다. 1939년 9월 23일 예언 “루즈벨트는 미국이 제2차세계대전에 참가하도록 할 것이다!” 연안의 작은 움막에서 마오저둥은 2년이나 앞당겨 미국이 제2차세계대전에 참전 할 것이라는 것을 예견했다. 이는 중국인민들이 항전에 대한 필승신념을 수립하는데 중요한 의의로 되였다. 1959년 3월 16일 예언 “우리 군의 장래 출로는 중원에 있다!” 7년후, 마오저둥은 3갈래 대군을 중원에 파견해 정권쟁탈에 나섰으며 전국적인 전쟁의 승리를 확고히 다졌다. 1942년 7월 2일 예언 “제2전쟁터가 있으면 1년내에 독일을 물리칠수 있다!” 구라파대륙이 제2의 전쟁터를 개척하기만 하면 독일을 물리치는데 1년정도의 시간이 소요 될 것이라는 마오저둥의 예언대로 제2의 전쟁터는 1944년 6월에 개척되였고 독일은 이듬해인 1945년 5월에 패배를 당했다. 1945년 8월 13일 예언 “핵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미국인들이 히로시마(  )에 첫 원자탄을 투척한 7일후, 마오저둥은 단언했다. “원자탄은 결코 전쟁을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마오저둥의 예언은 헛된 것이 아니였다. 오늘날까지 원자탄의 습격을 받은 국가는 일본이 유일한 나라이다. 1949년 12월 9일 예언“향항문제는 협상방법으로 해결 될 것이다!” 40년대부터 마오저둥은 향항과 오문 나아가서 대만문제를 해결할데 관한 기본사로를 세우고있었다. 즉 문제의 해결에 급급해하지 않고 향항과 오문의 력사와 현상태를 충분히 존중하는 전제하에서 협상을 통해 평화공존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이였다. 오늘날, 향항과 오문이 순조롭게 회귀한 것은 마오저둥의 영명한 예견을 잘 반영하고있다. 1949년 3월 예언 “일부 공산당원들은 사탕포탄앞에 무너질 것이다!” 1952년 2월 10일, 사탕포탄의 유혹을 못이긴 류청산, 장자선이 드디여 정의의 총구앞에 쓰러졌다. 이는 수십년이 흐른 현재까지도 부패를 반대하고 청렴을 창도하는 전형으로 손꼽히고있다. 1955년 1월 15일 예언 “기본립자도 분해할수 있다!” 물리학에 대한 깊은 연구는 없었지만 마오저둥은 신기하에도 20년후 물리학의 발전추세를 예측했다. 1978년, 하와이에서 거행된 “제7기 세계립자물리학토론회”에서 노벨물리상획득자는 기본립자의 이름을 “모립자”로 지을 것을 제의했다. 1956년 6월 예언 “높은 협곡은 호수에서 시작된다!( 高 出平湖)” 마오저둥은 장강삼협에 관한 전망계획을 세웠지만 자신의 예언이 실현되는것을 보지 못한채 서거되였다. 1992년 4월 3일, 제7기인민대표대회 제5차회의에서는 절대적인 우세로 “삼협공사의안”이 통과되였다. 현재 삼협공사는 시공중에 있다. 1958년 6월 21일 예언 “원자탄, 수소탄, 대륙간유도탄은 10년내에 만들어낼수 있을것이다!” 1960년, 쏘련에서 전문가를 철수하고 설계도를 가져가자 일부 외국인들은 “중국은 20년사이에 아무런 원자탄도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하지만 중국은 10년사이에 원자탄뿐만아니라 수소탄, 중성자탄까지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1958년 9월 5일 예언 “대고락이 나서면 좋은 점이 있을 것이다!” 대고락(戴高 )은 경상적으로 프랑스의 해외식민정책을 위해 변호하며 적극적으로 랭전을 추동한 장본인이다. 때문에 국제여론은 보편적으로 이같은 정치국면의 변화에 의해 구라파가 우회전할것이라고 인정했지만 마오저둥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대고락이 나섬으로 하여 구라파중립주의의 발전을 추동하고 구라파가 미국을 떨쳐버릴수 있다고 단언했다. 역사의 발전은 드디여 마오저둥의 이같은 예언을 실증했다. 1962년 1월 30일 예언 “중국이 세계선진국을 따라잡는데는 백여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마오저둥이 1962년 “7차인민대표대회”에서 예견했던 발전속도는 제2대 영도자가 제정한“3보(三步走)”전략과 묘한 일치를 가져왔다. 동포투데이 편집국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5-03-21
  • 신념 하나로 살아온 파란만장한 인생길
    ■ 리강춘 (중국 왕천현) 나는 이 세상에 “남자”로 태여나 가정에서는 기둥으로, 안해에게는 훌륭한 남편으로, 자식에게는 떳떳한 아버지가 되려는 굳센 신념 하나로 다른 사람이 상상도 못할 파란만장한 인생길을 힘들게 걸어왔다. 1980년 1월 22일 아침, 음악교원으로 있던 나는 갑자기 건 피소변이 나가면서 아래배가 아파 연변병원에 호송되여 수술대에 올랐다. 29세 꽃나이에“악성방광암말기”라는 진단을 받을줄이야. 매일 체온이 40도로 오르내리고 동통을 참다 못해 헛소리를 치다가는 혼수상태에 빠지군 했다. 그때 나의 생명은 꺼져가는 불찌와도 같이 가물거렸다. 수술한지 일주일이 지난후 수술실을 뽑으니 응당 아물어야 할 수술자리에서 고름이 왈칵 터져 나왔다. 마취제를 쓰지 않으면 수술자리가 빨리 아문다는 말을 들은 나는 이를 악물고 마취제를 쓰지 않은 대수술을 두번이나 받아냈다. 6개월만에 수술자리가 겨우 아물자 나는 안해한테 업혀 천진시공안병원에 가 한달동안 화학치료를 받았다. 머리가 몽땅 빠지고 체중이 32킬로그람으로 줄어 이 세상에서 남은 시간이 석달밖에 안된다는 “시한부선고”를 받고 고향에 돌아왔다. 7개월만에 고향땅을 밟게된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나보다 안해가 더 기뻐했다.안해는 나를 부축하고 고향땅을 한발자국 두발자국 내 디디며 언젠가? 내가 배원준 노래를 조용히 불렀다.“종다리 울어 예는 하늘아래 진달래 곱게핀 고향이로세...”안해의 은은한 노래소리는 나에게 삶의 희망을 안겨 주었다.갈수록 심산이라고 그 기쁨은 얼마 가지 못하고 비극으로 넘어갔다. 그토록 보고싶었던 딸애가 귀신처럼 변해버린 아버지가 무섭다며 내 곁에 오지도 않았고 밖에 나가 해볕쪼임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남들이 나를 보고 놀라 할가봐 감히 밖에 나가지도 못했다. 할수 없이 나는 안해가 갖추어 주는 도시락을 싸가지고 날이 밝기 전에 마을과 4리나 떨어진 남산 락엽송밭에 가서 하루를 보내다 날이 어두워 캄캄해져야 산에서 내려오군 했다. 두해 여름을 산에서 이름 모를 산나물을 뜯어 먹으며 하루하루 보냈다. 지루하고 고독하고 막막했다. 이제 오래 지나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사라지겠구나 하는 생각에 서러웠고 맹인이나 지체장애자들이 부러웠다. “시한부선고”를 받지 않은 그들이기 때문에... 병마와의 싸움은 점점 악렬했다. 수술자리가 아물지 않아 동통이 심해 맞은 강통정(强痛定)주사에 은이 박혀 하루라도 주사를 맞지 않으면 못 견디는 상황이였다. 나는 왕청현내의 크고작은 향진과 촌툰 위생소를 찾아다니며 손이야 발이야 빌면서 강통정을 사다가 위생실에 주사기를 감추어두고 아침 저녁으로 맞았다. 강통제에 의거해 사는 나는 마약중독자나 다름없었다. 주사를 맞지 않으면 온 몸에 진땀이 줄줄 나고 발광이 나고 닥치는대로 마스고 부수고 했다. 그러던 1983년 8월의 어느날, 왕청현 대흥구진병원의 리동렬원장이 나를 찾아와 “젊은 나이에 이게 무슨 짓이요? 남들은 대수술을 하고도 하루에 주사 한대를 맞으면 그만인데 하루에 열대씩 맞으면 한달도 살지 못하오”하며 강통정(强痛定)을 떼라고 진심으로 권고했다. 그 말에 나는 “암말기”라는 사형진단을 받고도 버티고 일어섰을라니 강통정을 떼다 죽더라도 주사를 떼봐야겠다는 마음을 다졌다. 3년이나 맞아온 강통제주사를 떼자니 쉬운 일이 아니였다. 대흥구병원에 입원한 나는 주사생각이 난다 하면 속이 답답하고 발광이 나면서 맞고있는 링게르를 잡아당겨 복도창문으로 내던져 주사병이 맞은켠 병실벽에 맞아 박산나기도 했다. 환자들은 병 떼러 왔다가 심장병을 얻겠다며 출원하겠다고 야단쳤다. 병원에서는 나를 철침대에 꽁꽁 묶어놓고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고 나는 발광하다 맥이 빠져 쓰러지군 했다. 나는 사내대장부라면 안해를 위해, 자식을 위해 죽지 말고 꼭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아픔과 약중독을 이겨내리라 마음먹고 견디고 또 견뎌냈다. 석달동안의 치료를 거쳐 나는 기적적으로 마약중독에서 벗어나게 되였고 혼 나간 사람처럼 동분서주하면서 강통제를 구걸하던 력사를 종말짓게 되였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우에도 꽃이 핀다고 안해의 정성에 염라대왕이 손을 들었는지 아니면 나의 굳센 삶의 욕망이 기적을 낳았는지? 1986년 2월 나는 건강회복이 빠르고 대체상 치유되였다는 결론을 받았다. 나는 죽지 않고 살았으니 사회, 가정, 안해와 자식을 위해 보람있는 삶을 사는것이 나의 삶의 자세라고 생각했다. 우선 남편을 넘어지지 않게 뒤받침을 해준 안해의 정성에 보답하기 위해 안해를 글로 쓰기로 하고 신문, 잡지에 투고하기 시작했다. 1년동안 26번이나 퇴고를 받으면서 쓴 “나의 안해”라는 실화문학이 “청년생활”, “연변녀성” 등 잡지에 발표되였다. 그때로부터 나는 그렇게 애착해오던 음악을 포기하고 신문보도사업에 발을 들여놓았다. 나의 노력으로 12년째 해마다 기사 수백편이 언론매체에 발표되면서 “흑룔강신문”,“로년세계”,“연변로인의 벗”등 아홉개 신문매체의 특약기자로 초빙되었다. 또한 왕청현 신문보도센터의 주임, 왕청지구통신련협회 부주석,중앙인민방송국 연변조선말방송애청자협회 왕청분회 회장,왕청현음악가협회조선족중로년성악예술협회회장,“연변로인의 벗” 왕청현기자소 소장 등 직무를 맡고 선후로 “길림성우수지원자”,“연변주조선어문사업선진개인”,“연변주후대관심사업선진개인”,“왕청감동인물”,“왕청현로년사업선진개인”,“왕청현민족단결선진개인”등 수많은 영예를 받아안아 왕청현을 대외에 홍보하는 중요역할을 하고 있다.
    • 오피니언
    2015-03-15
  • [김혁 칼럼] 봄 우레
    ●김 혁 (재중동포 소설가, 용정.윤동주 연구회 회장) 1 우레, 여름철 소나기 올 때 하늘에 크게 울리는 소리를 말한다. 대기 중의 방전 현상으로 생기는 큰 소리이다. “울다”의 어간 “울”에 어미 “에”가 붙어서 이루어진 순 우리 말이다. 또 천둥이라고도 하는데 천동(天动)이 변한 말이다. 옛 사람들은 하늘에서 북을 치는 소리가 나는 것 같다고 해서 천고(天鼓)라는 표현도 썼었다. 우레는 장마철이나 여름철에 많고 봄에는 드물다. 그래서 봄우레를 신뢰(新雷)라고도 했다. 연변지역은 비교적 한랭한 기후이니 봄 우레가 우는 경우가 드물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95년전 지금의 연변지역 즉 당시의 북간도에서는 세상을 놀래는 “봄 우레”가 울었다. 2 1919년, 3월1일, 민족자결주의에 자극받아 독립지사들은 경성의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조선 전역을 무대로 성세호대한 반일시위운동을 일으켰다.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온 겨레가 떨쳐 일어 선 이 장거에 연변의 반일지사들은 적극 호응하여 “간도의 서울”인 용정에서 반일시위를 거행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3월 13일, 이른 새벽부터 북간도 각지에서 사람들이 삼삼오오 용정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3만 여명의 민중들이 분분히 대렬을 지어 용정에 도착하였는데 그 광경은 실로 미증유의 장관이었다. 대회에서는 "간도거류조선민족일동" 명의로 된 "독립선언서포고문"을 낭독한 뒤 일본간도총영사관을 향해 나아가며 거리시위를 단행했다. "조선독립만세!", "일제의 침략을 반대한다!", "친일주구를 타도하자!"라는 구호가 용정의 거리와 골목에 우레처럼 메아리쳤다. 시위는 일제의 잔인한 탄압을 받았다. 군경들은 적수공권인 군중들을 향해 무자비하게 발포했다. 이날 일제와 지방군경들의 탄압으로 19명이 피못에 쓰러졌고 48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94명이 체포되었다. 그 후 용정의 각계 인사들은 눈물을 머금고 14명 수난자들을 용정 동남쪽에 있는 합성리 공동묘지에 고히 안장했다. 용정의“3.13”반일운동은 20세기 10년대 북간도 지역에서 거행된 가장 대규모적인 반일시위이다. 학계에서 “해란강의 봄 우레”라고 지칭되는3.13반일운동의 천둥은 북간도는 물론 북만과 남만일대까지 울려퍼지어 앙양된 반일투쟁을 불러 일으켰다. 3.13반일운동과 직결된 인물들은 많고 그중에는 조선민족을 빛낸 여뢰관이 (如雷贯耳 우레소리가 귀를 뚫고 지나는 것 같이 명성이 자자하다) 의 인걸들이 적지않다. 그 몇분을 뽑아보면- 김약연 당시 간도지역의 “대부”로 연변 초기의 이주민 마을인 명동촌의 지탑을 잡고있던 그는 조선에서 “3.1”운동이 일자 연해주로 파견되여 갔다. 연해주에서 김약연은 각지에서 파견 되여온 독립지사들과 회합하여 독립선언서의 작성과 그 선포에 관한 합의를 하고 용정반일시위를 기획하였다. “3.13”반일시위가 일제에 탄압을 받은 후 조직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는 이를 빌미로 2년간의 옥살이를 하였다. 북간도 지역의 초기의 근대 교육학교인 명동학교를 세운 그이는 민족시인 윤동주의 외삼촌이기도 하다. 림민호 반일시위가 일던 날 대회장 가녁의 교회당 첨탑 위에 올라가 구경하고 있던 한 소년이 교회당의 종소리를 울렸고 그 종소리와 함께 대회가 시작되었다. 종소리를 울려 성세호대한 반일시위를 촉발시킨 그 홍안의 소년이 바로 후일 연변대학의 총장으로, 조선족교육의 정초에 크게 기여를 한 림민호 총장이었다. 한낙연. 근대 중국미술발전사와 중국현대혁명사에서 선구자적 위치를 자리매김하여 “중국의 피카소”라 지칭되고 있는 그는 당시의 반일시위에 적극 동참하여 대회에 사용 될 기발을 만들고 프랑카드를 써서 대회장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시위자들과 함께 반일과 민족독립을 위해 한 목청을 높였다. 3 조선후기의 대실학자 다산 정약용(丁若鏞)이 탁월한 승려인 혜장을 높이 치하하여 지은 시가 있다. 그 명성이 우레처럼 크게 떨쳐 사방의 호걸들이 얼굴보기를 원했지 해란강반에서 반일의 봄우레가 터진 3.13반일시위가 어언 96돐을 맞았다. 이날을 계기로 또 한번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한 몸 바친 인걸들의 “여뢰관이”한 이름을 크게 새기며 망각과 무심으로 안일했던 마음 들을 들깨우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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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12
  • [인물탐구] 윤동주의 소울메이트 송몽규
    ●김 혁 (재중동포 소설가, 용정.윤동주연구회 회장) 올 2월 16일은 민족시인 윤동주 옥사 70주기이다. 그리고 3월 6일은 윤동주가 후쿠오카 일제 형무소에서 한줌의 재로 스러져 고향 용정에 돌아와 장례가 치러진 날이다. 그러면 윤동주의 고향집에서 장례가 치러진 이튿날인 3월 7일은 무슨 날이였을까? 바로 송몽규가 일제 감옥에서 옥사한 날이다. 막상 송몽규하면 누구? 하고 흐릿한 기색을 짓는 이가 많다. 하지만 그와 관련된 한 인물의 이름을 거론하면 사람들은 그제야 아! 하고 송몽규라는 인물에 대해 얼추잡아 깨닫게 된다. 송몽규는 바로 윤동주의 고종사촌형이다. 송몽규의 생애에 대해서는 한국의 소설가이자 사학가인 송우혜가 “윤동주 평전”을 집필하면서 일목료연하게 정리한바가 있다. 그는 송몽규와 인척지간으로서 송몽규의 조카이기도하다. 또 지난 2011년 7월, 일본 교또 검찰청은 송몽규의 재판 판결문을 최초로 전격 공개하였는데 그 기록에서도 우리는 송몽규의 행적을 세세히 살펴볼수가 있다. 꿈꾸는 별, 태여 나다 1917년 파평 윤씨네 가문에서는 겹경사가 났다. 가문의 어른인 윤하현(尹夏鉉, 1875-1947)은 외아들 영석(永錫, 1895-1962)과 딸 신영(信永, 1897-?), 신진(新眞) 둘을 두었는데 명동촌 친정 집에 얹혀있던 큰 딸 신영이가9월 28일 아들애를 낳았고 외아들 영석이네가 12월 30일 또 아들애를 보았던것이다. 석달을 차이두고 태여난 그들이 바로 송몽규와 윤동주이다. 송몽규는 윤동주의 동갑내기 고종사촌형이 된다. 그들은 다섯살이 될 때까지 한 집에서 자랐다. 송몽규는 1917년 9월 28일, 북간도 명동촌에서 명동학교 조선어 교사이던 송창희(宋昌羲, 1891~1971)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송몽규 가문은 본적이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읍 웅상동이다. 송몽규의 할아버지 송시억(宋始億)은 15세 때에 충청도로부터 연해주로 가다가 그 길목인 웅상에 머물러 가세를 일으켰다고 한다. 아버지 송창희는 웅상에서 서울에 류학하여 신교육을 받았다. 송씨 문중은 웅상동에 “북일학교(北一)”라는 교육기관을 세워 자제들 교육을 담당했다. 그들 가문에는 독립운동에 투신했거나 류학을 떠난 사람이 많았다. 송몽규의 삼촌인 송창빈은 홍범도 부대 소속의 독립군으로 싸우다가 1920년에 전사했고 송창근은 일본을 거쳐 미국에 류학하여 1931년에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미국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송창희는 25세에 미혼의 청년으로 명동에 오게 되였다. 송창희는 체격과 인물이 아주 뛰여난 사람이였다. 이런 그를 윤동주의 어머니가 보고 이미 적령기의 규수가 된 큰시누이의 신랑감으로 욕심이 났다. 그래서 집에 가서 이야기했다. 이에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 장로는 서둘러서 자기의 큰딸과 선을 보게 만들어 두 사람을 결혼시켰다. 송창희는 결혼하자 윤장로 댁에서 처가살이를 했다. 동시에 명동학교에 교사로 부임하게 되였다. 학교에서 그가 가르친 과목은 조선어와 양잠이였다. 송창희 선생은 명동소학교 교사를 거쳐서 나중에는 7도구(七道溝)소학교 교장을 지냈고 송몽규가 윤동주와 함께 서울 연희전문에 다닐 무렵에는 대랍자촌(大拉子村)의 촌장을 지냈다. 늘 입에는 파이프 담배를 피워물고 조선인이라기보다는 서구사람처럼 이목구비가 컸던 송창희는 성품이 엄해서 명동학교 생도들 간에 “송호랑이”로 불리웠다고 한다. 하지만 몹시 애처가였고 자식들을 극진히 사랑했다. 문과로 진학하겠다는 동주를 억지로 의과로 진학시키려고 했던 윤씨가문에 비해 그는 “아이들은 그들의 의향대로 키워주어야지 부모 욕심으로 키우려면 안된다”면서 몽규의 의도를 늘 존중했었다. 대바르며 너그러웠던 아버지의 애대속에 구김없이 자라난 송몽규는 아이들중에서 단연 돋보였다. 문학소년이면서도 대범한 성격을 갖고 있고 어려서부터 무서운 활동가의 재질을 보인 야무진 소년이였다. 소학교 5학년때 동주등과 “새 명동”이란 등사판 문예지를 발행했고 성탄절이면 연출 선생님을 모시고 연극을 하곤 했는데 그런 때에도 몽규가 선두주자로 나서 애들을 휘동하곤 했다. 부끄럼 잘 타고 조용한 윤동주와 활달하고 대범한 송몽규는 성정미가 판다르게 대조적이였지만 타고난 혈연 그리고 의기투합으로 서로를 포옹하면서 어릴 적부터 삶과 문학을 거의 같이 했다. 1925년 여덟살인 송몽규는 윤동주, 문익환 등과 함께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곳에서 교장이자 외숙부였던 김약연 선생의 훈도아래 철저한 반일교육을 받았다. 두 사람이 문학에 뜻을 둔것은 바로 명동소학교 시절이였다. 4학년때 송몽규는 서울의 월간잡지 “어린이”를 구독하고 윤동주는 “아이 생활”을 구독하였다.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송몽규는 윤동주와 함께 달라자에 있는 당시 화룡현립 제1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1년동안 한족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소학교 학생의 나이로 말하면 매일 밟아야 하는 20여리라는 등교길은 힘에 부치는 거리였다. 그런 산길을 둘이는 함께 매일이고 걸었다. 윤동주 가(家)는 1931년 늦가을 룡정으로 이사하게 되고 윤동주와 송몽규는 1932년 4월 봄 은진(恩眞)중학교에 함께 입학한다. 이때에도 송몽규는 윤동주네 집에 얹히게 된다. 어린 나이에 서울문단에 등단하다 은진중학교 시절의 송몽규는 상당히 조숙한 문학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다. 문단 진출도 남보다 빨랐다. 송몽규는 1934년 12월 은진중학 3년생으로 열여덟 어린 나이에 서울의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꽁트 부문에 응모한다. 송한범(宋韓範)이란 아명으로 응모한 작품인 꽁트 “술가락”이 당선되여 간도사람들을 놀래웠다. “술가락(요즘 표기로는 숟가락)”이란 제목의 이 꽁트는 가난한 부부의 애환을 그린 것인데, 몽규의 아명은 “한범(韓範) “이다. 집에서는 물론이고 은진중학교 시절까지 학교에서도 ”한범”이란 이름을 사용했다. “몽규(夢奎)”는 이름 뒤자에 별 규(奎)자를 쓰는 집안 항렬을 따라 지은 이름이다. 그의 어머니가 꿈에 큰 별을 보고 그를 낳은 데서 꿈 몽(夢)자를 쓰게 되였다고 한다. 신춘문예에도 송몽규는 아명으로 투고했다. 그래서 작가의 이름이 송한범으로 표기되여 있다. 우리의 청년문사의 문재를 흔상해 보고자 “술가락"을 전문을 당시 표기법 그대로 옮겨본다. 술가락 송몽규 우리부부는 인제는 굶을 도리밖에 없엇다. 잡힐 것은 다 잡혀먹고 더잡힐 것조차 없엇다. 「아- 여보! 어디좀 나가 봐요!」 안해는 굶엇것마는 그래도 여자가 특유(特有)한 뾰루퉁한 소리로 고함을 지른다. 「………」 나는 다만 말없이 앉어 잇엇다. 안해는 말없이 앉아 눈만 껌벅이며 한숨만 쉬는 나를 이윽히 바라보더니 말할 나위도 없다는 듯이 얼골을 돌리고 또 눈물을 짜내기 시작한다. 나는 아닌게 아니라 가슴이 아펏다. 그러나 별 수 없었다. 둘 사이에는 다시 침묵이 흘럿다. 「아 여보 조흔수가 생겻소!」 얼마동안 말없이 앉아 잇다가 나는 문득 먼저 침묵을 때트렷다. 「뭐요? 조흔수? 무슨 조흔수란 말에 귀가 띠엿는지 나를 돌아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아니 저 우리 결혼할 때… 그 은술가락말이유」 「아니 여보 그래 그것마저 잡혀먹자는 말이요!」 내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안해는 다시 표독스운 소리로 말하며 또 다시 나를 흘겨본다. 사실 그 술가락을 잡히기도 어려웟다. 우리가 결혼할 때 저- 먼 외국 가잇는 내 안해의 아버지로부터 선물로 온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 술가락과 함께 써보냇던 글을 나는 생각하여보앗다. 「너히들의 결혼을 축하한다. 머리가 히도록 잘 지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는 이 술가락을 선물로 보낸다. 이것을 보내는 뜻은 너히가 가정을 이룬뒤에 이술로 쌀죽이라도 떠먹으며 굶지말라는 것이다. 만일 이술에 쌀죽도 띠우지 안흐면 내가 이것을 보내는 뜻은 어글어 지고 만다.」 대개 이러한 뜻이엇다. 그러나 지금 쌀죽도 먹지 못하고 이 술가락마저 잡혀야만할 나의 신세를 생각할 때 하염없는 눈물이 흐를 뿐이다마는 굶은 나는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없이 「여보 어찌 하겟소 할 수 잇소」 나는 다시 무거운 입을 열고 힘없는 말로 안해를 다시 달래보앗다. 안해의 빰으로 눈물이 굴러 떨어지고 잇다. 「굶으면 굶엇지 그것은 못해요.」 안해는 목메인 소리로 말한다. 「아니 그래 어찌겟소. 곧 찾아내오면 그만이 아니오!」 나는 다시 안해의 동정을 살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없이 풀이 죽어 앉어잇다. 이에 힘을 얻은 나는 다시 「여보 갖다 잡히기오 발리 찾어내오면 되지 안겟소」 라고 말하엿다. 「글세 맘대로 해요」 안해는 할 수 없다는 듯이 힘없이 말하나 뺨으로 눈물이 더욱더 흘러내려오고잇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전재산인 술가락을 잡히기에는 뼈가 아팟다. 그것이 운수저라 해서보다도 우리의 결혼을 심축하면서 멀리 ××로 망명한 안해의 아버지가 남긴 오직 한 예물이엇기 때문이다. 「자 이건 자네 것 이건 자네 안해 것-세상없어도 이것을 없애서 안되네」 이러케 쓰엿던 그 편지의 말이 오히려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런 숟가락이건만 내것만은 잡힌지가 벌서 여러달이다. 술치 뒤에에는 축(祝)지를 좀 크게 쓰고 그 아래는 나와 안해의 이름과 결혼 이라고 해서(楷書)로 똑똑히 쓰여잇다. 나는 그것을 잡혀 쌀, 나무, 고기, 반찬거리를 사들고 집에 돌아왓다. 안해는 말없이 쌀음 받어 밥을 짓기 시작한다. 밥은 가마에서 소리를 내며 끓고잇다. 구수한 밥내음새가 코를 찌른다. 그럴때마다 나는 위가 꿈틀거림을 느끼며 춤을 삼켯다. 밥은 다되엇다. 김이 뭉게뭉게 떠오르는 밥을 가운데노코 우리 두 부부는 맞우 앉엇다. 밥을 막먹으려던 안해는 나를 똑바로 쏘아본다. 「자, 먹읍시다.」 미안해서 이러케 권해도 안해는 못들은체 하고는 나를 쏘아본다. 급기야 두 줄기 눈물이 천천이 안해의 볼을 흘러 나리엇다. 웨 저러고 잇을고? 생각하던 나는 「앗!」하고 외면하엿다. 밥 먹는데 무엇보다도 필요한 안해의 술가락이 없음을 그때서야 깨달앗던 까닭이다. 마치 단편소설의 대가 오. 헨리의 작품을 읽는듯한 기분이다. 당선작품의 소재와 기법이 제법 성숙되여 지금 읽어도 그 구성이나 반전의 솜씨가 절묘하게 느껴진다. 당시 이주민들이 모여든 중국 변강의 오지- 룡정촌에서 서울의 신춘문예에 그것도 학생의 신분으로 당선된다는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였다. 당시 여러 신문의 신춘문예를 통해 당선된 이들은 황순원, 서정주, 김동리와 같은 그후 한민족 문학을 이끈 기라성과 같은 작가들이였다. 윤동주보다 빠른 문단 진입이였고 이는 윤동주에게 큰 자극이 되였다. 몽규의 수상을 축하해주면서 윤동주는 “아, 나는 아직 멀었구나. 대기만성이라는 말도 있는데…” 하고 부러운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 동주는 몽규를 친겹게 여기고 그의 뛰여난 장점들을 자기 발전의 자극으로 삼았다. 무엇보다도 일찍 민족의식에 눈뜨고 반일에 몸소 투신하는 몽규를 자랑스러워하고 본받으려 하였다. 독립군관학교를 찾아가다 어린나이에 경성의 문단에 등단하여 학교와 고향 사람들을 놀래웠던 송몽규는 어느 날 문뜩 그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결연히 민족독립운동으로 향하는 길에 애젊은 몸을 던진것이다. 송몽규는 1935년 4월에 중국으로 건너갔다. 3월에 은진중학교 제3학년을 수료하고 나서 4학년으로 진급하지 않고 그대로 중국으로 건너간 것이다. 송몽규는 당시 은진중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치시던 민족주의자 명희조(明羲朝)선생의 영향을 받고 이 길에 오른 것이였다. 명선생은 도꾜 제대에서 동양사를 전공한 이로서 당시로는 은진중학에서 최고 학벌의 선생이였다. 소동파의 ”적벽부”와 같은 고문도 술술 강의하곤 했는데 한문의 대가였고 그의 동양사와 국사 강의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송몽규, 윤동주등은 명희조 선생을 통해 우리 민족이 처한 현실과 나아갈 방향 등에 대해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송몽규는 어렵게 중국의 내륙으로 들어가 백범 김구선생이 주도하는 림시정부 락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 2기생으로 입학하게 된다. 그러면 북간도 룡정촌에 있던 송몽규는 어떻게 낯설고 물설고 언어까지 통하지않는 수천리밖 군관학교의 존재를 알고 거기에까지 찾아 갔던것일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송우혜가 송몽규의 은진중학교 1년 선배이자 락양군관학교 제2기 동기생인 라사행을 취재하면에서 밝혀 내였다. 1914년 평안남도 개천에서 출생한 라사행(羅士行) 역시 역시 1935년 4월에 락양군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룡정에서 무작정 락양을 향해 떠났었다. 거기서 라사행은 송몽규를 만났다고 한다. 아래는 송우혜와 라사행의 문답으로 된 락양군관학교에 대한 증언이다. (“윤동주 평전” 송우혜 지음. 2004년 푸른력사 펴냄) 송우혜: 락양군관학교 이야기는 언제 어떤 경로로 듣게 되셨습니까? 라사행: 제1기생이 교육받고 있던 1934년 당시, 나는 은진중학교 4학년 졸업반이였지요. 그때 우리 력사선생이던 명희조 선생께서 우리들에게 “그런 군관학교가 생겼고 우리 학교 출신중에서도 거기 간 사람이 있다”고 하셔서 알게 되였습니다. 이미 1기생중에 은진 출신이 가 있었던거지요.” 가는 길에 일본측의 취체가 굉장히 심했습니다. 그때는 이미 북경 근처인 천진에까지 일본 군대가 꽉 차 있더군요. ”천진(天津)→ 제남(濟南)→ 서주(徐州)→ 남경(南京)”.. 이런 경로를 밟아 남경에 도착해서 현철진을 만났지요. 현철진 역시 우리 은진 선배였어요. 그가 우리를 김구 주석에게 련결해주었습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점조직 같은것을 따라서 북간도로부터 남경의 김구선생에게까지 이르게 된 거예요. 송몽규 역시 같은 코스를 밟은 거지요. 송몽규가 명희조선생의 소개로 중국 내륙으로 출발한 당시, 그의 행선지와 목적은 극비에 속하는것이였다. 그래서 매일 그림자처럼 붙어다녔던 윤동주조차도 죽마고우인 문익환 목사조차도 그의 행적에 대해 감감 몰랐었다. 후일 문익환 목사는 이렇게 증언했다. 은진중학교의 전설적인 로교사 명희조 선생이 몽규를 중국으로 보낸 일이 있었다. 그것이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 아니였나 싶다. 나는 끝내 그가 무슨 사명을 띠고 중국에 갔었는지 묻지 못하고 말았다. 그 일로 해서 몽규는 몹시 고생했고…… 그러다가 송몽규와 윤동주에 대한 일본 특고경찰(特高警察)의 “엄비(嚴秘)”기록인 “취조문서”가 일본에서 공개되여 1977년 12월호 “문학사상”지에 번역, 보도됨으로써 송몽규의 그동안의 행적이 더 상세한 검증을 받게되였다. 취조문서에는1936년에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했던 한인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상황이 “1936년의 재지(在支)불령조선인의 불온 책동 상황”이란 표제 아래 정리되여있다. 이 문서속에 당시 중국에 있었던 한인 군관학교들에 관한 자료들이 상세히 기재되여 있고 “소위 선인 군관학교 사건 관계자 검거 일람표(所謂 鮮人 軍官學校 事件 關係者 檢擧一覽表)”에는 1936년에 검거한 각 한인 군관학교 학생들 38명의 명단이 실려 있다. 이 검거 일람표 속에서 “송몽규”의 이름을 찾아볼수 있었다. 최조문서의 기록을 보면- (송몽규)는 1935년 4월 은진중학교 3학년때 19세의 나이로 당시 남경(南京)에 잠복하고 있던 조선독립운동단체인 김구(金九)일파를 찾아가 독립운동에 참가할 목적으로 동년 11월까지 그곳에서 교육을 받았었다. 그러나 김구 일파의 내부사정으로 말미암아 목적 달성이 어려울것을 알게 되자 다시 제남시(濟南市)에 있는 리웅(李雄)이라는 독립운동자를 찾아가 함께 독립운동을 펴려고 하였으나 사찰(査察)당국의 압박으로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1936년 3월 출생지의 부모 곁으로 돌아왔다. 그 기록의 송몽규 관계 부분을 보면 송몽규가 갔던 군관학교의 정식명칭은 “락양군관학교”였다. 그리고 본명 외에 “왕위지(王偉志), 송한범(宋韓範), 고문해(高文海)”라는 세 가지 명칭을 더 사용했다. 당시는 1931년 “9. 18사변” 이래 아주 로골화된 일본의 중국대륙 침략이 시시각각으로 마수를 뻗치고 있던 험악했던 시기, 중국과 일본 량군간의 치렬한 교전으로 흉흉하던 전쟁시국이였다. 하지만 여태 북간도 오지에서 태여나 자란 열여덟의 젊은이는 낯설고 물설고 언어까지도 생경한 거대한 대륙의 땅덩어리를 횡단하며 천진-제남-서주를 거쳐 남경에까지 도착해 백범 김구(金九) 선생을 찾아 뵌것이다. 송몽규등이 다녔던 락양군관학교 한인 특별반에 대해서는 그후로 적지않은 연구물들이 발표되였다. 1933년 봄, 상해 홍구공원 윤봉길 의거를 단행해 세계를 놀래운 김구는 국민당정부의 장개석 군사위원회 위원장과 만난다. 윤봉길 의거의 배후로 지목되어 상해를 탈출한후 가흥에 은둔하던 때였다. 김구는 군사인재 양성을 위한 지원을 요청했고, 그 결실로 중국육군군관학교 락양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이 개설됐다. 윤봉길 의사가 상해 홍구공원에서 장렬한 의거를 성공시키자 “우리가 하지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고 쾌재를 부르며 림정측에 호의를 보이기 시작한 국민당 장개석 위원장의 신뢰와 관심이 군관학교 한인특별반 설립의 동기가 되였던 것이다. 락양군관학교 한인반이 1933년 12월에 특별히 설치되여 92명의 한인 학생을 비밀히 모집했다. 1934년 2월부터 실제 군사교육이 시작되였다. 그 재정지원은 장개석 정부에서 전적으로 담당했다. 학제는 1년제였다. 한인특별반의 정식 명칭은 “중국중앙륙군군관학교 락양분교 제2총대 제4대대 륙군군관훈련반 제17대”였다. (“백범 김구 평전”. 김삼웅 지음 | 시대의창 | 2004) 김구가 설립을 주도한 중국락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의 교육 목표는 “일본 제국주의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로동자, 농민을 지휘할 수 있는 독립운동 간부를 양성하는 것”이였다. 이들은 모집한 한인 청년을 주축으로, “9.18사변” 이후 남경으로 이동해 온 전 한국독립군 대원들, 간부학교 2기생 일부, 남화(南華)한인청년련맹 대원 약간 명 등으로 이루어졌다. 김구는 또 1935년 2월부터 한인 청년들을 수용, 교육시키는 학생훈련소를 운영했다. 위치는 남경 동관두(東關頭) 32호였고 “특무대예비훈련소” 또는 “몽장훈련소(蒙藏訓練所)”로 불렸다. 대원들에게는 매월 10원의 급여가 지급됐고 오전 7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중국어, 기하, 대수등의 학과 교육과 정신 교육을 받았다. 이들은 1935년 6월 22일 일제의 정보망을 피해 강소성 의흥현 장저진 용지산 속에 있는 징광사(澄光寺)로 이동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징광사와의 임대계약 기간이 만료됨에 따라 대원들은 다시 남경으로 이동하여 한국특무대독립군 본부 등지에서 합숙했다. 이후 한국특무대독립군 및 학생훈련소 대원들은 한국국민당청년단으로 재편성된 다음 “통합”한국독립당과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의 중심인물로 활동하며 림시정부를 지키는데 자신을 바쳤다. (“중국항일전쟁과 한국독립운동”. 김승일 옮김. 시대의창. 2005) 송몽규는 이곳에서 1년간의 교육을 받았다. 당시 장개석 정부는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이 한인 특별반의 존재를 극비에 부쳤다. 중국의 공식 군사교육기관에서 한국 독립군을 양성한다는 사실이 일본에 알려지면 큰 문제가 되기때문이였다. 그래서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한인을 모두 중국인으로 위장했다. 그래서 학생들은 모두 중국식 이름을 지어 사용했었음이 관련 자료에서 밝혀지고 있다. 송몽규가 중국식 이름인 ”왕위지”를 쓰고 있었음도 그런 사정에서 연유했던것이다. 여기서 그의 또 하나의 가명인 “고문해”를 보면 바로 후일에 호로 썼던 “문학의 바다”라는 뜻의 가명임을 알수 있다. 이처럼 일제와 맞서기 위해 매일이고 땀동이를 흘리며 총칼을 벼리는 긴박한 상황하에도 문학에 대한 그의 열망은 식지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문학적인 재능은 그 어디에서도 빛을 발하였다. 락양군관학교에서 송몽규는 군사기능을 열심히 연마하면서 학생들을 조직하여 한인반 잡지를 만들기도 하였다. 등사로 인쇄하여 만든 두툼한 책을 보고 김구선생은 몹시 칭찬하시면서 책이름을 “신민(新民)”이라고 지어주었다. 이 부분은 송우혜가 라사행에 대한 취재에서 상세하게 나온다. 라사행: 제2기생은 처음엔 남경성 내 동관두(東關頭)32호의 커다란 중국식 민가에서 합숙하며 지냈습니다. 송우혜: 학생들 수효는요? 라사행: 삼십 명 정도였어요.” 송우혜: 교육과목은? 라사행: “군사훈련 과목과 중국어 등 어학과목이지요.” 송우혜: 교관은 어떤 분들이셨죠? 라사행: 엄항섭, 안공근 (안중근 의사의 막내동생)선생 등이 우리를 가르쳤습니다. 동관두 32호에서 한 2개월 그렇게 지낸 뒤에 강소성 의흥현 용지산(龍池山)에 있는 용지사(龍池寺)로 옮겨서 거기서 훈련을 받았지요. 남경에서 한 백여 리 떨어진 곳이었지요.” 송우혜: 용지사란 곳은 절인 모양이지요? 라사행: 불교의 절이지요. 중국 절들은 아주 커요. 재산도 많고요. 용지사도 한 3천 명쯤 수용할수 있는 규모였어요. 군인 1개 대대가 예고 없이 들어닥쳐도 한꺼번에 그대로 류숙시킬수 있을 정도지요. 우리는 거기서 6월부터 10월 초까지 지내면서 훈련받았습니다. 그때 특히 김인(김구 선생 장남, 락양군관학교 제1기졸업생)씨가 교관으로 우리를 가르쳤었습니다. 거기도 김구, 안공근 선생 등이 가끔 찾아왔었고 엄항섭 선생이 총책임자로서 우리와 같이 지냈지요. 그렇게 지내다가 10월 초에 용지사에서 다시 남경으로 나왔습니다.” (필자 중략) 송우혜: 군사훈련을 받는 외에 다른 일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까? “송몽규가 중심이 되어 잡지를 만드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용지사에 있을 때였지요. 송몽규가 우리보고 다들 원고를 써내라고 하여 꽤 두꺼운 책을 만들었었습니다. 한 3백 페이지쯤 됐어요. 송몽규는 문학에 재능이 있었지요. 성격이 쾌활하고 글씨도 잘 썼어요. 그래서 등사판을 새로 사다가 직접 써서 등사로 인쇄하여 만들었었습니다. 김구 선생이 몹시 칭찬하시고 책 이름을 “신민(新民)”이라 지어주셔서 그런 제목으로 책이 되여 나왔지요. 송몽규는 이처럼 잔뜩 달궈진 용광로 속의 쇠물처럼 반일과 독립의 열망으로 들끓던 그 한인특별반에서 1년여동안 교육을 받았다. 제2기생들은 1935년 10월 초에 용지산에서 남경 시내로 들어온 뒤 해산되였다. 여러 관계 자료들을 검토해보면 중국측의 재정지원이 중단된 바람에 이들이 해산된것으로 보인다. 한인특별반에서 나온 송몽규는 1936년 4월 10일 산동성의 성도인 제남(濟南)에서 제남주재 일본령사관 경찰부에 체포된다. 일본 특고(特高)의 리스트에 그 이름이 오른것이다. 이것이 그후 1943년 7월 일본 교또에서 윤동주와 함께 체포되는 한 원인이 된 것이다. 라사행 역시 상해에서 얼마간 지내다가 어느 날 일경에 체포되였다. 일경의 극비문서에 있는 “검거 일람표”를 보면 락양군관학교 출신들은 이미 1935년 10월부터 체포되고 있었다. 그해 6월 27일 송몽규는 웅기경찰서로 이감되여 9월 14일까지 류치되였다. 갖은 고역에 시달리다 겨우 석방되여 나왔다. 일본측이 중국에서 활동한 한인 군관학교 관련 학생들에 대해 일본의 국내법인 치안유지법을 적용하여 실형을 언도하는데 법적인 난관이 있어서 그들을 모두 일단 석방한뒤 요시찰인으로 감시하기로 정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때부터 송몽규에게는 “요시찰인물”이란 딱지가 붙어 늘 일제당국의 감시망속에서 살아야 했다. 당시 웅기읍 웅상동에 살았던 송몽규의 사촌형 송웅규 씨의 증언에 의하면- “웅기경찰서로부터 ‘몽규를 데려 가라’는 연락이 왔어요. 내가 데리러 갔었지요. 가보니 그간 고생해서 아주 바싹 말랐고 얼굴이 오래동안 해빛을 못봐 아주 하얗게 창백한 모습이더군요. 경찰은 풀어주면서 웅기로 거주제한을 했지요. 그랬는데도 불구하고 몽규는 며칠 쉬더니 그대로 만주로 튀여버리더군요.” 일제의 거주 제한에 조소를 날리며 송몽규는 1937년 4월 다시 룡정으로 와서 윤동주와 재회한다. 그리고 룡정대성(大成)중학교 4학년에 편입한다. 대성학교는 4년제 중학교였다. 그는 편입할 때 다시 은진중학교로 돌아가려 했으나 당시 은진중학교가 감시와 사찰을 많이 당하던 중이라 문제학생을 받을수 없었다는데서 대성중학으로 가게된것이였다. 송몽규는 2년만에 다시 중단됐던 공부를 시작했다. 이때의 윤동주의 행적을 보면 또 다른 친구인 문익환과 함께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입학한다. 얼마 다니지도 못한 상태에서 신사참배 거부로 숭실학교에서 자퇴를 하고 룡정으로 되돌아와 윤동주와 문익환은 룡정광명학원(光明學院) 중학부 4학년에 편입되였다. 광명학교는 당시 흉년의 여파로 경영난에 허덕이다가 일본인에게 매각되어 친일계 학교가 되였다.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자퇴한 윤동주와 문익환은 조선인의 황국화(皇國化)를 위해서 세워진 중학부에서 공부할수밖에 없는 신세에 “솥에서 뛰여 숯불에 내려앉은 격이구나”하고 개탄을 금치 못했다. 여기서 “이런 날” (1936.6.10)이라는 윤동주의 시 한 편을 보자. 사이좋은 정문의 두 돌기둥끝에서 오색기와 태양기가 춤을 추는 날, ...(중략) 이런 날에는 잃어버린 완고하던 형을 부르고 싶다. 동주가 다니는 친일계 광명중학교 정문 량쪽 돌기둥에는 만주국 기발과 왜놈들의 일장기가 걸려 펄럭이고있었다. 이런 무가내한 상황에서 동주는 하소연하고 기대고 싶은 존재로 송몽규를 찾고 있었다. 겨우 석달 이상이지만 랭철한 현실 대처의 자세로 언제나 그들의 선두주자였던 의젓한 형 송몽규를 사무치게 그리고 마음으로 부르고있는 것이다. 룡정 대성중학에 입학하여 그동안 그동안 총가목을 잡았던 손에 다시 펜을 들면서 송몽규는 잠시 잊고있었던 문학에 대한 구지욕을 다시 태우기 시작했다. 지금 찾아볼수 있는 그의 졸업일기에는 영어로 “일체는 문학을 위하여”라는 글발이 남겨져 있다. 서울 연희전문에 입학하다 1938년 초봄, 그들은 당시 간도에서는 단 두사람으로 연희전문에 나란히 합격한다. 윤동주는 의사나 고등고시로 출세하라는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문과를 택했고 몽규도 같이 문과로 간다. 연희전문 문과에서 두 사람은 기숙사생활을 같이 했다. 이 시기에 최현배,손진태, 리양하 등 훌륭한 스승으로부터 민족문화에 대해서 배고 문학 세계를 심화시켰다. 동기들의 증언에 의하면 송몽규는 나라를 잃은 민족의 현실에 대해 격정을 토로하며 행동반경이 컸다고 한다. 또 윤동주에 대해 끔찍한 우정을 보여줬다. 윤동주가 감성적이고 내성적이며 종교적으로 자연과 평화를 사랑하며 시를 통해 저항의 표현을 했다고 한다면 송몽규는 일찍이 그의 문학적 재질을 드러내면서도 문학보다는 독립운동에 결여된 리론적 보완의 필요성을 느끼고 직접 운동에 뛰여들었고 예리한 시대 상황을 분석하여 민족의 독립에 대처하는 선견지명을 갖고 있었다. 적극적인 성격인데다 달변인 그의 주도하에 문과학생회는 문학동아리들의 잡지 “문우”를 펴냈다. 송몽규는 문예부장으로서 “문우”지의 실무를 맡아 하면서 잡지의 속간을 추진하고 직접 뛰였다. “문우”지는 송몽규의 편집후기로 마감된 1941년도 판을 최종호로 하여 종간되였다가 1960년에 와서야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학생들에 의해 복간되였다. 송몽규는 이 잡지에 그의 시 “하늘과 더불어”를 “꿈별”이라는 필명으로 게재했다. 우리말이 억압당하던 시기 몽규(夢奎)를 꿈별이라 굳이 우리말로 풀어 이름을 단것이다. 하늘—/ 얽히어 나와 함께 슬픈 쪼각하늘/ 그래도 네게서 온 하늘을 알수있어 알수있어…… 푸름이 깃들고/ 태양이 지나고/ 구름이 흐르고/ 달이 엿보고/ 별이 미소하여 너하고만은 너하고만은/ 아득히 사라진 얘기를 되풀고 싶다. 오오—하늘아—/ 모—든것이 흘러흘러 갔단다./ 꿈보다도 허전히 흘러갔단다./ 괴로운 사념들만 뿌려주고/ 미련도 없이 고요히 고요히…… 이 가슴엔 의욕의 잔재만/ 쓰디쓴 추억의 反芻만 남어/ 그 언덕을/ 나는 되씹으며 운단다. 그러나/ 련이 없어 고독스럽지않아도/ 고향을 잃어 響愁스럽지 않아도/ 인제는 오직—/ 하늘속에 내맘을 잠그고 싶고/ 내 맘속에 하늘을 간직하고싶어. 미풍이 웃는 아침을 祈願하련다./ 그 아침에/ 너와 더불어 노래부르기를 가만히祈願하련다. 시는 비운에 얼룩진 지난날을 되새기며 솟구치는 회한의 정과 더불어 비장한 결의를 토로하고 있다. 그 “문우”지에는 또 윤동주의 시 “새로운 길”과 “우물속의 자화상”도 실려있어 윤동의 장례식때 가족들은 이 잡지를 가져다가 윤동주의 시 를 랑독했다고 한다. 이 무렵에 송몽규는 “문해(文海)”라는 호를 지어 사용했다. 일찍 “고문해”라는 가명을 썼듯이 그가 즐겨 쓴 이 가명과 호는 그의 문학적 원념을 크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그 호로 사각도장을 새겨서 자기의 책을 분류, 정리하는데 찍기도했다. 오늘날 윤동주의 유품인 “철학사전”(일어판)속장에 그의 도장 자취가 뚜렷이 찍혀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면서 더욱 암담해 지고 있는 시국에 12월 27일 연희전문 졸업식이 앞당겨 치러졌다. 송몽규와 윤동주등 문과 졸업생은 21명이였다. 졸업식에서 송몽규의 성적은 단연 앞선 2등이였다. 적국 일본으로 송몽규는 1942년 3월, 부산에서 관부련락선을 타고 현애탄을 넘었다. 친구이자 동생인 윤동주와 함께였다. 두 사람은 일본 류학길에 오른것이다. 창궐한 일제는 공공연히 대동아공영권을 부르짖으며 동아시아 제국에 대한 침략야욕을 드러내고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송몽규는 적국인 일본 땅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대학과정으로 진학하기 위해서는 어쩔수 없는 일이였다. 사실 경성이나 고향에서 취직자리도 있을리 없었다. 이것은 당시 모든 젊은이들이 고민했던 진로 문제였고 무가내의 선택이였다. 무엇보다 독립에 도움이 되려면 민족문학을 연구하는 한편 아세아 민족문화의 특성에 대한 연구를 더 해야겠다는 웅숭깊은 생각도 안받침 되여 있었다. 그런데 류학을 앞두고 하나의 커다란 관문이 있었다. 바로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해야하는 것이였다. 창씨개명은 1939년 12월 26일 시행된 조선인의 씨명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일제의 악랄한 식민지 정책이였다. 류학을 지망하는 청년들은 이를 피할수 없었다. 송몽규와 윤동주는 미루다 미루다 나중에 끝내는 창씨개명계를 냈다. 그리고 토혈(吐血)하듯한 시발로 적어 내린 윤동주의 그 유명한 “참회록”이 탄생한다. 그들의 창씨개명 이름과 날짜는 다음과 같았다 . 소무라 무게이(송촌몽규, 宋村夢奎); 1942.2.12 히라누마 도쥬(평소동주, 平沼東柱); 1942.1.29 송(宋)은 소무라(宋村)라로 윤(尹)은 히라누마(平沼)로 한것이다. 일본땅에 이르러 송몽규는 1942년 4월 1일 교또(京都)제대 사학과 서양사학 전공(선과)에 입학하고 윤동주는 1942년 4월 2일 이케부쿠로(池袋)에 있는 릿교(立敎)대학 문학부 영문과(선과)에 입학한다. 1940년대에 조선인이 일본의 제국대학에 입학하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하지만 송몽규는 뛰여난 성적으로 단연 제국대학에 입학한것이다. 그런 송몽규에 부러움을 느끼던 윤동주는 그후 도시샤(同志社) 대학으로 자리를 옮긴다. 일본에서의 그들의 기숙처를 보면 송몽규는 북백천(北白川) 동평정정(東平井町) 소스이도리(疎水通) 60번지. 청수영일(淸水榮一)의 2층 집이였고 윤동주는 좌경구(左京區) 전중고원정(田中高原町) 27번지. 다케다(武田) 아파트였다. 송몽규와 윤동주는 한 집에서 지내지 못했지만 두 집 사이는 도보로 5분, 가까운 거리였다. 늘 머리를 맞대고 있으면서 그들은 일경이 그를 감사하는 줄 모르고 “우리 민족의 장래”며 “민족독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강렬한 민족의식의 지배하에서 민족독립의 래일을 기원하였고 일제당국의 조선민족과 문화에 대한 말살정책을 비난하였다. 송몽규는 자신은 앞으로 연극분야에 투신해 연극을 통한 민족문화운동을 해보겠다는 포부를 토로하기도 하였다. 1942년 7월 여름방학을 맞은 송몽규와 윤동주는 함께 만나 룡정으로 간다. 이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귀향이였다. 방학을 끝내고 학교로 돌아와 두 사람은 곧 일본 경찰의 마수에 떨어진다. 송몽규는 1943년 7월 10일, 윤동주는 7월 14일 각각 경도에서 특고 형사에게 체포되여 교또 시모가모(下鴨)경찰서 류치장에 감금되였다. 건명은 “재경도(在京都)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이라는것이였다. 그 그룹은 송몽규가 중심 인물이고 윤동주가 이에 동조했고 고희욱등 젊은이들이 관련된 례사로운 모임이였다. 그러나 작은 일도 침소봉대(針小棒大)되는 때라 중국과 조선에서의 활동이 활발한 “요시찰인물”인 송몽규가 가차없이 그 사정권에 들었던 것이다. 이즈음 치안유지법 위반 조선인의 취조상황 례를 보면 이러한것들이 있다. 재판(在阪) 조선인 고학생 민족주의 그룹 “충성회” 사건 재판(在阪) 조선인 고학생 민족주의 그룹 “조선독립청년당” 사건 재경도(在京都)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 재명(在名) 조선인 민족주의 그룹 “와룡회(臥龍會)” 사건 재선교시(在船橋市) 조선인 고학생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그룹 사건 조선인 중등학교 촉탁 교사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분자의 책동사건 그 대부분의 경우가 협의만 가지고 체포하는 상황이였다. 12월 6일 송몽규, 윤동주는 고희욱과 함께 교또 지방 검사국으로 넘겨졌다. 고희욱은 기소유예로 인차 풀려났으나 송몽규와 윤동주는 2월 22일 기소되였다. 1944년 1월 19일 교또 지방재판소에서 첫 재판이 열렸고 이어 결심공판이 있었다. 윤동주는 1944년 3월 31일, 송몽규는 4월 13일에 결심공판이 있었다. 징역은 각각 2년이였다. 형은 같았으나 형 종료 시기는 윤동주는 1945년 11월 30일, 송몽규는 1946년 4월 12일이였다. 송몽규의 형이 더 무거웠다. 지난 2011년 7월, 일본 교또 검찰청은 송몽규의 재판 판결문을 최초로 전격 공개하였다. 물론 윤동주 연구자들에 의해 내용은 이미 알려진 상태지만, 일본의 검찰청 기록과에서 공식적으로 공개한것은 처음이다. 이는 “윤동주시비건립위원회” 위원장을 맡고있는 맡리쓰메이칸대학 종신 석좌교수인 안자이 이쿠로(安濟育郞·71)등 량지가 있는 일본의 학자, 언론인들의 공동의 노력으로 해볕을 보게 됐다. 안자이 교수는 국내외 평화 강연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최근 2∼3년 동안 노벨평화상 후보로도 추천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은 윤동주 판결문 공개와는 달리 유족의 공개 요구 승낙위임장을 요구해 송몽규의 조카인 송우혜 씨의 승낙서를 받아서 제출하였다. 7매로 된 송몽규에 대한 재판 판결문을 보면 청년문사이며 민족의 독립에 뜻을 둔 한 젊은이의 행보가 오롯이 그려진다. 판결문 내용을 보면 송몽규는 일본의 민족 말살 정책, 특히 언어 문화를 말살하는 사회 상황 구조를 파악하여 지적하고 있고 기존의 독립 운동의 한계를 자성하며 학구적 리론적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또한 일본이 머지않아 대동아전쟁에서 패전을 할것이므로 그 시기에 맞춰 한꺼번에 대세를 몰아 조선의 독립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전략적 방법론도 전개하고 있다. 일제 형무소에서 스러지다 형이 확정된 송몽규와 윤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되였다. 쿠슈주에 있는 후쿠오카 형무소는 원나라와 고려의 련합함대가 상륙했던 하카다(博多) 만 앞에 있는 곳으로 서신정(西新町) 108번지였다. 일본의 형무소들 중 한반도에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어 조선인 죄수들이 많아 수감되였다. 이곳은 지금의 후쿠오카 자리하카다 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후사키역에서 내리면 10분 거리에 있는데 지금도 후쿠오카구치소로 사용하고 있다. 송몽규는 머리를 깎고 죄수복을 입었다. 사상범인 연고로 다른 죄수들과는 달리 붉은 색 죄수복을 입었다. 감옥에서 그들은 최저의 인간대우도 받지못했고 로역에 시달렸다. 이때 일제는 패망으로 줄달음 치고 있었다. 일본 본토에 대한 미군의 폭격이 한창이였다. 1945년 2월 쏘소련의 대일 참전이 결정됐다. 일본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재소자를 재소자답게 처우할 처지가 아니었다. 감옥에 있는 조선인 복역자들은 일제에 큰 짐이 되고 있었다. 그들은 이들의 처치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바로 생체실험이였다. 의문의 주사를 맞고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절명했고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송몽규는 그 며칠 뒤인 3월 7일 윤동주를 따라갔다. 민족에 대한 충정과 민족문화에 대한 수호의 의지를 한 가슴 지녔던 애젊은 나이의 문사는 비참하게 적국의 땅에서 한줌의 재로 스러졌다. 윤동주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죽었고 송몽규는 눈을 감지 못했다. 시신을 거두러 간 아버지 송창희가 통곡하며 눈을 감겼다. 일제의 패망과 광복을 불과 5-6개월 앞둔때, “밤보다 깊은 꿈”을 펼치지도 못한 두사람의 원통한 옥사였다. 이들의 의문사에는 후쿠오카 형무소와 구주제대 의학부의 생체실험의 의혹이 강력히 제기되고있다. 후쿠오카 화장장에서 재로 변한 윤동주의 시신은 고향 룡정으로 돌아 왔다. 가족들은1945년 3월 6일 장례를 치르고 룡정 동산의 교회 묘지에 묻혔다. “시인” 윤동주 지묘라 비석을 새겼다. 한학에 밝은 윤동주 아버지의 친구 김석관이 비문을 썼다. 송몽규의 시신도 후쿠오카 화장장에서 재가 되였다. 명동의 장재촌 뒤산에 묻으며 가족들은 “청년문사(靑年文士)” 송몽규 지묘”라 비석을 세웠다. 비문은 역시 윤동주의 비문을 작성했던 김석관이 썼다. 1990년 4월 그들을 기리는 이들에 의해 송몽규의 묘는 룡정 동산으로 이전했다. 불과 몇메터 가까이 손잡힐듯한 곳에 친구 윤동주가 묻혀 있다. 두 사람은 그야말로 삶과 죽음을 온전히 함께 한 벗이였다. 지성인들에 의해 근년에 송몽규의 “밤” 이라는 시 한편이 또 발굴되였다. “조선일보” 1938년 9월20일자에 실린 작품으로서 연희전문 1학년때 쓴것으로 보인다. 지금 우리가 찾아볼수있는 송몽규의 작품은 동아일보 공모에 입선된 꽁트 “숟가락”과 연희전문 시절 “문우지”에 발표한 시 “하늘과 더불어” 등 두편이 고작이다. 고요히 침전(沈澱)된 어둠/ 만지울듯 무거웁고/밤은 바다보다 깊구나/ 홀로 헤아리는 이 맘은/험한 산길을 걷고/ 나의 꿈은 밤보다 깊어/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멀-리 별을 쳐다 쉬파람 분다. 맑고 고운 결 고운 마음, 잘 옹글은 사색으로 어두운 세상에 대한 고심이 깊은 시다. 벗인 윤동주의 시를 닮은듯 하지만 나름 깊은 시다. 그들은 같은 해에 한 집에서 태여났고 같은해 한 형무소에서 함께 죽는다. 참으로 기이한 운명이였다. 윤동주가 감성적이고 내성적이며 자연과 평화를 사랑하는 글발을 통해 저항의 표현을 했다고 한다면 송몽규는 일찍이 그의 문학적 재질이 인정 받으면서도 시대 상황에 대한 선견지명을 갖고 문학보다는 반일운동에 적극 뛰여 들었고 그 와중에 젊은 몸을 바쳤다. 오늘날 윤동주가 겨례 시인으로 높이 추앙됨은 천행이라 하겠다. 그런데 유감스러운것은 송몽규는 그에 비해 아는이가 적다. 뒤미처 한반도 나아가 그를 숨지게 한 적국에서 까지 사랑 받고 있는 친구의 곁에 우두커니 서있는 송몽규이다. 그러나 차라리 숙명의 동반자였던 윤동주가 옆에 있어 그는 외로웁지 않을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존재가 다시금 각인되는것은 그 역시 친구가 읊조리고 지켜왔던 생의 수칙처럼 “한점 부끄럼없이 주어진 길”을 걸어간 위인이기 때문이다. 소울메이트- 마음의 벗, 성격이 잘 맞는 사람들 사이를 가리켜 말한다. 요즘의 형용어를 빈다면 송몽규와 윤동주는 생사를 함께 한 소울메이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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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10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30)
    팔미라유적의 서류 소속대륙: 아시아, 소속국가: 시리아, 지점: 수리아 중부의 한 오아시스함의: 수리아경내 “비단의 길”에서의 저명한 고대도시임 팔미라(巴尔米拉)는 동서의 상업무역통로에 있다. 서기 2-3세기 시기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요한 도시 중의 하나였다. 부유하고 휘황한 궁전은 바로 그 시기에 수건한 것이다. 기원 3세기에 들어 로마인들은 이 팔미라성을 공략한 후 대대적으로 빼앗아 냈으며 마지막엔 불을 질러 이 이름난 도시로 하여금 훼멸되게 하였다. 그리하여 팔미라성은 꽃과 같은 그 영광스러운 역사를 종말짓게 되었다. 지금 여기에는 페허만이 남아 당년의 그 위대하고 화려함을 말해주면서 묵묵히 서있다. 방불히 세인들한테 하나의 오랜 문명도시의 흥망성쇠를 말해주는듯 하다. 여왕의 전기 서기 267년, 팔미라국왕이 암살당하자 그의 미망인 자누비아 여왕은 유공자를 대신하여 집정, 자신을 “동방여왕”으로 자칭하였다. 여왕의 통치하에 나라의 변강지역은 부단히 확대발전하였다. 팔미라가 강대해지자 이는 로마제국의 경각성을 불러 일으켰으며 뒷따라 팔미라는 로마군사에 의해 함락됐고 여왕은 포로되었다가 후에 감옥에서 사망했다. 후에 시리아국민들은 여왕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그들의 화폐에 여왕의 초상화를 새겨넣었다. 아름다운 문명잔해 팔미라가 다종문화의 집중지방에 위치해 있기에 이 곳의 건축물들은 고대그리스풍격, 로마풍격, 이란풍격 및 당지의 전통풍격 등으로 완미하게 융합되었으며 신비하고도 화려하다. 팔미라유적에는 아직도 중앙거리, 석각개선문, 패륵신(贝勒神)무덤, 기둥복도, 왕궁 등 유적이 남아있다. 유적의 중심에 서있는 석각개선문은 “山”자형으로 정문과 부문이 모두 큰 방석을 깎아 만든 것이다. 중앙거리는 길이가 약 2000미터에 달하는데 거리 양측에는 750개의 원형돌기둥으로 구성된 기둥복도가 있어 웅위롭고도 아름답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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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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