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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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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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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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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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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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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3-11-1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마중물
    ●김경화(재중동포작가) 얼마 전, 시내로 갔다가 어느 한정식 집 앞에서 녹이 쓴 뽐프(펌프)를 보게 되었다. 공능을 상실한 뽐프는 불그스름한 녹을 온몸 가득 바른 채 우두커니 서서 식당 앞에서 하나의 풍경으로, 누군가의 향수를 자극하는 관상용으로 돼있었다. 녹 쓴 뽐프를 마주하고 순간, 내 마음 밑바닥에서 무엇인가 울컥하는걸 어쩔 수 없었다. 고향을 수천리 등진 한국땅에서 마주한 녹슨 뽐프는 시공을 가로질러 아련한 향수를 자극했다. 어린 시절, 물 한바가지 부어넣으면 이내 콸콸 시원한 맑은 물을 올려주던 시골 고향집뽐프가 생각났다. 상수도가 없던 그때 그 시절의 사람들에게 뽐프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마시고 쓰는 가정용에 필요한 모든 물이 뽐프를 통해 얻어졌지를 않았던가. 알뜰한 집에서는 뽐프에 뼁기칠도 자주 해주고, 먼지 들어가지 말라고 손수건만큼한 천도 씌워놓았었다. 한참을 녹슨 뽐프를 마주하고 우두커니 바라보며 나는 이렇게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한국땅에서 재한동포로 불리며, 현대판 이산가족을 앓고 있는 우리는, 누군가의 마중물일수는 없습니까. 저 녹슨 뽐프에 물 한바가지 부어넣고 지레대질을 하여 맑은 물을 콸콸 나오게 하듯,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줄수는 없습니까 라고. 언제부터인가 시작된 우리 중국조선족의 한국행은 이제 수십만이라는 수자를 기록하고 있다. 중국에서보다는 좀 더 많은 돈을 벌수 있다는 것이 그래서 좀 더 현대적이고 윤택한 삶을 살수 있다는 것이 어제도, 오늘도, 중국 조선족이 한국진출을 하는 가장 주되는 목적이다. 돈을 벌어 잘사는 것, 얼마나 밝고 긍정적인 일인가, 하지만, 이 밝고 긍정적인 화면 뒤에는 수많은 어둠이 드리워져있는것 또한 현실이다. 오랫동안 떨어져있는 관계로 부부사이가 소원해지고, 불신이 깊어지고, 수많은 가정이 해체되거나, 해체위기에 서있다. 중국에 있는 가족은 한국에 있는 가족이 돈을 적게 보낸다고 원망하고 전화가 자주 안온다고 원망한다. 반면 한국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돈을 벌고 있는 동포들은 스트레스와 고된 일에 시달리는 자기들을 가족이 이해하여주지 못하고 자기들의 고생을 알아주지 못한다고 불만한다. 이런 것들이 쌓이다보면 전화상으로도 좋은 말들이 오가지 못하고 점차 서로가 소원해질 수밖에 없는 결과를 초래한다. 아이들을 옆에서 돌보지 못하는 부모는 그저 미안한 마음에 금전으로 모든 것을 보상하려 하고, 아이는 부모가 돈 이외에 해준게 머가 있냐고 소리 지른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부를 포기할 수 없다. 돈이 대체 뭐냐고 하지만, 돈이 없으면 생존조차 할 수 없는게 현실이 아니던가. 결국, 우리는 이것도 저것도 확실하지 못한 채, 모순 속에서 서로를 원망하고 불신하고, 상처만 입어가면서 오늘도 내일도 불안하고 위태위태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중국조선족의 뼈아픈 삶의 현실이다. 나는 조선족의 한국진출을 긍정적으로 본다. 마침내 우리는 한국행을 통하여 부를 얻었고, 많은 것을 배웠고, 소중한 경험을 쌓았고, 내 고향에서는 미처 몰랐던, 많은 소중한 것들을 새삼 깨우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나 역시 너무나도 고생스럽고 힘들어서 다시 떠올리기조차 싫을 정도로 한국생활이 힘들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얻은 것이 더 많은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가정들은 지금 위기에 직면해있는것 또한 현실이다. 가족이란 한집에서 한솥밥을 먹고 함께 잠을 자면서 알콩달콩 부대끼며 살아가야 한다는 말, 서로 헤여져있으니 아무래도 라는 말,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말, 참으로 말하고 들을수록 맥만 빠지는 소용없는 말들만 주절주절 어제도 오늘도 되풀이하고 있다. 깊은 한숨을 쉬고 맥 빠진 탄식을 한다. 어쩌면 우리는 뽐프가 아닐지 모르겠다. 누군가 나라는 뽐프에 부어줄 마중물을 바라고있는건 아닐지 모르겠다. 한꺼번에 충분한 량의 마중물을 받았을때에야만 비로소 작동하는 저 뽐프처럼, 조금씩 찔끔찔끔 넣어서도 안 되고 한꺼번에 충분한 량을 넣어주는것과 동시에 지렛대를 반복적으로 작동시켜야만 밑에 있는 물을 끌어올릴 수가 있는 뽐프처럼, 물 넣는 것만 생각하고 지레대질을 소홀히 해서도 안 되고 무작정 지레대질만 힘차게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닌, 마중물의 량과 지레대질의 빈도와 강약, 모든 것이 맞물릴 때 비로소 자기 기능을 발휘하여 저 땅 밑에서 물을 끌어올려주는 뽐프가 아닐까 모르겠다. 누군가 마중물을 넣어주고 지레대질을 해줘서 보기만 해도 시원해질 것 같은 맑은 물을 콸콸 뿜어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괴로운 뽐프가 아닌지 모르겠다. 마중물을 기다리는 뽐프이기보다는 우리 스스로 마중물이 되는 건 어떨까. 저 땅속 맑은 물을 끌어내는 뽐프의 지혜를 다 배우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뽐프와 마중물의 그 끈끈한 애정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현실을 바로 보고 무엇이 올바르고 무엇이 가장 소중한 것인지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뜨거운 가슴을 열어 내 사랑하는 사람과 내 가족과, 내가 뜨거운 눈물을 가슴으로 삼키며 지키고자 떠났던 것들을, 지키고자 떠나보내야 했던 그 사람을, 그 사랑하는 것들을, 그 목마른 애정과 그리움들을, 그 눈물겨운 것들을 인내해야 하는 그 이유를 한번쯤 다시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냉정하고 차가운 머리로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이 과연 무엇인지, 내게 가장 소중했던 건 과연 무엇이였는지, 지금 나는 무엇을 지키고, 또 무엇을 위해 마음을 다잡고 눈물을 삼켜야 하는지 한번쯤 생각해보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녹슨 모습으로 의연히 서서 풍경이 되고 누군가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해주고 마음을 울려 나를 되돌아보게 해준 뽐프를 다시 바라본다. 햇빛에 반사된 녹이 진 붉게 빛난다. 나는 한발 가까이 다가가 손가락을 내밀어 녹을 문질러본다. 깔깔한 감촉이 손가락을 타고 온몸 가득 스며든다. 햇빛이 찬연하다. 녹슨 뽐프가 햇빛아래 반짝반짝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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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01
  • 윤동주를 기리는 사람들
    ●김 혁(재중동포소설가) 윤동주 연구의 결정판 "윤동주 평전"의 저자 한국 소설가이자 사학가인 송우혜.宋友惠와 윤동주의 릿쿄대학 후배이자 연구자인 야나기하라가 만난 자리에 나의 인물전 "윤동주"가 등장했다. 송우혜는 1947년 서울에서 출생. 서울대 간호학과에 입학하여 중퇴하고 한신대 신학과에 편입하여 졸업했다. 이화여대 대학원 사학과(한국사 전공)에서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을 마쳤다. 198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1982년 한국문학 신인상, 1984년 삼성문예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눈이 큰 씨름꾼 이야기≫, 장편소설 ≪남도행≫, ≪저울과 칼≫, ≪투명한 숲≫, ≪하얀 새≫, 산문집 ≪서투른 자가 쏘는 활이 무섭다≫ 등이 있고, 평전으로 ≪윤동주 평전≫, ≪송창근 평전≫ 등이 있다. 또 연변지역 동포들의 삶 등 다양한 소재를 통해 우리의 시대정신을 탐구하는 『스페인 춤을 추는 남자』(1998) 등이 있다. 한국사 관련 논고와 학술논문으로는 「청산리전투와 홍범도 장군」, 「북간도 대한국민회의 조직형태에 관한 연구」, 「대한독립선언서(세칭 무오독립선언서)의 실체」,「이은. 李垠의 정략결혼연구─언론보도 (1907~1920)를 중심으로」(석사학위론문) 등이 있다. 역사적 소재 및 당대의 사회상을 통해 인간의 삶과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는 평을 받고 있다. 각종 언론매체에서 예리하게 시사문제를 논하는 칼럼니스트로서도 이름이 높다. 송우혜가 되살려낸 윤동주의 순결한 초상 『윤동주 평전』은 다양한 주변 인물들과 함께 살아간 다채로운 삶의 자취, 북간도의 역사와 당시의 시대상황, 일경의 극비취조문서, 일본 경도재판소의 판결문 등을 비롯한 각종 자료들에 대한 예리하고 집요한 추적과 분석을 통해 민족시인 윤동주의 삶과 시를 정리한다. 야나기하라 야스코.楊原泰子는 1946년생으로 릿쿄 대학 문학부 사학과 졸업했다. 야나기하라 씨는 릿쿄대학 사학과 졸업생으로 윤동주 시인의 후배가 된다. 20여 년 전 시인 이라바키 노리코의 에세이에서 '릿쿄대학에 유학했던 시인 윤동주'에 대한 문장을 읽고 윤동주 시인의 발자취를 좇기 시작했다. 시인이 일본에 남긴 발자취를 조사하고 체포시 압수당한 장서 찾기를 계속하고 있다. 2008년 릿쿄대 졸업생, 교직원과 함께 ‘윤동주 시인을 기념하는 릿쿄 모임’을 설립하고, 시인의 기일인 2월 16일 전후로 ‘윤동주 시인과 함께’를 매년 개최해 왔다. 윤동주가 숨진 곳에서 과거의 불행한 역사를 기억하고 미래지향적인 자세를 보여준 이들의 행보는 우리에게 많은 귀감으로 되고 있다. 기라성 같은 윤동주 연구의 장인들 앞에서 필자의 작은 책자가 초라할 뿐이다. 격동의 지난 세기, 북간도 용정에서 태어나 한반도와 일본열도에 자취를 고루 남긴 윤동주는 아시아 문인들중 유일하게 한국, 중국, 일본에 모두 기림비가 세워진 시인이다. 이에 연구가들은 "세계가 서로 다른 가치관으로 충돌하고 있는 오늘날 윤동주는 오욕의 역사를 씻고 한, 중, 일의 새로운 유대를 잇는 문화사자의 역할을 은연중 하고 있다"고 정평한다. 시인이 그 고난과 격변이 세월에 쓴 시는 시대와 국경, 언어의 벽을 넘어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다. 시 속에 담긴 하늘과 바람과 별의 의경.意境은 중국의 "북간도",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넘어 같은 시대를 살아간 수많은 아시아 사람의 생각을 대변한다고도 할 수 있다. 윤동주의 고향 용정에서 십 수 연간 오롯이 시인에 대한 연구와 기림사업에 몰두 해온 필자로서는 이념과 역사의 벽을 넘어 한. 중. 일에서의 윤동주 연구가 더 활발하게, 더 협력적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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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01
  • [김정룡 칼럼] 변소간보다 더 많은 사장님, 회장님
    ●김정룡(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장) 도시개발이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전인 1980년대까지 중국 도시골목마다 공용변소가 많았고 아침이면 줄 서 순번을 기다리던 풍경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정확한 통계는 모르겠으나 당시 연길시에 1천여 소에 달하는 공용변소가 있었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정확한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무튼 공용변소가 그만큼 많았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중국 개혁개방 직후인 1980년대 중후반부터 경제 분야에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남에 따라 독립적인 경제활동이 법적 인가를 받은 00꿍스(公司)가 자고 깨면 생겨날 정도로 우후죽순마냥 많이 나타났다. 그래서 민간에서는 당시 다수 꿍스(公司)들을 내실도 실적도 없고 하여 허수아비라는 뜻이 담긴 피바오꿍스(皮包公司)라 불렀고 꿍스(公司)의 법인(法人) 경리(經理)들을 빗대어 “경리가 변소간보다 더 많다.”고 비꼬았다. 당시 피바오꿍스(皮包公司) 중국식 경리들을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사장님들이다. 그러니까 바꿔 말하자면 “사장님이 변소간보다 더 많았다”는 말이 성립된다. 중국에선 독립적인 경제활동을 하는 업체의 법인을 경리 혹은 규모가 크면 총경리라 부르고 규모가 굉장히 작은 업체 혹은 구멍가게의 법적등록인은 보편적으로 ‘라오반(老板)’이라 부르고 개별적으로 ‘짱꾸이(掌櫃)’라 부른다. 한국은 규모가 크든 작든 하다못해 부부가 운영하거나 심지어 혼자 운영하는 구멍가게 책임자조차도 전부 사장이라 부른다. 거기에 한국식 특유 경어를 붙여 ‘사장님’이라 부른다. 뿐만 아니라 중국에선 길가에서 낯선 사람과 대화할 경우 상대를 높여 사부(師傅)라 부르는데 비해 한국에선 이럴 경우에도 상대를 ‘사장님’이라 한다. 한국엔 ‘사장님’이 어떻게나 많은지 인파가 북적거리는 동대문상가에서 “감사장!”라고 부르면 열에 다섯이 머리를 돌린다고 한다. 이 경우 김씨가 많다는 말이 되겠지만 그만큼 ‘사장님’의 호칭이 남발되고 있다는 증거이리라. 중국과 한국에서 사장이란 호칭이 서로 다르게 사용될 뿐만 아니라 회장이란 호칭도 사용법이 엄청 다르다. 중국에선 계열사를 갖고 있는 대기업 오너를 ‘동사장(董事長)’이라 부르는데 비해 한국에선 ‘회장님’이라 부른다. 그리고 중국에서 말하는 주임(主任)이 한국에선 회장이 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이를테면 시골마을이나 도시 부녀회 책임자를 중국에선 ‘주임’이라 부르고 한국에선 ‘회장’이라 부른다. 정부기구도 중국에서는 인대(人大) 책임자를 중앙기구는 위원장이라 부르고 성급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주임이라 부른다. 화교사무실, 외사사무실 등등의 많은 기구의 책임자도 주임이라 부르는데 비해 한국에선 정부기구의 모든 직책에 거의 다 ‘장(長)’자를 붙이는 호칭이 보편적이다. 전형적인 실례로서 중국에선 가도(街道) 책임자를 주임이라 부르는데 비해 한국에선 ‘장(長)’자를 붙여 ‘동장(洞長)’이라 부른다. 중국과 한국에서 사장과 회장이란 호칭이 왜 이토록 다르게 사용되고 있을까? 그 이유를 알려면 먼저 사장이란 ‘사(社)’의 역사적인 의미부터 살펴보고 또 회장이란 말의 유래를 알아야 한다. <설문해자>에 의하면 ‘社’는 “흙을 뫼어놓아 사가 되었다(堆土爲社).”고 한다. 그런데 아무 사람이 아무 곳에서 아무렇게나 흙을 뫼어놓으면 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한 개 부족이 조상을 기리기 위한 징표로 흙을 쌓아놓았고 그 징표를 중심으로, 즉 사(社)를 중심으로 족장이 백성을 거느리고 생산 활동을 진행하고 제사를 지내며 종교 활동을 하면서 삶을 영위한다. 사회란 이 사(社)에 모여서 삶을 영위한다는 뜻에서 유래된 말이다. ‘사(社)’란 뜻이 워낙 이렇듯 거창하기에 중국역사엔 ‘사장(社長)’이란 말이 없었다. 지금 한국에서 남발로 사용하고 있는 사장이란 호칭은 일본에서 건너온 것이다. 일본이 동양 삼국에서 서양의 근대화를 따라 배우는 선두에 섰고 많은 서양의 어휘들을 한문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지어낸 것들, 이를테면 과학, 화학, 물리, 지식인 등등이 일본이 지어낸 어휘들이 중국에 수출되었고 따라서 한반도에도 전해졌던 것이다. 그 중에 사장이란 호칭도 포함되어 있다. 변소를 화장실(けしょうしつ:化粧室)이라 하는 용어도 일본인이 지어낸 어휘이다. 일본이 사장이란 말을 지어낸 것은 중국식 번역인 서양식 꿍스(公司)를 일본인은 중국역사문화에 결부시킨 결과였다. 즉 사람이 모여 기도 올리며 종교 활동을 진행하는 곳을 ‘신사(神社)’라 부르는 것처럼 사람이 모여 경제활동을 벌이는 업체를 ‘회사(會社)’라 지어내고 그 책임자를 사장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아울러 일본인은 중국역사문화적인 용어인 사회를 거꾸로 하여 회사란 용어를 지어내게 되었던 것이다. 즉 사회를 거꾸로 하면 회사가 되는데 사회는 ‘사(社)’가 포인트이며 사를 중심으로 모인다는 뜻이라면 회사는 ‘회(會)’가 포인트로서 사람이 모여 ‘사(社)’를 꾸린다는 의미이다. 일본인은 이 사람이 모이는 것을 여러 포기라는 표현을 빌려 ‘주식회사(かぶしきかいしや(株式會社)’라고 불렀다. 사장이란 호칭은 본래 이렇듯 주식회사 대표자를 부르는데서 유래되었는데 지금 한국에선 구멍가게 주인, 길 가는 아저씨한테도 사장님이라 남발하고 있다. 회장이란 말도 중국역사에선 그다지 사용되지 않는 어휘인데 일본이 동양에서는 매우 낯설었던 서양의 상공회 같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조직의 책임자를 회장, 또 NGO단체 같은 사람이 많이 모여 시민 활동하는 조직의 책임자를 역시 회장이라 지어내게 되었던 것이다. 중국과 한국은 일본의 영향에 의해 사장, 회장이란 호칭을 도입하였으나 중국에선 그다지 사용되지 않고 있는데 반해 한국에선 진짜 변소간보다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를테면 중국에선 큰가마밥 제도가 실시되던 인민공사 책임자를 사장이라 불렀고 당시 사장이 관할하는 인구는 적어도 수천 명이었다. 또 신문사, 출판사 책임자를 사장이라 부르기는 하였으나 사장보다 편집과 편제(編制)를 총괄한다는 의미로서 총편(總編)이란 호칭을 더 선호하였던 것이다. 신해혁명 전 역사에 없었고 겨우 수십 년 전의 일이다. 그렇다면 왜 중국은 사장과 회장 호칭을 적게 사용하는데 비해 한국에선 남발로 사용하고 있을까? 첫째 한국은 중국보다 일본문화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다. 둘째 한국인은 멋을 추구하는 겉치레 문화를 즐기기 때문에 아무데나 무작정 ‘長’을 붙이기를 굉장히 선호한다. 셋째 양반과 상놈의 문화에 한이 맺혔던 한국인은 일단 ‘長’을 붙이면 출세의 의미가 다분하기에 사장, 회장을 남발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자유 민주사회에 진입함에 따라 각종 비영리단체 등록이 쉬워지고 따라서 그 단체들을 협회라 부르는데서 회장이란 호칭이 남발되고 있는 것이다. 재한조선족사회는 상기 한국사회 물에 듬뿍 젖어 역시 중국에서 사용하지 않았던 사장, 회장 호칭을 남발하고 있다. 조선족이 한국에서 업체를 꾸려봤자 무역업체나 제조업체는 매우 적고 또 대규모의 음식점이 없고 절대다수가 소규모의 음식점이나 식품상점 등 구멍가게를 운영하면서 명함에 사장이라 박고 공중장소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 스스로 ‘사장’이라 말한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한국인은 보편적으로 스스로에게 사장을 붙이지 않고 “00를 운영하고 있는 00입니다.”라고 겸손하게 자아소개 한다. 그리고 한국식을 따라 배워 영양가 없는 협회들을 잔뜩 만들어 놓고 실체도 내실도 없이 회장님이랍시고 어깨에 힘주고 남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재한조선족사회 다수 사장님, 회장님들은 중국에선 상상도 못할 일들, 즉 한국에서 ‘長’을 스스로 붙이고 아Q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정신건강에 유리하므로 무조건 나쁜 일이라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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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01
  • [기고] 북한영화와 배우들
    ▲영화 '꽃파는 처녀' 꽃분이역을 맡았던 북한스타 홍영희 중국에서 어릴 적에 북한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예를 들면 꽃파는 처녀, 꽃피는 마을 등의 영화가 인상적이었다. 영화 속 많은 이야기들은 다 잊혔지만, 배우들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아마도 영화 속 처녀들의 예쁘고, 용감하며, 터프한 인상이 깊었기 때문인가 싶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즐겨 보고 있으나 북한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사람은 매우 적다. 북한은 매년 많은 영화와 드라마를 촬영하고 있으며 평양영화성 역시 비교적 규모가 큰 영화타운이다. 북한에서는 영화나 드라마를 촬영할 때는 강력한 스타 캐스팅도, 첨단 장비도 없고 설비도 단순하다. 그러나 배우나 스태프나 굉장히 열심히 하고 있다. 설비가 단순하고 특수효과도 별로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북한이 좋은 영화를 출품 못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도 전에 많은 영화들을 특수효과도 없고 첨단 기술 설비도 없는 환경에서 촬영했다. 사람들은 북한 배우들은 모두 소박해서 주연배우라고 해도 스타다운 구석이 전혀 없다고 말한다. 또한 북한 연예계는 노이즈 마케팅도 비즈니스 포장도 숨은 룰도 없어 순수한 느낌을 준다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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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25
  • [유래상식] 찰떡에 깃든 이야기
    ‘찰떡’이란 찹쌀로 만든 떡을 말하는데 일명 ‘인절미’라고도 합니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의 전통음식으로 불리는 ‘찰떡’의 유래에는 이런 이야기가 담겨있답니다. 옛날 공산성이라고 부르는 곳의 어느 한 시골에 임씨 성을 가진 마음씨 고운 한 농군이 아들 삼형제와 함께 농사를 지으면서 열심히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연속 3년째 농사가 되지 않아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할 정도였습니다. 그해 겨울 임씨는 셋째 며느리를 맞아들였는데 셋째 며느리는 인물도 절색이지만 음식을 만드는 솜씨도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비록 산나물로 끼니를 에우더라도 그 맛이 때마다 다르고 구수했습니다. 하루는 가마 목에 앉은 셋째 며느리가 기장쌀로 밥을 짓게 되였는데 밥이 다 되였는데도 밥을 풀 념을 못했습니다. 죽밥이 되면서 한 덩어리가 되여 버린 것입니다. 셋째 며느리는 그런대로 식구들에게 그 떡이 된 밥을 골고루 나누어주었습니다. “덩어리가 된 죽밥이라도 식기 전에 어서 잡수세요.” “음, 어서 먹고 밭으로 나가자구나.” 시아버지 임씨가 이렇게 말하면서 수저를 먼저 들자 모두 따라들었습니다. 그날 아침 비록 모두 배부르게는 먹지 못했지만 그런대로 산으로 일하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날 다른 날에 비하여 늦게까지 일했는데도 모두 배고파하는 눈치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웬 일일가? 셋째 며느리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찰밥덩어리를 먹은 것이 원인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튿날 아침에 밥을 지을 때 의식적으로 기장밥을 뭉개서 떡을 만들어 식구들에게 대접했습니다. 그날도 역시 저녁 늦게까지 일했지만 누구 하나 배가 고프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비결을 알아차린 셋째 며느리는 혼자 빙그레 웃었습니다. 바로 그 떡이 된 찰밥덩어리를 먹은 것이 효과를 본 것이었습니다. 그해 임 씨네는 셋째 며느리의 제의 하에 기장쌀, 차수수, 찰옥수수 등을 많이 심었는데 생각 밖으로 대풍년이 들었습니다. 어느 날 셋째 며느리는 기장쌀을 씻어 한가마를 찐 후 그것을 퍼내 절구에 넣고는 남편더러 찧게 했습니다. 잠시 후 저녁상이 갖추어졌습니다. 셋째 며느리는 잘 찧어진 기장쌀떡을 칼로 저미여 밥상에 올려놓고 또 어느새 만들었는지 콩가루를 사발에 담아 올려놓으면서 말했습니다. “떡이 목에 붙지 않게 이 구수한 콩고물을 묻혀 잡수세요.” “아니, 이것이 별맛이로구나.” 떡 한 덩이를 맛보던 임씨가 엄지를 내들었습니다. “찰 붙이로 만든 떡이라 이것을 찰떡이라고 하면 되겠다.” 이때로부터 ‘찰떡’이라는 이름이 생겨나게 되였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시일이 지난 후의 일입니다. 당시 조정에 반란이 일어나서 인조임금님이 공주의 공산성으로 피난을 오게 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임씨는 아침 일찍 셋째 며느리더러 찰떡을 하라고 하고는 그것을 임금님께 바쳤습니다. 난생처음 먹어보는 쫄깃쫄깃하면서도 구수한 음식의 맛에 놀란 임금님이 떡의 이름을 묻자 병졸은 임씨 성을 가진 백성이 만들어왔다고 아뢰었습니다. “허허… 임서방이 가져온 떡이 절세의 맛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 떡의 이름을 임절미라 하면 되겠구나.” 인조임금님의 명명으로 그날부터 ‘찰떡’은 또 ‘임절미’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게 되였답니다. 세월이 가면서 임이 어음 적으로 쉽게 불리는 인으로 변하여 ‘인절미’로 되였다고 합니다. 그 후 찰떡소문이 온 나라에 퍼지게 되였는데 후세사람들은 점차 지역별로 찰떡을 만드는 방법을 기발하게 바꾸어 방아에 찧고 절구에 찧고 들판에 놓고 나무로 떡메를 만들어 치고 또 전문 떡구유를 만들어 치게 되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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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25
  •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 김경화 내 휴대폰화면에 슬라이드로 지나가는 문구다. 한국에 온지 얼마 안 되던 어느 날엔가 나는 이런 문구를 휴대폰화면에 넣고 있었다. 서로 다른 문화에 차이에 부대끼고, 힘든 일에 지쳐가고, 가족도 그립고, 설상가상으로 한국에 온 이튿날에 화장실문에 새끼손가락을 끼여 손톱 하나가 빠져나간 채로 일을 해야만 하던 극한의 상황속에서였다. 중국조선족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꿈꾸어봤을 코리안 드림, 열악한 환경속에서 고된 일을 해야 하고, 수모와 냉대가 아무리 빗발친다고 떠들어도 코리안 드림을 향한 그 거센 물결을 막을 수 없는 것은 아무래도 임금의 차이가 아닐까, 거기에 내 조상의 뿌리가 있는 고국이라는 점이 포인트를 더해 코리안 드림의 유혹은 한국 문이 열려서부터 지금까지 빛을 바래지 않고 있지를 않는가!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다섯 살 배기 아들애의 손을 놓기가 죽기보다 싫었음에도 나는 사증도장이 찍힌 여권을 들고 회심의 미소를 짓지 않았던가?! 사람이 살아가는데 돈보다 소중한건 얼마든지 있다는 말을 나는 찬성한다. 그렇지만 또한 돈보다 더 소중한 것도 없다는 말도 반대하지 않는다. 그만큼 돈이라는 이 매개물은 때론 어마어마한 위력을 갖고 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튼 나의 한국행도 예외는 아니였다. 과연 내가 한국이라는 땅에 가서 가장 힘든 3D업종 밑바닥에서 적응해 낼 수 있을 거라는 걱정도 앞섰지만 남하는데 내가 못 하랴는 배짱 하나를 가지고 떠난 터였다. 이제 활은 이미 시위를 벗어 난지 오랜 터, 내겐 앞으로의 질주만 있어야 할뿐 후퇴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이였다. 하지만 처음 해보는 식당일, 그것도 호떡집에 불난 것처럼 정신없이 뛰어야 하는 자장면 집 서빙일, 손님들의 이런저런 잔소리와 뜬금없이 툭툭 쏘아대는 주인들의 핀잔에 몸과 마음이 매일 매일 혹독한 고문을 견디는 격이였다. 잠간 짬이 나서 밖을 내다보면 엄마가 가는 뒤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아들애를 재워놓고 밤중에 도망치다 싶이 비행기를 타버린 생각에 가슴이 미여졌다. 당금이라도 엄마 하고 아들애가 달려올 것만 같아 눈물이 나던 그 나날, 나는 나 스스로 희망의 빛을 내게 던지기로 했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그것은 그 혹독한 시련 같은 나날을 견디어 내야 한다는 나 스스로의 각오이기도 했고, 나보다 더 마음이 아플 아들애와 남자의 몸으로 아들애를 돌보며 나 못지않게 고생하고 있을 남편에게 보내는 무언의 메시지이기도 했다. 오늘을 이겨나가야만 내일에 웃을 수 있다는 어떤 결의 같은 것이였다. 그럭저럭, 눈이 내리던 새벽에 길을 떠난 지가 어제 같은데 봄, 여름 가을이 지나고 또 다시 눈발이 흩날리는 겨울이 도래했다. 한국 땅에 발을 들여 놓은 지도 십여개월, 이제 환경에도 적응이 되었고 일도 손에 익었다. 새끼손톱도 새로 자라나 거짓말같이 원상복귀 되었다. 모든 것은 지나가는 것이리라. 지금 한국에 온 중국조선족을 비롯하여 세계가 경제위기로 고난을 겪고 있다. 특히 한국에 있는 중국조선족들은 지난해에 비해 반으로 훌쩍 줄어든 환율로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고 있다. 나 역시 같은 처지이기에 그 마음을 잘 안다. 하지만 걱정한다고, 한숨을 쉰다고 머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나 혼자의 고난도 아닐진대, 우리가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한, 내가 맡은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한, 모든 것은 지나가고 반드시 밝은 빛이 우리 앞에 도래할 것임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세상에는 영원한 행복도 영원한 슬픔도 없지 않을까?! 모든 건 잠간 우리 곁에 손님처럼 머물고 지나 가는게 세상사가 아니던가? 행복에도 100% 도취되지 말고, 슬픔에도 완벽하게 절망하지 않는, 모든 건 지나가리라는 0도 심리로 세상을 사는 것 또한 삶의 한 지혜가 아닐까?! 힘든 오늘을 사는 모든 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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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22
  • [김정룡 칼럼] 코로나19와 21대 총선
    ●김정룡(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장) 때는 2016년 3월 21일 저녁, 서초구에 위치한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사무실에서 독서모임이 있었다. 토론지정 책은 미국 대법관을 40여년 지낸 더글라스의 인물평인 <더글라스 평전>이었고 직접 저자가 참석하여 강의했다. 여느 모임도 마찬가지. 처음에는 ‘주제’를 둘러싸고 한참을 얘기를 나누다 나중에는 시국에 대한 담론이 오가기 마련이다. 그날 시국담론은 다가오는 4.13 제20대 총선이었다. 그로부터 2년 전인 2014년 ‘4.16 세월호 사건’을 겪고 나서 민심이 크게 등 들리고, 2015년 12월 말경 정윤회 문건 파동이 있었고 그때부터 최순실 이름이 슬슬 거론되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대통령은 서열 3위라는 충격적인 말까지 나돌았는데도 보수정권은 전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오히려 아주 잘하고 있다는 도취에 빠져 있었다. 20대 총선을 앞두고 보수당은 180석 확보는 따 놓은 당상이라는 듯 오만에 빠져 있었다. 설마 설마하면서 불안감을 느끼는 쪽은 당연히 진보진영이었다. 민변은 진보단체이기 때문에 그날 모임에서 진짜 그렇게 된다면 나라 앞날이 암울하다고 큰일이라는 반응들이었다. 이에 대해 <더글라스 평전>의 저자인 안경환 교수 왈,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우리나라 국민의 의식수준이 나라가 망가질 지경으로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과연 안경환 교수의 예언대로 보수당은 패배했고 진보당이 이겼다. 20대 총선 결과를 통해 필자는 안경환 교수의 탁월한 식견에 탄복했다. 지난 10여 년 동안 한국생활에서 교수, 변호사, 고급관료들을 많이 접촉했어도 안경환 교수의 식견을 초과하는 엘리트를 만나보지 못했다. 민주당은 20대 총선의 순풍을 타고 그 후 있은 2017년 제19대 대선, 2018년 제7회 지방선거, 이번 21대 총선까지 승리해 4연승을 달려왔다. 이 4연승 중에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이 1987년 민주화 운동 이래 가장 좋은 성적을 거뒀다. 이렇듯 민주당이 연승가도를 달리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일각에서는 민주당이 잘해서가 아니라 보수당이 너무 못해서 민주당이 반사이익을 얻은 결과라고 주장한다. 박근혜 탄핵 이후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에 대해 반성도 성찰도 없고 변화도 없고 혁신도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보수당은 그 동안 변화와 혁신을 입이 아프도록 외쳤으나 그것은 눈속임에 지나지 않았고 실제적인 행동은 없었다. 총선을 앞두고 보수당은 물리적인 통합은 이뤄냈으나 화학적인 결합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또 당명은 미래통합당이지만 실제로는 ‘과거통합’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정치9단으로 불리는 박지원 의원은 21세기 국회의원이 하지 말아야 할 세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 의원직을 사퇴한다는 말을 함부로 던지지 말 것. 둘째, 삭발하지 말 것. 셋째, 단식투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황교안 통합당 대표는 국회의원이 아니기 때문에 던질 의원직이 없지만 머리 깎고 밥을 먹지 않는 운동을 여러 번 했고 쩍하면 광화문에 가는 장외정치를 감행하여 낡은 정치, 구태정치라는 이미지로서 국민들의 마음을 떠나게 했던 것이다. 게다가 보수당은 과거 낡아빠진 정치 수단이었던 ‘좌파 빨갱이’ 이념공격이 유권자들에게 전혀 먹히지 않는 시대가 왔으면서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효할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해 듣기 거북한 공격을 퍼붓는 바람에 유권자를 등 돌리게 만든 것도 사실이다. 정녕 빨갱이란 무엇인지? 보수당 국회의원 중에 제대로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고 나는 확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멋도 모르고 그냥 빨갱이 공격이 여전히 난무하니 국민들을 식상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외적 요인은 변화의 조건이고 내적 요인이야말로 변화의 근거라는 철학적 논리가 있다. 야당이 잘못해 여당이 어부지리를 얻은 부분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없는 사실이나 어디까지나 당사자가 잘해야 큰 성과를 이룩할 수 있다. 문재인 정부가 뭘 잘했나? 크게 두 가지로 접근할 수 있다. 하나는 투명성이고, 다른 하나는 시민의식 강화이다. 굳이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국가의 존재이유인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는 의무를 지킨 것이다. 아주 상식적인 얘기지만 전 정권은 국민의 안전에 소홀했다. 그 예가 바로 세월호 사건이다. 박근혜 정부가 밀리게 된 계기가 바로 세월호 사건이 결정적이었다. 메르스 사태 때도 전 정권은 대응이 미진해 말밥에 올랐던데 비해 이 정부는 정신을 차리고 국민 안전 지키기에 최선을 다 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의 대응에 있어서 한국은 지구촌의 스승으로 급부상했다. 여러 가지 이유 중에서 필자는 한국은 정보를 투명성 있게 국민들에게 공개한 점을 높게 평가하고 싶다. 지금까지 선진국이라고 동경을 받아왔던 미국과 서구 여러 나라들 및 일본은 이번 사태에서 정보가 투명하지 못했다. 물론 속이고 싶어 속인 것은 아니겠지만 의료시스템문제와 국가 방역시스템이 낙후되어 투명하지 못한 것도 있고 일본처럼 천방백계로 올림픽을 치르려는 욕심에 일부러 숨겨온 이유도 있을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정보가 투명하지 못하면 국민들의 신뢰를 받지 못한다. 이들 선진국에 비해 한국은 정보의 투명성을 확보했고 이로서 국민은 정부를 믿고 관과 민이 정보를 공유하고 협력하는 좋은 방향으로 흘러왔기 때문에 한국이 외신의 찬양을 높게 받고 있는 것이다. 아주 상식적인 말로 하자면 정보가 투명하다는 것은 솔직하다는 얘기이고 인간은 부부, 부모와 자식, 형제, 친구 사이에 서로 솔직하지 못하면 거리가 멀어지고 솔직해야 마음으로 가까워진다. 비즈니스조차도 서로 진정성이 있어야 오래간다. 한국국민은 정부의 정보 투명성을 좋게 여기고 믿고 따르고 심지어 이번 총선에서 정부가 여러모로 허물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믿어주자는 심리 덕분에 표를 많이 주었다고 생각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한국 민주주의에 대해 별로 탐탁지 않게 여겨왔던 사람이다. 한국 민주주의는 너무 시끄럽다. 사회주의체제하에서 살아온 사람이라면 모두 같은 생각일 것이다. 너무 시끄러운 나머지 나라가 별로 나라 같지 않다는 생각마저 들 때가 많았다. 예를 들어 야당은 반대만 있고 대안은 전혀 없이 시비만 걸고 국민을 불안하게 만든다. 대통령을 함부로 하야하라고 외치고, 대통령 외교를 천렵질(낚시질)이라고 비하하고 심지어 대통령을 아주 막말로 ‘동네 강아지’ 대하듯 함부로 하는 저질 행위도 그 어떤 법적 책임을 지지 않아 나라가 시끌벅적해서 불안해 날 때가 많다. 물론 정권의 성향에 따라 시끄러운 상대를 대하는 방법과 방식이 다를 수 있다. 보수정권 같으면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언론을 장악해서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만든다든지, 정부에 지극히 맞서는 집단에 물대포라도 쏠 사건을 이 정부는 전혀 물리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시끄럽게 느껴졌던 것도 사실이다. 태극기가 나라의 상징이지만 일부 보수단체가 애국이란 명분으로 태극기부대를 만들어 정권을 흔들어도 정부는 물리적인 탄압이 없었다. 정부가 도가 지나친 반대 세력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점잖아서 무능하다는 소리까지 들어왔다. 이 정부가 도가 지나친 반대 세력에 잠잖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대한민국 인권신장을 취지로 만든 ‘민주주의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창업 맴버이고, 지금 문재인 대통령, 경관(京官)인 박원순 서울 시장, 인구가 가장 많은 경기도 이재명 지사 모두 민변 출신이다. 그래서 이 정부가 더욱 점잖다. 그렇기는 하지만 한편 정권이란 힘이다. 정권을 갖는다는 것은 힘을 발휘하라는 의미이다. 그런데도 힘을 전혀 쓰지 않고 저토록 점잖게 대하면 앞으로 극단적인 반대 세력들을 어떻게 이겨내려고 저럴까? 하는 의문을 수없이 해왔다. 아무리 자유민주주의라 하지만 무슨 정당들이 그토록 많은지 정당투표용지가 48센티이고 비례정당이 35곳이 기재되어 있다. “키 작은 사람은 감당키 버거울 것”이란 발언을 해 여론의 물매를 맞아 이미지에 손상을 입은 통합당 황교안 대표의 말처럼 선거민주주의 이래 투표용지가 가장 길었다. 35곳 정당 중에 들어본 정당은 거푸 대여섯 곳 넘지 않고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정당들이 선거를 앞두고 임시 창당한 것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무리 자유민주주의라도 거를 것은 거르고 국민들의 눈 높이에 맞는 정당을 투표용지에 올리는 것이 마땅한 일이 아닌가는 의문을 가졌었는데 그런 작업은 전혀 없었다. 아니 그런 작업을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만18세부터 전체국민에게 매달 150만원 준다고 하고 코로나환자는 1억씩 준다는 정당을 누가 믿을 것인가? 그러나 전혀 말이 안 되는 이런 황당무계한 장당조차 이름을 올렸으니 투표용지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더욱 한심한 것은 선거를 앞두고 공영방송인 KBS선거방송 타임에 기독교당 후보인 탈북자 여성이 출연하여 정권을 함부로 매도하고 구속된 전광훈 목사를 ‘영웅’으로 칭송하는 목소리를 함부로 발설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만약 조선족 후보가 그 탈북여성처럼 공영방송에 출연하여 함부로 정권을 매도하고 구속된 목사를 찬양한다면 한국사회의 반응이 어떨까? 그 결과는 뻔하다. 정신병 취급을 받지 않으면 당장 추방하라고 한바탕 난리일 것이다. 여기서 탈북자와 조선족을 비교하자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어떻게 ‘굴러온 돌’이 대한민국의 은혜에 대해 ‘원수’로 갚을 수 있는가는 것이다. 보수정부든 진보정부든 모두 대한민국 정부다. 탈북자는 대한민국 정부의 혜택을 입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현재 무슨 정부든 간에 정부를 매도하는 행위는 어쩐지 용납이 가지 않는다. 또 국민들이 아파하는 세월호 사건을 막말로 대한다든가, 5.18광주항쟁을 폄하한다든가, 대통령을 너무 막말로 공격한다든가 하는 정치인이 보수진영에 많아서 다수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어왔다. 어중이떠중이 정당들, 태극기부대로 불리는 애국당, 기독교당이라 불리는 극단보수단체, 막말을 하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지 못하는 막말 정치인들은 모두 이번 총선에서 궤멸 당했다. 만약 정부가 공권력을 투입하여 제거하려고 한다면 큰 파장을 불러올 것이고 후유증이 심각할 것이다. 이번 총선은 정부의 공권력이 아닌 국민의 한 표 한 표로서 이들 세력들을 말끔하게 정리해버렸던 것이다. 만약 정부의 힘으로 탄압한다면 반발이 엄청 셀 것이지만 국민의 표로서 심판 받으니 할 말을 잃고 조용히 지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제대로 된 민주주의 1인1표의 정치의 본질이자 기본 정신이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의 표현을 빌자면 이것이 바로 ‘시민적인 역량강화’ 정치시스템이다. 14세기 유럽을 강타한 흑사병은 5천만의 목숨을 앗아갔다. 당시는 국가적인 방역시스템도 없었고 마스크도 없는 상황에서 교회에 모여 예배를 계속 강행한 결과 감염이 더욱 심각했던 것이다. 이렇듯 큰 전염병을 겪고 나서 생각 없이 감성적으로만 믿어왔던 신에 대해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계기를 갖게 되었고 따라서 르네상스의 바람을 일으켰던 것이다. 한국도 이번 코로나19를 통해 사회적으로 큰 변화가 생겨났다. 우선 정부의 대응에 국민이 이번처럼 신뢰를 가져본 적이 없다. 시민의식이 이번처럼 강화된 적이 없다. 시민의식 강화라는 이 훈풍은 매우 힘든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치르게 되는 21대 총선까지 이어져서 또 한 번 지구촌을 깜짝 놀라게 했다. 미국은 오는 11월에 대선이 있다. 은근히 한국 총선을 지켜봤다. 결과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나서 아주 성공적으로 질서정연하게 치른 한국총선을 따라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이번 21대 총선에서 민주당이 압승을 거둔 것에 나는 별 관심이 없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이번 총선을 통해 정부의 공권력이 아닌 시민의 역량으로 부정세력을 정화하는 정치시스템에 매우 높은 점수를 부여하고 싶다. 더불어 이번 총선을 통해 한국사회는 엄청난 변화와 발전을 가져올 것이고 나라가 한층 더 높은 차원으로 업그레이드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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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21
  • [김정룡 칼럼] 코로나19와 흔들리는 재한조선족 정체성
    ●김정룡(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장) “야, 저 봐, 신천지 때문에 또 하루 사이 확진자가 100명이 넘어 나왔대. 아이 이상하다. 중국처럼 말 안 들으면 확 족쳐버리면 될 것을 한국정부는 왜 저리 무능하냐?” “엄마, 한국은 민주주의국가라서 인권 때문에 중국처럼 강력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어요.” “야, 야, 인권이고 뭐고 이 비상시국에 비상조치를 취해야지. 정부가 저렇게 물렁해서야 진짜 전쟁이 나면 어쩐다냐?” “잘 대처해 나가겠지 뭐, 엄마가 걱정해서 해결될 일이 아닌데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어이구, 답답해서 어디 보겠니! 이 긴장한 사태에 여당인지, 야당인지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매일 쌈박질이나 하구, 참 기가 막혀. 내일부터 뉴스 안 볼란다.” “엄마, 이게 민주주의이고, 민주주의는 본래 이렇게 시끄러운 법이예요.” 한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 모녀의 대화 내용이다. 다시는 뉴스 안 본다고 선포한 엄마는 이튿날 아침 눈 뜨자마자 TV를 켠다. 예전 같으면 매일 아침 기상하기 바쁘게 드라마를 보던 엄마가 요즘에는 매일 뉴스를 틀어놓는다. 뉴스 안 본다던 엄마를 딸이 놀려대면 ‘그래도 돌아가는 형세는 알아야지’ 하면서 코로나19에 관심이 크다. 사태가 사태인 것만큼 전 인류가 관심 갖는 코로나19에 엄마가 눈과 귀를 기울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매일 한국이 제대로 대응 못한다는 볼멘소리를 한다. 처음에는 딸이 뭐라 하면 화기애애하게 대화하였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엄마는 신경질적으로 변해간다. 한국이 영 못 마땅하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재한조선족은 머리 한쪽에는 현재 벌어서 먹고 살아가는 고국 한국이 자리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나고 자라고 사회생활 해오던 고향 중국이 차지하고 있다. 마치 한국과 중국이 천평(天平) 양쪽에 올라 있는 것처럼 어느 한쪽의 무게가 커지면 다른 한쪽의 무게가 작아지고 때로는 양쪽의 무게가 비슷해질 경우가 있을 수 있겠으나 대개는 한쪽의 무게가 더 커질 때가 많다. 그것이 한국이 될 수도 있고 중국이 될 수도 있다. 딸은 올해 30대 중반이고 엄마는 60대 중반이다. 딸은 중국연변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에 유학 왔고 현재 한국에서 직장생활 하고 있다. 엄마는 중국 연변 시가지에서 태어났고 모택동 지시에 따라 시골에 가서 집체호 생활 경험이 있다. 딸이 사춘기에 들어설 쯤부터 엄마가 우리 땐 집체호에 가서 고생도 많이 했지만 문예선전대를 조직해 노래와 춤으로 얼마나 즐겁게 보냈는지에 대한 추억을 귀가 따갑도록 들려주었다. 지금도 노래방에 가면 그때 그 시절 노래를 아주 즐겁게 부르면서 흥이 나면 춤 솜씨까지 뽐낸다. 엄마가 한국에 와서 돈을 버느라 고생을 많이 했지만 정신적으로는 아주 건전하고 건강해 보였다. 그러던 엄마가 요즘에는 얼굴이 어두워졌다. 지난 한국생활 10여 년 동안 엄마의 심경에 도대체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엄마는 중국연변에서 직장 다니다가 구조조정에 의해 실직당하고 한국에 왔다. 엄마가 한국 올 때는 1990년대 말이다. 남한에 연고가 없어 수속이 어려워 가짜 공무초청장을 들고 왔다. 처음부터 불법신분으로 살아가느라 육체적인 고생보다 마음을 졸이며 정신적으로 고통이 더 심했다. 각박한 자본주의 한국은 엄마를 할아버지가 살던 고국에 찾아온 한핏줄로 대하지 않았다. 앞서 1992년 한중수교 이후 한국 유학 왔던 조선족 젊은이들이 겪었던 조선족정체성 문제를 엄마도 몸소 겪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빚지고 왔기 때문에 오로지 돈을 벌 일념으로 정체성 따위는 뒤로 하고 일에만 몰두했던 것이 그 당시 재한조선족들의 삶이었을 것이다. 2007년 3월 노무현 정부 말기 실시된 방문취업비자(H-2)에 의해 불법체류가 합법화 되었다. 엄마도 중국에서 어릴 때 떼어두고 왔던 딸애를 자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한국에 대해 많이 쌓였던 섭섭함도 점차 많이 사라지게 되었다. 중국과 한국이 축구하면 어디를 응원할 것이냐? 10여 년 전 한국인들이 재한조선족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궁금증이었다. 나아준 엄마의 편이냐? 키워준 엄마의 편을 들 거냐는 유치한 질문이었다. 당연히 엄마는 여느 조선족들처럼 처음엔 무조건 중국 편이었다. 단일민족, 단일국가로 살아온 한국인들의 머리로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진리만 알았지 키운 정이 낳은 정보다 더 크다는 또 하나의 진리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고 이를 계기로 한국인들이 조선족에 대한 편견이 섰고 조선족은 믿을만한 족속이 못 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원한 짱개’들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는 인식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2000년대 들어, 특히 2007년 방문취업비자 실시와 그 이듬해인 2008년부터 시행된 재외동포비자(F-4)에 의해 한국에 온 조선족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재한조선족은 한국사회로부터 차별을 당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사회가 조선족을 차별하는 원인이 처음에는 양반과 상놈(常奴) 문화 때문이라는 문제의식으로 접근했는데 세월이 지남에 따라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예를 들어 한국에 시집온 조선족여성의 남편인 한국인 배우자가 째지게 가난해도 아내를 욕할 때면 ‘거지같은 나라에서 왔다’는 말을 입에 달고 있은 것이 보편적이었기 때문에 한국인은 양반, 조선족을 못 사는 중국에서 왔다는 이유로 거지(상놈) 취급하는 행태가 바로 이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물론 지금도 이 요소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이것이 한국인이 조선족을 차별하는 근원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한국인이 조선족을 차별하는 근원적인 문제는 따로 있다. 한국인이 조선족을 차별하는데 있어서 진보보다 보수진영이 더 심하다. 우리는 흔히 한국보수를 친일파, 있는 자, 가진 자 등등으로 낙인찍는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멋진 비유가 있다. 경상도에서는 만원을 태운 버스가 다음 정류소에서 손님이 더 오를 경우 자리를 내주면서 ‘함께 가야지’ 하고 나선 사람이 진보이고 ‘아이고 비좁아 죽겠는대 고만 태우고 빨랑 갑시다.’라고 불평을 부리는 사람은 보수라는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말씀한 ‘사람이 사는 세상’이란 바로 서로 차별 없이 골고루 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자는 것이다. 즉 내가 불편하더라도 손님을 태우고 함께 가려는 사람은 진보이다. 반면에 다른 손님이 더 오르면 내가 차지했던 공간을 침해당하고 따라서 나는 그만큼 불편해지기 때문에 양보를 거절하는 사람은 보수이다. 남과 북의 관계를 말하자면 진보는 북한을 돕자는 원칙이고 보수는 퍼준다고 비판하고 비난한다. 퍼준다는 것은 나의 몫을 북한에 빼앗긴다는 의식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한국인과 외국인을 비유해 말하자면 전반 한국사회에서 돈을 버는 총량이 100이고 이 전부를 한국사람, 즉 내국인이 독점하고 있었는데 외국인이나 조선족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점차 이들 소수 집단이 10~30% 가져간다면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몫을 빼앗겼다고 생각되어 외국인이나 조선족을 미워하게 되고 따라서 어떻게 하나 밀어내려고 차별을 하는 것이다. 거의 20년 전의 일이긴 하나 대선 때 이회창 보수당 후보가 불법체류를 1%미만으로 줄이겠다는 공약을 내걸었었다. 얼마 전에 보수당 오너인 황교안 대표가 “세금을 안 내는 외국인에게 같은 임금을 줄 수 없이 응당 차별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해 사회적인 논란을 일으켰다. 보수는 늘 이렇게 외국인을 차별한다. 보수가 외국인을 차별하는 것은 한국뿐만의 일이 아니다. 세계리더를 자부하는 미국은 보수당이 집권하자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쌓고 난민에 대한 혐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민사의 연구에 의하면 어느 나라든 보수는 외국인이나 이민에 대해 우호적인 나라가 없다고 한다. 보수도 문제이지만 대한민국은 현재까지 차별금지법이 없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외국인이나 조선족을 차별해도 법적 처벌이 불가능하다. 국가인권위원회라는 기구가 있긴 하지만 민원이 제기되면 권고조치를 내릴 뿐 법적 해결은 하지 못한다. 그래서 가해자들이 시정하면 좋고 듣지 않아도 어찌할 방법이 없어 외국인이나 조선족 차별을 법적으로 막을 장치가 없다. 일례로 관영매체인 KBS가 1년 넘게 조선족을 비하하는 <황해>라는 개그프로를 방송해도 법적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것이 조선족이 한국에서 차별당하는 객관적인 원인이라면 그럴만한 주관적인 이유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반성해야 한다. 조선족은 중국에서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중국문화가 몸에 배였고 생활관습문화도 배여서 한국생활에 적응이 어렵다. 예를 들어 직장에 근무하다가 그만두겠으면 사직서를 내고 절차를 밟고 사직해야 하는데 무조건 아무 말 없이 이튿날 근무하지 않는 것으로 사직을 무언으로 알리니 사장의 입장에서 환장할 노릇이다. 요즘에는 이런 사례가 적지만 10년 전까지만 해도 비일비재했다. 이외 쓰레기 처리, 무단횡단, 가래침을 아무데다 뱉기, 공공장소에서 떠들기 등 지금까지도 이런 공공질서의식 문제는 심각하다. 이번 코로나19 사태가 시작된 초기에 한국 언론들이 조선족 최대 밀집지역인 대림동을 취재하고 그곳을 더럽게 다루어 반발이 심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자면 대림동이나 가리봉동 혹은 조선족밀집지역 시장거리나 길 양쪽 늘어선 가게들에서 면식(面食)들이 덮는 장치가 없이 바람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어 정말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꼴불견이다. 해바라기 씨를 살 때면 한 줌씩 맛보는데 그 껍질을 바닥에 지저분하게 던져버려 진짜 환경이 더럽기로 말이 아니다. 우리는 늘 남이 우리를 비하한다고 불평만 부리지 말고 우리 자신이 뭘 잘못하고 있는지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한국인에게 비춰 보이면 좋을까 반성이 전혀 없다. 아무리 조선족이 한국에서 차별을 당해도 외국에서 왔으니 그러려니 하고 10여 년을 살다보면 한국사회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기 마련이다. 한국은 중국에 비해 전반 사회가 투명성이 높고, 공공기관이나 병원 등 서비스가 좋고, 치안이 좋고, 기후가 좋아 사람살기가 좋은 것은 사실이다. 민주주의정치가 시끄럽긴 하지만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편하게 살 수 있다. 쉽게 말해서 재한조선족은 한국생활에 두루 만족하면서 어영부영 살아가고 있었는데 요즘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이런 의식이 도망 가버렸다. 이런 변화가 생긴 계기는 코로나19 사태를 대응하는데 있어서 한국이 중국과의 대비에서 비롯되었던 것이고 또 일부 언론이 재한조선족을 더럽게 매도한 불상사도 있고 또한 총선을 앞두고 조선족을 매도하는 실체가 없는 유령인 ‘조선족게이트’니 ‘차이나게이트’니 황당무계한 일이 지난 3월 1일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1위에 오를 정도로 큰 이슈가 되어 조선족을 또 한 번 울렸다. 그건 그렇고 이번 코로나 사태 초기 만약 대리동이나 가리봉 및 중국인 밀집지역에서 확진자가 나왔다면 차별과 혐오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보수의 공격으로부터 막말로 ‘개박산’을 맞을 뻔했는데 다행히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다. 지구촌에서 최고 베스트셀러(<사피엔스>란 책이 무려 1천만 부나 팔렸음)를 자랑하는 유발 하라리는 지난 3월 20일 파이낸셜타임즈에 ‘코로나바이러스 이후의 세계’라는 제하의 칼럼을 기고해서 또 세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이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과 같은 위기상황에서 우리는 두 가지 힘들고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한다. 첫째는 전체주의적인 감시체제와 시민적 역량강화 사이에서의 선택이다. 두 번째는 민족주의적 고립과 글로벌 연대 사이에서의 선택이다.” 유발 하라리는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대응하는 방식을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누었는데 중국과 이스라엘은 전체주의적인 감시체제를 발동하였던데 비해 한국, 대만(중국 대북), 싱가포르 등은 시민적 역량강화를 발동하여 효과적으로 막아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중국과 이스라엘은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통제조치로 전체주의적인 감시체제를 발동하여 전체 국민이 통일행동을 취하도록 만들고 이를 어기면 강력한 형사적 처벌을 내린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는 몇 사람 모여 마작을 놀아도, 음식점에 모여식사를 해도 형사적 처벌을 안겼다. 하다못해 사사로이 아파트 구역을 벗어나도 처벌을 안겼던 것이다. 이에 비해 한국은 수백, 수천이 되는 사람들이 붐비는 장소에서 예배활동을 해도 형사적인 처벌이 없다. 만약 한국은 일부 교회가 아니었다면 진짜 청정지역으로 분류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사례를 목격하는 재한조선족은 한국이 무능하게 보였던 것이다. 반면에 중국의 강력한 전체주의적인 감시체제를 높이 평가하고 찬양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한국정부의 코로나19 ‘물렁한 대응’에 대해 조선족들이 아무리 못 마땅하게 여겨도 전 세계에서 한국이 가장 잘 대응하고 있다는 칭찬 일색이다. 선진국이라고 자랑해오던 유럽나라들이 한국 배우기에 나섰고 세계 최강인 미국도 한국에 진단카드 제공을 요청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국이 줄곧 배우기만 했던 독일이 요즘 한국한테서 배우는 반전이 일어나고 있다. 한국이라면 깎아내리지 못해 안달 떠는 일본도 요즘에는 한국칭찬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한국은 76일간 환자 추적·관리한 유일한 나라라고 빌 게이츠도 엄지로 칭찬했다. 한국이 뭘 잘해서 일약 ‘세계적인 스승’이 되었고 일약 스타덤에 오르고 있는가? 선진적인 건강의료보험제도, 선진적인 방역시스템, 정보의 투명성에 따른 관과 민의 정보의 공유, 시민의 협력정신 등 요소들이 세계적으로 높게 평가받고 있다. 이것을 유발 하라리는 ‘시민적 역량강화 시스템’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한국이 잘했다고 하지만 또 유발 하라리가 말하는 ‘시민적인 역량강화 시스템이 좋다고 하지만 전시와 같은 비상시국을 대처하는데 있어서 중국의 전체주의적인 감시체제에 비해 효율성이 어림없이 못 미치는 것은 사실이다. 만약 중국이 이런 전체주의적인 감시체제를 발동하지 않았더라면 그 큰 땅덩어리에 그 많은 인구를 가진 대국이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다. 결론을 말하자면 중국식 전체주의적인 감시체제는 중국실제에 부합하는 비상시국 대응에는 ’딱‘이다. 이에 대해선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제기할 수가 없다.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평상시에도 테러방지 위해 국민에 대한 감시 시스템을 구축했는데 이번 코로나19 대응에 그 시스템을 그대로 옮겨 사용해서 중국과 같이 전체주의적인 감시체제로 분류되고 있다. 물론 중국과 이스라엘처럼 코로나19 대응에 전체주의적인 감시체제가 다른 나라에도 100% 다 맞는다든지, 혹은 한국, 대만, 싱가포르처럼 시민적인 역량강화 시스템이 다른 나라에도 모두 배울 모델이라는 주장은 적합하지 않다. 나라마다 각기 제 나름의 실제가 있기 때문에 천편일률적인 체제나 시스템을 함께 똑 같이 적용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코로나19가 지나간 이후의 시대에 인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이다. 유발 하라리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세계는 전체주의적인 감시체제가 아닌 시민적인 역량강화 시스템을 선택할 것을 호소한다. 나름의 일리가 있겠으나 이 호소도 천편일률적이고 지구촌의 어디서든 맞는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번 사태 이후 시민적인 역량강화 시스템이 한국국민 삶에 더 유리하거나 보탬이 된다면 마땅히 유발 하라리의 선택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유발 하라리의 두 번째 선택, 즉 협소한 민족주의보다 글로벌 연대 강화는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정말 십분 맞는 주장이다. 글로벌 리더를 자칭하던 미국은 트럼프 시대를 맞아 이기적인 국수주의체제로 변화하고 있어 국제리더를 포기한 상태에 처해 있다. 미국 때문에 현재 글로벌 연대가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류는 새롭게 글로벌 연대와 협력을 이뤄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인류는 공멸할 수도 있다. 한편 과거 아세아는 구미의 민주주의에 대해 맹신해온 것은 아닌지, 이 기회를 빌려 깊이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와 선진국을 등식화로 인식했던 아세아의 사고가 얼마나 유치한 일인지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여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현대문명의 본산지인 미국의 경우 코로나19 초기 중국과 한국을 비웃고 때리고 공격하고 마치 자기네는 영원한 청정지역인양 거들먹거리다가 확진자가 30만이 넘어가는 거대 역풍을 맞고 있다. 민주주의 꽃인 아메리카가 이게 웬 말인가? 미국은 건강의료보험이 엉망이어서 정부가 검사비용을 부담하지 않아 400달러 되는 돈을 서민들이 벅차 검사를 외면하고 있어 사태가 더욱 심각해졌고, 방역시스템도 엉망이어서 진단카드조차 한국에 손을 내미는 신세이고, 마스크는 범죄자나 심한 결핵을 앓는 전염병 환자나 끼고 다니는 것으로 인식하는 문화가 있어 전염이 더욱 창궐해졌던 것이다. 어찌되었던 미국은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대응하는 것을 보면 과거 우리가 미국 하면 모든 것이 선진적일 것이라고 너무 맹신했다는 생각이 강열하게 느껴진다. 그럼 미국의 본가인 영국은? 그들과 거의 같은 종족인 백인 국가들인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 나라는 어떨까? 이들 나라들도 미국 처지와 별로 나은 바가 없이 도진개진이다. 이탈리아는 사태가 너무 심각해 중국처럼 강력한 조치(형사 발동)를 취하고 있다. 심각한 사태 앞에서는 장사가 따로 없다. 민주주의는 허울 좋은 개살구일 수 있다. 때문에 이탈리아는 전체주의 감시체제를 취할 수밖에 없다. 일본도 수도 동경을 봉쇄하느니 마느니 딜레마에 빠져 있다. 필리핀 대통령은 말을 듣지 않는 자에게 총을 쏴도 좋다는 어명을 내렸다. 역시 전체주의 감시체제가 최후의 처방이자 유일한 처방이 될 것이다. 우리가 상식처럼 알고 있던 지구상 선진국인 미국과 유럽나라들 및 일본의 사태가 심각해짐에 따라 한국이 가장 돋보이는 스타로 떠올라 갑자기 외교가 다망해졌다. 요즘 대한민국은 갑자기 지구촌의 ‘공자’가 되어 한국인들은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한국국민이라는 사실이 이렇게 자랑스럽게 느껴본 적이 이번이 처음입니다.” 요즘 한국인들의 정서를 나타내는 말이다. 재한조선족사회는 이와 같은 세상이 돌아가는 심원(深遠)하고 심오한 이치와는 거리가 멀게 한국과 중국 단순한 비교에 물젖어 있다. 요즘 엄마의 위챗이나 카카오톡방에는 온통 ‘인민전쟁 승리’ ‘봐라 대국은 대국이다’ ‘중국이 얼마나 통 큰 나라인가!’ ‘영웅의 도시 우한!’ ‘조국을 빛낸 우한 지원 영웅적인 의료일군들!’ 등등의 중국 찬양으로 가득 차 있다. 중국에서 나고 자랐고 중국에서 성인이 되어 한국에 왔기 때문에 재한조선족은 중국 찬양이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천평 한쪽에 중국 찬양이 무게를 너무 눌러 다른 한쪽의 천평 그릇의 한국비하(비하까지는 아니더라도 못마땅함)가 허망 공중에 떠 있다는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겨날까? 인간은 세 살 때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다. 또 독립적인 세계관이 형성되기 전에 받은 교육은 성인이 되어도 쉽게 바뀌지 않는다. 가령 성인이 된 후라도 강력한 이념과 사상교육 앞에는 장사가 따로 없다. 재한조선족이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대응하는 중국과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이 완전히 전체주의적인 일원화 교육을 받았던 영향이 다시 작동되어 이런 현상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엄마가 집체호 시절 불렀던 노래와 추었던 춤은 대개 이념과 사상이 짙은 ‘문예선전’이었다. 요즘 엄마를 바라보는 딸의 생각을 ‘우리 엄마는 집체호 시절로 돌아갔어요’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재한조선족은 부모의 품을 떠나 새로운 상대를 맞아 새롭게 생활하고 있다. 시집 간 딸이 친정에 대한 연민은 당연한 일이다. 친정 부모에 대한 미련은 영원히 잊을 수 없다. 또 잊어서는 절대 안 된다. 한편 새로운 대상을 만나 살면서 친정 부모의 장점만 생각하고 상대의 환경에 적응할 노력은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상대의 허물만 보고 살아간다면 얼마나 피곤할까! 피곤할 정도가 아니라 얼마나 괴로울까! 이슬람 국가가 싫으면서도 하나님의 복음 전파라는 사명을 지닌 열혈 전도사라면 모를까, 절이 싫다면서 계속 버티는 중의 행위는 결국 자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산에 가면 산에 맞는 노래 부르고, 강에 가면 강에 맞는 노래를 부르라는 속담에 굳이 치우칠 필요가 없더라도 천평 양쪽에 한국과 중국의 무게가 비슷하게 올려놓고 지혜로운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다. 필자/김정룡/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장,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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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19
  • [김혁 칼럼] 열반(涅槃)의 황학루
    ● 김 혁(재중동포소설가) 요즘 세간의 모든 이목은 온통 무한에 쏠려 있다. 혹한과 함께 덮쳐든 바이러스 병독에 사상 초유 도시봉쇄의 비극을 맞이한 무한, 그 바이러스의 병명은 “코로나” 혹은 “무한 폐염”이라고도 부른다. 병마와 간거한 고전을 치르고 있는 시민들과 의무일군들을 위한 비원과 성원이 담겨진 포스터들에는 무한의 절경이자 징표인 황학루가 자주 등장한다. 천하절경 황학루. 강서성 남창의 등왕각(滕王阁), 호남성 악양의 악양루(岳阳楼)와 함께 “강남 3대 루각”으로 꼽히는 루각이다. 루각을 세운 시기는 저 유명한 삼국 시대로 거슬러 오른다. 이 루각은 오나라의 왕 손권이 초나라 류비와의 전쟁을 대비해서 세운 망루이다. 지금도 황학루에는 손권의 강한 의지가 남아있어 “초천극목(楚天极目)”이라고 적힌 편액이 루각의 처마에 걸려 있다. 초나라의 하늘을 끝까지 보겠다는 뜻의 성구이다. 황학루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전쟁과 화재의 세례속에 7차례나 소실되고 중건되기를 반복하면서 군사들이 망을 보던 장소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관망하는 루각으로 거듭났다. 그리고 당대와 송대에 내로라하는 문사들이 황학루에 대해 례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중 당나라 시인 최호(崔颢)가 쓴 시 “황학루”가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昔人已乘黄鹤去/옛 선인은 누른 학 타고 가버리고, 此地空余黄鹤楼。/이곳 황학루만 텅 빈 채 남아있네. 黄鹤一去不复返/학은 한번 가서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고, 白云千载空悠悠/흰 구름은 천년 동안 한가히 떠도네 시성이라 일컫는 리백도 그의 작품을 보고 황학루에 대해서는 이보다 더 훌륭한 시를 쓸 수 없다며 붓을 내려 놓았다는 일화가 있다. 황학루 초입에서 만나는 각필정(搁笔亭)이 바로 리백이 붓을 내려 놓았다하여 이름 지어진 곳이다. 시 짓기를 즐겼던 모택동 주석도 역시 황학루를 두고 지은 률시가 있다. 황학루에는 자자한 명성만큼 재미난 전설이 깃들어 있다. 옛날 어떤 주막이 있었는데 주인장은 어느 날 찾아와 공짜 술을 퍼마시는 도사를 싫어하는 기색없이 환대해 주었다. 거나하게 걸치고 길을 떠나게 된 도사가 밀린 술값이라며 주막의 바람벽에 누른 빛갈의 학 한 마리를 그려주었다. "손님이 오면 손뼉을 치며 노래를 부르시오. 그러면 황학이 나와서 춤을 추며 주흥을 돋울 거요." 도사는 이런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아닌게 아니라 주인장이 노래를 할 때마다 학이 나와 춤을 추었는데, 이것이 입소문을 타고 널리 알려지면서 주막이 크게 번성하였다. 10년 뒤 도사가 다시 찾아와서는 피리를 불어 학을 불러내더니 그 학을 타고 하늘로 날아갔다고 한다. 그후 부자가 된 주인이 도사와 학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주막을 헐고 “황학루”라는 이름의 루각을 세웠다는 전설이다. 리백, 백거이, 최호(崔顥), 륙유(陸遊), 장거정(张居正) 등이 황학루를 읊었고, 황학루에 자신의 작품을 거는것으로 그 인끔을 뽐냈다. 그 기라성 같은 문인문사들의 자취가 서린 곳에 조선족 화가이자 혁명가인 한락연도 족적을 남겼다. 1937년 초겨울, 한락연은 십여년 만에 류학을 갔던 프랑스로부터 귀국했다. 당시 외국류학을 다녀온 미술가들은 대부분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는 것이 상례였다. 하지만 일제의 침략이 우심화되는 상황에서 구국의 일념으로 불탔던 한락연은 일신과 가족의 안위를 돌볼 사이가 없이 전운이 감도는 무한으로 성큼 발걸음을 내딛었다. 누른 빛의 장강과 푸른 빛의 한수가 만나는 이 곳에서 한락연은 공산당의 령도아래 결성된 항일민족통일전선조직인 동북구망총회(东北抗日救亡总会)를 찾아갔다. 주은래의 동의를 거쳐 한락연은 “동북구망총회”의 선전과 련락사업을 담당하게 되였다. 이 시기 “총회”에서 발행하는 “반공(反攻)”이라는 반월간 잡지의 표지에는 한락연의 그림이 자주 등장했고 그가 창작한 “노예살이를 원치 않는 이들은 일떠나 일제를 소멸하자!”라는유화도 한구(汉口)의 표지성 건물인 세관청사에 걸렸고 “전민항전” 이라는 거폭의 유화는 황학루(黃鹤楼)에 높이 걸렸다. 황학루, 그 고풍어린 루각에 높이 걸린 한락연의 그림은 민중들의 항일의지를 크게 격려했다. 황학루 루각에 오르면 무한 3진이 한눈에 들어 온다. 한수강과 양자강의 합수목에 자리한 중국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 무한은 한구, 한양, 무창 등 린접 된 3개 도시가 합쳐져 이루어진 대도시이다. 고도(古都) 무한은 중국 력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삼국연의”에 나오는 적벽(赤壁), 형주(荊州) 등 력사 현장의 대부분이 무한 주위에 모여 있다. 19세기 중반 이후 무한은 장강 수운의 리점을 활용해 발전을 구가하며 한때 상해에 버금가는 경제 규모를 자랑하기도 했다. 이 곳은 또 중국현대사의 주무대로 되여 두드러진 역할을 해왔다. 중국민주혁명의 발상지로서 신해혁명의 기폭제가 된 무창봉기도 이 지역에서 시작되였다. 1911년 10월 10일, 무창에서 거둔 혁명군의 첫번째 성공은 중국 전토로 확산되며 청조의 멸망을 불러왔다. 무한에는 지난 세기 30년대 우리의 겨레들의 반일의 자취도 력력히 서려 있다. 1938년 일제는 상해 남경을 거쳐 화중의 중심지 무한을 겁박(劫迫)하려 들었다. “항전의 수도 무한을 보위하자!” 절체절명의 순간 무한군민들의 함성이 터져올랐고 무한 삼진이 산악같이 일떠섰다. 1938년 10월10일 무한시 무창(武昌)구 자양로(紫阳路) 234호 대공중학교 강당에는 120여명의 건장한 청년들이 군청색 군복을 입고 비장하게 창립식을 올리고 있었다. "조선의용대의 기발을 높이 들고 용감한 중국 형제들과 손을 맞잡아 필승의 신념으로 정의의 항일전선으로 용감히 전진하자." 주먹을 불끈 쥐고 비장하게 선서하는 대원들은 모두가 황포군관학교 조선인 졸업생들이였다. 창립식에 특별히 중공의 대표들이 참석해, 주은래는 동방 피압박 약소민족의 해방에 대해 호소하는 연설을 했고, 곽말약은 문호답게 축시로 조선의용대의 무운장구를 기원했다. 창립식이 끝난 뒤 경축행사도 열렸다. “아리랑” 합창과 “두만강변” 연극이 무대에 올랐다. 창립식이 열리는 동안 밖에서 가끔 포성이 들려왔다. 무한에서 한민족의 반일독립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긴 단체- 조선의용대가 세상을 향해 우렁찬 고고성을 지르는 순간이였다.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즉각 포탄이 터지고 초연이 자오록이 피여오르는 무한 시내로 투입됐다. 무한 중심가에서 반일 선전전을 벌렸다. 그들은 사다리를 메고 다니며 담벽과 길바닥에 콜타르로 선전구호를 쓰기 시작했다. “일본 형제들이여, 착취자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지 말라”“총구를 상관에게 돌려라” 이 광경이 그후 중국문학사에서 문호의 반렬에 오른 곽말약의 뇌리에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다. "의용대원들은 네댓명 씩 한조가 돼 콜타르나 페인트로 거리나 벽에 대적 표어를 쓰고 다녔다. 모두 조선의용대뿐이였다. 무한함락 직전 대적표어를 쓰고있는 것은 조선의 벗들뿐이였다" 곽말약이 저서 “홍파곡(洪波曲. 1979년 발간)”에서 묘술한 무한 함락시의 조선의용대에 관한 생동한 묘사의 한 구절이다.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이였던 조선족 문단의 거목- 김학철도 조선의용대의 창설과 무한, 태항산에서의 항일력정을 세세히 기록해 후세에 남겼다. 한시나 고사에서 곧잘 등장하는 루각은 흔히 세월과 력사의 견증물로 사람들의 시선 속에 간주되여 있다. 세상사의 뜬 구름과 전란의 초연을 지켜 본 황학루는 또 한번 세기의 증언자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다. “초천극목(楚天极目)”. 하늘을 끝까지 보겠다는 호매로운 성구의 편액이 루각의 처마에 걸려 있는 황학루, 그어떤 역경도 이겨내며 세월의 행간에서 넘어지지 않고 우뚝 선 황학루는 고사와 희망을 우리에게 전언해 준다. 이제 검은 구름은 걷히고 더욱 명징(明澄)해진 하늘아래 학은 다시 돌아 올것이며, 다시 돌아 온 학은 열반을 거친 루각우에서 너울거리며 새로운 전설을 춤사위에 담아 이야기 해 줄 것이다. 필자/김 혁(재중동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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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19
  • 아프도록 아까운 나의 옛날이여!
    ● 훈 이 남에게 맡기고 한국가서 거의 십년세월을 지우고 오니 옛집이 얼마나 많이 망가져 버렸는지 맘놓고 발들여 놓을 자리도 없을 지경이 되였다. 남편과 둘이서 어렵던 세월에 오순도순 세아이들을 키우면서 꿈도 많았던 내 보금자리, 비록 초라하게 붉은 기와를 얹은 옛스런 단층 벽돌집이지만 늘 윤기가 돌던 내집! 쇠줄로 엮은 넓고 예쁜 초롱에 닭, 오리,게사니 키워서 고기먹고 알먹고 담장을 의지해서 벽돌로 아담한 개집을 지어 네눈박이 귀여운 “보초군” 살게하고 얼마 안되는 둘의 월급을 쪼개가면서 다들 부러워하게 총명했던 아이들 공부 뒷바라지 하던 재미, 구석구석 먼지 티끌이 쌓일세라 쓸고 닦으면서 만석부자 부러워하지 않고 살았던 알뜰한 내 살림! 복숭아,사과, 오얏나무가 사이좋게 둘러서 있던 앞뜰 우물터, 과일꽃 향기와 록음이 무지 은혜롭던 봄 여름이 지나 가을이 오면 주렁진 과일나무 밑으로 이웃집 아낙네들과 아이들이 줄레줄레 모여들어서 넉넉한 내 인심을 바구니에 가득 담아들고 흐뭇해했던 기억들… 갖가지 풋남새들이 흐드러지게 자라서 이웃에 나누어 주면서 맛있게 먹던 뒤뜰 채소밭…..아! 그때가 너무도 그리워서 난 미칠것만 같고 하염없는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그처럼 알뜰했던 내 보금자리 살림집을 게으름뱅이 어떤 부부가 들어와 살면서 십년세월 아예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과일나무는 다 죽어 버리고 숱한 닭오리 게 사니를 키웠던 예쁜 쇠줄 초롱마저 쇠붙이라고 다 팔아먹은건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성스런 우물터에다는 더러운 널판자를 깔고 닭을 치고 있어서 우물터가 아예 닭똥터가 되었고 집안 구석구석 때와 먼지에 찌들어서 내가 살았던 깔끔했고 윤기돌던 흔적이란 찾아볼수도 없으리만치 돼지우리도 그런 돼지우리가 없다. 아! 가슴이 찢어지고 억장이 무너진다. 사람이 어찌 이렇게도 더러울수가 있을까리해가 안된다. 너무도 화가 나서 몇 날 며칠을 새벽 세시쯤 시작해서 해가 떴다지고 달이 뜨고 그래서 어두워 보이지 않을때까지 닦아내고 쓸어내고 정리하고 가담가담 잔소리도 해가면서 애쓴 보람에 원상 복구를 어느 정도 시켰다. 물론 재개발을 기다리고 있는집이고 이미 고향에 아파트를 따로 마련해서 살고 있으니 우리가 거기에 다시 살 가망은 거의 없지만 내 사랑 내 꿈이 깃들어 있었고 우리 다섯식구가 지지고 볶고 진한 정을 나누면서 긴 세월을 같이했던 알뜰한 옛 보금자리가 그렇게 망가져 가는걸 그냥 보고 있으려니까 아기자기 살갑던 우리가족의 정마저 엉성하니 변해가는게 아닌가 싶어서 너무나도 가슴아픈 일이였다. 예로부터 메토끼 잡으러 가면 집토끼가 잃어진다 했던가? 곰곰히 생각해 보니 한국가서 돈 번다고 살림을 팽개치고 설쳐대는 사이 나는 돈으로는 도저히 살수 없는 많은 소중한 것들을 잃은 것 같다. 지금은 동서남북 여기저기에 다 흩어져 버린 우리집 식구들, 십년 리별에 아예 습관이 되어 버려서 만나면 오히려 서로가 서먹해진 이상한 느낌! 다시 한데 모여 오순도순 화기애애하게 살던 그 옛날로 되돌아 갈수만 있다면 내가 무엇인들 아낄까? 되돌릴래야 되돌릴수 없이 된 지금에야 그 옛날의 소중함을 알게 되였으니 이보다 통분한 일이 다시 없는데 돈에 속아서 보이지 않는 건강까지 잃은점 또한 더더구나 통분한 일이 아닐수가 없다. 한국가기전에 그처럼 짱짱했던 내 몸이다, 기껏해서 어쩌다 걸리군 하던 경한 감기가 제일 무서운 병이였고 웬간히 무거운 물건은 겁없이 다루던 나, 지금은 껍질만 남았다. 열근쯤되는 물건도 아예 깔려 죽을듯이 무겁게 느껴지는 등신이 되었고 엄중한 풍습성관절염에 심한 골다공증과 빈혈에 저혈압에 영양부족에…그리고 나 스스로는 별로 못 느끼는건데 언니들의 말을 빈다면 난 또 심한 강박증 증세까지 보인다는가? 그새 그렇게 그냥 나는 사람이 아닌 돈버는 기계로만 산 것이였다. 귀국후 일년 반 동안을 북경 청도 흑룡강의 여러지역과 여기 연변지구까지 많이 돌아다니면서 새삼스레 느낀건데 우리 중국에서는 사람들이 너무 신 나게 한가하게 놀면서도 잘먹고 잘 살고 있는것 같다. 어디를 가도 공원이나 아파트 단지 넓은 공터나 이름모를 어느 광장이나 운동장같은 그런 곳엔 아침저녁으로 늘 숱한 사람들이 모여서 음악을 틀어놓고 춤추고 신체 단련을 하고 그렇게 시름없이 신 나게 노는 사람들 천지다. 거기에 비해 크고 작은 공원에 아파트단지마다 있는 작은 휴식터에 간단한 체육시설이나 기구들이 널려있는 한국이지만 누구나 먹고살기 바쁜 한국인들이라 그런 곳에서 한가하게 춤이나 추고 그네타고 있는 모습들을 난 본적이 없다. 그렇게 중국인들과는 완전히 다른 한국인의 생활리듬에 물 젖은 탓이였던지 지금와서 생각하면 굳이 그렇게 악을 쓰고 일하지 않아도 되였을 것을 하루라도 놀게 되면 큰 죄라도 짓고 있는듯이 난 늘 불안했던것 같다. 그래서 거의 십년 세월 여관의 청소아줌마로 일했던 내가 휴식한 날짜는 손으로 꼽을 정도인데 영 아파서 도저히 일할수가 없는 그런 날에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그냥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고자고 또 자고 저녁부터 다시 새벽까지 자고자고 또 자고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서 그 다음날 머리를 들 수 있는정도 다리를 끌지 않고 걸을수 있는 그런 정도면 다시 일을하고…. 그렇게 보낸 세월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십년이나 되였으니 내 몸이 쇠덩인들 당할 수 있을까? 그래도 은행에 저금이 늘어나는 재미에 빠져서 몸이 썩어 가는 줄을 모르고 있다가 지난해 삼월 중순의 어느 날, 내가 이러다가 앉은뱅이가 되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두다리가 갑자기 심하게 아파서 화장실도벽을 밞으면서 기어가는 상황이 된 것이다. 하늘이 노랗게 보이고 눈앞이 캄캄해났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것이다. 돈을 많이 벌어 금산은 산을 쌓아 놓은들 내가 걸음도 못걷는 병신이 되어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래서 몇 번이나 전전긍긍을 하면서 미루어 왔던 귀국을 갑자기 결심하게 된 나였다. 이제 하늘이 두 쪽이 나더라도 집에가고 싶었다. 아프고 보니 그처럼 목숨 같던 돈이 원쑤같았다. 그립던 내 식구들을 만나보지도 못하고 그냥 한국에서 이대로 죽을 것만 같았다. 나의 귀국은 그렇게 갑자기 이루어졌고 귀국과 함께 열심히 벌어 모았다고 여겼던 “큰돈”도 실감이 나지 않게 여기저기 반년도 되기전에 다 날아나 버렸다. 결국 출국전이나 똑같이 난 또다시 빈털털이가 된 것이다. 돈이란 돌게 생긴 물건이라서 아무리 벌어도 손에 남아 있는 법은 없다고 했던가? 그것이 누구의 명언인지는 몰라도 진짜로 100%진리임을 실감했다. 이리 될줄 내가 미리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왜 그 긴 세월 제몸을 혹사하며 기를 써 왔을까? 실로 후회막급이다. 그렇게 내딴엔 대단히 적시적이고 명지한 결심이고 행동이였다고 여겼던 나의 귀국, 하지만 이미 늦었다! 심심히 느끼건대 지금 남아 있지도 않고 이미 다 없어져 버린 돈을 다 끌어모아 처넣어도, 아니 그보다 백배 더 되는 돈을 처넣는대도 목숨보다 더 소중했던 많은 것들은 이미 되돌릴수 없이 나한테서 영영 떠나가 버리고 말았다. 아, 그리운 옛날이여! 소중했던 내 건강이여!!!! 돈에 미쳐서 그리 허망하게 잃어버리기엔 너무도 아깝고 아픈 내것들이였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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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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