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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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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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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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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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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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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한반도의 봄 이제 진짜 오는가?
    ● 철 민 3월이 왔다. 꽃이 핀다는 춘삼월이다. 이제 곧 저기 제주도 한라산 기슭으로부터 훈훈한 봄바람이 불면서 버들개지 움트고 유채꽃이 만개될 것이다. 그리고 봄은 서서히 북상하면서 광주, 청주, 서울을 거슬러 올라가다 다시 휴전선을 넘어 평양, 함흥을 거쳐 북단의 신의주에도 가닿을 것이다. 봄, 반도의 봄은 철따라 분명 오고 있다. 아니, 지난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남과 북(북과 남)의 고위급 회담이 재개되면서, 또한 평창 동계올림픽에 참가한 북측고위급 대표단, 응원단 및 예술단과의 만남을 통해 꽁꽁 얼어붙었던 대한민국의 최북단 강원도 땅에도화기애애한 봄소식은 진작 전해졌다. 그렇다. 다가오는 한반도의 봄은 계절 따라 오는 자연계의 봄만은 아닌 것 같다. <우리는 하나>라며 서로 손잡은 사람들, 손에서 흐르는 난류를 통해 계절보다 앞당겨 오는 봄을 느꼈을 것이며 또한 모두들 이를 기다렸을 수도 있다. 이젠 평창 동계올림픽은 막이 내렸다. 북측대표단은 돌아갔다. 하지만 화해의 무드는 평창 동계올림픽 기간이란 <단기행위>로 끝나지 말아야 하며 자연계의 봄과 더불어 남북교류의 새봄은 계속 이어져야 한다는 기대감이다. 즉 봄처럼 훈훈하고 여름처럼 뜨겁다가, 다시 가을처럼 쌀쌀하고 겨울처럼 얼어붙는 현상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우리 민족은 슬기롭고 위대한 민족이다. 스포츠에 자질이 뛰어나고 노래와 춤에도 인기가 있는 민족이며 남성은 용맹하고 여성은 부드럽다. 이번 평창 동계올림픽에서도 한국은 금메달 5매, 은메달 8매, 동메달 4매로 종합순위 7위를 기록, 11위인 일본과 16위인 중국을 훨씬 추월해 아시아 국가로서는 최강자 위치를 확립했다. 인구 5000만 명에 불과한 대한민국이 인구 1억 2000만 명을 가진 일본과 인구 14억 명을 가진 중국을 제치고 동계올림픽에서 아시아의 최강자로 군림했다는 현실, 그리고 몇 년 전 기네스북에도 오른 북한(조선)의 대형집단예술체조 공연(10만 명 출연) 역시 웬만한 국가나 민족으로서는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는, 인구 2500만 명밖에 안되는 북한이 창출해낸 세계적인 예술로 주목을 받았었다. 그 외에도 세계적으로 위치를 굳힌 한국의 반도체 제조업, 선박제조업과 자동차공업 등 이루다 자랑할 수 없다. 그런가 하면 우리 민족은 싸움도 잘 한다. 헌데 싸움이라면 별로 자랑거리로 될 것 같지 못하다. 옛날 이순신 장군처럼 왜적과의 싸움에서 용감한 것을 사례로 들라면 자랑거리겠으나 반대로 자기 민족끼리도 잘 싸운다는 점, 이는 자랑거리보다는 수치이며 치명적인 약점이다. 크게는 남과 북으로 마라톤식 싸움이 계속 이어져 왔고 작게는 지역끼리 싸움이 잘 날이 별로 없었다. 남한만 보더라도 지역끼리, 정당끼리 곧 잘 싸웠으며 더 작게는 잘 어울려오던 친구끼리도 돈 때문에 싸우고, 여자 때문에 싸우고, 함께 술 마시다가 싸우고 등을 반복한다. 우리 민족은 1945년 미소(美苏)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된 뒤 지금까지 70여 년간 통일을 부르짖어 왔다. 통일의 기회가 없은 것도 아니라는 분석이다. <평화통일>이란 목소리가 높았고 염원도 같았으나 그 목소리가 합치지 못했으며 그 방법과 수단이 각각 달랐기에 이념과 체제가 다른 두 개의 정부가 나타났고 대화와 타협에 의한 <평화통일>에 실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동족상잔의 <6.25>가 터졌고 300만 명의 수난자와 1000만 명의 이산가족이 생기었으며 오히려 분단의 골을 더욱 깊어만 갔다. <6.25>란 화제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당시 <통일전쟁>이란 슬로건은 죄악의 계기었지만 전쟁초기 남측 정부가 진정 민족을 생각했더라면 북측과 타협해 전쟁을 멈추고 유엔군 참여도 없게 만들어 통일을 완수할 수도 있었을 것이며 반대로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할 때 북측 정부 역시 맥아더 장군의 투항제안을 받아들였더라면 중국군의 참전을 막고 통일이 가능했을 수도 있었다는 안타까운 마음에 엉뚱한 분석도 해보았다. 적절한 추리인지 모르겠다. 옛날 필자는 부친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가장 살기 힘들고 고달픈 곳이 조선(반도)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일본이 중국을 치자면 반드시 거쳐할 관문이 조선이고 또한 중국이 일본을 막자면 반드시 조선에서 일본이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리가 있었다. 옛날에 그랬는가 하면 오늘까지도 미국은 반도를 포기하지 않고 있으며 중국 역시 반도땅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그래서 군사학자 및 역사학자들은 반도를 <완충지대(缓冲地带)>라고도 지적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객관요소 등으로 반도의 통일이 그만큼 힘들고 어려워지고 있는 것 같다. 한편 주관적으로 볼 때 우리 민족은 남비처럼 빨리 끓고 빨리 식는 성격을 갖고 있다는 자아분석이다. <6.25> 이후 남과 북이 마주 앉아 통일과제를 추진한 적도 몇 번 있은 걸로 알고 있다. 특히 1972년에는 이른바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면서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고 사람들 모두가 그렇게도 갈망하던 통일이 당장 다가오는 줄로 여기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불과 1년 뒤 한동안 북적이던 통일의 열은 급기야 식으면서 원점으로 돌아갔다. 남비 식으로 빨리 달아올라 끓었고 또 인차 식으면서 겨울처럼 결빙되었었다. 그리고 그 뒤 전두한 및 노태우 정부 시절에도 남북의 화해시도는 있은 것 같았으나 여전히 별다른 결과가 없었으며 2000년에 있은 <6.15> 남북공동성명이 있은 후 남북관계는 급물살을 탄 듯 개선되는 양상을 보이었다. 그것을 계기로 노무현 정부시대에는 개성공단 가동, 남북철도연결 등 일련의 대형사항들이 이뤄지면서 역시 통일이 멀지 않겠구나 하는 기대감도 보이는 듯 했다. 하지만 이것이 이명박 정부 시대에 들어서면서 180도로 바뀌었다. 남과 북(북과 남)이 재차 급속도로 냉전 상태로 돌아갔고 이어 <천안함 사건>, <연평도 포격사건> 등이 터지면서 박근혜 정부 시대에는 판문점 전화선 차단, 휴전선 대북방송 재개 및 개성공단 중단 등으로 그 동안 통일을 위해 양측이 들였던 노력이 물거품으로 되고 말았다. 지금은 이미 서기 2020년을 향해 육박하고 있다. 분단의 역사도 세기를 뛰어넘어 70년을 넘기고 있으며 1945년 이전 비록 일제의 치하에서 생활했지만 남과 북을 넘나들며 살았던 세대들도 한 두 명씩 우리의 곁을 떠나고 있다. 통일의 중요성을 우리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을 세대들이다. 반대로 이들에 비해 필자와 비슷한 나이의 세대는 통일의 절박성에 대해 어느 정도 모호하다는 생각이 들며 지금 한창 자라고 있는 세대들은 더욱 분단의 아픔이란 뭔지도 모르는 세대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이들은 북한이란 <국가>가 있으며 그 곳에서도 우리와 같은 민족이 살고 있다는 정도로 알고 있을 것이고, 70여 년 전에는 분단된 반도가 아니었다는 것도 역사교과서를 통해서나 배웠을 뿐 그것을 정녕 피부로는 느끼지 못했을 세대들이다. 우리 나이의 세대보다 더욱 모호하다는 뜻이다. 맹목적인 통일을 갈망하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통일이난 먼 앞날의 일로 될 수도 있다. 때문에 우선 통일을 위한 인프라구축부터 잘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남과 북 서로에 유리한 행사들을 자주 만들고 교류를 벌이며 또한 이러한 것들을 통해 가까워져야 한다. 큰 갈등은 작은 갈등으로 취급하고 서로간의 신뢰를 보여주고 그것들을 이행해야 할 것이며 또한 그것이 세대가 바뀌고 정부가 교체되더라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분석이다. 필자는 반도인 혈통의 중국인이다. 이전에는 이북에도 가보았고 지금은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몸이다. 이렇게 북과 남을 오가면서 남측에 대한 북측 사람들이 보는 시각, 북측을 보는 남측사람들의 시각 등을 모두 체험했으며 중국 본토인들이 남과 북을 보는 분석도 자주 들어보군 했다. 총적으로 북측을 보는 시각이 남측 사람들보다 더 객관적이고도 합리적이며 남측을 보는 북측 사람들보다 더 객관적이고도 합리적일 수 있다. 현재 남측이나 북측 사람들은 <평화통일>을 부르짖으면서도 서로 간 상대방을 과장하여 비난하고 또한 이빨을 갈기도 하는 현상이 비교적 심하다. 이에 중국 본토인들은 어찌 보면 잘코사니를 부르는 양상이다. 아니 비웃는 것이 분명했다. “서로 <개싸움>을 하는 꼬리방즈(高丽棒子)들”이라고 비꼬아대는 사람도 보았다. 이럴 때마다 필자로서는 수치감과 더불어 안타깝기만 했다. 그것은 필자 자신이 중국인이 아닌 <반도인>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중국인으로 생각하면 그런 것에 신경 쓸 필요조차 없을 것이 아닌가?! 바로 반도인으로, 또한 한반도가 나의 모국(조국?)으로 생각하기에 울화가 치밀어 중국 본토인들과 언쟁을 벌이고 그들한테 한대 갈겨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도 했으며 오늘은 또 말밥에 오르거나 큰 비난을 당할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지난 세기 90년대엔가 일본에서 활동하는 문인 김문학씨가 <한중일 삼국지>를 펴내어 화제에 올랐다. 가령 필자가 김문학씨처럼 자신의 <한중일 삼국지>를 쓴다면 일본인은 섬나라에서 호시탐탐 바다 건너 그 뭔가를 노리는 <열도(列岛)인>으로, 14억을 품고 있는 중국인은 그들 내속을 알기 어려운 <대륙인(大陆)인>으로, 한국인은 각각으로 외세를 등에 업고 감정풀이나 잘하는 <반도(半岛)인>으로 묘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라 지나온 역사가 그것을 잘 증명하고 있으니 말이다. 요즘 필자는 이런 한탄도 자주 해본다. 지난 세기 70년대 베트남 사람들은 전쟁으로 통일을 했고, 독일 사람들은 하룻 새에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면서 통일에 성공하였지만 우리 민족은 왜 1950년대의 전쟁통일에도 실패하였고 오늘까지도 그 통일에 전전긍긍만 하고 있는 걸까?! 한반도의 통일이 힘든 것이 외세 때문인가 아니면 우리 민족 자신 때문일까?! 가령 독일 사람들 같은 성격이라면 한반도의 통일이 지금까지 지연되었을까?! 그러면서 지금까지 내려온 비극적 역사를 개변시키는 것이 반도의 지금의 세대 혹은 아래 세대 사람들한테 맡겨진 역사적 사명이라는 생각이다. 통일된 한반도는 만들지 못하더라도 계속 전쟁위기를 겪는 반도를 세세대대로 물려주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요즘 반도는 어렵게 찾아온 화해적인 분위기인 것 같다. 상대방에 대한 고강도 비난도 한결 누그러들었고 계절적인 봄도 다가오고 있다. 이를 소중히 여길 필요가 있겠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통일을 위한 다음 단계의 일에 착수하는 것이 우선인 것 같다. 계절과 함께 찾아온 남과 북의 <화해의 봄> 이는 이제 진짜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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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3-01
  • 동북항일연군 조선인 "여장군" ― 허성숙③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간고한 항일무장투쟁시기 여성의 몸으로 육중한 기관총을 보총다루듯 휘두르며 일제놈들을 무리로 쓸어눕힌 한 조선인 “여장군”이 있었다. 그가 바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4사 제1퇀 제1련의 첫 여성기관총사수인 허성숙(许成淑)이다. 1938년 5월, 허성숙은 항일연군 제2군을 따라 수개월에 달하는 일제와의 조우전을 벌이면서 마침내 겹겹으로 되는 적의 봉쇄와 추격을 벗어나 로야령산속에 진입,로야령에서 항일을 견지하고 있는 항일연군 제1로군과 승리적으로 합류하였다. 합류 후 제2군의 4사와 제1군은 배합하여 연속 몇 차례의 대승전을 거두었다. 그 후 제2군은 다시 화전, 교하와 연길지방으로 진출했다. 1939년 1월, 제2군의 4사는 화전에서 항일명장 양정우가 인솔하는 부대와 합류하였다. 양정우 사령의 인솔하에 일거에 화전현 경내에 있는 목기하림장과 따푸차이허진을 공략했다. 두 차례의 전투에서 허성숙은 상급에서 준 정찰임무를 원만히 수행, 적군의 인수와 병력포치 등 정보를 부대에 제공하여 큰 공로를 세웠다. 이어 또 안도현 경내에서 있은 어느 한 차례의 매복전에서 지혜롭게 적의 기관총 한 자루를 노획하기도 했다. ▲ 대사하전적기념관 허성숙 열사 동상 1939년 7월, 항일연군 제4사와 제5사의 주력은 개편되어 항일연군 1로군 제3방면군으로 되었고 허성숙은 제3방면군 13퇀 기관총반의 반장으로 되었다. 부대재편성이 끝난 후 제3방면군에서는 항일투쟁의 새로운 고조를 형성하기 위하여 적들의 요새지역인 대사하진을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지휘부에서는 적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하여 우리 부대를 두개 방면군으로 나누어 적들의 응원부대가 올 수 있는 대장강남골과 소사하 방면으로 파견하고 주력부대는 대사하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8월 24일 아침 주력부대는 총공격을 개시하여 대사하진 경찰서를 점령하고 자위단의 무장을 해제시켰으며 2시간 후에는 대사하진을 완전히 점령하였다. 대사하진이 함락되었다는 급보를 받은 송강에 주둔해 있던 적들은 급급히 부대를 동원하여 대사하 방면으로 달려왔다. 이때 남골에 파견된 우리 부대는 기회를 보아 순식간에 대장강과 동양툰부락을 점령함으로써 명월구의 적들로 하여금 부득불 증원부대를 파견하지 않으면 안되게 하였다. 그날 밤 지휘부에서는 적들이 추격해 올 것을 예견하고 허성숙과 한 전사를 동양툰에 파견하여 보초를 서게 하였다. 그들은 임무를 받고 동양툰에 도착하였으나 이미 늦었다. 놈들은 6대의 트럭에 앉아 마을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사태는 매우 긴급하였다. 재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지휘부가 위험한 처지에 빠지게 되였다. (어떻게 할 것인가, 둘이 함께 부대에 연락을 간다면 적들을 견제하지 못하므로 부대의 안전에 위험이 끼칠 수 있다. 어떻게든 저놈들을 견제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한 허성숙은 비장한 결심을 내렸다. 죽음을 각오하고 장엄한 임무를 자기가 맡을 것을 결심한 허성숙은 명령조로 다른 대원에게 말하였다. “어서 가서 지휘부에 소식을 전하오. 내가 적들을 견제하겠소!” ▲ 동양툰 허성숙 희생지 허성숙은 그 전사를 지휘부로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들이 탄 자동차가 마을 어귀에 들어섰다. 허성숙은 자리를 정한 후 침착하게 앞에서 달리는 자동차를 겨냥하여 사격을 시작했다. 불의의 습격을 받은 놈들은 항일연군의 매복에 걸려든 줄로 여기고 자동차를 세운 채 어쩔 할 바를 몰라 하며 헤덤벼 쳤다. 한참 후에야 대방이 소수임을 눈치 챈 적들은 그제야 제정신이 들어 허성숙을 향해 집중사격을 들이댔다. 탄알은 빗발치듯 허성숙을 향해 날아왔다. 허성숙은 완강하게 저격하였다. 시간은 1분 1초 흘러갔다. 안달아난 적들은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돌격해왔다. 지휘부의 안전을 위하여 허성숙은 개인의 안전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그는 유리한 지세로 옮겨가며 대응 사격을 가했다. “땅!” 아츠러운 총소리와 함께 적탄이 허성숙의 다리를 명중하였다. “목숨이 붙어있는 한 적들을 견제해야 한다!” 허성숙은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그러나 연속 날아드는 적탄은 또다시 그의 복부를 명중하였다. 그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의 사격이 중지되자 적들은 그가 죽은 줄 알고 곧추 마을을 지나 지휘부가 있던 산으로 향하였다. 얼마 후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허성숙은 있는 힘을 다하여 부대가 있던 산 밑으로 기어갔다. 그러나 지나친 출혈로 하여 그는 얼마 못 가 다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이튿날 마을 사람들이 그를 발견하고 구원의 손길을 뻗쳤으나 지나친 출혈로 하여 얼마 안 지나 그의 심장은 박동을 멈추었다. 부대는 안전하게 전이하였다. 그 이튿날 항일연군은 대장강남 골에서 멋들어진 매복전으로 적들의 “토벌대”와 특설부대 170여 명을 전부 소멸해버렸다. 그러나 부대의 안전을 위하여 단신으로 적들을 견제한 허성숙은 이 기꺼운 승리도 보지 못한 채 24살 꽃 나이로 전우들과 영영 이별하였다. 허성숙은 청춘과 생명을 성스러운 항일무장투쟁에 아낌없이 바치었다. 참고문헌 金正明 編, 『朝鮮獨立運動』 2, 原書房, 1967, 65~66쪽.☞ 김정명 편, 『조선독립운동』 1-분책, 563~564쪽.☞ 김정명 편, 『조선독립운동』 3, 326쪽.☞ 박용옥, 「조신성의 민족운동과 의열활동」,『오세창교수 화갑기념논총』, 한국근현대사학회, 1995 참조.☞ 『독립신문』 1921년 1월 15일, 3월 26일, 12월 6일자 ; 『동아일보』 1921년 10월 21일자 ; 박용옥, 「조신성의 민족운동과 의열활동」, 『오세창교수 화갑기념논총』.☞ 『동아일보』 1921년 6월 13일자.☞ 연변조선족자치주부녀연합회 편저, 『항일녀투사들』, 1984.☞ 村田陽一 編譯, 『コミンンテルンン資料集』 2, 大月書店, 1982, 75쪽.☞ 조선총독부, 『朝鮮の治安狀況』, 1930, 12~13쪽.☞ 중공연변주위 당사사업위원회 편저, 『연변인민의 항일투쟁』, 연변인민출판사.☞ 연변조선족자치주부녀연합회 편저, 『항일녀투사들』, 101~102쪽.☞ 연변조선족자치주부녀연합회 편저, 『항일녀투사들』, 201~216쪽. 허성숙의 열사전은 『불멸의 투사』 및 『빨찌산의 녀대원들』등에 실려 있는데, 그의 장렬한 희생 장면 묘사는 각기 다르다. 『항일녀투사들』에서는 7대의 敵특설부대 중 첫 번째 트럭을 향해 사격하다가 다리와 복부에 적탄을 맞고 쓰러진 것을 그 이튿날 한 韓醫師가 자기 집에 데려다 눕히자 죽었다고 했다. 『불멸의 투사』에서는 다리 부상으로 적에게 체포 압송된 그녀가 自衛團長의 딸임을 알고 전향시키려 했으나 끝내 불복하여 총살했다고 했다. 『빨찌산의 녀대원들』에서는 중상으로 체포되느니 차라리 끝까지 싸우다 죽겠다고 생각, 250여발 보총 탄알을 모두 쏘았고 마지막으로 수류탄을 적에게 던져 큰 희생을 주고 자신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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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22
  • 연길서 옥사한 중국의 말대황후- 완용②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곽부라 완용(郭布罗·婉容)은 자가 <모홍(慕鸿)>이고 호는 <식련(植莲)>으로 중국의 말대 황후이다. 완용은 별명으로 영월화(荣月华), 이리싸 백(伊丽莎白) 등이 있으며 중국의 만청시대 및 민국시대를 겪으면서 이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 중의 한명이었고 또한 시대의 희생품으로 된 비운의 여인이기도 했다. 1931년 말, 일본 여간첩인 가와시와 요시코(川岛芳子)가 일본 관동군의 명령에 의해 천진에 가서 완용을 만주로 데려오게 된다. 그 뒤 1932년 1월, 일본인들의 유혹하에 완용은 여순(旅顺)에서 그녀보다 앞서 그 곳에 도착한 부의와 상봉하게 되었다. 그 시기의 부의는 이미 일본 관동군에 의해 조종되는 괴뢰로 되었으며 완용 역시 일본인들의 음모에 말려들게 된다. 당시 만주에서의 완용은 모든 것을 일본인들의 배치에 복종해야 했으며 그녀의 일거일동 모두가 일본인들의 감시를 받아야만 했다. 이는 <모덴여성>이었던 완용으로 하여금 가장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결국 완용은 도주를 결심하였다. 남경 국민정부의 제1임 외교장관이었던 고유균(顾维钧)의 회고에 따르면 일찍 완용은 만주국정부내의 한 사람을 고물상으로 가장시켜 고유균한테 파견, 자기의 탈출을 도와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당시 고유균 역시 신분상 완용의 탈출을 도울 방법이 없었다고 한다. 이 일이 있은 뒤에도 완용은 탈출시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1933년 8-9월 기간, 위만주국 입법원의 조흔백의 부인이 일본을 방문하게 되자 완용은 그녀한테 자기의 탈출을 도와줄 것을 간청했다. 그 때 오직 자기만 탈출에 성공하면 후에 부의까지 탈출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하지만 당시 한 일본인 첩자가 이를 알아채고는 부의한테 밀고하여 완용의 탈출시도는 재차 물거품으로 되고 말았다. 그 후 완용은 더는 탈출기회를 찾을 수 없게 됐다. 1934년, 3월 1일, 완용은 만주제국의 황후로 책정되었지만 매일 마약과 접촉하면서 세월을 보내며 병태적인 생활을 지속, 때로는 예쁘게 치장하고 황궁내의 정원을 거닐기도 했다. 바로 그 시기, 만주국 황궁에서는 완용과 시중꾼 사이의 간통사건이 터지었다. 당시 부의의 말대로라면 완용이 문수를 내쫓자 부의는 완용에 대한 반감이 생기면서 아주 오랫동안 완용은 부의로부터 냉대를 받아왔다. 하지만 황후라는 존호를 잃을 수 없었는가 하면 부의와 이혼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반대로 정상적인 생리수요가 있는 여성이었기에 사통이라는 불륜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완용은 선후로 부의의 시중꾼 이체육(李体育), 기계충(祁继忠) 등과 간통, 나중에는 임신까지 하게 되었다. 완용의 마약흡입으로부터 사통에 이르기까지에는 오빠의 역할이 컸다는 설도 있다. 일찍 천진에서 대련으로 오는 동안 오빠는 일종의 이익을 챙기고는 자기의 여동생을 한 일본군 장교한테 팔아먹었다고 한다. ▲곽부라 완용(郭布罗·婉容)의 묘 1935년, 완용이 여자아이를 출산, 이는 부의로 하여금 대노하게 했다. 당시 부의는 애를 처남(완용의 오빠)한테 맡겨 키우기로 했다고 완용한테 말했으나 기실은 이미 애를 보일러 속에 집어던져 요절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고도 분을 삭일 수 없었던 부의는 또 완용을 황궁에서 가장 추운 방에 한동안 가두어 놓기도 했다. 그 뒤 완용은 지나친 정신적 타격으로 정신분열증에 걸리고 말았다. 정신병에 걸려있던 나날, 완용은 완전히 미치광이였다. 치장은 고사하고 매일 울고 웃고 하였으며 유일하게 남은 습관이란 곧바로 매일 마약을 흡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병이 엄중할 때는 방안(갇혀있는 독방)에서 거닐 수도 없을 지경이었으며 두 눈은 한 점의 광채도 없이 늘 흐리터분하였다. 또한 가끔씩 정신이 들 때마다 울면서 자기의 부친을 욕했다. 자기의 출세를 위해 딸을 불구덩이에 밀어 넣었다고 욕해대군 했다. 1945년 8월, 소련은 <8월 폭풍>으로 명명된 군사행동으로 신속히 만주 전체를 점령, 8월 11일 완용은 신경(장춘)을 떠나 통화로 피난 가던 중 따리즈거우(大栗子沟)에서 당지의 유격대에 의해 포로가 되었다. 그 뒤 완용은 통화, 장춘, 영길(永吉), 돈화와 연길 등지에서 수감생활을 하다가 1946년 6월 10경에 연길감옥에서 사망했다. 그녀가 사망한 뒤 여러 가지 설이 난무, <낡은 온돌 삿자리에 말아 연길 북산에 버려졌다>는 설과 <연길 남산(즉 모아산 주변)에 묻혔다>는 설이 엇갈리었다. 그 때로부터 3년 뒤 소련의 시베리아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부의는 동생 부걸이 보낸 편지를 통해 완용의 사망소식을 접하고는 비애에 잠겨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고 한다. 2006년 10월 23일, 완용의 남동생 윤기의 동의를 거쳐 하북성 청서릉(清西陵)밖에 있는 화룡황가릉원(华龙皇家陵园)에서는 초혼(招魂)의 형식으로 된 완용과 부의의 합장의식이 있었으며 묘비에는 <효각민황후(孝恪愍皇后)>라고 씌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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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22
  • 연길서 옥사한 중국의 말대황후- 완용①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곽부라 완용(郭布罗·婉容)은 자가 <모홍(慕鸿)>이고 호는 <식련(植莲)>으로 중국의 말대 황후이다. 완용은 별명으로 영월화(荣月华), 이리싸 백(伊丽莎白) 등이 있으며 중국의 만청시대 및 민국시대를 겪으면서 이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 중의 한명이었고 또한 시대의 희생품으로 된 비운의 여인이기도 했다. 곽부라 완용은 1906년 11월 13일, 청정부 내무부 대신인 영원(荣源)의 규수로 태어났다. 생모 아이신기오로(爱新觉罗氏)는 완용을 낳은 뒤 산욕열(产褥热) 로 사망, 완용은 계모 김중형(金仲馨)의 슬하에서 자라게 되었다. 완용의 계모 김중형은 당시 조정에서 일정한 권세가 있는 왕박후(王溥煦)의 손녀로서 완용을 총애하면서 아주 자상하게 완용을 돌봐주었으며 이들 모녀간은 더없이 화목했다고 한다. 한편 완용의 부친 곽부라 영원은 일명 개명인사로서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인사였으며 여자애들도 남자애들처럼 학당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인정하고 있었다. 이러한 부친이 있었기에 어릴 때의 완용은 독서하고 글자를 익히는 외 악기를 다루고 그림 그리는 것도 배울 수 있었으며 또한 미국인 이사벨(Miss Isabel) 여사를 가정교사로 초빙해 영어를 배우기도 했다. 당시 완용은 아우르족(达斡尔族) 가정의 공주로 부유한 생활환경과 현저한 가족지위가 있었으며 특히 민족문화와 전통문화의 교육은 그한테 아주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1922년, 이미 16살이 된 완용은 용모가 단정하고도 아름다운 숙녀로 탈바꿈했다. 아울러 양금을 다루고 붓글씨도 제법 잘 쓰는 등으로 그 이름이 원근에 자자했다. 그 해 완용은 고궁(자금성)에 입궁, 그 해 11월 30일에 <청조사상의 마지막 황후>로 되었다. 당시 완용이 황후로 된 것은 단지 그가 아름답고 다재다능해서만이 아니었다. 즉 근황귀비(瑾皇贵妃)의 지지가 있었기에 마침내 황제였던 부의가 완용한테 방점을 찍었던 것이다. 1911년 중국은 2000여 년간 지속되던 봉건군주제를 결속시키고 공화제의 길로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화민국 정부는 대청제국 황제의 퇴위 후에도 여전히 황제‧황후의 존호(尊号)를 폐지하지 않았으며 부의와 완용에 대해 군주에 해당한 대우를 해주었다. 때문에 부의와 완용의 혼례는 완전히 황제의 혼례로 예의를 갖추고 거행되게 하였으며 민국정부의 특별 승낙으로 황후가 탄 가마가 동화 문으로부터 자금성의 후반부로 들어가도록 하였다. 귀족출신인 완용은 지식이 있고 예의가 밝았으며 제법 시를 쓰고 읊을 줄도 알았다. 또한 부의와 서신 거래를 할 때면 늘 영문으로 쓰면서 마지막엔 꼭 <이리싸 백>이라고 서명하군 했다. 거기에 완용은 용모가 단정하고도 아름다웠고 행동자세가 우아했으며 거기에 내강외유(内刚外柔)의 스타일로 동서방 문화를 겸비한 전형적인 귀족부인이었다. 하지만 부의 자신의 신체원인으로 결혼 후 완용은 줄곧 자녀가 없었다. ▲ 위만주국시기 말대황제 부의(溥儀)와 완용 1924년 풍옥상(冯玉祥)이 <북경쿠테타(北京政变)>을 일으키면서 11월 5일, 부의는 자금성에서 쫓겨났고 완용 역시 부의를 따라 자금성을 떠나게 되었다. 그 뒤 완용은 부의를 따라 천진에 거주, 그 때로부터 그녀는 마약에 인이 박혔다. 그리고 궁중에서 입던 복장을 활활 벗어버리고는 치포를 입었고 하이힐(高跟皮鞋)을 신었으며 파마를 하는 것으로 당시 조계지에서의 <모덴여성(摩登女性)>으로 탈바꿈했다. 그 시기 완용의 최대 즐거움이란 각 백화점들을 돌면서 물건을 구입하는 것으로 돈은 여하튼 부의가 지불하기에 그녀는 절제 없이 돈을 휘뿌릴 수 있었다고 한다. 이는 또한 1922년 함께 입궁한 다른 한 황비 문수(文绣)와의 암투로 되기도 했다. 천진에서 생활하는 동안, 세월이 흐름에 따라 부의는 성격상의 약점이 점차 드러났다. 그의 생리상 약점은 마침내 문수가 이혼을 제기하기까지에 이르게 했고 부의는 이러한 결과를 두고 몽땅 완용의 잘못으로 밀어붙였다. 한편, 완용은 사회를 위해 돈과 금은 장신구 등을 기부하여 각 계로부터 찬양을 받은 적도 몇 번 있었다. 1923년 12월엔 북경에 있는 <임시 와와두회(临时窝窝头会)>로 명명된 자선기구에 은화 600원을 기부하여 이재민을 돕게 하였고, 1931년 중국의 16개 성이 엄중한 수재를 입었을 때에도 은화와 함께 진주보석들을 기부(당시 부의는 층집 한 개 동을 내놓았음)해 이재민을 돕게 하여 당시의 <대공보> 등 신문들에서는 이를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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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21
  • 동북항일연군 조선인 "여장군" ― 허성숙②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간고한 항일무장투쟁시기 여성의 몸으로 육중한 기관총을 보총다루듯 휘두르며 일제놈들을 무리로 쓸어눕힌 한 조선인 “여장군”이 있었다. 그가 바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4사 제1퇀 제1련의 첫 여성기관총사수인 허성숙이다. 1934년의 겨울은 빨리도 찾아왔다. 10월에 들어서자 동만의 대지는 큰 물속에 파묻혀 버렸다. 그때 허성숙은 과도한 피로와 열악한 숙영 환경 등으로 병들어 눕게 되었다. 그러나 조직에서는 그를 연길현 사방대구위에 보내 부녀사업을 하는 한편 병 치료를 하게 하였다. 동북항일연군에 있어서 겨울은 가장 간고한 시기였다. 일제의 토벌, 방화, 약탈 등 심공정책으로 하여 당시 인민들의 생활은 극히 간고하였고 항일부대 역시 먹는 것을 해결하는 것이 가장 큰 난제였다. 허성숙은 그냥 남들의 관심 속에서 병 치료만은 할 수 없었다. 그는 자기한테 차례진 식량을 가난한 백성가정의 애들한테 보내주고는 자기 역시 함께 허리띠를 졸라매며 풀뿌리로 연명하였다. 허성숙은 또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기도하여 사람들은 선량하고도 의지가 견강한 이 처녀를 좋아하게 되었다. 당시 그는 시시각각 부대의 전우들을 그리었다. 1935년 봄, 허성숙은 신체가어느 정도 회복되자 부대로 돌아오게 되었으며 그의 간절한 요구에 의해 부대에서는 그더러 기관총수로 되기 위하여 허성숙은 모든 시간을 집중하여 훈련하였다. 매번 부대가 숙영할 때 기타 전우들은 모두 잠자리에 들었지만 그만은 피로를 무릅쓰고 훈련을 견지하였다. 결과 그의 기관총 사격기술과 묘준 능력은 놀라운 제고를 가져왔다. 1935년 6월, 허성숙은 연갈현의 도목구와 옹성라자 지구에서 있은 전투에 참가, 냉정을 잃지 않고 정확하게 적들을 쓸어 눕혀 전우들로부터 절찬을 받았다. ▲ 6월 30일 새벽 김인구가 인솔하는 2천여 명의 적들은 짙은 안개를 이용하여 간삼봉을 삼면으로 둘러싸고 올라왔다.(이미지 출처 : 중국해방군보) 1936년 3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은 동북항일연군 제2군으로 개편되었고 허성숙이 소속된 제1퇀은 제1사로 되었다. 항일연군 제2군은 저명한 항일장령 왕덕태, 위증민의 인솔하에 동만과 남만의 여러 현에서 출몰하면서 기동 영활한 유격전술로 일제한테 수차례에 거쳐 섬멸적인 타격을 주었다. 이 해는 허성숙한테 있어서 가장 빈번하게 전투에 참가한 한해였다. 4월의 화전현 대포차자(지금의 돈화시)공략 전투,8월의 무송현성 전투,10월의 안도현 동청구에서의 위만주국군과 교전, 11월의 임강현 대양차에 있는 위만주국군의 거점을 날려 보낸 전투 등으로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당시 허성숙의 기관총은 무송현성을 진격할 때 부대로 하여금 성동남쪽의 거점을 일격에 점령하게 하였고 대양차의 전투와 동청구의 전투에서도 큰 위력을 발산하였다. 이러한 전투에서의 단련과 고험을 거쳐 허성숙은 항일연군의 용맹한 여전사로 거듭났으며 1936년에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임규광의 희생은 허성숙에게 형언할 수 없는 비통과 슬픔을 가져다주었다. 허성숙은 어느 한 나무아래에서 한동안 통곡한 뒤 눈물을 닦고는 입술을 악물었다. “저에게 기관총을 맡겨주십시오!” 허성숙은 상급에 간절히 요구하였다. 상급에서는 그의 요구를 허락하였다. 이리하여 허성숙은 항일연군 제1로군 제4사 제1퇀 제1련의 첫 여성기관총사수로 되었다. ▲6월 30일 새벽 김인구가 인솔하는 2천여 명의 적들은 짙은 안개를 이용하여 간삼봉을 삼면으로 둘러싸고 올라왔다. 허성숙은 사격명령이 떨어지기 바쁘게 기관총으로 맹렬한 사격을 가하여 적들을 무더기로 쓸어 눞혔다. (이미지 출처 : 중국해방군보) 1937년 6월 허성숙은 부대를 따라 장백현 13도구에 진출, 간삼봉에서 일제와 조우전을 벌이게 되었다. 6월 30일 새벽 김인구가 인솔하는 2천여 명의 적들은 짙은 안개를 이용하여 간삼봉을 삼면으로 둘러싸고 올라왔다. 기관총을 손에 잡고 적들을 노려보던 허성숙은 사격명령이 떨어지기 바쁘게 맹렬한 사격을 가하였다. 놈들은 무더기로 쓰러졌다. 기세 당당히 덮쳐들던 적들은 혼비백산하여 뿔뿔이 도망쳤다. 간삼봉전투 후 전사들은 허성숙의 용감성과 대담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여성의 몸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기관총을 휘두르며 적들을 삼대베듯 쓸어 눕히는 그에게 “여장군”이라는 영광스러운 별호를 달아주었다. 그때로부터 제4사에서는 “여장군”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편집 철민 기자/다음에 계속) 참고문헌 金正明 編, 『朝鮮獨立運動』 2, 原書房, 1967, 65~66쪽.☞김정명 편, 『조선독립운동』 1-분책, 563~564쪽.☞김정명 편, 『조선독립운동』 3, 326쪽.☞박용옥, 「조신성의 민족운동과 의열활동」,『오세창교수 화갑기념논총』, 한국근현대사학회, 1995 참조.☞『독립신문』 1921년 1월 15일, 3월 26일, 12월 6일자 ; 『동아일보』 1921년 10월 21일자 ; 박용옥, 「조신성의 민족운동과 의열활동」, 『오세창교수 화갑기념논총』.☞『동아일보』 1921년 6월 13일자.☞연변조선족자치주부녀연합회 편저, 『항일녀투사들』, 1984.☞村田陽一 編譯, 『コミンンテルンン資料集』 2, 大月書店, 1982, 75쪽.☞조선총독부, 『朝鮮の治安狀況』, 1930, 12~13쪽.☞중공연변주위 당사사업위원회 편저, 『연변인민의 항일투쟁』, 연변인민출판사.☞연변조선족자치주부녀연합회 편저, 『항일녀투사들』, 101~102쪽.☞연변조선족자치주부녀연합회 편저, 『항일녀투사들』, 201~216쪽.허성숙의 열사전은 『불멸의 투사』 및 『빨찌산의 녀대원들』등에 실려 있는데, 그의 장렬한 희생 장면 묘사는 각기 다르다. 『항일녀투사들』에서는 7대의 敵특설부대 중 첫 번째 트럭을 향해 사격하다가 다리와 복부에 적탄을 맞고 쓰러진 것을 그 이튿날 한 韓醫師가 자기 집에 데려다 눕히자 죽었다고 했다. 『불멸의 투사』에서는 다리 부상으로 적에게 체포 압송된 그녀가 自衛團長의 딸임을 알고 전향시키려 했으나 끝내 불복하여 총살했다고 했다. 『빨찌산의 녀대원들』에서는 중상으로 체포되느니 차라리 끝까지 싸우다 죽겠다고 생각, 250여발 보총 탄알을 모두 쏘았고 마지막으로 수류탄을 적에게 던져 큰 희생을 주고 자신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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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20
  • 두 세기의 교체시대, 中 서구문화의 선구자 황초구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황초구(黄楚九 1872-1931)는 절강 여요인(浙江余姚人)으로서 청조말년과 민국초엽 서약업 및 오락업을 중국으로 들여온 즉 서구문화를 보급시킨 선구자라 할 수 있다. 그는 또 일생의 창업 중 여러 개 업종에 투신하여 <백가보스(百家经理)>로 불리기도 했다. 예하면민간자본으로 된 중국의 첫 제약기업인 <용호회사(龙虎公司)>를 세웠고 중국의 첫 종합성 오락장소인 <상해신세계(上海新世界)>의 창립자였으며 또한 중국의 첫 오락신문인 <대세계보(大世界报)>를 창간, 이른바 의약, 오락, 금융과 부동산 등 업에까지 손을 뻗었으며 21개의 의약기업을 묶어 세운 <황씨의약그룹(黄氏医药集团)>의 대보스였다. 황초구의 <학력>이라고 하면 큰 학당에 다닌 것도 아니고 서양에 다녀온 것은 더욱 아니었으며 중의였던 어머니를 따라다니면서 안과의술 비법을 익힌 것이 그 전부였다. 하지만 황초구는 영리하고 머리가 비상했으며 취미가 다양했는가 하면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지꿎고도 담대한 그것이었다 한다. 황초구가 16세가 되던 해인 1887년, 부친이 타계했다. 그러자 그는 모친을 따라 상해에 들어갔다. 당시 그의 보자기 속에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약서(药书) 한권이 있었다. 황초구가 이 책 한권에 모든 인생을 기탁하면서 상해로 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상해에서 황초구는 모친과 함께 성황묘 부근의 한 고층누각 밑에서 난전을 펼쳐놓고 약재를 파는 장사를 시작, 인생개척의 첫 발자국을 내디디었다. 당시 성황묘 부근은 옛 상해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로서 상가들이 운집된 곳이기도 했다. 바로 이곳에서 난전을 벌인 황초구는 돈을 번다기보다는 작은 난전으로부터 한 가지 업체를 운영하는 비법을 배우기에 더욱 신경을 기울였다. 어떻게 하면 물건을 사는 이들의 마음이 기쁘게 할 수 있겠는가? 또 이들이 가장 급히 수요하는 약재품종, 평소 필수적으로 사재해두는 약재품종 등에 대해 곰곰이 따져보기도 했으며 앞으로 장사를 함에 있어서 어떤 방향으로 기틀을 잡아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도 자주 생각해 보았다. 이렇게 자신의 일확천금보다는 고객들의 수요와 만족도에 대해 집착할수록 황초구의 난전은 날이 갈수록 단골이 많아졌으며 흥성해지기도 했다. 한편 이런 고객들과의 교류를 통해 자신의 향후도 뚜렷한 선택이 있게 되었다. ▲ 황초구가 세운 <상해대세계>의 건물모습 그 뒤 1890년(광서16년 - 光绪十六年), 상해 법대거리(法大马路)에 자신의 첫 업체인 <상해 중불대약방(上海中法大药房)>을 차리면서 황초구의 인생은 비교적 승승장구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당시 중약만 고집하는 봉건시대의 의약업체들과는 달리 황초구는 중서의가 결합되는 의약발전의 길을 선택, 중국의약계에 신선한 서구의약의 문화 붐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나이 32세가 되던 1904년, 황초구는 상해는 물론 중국 전체가 깜짝 놀랄 대사를 일궈냈다. 그것인즉 황초구가 세운 의약기업 <용호회사>에서 연구제작한 <에로보뇌즙(艾罗补脑汁)>이 탄생한 것이었다. 중서의약이 결합된 이 약은 출시하자마자 의약판매업체 및 병원들에서 앞다투어 구입하는 명약으로 되었으며 지어 당시 어떤 의원들은 이 약을 두고 <지혜를 키우고 백병 제거(长智慧、祛百病)하는 명약> 이라고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어찌 보면 그 때로부터 중국의 의약업은 <황초구의 시대>에 들어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어서 황초구는 100년 넘게 중국의 약방들에 없어서는 안 될 약 <용호인단(龙虎人丹)>을 연구‧개발하여 재차 세상을 놀라게 했다. 위에서 언급하다 싶이 이 시대는 황초구의 창업사상 말 그대로 승승장구하던 시대였다. ▲ 옛 상해 거리의 일각 1907년,하쇄방과 합작해 오주대약방(五洲大药房) 개설한 뒤를 이어 황초구는 의약업계를 벗어나 기타 항업에도 새로운 활무대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1913년, 문화오락업체인 <신세계(新世界)>를 개업, 1918년에는 독자적으로 중화영화회사(中华电影公司)를 창립했으며 1919년에는 일야은행(日夜银行)을, 그 이듬해인 1920년에는 합작업체인 상해 일야물권교역소(海日夜物券交易所) 등 문화 및 금융 등 분야에도 그 명맥을 이어갔다. 그 외, 삼정부동산회사(三星地产公司), 복창엽업회사(福昌烟公司), 온천욕실(温泉浴室), 몽춘각찻집(萝春阁茶馆), 구복남 잡화점(九福南货店), 맥스카이 당과점(麦司凯糖果店), 황초구병원 등 중소업체까지 합치면 그 업체가 100여개에 달했다. 그러면서 황초구는 상해상회 위원(上海商会委员), 상해적십자회 경제위원(经济委员), 상해신동약업공회 주석(上海新同药业公会主席) 등 사회직무도 맡아해 한시기 동안 상해의 서민사회에 눈길을 돌이면서 사회와 민중한테 많은 유익한 일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50대에 들어서면서 황초구는 투기활동에 참여, 상해의 폭력사회와 자주 이러저러한 마찰을 빚다가 당시 상해 폭력사회의 두목 황금영(黄金荣), 두월생(杜月笙) 등 사람들한테서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31년 1월 19일, 황초구는 심장병으로 상해에서 타계, 향년 59세였다. 한편 황초구가 사망한 뒤인 그해 5월, 그의 오락업체였던 <상해대세계>가 폭력사회의 두목 황금영한테 넘어간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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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19
  • 동북항일연군 조선인 "여장군" ― 허성숙①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간고한 항일무장투쟁시기 여성의 몸으로 육중한 기관총을 보총다루듯 휘두르며 일제놈들을 무리로 쓸어눕힌 한 조선인 “여장군”이 있었다. 그가 바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4사 제1퇀 제1련의 첫 여성기관총사수인 허성숙이다. 허성숙, 1915년 연길현 차조구 중평촌(지금의 안도현)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가난하여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그는 어려서부터 집살림을 도와 산나물도 캐오고 땔나무도 해오면서 노동으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는 남자들 못지않게 힘도 셌으며 성격도 남달리 쾌활하였다. 그가 15살 되던 해인 1930년 5월, 동만일대에서는 성세호대한 반제·반봉건투쟁은 노한 불길마냥 용정을 중심으로 온 동만을 휩쓸었다. 그 당시 중평촌에는 혁명자들이 세운 야학교가 있었다. 선생은 농민들에게 문화지식을 보급한다는 명의로 일본제국주의와 봉건주의를 반대하고 자유해방을 쟁취할데 관해 선전하였다. 당시혁명가들의 강의를 청취하는 사람들 중에는 동그란 얼굴에 단발머리를 한 12~13세 가량의 소녀가 있어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그는 매일 저녁마다 가장 일찍 야학교에 와 강의시간을 기다렸으며 강의가 시작되면 정신을 집중하여 들었다. 때로는 눈을 깜빡이면서 뭔가를 사색하기도 했다. ▲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4사 제1퇀 제1련의 첫 여성기관총사수인 허성숙(이미지 출처 : 중국해방군보) 이 소녀가 바로 허성숙이였다. 그는 야학교의 선생님을 몹시 탄복, 선생님은 지식과 재능이 있어 강의하는 구절 구절과 마디마디가 이유가 있고 들을수록 격동되고 통쾌하며 새힘이 솟구친다고 생각하였다. 야학교에서 강의를 듣는 차수가 많아질 수록 허성숙의 혁명지식은 갈수록 풍부해 졌다. 한번은 집에서 마을의 애들한테 야학교에서 들은 쏘베트에 대한 얘기를 해주다 아버지한테 훈계를 당하였다. 아버지는 “어린애들은 그런일에 참견하지 말아야 안다”고 했고 허성숙은 “전 배울 뿐만 아니라 앞으로 그렇게 하겠다”고 반발하였다. 1930년, 반제반봉건투쟁의 불길이 동만지구에서 활활 타올랐고 편벽한 시골인 중평촌 역시 이 격류속에 말려들었다. 당시 허성숙은 15세였지만 공산당 지하공작원의 교육과 도움으로 소년선봉대에 가입하였고 혁명투쟁에 투신하였다. 1933년에 허성숙은 청년단에 가입, 그해 그는 또 연길현유격대 여전사로 되었다. 열화와 같은 항일투쟁을 맞으면서 허성숙의 가슴에서는 피가 끓어번지였다. 그는 청년들한테 주어진 중임을 깨달았으며 멸망의 위기에 처한 나라와 민족을 구하고 일본침략자를 몰아내는 투쟁에 매진하겠다고 다짐하였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일제의 “동계토벌”이 시작되었다.일제와 위만주국군은 도합 3,000여 명의 병력을 출동하여 동만항일무장을 요람속에서 없애버리려고 시도했다. 연길현 유격대는 “반토벌”전에서 14일간 전투를 견지, 일제는 유격대를 소멸하지 못햇을 뿐만 아니라 유격대에 의해 10여구의시체를 내버려둔채 현성으로 물러가는 수밖에 없었다. 전투 중에서 허성숙은 남달리 용감하고도 결단성 있게 전사들과 함께 돌격하면서 적을 무찔렀다. 그는 또 행군도중이나 숙영지에서도 다른 전사를 도와 총을 메고 상병원을 돌보는가하면 전사들의 옷을 씻어 기워 주었으며 취사원을 도와 밥도 짓곤 하였다. 오직 부대의 일이고 항일에 유익한 일이라면 뭐든지 개의치 않고 충실히 하였다. 바로 그 시기 포수로 사냥을 즐기던 허성숙의 부친 허기영은 일제의 농락과 협박에 넘어가 자위단 단장으로 되었다. ▲ 1934년 7월의 어느날 허성숙은 중평촌 부근의 한 골짜기에서 아버지 허기영이 인솔하는 자위단과 조우전. (이미지 출처 : 중국해방군보) 1934년 7월의 어느날 허성숙이 소속된 동북인민혁명군(동북항일연군)독립 1퇀 1련은 중평촌 부근의 한 골짜기에서 허기영이 인솔하는 자위단과 조우,일촉즉발의 대치상태를 이루었다. 이때 허성숙은 딸의 절절한 호소로 부친의 마음을 움직이리라 마음먹었다. “아버지! 딸 성숙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들은 일제를 때려엎고 민족을 해방하기 위해 싸우는 대오입니다. 무엇때문에 우리들이 서로 싸워야 합니까? 아버지! 총부리를 돌리십시오, 딸 성숙이와 함께 성스러운 반일투쟁에 참가합시다!” 허성숙이는 애타는 목소리로 웨쳤다. 그는 지금이라도 아버지가 잘못을 뉘우치고 혁명의 길에 들어설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염원과는 반대로 허기형의 멱따는 소리와 함께 요란한 총소리가 울렸다. 자위단 놈들이 허기형의 지휘하에 공격을 개시했던 것이다. 아군은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돌격명령이 떨어지기 바쁘게 전사들은 쏜살같이 적진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놈들은 무리로 쓰러졌다. 어느 하루 허성숙은 유격대원들과 함께 식량을 얻어가지고 돌아오는 도중 토벌대 놈들과 맞띄우게 되었다. 그는 침착하게 다른 대원들을 수림 속에 은폐시키고 자기는 짐을 진채 전봇대에 올라갔다. 5~6명의 토벌대 놈들이 전봇대 부근에 접근하자 허성숙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놈들에게 수류탄 불벼락을 들씌웠다. 이 일로 하여 부대의 전사들은 허성숙의 지혜와 용감성에 깊이 탄복하였다. (편집 철민 기자/다음에 계속) 참고문헌 金正明 編, 『朝鮮獨立運動』 2, 原書房, 1967, 65~66쪽.☞김정명 편, 『조선독립운동』 1-분책, 563~564쪽.☞김정명 편, 『조선독립운동』 3, 326쪽.☞박용옥, 「조신성의 민족운동과 의열활동」,『오세창교수 화갑기념논총』, 한국근현대사학회, 1995 참조.☞『독립신문』 1921년 1월 15일, 3월 26일, 12월 6일자 ; 『동아일보』 1921년 10월 21일자 ; 박용옥, 「조신성의 민족운동과 의열활동」, 『오세창교수 화갑기념논총』.☞『동아일보』 1921년 6월 13일자.☞연변조선족자치주부녀연합회 편저, 『항일녀투사들』, 1984.☞村田陽一 編譯, 『コミンンテルンン資料集』 2, 大月書店, 1982, 75쪽.☞조선총독부, 『朝鮮の治安狀況』, 1930, 12~13쪽.☞중공연변주위 당사사업위원회 편저, 『연변인민의 항일투쟁』, 연변인민출판사.☞연변조선족자치주부녀연합회 편저, 『항일녀투사들』, 101~102쪽.☞연변조선족자치주부녀연합회 편저, 『항일녀투사들』, 201~216쪽.허성숙의 열사전은 『불멸의 투사』 및 『빨찌산의 녀대원들』등에 실려 있는데, 그의 장렬한 희생 장면 묘사는 각기 다르다. 『항일녀투사들』에서는 7대의 敵특설부대 중 첫 번째 트럭을 향해 사격하다가 다리와 복부에 적탄을 맞고 쓰러진 것을 그 이튿날 한 韓醫師가 자기 집에 데려다 눕히자 죽었다고 했다. 『불멸의 투사』에서는 다리 부상으로 적에게 체포 압송된 그녀가 自衛團長의 딸임을 알고 전향시키려 했으나 끝내 불복하여 총살했다고 했다. 『빨찌산의 녀대원들』에서는 중상으로 체포되느니 차라리 끝까지 싸우다 죽겠다고 생각, 250여발 보총 탄알을 모두 쏘았고 마지막으로 수류탄을 적에게 던져 큰 희생을 주고 자신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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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18
  • 역사의 살아있는 증인, 조선족 항일투사 - 이재덕③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이(리)재덕(李在德)- 동북항일연군 내의 조선족 여투사이자 국제주의 전사였으며 살아 있은 역사의 증인이다. 그리고 조선인으로부터 중국조선족으로 탈바꿈하게 된 특수시대가 낳은 여성강자이기도 하다. 결혼 뒤 이재덕은 여전히 6군 피복공장에서 근부했고 남편 우보합은 소년련의 100명 기병을 거느리고 부금(富锦), 화남(桦南), 쌍압산(双鸭山), 의란(依兰)으로 진출했다. 1938년은 동북의 항일전쟁 사상 전투가 가장 치열했고 가장 간고한 한해이기도 했다. 5월에 들어서면서 이재덕은 임산기에 이르렀으나 부대를 따라 이동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당시 조직에서는 이태준(李泰俊) 부부를 파견하여 이재덕을 돌보게 했다. 그 때 그들은 깊은 밀림속의 한 작은 골짜기에서 은신할 곳을 찾아 숙영했고 이재덕은 그 곳에서 남자애를 출산, 이태준 부부가 새생명을 위해 성의껏 돌봤지만 환경이 열악하고 먹을 것마저 없는 상황에서 이들은 생사의 고비에서 울부짖는 이 작은 생명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으며, 어린 것의 숨이 떨어지자 이들은 비통을 참으며 어린 것을 밀림속에 매장해야만 했다. 1939년 1월, 우보합과 이재닥은 동북항일연군 제6군 4사 32퇀의 37명 전사들과 함께 우쑤리강(乌苏里江)을 건너 소련의 임마 누엘을 거쳐 다시 하바롭스크 도착, 하바롭스크에서 이들 부부는 조상지 사령과 6군 군장 및 11군 군장 등을 만날 수가 있었다. 1940년부터 이재덕은 사업의 수요로 소련 하바롭스크에서 무선전 접수 및 발신 그리고 수리 기술을 배웠다. 그 뒤 1941년 7-8월에는 항일연군 제2로군 2지대 왕효명(王效明)이 인솔하는 소부대를 따라 중국내로 잠입, 보청(宝清), 부금(富锦)과 의란(依兰) 등 지에서 활동하면서 소부대의 무선전 접수/발신 임무를 맡아하였다. 1942년 겨울, 이재덕은 강신태(姜信泰) 정위를 따라 재자 소련으로 건너가 88국제여단 교통영의 전사로 되었다. 1945년 8월 8일, 소련은 정식으로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150여만명의 막강한 병력을 동원해 중국의 동북과 조선을 향해 파죽지세로 진격, 이와 더불어 88국제여단의 많은 항일연군 장병들은 분분히 소련홍군과 배합하여 동북 및 조선 해방 전투에 뛰어들었다. 그해의 9월 8일, 이재덕의 남편 우보합은 주보중 장군을 따라 비행기에 탑승해 장춘으로 향발했다. 소련군과 배합해 질서를 유지하고 인민무장을 조직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재덕은 남편과 동행할 수 없었다. 두 자녀가 있는 여성인데다 당시 이재덕은 세 번째로 임신한 몸이었기 때문이었다. ▲ '중국인민항일전쟁 및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 65주년’ 기념활동에 참가한 이재덕 여사 이재덕은 1945년 12월이 돼서야 부분적으로 자녀들을 거느린 기타 여 전사들과 함께 귀국길에 올랐다. 떠나기 앞서 이재덕은 김정숙(김일성 부인), 왕옥환(최용건 부인) 등 함께 동고동락을 해오던 10여명의 여전사들과 뜨거운 포옹으로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당시 88국제여단의 조선인 장병들 중 두갈래로 나뉘어 한갈래는 중국 동북으로 진출하고 다른 한 갈래는 조선으로 진출하게 되었는데 김정숙, 왕옥환 등 여전사들은 조선으로 진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이재덕이 귀국해 수분하를 거쳐 장춘에 도착하자 주보중 장군이 장춘역까지 마중나와 있었으며 동북민주연군의 대부분 부대는 이미 장춘을 떠나 길림부근의 차루허(岔路河)까지 철수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소련정부는 국민당 정부와 이른바<중소우호동맹조약(中苏友好同盟条约)>을 체결, 소련군이 전반 동북을 해방시킨 후 동북의 대도시들을 국민당 정부에 넘겨주기로 했으며 이 <조약>에 따라 동북민주연군은 잠시 장춘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동북민주연군은 일단 소련홍군이 철거만 하면 신속하게 장춘, 하얼빈, 치치할 등 대도시를 점령할 계획을 잡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장춘의 전략적 위치는 아주 중요하기도 했다. 이 계획을 차질없이 수행하기 위하여 당시 주보중은 우보합을 소련군에 파견, 소련군과 접촉하는 기간 그들이 <66666>이란 신호로 장춘에서의 철수 시간을 알린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렇게 되자 우보합과 이재덕은 윤번으로 잠을 자면서 주야로 소련군의 무선전 통신을 감청, 드디어 1946년 4월 14일 낮 12시, 소련군 무선통신은 과연 <66666>을 발송했고 이재덕은 즉시 참모장한테 이를 보고했다. 이 날 오후 2시, 주보중이 장춘을 향해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동북민주연군은 세갈래로 나뉘어 도심을 향해 총공격을 발동, 18일 새벽에 장춘을 공략하였다. 하지만 국민당이 대병력을 집중하여 수차 공격해오고 또한 중공중앙의 포치에 따라 중공 동북국에서는 임시 대도시를 포기하기로 결정하고는 5월 28일 재차 장춘에서 철거했다. 그 뒤 동북국과 동북군구는 하얼빈으로 철수했고 이재덕은 길동군구를 따라 길림을 거쳐 연길에 도착, 이재덕은 길동군구 무선전 부문에 배치되어 장장 3년에 거친 중국 국내해방전쟁에 참가하게 되었다. 길동군구에서 근무하는 동안, 이재덕은 3명의 자녀를 거느린 몸임에도 불구하고 중임을 맡고 있는 남편의 내조에 정성을 다하는 한편 자신이 맡은 업무도 출중하게 완수하여 늘 강신태를 비롯한 길동군구 장령들의 표창을 받았었다. ▲ 1992년, 리재덕과 그의 자녀들은 평양을 방문, 김일성 주석과 기념사진을 남겼다. (왼쪽부터큰 딸 우화, 이재덕, 김일성 주석, 장남 우영) 1948년 3월, 이재덕은 지방으로 전근, 선후로 길림성 부녀연합회 위원, 연길 조선족간부학교 조직과 과장, 화룡현위 위원 겸 부련회 주임 직을 맡았으며 1949년 1월에는 길림성 부녀대표단 성원으로 심양에 가 동북부녀대표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1949년 3월, 이재덕은 제4야전군을 따라 남하, 호북성 이창(宜昌)까지 갔다가 이창에서 시부녀연합회 주비위원회(筹委会) 주임으로 활약했으며 그의 남편 우보합은 이창시 전신국의 군대표로 되었다. 새 중국이 창립된 후 이재덕은 중앙인민정부 비서처 당지부 조직위원 및 보위위원으로 있다가 1953년에는 국가 정무원(政务院- 국무원 전신) 당대표대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당시 이재덕은 사업에 까근하고 업무완수량이 많고도 실수가 없어 늘 주은래 총리의 애대를 받아왔는바 동료들로부터 늘 총리의 개인도장과 정무원 옥새를 장악하고 있는 <장새대신(掌玺大臣-)>으로 불리기도 했다. 1955년 1월부터 이재덕은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판공청에 전근되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한편 1960년, 조선 부수상 최용건이 중국을 방문, 최용건을 환영하는 국가연회를 베풀 때 주은래 총리는 이재덕이 연회에 배석하게 했다. 항일연군의 여전사로부터 중국 국가의 당당한 중견일군으로 된 이재덕을 보는 순간, 최용건 부수상은 반가움과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왜냐하면 최용건이 양성한 수많은 조선인 항일 여투사들 중 유일한 생존자는 이재덕뿐이었으니 말이었다. 또한 이재덕 모친의 입당소개인이었던 최용건은 이재덕과 그 가정에 특수한 정분을 갖고 있기도 했다. 1964년 이재덕은 제3기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로 당선, 문화혁명기간 각종 누명을 쓰고 직무에서 쫓겨나 <5.7> 간부학교에서 노동개조를 하다가 1979년에 누명을 벗고 전국인대 당위 도서관 주임으로 복직하게 됐고 1982년 6월에는 전국인대 당위 비서국 부국장으로 부임되었다. 이재덕은 1982년 9월에 이직하여 은퇴생활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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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18
  • 시대가 무색해진 상해탄의 절색미인- 엄인미(严仁美)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2017년, 그의 나이 102세를 맞으며 사람들 앞에서 선보인 옛 상해의 절색미인이었던 엄인미(严仁美) 여사는 여전히 숱이 많은 머리칼로 세월이 무색케 하였다. 비록 흰 머리칼이 조금씩 보이긴 했으나 윤기가 흐르고 잘 정리된 엄인미의 머리칼을 보고 모발분야의 연구일군들은 분분히 그녀한테 머리칼 보호비법을 알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엄인미 여사는 담담하게 웃으면서 오히려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하였다. “여러분들의 질문에 실망시켜 미안하지만 어릴 때 저는 머리에 모발 몇 대 자라지 않아 늘 중머리를 하고 있은 <못난 새끼 오리>였답니다…….” … 엄인미의 인생을 밝히자면 그에 앞서 그 조상부터 소개해야 할 것 같다. 엄인미의 증조부 엄소방(严筱舫)은 이홍장(李鸿章)의 참모로서 상해에서 중국의 첫 은행인 중국호시은행(中国互市银行)을 세웠고 제1임 총재로 되었으며 또 상해 총상회(上海总商会) 및 호번관 사영기업(浩繁官)을 창립, 녕파방(宁波帮)으로부터 <개산의 창시자(开山祖师)>로도 불렸다. 그리고 엄인미의 조부 엄자균(严子均)은 환전실무를 취급하는 금융업자로 크게 이름을 날렸으며 상해 성황묘(城隍庙)의 물화루금점(物华楼金店)과 남경로에서 유명한 아홉째 장주장(老九章绸庄) 모두가 엄자균의 하청업체였다. 한편 엄인미의 부친 엄지다(严智多)는 당시 절강성 호주(湖州)지구의 4대 재벌거물 중 첫 번째로 꼽히는 유용(刘镛)의 손녀 유승의(刘承毅)를 부인으로 맞이, 첫 출산한 아이가 바로 엄인미었다. 헌데 임신 8개월만에 고고성을 울린 엄인미는 머리에 머리카락 몇대 없었다. 이는 엄지다 부부한테 큰 실망을 주었다. 반대로 엄인미의 조부는 아주 개화된 사람으로 아기의 이름을 <엄인미>라고 지었으며 아기가 자라면서 그 이름처럼 점점 아름답게 숙성하기를 희망했다. 그 뒤 엄인미의 어머니는 머리칼을 빡빡 깎으면 모발이 잘 자란다는 말을 듣고 그것을 딸한테 실험, 2살이 될 때까지 엄인미는 무려 7차례에 거쳐 <아기여승(婴儿女僧)>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거의 효과가 없었으며 후에 병원 소아과 의사로 근무하던 한 친척이 엄인미를 데리고 영국으로 가 수차에 거쳐 치료하면서 비로서 효과를 보게 되었으며 귀국할 때의 엄인미는 새까만 모발로 뒤덮이었다. 6살부터 엄인미는 조모를 따라다니면서 생활, 7살이 되자 계모의 고모가 교장으로 있는 계수여자학교(启秀女校)에 입학하면서 학업의 첫 발자국을 뗐고 10살에는 대학을 졸업한 다섯째 고모가 임직하고 있는 중서여자중학(中西女中)에 학적을 옮겼다. 당시 중서여자중학교는 명망 높은 귀족서당이었는데 엄인미가 다니는 학급에 도합 90명의 학생이 있었으며 이 중 엄인미를 포함한 8명 여학생이 가장 절친한 사이었다. 그 때, 엄인미 외 7명의 자매 역시 모두 높은 지위를 갖고 있는 명문가정의 규수들로서 이들 중에는 국민정부 재무부 차장으로 있는 장수용(张寿镛)의 딸 장함분(张涵芬), 중국 서약업의 선구자 황초구(黄楚九)의 딸 황혜보(黄惠宝), 중국 주 프랑스 대사의 딸 당민정(唐民贞), 복건의 거상 임씨 가문의 규수 임앵(林樱) 등이었다. 엄인미의 회고에 따르면 그 시기가 그녀한테 있어서 가장 천진난만했으며 즐겁고도 유쾌한 시절이었다. 바로 이때 엄씨 일가에는 한 규수가 봉건식 결혼에 반항해 타지로 도망하는 사건이 발생, 이 사건은 이 일가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특히 엄인미의 부친이 받은 충격은 더욱 컸다. 그는 여자애들의 반항심은 공부를 하면서 현시대 물정을 너무 많이 알아서이고 이런 여자애들을 잘 단속하려면 공부를 적당히 시키는 것이라고 인정했다. 그 때 엄인미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처음에 엄인미는 공부를 그만둘 것을 강요하는 아버지한테 맞섰고, 이에 아버지도 어쩔 수 없었으며 나중에는 딸이 과목마다 90점 이상을 맞아야 계속 공부를 할 수 있다는 무리한 요구를 제기했다. 이어 기적이 생겼다. 아버지의 뜻밖으로 엄인미는 중학교 3학년으로 올라가는 시험에서 과목마다 90점 이상을 맞은 건 물론이고 전 학급의 1등까지 하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이제 중학교만 졸업하면 공부를 그만둬야 한다는 것, 이유인즉 이미 딸의 결혼상대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1929년 엄인미의 여섯째 고모가 결혼, 고모가 결혼한 마씨 가정은 상업에 종사하는 아주 부유한 가정이었다. 바로 그럴 즈음, 고모의 출가와 더불어 마씨 가정에서는 인편을 통해 또 다른 기별을 보내왔다. 즉 마씨 가정에서는 엄인미까지 며느리감으로 점찍고 있으며 그 어떤 요구도 다 들어 줄테니 재삼 혼약을 정하자는 것이었다. 마씨 가정으로 놓고 말하면 첫째, 당시의 엄인미가 천하절색이었고 둘째는 당시 마씨의 부인이 중병으로 앓고 있는 상황으로 엄인미를 며느리로 맞아들여 <액막이(冲喜)>하려는데 더 큰 목적이 있었다. 이에 엄인미의 부친 엄지다는 마씨 가정의 외부배경만 보고 흔쾌히 그 혼인을 허락했으며 엄인미가 불복하자 그 때부터 딸을 집안에 가두어 놓고는 서당에 가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자 엄인미는 단식하는 것으로 아버지의 강요에 대항, 단식이 지속됨에 따라 영양실조가 왔으며 나중에는 폐병에 걸리기까지 하였다. 그 뒤 사태의 위태로움을 느낀 엄인미의 외조부는 급히 외손녀를 항주로 데리고 가 치료하기로 작심했다. 엄인미의 외조부를 놓고 말하면 그야말로 외손녀를 애지중지하던 어른이었다. 그는 외손녀의 병 치료를 위해 좋다는 약을 다 구해왔고 용하다는 명의는 다 청해오기도 했으며 거처 옥상에 유리방(玻璃房) 하나를 가설하여 엄인미로 하여금 경상적으로 햇볕 쪼임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외조부의 정성이 지극해서일까? 과연 약 1년 뒤 엄인미의 병세는 근본적으로 호전되었다. 그 때로부터 그녀는 부친과의 마라톤식 타협 끝에 양보와 주견을 병행한 협약을 맺었다. 즉 결혼은 할 수 있으나 공부는 계속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 ▲ 상해 홍구클럽에서 친구들과 함께 남긴 엄인미의 사진(제일 가운데 여인이 엄인미임) 엄인미가 결혼한 뒤 과연 마씨네 마님의 병세가 나아졌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엄인미는 임신했고 더 이상 서당으로 다닐 수 없게 됐다. 그러자 마씨 가정에서는 한 영국인 목사를 청해 집에서 엄인미한테 영어와 사회교제 등을 배우주게 했다. 하지만 이 역시 서당으로 다닐 수 없는 엄인미의 마음을 달래줄 수 없었다. 그 시기 그래도 엄인미의 지인으로 돼 준 것은 <조씨네 넷째 딸>로 불리는 남편의 형수였다. 그녀는 늘 엄인미와 함께 상해 교외로 나가 산책도 하고 이런저런 대화도 하면서 동반해주었다. 둘은 비록 동서 사이었지만 친자매마냥 아주 자별했으며 그들이 몰고 다니는 승용차 역시 멋지고도 고급스런 무개차로서 한 대는 <조씨네 넷째 딸>이 운전했고 다른 한 대는 엄인미가 운전했다. 이렇듯 결혼 뒤 엄인미는 <조씨네 넷째 딸>한테 많은 것을 의지하며 마음의 평형을 잡으려 했지만 기타의 여건은 여전히 많은 실망을 가져왔다. 마씨네 가문은 비록 부유하였지만 전형적인 봉건식의 가정이었으며, 이는 서양의 문명에 눈을 뜬 엄씨네 가문과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았다. 이들 부부 또한 한명은 봉건전통가정의 <나으리>였다면 다른 한명은 발랄하고도 개방적인 신 여성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사유와 관념도 제각각이었고 음식습관마저도 도무지 융합될 수 없었다. 엄인미의 낭군 마령랑(马令郎)은 비교적 소탈하게 생겼지만 성격상 봉건세속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한편으로 개인생활상 여자들과의 관계가 난잡했으며 그의 주위에는 생활습성이 나쁜 친구들이 늘 붙어다녔다. 그러한 그의 생활습성은 엄인미와의 결혼생활이 지속될수록 점점 드러났다. 이러한 모든 것은 엄인미가 주장하는 신문화 및 개방형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참을 수 없었던 엄인미는 결연히 신랑 마령랑과의 이혼을 결심했다. 이 역시 그 때의 시대로서는 흔치 않게 봉건적 혼인에 대한 현대여성의 대담한 도전이었다. 바로 이 시기, 엄인미는 송애령(宋霭龄)의 큰 딸 공녕의(孔令仪)와 각별히 가깝게 지낸다. 명문가족끼리는 세세대대로 교제한다고 공녕의가 비록 엄인미보다 한 살 어렸지만 두 자매는 늘 가슴을 터놓고 대화를 나눴다. 공녕의는 엄인미의 불행한 혼인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더러 자주 공씨네 집에 와서 놀도록 하였으며 또한 공씨네 윤선(轮船)에 승선해 홍콩 등지에 가서 유람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윤선에서 엄인미는 서양요리사한테서 제빵 기술을 습득, 자신이 직접 만든 빵을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 여사한테도 드렸는데 송미령 여사도 아주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평소 엄인미는 송애령 여사한테 <부인> 하고 깎듯이 불렀지만 그럴 때마다 옹애령 여사는“너도 녕의처럼 나를 어머니라고 불러줬으면 좋겠구나”라고 했다. 이는 송애령 여사가 엄인미를 친딸처럼 생각하고 있었음을 의미했을뿐만 아니라 엄씨 가문과 공씨 가문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말해주기도 했다. 또한 송씨 가문과 공씨 가문 모두가 엄인미의 이혼결심을 지지했으며 그녀가 다시 분발하여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나가도록 고무 격려했다. 태평양전쟁 전야, 엄인미의 수양어머니 성관이(盛关颐)가 상해를 떠나게 되어 신강화원 15번지(新康花园15号)의 주택이 비어있게 되었다. 상해를 떠나면서 성관이는 엄인미가 이 주택에 기거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인부들을 청해 이 주택을 새롭게 수건하게 하였다. 이 시기, 조계지내에서의 일본의 세력은 날로 팽창하였다. 아울러 엄인미가 들려고 했던 신강화원 15번지의 이 주택 역시 일본관원들이 사무실로 쓰려고 노리던 것이었다. 그러던 중 어느 하루, 이 주택을 보러왔던 일본인 야마모토는 엄인미의 미모를 보고는 더욱 끈질기게 <주택임대>를 명목으로 치근덕거렸으며 그날부터 매일 이 주택으로 들락거렸다. 이에 엄인미는 재삼 주택을 임대해주지 않는다고 밀막아 버렸지만 야마모토는 여전히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모 친일주구 한명은 엄인미를 찾아와 “야먀모토는 관직이 높은데다 미혼이기에 그와 결혼하면 낭패될 것이 없다”고 구슬리기도 했다…… 그 뒤 엄인미는 화를 피하려고 더 이상 신강화원 15번지로 가지 않고 친정에 머물러 있었지만 야마모토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그녀의 친정을 찾아와 치근덕거렸다. 이어 엄인미가 숙부의 집에 가 피신해 있자 야마모토는 또 숙부 집 주위에 감시망을 설치하였다. 그러자 엄인미는 다시 몰래 작은 고모가 출가해 있는 주씨 가정에서 몰래 숨어있어야 했다. 엄인미가 주씨 가문에 숨어있던 그 나날, 주씨 가문의 모든 이들이 가슴을 움켜잡고 숨 죽이며 긴장해하던 나날들이었다. 한편, 송애령의 딸 공녕의는 엄인미의 신변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게 되자 사람을 시켜 엄인미를 중경으로 데려가려고 했다. 떠날 날자가 다가오자 뜻밖으로 엄인미의 원 시가인 마씨 가정에서는 그녀가 자식을 데리고 떠나지 못하게 했고 엄인미 역시 아들애와 떨어지기 싫었다. 결국 엄인미는 계속 상해에 남기로 했다. 일본인 야마모토가 계속 치근덕거리는 상황에서 상해에 홀로 남아 있는다는 것 역시 장구지책이 못되었다. 이러자 엄인미의 가까운 친척들은 상론한 끝에 유일한 방법은 하루 속히 훌륭한 신랑감을 찾아 엄인미를 결혼시키는 것이었다. 그 3개월 뒤, 과연 엄인미와 잘 어울릴 수 있는 신랑감이 나타났다. 바로 엄씨 가문과 세세대대로 가깝게 지내왔으며 역시 상해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이씨 가문의 공자- 이조민(李祖敏)이었다. 광화대학 경제학부(光华大学经济科)를 나온 이조민은 학식이 연박하고도 본분을 잘 지키었으며 대중성냥공장(大中火柴厂)의 보스이자 미혼의 몸이기도 했다. 혼례식 날, 만일의 경우 일본인들이 몰려와 소란을 피울 것이 염려되어 이씨 가문에서는 10명의 경호원을 배치했으며 혼례도 아주 간소하게 치러졌다고 한다.그 일례로 엄인미의 결혼사진 중 신랑와 신부가 나란히 등장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마저 찾아 볼 수가 없다. 이는 오늘까지 엄인미가 가장 유감스러워하는 일이기도 했다. 결혼 뒤, 엄인미의 결혼생활은 아주 행복했다고 한다. 둘은 서로 극진히 상대를 사랑했으며 일본인들도 더 이상 찾아와 시끄럽게 굴지 않았었다. 새 중국이 창립된 후 엄인미는 애국운동에 적극 가담, 나라건설을 위해 자신이 솔선적으로 헌금했을 뿐만 아니라 공상업계의 모금계획도 적극 추진했다. 그러면서 이런 애국운동중 공상계의 유념의(刘念义), 영의인(荣毅仁), 성가년(盛康年) 등 거물들의 믿음직한 동반자로 되기도 했다. 한편 미국 하와이에 가서 당시 그 곳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장학량과 조일획(조우쓰 쇼제-赵四小姐)를 탐방했는가 하면 또 워싱턴에 가서 채문치 장군(蔡文治将军)을 만나뵙기도 했다. 미국방문시 엄인미는 그 시기 미국에 체류하고 있던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도 만나 뵐 계획을 하였으나 송미령이 대륙에서 온 그녀를 만나주지 않았다. 하지만송미령은 공녕의한테 부탁하여 엄인미한테 고급옷 한 상자를 보내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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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8-02-16
  • 헐, 바닥이 드러나네
    ●진 언 국민일보, 뉴스시 등 신문에 “北 선수만 '삼성 올림픽 스마트폰' 못 받는 이유”라는 제목의 글이 났기에 스쳐보니 기자의 저의도 비리거니와 북에 관한 기사라고 범벅이에 쉬파리떼 같이 달려들어 댓글(1636개)을 단 애국지사들의 쾌거가 어처구니 없다 못해 우습게도 눈물겨워질가 한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 참가하는 3000명가량 선수들은 삼성 갤럭시 S8 스마트폰과 나이키 유니폼 등을 선물로 받는다. 하지만 북한 선수 22명은 이 선물을 받을 수 없다. 북한이 유엔 안보리와 미국 등의 제재 대상 국가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북한 선수단에 편의를 제공하면서도 각종 제재에 위반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쓰고 있다.…이에 여자 아이스하키팀의 유니폼은 미국의 나이키사가 제작한 것이 아닌 핀란드 회사가 만든 유니폼을 사용하도록 했다. 하키 스틱 역시 핀란드 회사가 제작한 것을 사용하는데 ‘임대’ 형식이며 북한 선수들은 한국을 떠나기 전에 이를 반드시 반납해야 한다.…” ▲ 북선수단과 응원단 기자씨가 모쪼록 이런 글을 올린 것이 선각자의 발견인지, 악어의 눈물인지 직접 물을 수는 없으나 그 저의가 참 비릿함은 분명 느낄 수 있다. 그건 그렇고, 댓글을 다느라 팔을 걷어부친 누리꾼들의 모습이 보이는 듯 해서 경이원지하게 되는데 입을 벌리면 평화통일이니 민족융합이니 떠들어치는 국내상황에 비추어 보면 일본놈들이 이래서 “반도인”은 안된다구, 죠센징은 몽둥이로 다스려야 한다고 나발분 근거를 다시 떠올리게 된다. 아래에 참으로 경탄스러운 댓글 1351개 중에서 일부를 베껴본다. ※ 개불쌍 뭐하러 줘? 가면 다 뺏어서 못된일에 사용할텐데. ※. 고마움도 모르고 또 뒤통수 칠 것들이다..줄 필요없다. 우리 국민들 냐눠줘라~~ ※ 줘봤자 외화벌이용으로 수거해 되팔겠지. 아님 고위간부가 가져다 쓰거나. ※ 지상낙원에서 왔는데 그게 무슨 소용있나 ※ 한창 휴대폰에 관심이 많을 세대인데 마음이 야좋네요. ㅠㅠ ※ 줘도 쓰지도 못하는 동네고 줘봤자 간부들에 뺏겨서 다 팔리고 그돈은 ○○은 사치품 사가는데 쓰이는데 당연하지. ※ 이젠 무상 지원 없애야 한다. 핵무기 만드는 잘사는 나라에 왜 공짜로 주는지 참 알수가 없다. 북한 선수들 잘 먹고 잘 산다. ※ 그렇게 퍼줄돈 있으면 국내어려운 가정이나 불우아동들에게 사용해라! ※ 저것들한테 숙소랑 식사제공하는것도 짜증난다 ※ 구충제나 주자 초코파이좀 던저주고 ※ 줘도 쓸줄도 모르고 가져가봐야 다 뺏긴다 외화벌이 해서 핵탄두 만드는데 보태 겠지,,, ※ 올림픽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 하면서 이건 정치적으로 이용하는건 뭔데? 니가하면 무죄이고 내가 하면 유죄냐? 뭐 이런 개 같은경우가 다 있냐?(량지가 있음) ※ 주지마 가져가봐와 ○○이줄텐데 왜주냐 북한애들주느니 우리영세민주시오 ※ 미친 빨괭이 따위에게 핸드폰이 가당키나 하나 옥수수나 던져줘 ※ 이런 취급을 받는 무리들을 상전으로 주공으로 모시니 나라의 운이 다 되었다.... ※ 걍 돌려보내 시끄럽게 하지말구 ※ 주는거 없이도 너희들 북한은 시르다 ※ 짝짝짝 지금 이라도 ♬♬ 는 쫓아버리자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걸치는 양아치 한테 무슨 대접을 해 ※ 초코파이나 처먹으라고 던져줘라 ※ 줄 필요없다 폰 아깝다 차라리 자원봉사에게 주라 ※ 아니 유니품도 대주냐 북이할수있는것이 뭐냐 그런걸왜 우리가 대주냐 이해불가다 ※ 이럴꺼면 뭐하러 올림픽 불러 참가하도록 한거니(어쩌다 인물났네) ※ 적국인 북한놈들한테 왜 비싼 삼성스마트폰을 준단 말인가? 뺨을 서너차례 때려주고 싶은데..... ※ 비용한푼안들이고 오는주제에도 모가지 힘주고 다니는데 안주는게 맞다.. 여기서 민족이란 단어 씨부리는넘들 아가리를 찟어버린다..민족이 뭐냐??? 족발이냐?? ※ 북한은 외국이라 본다. 언제까지 외국 북한에게 퍼주고 끌려 다닐건지?? ※ 적국국민을 왜 줌? 동맹국 미국민한테나 하나 더 주지 ※ 북괴놈들 폰 못 가져가는 것도 걱정이냐 별 더러운 기레기를 다보겠네 너 문빠냐 북한놈 챙기게 ※ 추운데 고생한 자원봉사자들에게 하나씩 선물로 주었으면 좋겠다. ※ 누구누구의 논리라면, 북한 선수단 밥도 주지 말아야 한다. 식사를 제공하면 밥 먹은 힘으로 ○○은 동지를 위해 충성하면서 핵무기 만드는 데 힘을 합해서 우리의 종주국 미국, 일본에 위협이 된다. 따라서 밥도 주지 말아야 한다. ※ 전세기허용,공연장 무료제공,유니폼 제공,체제비 all 부담하면 됐지,, 갤S8까지 줄 필요는 없어! 문재앙 주사파 촛불폭도들! UN제재 결의안 반하는 꼼수 부리지마라,, 국제신뢰 바닥인데 한미동맹마저 완전 파괴돼 수습불가능한 고립무원 국제왕따 된다! 이번올림픽으로 북한이 얼마나 괴씸하고 이기적인 놈들인지 다시한번 느낀다. ※ 당연하다 ᆢ적국 이라는것 잊지마라 ※ 하여간 희한한 짓거리 해대는 이상한 것들 땜시 대한민국이 엿같은 짓하는 나라가 됐으니...(그래도 생각이 올똘한 사람이 있네) ※ 잘한다 선은 확실히 긋는게 좋다 ※ 빨 개이라 재앙이가 줘라 같은 빨개이 고향 ※ 추접구로 뭐하는짓이고? 선수들한테 그럴거 뭐있냐? 초코파이 던져주라는것들 ~ 저질인지 ,수준이 낮은건지,어린애 인지...( 량지가 있는 사람의 당연한 질타) ※ 그 넘들 먹여 주고 재워 주는것 만도 고맙지 그런걸 왜 줘 ! 주면 그게 걔덜꺼 되니 ? 전부 압수 해서 똥돼지 떨거지 넘들이 가져 가겠지 ! 못 줘서 아쉽냐 ? ※ 주지마라. 임대형식이라도 줘서는 않돼. ※불쌍한 북괴선수!가장 좋은 휴대폰 갖을수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태여난 땅이 문제구나.그래도 몇일간 잘먹고 잘놀았잔여.... 중구난방의 고견들을 여기까지 옮기고 접어두련다. 썩은 나무 몇그루를 보고 온 수림이 썪었다고 말하면 안되지만 일엽지추라고 작은 남녘땅에 “나라의 흥망성쇠는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고염무의 말이 무색해질 정도로 자기 국가앞에 책임지고 나서는 우국지사들이 저리도 많음에 감탄이 묻어나오고 한편 저리도 잘난 똑똑이들이 왜 댓글질이나 하면서 표현욕망을 만족시키는지 곤혹스럽기만 하다. 미운정도 고운정도 정이란다. 미워도 무서워도 한피줄 겨레이다. 장기간의 분단상황에서 이질화되었더라도 피는 영원히 물보다 진하건만 오히려 불구대천의 원쑤로 절치부심하며 이를 뿌득뿌득 가는 양자가 대견스럽지가 않지만 수많은 인재들이 초야에 묻혀 육도삼략을 썩인다고 생각하니 싱거운 개탄이 나온다. 옆구리 터진 도토리만큼한 그릇들이니 그럴 수 밖에 있겠냐 하면서도… 조선민족의 전통속담에 동냥은 주지 못할망정 쪽박은 깨지 말라고 했거늘, 주지도 않겠다며 웬 성화인가? 아무리 삼성스마폰이던들 그것으로 일국의 재정을 보탤 수 있단말인가? 스마트폰 22개 값이 얼마냐? 중국에서 웬간만한 사람이면 단번에 살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따위로 네티즌들이 앞다퉈 목에 핏대를 세우고 쾌지나 칭칭하며 멋에 겨워있다만 인간성의 밑바닥을 드러냈다고 생각못하는가? 말한마디에 천냥빚도 갚는다고 한다. 그러나 말한마디로 말하는 자의 위인됨이 확인된다. 아무튼 그 놀라운 동족증오병에 열뜬 투사들을 두고 혀가 홰홰 내둘러진다. 트럼프가 알고 찾아와 어깨를 도닥여주고 엄지를 내흔들며 치하를 하지 않으면 공념불이 될듯, 그리고 한다하는 삼성이 고작 22개의 스마폰을 못주는 이유를 무슨 제재타령으로 뭉그리지만 결국 세계인들이 짝이 없는 쪼잔함에 갈채를 보낼만도 하겠다. 유엔총부에서도 유엔결의를 잘 집행한다고 큼직한 상장을 보내줄가? 아무튼 이를데 없이 찌질한 그 작태에서 국민의식 수준을 가늠하게 된다. 어이 없지만 감탄하던차 동족증오병 환자들에게 곰팡이 낀 말로 일침을 가하고싶다. 알만한 사람이 다들 알고 있고 정설이 아니라 와전된 것이라 하지만 마지막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의 소름끼쳤던 “예언”을 여기에 옮기나니 그저 코웃음만 치고 그냥 간과할 것이 아니라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한번 다시 읽어 보시라. 그래도 아무런 느낌이 없다면 구제불능이구,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장담하건대 조선민이 제정신을 차리고 찬란한 위대했던 옛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놓았다. 결국 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 조선은 결국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 “日本は敗れたが、朝鮮が勝利したわけではない。大言壮語ハゴンデ朝鮮が第我に返ってきらびやかで偉大な昔の朝鮮の栄光を取り戻すには、100年という歳月がはるかにかかるだろう。私たち日本は、朝鮮国民に銃と大砲よりも恐ろしいの植民地教育を植えて置いた。結局、朝鮮人たちはお互いに仲違いし、奴隷的な生活を送るのだ。見よ!実に朝鮮は偉大した絢爛だったが、現在の朝鮮は結局日本の植民地教育の奴隷に転落した。そして、私の阿部は再度もどって来る” 아베 노부유키가 패망하면서 조선국민에게 쏜 저주의 화살이 자신으로 향하도록 정신 똑바로 차리고 보여줘야 하건만 오히려 그들과 합창하고 있지는 않는가 한번 생각해 보라!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속담은 우리 선조님들이 오늘을 내다 본듯 경계하여 남기는 경세지언일진대 일심전력하여 단합된 배달민족의 홍익인간을 세계만방에 떨친다면 아니 좋은 일인가? 모래알은 아무리 많이, 높이 쌓여도 그냥 모래무지이지 장성이 못된다. 뭉쳐도 어떨가 하는 위태위태한 판에 호시탐탐하는 외세에 어부지리를 마련하려고 광분하며 기세충천하니 타국에 백발로옹이라도 넘 감격해서 즉흥적으로 끄적거려 본다. 시끌한 인간세상 탈도 많다만 분단족 어쩌다 잘해 보자는데 천하에 몹쓸 잡것들 납뜨누나 옆구리 터진 도토리 심통이라 그리 보채며 성화를 부리느냐 뿌리 깊은 노예근성 못말려도 열강들 멋대로 가지고 노는데 자존은 없더라도 치욕도 없냐 ※ 본지에 기고되는 논문이나 나의주장, 칼럼은 순수한 기고자의 주장임으로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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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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