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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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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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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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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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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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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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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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편실화연재】한 여인의 인생변주곡(27)
    ■ 김철균 2 그 일이 있은 후부터 문영이는 늘 수심에 잠겨있던 지난날과는 달리 활달한 모습을 보이었다. 자신을 낳은 친 어머니는 없지만 자신을 더없이 아끼고 사랑하는 새로운 조선족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더는 영애를 비롯한 순자네 자식들의 눈치를 보지도 않았다. 그 어머니에 그 딸이라고 알고 보니 순자의 딸들 역시 착하고 친절했으며 문영이를 친동생처럼 여기는 자매들이었고 점점 나날이 지나면서 오빠들 또한 모두 점잖고 유식했으며 동정심도 많은 형제들이었다. 문영이는 일요일마다 “북해상점”에 와서 순자와 어울려 때로는 어리광을 부리기도 하고 때로는 상점옆에 있는 영옥이네 집에 들어가 영옥이네 아들애와 함께 놀아주기도 했다. 한편 문영이는 순자의 일을 거들어주면서 김치와 장을 담그는 재간과 기타 주방일을 배웠다. 일이란 내켜서 하는 것이라 재미있기 마련이었고 문영이는 열심히 조선족주방일을 배웠으며 얼마 안있어서는 제법 조선족 여성에 못지 않게 주방일을 척척 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담근 김치도 제법 맛있다는 평가를 받아보기도 하였다. 문영이가 기뻐하며 기를 펴고 나다니자 이를 바라보는 순자의 마음 또한 흐뭇하기만 했다. 그리고 얼마 뒤 순자의 남편 김용환 교원도 상점에서 문영이를 만나보고는 자신도 어렵게 자라면서 공부를 해온터라 문영이에 대해 진정으로 아껴주면서 친딸처럼 대했다. 그 해 겨울방학이 되자 문영이는 연길을 떠나 돈화에 있는 아버지의 곁으로 가게 되었다. 순자의 곁에 있고 싶기도 하고 그러면 더 편하고 행복할 수도 있었지만 문영이는 가야만 했다. 방학기간만이라도 장애자인 아버지를 돌봐야 했다. 문영이를 돈화로 보내는 것 이는 또한 순자의 뜻이기도 했다. 문영이가 떠날 때 순자는 과자, 사탕, 과일, 술 등 먹을 것을 한아름이나 사서 문영의 가방안에 넣어 보냈다. 어쩔 수 없이 문영이를 돈화의 시골로 보내긴 했지만 이는 가슴의 살을 도려내듯 저리고 아픈 노릇이었다. 아니나 다를가 문영이가 떠난 이튿날부터 순자는 문영이에 대한 근심으로 끙끙 속을 앓으면서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돈화의 농촌은 이곳 연길보다 많이 더 춥겠는데 얘가 감기에라도 걸리지 않았는지?…얘 영순아, 문영이가 무사히 도착했는지 또 앓지나 않는지 전보라도 한통 쳐보려므나.” “어머니, 우리가 자랄 때는 막 굴러다니며 자라게 하더니 이번에 한족딸을 삼으니 제법 정성이 지극하구만요.” 큰 딸 영순이의 악의없는 농담에 순자는 제법 정색을 했다. “너희들 그렇게 생각하면 못쓴다. 걔는 에미가 없는 애란다. 너희들과는 달라. 너희들도 걔를 불쌍히 여겨야 한다.” “알겠습니다. 한족딸의 어머니, 이 조선족딸들은 그 영을 받들어 따르겠나이다.” 막내 딸 영애도 한술 더 뜨며 말참견을 했다. “에끼, 이것들 너희들도 자식을 키워보면서 그것도 몰라?” 순자 역시 악의없이 딸들을 흘겨보았다. 그러면서도 순자의 뇌리속에는 문영이에 대한 근심뿐, 요즘 세월처럼 전화 한통이라도 할 수도 없었고 다만 편지를 연락을 주고 받을 수 있었으니 더욱 그랬다. …… 어느 덧 음력설과 정월보름이 지나고 위생학교 울안의 백양나무에 까치가 앉아서 우는가 싶더니 개학을 앞둔 어느 날 문영이가 나타났다. “어머니!” “문영아!…” 모녀는 대뜸 한덩어리가 되었다. “어머니, 보고 싶었어요.” “문영아, 나도 그랬어. 나도 네가 보고 싶어 죽는줄 알았다.” 모녀는 다시 한덩어리가 되었다. 이윽고 문영이의 손을 잡아보는 순간 순자는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구, 네 이 손이 뭐냐?” 그도 그럴 것이 문영이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거웠고 손등은 얼기설기 갈라터지기까지 했다. 더 설명하지 않아도 집에 가있는 동안 아버지의 병수발을 들면서 찬물에 밥을 하고 빨래하고 하면서 무척 고생한 것이 분명했다. 순자는 문영이의 언손을 가슴속에 꼭 품어 주었다. 순자의 따뜻한 살결이 손에 닿는 순간 문영이는 뜨거운 모성애에 눈앞이 흐려났다. 아, 모성애란 바로 이런 것인가?! 순자의 가슴팍에 안긴 문영이는 7-8살이 어린애가 되고 싶었고 그대로 발버둥이질을 치며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으며 아니, 그대로 영영 떨어지고 싶지를 아니했다. 때마침 이들의 상봉을 알아주기라도 하는듯 당시 중국대륙에서 많이 유행되던 대만가요 “세상에는 엄마가 좋아(대만영화-‘어머니 다시 한번 더 사랑해 주세요’에서의 주제곡)”가 “북해상점”의 반도체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세상에는 엄마가 좋아/ 엄마있는 아이는 보배같지요// 엄마품에 안기어 행복 끝없어라… 한편 순자와 문영이가 서로 한덩어리가 되어 있는 모습은 옆에서 지켜보는 영순이와 영애마저도 눈시울이 뜨거워나게 했다. 3 봄이 왔다. 뒤늦게 찾아오는 북국의 봄이지만 봄이 오는 것만은 분명했다. 해빛은 포근했고 살랑살랑 부는 바람도 매섭지 않았으며 사람마다 봄이 좋다고 겨우내 웅크리고 있던 허리를 펴며 기지개를 켰다. 아니 이 시각, 자연계에 찾아오는 봄도 좋았지만 문영의 가슴에 스며드는 인생의 봄은 더욱 따뜻하고 좋았다. 봄을 맞는 마음은 순자도 마찬가지었다. 그 해는 한족딸 문영이와 인연을 맺은 뒤 맞는 봄이라서인지 더욱 즐겁기만 했다. 문영이는 자주 “북해상점”으로 찾아왔다. 또한 문영이가 오지 않으면 순자가 문영이네 기숙사로 찾아가기도 했다. 이틀만 서로 보지 못해도 그리워서 못견딜 지경이었다. 어느 덧 “3.8절”이 다가왔다. 그 날 학교에서는 오전만 수업하고 오후에는 전체 사생들을 휴식시키기로 했다. 그러자 집으로부터 용돈을 좀 넉넉히 받아쓰는 학생들은 기숙사식당의 밥은 먹지 않고 외출준비에 서둘렀다. 밖에 나가 맛있는 것도 사먹고 옷도 사입으면서 유쾌하게 “3.8절”을 쇠려고 말이다. 그러나 문영이를 비롯한 가난한 가정의 애들 몇몇은 외출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외출하는 애들이 함께 나가 식사라도 한끼를 같이 하자고 했으나 일일이 거절했다. 그 애들도 집에서 보내오는 돈을 쓰기에 남을 도우면서까지 쓰기엔 넉넉하지 못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까닭없이 남의 배려를 받고 싶지도 않았다. 하긴 문영이는 순자네 “북해상점”으로 찾아가 맛있는 것을 얻어먹을 수 있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늘 함께 어울리던 애들을 떼놓고 혼자 가기도 미안했고 그렇다고 그 애들을 몽땅 데리고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바로 이 때 순자가 헐레벌떡 기숙사로 찾아왔다. “문영이 있구나. 내가 좀 늦었구나. 아직 밥먹기 전이지? 오늘은 ‘3.8절’이니 상점에 가서 물만두나 빚어먹자꾸나.” “어머니, 전 괜찮아요. 기숙사식당에도 밥이 있는데요 뭘…” “얘, ‘3.8절’날에 왜 고독하게 기숙사식당에서 밥을 먹겠니? 자, 그러지 말고 함께 가자꾸나. 오후에 수업도 없다면서…” “그런데…” 문영이는 함께 기숙사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던 얘들을 돌아 보았다. 그러자 순자는 눈치를 인차 알아 차렸다. “너, 저 애들 때문에 그러는구나. 그럼 저 애들도 함께 데리고 가면 될게 아니냐?!” “어머니 정말요?…” 문영이는 기쁜 나머지 순자의 목을 끌어 안고는 볼에 입을 맞추었다. ▲북해상점서 한족딸 문영이와 장려(안경을 낀 사람 장려임)한테 일본어를 배워주는 김순자(흰위생복을 입은 사람 김순자임) 그 날 문영이와 몇몇 가난한 집의 자녀들은 “북해상점”에서 순자가 만들어준 물만두와 몇가지 맛있는 밑반찬과 볶음채를 먹으면서 “3.8절”을 기념했다. 음식을 다 먹자 천진난만한 여자애들은 자기네들이 보고들은 학교얘기와 기타 사생활을 화제에 올리며 웃고 떠들었다. 그와 중 어느 한 애가 학교과목 중 일본어가 배우기 가장 힘들다고 했다. 이에 문영이도 한마디 동조했다. “그래 나 역시 일본어가 힘들긴 마찬가지야. 선생님들이 말하기를 발음상에서 조선족들은 일본어를 배우기가 쉽대. 한족은 영어를 배우기가 쉽고 말이야.” 순자는 설겆이를 하다가 엉결에 그 애들이 주고 받는 말을 엿들었다. “얘 문영아, 일본어가 배우기 힘들다구?” “그래요, 어머니. 가장 힘든 것이 일본어예요.” “음, 그랬구나. 그럼 진작 이 엄마한테 얘기할 것이지.” “뭐예요?! 그럼 어머니가 일본어를 배워줄 수 있다는 말씀이세요?” “그래 그래, 안믿어?! 이래뵈두 난 해방전 일본인이 교장하는 학교에서 전문 일본말로 대화하며 공부한 사람이란 말이다. 일본어를 모른다면 아주 섭섭한 일이지.” “야 ㅡ 정말……” 여자애들은 탄성을 올렸다. 그도 그럴 것이 순자가 한 말은 결코 제 자랑을 늘여놓는 것이 아니었다. 소학교 시절의 6년간 일본의 노화교육을 받았던 그는 일본어의 회화나 문자 실력이 당시 연변 내의 웬간한 일본어 교원은 뺨칠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때로부터 순자는 상점벽에 자그마한 흑판 하나를 걸어 놓고는 문영이를 비롯한 몇몇 위생학교 학생들한테 일본어를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가 순자의 일본어실력은 대단했다. 한낱 평범한 가정주부로만 여겼던 순자한테 그렇듯 놀라운 일본어 실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문영이와 기타 학생들은 모두가 깜짝 놀라면서 틈만 나면 순자한테로 찾아와서 모를 것을 물어보군 하면서 열심히 일본어를 배우군 했다. 순자의 보충교수로 문영이를 비롯한 애들의 일본어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제고돼 갔다. 문영이는 순자와 자기 자신의 인생이 함께 엉키게 된데 대해 진정으로 고마움을 금할 수 없었다. 만약 하늘에 하느님이 있다면 문영이는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배려라고 인정하고 싶기도 했다. 연변위생학교ㅡ “북해상점”ㅡ 김순자어머니ㅡ그리고…만약 자신의 인생에 연변위생학교, “북해상점”과 김순자어머니가 개입되지 않았더라면 과연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되였을까 하고 문영이는 자주 반문해 보기도 했다. 한편 문영이는 조선족어머니의 사랑과 도움에 고마워하는 마음만을 가지고 있을뿐만 아니라 뭔가 어머니한테 해드리고 싶었다. 그러는 것으로 어머니가 기뻐하게 해드리고 싶었는데 그것이 후날 문영이가 작가로 되는 취지가 되기도 했다. 평소에 그림그리기를 즐겼고 또 어느 정도 “미술자질”을 갖추고 있었던 문영이는 조선족어머니를 노래하는 첫 스타트로 “꿈속의 어머니”란 제목으로 된 그림 한장을 그렸다. 홀로 상상해서 그렸으니 어떻게 보면 이는 창작이기도 했다. 그림속에는 술병, 간장병과 기타 상품들이 있는 가운데 새하얀 위생모자를 쓴 순자가 벽에 걸린 작은 흑판을 이용하여 학생들한테 일본어를 가르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림의 수준을 떠나 그 속에는 순자에 대한 문영이의 고마움과 애정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4 “3.8절”이 지난 후 3일 뒤, 이른 봄이었지만 그날은 날씨가 제법 더웠다. 그 날 물건구입을 나갔던 순자는 행인들의 옷차림과 자신의 옷차림을 비교해 보고는 깜짝 놀랐다. 아직도 겨울옷을 걸치고 있는 자신과는 달리 행인들 거의 모두가 가볍고도 환한 봄철 옷으로 단장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연길복무청사 냉면부의 출입문으로 사람들이 삼삼오오 줄지어 들어가고 있었다. 날씨가 더워오자 목에 갈증이 생기면서 냉면생각들이 난 모양이었다. 순간 순자는 또 문영이가 생각났다. 문영이를 보지 못한지도 사흘이나 되었던 것이다. 그 동안 기숙사밥으로 끼니를 에우며 공부를 하고 있을 문영이를 생각하니 가슴이 또 알짝지큰해났다. 순자는 문영이한테 냉면 한그릇 사먹이고 싶었다. 시계를 보니 별로 늦지는 않았다. 순자는 종종걸음으로 문영이의 기숙사로 향했다. 기숙사에는 마침 문영이가 있었고 점심밥을 먹기 전이었다. “문영아, 오늘 무척 덥구나. 나와 함께 냉면 한그릇씩 먹지 않을래?” “냉면?! 어머니 저한테 냉면 사줄래요? 오케이, 야 신난다. 오늘 냉면 먹게 됐구나!” 키만 컸지 문영이는 여전히 애나 다름이 없었다. 냉면을 먹는다고 하니 그렇게 뛸듯이 좋아하는 문영이를 보며 순자는 저런 철부지를 두고 에미가 어떻게 눈을 감았느냐 싶었다. 순간 또 가슴이 뭉클해 나며 눈물이 나왔다. 하긴 기숙사생활을 오래 하노라면 어른들도 항상 속이 출출한 법이라 이는 결코 문영이가 철부지래서만이 아니었다. 미구하여 함께 복무청사 냉면부에 들어가 사람들 속을 비집고 겨우 식탁에 마주앉은 순자와 문영이ㅡ 헌데 순자는 문영의 몫으로 냉면 한그릇만을 샀다. “어머니, 왜 한그릇만 샀어요? 어머니는요?” “기실 난 아까 나왔던 김에 한그릇 먹었다. 미안하다. 혼자서 먹다가 그만 네생각이 나서 너한테로 간거다. 어서 먹어라.” “그랬어요? 기실 전 안먹어도 괜찮은데…” 문영이는 순자의 말을 그냥 그대로 믿었다. 쫄깃쫄깃한 냉면오리와 시원한 냉면국물, 정신없이 맛있게 먹고 있는 문영이를 바라보는 순자의 마음은 흐뭇하기만 했다. 그러나 두눈에는 이슬이 맺혔다. “어머니, 울잖아요? 왜 그래요, 어머니?” “아니다. 네가 먹는 걸 보니까 흐뭇해서 그런다. 앞으로는 냉면이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이 엄마한테로 오거라.” 천진한 문영이는 오늘 어머니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으나 그렇다고 점심을 굶어가며 자기한테 냉면을 사주고 있다는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였다. 그 날 문영이한테 냉면을 사먹이다 보니 순자는 손님이 가장 많이 들이닥칠 점심시간에 상점문을 닫아야만 했다. 하루 매출액이 100여위안이라 할 때 점심시간에 그 50% 이상의 매출액은 그 시간에 올려야 한다는 것은 모든 상점주인들이 다 알고 있는 상업법칙이다. 그렇게 말하면 그 날 순자는 주먹구구로 아무리 적게 계산해도 70원 정도는 적게 번 셈이었고 또한 적지 않은 단골을 다른 상점에 빼앗길 수도 있었다. 아니나 다를가 후에 단골로 “북해상점”에 드나들던 맥주애호가 몇몇이 그 날 점심에 찾아왔다가 그냥 돌아섰다며 섭섭해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생필품을 사러 다니는 위생학교 교직원과 학생들과 그냥 길가다 찾아들어오는 행인손님들, 그 날 순자가 놓친 손님은 과연 얼마나 되였을까? 하지만 문영이한테 냉면을 사먹인 것에 대해 순자는 꼬물만치도 후회가 없었다. 아니, 자기가 문영이한테 등한히 대한 적이 있을가봐 항상 신경을 기울였으며 2-3일만 문영이를 보지 못해도 얘가 앓지나 않는가 하고 마음을 졸이군 했다. 그랬다. 순자가 문영이에 대한 사랑은 친 딸들에 대한 사랑 그 이상에 달했다. 이는 그 사랑을 직접 받고 있는 문영이 자신도 다는 알 수가 없었으니 타남들이야 그것을 알아줄리 더욱 만무했다. 사례로 한가지만은 꼭 적고 싶다. 그해의 여름, 큰 아들과 큰 며느리가 북경으로 출장갔다가 돌아오면서 순자한테 값진 양털적삼, 속내의와 신 등을 기념으로 사왔다. 이런 옷과 신 등은 평소에 순자가 별로 보지도 못하던 것들이었다. 좋은 옷을 보면 입고 싶어하는 것이 여성들의 천성이라고 할까? 순자도 마찬가지었다. 아들 며느리가 사다준 옷을 입어보고 신을 신어보고 하던 순자는 기쁘기 한량 없었다. “고진감래(苦尽甜来)”라고 자식들 효도에 이젠 복을 누리는가 싶었고 또한 옷이 날개라고 그 옷을 입으니 20년은 더 젊어 보이기도 했다. 순자는 그 옷을 입고 거울앞에서 이리 저리 비춰보기도 했다. 결혼한 뒤 수십년간 영감한테서는 이런 옷을 한번도 선물받아 본 적이 없었는데 자식한테서 이런 복을 받아 보다니 어쩐지 꿈만 같았다. 하지만 이는 한순간에 불과했다. 또 문영이가 뇌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그 애는 지금 한창 피여나는 꽃나이인데 반반한 옷 한벌 없지 않은가?!) 순자는 아쉬운대로 입었던 새옷을 벗어 다시 포장했다. 순자는 문영이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어느 날 그가 나타나자 아들 내외한테서 선물받은 옷을 내놓았다. “어머니, 이게 뭔가요?” “너 큰 오빠네 내외가 북경에 갔다가 나한테 선물로 사온 것이다. 아마도 네한테 어울릴 것 같아서다.” 그러자 문영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뒷걸음질을 쳤다. “어머니, 전 받을 수 없어요. 어머니한테 선물한 것을 제가 어떻게 받아요.” “얘, 큰 오빠가 뭐 남이냐? 그리고 기실 그 옷들이 너무 환해서 나한테는 좀 어울리지도 않는다.” 순자는 짐짓 맘에 없는 말을 했다. 순자는 막무가내로 옷과 신 등을 문영이한테 밀어맡겼다. 기실 문영의 얼굴에는 기뻐하는 기색이 역연했다. 그러면서도 짐짓 그 심정을 감추는 모양이었다. “어머니, 제가 어머니한테서 자꾸 이렇게 받기만 해서 어떡해요. 전 어머니한테 아무 것도 해드린 것이 없는데…” “아직 나이도 어리고 앞날이 창창한데 앞으로 왜 기회가 없겠느냐! 그리고 이 엄마가 널 해주는 건 너한테서 뭘 보답받기 위해서가 절대 아니란다.” “어머니ㅡ” 문영이는 재차 순자의 목을 끌어 안으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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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5-03-23
  • 중국과 세계에 영향력을 미친 마오저둥의 예언
    “학문이 있다는것은 마치 높은 산에 올라 남보다 더 많이 더 멀리 바라볼수 있는 것과 같으며 학문이 없다는것은 마치 암흑속에서 걷는 것과 같이 한치앞을 바라보기조차 힘들다! 마오저둥” 마오저둥의 예언은 억측이 아니였다. 우연의 일치는 더구나 아니였다. 그것은 풍부한 실천경험과 연박한 지식 그리고 비범한 통찰력과 현실속에 깊이 침투해 조사하고 연구하고 분석하고 판단하면서 쌓은 경험적 결론이였다. 중국공산당제7차전원회의에서 마오저둥은 이같은 발언을 했다. “지휘대에 올라서서 아무것도 보아내지 못한다면 그는 진정한 영도가 아니다. 지휘대에 올라서서 수면우에 드러난 보편적인 상황들만 본다면 이 역시 진정한 영도자가 아니다. 문제가 발생하기전에 바야흐로 일어나게 될 상황들을 예견하고 멀리 내다보며 상황을 파악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영도자이다!” 1916년 7월 25일 예언 “앞으로 20년사이에 중국과 일본간에 큰 전쟁이 있을 것이다!” 1937년 7월 7일, 로구교사변을 알리는 첫 총성이 드디여 항일전쟁의 서막을 열어제꼈고 이 한방의 총소리는 20년전 24살난 한 사범생의 예언이 적중했음을 증명했다. 1919년 7월 21일 예언 “20년후, 프랑스인들에게 골치아픈 일이 생길 것이다!” 그로부터 20년후, 프랑스인민들앞에 크나큰 치욕이 생겼다. 히틀러는1918년에 독일이 투항을 선포한적 있는 바로 그 지점, 같은 기차, 같은 차바곤에서 프랑스가 투항서에 싸인하도록 강요했던 것이다. 1919년 7월 28일 예언 “일본과 독일은 세계적인 화를 불러올 것이다!” 마오저둥은 놀랄만한 관찰력으로 일본과 독일의 관계를 속속들이 꿰뚫고 있었다. 그는 장장 20년을 앞당겨 “추축국( 心 )”의 2대 파쑈마왕들이 한통속이 되여 세계에 위해를 끼치게 될 것을 예견했다. 제2차세계대전의 폭발이 바로 이러한 예언의 철같은 립증으로 되였다. 1933년 11월 예언 “우리는 제5차 포위토벌을 막을 절호의 기회를 잃게 될 것이다!” 장개석이 중앙쏘베트지구를 상대로 제5차 포위토벌을 발동하고 있을 때 마침 마오저둥은 정치생애의 궁지(低谷)에 처해있었다. 쏘베트구역과 홍군의 안위를 위해 마오저둥이 계략을 내놓았지만 중앙에서는 결국 마오저둥의 의견을 채납하지 않았다. 따라서 “제5차 포위토벌”을 막을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리게 되였던 것이다. 1934년 12월 12일 예언 “적들이 준비해둔 ‘주머니’속에 기여들어가서는 안된다! ” 마오저둥은 “주머니”전문가이다. 그는 항상 계략의 주머니를 풀어 장개석이 스스로 기여들어오도록 했었다. 그런 그가 어찌 달갑게 장개석이 풀어놓은 주머니에 기여들어간단 말인가! 류백승이 말했다. “마오저둥의 지략이 없었더라면 당시 3만홍군의 앞길은 훼멸밖에 없었을 것이다.” 1935년 5월 24일 예언 “석달개가 뚫지 못한 길, 우리가 반드시 뚫고만다!” 태평천국은 증국번(曾 藩)이 이끄는 상서군의 수하에 의해 최종패배를 당했다. 장개석은 증국번을 아주 숭배했는데 늘 증국번을 모방하기를 즐겼다. 장개석은 마오저둥이 “제2의 석달개”로 되기를 바랐지만 마오저둥은 홍군을 령솔해 겹겹한 포위를 뚫고 석달개가 뚫지 못한 길을 뚫는데 성공했다. 1935년 9월 예언 “남하하는것은 출로가 없다. 1년후 당신들은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마오저둥과 장국도(   )는 함께 “중국공산당제1차대표대회”에 참석한적 있는 원로이다. 이들은 장정의 길에서 회합한후 다시 두갈래로 갈라져 각기 제 갈길을 갔다. 장국도와의 분렬로 인해 마오저둥은 장개석의 포위권을 뚫고난후 일생중 가장 암흑했던 시기를 보냈다. 1936년 10월 9일, 홍군의 3대주력이 합류하고 장정은 결속되였다. 1936년 7월 15일 예언 “중국은 독립된후 대규모로 외자를 끌어들일 것이다!” 새중국이 건립된후 처음으로 끌어들인 외자는 쏘련정부에서 제공한 정보대부금 3억딸라였다. 그후 중국인들은 국제적채무를 갚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마오저둥의 영명한 예견은 후일 등소평에 의해 실현되였다. 1994년, 중국은 이미 세계에서 미국에 이어 두번째로 외자를 많이 보유한 국가로 성장했다. 1938년 5월 예언 “중국의 항전은 7~8년이 소모될것이다!” 성사원의 회억에 의하면 마오저둥의 《지구전을 논함》이라는 문장이 발표되기전, 주은래는 이미 문장의 기본정신을 백숭희에게 소개했다. 백숭희는 문장을 높이 평가하면서 이는 적을 물리치고 승리를 이끌어내는데 있어서 최고의 전략방침으로 될 것이라고 했다. 《지구전을 론함》을 두고 백숭희는 “작은 승리를 모아 큰 승리를 이끌어내고 공간을 시간으로 바꾼다.”라고 규납했다. 이는 군사위원회를 통해 전국에 널리 전파되였고 항일전쟁중의 전략적지도사상으로 되였다. 과연 8년의 간고분투끝에 일본은 종국적으로 투항을 선포했다. 1938년 10월 예언 “장백륜은 반드시 돌멩이를 들어 자신의 발등을 깔 것이다!” 2차대전전, 영국의 수상인 장백륜은 정치가의 리성과 상인의 자사자리를 내세워 전쟁미치광이 히틀러를 대처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장백륜이 들어올린 돌멩이는 쏘련인들의 머리꼭대기에 던져진것이 아니라 자신의 발등을 내리친격이 되고말았으며 그의 정치생명도 뿌리채 뽑히우는 격이 되여버렸다. 1939년 9월 23일 예언 “루즈벨트는 미국이 제2차세계대전에 참가하도록 할 것이다!” 연안의 작은 움막에서 마오저둥은 2년이나 앞당겨 미국이 제2차세계대전에 참전 할 것이라는 것을 예견했다. 이는 중국인민들이 항전에 대한 필승신념을 수립하는데 중요한 의의로 되였다. 1959년 3월 16일 예언 “우리 군의 장래 출로는 중원에 있다!” 7년후, 마오저둥은 3갈래 대군을 중원에 파견해 정권쟁탈에 나섰으며 전국적인 전쟁의 승리를 확고히 다졌다. 1942년 7월 2일 예언 “제2전쟁터가 있으면 1년내에 독일을 물리칠수 있다!” 구라파대륙이 제2의 전쟁터를 개척하기만 하면 독일을 물리치는데 1년정도의 시간이 소요 될 것이라는 마오저둥의 예언대로 제2의 전쟁터는 1944년 6월에 개척되였고 독일은 이듬해인 1945년 5월에 패배를 당했다. 1945년 8월 13일 예언 “핵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미국인들이 히로시마(  )에 첫 원자탄을 투척한 7일후, 마오저둥은 단언했다. “원자탄은 결코 전쟁을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마오저둥의 예언은 헛된 것이 아니였다. 오늘날까지 원자탄의 습격을 받은 국가는 일본이 유일한 나라이다. 1949년 12월 9일 예언“향항문제는 협상방법으로 해결 될 것이다!” 40년대부터 마오저둥은 향항과 오문 나아가서 대만문제를 해결할데 관한 기본사로를 세우고있었다. 즉 문제의 해결에 급급해하지 않고 향항과 오문의 력사와 현상태를 충분히 존중하는 전제하에서 협상을 통해 평화공존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이였다. 오늘날, 향항과 오문이 순조롭게 회귀한 것은 마오저둥의 영명한 예견을 잘 반영하고있다. 1949년 3월 예언 “일부 공산당원들은 사탕포탄앞에 무너질 것이다!” 1952년 2월 10일, 사탕포탄의 유혹을 못이긴 류청산, 장자선이 드디여 정의의 총구앞에 쓰러졌다. 이는 수십년이 흐른 현재까지도 부패를 반대하고 청렴을 창도하는 전형으로 손꼽히고있다. 1955년 1월 15일 예언 “기본립자도 분해할수 있다!” 물리학에 대한 깊은 연구는 없었지만 마오저둥은 신기하에도 20년후 물리학의 발전추세를 예측했다. 1978년, 하와이에서 거행된 “제7기 세계립자물리학토론회”에서 노벨물리상획득자는 기본립자의 이름을 “모립자”로 지을 것을 제의했다. 1956년 6월 예언 “높은 협곡은 호수에서 시작된다!( 高 出平湖)” 마오저둥은 장강삼협에 관한 전망계획을 세웠지만 자신의 예언이 실현되는것을 보지 못한채 서거되였다. 1992년 4월 3일, 제7기인민대표대회 제5차회의에서는 절대적인 우세로 “삼협공사의안”이 통과되였다. 현재 삼협공사는 시공중에 있다. 1958년 6월 21일 예언 “원자탄, 수소탄, 대륙간유도탄은 10년내에 만들어낼수 있을것이다!” 1960년, 쏘련에서 전문가를 철수하고 설계도를 가져가자 일부 외국인들은 “중국은 20년사이에 아무런 원자탄도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하지만 중국은 10년사이에 원자탄뿐만아니라 수소탄, 중성자탄까지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1958년 9월 5일 예언 “대고락이 나서면 좋은 점이 있을 것이다!” 대고락(戴高 )은 경상적으로 프랑스의 해외식민정책을 위해 변호하며 적극적으로 랭전을 추동한 장본인이다. 때문에 국제여론은 보편적으로 이같은 정치국면의 변화에 의해 구라파가 우회전할것이라고 인정했지만 마오저둥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대고락이 나섬으로 하여 구라파중립주의의 발전을 추동하고 구라파가 미국을 떨쳐버릴수 있다고 단언했다. 역사의 발전은 드디여 마오저둥의 이같은 예언을 실증했다. 1962년 1월 30일 예언 “중국이 세계선진국을 따라잡는데는 백여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마오저둥이 1962년 “7차인민대표대회”에서 예견했던 발전속도는 제2대 영도자가 제정한“3보(三步走)”전략과 묘한 일치를 가져왔다. 동포투데이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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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21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30)
    팔미라유적의 서류 소속대륙: 아시아, 소속국가: 시리아, 지점: 수리아 중부의 한 오아시스함의: 수리아경내 “비단의 길”에서의 저명한 고대도시임 팔미라(巴尔米拉)는 동서의 상업무역통로에 있다. 서기 2-3세기 시기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요한 도시 중의 하나였다. 부유하고 휘황한 궁전은 바로 그 시기에 수건한 것이다. 기원 3세기에 들어 로마인들은 이 팔미라성을 공략한 후 대대적으로 빼앗아 냈으며 마지막엔 불을 질러 이 이름난 도시로 하여금 훼멸되게 하였다. 그리하여 팔미라성은 꽃과 같은 그 영광스러운 역사를 종말짓게 되었다. 지금 여기에는 페허만이 남아 당년의 그 위대하고 화려함을 말해주면서 묵묵히 서있다. 방불히 세인들한테 하나의 오랜 문명도시의 흥망성쇠를 말해주는듯 하다. 여왕의 전기 서기 267년, 팔미라국왕이 암살당하자 그의 미망인 자누비아 여왕은 유공자를 대신하여 집정, 자신을 “동방여왕”으로 자칭하였다. 여왕의 통치하에 나라의 변강지역은 부단히 확대발전하였다. 팔미라가 강대해지자 이는 로마제국의 경각성을 불러 일으켰으며 뒷따라 팔미라는 로마군사에 의해 함락됐고 여왕은 포로되었다가 후에 감옥에서 사망했다. 후에 시리아국민들은 여왕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그들의 화폐에 여왕의 초상화를 새겨넣었다. 아름다운 문명잔해 팔미라가 다종문화의 집중지방에 위치해 있기에 이 곳의 건축물들은 고대그리스풍격, 로마풍격, 이란풍격 및 당지의 전통풍격 등으로 완미하게 융합되었으며 신비하고도 화려하다. 팔미라유적에는 아직도 중앙거리, 석각개선문, 패륵신(贝勒神)무덤, 기둥복도, 왕궁 등 유적이 남아있다. 유적의 중심에 서있는 석각개선문은 “山”자형으로 정문과 부문이 모두 큰 방석을 깎아 만든 것이다. 중앙거리는 길이가 약 2000미터에 달하는데 거리 양측에는 750개의 원형돌기둥으로 구성된 기둥복도가 있어 웅위롭고도 아름답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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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9
  • 오묘한 세계 대백과(30)
    “곧추 날아예서 3000자요, 구천에 떨어지는 은하 믿기 어려워라.” 이는 중국 당조시의 대시인 이백이 폭포를 묘사한 저명한 시이다. 결백한 물이 고공중에서 날아떨어지며 폭포를 형성하는 것은 마치 부드러운 비단대와도 같아 아름답기 그지 없다. 그럼 폭포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폭포란 물흐름이 높은 곳에서 지세가 낮은 곳으로 떨어지면서 형성된 것이다. 이런 낙차가 비교적 큰 지세는 흔히 자연계 중의 높고도 큰 암석이 단렬로 인해 조성된 것이다. 단렬된 암석은 마치 층계와도 같아 한층은 높고 한층은 낮은바 물이 이 곳을 흘러서 지날 때면 날아 떨어지면서 아주 장관을 이루는 폭포가 형성된다. 그리고 위로부터 아래로 떨어지는 폭포의 충격력이 매우 크게 되면서 그 물기둥이 아래의 암석을 호되게 내리치게 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암석에는 큰 “凹”자형 구명이 생기며 점차 이 것이 깊은 담으로 되기도 한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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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3-09
  • 【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26)
    ■ 김철균 3 순자가 문영이란 애를 한번 만나보려고 했으나 기다리던 그 애는 며칠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다른 애들과 물어보아도 그저 그애는 밖에 나다니기를 썩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라는 것만 알려줄뿐 더 이상 아는 것이 없었다. 순자는 한번 위생학교 기숙사를 찾아갈까 하고 생각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무턱대고 찾아갈 명목도 없었다. 무턱대고 찾아가면 문영이란 애가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으니 그럴만도 했다. 그러는 사이 이틀이란 날자가 또 훌쩍 지나갔다. 순자는 이제 하루만 기다려서 오지 않으면 아무런 이유라도 달고 찾아가려고 했다. 순자가 이렇게 궁리하고 있던 찰라 마침 문영이가 찾아왔다. 순자가 “또 우표와 편지봉투를 사려는가”고 물으려 하는데 생각밖에도 문영이는 싸구려 빵 하나를 사려고 했다. 점심을 굶었는지 무척 허기진 모양이었다. “학생, 빵갖고 요기나 하겠어? 마침 상점에 금방 해놓은 뜨근뜨근한 밥과 국이 있으니 그걸 먹으라우.” 이에 문영이는 아주 놀라하며 순자를 빤히 쳐다보는 것이었다. 상점에서 국밥도 파는가 의아해하는 모양이었다. “돈을 받지 않을테니 근심마우. 워낙 내가 먹자고 지었는데 좀 많이 했수다. 다 딸같은 애들인데 그냥 학생한테 먹이고 싶어서 그런다오.” 그제야 문영이는 이것저것 눈치를 보면서 순자가 차려주는 밥과 국에 수저를 대였다. 그러나 의연히 의아해하는 기색이었다. “눈치보지 말고 그냥 먹수. 쯧쯧 얼마나 배고겠수?!” 진짜 몹시 배가 고팠는지 문영이는 제법 밥과 국을 맛스레 먹었다. “이름이 문영이라지? 우리 좀 얘기를 해볼까?” 문영이가 어느 정도 배가 찼겠다고 생각되자 순자는 문영이곁에 다가앉으며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문영이도 다소 안심이 되는지 순자를 향해 약간 방그레 웃어보였다. 크게 접촉해보지는 않았지만 얼핏 봐도 순자가 착해보였던 모양이었다. “돈화에서 왔다지?” “예, 돈화 사하연의 산골에서 왔어요.” “집에는 어떤 식구들이 있지?” “어머니는 아주 오래전에 돌아가고 아버지는 장기환자로 힘든 일은 못하고 있어요.” 문영이는 사실대로 말씀드렸다. “쯧쯧, 농촌살림에 안사람도 없고 거기에 병까지 있다니… 그러구보니 학생도 몹시 외롭구 불쌍하구만.” 문영이를 보니 순자는 어쩐지 자꾸 눈물이 나왔다. 순자는 문영이더러 많이 먹으라며 밥과 국을 더 떠주었다. 문영이가 돌아갈 때 순자는 그녀한테 과자, 사탕 등 먹을 것을 호주머니에 가득 넣어주었다. 문영이가 뿌리치는 것도 “저녁에 허기질 때 요기하라”며 억지로 밀어넣었다. 한편 기숙사로 돌아온 문영이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세상에 아무리 맘씨고운 사람이 많다지만 “북해상점” 조선족 할머니의 거동은 어떻게 봐도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 저 어머니가 다른 그 어떤 목적이 있어서가 아닐까? 그녀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조선족 여인들이 선량하고 동정심이 강하다더니 그렇다면 저 어머니가 서양의 명절 크리스마스에 나타난다는 산타클로스 노인같은 분이 아닐까? 그렇찮으면 조선족 여인들중에서도 남을 즐겨돕는 뇌봉같은 어머니? 맞아 꼭 뇌봉같은 어머니일것야…… 결국 문영이는 긍정적인 면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세상인심이 아무리 박하다 해도 어디에 가든지 좋은 사람은 있기 마련이라고 믿었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니 문영이는 저도 몰래 순자한테 마음이 끌리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다. 그 뒤에도 문영이는 몇번 “북해상점”으로 찾아갔다. 웬간해서는 외출하기 싫어하는 그녀었건만 “북해상점”의 김순자를 알고난 뒤에는 틈만 있으면 절로 그 쪽으로 발길이 돌려지군 하는 문영이었다. 결코 의도적이 아니었다. 허기진 배를 달래려고 찾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북해상점”에 가면 어쩐지 마음이 편해졌다. 특히 순자와 마주할 때마다 문영이는 까마득히 오래되어 가물가물하던 친어머니의 얼굴이 자꾸 떠오르면서 무척 따사로움이 느껴지군 했다. 한편 문영이가 찾아갈 때마다 순자는 맛갈스러운 음식을 내놓군 했다. 문영이가 올 것을 미리 알고 몰래 남겨 놓은듯이 말이다. 그것은 문영이를 위해 남겨놓은 것이 분명했다. 당시 문영이는 흔히 주말 저녁이면 순자가 운영하는 “북해상점”으로 찾아갔고 이에 순자 또한 문영이가 찾아올 것을 예견하여 맛있는 것을 만들어서는 남겨놓군 했다. 그러면 문영이가 와서 그 음식을 먹으면서 학교에서 있었던 재미나는 일과 책에서 읽은 장면들을 웃고 떠들고 손질발질하며 이야기했고 그것을 바라보는 순자의 마음은 흐뭇하기가 그지없었다. 그리고 문영이가 기숙사로 돌아갈 때면 순자는 어김없이 호주머니에 당과류같은 것을 불룩하게 넣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제 12 회 모성애 1 고생스레 자란 애들이 남의 눈치를 많이 본다는 말이 있다. 이는 이런 애들이 자라온 생활환경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또 이런 애들은 자존심이 강하며 쉽게 남을 오해할 때도 많은 법이다. 이 면에서 흔히 여자애들이 더 심한 양상을 보이군 한다. 문영이 역시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었다. 어느 날 문영이가 “북해상점”에서 순자가 해준 국밥을 먹고있을 때 순자의 셋째 딸 영애가 시내로 일보러 나왔던 김에 친정 어머니가 차린 상점에 들렸다. 영애는 밥을 먹고있는 문영이를 보고는 이상해하며 어머니한테 물었다. “어머니, 누구세요?” 하긴 순자가 문영이를 딸처럼 대하면서 자주 밥을 먹이는 것 등에 대해 영감과 자식들한테 일언반구도 한적이 없는지라 영애가 알리 만무했다. “오, 위생학교 학생인데 엄마가 없고 아버지는 장애인으로서 몹시 불쌍한 애란다.” “그래요? 거 참 안됐구나.” 영애는 몹시 놀라는듯 하다가 인차 마음을 가라 앉히고는 문영이한테 다가 앉으며 살갑게 굴었다. 마음이 착하고 동정심이 많기는 영애 역시 마찬가지었다. “얘, 너 올해 몇살이지? 우리 한번 친해보자꾸나!” 하지만 영애가 낯설어서인지 문영이는 물어보는 대답이나 겨우 할 정도였다. 문영이는 어쩐지 순자한테는 어리광을 부릴 정도로 친근감을 느꼈지만 순자의 딸임에도 영애한테만은 저으기 눈치가 보였다. 자기가 불시에 나타났기에 문영이가 불편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영애가 문영이더러 시름놓고 밥을 먹으라고 자리를 피해주었지만 문영이는 그것마저 미안했다. 자기가 상점에 와서 밥같은 것을 먹으면 상점주인의 자식들이 좋아할 수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 뒤부터 문영이가 “북해상점”으로 다니는 차수가 차츰 뜸해졌다. 순자가 잘 대해줄수록 문영이는 자주 다니기가 더욱 무엇했다. 그럴수록 자기를 두고 영애네 형제들이 곱지 않는 시선을 보낼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웬간해서는 “북해상점”에 가서 밥같은것을 먹지 않기로 작심했다. 일부러 자제하기로 했던것이다. 한편 문영이가 상점으로 다니는 차수가 뜸해지고 어쩌다 와서도 웬간해서는 밥술을 들지 않자 순자는 이상스럽게 생각했다. 혹시 그날 영애가 문영이한테 그 무슨 상처가 될 말을 하지 않았나 해서 셋째 딸한테 따져 묻기도 했다. 셋째 딸 영애는 그 날 절대 문영이한테 서운하게 대하지 않았다고 재삼 설명했다. 순자는 여전히 시름이 놓이지 않아했다. “너희들이 앞으로 이 어미가 하는 일에 절대 참견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불쌍한 사람을 도와줄줄 모르면 그것은 사람이 할 도리가 아니느리라.” 영애 역시 착하기는 형제들 중 둘째로 가라고 하면 서운해 할 사람이라 어머니의 말뜻을 너무나 잘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가뜩이나 발길이 뜸해지던 문영이는 언제부터인가 일주일 가량 지났어도 상점에 나타나지 않았다. (영애도 그애한테 별다른 소리를 하지 않았다는데…아무렴 영애가 그런 싫은 소리를 할 애가 아니지. 그런데 문영인 웬일일까?) 이제나 저제나 하고 문영이가 나타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려도 오지 않자 어느 날 순자는 상점에 온 학생들한테 문영이가 왜 상점에 오지 않는가고 물었다. “문영이 말인가요? 그앤 요사이에 된감기에 걸렸답니다. 기숙사가 추운데다 입은 옷까지 얇아 감기에 걸린 것이지요.” 그 학생의 말에 순자는 갑자기 속에 맺히는 것이 있었다. (아, 내가 왜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애가 분명 옷을 얇게 입은 것을 보면서도 말이야. 문영이의 엄마로 돼주겠다고 하면서도 애한테 밥이나 먹이는데만 만족하고…) 순자는 등한했던 자신을 책망하면서 내일엔 상점을 딸들한테 맡기고는 기어코 문영이한테 동복을 사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순자는 무심중 밖을 내다 보았는데 하늘에서는 눈송이가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안되겠군. 오늘 눈이 내리면 내일은 긍정코 눈보라가 터질 것이고 그러면 날씨가 더 맵짜고 추워질 것이 아닌가?) 여기까지 생각을 굴린 순자는 더이상 지체할세라 상점문을 잠그고는 그 길로 백화상점으로 향했다. 백화상점에서 순자는 문영이가 입을 두터운 솜옷을 샀고 또한 돌아오는 길에 연변병원에 들려 문영이가 먹을 감기약을 샀다. … 그 날 순자가 문영이네 기숙사방에 들어서자 침대에 누운채 눈도 겨우 뜨고 있으면서 신음소리를 내고 있던 문영이는 불현듯 앓던 사람이 같지 않게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순자의 품에 안기면서 서럽게 울었다. “마마(어머니),” “너, 정말 멍청하구나. 이렇게 된감기에 걸려갖고도 왜 엄마한테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느냐?! 너 아직도 이 엄마의 마음을 모르겠느냐?” 문영이를 껴안은 순자는 눈물이 솟구치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순자가 눈물을 흘리자 문영이는 더욱 서럽게 울었다. “어머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어머니한테 찾아갈 용기가 없었어요.” 문영이는 잠시나마 생각이 짧았던 자신을 탓하며 더욱 소리내여 울었다. 그 날 순자가 문영이한테 가져간건 단지 한벌의 솜옷이나 한봉지의 감기약만이 아니었다. 문영이가 여태껏 받아보지 못했고 꿈속에서도 바라마지 않던 모성애였다. 그 날 문영이는 태어나 처음으로 스스로 자기는 행운아라고 자부해보았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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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5-03-06
  • “나 공산당과 함께 널 토벌할테다”
    1941년 여름, 중국의 항일전쟁이 가장 간고한 대치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특히 당시 염석산이 담당구역인 중원지구가 일본군에 의해 점령될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그것은 염석산의 병력이 약해서보다는 이 전구장관인 염석산이 항일에 대해 동요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렇듯 관건적인 시각, 염석산의 꿍꿍이를 미리 보아낸 장개석은 자신의 특사 서영창을 제2 전구 즉 염석산이 맡은 전구를 시찰하게 하였다. 이 해 8월 25일, 중경으로 돌아온 서영창은 장개석한테 몇가지 중요한 것을 회보하였다. 첫째, 염석산이 일본과 결탁할 가능성이 있기에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 둘째, 산서의 염석산이 중앙과 오해가 생겨 다른 정권을 세울 우려가 있다. 셋째, 공산당에 대한 염석산이 증오가 극도로 달해 일본군과 함께 공산당을 제거할 가능성이 크다. 8월 29일, 장개석은 염석산한테 편지를 보냈는데 내용은 “존경과 위안의 뜻”이 내포되어 있으면서도 어딘가 다른 뜻이 담겨져 있었다. 특히 서영창이 염석산의 방위지역인 산서성 길현지구를 방문할 때 염석산은 일본과 비밀리에 담판을 진행, 얼마 후 과연 일본과 염석산은 모종의 협의를 달성했는데 당시 협의내용에는 일본측에 기울여지려는 경향이 농후했다. 또한 염석산은 한편으로는 장개석의 동의를 거쳐 “합법”적으로 일본과 연합해 공산당을 토벌하려고 시도했다. 이 해 9~10월 기간 염석산은 연속 3차례 장개석한테 전보를 보내어 “오직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본인은 그 어떤 희생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위원장께서 공산당을 토벌하려면 공산당 소련의 눈치를 봐야 하는 난처한 입장이기에 일본의 힘을 빌어 공산당을 제거하면 위원장의 난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장개석의 특사 서영창은 다르게 생각했다. 즉 염석산이 일본과 연합해 중공을 제거하려고 하는 것은 완전히 일본에 투항하려는 뜻이며 가짜로 공산당을 토벌하는 것으로 자기의 진정한 목적을 가리려는데 불과하다고 분석했다. 당시 염석산에 대한 서영창의 분석은 매우 적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에 대해 염석산은 기본상 저항을 포기하려는 태도였다. 당시 국군이 여러 전선에 거쳐 전면 패하고 있을 때 상당 부분의 국군을 지휘하고 있는 염석산의 음모는 장개석의 중시를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10월 26일, 장개석은 일기를 통해 염석산을 호되게 질책했다. “비열하고 교활한 한간, 왕정위 역도보다 다를바 없도다.” 하지만 장개석은 그냥 혼자서 이빨만 갈뿐 공개적으로 염석산을 질책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염석산의 수십만 대군이 일제한테로 넘어가는 날이면 더욱 큰 손실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일본군은 황하 동안 용문산에 있는 국군을 향해 공격을 발동, 호종남은 한개 사의 병력을 도하시켜 지원하려고 하였다가 염석산의 거절을 당했다. 이유는 중앙군이 도하해오면 후방질서가 혼란스럽게 된다는 것이었다. 기실 당시 중앙군이 황하를 도하하여 협력하면 염석산과 일본과의 협의가 무산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로 보아 염석산에 대한 서영창의 판단은 적중했다. 1월 6일, 장개석은 염석산에게 명령하여 “중앙군 61사를 반드시 도하시키며 상론한 여지가 없다”고 못박았다. 이날 장개석은 또 자기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최종 이 한간이 적에게 투항할 경우 나 이 중정은 극단의 조치로 한간을 처단하겠노라 한편 장개석은 중앙군 61사를 기어코 도하시킬 결심을 굳히었다. 그 중요한 목적은 압력을 가하는 것으로 일본에 투항하려는 염석산의 의도가 실현되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막부득한 경우 공산당의 팔로군과 협력하여 염석산을 토벌하려는데 있었다. 이어 장개석은 재차 가경덕을 염석산이 맡은 전구에 파견하여 섬서 혹은 감숙 등지에 발을 붙이지 못할 경우 염석산의 책임을 추궁할 것이며 만약 염석산이 일본과 손잡고 공산당을 토벌할 경우 자신이 더욱 큰 토벌대상으로 될 것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고 경고하면서 그 때는 장개석이 직접 공산당을 거느리고 염석산 토벌에 나설 것이라고 했다. 당시 장개석은 민족의 운명아에서 추호의 여지도 없이 중공과 함께 한간을 토벌할 것이며 적아사이에는 그 어떤 투기적인 수작도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당시 염석산이 문무관원 중에는 일본과 결탁하려는 극소수의 투항주의파 외 대다수 장병들은 모두 항전으로 출로를 찾고 태원을 수복하여 산서군벌의 자존심을 되찾자는 결의로 충만되어 있었다. 거기에 1941년 말 미국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자 염석산은 자기의 판단이 틀렸음을 인식, 1942년 1월 초, 장개석한테 전보를 보내어서는 “위원장과 함께 공산당과 손잡고 항전을 끝까지 견지하겠노라”고 표했다. 이는 일본에 대한 염석산의 큰 태도변화였다. 하지만 염석산은 여전히 장개석한테 완전히 기대를 건 것은 아니었으며 일본에 투항하려는 뜻을 완전히 포기한 것도 아니었다. 이해 3월 하순, 장개석은 염석산한테 서안에서 한번 만나자고 제의하였다. 하지만 염석산은 “전방이 긴장하여 떠날 수 없다”고 거절하였고 이해 8월 14일에도 장개석이 서안에서 재차 염석산과 만나자고 제의했지만 염석산은 여전히 각종 이유로 조승수와 왕정국 두사람을 서안에 보내어 장개석과 만나도록 했을뿐이었다. 1943년 12월 29일, 산서성 주석 조대문이 타계하자 이듬해 1월 6일, 장개석은 자기의 일기에서 반간첩 전략에서 큰 기여를 한 조대문을 추모하는 글을 적어두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대문은 장개석의 특사 서영창은 당시 일본에 투항하려는 염석산 시도를 파괴시겼을 뿐만 아니라 한편 염석산을 설득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도록 하였다. 그 뒤 염석산과 일본의 관계는 점차 냉담해지기 시작하였고 장개석도 더는 특별조치를 취하자던 결심을 포기하기에까지 이르렀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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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18
  • 오묘한 세계 대백과(29)
    혹시 그대는 잘 모를 것이다. 세계의 많은 도시들 즉 상해, 북경, 천진, 로스앤젤레스, 베니스, 오사카, 도쿄 등 도시의 지면은 지금도 꺼져내려가고 있으며 그 꺼져 내려가는 속도가 매우 빠르다. 중국의 상해는 1921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지면이 줄곧 꺼져 내려갔는데 어떤 지구는 이미 2미터까지 꺼져 내려 앉았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그럼 무엇 때문에 이런 도시들의 지면이 쉼없이 꺼져 내려 앉을가? 이는 우리 인류 자체를 탓해야 한다. 즉 지하수를 과도하게 뽑아 올리는 것이 도시의 지면이 내려가게 하는 직접적 원인이다. 지하수란 인류생존의 자원일뿐만 아니라 지면을 평형을 잡아주는 작용도 한다. 만약 인류가 과도하게 지하수를 뽑아 올린다면 충족한 물로 지면을 도와 도시의 압력을 담당할 수 없게 되며 도시는 자연스럽게 천천히 거져 내려앉게 된다. 지면이 내려 앉으면 위해성이 크다. 일단 도시가 내려 앉는 일이 발생하면 사람들의 생산과 생활에 엄중한 후과를 초래하게 된다. 예하면 시정 기초시설, 도로와 교량 및 항구와 부두, 지하케이블의 손해와 깊은 우물의 사고 및 지면의 갈라지는 등 위해성을 갖다 주게 된다. 편집 :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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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16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29)
    노틀담 대성당의 서류 소속대륙: 유럽, 소속국가: 프랑스, 지점: 파리 세느강 중앙의 시테섬(塞纳中央的西岱岛) 함의: 유럽에서 조기고트식 건축과 조각 예술의 대표임 가령 그대가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유고의 소설 “노틀담 대성당(일명: 파리 성모원)”을 읽어 보았다면 이 노틀담 대성당으로 몹시 가보고 싶을 것이다. 노틀담 대성당은 세계에서 저명한 프랑스의 천주교 성당으로 1163년에 교황 알렉산드르와 프랑스 국왕 루이 7세가 공동으로 손잡고 지은 것으로 공사시일이 200년이 걸렸다고 한다. 노틀담 대성당은 유럽에서 일찍 지은 대표적인 고트식 건축과 조각예술의 건물로서 종교, 문화, 건축예술이 한몸에 집중돼 있으며 프랑스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걸작으로 되고 있다. 노틀담 대성당의 진면모 노틀담 대성당은 정면이 정방형으로 된 건물로 제일 밑에는 세개의 복숭아형 문이 있으며 전반 건물 중 가장 눈부신 곳이다. 그 중 좌측의 성모마리아문은 3개의 문중 가장 아름답고도 정교한 문으로 중간에 성모마라아와 아이의 조각상이 있으며 양 옆에는 성모 마리아의 생애를 표현한 그림들이 있다. 그리고 문의 양 측에는 1년 12개월의 그림과 신도와 천사의 조각상이 있다. 그 외 문위에는 긴 벽감(壁龛)이 있으며 거기에는 28명의 유대국왕의 조각상이 모셔져 있어 사람들은 이를 “국왕장랑(长廊)”이라고 부른다. 노틀담 성당의 무대 노틀담 성당 중의 무대는 국왕 루이 13세가 자식을 보게 한 성모 마리아를 위해 세운 것이다. 그는 결혼 후 23년만에 자식을 보았다. 그 자식이 바로 후세의 루이 14세였다. 루이 13세는 이 일을 하느님의 은덕으로 생각, 바로 성모 마리아를 가송하기 위하여 이 무대를 세웠던 거이다. 무대의 앞에는 하나의 아름다운 조각상이 있으며 이 조각상이 바로 “성모 마리아가 아기를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무대 중의 파이프오르간(管风琴)이 있었는데 이 파이프 오르간은 전 프랑스에서 제일 큰 것이었으며 그 무겁고 폭넓은 음악은 노래에 어울려 더욱 아름답게 들려온다. 편집 :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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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16
  • 상처한 뒤 처제와 재혼한 중국 영화배우 김산
    편집자의 말: 중국의 저명한 영화배우 김산(金山)은 1911년 절강태생으로 본명은 조묵(赵默)이다. 1920년대 김산은 상해에 가서 시화를 배우는 한편 아마추어로 경극공연에 참가하다가 1936년부터 영화계에 입문, 선후로 “광환지야(狂欢之夜)”, “밤중의 노래소리(夜半歌声)” 등 여러편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1946년 김산은 장춘영화촬영소 건립사업에 착수, 촬영소 창립자로 되었으며 이 해에 영화 “송화강에서”의 감독을 맡아하였다. 그는 선후로 중국희극가협회 부주석, 전국 문련위원, 전국정협위원 등 직을 맡았었다. 1982년 7월, 김산은 병으로 타계하였다. 향년 71세었다. ▲ 김산과 손유세 1950년 10월 14일, 북경청년궁은 등불이 찬연하고 음악소리가 흥겹게 울려퍼졌다. 이 날 이 곳에서는 29세의 여인 손유세와 39세의 남성 김산의 결혼식이 있었다. 결혼식에는 북경에 있는 각계 명류인사들이 분분히 찾아와 이들의 결혼을 축하해주었으며 주은래의 부인 등영초도 찾아왔다. 이날 등영초는 이들에게 아주 진귀한 선물을 주었다. 이 선물인즉 새로 출범된 “중국 국가혼인법”으로 이를 선물한 것은 현시대의 부부답게 “혼인법”에 충실하라는 이었다. 결혼 후 김산과 손유세는 중국청년예술극원에서 김산한테 분여해 준 숙소에 신혼살림을 차렸는데 당시 손유세의 여동생 손신세(新世)가 언니와 함께 있다보니 매우 불편해하였다. 그러자 주은래와 등영초는 손신세의 고충을 헤아려 주어 자기네가 살고 있는 서화청에 와 함께 살도록 하였다. 당시 주은래와 등영초는 손신세를 월생녀(粤生女儿)라고 친절하게 불러 주었다. 그리고 주총리가 외국방문을 갈 때마다 등영초는 손신세를 집에 불러 함께 자게 하면서 주로 총리에 침대를 사용하게 하였다. 이 시기 손신세는 매우 유쾌한 나날을 보냈으며 생활도 아주 안정되였다. 헌데 그 때 언니 손유세의 혼인생활이 풍파를 겪게 되었다. 1951년 김산과 문화예술위문단이 북한에 나가 위문활동을 하게 되었다. 당시 김산이 6.25를 소재로 한 씨나리오를 쓰겠다고 하자 김일성은 대단히 기뻐하면서 자기의 여비서로 하여금 김산의 가이드 겸 통역을 맡게 하였다. 헌데 얼마 되지 않아 김산과 김일성의 여비서가 눈이 맞아 탈선행위를 저지른 것이 탄로되어 그 여비서가 총살형에 언도되고 김산은 당적을 직무를 박탈당하는 처분을 받았다. 이 일은 손세유로 하여금 크나큰 충격에 빠지게 했다. 하지만 결국 손세유는 김산을 양해해 주었고 이것으로 하여 김산은 아내한테 크나큰 감동을 받기도 했다. 그 뒤 손신세는 소련 레닌드라드대학에 유학하여 러시아문학을 저공하게 되었다. 이러자 등영초는 손신세가 조국을 멀리 떠나 고독해 한다고 경상적으로 책을 보내주고 편지를 써주면서 관심하군 하였다. 그러자 손신세 또한 모든 일을 등어머니한테 회보, 자신이 남친인 이종창을 사귀게 되자 이런 소식도 등영초어머니한테 알려주군 하였다. 이에 등영초 또한 손신세가 자기의 반려를 찾은데 대해 진심으로 축하해주군 하였다. 1957년 2월, 손신세는 소련에서 결혼식을 올리었고 또 얼마 되지 않아 귀국해 북경대학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손신세는 등영초어머니와 총리아버지를 자주 만날 수 있게 되어 무등 기쁘기만 했다. 그 뒤 손신세가 아이를 출산하자 등영초와 주은래는 아이를 이뻐해하는 한편 더욱 이들 부부를 아껴주었다. 특히 어린 것이 말을 하게 되어 TV를 통해 영초할머니 혹은 총리할아버지를 보았다고 하면 총리네 노부부는 아이가 기특하다고 하면서 자주 어린 것의 볼에 뽀뽀를 해주군 하였다. 헌데 이런 날을 그닥 오래가지 못하였다. 얼마 안되어 문화혁명 폭풍우가 도래하자 이들 부부는 총리네 부부를 더는 볼 수가 없었다. 문화혁명이 시작되자 강청은 손세유가 이립삼(李立三)한테 극장티켓 한번 선물한 것을 이유로 억지로 손세유한테 “소련수정주의 간첩”이란 죄명을 씌웠으며 장기간 조리돌림을 시키기도 하였다. 손세유는 자기가 잡혀가기 전에 어느 금요일 저녁 여동생 손신세와 비밀리에 천안문앞에서 만났다. 그녀는 여동생한테 “난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절대 자살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내가 죽게 되면 이는 타인한테 박해를 받아 죽은 것으로 될 것이다. 너는 이것만은 꼭 믿어주기 바란다”고 하였다. 과연 얼마 뒤 손세유는 반란파들의 시달림을 받아 억울하게 죽게 되었다. 언니의 죽음은 손신세로 하여금 비할데 없는 분노를 느끼게 하였다. 손신세는 그 누구보다도 언니 손세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희생된 후 손유세는 어머니와 함께 상해에서 숨어살다가 16살이 되어서야 겨우 조직을 찾았고 후에 주은래와 등영초의 추천으로 소련 동방예술학교에 입학했던 것이다. 소련에서 손세유는 소련의 위국전쟁에 참가하기도 했다. 한편 그는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기에 1950년 모택동과 주은래 등이 소련을 방문했을 때 모택동과 스탈린, 주은래와 스탈린 사이의 통역을 담당하기도 했었다. 이렇듯 당과 국가의 지도일군한테 충직한 언니가 어떻게 수정주의 간첩으로 될 수 있단 말인가?! 문화혁명시기 손신세 역시 “현행 반혁명분자”란 감투를 쓸 수 밖에 없었다. 헌데 이상하게도 몇차례의 비판과 투쟁을 받은 뒤 그냥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후에 알고 보니 당시 북경대학에 진주한 군대표는 손신세에 대한 자료를 근본 “중앙 문화혁명소조”에 바치지 않았던 것이었다. 한편 문화혁명시기 손세유와 마찬가지로 박해를 받다 감옥으로 갔던 김산은 1975년 4월에야 만기석방되었고 집으로 돌아온 뒤에서 아내 손세유는 일찍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손신세는 옥살이를 하고 나온 김산을 돌보기 위해 김산으로 하여금 자기의 집에 와 거처하게 하는 것으로 아내를 잃은 김산의 만년생활이 안위를 얻도록 하였다. 얼마 후 문화혁명이 결속되자 손신세는 20여년간 사업해온 북경대학을 떠나 중국TV예술위원회로 전근하였다. 이어 손신세의 남편 이종창이 병으로 세상뜨자 이 가정에는 오직 김산과 손신세만이 친인으로 남게 되었다. 사람의 인연이란 참 미묘할 때가 많다. 손신세의 남편 이종창은 임종시 아내한테 자기가 죽은 후에도 김산을 잘 돌봐주라고 부탁했고 그가 죽은 뒤 김산 역시 손신세의 집에서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얼마 안되어 김산은 당조직에 편지를 보내어 그와 손신세가 결혼하도록 비준해줄 것을 희망하였다. 1976년, 50세가 된 손신세와 나이 65세가 된 김산은 손잡고 서로 상대방 심령을 위로해주면서 새로운 인생길에 들어섰다. 1978년 김산은 중앙희극학원 원장 겸 중국TV예술위원회 주임직을 맡게 되였다. 1982년 7월 7일, 김산은 돌발성 뇌익혈로 타계, 향년 71세었다.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손신세 노인의 친인들은 모두 한명씩 저 세상으로 떠나갔다. 현재 손신세의 자식들은 모두 해외에 체류, 노인은 경상적으로 출국하여 자녀와 손군들을 만나보군 한다. 하지만 노인은 여전히 북경의 옛집을 잊지 않고 있으며 청명절이 돌아올 때마다 북경의 공동묘지에 가서 친인들을 찾아보군 하고 있으며 몇개의 기념일을 잊지 않는다. 주은래총리가 서거한 날, 등어머니가 별세한 날, 언니가 순직한 날과 김산이 타계한 날… 그리고 “문회보”에 추억록을 발표하여 돌아간 친인들에 대한 그리운 정을 담기도 했다. 현재 손신세 노인은 한권의 회억록을 준비, 생전에 이를 완수하지 못하면 친인들한테 미안한 노릇이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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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12
  • [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
    ■ 김철균 제11회 북해상점 1983년 순자는 연변위생학교 남쪽 거리의 길옆에 식료품상점을 차렸다. 순자가 차린 상점은 개혁개방과 더불어 연길시에서는 가장 선참으로 나온 개체상점 중의 하나였다. 순자가 상점을 차린 것은 딱 돈을 벌자는 것만은 아니었다. 점차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이전처럼 임시공으로 공사장으로 다니면서 막일을 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집에서 놀자니 아직 그 나이까지는 된 것 같지 않아서었다. 또한 상점으로 드나드는 학생애들과 얘기같은 것을 나누면서 학생시절의 옛추억을 떠올리는 것도 일종의 즐거움으로 될 것 같아서였다. 순자가 차린 식료품상점의 간판이름은 “북해상점”이었다. 그닥 크지 않은 상점이었지만 순자는 영업을 시작한 날부터 상점안팍을 매우 깨끗하게 거두었다. 특히 상점하게 들어서면 벽에 붙여놓은 “위생공약”이 유표하게 안겨왔다. 이는 상급 해당부문에서 요구하여 써붙인 것이 아니고 순자 스스로 제정한 것이었다. 위생공약 위생청결은 본인과 찾아오는 손님의 신체건강에는 물론 주위환경도 깨끗하게 하는 아주 훌륭한 일이다. 본 상점은 상급 해당부문에서 상점내외의 위생을 검사감독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환영하며 한편 아래와 같은 자체공약을 제정한다. 첫째: 천정, 벽과 방바닥 등 곳에 구멍같은 것이 전혀 없어야 한다. 둘째: 모기장, 파리채, 파리약, 가래통, 위생복과 위생종이를 놓는 철망통은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셋째: 맥주통, 맥주컵은 3일에 한번씩 소독해야 한다. 특히 상점이 결핵병원 근처에 있기에 더욱 이에 유의해야 하고 여름철에는 철저히 질병예방에 신경써야 한다. 넷째: 돈을 담는 그릇, 거울, 간장그릇과 형광등은 자주 닦아야 한다. 다섯째: 상점 문앞엔 항상 깨끗한 물을 떠놓아야 한다. 그래야 상점으로 드나드는 손님들이 수시로 손을 씻을 수가 있다. 여섯째: 상점주위와 큰 길 등을 매일 2차 내지 3차 정도 쓸어야 한다. 왜냐하면 상점주위엔 몰래 소변을 보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연길 북해상점 1983년 ×월 ×일 이렇게 위생공약을 제정한 외 순자는 자신의 개인위생에 특별히 신경을 썼다. 그는 항상 새하얀 위생모자와 위생복을 착용, 그것을 이틀에 한번씩 갈아입었으며 하루에도 수십번씩 손을 씻었고 아무리 손으로 쥐여도 될 음식물이라 해도 손으로 쥐지 않고 항상 소독을 한 집게로 집어 그릇에 담군 하였다. 봉사자세에도 신경을 썼다. 남녀노소를 막논하고 일단 상점에 들어서면 “어서 오세요. 환영합니다”란 인사를 하였으며 설사 손님이 물건을 사지 않고 그냥 나가더라도 “편히 나가십시요. 또 오세요”란 말로 손님들의 마음을 즐겁게 하였다. 그리고 상점에서 맥주를 청해마시는 손님들한테는 김치나 기타 짠지같은 안주는 그냥 공짜로 주었는데 손님들이 부담스러워하면 “장려음식”이라고 했다. 그 뒤 연길시에는 상점이나 식당들 거개가 손님들이 매상을 많이 올리면 이른바 “장려음식”이란 것을 음식상에 많이 올리군 했는데 이 “장려음식”이 아마도 순자가 운영하는 “북해상점”으로부터 첫 스타트를 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상점이 깨끗하고 순자가 친절해서일까? 상점에는 위생학교 교직원들도 자주 들려서는 맥주잔을 나누군 했다. 처음에 그들 거개가 이 상점이 김용환 교수의 부인이 차린 상점인줄을 몰랐었다. 그러다가 언젠가 김용환 교원과 함께 이 상점에 와서 맥주를 마시면서 이 상점의 주인이 김용환 교원의 부인인 것을 알고는 모두가 놀라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김용환 교원을 부러워하는 모습이었다. “상점이 참 깨끗하고 좋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김선생님은 진짜 사모님복이 많은 것 같습니다. 얼핏 선생님이 입고 다니는 옷만 봐도 그렇습니다. 우린 선생님께서 주름살이 간 옷을 입고 다니는걸 정말 한번도 본적이 없다니까요.” “그렇다오. 아무리 마누라자랑을 하면 상등바보라고 하지만 난 정말 마누라를 잘 만난 것 같수다. 일찍 툭 털면 먼지밖에 없는 나와 결혼해줘서 고맙고 후에 문화혁명 때 그 고생을 하면서도 자식들을 잘 키워줘서 또 고맙고… 바른대로 말해 이 마누라가 아니었더면 오늘의 나를 상상도 못할 일이지…” 이에 순자는 눈을 곱게 흘겼으나 자기의 노력을 긍정해주고 또 고맙게 생각해 주는 남편이 슬며서 고맙기만 했다. 한편 순자는 상점의 손님뿐 아니라 기타의 상점에 물건을 나르는 일군들한테도 잘해주었다. 다른 상점들에서는 물건을 날라주는 사람한테 고작해 냉수나 한고뿌를 대접하는데 그쳤으나 순자는 이런 사람들한테 냉장고 안에서 얼음과자나 사이다같은 것을 꺼내주기도 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점심밥을 공급하기도 했다. 그 중에는 부모가 없이 살면서 상점에 물건을 날라주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보일이라고 불리우는 한 조선족 총각이 있었다. 순자는 그 총각한테 특별히 잘해주었다. 남편도 고아로 자랐던터라 부모가 없이 자란 젊은이들을 보면 그냥 남의 일 같지 않아서였다. 그 와중 보일이란 젊은이가 날라오는 물건에는 간혹 요구했던 수자가 모자랄 때도 있었는데 특히 맥주같은 것이 한두병씩 모자라는 일은 흔히 있었다. 보일의 말로는 운수도중 쏠쏠이패들한테 빼앗겼다고 했다. 헌데 거의 번마다 이런 일이 생기니 어느 정도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순자는 “맥주같은 건 마시고 싶을수가 있지만 운수도중 술을 마시면 사고가 날 수 있으니 다 날라온 후 상점에서 안주를 먹으면서 마셔야 한다”고 일깨워주었을뿐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그리고 진짜 보일이더러 자주 상점에서 밥술을 들게 했으며 자식들이 몇번 입지 않아 거의 새 것이나 다름이 없는 옷을 가져다는 그 보일이란 총각한테 몇번 주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그 총각은 순자네 상점의 물건을 날라주기를 각별히 좋아했으며 순자네 상점의 물건을 날라주는 날인즉 그가 상점에서 점심밥을 공짜로 얻어먹는 날이었고 뭔가를 얻어가지는 날이기도 했다. 순자는 길가는 행인들한테도 아주 잘해 주었다. 그는 길가는 노인들이 몸이 불편한 모습이라도 보이면 항상 상점안에 들어와 휴식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노인들이 마실 수 있는 사이다 혹은 기타 노인들이 즐기는 귤같은 식품을 공짜로 대접하군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한 할머니가 역시 순자의 부축으로 상점안으로 들어와 휴식하게 되었는데 이말 저말을 하던 중 순자가 신흥소학교 부근에서 살고 있고 이름이 아무개라고 하자 “난 임자가 뢰봉처럼 좋은 일을 많이 한다는 소문은 들었어도 이렇게 얼굴을 처음 보는구려”하고 하며 기뻐하면서 후에는 이 거리를 지날 때마다 상점에 들려서는 한참씩 한담하군 하였다. 이렇게 순자가 상점을 하게 된 후에야 순자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는 사람은 그 할머니뿐이 아니라 몇명 잘되었다. 2 순자가 상점을 시작한지도 어언간 2년철을 잡았다. 그 동안 순자는 새벽마다 맥주공장에 가서 생맥주를 받아 밀차에 밀어오는 등으로 몹시 바삐게 보냈지만 낮이 되여 찾아오는 위생학교 학생들과 얘기같은 것을 나누노라면 시간이 가는줄도 몰랐고 별로 피곤하지도 않았다. 한편 순자는 자신이 어렵고도 힘들게 공부하던 옛날과 그리고 비록 해방후였지만 없고 가난하던 그세월 자식들한테 배불리 한번 먹이지 못하면서 키우던 그제날을 생각하니 상점으로 찾아오는 모든 학생들한테 뭐든지 공짜로 주고 싶었다. 그만큼 순자한테 있어서 돈버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있었으니 그것이즉 바로 매일 그 학생들이 상점으로 찾아오는 것이었다. 생각밖으로 상점으로 찾아오는 학생들 거개가 가정생활이 비교적 풍족한 모양이었다. 여학생들은 대부분 털실적삼에 오리털 방한복을 입었었고 남학생들도 용돈을 귀하지 않게 썼으며 일주일에 한두번씩 맥주놀이를 하는 남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물어본즉 학생들 거개가 가정으로부터 용돈을 비교적 넉넉하게 보내준다는 것이었다. (세월이 좋아졌구나! 이전에 우리가 공부할 때와는 판이하구나!) 순자는 웃고 떠들며 좋아하는 학생애들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며 “개혁개방이 좋긴 확실히 좋은 모양이야”라고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순자는 위생학교 학생들의 가정형편을 다는 알 수 없었다. 기실 위생학교에는 가정생활이 부유한 집의 애가 있었는가 하면 가난한 집의 애들도 있었으며 지어 어떤 가정의 학생들은 집이 가난한 시골에 있는데다 한쪽 부모 혹은 부모 양쪽이 다 없는 불쌍한 애들도 있었다. 상점으로 다니는 애들한테서 알아본즉 가난한 가정의 자식들은 일요일날에도 기숙사에 있으면서 아주 드물게 시내로 나온다는 것이었다. (아무렴 그렇지 그렇구말구. 가난한 집 자식들이 어떻게 상점으로 드나들 수 있겠는가?!) 그도 그럴 것이 이는 순자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순자의 “북해상점”에도 옷을 아주 남루하게 입은 한 여학생이 찾아왔다. 수심이 가득한 얼굴에 피기가 별로 없이 해쓱한 모습으로 상점에 들어선 그 여학생은 순자한테 약간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8전짜리 우표와 편지봉투 몇 개 씩만 산 뒤 다시 약간 고개를 숙여 인사를 남기고는 인차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순자는 그 여학생이 나간 문 쪽을 이윽토록 바라보았다. 단지 가난 때문만이 아닌 것 같았다. 꼭 다른 말못할 사연이 있는 여학생임에 틀림없었다. 순자는 어쩐지 이상한 예감이 들어 상점에서 음료수를 마시는 다른 학생들한테 물었다. “학생들은 아까 우표와 봉투만을 사간 학생을 아우?” “예, 돈화에서 온 이문영이란 앤데요.” “돈화에서 왔다구? 그런데 너무 측은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그래요. 저 애는 엄청 불쌍한 애예요. 엄마가 일찍 세상을 뜬데다 70세가 되는 아버지는 또 심한 장애인이고 말예요. 때문에 그애는 얼마 안되는 조학금마저 남겨서는 아버지한테 약도 사서 보내드린답니다.” “그래? 참 안됐구나!” 순자의 짐작은 맞아 떨어졌다. 이어서 다른 애가 “문영인 언니 한명이 산동에 있고 오빠 한명이 돈화 시내에 있으나 모두가 사는 꼴이 여의치 않아 모두 여동생의 뒤를 대줄 형편이 못된다”고 덧붙였다. 순자는 또 그제날 의지가지가 없는 고아의 몸으로 어렵게 어렵게 자라며 공부해온 남편을 머리속에 떠올렸다. 순자는 없고 외로운 사람한테 주는 정신적 위안과 사랑이 얼마나 큰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순자는 언제 한번 기회가 있으면 문영이란 그 애를 직접 만나보리라 생각을 굴렸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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