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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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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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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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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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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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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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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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홍색연안’의 10대 미녀들의 운명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지난 세기 40년대, 중국의 연안은 중국혁명의 “성지”었다. 당시 수많은 열혈청년들은 천리길도 멀다 하지 않고 또한 온갖 험난도 무릎쓰고 연안을 찾아와 구국의 길과 인생의 이상을 찾으려 시도하였다. 이 중에는 여성청년들도 근 50%를 차지, 또한 이들 여성청년들 중에는 남성들의 이목을 끄는 미녀들도 일부 있었으며 후에 사람들은 취미로 이들 여성들중에서 “10대 미녀”를 선정, 당시 이들은 연안의 인기인물들이기도 했다. 하다면 이들은 모두 누구와 결혼했으며 어떠한 인생의 길을 걸어왔을까? 소비 : 소비(苏菲)는 당시 연안 노신예술학원 “교정의 꽃”으로 원명은 주소진(周素珍)이었으며 원적은 절강 정해였다. 소비는 15살 되던 해에 강청, 조단 등과 함께 상해에서 연극 “대뢰우(大雷雨)”에 출연, 강청이 여주인공 카싸리나 역을 맡고 조단이 카싸리나 남편 역을 맡았으며 소비는 카싸리나의 시녀 역을 맡았다. 이 해 소비는 영화 “해장(海葬)”에도 출연했다. 1939년 10월, 소비는 19살 나이에 연안에 와 노신예술학원에 입학했다. 당시 연안성에서는 연안으로 온 그녀를 두고 강청의 여동생이 왔다고 했으며 소비는 일약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인물로 되었고 사람들은 분분히 누가 강청의 여동생인가 하고 탐문하기도 했다. 1940년 구정 전야에 노신예술학원 예당에서는 무도회가 열렸다. 그 때 코가 큰 미국인 하드무가 대담히 소비한테 춤을 청했다. 이에 소비가 춤 출줄 모른다고 사절했지만 그는 배워주겠다고 하면서 지꿎게 달라붙었다. 이렇게 하드무는 소비의 섬섬옥수같은 손을 잡고 놓을줄 몰랐다. 이 날 밤, 소비와 같은 움막에서 거주하는 한 여성이 출산하게 되자 모두들 소비더러 하드무 의사를 청해오도록 하였다. 당시 하드무는 자기가 산부인과 의사가 아니라고 하면서도 소비와 함께 임산부한테로 달려왔다. 새벽이 되어 아기는 순리롭게 태어났다. 그 뒤 소비는 하드무더러 돌아가 휴식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도리어 소비와 함께 밖에 나가 산보하고 싶다고 하였다. 밖에서 거닐면서 하드무는 소비한테 프로포즈를 하였고 소비는 하드무의 프로포즈를 받아들였다. 일직 “연안정풍” 기간 “간첩”혐의를 받은 하드무는 문화혁명기간에도 가산을 몰수당하고 감옥에 갇히었다. 하지만 소비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이들은 첫날의 언약을 잊지 않고 그 사랑을 종신토록 이어갔다. 포안수: 1938년 북평사범대학 학생 포안수(浦安修)가 연안에 도착했고 북평사범학원 부속중학교를 졸업한 엽정의(후에 엽군으로 개명)도 연안에 도착했다. 그리고 설명과 주은래의 앙녀 손유세 역시 선후로 연안으로 달려왔다. 이렇게 되어 연안에는 남평(강청), 유지란, 엽정의, 포수안 등으로 1938년판 연안의 “10대 미녀”로 되었다. 1938년 4월, 연안에 도착한 포수안은 팽덕회의 눈에 들어 20살 나이에 팽덕회와 결혼하였다. 당시 두 사람의 나 차이는 아주 현저했다. 1949년 건국후 포수안은 중국 국가경공업부 노동노임사(司) 사장, 북경사범대학 당위 부서기 등 직을 역임하였다. 팽덕회가 평판된 후 그의 추도회를 준비하는 기간 팽매괴 등 사람들은 포수안이 “부인”의 신분으로 추도활동에 참가하는 것을 견결히 반대했다. 하지만 최종 중앙에서는 포수안의 이혼보고가 비준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포수안을 여전히 팽덕회의 부인으로 인정했다. 1991년 포수안은 유선암으로 북경에서 타계하였다. 증헌식: 증헌식(曾宪植)은 호남 상향(지금의 쌍봉)사람으로 엽검영 원수의 첫번째 부인이었다. 증헌식은 1926년 중앙 군사정치학교 무한분교의 여성대에 가입해 북벌전쟁에 참가했고 1928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1929년에 일본유학길에 올랐다가 다시 1941년에 연안으로 돌아왔다. 1946년 증헌식은 중경과 남경에서 중공대표단 성원 등영초의 비서로 있었고 건국후엔 중화 전국 부련회 부비서장, 부련회 제3기 서기처 서기, 제4기 전국부련회 집행위 부주석직을 역임했고 제4기, 제5기 전국 정협 상무위원으로 있었다. 증헌식은 1989년 10월 11일, 북경에서 타계하였다. 1938년 초, 증헌식은 임신한 몸으로 홍콩으로 갔다. 그 해 10월 증헌식은 홍콩에서 그녀 일생에서의 유일한 자식인 엽선녕을 낳았다. 1941년 증헌식은 재차 연안으로 돌아와 마르크스-레닌주의 학원에서 학습하다가 후에 당조직의 배치에 의해 부녀통일전선 등 방면의 사업을 하였다. 당시 그녀는 엽검영의 아들 엽선녕을 홀로 키우며 엽검영과의 결혼을 기다렸으나 엽검영은 끝내 그녀를 아내로 맞지 않고 다른 여인한테 장가들었다. 오광위: 연안시기 중공의 수령 모택동이 부인 하자진과 한번 크게 싸운적이 있다. 그것인즉 바로 그들 사이에 “제3자”가 끼어들었기 때문이었다. 1937년 1월, 미국 작가 스미들리가 독일 “프랑크 푸트 데일리(法兰克福日报)” 기자의 신분으로 연안에 왔을 때 그의 비서 겸 통역을 선 중국여인이 있었다. 이름은 오광위(吴光伟)었고 오리리(吴莉莉)로 불리기도 했으며 당시 그녀는 연안의 제1 미녀로서의 손색이 없었다. 그 뒤 모택동과 스미드들리 및 오광위 사이에 내왕이 밀접해지자 마침내 참고 참았던 하자진이 큰 반응을 보였다. 한번은 모택동과 스미들리 그리고 오광위가 친절하게 한담하고 있을 때 갑자기 하자진이 뛰어들더니 오광위와 트집을 잡기 시작했고 나중에 두 여인은 몸싸움까지 벌였다. 이것이 바로 당시 연안성을 놀래운 “오광위 사건”이었다. 그 뒤 오광위와 하자진은 선후로 연안을 떠났다. 듣는바에 따르면 후에 오광위는 남편을 따라 대만으로 건너갔다고 하지만 그 뒤의 일은 종무소식이다. 손유세: 1921년생인 손유세(孙维世)는 황포군관학교 교관이었던 손병문(孙炳文)의 딸이다. 손유세의 부친 손병문은 일찍 주덕과 함께 독일유학을 하였다. 당시 그는 주은래의 소개로 주덕과 함께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25년, 손병문은 귀국해 국민혁명군 정치부 비서, 광동대학 교수, 황포군관학교 교관 등 직을 맡았고 북벌전쟁에 참가하였다가 1927년 대혁명 시기에 희생되었다. 당시 손병문의 딸 손유세는 5살에 불과하였다. 1938년 손유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 그 뒤 주은래를 따라 연안에 왔으며 주은래의 양딸로 되었다. 연안에서 손유세는 마르크스-레닌주의 학원에서 공부하면서 “홍색공주”로 불리었다. 사진은 1930연대의 손유세(중간 사람)이다. 문화혁명기간 손유세는 잔혹한 비판투쟁을 받았으며 당시 주은래마저 손유세를 보호할 수가 없었다. 손유세는 1968년 반란파들의 박해로 사망, 당시 47밖에 되지 않았다. 사진은 남편 김산과 함께 있는 손유세이다. 유지란: 북경사범대학 시절 유지란(刘志兰)과 포안수는 친구사이었다. 당년에 유지란은 허다한 남학생들의 애모를 받았었다. 연안으로 온 뒤 유지란은 중공북방국 부녀사업을 책임졌었고 섬북 공학분교 교도원으로도 있었다. 1939년, 팔로군 총부가 있는 노성북촌에서 좌권과 결혼하였다. 결혼 1년후 유지란은 딸 좌태북(左太北)을 출산하였다. 1942년 좌권과 결혼할 때 유지란의 나이는 25세였다. 좌권과 결혼한 후 1년여만에 좌권의 희생으로 이들은 영별하였다. 유지란이 비통에 잠겨 있을 때 팔로군 총사령 주덕이 자주 그녀를 찾아 위안하군 했었다. 설명: 설명(薛明)은 1916년 생으로 하북성 패현의 한 빈고농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원명은 왕애진(王爱真)이었으나 후에 모친의 성을 따르면서 설명으로 이름을 고쳤다. 설명은 1936년 비밀리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1938년 여름에 연안으로 갔으며 1942년 8월 1일에 하룡과 결혼하였다. 그 뒤 설명은 하룡을 따라 남정북전을 하면서 장기간 군대직을 맡았다. 그러다 선후로 서남국 부녀복리부 부장, 총참모부 판공청 당위 위원을 맡았고 선후로 전국 정협 제6기, 제7기 상무위원으로 되었으며 중공 제12차 대회 대표로 선출되기도 했다. 설명은 2011년 8월 31일, 북경에서 병으로 타계하였다. 향년 95세로 신중국 개국원수의 부인 중 제일 마지막으로 타계한 노인이었다. 범원견: 범원견(范元甄)은 일찍 강청, 엽군, 손세유와 더불어 연안의 “4대 미녀”에 속했었다. 범원견은 일찍 학생운동시절 왕명의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연안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학원을 다닐 때에는 모택동마저 그의 이름을 기억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었다. 1939년 범원견은 중경 팔로군 판사처에서 이열(李锐)과 결혼했다. 결혼 뒤 둘은 함께 연안으로 갔다. 1943년 봄 이열은 간첩혐의로 연안 보안처에 의해 감금되었고 그 뒤 이열과 범원견은 이혼했으나 이열이 출옥하자 복혼하였으며 얼마 후 두번째로 이혼하기도 했다. 이어서 각종 정치운동이 있을 때마다 범원견은 미친듯이 이열을 적발했다. 그녀한테는 오직 당성만 있고 인성은 없었으며 나중에는 뭇사람들의 버림을 받기에까지 이르게 됐다. 범원견의 비극은 그 시대의 비극이었다. 사진은 인생만년의 범원견이다. 엽군: 1938년 4월 북경사범대학 부속중학교를 졸업한 엽군(원명 엽정의)이 연안에 도착, 남평(강청), 유지란, 포안수 등과 더불어 연안의 “10대 미녀”로 되었고 팔로군의 유명한 장군 임표의 부인으로 되었다. 결혼 뒤 임표는 “부드럽고 호방하며 이지적인 여인”이란 글로 엽군을 평가했었다. 하지만 임표 역시 대도시에서 온 이 인테리형 여성한테 허영적인 일면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1971년 9월 13일, 엽군은 결국 남편 임표와 함께 비행기에 앉아 외국으로 도망가다가 몽고국 언더르한에 추락되어 허영심 많은 인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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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5-02-07
  • 세계에서 가장 위대난 문명기적 시리즈(28)
    만리장성의 자료 소속대륙: 아시아, 소속국가: 중국, 지점: 동쪽은 압록강으로부터 서쪽의 가욕관(嘉峪关)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북부와 중부의 9개 지구를 횡단 함의: 중화민족의 위대한 상징임 만리장성은 중국과 세계에서 수건시간이 제일 길고 공사량도 제일 방대한 고대군사의 방어공사였다. 만리장성은 기원전 8 세기부터 수건하기 시작하여 그 수건역사가 장장 2000여년이 걸렸으며 중화문명의 견증으로 불멸의 역사적 기념비로도 된다. 장성은 성벽을 주체로 성장(城障), 관성(关城), 병영, 초소, 봉화대 등 허다한 군사와 생활시설로 되어있으며 전투, 지휘, 관찰, 통신 등 종합기능을 갖고 있다. 지금 만리장성은 그 방대한 공사와 유구한 역사 및 심원한 문화적 가치로 하여 중화민족의 위대한 상징으로 되고 있다. 가장 긴 군사방어시설 장성의 건축역사는 최초로 거슬러 올라가면 서주시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춘추전국시기 여러 열강들은 패권을 잡기 위해 서로 장성을 쌓기 시작, 기원전 220년에 이르러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나라의 안전을 보호하고 북방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이 방서공사들을 하나로 이어 완정한 방어체계로 구축하였으며 동시에 부대건축과 확건을 진행, 동쪽의 요동으로부터 서쪽의 임조에 이르러 만리에 달해 그 때로부터 만리장성이라 불리게 되었다. 현재 비교적 완정하게 보존되고 있는 장성은 동쪽의 압록강으로부터 서쪽의 가욕관까지 6700 킬로미터에 달하는데 그야말로 장관을 이루고 있다. 성벽, 관성과 봉화대 군사방어체계의 구성부분으로 볼 때 성벽, 관성과 봉화대는 매우 중요한 작용을 한다. 장성의 성벽은 방어체계의 주체로서 평균 두께가 7 – 8미터에 달하며 제일 넓은 곳은 말 다섯필과 사람 10명이 동행할 수 있는 규모이다. 관성은 장성 연선의 중요한 군사주둔거점으로 높은 담, 성문루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위에는 관망처와 사격구멍이 있다. 봉화대는 “봉수(烽隧)”, “봉대”, “낭연대(狼烟台)” 등으로 부르기도 했다. 봉화대는 봉화와 연기로 적정을 전하는 건축물이었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5-01-28
  • 오묘한 세계대백과(28)
    많은 사람들 심목중의 사막이란 꼭 단조롭고 무더우며 아주 밋밋하겠다고 생각될 것이다. 기실 사막은 변화다단한 “천면여랑(千面女郎)”과 같다. 사막은 끝임없이 변하고 또 변하는바 어제의 소사구 혹은 월아의 형태가 오늘은 별처럼 반짝이는 형태로 변하기도 한다. 그외 사막의 모래색갈 또한 그 전체가 황색인 것이 아니다. 만약 사막의 모래 중에 철함량이 많으면 곧 붉은색을 띠고 만약 석고 함량이 많으면 곧 백색을 띤다. 이 “천면녀랑”인 사막은 도대체 어떻게 왔을가? 기실 바람은 사막을 만드는 “마술사”이다. 바람이 불면 대지의 진흙모래을 날려보내 대지는 나체모양의 암석과 지각만이 남게 하거나 근근히 흩어진 조약돌만이 남게 하여 황량한 사막으로 되게 한다. 동시에 이런 모래알들은 저지를 당했거나 풍력이 약해지면 땅에 내려앉아 모이게 되면서 많은 서로 연결된 사구가 되게 하는데 먼 곳에서 보면 풍랑이 기복을 이루는 바다를 련상케 한다 이런 사막, 사구 거기에 대량의 유사 등이 모인 것이 곧 바로 사막의 주요 면모라고 할 수 있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5-01-28
  • 【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24)
    ■ 김철균 남편 김용환과 결혼할 때부터였다고 할까? 아니 퍽 그전인 소시적 오빠의 색시가 물동이를 깼을 때 자기가 한 것이라고 덤터기를 쓴 것, 추운 겨울 추워하는 옥단이와 옷을 바꾸어 입은 것 등을 비롯하여 순자가 수십년간 살아온 인생사를 보면 한마디로 남을 동정하고 아껴주고 베풀면서 살아왔다는데 총적으로 귀납된다. 또한 그것은 자식들과 며느리와 사위한테만 향해진 것이 아닌 타남한테까지, 심지어 많은 부분이 한족들한테까지 베풀어졌다는데서 더욱 사람들로 하여금 감동되게 만든다. 김순자의 생활노트를 펼쳐 보노라면 동네의 별의별 일에 다 참여하였다는 것을 알 수 된다. …… ◎ 동네의 한 한족남정이 임신한 안해를 때리는 것을 보고 말리다가 어깨를 크게 다쳤고 그 것 때문에 오래동안 고생했음. ◎ 동네에 도둑질에 이골이 튼 한 남정이 있었음. 남들은 다 그 집을 온역을 피하듯 꺼려했으나 경상적으로 그집에 드나들면서 “사람은 자기의 노력으로 살아야 하지 무작정 남의 것을 탐내서는 안된다”며 교육하는 한편 그 가정을 돕기 시작, 그 집에 아이를 볼 사람이 없자 딸들을 윤번으로 보내어 아기를 돌보게 해 그들 내외가 시름을 놓고 출근할 수 있게 하였음. ◎ 남편의 친어머니가 사망하고 이복형제가 많은 한 여인의 가정에 석탄이 떨어지자 집에 있는 석탄을 날라다 주었으며 그 집 애들한테 공책을 사주었음. 그리고 문화혁명시기 그 집 아들이 상대방 조직원들한테서 맞아서 거의 죽어가는 것을 구해서는 밀차에 실어 집까지 데려 왔으며 후에 또 그 집 딸이 시집가게 되자 소조주민들과 함께 가서 첫날 이불과 요 그리고 기타 베개같은 것을 해주었음. ◎ 남편과 시어머니 사이에서 구속을 받으며 속을 많이 태우는 한동네의 한 여인을 늘 위로해 주었음. 문화혁명때 아들이 맞아서 죽고 남편도 술로 세월을 보내면서 집에 잘 들어오지 않자 이 여인을 위로해 주면서 돈도 손에 쥐어 주었음. ◎ 몹시 가난한 집이 있었는데 콩장같은 색다른 음식을 할 때마다 이 집에 먼저 맛보라고 가져다 주었고 이 집 큰 아들이 결혼하자 한번도 쓰지 않은 큰 늄대야, 사발과 접시 등을 가져다주면서 살림에 보태게 하였음. ◎ 가정식구가 9명이 되고 아버지가 장기환자인 가정에 경상적으로 생선, 김치와 된장같은 것을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 집에 베개가 없는 것을 보자 일부러 천을 사다가 베개를 만들어 주었음. ◎ 동네에서 자주 말썽을 일으켜 따돌림을 당하는 늙은 양주가 있었지만 늘 그 집에 드나들면서 약도 사다 드리고 골난도 해결해 주면서 연세가 들수록 동네의 화목을 도모해야 한다면서 설복하여 끝내 늙은 양주가 더는 말썽을 부리지 않게 했음. ◎ 용정에서 온 한 학생이 부모가 늙고 집이 가난하기 때문에 위생학교에서 퇴학하러 하자 돈 10위안(그 때는 명태 한근에 19전씩 했음)을 손에 쥐여주며 “힘을 내라”고 신심을 북돋아 주었으며 후에도 여러모로 도와주었음. ◎ 비가 오는 날 이웃집 바깥에 있는 석탄이 비에 젖자 자기 집 석탄우에 씌웠던 비닐방막을 벗겨다가 이웃집 석탄더미에 씌워 주었음. 이 때문에 집의 석탄이 비에 젖어 이날 저녁 부엌아궁이에 불도 지피지 못했음. …… 이렇게 순자의 노트를 대충 훑어보노라면 일종 감각이 확 든다. 그것을 좋게 말하면 “뢰봉정신”이라 할 수 있었고 거기서 좀 다르게 붙이면 “걱정도감”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대부분 사람들이 이를 보면 “바보”같은 짓으로 취급하기가 일쑤일 것이다. 바보같은 짓, 이렇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순자는 “나 스스로도 내가 바보처럼 여겨질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하지만 이 사회는 나같은 바보를 필요로 할 때가 늘 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는 내가 바보로 나서지 않아도 누군가는 꼭 바보로 나서야 할 것이 아닌가” 라고 일축해 버리군 했다. 어떤 위태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누군가는 꼭 바보로 나서야 한다는 말, 그런 경우가 가끔씩 있은 것도 사실이었다. 어느 해엔가 순자는 연길개발구에 있는 셋째 딸 영애네 집으로 가있게 되었다. 당시 개발구에 있는 딸 집 근처에는 항주에서 왔다는 한족 노부부가 작고 헐망한 가게를 차려놓고 아들 며느리와 함께 음식장사를 하면서 매우 힘들게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날이었다. 이 날도 순자가 밖에 나가 바람을 쏘이려는데 불현듯 항주에서 온 그 노부부네 가게 쪽에서 왁작지껄 크게 떠들어 대는 것이었다. 이에 순자가 웬일이 일어났다 싶어하면서 그 쪽으로 가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가 그 노부부네 아들과 며느리가 대판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아들은 식칼을 쥐고 며느리는 돌멩이를 집어들었는데 당장이라도 살인사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얘 영순아, 영애야! 큰일이 났다. 빨리 110에 전화를 걸어라. 이러다간 살인사건이 나겠다.” 큰 소리로 딸들한테 알린 순자는 무작정 식칼을 쥔 아들의 허리를 끌어안은 한편 빨리 돌멩이를 쥔 사람을 제지시켜 달라고 주위의 사람들한테 요청했다. 하지만 모두들 구경만 할뿐 누구도 선뜻 나서주지 않았다. 자기와 상관없는 일에는 참견하고 싶지 않다는 자세였다. 다행히도 얼마 뒤 110특경들이 차를 몰고 나타났고 특경들에 의해 싸움은 인차 제지됐다. 110특경들은 싸움당사자들한테 한바탕 교육을 하면서 그들한테서 더는 싸우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는 차를 몰고 돌아갔다. 하지만 그래도 시름이 놓이지 않아 순자는 그 노부부의 아들한테서 빼앗은 식칼 2자루를 딸의 집에 감추어 두었다가 퍽 후에야 돌려주었다. 이날 저녁 크게 놀란 순자는 하루종일 심장이 떨려서 밥술도 제대로 들 수가 없었다. 10년 감수란 말의 진수를 맛보는듯 하기도 했다. 이날 밤 순자는 잠자리에서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면서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는 위태로운 사태가 벌어질 때마다 그것이 왜 유독 자기의 눈에 띄우는가에 대해 생각을 굴려보았다. 예하면 동네에서 한족남정이 임신한 안해한테 폭력을 휘두를 때도 그랬고 여름날 길가에 쓰러진 전간병이 있는 젊은이와 겨울날 저녁 술취한 남성이 길가에 쓰러져있을 때도 그랬으며 낮에 젊은 한족부부가 싸움을 벌였을 때도 그러했듯이 이런 일은 흔히 순자의 눈에 잘 띄웠다. 그렇다면 순자한테 진짜 그가 생각한것처럼 위태로운 사태가 눈에 잘 띄워서였을까. 아니면 순자 본인 스스로 그런 위태한 사태를 목격하면 자기를 돌보지 않고 나서는 습관이 있어서였을까? 그것은 그 후자가 맞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딱 이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순자는 이른바 부질없는 일에 참여할 때가 많았으니 말이다. 1993년엔가 셋째 딸 영애네가 집수리를 하게 되었다. 당시 영애가 한국으로 가고 없었기에 순자가 딸 대신 사위를 도와 집수리를 하는 13명 인부들의 밥을 해주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하루 인부들 중 나이가 비교적 어린 인부 한명이 부주의로 상해 머리가 터졌으며 얼마간의 피도 흘렀다. 그러자 이를 본 순자는 너무 가슴이 아파하며 자기의 옷을 찢어서는 그 인부의 머리를 동여주었다. 그러고도 “머리가 터져 피를 흘렸으니 닭걀과 돼지고기같은 것을 많이 먹어야 한다”며 돼지고기 요리 등 맛있는 것을 가득 만들어서는 그 머리를 상한 인부는 물론 다른 인부들의 음식그릇에까지 듬뿍듬뿍 담아주었다. 헌데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날 저녁 순자가 사위와 외손주가 먹을 밥과 반찬을 따로 챙겨두지 않고 있는 것 그대로 인부들한테 퍼먹이다 보니 밖에서 들어온 사위 이연규와 외손주는 인부들이 먹다 남긴 찌꺼기로 때를 에우는 수밖에 없었다. 당시 다른 사람들 같으면 장모의 소행에 속으로 고까운 생각을 했을 수도 있었겠으나 장모의 성미를 너무나도 잘 아는 셋째 사위 이연규는 “이러지 않으면 우리의 장모님이 아니지”라고 우스개로 넘겨버렸다고 한다. 이 외 순자는 그 12명 인부들의 빨래까지 도맡아 해주었다. 아무리 세탁기로 빨래를 한다지만 당시 60세가 넘은 노인이 된 순자로서는 여간만 힘든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 인부들이 입던 작업복은 두껍고도 무거운지라 더욱 힘들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인부들이 높은 곳에서 작업할 때면 밖에 나서서 몸을 조심하라고 항상 걱정해 주었고 날씨가 좀 무덥기라도 하면 자기의 돈으로 광천수나 얼음과자 같은 것을 사서는 인부들의 손에 한두개씩 쥐어 주고야 시름을 놓군 하였다. 순자의 이러한 소행은 외지에서 떠돌이생활을 하면서 품팔이를 하는 인부들한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집수리가 마무리되어 떠나게 되던 날 그 13명의 인부들은 “수십개 지방으로 다니면서 집수리를 하면서도 이렇게 인부들을 친자식처럼 대해준 분은 어머니밖에 없었다”면서 눈물까지 흘렸고 자동차에 앉아서는 오래도록 순자한테 손을 저었다고 한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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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26
  • “흑토지”의 희와 비- 소련이 지배하던 중국 동북의 나날
    1945년 8월 9일, 소련홍군은 유럽전장이 결속된지 3개월만에 중국 동북으로 진출해 위 만주국땅에 주둔해 있던 일본 관동군을 격멸시키면서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한 미군의 원자폭탄과 더불어 일본의 무조건 투항을 앞당겼다. 최초 동북으로 진출한 소련군은 군 규율을 엄격하게 준수하는 부대였다. 하지만 전쟁 중 상망이 많아지자 소련군은 범죄자 혹은 군입대 조건에 부합되지 않는 남자들한테 총을 쥐어주며 참군하게 하였다. 그런 소련군은 군규율이란 전혀 없었다. 그들은 거리를 쏘다니면서 술에 취해 물건을 강탈하는가 하면 제멋대로 살인하기도 하였다. 그 외 부녀자들을 능욕하고 강간하고 하여 당시 백성들은 공포에 질려 집문도 감히 열지 못했다고 한다. 위 사진은 당시 중화민국 대표 팽벽생과 심양주둔 소련군 장교가 악수하고 있는 장면이다. 당시의 심양역이다. 역청사 꼭대기에는 중화민국국기와 소련국기가 걸려 있고 출입문 옆의 문주에는 “소련홍군의 영수 스탈린 대원수 만세!”, “소련 노농홍군 창립 28주년 기념 만세!”란 구호가 걸려져 있다. 당시 심양역뿐만 아니라 장춘, 할빈, 여순, 안동 등 대도시의 기차역 청사에는 모두 이런 구호들이 걸려 있었다. 당시 소련홍군은 전패한 일본인에 대해서만 난폭하게 굴었을뿐만 아니라 동시에 동맹국이라는 중국의 백성들한테도 횡포무도하게 굴었다. 위 사진은 심양 거리의 벽에 붙여 있는 소련과 스탈린을 선양하는 포스터이다. 1946년 3월, 심양 제국판점 출입문 위에는 소련과 중화민국의 국기가 걸려 있고 그 위는 스탈린, 레닌, 손중산, 장개석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그리고 그 밑에 중국문과 러시아문으로 “중소 양대 민족은 연합하라!”고 씌어져 있다. 소련 홍군이 동북에 주둔해 있는 몇년간 물건을 강탈하고 부녀를 강간하는 행위로 하여 당지의 백성들은 공포에 떨었으며 아주 나쁜 후과와 영향을 초래하였다. 사진은 미군의 협조대표와 중화민국 정부 및 국군장령이 심양을 접수하기 위하여 심양비행장에 도착한 장면이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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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16
  • 오묘한 세계대백과(27)
    대자연 속의 돌은 대부분 움직이기 싫어하며 그것들은 조용히 “누워 있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어떤 돌은 진짜 매우 활발하여 경쾌하게 춤을 춘다. 이는 무엇때문일가? 한번은 과학자들이 금방 바다밑에서 채집해온 돌을 갑판위에 놓았는데 그 중 몇덩어리의 돌들이 돌연히 아래위로 뛰놀기 시작했다. 과학자들은 매우 이상하여 그 돌들에 대해 자세히 연구하였다. 알고보니 모든 돌들이 다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사화산과 활화산이 형성된 바다밑 산맹에 있는 돌만이 “춤”을 출 줄 알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화산용암 암석 중의 돌들은 이산화탄소의 함량이 일반적인 암석에 비해 20배가 높았다. 그 돌들은 바다밑에 있을 때 받는 압력이 특별히 컸다가 일단 바다밑을 떠나 수면에 올라오면 원래 있던 큰 압력이 소실되면서 구속에서 방불히 벗어난 듯 “경쾌”하게 춤을 추게 된것이다. 세상에는 “춤”을 출줄 아는 돌이 있을뿐만 아니라 “노래”를 부를줄 아는 돌도 있다. 중국 절강의 호수에는 세상에 별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황룡동이 있는데 이 작은 동굴의 꼭대기 부분의 암석은 일반적인 돌과는 특별히 다르다. 왜냐하면 그 돌이 바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소리”가 나는 돌이다. 만약 누군가 힘을 주어 이 돌을 두드리게 되면 이 돌들은 곧 소리를 낸다. 가령 음악가가 절주있게 이 돌을 두드린다면 이 돌들은 심금을 울리는 “음악”도 연주할 수도 있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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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15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27)
    용문석굴의 자료 소속대륙: 아시아, 소속국가: 중국, 지점: 하남성 낙양시 용문협곡 함의: 중국의 3대 석각예술 보물고의 하나임 용문석굴은 북위시기부터 건설되기 시작, 400 여 년 후에야 비로서 완공이 되었으며 지금으로부터 1500 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용문석굴은 남북의 길이가 약 1000미터이고 2000여개의 동굴 중 불상이 10만 여 개가 있으며 글이 새겨진 돌조각품이 3600여개이고 불탑이 40여개이다. 용문석굴에는 대량의 종교, 미술, 서법, 의약 등 방면의 실물들이 보존되어 있다. 이는 중화민족의 탁월한 창조력을 보여주고 있다. 용문석굴과 막고굴, 운강석굴 등은 중국의 3대 석각예술 보물고로 불리우고 있다. 특색이 각이한 동굴 봉선사(奉先寺) 석굴은 용문석굴 중 규모가 제일 크고 가장 대표성을 띤 노천불감(露天佛龛)이다. 감내에는 형태가 각이하고 석각기술이 신비한 마애석조군(摩崖石雕)으로 조성되어 있다. 고양동굴(古阳洞)은 북위 효문제(孝文帝) 시기에 건설되기 시작, 용문석굴 중 제일 먼저 파기 시작한 것이며 내용이 가장 풍부한 동굴이다. 약방동굴(药方洞)은 북위말기에 파기 시작, 동굴 내에 고대약방문이 많이 새겨지어 그 이름을 따게 되었다. 이 동굴안의 양측에는 140여개의 양방문이 씌어져있으며 어떤 약방문은 지금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대불상 로사나 봉선사 석굴의 중앙에는 용문석굴에서 가장 큰 불상인 노사나(卢舍那)의 불상이 모셔져 있다. 이 불상의 높이는 17.14미터로 머리 부분의 높이만도 4미터에 달한다. 불경에 따르면 노사나란 “광명의 선물”한다는 뜻이다. 이 불상을 자세히 관찰하면 입에 미소를 담고 있는듯하고 머리를 약간 숙인듯한 것이 속세를 내려다 보는듯 하다. 이 불상을 보면 흡사 고상한 정조와 풍부한 감정 및 정직한 외모 등이 잘 결합되어 하나의 독특한 예술걸작임에 틀림없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제공)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5-01-15
  • [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23)
    ■ 김철균 1 순자가 가두 적십자회 주임, 중앙소학교와 신흥소학교의 총보도원, 연변건축공사 선진사업자 등 일련의 희로애락을 거쳐오는 사이 춘하추동과 더불어 세월은 빨리도 흘렀다. 그 사이 “소근장 따라 배우기”, “자본주의 꼬리 자르기”, “우경번안풍 반격” 등 정치선풍을 일으키며 이 나라 백성들을 지지리도 괴롭히던 “4인 무리”가 마침내 역사의 심판대에 오르면서 많은 노간부들과 지식분자들은 이전에 맡았던 당과 국가의 주요한 직무를 회복하였고 사회의 모든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하였다. 순자의 가정도 마찬가지었다. 남편 김용환 선생이 모든 직무를 회복하고 연변 위생학교의 중견일군으로 입지를 굳혔는가 하면 노동자 모집에 합격되어 안도에 있는 삼림경영국에서 투시실 의사로 근무하던 큰 아들 김영남이가 연변의학원 통신학부 시험에 합격되어 노임을 받으며 공부하는 대학생이 되었고 해방군에 입대했던 둘째 아들 경남이는 건강한 몸으로 그것도 더욱 성숙된 채 제대했으며 딸들인 영순이, 영옥이와 영애도 선후로 노동자 모집에 합격돼 연길시내에서 직장근무를 하게 되었다. 이쯤 되면 순자는 한시름 덜 수도 있었다. 하지만 순자는 자녀들이 장성할수록 그들에 대한 요구를 더욱 높였다. 얼마 뒤 큰 아들 영남이가 결혼하게 되자 순자는 아들한테 가정과 동네간의 화목을 위한 많은 것을 일깨워 주었다. “곤란이 있을 때면 항상 아내를 먼저 생각해 주고 특히 그 어떤 일이든 아내가 힘들어할 때 혼자서 하게 하지 말고 함께 받들어서 하라”고 타일렀으며 “결혼하면 이웃이 있기 마련이기에 이웃과의 관계를 잘 처리하며 김치라도 나눠어 먹으면서 화목하게 지내며 사노라면 한족들과 이웃으로 살 수도 있는 법, 서로 재미있게 보내면서 민족단결에도 유의하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이어서 큰 딸 영순이가 약혼하여 오래지 않아 결혼하게 되자 또 “넌 남편의 생모가 없는 가정의 맏 며느리이다. 그러니 뭐니 뭐니 해도 먼저 남편의 계모한테 잘해주어라. 남의 말을 열마디 듣고 너 자신은 한두마디만 해야 한다”는 등으로 수십종목에 달하는 주의사항을 적어주었으며 또한 인생의 좌우명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부생활십계명”과 어렸을 때 외국인들이 꾸린 성당을 다니며 배운 “말 한마디”란 명구들도 적어주기도 했다. 그 “부부생활십계명”이란 명구는 다음과 같다. 부부생활 십계명 1. 부부 두사람이 동시에 화를 내지 마세요. 2. 집에 불이 났을 경우 외에는 부부 사이에 절대 고함을 지르지 마세요. 3. 눈이 있어도 상대방의 흠을 보지 말며 입이 있어도 상대방의 실수를 말하지 마세요. 4. 아내와 남편은 서로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마세요. 5. 상내방의 아픈 곳을 긁지 마세요. 6. 분을 품고 침실에 들어가지 마세요. 7. 결심한 걸 결코 단념하지 마세요. 8. 처음의 사랑을 잊지 마세요. 9. 모든 것을 숨기지 마세요. 10. 서로의 잘못을 감싸주고 부족한 사랑으로 채워주도록 노력하세요. 이러한 어구들을 보면 지난 세기 70년연대말과 80년대 초기까지만 해도 크게 시대와 떨어진 봉건예의사상이 짙은 어구라는 평가를 받기가 일쑤였다. 하지만 순자의 이러한 타이름에 영남이와 영순이는 그 마디 마디를 명심해 가슴속에 아로 새겼으며 앞으로 결혼생활에서 모든 일을 잘 처리하여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에 먹칠을 하지 않겠노라고 수십번도 더 맹세했다. 결혼을 앞둔 자식들에 대한 교육은 영남이와 영순이한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 아래로 영옥이, 영애, 경남이와 김진 이렇게 내려가며 모두 순자로부터 이러한 교육을 받은 뒤에야 결혼하게 되었다. 순자는 이렇게 큰 딸은 시어머니가 계모인 가정의 맏며느리로 시집보냈고 둘째 딸은 아들만 6형제인 가정에 시집보냈으며 후날 셋째딸 영애는 신랑이 비록 셋째었으나 큰 시형은 북경에서 사업하고 둘째 시형은 장춘에서 사업하는 가정에 시집갔으니 역시 신랑이 맏 아들 노릇을 하는 가정이었다. 이런 가정에 시집을 가면 고생할 수도 있다는 도리를 모르는 순자가 아니었으나 일처리를 잘 하면 더욱 받들리며 살 수 있고 그만큼 복도 차례진다는 것이 순자의 철리였다. 그리고 딸들이 그렇게 잘 처사하리라고 순자는 믿고 있는 터였다. 한편 순자의 딸들이 이렇게 부담이 많은 가정에 시집갔는가 하면 아들 3형제 역시 그랬다. 큰 아들 영남이는 아들이 없는 가정에 장가를 들었고, 둘째 아들 경남이는 가정의 맏 사위로 장가를 들었으며 막내 아들 김진 또한 둘째 사위로 장가들었으나 처가집의 큰 처형이 장애인이다보니 역시 맏 사위 노릇을 해야 하는 사정이었다. 이러고 보니 순자의 자식 6남매는 모두 처가집이나 시집의 큰 중임을 떼메게 되었는데 당시의 말대로 하면 순자는 그야말로 “남의 좋은 노릇을 해준 셈”이었다. 2 자식들의 부부를 대함에 있어서 순자는 확실히 아들보다는 사위를, 딸보다는 며느리를 더 끔찍하게 사랑하고 생각해주었다. 그것은 셋째 딸 영애, 둘째 아들 경남이와 셋째 아들 김진이가 결혼하면서 더욱 도드라지게 나타났다. 맏아들 영남이와 딸 영순이가 25살을 넘게 되자 순자는 집에 돼지를 치기 시작하였다. 이는 돼지를 키워팔아 생활비로 보태자는 타산도 있었지만 다른 사연도 있었다. 당시 돼지를 치면 배급에 돼지사료몫으로 옥수수를 더 주었기에 그 옥수수나마 식량에 보내여 며느리와 사위들이 들어오면 배를 곯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가 더 큰 목적이였다. 이렇게 돼지를 키우면서 배급으로 옥수수를 더 타서 식량에 보태서일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순자네는 옥수수밥이나마 더 이상 식구들이 배를 곯는 날이 없었다. “딸보다 며느리를 더 아껴주어야 하고, 아들보다 사위를 더 아껴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가 그들 부모한테는 귀한 자식들이기 때문이다.” 이는 아들과 딸들을 결혼시키면서부터 제정한 순자의 좌우명이었다. 순자는 말을 이렇게 하였을뿐만 아니라 실제 행동상에서 힘들고 무거운 일은 흔히 아들과 딸들한테 시켰고 애로에 봉착하게 되면 아들이나 딸보다 며느리나 사위를 먼저 돌보군 하였으며 색다른 음식이 있으면 며느리나 사위한테 먼저 먹이군 했다. 1989년 겨울의 어느날에 있은 일이다. 이 날 큰 딸 영순이는 오전 내내 거리를 돌면서 일을 보다가 점심시간이 좀 지나자 밥 한술 얻어먹으려고 친정집에 들렸다. 헌데 원체 모든 자식들한테 단 한번도 인색하지 않던 어머니가 그 날만은 밥이 없다면서 딸더러 집에 가서 먹으라고 하는 것이었다. 딸 영순이가 둘러보니 집에는 덮개를 꼭 덮은 음식그릇이 하나 있었다. 영순이가 그 덮개를 열어보니 밥은 아니었으나 아주 맛있어보이는 오그랑 팥죽이었다. 며느리한테 남겨놓은 것이 분명하였다. 어머니의 심사를 모르는 영순이가 아니였으나 짐짓 어머니를 떠보려고 한마디 했다. “어머니, 여기에 오그랑 팥죽이 한 그릇이 있네요. 야, 맛있겠다. 밥 대신 먹으면 좋겠구만요.” 그러자 순자는 급기야 부엌에서 올라오며 영순의 손에 있는 죽그릇을 빼앗아냈다. “안된다. 셋째 며느리가 오면 한번 더 먹이려고 그런다.” 기실 영순이도 올케한테 남겨놓은 그 오그랑 팥죽을 먹을 생각은 꼬물만치도 없었다. 그래서 슬쩍 건드려본 것인데 진짜 성을 내는 어머니, 그야말로 못말릴 어머니었다. 이렇듯 고부지간에 화목하려면 우선 시어머니가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가 순자의 며느리 3명 모두가 시어머니를 친정어머니 이상으로 존경하고 따른다. 거기엔 역시 딸보다도 며느리를 더 아끼고 사랑하는 순자의 마음과 솔선수범이 따라준 결과라 해야겠다. 1980년 셋째 딸 영애가 결혼했다. 당시 순자는 셋째 딸의 결혼시 첫날 이불과 이불장 및 첫날옷과 같은 기본적인것만 해주었을뿐 남들처럼 요란하게 잘해주지 못했다. 더군나나 첫날 이불과 요는 제일 싸구려천으로 해주어 그것이 후일 두고 두고 속에서 내려가지 않았다. 그리고 결혼비용도 모자랐다. 예단감을 갖추고 결혼식날의 부식을 구입하고… 돈이 들 일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가정에는 돈이 나올 구멍이 없지만 결혼식은 치러야 했다. 그러자 결혼 당사자인 영애가 단위의 “호조금(互助金)”에서 100원 정도 앞당겨 꺼내서 쓸 수밖에 없었다. 당시 영애의 한달로임은 겨우 35원이었다. 그러니 영애가 그 100원을 갚으려면 일전 한푼 쓰지 않고 두달 노임을 몽땅 밀어넣어도 모자랄 판이었다. 영애가 결혼할 때 친척과 이웃 그리고 영애네 단위의 직원들로부터 들어온 축의금(부조돈)은 수백원에 달했지만 결혼식 때의 비용을 제하고 나니 남은 돈은 약 160원 정도였다. 모두가 1원, 2원 많아야 5원, 10원씩 들어온 축의금이였다. 순리대로 하면 영애의 결혼 후 순자는 그 축의금 160원을 그대로 영애한테 주어 빚부터 갚게 해야 했다. 하지만 순자는 그렇게 처리하지 않았다. 생각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셋째 딸 영애가 진 빚은 천천히 갚아도 된다는 타산에서였다. 아니 영애의 빚을 갚는 것도 급했지만 더 급히 처리할 일이 있었던 것이다. 영애의 결혼식이 끝나고 친척들 거개가 집으로 돌아가고 집안식구들만 남게 되자 순자는 큰 며느리 금봉이를 헛간으로 불러냈다. 순자는 보자기에 꽁꽁 싼 돈뭉치를 내놓았다. 그 돈은 영애가 결혼하면서 친척과 친구 그리고 영애 단위의 직원들로부터 받은 축의금이었는데 도합 160원이였다. 원래 받은 축의금은 1원짜리, 2원짜리, 5원짜리 심지어 50전짜리와 20전짜리도 있었지만 순자가 어느 결에 몽땅 10원짜리로 바꾸었던 것이다. “자네 시누이 셋씩이나 시집보내느라고 정말 수고가 많았네. 가정에서 뭐니 뭐니 해도 큰 며느리가 제일 고생한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네. 그러니 자 이걸 받게. 160원인데 많지 못하네. 자네 가정의 수요대로 자전거를 사든, 재봉침을 사든 여하튼 큰 가정기물 하나를 갖추게나. 이 시어미가 진작부터 자네 가정에 뭔가 해주고 싶었었다네.” 금봉이는 깜짝 놀랐다. “아니 어머님, 제가 어떻게 이 돈을 받을 수 있어요?! 그리고 제가 무슨 고생을 했다구 이래요?” 큰 며느리는 한사코 거절했다. “그러는게 아닐세. 내가 줄만하니까 주는 걸세. 그리고 이 시엄마가 주는 성의를 무작정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지…” 순자는 망설이는 큰 며느리한테 마구 돈뭉치를 밀어맡겼다. 결혼하느라고 빚을 낸 영애한테는 매우 미안한 일이었지만 그 당시로서는 시누이 셋씩이나 시집보내느라고 고생한 맏 며느리가 그만큼 더욱 불쌍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엉결에 시어머니로부터 돈뭉치를 받고난 큰 며느리 금봉이는 한동안 어안이 벙벙해있었다. 무슨 감투끈인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뒤 큰며느리 허금봉은 그때의 일을 자주 입에 올리면서 참으로 못말릴 시어머니라고 두고두고 감탄해마지 않았다고 한다. 3 1980연대는 순자네 가정에 있어서 “번창하는 연대”였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간고한 “기아기(饥饿期)”을 넘어 온집식구가 배불리 먹기 시작했고 자식들 모두가 성가하여 손군들이 육속 태여나기 시작하기도 했다. 형제가 많아 거기에 딸린 며느리나 사위들이 여럿이 되다 보면 집안말썽도 가끔씩 생길만도 하지만 순자네 가정만은 말썽은커녕 모든 자식들이 모일 때마다 항상 웃음과 노래 소리가 넘쳐나 동네의 부러움을 사군 했다. 특히 명절 때면 17평방미터밖에 안되는 작은 집이었고 모여서 음식을 해먹거나 잠자리 등 모든 것이 불편했지만 어른과 어른 사이, 어른과 아이들 사이 그리고 아이와 아이들 사이에 한마디의 불평이 없이 서로 양보하고 돌보며 웃음꽃을 피우는 모습이 그렇게 보기 좋을 수가 없었다. 대 가정이 이렇듯 화목하고 아기자기하게 지낼 수 있는데는 작으마한 모순이라도 생길 수 있는 화근을 미리미리 막아버리는 순자의 숨은 노력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모른다. 즉 며느리나 사위를 자기가 낳은 자식보다 더 아끼고 사랑한 것 다시 말하면 자식들한테 덕을 쌓은 결과이기도 했다. 한편 가정범위가 커지니 크고 작은 일들이 속출하기도 했다. 손군들이 앓거나 하는 가정내부의 일들이 생기는 건 물론 멀리로는 며느리나 사위쪽 가정에 바라지 않던 일도 가끔씩 생겨나군 하였다. 사돈쪽에서 그 무슨 불행이 생길 때마다 순자는 한번도 남의 일처럼 등한시하지 않았다. 1987년 겨울의 어느 날, 돈화에 사는 둘째 며느리 제갈영애의 친정어머니가 갑자기 병이 위독하다는 기별이 왔다. 빈혈이 심해 수혈도 해야 한다고 했다. 순자는 그 기별을 받은 그길로 남편이 출근하는 연변위생학교로 종달음쳐갔다. “여보, 둘째네 장모가 병이 도졌는데 몹시 위독하다는구만요. 당신이 어떻게 좀 방도를 강구하시우.” “그래?! 어떻게 위독하기에? 아니 알겠소. 그럼 나 인차 퇴근할테니 당신은 알릴만한 사람은 다 알리구려.” 그 날 순자는 큰 아들과 큰 사위 그리고 작은 아들까지 집에 모이게 했다. 큰 사위 최태호는 어디에서 구했는지 봉고차 한대를 몰고 달려왔다. 미구하여 남편이 금방 퇴근한 연변병원 소화내과의 배봉욱 주임의사을 동행시켰다. 배봉욱 주임의사의 가방안에는 얼음으로 포장한 혈액까지 들어있었다. 일행은 밤도와 돈화로 향했다. 약 4시간 뒤 돈화에 도착한 일행은 즉시 경남의 장모를 살려내는 긴장한 구급치료에 달라붙었다. 점적주사를 놓는 한편 동시에 수혈을 시작했으며 배봉욱 주임의사는 환자의 심장맥박, 혈압 등을 수시로 체크하면서 환자가 이외의 반응을 보일 때마다 긴급조치를 취하군 하였다. 병원의 구급실은 아니었지만 모두가 손발이 척척 맞아돌아갔고 환자의 상태를 관찰하는 배봉욱 주임의사와 김용환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대돋았다… 긴장한 구급과 더불어 수혈이 끝나자 얼마 뒤 백지장같던 환자의 얼굴에는 차츰 피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몇 시간의 구급끝에 환자가 위험에서 벗어나자 어느 덧 새벽이 되었다. 일행은 좀 휴식하다가 아침밥을 드시고 떠나라는 경남이와 제갈영애의 만류도 마다하고 눈 한번 붙이지 못한 채 귀로에 올라야 했다. 낮에 또 출근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친정어머니가 완쾌한 모습을 보인 뒤 연길로 돌아온 둘째 며느리 제갈영애는 순자앞에서 오래도록 감격으로 어깨를 들먹이였다. “어머니, 어머니의 은공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어요. 어머니가 아니었더면 저의 친정어머니가 어떻게 되었겠어요?! 정말이지 어머니의 그 정성이 저의 친정어머니를 구해냈어요.” 그리고 병이 완쾌되자 둘째 며느리 제갈영애의 친정어머니는 큰 사돈인 김순자네 내외와 그 자녀들한테까지 크게 한턱 내겠다고 했다 한다. 그뿐이 아니다. 셋째 며느리 정선희의 친정아버지가 중풍에 걸리자 순자는 사돈이 입원한 날부터 위문을 다니기 시작, 장장 20년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며칠에 한번씩 문안을 다니는것이 일과중의 하나였다. 그 사이 순자 역시 노년기에 접어들었고 누구한테 짝지지 않게 건강하던 몸이 나중에는 지팽이를 짚고 다니는 파파할머니로 되기도 했다. 하지만 사돈의 건강에 대한 관심은 그 사돈이 사망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며느리와 사위들을 아껴주고 지어는 사돈집의 일에까지 참여하는 순자였건만 자기의 몸에 등한시할 때가 많았다. 일찍 지난 세기 80연대 작은 아들 김진이가 결혼하고 거기에 둘째 아들 경남이네가 집이 파가이주되어 임시로 들어와 있다 보니 17평방미터밖에 안되는 집은 터질 지경이었다. 그래서 식사는 교대별로 했고 남편은 학교 사무실에 가서 자야 했으며 순자는 현관에 넢판자를 펴고 쪽잠을 자야 했다. 심지어 온집식구가 몽땅 모여 함께 북적일 때면 순자는 손에 쥐었던 대야를 놓을 자리가 없어 아예 머리위에 이고 있었다고 하니 그 때의 그 광경이야말로 17평방미터밖에 안되는 작은 방안에 콩나물시루처럼 식구가 빼곡히 들어와 있었다는 비유가 딱 들어맞았다. 당시 순자는 저녁에 현관에서 자다가도 새벽이 되면 다시 살며시 들어와 며느리들을 깨울세라 아침밥을 지었고 그 뒤 며느리가 식사할 때면 손주녀석 둘씩 업고 밖에 나가 달래면서 며느리가 제때에 밥을 먹고 출근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러다 가도 며느리나 사위들 중 누가 앓기라도 하면 모든것을 제쳐놓고 거기에 모든 정성을 쏟는 순자였다. 이렇듯 가정에서 순자가 모범을 보이기에 가정성원들 사이가 화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순자네 가정의 화목함을 두고 당시 많은 사람들은 부러워하면서도 왜 그렇듯 화목할수 있었는가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순자를 찾아와서는 “며느리를 잘못 맞아와 부산해죽겠소”, “아들도 장가를 가더니 남이 돼가오”, “손자손녀를 키워주어도 차례지는 것이란 그저 그렇소”하며 불평을 부리기가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순자는 아주 설득력이 있게 그런 사람들을 감화시키군 했다. “가정관계도 대괄호, 중괄호, 소괄호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우다. 대괄호 【 】가 로인들이 있을 위치라면 중괄호{ }는 젊은이들이 있을 위치이고 소괄호 ﹝﹞는 손군들이 있을 위치라우. 그런데 노인들은 자기들이 있어야 할 대괄호안에 있지 않고 자꾸 중괄호안이거나 소괄호안에 비집고 들어가려고 하니까 인간위치 관계가 혼돈이 생기면서 망썽이 생기는 법이 아니겠수?!” 순자의 이론을 개괄하면 다음과 같다. 【할아버지{ 아들 ﹝손자, 손녀﹞ 며느리 }할머니】 이는 어찌보면 소괄호안의 문제부터 풀이하는 수학법칙과도 같았다. 즉 소괄호풀이부터 시작하여 중괄호와 대괄호의 문제를 풀이하는 법칙 말이다. 이렇게 보면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아들과 며느리가 있는 중괄호안에 들어가려고 해도 어긋나거니와 손자와 손녀가 있는 소괄호안에 들어가 손자나 손녀들과 똑같은 배려를 요구하면 더욱 안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렇다면 순자의 솔선수범이 전반 가정의 화목을 촉진시켰다고 해도 실로 과언이 아니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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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10
  • 민국일화 - 귀족후손들과 양공주들의 풍류사
    한 나라로 놓고 말하면 조대의 개방정도에 따라 섭외혼인의 수량과 활약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중국의 당조시기, 허다한 본토 여자들이 해외에 정착했고 동시에 역시 수많은 요염한 양공주들이 당조의 남자들과 짝을 맺아 인륜사를 창조, 이는 당시 당조의 일종 아름다운 풍경으로 되었다. 당조 이후 중국은 점점 대내외적으로 봉쇄정책을 실시하면서 이러한 풍경은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편전쟁을 계기로 서양인들에 대한 중국인들의 시각은 부동한 두가지 부류로 나뉘게 되었다. 즉 전자는 오만하고 후자는 공포감에 시달리는 것 등이었다. 청나라의 도광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크고 작은 관원들은 마치 서양인들을 보면 마치 “온역”을 피하듯 멀리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서양인을 별로 “인간취급”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청조말기와 민국초기에 와서 이러한 현상이 개변되면서 중국은 다시 얼굴을 해외로 돌리고 서양인들과의 교류를 활발하게 진행하기 시작하였으며 따라서 중국남자와 서양여자, 서양남자와 중국여자들 사이의 혼인현상도 종종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때에 와서야 사람들은 인간의 정감이란 민족과 종족을 떠나 세계의 그 어느 곳에도 가 닿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른바 귀족후손들이 섭외혼인에서도 선도작용을 했다. 육정상(陆征祥), 장백리(蒋百里), 호적(胡适), 부걸(溥杰), 장위국(蒋经国)…그들은 청조말기부터 민국초기 사이의 풍류남아들로서 이들 모두는 출신이 우월했고 전통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대담히 전통과 문화의 장벽을 허물고는 한명, 또 한명의 이국소녀의 마음을 사로잡기도 했다. 육정상과 벨지크 여인 페더 베르트 1895년 러시아 상테페테르부르그 차르궁정의 무도회에서 아주 뜻하지 않던 일이 발생했다. 러시아 주재 청정부 대사관의 통역관 육정상이 양복을 입고 숙련된 프랑스어로 신사숙녀들 속에서 통역을 담당해 인기를 끌었다. 그의 세련된 예의, 서방남성한테서 볼 수 있는 풍도와, 동방남성한테서 볼 수 있는 우아함에 많은 숙녀들이 가슴을 부둥켜안군 했다. 이 중에는 벨지크 숙녀 페더 베르트도 있었다. 페더 베르트는 벨지크의 한 장군의 손녀였다. 베르트의 부친은 벨지크 국왕의 시종무관이고 육군대령이었다. 당시 베르트는 러시아 주재 벨지크 대사관에 거주하는 친척 로크의 집에 머물고 있었으며 친척관계를 통하여 경상적으로 궁정 연회 및 무도회에 드나들군 하였다. 그녀는 말씨가 친절하고 자태가 아름다워 늘 사교계의 화제로 되군 하였다. 얼마 뒤 육정상과 베르트는 서로 사랑하기 시작, 당시 육정상은 24세였고 베르트는 40세였다. 1899년 2월 12일, 상테 페테르부르크의 성카리나 대성당에서 서양식 결혼식을 거행, 천주교 교부 라클랑르가 주례를 섰다. 그 뒤 27년간의 결혼생활에서 이들 남녀는 결혼선언을 완벽하게 이행하였다. 결혼후 이들은 비록 서로 끈끈히 사랑했지만 세속은 그들의 사랑을 인정하지 않았고 각종 적의적인 유언비어들이 난무하였다. 그러자 남편의 압력을 덜어주기 위하여 낭만적이고 떠들기를 좋아하던 베르트는 늘 집안에 들어박혀 있으면서 외출을 삼가하였다. 러시아 생활의 8년간 육정상은 4등 통역관으로부터 2등 참사관으로 되었다. 그가 순리롭게 출세할 수 있은데는 역시 베르트의 공로가 아주 컸다. 이들은 서로 아껴주고 사랑하면서 27년간을 함께 생활, 1926년 베르트가 사망할 때까지 줄곧 결혼시의 언약을 잘 이행해왔다. 베르트가 사망한 이듬해 육정상은 스위스주재 중화민국 공사관의 직무에서 사퇴하고는 벨지크로 이민하였다.    호적과 미스 에디스 윌리엄스의 사랑 중국 신문화운동의 기수로서 호적은 일생동안 사랑과 도덕의 십자가를 등에 지고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호적은 자신의 전족부인 강동수와 함께 정이 없는 부부로 “백년해로”했지만 그 역시 “남자로서는 모두가 범할 수 있는 착오”를 범했다. 이 중 하나는 그와 이종사촌 여동생 조성영간의 혼외연이었고 다른 하나는 장장 반세기에 달하는 그와 미국연인 월리엄스와의 플라톤 사랑이었다. 호적과 월리엄스가 서로 알기 시작한 것은 1914년이었다. 당시 월리엄스의 부친은 미국 예일대학과 코넬대학의 지질학 및 고생물학 교수였고 당시 월리엄스는 뉴욕의 한 예술전문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그 때 월리엄스는 귀가해 휴가를 보내던 중 처음으로 호적과 만나게 되었다. 당시 월리엄스의 평범하지 않고 명랑한 성격은 호적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는 그로 하여금 비상한 용기로 전문 월리엄스를 방문하도록 하였다. “서양부호”의 딸 월리엄스는 호적보다 6살 연상이었다. 그 때 월리엄스의 고결한 인품과 풍부한 학식 등은 호적으로 하여금 그녀를 사모하게 하였다. 아울러 호적의 넘쳐나는 재능 또한 월리엄스로 하여금 “인생지기를 얻은듯한 쾌락”을 가지도록 하였다. 또한 유능인과 유능인의 만남은 마음속에 가졌던 모든 방선이 무너지도록 하였다. 하지만 그들 남녀의 내왕은 호적의 부모로부터 강한 반대의 벽에 부딪쳤다. 원래부터 호적의 미국생활을 반대해온 부모는 기어코 호적으로 하여금 억지로 미국으로부터 돌아오게 하였고 귀국하자 바람으로 강동수와 결혼하도록 강요하였다. 어찌보면 호적 역시 흉금이 넓은 군자였다. 그는 종래로 강동수와의 혼약을 월리엄스한테 숨기지 않았으며 지어 강동수의 사진을 월리엄스한테 보여주기도 했다. 또한 서신거래로 맘에 들지 않는 강동수와의 결혼에 대해 고민을 털어놓으면서 월리엄스의 조언을 요청하기도 했다. 비록 자신의 미혼녀에 대해 만족해하지 않았지만 호적은 자기가 좋아하는 여인앞에서 자기 자신은 봉건세속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결국 강동수와 결혼할 수밖에 없노라고 고백했다. 이에 월리엄스는 조금도 호적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녀는 묵묵히 호적의 고충을 이해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지지하고 달갑게 호적의 “학술상의 반려”로 되어 주었다. 그리고 월리엄스는 종신토록 출가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소현미와 항미려의 로맨스 소현미(邵洵美)라고 하면 현재의 중국 문학권에서는 아는 사람이 별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세기 30~40연대의 중국문단에서 그는 명성이 아주 대단하던 사람으로 일찍 수차 노신(鲁迅)으로부터 풍자와 공격을 받았었다. 당시 노신으로부터 비판을 받은 사람들을 놓고 보면 모두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다. 소현미는 출신부터 평범하지 않았다. 그의 조부는 일찍 청조시기 대만의 제2임 순무관 소우겸이었고 외조부는 만청시대의 제1 관상으로 “중국의 상부(中国商父)”로 불렸던 성선회었다. 이러한 출신은 그로 하여금 부잣집 도련님으로 될 확율이 아주 높게 하였다. 하지만 그는 인생을 옳바르게 인식하고 남들이 먹고 마시고 창기 놀음을 할 때 문학의 길에 들어서서 시를 쓰고 서점과 잡지사를 만들면서 자신의 가치관을 수립했다. 한편 그의 인생에서 전기적인 색채로 보면 미국 여작가 항미려와 한단락의 연애사가 있은 그 것이었다. 항미려의 원명은 에밀리 하은으로, 1905년 미국 중서부의 생루이 주에서 태어났으며 소현미보다는 한살 위었다. 그녀는 어릴적부터 독립성이 강했고 위스콘신 대학 광야금공업공정학부를 졸업한 뒤 이 학교의 첫 광야금공업공정부야 학위를 딴 졸업생으로 되었다. 에밀리 하은은 자기의 전업에 대해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오직 종래로 여학생을 모집하지 않는 이 학부에 도전해보았을 따름이었다. 졸업 후 에밀리는 자신이의 성격이 “오전 9시에 출근하고, 오후 5시에 퇴근하는 생활”에 적합하지 않음을 깨닫고는 직업을 포기, 아프리카 콩고의 열대우림에서 생활하면서 미국 뉴욕의 한 간행물에 글을 보내는 작가로 되었다. 1935년 에밀리는 중국 상해로 향하는 윤선에 올랐다. 상해에서 그녀는 재빨리 싸롱과 나이트클럽 등 밤무대의 총아로 되었다. 이 시기 에밀리는 이름을 항미려로 바꾸었고 소현미와 한단락의 로맨스를 엮기도 하였다. 하지만 레온사인의 황홀함 역시 그녀한테는 원시삼림의 유혹보다는 크지 못했다. 그녀 즉 항미려- 에밀리가 상해를 떠나기로 했던 그 시각, 소현미와 에밀리의 사랑도 막을 내렸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역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5-01-05
  • 장개석의 투항 유도하려 했던 모택동의 “실수”?
    1950년 5월 16일, 국민당군이 주산(舟山)에서 철거한 뒤 장개석한테는 금문도와 마조군도에 대한 수비문제가 골치거리로 나섰다. 당시 이 2개의 섬도를 사수하느냐 아이면 포기하느냐를 두고 국민당군 내부에서는 논쟁이 가시화되었다. 장개석과 국민당의 고위층은 확실한 계획을 잡지 못하였고 이 2개 섬의 백성들은 불안과 공포에 시달렸다. 바로 이 때 모택동과 중공은 이미 대만을 해방할 결심을 확정하였다. 중공중앙에서는 1950년의 해방군 임무를 해남도, 대만과 서장을 해방하고 이 경내의 국민당 잔여세력을 소멸하는 것이라고 명백히 규정하였다. 하지만 당시 외계에서 알지 못하고 있은 것은 모택동은 일을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하지 않은 바로 그 것이었다. 아울러 모택동은 장개석에서 회생의 길을 마련해 주려고 했었다. 당시 해방군이 한창 전쟁준비를 진행하고 있을 때 모택동은 적당한 인물을 파견하여 장개석과 접촉함과 동시에 평화담판의 가능성을 탐색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그 때 모택동이 선택한 인물은 장치중 장군이었다. 장치중 장군은 원 국민당의 고위관원으로서 육군 2급 상장이었고 선후로 호남과 신강 등 2개 성의 성주석이었으며 장개석의 위원장 비서실 주임까지 한적이 있었기에 장개석과 사인관계가 아주 밀접했다. 한편 그와 중공과의 관계 또한 양호하였는바 일찍 국민당을 대표하여 국공 양당간의 담판에도 수차례 참가하였었다. 1950년 3월 11일, 모택동은 화남지구에서 조용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장치중한테 “대만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데 관한 장치중 선생에게 보내는 전보”에서 “선생이 대만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사업에 참여하는 것이 매주 적합하고 중요할 것 같습니다. 희망을 버리지 말고 고심히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생각밖의 효과를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썼다. 그 뒤 3월 20일, 모택동은 재차 장치중한테 전보를 보내어 한번 만나 구체적으로 연구해보자고 제의하였다. 그리고 특별히 엽검영한테 지시하여 장치중의 경호사업을 잘할 것을 부탁하였다. 그 뒤 장치중이 북경으로 오자 모택동은 직접 중앙군위의 모 책임자를 배치하여 장치중의 경호사업을 책임지게 하였으며 한편 장치중과 회담하면서 일단 대만이 평화적으로 해방될 수만 있다면 장개석의 인신안전은 물론 기타의 정치와 행정분야에서도 출로를 마련해줄 수 있다는 것을 명백히 알려 주었다. 그러자 장치중은 모택동의 계획에 좇아 장개석한테 마지막 회생의 기회를 줄수 있는 내용을 편지에 담아 정성들여 썼으며 홍콩의 한 유명인사를 통해 편지가 대만의 장개석한테 전해지도록 부탁하였다. 헌데 이 편지가 장개석의 손에 들어간 것은 수개월 뒤인 7월 19일이었다. 국민당군이 주산군도에서 철수한 뒤 장개석과 대만의 군민들은 의연히 중공측에서 평화담판의 뜻을 갖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크나큰 공포와 긴장속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후에 원 국민당군의 장령이었던 주굉도는 장개석이 이 편지를 받았을 때의 정경을 다음과 같이 회억하였다. 1957년 7월 27일, 이 날은 한반도 내전이 발발한지 1개월이 되는 날이었다. 이날 장개석은 연회를 차려 국민당군의 여러 원로들을 청해서는 한국전에 개입할 뜻을 전달하였다. 연회도중 국민당 장령인 하응흠이 돌연히 장치중이 3월 16일에 쓴 편지가 7월 19일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공개하였다. 하응흠은 “67페이지에 달하는 이 편지는 참모총장 주치유를 통해 장개석한테 전달되었다가 19일 다시 나한테 보내졌다”면서 장개석은 당장에서 중공의 제의를 거절하였다고 밝히었다. 그러면서 하응흠은 장치중의 편지내용을 공개,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았다. 국민당은 10여년간 “공산비적토벌”에 나왔지만 정치의 부패로 필연적인 실패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현재 국공간의 힘을 비교해볼 때 인민해방군은 긍정코 대만을 해방할 수 있으며 아울러 국민당은 대만을 지킬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대만은 필연코 국민당의 무덤으로 될 수밖에 없다. 장치중은 편지에서 또 만약 위원장께서 원한다면 자기 자신이 홍콩에서 만날 수가 있으며 이 편지는 모택동의 동의하에 작성한 것이라고 밝혔다. …… 하응흠의 보고가 끝나자 진성, 장군, 오충신 등은 모두 이는 대만공격 전야에 있게 되는 중공의 상투적인 정치공세라고 하는 한편 장치중을 혁명의 배반자라고 하면서 마땅히 제재하여야 한다고 흥분해하였다. 주굉도는 그 때의 정경을 회상하면서 장개석이 당시 사적으로 편지를 처리하지 않고 하응흠더러 공개장소에서 읽게 한 것은 자신이 복국중임(复国重任) 을 짊어졌기에 자신이 중공한테 머리를 돌린다는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서였지 그한테 평화담판의 생각이 없은 것은 아니라고 인정하였다. 한편 장개석이 모택동의 평화담판제의를 거절한 것은 다른 두가지 방면의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한반도전쟁이 발발하고 대만을 돕지 않던 미국정부의 태도가 크게 전변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장개석 본인이 장치중과의 개인감정에서 크게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장치중으로 놓고 말하면 1949년 북평에서 있은 국공양당간의 평화담판시 북평에 간지 얼마 안되어 공산당쪽으로 기울어지면서 국민당내에서 공산당에 투항한 장령중의 일원으로 되어 장개석한테는 가장 큰 수치이기도 했다. 한편 장치중이 쓴 편지가 4월이나 5월에 대만에 도착했더라면 역사는 혹시 다르게 씌여질 수도 있었는바 이는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당시 해방군은 주산군도와 해남도를 해방한 후 즉시 대만에 대한 공격준비를 다그쳤다. 당시 해방군은 화남 각지에 30개에 달하는 군용비행장을 수건하여 400대의 전투기가 이미 비행장에 진입했으며 복주, 하문, 산두 등 항구에 대량의 등륙정 및 기타 군함을 배치해 놓고 출항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장개석 등 국민당 수뇌부는 7월경에 이르러 대만해협의 풍랑이 적게 일 때 중공의 수십만 대군이 해협을 건너오면서 공격을 개시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다. 또한 당시 5월말의 대만은 완전히 미국의 “제28호 특별명령”에서 지적한 것처럼 “모두들 이 섬이 곧 함몰되고 중화민국이 섬도에서 기타 지구와 마찬가지로 쉽게 공략된다”고들 했다. 한편 5월 27일, 대북의 “중앙일보”는 사론을 발표하여 대만이 이미 전례없는 위기가 도래하였다고 승인, “중앙일보”의 이사장 동현광 역시 “중국이 이미 이 지경에 도달했으니 오직 의지상의 기적만이 이를 만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 와중 오직 장개석만이 매우 견정했다. 당시 장개석은 “만약 대만을 지키지 못해도 나는 절대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이미 “살신성인(杀身成仁)”의 각오를 가졌다고 한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만약 당시와 같은 사태가 재차 벌어져 모택동이 장치중이 아닌 다른 사람한테 위탁해 “살신성인”이 지경에 이른 장개석에게 편지를 쓰고 또한 한반도 전쟁같은 “대사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 결과의 역사는 긍정코 다시 씌어질 수도 있겠다는 결론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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