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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멕시코 남부 해안 시신 8구 정체는... “아시아계 이민자일 수도”
    [동포투데이] 멕시코 남부 오악사카주 검찰은 29일 남태평양 해안 샌프란시스코 델마르 비센테 해변에서 시신 8구와 생존자 1명이 발견됐다고 밝혔다. 조사 결과(잠정) 이들은 아시아계 이주민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오악사카주 검찰의 조사에 따르면 선박이 오악사카로 향하던 중 사고를 당했으며 구조된 한 남성이 사고 생존자라고 주장했다. 이 남성이 제시한 신분증을 근거로 이 남성이 이민자일 가능성이 있다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검찰은 사고에 대한 추가 조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시신이 발견된 곳은 오악사카주 샌프란시스코 델 마르의 한 해변으로 이민자들이 미국행을 시도하는 단골 코스다. 공식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멕시코를 건너려다 체포된 이민자 중에는 중국, 인도, 우즈베키스탄 국민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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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31
  • 英 경제, 2023년 하반기부터 불황…1인당 연간 GDP 0.7% 하락
    [동포투데이] 영국 통계청(ONS)이 28일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4분기 영국 경제는 전년 대비 0.3%, 2023년 3분기는 전년 대비 0.1%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두 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은 영국 경제가 기술적 불황에 빠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고서는 2023년 영국 경제가 연간 0.1% 성장하는 데 그쳐 2009년 이후 가장 약한 모습을 보였다고 전했다. 영국의 1인당 GDP는 2022년 초 이후 성장이 없었고 2023년 4분기에는 0.6%, 2023년 연간으로는 0.7% 감소했다. 리즈 매키온 영국 통계청 경제통계국장은 영국과 다른 지역의 기본 국제수지 적자가 2023년 말 확대돼 2023년 4분기 경상수지 적자는 총 211억8000만 파운드(약 1930억 원)로 GDP의 3.1%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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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31
  • 美 연방정부, 볼티모어 대교 재건에 6천만 달러 배정
    [동포투데이] 미 연방정부는 26일 선박과 충돌해 붕괴된 볼티모어의 프랜시스 스콧 키 대교 재건에 6000만 달러를 배정했다. 보도에 따르면 웨스 무어 메릴랜드 주지사는 연방정부에 6000만 달러를 요청했고, 미 연방도로청은 이를 승인했다. 로이터통신은 경제 분석 회사의 예측을 인용해 이 대교의 재건 비용이 6억 달러로 잠정 추정된다고 밝혔지만, 더힐은 소식통을 인용해 연방 관리들이 메릴랜드주 의원들에게 재건 비용이 최소 20억 달러까지 치솟을 수 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26일 싱가포르 국기를 단 컨테이너선이 볼티모어 프랜시스 스콧 키 다리와 충돌하면서 다리가 붕괴돼 8 물에 빠졌고 그중 2명이 구조됐다. 26일 밤 미국 해안경비대는 실종자 6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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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31
  • 美 샴쌍둥이 중 한 명 결혼, 가족사진 공개
    [동포투데이] 애비 헨셀(34세)과 브리트니 헨셀(34세)은 미국의 유명한 결 쌍둥이 자매이다. 이들은 6세 때부터 미국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했으며, 그들의 경력은 다큐멘터리 '평생을 함께'에 담겼다. 두 자매는 사생활에 대해 매우 조용한 편이다. 애비의 2021년 결혼 발표는 현지 시간으로 3월 27일에 공개되었다. 보도에 따르면 애비는 2021년 조쉬 볼링과 결혼식을 올렸다. 애비와 브르타니는 미네소타주 조쉬의 고향으로 이사했으며 세 사람은 조쉬의 여덟 살짜리 딸 이사벨라와 함께 새 가정을 꾸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가족은 훈훈한 생활 모습을 많이 남기고 있으며, 앞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다. 조쉬는 남자 간호사로 소셜미디어에 자신을 '아버지, 재향군인, 간병인'이라고 소개했다. 1996 년 초 미국의 '오프라 윈프리 쇼' 프로그램 팀이 두 자매의 집을 찾았는데 미국의 많은 TV 시청자들이 '그들의 성장을 지켜봤다"고 말할 수 있다. 2006년, 막 16살이 된 자매들의 인터뷰를 담은 다큐멘터리가 제작됐고, 2012년에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공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애비와 브리트니는 "세상이 우리가 누구와 사귀고 있고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알 필요는 없다"며 연애 생활을 비공개로 유지하고 싶다고 말했다. 당시 방송에서 이들은 임신과 출산이 두 사람 사이의 정신적·생리적 상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알 수 없지만 엄마로서의 느낌을 경험하고 싶다고 밝혔다. 이들 자매는 머리가 두 개인 샴쌍둥이다. 태어날 때 몸통은 융합되어 척수, 뇌, 심장 등 각각 별도의 장기를 가지고 있지만 허리 아래의 기관은 둘이 함께 공유한다. 브르타니는 몸의 왼쪽 움직임을 제어하고 애비는 오른쪽 움직임을 제어한다. 2012년 버트랜드 대학을 졸업한 두 자매는 최근 몇 년 동안 고향의 한 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며 애비는 주로 수학을, 브리트니는 영어와 미술을 가르치고 있다. 두 자매는 소셜 미디어 계정을 공유하지만 근로 계약을 체결할 때는 각각 별도의 계약서에 서명해야 한다. 자매의 어머니는 임신했을 당시에는 둘 중 한 명만 생존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쌍둥이 자매는 모두 살아남았다. 자매가 성인이 되면 이론적으로는 수술로 분리할 수 있지만, 부모는 더 '완벽하고 충실한' 삶을 위해 함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애비와 브리트니는 "우리는 함께 소프트볼을 하고, 달리기를 하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싶은데, 헤어지면 이 모든 것을 함께 경험할 기회가 없을 것"이라며 이 결정에 동의했다. 자매는 자신들이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일부 사람들의 지나친 호기심 어린 시선, 특히 사람들이 공공장소에서 허락 없이 그들을 향해 사진을 찍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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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31
  • 中고고학연구소, 고대 제왕의 모습 복원
    [동포투데이] 푸단대 과학기술고고학연구소와 산시성 고고학연구소가 28일 북주 무제 우문옹(宇文邕·543~578)의 두상 '복원도'와 관련 고고학적 성과를 공식 발표했다. 고대 제왕의 모습을 과학기술 고고학 방식으로 복원해 역사에 신선한 기운을 불어넣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선비족 출신인 우문옹은 중국 북방을 통일한 뒤 '돌궐과 강남 평정'을 야심차게 준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나 지금의 산시성 함양시 효릉에 합장했다고 사서에 기록돼 있다. 중국 고대 제왕의 모습을 복원하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은 고대 제왕의 완전한 두개골과 고품질 유전체 데이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1994년부터 1995년까지 산시성 고고학연구소와 함양시 문물고고학연구소는 효릉의 구조 발굴에 성공해 우문옹의 두개골과 지골, 천원황태후새를 발견해 선비족 제왕의 신원을 명확히 했다. 푸단대 과학기술고고학연구소는 고대 DNA에 특화된 포획 탐침으로 북주 무제의 지골 샘플에서 약 100만개의 사용 가능한 유전자 위치를 획득해 북주 무제의 머리카락, 피부, 동공 등 주요 특징을 복원했다. 6년간의 반복적인 시도 끝에 마침내 용원용의 초상화가 '그려졌다'. 복원된 우문옹의 모습은 검은 머리, 노란 피부, 갈색 눈을 갖고 있어 전형적인 동북아시아 및 동아시아인의 외모와 일치하며, 무성한 수염과 머리카락, 노란 머리카락, 높은 코와 깊은 눈을 가진 선비족의 외모에 대한 사람들의 상상과는 매우 다르다. 우문옹의 모습은 당나라 화가 염입본에 의해 '역대 제왕도'에도 그려졌다. 염입본이 그린 북주 무제 우문옹은 풍만하고 통통한 체구였지만 복원된 우문옹의 모습은 마르고 수척했다. 연구팀은 “북주 무제의 족보를 보면 그의 조모 왕씨가 북방 한족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며 “선비족의 형성은 다민족 통합의 역동적인 과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북주 무제 우문옹의 모습 복원과 관련해 푸단대 역사학과 교수는 남북조는 중국 역사에서 영향이 깊은 민족 대통합 시기로 과학기술 고고학은 관련 역사 연구의 증거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중화민족의 다원적 일체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켰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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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31
  • 브렉시트 '후유증' 240만 영국인, 유럽 입국 못 할 수도
    [동포투데이] 브렉시트 이후 여권 규정에 따라 수백만 명의 영국인들이 유럽 입국이 금지될 예정이다. 이러한 규정은 다가오는 부활절 연휴 동안 혼란을 야기할 것으로 보인다. 휴가철 여행 붐이 28일부터 본격화됨에 따라 240만 명의 여행자가 소지한 증명서가 유효기간 요건 변경으로 EU행 일정에 사용되지 못할 것으로 추정된다. 브렉시트 이후 영국인이 소지한 여권은 EU 입국일로부터 10년 이내에 발급된 것이어야 하며 영국으로 귀국하려는 날짜로부터 최소 3개월 동안 유효해야 한다. 그러나 2018년 9월 이전에 발급된 수백만 개의 여권은 유효 기간이 더 길다. 3월 27일 영국 인디펜던트에 따르면 영국 공항에서는 매일 약 200명의 여권이 이 요구 사항을 준수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으며, 앞으로 수천 명이 다가오는 여권 규정 위반으로 인해 휴가를 망칠 것으로 예상된다. 이 같은 규정 변경은 영국이 EU와의 브렉시트 합의 이후 '제3국' 범주에 포함돼 베네수엘라나 사모아와 마찬가지로 EU 회원국과 다른 여권 유효기간 규정이 적용되면서 발생했다. 이는 EU로 여행하는 영국인이 이전에 EU를 여행할 때 동일한 여권을 사용했더라도 공항, 페리, 기차를 통한 여행이 금지된다는 의미다. 부활절 연휴는 영국에서 유럽으로 떠나는 여행자가 64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본겯적인 여행 시즌으로 부활절 긴 주말에만 160만 명이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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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9
  • 백두산, 중국명 '창바이산'으로 세계지질공원 등재
    [동포투데이] 3월 27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집행위원회 제219차 회의에서 중국이 신청한 창바이산(백두산), 푸젠 룽옌, 장시 우궁산, 후베이성의 엔시 대협곡-텅룽동 동굴 지질공원, 구이저우 싱이, 간쑤 린샤 등 6개 지질공원이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공식 지정됐다. 이로써 중국의 세계 지질공원은 47개로 늘어나 세계 1위를 이어가고 있다. 세계지질공원은 세계유산, 인간과 생물권 보호구역과 함께 유네스코의 3대 주력 브랜드로 꼽힌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중국의 세계 지질공원은 국제적 가치가 있는 지질 유적을 보호하고, 지역의 독특한 자연 유적과 문화유산을 활용하며, 지속 가능한 사회경제 발전을 촉진한다는 측면에서 현지 상황과 지역 특성에 맞는 보호 및 활용 방식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다고 전했다. 중국의 6개 신규 세계지질공원은 독특한 가치와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길림성 동남부에 위치한 창바이산 세계지질공원의 면적은 2,723.8평방킬로미터에 달하며 주로 거대 복합화산구와 용암단구 등 화산지형과 구조적 침식지형, 유수지형을 특징으로 한다. 또한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산지 수직분포를 보이고 있으며 공원 내 야생 동식물 자원이 풍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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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8
  • 日 고바야시제약 '붉은 누룩' 건강기능식품, 2명 사망·수백명 입원
    [동포투데이]일본 고바야시제약회사의 '붉은 누룩'이 함유된 건강기능식품 판매로 인한 건강 문제로 현재까지 2명이 사망했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문제의 제품을 섭취한 후 100명 이상이 병원에 입원했다. 일본 당국은 소비자들에게 해당 건강보조식품의 섭취를 즉시 중단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일본 후생노동성이 화요일(3월 26일) 고바야시제약에 대해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베니 코지 콜레스테 헬프 보충제로 인한 사망자가 한 명 더 발생했다고 밝혔다. 오사카에 본사를 둔 고바야시제약은 1886년에 설립된 일본의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제약 회사이다. 수요일(27일) 오사카시는 고바야시 제약에 대해 행정 제재를 내리고 베니 코지 성분이 함유된 제품 3종을 회수하도록 명령했다. 오사카시 건강증진과의 가메모토 케이코 보건국장은 기자회견을 열고 "문제의 제품에 대해 회수를 명령했으며, 해당 제품으로 인한 건강 위해의 원인을 철저히 조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NHK 방송은 쌀 등 곡류에 아스퍼질러스 에리스로히주스라는 곰팡이를 증식시켜 만든 제품인 붉은 누룩은 예로부터 (일본에서는) 식용 색소로 사용되어 왔다고 보도했다. 붉은곰팡이의 구성 성분인 로바스타틴은 콜레스테롤을 낮추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반면에 누룩 곰팡이는 시트러스라고 불리는 곰팡이독소를 만들어내는데, 이 독소가 콩팥병을 일으킬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고바야시제약은 자신들이 사용하는 균주는 시트리닌을 생산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2월에 모든 원료 배치에 대한 분석에서 시트리닌이 검출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고바야시는 건강 관리 제품뿐만 아니라 식품의 착색제 및 향료로도 붉은 누룩을 생산한다. 지금까지 약 52개의 에이전트에 공급한 이 회사는 대만 기업에만 해외 수출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 40대 여성은 건강검진 결과 콜레스테롤 수치가 너무 높다는 진단을 받고 지난해 10월부터 '레드 코지 콜레스테롤 헬프'를 복용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2주 정도 지나자 콜레스테롤 수치가 떨어졌기에 많은 양을 구입해 하루에 3캡슐씩 복용했다. 현재 건강 상태에는 변화가 없지만 검진을 받을 계획이다. 오사카 응급종합의료센터 신장고혈압과 하야시 코마사 과장은 "일부 사용자의 증상은 약물유발 세뇨관간질질환과 유사하다"며 사용자들에게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을 것"을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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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8
  • “IS가 테러 배후?” 러시아, 미국의 주장에 의문 제기
    [동포투데이] 러시아는 월요일(3월 25일) 모스크바 외곽 크로쿠스 콘서트홀 테러 공격의 배후가 이슬람국가(IS)가 소행이라는 미국의 주장에 대해 의구심을 표명했다. 로이터통신은 지난 3월 22일 모스크바 외곽 크로쿠스 콘서트홀에서 유혈 테러가 발생해 137명이 사망하고 182명이 부상했다고 전했다. 이는 2000년 이후 러시아에서 발생한 최악의 테러참사이다. IS는 이번 공격이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고, 미국도 이를 믿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미국 당국자들은 이달 초 극단주의 단체가 러시아에 대한 공격 가능성을 경고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IS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테러범들이 우크라이나로 도피하려 했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 측은 테러와의 연관성을 부인했고, 젤렌스키 대통령은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거론하며 책임을 돌리려 한다고 비난했다. 자하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은 이번 테러의 배후에 IS가 있다는 미국의 주장에도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에 게재한 기고문에서 "백악관은 IS가 맞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라고 일침을 날렸다. 자하로바는 미국이 키예프를 감싸기 위해 이슬람 국가를 '괴물'로 유포하고 있다며, 1980년대 소련군에 맞서 싸운 '무자헤딘' 전사들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상기시켰다. 모스크바 바스마니 지방법원은 24일(현지시간) 크로쿠스 콘서트홀 테러 공격에 가담한 혐의로 남성 4명을 테러범죄 혐의로 기소했다. 4명 모두 타지키스탄인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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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우크라이나
    2024-03-25
  • 마크롱 “우크라이나 곧 붕괴될 것”
    [동포투데이] 폴리티코 유럽판은 3월 21일 소식통을 인용해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엘리제궁에서 있은 사적인 대화에서 "우크라이나가 곧 붕괴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라고 보도했다. 회담 관계자는 마크롱 대통령은 “논의가 많지만 실제로 필요한 것은 동원”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몇 주 전 키예프를 위해 싸우던 프랑스 국민 다수가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으로 사망한 후 마크롱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언급을 늘렸다. 앞서 2월 26일, 마크롱은 처음으로 우크라이나 파병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이날 파리에서 많은 서방 국가들이 참여한 가운데 '우크라이나 지원 국제회의'가 열렸다. 이후 기자회견에서 마크롱은 각국이 우크라이나에 군대를 파병할지 여부에 대해 합의에 이르지 못했지만 향후 지원을 위해 파병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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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3

사람들 검색결과

  • 18세 저우쉰의 마네킹 그림, 그것은 예술을 위한 그녀의 헌신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얼마 전 TV 드라마 ‘완벽하지 않은 그녀(不完美的她)’가 중국 국내에서 히트, 저우쉰(周迅)만의 독특한 기품과 선명한 이미지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고도 남음이 있었다. 지금도 저우쉰은 연예계에 자주 등장, 그럼 오늘은 그녀의 그제 날 이야기를 알아보기로 하자. 저우쉰, 1974년 저장(浙江)에서 태어난 저우쉰은 어릴 때부터 영화배우를 좋아했고 스크린에 나오는 게 그녀의 꿈이었다. 마침 아버지는 당시 영화관의 방영원이라 영화를 좋아하는 어린 저우쉰을 영화관으로 늘 데리고 다녔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저우쉰은 중학교 명문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예술학교를 선택, 민속춤을 배운다는 사실에 부모님을 놀라게 했지만 부모님은 인차 그녀의 선택을 존중했다. 한편 저우쉰은 학창시절부터 친구들과 함께 사진을 찍어서는 자신의 얼굴을 달력에 곧 잘 나타내곤 하여 당시 아주 작은 명성을 얻기도 했다.  언젠가 세테리(谢铁骊)란 촬영사가 고분황재(古墓荒斋)’를 촬영할 때 저우쉰더러 합작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당시 그녀는 거절, 후에 세테리가 저우쉰의 공부를 도와주겠다고 약속해서야 그녀의 동의를 얻어냈다.  또한 저우쉰은 달력을 찍을 때부터 늘 레이밍(雷鸣)과 함께 있었지만 레이밍은 전형적인 남성주의자여서 저우쉰이 모델 등 작품을 찍는 것을 단호히 반대했다. 하지만 저우쉰은 마음속에 오직 꿈만 있었다. 결국 레이밍은 그녀를 설득하지 못하자 두 남녀는 즉시 헤어져 연락이 끊어졌다. 1992년, 18세의 나이로 모델분야에 데뷔한 저우쉰은 꿈을 위해 마네킹(人体模特)을 선택했다. 소녀 시절 저우쉰은 청순함과 볼 살 한 가닥으로 강남 여자의 특징을 잘 살렸다. 화백은 판훙하이(潘鸿海) 선생으로 당시 그는 세계적으로도 좋은 명성을 갖고 있었다. 일찌감치 저우쉰의 저력을 보아낸 판훙하이선생은 일찍부터 저우쉰의 앞날은 창창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저우쉰은 손님에게 물을 따라주다가 실수로 자신의 다리에 뿌렸는데요. 하지만 그녀는 살짝 닦고 여유롭게 계속 물을 따랐어요.”  판훙하이는 이런 저우쉰의 여유작작한 자태가 앞으로의 성공을 이끈 건지도 모른다고 회고했다.  판훙하이한테서는 성공한 작품들이 많이 나왔다. 특히 판훙하이는 많은 유화작품으로 저우쉰의 강남여성을 잘 그려냈다. 그리고 판훙하이가 그린 작품에는 저우쉰이 초지의 들판과 냇물을 배경으로 모델을 선 작품이 많았다. 당시나 지금이나 소중한 작품들이라 판훙하이의 유화작품은 많은 소장가들의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  판훙하이의 작품 중에는 반쯤 벗은 채 옹기동이를 안고 있는 저우쉰의 작품도 있다. 이는 당시의 미적 예술과 잘 맞아떨어져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추천을 받고 있다. 유화 ‘햇빛 아래의 소녀(阳光下的少女)’는 184만 위안, ‘외할머니의 다리(外婆桥)’는 165만 위안, ‘먼 옛날의 바람(远古的风)’은 80만 위안에 팔렸다. 후에 저우쉰은 이 일을 별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는 저우신과 화가의 예상을 뒤엎은 것이었다. 당시 저우신은 예술을 위해 헌신한 것이지 많은 돈을 벌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소식통들은 전했다. 1991년부터 2000년 사이에 저우쉰의 인생길은 여전히 힘든 여정이었다. 1993년 저우신은 술집에 가서 노래를 불렀다. 당시 그녀는 손님들한테서 술 접대부 취급을 받았다. 저우쉰은 감정생활이 매우 복잡하지만 당시에도 매우 원칙적인 여자인지라 단번에 거절하는 바람에 깡패에게 입 주위를 두 번이나 얻어맞기도 했다. 2000년 이후 저우쉰은 큰 명성을 얻기 시작했고 관객들에게 좋은 영상물을 많이 남겼으며 영화스타로도 평가받으면서 천지개벽의 변화를 가져왔다. 지금의 저우쉰은 인생의 성공자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거기에는 그녀가 모델로 선 유화작품들도 매우 큰 예술적 자산이 되었다.
    • 사람들
    2021-06-15
  • 中 '외교의 꽃' 미녀 대변인 - 화춘영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중국의 외교부는 긴장하고도 엄숙하며 또한 민감한 부문이다. 이러한 부문에서 근무한다는 건 분명 영광스럽고도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자랑스럽기에 앞서 자아관리를 철저히 해야 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 기민하고도 지혜로워야 하며 웅변능력 또한 비범해야 가능한 일이다. 아래에 소개되는 여성은 바로 웬간한 남자들도 능력의 한계를 느낀다는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의 일꾼, 그것도 외교부 대변인이다. 까다롭기도 하거니와 쩍하면 넘겨짚기를 잘하는 중외 기자들 앞에서 때로는 침착하게, 때로는 날카롭고도 당당하게 또한 어떤 경우에는 상냥하고도 겸허하게 기자들 앞에 나서는 그녀 - 화춘영(华春莹)은 지금까지 아주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1970년 화춘영은 중국 강소 회안의 한 간부의 가정에서 태어난 화춘영은 별로 간부가정의 자녀라는 우월감을 별로 느끼지 못하며 자랐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단발머리를 하기 좋아했으며 늘 얼굴에 웃음기를 담고 있는 친절하고도 예의가 바른 소녀였다. 중학교 시절, 화춘영은 학습 성적이 돌출한 편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남한테 뒤지는 편도 아니었다. 당시 그녀는 남자애들이 즐기는 축구운동을 좋아했으며 고중입시를 앞두고는 여학생들을 이끌고 남녀 축구 대 항전을 치르기도 했다고 한다.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고나 할까? 선생님과 동창생들의 눈에는 조용하고도 기타 사심이 없어 보이는 화춘영 - 그한테는 조용한 가운데 강인한 일면이 있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 그녀는 대학교 숙소의 ‘영춘화(迎春花)’로 불렸지만 대학교 4년간 그녀는 연애 한번 해보지 못한 극소수 여학생 중의 한명이었다. 이렇게 아련한 것 같으면서도 강한 일면이 있고 또한 다른 측면으로 보면 부드럽기도 한 것이 화춘영의 과거의 주소라면 후에 외교관이 된 다음의 화춘영은 강자 앞에서는 약하지 않고 약자 앞에서는 또한 절대 강하지 않는 것이 외교부 대변인으로서의 현주소였다. 2012년 11월 19일, 당시 42세가 되는 화춘영이 중국외교부 브리핑 장소에 나타나자 장내는 삽시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단발머리 미녀가 외교부 대변인의 신분으로 나섰으니 말이었다. “드디어 중국에도 미녀외교관이 나타났군 그래.” “그래그래, 미녀이면서도 어딘가 카리스마가 있어” 한편 화춘영의 언변과 실력에 대해 시험대에 올려 보려는 외신 기자들도 없지 않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엉뚱한 속셈을 가졌던 외신기자들도 눈알이 동그랗게 되면서 잠잠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때로는 부드럽고 때로는 날카롭다가도 다시 친절한 화춘영의 언어실력은 장내의 분위기를 이끌어 가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긴 화춘영은 외교부에 갓 입문한 햇내기가 아니라 이미 거의 20년간 외교전선에서 단련된 외교능수라는 것을 외신기자들이 어떻게 알 수 있었으랴. 사실 화춘영이 중국 외교부에 첫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93년이었다. 외교부에 입문한 화춘영은 선후로 서 유럽사(司) 과원, 주 싱가포르 대사관 수행인원, 3등비서, 외교부 서 유럽사 3등비서, 부처장, 주 유럽연맹 사절단 2등비서, 1등비서, 참사관, 외교부 유럽사 참사관 등 직에 머물다가 2012년 강유(姜瑜)에 이어 중국 외교부 보도 사 부사장으로 되었다. 그리고 그 해 11월 중국외교부 대변인으로 부임, 중국외교부가 대변인 제도를 건립한 이래 모두 5명의 여성대변인이 탄생했다. 역대 중국외교부의 여성대변인들로는 각각 이금화(李金华), 범혜연(范慧娟), 장계월(章启月), 강유와 화춘영이었다. 알려진데 의하면 화춘영이 외교사업에 종사한 28년 간 유럽사 및 유럽, 아시아 지구에서 근무하면서 비교적 풍부한 외교경험과 양호한 소통능력을 키웠으며 외교부 대변인으로 되기에 매우 합당한 인선이 되었던 것이다. 화춘영은 늘 “나는 최선을 다 하여 모든 이들을 도와 적시 적이고 정확하며 또한 전면 적으로 중국의 외교정책을 요해하게 하는 동시에 나 역시 모든 이들과 진정으로 소통하고 평등하게 교류하며 그리고 양호하게 합작하는 것으로 중국과 세계와의 상호 요해와 이해, 신입과 합작을 추진하기에 적극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하군 했다고 한다. 화춘영은 진실로 그렇게 했다. 2012년 11월 16일, 화춘영은 중국외교부에서 개최한 정례브리핑이 거의 마무리가 될 무렵에 중국외교부의 신임대변인의 신임으로 기자들 앞에 나타났다. 그 때 그녀는 외교부의 제 27번째 대변인이자 5 번째 여성대변이기도 했다. 당시 자기의 어깨위의 책임이 중대함을 느꼈다고 한다. 당시 화춘영은 중국과 세계의 관계는 한창 심각한 조정 시기에 있으므로 중국은 세계를 더욱 많이 요해해야 하며 세계 또한 중국을 더욱 많이 요해해야 한다고 표했다. 이어 11월 19일, 화춘영은 정식으로 중국외교부의 정례 브리핑을 주최, 브리핑에서 화춘영은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연임 후 첫 출국방문이 아시아태평양 지구를 선택한 것과 중국공산당 제 18 차 당 대회 이래의 중국의 외교정책 등에 관한 기자들의 물음에 답하면서 논리성이 강한 그녀의 답변과 막힘없는 화술구사는 모든 기자들의 찬탄을 자아내면서 중국의 젊은 여 대변인의 매력과 풍격을 충분히 과시하였다. 그 이튿날 중국 홍콩의 한 매체는 당시의 정경을 두고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11월 19일 오후, 외교부의 신임대변인 화춘영이 첫 브리핑을 주최, 20분도 채 되지 않은 짧은 시간 내에 화춘영은 선후로 10명에 달하는 중외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을 주었다. 중일관계로부터 시작하여 미국의 아시아 태평양 지구 전략 및 향후 어떻게 매체를 대하겠는가 하는 것을 두고 경외 기자들은 불쑥불쑥 ‘도전적’이고도 민감한 문제에 대해 질문을 쏟아냈으나 신임대변인 화춘영은 기민하고도 자유자재로, 개방되고도 솔직하게 답했으며 난감한 문제들에 대해 회피하지 않고 대범하고도 상세하게 답변하여 모든 기자들의 긍정을 받았다. 브리핑이 끝난 후 화춘영은 웃음기가 어린 얼굴을 하고는 처음으로 발언대에 올라 기자들한테 진심으로 소통하고 평등하게 교류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 뒤로부터 중국과 외국의 매체의 기사들에는 중국외교부 대변인 화춘영이란 이름이 자주 오르내리면서 그 이름은 지구촌 방방곳곳에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화춘영은 외교부 대변인이란 본직에는 물론 다른 분야에서도 남다른 모범을 보이어 2020년 1월 1일, ‘중국부녀’ 편집부로부터 ‘2019년 10대 여성인물’로 평선 되었고 2020년 9월 8일에는 전국 코로나 19 대응 선진개인 및 전국 우수 공산당원으로 선정 되기도 했다. 현재 화춘영은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 보도사(司) 사장직에서 근무하고 있는 걸로 알려지고 있다.
    • 사람들
    2020-10-20

오피니언 검색결과

  • 국가의 결심, 인민의 호응과 단결 - 코로나 19 전승의 촉매제④
    (전번 계속) 우한에서의 첫 조사 자료를 얻은 후 전문가 팀 성원들은 코로나 19는 누군가의 전파에 의해 확산된 현상이라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일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우리는 즉시 우한 사람은 우한을 떠나지 말 것과 외지 사람은 우한으로 가지 말 것을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전문가 팀 성원들의 회억이었다. 1월 20일 아침 일찍 6명의 고급별 전문가들은 베이징의 중남해로 들어가 직접 결책 층과 대면하여 코로나 19에 대한 판단과 의견을 회보하였다. 당일의 국무원 상무회의는 전문 코로나 19를 예방 통제할 데 관한 포치 의정으로 진행, 중난산(钟南山), 리란줸(李兰娟) 등은 요청에 의해 열석했으며 아울러 코로나 19의 예방 통제 및 환자 구급 등에 대해 구체적인 건의를 했다. 이는 코로나 19 만연 국세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전환점으로 되었다. ▲우한방창병원(方舱医院)ⓒ신화사 1월 20일, 시진핑(习近平) 총 서기는 코로나 19 만연 국세를 두고 중요한 지시를 내리면서 인민대중의 생명안전과 신체건강을 첫 자리에 놓고 코로나 19의 만연 국세를 견결히 억제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 날 오후, 중국 국가 위생 건강 위원회는 고급별 전문가 팀을 조직하여 브리핑을 열었고 브리핑에서 팀장 중난산은 엄숙한 어조로 “현재 모든 것을 밝힐 수 있는바 이번의 이 전염병은 누군가에 의해 전파된 현상이란 것을 긍정할 수 있습니다”라고 증언하였다. 당시는 한창 중국의 가장 큰 전통명절인 춘제(春节) 기간인지라 인구가 큰 범위로 밀집 이동하고 있었다. 특히 우한은 춘윈(春运)의 중추 위치에 있는지라 9개성으로 사통 발달했기에 인구유동의 집산지이기도 했다. 전염병 예방과 통제, 용단을 내려야 할 때는 과감히 용단을 내려야 1월 20일, 중국 국가 위생 건강 위원회는 공고를 발부하여 코로나 19를 전염병 방치법규의 규정에 따라 을 급류 전염병에 규합, 갑 급류 관리를 실행하기로 했다. 그리고 국가 위생 건강 위원회가 앞장서고 30개 부문이 포함되어 연방연공사업기제(联防联控工作机制)를 성립하였다. 이와 동시에 중국은 적시 적으로 세계의 해당 국가와 국제조직에 통보하여 해당 정황을 교류하였다. 1월 하순 이래 시진핑 주석은 여러 나라 정부요원 및 국제조직의 책임자들과 수차 통화하거나 회견하는 등 형식으로 밀접한 소통을 유지하면서 중국의 코로나 19 예방 통제 상황을 공유했으며 중국인민이 일치하게 단결하여 ‘전염병’과 박투하는 견정한 결심을 전해 주었다. 코로나 19의 흉악하고 위험한 정도 인간의 예측을 훨씬 추월하였다. 우한 진인탄 병원(金银潭医院)의 중환자실(ICU)에는 호흡장애로 입원한 중증환자들로 가득 찼다. 환자는 급증하고 바이러스 감염 진단 키드가 엄청 부족한 상황에서 수많은 의심환자들은 적시 적으로 검사를 받을 수가 없었다. 병원에서는 확진할 수 없고 집으로 돌아가면 집식구들한테 전염될까봐 두려워 많은 사람들은 사처로 도주하기 시작, 괴로움과 공포에 시달리는 사람들 ㅡ 이들 또한 거대한 유동 전염 원의 대 군체로 되었다. 폭풍우의 중심으로 된 후베이(湖北)와 우한은 대뜸 긴급 ‘전시상태’로 진입하였다. 1월 22일, 후베이 성에서는 중대돌발 공공위생 사건 Ⅱ급 긴급 경보를 가동하였으며 2일 후에는 그것을 Ⅰ급으로 상향 조정하였다. 1월 23일, 우한 시는 당 중앙의 결책포치에 따라 우한의 모든 통로를 봉쇄하였다. 이는 아주 어렵고도 힘든 중대 결정이었다. 중국의 춘윈이란 인류의 가장 큰 대규모 인구 이동시기에 인구가 1000만 명을 초과하는 현대화의 대 도시를 ‘봉쇄’하기로 한 결책 자들이 받는 압력은 전례 없는 것이었다. “이 결책을 내리기까지 거대한 정치적 용기가 필요하였다. 하지만 용단을 내려야 할 때는 반드시 용단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반대로 우물쭈물하다가는 더 큰 재난을 당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시진핑 총 서기의 말이었다. 인류세계와 바이러스 세계와의 한 차례 새로운 전쟁에 직면하여 14억 인구를 가진 중국은 아무런 우려도 없이 선참으로 저격 전을 벌였다. 1월 23일부터 30개 성, 자치구와 직할시에서 선후로 ‘중대 돌발 공공위생 사건 I급 경보’를 발령했고 각 사회구역마다 예방 통체 조치를 낙실하고 온라인화를 실행했으며 융단 식 관리에 들어갔다. 2020년 춘제 연휴기를 연장, 각 대학을 비롯한 고등학교와 중소학교에서는 개학을 미루었고 중국의 ‘양회(两会 - 전국인대와 전국 정협 회의)’ 또한 미루어 소집하기로 했다… 시진핑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중국공산당의 견강한 영도 하에서 각지에서는 ‘대외적으로는 바이러스 유입을 방지하고 내부적으로는 확산을 방지’하는 조치를 취하면서 가장 전면적이고, 가장 엄격하며, 가장 철저한 전국적 규모로 되는 코로나 19 예방 통제 ‘전역’을 펼쳤다. 하나의 도시를 격리하여 하나의 나라를 보호하기 중국의 전례 없는 이 전염병 예방 통제의 거동은 세계 각국에 보내는 가장 명확한 경고신호이기도 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마귀이며 우리는 절대 마귀가 은닉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는 1월 28일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베이징에서 세계위생조직 사무총장 탄데세를 회견하였을 때 한 말이다. 한편 세계 각국에서는 중국의 코로나 19 예방 통제 거동에 대해 고도로 주목했다. 영국의 로이터 통신, 타임스 등 언론들은 우한의 통로를 봉쇄하는 현대의학사상의 첫 시험대라고 긍정적인 평가를 했지만 어떤 언론들을 전문가들의 입을 빌어 ‘도시봉쇄’의 유효성은 아직 증거가 없으며 격리는 공포를 인기시켜 의료자원의 긴장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걱정하기도 했다. (다음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9-20
  • 국가의 결심, 인민의 호응과 단결 - 코로나 19 전승의 촉매제③
    ▲2월 2일, 중국공군은 8대의 대형운수기를 출동시켜 군대의 후베이 지원팀을 우한 텐허 비행장에 수송하였다ⓒ신화사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1월 2일, 후베이 성에서 보낸 병례 샘플을 받은 후 중국 질병통제 센터 생물안전 수석 전문가 우구이전(武桂珍)과 바이러스 병 연구소 탄원제(谭文杰) 연구팀 그리고 자오샹(赵翔) 연구팀은 즉시 바이러스가 유전되는 ‘비밀번호’ 해독에 투입되었다. 2개 연구 팀이 릴레이를 하듯 주야로 실험하고 연구한 결과 24시간 뒤 드디어 바이러스 전체의 유전체 서열이 해명되었다. 유전체 대비 결과에 따르면 이 바이러스와 이미 알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는 차별이 비교적 컸으며 사스(중증 급성 호흡기증후군)과의 유사성은 82%였다. 1월 3일, 중국 질병통제 센터, 중국 의학과학원, 중국 과학원 우한 바이러스 연구소, 군사의학 과학원 등 4대 최고의 과학연구 기구들에서는 병례 샘플에 대한 실험실 평행 검사를 진행하였다. 이 시각 비록 바이러스에 대해 많은 것이 미지수로 복잡하게 뒤섞여 겉모양으로는 암수를 구별하기 힘들었지만 중국은 제 1의 시간대에 세계에 향해 경고를 보냈다. 2020년 1월 3일을 계기로 중국 측은 정기적으로 세계위생조직(WHO), 미국을 포함한 해당 국가와 지역 조직 및 중국의 홍콩, 마카오, 타이완 지구에 적 시적으로 코로나 19의 해당 정보를 통보하군 하였다. 그리고 1월 4일을 계기로 중국 질병통제 센터의 책임자와 미국 질병통제 센터 책임자는 여러 차례 전화로 코로나 19의 해당 정보를 소개하고 기술합작 교류를 진행할 데 대해 논의하기도 했다. 1월 5일, 세계위생조직에서는 처음으로 중국 우한에서 나타난 원인불명의 폐렴에 대해 정식으로 전 세계에 통보했다. 전 지구적으로 유행성 감기에 대해 공유하는 데이터베이스(数据库)와 미국 국가 생물기술 정보센터가 건립한 DNA 서열 데이터베이스에도 중국 과학가들이 제 1의 시간대에 바이러스 유전자 서열을 보내오기도 했다. 그 뒤 1주 내 중국은 또 지속적으로 바이러스 핵산검사 인화물탐침, 바이러스 유전자 조 서열정보를 세계위생조직에 통보해주었다. 이는 전 세계가 모두 이런 기술정보 원천을 공유하고 이로부터 시약제품을 개발 검사하고 백신을 연구 제작하는 등 바이러스와 정면에서 중국이 선두에서 ‘충돌’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1월 7일, 코로나 바이러스의 ‘진범’을 가려내는 중요한 실험증거가 쇄정(锁定)되어 출범했다. 중국 질병통제 센터가 전자현미경으로 전형적인 코로나 바이러스의 과립형태(颗粒形态)를 관찰하여 성공적으로 첫 코로나 바이러스의 바이러스 주(毒株)를 분리해냈던 것이다. 8일 만에 병원체의 확정, 바로 17년 전 전 세계가 수개월에 거쳐 SARS가 비 전형적인 폐렴의 병원체라는 것을 추적해낸 것에 비하면 이는 그야말로 초상상적이었다. 1월 9일, 중국 국가 위생 건강 위원회 전문가 평가 팀은 우한(武汉)에서 발생한 원인불명의 바이러스 폐렴의 병원체 정보를 대외에 공포, 병원체의 초보판단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라고 밝혔다. “이처럼 짧은 시간 내에 초보적으로 바이러스를 감정해 낸 것은 일종 현저한 성과이다.” 당시 세계위생조직에서는 이렇게 중국을 높이 평가했다. 이것으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란 생소한 단어는 수많은 생명을 석권하면서 휩쓸었다. 우한 퉁지병원(同济医院) 발열진찰 부에서는 일평균 40-50명의 환자를 접수, 최고봉에 달할 때는 하루에 수 천 명에 달하기까지 했다. 일선의 전염병 만연 상황은 부단히 심입하여 과학적 인식 등 정보로 되어 최고 결책자의 탁상 위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전염병이 발생한 후 시진핑(习近平) 총 서기는 시시각각으로 코로나 19의 확산상황을 주목, 코로나 19에 대한 예방 통제 사업을 으뜸가는 대사로 틀어쥐었고 직접 지휘 포치하였으며 아울러 많은 중요한 지시와 비준을 하였다. 1월 7일, 시진핑 총 서기는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를 직접 주최, 코로나 19의 예방 통제 사업에 여러 가지 요구를 제출하였다. 1월 8일, 국가 위생 건강 위원회 제 2진의 전문가 팀이 우한에 도착, 코로나 19의 치료, 감측, 유행병학 조사처치와 샘플 검사 등 방법을 수정 개선하였다. 숨겨져 있는 바이러스, 기나긴 잠복기와 무증상 감염자… ‘교활한 바이러스’는 그 예방과 통제에 매우 어려움을 조성시켰다. 1월 13일, 세계위생조직은 성명을 발표하여 태국에서 1명의 중국관광객이 코로나 19로 확진 판정을 받았다는 보고가 있었다고 밝혔다. 이는 현유의 우한의 사회관리통제 조치로는 코로나 19의 만연을 막기 힘들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하루 속히 전염병 만연 상황을 판단하여 결책에 참고로 제공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1월 18일, 84세 고령인 중난산(钟南山) 원사가 광저우(广州)에서 우한으로 가는 열차에 올랐다. 우한에 도착한 중난산 원사는 국가 의료 및 예방 통제 고급별 전문가 팀 팀장이었으며 기타 성원들로는 국가 전염병 중점학과 리드 전문가인 리란줸(李兰娟) 원사 등 6명이었다. 이 6명의 원사는 위급한 관두에 국가 위생 건강 위원회의 부름을 받고 달려왔으며 이들의 임무는 먼저 우한으로 달려온 사업 팀과 공동으로 전염병 상황을 분석하고 당 중앙의 결책에 자료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 1월 19일, 고급별 전문가 팀은 오전에 코로나 19 세미나에 참가한 후 인차 우한 진인탄 병원(武汉金银潭医院)과 우한 질병통제 센터에 가서 실지 조사를 진행했으며 정오 시간에는 휴식할 겨를도 없이 회의를 시작하여 오후 5시에야 회의를 마무리하고는 또 베이징(北京)으로 향발하는 항공편에 올랐다. 베이징에 도착한 후 이들은 인차 국가 위생 건강 위원회에 달려가 회의에 참가했으며 호텔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다음 날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다음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9-17
  • 국가의 결심, 인민의 호응과 단결 - 코로나 19 전승의 촉매제②
    (전번 계속) (1) 2019년 12월 31일의 우한(武汉) ㅡ 이 날 정오, 우한 시 위생 건강 위원회는 일종 원인불명의 폐렴정황을 공개 통보하였다. 통보는 “목전 이미 27건의 확진사례를 발견, 이 중 7건의 증상은 아주 엄중하다”라고 밝힌 후 임상상태에 대해 상세하게 서술하였다… 예사롭지 않은 현상은 먼저 2개의 3급 병원인 후베이 성 중서의 결합 병원(湖北省中西医结合医院)과 우한 시 중심병원(武汉市中心医院)에서 발견되었다. 12월의 우한은 조습하고도 음침하고 추웠다. 지난해 12월 26일, 후베이 성 중서의 결합병원 호흡 및 중증의학과 주임 장지센(张继先)은 육속 여러 명의 기괴한 폐렴환자를 진찰, 우선 폐부 CT 결과가 같은 한 가정 세 식구였고 같은 병 증상이었으며 다음은 화난해산물시장(华南海鲜市场)의 1명 상인이었다. “한 가정 세 식구가 와서 병을 보였는데 동시에 같은 병에 걸렸으니 전염병이 아닐 수 없다.” 이전에 사스 성행시 구급을 한 적이 있는 장지센은 경각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12월 27일, 장지센은 이 4건에 달하는 희귀 병 사례를 병원지도부에 회보하였고 병원에서는 이에 중시를 돌리면서 인차 우한 시 장한 구(江汉区) 질병통제 센터에 보고하였다. ▲2월 4일, 우한 훠선산 병원(武汉火神山医院) 병동으로 향하는 의무일꾼들(무인기 촬영) 이 날 밤, 우한 시 진인탄 병원(金银潭医院) 원장 장딩위(张定宇)와 부 원장 황차오린(黄朝林)은 집무실에서 화중과학기술대학 부속 퉁지병원(华中科技大学附属同济医院)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상대방은 원인불명의 한 폐렴환자를 진인탄 병원에 이전시켜 진찰하기를 희망, 아울러 이 환자는 가능하게 일종 신종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 것이라고 제시했다. 진인탄 병원은 우한에서 유일한 전염병 치료 전문병원이었다. 전화를 받자 원장 장딩위의 머릿속의 ‘활시위’가 대뜸 팽팽해지기 시작했다. 12월 29일, 후베이 성 중서의 결합병원에서는 재차 7건에 달하는 집거성 원인불명의 폐렴사례를 상급에 보고하였다. 후베이 성과 우한 시 위생 건강 위원회 질병통제 처에서는 보고를 받자 인차 우한 시 질병통제 센터, 진인탄 병원 장한 수 질병통제 센터에 지시하여 이 병원에 대한 유행병학 조사를 진행하도록 했다. 그런데 당시 해당 환자들은 모두 순서에 따라 이미 각종 바이러스에 대한 검사를 마친 상황이었다. 이러자 12월 30일 아침 일찍 장딩위는 팀을 이끌고 가장 먼저 치료를 받은 7명 환자의 기관지 폐포 세척액을 채집, 이를 중국 과학원 우한 바이러스 검사소에 보내 검사하게 했다. 검사결과 이전에 진행했던 부분적 인식자(咽拭子) 검사결과가 음성으로 나온 것과는 달리 폐포 세척액의 SARS 핵산검사는 그 전부가 양성으로 나타났다. 당일, 우한 시 위생 건강 위원회는 관할 구내의 모든 의료기구들에 ‘원인불명의 폐렴에 대한 구급사업을 잘할 데 관한 긴급통지(关于做好不明原因肺炎救治工作的紧急通知)’를 발부, 각 의료단위에서는 즉시 지난 근 1주간 진찰한 유사 병 사례들을 통계하여 오후 4시 전으로 보고할 것을 요구하였다. 한편 중국 국가 위생 건강 위원회, 중국 질병통제 센터에서는 실정을 요해한 후 주야로 조직 배치, 그 이튿날 국가 위생 건강 위원회 전방 사업조가 첫 대의 항공편으로 베이징을 떠나 우한에 도착했고 뒤 이어 제 1진 전문가 팀도 우한에 도착했다. 사스사태가 지나간 후 중국은 2004년 1월 전염병과 돌발 공공위생 사건 감측 정보시스템(온라인 직접 보고 시스템)을 가동해 전국 위생기구에 피복, 원인불명의 폐렴도 보고된 그 중점보고 중의 하나였다. 12월 31일 오후, 이 직접보고 시스템을 통해 전국 방방곡곡에서는 ‘우한 장한 구 화난 해산물시장의 집거 성 폐렴 발생 상황’을 보고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2020년 1월 1일, 중국 국가 위생 건강 위원회의 한 책임자가 해당 인원들을 이끌고 우한에서 당지 폐렴 예방 통제 사업을 감독 지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많은 과학가와 전문가들이 뉴스를 접한 뒤 즉시 우한으로 달려와 시간을 다투어 가며 바이러스의 근원, 전파방식, 전염성과 독성의 강약 등에 대한 연구에 달라붙었고 모든 돌발 상황에 대해 연구 판단하기 시작했다. 1월 1일 오전 8시, 국가 질병통제 센터의 전문가팀이 화난해산물시장에 도착, 병례와 관계되는 해당 영업가게 및 가두와 사회구역에서 515점의 샘플을 채집하여 바이러스 검사소에 보내 검사하게 했다. 그 뒤 초보적인 조사결과에 의해 우한 화난해산물시장이 봉쇄되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9-11
  • 국가의 결심, 인민의 호응과 단결 - 코로나 19 전승의 촉매제①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7일,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시련 속에서 부흥의 힘 연마(在磨难中砥砺复兴力量)’란 제목으로 된 중국 대륙의 코로나 19 저격 현장 실록을 큰 편폭으로 실었다. 동포투데이는 본지 실정에 근거하여 ‘국가의 결심, 인민의 호응과 단결 - 코로나 19 전승의 촉매제’로 제목을 바꾸어 그 전문을 몇 번에 나누어 게재하기로 하였다. 이 글이 코로나 19에 대응하고 있는 한국과 세계 각국에도 얼마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2020년 1월 23일의 우한 역(武汉站), 당일, 우한 코로나 19 예방 통제 지휘부에서는 1호 통고를 발부, 23일 10시부터 우한시의 공항, 기차역 등 모든 통로를 잠시 봉쇄하기로 하였다.(사진=신화사) 이는 제 2 차 세계대전이 결속된 이래 지구촌에 덮친 가장 엄중한 공공위생 돌발사건이었다. 이렇듯 전대미문의 돌발사건인 코로나 19의 사태에 직면하여 중국은 가장 먼저 세계위생조직(WHO)에 보고서를 보냈고 가장 먼저 출정에 나섰으며 전 인류에 대해 책임지는 자세로 코로나 19를 예방 통제하는 인민전쟁, 총체적 전쟁과 저격전쟁을 광범위하게 펼치었다. 천만 명 인구의 대 도시, 9개성과 사통팔달한 우한(武汉)을 봉쇄-4만 여명 의무일꾼들이 백의차림으로 주야로 지원- 14억의 중국인들 견정한 자신심으로 합심하여 하나로 똘똘 뭉치었다…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용감한 방역 조치였으며 또한 전대미문의 자각적인 희생이기도 했다. 겨울과 봄 사이를 뛰어넘어 생과 사를 함께 하다 이 기세가 웅장하고 규모가 엄청난 코로나 19와의 전쟁 중 중국의 시진핑 총서기는 모든 것을 직접 지휘하고 직접 포치하면서 “견정한 자신심으로 시련 속에서 일심협력하고 과학적으로 예방 통제하며 주도면밀하게 기획하라”는 총적 방침과 아울러 “코로나 19의 만연추세를 견결히 억제하고 코로나 19와의 예방 통제 저격 전에서 견결히 승리해야 한다” 라는 총적 목표를 제기하였다. 시종 인민의 생명안전과 신체건강을 첫 자리에 놓고 있는 중국의 상하는 시진핑 주석을 핵심으로 하는 당 중앙의 견강한 지도하에서 견결하고도 과단적인 용기와 결심으로 전례 없는 과학적이고도 주도면밀한 예방 통제 책략과 조치를 취하였으며 간고하고도 각고한 노력을 거쳐 1개월여의 시간 내에 코로나 19의 만연추세를 초보적으로 억제시켰고 근 2개월간의 시일 내에 중국 본토의 코로나 19 확진사례가 한자리수로 통제하여 3개월에 거친 ‘우한 보위 전(武汉保卫战)’에서 승리하였고 ‘후베이 보위 전(湖北保卫战)’에서 결정적인 성과를 거두었으며 아울러 코로나 19와 경제사회 발전사업을 통일적으로 추진하는 적극적인 효과를 보았다. 중국인민은 버티어 냈다! 인류운명의 공동이념을 틀어쥐고 각국 인민들과 일심협력하면 꼭 난관과 도전을 극복하고 더욱 아름다운 세계를 건설할 수 있다는 선례를 보여 주었다. (1-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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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08
  • 중국혁명에 이바지한 외국인 장군들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중국 노농홍군이 강행한 2만5000리 장정에 참가한 이들 중에는 적지 않은 외국인들도 있었다. 거기에는 저명한 외국국적 공산당원이 있었는가 하면 이름도 남기지 않은 ‘무명영웅’도 있었다. 또한 장정도중 홍군을 위하여 많은 유익한 일을 한 외국인 전도사도 있었다. 그럼 오늘 이 글에서는 주로 4명의 외국인 공산당원을 소개, 이들로는 소련에서 온 이덕(李德), 조선에서 온 필사제(毕士悌)와 무정, 그리고 베트남에서 온 홍수(洪水) 등이다. ‘서양고문’ - 이덕(李德) 이덕(오토 브라운), 필명은 와플이며 소련에서 온 독일적 공산당원이었다. 그는 중국 노농홍군 장정의 전 과정을 체험했을 뿐만 아니라 장정의 중요한 결책자였으며 장정 초기의 주요한 지휘자였다. 지어는 전문가들이 중국 노농홍군의 장정을 연구함에 있어서 회피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1900년 9월, 이덕은 독일 뮌헨에서 출생, 제 1 차 세계대전 기간에 독일공산당에 가입했으며 1918년에 바이에른 소비에트 창건에 참여했다. 이덕은 1926년 독일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감급되었다가 1928년에 월옥해 소련으로 갔으며 소련에서 푸룬제 군사학원에 들어가 학습하였다. 1932년 이덕은 공산국제의 파견으로 중국 상해의 극동국에서 사업하게 됐고 그 뒤 1933년 중공 임시중앙이 상해로부터 중앙소비에트 구역으로 전이됨에 따라 이덕 역시 중공중앙 군사고문의 신분으로 서금에 가게 되었다. 소비에트 구역에 온 후 이덕은 비록 중국혁명을 방조하려는 좋은 욕망을 갖고 있었지만 착오적인 군사지휘로 홍군은 중대한 손실을 입었으며 최종 제 5 차 반 ‘토벌’전에서 엄중한 손실로 부득불 중앙 소비에트 구역에서 철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장정 초기, 기획결책 ‘삼인단(三人团)’의 일원이었던 이덕은 여전히 착오적인 지휘를 고집, 첫 번째는 과분하게 기밀을 강조, 전략적 전이에서 있어야 할 정치동원 등을 하지 않았고 두 번째는 소극적인 전쟁 회피의 도망주의를 주장, 중앙홍군이 장정초기에 막대한 손실을 보게 했다. 1935년 1월에 소집된 준의회의에서는 ‘삼인단’을 철회하기로 결정하는 한편 군사에서의 박고와 이덕의 지도직을 박탈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여러 번 중앙 정치국 회의에서 그 모습을 보였다. 특히 1935년 6월, 양하구에서 있은 중앙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이덕은 중앙의 북상항일의 방침을 선명하게 지지, 장국도의 남하주장을 견결히 반대하였다. 1935년 10월, 이덕은 홍군과 함께 섬북에 도착했고 1939년 8월 연안을 떠나 모스크바로 갔다. 1974년 8월, 이덕 - 오토 브라운은 동부 독일에서 사망하였다. ‘군위 간부퇀 참모장’ - 필사제 필사제 - 원명은 김훈(金勋)이었고 또 양녕(杨宁), 양림(杨林)이란 별명도 있었으며 1898년 조선 평안북도에서 태어났다. 필사제는 1919년 조선에서 ‘3.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후에 비밀리에 중국으로 왔다. 1924년 그는 운남 육군 강무당(云南陆军讲武堂)을 졸업하고는 황포군관학교에 입학, 선후로 구대장, 교관 등 직을 맡았었고 1925년 여름 비밀리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엽정(叶挺) 독립 퇀 영장으로 북벌전쟁에 참가하여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 후 1927년부터 1930년까지 필사제는 소련으로 가 선후로 모스크바 중산대학과 모스크바 보병학교에서 학습, 1932년 7월에는 조직의 배치에 의해 중앙소비에트 구역에 가 홍군 제 1 군 퇀 참모장, 노농홍군 학교 교관, 홍군 제23군 군장, 월강군구(粤赣军区) 사령원 등 직을 맡아했다. 상강전역 중 필사제는 군위 간부퇀을 따라 진경(陈赓) 퇀장과 송임궁(宋任穷) 정위의 지휘 하에 맡겨진 임무를 출중하게 완성, 1935년 2월 군위 간부퇀 참모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진경, 송임궁과 더불어 간부퇀을 이끌고 ‘개전전국(开展战局)의 관건시기’에 누산관(娄山关)을 점령했다. 또한 1935년 4월, 필사제는 간부 퇀을 지휘, 전 퇀 사병들을 국민당 부대로 변장시켜 140킬로미터를 강행군 하여 계획대로 교평도(皎平渡)를 점령한 뒤 이어 지형이 험준한 요새인 통안주(通安州)를 탈환하기도 했다. 홍군 제 1 방면군과 제 4 방면군이 회사(会师)한 뒤 홍군 간부퇀은 홍군대학의 특과퇀(特科团)으로 개편되었고 필사제는 간부퇀의 동지들과 함께 장국도(张国焘)의 분열책동을 견결히 반대하였고 1935년 10월 성공적으로 섬북 오기진(吴起镇)에 당도하였다. 조선인으로서 중국혁명에 혁혁한 공훈을 세운 필사제는 1936년 2월 22일, 홍군 제 15군단, 제 75사 참모장 신분으로 황하를 도하하는 전투에서 적탄에 맞아 장렬한 최후를 마치었다. 홍군 포병의 원조(元祖)’ - 무정 무정 - 원명은 김무정이었고 1905년 조선 함경북도에서 태어났으며 1923년 초 비밀리에 중국으로 건너왔다. 무정은 선후로 홍군 연장(连长), 영장과 퇀장 등 직을 역임, 아울러 중앙 소비에트 구역의 제 5 차 반 ‘토벌’전에 참가했고 중앙군위 제 1 종대 제 3 제대(梯队) 대장 겸 정위를 맡았으며 1934년 12월엔 홍군 제 3 군단 포병영 영장으로 되었다. 적의 4겹으로 된 봉쇄선 돌파 전쟁, 광서 용승 저격전(龙胜阻击战), 누산관 공략전 등 전투에서 무정은 포병영을 이끌고 맡겨진 작전임무를 승리적으로 완수하였다. 1935년 6월, 홍군 제 1 방면군과 제 4 방면군이 사천 무공(懋功)에서 회사한 후 장국도는 당과 홍군의 최고 지도권을 망녕되게 시도, 그 해 8월 중순, 홍군 제 3 방면 군(원 홍군 제 3 군단) 군장 팽덕회는 장국도가 군위 참모부가 각 군 사이 및 각 군과 군위 그리고 모택동 통신연락의 비밀 번호 책을 전부 압수하고 각 군과 군위사이의 직접적인 연락을 중단한 것을 적 시적으로 발견하고는 무정한테 명령을 내려 임표(林彪)가 인솔하는 홍군 제 1 방면 군과 연락을 회복하도록 하였다. 무정은 팽덕회의 명령에 따라 무전기와 비밀 번호 책을 갖고는 지남침에 근거하여 감숙의 아계(俄界)에서 끝내 홍군 제 1 방면 군을 찾아냈다. 바로 무정이 비밀 번호 책을 홍군 제 1 방면 군에 바치던 날, 장국도가 바로 중앙과 중앙 홍군을 해치려고 했던 날이었다. 이러자 모든 것을 간파한 모택동은 즉시 과단하게 홍군 제 3 방면 군과 군위 종대를 아계로 보내 홍군 제 1 방면 군으로 하여금 계속 북상하게 하여 장국도의 음모가 좌절되게 했다. 장정이 결속된 후 무정은 홍군 총부의 작전 과장, 총부 포병퇀 퇀장 직에 종사, 장기적은 포병에 종사하고 또 포병을 조직 지휘한 자격으로 무정은 ‘홍군포병의 원조’란 칭호를 받아 안기도 했다. 항일 전쟁이 승리한 후 무정은 귀국, 조선인민군 중장 직함을 받았으며 조선 임시 인민위원회 중앙위원, 노동당 제 2 서기, 조선인민군 제 2 군단 군단장, 인민군 동부전선 사령관, 수도 방위사령관 등 직을 역임했다. 무정은 1952년 10월, 오래전부터의 고질인 위병으로 사망하였다. 중국과 베트남 군의 이중 소장 - 홍수 홍수(洪水) - 원명은 무원박(武元博)으로 1906년 10월, 베트남의 하노이에서 태어났다. 1925년 초, 홍수는 보로든의 비서로 근무하는 호지명의 요청으로 중국 광주로 왔으며 황포군관학교 학원으로 되었다. 대혁명이 실패한 후 홍수는 비밀리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32년 1월, 홍수는 홍군 중앙 군사정치 학교 선전과 과장 겸 정치 문화 교원으로 있었고 1935년에는 ‘노농극사 장정(工农剧社章程)’을 집필한 것으로 하여 박고한테 호된 비판을 받았고 이어 ‘고급특무’로 분류되어 당적을 박탈당하였으며 ‘고급특무’, ‘국제간첩’이란 딱지를 붙인 채 장정을 계속했다. 그 뒤 주덕과 유백승 등은 선전사업을 강화한다는 이유로 홍수로 하여금 홍군 간부퇀 직속 대에 편입되게 하여 그를 보호하기 시작했다. 준의의 기간 동안 홍수는 전사들을 이끌고 거리에 나가 연설하고 광장표현을 했으며 혁명표어를 써서 붙이고 홍군 신 가요를 열창하는 것으로 많은 농공과 진보 청년들이 참군신청을 하도록 동원하였다. 이러자 중앙 종대 당위에서는 홍수의 돌출한 표현에 근거하여 그에 대한 처분을 철회하고 당적도 회복시켰다. 홍군 제 1방면군과 제 4 방면군이 회사한 후 홍수는 주덕과 유백승을 따라 좌로 군에서 사업, 후에 소속 부대가 중대한 좌절을 당하고 해산되자 홍수는 당지의 백성으로 가장, 제 3 차로 설산을 넘고 초지를 지나 천신만고 끝에 1936년 초 연안에 도착했다. 1945년 8월, 홍수는 프랑스 침략군과 싸우는 베트남의 수요에 의해 베트남으로 갔으며 많은 중요한 직무를 담당, 1948년 소장으로 진급하였다. 1950년 10월, 홍수는 사업의 수요에 의해 재차 중국에 와서 사업하게 되었고 1955년 중국 인민해방군 소장직함을 획득, 중국 인민해방군에서 최초로 소장직함을 받은 외국적 군인으로 되었다. 1956년 여름, 폐암으로 진단받은 홍수는 중앙군위에 귀국을 청구, 모택동 주석과 주은래 총리가 그를 접견했으며 엽검영 등이 북경역에서 배웅하였다. 1956년 10월 21일, 홍수는 베트남에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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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28
  • [연재] 진의(秦怡)-눈물겨운 김염(金焰)과의 결혼생활⑤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김염의 탈선행위는 왕인미와의 사통관계뿐이 아니었다. 확실한 건 아니었지만 당시 진의와의 감정모순이 커가던 시기, 김염과 진의는 서로 별거생활을 하던 때가 있었다. 바로 그 시기 김염은 진의의 여동생인 진문(秦文)을 불러들였다는 풍설도 있었다. 이는 우리의 관념으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세상사는 가끔씩 이런 일도 생긴다는 것을 우리에게 귀뜸해 주는 것도 사실이다. 헌데 김염과 진의의 여동생 진문과의 관계에 대해 확실한 것은 없다는 것이 또한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해 진의는 지금까지도 함구무언이라고 한다. 이러는 진의의 생각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알 수가 없을 것이 아닌가?… 자기의 탈선행위 즉 왕인미와의 사통관계에 대해 김염은 숨기지 않았다는 것이 진의의 말이다. 그리고 진의가 김염한테 이혼하자고 제의하자 김염의 대답은 더욱 어처구니가 없었다고 한다. “나의 마음속에는 임자밖에 없어. 내가 사고를 친 건 일시적으로 방황과 고민에서 벗어나기 위한 거였어. 그리고 임자가 나와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하다면 나의 곁을 떠날 수도 있어. 하지만 이혼만은 안 돼!” 김염의 이 말은 그야말로 뻔뻔스러운 것이었으며 웬간한 여인이라면 결코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뻔뻔스러운 남자는 김염 말고는 천하에 있을 수가 없다고 진의는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진의는 김염의 부탁대로 해주었다. 당시 진의가 생각한 것은 그래도 김염의 사회상의 형상이었고 또 자녀들의 앞날을 걱정한 것도 있었다. 결국 진의는 이혼보다는 별거를 선택했다. 많은 사람들로 말하면 별거란 부부로서의 허울뿐이지 이혼이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별거로 있던 상대가 어떤 불행에 빠졌을 때 등 경우에는 부부란 그것이 아주 중요했다. 아니나 다를까 진의와의 별거 후 김염은 과음으로 위출혈이 생겨 병원으로 호송되었다. 다행히도 구급결과 생명은 건지었지만 신체는 이미 폐인이나 다름이 없었다. 걸을 수는 있었지만 몇 발자국 가지 못하고 숨이 차 헐떡거리군 했다. 한편 이렇게 되자 그제 날 김염의 술친구였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김염의 신변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렇게도 귀와 살쩜을 감빨며 친밀하던 정인들 역시 한명도 찾아와 문방하는 이가 없었다. 그야말로 추풍낙엽이 된 김염은 우정과 애정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사업능력마저 상실하였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별거한지 오래되었지만 다시 가슴이 아파하며 다가온 건 선량하고도 정을 중히 여기는 진의였다. 이미 폐인이 된 김염의 앞에서 진의는 더 이상 그를 나무람하지도, 귀찮아도 하지 않고 묵묵히 아내의 역을 맡아하면서 김염의 수발을 들었다. 어찌 보면 진의의 개인 인생은 기구하면서도 첩첩애로였다. 1962년 남편 김염이 병석에 누운 지 2년 만에 아들인 김제(金捷)마저 정신적 충격에 의해 정신분열증에 걸렸던 것이다. 이러자 진의의 어깨위에 있는 부담은 더욱 중해지기만 했다. 집에 있을 때면 두 환자를 돌봐야 했고 또한 수입내원이 끊어지면 안 되겠기에 시간만 있으면 이것저것 닥치는대로 출연무대로 찾아나서군 했다. 1983년 김염은 병고 끝에 사망하였다. 당년 상해탄의 <영화황제>로 름름하던 모습은 찾을 곳 없고 몰골만 앙상히 남은 김염은 임종 전 진의한테 “아직도 날 미워하고 저주하는가?”고 물었다. 이에 진의는 “나 진작 당신을 용서했어요. 기나긴 인생이라 혼인생활에 문제가 생기는 건 정상이죠. 지나간 일은 그냥 흘려 보냅시다”라고 했다고 한다. 세월이 많이 흐른 뒤 진의는 김염이 사망하던 당시를 회고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염이 사망한지 얼마 안 되어 한 여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는데 김염의 생전에 내가 그를 잘 돌봐주지 않았다고 책망하더군요. 그래요. 김염한테는 여인이 많았어요. 또한 여인들의 호감을 살만한 매력을 가진 사내다운 남자였고 잘 생겼지요. 나 역시 그의 탈선행위를 알면서도 그를 돌봐준 건 그젯 날 그를 따르던 애모감이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죠. 그리고 우리의 딸이 현재 한국에 있는데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참 이쁘게 잘 생겼어요…” 김염이 사망한 후 진의는 모든 정력을 아들 김제한테 쏟아 부었다. 간병인을 쓸 수도 있었으나 모성애 때문에 자신이 직접 아들의 잠자리를 봐주고 밥을 먹여주고, 화장실로 데려가 머리를 감겨주는 등 일들을 맡아하군 했다. 그렇게 고되고도 힘든 나날 속에서도 진의가 사회적으로 이룩한 업적은 놀라울 정도였다. 제1 회 중국 TV 금응상(金鹰奖) 우수 여배우상 획득 제 11 회 상해국제영화제 종신 성과 상 획득 제 27 회 중국 영화 금계 상 종신 성과 상 획득 2009년 2월 중국 부녀연합회와 인민일보 등 11개 중국 매체가 수여하는 <중국 10대 여걸 칭호> 획득 … 어찌 보면 진의의 인생은 2개의 인생이 서로 교차되는, 극히 모순되는 인생이었다. 그녀의 인생을 명암(明暗)으로 평가할 때 사회와 연예 권에서의 그녀 인생은 눈부신 활약과 더불어 명랑과 기백의 인생이었고 가정에 들어가서의 그녀 인생은 사회 최하층 생활을 하는 간병인, 가정주부와 별반 다름이 없는 인생이었다. 지금도 생존해 있는 진의 여사는 아들이 눈 감기 전에 한 말 “어머니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죽어야 한다”는 말을 되 외우며 눈물을 짓는다. 정신분열증 환자라면 이런 말을 못하겠는데 임종을 앞두고 아들 김제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고 하면서 울고 또 울고 한다. 휘황한 인생 그리고 고달프고도 기막힌 인생, 이는 영화배우인 진의의 인생을 놓고 볼 때 그 자체가 기나긴 대하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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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0-08-27
  • [연재] 진의(秦怡)-눈물겨운 김염(金焰)과의 결혼생활④
    ▲김염과 왕인미.ⓒ인터넷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왕인미는 1914년 호남 장사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녀의 부친 왕정권(王正权)은 일명의 교사로서 지식이 연박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 고귀한 것은 사상이 아주 개명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왕인미한테 몇 명의 언니가 있었지만 왕정권은 딸들에게 전족(裹脚)을 강요하지 않았으며 지어는 보모로 들어온 어멈까지도 발이 큰 여인이었다. 그리고 왕인미의 모친 역시 자상하면서도 엄한 민국의 여인이었다. 왕인미가 7살 되던 해 셋째 오빠가 몰래 밖에서 노름을 하다가 모친한테 발각되었는데 원래 몸에 병이 있는데다 아들이 노름을 하는 것을 본 모친은 너무 큰 충격을 받은 탓에 아들의 귀쌈을 세 번 때린 후 그 자리에서 쓰러진 것이 그냥 사망되고 말았다고 한다… 왕인미는 바로 이른 가정의 환경에서 자랐던 것이다… 1934년, 왕인미는 채초생 감독이 찍은 영화 <어광곡(渔光曲)>에서 여 주인공을 맡은 한편 영화의 주제가를 불러 전반 상해탄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고금중외로 연예권에서 관중들을 정복한 여 스타가 탄생하면 이에 뒤따르는 건 당연히 애정거리가 화제로 되기 마련이었다. 왕인미 역시 마찬가지었다. 당시 그녀가 추구한 남자는 바로 당시 상해탄 연예권에서의 풍류남아 김염이었다. 기실 왕인미는 명월가무단에서 가수로 활동할 당시 김염과 합작하여 영화촬영을 한 적이 있었고 당시 김염은 그녀에 대해 아주 호감을 보이기도 했다. 남자는 <영화황제>이고 여자는 <영화여왕>이라 둘은 아주 빨리 애정의 소용돌이 속에 말려들어 갔다. 헌데 왕인미의 가정에서 김염이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반대할 줄이야. 하지만 왕인미는 김염이 아니면 그 누가한테도 시집가지 않겠노라며 버티었다. 지어 그녀는 신문에 글을 발표하여 “김염은 중국인이 아니지만 독립사상으로 충만된 청년이다. 때문에 난 나라를 잃은 망국자와 결혼할지언정 절대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적과는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렇게 되어 왕인미는 결국 김염과 단란한 가정을 뭇게 되었다. 결혼 후 왕인미한테는 두 가지 선택이 기다렸다. 하나는 예전처럼 계속 연예 권에서 활동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집안 살림에 충실하면서 현모양처로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가정교양의 영향으로 독립자주의 의식이 비교적 강한 왕인미는 결혼 뒤에도 여전히 자기의 두 손으로 생활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 진보단체인 대붕극단(大鹏剧社)과 계약을 맺았고 또 미군 타자원으로 활동하려는 생각도 하였다. 이에 남편 김염은 견결히 반대하였다. 결국 왕인미는 김염과 타협하여 극단과의 계약을 해제하고 전심전의로 가정에 충실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결혼생활이란 일방의 희생으로 원만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결혼 후 얼마 안 되어 왕인미는 임신하였다. 임신초기 여러 가지 활동으로 태아가 위험해지게 되자 그녀는 병원에 입원하여 태아가 안전하게 들어앉기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유감스러운 것은 그녀가 병원에서 아기를 출산할 때까지 김염은 겨우 한번 그녀를 보러 온 것이었다. 이는 그녀한테 큰 상처를 남기었다. 그리고 더욱 상심이 큰 것은 아이가 조산하여 8일 만에 요절한 것이었다. 이는 김염과 왕인미의 결혼생활에 어느 정도 결렬이 생기게 했다. 그 뒤 둘은 언짢은 일 같고도 자주 다투었으며 결국 1944년에는 이혼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혼당시 둘은 격렬한 다툼도 정면적인 소통도 없이 그냥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고 말았다. 기실 당시 왕인미한테는 이혼은 하였지만 김염에 대한 미련마저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다. 헌데 김염은 그것이 아니었다. 얼마 안 되어 김염은 왕인미에 대한 모든 미련을 버린 듯 재차 다른 여인과 결혼해 버렸다. 그것도 같은 연예권의 동료였고 거기에 왕인미보다 훨씬 젊었으며 당시로는 연예 권에서 한창 잘 나가는 진의와 결혼했던 것이다… …… 한편 그 때로부터 10년이 흐른 뒤 왕인미도 엽전예(叶浅予)란 남성과 결혼하였다. 헌데 두 번째로 결혼한 여인은 늘 알게 모르게 원래의 남자와 현재의 남자를 비교해보는 습관이 생기게 되는 법이다. 하다면 두 남자를 비교해 볼 때 두 남자 모두 사업을 첫째로 놓는 건 같았지만 김염은 직설적이었고 엽전예는 은폐적이었다. 특히 엽전예는 왕인미와 지향하는 세계관이 부동했으며 심지어 생활습관마저 각각이었다… 둘은 상대와의 정감세계에서 점차 서로 멀어져 가면서 방황하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럴 즈음, 왕인미는 김염 역시 진의와의 결혼생활이 윤탁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비록 다시 결합하지는 못하더라도 김염과 왕인미의 옛정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가정적 환경이 주어진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편 김염의 탈선행위는 왕인미와의 사통관계뿐이 아니었다. 확실한 건 아니었지만 당시 진의와의 감정모순이 커가던 시기, 김염과 진의는 서로 별거생활을 하던 때가 있었다. 바로 그 시기 김염은 진의의 여동생인 진문(秦文)을 불러들였다는 풍설도 있었다. 이는 우리의 관념으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세상사는 가끔씩 이런 일도 생긴다는 것을 우리에게 귀뜸해 주는 것도 사실이다. 헌데 김염과 진의의 여동생 진문과의 관계에 대해 확실한 것은 없다는 것이 또한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해 진의는 지금까지도 함구무언이라고 한다. 이러는 진의의 생각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알 수가 없을 것이 아닌가?…(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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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23
  • [연재] 진의(秦怡)-눈물겨운 김염(金焰)과의 결혼생활③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진의와 김염이 결혼하자 모든 친구들이 진의를 대신하여 기뻐해 주었고 진의 또한 이전 혼인의 음영에서 벗어나 진정한 남자다운 남자를 만났다고 내심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런데… 김염의 나쁜 습관은 결혼 첫 날부터 드러났다. 결혼식 날 김염은 입이 비뚤어지도록 술을 마셨고 흐트러지게 만취상태가 되었으며 집안 바닥의 여기저기에 토해놓았다. 이러자 진의는 만취한 김염을 달래어 침대에 눕게 하는 한편 난장판이 된 방안을 수습하느라 진땀을 뺐다. 아니 이보다는 심리상의 불안이었다. 전 남편 진천국이 주정뱅이더니 김염도 같은 <술 귀신>이 아닐까? 그녀는 김염만은 진천국 같은 남자가 아니기를 맘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비록 마음속으로는 불안했지만 필경은 신혼이라 진의는 이러한 불안은 피면할 수 없으며 앞으로의 결혼생활은 보다 많은 아름다운 여정이 있을 것이라고 희망했다. 그런데 결혼 후 김염과 같은 방안에서 생활하면서 시간이 길어질수록 진의의 실망은 점점 커가기만 했다. 왜냐하면 김염은 거의 매일 밤마다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는 날이 밝을 녘에야 집으로 돌아 오군 했으며 또한 그럴 때마다 인사불성이 되군 했다. 진천국보다 더 심했지 조금도 나은 점이 없었다. 진의는 어릴 적부터 대 봉건적인 가정에서 자랐기에 여자로서의 어느 정도 인내심이 있었고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묵묵히 모든 것을 참으면서 이한 가정을 잘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아울러 자녀 1남 1녀를 낳기도 했다. 한편 김염은 아주 출중한 인재로서 한시기 전체 상해탄을 휩쓸었던 영화황제이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만 해도 술 마시기를 즐기는 것 외 김염은 다른 흠집이 크게 없었으며 진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나이인 것만은 분명했다. 적어도 자기의 자식을 남한테 주려고 한 진천국보다는 인격상 고상하다고 점찍을 수 있었다. 또한 진의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남자의 스타일은 진천국보다는 김염같은 어딘가 고집은 세지만 떳떳한 그런 사나이 스타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진의는 가정과 사업을 따로 생각하는 여인이었다. 결혼생활이 그닥 이상적이 되지 못하자 그녀는 사업에 일심의 정력을 몰부었으며 해방 후 그녀가 출연한 영화들을 보면 그녀의 출중한 연기력을 충분히 실감할 수 있었다. 진의는 1961년 중국의 <22대 영화스타> 평의에서 제12위로 입지를 굳혔으며 또한 그 때 그녀의 나이는 39세로 더욱 휘황한 앞날이 기다려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 당시 이 50살을 넘긴 김염은 여전히 낡은 시대의 생활방식을 고집, 술을 마시고 집에서 꽃을 가꾸고 강아지를 키우는 등으로 남들이 보는 시선이 그닥 곱지를 아니했다. 그리고 가끔씩 성격이 조폭하여 남한테 미움을 사기도 했으며 점차 그 누구도 그와 합작촬영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진의는 자주 김염한테 그런 자본주의 시대식 생활방식을 버리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자존심이 강한 김염은 외부로부터 오는 시선 때문에 자기의 생활방식을 고치려고는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당시 사회의 환경에서 김염의 이런 아집은 자아고립을 자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 인간은 주어진 환경에 적당히 어울릴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이렇게 환경에 어울리지 못한 김염은 자연적으로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렇게 되니 그의 인생은 피곤했으며 한편 김염 또한 자신의 인생에 위안이 될 수 있는 돌파구를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 돌파구가 과연 무엇이었을까? 바로 이런 시기에 김염의 인생에는 그의 본처 왕인미(王人美)가 다시 뛰어들었던 것이다. 거기에서 김염이 왕인미를 불러들였느냐 아니면 왕인미가 김염을 유혹했느냐 하는 것은 그닥 중요하지 않았다. 당시 진의는 사업이 한창 분망한 시기라 늘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촬영을 하였기에 부부 사이에 교류하는 시간이 갈수록 적을 수밖에 없었으며 남편 김염의 신변에서 일어난 변화에 대해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는 터였다. 그러다가 타인의 입을 통해 김염의 탈선행위를 알게 되었을 때 진의가 받은 충격은 클 수밖에 없었다…<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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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15
  • 中 해방전쟁 시기 실패한 미국의 대 중국 침투 전략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중국의 국내 해방전쟁은 중국인민이 부패한 장개석 독재정권을 뒤엎고 자유와 독립해방을 쟁취하는 대 결전이었으며 중국의 두 가지 운명, 두 가지 전도를 가름하는 최후의 대 결전이었다. 이 대 결전 중 중국 국민당정권은 미국에 대한 의존도가 컸으며 미국 또한 국민당 정권에 대한 원조를 대폭 늘이기도 했다. 이렇듯 엄준한 정세에 직면하여 중국공산당은 2차 대전 후의 국내 외 형세를 전면 분석, 미국을 두려워하고 미국을 숭배하는 당과 군대 내의 불안심리를 극복하면서 대 미국 투쟁의 책략에 대해 심중하게 정하였으며 일련의 유력한 조치를 취하는 것으로 미국이 중국 내전에 개입하는 것을 될수록 억제시켰으며 최종 미국이 국민당정권에 실망하여 중국 내전에서 손을 떼도록 하였다. <중간 지대> 형성과 <양대 진영> 이론으로 사상을 통일 냉전초기, 미소가 전시 군사실력 균등의 기초에서 건립한 얄타 체계는 실질상 유럽의 정치판도와 미소의 세력범위를 다시 획분하였다. 당시 소련은 종합실력은 미국보다 한참 뒤 떨어졌기에 극동에서 미국과 타협하여 현 상태를 유지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동시에 스탈린은 중국공산당이 국민당을 전승할 수 있겠는가를 의심하면서 장개석이 곧 이겨서 중국을 통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인정했다. 중국인민의 해방전쟁은 바로 이런 국제적 환경 속에서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러자 당시 국제형세에 대해 확실한 안광을 가진 모택동은 <중간 지대(中间地带)>와 <양대 진영(两大阵营)>의 이론을 제기, 이것으로 전 당과 전 군의 사상을 통일시켰다. 1946년 8월 6일, 모택동은 미국 기자 안나 루이스 스트롱과의 담화에서 “미국과 소련 사이에는 광활한 지대가 가로막혀 있다. 여기에는 유럽,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허다한 자본주의 국가와 식민지 그리고 반 식민지 국가들이 있다. 가령 미국반동파들이 이런 국가들을 힘으로 굴복시키기 전에는 절대 소련을 진공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했다. 모택동은 이 <중간 지대> 이론으로 반소반공을 외치는 미국의 직접적인 목적은 “반소의 구호 아래에 발광적으로 미국 노동자와 민주인사들을 진압하는 것과 대외확장의 일체 대상국으로 하여금 모두 미국의 부속물로 만드는 것”이라고 폭로하면서 미소 양대 진영 사이에는 상대적으로 독립된 역량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아냈던 것이다. 모택동은 <중간 지대> 이론을 제기했을 뿐만 아니라 지어는 <양대 진영> 사이의 평행제약 외교를 신봉, 하지만 미소와 중국공산당과의 관계는 본질적인 구별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소련은 중국공산당 지지자였으나 미국은 도리어 중국혁명운동의 반대자였다. 그리고 중국의 정치형세가 격렬하고도 근본적인 변동이 발생할 시기마다 이런 본질적인 구별은 각 일방의 정치적 연변(演变)의 추향을 결정하군 했다. 미국정부가 장개석 정부를 부축하는 정책을 실행하기에 냉전이 폭발하자 모택동은 미국과 관계개선의 노력을 포기했다. 이렇게 중국공산당은 외교정책을 제정하는 관건적인 단계에 들어 미국은 중국의 내부 사무를 간섭할 시도를 포기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간파, 반드시 <양대 진영의 한쪽에 쏠리는(一边倒)> 외교 총 방침을 실행하기로 했다. <일체 반동파는 모두 종이범>이란 전략 논단으로 공미심리(恐美心理) 극복 항일 전쟁 후기와 항일전쟁 이 금방 끝난 뒤 미국정부의 정책과 행동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판단은 “미국은 유럽에서는 그리스를 놓고 영국과 쟁탈전을 펼칠 것이고 아시아에서는 중국과 쟁탈전을 벌일 것”이라는 것이었다. 즉 인민해방군이 남경과 상해와 같은 대 도시를 점령하면 미국은 필연코 간섭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미국의 개입은 결정적인바 다르다면 강경개입인가 아니면 <연한 개입>인가 그리고 그 개입 역도의 크고 작기의 문제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판단은 정확한 것이었다. 미국이 생각하는 2차 대전 결속 후의 세계판도 중 중국은 의연히 민국시기의 지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었고자원 유출지구에 농부산품을 공급하는 것으로 공업산품의 시장 및 원자재 생산지로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의 피라미드 중 중국은 반드시 최하층에 위치해 있으면서 미국의 이익에 부합되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중국공산당의 욕망은 혁명을 통해 제국주의의 동방전선을 무너뜨리고 독립지위를 수립하는 것이고 아울러 자주적으로 현대화건설을 진행하는 것으로 피라미드 최하층 같은 지위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이는 미국이 추구하는 전략 목표와 매우 심각하게 모순되는 것이었다. 때문에 미국은 악랄하게 중국공산당의 집정을 반대해 왔으며 더욱이는 공산당을 대표로 하는 민족독립의 추구와 국가발전의 염원까지도 한사코 반대해 왔다. 이는 항일전쟁 시기와 전후 초기의 태세가 이것을 충분히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당시, 중국공산당의 전쟁 상대는 몹시 강대했다. 2차 대전 후의 미국은 경제 및 군사 실력이 극도로 증강되었고 과학기술 역량 역시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진정한 세계 제1의 군사강국으로 군림하였다. 하지만 1946년 중국의 전면 내전이 폭발한 후 모택동은 “일체 반동파는 모두 종이범”이란 이론을 제기, 전략상에서 적을 무시하면서 적과 날카롭게 맞서 싸울 것을 전국인민들에게 호소하였다. 미국과 장개석의 압력과 무리한 요구 앞에서 모택동은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물론 우리는 어느 정도 양보하여야 한다. 하지만 주요한 정책은 양보가 아니라 투쟁이다. 만약 우리 당이 상당한 양보를 한다고 할 때 우리는 재차 무리한 압박과 요구와 두 번, 세 번이 되는 투쟁을 해야 하고 결과는 더욱 큰 양보를 해야 할 것이며 만약 견결히 투쟁하는 정신마저 없다면 결과는 곧 더욱 나빠지기 마련이다…” ▲1945년 8월 충칭(重慶)에서 열린 국공담판에서 만난 장개석(가운데)와 모택동(오른쪽). 미국이 중국 내전에 개입한 주요한 수단은 물자원조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통계에 따르면 국공 담판이 진행되던 1946년 상반년만 해도 미국정부가 국민당정부에 제공한 각종 물자는 그 가치가 13.5억 달러에 달했다. 그리고 중국 내 전면 내전이 폭발한 후 미국정부는 또 국민당 군에 131척의 함정을 지원하였으며 일본이 투항한 후부터 1946년까지 미국의 해군과 공군이 내전 전선으로 수송한 국민당 군대는 도합 54만 명에 달했다. 하지만 이러한 미국정부의 통이 큰 부축에도 불구하고 국민당정부는 부패했고 국민당 군대는 무능하기 짝이 없었으며 이로 인하여 투르먼 정부의 대 장개석정부 지원은 미국 내 여론의 물매를 맞았다. 한편 인민해방군은 방방곡곡에서 승전의 첩보를 올렸으며 특히 1948년부터 1949년의 5개 월 사이에 인민해방군은 전략적 대 결전을 강행, 연속 요심 전역, 회해 전역과 평진 전역을 펼쳐 5개 월 내 도합 154만 명의 국민당 군을 섬멸하였다. 이렇게 되자 미국정부는 부득불 국민당정부가 군사상에서의 실패가 이미 기정사실로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주중 미국대사 존 레이튼 스튜어트(John Leighton Stuart, 1876-1962)가 1948년 미 국무장관 마셜한테 보낸 전보문에서 “우리는 매우 원하지 않는 이러한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민당 현 정부의 붕괴는 조만간 피면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라는 형식으로 반영되었다. 그 뒤 미국정부는 국민당정부에 대한 원조의 수량과 차수를 줄이면서 대 중국 정책을 개변하기 시작했다. 한 방면으로 미국은 여전히 매 주 400만 달러 가치에 달하는 군수품을 국민당정부에 제공하는 한편 다른 한 방면으로는 장개석의 일부 요구에 대해 거절하면서 다른 출로를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1949년 1월 2일, 미국정부는 국민당 군대에 실시하던 군사훈련을 정식으로 중단한다고 선포, 동시에 주중 미국 연합 군사고문단 단장 파다비를 귀국시켰으며 1월 27일에는 주중 미국 군사고문단을 전부 철수한다고 선포하기도 했다. 미국정부는 장개석을 두고 더 이상 이상적인 인물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미국의 대 중국 이익은 이미 성사보다는 망치는 일이 더 많다고 인정하였다. 그 뒤 미국은 <중도환마(中途换马)>를 목적으로 국민당의 2인자 이종인과 접촉, 최종 장개석을 압박하여 은퇴하게 하고 이종인더러 대권을 잡게 했다. 헌데 유감스러운 것은 미국의 부축 하에 대권을 잡은 이종인이었건만 그 역시 국민당의 독재정치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아울러 장개석 또한 진짜 은퇴한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되어 1949년 봄에 북경에서 있는 국공 양당의 평화담판은 철저히 파탄되었다. 이와 더불어 미국은 <중국 내정 개입>의 목적이 실패로 돌아가자 백서를 발표하여 책임을 국민당 정권에 떠밀면서 더 이상 중국 내정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고 표했다. 이렇게 되어 중국공산당은 중국내정에 개입하려는 미국의 전략을 억제시키는 역사적인 승리를 취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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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10
  • [연재] 진의(秦怡)-눈물겨운 김염(金焰)과의 결혼생활②
    ▲진의와 유명 영화배우 김염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이혼 후 진의는 다시는 결혼하지 않고 모든 정력을 쏟겠노라고 맹세했다. 하지만 맹세는 어디까지나 맹세에 그쳤고 실행은 아니었다. 그리고 진의의 그러한 맹세는 조선인 남자 김염(金焰)의 등장으로 크게 흔들렸다. 김염(원명: 김덕린) ㅡ 1910년 조선 서울에서 태어난 김염은 1912년 한의사이며 독립운동가인 부친한테 지명 수배령이 떨어지자 가족을 따라 중국 흑룡강성 치치할시에 이주, 1919년 부친이 사망되자 상해에 있는 고모한테로 가서 의탁했다. 그 뒤 고모가 천진으로 이주하자 김염은 천진 남개 중학교에서 공부하면서 혁명사상을 접수하게 되었고 남개 중학교를 졸업한 후엔 홀로 배에 올라 다시 상해로 향발, 상해에서 그는 소설도 써보고 영화회사의 잡부로 일하기도 하면서 유랑걸식 생활을 하다가 1934년 영화계에 입문했다. 영화 <대로(大路)>에 출연하면서 자기의 예술적 재능을 과시했으며 뒤이어 영화 <야초한화(野草闲花)>, <신도화선(新桃花扇)>, <들장미(野玫瑰)>와 <장지능운(壮志凌云)> 등 수많은 영화의 주인공으로 출연하면서 1930연대부터 상해의 <영화황제>로 입지를 굳혔던 김염이었다. … 이러한 김염이었으니 진의한테 있어서 우상이나 다름이 없었으며 그녀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그것이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다. 기실 진의가 김염을 알게 된 것은 1941년 김염의 생일연회에서였다. 당시 진의한테 있어서 김염은 우상같은 인물이었으나 둘 다 가정이 있는 상황이어서 진의는 김염에 대해 별다른 감정같은 것은 없었다. 하지만 일본이 패망하고 김염과 진의가 선후로 상해로 다시 왔을 때는 이미 둘 다 가정이 없는 상황이었다.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여기에는 이런 짤막한 스토리도 있었다. 당시 김염과 진의는 영화 <망망한 대해(海茫茫)>를 함께 촬영하면서 함께 있을 기회가 많았다. 그리고 홀아비로 된 김염은 자주 진의 집에 가서 진의의 어머니와 언니 등과 함께 마작도 두고 한담도 하고 음식도 얻어 먹 군 했다. 그럴 때마다 진의보다도 진의 어머니가 김염을 더 반겨 맞 군 했으며 맛나는 것을 감췄다가는 김염이 올 때마다 내놓군 했다. 그러고는 김염의 눈치를 보아가면서 “내 딸이 자네를 좋아하는 것 같아. 자네 생각은 어때?”라고 하면서 김염의 속마음을 떠보기도 했다. 이러자 진의는 “엄마, 난 결혼하지 않을 거야”라고 하군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진의는 혼자서 전 가정의 11명 식구들의 호구를 책임져야 했다. 그러니 결혼보다는 일심전력으로 영화나 희곡에 출연하여 돈을 버는 것이었다. 하지만 진의 역시 여인이었으며 더군다나 사랑을 알고 사랑을 갈망하는 젊은 여인이었다. 거기에 김염같은 대 스타가 나타났으니 흔들리고 설레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시기, 진의는 홍콩에 가서 자주 연예활동을 하군 했다. 그러면 홍콩의 거리에는 김염도 나타 나군 했다. 하긴 김염의 영화계 동료들이 홍콩에 많은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김염의 진정한 홍콩행 목적은 진의와 함께 있고 싶어한다는 것을 그의 동료들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김염의 옛 동료 오조광(吴祖光)이 불쑥 진의 앞에 나타나더니 “당신들은 왜 아직도 결혼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그 뒤부터 오조광은 더욱 열성스레 앞뒤를 뛰어다니며 동료들을 선동, 나중에는 문예계의 거장 곽말약까지 설복하여 두 사람 결혼의 증명인으로 나서게 했다. 이렇게 1947년 25세의 진의와 37세의 김염은 결혼에 올인하였고 곽말약 선생을 청해 결혼 증명인을 맡게 했다.<다음에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0-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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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우쉰·황레이·탕웨이, 드라마타운 행사 참석
    [동포투데이] 일부 네티즌이 SNS에 공유한 장시 후이창 드라마타운 개막식 영상과 사진에는 행사에 참가한 황레이(黄磊), 저우쉰(周迅), 탕웨이(汤唯) 등 모습이 담겼다. 황레이는 검은색 슈트 차림으로 등장했고, 단정한 머리를 하고 있어 산뜻해 보였다. 저우쉰은 프린트된 레깅스에 블랙 재킷과 네이비 컬러의 와이드 팬츠를 매치해 동양적이면서도 클래식한 멋을 뽐냈다. 탕웨이는 검은색 이너에 말차녹색 재킷과 카키색 바지, 긴 머리를 늘어뜨린 캐주얼한 모습을 연출했다. 황레이, 저우쉰, 탕웨이 등이 행사장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많은 팬들이 와서 쪼그려 앉아 기다렸고, 이들이 등장하자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이름을 외치며 환호했다. 이들 또한 팬들의 호명에 일일이 화답하며 팬들을 즐겁게 했다. 저우쉰이 등장했을 때, 그녀는 마침 동료와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팬들의 호명에 손을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탕웨이는 무대에 등장하자 팬들에게 직접 손을 흔들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행사 기간 동안 황레이, 저우쉰, 탕웨이는 주최 측의 안내하에 행사장을 방문하고 현장을 둘러보았다. 많은 참석자들은 저우쉰과 탕웨이를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고 전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저우쉰이 정말 말랐지만 매우 아름다웠다고 말했다. 탕웨이는 마른 체형이지만 키가 170cm가 넘는 큰 키가 눈에 띄고 기질도 좋아 보였고 웃으면 목춘풍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컨디션이 좋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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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7
  • 제80회 베니스 국제영화제 개막
    [동포투데이] 제80회 베니스 국제영화제가 30일 저녁 이탈리아 물의 도시 베니스에서 개막했다. 총 23편의 영화가 본선에 진출해 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놓고 경쟁을 펼친다. '라라랜드'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은 데이미언 샤젤은 이번 영화제 심사위원장을 맡아 8명의 다른 심사위원들과 함께 올해 황금사자상 등 주요 대상을 누가 차지할지 결정하게 된다. 개막식에서 이탈리아 여성 감독 릴리아나 카바니가 평생공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이탈리아 에도아르도 데 안젤리스 감독의 '코만단테'가 영화제 개막작으로 이날 밤 세계 최초 개봉됐다. 이번 영화제는 9월 9일 폐막하며, 수상자는 폐막식에서 발표된다. 이탈리아 베니스 국제영화제는 프랑스 칸 국제영화제, 독일 베를린 국제영화제와 함께 유럽 3대 국제영화제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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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1
  • 탕웨이, 제16회 아시안필름어워즈 최우수 여우주연상 수상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13일, 펑황망에 따르면 12일, 홍콩에서 열린 제16회 아시안필름어워즈 시상식에서 중국 배우 탕웨이(汤唯)가 ‘헤어질 결심’으로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으나 허리 부상으로 참석하지 못해 박해일이 대신 수상했다. 한편 량차오웨이(梁朝偉)가 ‘바람이 다시 불 때’로 우수 주연상과 함께 아시아영화 공헌 영예 대상도 받았다. 흥미로운 것은 아내 류자링(刘嘉玲)이 남편에게 직접 상을 수여했다는 점이다. 다음 일본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브로커’로 우수 감독상을 받았다. 이번 심사단은 장이머우(张艺谋)가 심사위원장을 맡았다. 이에 앞서 탕웨이는 제27회 춘사영화상, 2022년 한국 부일영화상, 제42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제43회 청룡영화상, 제42회 황금 촬영상, 제9회 한국영화제작가협회상 등의 7개 ‘여우수주연상’을 연속 수상했다. ‘헤어질 결심’은 박찬욱 감독의 멜로 영화로 탕웨이, 고경표, 박해일, 유태오, 이정현, 박용우가 주역을 맡았으며 올해에 있은 제75회 칸국제영화제에서 단숨에 감독상을 거머쥐었다. ‘헤어질 결심’은 '아가씨' 이후로 6년 만에 나온 박찬욱의 11번째 장편 영화. 산에서 벌어진 변사 사건을 수사하게 된 형사가 사망자의 아내와 만난 후 의심과 관심을 동시에 느끼며 시작되는 이야기를 그렸다. 박찬욱 감독은 탕웨이가 여주인공으로 캐스팅된 이유에 대해 “영화 ‘색계’를 보고 함께 일하고 싶었으며 탕웨이는 우리가 만들고 싶은 캐릭터였다”고 밝혔다. 한편 탕웨이의 차기작은 AI를 소재로 한 한국 영화 ‘원더랜드’로, 탕웨이는 ‘만추’에 이어 두 번째로 김태용과 호흡을 맞췄으며 공유, 박보검, 수지, 정유미, 최우식 등이 주연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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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13
  • 전통여성의 소박한 형상을 스크린에 올린 中 영화배우-백양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민국시기인 1947년에 제작된 영화 ‘동으로 흐르는 봄 물결(一江春水向东流)’은 문화혁명 시기 상영이 금지되었다가 70년대 말 재방영이 되자 이 영화를 두 번 이상을 본 관람객은 기수부지였으며 심지어 다섯 번 이상 본 이들도 적지 않았다. 40년대에 제작된 영화, 그것도 흑백영화가 왜 이다지도 관객들의 마음을사로잡았을까? 그것은 간단했다. 영화에서의 여주인공의 연기력 때문이다. 그 여주인공의 이름은 백양이다. 백양(白杨-1920년 4월 22일~1996년 9월 18)일)의 본명은 양성방(杨成芳)으로 본적은 중국 호남성 멱라(汨罗)시 고륜향(古仑乡)이며 출생지는 북경이다. 백양의 기억에 따르면 그가 태어날 당시 백양의 부모는 중남경녀(重男轻女)의 봉건의식이 매우 농후하였기에 여아이로 태어난 백양은 부모로부터 가정과 남자에 순종하는 사상을 진절머리가 나도록 주입받았다. 한편 백양은 어릴 적부터 유모에 의해 시골로 끌려가 생활하면서 신물이 나도록 가난과 고난을 겪었다. 1931년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자 더 이상 어머니처럼은 살 수 없다고 생각한 백양은 연화영업공사(联华影业公司)가 북평에 설립한 배우양성소를 찾아갔으며 거기에서 무성영화 ‘고궁신원(故宫新怨)’에서 여자아이의 역을 맡으면서 영화계에 데뷔했다. 영화회사가 해체되자 백양은 극단 ‘보리바(苞莉芭)’에 가담해 연극 ‘난종(乱钟)’, ‘전우’ 등에 출연했으나 얼마 후 이 극단은 강제 해산됐다. 1934년 백양은 선후로 중국여행극단과 중국무대협회 등 극단에 입사했다가 1936년 다시 상해의 스타필름회사 제2 지사가 설립되자 홍심(洪深) 소개로 계약을 맺고 첫 영화 ‘십자거리(十字街头)’에 주역으로 출연했다. 영화에서 백양은 사랑스럽고도 지독한 여직원 양지영(杨芝瑛) 역을 맡았다. 백양은 또 1937년 가족영화 ‘사천금(四千金)’에 출연하였고 같은 해에는 장석천(张石川) 감독이 연출하는 ‘사회의 꽃(社会之花)’에 출연하기도 했다. 1937년 ‘7.7’사변 발발 이후 백양과 진백진(陈白尘), 심부(沈浮) 등은 영화극단을 결성해 항일구국을 알리는 공연을 펼치기로 했다. 그리고 1939년에는 자오단(赵丹) 등과 함께 영화 ‘중화의 아들딸(中华儿女)’에 출연했으며 1940년에는 손유 감독의 영화 ‘창공 만리’에도 선보였다. 또한 같은 해 도금(陶金)과 합작하여 항일영화 ‘청년중국’에서 주역을 맡았다.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자 백양의 영화배우 생애에도 전성기가 찾아왔다. 1946년 백양은 영화 ‘팔천리 길운과 달(八千里路云和月)’, 1947년에는 영화 ‘동으로 흐르는도도한 물결’에서 주역를 맡는 등 말 그대로 그녀의 영화배우 생애에는 전성기가 찾아왔다. 1949년 새로운 공화국이 탄생하자 백양은 여전히 변함없이 영화배우 생활에 충실하면서 많은 영화에 출연하였다. 1950년엔 ‘단결하여 내일에로(团结起来到明天)’, 1956년에는 중국의 첫 칼라 영화 ‘축복’에서 주역을 맡았으며 1960년에는 전쟁영화 ‘동매(冬梅)’에서 주역을 맡았다. 이 외에도 해방 후 백양이 출연한 영화들로는 ‘평화를 위하여(为了和平1955년)’, ‘김옥희(金玉姬-1960년)’, ‘봄빛 찬란한 세상(春满人间)-1959년’ 등 여러 편이 있으며 그가 출연한 드라마로는 중국의 저명한 여성 지도자 송경령의 생애를 부각한 ‘인간세상에 뿌려지는 건 모두 사랑(1989년-洒向人间都是爱)’이 유일했으며 이 드라마의 출연으로 백양은 중국 방송․영화TV드라마 부문의 영예 배우상을 받았다. 백양의 예술풍격은 소박하고 아름다우며 자연스러우면서도 동양 여성의 자태 표현에 능숙하다. 특히 그녀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여성의 모습을 잘 형상화했다. 백양은 자신이 가진 여성스러움과 배역을 절묘하게 결합해 관객들에게 무한한 동정심을 부여함으로써 항상 사랑과 존경을 받아왔다. 그가 연기하는 모습의 하나하나가 관객들에게 인정받았으며 맘속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 깊고도 다각적인 연기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녀가 출연하게 되는 인물에 대한 깊은 연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1995년, 세계 영화 탄생 100주년, 중국 영화 탄생 90주년을 맞아 백양은 중국 국가 문화부로부터 중국 영화 세기 상, 여배우상을 수여받았다. 1996년 9월 18일, 백양은 향년 76세로 별세했다. 백양의 임종은 남편 장군초(蒋君超), 아들 장효송(蒋晓松)과 딸 장효신(蒋晓真) 그리고 언니 양말(杨沫)이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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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28
  • 시대를 빛낸 할리우드 여배우- 마릴린 먼로②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지난번 계속) 마릴린 먼로의 본명은 노마 진 베이커이다. 그녀의 외할아버지 성은 먼로, 그는 정신 질환으로 앓고 있는 자동차 엔지니어였으며 늘 자신을 제임스 먼로 대통령의 자손이라고 했다. 그리고 외할머니인 델라에게도 정신적인 장애가 있어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하면 매우 격렬했다. 그런가 하면 어머니 글래디스는 MGM 콜롬비아의 한 영화제판공장에서 스크랩 작업을 했으며 어머니 역시 심각한 정신분열증 환자로 평생 수용소 출입이 아주 잦았다고 한다. 1942년 6월 19일, 마릴린 먼로는 제임스 아이젤 돌티와 결혼했으나 1946년 9월 13일 첫 결혼은 이혼으로 막을 내렸다. 그 뒤 마릴린 먼로와 조 디마지오는 1954년 1월 14일 샌프란시스코의 한 모텔에서 결혼식을 올린 뒤 2월 2일 일본 도쿄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이들이 혼인신고를 한 지 274일 만에 마릴린 먼로가 이혼을 제출했고 1954년 10월 31일, 법원은 마릴린 먼로가 조 디마지오와 이혼하라고 판결했다. 뒤이어 마릴린 먼로는 1956년 6월 29일 극작가 아서 밀러와 극비리에 결혼했고 그해 8월 메릴린 먼로는 임신했지만 곧 유산했다. 마릴린 먼로는 1957년 8월 1일 자궁외 임신으로 다시 유산했다. 1961년 1월 20일 두 사람은 멕시코에서 정식 이혼하고 말았다. 18세 때 마릴린 먼로는 기독교인이 됐다. 하지만 1956년 아서 밀러와 결혼하면서 먼로는 유대교로 전향했다. 생전에 마릴린 먼로는 생전에 애완견을 많이 키웠으며 그 중 마지막 한 마리는 시나트라가 선물한 몰타 개로 이름을 지어 ‘마피아(Mafia)’라고 불렀다. 1960년 8월 28일, 마릴린 먼로는 정신과 입원치료를 받았으며 그 뒤 1961년 2월 7일 재차 뉴욕에서 병원에 입원했다가 3월 5일에 퇴원했다. 1962년 1월, 마릴린 먼로는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했으며 7월 20일 자궁내막염으로 또 입원치료를 받았다. 1962년 8월 4일, 마릴린 먼로는 심리치료사와 6시간을 보냈다. 이는 그녀의 생에 있어서 마지막 하루가 됐다. 그 이튿날 즉 8월 5일, 로스앤젤레스 경찰은 마릴린 먼로가 로스앤젤레스 브라이든무에 있는 자신의 거처에서 36세의 나이로 사망했음을 확인했다. 8월 8일, 로스앤젤레스에서는 마릴린 먼로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마릴린 먼로는 익숙한 이름이었고 익숙한 이미지였다. 그녀는 트레이드마크식의 웃음과 매혹적인 몸짓으로 하나 또 하나의 성감적이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그녀의 감동적인 연기 스타일과 죽음은 영화 팬들의 영원한 성감 적인 아이콘이자 대중문화의 대표주자로 자리 잡았다. 많은 팬들은 살아가면서 그녀의 사진들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아니 보고 또 보았을 것이다. 하얀 치마를 입고 뉴욕 거리에 있는 모습과 땅속 열기에 그녀가 걸친 치마가 나팔을 벌린 듯한 모습의 흑백사진 그리고 카메라를 향해 눈을 살짝 감은 듯 입술을 감빠는 모습, 소파 위에 하얀 다리를 드러낸 모습 등을 보노라면 사진만이 아닌 특별한 감정의 전달과 순수하고 성감적인 정국이 될 때가 많다. 공개된 사진에서 마릴린 먼로는 이전과는 다른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며 청순하기도 하고 털털하기도 한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좀 길게 땋은 머리 태, 청바지, 리넨 스커트 등은 다양한 스타일링으로 생활 속 먼로의 사랑스러움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먼로는 1962년 8월 5일, 자기의 거처이 로스앤젤레스 브라이든 무브먼트의 거실에서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숨진 채 발견됐다. 이후 케네디 대통령 암살사건을 떠올리면 마릴린 먼로의 죽음은 케네디 가문과 정치권의 암막에 휘말렸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었다. 그가 죽은지 수 십 년이 넘도록 그녀에 대한 공식 조사서류는 대부분 고급기밀로 분류돼 있었다. 2006년까지 FBI(미 연방수사국)는 미국 자유정보법에 따라 500쪽 분량의 먼로 관련 문건의 비밀을 해제했다. 그러자 마릴린 먼로의 죽음이 그가 적어놓은 비밀일기와 관련이 깊다는 사실을 역사 전문가들은 뒤늦게 밝혀냈다. 먼로의 일기에는 먼로와 케네디 형제의 ‘베갯머리 대화’가 다수 기록돼 있었다. 1962년 8월 초, 케네디 형제는 약속이나 한 듯 먼로와의 모든 왕래를 끊었다. 갑작스런 격변에 직면하여 마릴린 먼로 역시 자신의 위험을 의식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8월 4일 오후 9시 반, 그녀는 절친인 시드니 길라로프에게 전화로 케네디 형제와 있었던 자신의 사생활을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한 가지 위험한 비밀을 알고 있다”고 했다. 다음날 새벽 LA 아파트에서 숨진 채 발견된 마릴린 먼로는 공교롭게도 그날 밤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비밀 일기’도 신비롭게 사라졌으며 LA지검 사무실 또한 마릴린 먼로가 일기를 썼다는 것과 먼로의 죽음이 모살과 관련이 있다는 것도 부인했다. 2012년 5월 16일, 제65회 칸 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마릴린 먼로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제 홍보 포스터가 나붙었고 현장의 대형 스크린에는 마릴린 먼로 주연의 각종 다른 영화의 스틸 사진이 끊임없이 상영되면서 그녀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 유명 조각가 수어드 존슨이 만든 마릴린 먼로 조각상 ‘영원한 먼로’가 캘리포니아 팜스프링스에서 전시되기도 했다. 그녀는 줄곧 어떤 남자가 그녀를 사랑하기를 원했고 그녀도 전심으로 상대방을 사랑했지만 안타깝게도 먼로는 평생 이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는 여인으로서 먼로는 전심전력으로 절대적인 관심을 필요로 했다. 이런 100%의 사랑을 남편들은 주지 못했고 애인들은 더욱 주지 못했다. 지금으로부터 59년 전, 36세의 마릴린 먼로는 그 길지 않은 생을 마감했다. 하늘은 그녀에게 아름다운 용모를 주었지만 운명은 그녀에게 아름다운 인생을 주지 않았다. ‘세상의 좋은 물건은 견고하지 못하고 아름다운 구름은 쉽게 흩어진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아마도 마릴린 먼로를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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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2-01-01
  • 시대를 빛낸 할리우드 여배우- 마릴린 먼로①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그녀는 60년대까지 미국 할리우드의 유명한 여배우였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수많은 남자들 마음속에 자리 잡은 ‘유혹의 여신’이기도 했다. 마릴린 먼로-그녀의 별명은 노마 제인 모테이센(Norma Jeane Baker)으로 미국계 유대인이었으며 출생지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다. 마릴린 먼로: 출생일 1926년 6월 1일, 사망일 1962년 8월 5일, 별자리 쌍둥이자리, 혈형 AB형, 키 166cm, 몸무게 53kg, 직업 프로배우, 모델, 대표작 ‘7년차 가려움’, ‘버스터미널’, ‘용놀이’, ‘열정은 불처럼’ 등 다수 주요 성과로는 제9회 영국․TV예술아카데미상 영화상 최우수 외국여배우상, 제14회 미국영화방송 골든글로브 영화부문-뮤직코미디부문 최우수 여주연상, 제11회 영국 영화·TV예술아카데미 영화상 최우수 여배우상, 제17회 미국영화․TV 골든글로브 영화-뮤직코미디 최우수 여주역상, 100년 만의 가장 위대한 여배우 랭킹 6위… 1926년 6월 1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본병원에서 태어난 마릴린 먼로는 당시 노마 제인 모태슨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한 차례의 세례 후 그녀는 이름을 노마 제인 베이커로 변경했다. 불행한 것은 그녀가 사생아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에 멀리 타향으로 떠났으며 먼로는 태어난 지 13일 만에 브라운다이 부부의 집에서 매주 5달러씩 내기로 하고 입양됐다. 1933년 가을, 마릴린 먼로는 어머니 글라디스 바크르에게 인계되었다. 글라디스는 1935년 6월 1일 먼로의 보호자가 됐지만 몇 개월 후인 9월 13일 먼로를 고아원에 보냈다. 이어 먼로는 1937년 11월부터 안나란 여인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고교생이던 1941년 마릴린 먼로는 어린 나이에 결혼과 함께 ‘아름다운 여자’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결혼 후 마릴린 먼로는 올림픽 챔피언 하워드한테서 역도와 서핑을 배웠으며 1944년 5월부터는 항공기 무전기 제조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45년 6월 26일 마릴린 먼로는 사진작가 데이비드 코너일과 함께 잡지 사진을 찍었다. 그 때 사진작가 데이비드 코너일은 그녀가 사진을 게재하여 미군을 고무시키기를 희망했다. 마릴린먼로는 1946년 5월 26일 ‘가족권’ 잡지 표지를 통해 처음으로 얼굴을 알렸다. 1946년 7월 19일, 마릴린 먼로는 20세기 폭스로 처음으로 가게 되었고 7월 26일 폭스와 첫 6개월 계약을 맺었다. 또 머리를 황금색으로 염색하면서 ‘제인 아델’이라는 예명을 붙이기도 했다. 1948년 마릴린 먼로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 ‘슈쿠다, 허!스쿠다, 하이!(It's Shukuda, Huh! It's Shukuda, Hi!)’에서 교회를 달군 여자 역을 맡았지만 그한테 차례진 대사는 한 줄밖에 없었다. 이후 그녀는 한 영화에서 여자아이를 연기하였으나 역시 대부분의 장면은 삭제되었다. 1949년 5월 27일, 사진작가 톰 켈리는 먼로의 누드 사진을 여러 장 촬영하여 골드 미스 드림 달력을 출판했다. 하지만 먼로는 달력에 실린 자기의 사진에 싸인을 하지 않아 50달러만 받게 되었다. 그해의 8월 15일, 먼로는 뮤지컬 영화 ‘토마호크행 티켓(Tickets to Tomahawk)’의 촬영에 참여했고 10월에는 또 범죄영화 ‘밤의 밤’ 촬영에도 참여했다. 1950년 1월 5일, 먼로는 드라마 ‘화구(火球)’의 촬영을 시작했고 4월에는 또 드라마 ‘혜성미인’에서 어느 한 주요 배역을 맡았다. 같은 해 먼로는 잡지 ‘성조기’가 선정한 ‘매력 아가씨’로 뽑히기도 했다. 1951년 4월 18일, 먼로가 출연하는 애정 코미디 영화 ‘사랑의 둥지’ 촬영이 시작되면서 그해 5월 1일, 폭스는 먼로와 6개월 계약 기간을 7년으로 연장했다. 뒤이어 먼로는 1952년 5월 7일 ‘라이프(life!)’지의 표지모델로 데뷔했으며 6월 1일에는 멜로영화 ‘신사는 미인을 사랑한다’의 주역으로 발탁됐다. 그리고 그해 8월 31일 라디오 생방송에 첫 출연 했고 9월 2일에는 ‘미스 아메리카 모델 쇼’에 출연했다. 1953년 6월 26일 마릴린 먼로가 미국 연예계에 짙은 손자국과 발자국을 남겼으며 9월 13일에는 TV에 처음 등장했다. 이어 11월 5일 로렌 바이콜, 로리 캘헌과 함께 출연한 애정 코미디 영화 ‘결혼하고 싶어’가 개봉됐다. 영화에서 먼로는 어릴 때부터 백만장자와의 결혼에 목마른 성감 모델 ‘보라 드 베이워스’ 역을 맡았다. 1954년 4월 30일, 마릴린 먼로가 로버트 미첨과 함께 촬영한 서부 모험영화 ‘동으로 흐르는 강물’이 개봉했다. 이 영화에서 먼로는 팜므파탈의 바 가수 ‘카이’역을 맡았다. 먼로는 9월 1일 로맨틱 코미디 영화 ‘7년차 가려움’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이 영화로 먼로는 제9회 영국영화·텔레비전예술아카데미상 영화상인 외국여우상 후보에 올랐다. 1955년 1월 7일, 마릴린 먼로는 밀턴 그린과 함께 기자회견을 갖고 ‘마릴린 먼로 프로덕션 센터’의 설립을 발표하였고 1월 15일 20세기 폭스 프로덕션과의 계약은 종료됐다. 1956년 1월 4일, 마릴린 먼로는 20세기 폭스프로덕션과 재계약을 맺고 2월 25일 할리우드에 복귀했다. 그 때로부터 그녀는 마릴린 먼로로 개명했고 이어 3월 3일에는 주연 로맨틱 코미디 영화 ‘버스터미널’에 출연했다. 그녀는 이 영화로 제14회 미국 영화 TV 골든글로브 영화․TV 부문 여 최우수 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1957년 6월 13일, 마릴린 먼로가 로런스 올리버와 함께 주역을 맡은 로맨틱 코미디 영화 ‘드래곤 봉황’이 개봉되었다. 이 영화에서 마릴린 먼로는 관능적이고 매력적인 쇼걸 ‘엘시 마리나’의 역을 맡았으며 이 역할로 제11회 영국영화·TV예술 아카데미상 영화상-외국 여배우상 후보에 올랐다. 1958년 8월 4일, 마릴린 먼로는 애정 코미디 영화 ‘열정은 불처럼’에서 마이애미 악단의 아름다운 관능의 여인 ‘수가’ 역을 맡았다. 1960년 3월 8일 먼로는 영화 ‘열정은 불처럼’으로 제17회 미국 영화․TV 골든글로브 영화 부문-뮤직코미디 부문 여 최우수 주연상을 받았다. 1961년 1월 31일, 마릴린 먼로는 클라크 게이블, 몽고메리 클리프트와 함께 촬영한 서부 애정 영화 ‘난점 원앙보’가 개봉됐다. 1962년 3월 5일, 마릴린 먼로는 ‘세계 최고의 여배우상’을 수상했고 이어서 4월 23일에는 그녀는 주연 코미디 단편 영화 ‘멘붕’ 촬영을 시작했다. 1962년 6월 1일은 마릴린 먼로의 20세기 폭스프로덕션에서의 마지막 출근 날이자 마지막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날이었다. 6월 7일, 20세기 폭스프로덕션은 먼로와 계약을 종료했다. 하지만 그해의 8월 1일, 20세기 폭스프로덕션은 월급을 2배로 주기로 하고 마릴린 먼로를 다시 고용하기로 결정했으며 8월 3일, 먼로는 ‘라이프’지의 표지를 장식하는 ‘멘붕'의 재촬영에 동의하면서 ‘라이프’지의 표지모델이 됐다. 1999년 미국영화학회가 선정한 ‘100년 만에 나타난 가장 위대한 여배우 랭킹’ 6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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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29
  • 中, 영화 ‘장진호’ 국경일 하루 관객 4억명 돌파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지난 9월 30일 중국에서 개봉 첫날에 관객 2억을 돌파한 영화 ‘장진호’ 국경일 하루 4억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하며 개봉 이후 파죽지세의 흥행으로 치닫고 있다. ‘장진호’는 제작 규모, 투자 규모, 촬영 기간, 출연진과 스태프 수 모두 중국 영화 역사상 최고 기록을 세웠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영화 준비 기간은 2년 이상 지속되었으며 초기 단계에는 7,000명 이상이, 후반에는 12,000명이 영화에 참여하였으며 100,000명 이상의 엑스트라가 동원됐다. 10월 1일 20시 35분 현재 ‘장진호’와 ‘나와 나의 아버지 세대’ 등 2부의 영화에 힘입어 국경절 첫날 티켓 판매액은 이미 6억 위안을 돌파하였으며 국경절 첫날 티켓 판매는 역대 3위에 올랐다. ‘장진호’는 2일 만에 누적 흥행 6억 위안을 기록 중이며 또 다른 국경절 연휴 기간의 새 영화 ‘나와 나의 아버지 세대’는 개봉 2일 만에 누적 티켓 판매액 2억6000만 원을 돌파했다. ‘장진호’는 6.25 전쟁 기간인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24일까지 북한 장진호 지역에서 중국군 제9병단과 미 제10사가 직접 대결한 내용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이다. 장진호 전투에서 중국군 제9병단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무기 장비가 세계 일류이고 전공이 혁혁한 미 10사와 직접 교전하였던 곳으로 당시 미군 1개 사를 골탕 먹이면서 이 미군 정예부대는 역대 최장기 퇴진을 경험하게 됐다. 한편 2021년 상반기 중국 영화 매출은 30억1200만 위안으로 전년 동기 대비 553.23% 증가했고, 순이익은 3억500만 위안의 흑자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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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02

스포츠 검색결과

  • [월드컵 2차 예선]중국, 싱가포르에 4-1 대승
    [동포투데이] 이반코비치 감독이 이끈 중국은 26일 톈진 올림픽센터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6 북중미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 C조 조별리그 4차전 싱가포르와 홈경기에서 우레이(21',85), 페르난둬(65'페널티), 웨이시하오(90')의 골에 힘입어 4-1로 대승을 거뒀다.(사진출처 : 차이나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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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7
  • 이반코비치 중국 대표팀 감독 “최종 목표는 월드컵 진출”
    [동포투데이] 8일 오전 11시, 중국축구협회는 톈진에서 브란코 이반코비치 신임 축구대표팀 감독을 위한 정례 기자회견을 마련했다. 크로아티아 출신의 이반코비치 감독은 "이렇게 많은 기자들이 참석해 깊은 인상을 받았다. 위대한 국가인 중국 축구 대표팀의 감독이 된 것이 매우 자랑스럽습니다"라고 말했다. 중국 대표팀은 3월 21일과 26일 조별리그 36강전 싱가포르와의 연속 경기를 앞두고 있다. 이반코비치는 “지금 기자회견부터 경기까지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리그가 시작된 지 얼마 안돼 선수들의 경기 감각도 좋지 않다”라고 털어놨다. 이어 "우리의 1차 목표는 최종예선 진입이고 최종 목표는 강한 국가대표팀을 구성해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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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9
  • 中 U-20 여자축구, 일본에 완패…월드컵 진출 불투명
    [동포투데이] 7일 밤에 끝난 AFC U-20 여자 아시안컵 경기에서 중국이 일본에 0 : 2로 패하면서 U-20 여자 월드컵 진출이 이론상으로만 가능해졌다. 이번 U-20 여자 아시안컵에서 중국은 전년도 준우승팀인 일본, 그리고 전년도 준우승팀인 북한과 같은 조에 편성되어 있어 U-20 여자월드컵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조 2위 안에 들어가야만 했다. 상대의 강한 실력에 비해 중국은 라인업이 불규칙했고 중앙수비수인 차오루치(乔睿琪)가 경기 준비 마지막 순간 부상으로 물러났다. 1차전에서 중국은 1 : 1로 힘겹게 북한과 비기면서 월드컵에 진출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했다. 일본은 지난 경기에서 베트남을 10 : 0으로 대파했다. 중국은 월드컵 진출의 주도권을 유지하려면 이번 경기에서 적어도 골을 넣어야 하고 최소 1점을 따내야 했다. 왕쥔(王军) 중국팀 감독은 경기 전 “일본은 기술이 뛰어난 팀이고 아시아에서는 최고의 강팀”이라며 “북한과의 경기에서 우리는 필사적으로 싸워야 하고 일본과의 경기에서는 기술력을 보여줘야 한다”고 언급했다. 지난 경기에 비해 중국팀의 이번 라인업이 다소 미세하게 조정되었으며 리팅잉거(李渟英格), 장천징(姜晨璟), 천자위(陈佳宇)가 선발로 나섰다. 초반에는 양 팀 모두 골문 앞의 절대적인 찬스가 있었지만, 득점을 못했다. 경기 20분 중국은 상대의 실수를 기회를 만들었지만, 아쉽게도 루자위(卢家玉)의 슛은 상대 골키퍼에 의해 무산되었다. 26분 페널티 구역에서 동료의 크로스를 받은 일본의 마야 히지카타가 슈팅으로 승부의 균형을 깨뜨렸고 88분에 아마노 스즈가 페널티 지역 정면에서 얻은 프리킥을 득점으로 연결하며 승리에 쐐기를 박았다. 이번 대회에는 8개 팀이 참가하며, 중국은 일본, 북한, 베트남과 함께 B조에 편성됐다. 각 조 상위 2개 팀이 본선에 진출해 2024년 콜롬비아 U20 여자 월드컵 출전권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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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8
  • 파리올림픽 · 패럴림픽 공식 포스터 공개
    [동포투데이] 파리 올림픽과 패럴림픽 공식 포스터가 3월 4일(현지시간) 오르세 미술관에서 공개되었다. 프랑스 유명 일러스트레이터 우고 가토니가 만든 이 두 포스터는 올림픽 포스터 역사의 큰 혁신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요소가 많고 디테일이 풍부해 기존 올림픽 포스터 디자인의 전통을 깼다. 색채 활용에 일가견이 있는 예술가로서, 가토니는 파리와 프랑스의 상징적인 요소들과 이번 올림픽과 패럴림픽의 모든 스포츠를 포함하는 다원적이고 번영하는 미시세계를 상상했고, 동시에 파리 올림픽의 혁신적인 특징들을 보여주었다. 올림픽과 패럴림픽이 동등하게 중요하다는 이념을 부각시키기 위해 두 개의 포스터를 별도의 두 작품으로 볼 수도 있고, 하나로 합쳐 하나의 거대한 그림으로 완성할 수도 있는데, 왼쪽이 올림픽, 오른쪽이 패럴림픽이다. 가토니는 "디자인한 영감의 원천은 파리의 랜드마크 건물들을 재배열한 거대한 도시 경기장"이라며 "에펠탑은 스타드 드 프랑스 중앙을 관통하며 센 강, 개선문, 콩코드 광장 등이 자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멀리서 보면 마치 즐거운 스포츠 카니발처럼 보이는 포스터 전체는 즐거운 스포츠 축제를 원하는 파리 올림픽 조직위원회의 비전과도 부합하며, 가까이서 보면 포스터의 수많은 디테일들이 관객들에게 발견의 즐거움과 새로운 탐구의 충동을 선사한다. 포스터에는 파리 올림픽 마스코트 8개가 숨겨져 있어 찾는 데 시간이 걸린다. 올림픽 오륜기와 패럴림픽 삼색 엠블럼, 대중 마라톤, 올림픽 격언 등도 찾아볼 수 있다. 두 포스터 모두 그가 직접 그린 것으로 전체 제작 과정은 약 2000시간이 걸렸다. 토니 에탕게 파리 올림픽 조직위원장은 이 두 포스터에 매우 만족하고 있다. 에탕게는 "이것은 단순한 포스터가 아니라 가능한 한 많은 요소를 담고 싶고, 남들과 다르길 원한다"며 "이는 올림픽 역사상 새로운 시도"라고 말했다. 두 포스터는 3월 10일까지 오르세 미술관에서 전시될 예정이다. 두 포스터는 공개 시점부터 파리 2024 공식 온라인 스토어에서 각각 29유로에 판매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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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7
  • 네덜란드 국가대표 프로메스, 마약 밀매 혐의로 징역 6년 선고
    [동포투데이] 유럽타임스(European Times) 보도에 따르면 암스테르담 지방법원은 14일 스파르타크 모스크바에서 뛰고 있는 네덜란드 국가대표 퀸시 프로메스(Quincy Promes)가 1톤 이상의 코카인을 네덜란드로 밀반입한 혐의로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고 밝혔다. 법원은 2020년 프로메스가 공범자들의 도움으로 벨기에 앤트워프 항구를 통해 브라질에서 네덜란드로 1,363kg의 코카인을 운송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고 추정했다. 프로메스의 변호인은 검사가 프로메스에게 징역 9년을 구형했고 프로메스는 항소할 것이라고 밝혔다. 네덜란드 국가대표로 50경기 출전한 32세의 이 선수는 네덜란드 경찰에 체포될 것을 우려해 법원에 출석하지 않았다. 현재 프로메스에 대한 국제 체포 영장이 발부된 상태이며 그는 아직까지 러시아로부터 송환되지 않았다. 프로메스는 또 다른 사건에서 목걸이를 도난당한 후 사촌동생을 칼로 찌른 혐의로 18개월의 금고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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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19
  • 아시안컵 첫 이변, 일본 이라크에 1-2로 패배
    [동포투데이] 일본은 19일 오후 8시30분 카타르 알라이얀의 에듀케이션 시티 스타디움에서 열린 이라크와의 '2023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조별리그 D조 2차전 경기에서 1-2로 패배하면서 한 라운드 앞당겨 16강에 진출할 기회를 놓쳤다. 이는 지금까지 아시안컵에서 생긴 가장 큰 이변이다. 이번 경기는 세계랭킹 17위이자 아시아 랭킹 1위인 일본이 세계랭킹 63위인 이라크와 치르는 경기였다. 그렇다 할 스타가 없는 이라크는 견고한 밀집 수비와 역습으로 두 골로 일본을 꺾으면서 최근 국제무대에서 일본의 11연승 기록을 깨뜨렸다. 경기 5분 만에 이라크는 전방에서 공을 가로채며 빠르게 반격했고, 이 과정에서 아이멘 후세인이 일본 골키퍼 스즈키 아야키 실수를 기회로 삼아 골문을 갈랐다. 전반전 마지막 순간 아이멘 후세인이 추가골을 터뜨리며 승부를 두 골 차로 벌렸다. 경기가 지속됨에 따라 일본은 결정적인 찬스를 놓치면서 득점에 실패했고, 추가 시간에 코너킥 찬스에 의해 1점을 만회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일본으로서는 다소 늦은 득점으로 끝내 판세를 바꾸지는 못했다. 결국 이라크가 2-1로 일본을 이겼다. 경기 이후 이라크는 2승 6패로 D조 1위를 차지하면서 1경기 앞당겨 16강 진출을 확정 지었고 유력한 우승 후보 일본으로 뼈아픈 1- 2 패전에 땅을 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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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20
  • 8회 챔피언 광저우 헝다, CEO 체포되고 부채는 수조위안
    [동포투데이] 최근 에버그란데(헝다·恒大) 고위급 간부 류융줘(劉永灼)가 범죄 혐의로 구금되었다. 이로써 에버그란데 그룹 이사회 회장 쉬자인(許家印), 신에너지차 부회장 류융줘, 전 에버그란데 축구단 회장 커펑(柯鵬)등이 구금되었고, 에버그란데 그룹은 수조 위안의 부채를 떠안았다. 광저우로 이름을 바꾼 에버그란데는 이미 2부리그로 강등되었고, 호화 맴버는 뿔뿔이 흩어졌다. 현재 주로 젊은 선수들로 대체되었지만 축구협회의 빚 청산 1차 명단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에버그란데는 2011년 승격팀으로 중국 슈퍼리그에 출전해 그해 시즌 우승을 차지했고, 이후 7년 연속 중국 슈퍼리그 정상에 오른 데 이어 또다시 우승을 차지하며 다롄 완다가 세운 중국 최고 리그 8회 우승 기록과 타이를 이뤘다. 광저우 축구단의 전신은 1954년에 설립된 광저우시 축구단이다. 1993년 1월, 광저우시 축구단은 태양신 그룹과 합작하여 중국 최초의 정부와 기업이 공동 소유한 프로축구단이 되었다. 2010년 3월 1일 광저우 에버그란데 축구단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2013년에는 중국 축구단 최초로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했으며, 같은 해에 AFC 최우수 클럽상을 수상했다. 2021년 1월, 구단 명칭을 '광저우 축구단'으로 변경하였으며, 2022 시즌, 2부 리그로 강등되었다. 에버그란데는 중국 슈퍼리그 8회, 중국축구협회 슈퍼컵 4회, 중국축구협회 컵 2회, 아시아챔피언스리그 2회, 중국축구협회 2부리그 2회 우승을 차지했다.
    • 스포츠
    2024-01-10
  • 브라질 축구 ‘전설’ 자갈루 92세의 나이로 별세
    [동포투데이] 월드컵 4회 우승이자 브라질 축구의 전설 마리오 자갈루가 92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자갈루의 가족은 토요일 새벽 그의 사망 소식을 발표했다. 브라질 축구협회는 자갈루가 유일하게 월드컵 4회 우승을 차지한 전설이라고 밝혔다. 1931년 브라질 아라고아스에서 태어난 그는 선수와 감독 시절 큰 성공을 거두었다. 선수 시절 자갈루는 작은 클럽에서 시작해 브라질 내 큰 클럽인 플라멩코, 보타포고에서 뛰었다. 주로 왼쪽 측면 중앙 미드필더로 활약한 그는 1958년과 1962년 펠레, 가린샤와 함께 브라질의 월드컵 2회 연속 우승에 기여했다. 1970년 은퇴한 자갈루는 감독으로 브라질을 월드컵에 출전시키고 우승까지 거머쥐었다. 이로써 월드컵 3회 우승을 거둔 삼바군단은 당시 세계 축구계 최고의 영예였던 쥘 리메 컵을 영구 보존할 수 있게 됐다. 이와 함께 자갈루는 선수와 감독으로서 월드컵을 우승한 최초의 전설이 되었다. 자갈루를 제외하고 지금까지 이 업적을 달성한 사람은 독일의 축구 황제 베켄바우어와 프랑스 축구계의 거물 디디에 데샹뿐이다. 1994년 예순을 넘긴 자갈루는 페레이라 감독을 보좌하며 브라질의 월드컵 진출과 또 한 번의 우승을 이끌었다. 삼바군단의 첫 네 차례 월드컵 우승 과정에는 모두 자갈로가 등장했다. 오늘날 브라질이 '축구 왕국'으로 불리는 데는 자갈루의 공이 크다. 자갈루는 브라질 대표팀 역사상 두 번이나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몇 안 되는 감독 중 한 명이기도 하다. 하지만 1998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브라질은 개최국 프랑스에 0:3으로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감독으로서 자갈로는 5번째 월드컵 우승의 기회를 놓쳤고, 그 결승전 때문에 팬들의 비난을 받았다. 브라질축구협회는 '영원한 챔피언'이었던 자갈루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7일간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 브라질축구협회로드리게스 회장은 자갈루가 브라질 축구계의 가장 위대한 전설 중 한 명이라며 "우리의 축구 우상이 떠난 것을 아쉬워하는 이 시점에서 브라질축구협회는 그의 가족과 팬들에게 위로를 표한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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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7
  • 신화통신 선정 '2023 세계 10대 스포츠 선수'
    [동포투데이] 신화통신이 '2023 세계 10대 스포츠 선수'를 다음과 같이 선정했다. 1. 막스 베르스타펜(네덜란드, 男 26세, 스포츠카) 2023시즌 포뮬러원 챔피언십(F1)이 마무리되는 아부다비 그랑프리에서 레드불 레이싱팀의 베르스타펜이 폴포지션을 잡고 정상에 올랐다. 이로써 그는 올해 22개 대회에서 21차례 포디움에 오르며 19개 대회에서 우승하며 F1 시즌 승률 기록을 갈아치웠다. 앞서 지난 10월 카타르 그랑프리에서는 올해의 드라이버 종합 우승을 일찌감치 차지한 바 있은 베르스타펜이다, 이번 우승은 그의 3회 연속이다. 사진은 지난 3월 5일, 레드불 레이싱의 네덜란드 선수인 막스 베르스타펜이 세계 포뮬러 원 챔피언십(F1) 바레인 그랑프리 본선에서 우승을 자축하고 있는 모습이다. 2. 아이타나 본마티, (스페인, 女 25세, 축구) 본마티는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열린 여자월드컵에서 팀메이트들과 함께 미드필드 핵심으로 활약하면서 팀의 사상 첫 우승컵을 안았고, 개인적으로는 이번 월드컵에서 골든글로브를 수상했다. 지난 10월에 열린 2023년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는 여자 골든글로브 수상이 유력하게 점쳐졌다. 사진은 지난 8월 20일 스페인 대표팀 아이타나 본마티가 2023년 여자축구 월드컵 시상식에 참석하고 있는 모습이다. 3. 니콜라 요키치(세르비아, 男 28세, 농구) 2022∼2023시즌 메이저리그(NBA)에서 덴버 너기츠를 창단 첫 종합 우승컵으로 이끈 세르비아 출신의 미드필더 요키치는 파이널 MVP에 개인적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시즌 MVP로 3연속 선정되지는 못했지만 시즌 평균 24.5점, 11.8개의 리바운드, 9.8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정상을 지켰다. 지난 6월 12일, 덴버 너기츠의 니콜라 요키치(전좌)가 2022-2023 시즌 NBA 파이널 MVP로 선정(사진)되었다. 4. 시몬 바일스(미국, 女 26세, 체조) 미국 체조선수 바일스가 심리적 문제로 도쿄올림픽에서 리타이어하는 파란을 겪은 뒤 2023년 화려하게 돌아왔다. 지난 8월, 그는 전미선수권대회에서 사상 8번째로 여자 종합 우승을 차지했다. 10월 체조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4년 만에 종합 금메달을 목에 걸며 세계선수권대회 종합 6관왕에 올랐다. 이로써 26세의 바일스는 체조 역사상 올림픽과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가장 많은 메달(34개)을 획득한 선수가 됐다. 사진은 지난 10월 8일, 미국 선수 사이먼 바일스가 2023년 체조 세계선수권 평균대 시상에 나서는 모습이다. 5. 미카엘라 시플린(미국, 女 28세, 스키) 2022-2023 눈시즌에는 미국의 스키선수 시플린이 알파인스키 월드컵에서 이탈리아 쾰른플라츠에서 열린 예선에서 여자 그랜드슬램으로 우승을 차지하며 83승으로 월드컵 최다 여자 알파인스키 선수가 되었고, 시즌이 끝날 무렵에는 이를 88경기로 경신하며 스웨덴 남자선수 스텐마르크의 86경기를 제치고 월드컵 역사상 최다 우승을 차지하였다. 사진은 미국 선수 미카엘라 시플린이 2023년 1월 4일 자그레브 알파인 스키 월드컵 여자 회전 경기에서의 모습이다. 6. 켈빈 킵툼(케냐, 男 24세, 육상) 2023년 시카고 마라톤에서 킵탐은 2시간 0분 35초로 완주하며 남자 마라톤 세계 신기록을 수립했고, 공식 경기에서 2시간 1분을 돌파한 최초의 마라톤 선수가 되기도 했다. 당시 그의 우승 기록은 케냐 명인 킵초그가 세운 2시간 1분 9초의 전 세계 기록을 34초나 뛰어넘었다. 사진은 지난 4월 23일 케냐의 캘빈 킵툼이 런던 마라톤에서 결승선을 통과하는 모습이다. 7. 케일리 맥커운 (호주, 女 22세, 수영) 호주의 명장맥커운이 후쿠오카 수영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여자 50, 100m, 200m 배영 우승을 석권하면서 중국의친하이양(覃海洋)과 함께 같은 세계선수권대회에서 3관왕에 올랐다. 월드컵 시리즈에서 여자 배영 금메달 9개를 석권하고 부다페스트에서는 50m와 100m 배영 결승에서 두 차례 세계 기록을 경신하면서 여자 50m, 100m, 200m 배영 세계 기록을 모두 석권하였으며, 지난 10월에는 세계수영연맹 올해의 여자 수영 선수로 선정되었다. 사진은 지난 7월 29일 호주 선수 맥커운이 후쿠오카 수영 세계선수권대회 여자 200m 배영 결승에서 우승을 자축하고 있는 모습이다. 8. 페이스 킵예곤(케냐, 女 29세, 육상) 지난 6월, 두 번의 IAA 다이아몬드 리그에서 킵예곤은 여자 1,500m와 여자 5,000m 세계 기록을 연이어 경신했고, 7월에는 비올림픽 여자 1마일 세계 기록을 경신했다. 5,000m 세계 기록은 지난 9월에 에티오피아가 경신했지만 킵예곤이 1년 동안 세 번이나 세계 기록을 깬 것은 아직 보기 드문 일이다. 지난 8월 부다페스트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여자 1500m와 5000m 두 개의 금메달을 획득한 그는 현재 세계주니어챔피언, 세계챔피언, 올림픽챔피언, 세계기록 보유자 타이틀을 모두 보유한 선수이다. 사진은 지난 8월 22일, 케냐의 페이스킵예곤이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여자 1500m 결승에서 우승을 자축하고 있는 모습이다. 9. 노바크 조코비치(세르비아, 男 36세, 테니스) 조코비치는 2023년 네 번째 US오픈 우승 이후 통산 24번째 그랜드슬램 우승컵을 들어올리며 23관왕인 세리나 윌리엄스를 제치고 오픈 1위 독주 시대를 열었다. 연말에는 남자프로테니스협회(ATP) 2023년 종별 결선에서 7번째 우승을 차지하며 페더러와 통산 6번의 종별 결선 우승 기록을 깨기도 했다. 2023년 4대 메이저 대회에서 조코비치는 그중 3개의 우승컵을 거머쥐면서 윔블던 결승에서는 후발주자인 알칼라스에게만 졌다. 그가 호주 오픈에서 우승한 것은 이 경기에서 10관왕이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사진은 지난 6월 11일, 세르비아 선수 노바크 조코비치가 2023년 프랑스 오픈 남자 단식 시상식에서의 모습이다. 10. 친하이양(중국, 男 24세, 수영) 지난 7월에 열린 후쿠오카 수영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친하이양(覃海洋)이 남자 50, 100m, 200m 평영 3개의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사상 최초로 같은 대회에서 평영 3개 종목 금메달을 석권하며 남자 200m 평영 세계기록을 깼다. 2023년에는 청두대학생운동회에서 그는 철물을 따내고 항저우아시안게임에서 MVP를 수상하면서 수영 월드컵에서 월드컵 올해의 종합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사진은 지난 10월 23일, 중국 선수 친하이양이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2023년 세계수영연맹 최우수 남자 선수로 선정된 날의 모습이다.
    • 스포츠
    2023-12-31
  • FIFA 남자축구 연말 랭킹 발표, 아르헨티나 1위
    [동포투데이] FIFA가 21일 2023년 마지막 남자 축구 세계 랭킹을 발표한 가운데 세계 챔피언 아르헨티나가 4월 세계 1위로 복귀한 이후 단 한 번도 선두 자리를 내주지 않고 2023년을 1위로 마감했다. 아르헨티나가 2022년 월드컵에서 우승했지만 당시 2위에 그쳤다. 지난 4월 세계 1위 자리를 6년 만에 되찾은 아르헨티나는 흔들림 없이 그 자리를 지켰다.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2위와 3위를 차지했다. 남자 축구 세계 랭킹 상위 10개 팀에는 벨기에, 브라질, 네덜란드,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 크로아티아가 포함됐다. AFC 남자 축구는 일본, 이란, 한국 순이다. 중국 남자 축구는 세계 79위, AFC 팀 중 11위를 유지하고 있다.
    • 스포츠
    2023-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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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드컵 2차 예선]중국, 싱가포르에 4-1 대승
    [동포투데이] 이반코비치 감독이 이끈 중국은 26일 톈진 올림픽센터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6 북중미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 C조 조별리그 4차전 싱가포르와 홈경기에서 우레이(21',85), 페르난둬(65'페널티), 웨이시하오(90')의 골에 힘입어 4-1로 대승을 거뒀다.(사진출처 : 차이나데일리)
    • 스포츠
    2024-03-27
  • 저우쉰·황레이·탕웨이, 드라마타운 행사 참석
    [동포투데이] 일부 네티즌이 SNS에 공유한 장시 후이창 드라마타운 개막식 영상과 사진에는 행사에 참가한 황레이(黄磊), 저우쉰(周迅), 탕웨이(汤唯) 등 모습이 담겼다. 황레이는 검은색 슈트 차림으로 등장했고, 단정한 머리를 하고 있어 산뜻해 보였다. 저우쉰은 프린트된 레깅스에 블랙 재킷과 네이비 컬러의 와이드 팬츠를 매치해 동양적이면서도 클래식한 멋을 뽐냈다. 탕웨이는 검은색 이너에 말차녹색 재킷과 카키색 바지, 긴 머리를 늘어뜨린 캐주얼한 모습을 연출했다. 황레이, 저우쉰, 탕웨이 등이 행사장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많은 팬들이 와서 쪼그려 앉아 기다렸고, 이들이 등장하자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이름을 외치며 환호했다. 이들 또한 팬들의 호명에 일일이 화답하며 팬들을 즐겁게 했다. 저우쉰이 등장했을 때, 그녀는 마침 동료와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팬들의 호명에 손을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탕웨이는 무대에 등장하자 팬들에게 직접 손을 흔들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행사 기간 동안 황레이, 저우쉰, 탕웨이는 주최 측의 안내하에 행사장을 방문하고 현장을 둘러보았다. 많은 참석자들은 저우쉰과 탕웨이를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고 전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저우쉰이 정말 말랐지만 매우 아름다웠다고 말했다. 탕웨이는 마른 체형이지만 키가 170cm가 넘는 큰 키가 눈에 띄고 기질도 좋아 보였고 웃으면 목춘풍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컨디션이 좋았다고 한다.
    • 연예·방송
    2024-01-07
  • 신화통신 선정 '2023 세계 10대 스포츠 선수'
    [동포투데이] 신화통신이 '2023 세계 10대 스포츠 선수'를 다음과 같이 선정했다. 1. 막스 베르스타펜(네덜란드, 男 26세, 스포츠카) 2023시즌 포뮬러원 챔피언십(F1)이 마무리되는 아부다비 그랑프리에서 레드불 레이싱팀의 베르스타펜이 폴포지션을 잡고 정상에 올랐다. 이로써 그는 올해 22개 대회에서 21차례 포디움에 오르며 19개 대회에서 우승하며 F1 시즌 승률 기록을 갈아치웠다. 앞서 지난 10월 카타르 그랑프리에서는 올해의 드라이버 종합 우승을 일찌감치 차지한 바 있은 베르스타펜이다, 이번 우승은 그의 3회 연속이다. 사진은 지난 3월 5일, 레드불 레이싱의 네덜란드 선수인 막스 베르스타펜이 세계 포뮬러 원 챔피언십(F1) 바레인 그랑프리 본선에서 우승을 자축하고 있는 모습이다. 2. 아이타나 본마티, (스페인, 女 25세, 축구) 본마티는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열린 여자월드컵에서 팀메이트들과 함께 미드필드 핵심으로 활약하면서 팀의 사상 첫 우승컵을 안았고, 개인적으로는 이번 월드컵에서 골든글로브를 수상했다. 지난 10월에 열린 2023년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는 여자 골든글로브 수상이 유력하게 점쳐졌다. 사진은 지난 8월 20일 스페인 대표팀 아이타나 본마티가 2023년 여자축구 월드컵 시상식에 참석하고 있는 모습이다. 3. 니콜라 요키치(세르비아, 男 28세, 농구) 2022∼2023시즌 메이저리그(NBA)에서 덴버 너기츠를 창단 첫 종합 우승컵으로 이끈 세르비아 출신의 미드필더 요키치는 파이널 MVP에 개인적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시즌 MVP로 3연속 선정되지는 못했지만 시즌 평균 24.5점, 11.8개의 리바운드, 9.8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정상을 지켰다. 지난 6월 12일, 덴버 너기츠의 니콜라 요키치(전좌)가 2022-2023 시즌 NBA 파이널 MVP로 선정(사진)되었다. 4. 시몬 바일스(미국, 女 26세, 체조) 미국 체조선수 바일스가 심리적 문제로 도쿄올림픽에서 리타이어하는 파란을 겪은 뒤 2023년 화려하게 돌아왔다. 지난 8월, 그는 전미선수권대회에서 사상 8번째로 여자 종합 우승을 차지했다. 10월 체조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4년 만에 종합 금메달을 목에 걸며 세계선수권대회 종합 6관왕에 올랐다. 이로써 26세의 바일스는 체조 역사상 올림픽과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가장 많은 메달(34개)을 획득한 선수가 됐다. 사진은 지난 10월 8일, 미국 선수 사이먼 바일스가 2023년 체조 세계선수권 평균대 시상에 나서는 모습이다. 5. 미카엘라 시플린(미국, 女 28세, 스키) 2022-2023 눈시즌에는 미국의 스키선수 시플린이 알파인스키 월드컵에서 이탈리아 쾰른플라츠에서 열린 예선에서 여자 그랜드슬램으로 우승을 차지하며 83승으로 월드컵 최다 여자 알파인스키 선수가 되었고, 시즌이 끝날 무렵에는 이를 88경기로 경신하며 스웨덴 남자선수 스텐마르크의 86경기를 제치고 월드컵 역사상 최다 우승을 차지하였다. 사진은 미국 선수 미카엘라 시플린이 2023년 1월 4일 자그레브 알파인 스키 월드컵 여자 회전 경기에서의 모습이다. 6. 켈빈 킵툼(케냐, 男 24세, 육상) 2023년 시카고 마라톤에서 킵탐은 2시간 0분 35초로 완주하며 남자 마라톤 세계 신기록을 수립했고, 공식 경기에서 2시간 1분을 돌파한 최초의 마라톤 선수가 되기도 했다. 당시 그의 우승 기록은 케냐 명인 킵초그가 세운 2시간 1분 9초의 전 세계 기록을 34초나 뛰어넘었다. 사진은 지난 4월 23일 케냐의 캘빈 킵툼이 런던 마라톤에서 결승선을 통과하는 모습이다. 7. 케일리 맥커운 (호주, 女 22세, 수영) 호주의 명장맥커운이 후쿠오카 수영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여자 50, 100m, 200m 배영 우승을 석권하면서 중국의친하이양(覃海洋)과 함께 같은 세계선수권대회에서 3관왕에 올랐다. 월드컵 시리즈에서 여자 배영 금메달 9개를 석권하고 부다페스트에서는 50m와 100m 배영 결승에서 두 차례 세계 기록을 경신하면서 여자 50m, 100m, 200m 배영 세계 기록을 모두 석권하였으며, 지난 10월에는 세계수영연맹 올해의 여자 수영 선수로 선정되었다. 사진은 지난 7월 29일 호주 선수 맥커운이 후쿠오카 수영 세계선수권대회 여자 200m 배영 결승에서 우승을 자축하고 있는 모습이다. 8. 페이스 킵예곤(케냐, 女 29세, 육상) 지난 6월, 두 번의 IAA 다이아몬드 리그에서 킵예곤은 여자 1,500m와 여자 5,000m 세계 기록을 연이어 경신했고, 7월에는 비올림픽 여자 1마일 세계 기록을 경신했다. 5,000m 세계 기록은 지난 9월에 에티오피아가 경신했지만 킵예곤이 1년 동안 세 번이나 세계 기록을 깬 것은 아직 보기 드문 일이다. 지난 8월 부다페스트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여자 1500m와 5000m 두 개의 금메달을 획득한 그는 현재 세계주니어챔피언, 세계챔피언, 올림픽챔피언, 세계기록 보유자 타이틀을 모두 보유한 선수이다. 사진은 지난 8월 22일, 케냐의 페이스킵예곤이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여자 1500m 결승에서 우승을 자축하고 있는 모습이다. 9. 노바크 조코비치(세르비아, 男 36세, 테니스) 조코비치는 2023년 네 번째 US오픈 우승 이후 통산 24번째 그랜드슬램 우승컵을 들어올리며 23관왕인 세리나 윌리엄스를 제치고 오픈 1위 독주 시대를 열었다. 연말에는 남자프로테니스협회(ATP) 2023년 종별 결선에서 7번째 우승을 차지하며 페더러와 통산 6번의 종별 결선 우승 기록을 깨기도 했다. 2023년 4대 메이저 대회에서 조코비치는 그중 3개의 우승컵을 거머쥐면서 윔블던 결승에서는 후발주자인 알칼라스에게만 졌다. 그가 호주 오픈에서 우승한 것은 이 경기에서 10관왕이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사진은 지난 6월 11일, 세르비아 선수 노바크 조코비치가 2023년 프랑스 오픈 남자 단식 시상식에서의 모습이다. 10. 친하이양(중국, 男 24세, 수영) 지난 7월에 열린 후쿠오카 수영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친하이양(覃海洋)이 남자 50, 100m, 200m 평영 3개의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사상 최초로 같은 대회에서 평영 3개 종목 금메달을 석권하며 남자 200m 평영 세계기록을 깼다. 2023년에는 청두대학생운동회에서 그는 철물을 따내고 항저우아시안게임에서 MVP를 수상하면서 수영 월드컵에서 월드컵 올해의 종합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사진은 지난 10월 23일, 중국 선수 친하이양이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2023년 세계수영연맹 최우수 남자 선수로 선정된 날의 모습이다.
    • 스포츠
    2023-12-31
  • 2023 미스 유니버스, 미녀들의 민족 의상 쇼
    산살바도르에서 열린 미스 유니버스 선발대회에서 각국의 미녀들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민족 의상 쇼.(AP 사진/모이세스 카스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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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동·아프리카
    2023-11-22
  • 76.8m! 中 대륙서 가장 높은 나무 '부탄송'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티베트 모퉈(墨脱)현 베이벵背崩향 거린(格林)촌에서 76.8m 높이의 부탄송 한 그루가 발견됐다. '부탄송'으로 불리는 이 나무는 윈난 가오리공산(高黎贡山)에 있던 72m의 독삼나무의 높이 기록을 갈아치우며 중국 대륙에서 가장 높은 나무로 되었다. '부탄송'은 해발 1400~2500m의 산지우림과 아열대 기후 지역으로 수열조건이 우수하고 생물다양성이 풍부한 동부 히말라야에만 분포하는 수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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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2
  • 中, 목조건축물 순회전 닝바오서 개최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12일, 신세계 중국 연합 K11 공예기금회와 닝바오 건조학사(宁波建造学社)가 주최하에 ‘목조건축물 부흥’을 주제로 한 중국 목조건축물 순회전이 닝바오 신세계 닝주센터(宁铸中心)에서 개막되었다고 당일 중신망(中新網)이 보도했다. 목조건축물은 중국 고대의 건축물 중의 중요한 일환으로 수천년래 중국의 건축미학과 설계철학을 기록하고 있다. 중국 닝바오의 목조 건축물은 7000여 년 전 하무나루(河姆渡)의 맹장구조(干阑式木构)에서 발전하여 장뭇 구멍(榫卯) 구조로 파생되어 내려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기나긴 역사의 나날을 거쳐 목조건축물의 공예는 부단히 차원이 높아져 단지 거주수요를 만족시키는 외에도 예술적 미학을 융합해 더욱 감상성이 짙게 만들어졌으며 이 중 천일각(天一阁), 경안회관(庆安会馆), 천동사(天童寺), 자성고건축군(慈城古建筑群) 등은 모두 목조건축물의 대표적 작품들이다. 이 날 개막식에서 신세계 중국 우한(武汉) 지역 총경리 장옌(张燕) 여사가 개막사를 하였다. 그는 개막사에서 이번 중국 목조건축물 순회전은 목조 부흥에 대한 초심을 갖고 기획된 목조건축물 전시회이며 그 취지는 고전 목조건축물이 현대생활에서 활용되고 있는 최신 작품을 보여주는 것으로 천년의 동양 목조건축물 미학을 사회에 알리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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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13
  • 영하 40℃- ‘자연 냉장고’의 작은 도시 머허의 현주소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머허(漠河)는 중국대륙에서 전형적인 ‘자연냉장고’에 속하는바 가장 추울 때면 영하 50℃ 이라로 내려가기도 한다. 17일, 중국 관영 신화통신에 따르면 최근 며칠 사이 머허의 기온은 영하 40℃ 좌우이다. 하지만 머허 사람들의 일상은 온대지구의 사람들의 일상과 별반 다름이 없다. 거리에 나가면 인파의 흐름은 여전하고 가끔씩 난전을 펼치고 있는 장사군들도 보이곤 한다. 그리고 행인들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고 어린애들은 추운줄도 모르고 뛰놀기도 한다. 사진은 일전 무인기로 촬영한 ‘중국의 북극’ 머허 현성의 야경이다.(사진=신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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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18
  • 中 산둥 ‘신견기병(神犬奇兵)’ 동계훈련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6일, 인민망에 따르면 일전 중국 산둥 르자오(山东日照)에 있는 경찰견 훈련장의 ‘신견기병(神犬奇兵)’이 화제로 되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이 경찰견 훈련장에서는 훈련지도원의 지휘하에 경찰견이 장애물 통과하기, 물건 감별하기와 인질구조하기 등 항목을 훈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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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07
  • 中 제72집단군 자주 로켓포 연대 실탄전술 연습 진행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15일,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에 따르면 중국군 동부전구 육군 모려에서 자주 로켓포 중대가 야외의 생소한 지역에서 전천후(全天候) 실탄사격 연습을 진행, 부대의 전천후 작전능력을 점검하고 제고시켰다. 사진은 중국군 자주 로켓포에서 불을 내뿜는 장면이다.(사진=인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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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16
  • 세계 10대 고대건축물 중 4개는 중국의 것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우리는 간혹 고대의 많은 사물들에 대해 발전이 아주 뒤처졌다고 여길 때가 있다. 그것은 현대의 과학기술에 대해 너무 자호 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대의 일부 사물들은 우리가 현대의 이념으로는 도무지 해석하지 못할 때가 많다. 아래에 소개되는 고대의 10대 건축물- 우리는 지금도 여기에 대한 미스테리가 많을 수밖에 없다. 중국의 만리장성 장성은 중국의 ‘명물’이고 중국의 자랑이자 세계 급의 문화 대 유산이다. 중국의 장성은 15개성을 지나며 그 총 길이가 2만 119618 킬로미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를 갖고 있다. 그럼 그 장성을 어떻게 구축했을까? 조상들의 그 지혜에 대해 후손들은 아직도 잘 모르고 있다고 한다. 화산 창공의 잔도(栈道) 중국 안휘성 화산의 전도는 70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으며 화산 험도(险道) 중의 험도이다. 전도의 아래는 현애 절벽이고 전도는 철삭(铁索)로 만들어졌으며 돌을 엮어 노면을 깔았다. 당시 구경 어떻게 이 전도를 만들었는지에 대해 진짜로 상상할 수가 없다고 한다. 사천 낙산 대 불상 전하는데 따르면 사천의 낙산 대 불상은 당조시기부터 수건하기 시작하여 90년이란 긴 시간을 소모하여 비로서 완성되었다고 한다. 대 불상의 총체는 산을 허물면서 만들어졌는바 상투 등 부분의 결구는 후기에 첨가된 것이다. 그리고 발면 하나에 사람 100명 이상이 둘러앉을 수 있다고 한다. 이 낙산 대 불상은 세계에서 높이가 가장 높은 석불 상으로 알려져 있다. 서안 현공사(西安悬空寺) 서안 현공사는 북위(北魏) 연간에 만들어지기 시작, 전반 사원은 취봉산(翠峰山)의 허리께에 건립되었고 27개의 나무기둥이 전반 사원의 주요 건축물들을 떠받치고 있어 멀리서 보면 마치 사원 전체가 공중에 걸려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하고 있다. 이렇듯 정묘하고도 뛰어난 설계는 그야말로 고대인들의 지혜에 탄복토록 하고 있다. 피라미드(金字塔) 피라미드(金字塔)는 응당 모두가 익숙히 잘 알 것이다. 이집트 카이로에서 서남쪽으로 약 10킬로미터 상거한 기자(吉萨)에 있는 피라미드는 지금으로부터 약 2580년 전에 건설하기 시작하여 약 2560년 전에 완공, 지금까지 줄곧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고대 건축물로 손꼽히고 있다. 피라미드는 중국 문 ‘金’자와 비슷하다고 하여 일명 ‘금자탑’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리스의 메테오라 수도원 그리스 메테오라 수도원은 15세기에 수건, 전도사들에 의해 수건 된 이 수도원은 천연적인 사암 기둥 위에 우뚝 솟아있으며 멀리서 보면 그 풍광은 사람을 경탄하게 만들고 있다. 그리스 북부의 카람바카에 있는 이 수도원은 낭떨어지 같은 현애절벽 위에 건립, 세워진 수백만 년 전 이 곳은 망망한 바다였다가 후에 지각운동과 해수의 충격으로 석림(石林)으로 변했고 이 우중충한 암석 산정들 사이로 점점으로 보이는 지붕이 보이는데 절벽 사이의 공중에 걸려있는 듯한 것이 곧바로 메테오라 수도원이다. 터키의 수메이라 수도원 터키의 수메이라 수도원은 1200미터 높이의 현애절벽에 세워졌다. 이 수도원은 서기 386년에 건립, ‘수메이라’란 그리스어로 수도원이 메이라 산에 세워졌음을 뜻한다. 이 수도원의 원주민은 워낙 그리스인들이었고 386년 당시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의 명령에 의해 지어졌으며 원명은 ‘수메이라 성녀 수도원’이었으며 현재의 수도원 모습은 서기 13세기에 갖춰진 것이다. 부탄의 타케상 사원 부탄의 타케상 사원은 ‘호혈사(虎穴寺)’ 혹은 ‘호소사(虎巢寺)’로도 불리며 부탄 서부 파로 협곡 900미터 높이의 현애절벽에 지어졌으며 해발로는 3120미터에 달한다. 이 사원은 연화생 대사(莲花生大师)가 호랑이를 타고 이 곳을 날아 지났다는 전설에 의해 1692년에 건립됐다. 그리고 타케상 사원은 부탄 왕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고대 건축물의 하나로 이 나라 서적들에 많이 소개되었으며 다큐멘터리로 소개된 것도 여러 편 있다고 한다. 그리스의 패터넌 사원 그리스 아테네의 패터넌 사원에 대해 우리는 경상적으로 역사서적을 통해 보았었다. 패터넌 사원은 기원 전 5세기 아테네 성에 건립, 고대 그리스에서 아테네 여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원이었다고 한다. 패터넌 사원은 그리스 아테네 성의 가장 높은 곳 석회암 산정에 위치, 아테네 성 중 가장 중요한 주체 건축물로 되고 있으며 패터넌이란 이름 외에도 ‘파터넌 사원’이란 이름도 갖고 있다고 한다. 현재 패터넌 사원의 유적은 19세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누차 수건한 건축물이다. 페루의 마추픽추 페루 맞추픽추의 전체 유적은 해발 2350-2430 사이의 산등성이에 있으며 우루밤바 계곡을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모습은 사진만 보아도 절경이다. 맞추픽추 유적은 페루의 유명한 전 콜롬버스 시기 인자제국이 서기 1500년에 건설한 유적으로 역시 세계 신 7대 기적 중의 하나이며 현재 페루 경내의 쿠스코 서쪽으로 75킬로미터 상거, 열대우림에 둘러 싸여 있다. (철민 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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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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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늘을 나는 중국 자동차, 광저우 도심 상공 횡단
    [동포투데이] 3월 8일 샤오펑후이톈 비행 자동차 여행자 X2가 도심 '티안더 광장-광저우 타워' 지역에서 저고도 비행을 성공적으로 완료하여 향후 도심 항공 모빌리티 및 저고도 관광과 같은 저고도 경제 응용 시나리오의 포괄적인 보급을 위한 경험을 제공했다. 이번 비행에서 여행자 X2는 광저우 톈허구의 티안더 광장 A급 오피스 단지에서 수직으로 이륙해 자율주행 모드로 랜드마크인 광저우타워 방향으로 비행하며 광둥성 박물관, 화청 광장, 하이신아시안게임공원 등 광저우의 랜드마크를 횡단했다. 이 비행경로는 향후 도심 항공 교통뿐만 아니라 관상 가치가 높은 저고도 투어 루트로도 활용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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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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